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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길벗의 쉬어가는 자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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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보보우행(步步牛行). 
느리지만 진실한 걸음 걸음...</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hu, 15 Oct 2009 14:31:1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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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길벗의 쉬어가는 자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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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보보우행(步步牛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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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빅뱅 자서전, 「세상에 너를 소리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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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올초 신문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아이돌 그룹의 자서전(?)을 삼성그룹의 간부들에게 선물로 돌렸으며 쟁쟁한 인물들이 추천사를 남겼을까? 직접 읽고 확인해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은, 혹시라도 식어버린 내면을 다시 달구어주지는 않을까하는 기대를 했었다.</p><p>하지만 사서 읽는 것은 조금 망설였다. 두둥~ 일금 만 오천원! 아내를 처음만난 후 지출의 우선순위가 도서구입에서 데이트 비용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검증된(?) 책이라면 살테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읽어보고 소장 가치가 있으면 구입하자라는 생각으로 학교 도서관에 구입 신청을 했다. 그런데 책 읽기가 참 힘들었다. 1학기에 신청했고 같은 학기에 도서관에 입관되었는데, 늘 대출중이었다. 왠일인지 이 책은 대출예약도 안되었다. 결국 10월이 되어서야 간신히 손에 쥘 수 있었다.</p><p>아래는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메모한 내용이다. 와꾸 갖춘 서평을 쓰기에는 심신이 곤고하고 시간도 부족한지라 메모만 그냥 남기기로 했다.</p><br /><br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5/28/e0001728_4ad73220d8430.jpg" width="300" height="42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5/28/e0001728_4ad73220d8430.jpg');" /></div><br>제&nbsp; 목: 세상에 너를 소리쳐<br>부&nbsp; 제: 꿈으로의 질주, 백뱅 13,140일의 도전<br>출판사: 쌤앤파커스<br>빅뱅(BIGBANG) 지음 | 김세아 정리</p><p>2009년 1월 28일 초판발행, 같은해 3월 20일 132쇄... ㅎㄷㄷ</p><p>읽기 시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두 문단이 끝날 때마다 줄을 띄워서 공란을 만드는 것. 읽기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업계(?)에 종사해본 경험으로 보았을 때 책의 분량을 늘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된다.</p><p>'정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대필작가가 다 쓴거라고 생각했는데 G-Dragon(권지용)과 태양(동영배)의 문체가 확실히 다르다. G-Dragon의 글은 직설적인데 태양은 감성적 수식이 많다. 내용에 있어서도 G-Dragon은 보고 듣고 읽은 이야기를 많이 인용한 반면 태양은 자기 이야기를 한다. 물론 윤문작업은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분량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일단은 그렇다는... </p><p>YG의 연습실에는 '연습생 지침 조항'이 곳곳에 붙어 있다. &lt;가수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라&gt;는 내용이 첫번째이며 그 아래로 사람이 되는(?) 몇 가지 방법들이 나온다. 시간 약속 잘 지키기, 인사 잘하기, 청소 잘하기 같은 당연하면서도 소홀히 여기기 쉬운 것들이다(104).<br>연습생 시절부터 일상적 기본을 강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것은 당연한 것, 그리고 무시되기 쉬운 기본적 생활습관이 함께 가야한다는 것!</p><p>대성을 만든 '인생의 책'은 자그마치 「긍정의 힘」(Joel Austin)! 크리스천이라는 이야기와 어머니가 '긍정'을 강조하셨다는데서 약간 '촉'이 오긴 했지만.. ㅎㅎ 그래,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살아갈 힘을 주니까... 그건 인정하자. 반짝인다고 모두 황금은 아니지만... 그래, 황금이 아니라고 길바닥에 무조건 던질 필요는 없으니까...</p><p>T.O.P의 문장에는 가오(?)가 너무 들어가 있다. 후까시(?) 좀 빼면 좋으련만... 그것도 자기 캐릭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무튼 읽으며 찾아오는 생각. 오오~ 탑, 수컷이로구나!</p><p>승리는 뭐 그냥 그렇네. 인상적인 것은 하늘을 나는 닭의 이야기. ㅋㄷ 사실인지 웹서핑을 해보아야겠다.</p><p>중간중간 메모까지 하며 독서에 소요된 시간은 약 한 시간. 엔터키 남발로 분량을 뻥튀기해서 빨리 읽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그보다는 굉장히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 진짜 이유. 다 읽은 후의 전체적인 인상은 &lt;팬심으로 한탕!&gt;을 노린 책이라는 것. 하지만 몇 가지 배울 점은 있었다. 쉽게 읽히는 글쓰기에 대한 자극을 주었다는 점이 첫째,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이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둘째, 그리고 빅뱅의 멤버 이름과 얼굴을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 마지막이다.</p><p>&lt;세 줄 요약&gt; <br>재미있게 술술 읽었다.<br>조금은 감동도 받았다.<br>도서관에서 빌려본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p>			 ]]> 
		</description>
		<category>감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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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5 Oct 2009 14:31:11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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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ELBiS] 갈라디아서 1장 #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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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trong><span style="FONT-SIZE: 130%">ELBiS Club 침신점<br>「갈라디아서」 1장, 첫번째 모임 (2009-9-22 Tues.)</span></strong> </p><p>※ ELBiS Club이란?<br>일상생활성경연구 모임(EverydayLife Bible Study Club)의 줄임말입니다. 이 모임의 취지가 궁금하신분은 <a href="http://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wr_id=36&amp;page">http://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wr_id=36&amp;page</a>= 를 클릭해주세요.</p><p><br><strong>사소한 문제</strong></p><p>2학기를 시작하며 조그만 걱정이 있었습니다. 다시 일상생활성경연구모임을 할 수 있을까, 늘어나는 학업량 때문에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번 학기는 성경연구모임 안하냐?’며 먼저 물어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모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새롭게 함께 하신분들도 많아서 첫 모임은 8명이 북적거리면서 시작했습니다. </p><p>모임이 크게 부흥(?)하다보니 사소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관찰하다보니 너무 많은 질문이 쏟아져서 원래 살펴보기로 했던 본문을 제한된 시간에 다 살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모임에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1장을 연구하기로 결정한후 몇 가지 질문에만 대답을 찾아갔습니다.</p><br /><br /><p><strong>1. 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그렇게 강조했나? (1v)</strong></p><p>많은 영어성경은 1절을 ‘Paul, an apostle’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자신의 사도됨을 강하게 언급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했던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였을가요? 가르침의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도의 권위가 필요했을 것이며, 어쩌면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뜨거운 감격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p><p>그리고 1a절의 방식으로(사람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생각해 볼 때, 바울의 고백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주로 예루살렘 교회로 추정되는)의 공인을 거쳐서 세워진 것과 달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부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을 사도의 직무로 보는 사도행전 6장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내용은 오늘날 소위 말하는 ‘사역자’로 부름받았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바꾸어 말하면, “사역자를 세우는 공식적인 제도(신학교, 목사안수 등)를 통과한 ‘교회 사역자’만 사역자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p><p>직업적인 사역자를 중심으로 계층구조(hierarchy)를 이루었던 중세 교회를 개혁하고자 일어났던 개혁자들의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었습니다. 특정한 계층, 특별한 신분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이것은 나와 약혼관게에 있는 나의 서간이요 나의 캐티 본 보라(Katie von Bora, 루터의 아내)”라고 말했던 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p><p>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바울의 사상과 거리가 멀어보였습니다.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력은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사역자’가 되기에는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이날 함께 말씀을 나눈 공동체에서는 ‘사역’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아서 결국 신학교라는 제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형제의 고백이 있었으며, 전도사 시취와 목사 안수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제도의 불합리함을 보고도 눈을 감아야 하는 교회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픈 비판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목회학석사(M.Div) 과정은 목사가 되기 위한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과정, 즉 ‘사역자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제도라는 자조적 목소리도 있었습니다.</p><p>이러한 현실을 나누는 가운데 바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다시금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해서 끊임없이 사도권을 의심받았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받은 진정한 사도의 정체성을 흔들림없이 주장했던 바울처럼, 신학생이나 전도사라는 외적 호칭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모든 성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사역자’라는 것을 되새겼습니다.</p><p><br><strong>2. 바울의 편지는 공동 저작인가? (2v)</strong></p><p>2절을 보면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채 갈라디아서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바울 한 사람이 갈라디아지역의 교회 전체를 상대로 외롭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홀로 편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바울과 함께 머물고 있는 어떤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p><p>근대 이후 만연한 개인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사역도 혼자서 하는 것인양 인식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사역(ministry)이 사역(私役, personal works)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역자(이날 말씀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의 사역자(일꾼)로 현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역’이라는 표현은 ‘교회 내부의 일’이라는 의미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가 보냄받은 사역자입니다)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혼자 성경연구를 하고, 혼자 설교를 준비합니다. 대중을 상대로 혼자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홀로 서고, 성도들 앞에 홀로 서는 사람이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p><p>그러나 바울은 홀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바울의 전도여행에는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에도 함께 하는 공동체의 문안인사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역의 많은 부분 중에서 혼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공동체는 빠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연구해서 설교하는 일은 사역자 혼자의 일인 것으로 쉬이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연구의 과정은 성경을 기록한 원저자의 생각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보다 먼저 그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했던 선배들의 기록을 참고하는 것으로 심화됩니다. 설교는 설교자 혼자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청중들과 교감하는 중에 이루어집니다. 결정적으로 흔히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신비적 교제 역시 삼위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p><p>교회의 사역자로 섬기는 전도사들에게도 신앙의 갈등과 고민, 사역 혹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자체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면의 소리를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속으로만 끙끙거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비슷한 일을 감당하며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신학생들간의 이런 공동체가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함께 귀기울이며, 서로의 삶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외롭게 사역하지 않았던 바울,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사역했던 바울의 본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p><p><br><strong>3. 난데없이 왜 이런 구절이 삽입되었는가? (4-5v)</strong></p><p>바울은 4-5절에서 갑자기 찬송을 드립니다. 인사말(1-3v)로 편지를 시작했으니 본론(6절 이하)으로 넘어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보이는데, 갑작스런 찬송의 삽입은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위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한 내용입니다. (정말 그런지 직접 확인해본 경험은 드물지만) 그동안 익숙하게 배워온 내용대로라면, 사도 바울은 굉장히 논리적이며 탁월한 글솜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던 바울은 유대교의 전통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 공용어였던 헬라어에 능통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라틴어(로마어)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바울과 자주 비교되는 못배운 다혈질 베드로(심지어 베드로는 문맹이었으며, 베드로전후서는 다른 사람이 베드로의 구술을 받아적은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에 비할바가 아닙니다.</p><p>그런데 왜 바울은 초반부터 매끄럽지 못한 방식으로 편지를 쓰고 있을까요? 우리는 찬송(4-5v)에 뒤이어 나온 6절을 주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은혜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반응하고 있습니다. 한데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p><p>찬송의 가사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4v, 새번역) </p><p>하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찜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설명이라면 6절의 언급 뒤에 따라오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울텐데, 왜 굳이 앞쪽에 기록되어 있을까, 게다가 왜 찬송의 내용(5v)이 함께 있을까요?</p><p>함께 질문을 놓고 씨름하는 가운데 누군가의 입에서 “원래는 인사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본론의 시작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려다보니 감정이 북받쳐올랐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갑자기 찬송이 터져나왔던 것은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찬양을 터트리는 감정적인 예배자의 모습으로 바울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p><p>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성만으로 하나님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치밀한 논리와 막힘없이 흐르는 언변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원래 하려던 말이 막힌채 찬양했던 바울의 경험, 말막힘과 찬양의 영성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p><p><br><strong>세 줄 요약</strong></p><p><em>은혜에 말 막혀 찬송을 부르는<br>거룩한 사명으로 보냄받은<br>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em></p>			 ]]> 
		</description>
		<category>묵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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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3 Sep 2009 15:34:31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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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남자의 영성, 안셀름 그륀의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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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남자의 영성, 안셀름 그륀의 「사랑한다면 투쟁하라」(왜관: 분도, 2008)</strong></div><p>된소리에 갈라진 목소리로 발음하는 ‘영썽’과 달리, ‘영성’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수동적, 혹은 여성적이다.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결정적으로 탈일상적이다. 관음보살의 미소와도 흡사한 마리아상의 탈속한 미소에서 여성적 영성을 시각적으로 만날 수 있다.<br><br>그러나 안셀름 그륀은 성경의 인물 열여덟 명을 통해 남성적 영성의 원형을 말한다. 남성적 영성은 성적 욕망과 공격성,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영성이다. 바닥을 경험하며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영성의 양극단인 투쟁과 사랑을 조화시키는 영성이다. 결정적으로 남성적 영성은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영성이다.<br><br>“투쟁을 건너뛰고 사랑에만 몰두하는 남자는 결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남자가 될 수 없”기에(224) 이 책은 진정으로 매력적인 에너지를 전한다.</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09/18/28/e0001728_4ab39b4174449.jpg" width="200" height="32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09/18/28/e0001728_4ab39b4174449.jpg');" /></div><p>&nbsp;</p>			 ]]> 
		</description>
		<category>감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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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Sep 2009 14:38:17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아버지, 아버지(창세기 28:10-2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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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div><strong></strong><div style="text-align: center;"></div><strong><strong><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귀하게 얻은 아들들, 그리고 이삭의 편애</strong></div></strong></strong><p><strong></strong>아버지 이삭은 나이 40에 결혼(25:20)했다. 그들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부부였다. 이삭은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했고(21v)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나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비록 복중에서부터 싸우기 시작한 말썽꾸러기들이었지만 20년간의 기다림과 기도 끝에 생긴 귀한 아들들이었다. <br />
그러나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두 아들을 각각 하나씩 편애했다. <br />
이유 :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28v). 반면 리브가의 야곱 편애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음(몇 가지 추측은 가능. 외향적인 첫째보다 조용한 둘째를 더욱 사랑했다던지, 아니면 단순히 사랑받지 못하는 차남을 배려하다보니 또 다른 편애가 되었다던지... 아무튼 추측)</p><br /><br /><strong><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야곱의 내면<br />
</strong></div></strong><br />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 야곱(27v). 그의 내면에는 틀림없이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일종의 상처(?) 조용한 성격이 긍정적으로 개발되어 온유함과 깊이를 갖춘 인격자가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야곱의 발달 방향은 치밀한 계산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능숙한 쪽으로 향했다. <br />
한편 27장에서 리브가가 야곱을 위해 계책을 쓰는 것과 29장에서 외삼촌 라반이 결혼식에 술수 부리는 것을 보면 야곱의 잔머리는 외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부계, 즉 아브라함 가문의 남자들은 좀 흐리멍텅하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어딘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가며(말이 좋아 믿음의 조상 ㅋ), 사막 지대에서 목숨과도 같은 우물을 놓고 분쟁이 일어나면 매번 양보하고 선선히 물러섰다. 결정적으로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자기 살려고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말한 것이 똑같았다. 야곱의 관점에서 바라본 아버지 이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다분히 부정적이었으리라.<br />
어쩌면 속이는 자, 교활한 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야곱의 모습은 자신을 편애한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br />
<p><strong>&nbsp;</strong></p><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strong>청천벽력</strong></strong></div><p><strong></strong>야곱은 팥죽으로 형 에서가 가지고 있던 장자의 명분을 샀었다. 27:36에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속여서 빼앗은 것에 격분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실재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삭은 팥죽으로 이루어진 거래를 무산시키려 했다. 에서를 불러서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그것을 먹고 내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노라고 말한 것이다.<br />
야곱의 입장에서 이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100살 이상이었다. 마흔에 결혼해서 환갑에 쌍둥이를 낳았고, 에서가 사십세에 결혼했으니... 결혼 직후의 이야기라고 해도 100세다.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27:1) 아버지를 대신해 장자의 명분을 갖고 가문의 기업을 맡아 관리했을 야곱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형을 편애하고 있었다.<br />
<br />
<br />
</p><strong></strong><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strong>아버지를 속임<br />
</strong></strong></div><p><strong></strong>결국 야곱은 어머니와 공모해서 아버지를 속이는 일을 시작했다. 형이 사냥에서 돌아오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야 했다. 야곱은 염소 새끼의 털 가죽을 몸에 감고 어머니가 염소를 요리한 요리를 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술수에 능한 리브가와 야곱의 연합작전을 흐릿한 아브라함 가문의 남자가 당해낼리 만무했다. <br />
게다가 이삭은 연로해서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그는 목소리와 피부의 감촉이 불일치하는 것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27:22-23) 그 이상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큰 아들을 편애했었던(25:28) 그가 염소로 만든 요리를 사냥해온 것으로 오해했다(27:25). 지각과 미각이 흐릿한 상태였던 것이다.<br />
<br />
<br />
</p><strong></strong><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strong>벧엘에서 꿈을 꾸다.<br />
</strong></strong></div><p><strong></strong>아버지를 속여 축복 기도 받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했다. 명분은 결혼할 처자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분노한 형에게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의 축복 기도까지 받았으니...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하였으니 잘 풀려야만 했는데 그의 현실은 도망자였다.<br />
태어날 때부터 형의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던 야곱. 형이 되고 싶었으나 차남으로 태어났던 야곱.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형을 더욱 사랑했다. 장자권을 획득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형을 축복하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속여 축복 받았지만 집안에 그가 머물 곳은 없었다. 그는 형을 피해 집을 떠나야만 했다. <br />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될 때, 이젠 더 이상 아버지의 자비를 기대해볼 수도 없을 것만 같은 절대절망과 절대고독의 시기에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벧엘의 꿈, 하늘과 땅의 만남이 환상적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의 말씀(28:13-15)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야곱에게 너는 내게 아브라함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를 상실한 듯한, 뿌리를 잃은 듯한 쇼크 속의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br />
<strong>&nbsp;</strong></p><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strong>벧엘의 기억</strong></strong></div><p><strong></strong>벧엘에서 만난 여호와의 기억은 그의 일평생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다. 여전히 권모술수로 점철된 생을 살아가며 이익도 얻고 손해도 보면서 비틀비틀 지냈지만 그가 다시 돌아가기를 결정한 곳은 벧엘이었다(35장). 훗날 에서와 화해하고도 야곱은 바로 아버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33:18). 34장에서 딸 디나가 강간 당하는 슬픈 일을 겪은 후에야 그는 자기가 돌아가야 할 곳이 벧엘임을 깨닫고 가정을 정결히 정돈한 후 벧엘로 돌아갔다(35장). 그 후에야 비로소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찾아갔다(35:27-29). <br />
야곱의 응어리 진 가슴을 풀어주신 분, 아비에 대한 원망이 삶을 추동하던 것에서 벗어나 ‘나는 하나님과의 정당한 계약 당사자다. 나는 아브라함 자손이다’라는 의식을 회복시키신 분. 야곱, 즉 속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평생 달고 살았던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시는 은혜로운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야곱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br />
<br />
<br />
</p><strong></strong><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strong>아버지, 아버지<br />
</strong></strong></div><p><strong></strong>헤밍웨이의 단편집 가운데 "세속의 신전(The Capitol of the World)"이 있다. 스페인을 배경으로한 이 소설은 어느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심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다. &lt;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gt;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이 아버지가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 나갔을 때, 그곳에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남자 800여명이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br />
대학시절 남자 후배들과 고민을 이야기해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둘 중 하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나는 성(性), 또 하나는 아버지와의 갈등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것, 아버지에게 학대 받은 것... 그런 이유들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 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투영되었다.<br />
하나님은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참다운 아버지로 다가오셔서 아들의 일그러진 자아상을 영광스럽게 회복시키신다. 아버지 만나기를 소망하자.<br />
</p>			 ]]> 
		</description>
		<category>묵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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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7 Sep 2009 06:23:05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Anycall M480(미라지) 외장메모리(microSDHC) 인식 문제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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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메모리가 자꾸 자동 포맷(?)되어서  서비스 센터에 통화.<br />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받으면 안정된다고 답변.<br />
이 문제로 인터넷 검색해도 답이 안나오길래,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누군가를 위해 짧게 포스팅 함!<br />
<br />
<br/><br/>tag : <a href="/tag/M480" rel="tag">M480</a>,&nbsp;<a href="/tag/microSDHC" rel="tag">microSDHC</a>,&nbsp;<a href="/tag/외장메모리" rel="tag">외장메모리</a>			 ]]> 
		</description>
		<category>잡담</category>
		<category>M480</category>
		<category>microSDHC</category>
		<category>외장메모리</category>

		<comments>http://seekerjh.egloos.com/2432900#comments</comments>
		<pubDate>Mon, 07 Sep 2009 05:49:08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갈라디아서와 무교회주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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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 right"><a title="" href="http://seekerjh.egloos.com/2363140"></a><a title="" href="http://seekerjh.egloos.com/2363140"></div><p>갈라디아서로 '새로운 교회' 운동 읽기</a><br>김교신 전집을 읽다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을 때가 많다.<br>배울점이 너무 많고, 이미&nbsp;70여년 전에 내가 가려하는 길을 먼저 가던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쁘고 놀랍다.<br><br><br>현재 우리 무교회주의자들은 성서를 중히 여기고 성서 연구에만 치우친다는 비방까지 받는 수 있으나 이는 무교회주의자의 일면을 잘 말한 것이다. 과연 무교회주의자는 구신약 전서를 그 신앙의 기초로 안다. 그러나 성서 66권 중에서 무교회주의 독본이라 할 만한 것 한 권을 택하라면 그는 주저없이 갈라디아서를 들 것이다. 참으로 갈라디아서는 ‘우리의 책’이요, ‘나의 책’이다. 무교회를 기혐(忌嫌)하는 자 중에는 무교회주의를 알아본 일도 없고, 그 주의자를 만나본 일도 없이 그 명사(名詞)부터 사갈시(蛇蝎視)하는 수가 많은데 그런 이는 무교회주의를 알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통독해볼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알 수 있다면 그는 무교회주의를 가히 이야기할 사람이다. 무교회주의란 현대어로 한 갈라디아서이다. 만일 갈라디아서까지 혐오한다면 그가 무교회주의를 알 수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며 기독교 자체도 모를 것이 아닌가.<br></p><div style="TEXT-ALIGN: right">- 김교신, 「김교신전집3: 성서 개요」(서울: 부키, 2001), 380.</div><p><br>&nbsp;</p><p>기혐(忌嫌): 싫어서 꺼림. 보통 혐기(嫌忌)로 쓰인다.<br>명사(名詞): 원 뜻은 사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품사이나 여기서는 단어(單語)의 의미<br>사갈시(蛇蝎視): 뱀이나 전갈을 보듯 악독한 것으로 보고 끔찍이 싫어함</p><p>&nbsp;</p>			 ]]> 
		</description>
		<category>묵상</category>

		<comments>http://seekerjh.egloos.com/2428495#comments</comments>
		<pubDate>Mon, 31 Aug 2009 06:35:16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기는 길(DJ)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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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08/21/28/e0001728_4a8d6d13b725c.jpg" width="500" height="371.8181818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08/21/28/e0001728_4a8d6d13b725c.jpg');" /></div>			 ]]> 
		</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comments>http://seekerjh.egloos.com/2421560#comments</comments>
		<pubDate>Thu, 20 Aug 2009 15:34:47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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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p>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p><p>그 때에 바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p><p>“여러분, 여러분은 내 말을 듣고, 크레타에서 출항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p><p>그랬으면, 이런 재난과 손실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p><p>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p><p>기운을 내십시오. </p><p>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p><p>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요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p><p>‘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p><p>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p><p>하고 말씀하셨습니다. </p><p>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p><p>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p><p>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으로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br>(사도행전 27,21-26. 새번역)<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08/19/28/e0001728_4a8b5576e4fbc.jpg" width="477" height="59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08/19/28/e0001728_4a8b5576e4fbc.jpg');" /></div>(Rembrandt,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p><p>&nbsp;</p><p>주님, 흔들리는 이 나라 육지에 닿게 하소서.</p><p>먹지 못한채 두려워하는 약자들을 권념하소서.</p><p>&nbsp;</p></div>			 ]]> 
		</description>
		<category>묵상</category>

		<comments>http://seekerjh.egloos.com/2420457#comments</comments>
		<pubDate>Wed, 19 Aug 2009 01:30:09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땅의 구석구석이 폭력의 도가니이오니... ]]> </title>
		<link>http://seekerjh.egloos.com/242004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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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font size="2">땅의 구석구석이 폭력의 도가니이오니<br />
당신께서 맺어주신 계약을 기억하소서.<br />
억눌린 자, 부끄러워 물러가지 않고<br />
가난하고 불행한 자, 당신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br />
일어나소서, 하느님, 옳으심을 밝히소서.<br />
날마다 당신을 모독하는 미련한 자를 기억하소서.<br />
(시편 74:20-22, 공동번역)<br />
</font><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8/18/28/e0001728_4a8a934d7c77b.jpg" width="321" height="42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8/18/28/e0001728_4a8a934d7c77b.jpg');" /></div><font size="2"><br />
<br />
<br />
</font></div>			 ]]> 
		</description>
		<category>묵상</category>

		<comments>http://seekerjh.egloos.com/2420041#comments</comments>
		<pubDate>Tue, 18 Aug 2009 11:41:57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에스더 설교의 어려움(에스더 1장 묵상) ]]> </title>
		<link>http://seekerjh.egloos.com/2413193</link>
		<guid>http://seekerjh.egloos.com/2413193</guid>
		<description>
			<![CDATA[ 
  에스더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특이한 성경이다. 게다가 에스더가 표면에 등장하는 배경이 묘하다. 에스더 1장은 기존의 왕후 와스디가 폐위되는 이야기를 통해 에스더가 등장할 여지를 만들어 주고 있는데, 그 장면의 묘사를 통해 영적 교훈을 얻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부조리한 권력의 흐름 덕에 운 좋게 떠오른 여자란 생각마저 든다. Rising of Esther???<br />
<br />
<br /><br />본문을 좀 더 살펴보자. 에스더의 첫 머리는 아하수에로왕과 왕국의 부강함에 대해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어로는 ‘크사야르사’, 그리스어로는 ‘크세르크세스(Xerxes)’다. 영화 300에 금은보화를 칭칭 감은 변태적인, 그러나 관대한 외모로 등장한 그 인물이다.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8/09/28/e0001728_4a7e874d83df4.jpg" width="500" height="23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8/09/28/e0001728_4a7e874d83df4.jpg');" /></div><br />
<br />
실제로 아하수에로는 평생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치러왔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하수에로는 풍류남아로 등장한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보면 그 맛이 각별하다.<br />
<br />
<span style="font-style: italic;">2 아하스에로스는 수도 수사 성에서 왕위에 올라,</span><br style="font-style: italic;"><span style="font-style: italic;">3 나라를 다스린 지 삼 년째 되던 해에, 큰 잔치를 베풀고 고관 대작을 비롯하여 페르시아와 메대의 장군과 귀족과 각 지방 수령들을 초대하였다.</span><br style="font-style: italic;"><span style="font-style: italic;">4 이리하여 왕은 백팔십 일이라는 오랜 시일에 걸쳐 왕실의 거창한 부귀와 눈부신 영화를 자랑하였다.</span><br style="font-style: italic;"><span style="font-style: italic;">5 이 기간이 끝나자 왕은 다시 궁궐 안뜰 정원에다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고, 모든 수사 성민을 가리지 않고 초대하였다.</span><br style="font-style: italic;"><span style="font-style: italic;">6 정원에는 하얀 실과 자줏빛 털실로 짠 휘장이 쳐져 있었다. 그 휘장은 흰 대리석 기둥에 달린 은고리에 모시실과 붉은 털실로 꼰 끈으로 매어져 있었고, 반암석과 흰 대리석과 조개껍질과 갖가지 보석들을 박아 넣은 바닥에는 금은으로 만든 평상들이 마련되어 있었다.</span><br style="font-style: italic;"><span style="font-style: italic;">7 갖가지 모양으로 된 금술잔이 나왔고, 왕이 내리는 술은 한이 없었다.</span><br style="font-style: italic;"><span style="font-style: italic;">8 그러나 술을 마셔도 법도를 따라 억지로 마시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왕의 분부가 있어 저마다 원하는 대로 마시게 하였다.</span><br />
<br />
지배계층들과 한껏 즐긴 후(백팔십일이나… 반년씩이나??),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수사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즐겼다(5v). 이 파티에서는 갖가지 모양의 금술잔이 사용되었고 한이 없는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7v). 가장 시선을 끄는 부분은 억지로 마시게 하지 말라는 왕의 분부(8v)!! 이 얼마나 멋진 풍류남아의 모습인가?!<br />
<br />
이어지는 대목은 마초의 향기까지 물씬 풍기고 있다. 얼큰하게 취한 왕은 왕후의 아름다움을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왕후를 단장시켜 데려오라고 내시들에게 명령했다. 일곱명의 내시들에게 명령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10v) 한꺼번에 일곱명이 우루루 몰려가서 왕의 명령을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한 번에 한 명씩 일곱 번에 걸쳐 찾아간 것인지는 명백하게 알도리가 없다. 물론 양쪽 다 상당한 압박감을 주었으리라.<br />
<br />
하지만 왕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여성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당시 오리엔트의 문화에서 왕후는 왕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내가 노는 걸로 보여요? 나도 지금 일 하고 있다구욧!!”라고 응답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왕후도 부인내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9v). 얼마 전 방영이 끝난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을 통해 부인들끼리의 커뮤니티가 조직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슬쩍 엿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도 그냥 예사롭게 넘어가지 않았다.<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908/09/28/e0001728_4a7e877e0a61c.gif" width="500" height="282.05128205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908/09/28/e0001728_4a7e877e0a61c.gif');" /></div><br />
<br />
아무튼 이런 전차로 아하수에로는 격분했다. 이 일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겠느냐고 묻는데 당시의 관례를 따라 법률 자문위원들에게 물었다(13v). 그리고 그들은 왕후의 잘못은 단지 왕과 왕후의 관계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왕후의 저항(?) 이야기를 들은 부녀자들이 너도나도 왕후를 흉내 내기 시작하면 사내들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냐고, 그러니 다시는 왕후 와스디가 어전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왕이 부르기전에 왕 앞에 나가는 것이 큰 금기임을 암시하는 에스더의 말(4:16)과 새로 왕후를 뽑으라고 권하는 신하들의 이야기(2:4)를 통해 볼 때 사실상의 왕후 폐위를 요청하는 것이었다.<br />
<br />
왕의 권위, 가장의 권위에 손상을 입어서 열 받은 거였을까? 여튼 왕은 왕후를 폐비시켰다. 남자 중의 남자 아하수에로 왕은 이 일을 음지에서 은근슬쩍 처리하지 않고, &lt;가정은 마땅히 남자가 다스려야 한다&gt;는 내용의 칙서를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말로 전국에 써서 돌렸다(22v). 에스더 1장 1절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자면 그 소식이 퍼진 범위는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였다. “그깟 일로 동네방네 떠들면서 왕비를 폐위시킨다니 너무 속 좁은 처사 아니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 역사에도 제헌왕후(폐비윤씨, 연산군의 생모)가 지엄하신 주상 전하(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었다는 이유로 폐비된 전례가 있었다. <br />
<br />
1장을 읽고나니 기분이 참으로 거시기하다. 물론 지금의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바라보는 것에 큰 무리가 따른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치졸하다. ‘여성’이라는 표현이 불편하다면 ‘약자’로 바꾸어도 괜찮을 것이다. 성경의 전통은 고아와 과부를 약자 중의 약자로 묘사하고 있으니까 과부 아닌 과부로 평생을 살아가야했을 와스디 왕후는 당대 페르시아의 약자였다고 볼 수 있다.<br />
<br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치졸한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에스더가 왕후가 될 수 있었고 유대민족이 몰살의 위기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유진 피터슨의 「다시 일어서는 목회」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에스더를 낭독한다. 절망적 상황, 적들의 치졸한 음해에 익숙한 유대민족에게 에스더의 이야기는 큰 엑스타시를 주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쉽게 결론짓자면 &lt;절망적 한계상황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시니 소망을 포기하지 말자&gt; 정도의 교훈으로 이야기를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br />
<br />
그런데 여전히 뭔가 찜찜하다. 자기편에게 베풀 때는 통 큰 보스, 자기 소유인 왕후(오해 마시라! 당시의 가치관이 그렇다는 것이니)의 미모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허영심과 자기 권위가 무시당했을 때는 처절하게 복수하는 악랄함을 가진 남자.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런 왕을 등에 업고 출세했다. <br />
<br />
권력과 결탁한 종교가 보여주는 목불인견의 꼬라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2009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내게 에스더는 과연 어떤 텍스트일까? <br />
<br />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br />
<br />
에스더는 설교하기에 어려운 성경이다.<br />
<br />
			 ]]> 
		</description>
		<category>묵상</category>

		<comments>http://seekerjh.egloos.com/2413193#comments</comments>
		<pubDate>Sun, 09 Aug 2009 08:23:33 GMT</pubDate>
		<dc:creator>길벗</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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