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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수서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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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스토리라인 성경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설교입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ue, 24 Nov 2009 23:10:2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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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수서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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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스토리라인 성경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설교입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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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1월22일 주(속회 공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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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11월22일 주(속회 공과)<br />
*제목: 영적인 삶의 가치<br />
*성경: 갈5:16-25<br />
&nbsp;신앙생활은 아무렇게나 해서 결과만 좋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한다고, 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br />
&nbsp;구약성경에 보면 아론의 아들들이 허락되지 않은 불로 성소의 불을 밝히다가 저주를 받았는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 성소에 불을 밝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무 불이나 가져다가 밝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 많은 일을 하고,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방법이나 가져다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거룩해야 합니다. <br />
&nbsp;이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좋은 충고가 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령의 차원, 영적인 차원을 때로 시내산에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평지는 육체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 중턱은 혼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꼭대기 구름 속은 영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평지에 머무는 아론과 많은 백성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산꼭대기 '기도의 자리'이자, 성령(구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모세의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br />
&nbsp;어부 베드로는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고기를 갈릴리 호수에서 잡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기를 예수님에게서 잡는 것(기도의 자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결혼해서 처음에 아기를 남편과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나님과 갖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벳이나 마리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없이 고기를 잡을 수 있고,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br />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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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속회공과(설교)</category>

		<comments>http://stline.egloos.com/4593178#comments</comments>
		<pubDate>Tue, 24 Nov 2009 23:10:22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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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영적인 삶의 의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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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영적인 삶의 의미<br />
-갈5:16-25<br />
&nbsp;신앙생활이란 결국 영적인 생활인데 요즈음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고, 혼적(知情意 와 마음)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칸트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이성 밖에 있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아니고 단지 믿음과 요청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신앙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실제 교회에서 실천되면 '영적인 사항'들이 설교에서 다뤄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들을 기회'가 없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들음'의 기회가 차단된 것입니다. <br />
&nbsp;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에게 와서 완성된 이성 중심의 인간 생활이 교회에 적용되었을 때, 근대인의 신앙은 결국은 인간의 구성요소 중에서 '영'이 소외되고, 영과 관련된 '성령'이 소외되고 주로 이성이 속한 '혼'적 신앙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학'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성 중심의 신학의 발전은 점점 초월적이면 영적인 '성령' '천국' '기적' '천사'등과 같이 영적생활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주제와 실체들에 대해서 점점 멀어지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 때는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목사의 신앙을 가지고 가는데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는 무신론자가 되어서 나온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br />
&nbsp;그러나 실제 목회 현장에 나와서 목회를 해 보면 '영적차원'에서 목회하지 않으면 '학원'은 될 수 있어도 '교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영적인 삶과 목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는 곳은 없습니다(믿을 만한 곳). 각자가 알아서 책을 보든 아니면 눈치껏 목회를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면서 배워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데 십 년 이 십년 세월이 갑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목회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잘 모른 채 목회를 시작했다가 마칩니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한 두 사람을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은퇴의 시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br />
&nbsp;이제는 목회에 대한 너무 많은 주장에 시달리다 못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씀에 입각해서, 교회가 성장한 목회가 가장 모범적인 목회라고 생각하자고 무언중 합의를 한 것 같습니다.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허락되지 않은 불로 성소의 불을 밝히다가 저주를 받았는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 성소에 불을 밝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무 불이나 가져다가 밝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 부흥시키고 많은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방법이나 가져다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거룩해야 합니다. <br />
&nbsp;이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목회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좋은 충고가 될 것 같습니다. 성공적인 목회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의 차원, 영적인 차원을 때로 시내산에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평지는 육체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 중턱은 혼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꼭대기 구름 속은 영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평지에 머무는 아론과 많은 백성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산꼭대기 '기도의 자리'이자, 성령(구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모세의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지금 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 속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br />
&nbsp;오늘도 마음을 과거나 미래에 내 보내지 말고, 시내산 꼭대기라는 현재에 머물러 오직 하나님과만 대면하는 시간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br />
<br />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br />
<br />
			 ]]> 
		</description>
		<category>매일설교</category>

		<comments>http://stline.egloos.com/4593176#comments</comments>
		<pubDate>Tue, 24 Nov 2009 22:57:24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토착화의 문제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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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토착화의 문제<br />
-눅10:1-2<br />
&nbsp; 시대는 동양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여년 전만 해도 그런 말이 있었지만 설마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갑짝스럽게 세계의 이목이 동양에 집중되고 실제 동양 중심이 되었습니다. 동양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언제나 서양인처럼 되고자 했던 일본은 오히려 서양과 함께 몰락해 가는 것과 같고, 동양적인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국과 중국이 동양중심의 시대에 핵을 이루게 되는 것 같습니다. <br />
&nbsp;기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과 중국의 기독교가 이제는 세계 선교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한국에 와서 근 원형과 함께 변형이 항존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 유대의 기독교, 그 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무속종교'가 다 같이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이제 원하던 원치 않던 이슬람도 한국에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마치 모든 종교가 여기 와서 멈추는 종착역과 같고, 모든 종교가 버무려져 나름대로 색과 맛을 내는 '비빔밥' 그릇과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br />
&nbsp;결국 한국에서는 한 종교가 모든 종교를 다 지배하는 시대가 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각각의 종교가 그 원형을 보존하며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토착화가 어떻게 되어갈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모든 종교들은 우리식으로 토착화되어 있습니다.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론과 같이 適者生存(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종교도 그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적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등 종교는 생존력이 강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적응하고 생존하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br />
&nbsp;한국의 기독교는 주로 미국에서 받아들여졌지만, 미국의 기독교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한 것이 아니고,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땅의 형태에 맞춰서 흘러가듯이 그렇게 기독교가 흘러왔고 한국에 맞춰 있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토착화를 시도하려 하지만, 사실은 누군가 토착화하려 한다고 해서 기독교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종군기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한국에 심으셨고, 적응시키셨고, 발전시키셨는지를 세심히 살펴보고 그것을 알아내어 또렷하게 드러내고, 설명하고, 이해 가능케 하는 것이 옳은 일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착화 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현재 신앙에 대한 리포트와 같은 형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br />
&nbsp;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 자리 잡고 잘 착상되어 존재하는 모든 고등 종교는 종류와 관계없이 한국 토양에 맞게 이미 토착화, 변형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늘 저 자신이 이 시대에 태어난 '종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성령과 성도와 함께 '성령의 교인사' 시대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시고 있는지 그것을 읽어내고 그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정리하고, 보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구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이것이 신학함이라고 생각합니다. <br />
&nbsp;저는 동양적 토착화의 방법론으로 가장 첫 째 손꼽을 수 있는 특징이 동양 사상을 대표하는 공자가 말 것 '一以貫之(일이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자기 사상이자 유교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해서 '仁(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仁(인)을 이해하면 유교를 이해합니다. 이 인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전체를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서 '禪(선)' 불교가 되었습니다. 話頭(화두)나 公案(공안)으로 표현되는 一以貫之(일이관지) 된 한 단어나 한 구절의 말로서 불교전체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br />
&nbsp;아마 한국의 기독교도 이런 동양적이면서 한국적인 방식으로 도착화 되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토착화되어 갈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지난 기독교는 一以貫之(일이관지)하여 '삼박자 구원론'을 깊이 생각해 보면 다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귀납적인 형태의 서양인과 달리, 연역적인 형태의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는 동양인들은 하나로서 전체를 다 아는 형태의 가르침을 원하는 것입니다.<br />
&nbsp;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21세기에 새로운 시대를 一以貫之(일이관지)하여 하나로서 전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그 하나'의 단어, 문장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nbsp; 주님이 이미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서 말씀하고 계시며,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nbsp;<br />
&nbsp;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를 먼저 보내신다고 할 때, 주님의 이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듯 우리를 보내려 하십니다. 오늘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 봅시다. 이것을 알아 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성취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br />
<br />
눅 10: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br />
<br />
			 ]]> 
		</description>
		<category>매일설교</category>

		<comments>http://stline.egloos.com/4592353#comments</comments>
		<pubDate>Mon, 23 Nov 2009 23:35:23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하나님 나라의 所在(소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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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하나님 나라의 所在(소재)<br />
-눅17:20-21<br />
&nbsp;하나님은 시간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現在(현재)'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역시 영원한 현재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시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예측으로 연결되는 현재를 사는 시간적 존재입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이것을 현대철학자 하이덱거는 다시 과거는 피투적으로, 미래는 기투적으로 우리 현재에 침투되어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런 과거와 현재에 대한 생각에 이끌려 과거와 미래로 한없이 이끌려 다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가서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정확히 현재에 머물러 있을 때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생각)은 단 한 순간도 우리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 있게 놔두지 않습니다. 마치 귀신이 미친 사람의 머리채를 붙들고 이리 저리 이끌고 다니듯이 우리를 이리 저리 이끌고 다닙니다. <br />
&nbsp;우리 마음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갑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진자운동을 할 때 잠시 현재를 스치는 그 시점에서 잠깐 잠깐 느끼는 것입니다. <br />
&nbsp;월요일부터 너무 어렵게 철학적인 접근을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가을이 되니 보다 사색적이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좀더 쉽게 성경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점을 지적하여 "한 날 어제 일을 잊어버리고,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점잖게 쉽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현재에만 머물 수 있다면 그 자리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키엘케골이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말이 이 말입니다. 實存(실존)의 자리입니다. 천국의 평안함, 고요함, 침묵, 쉼, 등등의 모든 표현이 다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br />
&nbsp;사실 우리는 현재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것은 '사실'이 아니고 '생각'일 뿐입니다. 이것은 허구이고, 이것은 허상입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허상이 없습니다. 모두가 실상입니다. <br />
&nbsp;포스트 모던의 시대에는 불신자들까지 입만 열면 영성을 말합니다. 이들이 미친 듯 빠져드는 영성은 동양적 영성,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영성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진아)가 자신의 가상적 자아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인디안 추장은 이것을 우리 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어 서로 싸운다고 상징화시켜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자아 분열이 실제화되는데 오래 걸리고, 자신의 자아에서 허구의 자아를 몰아내고, 眞我(진아) 혼자만 남은 데 또 오래 걸입니다. <br />
&nbsp;성경은 그렇게 하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非我(비아)는 어느새 도망친다는 것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도망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 없이 어둠인 자아가 어둠인 비아를 물리치기 어렵습니다. 40도 강추위 속에서 나무에 달아 붙은 얼음은 돌보다도 떼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봄이 오면 따뜻한 봄볕에 얼음은 눈 녹듯 술술 녹아 사라집니다. 죽은 것과 같이 딱딱했던 나무 껍질을 뚫고 새 싹이 나옵니다. 얼음 옷을 입었던 나무가 봄의 태양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br />
&nbsp;성경에서 바울이 말한 "나는 죽고 예수는 산다"는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실제 그렇게 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나 제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한 사람도 못봤고, 저도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쓸데없는 말을 써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페를롱이 말했습니다. 자신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면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죽은 척 할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속아넘어갑니다. <br />
&nbsp;달이 태양을 바라보듯이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잊혀지고, 바라보다 사랑하게 되면,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넓은 벌판을 바라보면 잠시 넋을 잃습니다. 이런 상태가 천국을 바라보고 잠시 넋을 놓은 상태입니다. 이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찬송의 세계입니다. 눈을 사랑하면 눈속에 빠져들고 결국 눈속에서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처음에는 넋을 잃게 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사랑하하게 되고,&nbsp; 결국은 예수님속에서 죽게 됩니다.&nbsp; 이 번 한 주간도 주님과 함께 시작해 봅시다.<br />
<br />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br />
<br />
			 ]]> 
		</description>
		<category>매일설교</category>

		<comments>http://stline.egloos.com/4591349#comments</comments>
		<pubDate>Sun, 22 Nov 2009 23:20:33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두 소경의 이야기 ]]> </title>
		<link>http://stline.egloos.com/459028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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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두 소경의 이야기<br />
-마 20:29-34<br />
&nbsp;다시 主體(주체)의 문제를 논의해 봅시다. 근대 이후의 세상은 인간이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주인 없는 無主空山(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막시즘이 강성하여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이상적 사회로 만들어 보겠다고 밀어붙일 때는 활기라도 있었는데, 이제 는 죽음의 도시처럼 정적에 싸여, 남은 것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야수들의 욕심뿐입니다. 그 때는 인간이 너무 설쳐서 문제였는데 이제는 인간이 너무 쳐져서 문제입니다. 그래도 그 때는 일류대학생들이 사회를 변혁해 보겠다고, 척박한 노동 현장에 위장 취업하여 현실을 인식하고,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에 보겠다고,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자기 희생을 감행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인간의 시도가 결국은 무위로 끝나고, 공산주의가 패배를 선언하면서, 세상은 운전사가 급사한 버스처럼, 비틀거리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br />
&nbsp;데카르트에 의해서 사회와 역사의 주체로 등극한 인간이 실수만 연발하다 결국 주체의 자리에서 처참하게 끌려 내려오고, 그 자리는 텅 비게 되었습니다. 빈 의자만 덩그렇게 놓여 있습니다.<br />
&nbsp;사회를 바꿔 보겠다고 외치다 경찰에게 연행 당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던 대학교정에서는 이제 교수와 주차자리를 놓고 다투는 취업 중독 학생들만 목격됩니다. <br />
&nbsp;한 때 '4 영리'란 이름으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보았거나 만져봤을 전도지가 유행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빈 의자 그림인데, 그 의자에 누가 앉느냐가 아주 중요하다는 메시지 였습니다. 오늘은 왠지 그 의자가 자꾸 생각납니다. 이제 인류가 집단적으로 그 의자, 왕좌에서 내려왔는데, 문제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앉으실 수 있도록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 막시스트들은 그 의자에서 내려 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그 의자에 모실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우리, 주님의 종(놈)들은 주님을 그 자리에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의 주인으로 마땅하신 주님이 그 자리에 앉으실 수 있도록 해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저의 가슴은 칼로 저며오듯 아픕니다. 매일 매일 잠이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놈)들이 그 자리에 주님 대신 앉으려 멱살잡이 하고, 교회 밖에서는 수많은 종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 뛰는 것을 보니 오금이 저려 옵니다. 이렇게 많은 목사가 있고, 이렇게 많은 신학자가 있건만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못하고, 세상과 교회를 설득한 책한 권 쓰지 못하고, 서로 물고 뜯고만 있으며, 자기 잘 살 궁리만 하고 있는지--,&nbsp; 이 시대를 이렇게 살고 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뵈올지 두렵고 떨리기만 합니다.<br />
&nbsp;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소경이 등장합니다. 그냥 보면 육신의 소경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영적인 소경입니다. 소경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그 진리에 따라서 눈을 뜨게 하실 분이 오직 예수님 인데 그 분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히 주님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불러야 합니다. 왕좌에 보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경이 눈뜨게 하는 일에 관한한 텅 빈 왕좌에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령하시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nbsp;<br />
<br />
마 20: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20: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20: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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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매일설교</category>

		<comments>http://stline.egloos.com/4590285#comments</comments>
		<pubDate>Sat, 21 Nov 2009 22:41:40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두려워 말라, 의심 말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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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두려워 말라, 의심 말라<br />
-마 14:22-33<br />
&nbsp;오늘은 성경의 해석의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사람은 3 단계에 걸쳐서 성경을 해석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br />
&nbsp;첫째는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깊은 밤 중,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우리 곁에 계신다. 설교자는 먼저 청중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야 합니다.&nbsp;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리번거리지 말고, 눈을 들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 오늘 이 자리, 설교를 듣는 자리, 예배를 듣는 자리에도 주님이 함께 계심을 깨달읍시다." "너희가 두 세 사람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리라"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br />
&nbsp;제자들은 뭍에 남아 계셨던 주님이 이 한 밤중 폭풍 속에서, 호수 한 가운데서 '설마,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 도와 주실 수 있을까? 의심했습니다. 주님이 계셨습니다.&nbsp; 도와 주셨습니다. 주님은 구세주로서 우리 곁에 항상, 어디서나 함께 계십니다.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하늘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다."<br />
&nbsp;두 번째는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좀더 깊은 해석입니다. 바다를 보지말고, 눈을 떼어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바다의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보고 두려워 말고,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해석은 '상황의 인식'이고, 두 번째 해석은 이 상황의 '주체'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게하는 것입니다. 호수를 만드신 분, 폭풍을 만드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하고, 믿게 하자는 것입니다. 상황에 빠지지 말고, 주인에게 빠지라는 것입니다. 상황을 두려워 말고, 주인이신 예수님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br />
&nbsp;대부분의 설교는 여기서 끝납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한 설교가 됩니다. 근대의 입장에서 대부분의 설교가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의 인식과 의지의 결단을 요구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시대인 현재는 다시 한 번 더 해석을 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새벽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한 걸은 더 나가는 해석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br />
&nbsp;세 번째는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영적이 해석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영적인 생활입니다. 근대철학의 시대가 되면서 이 사실이 소홀히 다루어 졌습니다. 이제는 다시 '영적생활' '영적인 해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은 이 세 번째 해석을 가하고, 이 세 번째 해석의 내용을 메시지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br />
&nbsp;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갈리리 호수, 밤, 폭풍은 '자연으로서의 그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령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이 세상의 영적인 상황을 뜻합니다. 우리는 비록 사도라 할 지라도, 언제나 영적으로 사단과 악령이 이와 같이 날뛰는 상황에 조각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은 처지로 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불안과 초조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뛰는 악령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의심하지 말고, 말씀한 마디에 마귀와 악령을 물리치는(파도) 주님을 보고, 믿음으로 걸으로 걸어야 합니다. &nbsp;<br />
&nbsp;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여러분의 묵상과 기도가 필요합니다.&nbsp;&nbsp;&nbsp; &nbsp;<br />
<br />
마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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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매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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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Nov 2009 23:24:14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11월15일 주(속회 공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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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11월15일 주(속회 공과)<br />
*제목: 기도의 성패<br />
*성경: 마 15:21-28<br />
&nbsp;천국은 때로 침로 당하기도 합니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미리 비밀을 알고 '비밀'에 따라서 간구함으로써 예정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오거나, 천국의 혜택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있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실 때 주로 '비유'로 하셨습니다. 해석해야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말씀에 껍질을 입혀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29장에서 일부러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장치가 있음에도 어떻게 그 뜻을 알아냈는지 미리 다 알고, 기가 막히게 하나님 나라의 창고를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br />
&nbsp;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계획은 이 땅에 오셔서 갈리리 호숫가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여 12제자를 가르쳐 내는 것이었고, 제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의 순서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주님의 이런 계획이 간명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려면 이곳이 '땅 끝' 즉 이방 지역이니 한 참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지역의 이 여인은 복음이 예수님의 계획에 따라 이방 지역에 전파되기도 전에 주님께 미리 찾아와 성경의 약속대로 간구하여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못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구하되 약속의 말씀을 알고 믿고, 끝까지 구하면 응답 받는 다는 사실을 알고 그대로 구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같은 이방지역 사람들 보다 몇 십년 먼저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nbsp;<br />
&nbsp;가나안 여인은 불쌍한 자기 딸을 구원할 분은 천하에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얻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받을 줄 믿고 구하면 반드시 받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거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br />
&nbsp;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作心三日(작심삼일)입니다. 민6장에 보면 이것은 무효이며, 죄입니다. 성도들은 이것이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nbsp; 기도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무심하여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다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 없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이 마치 응답하실 능력이 없거나, 응답에 인색하신 분인양 보이게 합니다. <br />
&nbsp;성도들은 섣불리 기도를 시작했다가 중단하려면 차라리 그런 기도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고, 일단 시작한 기도는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nbsp;<br />
<br />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br />
<br />
			 ]]> 
		</description>
		<category>속회공과(설교)</category>

		<comments>http://stline.egloos.com/4588459#comments</comments>
		<pubDate>Thu, 19 Nov 2009 22:53:33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기도의 성패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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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기도의 성패<br />
-마 15:21-28<br />
&nbsp;천국은 때로 침로 당하기도 합니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미리 비밀을 알고 '비밀'에 따라서 간구함으로써 예정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오거나, 천국의 혜택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있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실 때 주로 '비유'로 하셨습니다. 해석해야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말씀에 껍질을 입혀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29장에서 일부러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장치가 있음에도 어떻게 그 뜻을 알아냈는지 미리 다 알고, 기가 막히게 하나님 나라의 창고를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br />
&nbsp;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계획은 이 땅에 오셔서 갈리리 호숫가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여 12제자를 가르쳐 내는 것이었고, 제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의 순서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주님의 이런 계획이 간명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려면 이곳이 '땅 끝' 즉 이방 지역이니 한 참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지역의 이 여인은 복음이 예수님의 계획에 따라 이방 지역에 전파되기도 전에 주님께 미리 찾아와 성경의 약속대로 간구하여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못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구하되 약속의 말씀을 알고 믿고, 끝까지 구하면 응답 받는 다는 사실을 알고 그대로 구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같은 이방지역 사람들 보다 몇 십년 먼저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nbsp;<br />
&nbsp;가나안 여인은 불쌍한 자기 딸을 구원할 분은 천하에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얻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받을 줄 믿고 구하면 반드시 받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거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br />
&nbsp;요15장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결실(응답)을 많이 받기 원하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 열매 없는 나무는 뿌리를 찍어 버리신다고 했고, 가지를 잘라 버린다고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作心三日(작심삼일)입니다. 민6장에 보면 이것은 무효이며, 죄입니다. 성도들은 이것이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br />
&nbsp;기도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무심하여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다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 없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이 마치 응답하실 능력이 없거나, 응답에 인색하신 분인양 보이게 합니다. <br />
&nbsp;성도들은 섣불리 기도를 시작했다가 중단하려면 차라리 그런 기도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고, 일단 시작한 기도는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nbsp;<br />
<br />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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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매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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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22:44:38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알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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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알림: 카자흐스탄 선교는 다녀왔습니다. 넘어져서 오른쪽 손목을 다쳤습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없어서 자료를 업데이트 못하고 있습니다. 반 기브스 중인데 오늘 처음 글씨 써봅니다. 주말부터는 반 페이지라도 쓰겠습니다. <br />
&nbsp;이 번 선교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br />
<br />
			 ]]> 
		</description>
		<category>매일설교</category>

		<comments>http://stline.egloos.com/4586736#comments</comments>
		<pubDate>Tue, 17 Nov 2009 22:18:41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11월8일 주(속회 공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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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11월8일 주(속회 공과)<br />
*제목: 나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br />
*성경: 겔 36:37-38<br />
&nbsp;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겸양의 덕이 있어서, 상대방이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할 때' 속으로는 먹고 싶으면서도 일단은 두 서너 번 '괜찮습니다'라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만일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정말 괜찮은 줄 알고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으면 굉장히 섭섭해합니다. 실제는 배가 고픈데 '괜찮다고 말함으로써' 배고파서 혼나는 경우도 종종있습니다. <br />
&nbsp;교회에서 연말에 계획을 세울 때도 담임목사가 이것 때문에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연세가 많은 교인의 경우 내년을 위해 '직분'을 맡기려 하면 처음에는 대부분 못한다고 거절합니다. 이때 담임자가 그 교인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지 아니면 겸양을 나타내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본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임명장을 냈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래도 담임목사님이 나를 인정하시는 구나"하고 좋아하는 경우가 있고, "임명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고 임명했느냐"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br />
&nbsp;서양에서는 우리와 같은 경우가 거의 없답니다. 먹고 싶으면 달라고 하고, 먹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서양이 주로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nbsp;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자 합니다. <br />
&nbsp;이사야서 55장 8절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 중에 한가지가 '기도'할 때의 태도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살다가 교회에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풍토에서 '겸양의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내가 너를 구원해 주랴?' '내가 너에게 축복을 주랴?' '내가 네게 응답을 주랴?'라고 물으시면, 성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무슨 받을 자격이 있나요, 면목이 없습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br />
&nbsp;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자랑인 것처럼 말하기 합니다.&nbsp; 여기서 하나님의 입장과 한국이 성도들의 입장이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해야 주신다'는 것이고, 성도들은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주시길 바란 다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간절히 바라면서도 실제 하나님 앞에서는 '구하지 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말씀처럼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다 내셨습니다. 준비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있지 성도에게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br />
&nbsp;만일 구하지 않아도 주신다고 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알아서 다 주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정한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한 방식과 약속하신 것에 기초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믿으면 안됩니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서양 사람들이 '구하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인격을 존중해서 절대로 주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배운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br />
&nbsp;우리나라 교인들은 아파 죽겠는데고 하나님에게 나와서 고쳐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돈 없어 죽겠는데도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친구에게 가서는 돈을 꾸어 달라고 할지언정&nbsp; 하나님께 와서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가 바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nbsp;<br />
&nbsp;어린 자식은 아버지를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우리 모두는 어린 신앙인) "아빠, 돈 줘'이렇게 말합니다. 맡겨 놓은 것처럼 말합니다. 아빠는 당연히 줘야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유를 물어보고 필요하다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요한일서 5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잘 못 구하면 어떻게 되나'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기도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우리가 마치 완전한 '성자'처럼 일생을 하나님 뜻에 따라서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실수로 잘못도 구해 보고, 정신차려 잘 구해 보기도 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응답 받아 보면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엎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br />
&nbsp;솔직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믿고 구하면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 구해도 '그대로 응답 주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안타깝지만 우리 인간 아버지(다윗에게 한 약속)와 같이 결과적으로 자식에게 손해가 간다해도 믿고 달라고 하면 응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등학생 아들이 오토바이를 사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처음에는 안 된다고 거절합니다. 공부해야 할 학생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 달라고 하면 사 줍니다. "너 후회 할 것이다. 네가 알아서 잘 한다고 하니, 아빠가 사주기 사 준다. 그러나 나중에 아빠가 오토바이 사줘서 공부 못해서 대학 못갔다고, 나 원망하지 마라" 이런 식입니다. <br />
&nbsp;성경에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상 8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처럼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안 된다고 설득합니다. 응답 받고 나서 후회 할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은 막무가네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주었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이 엄청난 고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믿고 구하면 준다'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을 달게 받겠다'고 하면서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셨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br />
&nbsp;결국 바로 기도해서 영혼이 건강해 지느냐, 파리해 지느냐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시106:15) 기도하면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도 저도 없습니다. &nbsp;<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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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6:38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 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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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점: 성도들이 기도할 제목이 있으면서도 구하지 않는 이유를 서로 고백해 봅시다. 그리고&nbsp; 합심하여 두 사람이 구하면 응답 주신다 했으니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한 주간 동안 기도해 봅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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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속회공과(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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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Nov 2009 23:28:47 GMT</pubDate>
		<dc:creator>예수 서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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