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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야스페르츠의 墨硯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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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안구에 테러할테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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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15:21:0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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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야스페르츠의 墨硯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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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안구에 테러할테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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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떡밥 춘추 2호의 정식 판매를 개시합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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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정확한 내용 및 구입 신청은 아래에 링크된&nbsp;악희 님의 글에서 해 주세요~<br><br><br><br><a title="" href="http://bulbbang.egloos.com/1746912"><br><br><strong><span style="FONT-SIZE: 130%">떡밥춘추 2차 판매 시작합니다.</span></strong></a><br><br><br>덧, 이 글은 2차 판매 종료시까지 상단에 위치합니다.<br><br><br/><br/>tag : <a href="/tag/잡담" rel="tag">잡담</a>,&nbsp;<a href="/tag/떡밥춘추" rel="tag">떡밥춘추</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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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잡담</category>
		<category>떡밥춘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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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01:20:00 GMT</pubDate>
		<dc:creator>야스페르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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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오호망양(五胡望洋) 23 - 가화만사성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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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부견의 몰락 이후 10여 년, 이 격동의 세월을 헤쳐나왔던 난세의 영웅 모용수와 요장이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은 후계자들이 있다. 이 후계자들은 모두 걸출한 아버지를 둔, 어찌보자면 불쌍한(?) 남자들이다. 사사건건 아버지와 비교될 것이 분명할테니 말이다. 어쨌든 이 후계자들이 10여 년이 걸려 쌓아올린 금자탑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 결과는 서로 정 반대의 극단을 달렸다고 할 수 있다.<br><br>주변 각국들과의 관계, 정권이 가진 특수성이나 한계가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두 후계자의 차이야말로 내가 보기에는 진짜 원인이다. 어쨌거나, 이 시대는 왕의 능력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던 시대였으니까.<br><br><br>후진 정권을 세운 요장의 후계자 요흥(姚興). 그가 황제에 즉위하여 나라를 이끌게 된 때는 28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질풍노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 원숙하다 이르기에는 조금 모자란 나이다. 아니, 원숙하다거나 중후하다는 것은 인생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무엇이든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넘칠 나이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nbsp;건국한지 10년 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가. 건국의 원훈이라 할만한 권위와 실력을 갖춘 공신들이 넘쳐났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런 나라에 28세의 혈기왕성한 군주가 즉위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br><br>그러나 요흥은 달랐다. 젊은 혈기로 쓸데없는 개혁을 하려 들지도 않았고, 공신들을 무시하거나 숙청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br><br>당시 진 정권에는 두 명의 유력한 원로(?)가 있었다. 요흥의 숙부인 요서(姚緖)와 요석덕(姚碩德). 후일의 활약상으로 보건대 요서는 주로 내정 전반에 힘을 가지고 있었고, 요석덕은 강력한 군권을 가졌던 것 같다. 국가를 꾸려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힘을 나눠가진 셈이다. 평범한 후계자였다면, 이들이 가진 권력을 견제하고 빼앗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테지만, 요흥은 달랐다. 그는 두 숙부를 깍듯이 예의로 모시면서 정무의 전반에 걸쳐서 이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들에게는 집안에서 하는 예의를 다했다고 할 정도였다.<br><br>군주 자신도 범상치 않은 인재인데다 권위와 실력을 갖춘 원로와의 관계도 원만하니 국가가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br><br><br>394년에 부등을 멸망시킨 진&nbsp;정권은&nbsp;사실상 관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워낙에 오랫동안 처절한 전쟁을 벌인 터라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부등 멸망 이후에 거의 5년 동안이나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은 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변두리의 지방 정권이라면 중요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기록이 적을 수 있지만, 장안을 차지하고 있는 진 정권의 기록이 이렇게나 적다는 것은, 내치에 온 힘을 쏟았다는 반증이 분명하다.<br><br>이렇게 내치에 힘을 쏟았다는 것도 요흥의 남다른 점 <span class="pops" id="POPS1136_125">가운</span>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젊고 혈기왕성한 군주가 힘을 분출하지 않고 내치에 힘을 쏟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다못해 문약한 군주라면 모를까, 요흥은 문약한 인재도 아니다.<br><br>어쨌든 이렇게 나이 답지 않은 애늙은이 요흥의 치세에서 진 정권의 국력은 날로 충실해져갔다. 그리고 그렇게 충실해진 힘을 바탕으로 차근 차근히 확장을 해 나간다.<br><br>요석덕은 농서왕에 책봉되었으며 요서는 진왕(晉王)에 책봉되었다. 책봉명은 곧 이 두 사람이 주로 활약하게 되는 무대를 말해 준다. 요석덕은 서쪽의 진주(秦州 : 감숙성 동부), 양주(凉州 : 감숙성 중서부)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고, 요서는 동쪽, 그 중에서도 장안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하동(河東 : 산서성 남서부)가 무대였다. 그 중에서도 주로 군사 활동을 보여준 것은 요석덕이고, 요서는 포판(蒲阪)을 점령하여 장안의 입구를 틀어막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대신 요서는 직위가 승상에 이를 정도로 진 정권의 내정 전반에 걸쳐서 많은 일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br><br>요석덕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96년 말, 부등을 멸망시킨 것이 394년의 일이니 2년이 넘도록 진 정권이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요석덕의 첫 정복지가 부등 세력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상규(上邽)였으니, 부등을 멸망시키고도 그 핵심 영토를&nbsp;취하지 않고&nbsp;내정에만 매달렸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br><br>게다가 주변의 국가들과의 관계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던 것 같다. 295년에는 연 정권과 화친을 맺었고, 탁발부 정권과도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포판을 점령한 것도, 특별히 주변 국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그쳤다. 심지어 연 정권이 탁발부에게 털리면서 원군을 요청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을 정도였다.<br><br>동방에서는 단숨에 수천리를 달려 뺏고 빼앗기는 각축을 벌였건만, 서방의 진 정권은 포판과 상규를 차지한 후에도 별다른 확장세를 보이지 않는다. 397년 말에 동진이 차지하고 있던 낙양 일대를 공격해서 일부를 점령하고 낙양을 한 차례 포위했던 사건이 하나 있을 뿐이고, 398년에는 아예 기록조차 없다.<br><br>399년 6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 정권의 대규모 군사 활동이 나타난다. 그 목표는 바로 낙양. 당시 동진 정권은 내분으로 인해서 기둥뿌리까지 휘청거리고 있던 터라 낙양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이었다. 낙양의 수비군은 위 정권에 원군을 청해 보기도 했으나, 원군이 도착하지 않고 100여 일을 농성한 끝에 결국은 함락되고 말았다. 384년에 낙양을 회복한 이래 15년 만에 다시 구도 낙양을 빼앗긴 것이다.<br><br>동진 정권이 휘청거리고 있는데다 어렵사리 되찾았던 낙양을 빼앗겼으니 낙양의 영향권에 있던 지역들이 동요하는 것도 당연하다. 과연 어느 정도 선까지 신뢰해야 할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기록에 따르면 한수와 회수 이북의 지역 대부분이 후진의 세력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황하 이북은 어차피 동진의 세력권이 아니었으니, 회수 하류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수에서 회수 상류까지 길쭉하게 튀어나온 모습이 된다. 이런 영토가 과연 유지가 가능했을런지, 좀 의문스럽기는 하다.&nbsp;일부 세력권은 남연 정권과 겹친다.<br><br><br>어쨌든 낙양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한 진 정권은 이후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하기 시작한다. 400년에는 요석덕이 서진(西秦)의 걸복국인을 정벌하여 멸망시켰고, 401년에는 양주로 진격하여 후량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고 양주의 양 시리즈들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진 정권은 서토를 완전히(?) 평정하였다.<br><br>내부의 우환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하였으니 이제 외부로 힘을 뻗을 때가 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북방의 위 정권과 분쟁이 생기면서, 화북의 양대 세력은 맞붙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p><br/><br/>tag : <a href="/tag/5호16국" rel="tag">5호16국</a>,&nbsp;<a href="/tag/후진" rel="tag">후진</a>,&nbsp;<a href="/tag/요흥" rel="tag">요흥</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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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역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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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Nov 2009 16:26:46 GMT</pubDate>
		<dc:creator>야스페르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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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오호망양(五胡望洋) 22 - 남연과 북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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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BACKGROUND-COLOR: #f4f4f4">398년 초, 황하 남동쪽의 활대(滑臺)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흥분으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업에서 빠져나와 활대로 들어온 모용덕이 나라를 정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덕을 뒤쫓아 온 모용린은 모용덕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으나, 모용덕은 이를 거부하고&nbsp;형인 모용수가 했던 전례를 따라 연왕(燕王)을 자칭했고, 연호도 고쳐서 "원년"을 칭했다.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개원을 한 것도 그렇고, 여러 제도와 관직을 설치한 것도 모두 새롭게 나라를 건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br><br>남연(南燕)으로 칭해지는 국가의 성립이다. 모용덕의 나이 63세. 모용수의 동생으로 당시 모용씨 일족에서 최고 연장자였으니 그의 즉위가 그렇게 뜻 밖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북방의 모용보는 얼마 되지도 않는 유주·평주의 영토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교통도 사실상 끊겨서 활대 인근은 고립무원이었으니 모용덕이 자립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br><br>그러나, 사실 모용덕이&nbsp;이제 막&nbsp;수립한 남연 정권은 당시로서는 멀리 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비교해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의 건국이었다. 남연 정권의 영역은 고작해야 황하 남동쪽의 일부 지역, 지금의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 지역에 불과했다. 그 외에는 여전히 후연 정권의 지방관, 혹은 반 독립적인 군벌 세력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나마도 이들 영역은 아주 평탄한 지역이어서 북서쪽의 자연국경 황하를 제외하면 지리적으로도 대단히 불리했다. 남연 정권의 미래는 아직 불투명했던 것이다.<br><br><br>모용덕이 막 나라를 세워 꾸려나가던 바로 그 시기, 황하를 지키던 모용종(慕容鍾)에게서 사신이 찾아왔다. 그가 알려온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북방에서 쫒겨난 황제 모용보가 암행을 거듭하여 적진을 뚫고 황하 서쪽에까지 도착하여 사신을 파견해왔다는 것이다. 모용보의 사신이 전한 말은 이러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황상이 2월에 승상(丞相 : 모용덕을 말함)의 표문을 받고 곧바로 남쪽으로 정벌을 가시다가 을련(乙連)에 이르러서 난리를 만나게 되어 근거지를 잃고 여기에 왔습니다. 왕(王 : 모용종을 말함. 모용종은 북지왕에 책봉되어 있었다.)께서는 빨리 승상에게 말씀을 드리고 받들어 마중하십시오."<br></span><br>모용보는 아직 모용덕이 나라를 건국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모용덕을 승상이라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모용종은 모용덕에게 황제를 칭하라 권하였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모용보의 사신이 달가울리가 없다. 그래서 사신을 도망치지 못하게 유폐해 놓고 즉시 모용덕에게 사신을 보낸 것이다. 성 안에서는 즉시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짐은 경들이 권고하기도 했고, 짐 또한 지금의 황제를 떠돌아 다니도록 내버려 둔 책임이 있어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황제를 대신하여 이 지위에 올랐다. 이제 하늘이 도우셨는지 황제께서 돌아오셨으니, 나는 장차 그를 받들고 감히 참칭한 죄에 대해 용서를 빌고자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br></span><br>모용덕의 조심스러운 발언에 즉각 신료들의 만류가 쏟아졌다.<br><br><span style="COLOR: #ff0000">"지금 천하는 혼란스러워 뛰어난 인재가 아니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선황의 뒤를 이은 황제는 어리석고 약하여 사직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nbsp;폐하께서 만일 보통 사람의 절개를 따르면서 하늘이 내려준 일을 버린다면 사직을 어떻게 보존하겠습니까?"<br><br>"지금의 황제는 국도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어려가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패망하였습니다. 나라를 망친 군주는 설사 어버이라 해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음은 &lt;춘추&gt;에도 올바르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자식을 거절하는 경우(모용덕은 모용보의 숙부이다.)가 다르겠습니까?"</span><br><br><br>아차피 짜고치는 고스톱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방침은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용덕은 모여호를 파견해서 사신과 함께 모용보를 맞아들이라 명하였지만, 실제로는 모용보를 붙잡으려 하는 것이었다. 모여호는 수백 명의 장사를 이끌고 사신과 함께 황하를 건너 모용보를 찾았다.<br><br>그러나, 모용보의 명줄(?)은 아직 남아있었다. 모용보가 사신을 보내 놓고나서 우연히 나무꾼과 만났는데, 이 나무꾼을 통해서 모용덕이 칭제(稱制 : 황제의 권한을 대행함. 섭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모용보는 사신을 버려둔 채 다시 북쪽으로 줄행랑을 놓았고, 모여호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애꿎은 사신만 모용덕에게 처형당했을 뿐이다.<br><br><br>=======================<br>모용덕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모용보는 결국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물론, 그냥 돌아갔다가는 개죽음만 당할 것이 분명하니 아직 후연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nbsp;기주&nbsp;일대에서 은밀하게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성의 동태를 예의주시하였다.<br><br>한편, 용성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쿠데타를 직접 일으켰던 이는 금군이었던 단속골 일파였다. 이들에 동조했던 것이 난한(蘭汗)이었는데, 난한은 은밀하게 단속골을 지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태연스럽게 근황군인 척 했다. 용성이 함락된 직후, 단속골 일파는 꼭두각시 황제를 누구로 하는가를 놓고 내분을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촌극을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모용농이 피살되기도 했다. 어쨌든 내분으로 약화된 반군은 결국 뒤에서 팔짱을 끼고 이를 지켜보던 난한에 의해 모두 참살당했고, 난한은 용성을 장악하고 태자 모용책을 받들었다.<br><br>모용책은 어차피 꼭두각시, 그러나 난한 자신은 대단히 신중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모용보는 난한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었다. 반명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은 난한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난한이 모용보를 받들겠다고 하자 이를 거부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래서 모용보는 남쪽으로 모용덕에게 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br><br>이제 다시 난한을 주시하게 된 모용보는 일단 난한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어쨌든 모용보 자신이 책봉한 태자를 받들고 있고, 종묘에도 제사를 지내는 등 여러 면에서 믿을 만 했던 것이다. 일단 신중을 기하느라 난한을 만나보도록 사신을 파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한이 파견한 사신이 찾아오자 모용보는&nbsp;아예 마음을 놓아버리고 용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용성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만류해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모용성은 모용보를 떠나 숨어버렸고, 모용보는 398년 4월,&nbsp;용성으로 유유히 입성하였다.<br><br>당연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난한의 암살자였다. 향년 44세, 너무나도 뛰어난 아버지를 두었던 평범하고 소심했던 한 남자의 최후였다.<br><br><br>모용보를 죽인 난한은 스스로 창려왕(昌黎王)을 자칭하며 유·평주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난한은 그 성격이 모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통성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태자 모용책을 제외한 모용씨 일족들 대부분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던 것이다. 모용성 또한 이런 난한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모용성은&nbsp;난한의 딸과 <span class="pops" id="POPS1246_445">결혼</span>했었기 때문에, 모용성이 난한에게 항복하자 딸과 부인이 만류하는 바람에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시중(侍中)으로 삼아 가까이 두기까지 했다.<br><br>난한의 형이었던 난제와 동생인 난가난 등이 모용성을 살해하자고 청했지만, 난한은 끝내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모용성이 난제와 난가난을 참소하여서 형제들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모용성의 음모는 차근차근히 진행되어 나갔다.<br><br><br>모용성의 사주로 모용기가 지방에서 거병하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난제·난가난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모용성이 이들을 믿을 수 없다고 참소하자 난한은 사령관을 교체하였고, 당연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난제 등은 끝내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난한의 아들 난목이 출정하여 반란을 진압하였고, 귀환한 난목은 암살, 난한도 곧이어 살해당했다. 그야말로 물흐르듯이 이어진 완벽한 음모였다. 지방의 요지를 수비하고 있던 난한의 일족들도 전광석화처럼 해치워버린 모용성은 마침내 후연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하였다.<br><br>398년 7월 신해일(21일),&nbsp;황실이 끊긴지&nbsp;3개월 여 만에 모용성이 뒤를 이어 후연의 수장이 된다. 모용성은 아직 스스로 황제라 칭할만한 상황이 아니라 여겼던 모양이다. 특별히 칭호를&nbsp;세우지는 않은 채, 자신의 책봉명인 장락왕(長樂王)으로 황제의 직책을 대행할 뿐이었다. <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19/22/e0042222_4b040d8072dd0.jpg" width="500" height="510.15473887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19/22/e0042222_4b040d8072dd0.jpg');" /></div><br>===========================<br>한편, 한창 나라를 일궈 나가고 있던 남연 정권은 399년에 이르러 위기에 직면한다. 3월 경에 반란이 일어나 모용덕이 직접 출정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모용덕이 활대를 비운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나 활대를 위 정권에 넘겨버린 것이다. 근거지를 사실상 잃어버린 셈이다.<br><br>모용덕의 무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활대를 다시 되찾자는 주장, 남쪽으로 내려가 팽성(彭城)을 점거하자는 주장, 동쪽으로 가서 청주(靑州)를 차지하자는 주장 등, 의견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다. 결국 모용덕은 승려 축랑(竺郞)에게 자문을 구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삼가 세 가지 책략을 살펴보니 반총의 의견(청주로 가자는 주장)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말입니다. 의당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nbsp;연주(兗州)를 빼앗아 안무하고, 북쪽으로 나아가 제(齊) 지역을 순행해야 할 것입니다."<br></span><br>축랑의 의견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절충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쪽의 팽성은 동진의 영토였고, 동진의 본거지와도 가까워서 위험했다. 또한 청주로 직행하기에는 청주 일대의 군벌 벽려혼(壁閭渾)의 세력이 막강했다. 그렇다면 일단 군대를 정비할 근거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축랑은 바로 그 지역으로 태산과 황하 사이, 옛날 적위(翟魏)가 할거했던 지역을 추천한 것이다.<br><br>모용덕은 축랑의 의견에 따라 남하하여 연주 북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군대를 정비하여 8월에 이르러 벽려혼을 정벌하기 시작했다.<br><br>벽려혼은 원래 전진 정권의 인물이었다. 비수대전 이후의 혼란기 동안 청주 지역을 점거하고 동진에 투항하였는데, 뒤에 모용농의 공격을 받자 다시 후연에게 투항하였다.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전형적인 난세의 군벌이었던 셈인데, 당연히 후연이 몰락한 <span class="pops" id="POPS44263_260">후부</span>터는 사실상 자립해 있었다.<br><br>모용덕의 벽려혼 정벌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어, 순식간에 산동성 대부분을 평정하는데 성공하였다. 399년 8월, 모용덕은 마침내 광고(廣固)에 수도를 정하였다. 남연 정권의 실질적인 출범이다.<br><br><br>이로써 과거에는 하나의 나라였던 후연 정권이 각기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중국의 사서는 군주의 혈통을 중심으로 국가를 나누는 경향이&nbsp;커서 이 북방의 연나라는&nbsp;후연 정권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북방의 후연 정권은 영토 면에서 보아 과거의 연 정권과는 다른&nbsp;국가이다. 그러므로 북연(北燕)의 건국은 사실상 모용성이 북방에서 나라를 추스른 시점부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br><br>그래서, 감히 이번 편의 제목을 남연과 북연으로 잡아 보았다. 물론 이후의 연재에서 후연을 굳이 북연이라 칭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할 생각은 없다. 역사 속의 북연 정권은 아직 출범하려면 멀었으니까.<br><br><br>덧, 반골 기질로 한 획을 그은 모용린. 모용덕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긴 주제에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다 주살당함.<br><br>덧2, 모용성의 사주를 받아 난한에 대해서 최초로 반기를 든 모용기. 자기를 부추긴 모용성에게 주살.<br><br><br>이래서 반골들은 안돼. (응?)<br></span></p><br/><br/>tag : <a href="/tag/5호16국" rel="tag">5호16국</a>,&nbsp;<a href="/tag/남연" rel="tag">남연</a>,&nbsp;<a href="/tag/후연" rel="tag">후연</a>,&nbsp;<a href="/tag/모용덕" rel="tag">모용덕</a>,&nbsp;<a href="/tag/모용보" rel="tag">모용보</a>,&nbsp;<a href="/tag/모용성" rel="tag">모용성</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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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후연</category>
		<category>모용덕</category>
		<category>모용보</category>
		<category>모용성</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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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Nov 2009 15:06:55 GMT</pubDate>
		<dc:creator>야스페르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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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이덕일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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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title="" href="http://tinis74.egloos.com/2478104">위서僞書의 종류 - 양계초梁啟超(1873-1929)</a>&nbsp;by 소하<br><br>명색이 역사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strike><span style="COLOR: #c0c0c0">배신자</span></strike>전공자 주제에 위서가 무엇인지조차 <span style="COLOR: #c0c0c0"><strike>쌩까는</strike></span>모르는 떡사마에게 소하 님의 글을 보여주고 싶다.<br><br>아래는 떡사마께서 &lt;ㅎㄷㄱㄱ&gt;를 옹호하시면서 날린 알흠다운 말씀.<br><br><span style="COLOR: #ff0000">"이상룡의 『서사록』과 박은식의 『동명성왕실기』가 1911년에 저술되었다고 해서 ‘후세의 위작’이라고 비판받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면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 - 2002, 이덕일,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과연 후세의 위작(僞作)인가?」,『우리 역사의 수수께끼』<span class="pops" id="POPS89558_186">김영사</span> "</span><br><br><br>석주나 백암이 언제 "내가 옛날부터 전해오던 고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엮은거여."라고 한 적 있냐?? 어디서 되도 않는 걸로 실드드립을 치냐. 아오....<br><br><br>더 열받는 것은, 이런 떡사마의 개솔히가 <span style="COLOR: #000099"><strong><u><a href="http://ko.wikipedia.org/wiki/%ED%99%98%EB%8B%A8%EA%B3%A0%EA%B8%B0#.EC.A7.84.EC.84.9C.EB.A1.A0" target="_blank"><span style="COLOR: #000099"><strong><u>위키백과 - 환단고기</u></strong></span></a></u></strong></span>에 당당하게 올라가 있다는 거다.... 내가 과감하게 태클을 날려 삭제하려 했지만, 위키백과의 시스템 상 "출처"가 명백하고 저 말에 태클을 건 "공식적인 발언"이 없기 때문에&nbsp;실패.... 이런 젝일.<br><br><br>위키백과의 저런 시스템이 참 유용할 때가 많지만, 가끔은 이렇게 뒤통수를 칠 때가 있다. ㅡㅡ;;<br><br><br/><br/>tag : <a href="/tag/잡담" rel="tag">잡담</a>,&nbsp;<a href="/tag/유사역사학" rel="tag">유사역사학</a>,&nbsp;<a href="/tag/위서" rel="tag">위서</a>,&nbsp;<a href="/tag/이덕일" rel="tag">이덕일</a>,&nbsp;<a href="/tag/환단고기" rel="tag">환단고기</a>,&nbsp;<a href="/tag/위키백과" rel="tag">위키백과</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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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잡담</category>
		<category>유사역사학</category>
		<category>위서</category>
		<category>이덕일</category>
		<category>환단고기</category>
		<category>위키백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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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Nov 2009 01:30:07 GMT</pubDate>
		<dc:creator>야스페르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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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요서 백제에 관한 잡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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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요서 백제와 관련된 많은 논의들 가운데 하나,<br><br><span style="FONT-SIZE: 170%; COLOR: #cc66cc">근초고왕 때 요서를 점령했다.</span><br><br><br>이 명제는 워낙에 당연히 틀린 것이기에 매식자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다.<br><br><br>그런데, 이 명제를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저러한 추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다른 사안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 본 결과 저 추론이 얼마나 병맛인지를 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br><br><br>어떤 적용인가 하니,<br><br><br>이런 사료가 발견되었다고 하자. 아무래도 중국쪽 사료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br><br><span style="FONT-SIZE: 170%; COLOR: #cc33cc">"조선은 임진왜란 때 규슈를 정복했다."<br></span><br>아....... 이런 병맛나는 사료가 발견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아무튼 저런 사료가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치자.&nbsp;당연한 이야기지만, 저 사료는 그 자체로 말이 안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일본군에게 오히려 침략을 당하고 있던 시점이니까.<br><br>자, 여기서 요서 경략설과 같은 추론을 적용해보자.<br><br><br><span style="COLOR: #ff0000">"임진왜란 때 조선은 규슈를 정복하는&nbsp;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일단 규슈 정복이라는 것은 사실이라고 쳤을 때, 조선은 아마도 <strong>최고의 전성기였던&nbsp;세종 때 규슈를 정복했을 것이다.</strong>"<br></span><br><br><br><br>참 알흠다운 추론이다............<br><br><br>다른 변형도 가능하겠다.<br><br><span style="COLOR: #ff0000">"일본에는 규슈를 정복당한 기록이 없다. 이는 부끄러워서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br><br>"조선은 규슈에 분조를 두었다. 사실 임진왜란은 규슈의 분조에서 벌어진 것이다."<br></span><br><span style="COLOR: #ff0000">"원래 조선은 규슈에서 건국되었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나서 한반도로 넘어온 것이다."</span><br><br><span class="pops" id="POPS66574_665">블라블라</span>............<br><br><br><br>아....... 병맛.<br><br></p><br/><br/>tag : <a href="/tag/잡상" rel="tag">잡상</a>,&nbsp;<a href="/tag/유사역사학" rel="tag">유사역사학</a>,&nbsp;<a href="/tag/요서" rel="tag">요서</a>,&nbsp;<a href="/tag/백제" rel="tag">백제</a>,&nbsp;<a href="/tag/임진왜란" rel="tag">임진왜란</a>,&nbsp;<a href="/tag/조선" rel="tag">조선</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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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雜想</category>
		<category>잡상</category>
		<category>유사역사학</category>
		<category>요서</category>
		<category>백제</category>
		<category>임진왜란</category>
		<category>조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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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01:25:49 GMT</pubDate>
		<dc:creator>야스페르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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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객관에 대한 새로운 정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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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이글루스에서 병신력의 측정 한계를 초월하여 초병신을 향해 고속 질주 중이신 모 님의 말씀.<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16/22/e0042222_4b00e66644c98.jpg" width="410" height="13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16/22/e0042222_4b00e66644c98.jpg');" /></div><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16/22/e0042222_4b00e7268a8cc.jpg" width="433" height="33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16/22/e0042222_4b00e7268a8cc.jpg');" /></div><br><br><br/><br/>tag : <a href="/tag/잡담" rel="tag">잡담</a>,&nbsp;<a href="/tag/난독증" rel="tag">난독증</a>			 ]]> 
		</description>
		<category>잡담</category>
		<category>잡담</category>
		<category>난독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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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6 Nov 2009 05:46:55 GMT</pubDate>
		<dc:creator>야스페르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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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오호망양(五胡望洋) 21 - 사분오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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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397년 5월, 이제 후연의 구도(舊都)가 되어버린 중산으로 한 무리의 군대가 입성했다.&nbsp;<span class="pops" id="POPS103574_44">용성</span>으로 도망쳐 가던&nbsp;모용보가 마지막 양심(?)으로&nbsp;파견한 원군이었다. 고녹관기(庫傉官驥)가 이끄는 원군은 고립무원으로 농성전을 벌이던 중산으로 어렵사리 입성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연의 고녹관기가 중산으로 들어가 개봉공 모용상과 더불어 서로 공격하였다.<br>燕庫傉官驥入中山，與開封公詳相攻。</span><br><br>당시 성 안에서 <span class="pops" id="POPS8065_845">지도</span>자로 추대되어 있던 것은 모용상(慕容詳). 자세한 것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아마도&nbsp;군대의 통솔권을 놓고 모용상과 고녹관기가 서로 대립하였던 것으로 추측해본다. 어쨌든 싸움의 결과 고녹관기를 비롯한 고녹관씨 일족은 모용상의 손에 모조리 참살당했고, 다시금 모용상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결사 항전을 결의하였다.<br><br>5월 갑진일(7일), 탁발규는 중산의 포위를 풀고 군량을 구하기 위해 하북 각지를 전전하였다. 전쟁을 개시한지 10개월 가까이 지났으니 위의 군대도 상당히 피로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중산의 포위가 풀리자 모용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포위가 풀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기고만장한 모용상은 중산에서 황제를 자칭하는 뜻밖의 <span class="pops" id="POPS51361_912">선택</span>을 한다. 연 정권이 드디어 분열을 시작한 것이다.<br><br>충분한 능력도, 배경도 없이 다짜고짜 황제나 사칭하는 사람에게 무슨 능력이 있을까. 모용상은 술독에 빠져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처형되고, 성 안에는 기근이 들었다. 포위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가 야생벼를 채취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성의 주민들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모용상은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 조세를 거두게 하는 등, 폭정이 계속 이어졌다.<br><br>한편, 모반을 일으켰다가 도망쳤던 모용린은 상산 일대의 정령 부락으로 숨어들어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nbsp;그 해 7월 경, 모용상이 보낸 군대가 상산 근처에서 조세를 거두자 모용린은 은밀하게 군대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군대와 함께 귀환한 뒤, 모용상을 붙잡아 죽이고 권력을 탈취한다. 음모가 다운 거사(?)였다.<br><br>모용린은 중산을 장악하고 황제를 자칭한다. 오랜 숙원을 푼 셈이다. 중산의 주민들은 그제서야 겨우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근, 그리고 내부 분란까지 겹치면서 중산의 군사는 급격하게 감소해 있었다. 여기에 탁발규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를 달렸다. 탁발규의 군대는 두 번이나 중산의 외성을 돌파하여 모용린을 궁지에 몰아넣었고,&nbsp;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중산은 다시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다.<br><br>9월이 되자 기근을 견디다 못한 모용린은 2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성을 탈출하였다.&nbsp;탁발규는 즉각 모용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nbsp;10월 갑술일(10일)에 모용린군을 완전히 격파해 버린다. 마침내, 중산이 탁발규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br><br>========================<br>이제 업의 상황을 살펴보자. 업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모용덕(慕容德)이었다. 모용덕은 모용수의 동생으로, 당시 모용씨 가문에서 최고의 큰 어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업 역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처절한 농성전을 펼쳤던 것은 다른 지역과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력군은 중산에 몰려 있었기에 업의 포위는 허술한 편이었다.<br><br>모용상이 중산에서 황제를 칭할 무렵, 모용덕 역시 같은 유혹(?)을 받았다. 딱히 잘못된 유혹은 아니었다. 모용보가 무슨 변을 당했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가문의 큰어른이었던 모용덕이 국가대사를 책임진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 용성에서 모용보가 건재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모용덕은 황제 즉위를 포기하고 모용보에게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 고토(?)를 회복하라는 표문을 올린다.<br><br><br>그런데, 바로 이 무렵에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br><br>첫째, 모용상이 황제를 자칭한 것은 일단 탁발규의 군대가 약화되면서 생긴 힘의 공백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탁발규의 군대가 약해졌다는 소식이 용성의 모용보에게 전해진 때는 중산이 함락된 다음의 일이다. 즉, 다시 탁발규의 군대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br><br>둘째, 위의 소식과 함께 모용덕의 표문도 도착했다. 탁발규의 군대는 약화되었고, 중산도 아직 건재하며,&nbsp;업도 모용덕이&nbsp;굳건하게 지키고 있다는&nbsp;사실이 전달된 셈이니 모용보가&nbsp;상황을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nbsp;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꼬여버렸다.<br><br>일전에 탁발규에게 격파당한 모용린은 또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가 11월 을해일(12일)에 업으로 도망쳐 들어오는데 성공한다. 적어도 모용린이 가진 정보는 그 당시로서는 가장 확실한 것이다. 모용덕으로서는 중산이 함락되었으니 업에 대한 탁발규의 공세가 강화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모용덕은 398년 정월에&nbsp;업을 버리고&nbsp;남쪽으로 황하를 건너&nbsp;활대(滑臺)로 옮겨가 버린다.<br><br>즉, 모용보에게 전해진 정보 가운데 그 시점에서 진실인 정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알 턱이 없던 모용보는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군대를 발동하고 만다. 최악의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br><br><br>=========================<br>397년 12월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모은 모용보는 출정에 앞서 간자를 파견해 남쪽의 상황을 알아보게 한다. 이듬해 봄에 돌아온 간자는 중산이 함락된 사실을 알려왔고, 앞의 정보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 사실을 알게 된 모용보는 기왕에 모은 군대를 그냥 해산해버리기에는 아까웠는지 북쪽으로 진로를 돌려 북방의 유목 부족 고막해(庫莫奚)를 습격하게 한다.&nbsp;그런데, 북진하던 도중 다시 모용덕이 파견한 사신이 찾아와 탁발규의 본군이&nbsp;북쪽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고한다.<br><br>모용덕이 업을 버리고 도망침으로써 황하 이북 대부분의 지역에서 탁발부에 반항하는 세력은 거의 사라졌다. 정복이 마무리된 것이다. 탁발규는 중산에 행대(行臺)를 설치하여 화북을 통치하도록 하고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평성으로 귀환하였다. 이 사실이 마침 모용보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br><br>모용보는 북진하던 군대를 돌렸다. 모용농, 모용성(慕容盛) 등은 용성으로 귀환할 것을 주청하고, 모여등이나 다른 장수들은 또 중원으로 진격할 것을 권하니 모용보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북방에서 기수를 돌린 군대는 모용보가 갈팡질팡하는 대로 용성으로 향하다가 다시 중원으로 진로를 바꾸는 등, 그야말로 똥개훈련을 당하는 꼴이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15/22/e0042222_4affa999f37df.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15/22/e0042222_4affa999f37df.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3333ff">※ 똥개훈련 하면 역시 "이 산이 아닌게벼." 시리즈...</span></div><br><br>2월에 이르러서야 겨우&nbsp;마음을 굳힌 모용보는 전군을 이끌고 다시 중원으로 진격할 것을 명한다. 약 한 달 동안 똥개훈련을 당한 군대가 그 명령을 그대로 따라 줄 리가 없다. 결국 예정된 파국이 찾아왔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금군에서.<br><br>금군의 장상(長上)이었던 단속골, 송적미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여러 종실왕들이 살해당하였고 모용보는 10여 기의 기병에게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탈출, 모용농의 진영으로 피신한다. 모용농의 진영에서도 모용보를 받아들이지 말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후연 군의 기강은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군대였으니, 모용농이 다른 제장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본영을 공격하자 오히려 공격하는 군대가 흩어져 도망쳐버리는 것도 당연한 이치. 결국 모용농과 모용보는 용성으로 도망쳐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br><br>용성은 모용성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 군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군대가 원정에 동원되었고, 그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니 용성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였다. 반란군은 난한(蘭汗)을 지도자로 하여 용성을 포위하였다.&nbsp;모용성이 전력을 다해 농성을 벌여 포위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일단 물러섰는데, 다음으로 이어진 공격은 정녕 충격적인 것이었다.<br><br><br><br><br><br><br>모용농이 반란군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br><br><br>그 동안 모용보를 충심으로 보좌하면서 연의 국정을 총괄하다시피 했던 충신 모용농이다. 그러나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하자 모용농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일단 살아남고 보자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nbsp;난한이 모용농을 유혹하자 모용농은 밤을 틈타 성을 빠져나간 것이다. 연에서 가장 명망 높던 모용농이 반란군과 함께 나타나자 농성하는&nbsp;한줌의 군대는 완전히 의욕을 잃고 말았다.<br><br>용성은 맥없이&nbsp;함락되고, 모용보와 모용성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nbsp;성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한때 화북의 한쪽을 장악하고 있던&nbsp;후연 제국이 산산조각으로 찢겨진 것이다.<br>&nbsp;<br/><br/>tag : <a href="/tag/5호16국" rel="tag">5호16국</a>,&nbsp;<a href="/tag/후연" rel="tag">후연</a>,&nbsp;<a href="/tag/남연" rel="tag">남연</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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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역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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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5 Nov 2009 07:14:2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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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전라도라고라고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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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title="" href="http://essen2.egloos.com/1899829">내 반쪽을 찾아보자</a>&nbsp;에서 트랙백.<br><br>반쪽을 찾아주신다고 하야 과감하게 어택 땅.<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13/22/e0042222_4afd16f40a5cc.jpg" width="500" height="354.27135678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13/22/e0042222_4afd16f40a5cc.jpg');" /></div><br>나이가 초큼 많구나....<br><br>근데 전라도라니....<br><br>이사가야겠군.<br><br>ㅋㅋㅋ<br/><br/>tag : <a href="/tag/잡담" rel="tag">잡담</a>,&nbsp;<a href="/tag/반쪽" rel="tag">반쪽</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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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Nov 2009 08:23:44 GMT</pubDate>
		<dc:creator>야스페르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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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오호망양(五胡望洋) 20 - 인종 전시장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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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pan style="BACKGROUND-COLOR: #f4f4f4">387년 말, 장대예와 왕목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여광의 양주(凉州) 평정은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여광은 양주를 평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389년 2월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고 396년에는 천왕(天王)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량(大凉)이라 정하였다.&nbsp;그러나, 여광의 희망대로 양주가 평정되었던 것은 아니다.<br><br>양주 일대는 원래부터 이민족들이 많이 살던 변방 중의 변방 지역이었다. 전량의 장씨 정권은 이러한 양주 지방을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통치했지만, 여광 정권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장대예가 장씨 가문의 네임 벨류로 반란을 일으켜 2년 가까이 항쟁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장대예의 반란에는 선비족 독발부, 흉노족, 강족, 한족 등등 수많은 이민족들이 개입했고, 엄밀하게 말해 여광이 진압한 것은 장대예와 그의 후견인 왕목의 세력 뿐이었다. 미약한 세력이었지만, 선비, 흉노, 강, 저, 한족 등 여러 종족들은 모두 제각기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체로 여광 정권의 힘을 인정하고 머리를 숙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광이 이들 부족들을 마음대로 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br><br>이들 이민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종족을 꼽으<span class="pops" id="POPS18057_741">라면</span> 역시 선비족 독발부였다. 장대예의 반란을 직접 지원했던 독발부의 수장은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이었다.&nbsp; 독발부의 주요 세력권은 지금의 청해성 북동부 지역이었다. 독발사복건이 죽자 아들 독발오고(禿髮烏孤)가 뒤를 이었는데, 여광이 내린 벼슬을 받고&nbsp;양 정권에 명목상의 복종을 하였다. 395년에는 염천보(廉川堡)를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br><br>어쨌든 양주를 명목상 평정하였던 여광은 세력의 확대를 꾀했는데 공격 목표는 당연히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걸복부 정권이었다. 그러나 걸복부의 수장이었던 걸복건귀는 여광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때로는 머리를 숙이고 복속하기도 했지만, 진왕을 자칭한 이후부터는 여광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br><br>397년 정월, 여광은 대대적으로 걸복부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출정하였다. 아들 여찬(呂纂)을 보내 금성을 함락시키고 동생 여연(呂延)을 보내 부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에 걸복건귀는 여연의 군대를 속여서 격파하였는데, 금성이나 부한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여광은 걸복부 정벌을 이 정도로 마무리짓고 고장으로 귀환하였는데,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br><br>독발오고가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면서 걸복부로부터 빼앗은 금성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독발오고는 여광이 천왕에 즉위한 뒤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는데, 여광이 걸복부와 싸우느라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거병한 것이다. 독발부 정권의 탄생이다. 이 독발부 정권은 흔히 남량(南凉)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양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수 년 뒤의 일이다.<br><br>어쨌든 독발오고가 자립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한 양 정권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붕괴되기 시작한다. 다음 순서는 흉노족이었다.<br><br>양주 장액(張掖) 일대의 흉노족은 노수호(盧水胡)라고 불렸는데, 그 수장은 저거라구(沮渠羅仇)였다. 저거라구는 여광에게 복속하여 걸복부 정벌에 동원되었는데 여연이 패배하여 죽게 되자 참소를 받아 여광에게 참수되었다. 저거라구의 시신을 운구하여 장액으로 돌아온 저거라구의 조카 저거몽손(沮渠夢遜)은 장례식에 모인 부족들을 선동하여 4월에&nbsp;반란을 일으킨다. 저거몽손의 반란은 여찬의 진압군에 의해 곧 격파되었는데, 저거몽손의 사촌형 저거남성(沮渠男成)이 뒤이어 주천(酒泉)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br><br>저거남성의 반란군은 건강(建康)을 포위하였는데, 건강의 태수 단업(段業)에게 사신을 보내 유세를 한다. 여광에 맞서서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는 제의였다. 단업은 천상 서생이었던 남자였다. 반란을 일으킬 재목은 아니었지만, 저거남성의 포위가 20일을 넘어가도 구원군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저거남성에 호응하여 성문을 연다. 저거남성은 단업을 건강공(建康公)으로 추대하여 <span class="pops" id="POPS8065_146">지도</span>자로 삼았고, 저거몽손도 잔존 세력을 이끌고 단업에게 합류한다. 이로써, 또 하나의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 한족, 흉노족의 연합 정권(?)은 흔히 북량이라 불린다.<br><br>다음으로 이어진 반란은 아주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양 정권의 <span class="pops" id="POPS25946_82">수도</span> 고장(姑臧)에서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이다.<br><br>당시 고장에는 곽논(郭<span style="FONT-FAMILY: 바탕">黁)</span>이라는 술사가 있었다. 곽논은 천문을 잘 보고 술수(術數)에 뛰어나서 고장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이 무렵에 왕상(王詳)이라는 사람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장에는 동원과 서원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었는데, 반란군은 이 가운데 동원을 점거하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왕상은 죽었지만 고장의 시민들이 곽논을 존경했기 때문에 이 반란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아서 세력이 급격하게 커졌다.<br><br>당시 여광은 여찬을 단업 토벌을 위해 북쪽으로 파견해 놓은 상태였는데,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단업 토벌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광에게 소환된 여찬은 즉시 귀환하였는데, 곽논의 명성은 여찬의 부장들에게까지 미쳐서 일부 군대가 곽논에 호응할 정도였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광이 전쟁을 전적으로 믿고 맡길 정도로 여찬은 뛰어난 인재였다. 여찬은 고장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곽논을 격파하고 고장 내부로 진입하여 곽논과 대치를 시작한다.<br><br>수도에서까지 반란이 일어날 지경이니 지방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평(西平)에서는 곽논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저족 양궤(楊軌)가 맹주로 추대되었고, 곽논을 돕기 위해 독발오고도 원군을 파견하였다. 8월에 시작된&nbsp;한 도시 두 성채 사이의 대치는 수 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398년 2월에는 양궤가 고장 북부를 장악하고&nbsp;곽논을 지원하는 한편&nbsp;독발오고의 원군도 추가로 가세하였다.<br><br>한편, 여찬의 압박에서 벗어난 단업은 곧 저거몽손을 파견하여 주천 서쪽의 서역 방면을 경략하였고, 뒤이어 장액의 여홍(呂弘)을 공격하였다. 여홍은 장액을 버리고 고장으로 향했고 여광은 여찬을 파견해서 여홍을 맞이하게 하였다. 여홍의 군세는 약 1만. 여찬과 여홍의 군세가 합쳐지면 여광군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므로 양궤·곽논 등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이에 양궤와 독발이녹고(禿髮利鹿孤)가 여찬의 진로를 막고 전투를 벌였는데, 여찬은 이들을 격파해 버렸다. 그 동안은 성채를 중심으로 대치할 수 있었지만, 결전을 치르려 하다가 격파를 당해 버렸으니 더 이상 성채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br><br>양궤는 패잔병을 이끌고 염천(廉川)의 왕걸기(王乞基)에게 도주하였고, 곽논도 도망쳐서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항복한다. 이로써 고장의 여광은 간신히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나라는 이미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지만.<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12/22/e0042222_4afade6c998ce.jpg" width="500" height="490.21143304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12/22/e0042222_4afade6c998ce.jpg');" /></div><br>※ 398년 초 양주의 상황<br></span></p><br/><br/>tag : <a href="/tag/5호16국" rel="tag">5호16국</a>,&nbsp;<a href="/tag/후량" rel="tag">후량</a>,&nbsp;<a href="/tag/독발부" rel="tag">독발부</a>,&nbsp;<a href="/tag/북량" rel="tag">북량</a>,&nbsp;<a href="/tag/남량" rel="tag">남량</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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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1 Nov 2009 15:56:4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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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아놔. 넘버링 미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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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망양 연재를 다시 시작한지 1달이 다되가도록 모르고 있던 실수를 오늘에야 발견했다.<br><br>연재를 잠시 중단한 것이 12편이었는데, 다시 시작할 때도 12편으로 시작했다는.....<br><br>아놔. &gt;.,&lt;<br><br><br>어느새 연재가 19편이나 되었군화.<br><br>이런 연재 속도<span class="pops" id="POPS18057_475">라면</span> 이번에는 30편으로도 어림없을 것 같다능.<br><br>ㅠㅠ<br/><br/>tag : <a href="/tag/5호16국" rel="tag">5호16국</a>,&nbsp;<a href="/tag/잡담" rel="tag">잡담</a>,&nbsp;<a href="/tag/실수" rel="tag">실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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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9 Nov 2009 06:53:2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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