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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얀웬리의 독설[獨,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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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얀웬리의 첫 블로그질.</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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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Nov 2009 16:14:4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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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얀웬리의 독설[獨,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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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얀웬리의 첫 블로그질.</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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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폐업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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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블로깅은 귀찮구나.<br>올드패션한 홈페이지에 정착하기로.<br><br>문화연구집단 <a href="http://go.jinbo.net/culturestudy" target="_blank">http://go.jinbo.net/culturestudy</a><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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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코멘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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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Nov 2009 16:13:46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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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문화사회연구소 오픈세미나 5th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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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9/86/c0092386_4adc530f36a81.jpg" width="500" height="681.8181818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9/86/c0092386_4adc530f36a81.jpg');" /></div><br/><br/>tag : <a href="/tag/신자유주의" rel="tag">신자유주의</a>,&nbsp;<a href="/tag/오픈세미나" rel="tag">오픈세미나</a>,&nbsp;<a href="/tag/문사연" rel="tag">문사연</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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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코멘트</category>
		<category>신자유주의</category>
		<category>오픈세미나</category>
		<category>문사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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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9 Oct 2009 11:52:58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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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어느 문화평론가의 주화입마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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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title="" href="http://ucsnz.egloos.com/2633555">김현진과 이택광과 서커들과 대한민국.</a><br><br>이택광 선생의 '뻘타'가 계속되고 있다.&nbsp;요즘&nbsp;그를 보면 이런 느낌이 든다.&nbsp;내공이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어쩌다가 비전의 외공을 습득한 후 저잣거리에서 신나게 휘두르다가 결국 '주화입마'에 빠지고 만 것 같다는. <br/><br/>tag : <a href="/tag/김현진" rel="tag">김현진</a>,&nbsp;<a href="/tag/이택광" rel="tag">이택광</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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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코멘트</category>
		<category>김현진</category>
		<category>이택광</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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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4 Oct 2009 18:22:01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20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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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div style="TEXT-ALIGN: left">"각자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 불신하는 사람들끼리 놀고 먹는 게 아니라 함께 일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노예끼리의 연대는 굶어 죽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20대들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쫄아' 있기 때문에, 갖가지 허상들에 시달리며 혼자 괴로워하고 있다. 20대를 괴롭히는 허상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이라는 환상적인 '개념'이다. 소통이라는 환상에 갇히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금세 상처받고 그 관계를 포기해 버린다. 흔히 소통은 '통한다'는 느낌이 들 때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감정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바로 그 사람과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상처받기 전에 얼른 그 관계를 끝내버린다. 그러고선 '문화 상대주의'라는 더 환상적인 개념으로 자신을 합리화해며 마무리한다. 그래서 20대들이 점점 더 연애라는 관계에 극도로 집착하는 것이다. 친구와 함께 무엇인가 하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br></div><br>- 우석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중에서 서명선 학생이 쓴 글</div><br/><br/>tag : <a href="/tag/20대" rel="tag">20대</a>,&nbsp;<a href="/tag/우석훈" rel="tag">우석훈</a>,&nbsp;<a href="/tag/혁명" rel="tag">혁명</a>,&nbsp;<a href="/tag/소통" rel="tag">소통</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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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코멘트</category>
		<category>20대</category>
		<category>우석훈</category>
		<category>혁명</category>
		<category>소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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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9 Oct 2009 13:44:58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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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고래 후원의 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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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09/24/86/c0092386_4aba4204998ea.jpg" width="500" height="119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09/24/86/c0092386_4aba4204998ea.jpg');" /></div><br/><br/>tag : <a href="/tag/고래" rel="tag">고래</a>,&nbsp;<a href="/tag/김규항" rel="tag">김규항</a>,&nbsp;<a href="/tag/후원의밤" rel="tag">후원의밤</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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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코멘트</category>
		<category>고래</category>
		<category>김규항</category>
		<category>후원의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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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3 Sep 2009 15:43:22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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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고종석의 공허한 자유주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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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맑스주의가 억압적인 전체주의 체제였던 현실 사회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이론과 실천?)라는 지적이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만의 외로운 목소리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한 '내부 비판'을 그 누구보다 강하게 제기했던 것은 언제나 일군의 맑스주의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군의 자유주의자들은 맑스주의 내부의 치열한 비판과 갈등의 역사를 은폐한 채, 맑스주의와의 정치적 거리감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는다. 현실의 구체성에 관심이 없는 외부자의 비판은 그것이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한 외양을 취할지라도 언제나 무의미한 법이다. 그의 비판은 현실을 바꾸려는 것이기라기보다 현실에 대한 하나의 논평에 불과하므로&nbsp;그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비판받지 않는다. 물론 외부자의 비판이&nbsp;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내부자들이 치열한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을 수행하지 않을 때 그러한 불성실을 지적해 주는 것은 외부자의 고유한 권리이다. 그런데 맑스주의의 외부자로서 고종석은 맑스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직접 나아간다. 그래서, 종종 맑스주의에 대한 숨은 애정을 넌지시 암시하곤 하는 고종석의 행태가&nbsp;더욱 못마땅스럽다. 자유주의자들은 항상 유리한 위치에서, 쉬운 게임을 벌이는 데 만족하곤 한다. <br><br>맑스주의가 부족해서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가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고종석의 말은 무의미한 레토릭에 불과한데, 바꿔 말해 맑스주의가 부족해서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nbsp;독자들은 나름 일리 있는 얘기라고 생각할&nbsp;것이다.&nbsp;맑스주의적 비판의&nbsp;가치는&nbsp;실현가능성과 무관하게 현존하는 세력균형 상태에서 더 왼쪽으로 갈 수 있도록 강제하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nbsp;데에서 찾을 수도 있다.&nbsp;'한 줌의 양식'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진정 단 '한 줌의&nbsp;양식'이 모자라서 용산&nbsp;참사가 발생한 것일까? 오히려 '만인의 양식'으로도 용산 참사를 막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nbsp;이런 식의 모호한 레토릭으로 과연 제2의 용산참사를 막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자유주의자들은&nbsp;언제나 현실을 바꾸기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에서 만족한다. 그것이 그들이 장수하는 비결인 지도 모르겠다.&nbsp;<br><br><br>---------------------------<br><br><a href="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3">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3</a><br><br>마르크스라는 유혹 <br><br>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lt;누벨 옵세르바퇴르&gt;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이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br><br>마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br>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br><br>물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 마르크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br><br><strong>‘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strong><br><br>실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br><br>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br/><br/>tag : <a href="/tag/고종석" rel="tag">고종석</a>,&nbsp;<a href="/tag/맑스주의" rel="tag">맑스주의</a>,&nbsp;<a href="/tag/자유주의" rel="tag">자유주의</a>,&nbsp;<a href="/tag/레토릭" rel="tag">레토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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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코멘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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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9 Sep 2009 06:38:34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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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2PM 재범탈퇴와 공범 만들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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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참으로 관용적이시네요들... 우리의 아이들이 우상화하는 사람이 동포애가 없다는 점은 지적받아야 할만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당연히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동포애를 강요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바라보고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를 공급하는 공급자에게 이정도의 지적은 가능하지 않은가요? 그리도 진보적인 미국에서도 흑인으로 자라 욕해 마땅한 미국을 대놓고 욕했다며 강력한 대통령후보인 오바마를 나락에 떨어지게 할 뻔 했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어느정도의 공감대의 형성을 요구하는건 어느정도는 인지상정아닌가요?"<br><br>재범 탈퇴 사건과 관련해 도를 넘는 애국주의를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드높다. <br><br><a href="http://blog.naver.com/sangyeun65/110069023106" target="_blank">"2PM 재범 탈퇴, 나는 공포를 느낀다' - 이동연 (프레시안)</a><br><br>넷상에 떠도는 각종 댓글들의 수위를 보면 '공포'라는 말이 전혀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진정 경계해야 할 유형의 담론은 위에 인용한 어느 무명인과 같은 반응들이다.&nbsp;배타적 애국주의를&nbsp;'공감대'라는 말로 순화시켜 합리성의 외양을&nbsp;취하는 부드러운 발언들. <br><br>더욱 거슬리는 것은 글쓴이의 어투에서 묻어나는 어떤 종류의 은근한 협박이다. 무명인은 한 아이돌 스타에게 애국주의를 강요한 것에서 모자라,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도 이 저열한 이지메의 공범이 될 것을 강요한다. 그러한 공감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아이들', '동포애' 따위의 쉽게 냉소하기 힘든 기표들이 동원된다.&nbsp;온라인 상의 뜨거운 논쟁들을 보면 대개 저런 류의 주장들이&nbsp;대세를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br><br>누군가 공범이 되길 거부했을 때 그에게 닥칠 일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테고,&nbsp;결국 공범이 되길 거부하는 자들이 승리하려면 집단적으로 세력을 형성하는 수밖에 없다. <br/><br/>tag : <a href="/tag/2pm" rel="tag">2pm</a>,&nbsp;<a href="/tag/재범탈퇴" rel="tag">재범탈퇴</a>,&nbsp;<a href="/tag/애국주의" rel="tag">애국주의</a>,&nbsp;<a href="/tag/낙인찍기" rel="tag">낙인찍기</a>,&nbsp;<a href="/tag/공범만들기" rel="tag">공범만들기</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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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1 Sep 2009 15:15:1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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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인문학의 위기란 이런 것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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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강유원 왈 <a href="http://allestelle.net/forum/topic.php?id=565">http://allestelle.net/forum/topic.php?id=565</a>&nbsp;<br><br>2009년 8월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 '고전 10권 읽기' 강의를 수강하는 서울 경희고등학교 3학년 조아무개 군에 따르면 3학년에서 세계사 과목을 선택한 학생은 조군 딱 한명이라고 한다. 세계사는 전국적으로도 선택 학생 수가 적어서 참고서와 문제집도 출간되지 않고 있다한다.&nbsp;<br><br><span style="COLOR: #3366ff">'적절함'을 감지하는 수공업적 도야, 구체화와 추상화를 오갈 수 있는 범주 감각, 역사적 맥락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통찰, 레토릭의 미묘함을 감별하는 시야</span> 등이 인문학 공부의 핵심적인 자질인데 이제는 어디에서도 익힐 수 없어 보입니다.<br><br></div><br><br/><br/>tag : <a href="/tag/인문학" rel="tag">인문학</a>,&nbsp;<a href="/tag/위기" rel="tag">위기</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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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인문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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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0 Aug 2009 14:42:28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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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2009 한국사회포럼 8.27~28 서강대 '진보의 또 다른 상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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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08/20/86/c0092386_4a8d188a1c6f6.jpg" width="500" height="1260.5042016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08/20/86/c0092386_4a8d188a1c6f6.jpg');" /></div><br/><br/>tag : <a href="/tag/한국사회포럼" rel="tag">한국사회포럼</a>,&nbsp;<a href="/tag/2009" rel="tag">2009</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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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코멘트</category>
		<category>한국사회포럼</category>
		<category>2009</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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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0 Aug 2009 09:34:28 GMT</pubDate>
		<dc:creator>얀웬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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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기술공학-인문학 수평적 통섭 못하면 미래는 재앙(한겨레)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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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지난봄 계간 &lt;문화과학&gt;이 ‘지엔알(GNR· 생명공학 나노 로봇) 시대의 도래와 문화변동’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뤘을 때 독자들은 당혹스러웠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벼랑에 내몰리고 용산 학살이 야기한 사회적 분노가 정치적 임계점을 향해 치닫던 상황이었으니, 유전학· 나노기술·로봇공학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의 긴박함을 외면한 ‘ 먹물들의 한담’쯤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p align="justify"><p align="justify">“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너무 ‘앞선’ 주제가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술결정론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고요. 하지만 눈앞의 사태에 매몰돼 사회의 심층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p align="justify">당시 심광현(사진) 교수의 문제의식은 최근 그가 펴낸 &lt;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gt;(문화과학사)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도르노 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영상이론을 가르쳐온 그가 ‘유비쿼터스’라는 기술공학적 주제로 책을 쓴 것이 의아할 법도 하지만, 그는 4년 전 프리고진의 복잡계 과학의 사유에서 인류 문명의 돌파구를 모색한 &lt;프랙탈&gt;(현실문화연구)의 저자이기도 하다. <p align="justify">심 교수가 &lt;유비쿼터스…&gt;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엔알 혁명에서 탈근대 문화정치, 학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핵심 주제를 꼽으라면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이다. 지엔알 혁명이 가속화하는 유비쿼터스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연과학과 기술공학, 인문사회과학, 예술 간의 접속과 소통을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p align="justify">그는 지엔알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혁명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백 개의 분과학문과 전공지식들로 세분화됐던 지식들을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을 매개로 하나의 통합적 지식으로 융합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본다. <br>문제는 지금 논의되고 있는 지식의 통·융합이 대단히 위계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등이 주도하는 ‘통섭’ 담론이 대표적이다. </p><p align="justify">“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과 제자인 최재천 교수는 모든 지식의 대통합을 강조하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물론 예술까지도 자연과학적(사회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심리현상도 인과관계가 있고, 이걸 찾아내면 사회도 인간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끔찍한 결정론입니까.” <p align="justify"><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90" align="right"><tbody><tr><td width="15"><!-- Padding - Width --></td><td><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tbody><tr><td align="middle"><img border="0"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09/0813/6000291100_20090813.JPG"> </td></tr><tr><td height="3"></td></tr></tbody></table><!-- 사진설명 --><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tbody><tr><td class="movie_text" bgcolor="#8f8f8f">»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td></tr><tr><td height="3"></td></tr></tbody></table><!--사진설명 --></td><td width="15"><!-- Padding - Width --></td></tr><tr height="15"><td colspan="3" noWrap><!-- Padding - Height --></td></tr></tbody></table>심 교수는 이런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담론에는 예술을 과학자들에 의해 언젠가 정복될 ‘처녀림’으로 간주하는 근대 과학기술 제국주의의 오만한 전제가 함축돼 있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수직적 통섭론이 신자유주의적 권력관계와 결합되는 상황이다. <p align="justify">“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자본과 국가권력이 독점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라크전에서 선보인 무인공격 시스템 등에서도 드러났지만,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계-기계(M2M) 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면, 영화 &lt;마이너리티 리포트&gt;에서와 같은 묵시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p align="justify">반면 첨단 과학기술이 민주적 사회관계와 결합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지식과 지식 간의 수평적(비환원주의적) 통섭이다. 수평적 통섭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이유를 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p align="justify">“수평적으로 통섭하려면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걸 시작하기가 어려워요. 전문가일수록 자기 영역이 아닌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의 전문성이 뭡니까. 자기도 모르는 것을 떠드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에 손 내밀고, 이질적인 것을 섞고, 실험하고, 상상력을 제공하고…. 통섭의 촉매제이자 예인선 역할로는 예술이 제격인 셈이죠.” <p align="justify">심 교수는 이처럼 예술이 매개하는 수평적 통섭을 자신이 가르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유-에이티(U-AT) 통섭교육사업’을 통해 실천하려고 했지만, 상급기관인 문화부의 반대로 좌절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장관의 사업 중단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문화부로부터 ‘중징계’(파면·해임·정직) 처분 요구까지 받았다. <p align="justify">“장관이 통섭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요. 자기가 아는 예술은 기악· 발레·연극·회화 등 장르적으로 전문화된 것인데, 여기에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거지요. 모르면 토론을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누르고 (인력과 예산을) 자릅니다. 이건 예술과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지시가 그런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불통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p align="justify">글 이세영 기자 <a href="mailto:monad@hani.co.kr"><span style="COLOR: #666666">monad@hani.co.kr</span></a>, 사진 김명진 기자 <a href="mailto:littleprince@hani.co.kr"><span style="COLOR: #666666">littleprince@hani.co.kr</span></a> </p><br/><br/>tag : <a href="/tag/심광현" rel="tag">심광현</a>,&nbsp;<a href="/tag/통섭" rel="tag">통섭</a>,&nbsp;<a href="/tag/유비쿼터스" rel="tag">유비쿼터스</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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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3 Aug 2009 14:59:0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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