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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r-search engine II</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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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나 자신에 관해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것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Fri, 20 Nov 2009 13:45:5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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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나 자신에 관해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것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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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다산 단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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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다산의 대표저작이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이서일표이겠지만, 요즘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저술은 내가 읽지 않을 책들인 『대학공의』와 『논어집주』이다. 그의 「일본론」과 아들들에게 썼던 서간들을 살펴보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br />
<br />
일본론에서 그는 일본에 대해 '과거로 관료를 뽑는 폐단이 없어 조선의 학문을 추월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언급한 학자들은 뜻밖에도 주자학자들이 아닌 고학파인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였다. 둘은 모두 젊은 시절 주자학에 열중했었던 사람들이며, 상품 경제가 날로 성장해가는 당대 일본과 주자학의 관념론이 엮는 모순을 발견하고, 결국 주자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다.<br />
<br />
다산이 남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주자학계보다도 이 둘을 언급한 것은 더욱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그는 청의 고증학파와도 교류를 나누었으며,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왕양명을 언급할 때 별다르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명 본토에서도 왜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을 하냐며 논쟁을 벌이던 것이 조선의 선비들이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br />
<br />
그 역시 당대의 성리학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고, 그의 날선 비판을 접할 때마다 조선 후기의 주자학 근본주의 풍토에 대한 비판이 결코 현대인의 오만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 기분이 들어서 반갑기만 하다. 에도 일본에서 주자학 이전의 유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듯이, 다산 역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리라.<br />
<br />
<br />
당시 서학교도로 몰려 유배 중이었던 그의 처지와 불과 100년 전에 벌어졌던 사문난적 사건들을 생각하면,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와 불굴의 용기에 대해서 경건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br />
			 ]]> 
		</description>
		<category>앤틱남자되기!</category>

		<comments>http://routis.egloos.com/4280296#comments</comments>
		<pubDate>Fri, 20 Nov 2009 13:41:39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난 된장녀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ㅋㅋ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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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녀동생에게 들은 모 녀대 이야기.<br />
<br />
미팅자리에서 만난지 10분만에 연봉이 얼마인지를 묻고, 얼만지 듣고는 30분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남자측은 나름 서울대 경영대 나오고 또래 중에는 잘 나간다고 자부심이 대단했을 터인데 ㅋㅋ), 대체 저 정도 연봉이 마음에 안 들면 어떤 남자를 만나나 봤더니 펌의 파트너급인 30대 중후반의 남자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는 그런 녀자들!!...<br />
<br />
<br />
왜 내 주변에는 저런 여자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싶은데!! 저런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지 너무 궁금한데, 나랑은 놀아줄 리가 없으니 어서 성공해서 만나 봐야겠따.<br />
			 ]]> 
		</description>
		<category>오늘 내 머릿속</category>

		<comments>http://routis.egloos.com/4274231#comments</comments>
		<pubDate>Wed, 11 Nov 2009 15:39:35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헌창 교수의 "제3의 시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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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a href="http://docs.google.com/gview?a=v&amp;q=cache:wJl2VabRfugJ:www.hanguksa.org/pds_board/announceBBS/download.asp%3Ffile%3D%25C1%25B6%25BC%25B1%25BD%25C3%25B4%25EB3%25BD%25C3%25B0%25A2.pdf%26tab%3Dannounce_pds_bbs%26tb_idx%3D50+%EC%9D%B4%ED%97%8C%EC%B0%BD+%EC%A0%9C3%EC%9D%98%EC%8B%9C%EA%B0%81&amp;hl=ko&amp;gl=kr&amp;pid=bl&amp;srcid=ADGEESgY07NS65Lclz2dKd_LyMg1NWDDKWpilIM07yGmt75J30doVTAknsR4maAbi2WcwTyIcecPCy3P-0nIKEYF0nO1z41Ifp6rzOJRXSUePumNpD7rKhUBp44or43KkDJywfxoxkrw&amp;sig=AFQjCNFlP3Ub1QRW8ME_L34J9f0RhtlN_w"><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헌창 교수의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제3의 시각" 보러가기</span></a><br />
<br />
a4용지 24페이지의 글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내재적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변증법적 지양 시도라고 할 수 있다.<br />
<br />
<br />
전근대시대에 대해 거칠게 요약하자면, 내재적발전론에서 이어지는 수탈론과 정체론에서 이어지는 식민지근대론이 대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전근데 조선에 대한 평가에 있어 이헌창 교수는 독특한 스탠스에 서 있다. 조선이 정체상태였음을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정체론을 거부한다면, 자력으로 근대화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발전론 역시 거부한다.<br />
<br />
60년대 이후 내재적발전론에 의해 제기된 많은 연구 성과에 의해서, 정체론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내재적발전론 역시 문제점을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이헌창 교수의 평가는 다음의 문장에 잘 드러난다.<br />
<br />
<blockquote>"내재적발전론은 해방후에 식민주의사관인 조선사회정체론을 비판하고 민족적 자기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요청된 사론으로서, 그러한역사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 사명을 다하였다고 생각된다. 해방후 한국의 경제,사회,정치의발전은 현대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되돌아볼 때 조선사회정체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br />
</blockquote><br />
내재적발전론에 대해서 이헌창교수가 제기하는 문제점 중에 특히 곱씹어볼만한 것은 '대외적 충격이 문명사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은가?'이다.<br />
<br />
그는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즐겨 인용하는데, 서유럽의 프랑스, 스페인에서조차 자본주의가 발생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심지어 영국조차 중상주의 유럽이라는 환경과&nbsp; 대항해시대 없이 산업화를 발생시킬 수 있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즉, 산업화라는 것은 우리보다 상공업이 훨씬 발전했으며 세계지도를 아메리카와 아시아까지 확장했던 서유럽에서조차 영국이라는 한 곳에서 발생하여 (어쩌면 네덜란드까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것이다.<br />
<br />
이런 관점에서 이들과 비교하여 극단적으로 고립되었던 조선의 근대화 자생 가능성을 묻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조선이 스스로 근대를 피워낼 수 없었던 것은, 프랑스 북부 이탈리같은 지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3국 중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물론 열강화에 성공했던 일본에서도 할 수 없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br />
<br />
<br />
반면 '얼마나 근대 이행에 적합하였는가?'는 질문은 이보다 유효할 수 있다. 서구와의 만남이라는 외부충격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근대로 이행하기 쉬운 상태였나를 묻는 것은 훨씬 나은 질문이 될 수 있다. 짧은 식견으로 감히 말한다면, 이것이 '제3의 시각'이다.<br />
<br />
이 관점에서 그가 내린 조선시대에 대한 평가는, 내재적발전론자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정도의 점수일 것이다. 그는 소농사회론을 지지하며, 송상 등의 활약을 인정한다고 해도 북부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이전에 이룬 상업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경제적으로 '근대화'라는 곳에 도달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거리가 남아 있었다.<br />
<br />
반대로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에 있어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보기에는 일제의 영향력을 악영향 위주로 평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일단은 지금 내가 다루려는 부분이 아니므로 여기서 패to the 스 ㅋㅋㅋ<br />
			 ]]> 
		</description>
		<category>심심풀이</category>

		<comments>http://routis.egloos.com/4274174#comments</comments>
		<pubDate>Wed, 11 Nov 2009 14:46:56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안정적인 사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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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a href="http://oldaga.egloos.com/2473410" title="">TV와 아줌마들이 한국 젊은 처자들을 다 망친다.</a><br />
<br />
<br />
<br />
결국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은 자식이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의 좁은 문을 향해서 꾸역꾸역 몰려간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이 낮은 실업률과 더불어 낮은 구직률, 그리고 산더미같은 고시생일 것이다.<br />
<br />
그보다도 더 찬연히 빛나는 결정체가 소위 말하는 '취집'일 것이다. 맨주먹으로 둘이서 어떻게든 차근차근 모아볼 생각일랑 하지를 말고, 조건 갖춘 남자 만나라는. 우리 부모 세대는 이렇게 우리에게 모험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br />
<br />
<br />
그런데 이건 정말 전형적인 greedy algorithm의 실패사례로, 혼자서 저러면 똑똑한 일이겠으나 전원이 저렇게 행동할 때 사회전체로 보면 비효율의 극치다. 각 개인이 저렇게 행동할 때, 우리 사회 전체로 봐서는 과연 얼마나 안정적이 되었을까?;;;<br />
<br />
<br />
<br />
<br />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ㅋㅋㅋ<br />
			 ]]> 
		</description>
		<category>오늘 내 머릿속</category>

		<comments>http://routis.egloos.com/4273501#comments</comments>
		<pubDate>Tue, 10 Nov 2009 16:27:17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한국경제통사 근세 정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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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책 자체는 개항기 이후 근대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는 하지만, 근세에 대한 부분을 요약정리해보려는 의도로.<br />
<br />
top-down 방식으로 근세 조선의 경제를 묘사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호혜/(정부의) 재분배/시장이 차지한 비중을 살펴보는 것이 될 듯하다. 이헌창 교수도 이 부분을 3장 商品市場과 商人資本의 成長 파트에서 서두에 두고 있다. 경제학 원론 첫 시간쯤에 '시장이 촹임'하는 결론으로 끝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 파트가, 경제사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br />
<br />
경제라는 것을<br />
<br />
<ul><li>무엇을 / 어떻게 생산해서,</li></ul><ul><li>누구에게 분배하고</li></ul><ul><li>누가 어떤 절차에 의해서 이런 결정들을 내리는가?</li></ul><br />
라고 할 때, (스티글리츠 경제학 1장) 이것을 어떤 기구에 위탁할 것이냐는 문제에 있어서 시장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한반도에서 생각보다 늦었던 것으로 생각된다.<br />
<br />
<br />
장보고가 서해상의 해상 무역에서 활약한 9세기 이후 한반도의 해외무역에 대한 자세는 점차 소극적이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국가 기관에 의한 재분배는 점차 강조되어 갔으며, 군단(群團)사회로부터의 전통에서 이어진 호혜 역시 여전히 중요한 자원 교환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호혜와 재분배의 압박 속에 시장은 위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상업의 필요성은 인정되었고 배제되지는 않았으나, 상업을 말업末業으로 여겨 천시하는 분위기는 고려조 초기 이미 자리잡았다. 여말 선초에 사전私田을 금지하고 과전법을 실시한 일과 명의 사무역 금지책, 해금海禁 등은 이런 풍조를 더욱 부추겼다.<br />
<br />
그리하여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1567년에서 1576년 사이 한 달 평균 42.4회 물건을 호혜관계로서 주고 받는 동안 1.35회 물건을 거래하였다. 다시 말해서 16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물건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주고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자본 원격지 유통은 있었고, 소규모이나마 장시는 널리 퍼져 있어서 지방에서도 시장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br />
<br />
아담 스미스는 "거지를 제외한 그 누구도 타인의 선의에 주로 기대 살지 않는다." 고 말했다. (Nobody but a beggar chooses to depend chiefly upon the benevolence of his fellow-citizens.) 그런데 그거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br />
<br />
한편 1592~1601년간 오희문 집안의 기록인 쇄미록에 의하면, 월간 상거래는 평균 1.7회, 선물 교환은 20회였다. 오희문 집안은 유희춘 집안보다 상거래 비중이 컸을 뿐더러, 영리목적의 시장 교환이 두드러진다. 1596년 5월 미역 25동을 구입한후, 20동을 보리와 바꾸어 시세차익을 실현하려 하였다. 1599년 4월에는 "영동의 어물과 미역은 매우 비싸 말을 세내어 사오면 반드시 잉여가 없고 도리어 손실을 볼 것"이라고 적고 있다.<br />
<br />
오희문 집안은 유희춘집안보다 신분이 낮아 선물을 적게 받았고, 임진란이라는 상황이 호혜를 나눌 여유를 앗아갔을 수도 있다. 이것들을 감안했을 때 30년 시차를 둔 이 두 기록 사이의 차이는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br />
<br />
<br />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장시는 현저하게 성장하였고, 18세기의 "승총명록", "이재난고" 등의 일기에는 시장교환이 선물교환을 압도하게 된다. 예천 박씨가의 기록을 보면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5일에 한 번 꼴로 장시를 이용하게 되었고 선물은 재화 구매액의 15%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br />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10/49/b0045749_4af83509a2804.png" width="500" height="505.63380281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10/49/b0045749_4af83509a2804.png');" /></div><br />
<br />
물론 이 도시화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선물을 받을 기회는 사족, 그 중에도 유력가문에게 많을 것이며 일반 농민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내가 참고로 한 책만을 가지고 보면 거래와 선물 교환의 횟수만이 언급되었을 뿐 그 가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지막으로 시장/호혜/재분배 간의 비율만큼 중요한 문제는, 저러한 자원배분 내의 비율 뿐만 아니라 자급자족과 재배분 되는 비율이라는 중요한 축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br />
<br />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 극적인 변화는 유의미할 것이다. 이 글은 <a target="_blank" href="http://dylanzhai.egloos.com/2740914">서포트ㅎㅎ</a>를 목적 중 하나로 하고 있으며, 붉게 표시한 부분 중 어딘가에 17세기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있다.<br />
			 ]]> 
		</description>
		<category>심심풀이</category>

		<comments>http://routis.egloos.com/4272683#comments</comments>
		<pubDate>Mon, 09 Nov 2009 15:28:41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와쿠라 사절단과 보빙사, 일본의 운명과 조선의 운명. ]]> </title>
		<link>http://routis.egloos.com/426947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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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04/49/b0045749_4af190d8cf0f2.jpg" width="500" height="395.77259475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04/49/b0045749_4af190d8cf0f2.jpg');" /></div><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04/49/b0045749_4af190f15d2c7.jpg" width="500" height="161.8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04/49/b0045749_4af190f15d2c7.jpg');" /></div>이거슨 <span style="font-weight: bold;">1860년~1863</span>년의 이와쿠라 사절단. 특명전권<span style="font-weight: bold;">대사</span> 이와쿠라 토모미와 그 일당들!!<br />
<br />
<br />
<br />
<br />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04/49/b0045749_4af19185a5680.jpg" width="500" height="313.46153846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04/49/b0045749_4af19185a5680.jpg');" /></div>그리고 이거슨 저 위의 사진보다 20년 <span style="font-weight: bold;">후 1883년</span>, <span style="font-weight: bold;">보빙사 정사</span>(正使) 민영익과 그 일당들. 이들이 現천조국 황제 체스터 A 아서를 만나 전통 큰절을 올린 이야기는 <a href="http://query.nytimes.com/gst/abstract.html?res=9F0CEED71438E033A2575BC1A96F9C94629FD7CF&amp;scp=8&amp;sq=corea&amp;st=p">NY Times 기사</a>에도 남아 있음. (1883년의 기사가 온라인이라니;;)<br />
<br />
민영익은 이후 보스턴을 찍고 유럽 각국을 돌아, <span style="font-weight: bold;">“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 속으로 들어가 보았고 이제 다시 암흑으로 되돌아왔다.” </span>라는 말을 남기고<span style="font-weight: bold;"> </span>조선으로 돌아왔다.<span style="font-weight: bold;"><br />
<br />
</span><br />
60년대 말쑥한 양복을 갖춰 입고 프랑스 장관들을 만나 세련된 서양식 인사를 나눈 이와쿠라 사절단<br />
80년대 전통 한복을 갖춰 입고 미쿡 대통령을 만나 큰절을 올린 보빙사<br />
<br />
<br />
이후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짐작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span style="font-weight: bold;"><br />
</span>			 ]]> 
		</description>
		<category>심심풀이</category>

		<comments>http://routis.egloos.com/4269477#comments</comments>
		<pubDate>Wed, 04 Nov 2009 14:46:55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조선의 세금, 조선의 농민 ]]> </title>
		<link>http://routis.egloos.com/4268774</link>
		<guid>http://routis.egloos.com/4268774</guid>
		<description>
			<![CDATA[ 
  <a href="http://Idealist.egloos.com/5111248" title="">조선의 세금</a><br />
<br />
이 글은 다소 기묘한 글이다. 이 글이 단순히 조선의 세금을 논하기 위한 글이라면 이런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글은 결국 조선의 농민 생활을 논하고 있다. 글을 따라가면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에 비해서 그다지 높지 않은 조세부담을 지고 있는 전근대 농민을 마주칠 것이다.<br />
<br />
그런데 그 농민은 대체 어떤 농민인가? 이 글에는 그 농민이 <span style="font-weight: bold;">자작농</span>이라는 가정이 (아마도 비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다. 국정교과서를 비롯한 조선까;;;들이 민생에 대해 지적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지주전호제인 상황에서, '소작'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이 글은 조선까;;들의 지적에 대해서 얼마나 유의미한 <span style="font-weight: bold;">대답</span>일까?<br />
<br />
대답의 가치는 조선의 자작농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가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조선 농민 대다수가 자기 땅을 가지고 있었고, 소작농이라는 것이 소수의 불행에 그친다면 위의 글에서 '조선 농민'을 자작농으로 설정한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반계, 성호, 다산 등 경세치용 학파의 이름난 실학자 치고 농지개혁론을 들고나오지 않은 학자가 없는 것일까? <br />
<br />
<blockquote>부자들의 한없이 넓은 토지들이 서로 맞대어 있어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형세가 되었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게 되었다. 악랄한 모략을 품은 자들이 토지를 독차지하는 반면 양민은 가족을 이끌고 유랑하다가 끝내 머슴이 될 수밖에 없다.<br />
</blockquote><br />
위 글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나오는 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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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a href="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06520&amp;term=%C1%A4%BE%E0%BF%EB+%C8%A3%B3%B2+%BC%D2%C0%DB%B3%F3&amp;query=%C1%A4%BE%E0%BF%EB+%C8%A3%B3%B2+%BC%D2%C0%DB%B3%F3&amp;menu=cview&amp;encrt=yNv92a150wbTmADYMTA1MiZzZWNzdWJudW09NTk=#middle_tab">'호남 여러 고을에서 소작농이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을 엄히 금하기를 청함'</a>이라는 글에서 주장하기로는, 호남 농민의 70%가 소작농, 25%가 자작농, 5%가 지주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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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론을 주장하면서 묘사한 모습 역시 상당히 처참하다.<br />
<blockquote>이제 호남지방의 관습은 지주가 먼저 그 수확의 절반을 빼앗아가고 높은 베개에 누워 있는데 농민들은 이미 그 절반을 잃어버렸을뿐만 아니라 남은 절반가운데서 종자를 제하고 또한 국가조세까지 삭제 당한다. 왼편에서 뜯어내고 바른편에서 갉아내니 남는 것이얼마나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며 “국가의 조세는 맥법을 가장하고 있으나 실제내용에 있어서는 역시 5/10를 떼어가고 국가가 또한5/10를 수탈하여가니 농민들은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여기에 우리나라 농민들이 중국의 농민들보다도 훨씬 더 곤궁하게 된 원인이있다.<br />
</blockquote><br />
동학농민운동에서 마르크스가 '감자 부대'에 비유했던 농민들마저도 들고 일어나서 요구했던 사항은 농지의 균분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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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 역밸에서 가끔 마주치는 '조선 작은 정부론' 역시 작은 정부라는 말을 쓰기 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으니, 과연 '작은 정부'라는 말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북유럽, 서유럽 및 뉴딜 미국이 달성했던 중산 사회는 모두 '큰 정부'하에서 가능했다.&nbsp; 미국의 경우 작은 정부의 등장과 빈부격차의 악화는 우연이건 필연이건 같이 등장했다. 현대의 '원조' 작은 정부론은 사실 전형적인 기득권층의 논리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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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이 조선이 '큰 정부'였다면 조선 민초들의 민생이 나아졌으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예시들과 달리 조선의 정부는 '다수의 통치'를 받는 정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의 힘이 위축되었을 때 가장 큰 수혜를 받는 것은 하층민보다는 기득권층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지적일 뿐이다. 더구나 예송논쟁의 결론이 <span style="font-weight: bold;">국왕은 사대부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니며 사대부의 제1가문에 불과하다</span>는 것을 시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조선이 토지에 부과한 낮은 세금이 70%의 농민을 위한 것일지, 5%의 지주층을 위한 것일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호포법과 같이 양반을 포함하는 세금 징수의 경우 조선이 망하기 직전, 최후의 최후에가서야 실행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더욱 그렇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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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지나서 국정교과서가 어찌 생겨먹었나를 잘 기억해낼 수는 없으나, 위의 논점들은 국정교과서 내의 것들로 추려낸 것들이다.16세기 이후의 지주전호제의 확대, 대동법, 균역법의 등장에 따른 종곡이나 기타 투자 비용의 소작농에 대한 전가 등이 당장기억나는 것들인데, 요새 교과서가 얼마나 바뀌었을지, 어떤 내용이 더해지거나 빠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원글은 그냥 국정교과서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의 눈으로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이만큼이나 많을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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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대한 내 태도를 pro와 con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야만 한다면 나는 con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500년을 지속했을지언정 실패로 끝난 왕조에 대한 올바른 기본 자세는 비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00년을 지속했다는 것을 자랑하는(또는 칭찬하는) 논리는 결국 어떤 시스템의 평가항목에는 지속가능성과 자기수복능력이 포함된다고 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도 그렇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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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을 칭찬함과 동시에, 근대라는 새로운 파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을 평가 기준에 넣지 않으면 안 되며, 나는 후자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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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심심풀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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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3 Nov 2009 15:04:58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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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Auf Wiedersehen!!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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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꽤 늦었지만 아마도 너무 늦지는 않게 간신히 회복!!<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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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버릴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나중에 만나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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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routis.egloos.com/4252329#comments</comments>
		<pubDate>Sat, 10 Oct 2009 09:31:10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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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레이더스 1~5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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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09/49/b0045749_4acf415e7fc81.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09/49/b0045749_4acf415e7fc81.jpg');" /></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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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의 후원인이 되고자 나름 애쓰는 중인데, 번뜩이는 뭔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데 그걸 마무리 지어서 (polishing)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뭔가가 5%쯤 아쉬운 경우가 많아서 심히 안타깝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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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죄 열망에 대한 시각, 훌륭한 그림 등이 돋보이지만, 원래 가진 잠재력을 모두 발휘할만큼 플롯을 정돈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5권은 특히 루즈하고 이전의 참신한 부분을들 너무 많이 놓친 것 같아서 못내 아쉽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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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읽고, 듣고 보고, 생각하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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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9 Oct 2009 13:58:02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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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마초이즘에 대해 -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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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title="" href="http://unsolved.egloos.com/2544780">어느 마초가 꿈꾸는 양성평등의 길 - 1 - </a><div><br></div><div>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얼마 전에 본 나루토의 마초이즘에 대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남녀 성대결 병림픽에 몇 번 참가하다가 벌어진 어떤 사건이다. 가끔 '자연인 r군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블로그만을 가지고 나를 판단했을 때 나는 어떤 인간으로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상당한 꼴마초로 오해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건도 그 징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div><div><br></div><div><br></div><div>매듭님의 글에서 쓰고 있는 '레알마초'라는 개념에 대해서 나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마초 본연의 모습으로서의 마초라기보다는 마초의 여러 형태 중 가장 좋은 것을 취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약자 보호'라는 측면이 마초이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nbsp;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마초이즘은 해로울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마초이즘을 훨씬 느슨하게 정의하기 때문일 것이다.</div><div><br></div><div><br></div><div>내가 마초이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성을 약자라고 규정하고 자기 스스로가 남성이라는 것을 기뻐하는 어떤 생각들의 집합이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느슨한 정의이다. 따라서 이 조건을 만족하는 생각들은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div><div><br></div><div>여성을 약자로 규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결과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div><div><br></div><div>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에게 여성이 약자라는 것은 신체적, 그것도 근력에 대한 문제이고 이것은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추위에도 여성이 더 강하고 평균수명도 더 길지 않은가?&nbsp;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근력에만 머물지 않으며, 신체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여성은 약하고,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존재이고 종합적으로 볼 때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다.</div><div><br></div><div>그런데 이러한 인식에 의해서 마초들이 보이는 행태는 '여성이 약자'라는 명제의 이해와 1:1 대응되지 않는다. 약자는 보호의 대상이라고 보는 경우에는 여성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보호이다. 그러나 이 보호가 여성을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은 무언가 마초에게도 공감을 살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다른 것은 다르게'라고 하는 차등의 논리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마초 역시 충분히 차별적이며 억압적이 될 수 있다. 때로는 그 억압이 꽤 달콤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억압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div><div><br></div><div>한편 어떤 사람들에게는 약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강자가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다. 사회적진화론자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더구나 여성과 남성이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므로, 각종 진화론자들 역시 개입할 여지가 있다. (나는 진화론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div><div><br></div><div><br></div><div>그런데 마초이즘은 누가 주창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거쳐서 형성된 것이고, 어쩌면 남성이라는 동물의 자연적인 성향일 수도 있으며, 최소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nbsp;(자연적이라는 말이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nbsp;페미니즘에 대해 시몬 보부아르같은 인물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것과 달리, 마초이즘의 중요인물이라는 개념은 매우 어색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마초이즘이 완전하게 극복가능할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그보다는 마초이즘을 무해화無害化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길이라고 생각한다.</div><div><br></div><div>70년대 삘의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은 남녀간의 성차는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 학습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화성남자 금성여자'로 대변되듯이 대세는 바뀌었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은 남녀간의 성차性差를 부정하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우열로 파악하지 않는 평등이다. 남성입장에서 이것에 도달한 한 상태가 <b>해롭지 않은 마초이즘</b>일 것이다.</div><div><br></div><div><br></div><div>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여럿이 있는데, 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의견의 다양함을 생각한다.</div><div><br></div><div>'여성은 약자인가?'</div><div>'여성이 약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div><div>'여성이 동등한 <b>의무</b>와 권리의 주체인가?'</div><div>'여성이 보호의 대상이라면 그 반대급부는 무엇인가?'</div><div><br></div><div>이에 대한 대답들은 아직 남성 사이에도, 여성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바닥에 깔려있는 논리들을 헤집어 보기 전까지 그가 마초인지 페미니스트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여성이 약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전투적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여자도 군대 보내라는 꼴마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온건한 페미니스트와 온건한 마초들은 여성을 약자라고 인정할 것이다.</div><div><br></div><div>좀 더 구체적으로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고 아끼는, 내 기준에서 해롭지 않은 마초에 대해서 모든 여성이 감사와 애정을 느낄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전투적페미니스트들은 남녀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징후로 여길 것이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꼭 불행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여기는 여성도 종종 보았고 이 사람들이 어디가 떨어지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Y대를 나와서, S대 졸업후&nbsp;<a href="http://alex2836.egloos.com/1284025" target="_blank">미쿡의 지잡대</a>&nbsp;박사과정 남편과 결혼해서 유학간 고등학교 동기가 있었다. 그녀가 고1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자기 꿈이 현모양처라고 했던 순간은 내게 미묘한 강렬함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div><div><br></div><div>어쩌면 양성평등이라는 것은 대단히 인위적이고 아슬아슬한 것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흑인들이나 식민지 시민들과는 달리 남녀 사이에는 분리주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섞여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각 가정의 지붕 아래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환경에서 완력에서 열세이고 공격 성향이 적은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리고 산다는 것은 극히 아슬아슬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추구할 가치가 충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div><div><br></div><div><br></div><div>나는 양성평등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내가 양성평등을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차별이라는 게 싫은 정의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알량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이 알량한 정의감이 세상사에 커다랗고도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하므로 그것이 그다지 모멸로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도 알량한 정의감을 가지지 않은 세상이야말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세상이다.</div><div><br></div><div>이보다 더 개인적인, 어떤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할 이유는 '완전히 활짝 핀 꽃을 보는 즐거움'이다. 한 인간이 타고난 무엇인가를 발휘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재능을 가진 한 인간이 어떤 이유로 사회에게 좌절을 강요당해서 자신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아까운 낭비가 될 것이다. 주변에 자신이 정말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 '자아성취'라는 단어를 캐캐묵은 개념상의 단어가 아니라 눈앞의 실재로 보여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nbsp;그렇게 활짝 핀 여성은, 억압에 위축되고 쭈그러진 여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울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div><div><br></div><div>마찬가지로 나는 마초이즘의 또다른 측면 - 자신이 남성이라는 것을 기뻐함 - 또한 중요하게 여긴다. 남성이기 때문에 타고난 자질들을 최대한 발현시켰을 때, 나 자신부터가 굉장히 즐거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여성들도 기쁘게 할지 모른다.</div><div><br></div><div><br></div><div>나는 결국 어떤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난립해 있는 여러 입장이 비교적 압축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때까지 많은 소요와 혼란이 있겠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세금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도 여전히 마초라는 말이 쓰이고 페미니스트들이 있겠지만, 양자 모두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div><div><div><br></div></div><div>-------------------------------------------------</div><div><br></div><div>그래서 앞으로 제가 성대결 병림픽에 참가하게 되면, 제 의견에 <b>공감</b>하시는 분들은 제가 이런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공감하셨으면 합니다. 꼴마초 소리 듣는 분들은 아마 저랑 비슷한 입장은 아니실 겁니다. (반대하시는 분들은 사실 크게 신경 안 씁니다.)</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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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오늘 내 머릿속</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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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6 Oct 2009 17:08:40 GMT</pubDate>
		<dc:creator>ουτις</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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