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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知不知尙矣 不知知病矣</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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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고古 촉국蜀國 청동가면</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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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2 Nov 2009 16:42:0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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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知不知尙矣 不知知病矣</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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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고古 촉국蜀國 청동가면</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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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모택동毛澤東 - <청평월淸平月 육반산六盤山>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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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FONT-SIZE: 130%"><strong>&lt;청평월淸平月 육반산六盤山&gt;</strong><br><br>모택동毛澤東 <br><br>1935년 10월 작.&nbsp;1957년《시간詩刊》1월호 재.&nbsp; <br><br><br><br>天高雲淡, 望斷南飛雁.&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천고운담, 망단남비안. <br><br>不到長城非好漢, 屈指行程二萬.&nbsp; 불도장성비호한, 굴지행정이만.<br><br>六盤山上高峯, 紅旗漫捲西風.&nbsp;&nbsp;&nbsp;&nbsp; 육반산상고봉, 홍기만권서풍. <br><br>今日長纓在手, 何時縛住蒼龍?&nbsp;&nbsp;&nbsp;&nbsp; 금일장영재수, 하시박주창룡?<br><br><br><br>하늘은 높고 구름은 희미한데, 남으로 날던 기러기 보이지 않네. <br><br>만리장성 못 오르면 사나이가 아닌데,&nbsp;손꼽아 헤아리니 행군길은 이만리. <br><br>육반산 높은 봉우리에, 홍군의 깃발 서풍에 휘감기네. <br><br>지금 손에 든 긴 끈으로, 언제나 창용을 묶을 수 있을꺼나?<br><br><br><br>六盤山육반산: 오드로스 안쪽의 영하회족자치구의 남쪽에 있는 산. 서안(장안)의 서북쪽에 있다. <br><br>雁안: 기러기. 민중을 지칭하는 말.<br><br>長城장성: 만리장성. 대장정의 결과를 지칭하는 말.<br><br>蒼龍창용: 장개석을 지칭하는 말.<br></span></p><br/><br/>tag : <a href="/tag/모택동" rel="tag">모택동</a>,&nbsp;<a href="/tag/시" rel="tag">시</a>,&nbsp;<a href="/tag/번역" rel="tag">번역</a>,&nbsp;<a href="/tag/장개석" rel="tag">장개석</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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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명문(名文) 역주</category>
		<category>모택동</category>
		<category>시</category>
		<category>번역</category>
		<category>장개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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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08:54:08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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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판옥선에 대한 궁금증.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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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title="" href="http://history21.egloos.com/2476517"><span style="FONT-SIZE: 130%">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43)-이순신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span></a><br><br><span style="FONT-SIZE: 130%">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무작정 트랙백을 했습니다. <br><br><br>판옥선에서&nbsp;노를 젓는 사람은, 서양의 갤리선처럼 서로 보조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하던군요. 아무나 데려다 놓아도 당장 전선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더군요. 아니면 어느 정도 훈련을 해야만 했던 것인가요?<br><br><br>실제로 그러했다면 위급시에&nbsp;병종의 운용이 좀 더 자유로웠을테고, 실제로 수군이 노를 잡은&nbsp;사례가 있었나요? 우리나라 고유의 기술이었는지도 의문이 듭니다. 그 기원은&nbsp;어디에부터(어느시기) 시작한 것인가요?</span><br/><br/>tag : <a href="/tag/이순신" rel="tag">이순신</a>,&nbsp;<a href="/tag/판옥선" rel="tag">판옥선</a>,&nbsp;<a href="/tag/임진왜란" rel="tag">임진왜란</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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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한국사(韓國史)</category>
		<category>이순신</category>
		<category>판옥선</category>
		<category>임진왜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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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16:52:42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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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南齊書남제서》 결문의 미스테리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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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FONT-SIZE: 130%"><strong>《南齊書남제서》 결문의 미스테리2</strong><br><br><br></span><a href="http://tinis74.egloos.com/975593" target="_blank"><span style="FONT-SIZE: 130%">《南齊書남제서》 결문의 미스테리1<br><br></span></a><span style="FONT-SIZE: 130%">&nbsp;&nbsp; 이전의 글에서는 《남제서 백제전》이 사라진 시기를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멸실된 내용을 복원해 보려 합니다. 전에 같이 쓰려고 했지만, 혹시 발견하지 못한 사료가 있을 것 같아서 포스팅을 미루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새로운 사료를 더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라진 글자수는 총 324자인데, 여러 서적에서 찾아보니 200여자를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span></p><p><span style="FONT-SIZE: 130%">&nbsp;&nbsp; 복원된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문헌의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 먼저 살펴 보도록 하지요. 온갖 추측이 난무하여, 해괴하고 황당한 소리들이 굴러다니고 있으니까요.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아래는 쿠투넷에서 가져옴.&nbsp;&nbsp; <br>--------------------------------<br>* 고의로 15줄을 삭제하여 은폐하다.<br>--------------------------------<br>아래 내용을 보면 15줄이 삭제되어 있는데 <br>중국 25사중 이렇게 본문중간에 ‘차하결문(此下缺文)’이라 표시하고 삭제된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이것은 1739년 판본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이것을 임의 삭제가 아니라 출판, 편집과정의 실수라느니 등등 <br>매식자들이 지랄, 발광을 하며 비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백제는 일제 식민미치광이 새끼(^.^)들이 조작한 반도 식민사관대로<br>한반도 서남부에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데 <br>그 땅보다 무려 20배나 더 큰 중국대륙 심장부를 백제가 통치하고 있었다고 하면 큰일나기 때문이다. (밥줄 떨어질까 두려워....)</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그러나 어쩌랴 연대별 판본을 비교해 보니 조작이 두눈에 선히 보이는 것을...</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br>* 고의로 삭제한 것이 맞다.<br>------------------------<br>아래를 보라... 삭제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백제국(百濟國) 부분에 </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 1637년 판본은 해당부분을 가리고 등사를 하였고 (또는 파내어 버리고)<br>- 1739년 판본은 차하결문(此下缺文)이라 표시하여 은폐하였으며<br>- 1874년 판본은 궐하(闕下)라 표시하여 삭제하였다.</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원래 ‘此下缺文, 闕下’ 라는 단어는 없었는데 나중에 족(?)팔리니까(^.^) 살짝 삽입하여 은폐한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br>* 1637년 판본 남제서<br>-------------------<br>구리넷 회원님중 이용하님이 고려대를 방문하여 복사를 해옵니다.<br>- 출처 : 고려대 중앙박물관(대학원) 한적실</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아래 내용을 보면 저것들이 15줄을 고의로 은폐하고 등사한 것이 눈에 보이시지요.</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0000">남아있는 남제서 내용에 백제 동성대왕의 통치강역이 중국 동해안 전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앞부분에 있는 15줄에는 도대체 무슨 역사가 들어 있었을까요.</span></p><p><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COLOR: #cc0000">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백제역사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br>서토가 두려워 삭제한 15줄 이제 그것을 추적해 봅니다.<br></span><br><br><strong>1. 324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strong> </span></p><p><span style="FONT-SIZE: 130%">- “백납본《남제서》”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북송 시기에 증공이 교정(1063-1067년 사이)하여 판각한 판본이 있었지만, 금나라의 침략으로 대부분 사라져 버립니다. 남송 시기에 촉지방에서 예전에&nbsp;학관에 나누어 주었던 것을 다시 수집하여 판각합니다.&nbsp;이를 “촉각대자본”이라고 합니다.&nbsp;이때 수집한 《남제서》의&nbsp; &lt;고려전&gt; 뒷부분과 &lt;백제전&gt; 앞부분이&nbsp;없었던 것입니다.(증공이 교정할 때는 탈문이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1편에서 자세히 써 놓았습니다.)</span></p><p><span style="FONT-SIZE: 130%">고서의 서지사항을 말할 때는 보통 “-행 -자”라고 말합니다. 백납본(촉각대자본)은 “9행 18자”입니다. 행이란 세로줄을 말하는 것이고, “18”자는 1행(세로줄)에 18개의 글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한 페이지의 글자수는 162자가 있는 것입니다. 사라진 것은 두 페이지로 모두 324자가 됩니다.&nbsp;즉 남송시대에 수집한 《남제서》에는 1장이 뜯겨져 있던 것입니다.&nbsp;</span></p><p><span style="FONT-SIZE: 13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8db7065.gif" width="409" height="50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8db7065.gif');"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9e55843.gif" width="411" height="45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9e55843.gif');"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a0f04c1.gif" width="413" height="50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a0f04c1.gif');"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a655bb2.gif" width="412" height="51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a655bb2.gif');" /></div><span style="COLOR: #3333ff">백납본《남제서》(촉각대자본) - 이것은 전에 고람거사님이 복사해 온 것이다.</span> </span></p><p><br><strong><span style="FONT-SIZE: 130%">2. 왜 고의로 삭제했다는 말이 떠도는가?</span></strong></p><p><span style="FONT-SIZE: 130%">- 제가 알기로 이 괴설의 주인공은 임승국으로 알고 있는데, &lt;백납본&gt;을 보지 못하고 후대의 판본만을 봤기 때문입니다.&nbsp;국회에서도 임승국은 청나라 시대인 1739년에 판각한 &lt;무영전본&gt;을 말하고 있습니다. &lt;백납본&gt;은 “9행 18자”이며, &lt;전본&gt;은 “10행 21자”입니다. 후대의 판본을 보니 한 장이 뜯겨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으며, 고의로 삭제되었을 거라고 상상하게 된 것입니다. </span></p><p><span style="FONT-SIZE: 130%">여기에 상상력을 더하여 고의로 삭제된 이유가, 백제의 영화를&nbsp;중국인들이 시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임승국이나 그 부류들은 이런 상상에다 더욱 괴설을 덧붙이게 되면서, 우습게도 학자들이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며, 더러운 중국인들을 사대모화한다고 합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669de86.gif" width="500" height="380.71428571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f669de86.gif');" /></div></span></p><p><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COLOR: #3333ff">쿠투넷에서 가져옴. (판본의 명칭을 몰라서 1793본이라고 하고 있다)&nbsp; <br>- 판심에 “건륭사년(1739년)교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무영전본”이라고 부릅니다. 간략히 “전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nbsp;&nbsp; <br></span></span></p><p><br><br><span style="FONT-SIZE: 130%"><strong>3. 25사 중에서 유일하게《남제서 백제전》만 삭제된 것인가?</strong> </span></p><p><span style="FONT-SIZE: 130%">- 거창하게 25사를 모두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아래는 《남제서》의 제44권인 “심문계전沈文季傳”입니다. 대략 300여자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저렇게 사라진 부분은 판본마다 다르고, 사라졌다는 표시도 없는 것이 25사에는 굉장히 많습니다.&nbsp;역대의 수많은 학자들은 다른 서적에서 인용된 것과 비교하여 하나하나 복원시켜논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적게는 수자에서 수백자까지 탈락된 것을 보충해 놓았습니다. 알지 못한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br><br>구투넷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이것을 찾아보겠다고 도서관에 가서 복사를 해오고 하는데,&nbsp;판본을 이름을 알지 못해서 "~년본"이라고 하고 있군요.&nbsp;복사해온 것은 "급고각본"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nbsp;그것이 모두 쓸데없다는 것을 알까요?&nbsp;다음편에서는 사라진 부분을 복원해보도록 하겠습니다.<br></span></p><p><span style="FONT-SIZE: 13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e9588b60.jpg" width="338" height="53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0/78/e0016778_4b056e9588b60.jpg');" /></div></span><span style="FONT-SIZE: 130%; COLOR: #3333ff">《남제서》&lt;심문계전沈文季傳&gt; - 청 무영전본 《남제서》(동문서국 영인본)<br>(다음 페이지는 생략한다)<br></span></p><br/><br/>tag : <a href="/tag/남제서" rel="tag">남제서</a>,&nbsp;<a href="/tag/대륙백제" rel="tag">대륙백제</a>,&nbsp;<a href="/tag/임승국" rel="tag">임승국</a>,&nbsp;<a href="/tag/쿠투넷" rel="tag">쿠투넷</a>,&nbsp;<a href="/tag/백납본" rel="tag">백납본</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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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고증학(考證學)</category>
		<category>남제서</category>
		<category>대륙백제</category>
		<category>임승국</category>
		<category>쿠투넷</category>
		<category>백납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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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16:20:18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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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양계초梁啟超 - 위서僞書를 감별하는 방법(서적의 전수에 의거하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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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FONT-SIZE: 130%"><strong>위서僞書를 감별하는 방법(서적의 전수에 의거하여)</strong></span></p><p><span style="FONT-SIZE: 130%">«고서의 진위와 그 년대(古書真僞及其年代)» <br>제4장 위서변별과 년대고증의 방법(辨別僞書及考證年代的方法) <br>양계초梁啟超(1873-1929)</span></p><p><span style="FONT-SIZE: 130%">(양계초는 위서 감별의 방법을 크게 두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서적의 전수에 의거하여",&nbsp; 둘째 "문장의 내용에 의거하여",&nbsp; 현재의&nbsp;의미로 본다면 1번은 “문헌의 외적 비판”, 2번은 "문헌의 내적비판"으로 볼 수 있다.)&nbsp;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strong>1. 서적의 전수에 의거하여</strong><br><br>（1）옛 목록서에 책이름이 보이지 않을 때, 위조로 판정하고 또는 위조의 가능성을 의심한다. 從舊《志》不著錄, 而定其僞或可疑.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2）앞 시대의 목록서에 책이름이 보이지만, 뒷 시대의 목록서에 보이지 않을 때, 위조로 판정하고 또는 위조의 가능성을 의심한다. 從前志著錄, 後志已逸, 而定其僞或可疑.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3）목록서의 보이는 권수와 편수가 서적과 서로 맞지 않을 경우, 위조로 판정하고 또는 위조의 가능성을 의심한다. 從今本和舊志說的卷數․篇數不同, 而定其僞或可疑.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4）목록서에 보이는 저자의 성명을 후대 사람이 마음대로 덧붙여서, 위조된 성명이 보일때는 분명히 위조한 것이다. 從舊志無著者姓名而定後人隨便附上去的姓名是僞. <br>(원동중 안함로의 삼성기)</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5）목록서나 주석한 사람이 이미 명확하게 위서라고 증명하였다면 그 학설을 따른다. 從舊志或注家已明言是僞書而信其說. <br>(후대에 다시 살펴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기록의 년대가 높을수록 자료 선택의 폭이 넓었을 것이고(증거를 남지지 않은 경우), 고증 방법이 치밀한 사람이었다면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우리나라는 고대에 목록학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의 방법을 적용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후대에 재편집한 사서의 주석이나, 자구를 대조하여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삼성기》는 한가지에 해당한다. 유일한 기록을 읽지 못하셔서...)</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6）후대 사람이 어떤 서적의 출현이 어떤 시기에 나왔다고 했을 때, 그 시기의 사람들이 모두 그 서적을 본 경우가 없다면, 그 서적은 위조한 것으로 확실하게 판정[斷定]지을 수 있다. 後人說某書出現於某時, 而那時人並未看見那書, 從這上可斷定那書是僞. <br>(양계초는 다른 곳에서는 “판정定”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단정斷定”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서, 이러한 경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번역도 문장의 의미에 살리려고 의역했다.<br>서적이 수백이나 천년이 넘게 전수되었다면, 작자와 서적의 이름이 후대 사람들에게 거론되거나 주석으로도 이용된다. 단 한줄의 기록도 없다면 위조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용이 제한적인 자료의 경우는 제외시켜야 한다. <br>단기고사나 환단고기는 천년 또는 수백년이 넘게 전수되었는데, 관련된 기록 자체가 없다)</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7）서적이 처음 출현할 때 이미 허다한 문제가 발생했거나, 어떤 사람이 위조를 증명하면 우리들은 당연히 (그 서적을) 믿을 수 없다. 書初出現已發生許多問題, 或有人證明是僞造, 我們當然不能相信. <br>(규원사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는 문제점도 많았고, 위서라고 증명한 사람들도 많았다.)</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8）서적의 내력이 애매하거나 불확실하면 확실하게 위조로 판정한다. 從書的來曆曖昧․不明而定其僞. <br>(단기고사나 환단고기는 문헌의 내력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span></p><br/><br/>tag : <a href="/tag/양계초" rel="tag">양계초</a>,&nbsp;<a href="/tag/위서" rel="tag">위서</a>,&nbsp;<a href="/tag/고증학" rel="tag">고증학</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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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변위학(辨僞學)</category>
		<category>양계초</category>
		<category>위서</category>
		<category>고증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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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02:56:53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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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양계초梁啟超 - 위서僞書를 만드는 동기(비의도적인 경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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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trong><span style="FONT-SIZE: 130%">위서僞書를 만드는 동기(비의도적인 경우)</span></strong></p><p><span style="FONT-SIZE: 130%">«고서의 진위와 그 년대(古書真僞及其年代)» <br>&nbsp;제2장 위서의 종류와 작위의 내력(僞書的種類及作僞的來曆)&nbsp;<br>양계초梁啟超(1873-1929)</span></p><p><span style="FONT-SIZE: 130%">(양계초는 모두 9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모두 문헌의 가치를 추락시키는 것은 아니다. 위조된 부분을 제거하여 문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거나, 편찬 시대. 작자를 재고하여 문헌의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는 사례들이 많다. 원서에서는 이 9가지 사례를 "1-4" "5-9" 두 부류로 나누고 있는데,&nbsp;여기에서는 하나로 합쳤다.)</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1. 서적의&nbsp;나오는 인물을 창작자로 보는 경우. 因篇中有某人名而誤題. <br>(황제의《황제내경》- 후대에(한나라) 편찬된 것임)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2. 서적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행사나 언론이 많이 기술되어, 그를 창작자로 보는 경우. 因書中多述某人行事或言論而得名. <br>(증자《효경》- 후대에(한나라) 편찬된 것임)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3. 작자를 알지 못할 때, 잘못된 추측으로 작자를 내세우는 경우. 不得主名而臆推妄題. <br>(하나라 시조 우의《산해경》)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4. 본래 작자의 이름이 있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 잘못된 작자를 내세우는 경우. 本有主名, 不察而妄題. <br>(후한 원강의《월절서》를 자공이 편찬했다고 오해. 범엽의《후한서》 “8지”는 사마표의 “8지”에서 취한 것인데, 범엽이 편찬한 것으로 오해)</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5. 여러 서적의 내용을 단지 하나의 서적으로 오인하는 경우. 注解與正文同列, 混入正文. <br>(관중《관자》, 장주《장자》 - 작자 본인과 제자, 다른 학파의 저작이 혼합되어 있음)</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6. 주석과 본문을 혼동하여, 주석이 본문으로 바뀐 경우. 注解與正文同列, 混入正文. <br>(《노자》《논어》《삼국지》 - 주석이 본문으로 바뀐 문장이 있음)</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7. 서적을 바칠 때 (내용을 늘려서) 편폭을 늘리는 경우. 獻書時求增篇幅. <br>(한비《한비자》- 다른 서적에서 취하여 늘린 부분이 있음)</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8. 후대 사람이 이어서 창작한 경우. 後人續作. <br>(사마천《사기》, 공자《춘추》- 무제 사후의 사건이 기록되거나, 공자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음)</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9. 편집하는 사람이 매우 무식하고, 욕심이 많은 경우. 編輯的人無識貪多. <br>(《이태백집》 - 다른 사람의 작품이 편입되어 있음)</span></p><br/><br/>tag : <a href="/tag/위서" rel="tag">위서</a>,&nbsp;<a href="/tag/양계초" rel="tag">양계초</a>,&nbsp;<a href="/tag/고증학" rel="tag">고증학</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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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변위학(辨僞學)</category>
		<category>위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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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Nov 2009 17:07:09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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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양계초梁啟超 - 위서僞書를 만드는 동기(의도적인 경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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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trong><span style="FONT-SIZE: 130%">위서僞書를 만드는 동기(의도적인 경우)</span></strong></p><p><span style="FONT-SIZE: 130%">«고서의 진위와 그 년대(古書真僞及其年代)»&nbsp; <br>제2장 위서의 종류와 작위의 내력(僞書的種類及作僞的來曆)&nbsp;<br>양계초梁啟超(1873-1929)</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1. 과거를 너무나도 사랑하여서. </span><span style="FONT-SIZE: 130%"><strong>탁고托古 <br></strong>&lt;과거를 사랑하는 것은 중국인의 특징 중에 하나로，이것은 위서 발달의 총체적인 원인이었다.("好古"爲中國人特性之一, 此實爲僞書發達之總原因.)&nbsp; <br>--- 양계초《중국근삼백년학술사》.<br>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도 고대의 역사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gt;</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2. 고서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칭찬이나 상을 바라고. </span><span style="FONT-SIZE: 130%"><strong>요상邀賞 <br></strong>(동진의 매색은 고문상서를 위조해서 바치고 군태수의 관직과 상을 받음.<br>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넓고 큰 것만을 기재.)</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3.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span><span style="FONT-SIZE: 130%"><strong>쟁승爭勝<br></strong>(왕숙은 정현의 설을 물리치고 자신의 설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공자가어를 만듬. <br>임승국의 독단 위조 - </span><a href="http://tinis74.egloos.com/1649560"><span style="FONT-SIZE: 130%">http://tinis74.egloos.com/1649560</span></a><span style="FONT-SIZE: 130%">)</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4. (자기학파나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span><span style="FONT-SIZE: 130%"><strong>현명炫名<br></strong>(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가 이에 해당하며, 이 유파는 위조와 비방을 전문으로 하는 학파다.)</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5.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위해서. </span><span style="FONT-SIZE: 130%"><strong>무선誣善<br></strong>(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의 작자와 추종하는 무리들. 김부식이나 이병도등을 근거없이 비방함. 일제의 앞잡이, 민족의 배신자, 유교주의자로 춘추필법을 계승. 사대모화.<br>춘추필법 - </span><a href="http://tinis74.egloos.com/1880576"><span style="FONT-SIZE: 130%">http://tinis74.egloos.com/1880576</span></a><span style="FONT-SIZE: 130%">&nbsp;&nbsp; </span><a href="http://tinis74.egloos.com/1876052"><span style="FONT-SIZE: 130%">http://tinis74.egloos.com/1876052</span></a><span style="FONT-SIZE: 130%">)</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6. 아름다운 칭송을 흠모하여 도둑질. </span><span style="FONT-SIZE: 130%"><strong>약미掠美 <br></strong>(정초의 통지 20략 중에서 15략은 통전을 그대로 전제하고, 서문에서는 자신이 창작했다고 함.<br>규원사화를 흠모하여 그 내용을 수용하고 증가시켜 단기고사와 환단고기를 만들어 냄)<br></span></p><br/><br/>tag : <a href="/tag/위서" rel="tag">위서</a>,&nbsp;<a href="/tag/환단고기" rel="tag">환단고기</a>,&nbsp;<a href="/tag/단기고사" rel="tag">단기고사</a>,&nbsp;<a href="/tag/규원사화" rel="tag">규원사화</a>,&nbsp;<a href="/tag/양계초" rel="tag">양계초</a>,&nbsp;<a href="/tag/고증학" rel="tag">고증학</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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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변위학(辨僞學)</category>
		<category>위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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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규원사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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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Nov 2009 05:50:00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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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양계초梁啟超 - 위서僞書의 종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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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FONT-SIZE: 130%"><br><strong>위서僞書의 종류&nbsp;<br></strong><br>&nbsp;«고서의 진위와 그 년대(古書真僞及其年代)»&nbsp;&nbsp;<br>제2장 위서의 종류와 작위의 내력(僞書的種類及作僞的來曆)&nbsp;<br>양계초梁啟超(1873-1929)</span></p><p><span style="FONT-SIZE: 130%"><br>1. 서적의 모든 부분을 위조. 全部僞<br></span></p><p><span style="FONT-SIZE: 130%">2. 서적의 일부분을 위조. 一部分僞<br></span></p><p><span style="FONT-SIZE: 130%"><br>3. 본래 서적이 없었으나, 책이름을 만들어서 위조. 本無其書而僞<br></span></p><p><span style="FONT-SIZE: 130%">4. 본래 서적이 있었으나 산실되고, 후대에 그 서적을 본떠서&nbsp;위조. 曾有其書,因逸而僞<br><br><br>5. 서적의 내용은 모두 위조가 아니지만, 책이름을 위조. 內容不盡僞<br></span><span style="FONT-SIZE: 130%"><br></span><span style="FONT-SIZE: 130%">6. 내용과 책이름은 모두 위조가 아니지만, 작자를 위조. 內容及書名皆不僞而人名僞<br><br>7. 서적의&nbsp;내용은 모두 위조가 아니지만, 작자와 책이름을 위조. 內容不盡僞,而書名人名皆僞</span></p><p><span style="FONT-SIZE: 130%"><br>8. 다른 사람이 저술한 내용을 훔쳐서 자신이 창작한 것으로 위조. 盜襲割裂舊書而僞</span></p><p><span style="FONT-SIZE: 130%">9. 위조한 서적의 내용을 집출하여&nbsp;다시 위조. 僞後出僞</span></p><p><span style="FONT-SIZE: 130%">10. 위조한 서적에 내용을 더하여 위조. 僞中益僞</span></p><p><br><br><span style="FONT-SIZE: 130%">&nbsp;&nbsp; “위서僞書”란 기본적으로 <strong>서적의 이름, 작자, 내용등을 위조</strong>한 것을 말한다. 내용이 진실이라도 다른 것이 거짓이라면 위서가 되는 것이다. «황제내경»은 한나라 시대의 저작으로, 그 내용과 가치가 중요시 되지만 황제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작자를 가탁하였으므로 위서가 되는 것이다. 서적의 위조 여부를 판정한 이후에,&nbsp;그 가치와&nbsp;중요성은 별도로 판별하는 것이다.&nbsp;<br></span></p><br/><br/>tag : <a href="/tag/양계초" rel="tag">양계초</a>,&nbsp;<a href="/tag/위서" rel="tag">위서</a>,&nbsp;<a href="/tag/고증학" rel="tag">고증학</a>,&nbsp;<a href="/tag/황제내경" rel="tag">황제내경</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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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변위학(辨僞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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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황제내경</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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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Nov 2009 00:12:59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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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사기삼가주》<맹자전> 역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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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FONT-SIZE: 130%">검은색은 사마천 《사기》의 본문이고, 적색은 “삼가주”, 청색은 추가로 “보충”한 것입니다.<br><br><br></span></p><p><span style="FONT-SIZE: 130%">&nbsp;&nbsp; 太史公曰：「余讀《孟子書》, 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 未嘗不廢書而歎也. 曰：嗟乎, 利誠亂之始也! 夫子罕言利者, 常防其原也. 故曰『放於利而行, 多怨.』 自天子至於庶人, 好利之獘何以異哉!」<br>태사공(사마천)이 말하길: 「내가 《맹자서》를 읽을적에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소?』라고 물은 대목에서, 독서를 멈추고 탄식하지 않은 수 없었다. 아아! 이익[利]은 진실로 혼란의 시초로구나! 부자夫子(공자)가 이익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은 것도 평상시 혼란의 근원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익 에 의지하여 행동하면 원망함이 많다.」고 하였다. 천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폐단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구나!」<br><br><br></span></p><p><span style="FONT-SIZE: 130%; COLOR: #3333ff">【주注】《韓非子. 顯學》:自孔子之死也，有子張之儒，有子思之儒，有孟氏之儒，有漆雕氏之儒，有仲良氏之儒，有孫氏之儒，有樂正氏之儒. 故孔·墨之後，儒分爲八，墨離爲三.<br>한비《한비자. 현학》: 공자의 죽음 이후로 자장, 자사, 맹씨(맹자), 칠조씨, 중량씨, 손씨(순자), 악정씨의 유학儒學이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와 묵자 이후에, 유가는 여덟 개로 나뉘고, 묵가는 셋으로 나뉘었다.</span></p><p><br><strong><span style="FONT-SIZE: 130%">孟軻맹가 (孟子맹자; 372?－289?)</span></strong></p><p><span style="FONT-SIZE: 130%">&nbsp;&nbsp; 孟軻, 騶人也.〔一〕 受業子思之門人.〔二〕 <br>맹가孟軻는 추騶나라 사람이다. 자사子思의 제자에게[門人] 수업을 받으셨다.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ff0000">〔一〕【索隱】軻音苦何反, 又苦賀反. 鄒, 魯地名. 又云「邾」, 邾人徙鄒故也. <br>【색은】가軻의 음은 고苦와 하何의 반절이며, 또한 고苦와 하賀의 반절이다. 추鄒는 노魯나라의 지명이다. 또는「주邾」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주邾나라 사람들이 추鄒로 이주했기 때문이다.<br></span><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COLOR: #3333ff">【주注】《孟子集注》: 騶亦作鄒, 本邾國也. <br>주희《맹자집주》: 추騶는 (다른 판본에) 추鄒라고도 적혀있는데, 본래 주나라邾國이다.</span>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ff0000">【正義】軻字子輿, 爲齊卿. 鄒, 兗州縣. <br>【정의】맹가의 자는 자여子輿이며 제나라의 경이다. 추鄒는 연주兗州의 현이다. <br></span><span style="FONT-SIZE: 130%; COLOR: #3333ff">【주注】《孟子集注》: 趙氏曰:「孟子, 魯公族孟孫之後.」《漢書注》云:「字子車.」一說:「字子輿.」<br>주희《맹자집주》: 조씨가「맹자孟子는 노나라魯 공公의 종족族인 맹손孟孫씨의 후예이다.」라고 하였다. 《한서주》에서 「(맹자의) 자는 자거子車이며, 일설에는 자여子輿이다.」라고 하였다.<br>(조씨는 후한의 조기를 말하는 것으로 《맹자주》를 지었다.)</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COLOR: #ff0000">〔二〕【索隱】王劭以「人」爲衍字, 則以軻親受業孔伋之門也. 今言「門人」者, 乃受業於子思之弟子也. <br>【색은】왕소는 「인人」자를 연자로 여겨서 맹가는 공급의 문하에서 수업받았다. 현재「문인門人」이라는 말은, 곧 자사의 제자에게 수업 받았다는 것이다. <br></span><span style="COLOR: #3333ff">【주注】(사기의 문장은 피동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데, 사기색은에서는 사기의 문장이 피동의 의미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span></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3333ff">【주注】《孟子集注》: 子思, 孔子之孫, 名伋. <br>주희《맹자집주》: 자사子思는 공자孔子의 손자로 이름은 급伋이다.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道旣通, 游事齊宣王, 宣王不能用. 適梁, 梁惠王不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br>(공자의) 학문[道]을 통달한 이후에[旣],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에게 유세하였으나[游事], 선왕은 (맹자를) 등용[用]하지 않았다. 양梁나라로 가시니, 양나라 혜왕은 (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을 찬성하지[果] 아니하고, 실행하기 어려우며[迂遠] 실정과 맞지 않는다는[闊於事情] 취급을 받았다[見以爲].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當是之時, 秦用商君, 富國彊兵; 楚.魏用吳起, 戰勝弱敵; 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 而諸侯東面朝齊. <br>이 당시에 진秦나라는 상군商君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초楚나라와 위魏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약한 적과 싸워 이겼으며, 제齊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은 손자孫子와 전기田忌의 무리를 등용하니, 동쪽의 제후들이 제나라에 조공하였다.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天下方務於合從. 連衡, 以攻伐爲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 所如者不合. <br>천하는 당시에[方] 합종合從과 연횡連衡에 힘쓰니[務] 정벌하는 것을 현명함으로 삼았는데, 맹가孟軻는 당唐. 우虞(요.순)와 삼대의 덕을 역설하니[述], 맹자의 유세는[所如者] (어느 곳에서도) 화합되지 못하였다.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退而與萬章之徒〔三〕序《詩》. 《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其後有騶子之屬. <br>(그리하여 맹자께서는 정치에서) 물러나와 만장萬章의 무리와 함께 《시경[詩]》과《서경[書]》를 논술[序]하고, 중니(공자)의 뜻을 기술[述]하여《맹자孟子》 7편을 지으셨다. 그 이후에 추자의 무리[屬]가 있었다. </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ff0000">〔三〕【索隱】《孟子》有&lt;萬章&gt;.&lt;公明高&gt;等, 蓋並軻之門人也. 萬, 姓; 章, 名. <br>【색은】《맹자》에는 &lt;만장萬章&gt;․&lt;공명고公明高&gt;등의 편이 있는데 이른바 모두 맹가의 문인(제자)이다. 만萬은 성이고 장章은 이름이다. <br></span><span style="FONT-SIZE: 130%; COLOR: #3333ff">【주注】《史記會注考證》：「公明高非孟子門人, 注謬.」<br>다카가와 가메타로《사기회주고증》:「공명고公明高는 맹자의 제자[門人]가 아닌데, (사기색은의) 주석이 잘못된 것이다.」<br>(공명고公明高는 증자曾子의 제자이다.)</span></p><p><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3333ff">【주注】《孟子集注》: 趙氏曰:「凡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韓子曰:「孟軻之書, 非軻自著. 軻旣沒, 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br>주희《맹자집주》: 조씨가 말하길「(맹자는) 모두 261장이며, 글자수는 34,685자다.」한자가 말하길「맹가의 책은 맹가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다. 맹가가 죽은 후에, 그의 제자인[徒] 만장과 공손축이 맹가의 말을 기록했을 뿐이다.」</span></p><br/><br/>tag : <a href="/tag/사기" rel="tag">사기</a>,&nbsp;<a href="/tag/사마천" rel="tag">사마천</a>,&nbsp;<a href="/tag/맹자" rel="tag">맹자</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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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중국사(中國史)</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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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맹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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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10:14:55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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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전국시기 진나라의 “주문”사용과 육국의 “고문”사용설> - 왕국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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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nbsp;&nbsp; * 이 글은 왕국유가 진나라 이전의 문자에 대해서 고찰한 글인데, 원문에서는 문단을 나누지 않았다. 번역문에서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인 것은 내 임의대로 한 것이다. 결론 부분의&nbsp;번역문에 모호한 부분이 있는데, 천박한 학문으로 인해 빗어진 오역일 것이다.&nbsp; </p><p><br>&nbsp;&nbsp;<strong> &lt;전국시기 진나라의 “주문”사용과 육국의 “고문”사용설&gt;(戰國時秦用“籒文”六國用“古文”說)</strong></p><p>&nbsp;&nbsp; --- 왕국유王國維《관당집림觀堂集林》제7권 예림藝林7.</p><p>&nbsp;&nbsp; <strong>들어가는 말<br></strong>&nbsp;&nbsp; 나는 과거에 《사주편소증》의 &lt;서문&gt;을 지으면서 전국시대에 진秦나라가 “주문籒文”을 사용하고, 육국六國이 “고문古文”을 사용했음을 의심하였는데, 진나라 시기의 옛 기물과 유문이 그 증거였다. 이후에 한나라 사람의 글에서도 반복되어, 이 설을 더욱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nbsp; </p><p><br>&nbsp;&nbsp; <strong>1. 주문籒文(대전과 소전)<br></strong>&nbsp;&nbsp; 반맹견(반고-《한서》의 저자)은 「《창힐》․《원력》․《박학》 3편의 문자는 많은 부분을 《사주》편에서 인용하였는데, 글자의 자체가 매우 다르니 (이것이) 이른바 “진전秦篆”이다.」라고 하였다.</p><p>&nbsp;&nbsp; 허숙중(허신-《설문해자》의 저자)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으로 천하를 병합하자, 승상 이사는 진나라의 문자를 통일하였으며, 진나라의 문자와 합치되지 않는 것은 (모두) 버렸다. 이사가《창힐편》을 지었고, 중차부령 조고가 《원력편》을 짓고, 태사령 호무경이《박학편》을 지으니, 모두 《사주》의 “대전大篆”을 취득하고, 잘못됨을 살펴 고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소전小篆”이다.」라고 하였다.</p><p>&nbsp;&nbsp; 이것은 진나라의 “소전小篆”은 본래 “대전大篆”에서 나온 것이며, 《창힐》삼편은 “대전大篆”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이전에 고친 것을 살피지 않고, 소위 진나라 문자인 “주문籒文”이라고 한 것이다.&nbsp; </p><p><br>&nbsp;&nbsp; <strong>2. 고문古文(육국문자)<br></strong>&nbsp;&nbsp; 사마자장은「진나라가 “고문古文”을 없애버렸다.」고 하였으며, 양자운(양웅)은「진나라가 “고문古文”을 잔멸시켰다.」고 하였으며, 허숙중(허신)은 「“고문古文”은 진나라가 끊어버렸다.」라고 하였다.</p><p>&nbsp;&nbsp; (내가) 생각하건대 진나라가 “고문古文”을 멸실시킨 것은 역사에 자세한 기록이 없다. 오직 《시경》과 《서경》을 금지한 두가지 사실만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br>육예(육경)의 서적은 제나라와 노나라에서 시행되었으며, (“고문古文”은) 조나라․위나라․진나라에서 유포된 것이 적었으며, 《사주편》은 여전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지 않았다. 그(육경) 서체는 모두 “동방문자”의 서체다. </p><p>&nbsp;&nbsp; 한나라 사람들은 그 육예(육경)에 사용된 서체를 “고문古文”이라고 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파기한 문자와 태운 책이 모두 이 문자로 (기록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육국문자”로 “고문古文”(이라고 한나라 사람들이 부른 것)이다. </p><p><br>&nbsp;&nbsp; <strong>3. 결론<br></strong>&nbsp;&nbsp; “진서팔체”를 살펴보면 “대전大篆”은 있으나 “고문古文”은 없으니, 공자의 벽중서(공자의 집 벽에서 나온 책)와 《춘추좌씨전》은 동토의 서적으로, “고문古文”을 사용하고 “대전大篆”은 사용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문古文”과 “주문籒文”은 전국 시대에 동쪽과 서쪽 두 땅의 문자로 이름이 다르며, 그 근원은 모두 “은주고문”에서 나온 것이다. </p><p>&nbsp;&nbsp; 진나라는 (주나라의) 옛 땅인 종주宗周의 거주하였으니, 그 문자는 풍豐과 호鎬의 잔재이다. 그러므로 “주문籒文”과 “주문籒文”에서 나온 “전문篆文”은 “은주고문”을 제거하고 “동방문자”와 비교하여도, 즉 한나라 시대의 “고문古文”과 가까운 것이다.(이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아마 내가 잘못 번역했기 때문인 것 같다.) </p><p>&nbsp;&nbsp;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후부터, 백전의 위엄으로 자리하고, 엄격한 법을 시행하여 문자는 통일되니, 무릇 “육국문자”는 고적에서만 존재하였으며, 이미 분소되고 잔멸되어서 민간에서 사용되는 문자는 진나라의 문자가 아니었다. </p><p>&nbsp;&nbsp; 세상에 전해지는 진나라 진시황 26년 소와 많이 새겼던 이세 원년 소인 “권량”등을 살펴보면, 비록 나라가 1-2년 중에 멸망하여 진나라의 법이 시행된 것이 (엄격하였다고) 하더라도, 당대에 동일한 문자를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킨 이후부터 초나라와 한나라의 중간의 10년간에 이르기까지 “육국문자”는 끊어지고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다.</p><p>&nbsp;&nbsp; 한나라 사람들은 육예의 서적을 모두 이 종류의 문자로 사용했으며, 또한 그 문자는 당대에 이미 폐지됐으므로 “고문古文”이라고 했던&nbsp; 것이다. 이러한 말을 계승되어 온 것은 이미 오래되었는데, 만약 여섯나라의 “고문古文”을 “은주고문”이라 한다면, “주문籒․전문篆”은 모두 그 이후에 있었으며, 허숙중이 《설문해자》&lt;서문&gt;에서 말한 것도 이와 같으니, 그 이름인 (고문古文의 뜻을) 따라서 그 실제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p><p>&nbsp;&nbsp;&nbsp; 【원문】<br>&nbsp;&nbsp; 余前作《史籒篇疏證》&lt;序&gt;, 疑戰國時秦用“籒文”, 六國用“古文”, 並以秦時古器․遺文證之. 後反覆漢人書, 益知/此說之不可易也. </p><p>&nbsp;&nbsp; 1.<br>&nbsp;&nbsp; 班孟堅言：「《蒼頡》․《爰歷》․《博學》三篇文字多取諸《史籒》篇, 而字體復頗異, 所謂“秦篆”者也. 」許叔重言：「秦始皇帝初兼天下, 丞相李斯乃奏同文字, 罷其不與秦文合者. 斯作《蒼頡篇》, 中車府令趙高作《爰歷篇》, 太史令胡毋敬作《博學篇》, 皆取史籒“大篆”, 或頗省改, 所謂“小篆”者也. 」是秦之“小篆”本出“大篆”, 而《蒼頡》三篇未出“大篆”, 未省改以前, 所謂秦文即“籒文”也. </p><p>&nbsp;&nbsp; 2.<br>&nbsp;&nbsp; 司馬子長曰：「秦撥去“古文”.」揚子雲曰：「秦剗滅“古文”.」許叔重曰：「“古文”由秦絕. 」<br>案：秦滅“古文”, 史無明文. 有之, 惟一文字與焚《詩》․《書》二事. 六藝之書行於齊․魯, 爰及趙․魏, 而罕流布於秦, 猶《史籒篇》之不行於東方諸國. 其書皆以“東方文字”書之. 漢人以其用以書六藝, 謂之“古文”. 而秦人所罷之文與焚之書, 皆此種文字, 是“六國文字”即“古文”也. </p><p>&nbsp;&nbsp; 3.<br>&nbsp;&nbsp; 觀“秦書八體”中有“大篆”無“古文”, 而孔子《壁中書》與《春秋左氏傳》, 凡東土之書, 用“古文”不用“大篆”, 是可識矣. 故“古文”․“籒文”者, 乃戰國時東․西二土文字之異名, 其源皆出於“殷周古文”. 而秦居宗周故地, 其文字猶有豐․鎬之遺, 故“籒文”與/自“籒文”出之“篆文”, 其去“殷周古文”反較“東方文字”, 即漢世所謂“古文”. 爲近. <br>自秦滅六國, 席百戰之威, 行嚴峻之法, 以同一文字, 凡“六國文字”之存於古籍者, 已焚燒剗滅, 而民間日用文字又非秦文不得用. 觀傳世秦“權量”等, 始皇廿六年詔後, 多刻二世元年詔, 雖亡國一․二年中, 而秦法之行如此, 則當日同文字之效可知矣. 故自秦滅六國以至楚․漢之際十餘年間, “六國文字”遂遏而不行. <br>漢人以六藝之書皆/用此種文字, 又其文字爲當日所已廢, 故謂之“古文”. 此語承用既久, 遂若六國之“古文”即“殷周古文”, 而“籒․篆”皆在其後, 如許叔重《說文 序》所云者, 蓋循名而失其實矣. <br></p><p><br>&nbsp;&nbsp;&nbsp; 【요약】<br>&nbsp;&nbsp; 옛 전적에 보이는 “古文고문”이란 말은 본래 전국시대의 “여섯나라가 사용하던 문자(6국 문자)”라는 뜻이었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옛 글자”라는 의미로&nbsp;이해하였다. 왕국유는 “주문”이 진나라가 사용하던 서쪽 지방의 문자며, “고문”은 여섯나라가 사용했던 동쪽의 문자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p><p>&nbsp;&nbsp;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nbsp;당시만 하더라도 획기적인 의견이었다. 이후로 고고 유물의 발굴되면서 왕국유의 의견이 사실임이 증명되었고,&nbsp;여섯 나라의 문자도 서로 다른 것임을&nbsp;알게 되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14/78/e0016778_4afd9c32235e9.jpg" width="500" height="186.48648648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14/78/e0016778_4afd9c32235e9.jpg');" /></div><strong>구석규,《문자학개요》, 상무인서관, 1988.</strong></p><p>&nbsp;<br>&nbsp;&nbsp; 【덧글】<br>&nbsp;&nbsp; 전적에 보이는 “고문古文”이란 말을 단순히 옛글자(은나라까지 소급하여)라고 생각하면서, 대가라도 된 것처럼 거만한 사람들을 간간히 보게 된다. 혹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문자학의 기초가 없는 사람으로 무시하면 된다.</p><p>&nbsp;</p><br/><br/>tag : <a href="/tag/왕국유" rel="tag">왕국유</a>,&nbsp;<a href="/tag/문자학" rel="tag">문자학</a>,&nbsp;<a href="/tag/번역" rel="tag">번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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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고증학(考證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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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Nov 2009 17:50:13 GMT</pubDate>
		<dc:creator>소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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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수경주水經注》서언왕徐偃王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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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 style="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80%"><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br><span style="FONT-SIZE: 130%">《후한서》에 의하면&nbsp;유방劉芳은&nbsp; 《서주인지록徐州人地錄》 20권을 편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nbsp;자는 “성국成國”이 아니라 “문백文伯”이라고 되어 있다. <br><br></span></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수경주》와 같은 내용이 《태평어람太平御覽》과 《박물지博物志》에 《서언왕지徐偃王志》라는 이름으로 인용되어 있다. 원문에 있는 []표시는 이 두 서적에 근거하여 보충한 것이다. 교감을 해 보아도 의미가&nbsp;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장이 조금 더 매끄러운 정도다.<br></span></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br><span style="FONT-SIZE: 130%">----------------------------</span></span><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br><span style="FONT-SIZE: 130%">《수경주水經注》8권 제수濟水조<br></span></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br><span style="FONT-SIZE: 130%">劉成國《徐州地理志》</span></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徐偃王</span></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之異, 言：<br><br></span></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유성국이《서주지리지》에서 서언왕의 특별함에 대해서 말하길:<br><br></span></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br><span style="FONT-SIZE: 130%">徐君</span></span></u><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宮人[任](御覽)娠而生(御覽作「產」)卵, 以為不祥, 棄之于水濱. </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孤獨母</span></u><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御覽作「孤獨老母」博物志作「老獨母」)有犬, 名曰</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鵠倉</span></u><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博物志作「蒼」). 獵于水側, 得[所](御覽)棄卵, 銜以來歸. </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孤獨母</span></u><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御覽作「獨母」)以為異, 覆煖之, 遂[烰](博物志)成兒(御覽作「弗乳而成人」). 生時[正](御覽 博物志)偃, 故以為名. </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徐君</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宮中聞之, 乃更錄取[收養](御覽). 長而仁智, [因](御覽)襲君</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徐國</span></u><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 後</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鵠倉</span></u><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博物志作「蒼」)臨死, [更](御覽)生角而九尾, 寔(博物志作「實」)</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黃龍</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也. </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偃王</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葬之</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徐</span></u></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梁界](御覽)中, 今見有「狗壟」焉. <br><br></span></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서군의 궁녀가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서 그것을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에게는 개가 있었는데 이름이 “곡창”이었다. 물가 옆에 버려진 그 알을 얻어서 물고서 돌아왔다. 고독모는 특별하게 여기고 그것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다. 태어날 때 넘어졌으므로 (언偃을) 이름으로 삼았다. 서군이 궁중에서 그것을 듣고서 상록을 주고 데려와 [길렀다]. 장성하자 어질고 지혜로웠는데, [이로 인하여] 서국의 임금을 계승하였다. 이후에 “곡창”이 죽자 뿔과 아홉 개의 꼬리가 나오니 황룡이었다. 언왕偃王이 서국 안에서 장사지냈는데, 지금도 그 「개무덤」을 볼 수 있다.&nbsp;<br><br></span></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br><span style="FONT-SIZE: 130%">偃王</span></span></u><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治國(博物志作「</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偃王</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既主其國」), 仁義著聞, 欲舟行上國, 乃通溝陳․蔡之間. 得朱弓矢, 以[己](博物志)得天(博物志作「知」)瑞, 遂因名為號, 自稱「</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徐偃王</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 江․淮諸侯[皆](博物志)服(博物志作「伏」)從[, 伏從](博物志)者三十六國. 周王聞之, 遣使[乘駟, 一日](博物志)至楚, 令(博物志作「使」)伐之. </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偃王</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愛民不鬪, 遂為楚敗, 北走[1]</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彭城武原縣</span></u><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東山下. 百姓[之](博物志)隨者[以](博物志)萬數, 因(博物志作「後遂」)名其山為</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徐山</span></u><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 山上立</span><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span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ascii-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石室廟</span></u></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博物志此字無), 有神靈, 民人請(博物志作「祈」)禱焉(博物志此字無). [今皆見存.](博物志)<br><br></span></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fareast-font-family: 한양신명조; mso-hansi-font-family: 한양신명조"><span style="FONT-SIZE: 130%">언왕偃王은 나라를 다스림에(박물지에는 “언왕이 그 나라의 주인이 되자”) 인의가 매우 높아서 배가 상국으로 다닐 수 있도록 진과 채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 하였다. 붉은 활과 화살을 얻어서 하늘의 상서러움을 얻었다고 여기고 스스로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하였다. 강수와 회수 사이의 제후들이 [모두] 복종하는 곳이 36개국이었다. 주왕이 그것을 듣고, [사마가 이끄는 수레로] 사신을 파견하여 [, 하루만에] 초나라에 도착하여 그곳을 정벌하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백성을 사랑하여 싸우지 못하니, 초나라에 패배하여 북쪽의 팽성 무원현 동쪽의 산 아래로 달아났다. [그를] 따르는 백성이 1만명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후에) 그 산을 서산이라고 하였다. 산위에 석실묘를 세웠는데, 신령함이 있어서 백성들이 빌며 청하였는데,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박물지)<br><br><br></span></span></p><br/><br/>tag : <a href="/tag/수경주" rel="tag">수경주</a>,&nbsp;<a href="/tag/서언왕" rel="tag">서언왕</a>,&nbsp;<a href="/tag/번역" rel="tag">번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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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8 Nov 2009 17:24:0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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