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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 quarantine stati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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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ax robbers of all of countries, unite!</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at, 04 Jul 2009 07:01:4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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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 quarantine stati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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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ax robbers of all of countries, unite!</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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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답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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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a title="" href="http://juwolf.egloos.com/2386946">udis님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수정)</a>(나이샷)에 트랙백<br />
<br />
우선 예로 드신  한반도평화연구원 포럼의 발표자료들에서 어떤 컨센서스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제가 평소 주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같은 포럼에서 발표된 최명해의 다음 글이 충분한 대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사실 북·중 관계 60년 역사 동안, <span style="color:#ff0000;">역량의 비대칭성이라는 구조적 제약</span> 속에서 북한이 중국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전략 옵션이란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북한은 ‘편승’, ‘기회주의’, ‘자력갱생’ 등의 수단을 선택했으나, 어느 것 하나 실효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오직 북한은 ‘모험주의적 돌출행동’ 등을 통해 자국의 지정학적 위상(status)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나 핵무장과 같은 ‘자구책’으로 동맹에 대한 의존을 낮추는 선택 외에는 다른 대안이 별반 없었다. <span style="color:#ff0000;">북한에 가장 이상적인 동북아 국제정치 구도는 미·중의 세력균형적 대립 양상이다. 북한으로서는 미·중의 전략적 간극을 이용할 수 있을 때, 자국의 전략적 위상이 제고될 수 있는 것</span>이다. …<br />
<br />
현실은 북한이 기대하는 구도로 전개돼오지 않았다. 이미 중국은 1970년대 대미 화해(rapprochement)를 추구하면서부터 미국과 모종의 전략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것은 <span style="color:#ff0000;">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가 양국의 공동 이익에 부합</span>한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현상의 안정적 ‘관리’에 양국 이익의 균형점(balancing of interest)을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중국은 1971~73년 남북관계 개선, 1983년  ‘남·북·미 3자회담’ 베이징 개최안, 1996년 ‘4자회담’ 수용의 대북 설득, 2000년대 ‘6자회담’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span style="color:#ff0000;">북한에게 미·중의 이익균형이란 강대국에 의한 대북 관리 체제의 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북한편이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북한은  ‘모험주의’를 통해 미·중의 이익균형의 판을 깬 것</span>이다. 1974년 대남 무력 도발을 통해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고, 1983년 아웅산 테러로 ‘3자회담’의 실현 자체를 좌절시켰으며,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4자회담’ 기제를 무용화하고 미국과의 양자협상 구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2번의 핵실험으로 ‘6자회담’ 기제를 형해화시켰다. 북한으로서는 향후 한반도 상황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동북아 국제정치 구도 변화에서 자국의 정치적 위상을 유지하려면 강대국 ‘관리’ 체제의 등장을 막아야 한다. <br />
<br />
최명해, <a title="" href="http://www.koreapeace.or.kr/modules/forum/forum_download.html?ff_no=322">북한의 2차 핵실험에 대한 중국의 입장 및 대응</a>, 한반도평화연구원 15회포럼 발표자료, 2009년 6월 12일</div><br />
<br />
이것은 제가 그간 소개했던 로버트 칼린이나 빅터 차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여러 해 동안 우리는 <span style="color:#ff0000;">북한이 안전보장과 맞바꾸어 핵을 포기할 의향이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 핵무기를 그들의 궁극적인 안전보장이라고 생각하는지</span>를 논쟁해 왔다. 하지만 그런 논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북한을 연구하고 또 북한 외교관들과 협상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된 바에 따르면 <span style="color:#ff0000;">북한의 목표는 그것보다 훨씬 크다</span>. 우리가 현재의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면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br />
<br />
Victor Cha,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76937">Up Close and Personal, Here's What I Learned</a>, 워싱턴포스트, 2009년 6월 14일</div><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쉽게 말해서 북한은 <span style="color:#ff0000;">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더 크고 장기적인 세력균형 게임에서 그들이 미국에게 유용하리라고 생각</span>하는 것이다. 중국은 그 점을 알고 있고 사석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br />
<br />
북한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참여하고 있는 6자회담 -곧 또 열리겠지만- 이 <span style="color:#ff0000;">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략적 상황의 축소판</span>이라는 것이다. 세 전략적 적수 -중국, 일본, 러시아- 가 판결에 참여해 압력을 가하며 (북한이 보기에) <span style="color:#ff0000;">북한은 영원히 취약한 나라로 남아있어야 한다</span>고 주장하고 있다.<br />
<br />
Robert Carlin, John W. Lewis,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52175">What North Korea Really Wants</a>, 워싱턴포스트, 2007년 1월 27일</div><br />
<br />
자 이런 시각을 기반으로 다음 주장을 검토해 보지요.<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TAN; padding:15px; background:IVORY;">서프 국제방이나 김명철(북한의 비공식 대변인)의 글을 보며 느낀건 이들이 전제하는 북한이 대북 강경론자들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협상이나 체제보장에 만족하지 않고 핵 보유와 동북아에서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하는 국가 말이다. <span style="color:#3333ff;">차이는 "태도"뿐</span>이다. 전자가 그런 강성대국 북한을 찬양한다면 후자는 증오하고 비난한다. (<a title="" href="http://juwolf.egloos.com/2387257">나이샷</a>)</div><br />
태도보다는 전제가 되는 <strong>힘의 평가</strong>가 다른 겁니다. 로버트 칼린, 빅터 차, 최명해, 그리고 저의 공통적인 전제는 <strong>'북한이 약하다'</strong>는 겁니다. 김명철 같은 사람의 주장은 보통 인식되고 있는 것보다 <strong>'북한은 훨씬 강하다'</strong>는 데서 출발하지요. 제가 볼 때 태도는 별 문제가 안됩니다. 예를 들어 로버트 칼린이 북한을 증오하고 비난한다고 보십니까?<br />
<br />
북한 외무성의 김계관은 핵문제에 있어 북한은 [비공식 핵무장국인] 인도 같은 대우를 원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주변국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지요. 물론 동북아에서 북한이 인도와 맞먹는 인구와 영토, 시장,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막강한 국가라면 그냥 웃어넘길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주변국의 원조에 생존을 의존해야하는 북한의 후달리는 국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br />
<br />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았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국제사회는 중국과 거래하기 위해 줄을 서는 분위기가 됩니다. 1998년 핵실험 이후의 인도도 비슷한 대접을 받습니다. 중국이나 인도의 힘은 이런 데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북한은 핵을 빼면 다른 나라들의 관심을 모을 방법이 묘연한 원래 별볼일 없는 국가이니까요.<br />
<br />
<br />
이어서 협상무용론(?)에 대해서도 간단히 논평해 두겠습니다.<br />
<br />
"외교 회담은 자신의 기본 입장만 무의미하게 되풀이하고, 상대의 불성실함을 규탄하거나 상대의 “부당함”과 “타도”를 주장하는 자리로 변한다. 그런 회담은 대립하는 체제들 사이에서 아직 편을 정하지 못한 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교한 공연을 펼치는 무대가 된다."라는 키신저의 지적은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대북협상들은 물론 6자회담의 상당 부분을 묘사하는데 잘 들어맞습니다.<br />
<br />
이미 고전이 된 조이 제독의 『how communists negotiate』부터 시작해 이런 측면이 있으니 북한과의 협상을 낙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경험담(*)은 수없이 많습니다. 게다가 2차 북핵실험 이후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 같지 않다는 분석이 훨씬 더 힘을 얻은 상황입니다. 그만큼 북핵협상의 전망이 나빠진 것이지요.<br />
<br />
그러니 "무엇이 정당한 요구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선의'와 '합의를 도출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외교가 언제나 국제 분쟁을 타결지을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실수"라는 키신저의 지적은 북핵문제가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strong>100% 간주하지는 않는 입장일 뿐</strong>인 전형적인 현실주의적 시각입니다. 제가 볼 때 이런 평범한 주장까지도 협상무용론에 힘을 실어준다고 받아들인다면 그 반대편에는 협상이 늘 성공할 거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입장밖에 남지 않는 것 같습니다.<br />
<br />
그리고 분쟁을 타결지을 수 없다 하더라도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br />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 = 협상무용 이란 도식은 더욱 약화됩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br />
<br />
1. 협상은 긴장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br />
2. 궁극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더라도 제네바 기본합의처럼 (일시적 핵동결 같은) 잠정적인 대책을 얻는 것은 그보다 쉬울 수 있습니다.<br />
3. 노력했는데도 협상에 실패했다는 결과는 다른 대안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강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으로부터 대북제재 결의안에 대해 찬성표를 던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최선을 다해 협상할 필요가 있습니다.<br />
<br />
이런 것들은 협상의 "전술적" 용도라고 부르면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최종목적 달성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더라도 나름 기능적인 유용성이 있으니까요.<br />
<br />
<br />
(*) 예를 들어 송종환,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781620&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북한 협상행태의 이해</a>』(개정판) , 오름, 2007 참조.<br/><br/>tag : <a href="/tag/북한" rel="tag">북한</a>,&nbsp;<a href="/tag/북핵협상" rel="tag">북핵협상</a>			 ]]> 
		</description>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onnet.egloos.com/4180757#comments</comments>
		<pubDate>Sat, 04 Jul 2009 06:42:3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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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 황당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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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TAN; padding:15px; background:IVORY;">또 북한 전문가들은 좌우를 불문하고 여전히 북한 현실주의 - 북한은 체제보장을 원하는 평범한 독재국가일 뿐이다 - 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 <span style="color:#3333ff;">서프라이즈 국제방의 종북주의자들이 응원하고 이글루스의 소넷님이 요즘 공들여 묘사하는 북한</span>은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전쟁도 마다 않고 핵을 보유한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위험한 악의 제국인 점도 주목할만하다. (<a title="" href="http://juwolf.egloos.com/2386634">나이샷</a>)</div><br />
살다살다 종북주의자와 같이 묶일 줄은 또 몰랐다는...<br />
굳이 저 둘 중에서 고르라면 저는 늘 '체제보장을 꿈꾸는 독재국가' 라는 설명 쪽에 섰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국제정치를 선과 악 같은 도덕적인 구도로 보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고. ;-)<br />
<br />
제가 묘사한 것이 있다면 그건, 북한이 미국을 통해서 체제보장을 확보하길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52175">원하겠지만 그건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일</a>이다, 즉 북한의 희망사항과 현실 사이에 넘기 힘든 괴리가 있다는 점일 겁니다.<br />
<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TAN; padding:15px; background:IVORY;">특기할만한 점은 보수 성향의 전문가(이화여대 박인휘교수) 조차 북한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북미 협상으로 귀착될 것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div><br />
그리고 북미협상에 대해서도 덧붙여두자면 저도 다시 협상이 재개될 거라고 이미 몇 차례 지적(<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76937#12741480.01">1</a>,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66881#12712514.02">2</a>)해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보는 이유 중 하나는 제가 몇 개의 글에 걸쳐 설명했던 것처럼 군사적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어떤 합의가 나올 수도 있지요. 문제는 그게 <strong>궁극적인</strong> 결과냐 아니면 <strong>스쳐가는</strong> 결과냐 하는 것이지요. 즉 과거의 제네바 합의나 2.13합의처럼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협상이 거듭 깨질 수 있으며, 사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안 그럴 가능성보다 더 높다는 겁니다.<br />
<br />
<br />
記. 한반도평화연구원에 올라온 글 중에서는 <a title="" href="http://www.koreapeace.or.kr/modules/forum/forum_download.html?ff_no=322">"북한의 2차 핵실험에 대한 중국의 입장 및 대응"</a>(최명해, 외교안보연구원)이 제일 볼만한 것 같습니다. 이를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3004272">Crazy Fearsome Cripple Gambit</a>,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52175">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a> 등과 비교해 보시면 공통되는 점을 많이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br/><br/>tag : <a href="/tag/북핵" rel="tag">북핵</a>,&nbsp;<a href="/tag/북핵협상" rel="tag">북핵협상</a>			 ]]> 
		</description>
		<category>정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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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2 Jul 2009 22:55:5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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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핵 안전보장과 북한 ]]> </title>
		<link>http://sonnet.egloos.com/417752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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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br />
<span style="font-size:130%;"><strong>1. 핵 안전보장의 역사</strong></span>[1]<br />
<br />
<strong>1.1. 적극적 안전보장(PSA)</strong><br />
<br />
1968년, 핵확산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국제질서로서 핵 비확산조약(NPT) 협상이 마무리되어 7월부터 출범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핵무기 비보유국들은 이 조약에 가입해 핵무장을 포기했을 때 대한 안전보장이 너무 빈약하다는 불만을 표명합니다.<br />
<br />
당시 NPT의 주요 후원자였던 미국과 소련은 이 문제, 즉 <strong>NPT에 가입해 핵무기를 포기한 국가들에 대한 안전보장</strong>에 대해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밝힙니다. 우선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이들에게 'UN의 집단안보체제와 미국의 방위보호를 통해서 보호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한편 소련의 코시긴 총리는 '그 영역 내에 핵무기가 없는 한 핵무기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NPT에 삽입할 용의가 있다'는 견해를 밝힙니다.<br />
<br />
당시 기성 핵무기보유국들은 자신들의 선언을 공식화하고 규범화하는 차원에서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55호[2](1968년 6월 18일)를 채택시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br />
<br />
<blockquote>(1) 핵무기를 동원한 침략 또는 그런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UN헌장의 의무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 특히 핵보유 상임이사국 측에서 즉시 행동하여야 할 사태임을 인정한다.<br />
(2) NPT 당사국인 비핵무기국이 핵위협 또는 침략의 대상이 되는 경우, UN헌장에 따라 이에 대한 원조나 지원을 하는 각국의 의사를 환영한다.<br />
(3) UN 회원국이 군사공격을 받을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UN헌장 51조에 입각한 개별적 혹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재확인한다.</blockquote><br />
이는 결국 <strong>'핵무기에 의한 침략이나 위협이 있을 경우 NPT를 따르는 비핵무기국에 대해서는 UN헌장이 허용하는 바에 따라 원조 및 지원을 할 것'</strong>이라는 핵무기국(=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의 선언인 셈입니다. 이것을 대개 <strong>적극적 안전보장</strong>(Positive Security Assuarances; PSA)이라고 부릅니다.<br />
<br />
<br />
<strong>1.2. 소극적 안전보장(NSA)</strong><br />
<br />
적극적 안전보장은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약속 이행의 신뢰성이 강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즉 어떤 비핵무기국이 핵공격을 받는 상황이라면 그 상대는 핵무장국일텐데, 다른 강대국들이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문제의 침략국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주겠냐는 점이 불확실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적극적 안전보장을 확실하게 받고 싶어하는 비핵무기국들은 안보리결의 255호 같은 <strong>PSA를 믿으면서 중립국으로 남는 대신 대개 어떤 핵무장국과 동맹</strong>을 맺고 전술핵무기를 국내에 반입하는 등의 방법을 계속 고수합니다. 즉 동맹은 PSA보다 신뢰성이 높았던 것입니다.<br />
<br />
따라서 비핵무기국들은 핵무기국들을 향해 핵공격을 받았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약속보다는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비동맹 48개국 공동결의(1966), 비핵무기국회의 중 멕시코-파키스탄의 제안(1968), 제1차 NPT 재평가회의의 추가의정서(1975) 등은 그러한 요구사항을 잘 보여줍니다.<br />
<br />
1977년 UN총회에서 미국은 "미국과 그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가에 대하여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이어 "핵무기국과 동맹관계에 있거나 혹은 핵무기국과 결탁하여 미국과 그 영역, 군대 및 동맹국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하거나 지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NPT 당사국이거나 이와 동등한 내용의 조약에 가입한 어떤 비핵무기국에 대하여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공식 발표를 합니다.<br />
<br />
소련도 이듬해 UN 특별총회에서 "핵무기 제조 및 획득을 포기하고 그 영역 내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어 영국, 프랑스, 중국 등도 각자 대동소이한 선언을 하여 이 흐름에 동참합니다.<br />
<br />
이런 것을 비핵무기국에 대한 <strong>소극적 안전보장</strong>(Negative Security Assuarances; NSA)이라고 합니다. 다섯 핵무장국이 개별적인 선언을 했기 때문에 세부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소극적 안전보장을 받기 위한 조건을 종합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br />
<br />
(1) 핵무기를 보유하지 말 것<br />
(2) 핵무기를 국내에 두지 말 것<br />
(3) 핵동맹조약에 참여하지 말 것<br />
(4) (핵무장국과 함께)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것<br />
<br />
소극적 안전보장은 적극적 안전보장보다는 낫다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핵공격이 실체화한 다음에야 UN안보리의 대응을 기대해야 하는 적극적 안전보장과는 달리, 비핵무기국이 자발적으로 핵부재를 증명함으로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핵비확산이라는 국제적 대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혔습니다.<br />
<br />
하지만 <strong>소극적 안전보장도 동맹보다는 불확실</strong>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NATO나 바르샤바조약기구처럼 강력한 동맹을 가진 나라들은 여전히 동맹에 의존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극적 안전보장은 믿을만한 동맹국을 구할 수 없었던 불행한 나라 또는 비동맹/중립이라는 입장에 매력을 느꼈던 나라들을 위한 <strong>차선의 대안</strong>으로 남게 됩니다.<br />
<br />
<br />
<strong>1.3. 핵무기부재지대(NWFZ)</strong><br />
<br />
소극적 안전보장을 위한 가장 유력한 실천방법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지역국가들이 뭉쳐 <strong>핵무기부재지대</strong>(Nuclear Weapon-Free Zone; NWFZ)를 형성[3]하는 것입니다. 이 방안은 기본적으로 NPT 제7조[4]가 추천하는 방법이며, 1975년 UN총회 결의 3472 B(XXX)[5]의 "모든 핵무기국은 우선 비핵지대를 존중하고 이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모든 국가에 대하여는 핵사용 및 위협을 하지 않을 것을 법규화하여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법적 뒷받침을 받기도 좋습니다.<br />
<br />
이 방안을 선구적으로 따른 것이 1967년에 성립된 <a title="" href="http://en.wikipedia.org/wiki/Tlatelolco_Treaty">남미비핵지대조약(Tlatelolco)</a>으로 이 지역의 33개 남미/카리브 국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5대 핵무기국도 이를 보장하는 추가의정서(II)를 비준하여 법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br />
<br />
<br />
<strong>1.4. 요약</strong><br />
<br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핵무장국이 핵공격 위협을 느낀다고 할 때의 선택은 다음과 같습니다.<br />
<br />
1. 비동맹 상태에서 NPT회원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다음 적극적/소극적 안전보장을 받는데 만족함<br />
2. 핵무기부재지대를 설립하고 비핵화를 입증해, 5대 핵무장국으로부터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음<br />
3. 적극적/소극적 안전보장은 포기하고 5대 핵무장국 중 하나 이상과 동맹을 맺어 핵우산 보호를 받음<br />
<br />
이상이 현 국제질서 아래서 가능한 세 가지 선택입니다. 이 세 가지 선택의 공통점은 해당국 스스로 비핵화를 입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strong>비핵화가 입증되지 않으면 위의 세 가지 보장은 받을 수 없습니다.</strong>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선택에 속하지 않는 한 가지 유력한 대안이 남아 있습니다.<br />
<br />
4. 기존의 모든 국제적 질서를 어기고 국제사회의 부랑아(rogue state)가 되어 자체 핵무장에 나섬<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130%;"><strong>2. 제1차 북핵위기 前史</strong></span><br />
<br />
<strong>2.1. 제1차 북핵위기의 시발</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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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소련의 압력을 받고 1985년 12월 NPT에 가입합니다. NPT에 따르면 가맹국은 조약의 의무인 핵시설 사찰을 규정한 안전조치협정을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18개월 내에 체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7년 동안이나 이를 미루다가 1992년 초에야 IAEA와 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그간의 핵활동에 대한 자체보고서를 제출하고 1992년 5월부터 1993년 2월까지 6회의 임시사찰을 받습니다. IAEA는 북한이 신고한 16개 시설을 사찰하면서 북한이 제출한 보고서와 실제 사찰결과에 "불일치"가 심각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불일치란 무엇이었을까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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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영변 5MWe 원자로를 1986년부터 가동해 1989년에 파손된 연료봉 교체를 위해 단 한 차례 가동을 중지하고 1990년에 이를 재처리해 90g의 플루토늄을 얻었다고 신고하고 샘플을 제공했었습니다. 하지만 IAEA가 시료를 분석해 본 결과 이 샘플의 플루토늄 동위원소들 간의 구성비가 다른 것으로 보아 각각의 인출시기가 다르며, Am<sup>243</sup> 분석을 통해 89년 한 번이 아니라 90, 91, 92년에도 연료봉을 인출했음을 입증합니다. IAEA는 북한이 kg단위의 플루토늄 추출을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추정치는 6~12kg입니다. 우리가 1차 북핵위기 당시 많이 들었던 원시적인 핵폭탄 1~2개 분량이란 이야기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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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IAEA는 북한이 군사시설이라고 주장하며 사찰을 거부한 2개 시설이 재처리 시설 혹은 핵폐기물저장소일 것이라는 강한 의혹을 품게 됩니다. 이에 따라 IAEA는 2월 9일 영변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합니다만, 북한은 이 시설의 공개를 거부하다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되자 3월 12일 돌연 NPT 탈퇴라는 강수를 둡니다. UN안전보장이사회는 이에 맞서 NPT 탈퇴를 철회하고 조약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IAEA 특별사찰을 받으라는 결의 825호를 14-0으로 통과[6]시킵니다. 이것이 1차 북핵위기의 시작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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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거야 정확히 알 도리는 없지만 가장 유력한 추측은 북한이 IAEA의 기술적 사찰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속여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을 거라는 설입니다. 즉 일단 속임수를 쓰다가 걸리자 배째고 나갔다는 거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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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1993년 3월 12일 NPT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명분도 흥미롭습니다. 북한은 UN안보리에 보낸 서한에서 "미국은 남한과 함께 조선을 위협하는 핵전쟁 연습인 팀 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사무국과 특정 회원국을 부추겨 … 우리의 군사기지를 개방토록 요구"함으로서 "나라의 최고 이익을 위협하는 비상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선언[7]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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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팀스피리트 훈련은 전부터 정기적으로 하던 것이고 북한이 이에 대해 비난을 퍼부어 온 것도 늘상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갖고 갑자기 "나라의 최고 이익을 위협하는 비상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보긴 힘듭니다. 게다가 북의 NPT탈퇴선언 직전, 남한이 호의적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조건없이 북한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아, 남한이 북한의 돌발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핑계가 무엇이든 간에 <strong>IAEA 특별사찰을 받지 않고 정면돌파</strong>하겠다는 북한의 의지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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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2.2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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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시계를 조금 뒤로 돌려 보면, 남한과 미국은 북핵 문제가 점차 부상하던 90년대 초, 북한이 IAEA 사찰을 받기 전에 <strong>북한의 비핵화를 겨냥해 상당한 양보</strong>를 했습니다. 핵우산을 직접적으로 담보하고 있던 전술핵무기를 철수시키고, 평화적 핵이용을 위해 제공되는 권리인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연료봉 재처리 또한 포기합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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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지금 이 시각 현재 우리나라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핵무기 부재선언을 하고, 이어 남북한은 1991년 12월 31일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비핵화하자는 합의를 합니다. 이 비핵화 공동선언은 일독할 가치가 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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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strong>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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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은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우리나라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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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br />
2. 남과 북은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br />
3. 남과 북은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br />
4. 남과 북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하여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들에 대하여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한다.<br />
5. 남과 북은 이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하여 공동선언이 발효된 후 1개월 안에 남북핵통 제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br />
6. 이 공동선언은 남과 북이 각기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그 문본을 교환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8]</div><br />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공동선언은 앞서 설명했던 <strong>핵무기부재지대</strong>(NWFZ)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남북한에 핵무기가 없으면 자연히 핵전쟁이 날 이유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미국은 언제든 대륙간 탄도탄이나 스텔스 폭격기 같은 것을 동원해 북한을 두들겨댈 수 있겠지요.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핵무기 부재지대는 우선 상호핵사찰을 통해 한반도에 핵무기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기존 핵무장국들로 하여금 공식적 안전보장에 동참하게 만들어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방안입니다. 게다가 한반도 비핵지대화는 1980년 이래 <strong>북한이 '조선반도의 비핵·평화지대화'라는 제목하에 늘 요구해 오던 것</strong>이기도 합니다. 즉 이것은 북한의 핵 안전보장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남한과 미국의 제도적 대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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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이라는 이름의 이 합의에 따라 남북한은 1992년 3월 19일 제1차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 회의를 시작으로 5월 27일 회담이 결렬될 때까지 5차례에 걸친 회담을 진행합니다. 이때 남한이 비핵화를 위한 사찰규정을 조속히 채택하자고 주장한 반면, 북한은 비핵화를 위한 주변 여건 확립(?)을 먼저 해야 한다며 자주성이니 핵위협 청산 같은 뜬구름잡는 잡는 이야길 꺼내어 물을 탑니다. 게다가 북한은 남북한이 서로 같은 수의 시설을 사찰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보다 남한이 훨씬 많은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북한의 불성실한 태도는 <strong>"녕변에 대응,모든 주한미군시설을 봐야겠다"</strong>[9]는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남한의 제안은 우선 군사시설과 민간시설을 한 곳씩 지정해 상호 시범사찰을 한 후, 연간 20개의 군사시설을 포함한 총 56개의 범위 내에서 사찰을 수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10] 결국 남북한에 의한 상호 핵사찰은 북한의 전형적인 <strong>'총론 합의 후 각론에서 회담 결렬시키기'</strong>에 걸려 좌초되고 맙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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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130%;"><strong>3. 제네바 기본합의의 뒷처리</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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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3.1. 제네바 기본합의 3조의 해석을 둘러싼 쟁점</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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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앞선 글에서 이어지는 제네바 기본합의의 3조 해석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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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TAN; padding:15px; background:IVORY;">그건 부시 행정부의 무모하리만치 과격한 대북외교정책 때문이 아닐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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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린턴 행정부 시절 분명히 북미간에는 상당할 정도의 외교적 접근이 있었고 제네바 합의를 통해 미국이 더 이상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과 위협을 금지할 것을 공식적으로 확약했다. (The U.S. would provide formal assurances to the DPRK, against the threat or use of nuclear weapons by the U.S.)<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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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시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더불어 2002년 1월 국방부를 통해 핵태세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를 발표했는데 유사시 핵무기 사용 국가에 기존의 러시아, 중국에서 이라크, 이란, 리비아, 시리아, 북한을 추가했다. 즉 <span style="color:#3333ff;">명백한 제네바 합의 위반 사항</span>이다.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 위협을 금지한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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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요? 제네바 기본합의 3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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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strong>III. 양 측은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strong><br />
(1)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대한 공식 보장을 제공한다.<br />
(2) 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일관성있게 취한다.<br />
(3) 본 합의문이 대화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남북대화에 착수한다.[11]</div><br />
읽어본 분들은 누구나 아실 수 있겠지만, 미국의 의무(3조1항)와 북한의 의무(3조 2항)은 <strong>연계</strong>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의무는 앞에서 제가 설명한 소극적 안전보장(NSA)의 전형입니다. 이 의무는 상대국이 핵의혹을 깨끗이 다 씻은 시점에 주어지는 것이지, 핵시설을 단순히 일시 동결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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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기본합의 3조를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다는 것은 제네바 협상 수석대표였던 갈루치의 글로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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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북한은 <span style="color:#ff0000;">자국의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에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span>을 해주길 원했다. 물론 미국측은 그와 같은 보장을 할 용의가 있었다. 새로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 구소련의 해체 후 우크라이나가 자국 영토에 존재하는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그와 같은 보장을 제공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한국 및 일본과 상의해야 했다.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이 이들 국가에 대한 안보 공약의 약화로 비춰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br />
12월 12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팀은 일본 외무성의 외교정책국 국장인 야나이 슌지(柳井俊二)를 만났는데 뜻밖에도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야나이는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이 일본의 안보에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크게 우려했다. 그러면서 안전보장서에 <span style="color:#ff0000;">북한이 NPT의 “정상적인 회원국”이어야 한다는 조건과 북한이 핵무장한 국가와 “함께 또는 동맹을 맺고” 다른 나라를 공격할 경우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문구</span>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이 계속해서 NPT를 우롱하거나, 러시아 또는 중국과 동맹하여 일본을 공격해도 미국의 핵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br />
그와 같은 상황을 한 번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던 미국측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갈루치는 <span style="color:#ff0000;">미국이 북한에 제공하는 것은 단지 소극적 안전보장일 뿐</span>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설명했다.[12]</div><br />
첫번째 강조는 동결이 아니라 북핵 '포기'와 소극적 안전보장 간의 교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번째로 강조한 일본 외무성의 문제제기는 제가 앞에서 설명했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소극적 안전보장의 세부조건들을 재언급하면서 소극적 안전보장의 해석을 엄격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일본 당국자들도 이를 소극적 안전보장의 일종으로 보았다는 말이지요. 마지막 강조는 갈루치가 일본에게 이것이 (당신들도 잘 아는) 소극적 안전보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확인해 주었다는 대목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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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제가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70604#4">앞선 글에서 지적</a>했듯이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우라늄 농축에 의한 비밀 핵개발을 추진하여 먼저 제3조2항을 위반했습니다. 제2차 북핵위기는 미국이 그 사실을 적발해 추궁하자 북한이 '그렇다 우리 HEU 있다 어쩔래'라며 적반하장식으로 나오면서 시작되었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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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데도 3조 2항에 규정된 북한의 의무는 싹 입 씻고 3조 1항의 미국의 의무만 거론하며 미국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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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후에 소극적 안전보장을 미국이 약속했을 때 북한의 반응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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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2005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회담에서 러시아 수석대표는 북한 대표단을 보며 지적했다. “미국인들은 진지하다니까.” “당신 이걸 봤소? 이건 <span style="color:#ff0000;">소극적 안전보장</span>이란 거요. 우리도 냉전 내내 이런 걸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얻을 수 없었소.”<br />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그리고 물론 북한도 포함된 저 유명한 ‘6자 회담’에서, 우리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종식시키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면서 2004년 이래 협상을 계속해오고 있었다.<br />
당시의 쟁점은 방금 워싱턴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미국이 “핵이나 통상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명시하는 구절에 관한 것이었다.<br />
그것은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결단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러시아 대표단 또한 그 점을 인정했다. 그것은 김정일이 끝내 안전보장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던 미국의 적대행위의 종식- 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북한 대표단은 <span style="color:#ff0000;">후에 그 조항을 진정으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는 아무 쓸모도 없는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며 매몰차게 거부</span>했다. 그 사건을 통해 나는 한 때 북한에게 최고로 중요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그 다음 순간에는 갑자기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표면적인] 요구사항과 [내면적인] 욕망은 크게 동떨어져 있을 수 있다.[13]</div><br />
이러한 반응은 제1차 북핵위기 당시 '팀스피리트 훈련'처럼, 제2차 북핵위기 때의 '핵태세보고서(NPR)' 또한 하나의 핑계거리에 불과했음을 잘 보여줍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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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고영구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은 평북 용덕동에서 97년 12월부터 2002년 9월까지 모두 <strong>70여차례의 핵고폭실험을 실시</strong>했다"[14]고 증언합니다. 이 시기는 제네바 합의가 유지되고 햇볕정책이 추구되던 시기지요. 이는 엄격히 말해 제네바 합의 자체를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strong>북한이 여전히 핵개발을 진행하고 있었음</strong>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미국이 NPR에 북한을 거론할 만한 이유는 부시가 집권하기 전에도 충분했던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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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3.2. 시한폭탄: 연기된 사찰</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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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북핵위기를 보는 대중적 시각 중에는 크게 잘못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strong>제네바 기본합의에 정해진 대로 경수로 2기를 지어주고 그 대가로 영변 원자로를 해체하면 북핵문제는 잘 끝날 일</strong>이었다는 시각입니다. 겉보기에는 남북정상회담이나, 올브라이트 방북, 조명록 방미처럼 뭔가 외형적으로 있어보이는 정치적 이벤트들을 통해 대중들의 눈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는 것처럼 비춰졌지만, 사안의 핵심인 북핵문제는 전혀 진전이 없이 <strong>타이머가 돌아가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상황</strong>이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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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서 설명했듯이 제1차 북핵위기는 북한이 IAEA 사찰을 받다가 덜미가 잡히자 그대로 국제질서를 상대로 극한투쟁으로 돌입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그 전에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킨데서도 볼 수 있듯이 북한은 핵사찰을 제대로 받을 생각이 전연 없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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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제네바 기본합의라는 것은 경수로 제공을 지렛대로 한 핵동결을 통해 1994년의 극한대결을 경수로 기초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strong>잠시 연기</strong>해 놓은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은 영변 핵시설 동결을 감시하기 위해 IAEA 사찰관 2명이 있었을 뿐, 그 어떠한 사찰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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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합의 제4조 3항에 따르면 “경수로 사업의 상당부분이 완성되었을 때 그리고 핵심부품이 공급되기 전에" 북한은 IAEA의 전면적 핵사찰을 수용하도록 규정[15]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당부분 완성'은 건물이 완공되어 터빈 발전기가 들어오는 시점이고, '핵심부품'은 원자로, 스팀제네레이터 등 돔 내부에 배치될 주요 장비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건설과정이 진행된다면 이 기간은 서너달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찰은 그 정도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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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strong>원자로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사찰이 완료</strong>되어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남김없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런 사찰을 하는데 적어도 3년쯤은 걸린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찰은 공정 진행상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 북한의 입장은 "<strong>원자로가 도입되기 전에 사찰을 시작</strong>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으며 계속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북한은 미룰 수 있는 데까지는 사찰을 미루고 싶었던 게 분명하며, 영원히 사찰을 받지 않을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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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들어 부시 대통령이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관련된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국무성 대변인도 이를 부연해 "사찰을 위해서는 3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에 맞추어 IAEA도 3단계 핵사찰 계획을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제네바 합의에 의해 동결된 시설은 물론 북한의 NPT 탈퇴 파동을 만들어낸 문제의 시설 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미뤄두었던 사찰을 둘러싼 대결 2라운드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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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핵태세보고서(NPR) 명단에 북한과 같이 오른 후 미국이 요구한 대로 적극적으로 비핵화 입증 의무를 이행하고 혐의를 털어버린 리비아 같은 국가가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단순히 북한을 상대로 함정을 판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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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북한은 리비아가 아니었지요. 북한은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비밀핵개발이 덜미를 잡히자 다시 예의 대결 투쟁으로 돌아갑니다. 이 패턴은 1994년의 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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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의 문제 의식이나 요구 자체는 일리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과의 대결에 임해 플루토늄과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지 못했고, 강압적이기 보다는 상대를 방치했으며, 상대 행동에 대해 금지선(redline)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등의 점에서 <strong>전술적으로 서툴었다</strong>는 점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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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130%;"><strong>4.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의 성격</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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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북한이 겨우 소극적 안전보장(NSA)이나 받으려고 15년 이상 위험천만한 핵 도박을 벌이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소극적 안전보장이란 실제로 매우 불만족스러운 안보 대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적극적 안보보장, 핵무기부재지대, 미국의 서면안보보장, 평화협정, 6자회담 참가국의 연대보증 등을 비롯해,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존 국제질서를 통해 제공할 수 있는 선택을 거의 다 제시해 본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끝없이 투쟁하는 것은 기존 국제질서가 제공하는 그 어떤 틀도 북한의 안보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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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현존 국제질서인 핵 비확산조약(NPT) 체제 및 동북아 세력균형과 북한의 관계는 키신저가 말하는 혁명적 세력과 기존질서의 관계의 판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꿈꾸는 만족스러운 세계[16] 또한 북한의 필요에 맞추어 국제질서를 대폭 새로 쓰지 않는 한 달성될 수 없는 성격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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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한 나라가 <span style="color:#ff0000;">국제질서나 국제질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방식을 억압적이라고 간주</span>하기 시작하면, 그 나라와 다른 강대국들 간의 관계는 혁명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경우, 주어진 체제 내에서 이견을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span style="color:#ff0000;">체제 그 자체가 문제</span>가 된다. 절충은 가능하지만 그러한 절충은 필연적으로 찾아들 결전을 대비해 유리한 입지를 다지기 위한 전술적 행동 또는 적대세력의 사기를 꺾기 위한 수단으로서 구상된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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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혁명적 세력의 동기는 방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은 솔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혁명적인 세력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들이 위협을 느낀다는 점이 아니다. 그런 인식은 주권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관계의 본질상 당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span style="color:#ff0000;">문제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안심시킬 수 없다</span>는 점에 있다. 그들에게는 오직 절대적인 안전 -적대세력의 무력화- 만이 충분한 보장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절대적 안전을 추구하는 한 세력의 욕망은 모든 다른 세력에게 절대적인 불안전을 뜻하게 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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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행사를 절제하는 기술로서, 외교란 그러한 환경에서는 동작할 수 없다. <span style="color:#ff0000;">“선의”와 “합의를 도출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외교가 언제나 국제 분쟁을 타결지을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실수</span>이다. 혁명적 국제 질서 하에서 각 세력들은 상대에게 정확히 그런 특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게 된다. 외교관들은 여전히 서로 만날 수 있으나, 그들은 더 이상 동일한 언어로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설득할 수 없게 된다. <span style="color:#ff0000;">무엇이 정당한 요구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span>에서, 외교 회담은 자신의 기본 입장만 무의미하게 되풀이하고, 상대의 불성실함을 규탄하거나 상대의 “부당함”과 “타도”를 주장하는 자리로 변한다. 그런 회담은 대립하는 체제들 사이에서 아직 편을 정하지 못한 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교한 공연을 펼치는 무대가 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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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평온에 젖어든 채 재앙을 겪어보지 않은 세력들에게 있어, 이러한 교훈은 어지간해선 체득하기 힘든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이 느껴졌던 안정의 시대에 마음을 놓은 나머지 그들은 기존의 틀을 때려 부수겠다는 혁명적 세력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은 혁명적 세력의 이의제기가 그저 전술적인 것인 양, 마치 혁명적 세력이 기성 질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만 <span style="color:#ff0000;">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사안을 과장하는 양, 혁명적 세력이 제한적인 양보로 달랠 수 있는 특정한 불만거리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 양</span> 혁명적 세력을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위험을 적시에 경고하는 이는 공연히 인심을 흉흉하게 하는 사람으로 간주될 뿐이다. 반면 상황에 적응하기를 권하는 자는 균형감각을 갖춘 분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들 또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그럴듯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 이들의 주장들은 기성 질서의 틀 아래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유화정책”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span style="color:#ff0000;">유화정책은 혁명적 세력의 무제한적인 목표를 파악할 수 없었던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일 뿐</span>이다.[17]</div><br />
<br />
<br />
<br />
[1] 1절의 설명은 황영채, <em>NPT, 어떤 조약인가</em>, 한울 아카데미, 1995의 7장을 주로 참고하였다.<br />
[2] UN안보리 결의안 255호, 1968년 6월 19일 <a href="http://pds15.egloos.com/pds/200906/28/40/NR024836.pdf">NR024836.pdf</a><br />
[3] 전 세계적 핵무기부재지대의 현황에 대해서는 <a title="" href="http://www.un.org/disarmament/WMD/Nuclear/NWFZ.shtml">UN군축사무국의 설명</a>을 참조.<br />
[4] 본 조약의 어떠한 규정도 국가의 집단이 각자의 영역내에서 핵무기의 전면적 부재를 보장하기 위하여 지역적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에 영향을 주지 아니한다.(Each of the Parties to the Treaty undertakes to pursue negotiations in good faith on effective measures relating to cessation of the nuclear arms race at an early date and to nuclear disarmament, and on a treaty on general and complete disarmament under strict and effective international control.)<br />
[5] UN총회 결의 3472 B(XXX), 1975년 12월 11일 <a href="http://pds15.egloos.com/pds/200906/28/40/UNAG30res3472i.pdf">UNAG30res3472i.pdf</a> <br />
[6] <a title="" href="http://en.wikisource.org/wiki/United_Nations_Security_Council_Resolution_825">UN안보리 결의 825호</a>, 1993년 5월 11일<br />
[7] 북,탈퇴서한 안보리 제출, 연합뉴스, 1993년 3월 13일<br />
[8] <a title="" href="http://www.unikorea.go.kr/kr/CMSF/CMSFBsub.jsp?topmenu=2&menu=2&sub=1&subtab=&act=view&main_uid=18&fullurl=&brd_cd=&ord_typ=&page_n=&mode=&sch_type=&sch_word_type=&sch_word=&sch_title=&sch_attach=&sch_dt_type=&sch_begin_dt=&sch_end_dt=">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a>, 1992년 1월 20일<br />
[9] 박정현, 핵사찰문제등 실질결실 못거둬/평양 6차 총리회담 결산, 서울신문, 1992년 2월 21일<br />
[10] 황영채, <em>같은 책</em>, pp.255-257<br />
[11] 아메리카 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간의 합의틀 (통칭 "제네바 기본합의") 1994년 10월 21일<br />
[12] Witt, Joel S., Poneman, Daniel B., Gallucci, Robert L., <br />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815793863">Going Critical: 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a>, Brookings Institution, 2004<br />
(김태현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538309&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북핵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협상</a>, 서울, 모음북스, 2005, p.353)<br />
[13] Cha, Victor., <a title="" href="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9/06/12/AR2009061202685.html">Up Close and Personal, Here's What I Learned</a>, Washington Post, 2009년 6월 14일<br />
[14] 김용출, 高국정원장 "北 용덕동서 70여회 고폭실험", 세계일보, 2003년 7월 10일<br />
[15]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은 북한 내 모든 핵물질에 관한 최초보고서의 정확성과 완전성을 검증하는 것과 관련하여 IAEA와의 협의를 거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을 포함하여 IAEA 안전조치협정(INFCIRC/403)을 완전히 이행한다.<br />
[16] 정치적/정책적 견해가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관해서 Victor Cha와 Robert Carlin/John W. Lewis는 의외의 일치를 보여준다.<br />
Cha, Victor., <a title="" href="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9/06/12/AR2009061202685.html">Up Close and Personal, Here's What I Learned</a>, Washington Post, 2009년 6월 14일<br />
Carlin, Robert., and Lewis, John W., <a title="" href="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7/01/26/AR2007012601363.html">What North Korea Really Wants</a>, Washington Post, 2007년 1월 27일<br />
[17] Kissinger, Henry A., <em>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 of Peace 1812-22</em>, Boston: Moughton Mifflin Co., 1957, pp.1-3<br />
<br/><br/>tag : <a href="/tag/적극적안전보장" rel="tag">적극적안전보장</a>,&nbsp;<a href="/tag/PSA" rel="tag">PSA</a>,&nbsp;<a href="/tag/소극적안전보장" rel="tag">소극적안전보장</a>,&nbsp;<a href="/tag/NSA" rel="tag">NSA</a>,&nbsp;<a href="/tag/핵무기부재지대" rel="tag">핵무기부재지대</a>,&nbsp;<a href="/tag/NWFZ" rel="tag">NWFZ</a>,&nbsp;<a href="/tag/북한" rel="tag">북한</a>,&nbsp;<a href="/tag/북핵" rel="tag">북핵</a>,&nbsp;<a href="/tag/북핵협상" rel="tag">북핵협상</a>,&nbsp;<a href="/tag/6자회담" rel="tag">6자회담</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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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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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Jun 2009 01:17:0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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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unhappy ever after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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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2005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회담에서 러시아 수석대표는 북한 대표단을 보며 지적했다. “미국인들은 진지하다니까.” “당신 이걸 봤소? 이건 소극적 안전보장이란 거요. 우리도 냉전 내내 이런 걸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얻을 수 없었소.”<br />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그리고 물론 북한도 포함된 저 유명한 ‘6자 회담’에서, 우리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종식시키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면서 2004년 이래 협상을 계속해오고 있었다.<br />
당시의 쟁점은 방금 워싱턴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미국이 “핵이나 통상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명시하는 구절에 관한 것이었다.<br />
그것은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결단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러시아 대표단 또한 그 점을 인정했다. 그것은 김정일이 끝내 안전보장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던 미국의 적대행위의 종식- 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북한 대표단은 <span style="color:#ff0000;">후에 그 조항을 진정으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는 아무 쓸모도 없는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며 매몰차게 거부</span>했다. 그 사건을 통해 나는 한 때 북한에게 최고로 중요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그 다음 순간에는 갑자기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표면적인] 요구사항과 [내면적인] 욕망은 크게 동떨어져 있을 수 있다.<br />
여러 해 동안 우리는 북한이 안전보장과 맞바꾸어 핵을 포기할 의향이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 핵무기를 그들의 궁극적인 안전보장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논쟁해 왔다. 하지만 그런 논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북한을 연구하고 또 북한 외교관들과 협상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된 바에 따르면 북한의 목표는 그것보다 훨씬 크다. 우리가 현재의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면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br />
이 정권의 핵 야심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의 핵 프로그램은 절대적으로 평화적 목적을 위한 것이자 에너지 생산을 위한 것이라고 오랫동안 주장한 후, 북한은 미국의 수석 협상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대사를 향해 미국은 북한을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핵무기국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그런 일은 있을 법하지 않다고 대꾸하자 그들 중 하나가 북한을 일방적으로 비핵화하는 것은 “우리를 벌거벗기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받아쳤다. 그는 우리에게, 진짜 회담이 되려면 <span style="color:#ff0000;">두 기성 핵 세력 간의 상호 핵군축</span>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신네들이 <span style="color:#ff0000;">냉전 시절에 소련과 해온 것처럼</span> 말이오.”<br />
북한은 단순히 핵폭탄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span style="color:#ff0000;">명실상부한 핵보유국의 지위와 위세</span>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미국의 침공에 대한 안전보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span style="color:#ff0000;">미국이 현 정권 -그리고 심지어는 김정일 사후까지도- 을 떠받치겠다는 보장</span>을 원한다. …<br />
<br />
Cha, Victor., <a title="" href="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9/06/12/AR2009061202685.html">Up Close and Personal, Here's What I Learned</a>, 워싱턴포스트, 2009년 6월 14일</div><br />
이에 대해서는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50219">북한은 "정말" 안전보장을 원하는 것일까?</a>와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52175">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a>에서 다룬 바 있으니 그 쪽과 비교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br />
<br />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북한이 국제사회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북한의 필요에 맞춰 국제사회가 재조직되고 북한의 필요에 맞춰 국제사회의 규칙을 새로 쓰라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듯 합니다.<br/><br/>tag : <a href="/tag/북한" rel="tag">북한</a>,&nbsp;<a href="/tag/대북정책" rel="tag">대북정책</a>,&nbsp;<a href="/tag/6자회담" rel="tag">6자회담</a>,&nbsp;<a href="/tag/안전보장" rel="tag">안전보장</a>,&nbsp;<a href="/tag/미북협상" rel="tag">미북협상</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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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onnet.egloos.com/4176937#comments</comments>
		<pubDate>Mon, 29 Jun 2009 07:38:5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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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 그리고… 전면전 옵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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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점점 더 확률이 희박해지는 순서대로 가는군요. 주말이니 간단히 쓰겠습니다.<br />
<br />
미군이 북한 전역을 점령, 장악하고 WMD 프로그램을 찾아내 없애겠다고 한다면, 미국이 이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휴전선 근처에 미군을 대거 증원한 후 밀고 올라가는 것과 중국의 동의 하에 중북 국경지대에 병력을 전개한 후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가는 정도밖에 남지 않겠지요(혹시 미군이 다른 아무 도움 없이 강습상륙만으로 북한을 끝장낼 거라고 생각하는 분 계신지?). 이 방식은 실제로 걸프전과 이라크 침공 양 쪽에서 사용되었고 미군은 늘 여러 달에 걸쳐 현지에 충분한 병력을 집결시킨 후에야 공격에 나서곤 했다는 걸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br />
<br />
걸프전과 이라크전에서는 남쪽, 즉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병력을 집결해서 공격을 했는데, 미국은 이 외에도 대안을 모색한 적이 있습니다. 2003년의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은 터키를 설득해 터키-이라크 국경을 통해 육군을 투입할 수 있게 하는 협상을 진행합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원조 30억 달러, 차관 30억 달러, 페르시아만 국가들로부터 걷어 제공하는 무상석유원조 10억불 상당, 전후복구사업 수주권 등을 제공하겠다는 당근을 터키에 제시합니다. 그러나 다 된 협상을 막판에 터키 의회가 거부하면서 북부에 투입될 예정으로 대기중이던 제4보병사단은 갈 데를 잃게 되어, 결국 이 부대는 주요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도 이라크에 투입되지 못하고 맙니다.(*) 이는 현지 국가들이 갖는 거부권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br />
<br />
그리고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을 돌이켜보면 미국은 기습침공을 하기보다는 실제 군사행동에 나서기 전에 전쟁의 명분을 쌓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아주 강력하고 전방위적인 외교활동을 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br />
<br />
그 이유는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현존 최강대국으로서 미국은 국제사회질서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통해 명분을 획득하려 노력하는 것이 대개 그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전면전 자체의 특징에서 옵니다. 즉 미국이 꼭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국가라서가 아니라 어차피 전면전 준비에는 여러 달의 시간이 걸리고 그런 대규모 증원을 완벽히 숨겨서 할 수도 없는 만큼, 그동안 팔짱 끼고 노느니 외교를 위한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점입니다.<br />
<br />
<br />
결국 북한 정권을 전면전으로 제거하겠다고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점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br />
<br />
1) 적어도 한 현지 국가의 전면적인 협력이 필요하고, <br />
2) 여러 달에 걸친 병력 증강이 요구되며<br />
3) 국제사회에서 침공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대대적인 외교활동을 펼치게 될 것<br />
<br />
북한에 대한 전면 침공을 위해 중국을 설득한다는 건 한국을 설득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이 옵션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게다가 설령 그런 일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게 기습적으로 벌어질 가능성은 더 낮습니다.<br />
<br />
<br />
정리하면 북폭은 그 후의 흐름이 좋을지 나쁠지는 젖혀두고라도 미국이 언제든지 독립적으로 선택할 수는 있는 옵션이라면, 레짐체인지 공작이나 전면전은 실행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옵션이라는 겁니다.<br />
<br />
<br />
* Gordon, Michael P., and Trainor Bernard E., <em>Cobra II: the inside story of the invation and occupation of iraq</em>, Pantheon, 2006(Vintage 2007), p.384,392			 ]]> 
		</description>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onnet.egloos.com/4175496#comments</comments>
		<pubDate>Sat, 27 Jun 2009 05:54:1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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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 악의 축(axis of evil)의 유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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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br />
「악의 축<em>axis of evil</em>」[1]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2년 1월 19일 의회 연두교서에서 북한, 이란, 이라크(언급순)를 지칭하는데 사용한 용어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부시 2기가 시작되던 2005년 1월 18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지명자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지목한 「폭정의 전초기지<em>outposts of tyranny</em>」[2]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쪽은 쿠바, 버마, 북한, 이란, 벨라루스, 짐바브웨(언급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br />
<br />
그래 미국이 이 나라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실제로 침공을 받은 곳은 이라크 한 곳 뿐이었지요. 여기에는 흥미로운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 마이클] 거슨은 다양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연두교서 초안을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라이스와 해들리를 붙잡고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으며, 백악관 연설문 기초팀에도 업무를 분담시켰다. 그의 팀에 소속된 보수파 저술가 데이비드 프럼에게는 이라크를 추궁한 사례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하게 했다.<br />
부시는 <span style="color:#ff0000;">사담 후세인과 9·11을 연관지으려고 시도</span>하고 있는데, 이것은 테러리즘을 후원한 국가들과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들과의 유대관계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프럼의 견해였다. 그는 이것을 “증오의 축”(axis of hatred)이라고 명명하며, 제안서에 이라크를 증오의 축으로 지칭했다. 2차대전을 일으킨 주축국(axis powers)을 연상시키는 매혹적인 용어였다.<br />
거슨은 체니가 2000년 여름 부시진영에 합류하면서 대선 전략회의 석상에서 우려한 ‘대량살상무기와 테러리즘과의 결합’을 상기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프럼의 “증오의 축” 개념을 확대하고, 불길하고 악의에 찬 의미를 추가하여 “악의 축”(axis of evil)이란 표현으로 고쳤다. 이것은 후세인이 악마의 대리인이라는 뜻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후세인 정권과 국제 테러리즘과의 연계는 세계를 아마겟돈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암시였다.<br />
초고를 읽으며 라이스는 대통령이 <span style="color:#ff0000;">대량살상무기와 테러리즘과의 커넥션 문제를 제기</span>할 수 있게 된 점이 흡족했다. 이것은 2001년 9월 20일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국민들을 더 이상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연기됐던 바로 그 이슈였다. WMD와 테러와의 연계를 “축”이라고 부른 것은 재치 있는 발상이며, 이것을 “악의 축”이라고 지칭한 것은 더욱 재치 있는 발상이었다.<br />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에 대한 극비 전쟁계획을 알고 있는 라이스와 해들리로서는 이라크만 “악의 축”의 화신으로 특정하게 되면 선전포고로 비쳐질 것으로 염려</span>됐다. 라이스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라크전이 시작되는 시점을 맞추는- 워싱턴 사교클럽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br />
그는 이라크에 대한 폴로스텝 전쟁계획을 보호하고자 했으나,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테러리스트들의 일반적 위험성을 설파하려는 의욕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와 해들리는 <span style="color:#ff0000;">다른 나라들을 추가할 것을 제안</span>했다. 북한과 이란은 둘 다 테러리즘을 지지하고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악의 축 후보였다.<br />
대통령은 이라크·이란·북한 - 3개국 아이디어가 기호에 맞았다. 해들리는 이란이 포함되는 것에 대해 재고했다. 이란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있었으나 실권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과 시아파 지도자들인 아야툴라가 쥐고 있어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라이스는 당초에는 해들리와 의견을 함께 하며, 대통령이 이란은 다른 나라와 경우가 다르고 민주화 운동이 싹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비난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라이스와 해들리는 이란을 누락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해들리는 이란이 격앙된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지적도 했다.<br />
“아니, 그대로 둬.”<br />
부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br />
…<br />
연두교서 초안 작업을 진행하면서 거슨은 강한 어감을 주는 단어를 발견한 것에 스스로 만족했다. 위험한 나라들은 전통적으로 “깡패 국가”(rogue nation)라고 불렸다. 거슨은 이 말이 너무 온건한 어감이어서 문제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하는 표현으로 생각됐다.<br />
“악의 축”은 <span style="color:#ff0000;">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span>이라고 몰아붙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도전적인 선언이 다시금 메아리친 것 같았다. 1983년에 처음 등장한 이 구절은 전체주의적인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차별화 선언으로, 1980년대를 관통한 냉전적 대결의 기조가 됐다.<br />
…<br />
구청사 2층에 있는 부통령 라운지에서는 [부통령 비서실장] 리비가 초고를 훑어보고 있었다. 어느 초안에는 “증오의 축”이나 “악의 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라는 말만 언급</span>돼 있고, 다른 초안에는 이 말이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만 지칭</span>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 표현이 즉각적인 행동을 암시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어, <span style="color:#ff0000;">북한과 같은 나라들을 첨가하는 것을 선호했다. 시리아도 마찬가지</span>였으나,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어 라이스와 해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란에 대한 용어 조정은 해들리와 거슨에게 떨어졌다. 이란은 악의 축의 일부였지만 이라크와는 차별화할 필요가 있었다.[3]</div><br />
즉 요약하면 악의 축은 처음부터 이라크를 겨냥해 만들어진 용어인데, 용어가 정해진 후 이라크 한 나라만 지칭하자니 너무 노골적이어서 이란과 북한을 집어넣어 물타기를 했다는 말입니다. 시리아처럼 후보에 올랐다가 외교적 고려[4]에서 빠진 나라도 있구요.<br />
<br />
<br />
실제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것은 이듬해인 2003년 3월이지만, 2002년 내내 다음 표적이 이라크라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시 행정부 고위층 다수가 1990년대 말에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73048">이라크 레짐체인지 운동에 열의를 보였다</a>는 점도 그런 판단에 힘을 실어 주었지요.<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워싱턴 포스트의 보수적 칼럼니스트 찰스 크라우타머는 부시의 교서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읽고, 그것을 “놀라울 만큼 대담한 연설”이라고 평했다.<br />
“<span style="color:#ff0000;">이 연설의 주제는 이라크</span>다. 행정부 내에서 이라크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 심각한 내부적 논의가 있었다면, 이미 논쟁은 끝났다. 그 연설은 선전포고에 버금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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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은 부시에게 있어 복합적 목표였다. 그것은 강력한 경고였다. 레이건 이래 그렇게 소란스럽게 칼을 흔들어댄 대통령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span style="color:#ff0000;">북한과 이란을 함께 거론함으로써 초점을 흐려</span>서 이라크 전쟁을 위한 극비계획에 덮개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었던 엄폐물이었다.[5]</div><br />
그리고 당시에는 만약 이라크 이후가 있을 수 있다면 -물론 이라크가 평정되어 투입한 병력을 빼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그건 이란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왜냐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점령하면 이란을 동서에서 육로로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이 확보된 셈이고, 이 두 나라는 점령상태이거나 미국이 수립한 신생 정부가 다스릴테니, 이들이 미국의 군사행동에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br />
<br />
<br />
<strong>주</strong><br />
[1] Bush, George W., <a title="" href="http://georgewbush-whitehouse.archives.gov/news/releases/2002/01/print/20020129-11.html">2002 State of the Union Address</a>, 2002년 1월 29일<br />
[2] Rice, Condoleezza, <a title="" href="http://foreign.senate.gov/testimony/2005/RiceTestimony050118.pdf">Opening Statement</a>, 미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청문회, 2005년 1월 18일<br />
[3] Woodward, Bob.,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74325547X">Plan of Attack</a>, Simon & Schuster, 2004<br />
(김창영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74048&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공격 시나리오</a>』, 따뜻한손, 2004, pp.125-130)<br />
[4] 또한 9.11 테러 이후 시리아는 CIA와 비밀 협력관계를 맺고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Hersh, Seymour M.,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060195916">Chain of Command: The Road from 9/11 to Abu Ghraib</a>, New York: HarperCollins, 2004, (강주헌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698633&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지휘계통: 9.11테러에서 아부그라이브까지』</a>, 세종연구원, 2004)의 8부 2장 참조.<br />
[5] Woodward, pp.137-138<br />
<br/><br/>tag : <a href="/tag/부시" rel="tag">부시</a>,&nbsp;<a href="/tag/악의축" rel="tag">악의축</a>,&nbsp;<a href="/tag/이라크" rel="tag">이라크</a>,&nbsp;<a href="/tag/이란" rel="tag">이란</a>,&nbsp;<a href="/tag/북한" rel="tag">북한</a>,&nbsp;<a href="/tag/콘돌리자라이스" rel="tag">콘돌리자라이스</a>,&nbsp;<a href="/tag/폭정의전초기지" rel="tag">폭정의전초기지</a>			 ]]> 
		</description>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onnet.egloos.com/4174624#comments</comments>
		<pubDate>Fri, 26 Jun 2009 02:20:18 GMT</pubDate>
		<dc:creator>sonnet</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Regime Change: 이라크전 전사(前史)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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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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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ime change(체제 교체)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거의 언제나 <strong>비정통적인 방법</strong>을 지칭합니다. 즉 정규전을 통해 목표국을 점령한 후 새 정부를 세우는 그런 것은 제외하고, 내부정변, 쿠데타, 시민봉기, 게릴라, 반군 같은 방법을 통해 정권교체를 달성한다는 것이지요. 부시행정부 들어 북한을 겨냥해 레짐체인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국내 언론에도 이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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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TAN; padding:15px; background:IVORY;">제 기억에, 2004년 후반부터 부시 행정부 말에 이르기까지, 이종석을 포함한 당시 안보정책 결정자들의 뇌리를 장악했던 걱정은 북폭보다는 레짐체인지에 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밖에서는 이 둘을 잘 구분않고 사용했던 것에 비해, 안에서는 꽤 날카롭게 갈랐던 것 같고, 특히 펜타곤이 북폭파라면 체니 부통령실이 레짐체인지에 꽂혀있다는 식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71443#12725550">ytekai</a>)</div><br />
저는 사실 북한의 레짐체인지 가능성은 거의 무시해도 좋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종석이 이걸 그렇게 걱정했다고 말씀하시니까 한 번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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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 멤버들이 북한을 겨냥해 레짐체인지를 언급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돌이켜봐야 할 것은 이라크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90년대에 야당 인사로 지내면서 <strong>이라크 레짐체인지 운동에 열심</strong>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열심인 정도는 북한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br />
<br />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첫 번째 이라크 레짐체인지는 <strong>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시도</strong>되었다는 점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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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1993년 11월, 사담 후세인을 전복시키는 데 골몰하던 저항집단인 이라크 국민회의(Iraqi National Congress; INC)의 아흐마드 찰라비(Ahmad Chalabi) 의장은 ‘엔드 게임(End Game)’이라 명명한 네 단계 전쟁계획을 클린턴 행정부에 제시했다. 여기에는 그 전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자금까지 다급하게 촉구하면서 찰라비는 “지금 당장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바야흐로 이라크에서 자생적 내분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그 도화선만을 당겨준다면 내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사담 체제는 전복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10년 동안 찰라비가 설득력 있게 거듭해서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메시지였다.<br />
…<br />
어쨌든 찰라비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겨도 좋다는 <span style="color:#ff0000;">허락을 클린턴 행정부에게서 받아냈고 자금 지원까지 받았다</span>. 그리고 1994년 10월쯤에는 쿠르드족이 관할하는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 북부의 한 지역에 CIA 파견대가 소규모로 설립</span>되었다. 찰라비의 본부도 그 근처에 있었다. 찰라비의 계획은 이라크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로 불만을 억누르고 있던 시아파 교도(사담과 그 추종자들은 대부분 수니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바스라와 북부의 쿠르디시, 키르쿠크, 모술에서 동시에 폭동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럼 이라크 군대에서 대규모 탈영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이곳을 담당하던 CIA요원 밥 바에르(Bob Baer)는 “우리는 이 작전을 찰라비의 쿠데타라고 불렀다”라고 말했다.<br />
바에르는 당시 상황을 그의 회고록 『See No Evil』에서, “<span style="color:#ff0000;">CIA는 이라크에 단 한 명의 정보원도 심어놓지 못한 실정</span>이었다. … 이라크 내에 단 한 명의 정보원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란, 요르단,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 인근 국가에도 이라크에 대한 정보를 전해줄 정보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다른 정부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수집하는 기구라는 CIA조차 이라크에 관한 한 눈먼 장님이었다”라고 쓰고 있다.<br />
1995년 3월, 찰라비의 폭동이 닻을 올렸지만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바에르는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계획보다 사흘이나 늦게 독자적으로 행동한 쿠르드족의 한 지도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내게 말했다. 이라크 군부 내에서 첩자를 심어두려 했지만 찰라비는 대령이나 장성은 고사하고 위관급 장교조차 확보하지 못했다.<br />
바에르는 “찰라비는 사담을 시험한 것이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바에르는 “찰라비는 허세를 부리며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그는 허세를 부리면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무런 수단도 없지 않았는가!”라며 “찰라비는 심리전이라고 생각했다. 클린턴이 ‘제군들, 이제 공격할 때가 되었어!’라고 말하면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면 사담을 전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 1996년 말,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군은 북부지역에서 찰라비 추종세력을 거의 몰아냈다. 이때 130명의 이라크 국민회의 회원이 처형</span>당했다.[1]</div><br />
찰라비의 계획은 사담 후사인 정권이 사실 매우 취약해서 한 번 깃발만 들면 이탈자가 속출해 그대로 무너질 거라는 식의 비현실적인 희망에 입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한마디로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면서 그들이 이라크 국내에 거의 지지자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br />
<br />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찰라비는 클린턴 행정부 대신 공화당에 밀착해 재기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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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찰라비는 실패의 쓴 맛을 멋들어지게 이겨냈다. 이라크 북부에서 그를 버렸던 클린턴 행정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언론과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곧 INC는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의 재집결지로 부상했고, 첫 부시 대통령을 위해 걸프전에 관여했던 많은 전직 고위관리들도 INC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br />
1998년 2월, 캐스퍼 와인버거, 프랭크 칼루치, 도널드 럼스펠드 등 국방장관을 역임한 유명 정치인들을 비롯해 40명의 저명인사가 서명한 공개편지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사담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를 대량으로 비축하고 있어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경고하는 편지였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민중봉기를 다시 한 번 계획하라</span>고 촉구했다. 찰라비의 1993년 전쟁계획을 그대로 되풀이한 듯한 이 공개편지에서 … 그들은 INC를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정하고, INC가 이라크 북부에 거점을 다시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클린턴 행정부에 걸프전 당시에 동결시킨 이라크 자산(약 15억 달러)을 해금시켜 임시정부를 지원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br />
그로부터 8개월 후, 클린턴 대통령은 의회의 압력에 견디다 못해,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 저항세력을 군사적으로 훈련시키고 군 장비를 지원하는 데 9천7백만 달러를 할당하기로 한 ‘이라크 해방법’에 서명</span>했다.[2]</div><br />
<br />
그리고 공개서한에 동참한 이들 중 다수가 다음 부시 행정부에서 주요 고위직에 취임합니다.<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2000년 대통령 유세기간 동안 <span style="color:#3333ff;">조지 W. 부시와 앨 고어는 사담에 저항하는 반군세력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약속</span>했다. 부시는 “사담을 축출하겠다”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사담이 대량살상무기를 계속 개발하는 경우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다. 선거가 끝난 후,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사견을 전제로 이라크가 새 정부의 우선적 해결 대상국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 하지만 부시 행정부 내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담 후세인과 그의 체제를 제거하는 것이 첫 걸프전 이후로 주된 관심사였다. 클린턴에게 이라크 반군 세력의 지원을 촉구한 1998년의 공개편지에 서명한 사람들 중 서넛이 부시 행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예컨대 <span style="color:#3333ff;">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차관, 더글러스 페이스 정책담당 국방차관</span>이 그런 인물들이다.<br />
<br />
1998년의 공개편지를 기초한 사람 중 하나는 <span style="color:#3333ff;">리처드 펄</span>이었다. 펄은 로널드 레이건 시절에 국방차관보를 지냈고 … 부시 행정부에서 펄은 국방정책위원장에 임명되어, 펜타곤에 전략적 문제들을 조언했다. 찰라비는 부시 행정부 내의 다른 인물들, 예컨대 럼스펠드와 페이스, 그리고 딕 체니 부통령의 수석참모인 <span style="color:#3333ff;">루이스 리비</span>에게도 연줄이 닿았다. 오랫동안 찰라비는 미국기업연구소[네오콘계 싱크탱크]의 저명한 회원들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의 지원을 꾸준히 받고 있었다. 물론 CIA 국장을 역임한 제임스 울시처럼 민주당에도 그를 지원하는 유명인사들이 있었다.[3]</div><br />
다들 잘 알려진 부시 행정부의 매파들이지요. 이 외에도 후에 부시 행정부 고위관리가 될 인사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 리처드 아미티지, 존 볼턴, 폴라 도브리안스키, 잘메이 칼릴자드, 피터 로드먼, 로버트 졸릭이 여기 서명하고, 윌리엄 크리스톨, 로버트 케이건,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네오콘 논객들도 동참합니다.[4]<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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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찰라비 세력을 이용한 작전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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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찰라비의 한 보좌관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9·11테러 이전의 INC의 전쟁계획은 저항세력을 군사적으로 훈련시키고 사담 체제 내에서 변절자를 찾아내며, 미국이 이라크 남부의 비행금지구역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요컨대 2백 명의 <span style="color:#ff0000;">교관을 선발해서 5천 명 가량의 저항세력군을 훈련</span>시키고, 십중팔구 미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짜여질 용병부대를 구성해서 군사력을 강화시키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또한 반군(叛軍)을 이라크 <span style="color:#ff0000;">탱크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강력한 공습</span>으로 어떤 수송수단도 다닐 수 없는 지역을 확보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5]</div><br />
이들의 작전은 기본적으로 망명 이라크인들을 훈련시켜 소수(~수천 명)의 경보병 부대를 만들어 싸움을 맡기고, 필요하다면 이들을 미 공군을 이용해 지원한다는 식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라는 것은 아주 오래된 레퍼토리 중 하나이긴 하지만 성공률은 낮은 편입니다.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쿠바 피그스만 침공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전을 계속 기획하게 되는 것은 <strong>정규 육군 사단을 동원한 본격적인 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는 9.11 이전의 국내정치적 한계</strong>를 반영하는 것입니다.<br />
<br />
대개의 미군 장성들은 이런 작전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중부군 사령관을 지낸 진니 장군은 찰라비 세력을 이렇게 평합니다.<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요즘 이라크 해방법에 따라 자금을 지원하고, 실크 양복을 입고 롤렉스시계를 차고 런던에서 소일하는 INC를 앞세우고 싶어 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1천 명의 그런 전사들을 9천 7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AK-47로 무장시켜 이라크에 침투시켜야 할 것이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얻겠는가? 기껏해야 ‘염소만’(피그스만의 패러디)일 것이다. [6]</div><br />
여담입니다만 찰라비는 훗날 미군의 침공으로 사담 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하지만 부시행정부 고위층의 각별한 비호를 등에 업고서도 국내 지지세력을 규합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맙니다. 결국 모로 가도 안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죠.<br />
<br />
이런 문제점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결국 이라크 전면침공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9.11이 없었더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길이었지요.<br />
<br />
<br />
그런데 레짐체인지라는 것은 꼭 망명자 단체를 앞세울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CIA가 비밀공작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든가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그것 또한 이라크가 아주 좋은 참고가 됩니다.<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CIA 이라크 공작 책임자] 사울은 숙련된 비밀공작원들과 첩보국(DI) 출신 정보분석요원들을 불러모아 과거의 작전을 재검토시켰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12년 내지 15년간 이라크 문제를 다뤄 경험이 풍부했고, 나머지는 발칸반도에서 비밀프로그램을 수행해온 요원들이었다. 핵심문제는 '이라크에서의 비밀공작을 어떻게 보는가?'<br />
<br />
영화와 현대적 신화에서 묘사되는 CIA는 무엇이든할 수 있는 광신적 전사들로 채워진 곳이다. 그들은 불가능한 임무와 위험성을 갈구하는 사람들이다. 사울이 내린 결론은 판에 박힌 고정관념과는 정반대였다. 그가 요약한 사실은 <span style="color:#ff0000;">"비밀공작으로는 사담 후세인을 축출할 수 없다."</span><br />
<br />
CIA는 1979년부터 권력을 잡은 후세인이 <span style="color:#ff0000;">자신을 보호하고 쿠데타를 막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경호체계를 완성했다는 현실</span>을 직시했어야 한다. 이라크 특수보안기구가 그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고, 대통령경호실은 24시간 수행하고 있으며, 공화국특수수비대는 대통령궁과 수도에 있는 정부기관들을 방어하고 있다. 4개의 첩보기관들이 그들의 업무를 지원하였으며, 10여개의 육군 사단을 쿠데타를 분쇄하는데 동원할 수 있었다.<br />
<br />
이라크 정부는 후세인의 생명을 지키고 권력을 유지하는 단 하나의 목표 아래 기능했다. 권력 내부에 대한 첩보활동·계획된 의혹·역할과 권한의 중첩·책임의 분산은 후세인을 이라크 국가 내 모든 것의 중심에 위치하도록 만들었다. … <span style="color:#ff0000;">성공할 수 있는 길은 CIA가 군의 이라크 전면침공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 것</span>이다. 그것만이 성공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CIA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선두에 나섰지만, 이라크에서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임무는 너무 어렵고 목표물은 너무 크다. 후세인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뚫는 것은 군사작전과 침공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7]</div><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2002년 1월 3일 사울은 테닛과 근동과 부과장 그리고 이라크 프로그램을 수행해온 두 명의 공작요원과 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다.<br />
<br />
사울은 어조를 부드럽게 조절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비밀작전으로는 후세인을 제거할 수 없다'고 체니에게 말했다.<br />
<br />
'CIA는 해법이 아닙니다. 독재정권이 조직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목표는 쿠데타를 막는 것입니다. 후세인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입니다. 그 '새끼'는 쿠데타를 억눌러 왔고, 쿠데타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부통령이 이라크 군대를 맡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쿠데타를 일으킬 탄환은 가지고 있지만 탱크를 움직일 기름은 없습니다. 부통령이 기름을 가지고 있다면 탄환을 주지 않습니다. 쿠데타를 준비하기에 충분한 기간 만큼 한 자리에 오래 앉아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br />
<br />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시도한다면 <span style="color:#ff0000;">권부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야</span> 합니다. 그런데 후세인은 쿠데타를 기도할만한 사람들은 일찍이 격리시킵니다. 가능한 팔다리까지 따로 떼어놓으려고 할 사람이니까요. CIA가 측면지원하는 군사작전과 정면침공을 통해서만 후세인을 제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CIA는 과거 이라크 비밀 공작에서 교훈을 얻기 위한 검토를 진행해봤습니다만, 솔직히 CIA는 때가 많이 탔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서 심각한 신뢰도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br />
<br />
쿠르드족과 시아파, 이라크의 예비역 장교들을 포함하여 CIA와 조율해본 사람들은 거의 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면 "꼬리 자르고 도망간" CIA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었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잠재적인 반 후세인 세력에게 <span style="color:#ff0000;">전에 없이 결단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증명</span>해야 한다. 카드란 카드는 이미 다 써먹어서 이제 <span style="color:#ff0000;">대규모 군사적 침공준비 이외에는 그러한 신호로 간주될 만한 것이 없었다</span>. 사울은 UN에 가서는 협상과 봉쇄를 천명하면서 사우디와 요르단에게는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극비리에 축출할 것이라고 귓속말을 하는데서 파생되는 문제점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br />
<br />
"… 또 다른 교훈은 <span style="color:#ff0000;">CIA가 장기간 비밀공작 프로그램을 지속할 수 없다</span>는점입니다. 후세인 정권은 우리가 새로 기용할 만한 정보원들을 색출하여 한직으로 전출시켜 버리기 때문에 재빨리 손을 쑬 수밖에 없습니다."<br />
…<br />
[CIA 국장] 테닛과 사울 일행은 그 뒤 대통령에게도 동일한 브리핑을 했다. 부시가 물었다.<br />
"우리는 은밀한 방법으로 그것을 할 수 있소?"<br />
<span style="color:#ff0000;">"없습니다."</span><br />
부시는 그때 "<span style="color:#ff0000;">젠장(darn)!</span>"이란 말이 얼핏 떠오르더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br />
…<br />
CIA는 '이라크 내에서 새로운 정보원을 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진지하게 임해야 되고 군대를 사용할 것이라는 언질을 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8]</div><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이라크 내 CIA 비밀정보원은 정확히 <span style="color:#ff0000;">네 명</span>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외무부나 석유부 등 정부의 일반 부처에 있었던 관계로, 권력 핵심부를 뚫고 들어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따라서 CIA가 공화국수비대 또는 특수보안기구 같은 군 내부로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 이라크 내부에 심어 놓은 정보원은 비밀통신망을 이용했다. 바그다드에는 미 대사관이 없기 때문에 통신위성을 통해 컴퓨터로 단파 송신을 CIA 본부로 바로 날려 보내는 방식을 흔히 썼는데, 이 방식은 항시 머리끝이 쭈뼛해질 만큼 노출의 위험이 뒤따랐다. 사울은 테닛 앞에서 지난 번 내린 결론을 반복했다.<br />
<br />
'비밀공작으로는 후세인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만이, CIA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후세인을 제거할 수 있는 길입니다. <span style="color:#ff0000;">이라크 내부의 정보원들을 확실하게 포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미국이 전면전을 벌여 후세인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한다는 진정한 결의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span>입니다."<br />
<br />
<span style="color:#ff0000;">부시가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 때마다 첩보활동은 위축</span>됐다. 전쟁은 그들의 첫 번째 선택이어야 했다. 대이라크 비밀공작이 점점 더 깊이 진행됨에 따라 심지어 어떤 요원들에게는 전쟁만이 유일한 선택이 돼 있었다.<br />
사울은 국장과 차장 등 핵심간부들이 일하는 7층에 정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br />
"우리의 한계는 2월 말까지입니다. 2월 말이 되면 사담 정권이 모든 걸 눈치 챌 것입니다. 만일 그보다 훨씬 늦춰진다면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br />
그들이 엄청나게 방대한 비밀을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세인의 경호부대와 첩보원들이 도처에 깔려있었고, 배신자에 대한 응징은 처참하기로 악명 높았다. 정보 제공자들과 스파이들은 곧 임무를 중단해야 할 것 같았다. … 이라크에 있던 사울의 2개 준군사팀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는 일어나는지, 일어난다면 그것은 언제인지, 기본적인 사항조차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막다른 상황에 몰려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경험이었다.[9]</div><br />
즉 요약하면 이라크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 상대를 포섭하려면 일단 대외적으로도 <strong>최후통첩 수준의 압박은 해 줘야 배신자를 만들 수 있다</strong>는 말입니다. 밖에서 설렁설렁 반 년에 한 번씩 6자회담이나 하고 있어서는 쉽지가 않겠죠. 그리고 그렇게 포섭한 배신자도 오래 끌면 잡히게 되므로 단기간에 최대한 포섭한 후 바로 써먹어 끝장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br />
<br />
위에서 "미 대사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데 이것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CIA가 비밀공작으로 정권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대부분 대사관을 거점으로 상당한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경우였습니다. 대사관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공작의 성사 여부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가 1953년의 이란 쿠데타[10]입니다. <br />
<br />
사실 미국이 북한 수준의 통제 사회[11]에서 쿠데타나 봉기를 조직하는데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위의 이라크 사례에서 보듯이 몇 명의 정보원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판국에 무리한 이야기지요. <br />
<br />
그것이 반군이건 쿠데타건 혹은 다른 방법이건 간에 미국이 북한 같은 사회를 침투하려고 생각한다면 우선 탈북자 공동체를 발판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의 공작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는 나라들은 방어 목적에서 그런 공동체에 다수의 끄나풀들을 심어놓기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재미를 본 나라로는 쿠바를 꼽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 쿠바를 겨냥해 미국의 쿠바계 망명자 공동체를 발판으로 조직한 정보망이나 반군은 번번히 쿠바 정보부에게 침투되곤 했습니다. 특히 반군처럼 많은 숫자의 지원자를 모집해야 하는 경우 침투를 방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br />
<br />
작전 거점도 문제입니다. 성공적인 작전이었던 80년대의 아프간 게릴라전 지원 공작의 경우 길고 통제되지 않은 국경을 접한 파키스탄에 거점을 두고 있었으며 주재국 정보기관과 협조 하에 일했습니다. 그런 것 없이 바다를 건너 침투시킨 쿠바 피그스만 침공의 경우엔 반격을 받자 그대로 전멸됩니다. 중국도 강력한 정보기관을 가진 나라로, 중북 국경 건너편에 레짐체인지 기지를 설치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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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초에 발표된 니콜라스 에버스타트의 컬럼[12]은 이들의 좌절감을 잘 보여줍니다. 에버스타트는 네오콘 씽크탱크이자 부시 행정부의 인재 풀로 유명한 AEI의 북한 연구자로 대표적인 미국의 대북 강경론자이지요. 놀랍게도 그는 어떠한 본격적인 개혁에도 북한이 저항할 것이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대안으로 보이는 선군정치를 버리고 (그들도 잘 아는) <strong>평범한 스탈린주의("ordinary" Stalinism)로 복귀하도록 설득해 보자</strong>고 주장합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br />
<br />
미국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기획하는'[13] 레짐체인지라는 것이 전망이 밝지 않은 대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좋은 대안이 있을 때 곧 레짐체인지를 버리고 그 길을 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strong>레짐체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한다는 것은 다른 더 좋은 대안(특히 직접무력사용)이 없다고 느낀다</strong>는 뜻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 />
<br />
그리고 실제 레짐체인지 시도가 적극적으로 진행되는지를 알고 싶다면, 워싱턴이 탈북자들에게 얼마나 적극적으로 접근하는지, 또 반대로 미국을 끼고 도는 탈북자들의 비정상적으로 활발한 활동이 있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한국 정부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너무 늦기 전에 적절한 경고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확실하게 아는 방법은 국정원도 독자적인 대북정보능력이 있으니 그 지분을 갖고 레짐체인지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겠구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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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요약</strong><br />
1. 미국은 클린턴, 부시 할 것 없이 90년대부터 꾸준히 이라크의 레짐체인지를 기획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허황된 계획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가 없었다.<br />
2. 9.11 이후 바뀐 국내 정세로 인해 정규전 침공이 가능해지자, 부시 행정부는 곧 레짐체인지 계획을 버리고 정규전으로 말을 갈아탔다. 이는 그만큼 레짐체인지 계획이 불만족스러웠음을 반증한다.<br />
3. 북한 같은 수준의 통제사회를 비밀공작으로 전복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br />
4. 미국의 과거 레짐체인지 시도는 몇 가지 패턴에 국한되어 왔으며, 아마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br />
5. 레짐체인지로의 관심의 전환은 역설적으로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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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주</strong><br />
[1] Hersh, Seymour M.,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060195916">Chain of Command: The Road from 9/11 to Abu Ghraib</a>, New York: HarperCollins, 2004,<br />
(강주헌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698633&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지휘계통: 9.11테러에서 아부그라이브까지』</a>, 세종연구원, 2004, pp.234-236)<br />
[2] 같은 책, pp.237-238<br />
[3] 같은 책. pp.238-240<br />
[4] <a title="" href="http://www.newamericancentury.org/iraqclintonletter.htm">Open Letter to President Bill Clinton</a><br />
[5] Hersh, p.238<br />
[6] 같은 책, p.248<br />
[7] Woodward, Bob.,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74325547X">Plan of Attack</a>, Simon & Schuster, 2004<br />
(김창영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74048&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공격 시나리오</a>』, 따뜻한손, 2004, pp.106-108)<br />
[8] 같은 책, pp.108-111<br />
[9] 같은 책, pp.153-155<br />
[10] 1953년의 이란 쿠데타에 대한 개괄로는 Kinzer, Stephen.,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471265179">All the Shah's Men : An American Coup and the Roots of Middle East Terror</a>, Wiley, 2003 을, CIA 대외공작사의 난맥을 개괄하는 책으로는 Weiner, Tim.,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307389006">Legacy of ashes : the history of the CIA</a>, Doubleday, 2007 (이경식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30058&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잿더미의 유산</a>』,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을 참조.<br />
[11] 북한에 대한 기밀정보를 검토한 미 대통령 자문위원회조차도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어렵다(extreme case)는 것은 한 수 접어주는 분위기이다. Jehl Douglas., Schmitt, Eric., <a title="" href="http://www.nytimes.com/2005/03/09/international/09weapons.html">Data Lacking on Iran's Arms, U.S. Panel Says</a>, New York Times, 2005년 3월 9일 참조.<br />
[12] Eberstadt, Nicholas., <a title="" href="http://www.aei.org/publications/pubID.22158,filter.all/pub_detail.asp">Pyongyang's Option: "Ordinary" Stalinism</a>, Far Eastern Economic Review, 2005년 3월 21일<br />
[13] 미국이 조직 혹은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북한 내부 사정으로 정변 등이 일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 바라는 방향이 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제외한다.<br />
<br/><br/>tag : <a href="/tag/이라크" rel="tag">이라크</a>,&nbsp;<a href="/tag/찰라비" rel="tag">찰라비</a>,&nbsp;<a href="/tag/INC" rel="tag">INC</a>,&nbsp;<a href="/tag/네오콘" rel="tag">네오콘</a>,&nbsp;<a href="/tag/PNAC" rel="tag">PNAC</a>,&nbsp;<a href="/tag/레짐체인지" rel="tag">레짐체인지</a>,&nbsp;<a href="/tag/비밀공작" rel="tag">비밀공작</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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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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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4 Jun 2009 03:54:5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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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 북폭 재론(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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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71443">북폭 재론</a> 에서 이어집니다.<br />
<br />
윌리엄 페리(민주당)는 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국방장관이었고,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공화당)는 전 국가안보보좌관(포드 & 아버지 부시)으로서 폭격으로 영변 핵시설을 제거할 것을 촉구하는 컬럼을 써서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들의 미 외교협회 대담에서 북폭 옵션을 언급하는 부분을 옮겨 보지요.<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strong>스코우크로프트:</strong> 저는 1994년 당시 국방장관이던 페리 박사가 이 문제로 씨름하고 있을 때, 북한의 핵 재처리 시설에 대한 군사행동을 권고함으로서 그에게 힘을 실어 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그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군사 작전이었으며, 비교적 쉽게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논평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br />
<br />
<strong>페리:</strong> <span style="color:#ff0000;">그 옵션[북폭]은 사실 지난 2003년 이래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span><br />
<br />
<strong>스코우크로프트:</strong> 맞는 말씀입니다.<br />
<br />
<strong>페리:</strong> 우리는 북한이 플루토늄을 얻기 위한 재처리를 하도록 방치했습니다.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자 북한은 금지선을 넘어버렸고, <span style="color:#ff0000;">그 군사적 옵션은 우리에게 더이상 유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차이</span>입니다.<br />
<br />
하지만 제가 국방장관이고 우리가 어려운 시기에 북한과 힘든 협상을 하고 있을 때, 군사 행동을 촉구하는 브랜트 스코우크로프트의 컬럼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br />
<br />
<strong>스코우크로프트:</strong> 그러시라고 제가 컬럼을 쓴 것이지요. <br />
<br />
<a title="" href="http://www.cfr.org/publication/19526/us_nuclear_weapons_policy.html?breadcrumb=%2Fissue%2F418%2Fproliferation">U.S. Nuclear Weapons Policy: Report of a CFR-Sponsored Independent Task Force</a>,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2009년 5월 28일</div><br />
이들이 2003년 이후 과거 생각하던 것 같은 북폭은 무의미해졌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2002년 말에 제네바 합의가 깨지면서 북한은 봉인되어 있던 사용 후 연료봉 8천 개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얻습니다. 일단 재처리가 끝나면 몇 십 kg 정도로 어딘가 잘 숨기면 거의 찾을 수 없지요. 따라서 1차 북핵위기 진행 중 또는 제네바 합의를 맺을 때의 계산으로는 북한이 멋대로 합의를 깨는 징후가 보이면 보관되어 있거나 재처리 중인 사용 후 연료봉을 즉각 때려서 제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br />
<br />
즉 이들은 제네바 합의가 깨진 후에도 부시 행정부가 계속 공격에 나서지 않고 방치한 결과, 더 이상 영변 핵시설을 폭격했다고 북한의 핵능력을 소멸시킬 수 없게 되었고, 그 가치가 없어졌다[크게 줄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br />
<br />
따라서 2002년 말에 제네바 합의가 깨지고 북한이 핵동결을 풀자 당시 관찰자들은 <strong>만약 미국이 단독 행동에 나선다면 조만간</strong>일 것이라고 봤습니다. 시간이 너무 흐르면 기회를 놓치니까요. 반 년, 다시 1년쯤 지나자 북폭에 대한 전망은 크게 떨어지고 맙니다.<br />
<br/><br/>tag : <a href="/tag/월리엄페리" rel="tag">월리엄페리</a>,&nbsp;<a href="/tag/스코우크로프트" rel="tag">스코우크로프트</a>,&nbsp;<a href="/tag/영변" rel="tag">영변</a>,&nbsp;<a href="/tag/영변폭격" rel="tag">영변폭격</a>,&nbsp;<a href="/tag/북폭" rel="tag">북폭</a>			 ]]> 
		</description>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onnet.egloos.com/4171690#comments</comments>
		<pubDate>Mon, 22 Jun 2009 10:02:13 GMT</pubDate>
		<dc:creator>sonnet</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북폭 재론 ]]> </title>
		<link>http://sonnet.egloos.com/4171443</link>
		<guid>http://sonnet.egloos.com/4171443</guid>
		<description>
			<![CDATA[ 
  <br />
1994년의 북폭 계획에 대해서는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2941757">영변폭격안과 미국인 소개 계획</a>에 정리해 둔 바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계획은 그 성격상 한국의 협조 없이는 집행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의 약점이 94년의 준비과정을 통해 잘 드러나게 됩니다.<br />
<br />
그런데 이런 점을 바탕으로 2차 북핵위기의 성격을 생각해 보지요. 저는 2차 북핵위기는 <strong>처음부터 북폭 가능성은 낮았다</strong>고 생각합니다. 2차 북핵위기는 북한이 비밀 우라늄 농축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문제가 위성 사진에 그대로 노출되는 영변 원자로가 아니라 지하에 숨겨놓았을 것이 뻔한 우라늄 농축 플랜트가 되자 그것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느냐가 문제의 선결조건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금창리 사찰 실패에서 보듯이 당시에도 미국이 그 정보를 자신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할 근거가 있었습니다. 설령 한 군데를 안다고 해도 정보란 것의 성격상 그게 다인지는 더더욱 확신하기 어렵기 마련이구요.<br />
<br />
<br />
백악관 NSC에서 아시아담당 책임자였던 마이클 그린의 글을 한 번 보지요.<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strong>허상1:“미국은 언제라도 북한을 공격할 기세다.”</strong><br />
이 오해는 나와 백악관의 동료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2년 서울에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밝힌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졌어야 했다. 물론 미국은 외교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모든 선택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대북 군사적 공격이 한번이라도 적극 고려됐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은 1994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영변을 공격하려 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이번 외교가 실패하면 즉각 군사 행동으로 갈 것이라고 단정한다. 클린턴이 실제로 그랬든 않든, 지금은 1994년이 아니다. <span style="color:#ff0000;">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은 지하에 숨어 있어 공격이 어렵다</span>. 게다가 지금 북한은 보복 위협을 줄 수 있는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를 그때보다 훨씬 많이 보유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북한이 미국의 공격 위협을 구실로 삼아 (6자회담에 참여한) 주변 강대국들을 분열시키고 대미(對美) 압력을 가중시키려 하는 만큼 이것이 오히려 북한을 외교적으로 도와주는 셈이 된다는 것을 알아챘다. <br />
<br />
마이클J 그린, <a title="" href="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602/200602280489.html">내가 목격한 한미관계</a>, 조선일보, 2006년 2월 28일</div><br />
그린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지, 한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는 읽는 사람 마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제가 한 이야기를 그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br />
<br/><br/>tag : <a href="/tag/북폭" rel="tag">북폭</a>,&nbsp;<a href="/tag/고농축우라늄" rel="tag">고농축우라늄</a>,&nbsp;<a href="/tag/HEU" rel="tag">HEU</a>			 ]]> 
		</description>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onnet.egloos.com/4171443#comments</comments>
		<pubDate>Mon, 22 Jun 2009 02:34:26 GMT</pubDate>
		<dc:creator>sonnet</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2차 북핵 위기를 돌아보며 ]]> </title>
		<link>http://sonnet.egloos.com/4170604</link>
		<guid>http://sonnet.egloos.com/4170604</guid>
		<description>
			<![CDATA[ 
  <a title="" href="http://crete.pe.kr/15488">북한 최고의 비밀병기(?) - 코발트 60</a> (crete)에 트랙백<br />
<br />
위 글은 내 글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66881">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의 붕괴와 美-中-日 3각 협의체 문제</a>에 대한 반론에 해당하는 글인데, 읽어본 결과 글의 상당부분은 내 글과 별 관련이 없고 한 가지 논점에 대해서만 답하면 될 것 같다. 그 논점이란 노무현 정부가 TCOG를 깨게 된 이유는 <strong>"부시 행정부의 무모하리만치 과격한 대북외교정책 때문"</strong>이라는 것이다.<br />
<br />
이 논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strong>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논쟁</strong>과 <strong>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strong>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130%;"><strong>1.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논쟁</strong></span><br />
<br />
우선 인수위 시절~노무현 정부 초기의 대미-대북 외교의 큰 가락을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부속 조직으로 ‘북한 핵 문제 특별팀’이 설치됐다. 이 특별팀에는 <span style="color:#3333ff;">윤영관, 이종석, 서주석, 서동만</span> 외에 <span style="color:#3333ff;">문정인</span> 연세대 교수가 포함됐다. 팀장은 윤영관, 사무국장은 위성락이 맡았다. … 윤영관은 외교통상부, 이종석은 통일부, 서주석은 국방부, 서동만은 국가정보원을 맡았고,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선 북한 핵 문제 특별팀과 연계해 노무현 정권의 정책을 입안해 나갔다.<br />
네 사람 모두 한국의 대미 정책이 시대에 뒤처져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대미 정책은 오랜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이 추진해 온 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모든 외교 정책은 미국의 지시를 받아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미 의존 외교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br />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린 첫 회의 주제는 북한 핵 문제였다. 노무현 당선자가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북한 핵 문제는 평화적으로, 협상을 통해 해결한다. 이를 모든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기초로 삼는다” 노무현의 관심은 오로지 북한 핵 문제 하나에 맞춰졌다. “<span style="color:#ff0000;">어떻게 해야 북한의 핵 보유를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미국의 군사 행동을 막을 것인가</span>”에 대한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노무현은 이와 관련해 세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1]</div><br />
이 그룹은 한나라당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구상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strong>상충되는 두 가지 구상</strong>이 존재했다.<br />
<br />
그리고 노무현에게 있어 <strong>북한의 핵 보유를 막는 것</strong>과 <strong>미국의 군사행동을 막는 것</strong>은 대등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미국의 대북공격을 반대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의 행동을 막는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strong>최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strong>한 대통령은 전례가 없었다. 이것이 그의 임기 동안 한미관계에 매우 큰 부담을 주게 된다.<br />
<br />
<br />
<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노무현 대통령은 <span style="color:#ff0000;">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는 미국의 대응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span>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span style="color:#ff0000;">한국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맡겠다</span>고 했다. 이종석이나 서주석은 “북한과 동북아시아의 환경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측 가능한 환경으로 바꾼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물리적 방법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리적 방법까지 동원하지 않는다는 능동적인 자세다. 인수위(통일외교안보 분과)의 네 명은 목표와 원칙 면에서 거의 의견 일치를 봤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논의 결과 대략 두 가지 견해로 압축됐다. 두 가지 견해는 <span style="color:#3333ff;">윤영관과 이종석의 시각차</span>다.<br />
윤영관은 미국과의 밀접한 정책 협의를 강조했다. <span style="color:#ff0000;">미국과 보다 깊은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영향력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을 보다 현실적으로 유도한다</span>는 내용이었다. 그는 “멀리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이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했다.<br />
이종석은 윤영관의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미국의 속내는 북한의 체제 전환이다. 그런 미국과의 정책 협의는 사실상 어렵다.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span style="color:#ff0000;">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보다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때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span>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br />
다만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군사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모두 생각이 같았다. 이들은 미국이 1994년처럼 북한에 대한 강경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2]</div><br />
상충되는 두 가지 구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윤영관과 이종석이었다. 윤영관은 미국과 더 깊게 얽혀들어감으로서 우리 생각을 미국에 반영시킬 기회를 늘리자고 주장했고, 이종석은 미국에 적극적으로 맞섬으로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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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노무현 당선자가 문정인을 포함한 다섯 명을 점심 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도 <span style="color:#3333ff;">윤영관, 문정인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이종석과 서동만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span>고 각각 주장했다. 윤영관과 문정인은 “미국과의 동맹 외에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물었고, 이종석과 서동만은 “미국과의 동맹은 언제까지 이런 상태여야 하나. 미국에 더 강한 태도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반박했다. 윤영관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하려 한다면 우리가 반대하든 말든 실행에 옮길 것이다. <span style="color:#ff0000;">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과 함께 작업함으로써 그 계획의 세부 사안에라도 우리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span>이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까지 군사 행동에 반대하고 미국이 군사 행동을 강행할 경우 동맹은 무너지고 한반도에는 군사 분쟁이 발생할 것이다.” “혹은 우리 반대 때문에 미국이 군사 행동을 포기한다면 미국은 한국과의 동맹을 포기할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 경우 북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결국 최선의 방법은 외교다. 미국과 공동 작업을 하는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br />
이종석과 서동만은 남북한의 민족적 접근성,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지역적 접근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처음부터 <span style="color:#ff0000;">북한 핵 개발은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span>.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다면 북한의 비핵화는 협상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나 유엔에서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북한을 더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포용정책을 펼쳐야 한다.” 대신 <span style="color:#ff0000;">한·중·일 3국의 협력 가능성에 더 중점을 둬야 하는 것 아닌가. 그가 강조하는 것은 중국의 역할</span>이었다. 급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영향력을 활용해 북한을 안정시키고, 비핵화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는 “<span style="color:#ff0000;">미국과의 동맹에 얽매이지 말고</span> 한국이 미국·일본·중국 등과 균형 잡힌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때 중국의 영향력을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의 돌출 행동을 자제시키고, 미국이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br />
하지만 윤영관은 이런 이종석의 견해가 중국의 역할을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교적으로 중국에 기울면 미국이라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을 수 있다. 그러지 말고 탄탄한 한·미 동맹을 유지함으로써 한·미·일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보다 안정적인 안보 정책이라고 반박했다. 윤영관은 특히 <span style="color:#ff0000;">TCOG에서 한·미·일 3국 정책 협조 체제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span>했다.[3]</div><br />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정치외교학자들(윤영관, 문정인)과 북한학자들(이종석, 서동만) 사이에 단층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외교학자들은 초강대국인 미국의 힘을 강하게 의식한 반면, 북한학자들은 자주나 민족에 중점을 두면서 필요하면 미국과 맞설 수도 있다는 시각을 보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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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갈등은 이종석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윤영관과 외교부가 끝없이 밀리는 형세를 보이다가 결국 2004년 1월에 <strong>외교부의 일대 숙청과 윤영관의 낙마</strong>로 끝이 난다. 그 이후 노무현 정부 내에서는 이종석이 확립한 정통적 견해에 더이상 도전하기 힘든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럼 이 논쟁에 있어 노무현의 입장은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노무현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하겠다는 입장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이종석과 유사한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유행하던 표현대로 윤영관은 노무현과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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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이 보여준 필요하면 중국 등과 연대해서라도 미국의 앞을 가로막겠다는 생각은 혁명적인 데가 있었다. 이는 같은 당 출신이자 햇볕정책의 선구자인 김대중과 비교해 보아도 잘 드러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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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김대중 전 대통령은 균형자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4대 강국 속에 끼인 작은 나라로 한·미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고, 한·미·일 공조를 유지하고, 4대 강대국과 협력·보완해 나가는 세 가지 틀 속에서 외교 관계를 진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span style="color:#ff0000;">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span>이다.”[4]</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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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제시하는,<br />
<div align="center">1순위: 한미동맹<br />
2순위: 한미일 공조<br />
3순위: 미일중러와의 협력</div><br />
이란 전략적 틀의 서열은 명쾌한 데가 있다. 이런 시각은 북방정책으로 중러에 접근했던 노태우 이래 김대중까지 정권에 관계없이 다들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이 서열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어설프게 등장해 미국을 열받게 만들었던 2002년의 '중재자'니 2005년의 '동북아 균형자'등은 모두 김대중이 <strong>운명이라고까지 말하는 전략적 틀의 서열</strong>을 무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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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하나 들어보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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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프랑스를 공식방문 중인 노무현(盧武鉉) 대통령은 5일 오후(현지 시간) “북한의 체제 문제를 걸고 들어가는 한 붕괴를 원치 않는 <span style="color:#ff0000;">중국, 한국과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체제 교체)를 해야 된다고 하는 나라들과의 사이에 손발이 안 맞게 돼 있다</span>”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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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이날 파리 인터콘티넨털 르그랑 호텔에서 현지 교민 350여 명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span style="color:#ff0000;">미국과 일부 서구 국가들</span>에서 북한의 체제가 결국 무너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더 불안해 하고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관련국 간에 손발이 안 맞을 경우) 북한 핵 문제가 안 풀린다”고 덧붙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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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발언이 북한의 체제 문제를 놓고 한국, 중국과 미국이 대립하는 것처럼 비치자 김종민(金鍾民) 청와대 대변인은 간담회 후 “노 대통령이 말한 ‘미국과 일부 서구 국가들’, ‘레짐 체인지를 해야 된다고 하는 나라들’이라는 표현은 그 나라의 정부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국가 내부의 일부 사람들, 일부 목소리가 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이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미국내 네오콘(신보수주의) 세력을 겨냥한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5]</div><br />
이 연설은 <strong>한국과 중국이 한 편이 되어 미국에 반대한다는 구도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언급</strong>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희석해 보려고 청와대 대변인은 그것을 일부세력(네오콘)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문제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같은 기사에 등장하는 분석을 보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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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익명을 요구한 한 한미관계 전문가는 “<span style="color:#ff0000;">노 대통령은 미국 내 네오콘과 미국 정부를 분리해 대응하려고 하지만 2기 부시 행정부에서는 네오콘이 미국 주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span>”며 “네오콘의 시각과 주장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제3의 논리와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6]</div><br />
이 말마따나 부시 재선 직후 시점에 한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네오콘과 미국정부를 분리해 네오콘만 때린다는 생각은 변명으로는 궁색하고, 제정신으로는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는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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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우리 편'으로서의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 사건은 그 외에도 적지 않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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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그는 지난 13일 새벽(이하 한국시각) 로스앤젤레스 국제문제협의회(WAC) 주최 오찬 연설에서 “<span style="color:#ff0000;">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span>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많은 경우 북한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span style="color:#ff0000;">이 문제에 관한 북한의 주장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span>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린 뒤 “지금 고쳐진 원고를 보고 처음했던 표현을 다시 찾으려 노력중인데 합리적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며 “내가 처음 준비했던 표현은 ‘이 문제에 관한 북의 주장은 여러 상황에 비추어 <span style="color:#ff0000;">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span>’ 였던 것 같다”고 수정했다.[7]</div><br />
이는 <strong>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 핵무장의 정당성을 일부 인정</strong>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는 노무현 정부가 품고 있던 (미국과 북한 사이의) '중재자'라는 인식이 잘 드러난다. 즉 한국이 미국에게는 북한의 입장을 설명하고, 북한에게는 미국의 입장을 설명해 합의를 끌어내겠다는 식이다. 하지만 (유사시에 북한을 상대로 함께 싸운다는 개념의) 동맹국과 중재자는 공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미국 측 입장에서는 평소에도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나라가 전시에는 자신을 지켜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 어이없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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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군사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거기 최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전례없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앞서 문제가 된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의 붕괴는 그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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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130%;"><strong>2.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의 유용성</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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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TCOG는 미국과 일본이 한 패가 되어 한국을 압박하기만 하는 조직은 아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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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200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3국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는 <span style="color:#ff0000;">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HEU 문제를 함께 질문하는 모양새</span>가 나타났다.<br />
켈리는 “북한은 장래 결코 경수로를 갖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 대표인 다나카 히토시와 한국 대표인 이태식이 그것을 비판했다. 특히 다나카는 격렬했다.<br />
다나카는 미국의 HEU 정보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졌다. 미국 측 참석자의 한 사람이 “한국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사태 해결을 위해 마이너스다. 너무 지나쳤다”고 느꼈을 정도다.[8]</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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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한국측 대표였던 이수혁도 이런 측면에서 TCOG란 틀이 미국을 설득하는 데 유익하다고 지적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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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한·미·일 3자 공조는 계속되어야 한다. TCOG를 통한 공조 체제 유지가 필요한 것은 일본의 역할 때문이다. 나는 2004년 2월 해외 공관장 회의에서 <span style="color:#ff0000;">일본을 등에 업고 가야 미국을 설득할 수 있다</span>고 했다. 6자회담 과정에서 우리가 미국과 이견을 보이는 문제에 대해 일본이 우리의 주장에 동조할 경우 미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사례들을 많이 경험했다.[9]</div><br />
다만 공조라는 결과물을 내놓기 위한 이런 틀을 통해 미국을 설득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은 우리 입장과 반대되는 흐름이 대세일 때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쪽도 어느 정도 따라가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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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런 흐름은 시간이 가면 바뀐다. 예를 들어 일본이 강경책을 계속 주장하는 중에 미국이 대북협상에 적극적으로 돌아서자 오히려 일본이 고립되는 모습도 관찰되기도 했다. 북한을 침공한다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은 실제로 채택될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시간이 흐르면 3국의 입장은 조금씩 바뀌기 마련이다. 기회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판을 깨는 것은 그야말로 단견이 아닐 수 없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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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130%;"><strong>3.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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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튀는 행동이 "부시 행정부의 <strong>무모하리만치 과격한</strong> 대북외교정책" 때문에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일까? 한 번 돌이켜 보기로 하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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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북한정책에 관한 한 새 부시 행정부에서 아무리 온건한 인사라도 민주당 행정부에 비하면 훨씬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이들을 포함한 어느 불카누스도 북한과 맺은 협약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span style="color:#ff0000;">월포위츠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1994년 제네바 합의의 폐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단 한마디로 “아니오”라고 대답했다.</span> 그는 새 행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대결정책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span style="color:#ff0000;">그는 감세, 미사일 방어, 중동 평화 문제 등 새 행정부가 추진할 다른 목표들이 있다며, “우리는 (북한보다) 더 중요한 일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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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color:#3333ff;">근본적인 문제는 불카누스들의 새 독트린이 이라크와 달리 북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북한은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남한을 공격해 서울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제공격이 가능한 국가가 아니었다. 북한은 또한 민주주의 확산을 위한 시범 프로젝트의 대상 국가가 될 수도 없었다.</span> 일부 불카누스들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 이라크를 아랍의 정치문화와 중동 전체의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민주주의 모델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의 경우, 이미 일부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나머지들도 북한의 뒤를 따르지는 않을 국가들이었다. 이라크는 정세가 불안정한 지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그것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나라였지만, 북한은 급성장하는 지역의 한가운데 놓여 있지만 고립돼 있는 나라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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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ff0000;">그래서 불카누스들은 북한문제만 만나면 미봉책으로 대처</span>해왔다. 이들은 세계 다른 지역의 현안들에 대해서는 대담한 접근법과 신속하고 항구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면서도,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심지어 위험한 핵무기 프로그램이 더욱 진전될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기다리는 길을 선택했다. 이들은 여전히 중국과 러시아가 결국 북한 지도자 김정일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압력을 넣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들은 또 북한의 절망적인 경제문제가 북한을 더욱 타협적으로 나오게 만들 날이 오기를 갈망했다. 일부 불카누스들은 나아가 북한의 붕괴와 정권교체를 희망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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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는 긴급 상황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시간을 끌었다. 국무장관 파월은 북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상투어가 돼버린 “<span style="color:#ff0000;">위기가 아니다</span>”는 말을 되뇌었다. 북한이 핵 원자로를 재가동했을 때도 관리들은 “위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북한이 국제사찰단을 추방했을 때도, 핵무기 개발을 위해 다시 한 번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도 위기가 아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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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그룹으로서 불카누스들은 자신들의 경력 내내 군사력에 집착해 왔다. <span style="color:#ff0000;">그러나 북한은 이라크 문제와는 달리 군사적 해법이 유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span>였다. 부시 행정부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해결책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럼스펠드는 “북한은 위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종류의 위협이다. 적어도 지금은 외교를 통해서, 다른 방법을 통해서 처리할 수 있는 위협이다.”라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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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대한 행동을 준비하고, 평양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해 나갈 무렵인 2002년 말과 2003년 초, <span style="color:#ff0000;">미국의 불확실하고 임시방편적인 북한 정책은 럼스펠드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는 말로 요약</span>됐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 문제를 외교관들의 손에 맡겨 놓고 있었다.[10]</div><br />
이처럼 미국은 북한보다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2875594">더 우선순위가 높은 나라들</a>을 많이 갖고 있어서 북한은 일단 전쟁 이외의 방법으로 상대하겠다는 의도를 여러 모로 드러내고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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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측의 분위기는 두 번의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도 잘 드러난다. <br />
2002년에 있었던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을 보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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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김대중이 레이건 대통령의 이야기를 한 대목에서 부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북한을 침략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 부시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이 미국의 역사를 상기시켜 주었다”며 레이건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고 명확하게 말했다. “우리의 태세는 순수하게 방어적이다. 그 이유는 위협에 취약한 DMZ의 존재에 있다”고 덧붙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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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한국의 언론은 일제히 “북한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부시의 발언을 톱뉴스로 다뤘다. 그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부시는 <span style="color:#ff0000;">“그런 게 뉴스가 되나”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span>을 지었다.[11]</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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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의 노무현-부시 정상회담에서도 미국측의 반응은 비슷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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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한국 측은 공동 성명에 군사 옵션을 넣지 않은 것이 외교적 승리라고 선전했으나 <span style="color:#ff0000;">미국 측은 이런 반응에 의아</span>해 했다. 미국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span style="color:#ff0000;">당시 부시 행정부에서 대북 군사 옵션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span> 하지만 청와대는 노무현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미국은 대북 군사 공격을 하려 한다’고 심각하게 믿고 있었다. 청와대 직원들이 노무현을 그렇게 세뇌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12]</div><br />
물론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북한 공격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한 것은 분명하다. 원한다면 그 의도까지는 순수했다고 평가[13]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건 사실 워싱턴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따른 설레발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설레발 때문에 한미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는 부시나 네오콘, 공화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4168457">민주당 측</a>에서도 동맹의 미래를 우려하는 견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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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폭에 대해서는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미국을 우선시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서 미국을 안심시키며 일했다. 적어도 해외에 가서 미국은 중국과 한국의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한다든가 하는 식은 아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노무현은 <strong>윤영관을 내치고 이종석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과거의 한국 정부들과는 전혀 다른 한미관계를 선택</strong>했던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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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130%;"><strong><a name="4">4. 제네바 협약 붕괴의 책임</a></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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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반론에서 제시되는 부시 행정부의 무모하리만치 과격한 대북외교정책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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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TAN; padding:15px; background:IVORY;">크린턴 행정부 시절 분명히 북미간에는 상당할 정도의 외교적 접근이 있었고 제네바 합의를 통해 미국이 더 이상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과 위협을 금지할 것을 공식적으로 확약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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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시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더불어 2002년 1월 국방부를 통해 핵태세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를 발표했는데 유사시 핵무기 사용 국가에 기존의 러시아, 중국에서 이라크, 이란, 리비아, 시리아, 북한을 추가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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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명백한 제네바 합의 위반 사항이다.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 위협을 금지한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 (crete)</div><br />
그런데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인 것 같다. 한 번 비교를 해 보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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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클린턴 행정부 기간 동안, 핵문제를 풀기 위한 조미 협상의 결과로, 미국의 조선 정책은 적대 그 자체에서 부분적 포용으로 옮겨가는 듯 보였다. 얼마 동안 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의 가능성도 희미하게나마 존재했다. 흑연감속로와 사용후 연료봉의 동결, 그리고 중유와 경수로의 제공으로 말이다. 그러나 <span style="color:#ff0000;">부시 행정부가 양자 간 정치 대화를 중단하고, 우리를 ‘악의 축’이라고 선언하고, 선제 핵공격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핵 문제는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span>[14]</div><br />
이것은 북한 외무성 미국 국장인 리근의 보고서 중 일부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즉 위 주장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저기에는 북한의 위반사항은 쏙 빠져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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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합의가 깨진 데 기여한 원인들을 다채롭게 거론하자면 잡다한 것들을 많이 들 수 있겠지만, 합의를 침몰시키고 제2차 북핵위기를 일으킨 단일 사건을 꼽는다면 그건 누가 뭐래도 2002년의 10월의 켈리 차관보 방북시에 <strong>미국이 고농축 우라늄(HEU) 비밀핵개발 의혹을 추궁하자 북한의 강석주가 이를 인정</strong>한 것 이외에는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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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북한의 그 비밀핵개발은 부시가 당선되기 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칸 박사가 1990년대 초부터 북한에 원심분리기 본체와 부품 설계도를 제공했다고 인정[15]했으며, 1999년 3월 일본은 북한의 대성섬유 무역상사가 발주한 주파수 전환기 2기의 수출을 금지[16]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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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파키스탄과 북한의 접근은 1993년 12월 베나지르 부토 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뒤 이뤄졌다. 부토는 당시 방북 때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아사히 신문(2004년 7월 18일자)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북한 측도 그에 상응하는 기술을 입수했다. 우라늄 농축 기술이었다. 부토는 당시 방북에 칸을 동행시켰다. … 미국 정부 고위 관리는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 커넥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br />
“<span style="color:#ff0000;">1998~1999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북한에 P1과 P2, 두 가지 크기의 원심분리기가 20개 정도 도착</span>했다. 두 가지 모두 시범용(견본)이었다. 클린턴 정권도 한참 지난 뒤 이 사실을 알게 됐다.”[17]</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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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했듯이 부시는 2002년 2월 방한해 김대중의 요청에 따라 북한을 침공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 바 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 등 다른 선순위 사항이 많았고, 그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에게 상충되는 신호를 보냈다는 점은 다소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북한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북한이 중유 지원을 받는 대가로 핵동결을 계속 유지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요약하자면 제네바 합의는 <strong>북한의 HEU개발 시인->KEDO의 중유지원 중단->북한의 핵시설 재가동</strong>이라는 과정을 거쳐 깨졌다. 그 책임은 기본적으로 북한 쪽에 있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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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북한 측이 '그래 나 HEU 있다 어쩔래'라고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자 미국은 당황했다. 미국은 처음에 이 사실을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언론에 정보가 새어나감에 따라 공개할 수 밖에 없게 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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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워싱턴에 돌아간 켈리는 국무부의 상층부에 방북 결과를 보고했다. 아미티지의 첫 반응은 “정말 그렇게 말했어?”였다. 파월도 “정말 갖고 있다고 말했단 말야?”라고 말끝을 급격하게 높였다. 파월은 그것을 부시에게 보고했다. 부시는 “에, 뭐라고? 인정했다고!”라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놀랍고 예상 밖이란 반응은 공통적이었다.<br />
“부정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시인했으니 <span style="color:#ff0000;">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곤혹스러웠다</span>.”(미 정부 고위 관리)[18]</div><br />
이는 미국이 북한에게 HEU를 추궁할 때, 제네바 합의를 적극적으로 깰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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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 1기 대북정책에서 나타난 주요한 문제는 강경한 위협과 대결을 택한 데 있지 않았다. 진정한 문제는 <strong>미국이 북한을 진지하게 상대 -그것이 전쟁이던 협상이던 간에-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strong>는 점이다. 미국의 태도는 엉거주춤한 것이 문제였지, 단호해서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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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130%;"><strong>5. 정리: "모든 선택이 테이블 위에 있다"</strong></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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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야길 했으니 정리를 해보자. <br />
2차 북핵위기 이후 대북협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군사력 옵션도 포함한) "모든 선택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표현을 둘러싼 논쟁은 북한을 칠까 말까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6자회담 대표를 지냈던 이수혁은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잘 요약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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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북한이 핵을 포기하기 위해서 최종 수단으로 <span style="color:#ff0000;">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는 카드는 유효</span>할 수 있다. <span style="color:#ff0000;">경우에 따라서는 한국도 이에 동조하는 강경 입장을 취하면 협상에 상당한 도움</span>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말했을 때 한국 국민이나 외국의 투자자들이 곧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심리적 동요이다. 북한은 더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은 무력 사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span style="color:#3333ff;">협상 전략에 부담이 되더라도 북한에 대해서 공격하면 안 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말하여 그 가능성을 부인해야 하는 상황</span>이었다. 미국의 입장은 <span style="color:#3333ff;">실제로는 북한을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특정한 선택(옵션, option)을 배제한다고까지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span>이었다.<br />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논쟁은 어느 면에서는 논쟁을 위한 논쟁이었다. <span style="color:#ff0000;">국민들의 성숙한 판단력이 문제</span>였다. 미국이 군사적 선택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여 군사력을 한반도에서 한국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는 행사하지 않을 것이며, 군사적 선택을 배제한다고 말했다고 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군사력은 사용되지 않는다고 믿을 수도 없다.<br />
국제정치는 현실적이다. 군사적 행동은 국익과 안보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행사되는 것이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작은 희생을 각오하는 판단력, 즉 합리성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심리적 요소가 문제라면, <span style="color:#ff0000;">군사력 불사용 천명이 북한과 협상에 미치는 영향과 군사력 사용 가능 천명이 한국의 정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span>하면 된다. 한국은 후자의 경우에 무게를 더 두었다.[19]</div><br />
이는 전쟁이냐 아니냐라는 극단적인 성격이 아니라 <strong>협상술 선택에 따른 장단점 계산</strong>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이 이런 강경 협상술의 가치를 이해하고 현명하게 동요하지 않는다면 한국도 더 자유롭게 강압적인 협상술을 이용해 성과를 거둘 여지가 있다는 말도 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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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국측이 집요하게 요구할 경우 미국 측은 내키지 않지만 이 점에 대해 양보하기도 하였다. 이라크 침공의 경우처럼 <strong>미국이 단단히 결심한 경우엔 그런 것은 불가능</strong>했다. 이것은 앞서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의 강경정책이라는 것이 대단한 실체가 없는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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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의 '맞춤형 봉쇄'나 2004년의 '관리된 압박' 또한 돌이켜보면 별다른 실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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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15px; background:#DDDDDD;">2002년 12월 29일 미국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부는 북한이 만약 핵무기 제조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북한에 대해 경제적·정치적 압박 수위를 높이기 위한 포괄적인 새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미 행정부 고위 관리들을 인용하여 보도했다.<br />
“행정부 관리들은 소위 ‘<span style="color:#ff0000;">맞춤형 봉쇄</span>(tailored containment)’라고 불리는 북한에 대한 고립 정책이 북한의 핵 개발 야망을 꺾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맞춤형 봉쇄’라는 용어는 북한 문제가 이라크나 이란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으로 주로 정치·경제적 압력과 다국 간의 최대한의 협력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관리들은 설명했다. 새로운 정책에 따라 북한의 주변국들은 북한과의 경제교류 축소가 권고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경제제재로 압박을 가하며 미국은 북한의 돈줄을 끊기 위해 북한 미사일 선적 선박의 이동을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br />
… 돌이켜 보면 언론의 입장에서는 ‘맞춤형(tailored)’이라는 용어를 잘 선택했다. 한국어 번역 ‘맞춤형’도 위기 인식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단어 선택이었다. 한국민에게 ‘맞춤형’이라는 단어는 양복감 위에 분필로 모형이 그려져 있고 재단사는 분필로 그려진 선을 따라 양복감을 막 베려고 뾰쪽한 가위 끝을 대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자. <span style="color:#ff0000;">봉쇄를 위해 분필로 그리기는커녕 분필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span> 위기감을 고조시키기에 안성맞춤의 우리말번역이었다.<br />
…<br />
2004년 12월 6일 미 백악관 해들리 안보보좌관 내정자는 한국 국회 방미단에게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위해 일종의 ‘<span style="color:#ff0000;">관리된 압박</span>(managed pressure)’이 필요하며, 6자회담 참여 5개국이 북한에 대해 더 이상 시간이 없으니 대화 테이블로 나오라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 일환이라고 말했다. …<br />
그러던 차에 2004년 12월 방미하여 미 국무부 켈리 차관보에게 ‘관리된 압박’에 관한 미 행정부의 논의 동향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켈리는 이 용어를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이었다. <span style="color:#ff0000;">담당 고위 관리가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을 가지고 한국은 흥분했던 것</span>이다. 어느 한 관리의 말이 꼭 정부의 통일된, 또는 정부 내에서 깊이 논의된 이야기가 아닌 경우를 많이 본다. … 미국의 관리는 ‘관리된 압박’을 이야기했을 때 압박 자체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카드로 말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br />
… 북한 핵 문제로 북한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면 [뭐든] 관리되고 절제되고 통제된 압력일 것이다. tailored나 managed의 수식어가 별난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것은 일부 관리들의 말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 결과였다.[20]</div><br />
부시 행정부의 강경정책이라는 인상을 준 것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북한을 겨냥한 것이라면 이런 솜방망이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였던 한국 측의 섬약한 신경에 있다. 협상력을 키우려면 대북 강경책에 관한 한 한국인의 신경은 좀 더 굵어질 필요가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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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주</strong><br />
[1] 船橋洋一, 『<a title="" href="http://bookweb.kinokuniya.co.jp/guest/cgi-bin/wshosea.cgi?W-ISBN=402250241X">ザ·ペニンシュラ·クエスチョン 朝鮮半島第二次核危機</a>』, 朝日新聞社, 2006<br />
(오영환 외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9005X&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김정일 최후의 도박</a>』, 서울: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p.306-307)<br />
[2] 같은 책, pp.308-309<br />
[3] 같은 책, pp.310-312<br />
[4] 같은 책, p.372<br />
[5] 김정훈 부형권, <a title="" href="http://www.donga.com/fbin/output?bestclick=news&f=ncs&n=200412060330">盧, 파리 교민 간담회: 부시-네오콘 분리대응…실효성 의문</a>, 동아일보, 2004년 12월 6일<br />
[6] 같은 기사<br />
[7] 백기철, <a title="" href="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4/11/003000000200411141820054.html">노대통령 LA연설 '대북강경책 NO' 단호한 메세지</a>, 한겨레, 2004년 11월 14일<br />
[8] 船橋洋一, pp.197-198<br />
[9], 이수혁,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9788961884006&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전환적 사건: 북핵 문제 정밀 분석</a>, 중앙북스, 2008, p.341<br />
[10] Mann, James,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143034898"><em>Rise of the Vulcans</em></a>, Penguin, 2004<br />
(정인석 권택기 역, <a title="" href="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8870067&orderClick=LAA">『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a>, 박영률출판사, 2005, p.357-358, 446-447)<br />
[11] 船橋洋一, p.174,176<br />
[12] 같은 책, p.338<br />
[13] 사실 이 문제를 어떤 경우에도 북한을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대북 저자세의 결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br />
[14] Pritchard, Charles L., <a title="" href="http://www.amazon.com/exec/obidos/ISBN=0815772009">Failed Diplomacy: The Tragic Story of How North Korea Got the Bomb</a>, Brookings Institution Press, 2007<br />
(김연철, 서보혁 역, 『<a 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2851&ttbkey=ttbsonnet0555001&copyPaper=1">실패한 외교: 부시, 네오콘 그리고 북핵위기</a>』, 사계절, 2008, pp.31)<br />
[15] Sanger, David E., <a title="" href="http://www.nytimes.com/2005/09/13/international/asia/13musharraf.html">Pakistan Leader Confirms Nuclear Exports</a>, New York Times, 2005년 9월 13일<br />
[16] 船橋洋一, p.127<br />
[17] 같은 책, p.182<br />
[18] 같은 책, p.161<br />
[19] 이수혁, pp.77-78<br />
[20] 같은 책, pp.213-218<br />
<br/><br/>tag : <a href="/tag/북한" rel="tag">북한</a>,&nbsp;<a href="/tag/미국" rel="tag">미국</a>,&nbsp;<a href="/tag/노무현" rel="tag">노무현</a>,&nbsp;<a href="/tag/김대중" rel="tag">김대중</a>,&nbsp;<a href="/tag/윤영관" rel="tag">윤영관</a>,&nbsp;<a href="/tag/이종석" rel="tag">이종석</a>,&nbsp;<a href="/tag/부시" rel="tag">부시</a>,&nbsp;<a href="/tag/대북정책" rel="tag">대북정책</a>,&nbsp;<a href="/tag/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 rel="tag">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a>,&nbsp;<a href="/tag/TCOG" rel="tag">TCOG</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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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0 Jun 2009 22:27:3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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