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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저기, 좀비가 걸어간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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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신선이 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복숭아 알레르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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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Nov 2009 09:14:0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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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저기, 좀비가 걸어간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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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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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5/33/d0009233_4b0cf5056b74e.jpg" width="102" height="1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5/33/d0009233_4b0cf5056b74e.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마누엘 칸트 지음 / 이원봉 옮김 / 책세상 / 2002년<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드라마 &lt;선덕여왕&gt;의 이번 주 방송분에서는 도덕에 대한 칸트의 이해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유신이 월야에 의해 복야회와 연류 되었을 거라는 정황인데, 팔이 안으로 굽어 유신의 편을 드는 이들도 있지만 정세를 판단하여 유신이 꺾인다면 비담의 세력이 너무 커질 거라는 우려의 시선 또한 있었다. 선덕이 사태를 파악하는 데에는 춘추의 역할이 컸으나 복야회를 인정할 수 없는 선덕은 유신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비담의 세력 또한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선덕은 정공법을 취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비담이 선덕에게 유신을 신국의 적으로 선포할 것을 간하면서 대의에 어긋남이 없다고 말할 때, 선덕은 그걸 인정하고 곧바로 사량부령 비담의 세력을 견제하며 반문한다. “물론 대의에 어긋남은 없죠. 허나, 또한 비담공의 사욕에도 어긋남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칸트를 읽는 와중이어서 그랬는지, 세 가지로 구분되는 행위의 동기를 떠올리게 된다. 칸트는 행위의 동기를 셋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1)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 2)직접적인 경향성에서 하는 행위, 3)‘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로 구분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lang="EN-US">1)의 경우는 교환 가치로 설명된다. 상인이 정직한 것은 상품을 팔아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니 도덕적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반면에 2)의 경우에는 선한 행위로 이익을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부심이나 명예 등의 내적 필요에 의한 행위를 말한다. 3)의 경우가 아무런 사심이 개입되지 않은 도덕적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는 건데, 칸트는 ‘도덕’의 가치를 너무 높은 곳에 설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1) 정도의 동기만으로 상도의를 지키며 사는 것도 꽤나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2)의 경우에는 행위가 그 어떤 명분으로 제시될 수도 있겠는데, 정치인들의 경우에는 2)조차 ‘1)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로 전락시키는 경향(그래서 ‘경향성’이라고 번역된 건가?)을 지니게 마련이다. 교환으로 얻는 물질적 이득이 아니라, 명분을 필요로 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렇게 걸러지고 나면, 도덕은 꽤나 높은 수준에서 요구된다. &lt;선덕여왕&gt;의 비담의 경우 우리가 흔히 꽁수라 부르는 꿍꿍이가 있었던 거고, 그 꿍꿍이를 대의로 포장하는 능력이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걸 간파하는 건 도덕에 대한 통찰인데, 여기서 수단과 목적이 나뉜다. 행위를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을 ‘도덕’이라고 말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러니 비담은 대의에 어긋나진 않았을지언정, 사욕에도 어긋나지 않게 유신과 세력 싸움을 벌였던 건데, 이는 선덕이 그동안 미실을 통해 오랜 시간 몸소 당하며 배워온 것이지 않던가. 그 정도 통찰은 있게 마련이다. 선덕에게는 커져가는 비담의 세력이 문제되기도 하겠지만, 대의에 어긋나지 않은 유신의 처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놓인다. 비담이 2)와 3) 사이에서 2)를 취했다면, 선덕은 지금 2)에서 3)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유신에 대한 신의라는 사욕을 버려야 하는 순간에 처한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래서 택한 것이 유신의 유배였다. 그와 더불어 춘추를 띄우는 것으로 비담을 견제한 것까지가 선덕이 2)에서 3)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왕의 자리에서 3)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니 ‘삼한일통’이라는 대의는 계속해서 추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칸트의 견지에서는 ‘삼한일통’이라는 목적을 두고 행해지는 정치는 그 자체가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긴 하다는 아이러니가 남긴 하지만, 2)에서 3)으로 옮겨가는 운동성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게 드라마 &lt;선덕여왕&gt;의 매력일 수도 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라는, 칸트의 저술 가운데 비교적 쉽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어려운 이 책을 읽으면서 요 정도 해석을 끌어낼 수 있었던 건, 역자인 이원봉의 해제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도덕」이라는 글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때마침 비담의 멋진 한수(결국 실패하고 말긴 했지만)에서 배운 바도 크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칸트로 비담 읽기, 좀 억지스러웠나?</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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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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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Nov 2009 09:14:06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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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건투를 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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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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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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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Nov 2009 19:52:02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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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프로이트와의 대화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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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23/33/d0009233_4b0a57cdd8837.jpg" width="101" height="1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23/33/d0009233_4b0a57cdd8837.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프로이트와의 대화』<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창재 지음 / 민음사 / 2003년<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lang="EN-US">“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의식론이 인류의 정신사에 충격을 던진 위대한 세 가지 발견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 하나는 갈릴레오의 ‘지동설’이다. (…) 갈릴레오 다음으로 인류의 자기애에 상처를 입힌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었다. (…)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의식론이 인류의 자존심에 세 번째 충격을 안겨 주었다고 생각한다.”(84~85쪽)</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프로이트를 모처럼 들여다본다. ‘모처럼’이 된지도 몰랐는데, 위에 인용한 내용을 보고 새삼 알았다. 그동안 나는 프로이트보다는 다윈에게 더 많은 눈길을 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모처럼’ 프로이트를 들여다보는데, 어렵지 않아서 좋다. 저자가 잘 풀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건지, 혹은 ‘모처럼’이 될 때까지 이것저것 들여다본 것들이 내 독해력을 증진시킨 건지, 그건 알 수 없어도, 어렵지 않게 읽히니 반갑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lang="EN-US">“유년기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대상인 동시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방어 대상으로 존재한다. 즉, 우리는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망각하고 싶어 하는 상반된 감정을 품는다.”(135쪽)</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양가감정이라 불리는 이러한 마음 상태의 균형점은 없다. 그러나 내 안에 이러한 양가감정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나는 나를 위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의식의 작용을 유심히 살핀다면, 좀 더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으로 무의식을 억압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 아니라,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면 내 안에 공존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적절한 생명에너지로 승화될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되면 우선 내가 견디지 못할 것이고, 견디지 못하는 나는 파괴적 충동으로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신경증자의 증세가 내게 있다면, 더 다듬어져야 할 나의 모습이지, 의식의 영역에서 억압해야 할 죄악 된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모처럼 들여다본 프로이트가, 모처럼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데 나는 이 시점에서 또다시 양가감정을 느낀다. 나를 돌아보고자 하는 욕망과 동시에 나를 외면하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한다. 나를 직시하는 게 옳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유년기 때 지니게 되는 트라우마가 불가피한 것이었다면, 그 이후 어느 정도 성장을 거친 뒤에 얻게 된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오이디푸스가 지녀야 했던 콤플렉스로 해석될 여지가 적다. 나는 나를 분석하여 정신적 안정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파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신경증세로 인해 얻게 된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계속해서 방어기재를 작동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의식이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저항만을 방어기재라고 한다면 몰라도, 유년기의 불가피한 환경에서 파생되는 트라우마로 제한되어 설명되어질 것은 아닌 것 같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유년기가 아니더라도 신경증세를 유발하는 외부 영향은 도처에 널려 있다. 성장기에 얻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성인기에 얻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성장기와 성인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측면에서 중요성이 강조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럼에도, 전부는 아닐지언정 전무(全無)하던 무의식을 발견했다는 건, 프로이트의 높은 성과이다.</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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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Nov 2009 09:38:1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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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초한지 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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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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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Nov 2009 18:09:49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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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순전한 기독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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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19/33/d0009233_4b0547ea7b92f.jpg" width="102" height="1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19/33/d0009233_4b0547ea7b92f.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순전한 기독교』<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lang="EN-US">C. S. 루이스 지음 / 장경철,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1년<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거다. 호감이 가지 않는 상대를 좋아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한다. 사랑하는 건 좋아하는 것과 다르단다. 사랑하는 건 잘 되길 바라는 거란다. 호감이 가지 않는 상대더라도, 그 상대가 호감이 갈 만한 상대가 되길 바라는 게, 사랑하는 거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무지막지한 요구는 ‘내 영혼이 잘 됨 같이 네 영혼이 잘 되기를’ 바라는 정도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런데 나는 내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조금 두렵다. 내 영혼이 잘 되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래서 ‘네 영혼’이 잘 되기도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겠다. ‘네 영혼’이 잘 되려면 고생 꽤나&nbsp;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조금은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게 고생길일 테니까, 원수에게 고생길이 열리기를 바라는 거, 어려울 거 뭐 있나?<br><br>그런데 요따위로 사랑이라는 걸 해도 되는 건가? 꼬인 심사만 순수해지면 어려울 건 없을 거 같은데,&nbsp;</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말은 참 쉽다. 그치?</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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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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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13:34:44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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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17/33/d0009233_4b02853044bfa.jpg" width="200" height="29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17/33/d0009233_4b02853044bfa.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혜경 외 지음 / 강 / 2009년<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혜경, 하성란, 권여선, 김숨, 강영숙, 이신조, 윤성희, 편혜영, 김애란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서울이라는 테마로 묶었지만, 꼭 서울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설정된 테마는 공간으로 제시되었지만 당대라는 시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기에 당대의 소설일 뿐, 서울이라는 테마로 한정해서 설명되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는 문단의 풍경조차 서울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지방색이 소외된 현실 탓일 수도 있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이후에 파생된 기획으로 보이는데, 아직까지 서울은 자치도시이기 이전에 중심부로써 누리는 특권에서 결코 벗어나 있지 않다. 중심으로써 특권을 버린 자리에서 서울이 자치도시로써 특색을 살려낼 수 있어야, 서울이라는 테마로 묶인 소설집은 서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독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실정에서는 서울이라는 특정 지역의 색채가 부각되기 보다는 중심부로써 서울을 과시하는 것으로 비칠 뿐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렇다고 해서 수록된 작품들이 중심을 과시하진 않는다. 서울이라는 테마로 묶였지만 테마파크처럼 조성되는 서울 곳곳의 만들어진 풍경에 감동하지 않는다. 서울의 변두리로 향하는 이들 작가의 시선은 자랑할 만한 서울을 배반한다. 테마를 기획한 이들은 수록된 소설을 놓고 서울을 자랑하고 싶었을지 몰라도 작가들이 주목하는 시선은 그렇게 뻑적지근하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작가들에게 지면을 마련해준 정도의 의미는 부여되나, 서울이라는 테마는 이런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뒷날개에 출판사 로고 옆에 나란히 새겨진 서울특별시와 서울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예산을 집행할 곳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의도는 나쁘지 않으나 기획은 크게 빗나갔다. 지나친 억측이겠으나, 세종시 안 가려는 서울시의 땡깡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뭐 기획은 그렇다 치고, 작품은 작품으로 읽어야겠기에, 읽는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작가들의 작품이다. 그 중 하성란의 「1968년의 만우절」에는 1968년 만우절에 아버지의 가장 큰 거짓말이 결실을 맺어 태어난 아이가 커서 화자로 등장한다. “아버지의 가장 큰 거짓말이 결실을 맺어 여기 이렇게 서 있다. 가끔 나 자신도 타인처럼 여겨지고 악착같이 전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며 시내의 회사로 출근하면서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는지도 모른다.”(63쪽) 불장난의 결실로 태어나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는데, 거짓말의 결실로 태어난다는 것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불장난이건 거짓말이건 당사자들이야 품고 있던 암술과 수술을 교환했을 뿐이겠지만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현실적이다. 내가 놓였던 자궁은 나를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 토대가 나를 위해 마련된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서울은 그렇게 비현실적이다. 내가 거닐고 있는 거리이지만, 나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 아닌, 누군가의 거짓말의 결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라는, 그런 비현실. 그리고 나 또한 현실이라는 거짓말을 살아내면서 미래의 어느 날 거짓말이라는 결실을 맺어놓게 되리라는, 그런 쓸쓸함.</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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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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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11:14:24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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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2003)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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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17/33/d0009233_4b0236aaf18c7.jpg" width="160" height="23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17/33/d0009233_4b0236aaf18c7.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화 &lt;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2003)&gt;<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봉준호 감독<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입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끝내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나는 스파이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명제 하나를 떠올린다. 성공한 스파이는 알려지지 않는다. 완전범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완전한 범죄는 결코 스토리로 엮일 수 없다. 스토리로 구축되는 그 순간 범죄는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것이다. 들통 난 범죄를 완전범죄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전통 추리물이 높은 긴장감을 유지하다가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며 갈등을 해소시킬 때면 긴장감이 떨어지면서 이입된 감정이 이완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카타르시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회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lt;살인의 추억&gt;은 범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실패했지만(애초 목적하지도 않았겠지만), 카타르시스(해소)를 포기하고 끝까지 늦춰지지 않는 긴장감을 보여줬다는 데 &lt;살인의 추억&gt;의 성과가 놓인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표면적으로는 연쇄강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의 중심에 강간살인사건이 위치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얼굴 없는 범인’ 따위가 아니다. 범인을 쫓는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이 중심에 놓이고, 영화는 쫓는 그들의 암담함을 보여준다. 그들의 아슬아슬한 실패에는 시대가 자리한다. 전경 2대 중대 병력도 남지 않을 만큼 수원시청에는 요란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영화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시위이지만, 시위는 시대의 중심에 놓여 있고, 일개 촌구석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권력의 공백으로 남는다. 영화에서 몇 차례 소개되는 등화관재는 안전이라는 미명으로 어둠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어둠에서는 스멀스멀 범죄의 기운이 싹을 틔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정권이 치안권력을 사유화할 때 그 외곽에는 공백이 생긴다. 그 공백지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떠맡은 담당수사관들은 암담할 수밖에. 그럼에도 사건 자체가 지니는 ‘흥행성’은 언론을 끌어들인다. 형사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들이 떠안아야 할 책임은 점점 커진다.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증거 없음으로 놓아주어야만 했던 박현규(박해일)에게 박두만이 하는 말, “밥은 먹고 다니냐?”는 용의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연민이다. 밥벌이의 고달픔은 긴장감 넘치는 범죄의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여 있다.</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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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이것 또한 내 세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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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05:38:14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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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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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14/33/d0009233_4afe4beae87d1.jpg" width="200" height="27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14/33/d0009233_4afe4beae87d1.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내가 가장 예뻤을 때』<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lang="EN-US">“그렇게 가슴앓이도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떠돌기도 하면서, 바람 앞에 선 들꽃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기도 하면서, 그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청춘은 조금씩 단련되어가리라. 기필코 살아서 경애, 수경이, 승규 몫까지 굳세게 살아서 마침내 아름다워지고 말리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눈물을 거두고 조용히, 그리고 힘차게 건배했다.”(300쪽)</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경애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유탄에 맞아 피 흘리며 죽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로 추정되지만 ‘어딘가에서 날아온 유탄’이라는 표현으로 가해자의 모습은 희석된다. 추정 가능한 가해자가 없진 않지만, 그 시대에는 누구든지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죽은 자는 죽어서 미안하고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아서 미안한 그런 시대는, 아픔이 통증으로 그치지 않고 죄의식까지 낳아서 살아남은 자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겼으리라.</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lang="EN-US">“누가 웃지 말라고 해서 웃지 않은 것은 아닐진대, 꼭 누군가 웃는 것을 용서치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가. 어쩌다가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만치 행복한 순간에도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습관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가. 혹시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되지 않을까, 따뜻한 내 집 창밖에 지금 누군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지는 않은가, 노심초사해야만 겨우 안심이 되는 이 못 말릴 습성이, 노인네들처럼 온갖 세상 근심걱정 다 떠안아야만 겨우 내가 사람 노릇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이 딱한 습벽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인가.”(283쪽)</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래서 살아남아서 행복한 순간에도 마음껏 웃지 못했던 게 아닐까. 경애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수경은 이러한 슬픔의 농도가 짙었기에 살아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경에게 자살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그녀에게는 그저 연민을 가질 뿐, 달리 말을 보탤 수 없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리고 승규의 죽음은 군복무 중 자살로 그려지고 있지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추리소설이 아니기에 그 실상을 파헤치는 데까지 이르진 않지만, 군에서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승규는 그렇게 죽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경애, 수경, 승규의 죽음을 지켜본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을 간직하지만, 아름답고자 하는 욕망을 늦추지 않는다. 거기에 공선옥 소설이 지닌 생명력의 비밀이 담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절망을 딛고 일어선 자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가, 공선옥 소설에서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끈적거리며 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찌찌직거리는 잡음 섞인, 결코 좋은 음질이라고 할 수 없는 전파를 타고서 말이다.</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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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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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4 Nov 2009 06:20:05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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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공부의 발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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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13/33/d0009233_4afca7a40d00a.jpg" width="150" height="22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13/33/d0009233_4afca7a40d00a.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공부의 발견』<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정순우 지음 / 현암사 / 2007년<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lang="EN-US">‘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어렵다. 이게 어려운 건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행해지는 공부가 참다운 공부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근대교육의 산실인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조선 유학자들의 공부론을 살피고 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유학자들의 공부론이라고는 하지만, 개개의 유학자 간에 공부에 대한 이해가 약간씩의 차이를 지니는데, 유학의 입장에서는 이단시 되는 도가나 불가, 혹은 서양의 기독교(천주학)와의 접합 지점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충돌하는 지점에서 배척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성인의 반열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상호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개개의 유학자 간의 차이는 유학자 간의 차이는 자연에 융합될 것이냐, 인간으로써 삶으로 승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으로 좁혀서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이는 도가를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로 볼 수도 있을 듯하고,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구분되는 불가의 경우와도 견줄 수 있을 듯하다. 다산 정약용에 이르러서는 천주학에 대한 수용 여부가 문제시되면서 학문의 실용성이 부각되기도 한다. 다산의 실용성은 작금에 흔히 일컬어지는 ‘실용주의’ 따위와는 다른 토대에 놓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 중에서 허균의 경우에 주목하게 되는 건, 공부를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작금의 공부가 시험 잘 봐서 좋은 성적 얻고,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을 얻는 것으로 권력지향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에 그러할지도 모른다. 퇴계의 경우가 이러한 것을 개인적 사욕으로 보아 금하고 있었다면, 허균의 경우에는 욕망의 향방이 초월적인 영역으로 뻗고 있었기에 퇴계의 금욕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조선 유학자들 간에, 작은 차이일 수도 있고 큰 차이일 수도 있는 이러한 차이들이 파생되는 지점은 앎과 삶의 긴장 관계, 즉 배움과 실천 사이에 놓인 긴장이 쉽게 해소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소되지 않은 긴장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어찌 공부를 끝낼 수 있으랴. 대체로 공부는 아직 진행 중이라는 얘기로 읽힌다. (사실 세부적인 차이를 읽어낼 만큼 ‘리(理)’니 ‘기(氣)’니 하는 것들을 읽어낼 요량이 없었다.)</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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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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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Nov 2009 00:26:47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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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공부도둑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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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10/33/d0009233_4af93837a6f7b.jpg" width="200" height="28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10/33/d0009233_4af93837a6f7b.jpg');" align="left" /><!--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공부도둑』<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격물(格物)은 치지(致知)와 병행되어야 한다.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 배운 지식을 열쇠로 새로운 지식을 열어내야 한다. 처음 주어진 열쇠가 무엇이건 열리기를 기다리는 함은 다종다양하다. 그것을 선별하고 선택하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공자님 말씀처럼 또한 즐겁지 아니할까. 배운다는 건 그런 거다. 무언가를 알아서 즐거운 것도 즐거운 거지만, 알아버린 그것이 나와 무관하다면 좀 허망하기도 하다. 격물이 치지와 별개일 때 그러하다.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까지 알아야 할 게다. 이미 배운 것을 토대로 더 열어야 할 함이 있음을 알아야겠고, 더 나아가야 할 길이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가다가 마감하면, 나를 넘어서는 다음의 누군가가 있기를 기다리며 매듭을 지어주는 수밖에.</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장회익의 『공부도둑』을 펼치기 전에, 물리학자의 공부이야기라니,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중간에 상대성이론에 대해 재미있다며 쉽게 설명해주겠다고 해놓고는 도무지 못 알아먹을 소리만 해주신 부분에서는 하나도 재미없었다. 이는 상대성이론이라는 걸, 적어도 지금은 내가 딛고 올라서야 할 무엇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게다. 저자도 자신의 성장 과정을 서술하면서 ‘선별’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내 심정을 기꺼이 이해해주셔야 한다. 딱 그 부분 빼고는 재미가 없진 않았다. 상 할아버지와의 가상대화로 구성된 부분은 사실 좀 유치해 보이는 면이 없진 않았지만.</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런데 문득 주목하게 되는 게 있는데, 책의 말미로 가면서 이 유치한 대화가 기획된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는 거다. 물론 기획이야 됐을 거다. 그런데 내가 주목한 건, 다소 유치할지언정 시공을 넘어서서 상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펼쳐지는 건, 단순히 선조의 학문을 계승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물리적 시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는 거다. 물리학 용어로 어떻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과 공간이 단선이 아니라는 그런 내용을 어딘가에서 주어들은 거 같은데, 이 책의 구성이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거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딱히 그러한 걸 염두에 두고 구성된 게 아니라 해도, 칠십 평생 물리학을 공부했으니, 한 권의 책을 저술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구성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리학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지만, 내가 지닌 문학이라는 열쇠로 읽어보면 그러하다는 거다. 약간의 자뻑이 가미되어 있긴 해도, 공부한 한 평생을 갈무리하는 기록으로써 훌륭해 보이는 건 내용이 자연스럽게 형식과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취한 형식이라는 게 자신이 평생 공부한 격물에 입각해 있는 거라면, 감히 치지에 근접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span></p><p class="바탕글">&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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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는다, 고로 존재한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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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Nov 2009 09:54:32 GMT</pubDate>
		<dc:creator>상큼한좀비통조림</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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