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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In my opini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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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방문하신 모든 분들의 마음에 평화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판도 좋습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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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Nov 2009 02:46:5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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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In my opini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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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국의 정치상황, 한국교회, 그리고 비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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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style="TEXT-ALIGN: center"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5pt; FONT-WEIGHT: bold"></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내게 '이제 한국정치에 관심두지 말고 이민생활이나 잘 적응하라'고 권유한다. 또 어떤 분들은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해진다'며 가급적 비판을 삼가라고 권한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권유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하면서 먼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진들 그리 개인적으로 유익할 리가 없다. 비판을 하는 것보다 현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거는 쪽이 훨씬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그러나 비판은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의 다른 이름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경우라면 비판할 동기가 사라지고 만다. 무관심한 대상에 대하여 누가 비판을 하겠는가?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물론 비판은 확고히 공익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확고한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 공익이 아닌 사리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 것은 음흉한 모략이 되고, 또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비방이나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그런 의미에서 한국정치에 대한 비판,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모두 나름 내 방식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가 45년 이상을 살아왔던 대한민국에 대하여 어떻게 순식간에 애정을 접을 수 있겠는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몸담았던 교회에 대하여 무슨 수로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다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헌법은 엄중하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민주국가로서는 영 체통이 서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 중에 한 대목이 기억에 있다. "전직 대통령이 존경받는 풍토를 만들겠<br>다."는 대목이다. 그동안 끝없이 이어지던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불행한 모습들이 이제는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곧장 국가기록물 유출 건으로 흠집을 내더니 마침내 가족들과 측근기업인의 돈거래를 빌미로 친인척은 물론 중병에 신음하던 측근들조차 모조리 사법적 가해를 당했다. 결국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정권을 잡고 곧장 지난 정권이 했던 모든 일을 무위로 돌리는데 그야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남북관계나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그렇고,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토목공사가 그렇다. 권력기관의 독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종시의 백지화 움직임도 그런 맥락의 일환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자신들은 지난 10년간 마음껏 비난의 자유조차 누렸지만 이제는 비판적인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뉴스에서 퇴출된 신경민 앵커, 시사토론의 정관용씨, 백분토론의 손석희씨, MBC PD수첩 관련자들, 가수 윤도현, 방송인 김제동등 모두가 시청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권에 밉보여서 쫓겨났다. 지난 정권에서 유인촌, 이덕화, 백일섭, 김흥국 등 모두가 거리낌 없이 활동하던 것에 비교해볼 문제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미디어 관련법의 처리과정에서는 민주주의의 사망을 보는듯한 느낌마저 든다. 야당의원들의 의결권을 강압으로 막았고, 자신들끼리는 서로 대리투표를 하는 등 차마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이렇게 절차법을 어기며 처리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국회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헌법재판소는 또 매우 비겁하고 우스운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의결과정에서의 문제는 많았지만 결과를 무효로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절차적 결격이 있는 법률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앞으로 국회법은 지킬 필요가 있을까? 600년 전 경국대전을 근거로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을 무효로 했던 판결처럼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판결이 또 하나 탄생하였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헌재의 판결에 대한 패러디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당선은 되었지만 대통령은 아니다.'라거나 'BBK를 설립은 하였으나 내 것은 아니다.'하는 식이다. 또 '강간과 폭행은 했지만 범죄는 술이 저질렀다.'거나 '선거법을 위반했지만 당선은 유효하다.'는 등 온통 헌재와 사법부를 불신하는 조롱이 담겨 있다. 심지어 '헌재가 판결은 했으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고 신랄하게 헌재의 결정자체를 빗댄 패러디도 있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행정부의 권력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국회가, 국회도 믿을 수 없다면 최소한 사법부는 균형자적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국민의 절망감은 점점 더 깊어가는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이제 국민들도 눈치를 살피며 생각을 감추기에 바쁘다. 10월 28일에 있었던 재보선의 결과에서 나는 국민들의 마음을 보았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50%를 넘어 청와대가 자축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재보선의 결과치고는 여당의 대참패가 아닐 수 없다. 그 간의 여론조사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국민들이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겨왔던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언론은 연일 집권세력의 비위를 맞추는데 여념이 없다. 언론이 권력과 유착을 형성하는 것은 그 사회에 비판기능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비판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뿐 아니라 패망을 향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에 다를 바가 없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비판받지 않아서 부패한 전형적인 예가 종교에 있다. 가톨릭은 절대 권력을 향유하며 부패했었다.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겨난 종교였으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신도들과 엄격히 구분된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바빴다. 자신들이 스스로 신이 되어 면죄부를 팔아먹는 등 타락이 극에 달하며 종교개혁 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물론 종교개혁을 주도한 자들의 동기를 의심하는 설도 있지만 그렇게 가톨릭의 부패에 대한 반향으로 신교가 탄생하였다. 성직자와 신도를 계급으로 분류하여 엄격히 속박하고 비판을 막아온 결과물이 극악한 부패로 나타났다. 또 자신들의 부패상을 감추기 위해서 마녀사냥도 서슴지 않았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그렇게 탄생한 신교는 또 어떤가? 특히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들은 부패에 침묵하였으며, 독재 권력에 영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하는데 몰두하였다. 거대한 교회건물이 그 자체로 기득권이 되고 신도들은 비판할 자유를 잃었다. 심지어 목회자가 무고한 사람들을 저주해도 "아멘"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lang="EN-US"><br>'성서에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사랑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말씀이 비판하는 입을 막는데 동원되고 있다. 교회의 잘못, 목회자의 잘못, 심지어 교회 내 다른 신도들의 잘못을 덮고 쉬쉬하자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비판이 횡행하면 교회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임을 이해는 하지만 비판을 막기 위해서 동원할 말씀은 아닌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결국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입을 막아놓고 자식들에게 거대한 교회건물과 부동산과 기득권을 세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출석 신도수와 헌금액수를 계산하여 교회를 사고파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여신도와 간통하다 들통이 나자 도망가다 떨어져 죽는 일까지 생겼다. 또 기독교인들이 똘똘 뭉쳐서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는 모습도 비판해야 될 일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거든 비판에 직면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예수는 당시의 로마통치와 식민지 유대민족의 통치자들에 통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율법을 숭상하는 바리새인들을 참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일갈하던 모습은 여인의 간통을 비호한 것이 아니라 다중의 죄와 무자비하고 부당한 처벌을 비판하는 장면이다. 종교개혁도 잘못에 대한 비판에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지금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절실히도 비판이 가해져야할 대상이다. 이민생활이 고달프지만 내가 나서 자란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할 수가 없고 뿐 더러 그리 옳은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갈수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고 부패를 재촉하는 균주처럼 변하는 것을 외면하고 사는 것도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사익을 추구하기에는 비판이 장애가 될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애정이 있다면 썩어서 뭉그러지기 <br>전에 비판하는 것이 옳다. 허물어지는 민주주의를 그저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점점 부패하여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모하는 교회를 보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어도 변화는 없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사랑한다면 비판하자. 그러나 인신공격이나 허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비방이나 비난을 하지는 말자. 철저히 사실에 기반을 둔 비판, 철저히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비판,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애정 어린 비판이 우리사회를 좀 더 사람 사는 세상에 가깝게 하는 것이 아닐까? 비판은 돌을 던져서 상대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고 애정을 담아 더 나은 지향점을 모색하는 일일 뿐이다.</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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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인권과 평등,종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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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Nov 2009 02:46:5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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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시드니에서 이민생활 5개월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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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어느덧 한국을 떠나 이 곳에 온 지<span lang="EN-US"> 5</span>개월이 되었습니다<span lang="EN-US">. </span>악명 높았던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의 손에 최후를 맞은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군요<span lang="EN-US">. </span>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을 보면서 이 곳에 온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br></strong></span></span><br></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nbs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6/73/c0018673_4ae5164c5cc05.jpg" width="500" height="375.26315789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6/73/c0018673_4ae5164c5cc05.jpg');" /></div></span></o:p></span><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p><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nbsp;&lt;이 꽃이 바로 Jacaranda이며, 원산지는 남미로 알려져 있습니다&gt;</span></span></o:p></span></div><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o:p></span><span style="FONT-SIZE: 100%"><span lang="EN-US"><span style="COLOR: #333333; FONT-SIZE: 11pt; TEXT-DECORATION: none; text-underline: none; mso-no-proof: yes"><span lang="EN-US"><span style="COLOR: #333333; FONT-SIZE: 11pt; TEXT-DECORATION: none; text-underline: none; mso-no-proof: yes"><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lang="EN-US">&nbsp;</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nbsp;</span></o:p></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지금 시드니에는 보라색<span lang="EN-US"> Jacaranda</span>가 만개하였습니다<span lang="EN-US">. </span>이 곳의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전령사쯤 되는 꽃이라고 하겠습니다<span lang="EN-US">. </span>곳곳에 보라색이 찬란하게 물든 광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이나 일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그런데 이 꽃이 호주의<span lang="EN-US"> 12</span>학년 학생들에게는 매우 반갑지 않은 꽃이라도 합니다<span lang="EN-US">. </span>바로 이 꽃이 만발하는 시기에 그 들은 대학입학을 위한<span lang="EN-US"> HSC(Higher School Certificate)</span>을 보아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span lang="EN-US">. </span>남들은 모두가 봄의 정취를 만끽하는 때에 그들은 중요한 시험을 거쳐야 하니 그리 반갑지는 않을 것입니다<span lang="EN-US">. </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이 곳에도 역시 학생들에게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span lang="EN-US">. </span>아이들을 공부와 시험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했지만 여기서도 역시 완전한 해방을 선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에서의 편리한 생활을 뒤로 하고<span lang="EN-US">, </span>많은 지인들과의 따스한 교류도 접어둔 채 이곳에 온 이유가 희석되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이 곳에 와서 문득문득 약한 향수에 젖어 막연히 한국을 그리워하는 일조차 이미 감내하기로 했는데<span lang="EN-US">, </span>이 곳도 역시 입시라는 것이 우리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하지만 역시 한국을 떠난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이내 자위하게 됩니다<span lang="EN-US">. </span>우선 대학입시라고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그 것과는 직접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span lang="EN-US">. </span>대학을 한 줄로 완벽하게 서열화시켜 놓고 소위 말하는 인류대학을 가기 위해서 목을 메는 현상이 이 곳에는 없습니다<span lang="EN-US">. </span>이 곳도 역시 평판이 좋은 대학이 있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학이 있지만 뚜렷한 서열을 매기기는 좀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span lang="EN-US">. </span>또 평판이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것이 곧 그 학생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span lang="EN-US">. </span>좀 평판이 낮은 대학을 나온다고 사회에 진출할 때 특별히 불리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또 경쟁의 강도도 한국의 그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span lang="EN-US">. </span>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외고나 과학고 등에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고<span lang="EN-US">, </span>그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중학생들이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에서는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사교육비를 엄청나게 지출하며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경우도 있으니 확실히 이곳과는 차이가 있습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물론 이 곳에서도 한국이나 중국 그리고 인도출신학생들의 경우<span lang="EN-US"> Primary School</span>부터<span lang="EN-US"> Selective</span>에 진학하려고 사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런 학생들이 평판 좋은 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span lang="EN-US">. </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그렇지만 그 것이 그들의 인생전체를 결정짓는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에서처럼 일류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에 들어가서 시작부터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span lang="EN-US">. </span>오히려<span lang="EN-US"> 10</span>학년을 마치고<span lang="EN-US"> TAFE</span>에 가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훨씬 높은 보수를 받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span lang="EN-US">. </span>특별히 학력이 높은 사무직과 현장에서 노동하는 기술직이 서로 계급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도 아닙니다<span lang="EN-US">. </span>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그래서 여전히 나에게는 훨씬 편안한 한국생활을 접고 아이들을 무한경쟁의 늪에서 탈출시킨 것을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span lang="EN-US">. </span>물론 아직<span lang="EN-US"> 5</span>개월에 불과한 이 곳 생활에 우리 부부도 아이들도 그리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span lang="EN-US">. </span>상당히 불편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span lang="EN-US">. </span>하지만 다소간 각오를 했던 일이기에 당황하지는 않습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한국에서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임원으로 편하게 생활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 내 생활은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span lang="EN-US">. </span>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러 가는 아내를 기차역에 내려주고<span lang="EN-US">, </span>아이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나서<span lang="EN-US"> TAFE</span>에 갑니다<span lang="EN-US">. 3</span>시쯤 끝나면 다시 아이들과 아내를 태워서 집에 옵니다<span lang="EN-US">. </span>잠시 한 숨을 돌리고는<span lang="EN-US"> 5</span>시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span lang="EN-US">. </span>뭐 그리 꺼릴 것이 없으니 공개하자면 큰 회사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일입니다<span lang="EN-US">. </span>저녁<span lang="EN-US"> 6</span>시부터<span lang="EN-US"> 10</span>시까지 열심히 하고 시급으로<span lang="EN-US"> 12</span>불을 받습니다<span lang="EN-US">. </span>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수입이라곤 집세의 절반도 안 되는 푼돈에 불과합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span lang="EN-US">Center Link</span>에서<span lang="EN-US"> 2</span>주마다 아이들 키우라고 주는 돈까지 합해서 겨우 집세를 낼 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span lang="EN-US">. </span>나머지 생활비와 공과금 등은 모두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야금야금 헐어 쓰고 있습니다<span lang="EN-US">. </span>물론<span lang="EN-US"> TAFE</span>에 다니지 않고 적극적으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생활비는 충당이 가능합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 곳에 살려면 적어도 의사소통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는 해야 하고<span lang="EN-US">, </span>또 장차 안정된 일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기에 은행잔고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있습니다<span lang="EN-US">. </span>이 곳에 온지<span lang="EN-US"> 20</span>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한국인하고만 아울려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span lang="EN-US">. </span>그렇게 사는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리 따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span lang="EN-US">. </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아이들도 이 곳에서 학교생활을 하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span lang="EN-US">. </span>이제<span lang="EN-US"> 1</span>학년인 작은 애는 별로 언어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span lang="EN-US">. </span>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냥 어울려서 잘 노는 편이죠<span lang="EN-US">. </span>그런데<span lang="EN-US"> 5</span>학년인 딸아이는 그렇지 못합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의 강도 높은 경쟁과 시험에서 해방된 대가를 나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span lang="EN-US">. </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사실 온 식구가 적응을 위한 몸살을 앓고 있어서 지금은 그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합니다<span lang="EN-US">. </span>그나마 지금은 훨씬 나아진 셈입니다<span lang="EN-US">. </span>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암담했습니다<span lang="EN-US">. </span>마치 이 곳이 추운 겨울이어서 날씨부터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span lang="EN-US">. </span>기거할 집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게 어려웠고<span lang="EN-US">, </span>언어장벽에 대한 공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span lang="EN-US">. </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을 떠나오던 때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이었습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의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휴머니스트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고통이 컸습니다<span lang="EN-US">. </span>정신이 없고 힘든 시간 중에도 문득문득 그분의 서거가 가슴속에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span lang="EN-US">. </span>누가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를 생각하며 분노하고 도 분노했습니다<span lang="EN-US">. </span>시드니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분향을 하고<span lang="EN-US"> 49</span>재를 한인들과 함께 준비하고 치르면서 분노를 다스렸습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가슴속의 분노가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span lang="EN-US">. </span>한반도의 평화<span lang="EN-US">, </span>한국의 민주주의<span lang="EN-US">, </span>지역주의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span lang="EN-US">, </span>빈부격차의 해소 등을 추구하던 두 분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이 지금도 분하고 화가 납니다<span lang="EN-US">. </span>화를 다스리는데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span lang="EN-US">. </span>우리 현대사에 긍정적 의미와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두 분을 한꺼번에 잃은 분노가 하필이면 이민생활 시작부터 찾아온 것입니다<span lang="EN-US">. </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하지만 우리아이들이 자신의 친구를 경쟁의 상대로만 여기고 이기고 딛고 설 대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은 피할 수 있어서 선택한 일입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민의 목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span lang="EN-US">. </span>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히 퇴행하고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독재자 박정희의 유령이 통치하는 곳에서 마음에 고통을 느끼며 속을 태우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한국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span lang="EN-US">, </span>오로지 친구는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에 불과한 아이들<span lang="EN-US">, </span>휴머니즘이 없는 사회<span lang="EN-US">, </span>정글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나라<span lang="EN-US">, </span>여전히 국민은 통치의 대상일 뿐 주권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대한민국<span lang="EN-US">, </span>그 곳에서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span lang="EN-US">. Jacaranda</span>가 흐드러지게 핀 시기에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여유롭게 자연을 관조할 여유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니 견딜 만은 합니다<span lang="EN-US">.</span></strong></span></span></span></span></p><p style="MARGIN: 0cm 0cm 0pt" class="MsoNormal"><span lang="EN-US"><o: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trong>&nbsp;</strong></span></span></span></o:p></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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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문화,교육</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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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6 Oct 2009 03:19:04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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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윤도현, 김제동, 그리고 다음은 누구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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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align="justify">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누구나 민주주의에 대하여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다. 심지어 북한도 자신들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넣어 사용한다. 노골적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그런데 우리는 비민주적 또는 반민주적 행태를 너무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아마도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제각각 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정의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틀린 정의를 내려두고 그것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전히 군사독재의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오로지 공산주의의 반대말에 불과하다. 그렇게 교육되고 세뇌되었기 때문이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백성이 스스로 주인 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가치를 공동 생산하여 공동 분배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 둘은 본래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공산주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될 위험성이 높고, 실제로 공산국가들이 하나같이 혹독한 독재정치로 흘러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은 것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주권자인 백성이 타인의 자유를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국가이다. 더 쉽게 말해서 백성이 마음껏 정권을 비판할 수 있으면 그 나라가 바로 민주국가인 것이다. </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일까?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해야 옳다.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니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스스로의 자유를 누리고 정권에 대하여 마음껏 비판도 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말할 자유가 그리 잘 보장되는 것 같지 않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보수단체들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는 반면에 진보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도 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좀처럼 하기 어려운 분위기이다.&nbsp; </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현 정권 초기에 한 네티즌이 정부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검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는 이미 상당한 벌을 받은 후였다. 구속 수감되어 재판을 받는 것은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시범케이스에 걸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위생검역조건 완화에 반발하여 촛불집회가 있었다. 그 집회에 참가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처벌된 일도 있었다. 정권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서서 반대하지 말라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광우병에 대한 우려를 보도한 MBC PD수첩의 제작진까지 검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있다. 정권에 비판적인 멘트를 했던 앵커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비판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전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밀려나는 일도 여러 사례가 있다. 가수 윤 도현이 오랫동안 진행하던 '러브레터'의 진행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최근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당일 노제를 진행했던 김제동이 '스타골든벨'에서 밀려났다. 이 지점에 이르면 치졸한 보복이 가해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가 없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국민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위해하는 일이다. 이쯤 되면 정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헌법이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내용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모두 심각한 침해를 당하고 있다. </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지난 정권에서는 대통령 욕하고 모욕하는 일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대통령을 심하게 욕하고 비난해도 권력이 그것을 막으려 들지 않았다. 누구도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언론들도 연일 비난을 퍼부었지만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만개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민주국가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정권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나라가 되어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가 지금 대한민국에 등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도 비판할 수 없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썩게 마련이다. 부패는 곧 주변으로, 주변으로 번질 것이다. </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그렇게 후퇴한 민주주의는 저절로 살아나지 않는다. 각고의 노력이 있은 후에 회복된다 하더라도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다. 매우 소중한 것이 심각히 퇴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단다.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이 이정도 라면 말할 자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혼란이라 여기고 정권의 강력한 통제를 수용하는 태도마저 보인다. 아마도 독재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오랜 왕정과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기나긴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그렇게 통제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 특히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는 것은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와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또 국민의 자유가 제한된다 하더라도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부디 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지키고 누릴 줄 아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p><p align="justify">&nbsp;</p><p align="justify">누군가 자신의 정치적 소신으로 인하여 보복당하는 그런 사회는 결코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특정 연예인의 생계문제가 아니다. 다름에 대한 포용과 인정이 없다면 이 세상은 항상 전쟁터가 될 것이다. 다른 견해가 서로 존중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 <div class="autosourcing-stub"><div>출처 : <a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45040&amp;PAGE_CD=">주권자의 입을 틀어막는 정권 - 오마이뉴스</a></div><div></div></div><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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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badco.egloos.com/5104439#comments</comments>
		<pubDate>Sat, 24 Oct 2009 10:31:44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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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드니 한인사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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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시드니의 한인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한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이국땅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 정을 나눈다. 또 때로는 신에게 의지하여 위안을 받기도 한다. </p><p>&nbsp;</p><p>그렇게 교회에 모여서 신앙적 공감을 나누고 때로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렇게 교회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뿌듯함마저 느끼게 하는 소중한 커뮤니티다. </p><p>&nbsp;</p><p>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같지 못하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다. 말하자면 정도를 지나친 공동체 의식과 과도한 연대감이 그 공동체외의 사람들에게 소외를 느끼게 만드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한다. 특히 기독교 신앙에 부정적인 한인들에게는 대다수가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진 모습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다.</p><p>&nbsp;</p><p>거기에 더하여 신앙을 핑계 삼아 교회에 들어간 후 교인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물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비즈니스라면 그조차 그리 문제가 아닐 테지만 누군가의 피해를 피할 수 없는 비즈니스의 경우엔 좀 심각해진다. </p><p>&nbsp;</p><p>예를 들어 다단계 사업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다단계는 무한히 증식될 수가 없다. 한계에 달하여 더 이상의 증식이 어렵게 되면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고스란히 경제적 피해를 떠안고 만다. 교회공동체를 발판삼아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p><p>&nbsp;</p><p>때로는 정치적 편향성을 공유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일도 일어나곤 한다. 합리적 근거도 없이 특정한 정파의 이익에 종사하는 패거리를 형성하는 일이 있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특정정파의 편에 서서 정치적 행위를 하는 일들을 연상하게 만드는 일이다. 좁은 한인사회에서 교회공동체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특히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p><p>&nbsp;</p><p>오늘 날 한국교회가 신앙의 대상인 예수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이익집단이 돼가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의 삶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이 난다. 그는 기득권자들의 탐욕을 나무랐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어린이를 존중히 여겼다. 그의 모든 행보는 약자와의 연대로 집약된다. 그는 또 기존의 사회질서와 율법에 사로잡힌 자들의 형식주의를 질타한 바가 있다. 말하자면 당시의 기득권층에게 그는 반체제 인사였다.</p><p>&nbsp;</p><p>모두에게 서로 사랑함은 물론 욕심을 버리고 나눌 것을 설파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질서와는 상극인 삶을 살다 갔다. 그 것도 탐욕에 물든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끝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서 삶을 마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공고히 형성된 자본주의적 질서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남긴 교훈들을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p><p>&nbsp;</p><p>오늘날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예수는 단지 교회를 광고하기 위한 모델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회들이 하는 일마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부를 축적하고, 그 것을 대물림하며, 나누고 베풀기 보다는 움켜쥐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어린이를 귀히 여기기보다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매우 달콤한 설교를 늘어놓는다. </p><p>&nbsp;</p><p>정치적으로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파에게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예수는 저만큼 멀리 쫓겨나고 부자들만이 득실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교회전단지에 등장하는 예수는 그저 교회의 광고모델에 불과해 보인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바에는 왜 그를 광고모델처럼 동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p><p>&nbsp;</p><p>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예수께서 본다면 아마도 회칠한 무덤이라 할 것이다. 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던 때의 모습보다 더욱 강렬하게 분노할 것이다. 약자보다는 강자들에게 붙어서 기득권을 적절히 옹호해주고 그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받는 교회에 이미 예수는 너무도 멀리 쫓겨나고 없다.</p><p>&nbsp;</p><p>지금 시드니를 중심으로 호주에 정착한 한인사회가 교회를 통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것이 지나치게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지금 회칠한 무덤이라 비판받는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을 답습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제 한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일에만 더욱 몰두할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한인들의 사회 속으로 나아가서 역할을 찾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적어도 약자와의 연대라는 예수의 사상을 부인해선 안 될 것이다.</p><p>&nbsp;</p><p>혹시라도 자신이 예수의 반대편에 서서 그에게 비판받던 기득권층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돌아봐야한다. 기득권자들의 쏟아지는 비난에도 굴하지 않았던 예수를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버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편 갈라서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좁은 울타리를 만들어서 누군가 힘없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 돌아볼 일이다.</p><p>&nbsp;</p><p>이국땅에 모인 한인들이라도 교회와 사업과 돈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포용과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예수의 뜻이고, 그에게 대적하지 않는 일이다.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을 좋다고 본받을 일이 아니라 그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p><p>&nbsp;</p><p>예수는 결코 자본가와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지금 다시 이 땅에 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런 타협은 없을 것이다. 시드니에 한인교회들이 서로 협력하고 선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다. 부자들이 아닌 예수를 신앙하는 진실한 모습을 보고 싶다. 돈이 아닌 이웃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편안한 이웃이었으면 좋겠다. 무리한 바램일까?</p><p>&nbsp;</p><p>부디 한국의 대형교회와는 좀 다른 모습이길 소망한다. </p><p>&nbsp;</p><p>&nbs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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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인권과 평등,종교</category>

		<comments>http://sbadco.egloos.com/5093084#comments</comments>
		<pubDate>Sun, 11 Oct 2009 07:00:09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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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정운찬, 정몽준, 정동영 그리고 노무현의 평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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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접하며 경황없이 먼 이국 땅으로 날아온지 이제 4개월이 되어 간다. 그 동안 너무 가슴이 아팠고 말문이 막혀서 그 일에 대하여 글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은 아프지만 이제 그 분의 유지를 상기하며 추억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 오늘은 그 시작으로 각별한(?) 인연으로 대비되는 세 명의 정씨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p><p>&nbsp;</p><p>정운찬</p><p>&nbsp;</p><p>지금 이명박 정권은 정운찬씨를 총리에 임명하려고 한다. 이미 인준을 위한 청문회에서 수 많은 결함과 결격이 밝혀진 상황임에도 압도적 의석수를 믿고 인준을 강행할 모양이다. 참으로 도의란 모르는 집권세력이다. 납세의 의무를 태만히 하였던 사람, 특별한 용돈을 받아 쓴 사람, 수상한 소득이 수억원에 달하는 사람이 과연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에 적합하다면 그 나라는 이미 그런 수준의 나라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하기야 대통령의 도덕성이 그보다 결코 나을 것 없는 상황에서 누구를 탓하랴마는...</p><p>&nbsp;</p><p>그가 서울대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남긴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바로 3불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노무현 정권을 향하여 던진 말이다. "원재료가 좋아야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일갈하였다. 3불정책으로 대학들이 좋은 학생을 골라서 입학시키기 어렵다는 비판이었을 것이다. </p><p>&nbsp;</p><p>또 한편으로는 정권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서 후일에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의도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그가 그렇게도 강력히 비판하던 MB정권에 몸담으려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정치적인 인물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소신을 버리기에 주저함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정권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접고 별반 차이점이 없다고 표변할 리가 있겠는가?</p><p>&nbsp;</p><p>다시 원재료 론으로 돌아가자면, 누구도 수긍하기 어려운 어불성설이다. 과연 지금 서울대를 비롯한 우리의 대학들이 원재료를 잘 고르지 못해서 훌륭한 인재를 만들지 못하고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상식이다. 지금도 그 들은 충분히 훌륭한 원재료를 골라서 데려가고 있다. 다만 공정이 잘 갖춰지지 못한 나쁜 공장과 엉터리 기술자들에 의하여 품질이 떨어지고 불량률이 높아진 것이다. 엉터리 기술자 주재에 무슨 원재료 탓을 할 처지인가?</p><p>&nbsp;</p><p>그가 참여정부 말기에 갑자기 대선주자군으로 주목을 받은 일이 잠시 있었다. 경제학자에다 서울대학교 총장이라는 타이틀이 대중의 착시를 일으켰음 이리라. 그는 마치 자신의 몸값이라도 높이려는 듯 한껏 교만을 부린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를 겨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마디 던진다. "정치인이란 이것저것 눈치살피고 기회를 노릴 것이 아니라 몸을 던져서 헌신한 후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고 하였다. 기회주의적 처신에 대한 멋진 일갈이 아닐 수 없다. </p><p>&nbsp;</p><p>철학도 보이지 않고, 소신도 쉽게 굽히며, 도덕성에 의문이 많은 그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이는 대한민국이 또 한번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가는 증거가 될 것이다. 자신의 어설픈 기술을 탓하기 보다 엉뚱하게 원재료를 탓하는 교만함이 과연 총리자리에 어울린다면 할말을 잃고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p><p>&nbsp;</p><p>정몽준</p><p>&nbsp;</p><p>거대한 집권여당의 당대표를 승계하였다. 아버지를 잘만나 거대한 부를 물려받은 것도 그렇고 박희태 대표의 사퇴로 인하여 당대표가 된 것도 그렇고 그에게는 과분해 보인다. 그다지 사려깊은 행실이 있는 것도 아니요, 철학이나 소신도 보인 바가 없는 그에게는 참으로 과도한 것이 현재의 위상이다.</p><p>&nbsp;</p><p>아버지가 잠시 정치를 하며 대통령에 출마했을 당시 그는 그 유명한 초원복국집 불법 도청을 자행한 사람이다. 물론 불법행위를 찾아서 고발한 것을 잘못이라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폭로가 오히려 지역감정을 더욱 자극하고 정적의 승리를 확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을 상기하면 참으로 정치적 계산이 짧은 사람임에 틀림없다.</p><p>&nbsp;</p><p>또 월드컵 4강신화에 기반하여 대선후보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축구협회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신화를 지원했던 것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축구 대표팀을 좀 잘 지원해서 성과를 얻었다고 스스로 대권을 꿈꾼다는 것은 좀 어이가 없었다. </p><p>&nbsp;</p><p>후에 그는 결국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로 물러나고 지원유세에 나섰다. 철없는 그의 지지자들은 유세현장에서 성급하게 '차기 정몽준'을 외친다. 노무현 후보는 단호히 말한다. 너무 앞서가지 말라는 것이다. "추미애도 있고, 정동영도 있고..."라며 제동을 걸었다. 물론 정몽준은 곧장 삐져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발표를 한다. 그 것도 대선이 하루 남은 상황에서 치명상을 입히고자 했던 것이다. </p><p>&nbsp;</p><p>조선일보의 일면 탑 제목 "정몽준마저 노무현을 버렸다."는 섹시함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는 당선되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정치행보를 했던 그가 지금 거대여당의 대표가 되었다. 노무현이 뻔히 불리할 것을 알면서도 그와는 정체성이 다르다며 단일화 협상을 거부했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수준의 정치행보를 하는 사람이 집권여당의 대표이자 차기후보군으로 분류된다는 것이 서글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슬프다.</p><p>&nbsp;</p><p>정동영</p><p>&nbsp;</p><p>당과의 일체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출마를 언론에 알린 후 공천이 안되자 탈당하여 당과 정면 대결을 벌인 그가 당선되고 말았다. 유권자들이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 자의 복당을 운운하는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해당행위를 한 자를 다시 받아들인다면 그 것은 이미 공당의 모습이 아니다. </p><p>&nbsp;</p><p>참으로 구차한 정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이 어려울 때 나름의 정치적 지명도를 지닌 인물이 당을 위해서 수도권에 출마하여 싸우는 헌신이 필요했지만 그는 그 것을 거부하고 지역기반에 기대어 정치적 재기를 모색한 것이다. 정치인이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고 자신의 입지만을 추구한다면 국민은 그 만큼 불행해질 것이다.</p><p>&nbsp;</p><p>그는 이미 그런 행보에 익숙한 사람이다. 2002년 대선 때는 민주당 경선에 출마를 했었다. 당시 이인제 씨와 함께 노무현 후보의 장인이 좌익활동을 했다는 것을 문제삼아 색깔론을 강력히 들고 나왔던 그이다. 그러던 그가 다른 후보들이 줄줄이 사퇴하자 경선지킴이를 자처하며 입지를 다져 나갔다. </p><p>&nbsp;</p><p>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그는 곧장 당을 장악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당권파와의 일전을 치른 끝에 분당을 결행하였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데 앞장선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전혀 새로운 정당 민주주의를 골간으로 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그 것마저 허무는데 노력을 다한다.</p><p>&nbsp;</p><p>당원들의 참여와 결정에 의하여 당권은 물론 중요한 공직선거 후보자가 결정되는 것은 매우 발전된 정당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 하지만 그러한 정당민주주의가 자신의 차기후보 자리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보이자 그는 그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흔들고 마침내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온갖 부당한 동원과 편법으로 대통합 민주신당의 후보가 되었으나 결국 별반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p><p>&nbsp;</p><p>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진 정동영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일까? 퇴임하고 봉하마을에 정착한 후 지역의 노사모 회원들과 그 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장군차 나무를 심으며 담소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지난 대선에 누구를 찍었는지 물었다. 듣는 이들은 참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처럼 민망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p><p>&nbsp;</p><p>하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은 꺼리낌없이 대답을 한다. "찍을 사람을 찍었어요. 안될 것 같아서 찍었어요. 될 것 같았으면 내가 그 놈을 찍었겠습니까?" 상당한 시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마지막 들은 노무현의 유지로 남아 있다. 그의 마음속에 정동영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던 것이다. </p><p>&nbsp;</p><p>그나마 의미있는 시도라 여길만했던 정당민주주의를 통채로 망가지게 만들었던 그의 정치행보를 기억한다면 매우 공감가는 일갈이 아닐 수 없었다. 헌신하고 룰을 지키며 노력한 후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하면 모든 룰을 송두리채 부정해 버리는 태도는 정치지도자가 넘어서는 안될 금도를 넘어버린 것이다. </p><p>&nbsp;</p><p>결론</p><p>&nbsp;</p><p>노무현 전대통령과 그가 추구하던 가치가 무참히 짖밟힌 상황에서 목숨마저 던져야 했던 한국의 정치현실이 슬프다. 그런 그가 못마땅해 하던 그 3명의 정씨가 지금 한국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설치는 판국이 더더욱 슬프고 못마땅하다. 이렇게 엉터리 정치판을 만들고 이끌어 가는 정권에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선물하고 있는 국민들이 원망스럽다. </p><p>&nbsp;</p><p>과연 한국정치는 내면이 없는 가식과 소신이 없는 오락가락 행보와 철학이 없는 임기웅변을 지속해야 하는가? 부자들을 위한 지원과 특혜와 감세를 추구하더라도 서민들과 악수하는 사진 좀 찍어서 보도하면 지지율이 오르는 정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아마도 국민들이 좀 더 현명하고 지속적인 깨달음을 갖기 전에는 좋은 정치를 꿈에도 다시 맛보지는 못하리라.</p><p>&nbsp;</p><p>이 점이 생각있는 사람들을 잠못들게 만드는 안타까움이다. 안타깝고,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오호 통재라 한국의 민주주의여!!!!!!!!!</p><p>&nbs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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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sbadco.egloos.com/5082271#comments</comments>
		<pubDate>Mon, 28 Sep 2009 01:23:33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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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인들이 주로 영위하는 시드니의 청소업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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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호주의 한인사회에는 청소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꽤나 많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하였다. 남들이 꺼려하는 청소를 한다고 해서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세계가 그리 건강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사회가 적절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적절한 사회적 고려가 있어야 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그런데 지금 호주에서 청소는 적절한 수익이 보장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이미 너무 과도한 경쟁으로 인하여 매우 낮은 임금에 고생만 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 나라의 법이 정한 시간당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고생만 많이 하는 일이 되었다. 특별히 시드니의 청소일은 이제 그리 수지맞는 일이 아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과거 호주의 한인들에게 청소는 힘들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물론 누구나 꺼려하는 일이어서 그만큼 구하기 쉬운 일이었고, 적절한 수준의 임금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많은 한인들이 청소에 종사하였고, 나름 그 분야에서 부를 축적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그러다 보니 점차 많은 한인들이 유입되면서 마땅히 일자리를 얻기 어려우면 모두 청소에 종사하게 되고, 점차 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경쟁이 시작되면 점차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어떤 일이나 과도한 경쟁의 국면에 들어가면 법적 규제를 넘나드는 무리를 하는 일이 생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물론 과당경쟁이 아니라도 이미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탈법행위들이 있었을 법 하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최저임금을 지급하고 나머지를 자신이 갖는 일에 누가 뭐라고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저임금에도 한참 모자라는 돈을 지급하는 일이 관행처럼 퍼진다. 또 처음 Contract를 채결할 때 4시간짜리였던 일을 3시간으로 줄여서 Pay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하는 일도 점점 늘어난다. 무리하게 뛰어들다 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물론 그런 악조건에서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간단히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학비자로 와서 학비에 생활비를 모두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조금이나마 가계에 부담을 덜 주려는 동기에서 악조건이라도 받아들여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 절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인건비 착취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것도 그렇게 해서 겨우 생활을 꾸려가는 경우라면 모르겠으나 상당한 수준의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경우라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 아닐까?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다른 것은 몰라도 이 나라의 법률이 정한 기준에도 미달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생활고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축적하고 누리려 한다면 누구라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무슨 일이든 금도라는 것은 있게 마련이다. 청소를 업으로 하는 이른 바 업계의 금도도 최소한 이 나라가 정한 법률의 테두리쯤이 되어야한다. 거기에 미달하는 방식의 욕심은 금도를 넘은 것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물론 변명의 여지가 있다. 첫째, 그렇게 나쁜 조건을 제시해도 와서 일할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변명할 수 있다. 둘째,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경쟁이 심해져서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그럴싸하다. 또 Full time job이 아닐 경우 최저시급을 지킬 의무가 없다며 정당성을 주장할 여지도 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하지만 그러한 변명들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보통은 그렇게 법의 테두리를 넘나들어야 되는 일이라면 그 일에 뛰어들지 말아야 옳다. 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은 더욱 인간적이지 못한 처사이다. 경쟁이 심화된 것도 이미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금도를 넘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비판도 들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우리는 종종 한국기업들이 외국의 입찰현장에서 경쟁하는 일화들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기업들은 담합을 하거나 서로 돕지만 한국의 기업들은 죽자 사자 경쟁에서 이기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관계에 그리 합치하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기업들이라고 애국심을 발휘해서 자국기업들과의 경쟁을 회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합리한 일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경쟁을 하되 금도를 넘어 법의 경계를 넘나들지 않는다는 것을 외부에서 한국기업의 눈으로 바라볼 때 마치 담합을 하거나 자국기업 간의 경쟁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기업들이 자국기업들과의 경쟁에 나서서도 금도를 넘어 과도한 경쟁을 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과거 우리기업들이 매우 낮은 금액으로 입찰에 나서서 외국기업들을 이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을 언론이 대서특필하거나 칭찬하곤 했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그 때마다 업계에서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업들은 보란 듯이 이윤을 남기곤 하였다. 그 비결은 바로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Know-how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도급자들에게 출혈납품을 강요할 수 있는 먹이사슬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권력과의 결탁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의 재벌기업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하지만 그렇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며 달려온 우리의 기업들이 지금까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잘나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뭔가 부당한 방법으로 경쟁에서 이기고 나면 곧 바로 누군가 더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여 공격하기 마련이다. 그 동안 그러한 경쟁력을 믿고 연구개발에 투지하지 않았다면 시장에서의 퇴출을 피할 수 없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누구도 금도를 넘어서 이기려 한다면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이기고 난 후 과연 계속 방어를 해야 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금도를 넘는 일이 잦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일부를 제외하고 한국의 재벌들이 처한 문제점이 그렇고, 시드니의 한인사회에서 청소 업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자신이 넘어버린 금도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서로 너무나 각박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모두 자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악착같이 먹고사는 일이라면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박수를 쳐줘야 한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하지만 너도나도 뛰어들어 밥벌이를 하다 보니 경쟁이 생겨나고 그러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의 경계선을 넘는다면 그 선에서부터 부당한 일이다. 또 처지가 곤궁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일을 한다면 인륜에도 반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정당하게 일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일에 뛰어들어서 경쟁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를 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다들 어려운 처지의 교민사회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가는 것은 모두에게 득 될 것이 없다. 때로는 정당한 방법을 벗어나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서로를 살리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br>물론 대다수가 최대한 정당한 방법으로 사업을 영위하려고 노력하고, 금도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일부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서 과도한 욕심을 부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법을 어기는 일이 생기고, 그 것이 부메랑처럼 모두를 어렵게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span></p><p class="바탕글"></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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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문화,교육</category>

		<comments>http://sbadco.egloos.com/5080767#comments</comments>
		<pubDate>Sat, 26 Sep 2009 08:55:42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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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사연많고 비싼 나의 호주운전면허증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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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필자는 한국에서 15년 이상을 사고는 물론이고 벌점도 없이 운전하다 이민을 왔다. 물론 이민생활에 있어서는 초보자이다. 지난 5월 28일 아침 시드니 공항에 도착한 후 이제 막 정착하려고 노력하는 새내기일 뿐이다. </p><p>&nbsp;</p><p>한국에서 가져온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지고 3개월은 합법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권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사진이 들어간 신분증이 없어서 운전면허를 취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혹시라도 면허시험에 실패하면 Learner's License를 받아야 하기에 상당히 위험부담이 있는 결정이었다.</p><p>&nbsp;</p><p>한국처럼 운전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운전을 했다는 점에 기대어 용감하게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호주의 운전면허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Knowledge Test부터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인터넷으로 연습을 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첫 12문제에서는 좀 틀려도 문제가 없지만 후반부의 30문제 중에서는 2문제만 틀리면 무조건 탈락이다.</p><p>&nbsp;</p><p>RTA에 찾아가서 접수를 하고 Knowledge Test에 응시했다. 중간에 입력실수를 해서 긴장했지만 더 이상의 실수는 없었고 겨우겨우 합격했다. 곧 바로 Learner's License를 받을 것인지 Driving Test 접수를 할 것인지 묻는다. 물론 바로 접수를 했다. 3주 후에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p><p>&nbsp;</p><p>곧 바로 지인을 통해 운전 교습하는 분과 연락해서 연습을 해 두었다. 시험당일 또 다시 연습을 하고 시험에 응했다. 엄청난 긴장이 엄습함을 느꼈다. 만일 떨어지고 나면 아이들 Pick-up도 할 수가 없다. 2KM나 되는 거리를 아이들이 걸어서 다녀야 하고 쇼핑도 다닐 수 없다. 반드시 합격하지 않으면 안 될 나름의 절박성이 있었다. 한국에서 면허시험을 볼 때처럼 '떨어지면 다시 보면 된다.'는 느긋함은 아예 없었다.</p><p>&nbsp;</p><p>과도하게 긴장한 결과 몇 가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점수는 94/103이었으니 합격선인 90점이 넘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사소한 실수가 결국 Fail Item이어서 불합격하고 말았다. 결국 Learner's License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암담했다.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새로 다니기 시작한 TATE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새로 시작한 Part Time Job을 시작하자마자 그만둘 수도 없었다. 매일 온 식구가 상당한 거리를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모두 지치고 힘들었다.</p><p>&nbsp;</p><p>그나마 걸어서라도 다닐 수 있는 거리에 City Rail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일요일에 교회 가는 문제는 대책이 없었다. Rail road가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불순한 마음을 먹었다. 거대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게다가 아직은 도착한 지 3개월이 안돼서 국제면허증을 제시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p><p>&nbsp;</p><p>그러나 안일한 생각이 결국 화를 부르고 말았다.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우연히 Round About에서 경찰차를 마주하고 말았다. 우회전을 하니 경찰차가 내 뒤를 쫓아온다. 우회전 깜빡이를 켰는데 동그랗게 회전하는 동안 꺼져 버렸고 경찰이 보는 순간에는 신호 없이 우회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반사항에 대해서 처분을 받을 각오는 했다.</p><p>&nbsp;</p><p>그러나 국제면허증을 제시하니 그 것을 가지고 다시 면허내용을 조회해 보는 것이 아닌가? 결국 Instructor없이 운전한 것과 L자 표시를 붙이지 않은 것, 그리고 우회전 깜빡이를 켜지 않은 것까지 합해서 무려 985불에 달하는 거액을 물어야 했다. 그 날 이후로 한동안 운전석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지만 그저 분하고 억울할 뿐 이었다.</p><p>&nbsp;</p><p>그 일이 있은 몇 주후에 나는 다시 Driving Test에 응시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정된 8월 25일 드디어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사연 많고 비싼 면허증을 손에 쥐고 느꼈던 그 회한의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5월 28일에 도착해서 채 3개월이 안 되는 8월 25일에 면허를 취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정에서 이미 너무 많은 출혈을 한 셈이다. </p><p>&nbsp;</p><p>만일 내가 면허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면 나는 합법적으로 8월 27일까지는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괜히 응시해서 화를 자초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나라의 면허관련 법 규정에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있었다면 합법이었을 행위가 뭔가를 시도하다 실수를 하니 곧 바로 불법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p><p>&nbsp;</p><p>물론 Learner's License를 가지고 혼자서 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운전한 나 스스로의 잘못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거액의 벌금을 지체 없이 곧 바로 납부하였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뭔가를 시도하는 것이 불이익을 가져오도록 만드는 법 제도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뭔가 시도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불리하다는 것은 동기나 유인을 앗아가는 일이다. 그 것이 특히 바람직한 일이라면 확실히 그런 제도는 문제가 있다.</p><p>&nbsp;</p><p>게다가 일부국가 출신들은 곧장 자국의 면허증을 인정받고 있는 점도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물론 각 국가와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여 이 나라가 정한 주체적 제도나 규정을 우리에게 불리하다고 고치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운전면허의 취득이 쉬운 것으로 알려진 나라의 면허는 인정하면서 한국처럼 나름 까다로운 면허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 데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p><p>&nbsp;</p><p>대한민국은 호주라는 나라에게 제 4대 교역상대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게 한국은 매우 중요한 상대국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한국이 필수적 자원을 많이 수입하는 것이기에 교역의 필요성은 한국이 더 많이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p><p>&nbsp;</p><p>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이 엄청난 교역량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걸 맞는 상대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이런 일이 단지 운전면허 문제에만 국한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과연 이 나라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또 양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p><p>&nbsp;</p><p>물론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자유무역협정이나 지리적 거리등 특수한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형평성의 문제는 남는다. 교민사회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여기서 좀 더 노력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노력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싶다. </p><p>&nbsp;</p><p>물론 필자의 경우처럼 어리석은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의 위상을 깎아내릴 뿐이다. 이 들이 만들고 운영하는 법제도를 최대한 정확히 알고 준수하면서 문제가 있다면 그 것에 대하여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고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p><p>&nbsp;</p><p>종종 인기 없는 이 나라의 야당 당수가 한국의 대통령과 비교되는 것을 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과연 우리는 이 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는지를 돌아볼 때가 아닐까 싶다. </p><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p><p>&nbsp;</p><p>&nbsp;</p><p>&nbs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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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my stories</category>

		<comments>http://sbadco.egloos.com/5069263#comments</comments>
		<pubDate>Sun, 13 Sep 2009 08:15:01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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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호주의 교육이 한국과 다른 점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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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5pt; FONT-WEIGHT: bold"></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WEIGHT: bold">겨우 58%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사회</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있다. 호주의 학생들 중 12학년까지 마치는 비율이 겨우 58%라는 것이다. 물론 각 주별로 편차도 꽤 큰 편이다. Tasmania는 37%, ACT는 82%, NSW는 51%, Queensland와 South Australia는 59%, 그리고 Victoria는 57%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신기한 일이다. 교육체계가 상당히 잘 발달되어 있다는 호주에서 이렇게 12학년을 마치는 비율이 낮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각 주마다 극심한 차이를 보이는 것도 그렇다. 호주의 수도가 있는 ACT의 경우 예외적으로 높은 편이고, Tasmania의 경우 극단적으로 낮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이민자들의 경우 12학년까지 마치는 비율이 매우 높은 편임을 감안할 때 실제로 본래의 호주사람들은 훨씬 더 낮은 비율만이 12학년을 마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12학년을 마친 사람들이 모두 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진학률을 이보다 훨씬 낮은 비율이 될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그 이유가 무엇인지 추론해보자. 첫째 이유는 아마도 대학을 나오는 것이 특별히 경제적으로 유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0학년을 마치고 TAFE에서 기술을 배운 후 일을 하는 기술자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큰 회사에 취직한 사람보다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어렵게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할 유인이 적은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둘째, 학생들이 공부를 강요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부모나 학교나 모두 싫은 공부를 억지로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한국, 중국, 인도에서 온 이민자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또 12학년까지 마치고 대학을 가도 특별히 유리할 것이 많지 않다는 점도 작용하였겠지만 부모나 학교의 선생님들이 아닌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는데 상당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셋째, 12학년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아니라도 다른 진로를 계획하기에 용이한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TAFE에서 기술을 익히고 산업현장에 나가서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후에 성인이 되어서라도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면 늦게라도 대학에 갈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할 필요는 별로 없어 보인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lang="EN-US">10학년만 마치면 언제든지 TAFE에서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있고, TAFE에서 공부를 마치면 대학진학도 가능하다. 참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있을 뿐 아니라 진로를 바꾸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주라는 나라의 대학진학률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선진국이라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WEIGHT: bold">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반면 한국의 경우는 호주와 정반대이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호주로 말하면 12학년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진학한다. 물론 대학이나 학과별로 철저히 서열화가 돼 있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전문대학이라도 12학년을 마치기 전에는 진학할 방법이 거의 없다. 아무리 공부하기 싫어도 모든 학생이 12학년을 마치도록 강요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늘 시험과 경쟁에 시달리며 한 명이라도 더 이기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모든 교육과정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면 학창시절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느냐에 따라서 경제적 계급이 정해진다. 높은 수능점수로 상위권 대학의 상위권 학과를 나온 사람들에게는 높은 임금과 생활의 안정이 주어진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반면 공부를 하기 싫어서 좀 덜 하거나 공부가 아닌 다른 적성을 가진 사람은 그 만큼 저절로 불이익이 따른다. 낮은 임금과 고된 노동 강도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급의식까지 고통을 가중시킨다. 모든 것을 걸고 공부에 매달려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이겨야 할 유인이 무척 강한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이미 그 것을 체득하여 알고 있는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날마다 시간마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녀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희생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바로 옆자리에서 친하게 지내야할 친구가 항상 경쟁자로 인식되는 사회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사회이다. 그렇게 각박하게 학창시절을 보낸 후 성인이 되어서도 끝없는 경쟁 속에 노출된다. 직장의 동료를 이기고 더 나은 승진기회를 얻어야 하고 더 좋은 보직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먼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한 노력마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높은 교육열이 반드시 해로운 것만은 아니겠으나 확실히 지금의 한국교육은 문제가 많다. 도무지 사람 사는 세상이라 말하기에 민망한 수준인 것이다. 비단 이 문제가 교육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문제가 바로 학부모들의 가처분 소득을 자녀들의 사교육에 모두 쏟게 만들어 소비할 여력을 앗아 간다. 사교육비 부담은 또 낮은 출산율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인구구조가 기형화되어 가는 것은 곧 닥칠 미래의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몇 명 안 되는 젊은이들이 수많은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사회가 곧 도래할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WEIGHT: bold">사회구조를 바꿔야 해결될 문제</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사교육 과열의 문제나 낮은 출산율 문제를 무작정 국민의식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가 국민에게 그렇게 동기를 부여하고 있으면서 그 결과 나타난 것을 가지고 국민을 탓하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다. 풀기 어려운 일이라도 근원적인 처방이 없는 것은 아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첫째,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가장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낮은 임금과 멸시를 받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이 우리사회에 가장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사무실에 앉아 편하고 안락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우받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나 공공기관부터 채용의 관행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학력이 아니라 실력에 의해서 인재를 채용하고, 필요에 맞는 수준의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첩경이 될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둘째, 사회적 요구에 맞는 교육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거나 잘할 수 있는 부문의 기술을 익혀서 그 방면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한다. 경쟁하다 탈락한 사람만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흥미와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 배워서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교육재정을 더욱 확충하고 훌륭한 시설과 인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기술학교는 고등학년을 마쳐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학교만 졸업하고도 들어가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셋째, 국가는 개인 간의 과도한 교육경쟁이 각자에게 유리할 것이 없는 환경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국가나 공공기관의 채용기준을 바꿔서 기술학교 출신을 우대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도 모두 대졸자를 채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대부분이 대학을 졸업하는 사회에서 대졸자가 아닌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WEIGHT: bold">한국의 과도한 교육열은 비정상</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확실히 선진국에 비하여 한국의 교육열은 과도하다. 불과 58%만이 12학년을 마치는 호주에서도 한국인 이민자나 유학생들이 그 비율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또 이곳까지 와서도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서 사교육에 열을 올린다. Selective에 보내려고 초등학생들이 사교육비를 과도하게 써가면서 과외를 한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이 나라가 공부를 많이 해서 사회에 진출한 경우보다 좋은 기술을 일찍부터 배워서 사회에 진출한 경우가 더 유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교육에 집착한다. 여기에는 냉철한 계산을 떠나 뭔가 사고의 방식이 따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실질을 숭상하기 보다는 폼 나는 허상을 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아무리 봐도 한국인의 교육열은 과도할 뿐 아니라 비정상적인 구석이 있다. 공부를 하고 싶거나 소질이 있는 학생은 공부를 할 기회를 충분히 부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12년은 너무 과도한 시간의 낭비가 아닐까? 그 것을 좀 더 줄여서 꼭 필요한 것을 배우는데 사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거라는 생각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학생들은 옆자리의 친구를 이겨야할 경쟁상대가 아닌 친구로 대할 수 있고, 학부모는 아이들의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소질을 발견하고 개발하도록 돕는 사회가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급격한 노령화의 문제도 과도한 사교육비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사회가 건강하게 지속가능한 사회일 것이다. 죽어가는 휴머니즘도 그렇게 되면 다시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span></p><p class="바탕글"></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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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문화,교육</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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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8 Aug 2009 23:41:52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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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김민선이 뭘 그리 잘못했다는 것일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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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class="article">배우 김민선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로부터 피소를 당한 모양이다. 이 일에 대하여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매우 점잖은 말투로 피소된 여배우를 나무란다. 그에 대하여 배우 정진영이 나서서 반론을 한다. 또 변희재씨가 나서서 배우 정진영에게 잘 알지 못하면 함부러 나서지 말라고 했고, 다시 배우 박중훈은 자신이 정진영보다 지적수준이 더욱 낮다면서 지적수준이 안되면 자기의사표현도 하지 말라는 것이냐며 반박한다. <br><br>미국산 쇠고기는 청산가리만큼 위험한가? <br><br>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면 그 업체의 대표는 고소하기가 좀 어려울 것이다. 만일 도축과정과 검역과정에 문제가 생겨나서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가 들어와서 식탁에 오른다면 청산가리만큼 위험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없는 쇠고기만 철저히 골라서 들여 온다면 전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다. 이쯤되면 이 글에 대한 수입업체 대표의 입장은 더욱 난감해질 것이다. 소송은 커녕 심지어 자기 편인지 반대편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br><br>그렇다면 배우 김민선이 한 발언은 명확히 허위사실이거나 아니면 정확히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는 정확한 사실이고 어떤 경우에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축과정과 검역과정이 완벽히 작동한다 하더라도 그 것은 청산가리와 같이 위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전제조건과 결론이 모순이므로 허위사실이다. 아무리 어린 여배우라 하더라도 그렇게 완벽하게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가 얻을 커다란 이윤획득 기회를 박탈했다면 아마도 손해배상은 아니라도 공식사과 쯤은 해야 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br><br>김민선이 미국산 쇠고기를 청산가리에 비유한 것을 보고 그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회피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 판단해 보건데 그 말로 인하여 먹으려 하다가 마음을 바꿨을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 녀를 무척 좋아하는 팬이라면 혹시 그녀의 말을 금과옥조로 믿고 따랐을지 모르나 과연 그러한 사람들로 인하여 상실한 업체의 이윤이 수억원에 달할 수 있을까? &nbsp; <br><br>차라리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조건을 전면허용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국민에게 보여준 앞뒤가 맞지않는 행태를 보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싶다. 바로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하여 신뢰가 가지 않아서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들어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면 그럴 뜻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피소대상은 다름아닌 이명박 대통령과 농림부 장관 및 통상교섭 본부장이 돼야 할 것이다. <br><br>만일 그 녀의 발언이 허위사실이어서 업체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아마도 앞으로는 국어의 문법도 바꿔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또 그 과정에 과장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그런 비유법과 과장법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용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좀 더 설득력을 더하기 위한 경우와 상대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가 승소를 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비유법과 과장법을 극도로 조심하면 살아야 할 것이다. <br><br>전여옥 의원의 충고 <br><br>전여옥 의원의 충고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는 업체를 편들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피소를 당하여 당혹스러운 어린 여배우를 진정으로 걱정하여 하는 충고일까? 아마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하여 촛불이 일어났고 그 것에 대한 반감을 이 일을 계기로 풀어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br><br>하지만 집권여당의 국회의원 쯤 되는 사람이 곤란한 일을 당한 어린 여배우에게 그런 식의 충고를 하는 것은 거의 조롱으로 해석될 일이다. 나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더니 참 안됐다. 그러게 입 좀 닫고 있지 그랬어? 이런 식의 조롱말이다.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과 같은 꼴이 아닌가? 아뿔싸! 비유법과 과장법을 함부러 쓰다가는 큰일 날 텐데 조심해야 겠다! <br><br>게다가 배우를 공인이라 규정하는 것은 합당한 일일까? 배우는 공공의 이익에 종사하기 위한 직업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서 영화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기를 얻으면 자연스럽게 여러사람에게 영향을 좀 끼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익을 추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공인딱지를 붙여서 입을 막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설혹 공인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어야 맞지 않을까? 아직도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라면 말이다. <br><br>변희재씨의 궤변 <br><br>위의 이유에서 배우 정진영의 반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공인이라면 적어도 공익에 종사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원처럼 공인인 사람이 또 어디에 있으랴? 정말 국회의원들은 함부러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br><br>변희재씨의 정진영에 대한 반박은 그 편 사람들에게는 매우 통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잘 알지도 못하고 지적능력에 의문이 있는 사람들은 함부러 반론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니 얼마나 통쾌한 주장인가? 지적능력이 훌륭하면 좋은 일이다. 나쁠 것이 없다. <br><br>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본인의 지적 능력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지적능력이 그리 높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나서서 함부러 반론을 제기하다니...또 지적능력이 높은 분에게 큰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인 아닐까? 아무래도 아주 똑똑한 사람들만 말을 하고 주장을 펴고 그래야 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인가? <br><br>우매한 지적능력으로 이해하기로는 민주주의란 누구나 동등한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 것이 잘못된 상식일까? 지적 능력이 모자라서 시대의 변화를 잘 읽지 못하고 아직 민주주의 타령을 하고 있나? 지금 이시대는 그러한 과거의 상식과 많이 달라진 것일까? <br><br>나 또한 배우 박중훈 씨처럼 지적능력이 높지 못해서 이런저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 모양이다. 변희재씨! 얼마나 공부하고 지적능력을 배양하면 당신처럼 말을 해도 상관이 없을까? 당신의 지적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좀 소상히 설명해 보시구려. 참 어려운 세상이 도래한 모양이군. 아무나 나서서 대통령을 **놈, *새끼라 하던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대통령도 아닌 그냥 쇠고기를 가지고도 말을 함부러 해서는 안되다니...시대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렵긴 어렵구만! <br><br>에이미트, 김민선, 전여옥, 정진영, 변희재, 박중훈... <br><br>평소에 그다지 영화를 많이 보는 편도 아니고 김민선이라는 여배우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이름과 동시에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녀를 편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진영, 박중훈 모두 그리 평소에 좋아하는 연예인이 아니다. 하긴 따지고 보니 좋아하는 연예인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br><br>하지만 이번 일에 관한한 나는 김민선과 정진영 그리고 박중훈의 편에 서고 싶다. 어쩐지 그 들의 지적수준이 나와 가까워 보여서이다. 자신이 왜 고발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여배우, 정치인 나리께서 점잖게 나무라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박하는 배우, 유명한 보수논객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헷갈려 하는배우가 훨씬 내 생각과 상식에 어울리는 듯하다. <br><br>정권이 바뀐지 이제 1년반 쯤 되어 가는데 여전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를 향수하는 나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시는 사장님, 집권여당의 국회의원, 보수논객님 들의 사고를 따라가지 못하겠다. 아니 역부족으로 느껴진다. 이제 시대는 뭔가 지적능력이 훌륭한 사람들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혹시 이 글도 지적수준도 낮으면서 함부러 촐랑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그렇다고 뚫린 입을 어쩌란 말인가?<br></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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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문화,교육</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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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7 Aug 2009 01:35:04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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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나의 가족사에 투영된 8.15 해방의 의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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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p><p>&nbsp;</p><p>아버지에 대한 원망</p><p>&nbsp;</p><p>어린 시절 나의 눈에 아버지는 무척이나 나약하고 무능하게 보였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늘 외지를 방랑하다 1년에 한번 집에 들를까 말까 했을 뿐 아니라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활동은 거의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p><p>&nbsp;</p><p>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불과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그 때의 내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아직 아버지를 여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리고 철이 없었다. 물론 그리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종종 가난을 물려주신 아버지를 원망하며 지냈다. </p><p>&nbsp;</p><p>딱히 정해진 수입원이 없었던 터라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사무실의 급사로 취직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이 교복 입은 모습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좌절감은 상당기간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p><p>&nbsp;</p><p>그러나 성장하면서 아버지는 원망이 아닌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나와는 14년 터울인 누나에게 아버지의 과거에 대하여 들은 후로는 항상 짠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p><p>&nbsp;</p><p>아버지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징용에 끌려갔다 8.15해방과 함께 돌아오셨다는 것이다. 또 돌아와서는 자신이 마치 조국에 죄라도 지은 양 부끄러워 고향의 일가친척을 모두 등지고 떠나왔다고 한다. </p><p>&nbsp;</p><p>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지가 당신의 과거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일은 본 일이 없다. 가슴에 상처와 한으로 남았을 과거사를 자식인 나에게도 숨기고 싶었던 것이리라.</p><p>&nbsp;</p><p>단발령과 창씨개명 거부 그리고 점점 기우는 가세</p><p>&nbsp;</p><p>그런 아버지를 아들이 없던 외할아버지께서 데릴사위로 삼으셨다. 지역에서는 나름 존경받는 유학자(儒學者)이던 외할아버지는 꽤나 넉넉한 농토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농사일을 하던 머슴이 10여명이나 되었다니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아버지를 사위로 맞이할 즈음엔 이미 가세는 기울고 허명만 남은 상태였다.</p><p>&nbsp;</p><p>외할아버지는 성격과 기질이 상당히 꼬장꼬장한 분이었던 모양이다. 단발령도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했으니 일제가 손봐야 할 주요대상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수탈은 이런 집에 더욱 가혹했을 법하다. 추수해서 곡식을 좀 숨겨놓기라도 하면 귀신같이 알고 찾아내서 빼앗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머슴들의 새경을 주고 가족들이 먹을 것도 변변히 남기기 어려웠다고 한다. </p><p>&nbsp;</p><p>당시 일하던 머슴들 중에는 상머슴이 한명 있었다. 묘하게도 그 상머슴의 집안은 날로 풍족해지기만 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 집은 해방이 되고나자 이미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형편이 되어 있었다. 뚜렷한 근거는 없으나 우리 집 비밀곡간을 밀고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뭔가 옳지 않은 일을 한 대가로 부를 축적했다며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합리적이지 못한 의심인 것이다. </p><p>&nbsp;</p><p>그렇게 몰락해가는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아버지는 1947년 아들을 보게 되었다. 또 두해 지나서는 딸을 낳았다. 바로 나에게는 형이고 누나이다. 형은 1947년생이다. 그렇게 태어난 형은 열 살을 겨우 넘긴 나이에 남의 집 생활을 해야 했다. 형이 일하던 방앗간 집이 바로 외할아버지 집에서 상머슴 생활을 하던 그 분의 집이었다. </p><p>&nbsp;</p><p>나는 그런 우리의 가족사를 모르고 자랐다. 그 방앗간 집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애기씨'이라 칭하고, 어머니는 그 분에게 항상 '아짐'이라 칭했지만 그 호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성장한 후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설명해주셨다. 바로 머슴살이 하던 집의 부인이나 집안 살림 해주는 분에게 '아짐'이라는 호칭을 하고, 주인댁의 딸에게 '애기씨'라 칭한다는 것이다.</p><p>&nbsp;</p><p>하지만 우리집안의 누구도 그 집을 질시하거나 경원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집안과는 항상 친근한 관계로 지내왔으며 도움을 받은 일도 적지 않았다. 타인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우리가족은 그 분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에 근거하여 그 분들의 부가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p><p>&nbsp;</p><p>아버지의 한과 가세가 이울어가는 그늘에는 어김없이 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징용에 다녀온 후로 가슴에 안고 살아가던 회한과 분노가 바로 일제로 인한 것 이었고, 외할아버지가 꽤나 넉넉한 가산을 모두 잃고 가난해진 것도 일제에 대한 비협조가 원인이었던 것이다.</p><p>&nbsp;</p><p>전도된 역사와 가치관</p><p>&nbsp;</p><p>우리집안에는 일제와의 항일전쟁에 나선 독립투사도 없고, 독립군을 지원하거나 국권 회복을 위해 특별히 노력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깊은 좌절과 가난을 대물림해왔다. </p><p>&nbsp;</p><p>하물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가족이 희생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어떨까? 가산을 모두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내놓은 분들은 또 어떨까? 후손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며 친일파의 후손들이 대대로 기득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p><p>&nbsp;</p><p>또 우리가 국권을 상실했던 기간, 바로 그런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삶이 고통으로 점철된 분들이 있었다. 바로 정신대 할머니들이다. 여전히 일본정부는 그 분들의 고통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며 발뺌을 하고 있다. 그 분들의 고통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일제의 만행과 우리의 나약했던 국력의 탓인 것이다. 그 분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희생을 당하고도 모든 고통을 스스로 지고 살아가도록 만든 국가와 우리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p><p>&nbsp;</p><p>반면 일제는 그 잔혹했던 식민통치의 역사를 부인하고 하나씩 지워나가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종종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일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p><p>&nbsp;</p><p>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해방 후에도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며 대물림하고 있다. 심지어 친일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조상들의 친일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려고 당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형편이다.</p><p>&nbsp;</p><p>이렇게 우리의 역사가 흘러가서는 안 된다. 또 다시 대한민국에 누란의 위기가 다가올 때를 상상해보자. 누가라도 나서서 자신을 희생하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전도된 역사와 가치관을 학습하지 않았는가? 저항하면 대대로 가난과 고통을 물려받으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것과 순응하고 협력하면 수많은 기득권과 부를 누리고 세습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p><p>&nbsp;</p><p>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우리의 과제</p><p>&nbsp;</p><p>그래서 역사는 전도된 기록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독립투사는 독립투사로 기록되어야 한다. 친일파는 친일파로 기록되어야 한다. 독립운동은 명예로운 역사적 기록이어야 한다. 친일은 부끄러운 역사적 기록이어야 한다. 일제의 폭압에 희생당한 분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따스하게 껴안고 보살펴야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내부에서조차 역사가 전도되어 흘러가고 있는데 일제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p><p>&nbsp;</p><p>그렇다고 친일파의 후손들을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다. 무슨 연좌제를 부활하자는 것도 아니다. 또 그렇게 할 방법도 없다. 독립지사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경제적 보상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 또한 그리 가능하지도 않으며 합당하지도 않다. 조상은 조상이고, 후손은 후손일 뿐이다. 시급한 것은 역사를 바로 기록하는 일이다. </p><p>&nbsp;</p><p>다시 우리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을 때 누구라도 나서서 우리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서 싸우는 것이 명예롭고 옳은 일임을 역사에 기록하는 일이다. 또 민족을 배신하고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것이 부끄럽고 해서는 안 될 일임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그래야 힘 있는 자에게는 굴종하고 불의와 타협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는 정의롭고 옳은 상식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p><p>&nbsp;</p><p>그 것을 위해서 우리는 전도된 역사를 정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전도된 역사라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우리의 역사적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고통 속에서 평생을 신음하신 분들을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따스하게 보살펴 드려야 한다. </p><p>&nbsp;</p><p>이제 64년째 되는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서둘러야 할 일이다. 이런 일을 해내지 못하면 진정한 광복은 아직도 멀었다. 그래서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내 가족사를 이렇게 노출해가며 이번 광복절을 맞이하려고 한다. </p><p>&nbsp;</p><p>&nbsp;</p><p>&nbs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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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역사,민족,평화</category>

		<comments>http://sbadco.egloos.com/5041373#comments</comments>
		<pubDate>Sat, 15 Aug 2009 01:06:53 GMT</pubDate>
		<dc:creator>비토세력</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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