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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8.7º</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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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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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4 Aug 2009 07:59:0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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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8.7º</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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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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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개념] 차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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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em>&nbsp;</em></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차연 개념은 후기 구조주의 시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데리다가 ‘차이+연기’라는 말을 합쳐 차연(differment)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요. </span></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레비 스트라우스로 대표되는 언어구조학자가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서 기표의 절대성을 믿은 반면(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구조주의의 기본 생각은 우리 사회에 있는 것은 어떤 ‘의미’와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레비 스트라우스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이 둘이 바뀔 가능성은 극히 소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한 단어는 그 단어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존재하는 사회, 다른 언어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 하나의 기표와 기의가 바뀌면 다른 기호체계도 바뀐다고 여겼습니다.)&nbsp;</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언어는 불안전하고 무질서한 체계로 봅니다. 기표와 기의, 이 둘 관계는 지극히 자의적이고, 찰나적이며, 일시적이며, 우연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기표와 기의는 서로 접합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고양이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단순히 고양이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양이처럼 매력적인 여성이나 혹은 고양이가 주는 공포 등을 지칭하기도 하지요. 또한 우리가 국가라고 말하여도 플라톤의 ‘국가’와 현대 사람들의 ‘국가’는 의미가 다르지요.</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후기 구조주의자들은 구조의 개념을 부정합니다. 즉 랑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부유하는 기표들 뿐입니다. 기표는 다른 기표들의 연쇄에 의해서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시계’라는 기표의 의미를 가져다보는 것은 ‘시간’ ‘알려주다’ ‘기계’ ‘장치’라는 기표의 연쇄 작용입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그런 후기 구조주의자 중에 데리다가 있습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데리다의 차연 개념은 앞서 말한 듯이 차이(different)와 연기(deferment)의 결합입니다.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닌 이 단어는 두 의미(차연과 연기)의 의미를 모두 작동시키며, 어느 순간에도 한쪽의 의미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작용의 연쇄 속에서 하나의 대체 가능한 언어해석으로 다른 해석으로 지연된다는 것이 이 핵심입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그런데 이 데리다의 차연 개념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이 것은 이전의 단어의 일대일 대응 프레임의 부정입니다. 절대적 법칙의 부정입니다. 한 단어는 하나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 수많은 해석과 이해 가능성이 열립니다. 또한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현재 지닌 관점과 미래에 지닐 관점이 상이하게 다를 수 있으므로 대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span>&nbsp;</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불평등 자체가 사회가 유지되는 필수조건이라고 보았던 데이비스와 무어에 비해서, 우리는 그저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는 파슨즈에 비해서 데리다의 차연 개념은&nbsp;관대한가요. 사회를 해석하는 프레임은 여러 가지가 있고 어느 프레임 역시 사회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데리다의 차연개념을 좋아한다고 해서 구조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알게 된 순간, 무언가 ‘용서’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해요.</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아, 참고로 눈의 역사와 눈의 개념에서 놀이와 ‘차연’을 연결시킨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제시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리다가 ‘차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하기 이전에는 ‘놀이’가 차연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집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nbsp;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개념이자, 알아두시면 좋을 내용이라 이렇게 올려둡니다.</span>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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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공유하고 싶은 마음</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5091527#comments</comments>
		<pubDate>Mon, 24 Aug 2009 07:52:43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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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작문] 질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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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style="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8서울남산체 M'; TEXT-ALIGN: justify"></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정말 아쉽게도 사람들은 누군가가 옳은 말, 선한 일을 하였다고 반드시 긍정적인 반응만 보이지는 않는다. 아낌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이가 있는가하면 “꼴값 떠네”, “착한 적 한다”라는 비난의 말을 서슴지 않는 이도 있다. 이런 비난의 감정 밑바닥에는 ‘당신이 한 일은 위선에 불과하오’라는 조롱이 짙게 깔려있다. 그러나 사람 감정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지라 똑같이 ‘꼴값 떠네’를 외쳐도 그 밑바닥에 담긴 감정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처음 문근영 씨가 거액의 돈을 도서관을 위해 기부하였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참 대단하다’와 ‘쳇, 돈을 얼마나 벌기에 그런 거액을 척척 내놓는 것이람’이라는 정반대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였기에 부러웠고 질투하였다. 기사의 댓글을 클릭해보니 ‘역시 국민여동생, 하는 행동이 다르네’라는 베스트 댓글에 찬성과 반대가 엇비슷할 정도로 달려있는지라 ‘아, 이 복잡한 마음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구나’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사람들과 다툴 때, 들으면 제일 화가 나는 말이 ‘옳은 말’이듯이 나는 문근영 씨의 선행이 내가 갖추지 못한 무언가를 보았고 그것에 대한 강한 질투가 솔직히 그녀의 선행을 친찬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span></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그러나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가 그 사람의 선행에 대해 칭찬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는 그 사람의 선행이 더할 나위 없는 뻔뻔스러움으로 느껴지면서, 뱃속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밀려 올려오면 온몸의 기를 모아 ‘꼴값 떠네’를 외치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재래시장 나들이를 하시는 몇몇 분들과 민생과 의료민영화를 동시에 외치는 얄미운 입들에게 집중적으로 이런 기분을 맛볼 때가 잦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span></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도덕철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학문이다. 도덕이란 절대적인 신이 내린 가르침이라는 의견도 있고, 홉스의 사회계약설처럼 서로의 이익을 위해 동의한 무엇이라는 견해도 있다. 도덕적인 일을 하는 것은 그 도덕적 일을 함으로써 기쁨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라는 ‘도덕적 이기주의’ 역시 흥미로운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철학적 논쟁에 앞서 놀랍도록 잘 만들어진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날카롭게 간파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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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공유하고 싶은 마음</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5081670#comments</comments>
		<pubDate>Sat, 15 Aug 2009 08:23:58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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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오타쿠의 독백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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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내 자신을 오타쿠라고 지칭하는 것은, 내가 2차원 세계의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br>물론 현실(3차원)에도 멋있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의 매력 역시 2차원의 그들에 뒤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리라.<br>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원 세계의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 역시 있다.현실에는 없는 이들. 인간의 상상과 욕망이 빚어낸 창작물. 그러나 아름답다.<br>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들만 모아서 빚어낸 듯한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하리오.<br><br>그러나, 아쉽게도 2차원 세계의 인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짝사랑이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세계에 속해있지 않다. 언제나 훔쳐보는 나는 방관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슬픔은, 나의 기쁨은, 나의 사랑은 언제나 그들의 곁을 맴돌 뿐이다. <br>피규어를 사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을까?<br>ost를 사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을까?<br>포스터를 사면?<br>묘한 이성은 이럴 때만 자신을 지켜 그래보았자, 상업주의의 놀이에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br>그렇다면 내가 직접 그들을 만들어내면, 될까?<br>솔직히 시도는 해보았지만, 상상의 즐거움은 있었을 망정 인형놀이의 기분은 지우지 못하였다.(그리고 나는 인형놀이를 싫어한다;;)<br><br>결국 나의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기쁨이 되는 것은, 내가 이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이 감정이 언제나 나를 환희에 휩싸이게 한다. <br></p>			 ]]> 
		</description>
		<category>38.7º</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5068183#comments</comments>
		<pubDate>Mon, 03 Aug 2009 14:37:23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작문] 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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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오늘 추격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디보자, 작년 개봉된 영화이네요. <br>그 때 저는 일본에 있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한바탕 떠들썩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br>보면서 무서웠던 것은 물론 지영민이 여성들을 죽일 때도 물론 그러하였습니다만, <br>자기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하여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였습니다.<br>조금만 더 빨리 지영민의 집을 찾았다면,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분명 그녀는 살아남았고 무고한 희생자는 줄어들었겠지요.<br>가장 연약한 그녀들을 제외한 이들, 심지어 엄준호조차도 가해자였기에 그 애처로움은 더하였을지도 모릅니다.<br>수사는 어이없을 정도로 체면치레와 무지함으로 가득차 있어, 설마 저렇게 경찰들이 무능할까(만약 그렇다면 정말 무섭습니다만..) 생각하였지만 영화의 극적 부분을 제외하고서로&nbsp;날카로운 비판이 곳곳에 숨어있는 영화라 무섭게, 그리고&nbsp;흥미롭게 보았습니다.<br>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nbsp;<br>죽이는 손, 살기 위해 발악하는 손, 때리는 손...손손손...&nbsp;<br><br /><br /><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퀴즈를 하나 내보도록 할까요? 아, 걱정하지마세요. 지극히 간단한 퀴즈이니깐요. “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 답이 바로 나오네요. 그래요. 저는 지금 글을 쓰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 당신의 대답은 틀렸습니다. 아니, 틀렸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는 그 순간, 저는 글을 쓰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맛나게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쿨쿨 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아, 물론 이 대답은 반칙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만나고 있는 것은 ‘글을 쓰고 있는 저’이니깐 말이죠. 결국, 같은 시간에 한 개 이상의 ‘나’가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이 위대한 마법의 비결은 바로 ‘손’에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뿐만이 아니라 연필, 지우개, 종이 등등이 필요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손입니다. 설사 그것들이 없더라도 이 놈은 땅을 파서든, 나무 이파리를 찢어서든 이 메시지를 전해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만나게 할 방법을 열 손가락 넘게 떠올릴 수 있답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이 손이란 놈을 말한 것 같으면, 인간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입니다. 효율적이란 말은 꽤나 파괴적인 말입니다. 이 놈은 동물의 발톱처럼 날카롭지는 않습니다만, 가장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요. 무엇이 들려있는가에 따라 이 놈은 180도의 변신을 꾀합니다. 때리고, 부수며, 자르고, 찌르며, 할퀴고, 파기도 합니다. 수많은 목숨이 이 놈 때문에 사라졌지요.&nbsp; 혹은 써내려가거나, 그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지요. 수많은 인생이 이 놈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span></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저기 저 몽둥이로 소년을 때리고 있는 남성이 보이십니까? 소년을 인정사정없이 두드려 패는 저 몽둥이는 방금 전까지는 탁자를 받치고 있던 지지대였습니다. 그러나 저 남자의 손에 들리는 순간, 저 것은 한 소년의 인생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흉악한 무기로 변해버렸죠. 저기 저 바이올린을 키고 있는 여성이 보이시나요? 저 바이올린에서 나는 소리는 그저 줄과 줄과의 마찰에서 나오는 기묘한 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의지를 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더 이상 바이올린은 비싸기만 한 나무 조각이 아니라 그녀의 일부로서 기능합니다. 이처럼 손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훌륭하게 융합하는 연금술을 발휘함으로써 더없이 절망적인 것도, 더 없이 아름다운 것도 만들어낸답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그 중, 제가 생각하기에 이 손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마법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마법으로 우리는 러시아의 오래된 동굴에서 매머드를 사냥하고 있는 신석기인도, 세상을 조롱한 돈키호테도, 깊은 절망에 빠진 고흐도 만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지금 나와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 역시 이 마법이지요.</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결국 나와 당신이 보고 있는 역사․문화의 대부분은 이 손이 ‘나’와 ‘내가 아닌 것’을 융합하는 연금술을 통해 써내려가고, 그리고, 조각하여 영원에 가까운 시간의 흔적을 새긴 결과입니다. 때리고, 부수며, 보완하고, 아껴온 역사의 축적인 셈이지요. 네, 뭐라고요? 진부한 이야기 하지 말라고요? 흐음…제 나름대로는 놀라운 발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무 슬퍼 손이 다 떨리네요. 그렇다면 제 글 어디가 부족한지를 첨삭해주세요. 당신의 역사와 나의 역사가 겹쳐지는 그 순간을 기다리겠습니다. </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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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공유하고 싶은 마음</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5067026#comments</comments>
		<pubDate>Sun, 02 Aug 2009 16:01:01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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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작문] 고양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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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70년대 중반까지 스웨덴에서는 40여 년간 우생학 이론에 따라 열등 유전자를 근절하기 위해서 강제 불임 수술을 시술하였다. 그 대상이 된 것은 미혼모, 집시, 부랑아, 정신병자, 상습 범죄자, 정신 지체나 약시(弱視)였다. 복지선진국가라고 여겨지는 스웨덴에서 일어난 이 비극에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잔혹성에 경악하는 동시에 이성의 차가움에 전율하였다. </span></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span>&nbsp;</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21세기가 된 지금도 이러한 만행은 반복되고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 서울에서이다. 다만 그 대상이 인간에서 고양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난해 3월부터 실시된 TNR은 길고양이들을 포획해 중성화수술을 시킨 후, 다시 본래 있던 장소로 돌려보내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기존의 살처분방식이 오히려 진공효과(빈 영역에 다른 길고양이들이 들어오거나 암컷이 새끼를 빨리 배 길고양이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효과)를 일으킨다는 연구결과에 따라 도입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쓰레기봉투를 헤집어놓거나 밤마다 아기울음소리의 발정기음은 많은 사람들이 길고양이에 대해 반감을 품게 만들었다. 길고양이에게도 이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너무 개체 수가 증가하면 길고양이사이의 영역다툼이 치열해질 뿐만이 아니라 살처분방식에 비하여 훨씬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언론은 이 프로그램이 길고양이와 사람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평한다. 이런 호의적인 반응에 힘입어 올해 부산에서도 TNR프로그램의 시범실시가 결정되었다.</span> </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span>&nbsp;</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그러나 이러한 환호가 오히려 나에게는 불안하게 보이기만 한다. 이러한 환호에는 어떠한 고민과 반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잔혹한 이기심과 이성의 차가운 메스가 번뜩일 뿐이다. 애당초 길고양이는 주택가를 배회하며 음식쓰레기를 ‘도둑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 것들만이 그들에게 그나마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 평의 땅도, 나무 한 그루도 주인이 매겨진 이 인간들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은 주택가의 보일러실에서 한 줌의 온기를 얻고,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로 연명을 이어나간다. 인간들과 그들이 선택한 애완동물만이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을 허락받은 이 사회에서 그들은 도시의 ‘빈민’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span> </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span>&nbsp;</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그런 길고양이들이 고작 음식쓰레기를 탐내며 보일러실에 자리 잡았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 이들을 떠올린다. 대형마트 때문에 동네 슈퍼마켓이 죽는다고 사정하는 이들에게 그래도 규제는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이를, 200만원 남짓의 보상금을 주고는 집에서 못나가겠다고 발버둥치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을.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는 불임수술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어조와 대형마트 때문에 힘들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라는 그의 말, 200만원이라도 감지덕지하게 받고 나가라는 그들의 조소는 그 어떤 차이점도 없다.</span> </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span>&nbsp;</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결국 ‘인간과 길고양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TNR프로그램은 길고양이에 대한 기만,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그 평화로움은 어디까지나 강자, 인간의 잣대로 재단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nbsp;</span></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span>&nbsp;</p><p style="FONT-SIZE: 9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2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0.8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문 앞에 뜯어져 더럽혀져 있는 쓰레기 봉지를 보며 분노하기 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비극을.</span>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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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공유하고 싶은 마음</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5053522#comments</comments>
		<pubDate>Wed, 22 Jul 2009 11:29:47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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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작문] 불안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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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모성’은 여성의 본능이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산업혁명까지만 하여도 모성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는 ‘작은 어른’으로서 ‘커다란 어른’들과 똑같이 술을 마시고 노동을 하였다. 귀족 여성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두었으며, 평민 여성의 아이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거나 어느 귀족의 종자로 일찌감치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였다.&nbsp;&nbsp;그러나 산업 혁명으로 절대적인 식량의 부족이 해결됨으로써 아이나 여성이 일할 필요성이 감소된 반면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린 남성들이 일을 끝내고 쉴 수 있는 ‘휴식처’의 필요성은 증가하였다. 따라서 더 이상 노동할 필요가 없어진 여성이 그 ‘휴식처’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남자는 일, 여자는 집’이라는 근대적인 가족제도가 성립되었다. 한편 사회에게 ‘아이’는 부모를 잇는 노동력으로서 인식되었고 좀더&nbsp;좋은 노동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교육’이 실시되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모성의 ‘발명’에 대한 위의 이론은 ‘어머니’, ‘아버지’, ‘아이’, ‘선생님’, ‘학생’ 등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역할’들이 사회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맡은, 혹은 선택한 역할에 따라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하면 창피한 일 등을 인지하고 행동하여 왔다. 각각의 행동들이 맞물려 구성된 사회는 또다시 과거의 사회를 ‘재현’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 안정성의 기반이다. 이와 반대로&nbsp;학생이 수업시간에 전혀 수업을 듣지 않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촌지를 받는 것에 더 열중하는 상황을 우리는 ‘학교붕괴’라 부른다. 이렇듯 우리가 각각이 맡은 역할에 집중하고 충실해야만 우리 사회의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물론 ‘역할 파괴’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혁명’은 대표적인 역할 파괴 현상이다.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 즉 역할을 부여받겠다는 시도는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이런 역할 파괴의 정당성은 대부분의 경우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할 때 성립된다.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역할 파괴는 흔히 개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폭력이 수반되며 이를 합리화시킬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강자는 자신의 역할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약자들에게 제제를 가할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역할 파괴는 그 제제수단을 사용해도 약자들이 저항하는 불합리한 무엇을 성취하고자 할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nbsp;</span></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대한민국사회에서는 바로 그 ‘강자의 역할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 처참한 모습은 특히 사법권을 중심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평 정대해야 할 대법관이 이메일로 재판개입을 한 사실이 드러나는가 하면 철거민에게 폭력을 가하는 용역들을 경찰이 방관하고 있는 사진도 공공연하게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자신을 심판하고 죄를 만들 수도 있는 사법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따끔한 비판의 글을 올린 할아버지에게 ‘용자’라고 환호를 보내는 한편, ‘무슨 일 당하시는 게 아닌지 걱정 된다’라는 염려의 댓글도 적지 않다.&nbsp;</span></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묻고 싶다. ‘견찰’과 ‘떡검’이라는 일그러진 조소 속에서 심판의 망치가 향해져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그것은 정권을 비판하는 국민인가, 아니면 사법계 그 자신인가.</span>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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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공유하고 싶은 마음</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5048362#comments</comments>
		<pubDate>Sat, 18 Jul 2009 16:16:45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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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논술] 미디어법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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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미디어법 처리를 놓고 팽팽한 대치를 보이고 있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15일 이들 법안의 ‘처리’와 ‘저지’를 위해 동시에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이 대립의 중점이 되고 있는 것은 ‘대기업과 신문이 방송사의 지분(지상파 20%, 종합편성 30%, 보도채널 49%)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여 신문과 방송의 겸업을 허용하자는 법률’이다. 이 법안이 상정될 경우, 이전까지 존재하였던 방송 진출의 커다란 벽이 허물어지면서 이 후의 방송 산업에 대변혁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된다. 이는 방송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그 방송을 소비하는 시민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비단 언론인과 정치가들의 문제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미디어법에 찬성하는 이들의 이론적 근거는 KISDI에서 제시한 ‘방송규제완화의 경제적 효과분석’이라는 보고서에 의존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방송진출 규제 완화를 통해 방송 산업에 대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짐으로써 선진국 수준으로 방송 산업이 발전할 것이다. 또한 이는 언론의 다양성․콘텐츠의 질적 향상․대규모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이 보고서는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첫 째, </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방송진출 규제 완화를 통해 대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짐으로써 방송 산업이 성장할 것이라는 지극히 일원론적인 분석의 문제이다.</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방송 산업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작용하는 것은 비단 돈만이 아니다. 언어, 인구, 당시의 경제상황 등 수많은 원인들의 상호작용의 결과 끝에 비로소 방송 산업의&nbsp;성장 여부가 결정된다. 캐나다나 영국, 미국에 세계적인 규모의 방송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어라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잠재적 소비자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어를 사용하는&nbsp;대한민국 방송의 잠재적 소비자는 5000천만 정도로&nbsp;월등히 적은 숫자다. 더구나 2018년 이후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될 것이라는 통계결과를 볼 때, 이 잠재적 소비자는 점점 줄어들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경기에 민감한 방송 산업의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현재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과연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설사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거대해진 몸집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 역시 제기된다. </span></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둘 째,</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대규모의 투자가 과연 콘텐츠의 질을 향상을 보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이다. </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보고서는 ‘대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지면 콘텐츠의 질을 향상될 것이다’라는 명제에 근거하여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산업의 성장이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하듯 이 명제는 얼마든지 거짓이 될 수 있다. 시장은 효율성은 보장해주되 효과성은 결코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청률 경쟁이 심각해지면서 자극적이고 재미만을 추구한 프로그램만이 브라운관을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 역시 부정할 수 없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셋 째, </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보고서가 가지는 시각의 한계이다.</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보고서는 지극히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익 여부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의 바다에서 언론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경제학적 손실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 속에서 일일이 참거짓을 판단하지 않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언론이 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언론의 공정성이 지켜지는 것과 사람들이 다양한 정보를 취사선택 가능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KISDI의 보고서의 가장 명백한 한계이자, 미디어법을 찬성하는 이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이다.</span> </p><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000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nbsp;언론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경제적 논리로서는 당위성이 입증할 수 없으며 따라서&nbsp;변화를 시도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토론과 의견수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디어법 상정 시도에는 그러한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이러한 모습은 언론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좁은 본의회장을 빠져나와, 좀더 넓은 비젼을 가지고&nbsp;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국회의 모습을 기대한다.</span> </p></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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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공유하고 싶은 마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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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5 Jul 2009 11:57:47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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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혼잣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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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괜시리 생각이 많아질 때가 있다. <br>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나, 나의 미래를 생각할 때, 혼자 좁은 방에 있을 때.<br>이상하게도 이 세가지 상황은 모두 똑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br><br>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의외로 진실이라는 것은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br>그 어떠한 위대한 사회학자의 이론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라는 기분이 든다는 것은 내 오만이거나 착각일지도 모른다.<br>하지만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 순간을 느끼고, 의문시 여기지만, 바빠서 잊어버리거나 혹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느낌을 놓치지 않고 정형화시키고, 논리화 시킨 것이 사회학이론이다.&nbsp;이렇게 써 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글쎄- 잘 만들어진 사회학 이론을 읽을 때의 기분은&nbsp;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났을 때의 감동과 비견될 만 하다. <br>아름답다, 라고 느낀다.<br><br>나는 언제나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br>그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br>비록 나의 예술로 먹고 살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자기만족적인 자위에 불가할 지라도, 나에게 설사 그런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간간히 느껴지는 어떤 예리한 느낌, 이것을 글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게 그것을 지속시킬 재능은 없다. 속물적이지만, 예술에도 돈과 밥은 필요한 것이다.<br>그 대신 나에게는 어떤 사회학적인 번뜩임같은 것이 있다. 천재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뭔가 그런 게 있다고는 자신할 수 있다. 아마 싹은 보이네, 라고 평가할 정도는 될 것이다. 이것을 발전시키면 어떨까. 지금은 미약하지만, 자꾸 공부하고 단련시키다보면 그럼, 나도 어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br><br><b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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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38.7º</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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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1 Jun 2009 13:50:15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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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독촉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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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뭐가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br>나야 원래 어렸을 때부터 커다란 꿈을 가진 인간은 아니었으니(황당한 꿈과는 별개다;;;), <br>꿈의 크기는 그닥 변한 것이 없지만.<br>나이를 먹어도 나는 변한 게 없는데, <br>무엇을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는데,<br><br>오직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빨리 꿈을 정하라고 누군가에게 독촉당하고 있는 기분이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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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38.7º</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4981066#comments</comments>
		<pubDate>Sun, 31 May 2009 16:33:33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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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기사] 포스코 회장 면접에서 무슨 일 있었나? ]]> </title>
		<link>http://yamye.egloos.com/490313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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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href="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06&amp;newsid=20090423190503774&amp;cp">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06&amp;newsid=20090423190503774&amp;cp</a>=<br><br>요즘 내 꿈은 이민이라지요.<br>하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옳지 못한 일을 보지 않은 척, 무력한 척. <br>결국 그 칼날이 내 목까지 왔을 때 후회할지도 모르지요. <br>그나저나 요즘 좋다 싶은 기사들은&nbsp;오마이뉴스...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 같죠. 			 ]]> 
		</description>
		<category>공유하고 싶은 마음</category>

		<comments>http://yamye.egloos.com/4903131#comments</comments>
		<pubDate>Sat, 25 Apr 2009 11:09:41 GMT</pubDate>
		<dc:creator>케키야상</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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