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
<?xml-stylesheet href="http://rss.egloos.com/style/blog.xsl" type="text/xsl" media="screen"?>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환상수첩</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link>
	<description>그림의 혁명</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un, 22 Nov 2009 14:56:54 GMT</pubDate>
	<generator>Egloos</generator>
	<image>
		<title>환상수첩</title>
		<url>http://pds16.egloos.com/logo/200911/13/39/e0005439.jpg</url>
		<link>http://saebing.egloos.com</link>
		<width>80</width>
		<height>86</height>
		<description>그림의 혁명</description>
	</image>
  	<item>
		<title><![CDATA[ 씨디 구경 하다가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80545</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80545</guid>
		<description>
			<![CDATA[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0421f5f5.jpg" width="400"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0421f5f5.jpg');" /></div><br><br>벨 앤 세바스찬&nbsp;BBC 세션이 라이센스로 나왔다.&nbsp;정말 아주 좋은 다른 앨범 두 장은 재발매되었다. <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04ac6c3c.jpg" width="400"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04ac6c3c.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cf0c8a167.jpg" width="400"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cf0c8a167.jpg');" /></div><br><br>이 앨범을&nbsp;검색하면 이렇게 다양한 초록을 볼 수 있다..<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cf2e6b342.jpg" width="500" height="102.66159695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cf2e6b342.jpg');" /></div><br><br>레고 아트도 있고..<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16232730.jpg" width="400"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16232730.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166e3494.jpg" width="400"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166e3494.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1701e41e.jpg" width="400"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2/39/e0005439_4b08d1701e41e.jpg');" /></div><br><br>			 ]]> 
		</description>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80545#comments</comments>
		<pubDate>Sun, 22 Nov 2009 05:42:25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유년 시절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8956</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8956</guid>
		<description>
			<![CDATA[ 
  <br>네가 살아온 모든 나날과 완벽하게 똑같은 질문을 내게 한다면 나는 날아다니는 새처럼 여러 대답을 하겠다. 순수히 병명(病名)으로만 이루어진 대답을 하겠다. 피가 섞이는 최초의 방식에 대해. 신의 독서 방식에 대해. 사랑하면 안 되는 구름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름에 대해. (조연호)<br><br><br><br>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에 다녀왔다. 평창동은 담 사이로 얼굴 내민 개, 윤호가 사는 집, 은강방직 사장이 사는 집, 미술관 같은 집. 그래서 찾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웠지. 이번에는 집 같은 미술관이려니 해서<br><br><em>"저 년놈들이 왜 도서관에서 떠들어?"</em><br><br>말하고 싶은 것은 가난할수록 예술 같은 것을 되는대로 다 접해야 한다. 차림새가 허름하다고 쭈뼛거릴 거 없어. 어차피 드라마에 다 나오는 상황이야. 마을버스가 30분마다 한 대만 오더라도 당연히 자가용이 없으니 걸어 다녀. 그러면 담 사이로 얼굴 내민 개벽이를 볼 수 있지<br><br>"시골의 갓쓴 할아버지들이 와서 안경을 보고 울고, 그 사랑이 보통이 아니다. 그래서 춘원의 친일이 더 문제가 되는 거는..." <br><br>세검정초등학교를 지나오면서<br><br>1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가면 3층집이고, 궁궐 같고, 애들은 서로 집에 차가 몇 대냐고 묻고 우리집은 세 대, 네 대. <br>영악한 여자애의 일기를 대신 써줬었는데 그 집에 갔더니 걔네 엄마가 속옷 차림으로 나와서 선물을 주었다.<br>그 때 우리집은 이층집. 빌라를 나와 개구멍을 통과하면 옆집 미술관으로 통했다. 그 먼지 같은 미술관은 맨날 걸려 있는 그림만 걸려 있었다. 아주 세밀하게 그린 스웨터를 입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가까이서 봐야 그림인 줄 알았다. <br>그 때 아빠가 듣던 테이프는 들국화? 산울림?<br>2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가면 맨션이고, 할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셨는데 퉁퉁 불은 죽 같은 라면. 그 여자애는 나에게 "우리 봄이 오면 북한산에 가자. 꽃도 보고 물 옆에서 맛있는 것 먹지 않을래?" 편지를 써주었다. 어른들이 편지를 보고 재미나 죽으려고 했다. 그애와 주택가 골목에 돌로 흰 금을 그어놓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땅따먹기를 했다. 우리는 지치는 적이 없었다. 하늘이&nbsp;붉어지면 쓸쓸하긴 했다.<br><br>			 ]]> 
		</description>
		<category>잎</category>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8956#comments</comments>
		<pubDate>Thu, 19 Nov 2009 15:30:00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헤겔의 영향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9009</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9009</guid>
		<description>
			<![CDATA[ 
  <br>피터 싱어의 《헤겔》에서<br><br>마르크스는 나이가 들면서 헤겔의 용어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헤겔 철학을 변형시켜 자신이 도달했던 공산주의의 비전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래 전에 죽은 사상가들이 살아나서, 그들의 사상으로 인해 후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게 된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까를 상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철학의 역사적 정점이 절대이념에 대한 포괄적 이해이기보다는 백여 년 이상 전 세계에서 일어난 혁명 운동에 영감을 준 공산주의 사회의 비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헤겔만큼 놀랄 수는 없을 것이다.<br><br>			 ]]> 
		</description>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9009#comments</comments>
		<pubDate>Thu, 19 Nov 2009 10:03:12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망기타 본문 입수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8611</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8611</guid>
		<description>
			<![CDATA[ 
  <br>박정대 &lt;망기타&gt;<br><br><br><strong>1 망기타</strong><br><br>나 지금 망기타를 듣고 있어<br>영화 타락천사에서 관숙이가 불렀던 그 노래<br>나 지금 줄 하나가 끊어진 내 기타 옆에 물끄러미 앉아<br>망연히 망기타를 듣고 있어, 뭐 하니, 타락하고 싶어<br>나 지금 문을 열고 나가 비 내리는 저녁과 몸 섞고 싶어<br>너와 함께 저 어둠 속으로 아득히 흘러가고 싶어<br>나 지금 망기타를 들으며 망가지고 있어, 넌 뭐 하니<br>이렇게 계속 망가지다 보면 내 꿈길의 입구마저 황폐해질텐데<br>나 지금 망기타를 들으며 내 폐허의 침대 위를 뒹군다<br>관숙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나를 침대 위로 쓰러트려<br>나 지금 내 몸속의 물결이 비 맞는 소리를 듣고 있어<br>뭐 하고 있니, 이 달빛도 없는 폐허의 침대에서 날 불러내 줘<br>나 지금 망연히 망기타만 듣고 있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노래<br>언젠가 천사가 날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나 지금 가슴이 너무 아파<br>나 지금 아무래도 끊어진 기타 줄을 구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br>기타 줄은 어디서 구하지, 네 긴 머리카락<br>나 지금 아무래도 그게 필요해<br>네 부드럽고 긴 한 줄기의 사랑<br><br><br><strong>2 그녀座</strong><br><br>밤하늘에 피어난 그녀座를 치어다보는 밤입니다, 초저녁별들 <br>아고라나이트의 石花로 아름답게 피어난 이 지상의 밤입니다<br><br>대낮의 느티나무 잎들이 불러주던 그 많은 음악들은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까<br>아니 이젠 이해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촛불나무 아래 누워 오래도록 그녀座를 바라보는 밤입니다<br><br>아, 갈증도 음악처럼 익어 흘러간다면 그녀座 가장 밝게 빛나는 이 지상의 아무르 강가로 나 또한 고요히 흘러갈 수 있으련만, 내 술병座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br><br>시에 시에, 중얼거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중국의 별들이 赤道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북반구의 여름밤입니다<br><br>그녀座를 너무 오래 치어다봐 꿈에서도 맑은 별이 뜰 것 같은 그런 밤입니다<br><br><br><strong>3 망기타에 줄을 매다</strong><br><br>망가진 기타에 줄을 매는 건 知音일 뿐, 망가진 기타를 스스로 고치는 자 가수가 아니네 시인이 아니네<br><br>기타가 망가지면 가수는 스스로의 목청으로 기타가 되고 기타가 망가지면 시인은 스스로의 온몸으로 악기가 되네<br><br>망가진 기타에 줄을 매는 건 언제나 아직도 이 지상에 남아있는 어둡고도 따스한 아픔들일 뿐, 그 아픔들이 매어논 기타줄을 두드리며 나 다시 노래 부를 힘을 얻네<br><br>아, 지금 내가 듣는 '忘記他'에 줄을 매어줄 자 누구인가<br><br>아, 망가진 기타 곁에 망연히 앉아 있는 나에게 줄을 매어줄 자<br><br><br><strong>4 날씨와 생활</strong><br><br>날씨 속에 그녀가 있다<br><br>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는가<br><br>그녀는 왜 그 시간이 되면 그 노래를 듣는가<br><br>어째서 고독은 나의 힘이고 빗방울들은 고독보다 힘이 센가<br><br>날씨와 생활은 어쩌자고 같이 붙어 있는 건가<br><br>나는 왜 비가 내리는 날이면 직장에 가기 싫고 직장에 가기 싫은 날에는 왜 생활도 함께 싫어지는가<br><br>날씨 때문에 생활을 버린다면 그 날씨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br><br>생활이 왜 중요한가, 왜 중요해야만 하는가<br><br>나는 자꾸 살고 싶은데 생활을 버리면 왜 자꾸만 죽어가는가<br><br>그런데 도대체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는가<br><br>그 노래만 들으면 나는 왜 자꾸 그녀가 생각나는가<br><br>그녀는 왜 날씨와 함께 오는가, 그녀는 왜 생활과 함께 가는가<br><br>생활은 왜 사랑이 되지 않는가, 생활이 사랑이 되는 나라는 없는가<br><br>날씨와 생활과 사랑이 음악처럼 함께 젖어드는 저녁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br><br>그런데 도대체 나는 어쩌자고 그녀를 사랑하는가<br><br>나는 왜 생활처럼 끝내 그녀를 사랑하는가<br><br>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는가<br><br>사랑은 왜 날씨 속에 있는가<br><br><br><strong>5 칭따오 삐주*</strong><br><br>물이 귀한 중국에 와서<br>물 대신 칭따오 삐주를 마신다<br>텐안먼 꽝창에서도<br>완리창청에서도<br>팔월의 폭염을<br>칭따오 삐주로 식힌다<br>북경의 뒷골목에서 만난<br>중국 청년도<br>자본주의보다<br>더 자본주의적인<br>중국식 사회주의도<br>칭따오 삐주로 사귄다<br>중국에 와서 내 여권은<br>칭따오 삐주다<br>마오쩌뚱의 초상도<br>明十三陵 가는 길<br>틈왕 이자성의 동상도<br>나는 칭따오 삐주를 마시며<br>통과한다<br>아는 만큼 보인다고<br>누군가는 말하지만<br>내 여행은<br>취하는 만큼만 보인다<br>거대한 중국의<br>심장부를 지나고<br>황하를 건너며<br>아직은 붉어지지 않은<br>광활한 옥수수 밭을 지나며<br>나는 칭따오 삐주를 마신다<br>수호전에 나오는<br>이규처럼<br>두 눈 질끈 감고 간다<br>그냥 취해서 간다<br>더운,<br>더러분 한세상<br>칭따오 삐주를 마시며<br>통과!<br><br><br><strong>6 옛 사진, 珍南**에게<br></strong><br>그래, 우리가 당도한 그 새벽녘 역 광장 모퉁이 어슴푸레한 사회주의 안개 속에 너는 서 있었다<br><br>사람들은 그곳을 청색의 도시라 불렀지만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푸른 하늘을 본 것은 네 눈동자 속에서였다<br><br>나귀가 수레를 끌고 그 수레 위에 사람이며 건초더미가 함께 실려가던 시골의 풍경을 너는 애써 자꾸 외면하려 했다, 너는 내몽골 대학교 3학년, 고향이 흑룡강성 근처라 했지<br><br>그래, 네가 떠나온 것은 결국 서러운 가난이었겠지만, 우리가 떠나온 것도 단순히 서울만은 아니었다<br><br>서울이라는 이름의 구역질 나는 자본주의, 그 자본주의에 빌붙어 사는 그 모든 개떼들로부터 우리는 잠시라도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br><br>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당도한 어슴푸레한 사회주의 안개 속에 너는 아름다운 유령처럼 서 있었다<br><br>그래, 종교와 국가를 넘어가면 그곳에 건물과 불빛이 있다<br><br>우리는 네가 사는 건물과 불빛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br><br>밤에 내몽골 대학 교정을 우리는 함께 걸었다<br><br>밤에 내몽골 대학 뒷골목에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br><br>밤에 너는 내몽골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고 우리는 늦게까지 배갈과 마유주를 마셨다<br><br>술 속에 불빛이 있었던가, 불빛 아래 술잔이 출렁거렸던가<br><br>그래, 우리가 아무리 술잔을 비워도 그 취기로도 우리의 천박함은 씻기지 않았다<br><br>그리고 그 다음 날 네가 우리를 데려간 그 드넓은 초원에서 드디어 나는 보았다<br><br>내 가장 사랑했던 그러나 지금은 잃어버린 옛 사진 한장을, 풍경 속에 아련히 서 있던 네 모습을<br><br>珍南, 조선족과 중국인과 내몽골 자치구 인민을 넘어가면 그곳에 네가 있다<br><br>내 청춘의 사막과 시퍼런 연민을 넘어가면 그곳에 네가 있다<br><br>네 눈동자 속에 펼쳐진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스물두 살의 내가 있다<br><br><br><strong>7 등려군</strong><br><br>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나무 아래 누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br><br>나는 지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무슨 시를 쓰지, 잠시 고민하다 등려군이라는 제목을 써보았을 뿐이다<br><br>깊은 밤에, 뜻도 알 수 없는 중국 음악이 흐른다, 나 지금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뿐이다<br><br>모니엔 모 위에 디 모 이티엔<br>지우 씨앙 이 장 포쑤이 더 리엔<br>난이 카우커우 슈어 짜이 찌엔<br>지우 랑 이치에 저우 위엔<br>쩌 부스 찌엔 롱이 디 쓰<br>워먼 취에 떠우 메이여우 쿠치<br>랑타 딴딴 디 라이<br>랑타 하오하오 더 취 따오 루찐<br>니엔 푸 이 니엔<br>워 부 넝 팅즈 화이니엔<br>화이니엔 니<br>화이니엔 총 치엔 딴 위엔 나<br>하이펑 짜이 치 즈웨이 나 랑화 디 셔우<br>치아 쓰 니 디 원러우<br><br>그렇다면 지금 그대들이 읽고 있는 이것은 노래인가 시인가, 등려군이 부르는 노래인가 내가 쓰는 등려군에 관한 시인가<br><br>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려군의 노래나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깊은 밤에, 시란 그런 것이다<br><br><br><br>*칭따오 삐주: 청도 맥주, '청도 비주'의 중국식 발음, 원래 발음은 '칭따오 피지우'에 가까움.<br>**珍南: 朴珍南, 몽골 여행에서 우리를 안내해 준 현지 여성 안내원.<br><br><br><br>			 ]]> 
		</description>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8611#comments</comments>
		<pubDate>Wed, 18 Nov 2009 16:38:57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혼종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8589</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8589</guid>
		<description>
			<![CDATA[ 
  <br>오늘 학교의 시계들이 다 죽었다.<br><br>학생들의 시계들보다 다 늦었다.<br><br>&lt;추위 환한 저녁 하늘&gt;<br><br>누이가 말했다 이봐 식탐군 자네는 한계가 없어서 마음에 든다 이게 아니라 얼어 죽을 때까지 혼자 좋은 것 다 할거야.<br><br>야 표시를 해야지<br><br>&lt;어린 신이 찾아왔어. 등에 신비한 과일 문신을 하고. 이봐, 식탐군, 자네는 한계가 없어서 마음에 든다. 이렇게 말했었지.&gt;<br><br>			 ]]> 
		</description>
		<category>잎</category>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8589#comments</comments>
		<pubDate>Wed, 18 Nov 2009 16:13:42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버틀러 <젠더 트러블 > 부분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8383</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8383</guid>
		<description>
			<![CDATA[ 
  <p><br>&nbsp;페미니즘의 오랜 난점은 여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여성'을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어떻게 파악하든지 간에 여성을 억압 상황과 관련지어 파악함을 의미한다. '여성'을 논해야 한다는 것은 여성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의미를 텅 빈 상태로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내용을 기술하려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동시에 여성은 그렇게 기술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여성이 이타적이라면, 여성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육아를 전담하게 된다. 이러한 난점은 페미니즘 내부에서 '평등-차이 논쟁'으로 불리는 문제와 같은 맥락에 있다.<br><br>&nbsp;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의 1장 &lt;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gt;에서 이 문제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을 '정치성'과 '재현'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한다. 앞선 딜레마 상황에서 여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정치성과 연결된다. 여성을 논하는 것은 재현과 연결된다. 재현이라는 개념은 '논의'나 '기술'이 전제하는 객관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정치성과 재현이라는 "논쟁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페미니즘은 '재현 정치학'의 문제를 공유한다. 여기에서 푸코가 인용된다. "푸코는 권력의 사법체계가 주체를 생산해내며, 그 주체들은 그 결과로 사법체계가 재현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재현하려는 페미니즘은 배제를 거쳐 여성 범주를 만들고 여성을 생산한다.<br><br>&nbsp;물론 모든 것이 의도된 것은 아니다. 여성 범주의 정치성에 도움을 구하는 '전략적' 주장이 페미니즘 운동의 '전선'에서 주장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재현 정치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 내부에 포함한다. 다시 말해 여성 범주의 정치성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여성을 결집하여 단일한 목적인 '여성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 요청되는 기존의 정치성이 있다. 그리고 배제와 생산을 통해 여성 범주를 구성하는 재현의 정치성이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후자 때문이다. 더 이상 페미니즘의 목표는 논의의 출발이 되는 불변의 여성을 설정하는 것일 수 없다. <br><br>&nbsp;버틀러의 주장은 페미니즘이 재현 정치학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의 재현 주장이 갖는 구성의 힘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 내부에 있다. '여성'과 관련하여 파악해야 할 억압 상황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적하듯이, 권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언어와 정치의 구조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언어와 정치의 구조 바깥에는 "어떤 입장도 없으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실행에 비판적인 계보학만이 있을 뿐"("There is no position outside this field, but only a critical genealogy of its own legitimating practices.")이다. 여기에서 '페미니즘 계보학'의 필요성이 뚜렷해진다. 페미니즘 계보학의 과제는 이미 언급되었던 것처럼 재현적 페미니즘의 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br><br>&nbsp;한편 여성의 내용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 '연합의 정치학'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있다. 이른바 실천의 영역에 보다 가까운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도 버틀러는 비판적이다. 연합의 정치학이 제안하는 '대화적 만남'에서는 대화의 규범을 제정하는 권위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버틀러를 냉소주의자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버틀러의 비판은 일관되게 근본주의를 향한다. 이는 비판에 쉽게 지치는 허무가 아니라 보편성에 대한 신중한 지향이다.<br><br></p>			 ]]> 
		</description>
		<category>글</category>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8383#comments</comments>
		<pubDate>Wed, 18 Nov 2009 10:24:10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락 음악의 가치 평가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8019</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8019</guid>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br><embed src="http://www.youtube.com/v/eB3VTX0pxoE&amp;hl=ko_KR&amp;fs=1&amp;"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embed><br><br><br></div>스크러튼이 &lt;음악 문화의 쇠퇴&gt;에서 음악 문화 속에서 할 수 있는&nbsp;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하모니를 들고, 하모니를 결여한 락 음악의 대표적인 예로 이 노래를 들어서 글을 읽다가 들어봤었다.&nbsp;들어보고 과연 단조롭군 했었는데 어쩌다 계속 듣다가 요즘은 참 좋다.&nbsp;다른 노래들도&nbsp;좋다. 어제 술집에서 씨디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주인 아저씨가 라디오헤드에 관심있냐고 했다. 관심있고 좋아하지만 그 옆의 알이엠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오 알이엠을 보고 있었어요 했더니 아저씨가&nbsp;알이에프를 본다고?? 그래서 아니오 알이엠을 봤다니까요&nbsp;ㅋㅋㅋ 했더니 아저씨가 알이에프라고 하는 줄 알았다고 놀랐다고 ㅋㅋㅋ 이러다 에세이는 또 내일 점심시간에 쫓겨 쓰겠지. 아무튼 스크러튼 글은 꼰대같은 면이 있어도 중요한 문제를 던지고 있고 재미있었다. 자꾸 이런 면만 인용하지만 'The <em>anomie</em> of Nirvana and REM is the <em>anomie</em> of its listeners'라는 구절도 있다. <br><br><br>			 ]]> 
		</description>
		<category>쪼가리</category>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8019#comments</comments>
		<pubDate>Tue, 17 Nov 2009 16:55:45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카디건스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7942</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7942</guid>
		<description>
			<![CDATA[ 
  <br><div style="TEXT-ALIGN: center"><embed src="http://www.youtube.com/v/97zQ9yQP8N4&amp;hl=ko_KR&amp;fs=1&amp;"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div></embed><br><br>원곡은 블랙 사바스. 덧글을 보면 격분하는 블랙 사바스 팬들이 있고 원곡을 들어보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나는 이 노래가 너무...좋다.....<br><br><br>			 ]]> 
		</description>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7942#comments</comments>
		<pubDate>Tue, 17 Nov 2009 14:44:05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부정적인 것을 향유하기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7046</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7046</guid>
		<description>
			<![CDATA[ 
  <p><br>우리는 비극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비극은 슬픔을 일으키며 슬픔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위의 반응에서는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인 즐거움이 양립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감정 반응은 역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설명이 필요한 문제로 제기했던 흄 이래로 학자들은 ‘비극의 역설’이라는 논의를 전개해왔다. 비극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서술될 수 있다. “관객들이 훌륭한 비극을 보며 그 자체로는 불쾌하고 감내하기 어려운 감정들인 슬픔과 공포, 불안 등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1)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br><br>&nbsp;비극의 역설은 다른 역설과 마찬가지로 각각은 참이지만 양립할 수 없는 명제들로 구성된다. 보통 비극의 역설에 대한 논의는 역설을 구성하는 명제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질문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경험적으로 참인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관객들은 비극으로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2) 관객들은 비극으로부터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최도빈의 지적대로, 역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참인 명제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명제가 필요하다.2) 예를 들어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은 양립할 수 없다’는 세 번째 명제를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번째 명제를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 비극의 역설을 규명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와 관련하여 비극 작품에 초점을 맞추거나 비극이 초래하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역설을 풀려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br><br>&nbsp;비극의 역설에 대한 논의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비극과 그에 대한 인간의 감정 반응의 탐구에 관해 많은 성과를 거두어왔다. 그러나 역설이 본질적으로는 사변으로 구성될 때, 명백히 존재하는 현실을 역설로 분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비극 작품이나 인간 감정을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논의들은 비극의 향유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을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비극의 역설을 풀지 않고도 비극의 향유를 분석하는 방식을 모색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비극의 역설이 없다고 주장하는 가우트의 논의를 살펴보자.<br><br><br><br>&nbsp;가우트는 &lt;호러의 역설&gt;에서 역시 흄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글의 제목에서 보듯이 가우트는 비극의 역설이 아니라 호러의 역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가 호러의 역설을 “부정적인 감정의 향유enjoyment에 대한 역설”3)로 정의할 때, 비극의 역설과 호러의 역설은 같은 문제의 다른 판본이 된다. 비극과 슬픔의 쌍이 호러와 공포의 쌍으로 대체된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관심은 개별 장르의 구조와 역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향유하는 기제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특정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슬픔, 공포, 불안, 두려움, 역겨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허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 전반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즉, 비극적이거나 공포스러운 소설, 연극, 영화 등이 모두 탐구 대상이 된다.<br><br>&nbsp;가우트는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즐긴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본다. 이는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의 관계를 규정하는 ‘세 번째 명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참인 또 하나의 명제다. 우리는 겁먹는 것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호러물에 흥미를 느낀다.4) 가우트는 호러의 역설은 없다는 판단 하에 ‘향유 이론the enjoyment theory’에 초점을 맞춘다. 향유 이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가?<br><br>&nbsp;가우트가 호러의 역설은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향유 이론에 속하는 월튼과 네일의 논의다.5) 월튼과 네일은 감정 자체와 감정의 대상을 분리하며 가치론evaluative theory을 도입한다. 가우트는 가치론의 토대 위에서 월튼과 네일의 허점을 지적하며 가치론적 설명을 보완한다. 월튼과 네일의 논의와 그에 대한 가우트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향유 이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다시 정리하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현대 감정 이론과 윤리학적 배경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br><br>&nbsp;슬픔이나 공포는 일반적으로 불쾌하다고unpleasant 여겨진다. 그런데 슬픔이나 공포를 유쾌하게pleasant 느끼는 상황이 있다. 바로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즐기는enjoy 상황으로, 향유 이론은 이 상황을 해명해야 한다. 모든 엄밀한 논의의 출발이 그렇듯이 여기에서도 ‘감정’이나 ‘부정적인’ 등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흄에게 감정은 “현상적으로 특징지어진 느낌”인 반면 현대의 유력한 감정 이론은 감정을 “인지적인, 특히 가치 평가를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6) 예를 들어 슬픔은 눈물의 분비 여부가 아니라 슬픔을 초래한 상황에 대한 인식과 평가와 관련하여 특징지어진다. 화를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심박 수가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등의 상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인 것이다. <br><br>&nbsp;평가는 도덕 판단의 영역과 관련된다. 도덕 판단은 선을 기준으로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의 기준인 ‘선’에 관하여 여러 논의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윤리학에서 도덕 판단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월튼과 네일이 감정의 대상과 감정 자체를 구분하여 감정의 대상만이 가치 판단의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부정적인 감정’이란 그러한 감정을 초래한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낳은 것이다. 감정 자체는 쾌 또는 불쾌와 우연적인contingent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가우트가 지적하듯이 쾌락주의hedonism에 반대하는 것이다. 쾌락주의는 쾌를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파악한다.7) 쾌의 감정을 좋음the good과 연결시키는 것은 도덕 판단에서 대상이 일으키는 감정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br><br>&nbsp;‘부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가치가 매겨진 감정의 대상과 그 대상이 일으키는 감정 자체를 통틀어 일컫는 표현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대상, 감정, 쾌 사이의 관계다. 월튼과 네일은 그들이 부정적인 감정과 불쾌 사이의 개념적 연관과 대상이 부정적이라는 판단에 포함된 부정적 감정의 경향성dispositionality을 간과한다는 반론을 맞닥뜨리게 된다. 가우트의 주장은, 사람들은 감정의 대상을 불쾌하게unpleasant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의 대상을 바람직하지 않게undesirable 여기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월튼과 네일의 주장과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가우트는 위의 반론을 참고하여 그들과 반대의 방식으로 주장을 논증한다. 요약하면 가치 판단과 욕구, 쾌 사이에는 ‘전형적으로typically' 개념적 연관이 있는데, 비전형적인 경우에 사람들은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쾌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br><br>&nbsp;가우트의 &lt;호러의 역설&gt;은 가치론을 도입하여 호러의 역설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하지만 너무 일반적인 수준에 머무른다는 문제가 있다. 그는 가치론을 다루기 시작하고부터, 예술의 한 갈래로서의 비극 또는 호러의 향유라는 미학적 논의와 인간 행위 일반에 대한 평가라는 윤리학적 논의 사이의 접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우트의 논증에서 사람들의 전형성 또는 비전형성의 구분은 자의적으로 측정된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 가치 판단·욕구·쾌 사이의 연관에 필연성 대신 전형성을 부여함으로써 개념적 연관과 비전형적인 경우가 양립할 여지가 생겼지만, 정작 비전형적 경우가 왜 비전형적인지에 관한 설명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앞선 논의의 바탕에서 반론을 참고하며 논증을 구성하는 가우트의 전략을 써서 이 글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다른 설명을 시도할 때다.<br><br><br><br>&nbsp;인간은 슬픔, 공포, 화, 두려움, 불안 등을 일으키는 허구적 이야기를 오랫동안 향유해왔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비극을 즐겼고, 오늘날 사람들은 공포 영화를 즐긴다. 현실에서는 보통 꺼려지는 감정들을 겪는 일에 자원하고 심지어는 쾌를 얻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어떻게 가능하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br><br>&nbsp;논의의 틀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떤 학생이 주말에 영화관에 갔다. 이 학생은 상영작 중에서 형부와 처제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는 &lt;파주&gt;를 보기로 한다. 이 학생은 &lt;파주&gt;는 꾸며낸 이야기에 기초한다는 것과, 자신이 영화관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을 위협하는 깡패들 때문에 불안을 느끼거나, 주인공의 언니가 죽을 때 슬픔을 느끼거나, 주인공을 비롯한 파주 사람들이 철거를 반대하며 용역 깡패들과 대치할 때 공포를 느낀다. 그런데 영화에 몰입하면서 전반적으로 하는 생각은 영화가 재미있다는 것이다. <br><br>&nbsp;이 상황에서 감정 반응이 평가와 관련된다는 설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lt;파주&gt;에서 주인공 언니의 죽음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등장인물의 의사에 반하여 일어난다. 이러한 정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슬픔이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에서 이 학생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화를 볼 때, 스크린에 살아나는 것은 허구이고 이 학생은 살고 있는 곳은 현실이다. 그리고 감정의 대상은 영화 속의 상황과 영화 그 자체로 나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학생은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감상자로서 영화 속의 상황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더라도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쾌를 느낄 수 있다.<br><br>&nbsp;허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숱한 이론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허구적 이야기와 현실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관계라는 설명이면 족하다. 서사 구조를 갖춘 작품은 만듦새가 뛰어날수록 감상자는 몰입하게 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감상자가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공포 영화를 보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등장하면 무서워서 눈을 가리는 사람은 있어도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봐 극장을 뛰쳐나가는 사람은 대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상자는 작품에 집중할수록 허구와 현실을 활발하게 오가게 된다. 이는 감상자가 완전히 허구에 빠진다거나 언제나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설명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감상자가 집중하는 지점이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계속해서 변한다는 것으로 벤야민의 ‘산만한 시험관’과 유사하다.8) 벤야민에 따르면 영화를 보는 관중의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으로서의 위치가 비평적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진술에 이르기 위해 우리의 논의는 감정의 대상 문제를 다시 짚어보아야 한다.<br><br>&nbsp;감상자에게 감정의 대상은 이미 언급한대로 작품 속의 상황과 작품 자체로 이원화된다. 감정의 대상에 대한 판단이라는 월튼과 네일의 도식은 이 중에서 작품 속의 상황에 적용된다. 등장인물의 행위나 인물이 처한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감정 반응을 설명하는 것이 월튼과 네일, 가우트가 했던 일반적인 분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된 바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작품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작품 자체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다. 그리고 두 가지 감정의 대상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감상자의 위치에서 비롯된다.<br><br>&nbsp;호러 소설 &lt;샤이닝&gt;의 예를 들어보자. 스티븐 킹의 &lt;샤이닝&gt;은 산 속의 오버룩 호텔에 취직한 잭 토런스와 그의 가족이 눈 속에 고립되었을 때, 잭이 미쳐서 로크 방망이를 들고 아내와 아들을 죽이러 다니게 된다는 얘기다. 아버지가 다섯 살짜리 아들을 죽이려든다는 상황은 불안, 공포,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내가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느꼈던 것은 즐거움이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즐겁게 여기는 경우는 논외로 할 때, 내가 느꼈던 즐거움은 소설을 잭이 처한 상황과 전후 미국의 절묘한 대응으로 읽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소설을 읽는 나는 소설의 허구적 이야기와 내가 겪었거나 알고 있는 현실 사이를 산만하게 오가며 때론 공포를 때론 즐거움을 느낀다. 그중 소설 속의 부정적인 상황과 관련된 즐거움은 &lt;샤이닝&gt;이라는 작품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다. 잭의 가족 내의 갈등을 가장과 주부, 자녀로 구성된 원형적 가부장제 가족 내의 갈등과 비교하고, 잭을 광기로 몰아가는 오버룩 호텔을 20세기 중반 미국의 얼룩진 역사와 견주어볼 때 재미와 쾌를 느꼈던 것이다.<br><br>&nbsp;따라서, 허구와 현실을 오가는 감상자는 허구적 이야기를 구성하는 개별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으나 허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비극 또는 호러와 관련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향유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몇 가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서사 구조를 갖춘 예술 일반을 다루며 소설, 영화, 연극 등의 특성을 서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가? 이 글에서는 개별 장르의 형식을 탐구할 여유가 없기도 하였지만, 서사에 집중하는 것이 형식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용과 밀접하게 조응하는 형식은 감상자가 작품에 몰입하여 풍부한 감상을 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부정적인 감정을 향유하는 것이 반드시 작품에 대한 좋은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이는 매우 유효한 반론일 수 있다. 이 반론을 검토하며 글은 최종적인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br><br>&nbsp;평가는 언제나 가치 기준을 함축한다. 예술 작품의 평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논의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일으키는 즐거움은 작품 자체의 평가와 연관된다. 즐거움이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쾌락주의와 유사하다. 쾌가 곧 좋은 것이라는 쾌락주의의 등식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쾌가 좋음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일 수 없다고 본다. 같은 입장을 예술 작품의 평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작품을 단지 즐거움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작품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은 결국 즐거움이 아닌 다른 가치에 근거한 평가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미학과 윤리학의 관계가 드러나며 벤야민이 말하는 ‘비평적 태도’란 바로 이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다. 나의 논의 내에서 가능한 답변은 즐거움을 좋음과 등치시키지 않으면서도 즐거움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것을 향유하는 문제에서 이미 즐거움은 허구와 현실을 넘나들며 구성된 능동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논의의 출발점이었던 인간의 비극의 향유를 더 좋은 삶을 바라는 인간 행위로 파악하는 것이다.<br><br><br><br>*주<br>1) David Hume, 'Of Tragedy', in his Essays Moral, Political and Literary; ed. Eugene F. Miller,&nbsp; Indianapolis Liberty Classics, 1987, 216. 최도빈, &lt;'비극의 역설'에 대한 고찰: 흄에서 현대까지의 논의들&gt;, 《미학》 제59집, 2009, 135에서 재인용.<br>2) 최도빈, &lt;'비극의 역설'에 대한 고찰: 흄에서 현대까지의 논의들&gt;, 《미학》 제59집, 2009, 138.<br>3) Berys Gaut, 'The Paradox of Horror', in Arguing about Art; ed. Alex Neill and Aaron Ridley, Routledge, 2008, 317.<br>4) 위의 글, 320.<br>5) 위의 글, 322-324.<br>6) 위의 글, 324.<br>7) John Hospers, Human Conduct, Harcourt Brace Jovanovich, 1982, 38.<br>8) 발터 벤야민, 반성완 역, &lt;技術複製時代의 예술작품&gt;,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226-229.<br><br><br><br></p>			 ]]> 
		</description>
		<category>글</category>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7046#comments</comments>
		<pubDate>Mon, 16 Nov 2009 05:16:25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겨울 곡 ]]> </title>
		<link>http://saebing.egloos.com/2476443</link>
		<guid>http://saebing.egloos.com/2476443</guid>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br><embed src="http://www.youtube.com/v/kobjnkTCIIY&amp;hl=ko_KR&amp;fs=1&amp;"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embed><br><br><br></div>날씨에 따라 음악 듣기가 달라진다. 한동안 안 듣던 엘리엇 스미스, 피아노 소곡들을 듣게 된다.&nbsp;오늘 피아노를 칠 때는 피아노가 차고 손이 마르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치면서 듣는 것은 특별하다. 몇 년을 두고 치는 곡들을 치더라도&nbsp;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nbsp;이번 방학에는 어릴 때 피아노 강습을 받던 때처럼 한 곡을 연습하고 외워서 어디서나 칠 수 있게 해야겠다고&nbsp;생각했는데 잘 할지 모르겠다.&nbsp;겨울에 피어나는 많은 곡 중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lt;BTTB&gt; 앨범이 있다. 정한 피아노 음색을 들으면 '높고 무섭고 쓸쓸하고 슬픈 겨울'이 떠오른다. 백석은 겨울에 관해 멧새를 잘 떠올렸던 것 같다.&nbsp;<br><br><br><br>백석 &lt;멧새 소리&gt;<br><br><br>처마끝에 明太를 말린다<br>明太는 꽁꽁 얼었다<br>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br>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br>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br>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明太다<br>門턱에 꽁꽁 얼어서<br>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nbsp;<br><br><br><br>			 ]]> 
		</description>
		<category>쪼가리</category>

		<comments>http://saebing.egloos.com/2476443#comments</comments>
		<pubDate>Sun, 15 Nov 2009 06:03:26 GMT</pubDate>
		<dc:creator>새벽</dc:creator>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