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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My Sweet Lif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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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多情多感</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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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Mar 2009 06:27:0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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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키워드로 읽는 우리시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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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trong><span style="FONT-SIZE: 130%">욕망의 식민지서 저항을 욕망하라</span></strong> <p style="MARGIN-TOP: 30px"><div style="LINE-HEIGHT: 22px"><span style="FONT-SIZE: 100%; COLOR: #222222"><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right" border="0"><tbody><tr><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d><img alt="" hspace="0"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1/12/009000000120050112A01130114.jpg" border="0"><br><p style="MARGIN-TOP: 10px"></p><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r><tr><td bgcolor="#ffffff" height="1"><img height="10" alt=""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1" border="0"></td></tr></tbody></table><p>&nbsp;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들이 넘실거린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뚜렷한 요소들 중 하나는 욕망이다. 물론 욕망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이 시대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표현되는 구체적 양태들은 각 시대마다 달리 나타난다. 인간은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등의 양상들(현실, 가능, 필연 등)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 양상들이 처하게 되는 맥락들과 그것들 자체가 맺는 관계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해야 한다”의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신 “~하고 싶다”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욕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불황기를 맞아 더욱 더 기형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 욕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p><br>&nbsp;인간이란 자신의 내부가 의지(意志)하는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욕망은 과연 누군가의 마음속에, 내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자신이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이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내면화한(자기의 내부로 받아들인) 결과들일 뿐이다. 사람들이 옷을 살 때 신경 쓰는 것은 그 옷이 내게 편할까 하는 것보다는 남이 이 옷을 입은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기를 쓰고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것도 실제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인정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할 때조차도 사람들은 타인들이 바라보는 자기 배우자의 모습을 통해서 그 결혼의 의미를 가늠하게 된다. 인간은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p><br><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left" border="0"><tbody><tr><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d><img alt="" hspace="0"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1/12/00900000012005011202163875.jpg" border="0"><br></td></tr></tbody></table>&nbsp;타인의 욕망을 가늠하는 잣대, 곧 자신이 타인의 욕망을 간파해내는 잣대는 타인의 눈길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통해서 자신을 판단한다. 그리고 타인의 눈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한 인간의 눈길 속에는 그 눈길이 향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판단·감정·요구… 등이 모두 깃들어 있다. 그래서 타인의 눈길은 자신의 거울과도 같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판단하듯이, 타인의 눈길을 보고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판단한다. 타인의 눈길에 비친 자기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기이다. <p><b><br>*타인의 눈길로 욕망하는 인간</b> <p>&nbsp;그러나 여기에서 타인의 눈길이란 반드시 물리적 눈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현존(現存)하지 않을 때에도,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마주대하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대접’은 곧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눈길이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표, 회사에서 받는 ‘대우’… 등등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적 대접·대우는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눈길이 모두 모여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다. 그 거대한 눈은 타인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눈이다. 우리는 그 눈을 ‘사회’라고 부른다. <p><br>&nbsp;이 보이지 않는 눈, 거대한 눈길은 어떤 이름에 응축된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명사이지만, 동물·가구… 같은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일정한 자리를 함축하는 이름이다. 회사에서 계장·과장·부장… 같은 이름들은 타인들의 다른 눈길, 사회의 다른 대우를 함축하는 이름들이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이름을 욕망하게 된다. 예컨대 의사·변호사·사장… 같은 이름들은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이름들이다. 타인들은 이 이름들을 욕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들이 욕망하는 이 이름들을 욕망하게 된다. 어디에 가나,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이 이름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조선 시대에는 태어날 때 이미 이런 이름들을 가지게 된다. ‘이’(李), ‘김’(金), ‘박’(朴) 등의 이름(즉 성)은 이미 한 인간을 사회의 어떤 자리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이름들이 생겨났다. ‘~대학(출신)’, ‘~회사’… 등등. 이 수많은 이름-자리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거기에서 응축되는, 곧 타인들의 욕망이 응축되는 곳이고, 그래서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욕망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p><br>&nbsp;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right" border="0"><tbody><tr><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d><img alt="" hspace="0"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1/12/00900000012005011202163921.jpg" border="0"><br></td></tr></tbody></table>이러한 이름-자리들은 일정한 체계를 구성한다. 소위·중위·대위… 같은 이름-자리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정한 유기적 체계를 구성한다. 체계를 구성하기에 눈길들로 기능한다.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각각이 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즉 하나의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그것의 자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단순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의 놀이를 함축하는 체계이기에 차라리 체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타인들의 눈길은 일정한 체제를 형성한다. 즉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p><br>&nbsp;무엇이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드는 것일까? 이런 이름-자리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왜 우리는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이런 이름-자리들이 체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두 권력은 국가장치와 자본주의이다. 국가장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p><b><br>*권력이 욕망 서열화·체계화 </b><p>&nbsp;20세기 중엽 마르크시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학교·군대·공장·병원·회사·종교단체… 같은 장치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 불렀다.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이 국가장치라는 대타자들(커다란 타자들)&shy;자신과 구분되는 다른 것들은 타자들이다. 그런 타자들 중 국가장치들은 커다란 타자들이다&shy;에서 어떻게 소주체들(작은 주체들)로 길러지는가를 규명했다. 학교·군대… 같은 대타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부를 때)&shy;“조국이 너를 부른다!”&shy; 우리는 그 대타자들이 길러내는 소주체가 된다. 알튀세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과 상보적이다. 푸코가 우리를 소주체로 길러내는 훈육장치들을 역사·시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면, 알튀세는 국가장치들을 사회·공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고 하겠다. 우리의 욕망은 이 훈육장치들/국가장치들 속에서 길들여지고 박제화된다. <p><br>&nbsp;마치 타원의 두 초점처럼, 국가장치와 더불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이다. 근대적 국가장치와 쌍둥이로 태어난 자본주의 체제는 오늘날 국가(‘국민국가’)와 복잡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지배하고 있다. <p><b><br>*국가·자본이 욕망을 길들여</b> <p><br>&nbsp;자본주의는 얼핏 우리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는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등 기존의 사회들과는 달리 결코 욕망을 부정하거나 누르려 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의 공기나 물과도 같다 해야 할 현대 문화를 창조해냈다.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발달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두 날개이다. 자본주의는 컴퓨터·휴대전화… 같은 테크놀로지들과 스포츠·연예… 같은 대중문화들을 두 날개로 삼아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욕망을 부추기고 조작해낼 뿐 긍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돈이 되는 욕망(대중의 욕망)만을 긍정한다. 자본주의는 대중의 욕망을 쥐어짜듯이 우려내 돈을 포획해 간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주의의 욕망은 대중의 욕망을 식민화해 우려 짜낸다. 천박한 욕망의 파도가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다. <p><br>&nbsp;전통 문화에서 천박한 욕망에의 저항은 대부분 욕망의 제어(유교)와 제거(불교)를 통해서 추구되었다. 우리말 ‘욕망’이 애초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면서 사용되는 것은 이런 전통 문화의 영향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라는 고전적인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들에 대응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욕망에 저항하는 다른 욕망, 저항하는 욕망, 건강한 욕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배하려는 욕망과 천박한 욕망에 저항하는 위대한 욕망을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사상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입장에서 ‘욕망의 철학’을 전개했다. 전자의 길(욕망을 비우라는 전통사상의 가르침)을 우리는 ‘소요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길(권력의 욕망과 싸우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가르침)을 ‘투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이 두 길 사이에서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br></p></span></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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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Mar 2009 06:27:0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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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키워드로 읽는 우리 시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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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trong><span style="FONT-SIZE: 130%">미셸 푸코의 &lt;지식의 고고학&gt;</span></strong> <p style="MARGIN-TOP: 30px"><div style="LINE-HEIGHT: 22px"><span style="FONT-SIZE: 100%; COLOR: #222222">*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right" border="0"><tbody><tr><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d><img alt="" hspace="0"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1/05/00900000012005010502149786.jpg" border="0"><br><p style="MARGIN-TOP: 10px"></p><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r><tr><td bgcolor="#dddddd" height="20">&nbsp; <font class="f9black"><b>관련기사</b></font></td></tr><tr><td><p style="MARGIN-TOP: 5px"><li><font class="f9blue"><a href="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5/01/009000000200501051729025.html">담론의 매혹 주체들의 백가쟁명</a></font> <span style="FONT-SIZE: 85%"><br><br></span></li></td></tr><tr><td bgcolor="#444444" height="1"><img height="1" alt=""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1" border="0"></td></tr><tr><td bgcolor="#ffffff" height="1"><img height="10" alt=""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1" border="0"></td></tr></tbody></table><b>담론의 역사적 흐름 ‘진맥’</b> <p><p><br>&nbsp;1980년대를 주도했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였다. 1990년대에 도래한 새로운 현실을 개념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미셸 푸코(1926~1984)다. 푸코의 영향은 너무나도 강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의 어휘들이나 사고방식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담론’이라는 말을 늘 쓰면서도 이 말의 현대적 의미를 푸코가 내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어버리곤 한다. <p><br>&nbsp;광인들·환자들·범죄자들을 비롯해 숱한 ‘타자들’의 세계를 파고들었던 푸코는 생애 한가운데에 도달했을 때 &lt;지식의 고고학&gt;(1969, 한국어판:이정우 옮김·민음사)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푸코는 자신의 작업을 가능케 한 인식론적 토대를 점검하면서 언표, 담론, 역사적 아프리오리, 문서고 등의 개념들을 비롯해 많은 중요한 개념들을 다듬어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저작은 푸코 사유의 ‘중간 점검’이며, 그의 방법론을 상세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저작이기도 하다. 때문에 푸코의 저작들 중 특이하게 추상적이고 난해하다. <p><br>&nbsp;푸코는 여기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지적 장, 곧 ‘인식론적 장’을 언급한다. 마르크스와 니체가 남긴 19세기 철학의 유산, 바슐라르와 캉길렘의 인식론, 구조주의와의 친화성과 차이 등 여러 담론사적 맥락들이 서술되고 있으며, 언어분석 철학자들과의 차이 또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푸코 사유가 담론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푸코의 언어철학·인식론·존재론 등, 그의 사유의 심층을 들여다보기 위해 꼭 읽어야 할 명저다. </p></span></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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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Mar 2009 06:23:2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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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코드로 읽는 우리 시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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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trong><span style="FONT-SIZE: 130%">담론의 매혹 주체들의 백가쟁명</span></strong> <p style="MARGIN-TOP: 30px"><div style="LINE-HEIGHT: 22px"><span style="FONT-SIZE: 100%; COLOR: #222222"><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right" border="0"><tbody><tr><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d><img alt="" hspace="0"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1/05/00900000012005010502148979.jpg" border="0"><br><p style="MARGIN-TOP: 10px"></p><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r><tr><td bgcolor="#dddddd" height="20">&nbsp; <font class="f9black"><b>관련기사</b></font></td></tr><tr><td><p style="MARGIN-TOP: 5px"><li><font class="f9blue"><a href="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5/01/009000000200501051735001.html">미셸 푸코의 &lt;지식의 고고학&gt;</a></font> <span style="FONT-SIZE: 85%"><br><br></span></li></td></tr><tr><td bgcolor="#444444" height="1"><img height="1" alt=""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1" border="0"></td></tr><tr><td bgcolor="#ffffff" height="1"><img height="10" alt=""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1" border="0"></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3e5b96">담론·욕망·해체·노마디즘…. 신문 잡지 등에 자주 언급되고 있어 그 의미를 느낌이나 이미지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규정은 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적지 않다. 그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알면 우리 시대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연재물 ‘코드로 읽는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이해하는 데 열쇳말이 되는 개념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갖가지 현상들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압축적으로 품고 있는 코드를 풀어내면 우리 시대가 보이고, 동시에 우리 시대의 풍경을 통해 그 코드의 의미를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마당인 셈이다.</span> <br><p><p><b><br>*체험-이론 잇는 언어구성물</b> <p>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여러 징후들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는 개념들의 변화와 맞물려 전개되는 법이기에,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다채로운 개념들과 함께 도래했다. 처음에는 학술적 차원에서 등장했던 개념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19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여러 개념들 중에서 아마도 ‘담론’(discours)이라는 개념만큼 널리 퍼져 일상 언어로 굳어진 개념도 드물 것 같다. ‘담론’이라는 말은 오늘날 도처에서 발견되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어휘가 되었다. <p>한 개념이 멀리 퍼져나가면 그 본래의 의미와 맥락이 탈색되어 다소 막연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이런 점에서 ‘담론’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주요 개념들을 검토해 보고 그 의미와 맥락을 점검해 보는 것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하는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일이 될 것이다. <p><b><br>*책·영상·패션 모든게 담론</b> <p>어린 시절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말과 사물 사이의 비중에서 큰 변화가 도래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시골에서 도시로’라는 공간적 이행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리라. 문명과 문화의 발달은 말의 비중이 사물들의 비중을 잠식해 들어가는 과정이다. 산천초목, 가축들, 그리고 집, 외양간, 우물, 리어카… 등을 비롯한 최소한의 인공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시절은 사물들의 시대였다. 말이라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일상어가 전부였다. 그러나 종이와 글의 비중이 점차 커져 간다. 문서들이 가득 쌓인다. 모든 것은 언어를 경과해서야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다. 1980년대, 그리고 특히 1990년대는 이런 언어적 구성물들이 내용에서나(예컨대 ‘영화학’을 비롯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담론들이 생겨났다), 매체에서나(예컨대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들이 등장했다)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불어난 시대였다. 언어로 구성된 것들, 곧 몸으로 겪는 실제 체험과 대비되는 언어적 구성물들을 ‘담론’이라 부른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우리 사회는 담론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p><p><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left" border="0"><tbody><tr><td width="7" rowspan="5"><img height="1" src="http://img.hani.co.kr/section-image/blank.gif" width="7" border="0"></td><td><img alt="" hspace="0"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1/05/00900000012005010502150675.jpg" border="0"><br></td></tr></tbody></table><br clear="all"><br><p>그러나 왜 ‘담론’일까. 담론 개념의 출현을 이제 다른 방향에서, 다시 말해 위로부터 다시 바라보자. 이전에, 특히 1980년대에 우리는 학문·과학·이론·사상·명제… 등을 이야기했다. 인식론의 맥락에서는 학문과 사회, 이론과 경험, 사상과 현실, 명제와 감각자료(센스 데이터)… 들의 관계를 논했다. 그러나 고도의 사유를 요하는 이론과 몸으로 직접 겪는 체험 사이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중대한 매개물을 빠뜨리는 일이다. 체험과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담론의 공간’을 건너뛰고 마는 것이다. 왜 ‘담론의 공간’을 빠뜨려선 안 되는가? 고도의 이론과 직접적 체험 사이에 각종 체험을 담론화하는 숱한 방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이론’은 우리의 체험, 특히 정치적 체험을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도의 이론적 체계들로 담론화했다. 1990년대는 체험을 담론으로 구성하는 형식들이 비약적으로 증폭한 시대, 또는 이전에 주목받지 않았던 담론 형식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라는 말의 외연이 갑자기 크게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제 의미를 읽어내어야 할 것은 반드시 고도의 이론적 언어들만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언어들, 나아가 영상들, 심지어 패션들까지도 ‘텍스트’가 되었다. 1990년대는 담론적 관점이 사물적-신체적 관점을 뒤덮으면서 모든 것을 ‘문화’의 영역으로 휩쓸어 담기 시작한 시대였다. <p><b><br>*다원성 옷 입고 문화 대중화</b> <p>담론의 시대는 인식론적 상대성이 발견된 시대이기도 하다. 각각의 담론에는 그 코드가 존재한다. 학생들은 1교시에는 사과의 화학적 조성을 배우고, 2교시에는 사과 특산지의 경제 상황과 연계되는 사과를 배우고, 3교시에는 사과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사과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다. 분명 똑같은 그 사과이다. 우리 눈의 구조는 거의 보편적이기에, 사과를 지각한 결과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거의 같다. 그러나 그 지각에서 읽어내는 의미, 그 지각을 어떤 형태로든(화학식의 형태로든, 문학적 언어의 형태로든, 그림으로든) 담론화하는 방식은 각 담론마다 모두 다르다. 또 각 담론이 전제하는 주체의 성격 또한 전혀 다르다. 생물학 시간에는 사물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데이터를 수식이나 화학식으로 표현하는 주체가 전제되고, 반대로 문학 시간에는 사물들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은유를 비롯한 문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주체가 전제된다. 담론의 공간이 달라지면 주체의 성격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의 종류가 비약적으로 증폭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가 인식론에서 상대주의가 첨예한 문제로서 대두된 시기였다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보편성, 객관성은 이제 단지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해결해나가야 할’ 무엇이 된 것이다. <p><b><br>*90년대 이후 백화제방 양상</b> <p>이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정치적 다원화와 맞물려 전개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나의 담론은 하나의 사회적 집단을 함축한다. 물리학·생물학… 등의 담론들은 ‘과학자들’이라는 집단을, 시·소설·희곡… 같은 담론들은 ‘문학자들’이라는 집단을, 정치연설문·팸플릿·국회보고서… 같은 담론들은 ‘정치가들’이라는 집단을 함축한다. 담론의 다양성은 사회집단들의 다양성을 함축하며, 또 새로운 담론들의 출현은 새로운 사회집단의 출현을 함축하는 것이다. 담론을 통해서 하나의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하나의 집단이 특정한 담론을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표현하기도 한다(앞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담론들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체적 차원에서의 사회집단들은 담론적 차원에서의 각종 담론들과 맞물려 사회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87년 이후 담론의 시대가 또한 다원화의 시대인 것 또한 조금도 우연이 아니다. <p><b><br>*이론의 독과점 시대 허물어</b> <p>담론의 시대는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글을 읽고 저술을 하는 시대, 고도의 이론과 신체적 체험 사이가 뻥 뚫려 있는 시대가 아니라 모든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담론을 구성해 가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문화 대중화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의 도래는 인류사의 커다란 성취들 중 하나이다.  <p><br>-이정우 철학자·철학아카데미 원장 </p></span></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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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인문학자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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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Mar 2009 06:21:1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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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봄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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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901/19/63/f0033763_49734dec61a04.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901/19/63/f0033763_49734dec61a04.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901/19/63/f0033763_49734df9ecb5c.jpg" width="400" height="9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901/19/63/f0033763_49734df9ecb5c.jpg');" /></div><br><br>지금은 저 멀리 있는 녀석 ㅠ_ㅠ<br>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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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소소한일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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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8 Jan 2009 15:42:55 GMT</pubDate>
		<dc:creator>단미</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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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0월에 구입한 책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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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r>[트와일라잇]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br><br>&nbsp;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샀다. 항간의 엄청난 소문 때문에! 팔랑 귀를 가진 내가 그런 어마어마한 유혹을 견딜 리가 없지. 어젯밤에 다시 열심히 읽었는데, 이 소설은 남 주인공 뱀파이어 훈남&nbsp;'에드워드' 없었으면 백이면 백 쪽박찼다. 나보다 어린 녀석(알맹이는 엄청 늙었지만)이 염장 지르는 말을 늘어놓고 있어. 만약 실제로 남자가 '에드워드'가 뱉은 대사를 읊었다면 대놓고 토하지 않았을까 싶다.<br><br>&nbsp;박지원 님의 에드워드 일러스트도 인기의 한 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글보다 일러스트가 더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체였다.<br><br>&nbsp;트와일라잇은&nbsp;확실히 여성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매력적인&nbsp;로맨스 소설이다. 현실적인 사랑이라기 보다 여자가 원하는 남성상은 모조리 다 들어있다. 남 주인공만 따진다면 완벽한 러브 판타지랄까.<br>&nbsp;여자가 미치고 팔딱 뛰는 에드워드가 가진 매력에 대해 나열하자면...<br><br>1. 나쁜 남자 - 에드워드는 그녀를 볼 때마다 흡혈 충동을 받는다.<br>2. 자상한 남자 -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피나는 인내심으로 흡혈 충동을 참는다.<br>3. 용감한 남자 -&nbsp; 나의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제대로 확 돌아버린다.<br>4. 잘생긴 남자 - 뱀파이어는 원래 잘생겼다.<br>5. 능력 좋은 남자 - 뱀파이어는 원래 잘났다.<br>6. 몸 좋은 남자 - 그녀는 항상 에드워드의&nbsp;가슴 근육 타령을 하더라.<br>7. 집안 빵빵한 남자 - 가족도 죄다 뱀파이어다.<br>.<br>.<br>.<br><br>등등등. 이 녀석 너무 잘났어.<br><br><br>&nbsp;[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br><br>&nbsp;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의 원작 소설. 안 읽어서 잘 모르겠는데, 코맥 매카시는 [로드]의 작가니 함 기대하려고... 약간 마초 성향이 섞여있을까 우려 중.<br><br>&nbsp;[보너스 트랙] 코시가야 오사무 지음.<br><br>&nbsp;16회 일본판타지소설 대상 우수상 수상작이라는데 안 읽어서 모름.<br><br/><br/>tag : <a href="/tag/트와일라잇" rel="tag">트와일라잇</a>,&nbsp;<a href="/tag/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 rel="tag">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a>,&nbsp;<a href="/tag/보너스트랙" rel="tag">보너스트랙</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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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BOOK DIARY</category>
		<category>트와일라잇</category>
		<category>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category>
		<category>보너스트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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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3 Oct 2008 23:26:5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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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중일 대표작가 공개대담회에 갔습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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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r>&nbsp;오늘 오후 6시부터 열린 동아시아 대표작가 대담회에 갔습니다.<br><br>&nbsp;교보빌딩 10층에서 열린 이번 대담에는 황석영, 시마다 마사히코, 모옌 이렇게 세 분의 작가님이 대담을 벌이셨어요. 사회자로는 서울대 중문과 교수인 성민엽 씨가 오셨구요.<br><br>&nbsp;성민엽 씨는 &lt;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gt;라는 학술서도 쓰셨답니다. 문학과 지성사 편집위원으로 계시다는데, 문학과 지성사는 매년 두 번 [SF소설 및 판타지 소설 작법]이나 [스토리 텔링]을 강의하니 하니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요.<br><br>&nbsp;황석영 작가님은 대하소설 &lt;장길산&gt;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고, 최근에 &lt;개밥바라기 별&gt;로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시죠. 웃음소리가 정말 소탈하신 분이셨습니다. 평론가를 싫어하신다며 평론가인 사회자를 자꾸 놀리시더라구요. '인터넷 어나 인터넷 문체를 전혀 쓰지 않는데, 젊은 독자층의 공감을 얻고 계십니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nbsp;질문에 '내가 아직 철이 안 들었다'고 답변하셨습니다. 세 작가님들 중 가장 나이가 많으셨지만, 하는 말이나 행동이 확실히 젊으십니다.<br><br>&nbsp;모옌 작가님은 영화 &lt;붉은 수수밭&gt;으로 유명하신 분이죠. 장이모 감독이 만든 &lt;붉은 수수밭&gt;은 88년&nbsp;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nbsp;가장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이십니다. 가장 유머 감각이 뛰어나시기도 했고요. 세 끼 만두를 먹고 싶어서 펜을 들으셨답니다. 작품에 나타나는 여성상. 즉, 어머니와 여성에 대해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옌 작가님은&nbsp;본명과 필명이 다르세요. 필명이 모옌인데 뜻이&nbsp;'말을 하지 마라'래요. 그에 대해서도 길게 말씀하셨는데, 넘 길어서 생략하구요...<br><br>&nbsp;시마다 마사히코 작가님은 제가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꽤 젊은 나이에 작가가 되셨고, 얼굴이 잘생겼기셨다는... 문명비평, 즉 각 나라의 문화를 잘 이해하시고,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서도 꽤 날카롭게 말씀하셨습니다. &lt;나는 모조인간&gt;이란 작품은 아내와 딸을 죽인 의사가 나온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네요. 한 번 읽어보려고요.&nbsp;대담이 열리기 전, 제 바로 옆에 계셨답니다ㅋ<br><br>&nbsp;의외로 사람이 적어서 맨 앞에 앉았어요. 덕분에 작가님들과 눈도 자주 마주쳤고, 싸인도 받았네요. 시마다 작가님이랑은 악수도 했구요. 황석영 작가님이랑은 막 졸라서 포옹했다는...가문의 영광ㅠ<br><br>&nbsp;11월 14일에는 &lt;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gt;을 쓰신 조세희 작가님께서 낭독회를 하신답니다.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리니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참석하셔요. 낭독회에는 쟁쟁한 분(작가나 배우, 비평가 등등)들이 함께 나오시거든요.<br><br>&nbsp;아마 많은 것을 가져가실 겁니다.<br/><br/>tag : <a href="/tag/황석영" rel="tag">황석영</a>,&nbsp;<a href="/tag/작가공개대담회" rel="tag">작가공개대담회</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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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소소한일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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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2 Oct 2008 14:19:0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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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동아시아 대표 작가 공개 대담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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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10/01/63/f0033763_48e3051563e1d.jpg" width="500" height="691.53846153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10/01/63/f0033763_48e3051563e1d.jpg');" /></div><br><p>&nbsp;일시 : 10월 2일 오후 6시 </p><p>&nbsp;장소 :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10층 대강당</p><p>&nbsp;참가 방법 : 선착순 300분 입장 <p></p><br>&nbsp;내일 6시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동아시아 대표 작가 대담회가 열립니다. 한국 대표 작가로는 &lt;개밥바라기 별&gt;을 쓰신 황석영 작가님이 나오신답니다. 끝나고 사인회도 같이 하니 오실 분들은 꼭 오시라는!!<br><br><br><br><br/><br/>tag : <a href="/tag/황석영" rel="tag">황석영</a>,&nbsp;<a href="/tag/개밥바라기별" rel="tag">개밥바라기별</a>,&nbsp;<a href="/tag/작가대담회" rel="tag">작가대담회</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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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BOOK DIARY</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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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1 Oct 2008 05:08:1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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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동성애에 대한 단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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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bsp;퀴어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엇비슷하다. 존중과 혐오, 호기심 등등. 나는 존중 쪽에 가깝다. 사랑은 성(姓)이 아니라 성(性)으로 깨우치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완전히 이해는 못할지라도 존중은 해주어야 한다.<br><br>&nbsp;비록 조용히 묻혀 있지만 여성 성소수자의 경우에는&nbsp;남성보다 혐오의 정도가 더욱 심하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는 레즈비언 인권 운동(여대이기 때문에 더욱 활성화 되어 있다.)을 하는 동아리가 있다. 신입생 시절 그들의 운동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여자가 같은 여자를 레즈비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성추행(성추행인지 성폭행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을 했다는&nbsp;글이 실려있었다. 왜? 이유는 레즈비언인 여자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다.<br><br>&nbsp;만약 그들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과연 성폭행을 한 가해자의 행동은 윤리적인 것인가.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어떻게 성폭행을?' 그리고 '그걸 밝혀서 어쩌라고...' 양 측 모두에게 그 사건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아마 레즈비언인 그녀는 평생 다 쥐어짤, 모든 용기를 꺼내어 사실을 밝혔을 것이다. 비인간적이다.<br><br>&nbsp;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 급기야 교수들의 귀에 들어갔고, 내가 듣던 토론 수업 시간에 성소수자에 대하여 토론까지 벌였다. 학생 대부분 존중으로 의견을 기울였다. 그녀의 용기가 조금씩 조금씩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동아리의 회원도 조금씩 늘었다. 세상의 시선은 분명히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nbsp;그들에 대한&nbsp;편견과 선입견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 숨는다면 차가운 시선은 더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용기가 조금 더 필요하다.<br><br>&nbsp;<br><br>&nbsp;...라고&nbsp;예전에 블로그에 적어 두었다. 이것을 다시 올리게 된 계기는 최근 대학교에서 레즈비언 인권 운동 동아리와 기독교회 동아리 간의 반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목이라기 보다 기독교회 동아리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얼토당토 않은 독선이었다.<br><br>&nbsp;글쎄.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 천차만별이기에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지만&nbsp;교회 측&nbsp;학생들이&nbsp;너무 심한 행동을 했다고&nbsp;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nbsp;억지로 제 논리를 강요하며 들이대는 독선이다. 신앙을 논리로 감히 까내릴 수는 없겠으나,&nbsp;'인간보다 성서를 앞세우는' 교회의 신학론은 이해할 수 없다. 교회마다 성서 해석이 다른 것도 마음에 안 들고...(신앙의 일관성이 없다) 그리고 일단 대통령이 교회 장로라서 싫다.(한때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를 무시하지 마라. MB)&nbsp;'인간 중심'이냐 '성서 중심'이냐의 논쟁은&nbsp;'성당vs교회'의 오랜 논란 거리였으니 제처두자.<br><br>&nbsp;일반 학생들이 엇비슷하게 생각하는 바를 말하자면...<br>'똑같은 동아리인데 남의 동아리 게시물은 왜 모조리 갈아 엎은 걸까? -_-; 지들이 뭔데.'<br>나중에 제제를 받고 사과문을 올리며 인권 동아리 측에 직접 사과를 올렸다고 게시했을 때, 솔직히 '교회 쪽'이 훨씬 처참해 보였다. 좀 많이 없어 보이더라.<br><br>&nbsp;책임지지 못할 행동은 하지 마라.<br>&nbsp;사랑을 죄로 생각하는 사람에게&nbsp;먼저 돌을 던진 쪽이&nbsp;잘못이다.<br/><br/>tag : <a href="/tag/동성애" rel="tag">동성애</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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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THINKING ABOUT</category>
		<category>동성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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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Sep 2008 18:57:04 GMT</pubDate>
		<dc:creator>단미</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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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9월에 읽은 책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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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br>&nbsp;스타일 - 백영옥 지음. 예담.<br>&nbsp;마이 짝퉁 라이프 - 고예나 지음. 민음사.<br>&nbsp;누구나 알 권리가 있다1. 2&nbsp;-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문학동네.<br>&nbsp;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 - 사이쇼 히로시 지음. 한스미디어.<br>&nbsp;글쓰기의 전략 - 정희모, 이재성 지음. 들녘.<br>&nbsp;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 지음. 김영사.<br>&nbsp;룬의 아이들 윈터러&nbsp;애장판&nbsp;- 전민희 지음. 제우미디어.<br>&nbsp;월야환담 광월야 2 - 홍정훈 지음. 넥스비젼 미디어웍스.<br>&nbsp;데로드 앤드 데블랑 1. 2. 3. 4 - 이상혁 지음. 문수미디어.<br>&nbsp;얼음나무 숲. 하지은 지음. 로크미디어.<br>&nbsp;볼테르의 시계. 강다임 지음. 로크미디어.<br>&nbsp;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사상사.<br>&nbsp;해변의 카프카 1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사상사.<br>&nbsp;철도원 - 아사다 지로 지음. 문학동네.<br>&nbsp;천국까지 100마일 - 아사다 지로 지음. 산성미디어.<br>&nbsp;시간을 달리는 소녀 -&nbsp;츠츠이 야스카타&nbsp;지음. 북스토리.<br>&nbsp;영원한 이방인 - 이창래 지음. 나무와숲.<br>&nbsp;마시멜로 이야기 2 - 호아킴 데 포사다&nbsp;지음. 한국경제신문사.<br>&nbsp;트와일라잇 -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북폴리오.<br>&nbsp;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지음. 소담출판사.<br>&nbsp;달콤한 나의 도시 - 정이현 지음.&nbsp;문학과 지성사.<br>&nbsp;오늘의 거짓말 - 정이현 지음. 문학과 지성사.<br>&nbsp;미얄의 추천 1 - 오트슨 지음. 시드노벨.<br>&nbsp;나인에스 1 - 하야마 토오루 지음. 대원씨아이.<br>&nbsp;완득이 - 김려령 지음. 창비.<br><br><br>&nbsp;책 취향은 잡식이라 자부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종류 별로 다양하게 읽었다.&nbsp;특히 소설을 좋아해서 문학 쪽으로 편중 되었다. 우리나라는 소설책을 돈을 주고 사보는 것을 무척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깝다. 책 자체를 사는 것을 아까워한다.<br>&nbsp;부디 독서 강국 대한민국이 되길 바라며...<br/><br/>tag : <a href="/tag/독서목록" rel="tag">독서목록</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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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BOOK DIARY</category>
		<category>독서목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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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Sep 2008 14:44:24 GMT</pubDate>
		<dc:creator>류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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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룬의 아이들 윈터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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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r>&nbsp;이 주 전&nbsp;'룬의 아이들 윈터러' 애장판을 전 권 구매했다. 유명하다는 말은 자주&nbsp;들었지만 읽지 않아서 궁금하던 찰나 서점에 갔더니 두꺼운 양장본이 있었다. 딱히 살 책이 없어 두 권을 덥석 샀는데, 웬걸 밤새 꼬박 두 권을 다 읽었다. 바로 다음 날 서점에 가서 나머지 두 권을 모두 샀다. 이틀 동안 모조리 읽었다.<br><br>&nbsp;나는 어린 소년의 성장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룬의 아이들 윈터러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보리스의 스승이자 친구이자 아버지인 월넛 선생(나는 이 이름이 제일 정감이 간다.)은 누구나 어린 시절 꿈꿔온 멘토일 것이다.&nbsp;제제에게 뽀르뚜가(이 이름 맞나?&nbsp;읽은지 하도 오래 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난다.)가 그렇지 않던가.<br><br>&nbsp;상처를 극복하고 감싸 안는 인물들은&nbsp;대부분 이십 대가 되지 않은&nbsp;소년과 소녀였다.&nbsp;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하는 과정. 그 내면의 성장과 외면의 성장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좋았다.<br><br>&nbsp;룬의 아이들 윈터러는 읽기 좋은&nbsp;잔잔한 성장 판타지 소설이다.<br/><br/>tag : <a href="/tag/룬의아이들" rel="tag">룬의아이들</a>,&nbsp;<a href="/tag/윈터러애장판" rel="tag">윈터러애장판</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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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BOOK DIARY</category>
		<category>룬의아이들</category>
		<category>윈터러애장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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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Sep 2008 14:05:03 GMT</pubDate>
		<dc:creator>류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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