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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redcat10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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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스치듯 살다가는 세상
선한 눈빛으로 뜨거운 몸짓으로 
그렇게 그렇게 한번 제대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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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Mar 2009 08:56:4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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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눈빛으로 뜨거운 몸짓으로 
그렇게 그렇게 한번 제대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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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사라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새(國璽)를 찾다(2009. 3. 17)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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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id="CLtag"><div id="newsCon" style="FONT-SIZE: 10.5pt"><div class="newsConImg" id="newsConImgDiv01"><br><br><img hspace="5" src="http://file2.cbs.co.kr/newsroom/image/2009/03/17134002937_60900010.jpg" vspace="5"><br></div><br><a h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094021">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원판필름의 사진과 일치</a><br><br>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大韓帝國)시기 국새가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바로 그 국새이다.<br><br>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17일 고종황제가 사용했던 국새를 공개했다. 이 국새는 문화재청이 국외반출 중요우리문화재에 대한 환수의 일환으로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해 지난해 12월 소장하게 된 것이다. <br><br>국새는 외함이 분실되고 내함만 남아있는데 전체높이 4.8cm, 무게는 794g이다. <span id="popup" onmouseover="javascript:show_clk_pop('2')" onmouseout="javascript:clear_ms_over_timer()"><a style="FONT-SIZE: 14px; CURSOR: hand; COLOR: #0000ff; TEXT-DECORATION: underline">손잡이</a></span>는 거북형이며, 비단실로 짜여진 끈이 달려있다. 정사각형의 인장면에는 “皇帝御璽”라 양각되어 있다. 내함은 황동의 재질로, 2단으로 되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도록 되어있고, 그 윗단에 국새를 넣는다. <br><br>성분분석결과, 거북형손잡이는 은과 금의 비율이 81:18이며, 몸체는 57:41의 비율로 제작되었고,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새의 글씨 중 황제의 “皇”은 “白”의 아래에 “王”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어새에서는 “自”의 아래에 “王”으로 표기되었다. <br><br><object id="id_1237263381468" codebase="http://f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version=8,0,0,0" height="345" width="400" align="middle"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param name="_cx" value="5080"><param name="_cy" value="5080"><param name="FlashVars" value=""><param name="Movie" value="http://flvr.pandora.tv/flv2pan/flvmovie.dll/userid=nocuttv&amp;url=923E123F75D7B5442A5F0034644637&amp;prgid=34644637"><param name="Src" value="http://flvr.pandora.tv/flv2pan/flvmovie.dll/userid=nocuttv&amp;url=923E123F75D7B5442A5F0034644637&amp;prgid=34644637"><param name="WMode" value="Window"><param name="Play" value="-1"><param name="Loop" value="-1"><param name="Quality" value="High"><param name="SAlign" value=""><param name="Menu" value="-1"><param name="Base" value=""><param name="AllowScriptAccess" value=""><param name="Scale" value="ShowAll"><param name="DeviceFont" value="0"><param name="EmbedMovie" value="0"><param name="BGColor" value=""><param name="SWRemote" value=""><param name="MovieData" value=""><param name="SeamlessTabbing" value="1"><param name="Profile" value="0"><param name="ProfileAddress" value=""><param name="ProfilePort" value="0"><param name="AllowNetworking" value="all"><param name="AllowFullScreen" value="false"><embed src="http://flvr.pandora.tv/flv2pan/flvmovie.dll/userid=nocuttv&url=923E123F75D7B5442A5F0034644637&prgid=34644637" width="400" height="345" name="id_1237263381468" allowfullscreen="true"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object><br><br>고종황제가 독일, <span id="popup" onmouseover="javascript:show_clk_pop('3')" onmouseout="javascript:clear_ms_over_timer()"><a style="FONT-SIZE: 14px; CURSOR: hand; COLOR: #0000ff; TEXT-DECORATION: underline">이태리</a></span>,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통의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두 종류가 확인되고 있는데, 한 종류는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span id="popup" onmouseover="javascript:show_clk_pop('1')" onmouseout="javascript:clear_ms_over_timer()"><a style="FONT-SIZE: 14px; CURSOR: hand; COLOR: #0000ff; TEXT-DECORATION: underline">글씨체</a></span>가 둥글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다른 한 종류는 1906년에 러시아황제 등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각이 지고 반듯한 분위기이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번 확인된 국새에 대한 제작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광무5년 11월 16일)으로 미루어 1901~1903년 사이에 제작되어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br><br>이 국새는 <span id="popup" onmouseover="javascript:show_clk_pop('0')" onmouseout="javascript:clear_ms_over_timer()"><a style="FONT-SIZE: 14px; CURSOR: hand; COLOR: #0000ff; TEXT-DECORATION: underline">공문서</a></span>가 아닌 친서에 주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비밀리에 제작되어 고종황제가 직접 소지하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문서에는 “대한국새” “황제지보”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원래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br><br>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어보(御寶, 의례용)와 국새(國璽, 실무용)를 비교해보면, 어보의 무게는 3.4kg으로 국새의 4배에 달하며, 크기에도 큰 차이가 있다. 주재료에 있어서 어보는 은과 구리가 주성분인 반면, 국새는 은과 금으로 제작되어 의례용과 실제 사용함에 있어서의 구별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br><br><div class="newsConImg" id="newsConImgDiv01"><img hspace="5" src="http://file2.cbs.co.kr/newsroom/image/2009/03/17135037828_60900010.jpg" vspace="5"><br></div>이번 국새 확인의 의의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유리원판사진 등으로만 전해져 오던 바로 그 실물이 확인되었다는 것과 국외반출 된 우리 중요문화재를 구입을 통해 환수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국새가 찍힌 친서의 내용 중에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제국의 황제로서 주변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어 대한제국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점이다. <br><br>국립고궁박물관은 이 국새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국보) 지정신청을 함과 동시에 적절한 시기에 일반시민들에게 특별공개 할 예정이다. 또한 덕수궁 석조전의 대한제국실이 복원되면 고종관련 자료 <span id="popup" onmouseover="javascript:show_clk_pop('4')" onmouseout="javascript:clear_ms_over_timer()"><a style="FONT-SIZE: 14px; CURSOR: hand; COLOR: #0000ff; TEXT-DECORATION: underline">전시</a></span>에 활용할 계획이다.<br></div></div><!-- 기사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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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Mar 2009 08:56:4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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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문학 산책] 500년전 세종의 국가 경영 키워드 '食民天'(한국경제, 2008. 12. 6)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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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h3 class="articleSubecjt"><span style="FONT-SIZE: 100%"><img id="mainimg0"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onerror="blankImg(this,0,0)" src="http://nimg.nate.com/orgImg/hk/2008/12/06/2008120528931_2008120543641.jpg"><br><br>세종대왕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대보라면 한글창제 하나를 들고 머뭇거린다. 조금 있다가 과학기술의 발달을 답하면 우수한 편이다. 명성에 비하면 홍보가 덜 되어 한국사 전공자로서 안타까운 책임감을 느낀다. <br><br>대왕은 1397년(태조 6)，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 해 태어났다. 아버지가 잦은 가뭄 앞에 부덕을 자책하면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 그는 23세의 청년이었다. 32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1450년에 53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치적은 수백년간 '동방의 요순'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글창제，과학기기 제작만으로는 가당치 않은 극찬이다. 무슨 일을 했던가. <br><br>세종은 즉위 다음 해 집현전(集賢殿)을 세워 유능한 신하들을 학사로 뽑아 여기서 일하게 했다. 10명에서 시작해 최대 20명까지 늘렸다. 6품 이상의 관원수로는 중앙 관서 중 최다였다. 집현전 학사는 로테이션 근무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타 관서 경력이 승진에 유리한 관례를 깨고 부제학 이하 집현전 전임관은 고과 서열 1위로 쳐주어 한눈팔 필요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전문성 부여 인재육성정책을 쓴 것이다. 각종 행정 실무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집단을 양성한 것이다. <br><br>세종은 재위 10년까지는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유교국가가 나아갈 방향과 갖춰야 할 제도를 연구하게 했다. 이렇게 기초를 잡은 다음에 특화된 시정에 착수했다. 첫째 과업은 농정이었다. 농업은 당시 경제의 80~9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으니 중농정책의 표방은 곧 왕정의 1순위를 경제발전에 둔 것이다. 그는 "먹을거리는 백성의 하늘(食民天)"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올렸는데 국가경영의 의지를 잘 드러낸 말이다. <br><br>이전 왕조인 고려는 불교국가였지만 말기가 되면 유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내세만 강조하는 불교로서는 다스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세종대왕은 말로만 민본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어야 민본을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농사는 고려시대까지도 지력회복을 위해 한두 해씩 땅을 놀리는 휴한방식을 썼다. 고려 말에 볏을 단 보습(농기구의 일종)이 등장해 이런 제약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종 당대에도 이 선진 기술은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에 제한돼 있었다. 세종은 재위 11년에 농사를 아는 집현전 학사를 뽑아 그 선진농업기술을 채방하여 '농사직설'이란 책자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평안도，함경도까지 보내 거기서도 선진농업기술을 써보게 했다. 전 국토의 선진 농업지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부단한 노력으로 이 과제가 달성됨으로써 백성의 생활도 향상되고 나라의 세수도 늘었다. 새 기술은 거름주기가 가능해져 단위면적 생산력을 크게 높여 국가와 백성의 경제를 한꺼번에 향상시켰다. <br><br>왕은 기술보급정책과 동시에 세제 개혁을 검토했다. 농사짓는 기술이 달라졌으니 세제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질의 등급을 3등에서 6등으로 세분하고 풍흉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 새 제도의 초점이었다. 이를 위해 왕은 두 차례 18만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현직 관리，향촌의 유력자 외에 촌민까지 대상으로 한 조사였다.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던 일이다. 토질의 등급 구분은 어렵지 않지만 고을별 풍흉의 정도 측정이 난제였다. 그러나 이 난제도 세자(나중의 문종)가 측우기를 발명함으로써 해결을 보았다. 각 고을에 측우기를 설치해 비온 시각과 내린 양을 재서 도의 감사를 거쳐 호조에 보고되도록 해 가을 전세 결정 회의에 자료로 삼았다. 전품 6등，연분 9등의 신 세제는 측우기 발명 직후인 재위 26년에 확정 반포됐다. <br><br>대왕은 농시를 특별히 강조했다. 기술 집약화에 따른 필수사항이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본국력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4년부터 경복궁의 위도를 측정하는 각종 천문기구를 만들고 이어 시각 측정기구들을 제작해 그 성과를 근거로 재위 24년에 '칠정산내편'이란 '본국력'을 만들었다. 세종대의 천문기구는 전적으로 올바른 농정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br><br>왕은 또 이런 기구들이 설치된 경복궁의 뒤뜰에서 한 뙈기의 땅에 '농사직설' 에 적힌 기술대로 직접 농사를 지어보았다. 스스로 땅을 갈고 씨 뿌리고 김매기를 한 결과는 경기도 일반 농가보다 몇 배였다. <br><br>왕은 농정의 주요 과제가 거의 이뤄진 시점인 재위 27년에 '권농교서'를 내린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다음 신하들에게 백성이 농사 잘 짓게 이런저런 일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같은 해 '용비어천가'를 짓게 했다. 이즈음 또 백성들이 쉽게 제 뜻을 적을 수 있는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br><br>세종대왕의 치적은 내 백성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지혜와 노력의 힘으로 달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요순도 하지 못한，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최고의 경영인으로 평가받을 업적이었다. <br><br>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span></h3><!-- 상단 옵션 --><!-- articleControl f_cle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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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4 Mar 2009 04:06:3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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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조선일보, 2009. 2. 28)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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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class="articleMedia mediaImageZoom " id="articleImage0"><span class="imageZoom"><img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alt="" onerror="blankImg(this,0,0);" src="http://nimg.nate.com/orgImg/ch/2009/02/28/ch_1235790314_-625389596_0.jpg"> </span></div><!-- 기사 내용 -->● 서울대 이태진교수, 日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 사본 입수<br>"데라우치·하세가와 총독이 독살 배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 나서자 제거" 고종황제 죽음과 관련 구체적 정보 기록<br><br>꼭 90년 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종(高宗) 황제의 죽음이 일본측의 지시에 의한 독살(毒殺)이었다는 정보를 기록한 당시 일본 고위 관료의 문서가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 문서는 1919년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의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1853~1948)가 쓴 일기로, ▲고종 독살의 배후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있었으며 ▲독살의 이유는 고종이 독립운동에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궁내성 내의 정보를 기록했다. 고종 독살의 개연성을 언급한 국내 자료는 많았지만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개입했다는 구체적 정황과 실명을 기록한 일본측의 문서는 이번이 처음이다.<br><br>이태진(李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의 해당 부분 사본을 입수하고 이 사실을 27일 본지에 공개했다. 이 교수는 일본 교토(京都)대 나가이 가즈(永井和) 교수의 홈페이지를 통해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됐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오는 4월 23일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br><br>◆<b>"말을 듣지 않아… 은폐하려 죽였다"</b><br><br>구라토미는 다이쇼(大正) 8년(1919) 10월 26일의 일기에서 도쿄(東京) 오오이마치(大井町)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 히로구니(博邦)의 집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기차에서 송병준(宋秉畯)을 만났다고 적었다.<br><br>송병준은 '민병석(閔丙奭)과 윤덕영(尹德榮)의 (작위) 사직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분노하고 있다'고 구라토미에게 말했다. 송병준·민병석·윤덕영은 모두 한일강제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였다.<br><br>4일 뒤인 30일, 구라토미는 궁내성의 한 부서인 종질료(宗秩寮)에 갔다. 종질료란 황족과 왕족, 작위, 조선 귀족 등에 대한 일들을 다루는 곳으로 조선의 종친부와 비슷한 관청이었다. 그는 종질료의 고위 관료 센고쿠 마사유키(仙石政敬)를 만나 민병석·윤덕영의 사직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br><br>"(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意)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李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李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 구라토미는 "데라우치가 얘기했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는 "당신은 이를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br><br>초대 조선총독(1910~1916)이자 일본 총리대신(1916~1918)을 지낸 데라우치와 고종 승하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독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언급된 것이다.<br><br>◆<b>"고종, 파리 회의에 독립 청원 시도"</b><br><br>독살 건에 대한 구라토미의 문의는 집요했다. 10월 30일 센고쿠로부터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11월 1일 다시 종질료 관리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를 만나 "조선에서는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얘기하게 한 것이 있었는데 태왕이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입을 막는 수단으로서 태왕을 독살한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독살을 지시한 것이 데라우치였음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시하라는 이에 대해 "그런 풍설이 있다고 한다"며 정보를 알고 있음을 시인했다.<br><br>이틀 뒤인 3일 구라토미는 종질료의 다른 관리인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에게 또다시 고종 독살건에 대해 질문했다. 다나카는 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민병석·윤덕영·송병준 등이 태왕으로 하여금 서명 날인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독립이 될 듯하면 민 등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br><br>◆<b>"독살 진상 실토한 사람은 송병준"</b><br><br>이태진 교수는 "구라토미는 고종 독살의 정보를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민병석·윤덕영의 사직'이야기가 일기에서 처음 등장한 곳이 송병준을 만난 부분이며 다른 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br><br>구라토미 등은 이 정보를 '풍문'이나 '풍설'인 것으로 언급하지만, 이것은 '뜬소문'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정보로 봐야 한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전한 사실은 일본 국가 최고 수뇌부의 인물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근거없이 쉽게 거론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시자인 데라우치와 전달자인 하세가와, 하수인 역할을 한 민병석·윤덕영과 이들의 전달자인 송병준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br><br>구라토미가 궁내성의 상급자로서 종질료 관리들에게 거듭 이 문제를 캐물었고, 복수의 관원들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얻은 것도 이것이 '풍문' 수준을 뛰어넘는 정보였음을 시사한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일본인들은 상당히 근거 있는 정보라 해도 자신에게 책임이 올 것을 우려해,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려고 우회적으로 '풍문이 있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br><br>송병준은 왜 구라토미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전했던 것일까? 법제국 장관(1913~1916)을 지낸 구라토미는 궁내대신 하타노 다카나오(波多野敬直)와 가까운 정계의 실력자였다. 송병준은 작위를 잃게 된 민·윤 두 사람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그에게 독살의 진상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태진 교수는 말했다. 구라토미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데라우치 등 당시 총리들의 노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독살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br><br>◆<b>"일제, 민족자결주의 후폭풍 우려"</b><br><br>만약 구라토미가 기록한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면, 일본은 왜 한국을 병합한 지 9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고종을 독살한 것일까? 이태진 교수는 기록에 등장한 '고종이 파리 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려 했다'는 부분을 주목한다.<br><br>고종 승하 직전에 열리기 시작한 파리 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국제회의로, 1917년부터 제창된 우드로 윌슨(Wilson)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대책을 세우던 중, 고종 황제가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것을 알고 협박 끝에 독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br><br>이 교수는 "국권 침탈의 두 주역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의 주역으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데라우치는 1919년 4월 12일 민족자결주의를 걱정하면서 3·1 운동에 대한 상세한 대책을 설파한 서신을 하세가와에게 보내기도 했다.<br><br>◆<b>"시신의 팔다리가 붓고 혀가 닳았다"</b><br><br>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직후 전국에 번졌던 '독살설'은 3·1 운동 발발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고, 이를 믿은 국민들은 황제의 장례(3월 3일)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韓昌洙)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으며, 일각에선 자살설도 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선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아 '3·1 운동 당시의 소문' 정도로 치부돼 왔다.<br><br>고종 독살에 대한 당시 국내 기록으로는 윤치호(尹致昊)의 일기가 구체적인데, 이것은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閔泳達)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韓鎭昌)에게 한 말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윤치호는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고 적었다.<br><br>고종의 독살이 '해외 망명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운동가 선우훈(鮮于燻)은 광복 이후에 쓴 '사외비사(史外秘史)'에서 이지용(李址鎔)의 증언을 전했다. 고종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던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눠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장소가 그려진 보물지도를 신하에게 맡기고 탈출하기 직전에 정보가 샌 탓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상학과 이완용(李完用)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내용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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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기사 모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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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8 Feb 2009 04:28:4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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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조선국 독도에 도항금지’ 에도시대 팻말 日서 경매(경향신문, 2009. 2. 27)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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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class="article medium" id="articleContetns"><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tbody><tr><td style="WORD-BREAK: break-all" valign="top" align="left"><!-- 기사 내용 -->일본 에도 막부시대에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명칭)는 조선국에 속해 있어 도항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적은 목재 팻말이 경매시장에 나온다.<br><br>산케이신문은 27일 “일본 동부지역에 사는 소유자가 팻말을 경매시장에 내놓았다”며 “최저 낙찰가격은 120만엔(약 1900만원)”이라고 보도했다. 팻말은 다음달 15일 교토에서 열리는 경매에서 공개입찰 방식으로 낙찰자를 정하게 된다.<br><br><table cellspacing="2" cellpadding="2" width="500" align="center" border="0"><tbody><tr><td><img id="mainimg0"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onerror="blankImg(this,0,0)" hspace="1" src="http://nimg.nate.com/orgImg/kh/2009/02/27/1san.jpg" vspace="1"></td></tr><tr><td><span style="FONT-SIZE: 9pt; COLOR: #616588">“다케시마는 조선국에 속해 있어 도항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힌 일본 에도시대의 팻말. |산케이신문 제공 </span></td></tr></tbody></table><br>1837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팻말은 가로 77㎝, 세로 33㎝의 크기로 에치고 다카다번에 게시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막부가 이시미 하마다번상인들에게 “ ‘다케시마’로 건너가 밀무역을 할 경우 관계자를 처벌한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br><br>신문은 “에도 시대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고, 현재의 독도와는 다르다”며 “한국 측이 ‘다케시마’를 자국령이라고 주장할 때 종종 인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br><br>다케시마문제연구고문인 스기하라 다카시(70)는 “이번 팻말이 한국에 넘어가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자료로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마네현 측은 “현재로서는 재정상황이 좋지 않아 낙찰받기가 어렵다”며 “한국 측이 값을 끌어올리면 경쟁할 수 없다”고 밝혔다.<br></td></tr></tbody></table></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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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기사 모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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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8 Feb 2009 04:25:59 GMT</pubDate>
		<dc:creator>redcat100</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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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블로그 전문 “이글루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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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Feb 2009 06:39:03 GMT</pubDate>
		<dc:creator>redcat100</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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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34) 융합문화의 수작 고려청자(한겨레, 2005. 2. 1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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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 border="0"><tbody><tr><td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0px" align="middle"><img height="433" src="http://imgnews.naver.com/image/028/2005/02/01/0090000001200501310201_16.jpg" width="300" border="0"></td></tr></tbody></table>[한겨레] <b>영롱한 비췻빛에 어린 ‘청어람’ 묘미</b> <br><br>우리 겨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세계적인 자랑거리를 들라면 으레 고려청자가<br><br>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려청자야말로 우리나라를 세계 도자기사의 선구로<br><br>자리매김을 하게 한 독창적인 문화유산이며,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세계적 수준의<br><br>자랑스러운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들의 자화자찬이 아니고 유수의<br><br>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평가하는 바다. 지난 세기 초 일본에 가 동판화를<br><br>공부하다가 조선 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로 전향한 영국의 세계적 도예<br><br>이론가인 버나드 리치는 백자에 엷게 비치는 청색을 보고 “이 색을 낸다면<br><br>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br><br>감탄했다고 하며, 같은 영국의 한 박물관 도자기 부장인 윌리엄 보여 허니는<br><br>〈중국 및 극동 각국의 도자기〉(1945년)란 저서에서 “최상급의 한국 도자기는<br><br>세계 도자기 중에서 가장 우아하고 진실하며 도자기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br><br>구비하고 있으니, 그것은 행복한 민족의 소산임을 첫눈에 말해주고 있다”라고<br><br>격찬을 아끼지 않는다.<br><br>청자를 비롯한 자기의 원조는 자기들의 나라라고 자부하는 중국사람들조차도<br><br>고려청자 앞에서는 다소곳해지고 만다. 고려청자가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br><br>때인 1123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은 고려사람들은 도자기 중<br><br>색이 푸른 것(즉 청자)을 비색(翡色)이라고 부르는데, 솜씨가 뛰어나고 색깔이<br><br>더욱 좋아졌다고 하면서, 차마 낫다는 말은 못하고 당시 송나라에서 새로 나온<br><br>여요(汝窯)의 청자와 ‘비슷하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같은 송대 사람인<br><br>태평노인은 세상에서 으뜸가는 것들만을 골라서 소개하는 책자에서 “고려 비색(즉<br><br>청자)이 천하제일이다”라고 사실을 실토하고 만다. 고려청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의<br><br>도자기에 얼마나 매료되었으면 평생을 그 연구에 바친 외국 도예인들도 있다.<br><br>그런가 하면 일본의 다니 슌제이 같은 사람은 고려청자의 국제적 성가를 등에 업고<br><br>복원했다면서 10년간이나 고려청자 전문가로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br><br><b>세계가 찬탄한 맵시와 때깔</b> <br><br>이렇게 고려청자가 ‘천하제일’의 평판을 받게 된 것은 한마디로 그 독특한 특성<br><br>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러한 특성은 중국 청자의 영향을 받았으나 무턱대고<br><br>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이루어놓은 도자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br><br>특유의 창의성을 발휘한 결과인 것이다. 이를테면, 문명교류에서 다른 문명을<br><br>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전통문화를 가일층 발전시켜 풍부하게 만드는, 이른바<br><br>융합의 묘미를 살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는 이러한 융합물이<br><br>적지 않지만, 고려청자는 단연 그 수작으로 꼽힌다. 문명교류사에서 보면 융합성을<br><br>구현한 문명만이 선진문명의 반열에 올라 세계성을 인정받게 된다.<br><br><br clear="all"><br><br>원래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은나라 때부터 잿물, 곧 회유를<br><br>유약으로 하는 회유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한대에는 이 회유도기가 초기의<br><br clear="all"><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20" align="center" border="0"><tbody><tr><td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0px" align="middle"><img height="144" src="http://imgnews.naver.com/image/028/2005/02/01/009000000120050131A02010116.jpg" width="520" border="0"></td></tr></tbody></table><br>청자 형태로 발전하였다. 7세기 초반 당나라 때부터는 비교적 세련된 청자가<br><br>나타나다가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월주요(越州窯) 청자 같은 완벽한 청자가<br><br>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공무역 등을 통해 앞서간 중국의 자기와<br><br>유약이 수입되었으며, 9세기 후반부터는 전라도 강진과 부안을 비롯한 서남<br><br>해안지역에서 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9세기 청해진을 본거지로 한<br><br>해상왕 장보고의 대중국 교역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br><br>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귀족문화의 개화와 더불어 불교의 선종이 들어오면서<br><br>차문화가 성행하게 되자 다구로서 청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다. 그래서 청자로<br><br>만든 제기나 다완, 의식용기 등 다양한 청자그릇이 선을 보인다. 그러나 11세기<br><br>전반까지만 해도 조형미라든가 장식기법에서 중국의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br><br>못했으며, 청자는 아직 일부 용기로만 쓰였을 뿐, 생활문화 전반에 뿌리내리지는<br><br>못했다. 고려청자가 ‘천하제일’의 명품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전성기인<br><br>12세기부터다. 이때부터 굽는 방법이나 기형, 문양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은<br><br>사라지고 빛깔과 형태, 문양에서 ‘고려적’인 것으로 승화해 중국을 능가하는<br><br>독창적인 세련미와 완성도를 보여준다.<br><br><b>중국산 수용해 독창적 승화</b> <br><br>고려청자의 독창성은 우선 그 영롱한 빛깔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로부터 동양<br><br>사람들은 옥을 가장 신비스러운 보석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청자도 어떻게 하면<br><br>파르스름한 옥색을 띠게 할 수 있을까를 고심해 왔다. 고심 끝에 중국 사람들은<br><br>10세기께 자신들이 만들어낸 청자 색깔이 옥색에 가까운 것으로 믿고 궁중에서만<br><br>사용되고 있는 비밀스런 색깔이란 뜻에서 ‘비색’(秘色)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br><br>그것은 그저 ‘비밀스런 색깔’일 뿐, 참 옥색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이<br><br>고려청자를 봤을 때, 이것이야말로 진짜 옥색이라고 해서 초록색 경옥을 가리키는<br><br>‘비색’(翡色)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실 고려청자의 빛깔은 중국의 ‘비색’<br><br>같은 색깔이 아니라 아름다운 맵시와 빛깔을 조화시킨 문자 그대로의 때깔이다.<br><br>여기에 고려청자만이 지닌 빛깔의 오묘함이 있다. 그래서 이규보는 청자<br><br>인형연적을 앞에 놓고 “작기도 하여라 푸른 옷 입은 동자/ 고운 살결 옥과<br><br>같구나/ …너의 고마움을 무엇으로 갚을쏜가/ 깨지지 않게 소중히 간직하리”라고<br><br>청자에 대한 애틋한 정과 소중함을 읊조리고 있다.<br><br><b>상감기법 청자 적용 세계유일</b> <br><br>고려청자의 독창성은 상감기법을 도입한 데서도 드러난다. 상감기법이란 금속이나<br><br>도자기 표면에 무늬를 파서 그 속에 금속이나 보석을 넣어 채우는 기법을 말한다.<br><br>원래 이 기법은 일찍이 이집트에서 발생한 후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br><br>삼국시대에 이미 한반도에 전래되어 주로 금속이나 나전칠기에 장식줄을 박는<br><br>입사법 같은 공예기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br><br>이러한 공예기법을 청자의 제작기법으로 도입한 것은 고려가 유일하며, 그로 인해<br><br>고려의 상감청자라는 다채롭고 장식적인 멋을 띤 독특한 청자가 만들어지게<br><br>되었다. 그 기법은 반건조된 그릇 표면에 문양을 파고 초벌구이한 다음 파인<br><br clear="all"><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20" align="center" border="0"><tbody><tr><td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0px" align="middle"><img height="265" src="http://imgnews.naver.com/image/028/2005/02/01/009000000120050131A02010116-1.jpg" width="520" border="0"></td></tr></tbody></table><br>부분을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유약을 바른 뒤에 다시 구워냄으로써 문양이 유약을<br><br>거쳐 투시되도록 하는 것이다. 원래 청자는 유약의 유리질로 인한 반사 때문에<br><br>무늬를 넣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청자를<br><br>포기하고 청백자의 길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은 힘든다고 걸어온 길을<br><br>버리지 않고 전래의 입사법에서 영감을 얻어 끝내 상감기법을 발명함으로써 으뜸<br><br>청자를 만들어낼 수가 있게 되었다.<br><br><br clear="all"><br><br>이러한 상감기법의 도입으로 인해 자기의 표면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늬를<br><br>새겨넣은 것은 고려청자만이 지닌 또하나의 특색이다. 일반적으로 제품의 무늬는<br><br>제작자와 수요자들의 사상, 감정과 문화적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br><br>반복적인 기하학적 무늬인 연꽃무늬, 국화무늬, 당초무늬, 보상화무늬, 초화무늬<br><br>등과 더불어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며 청빈한 삶을 염원하는 마음이 깃든<br><br>구름학무늬, 강변의 물새(포류수금)무늬, 포도동자무늬 등 실로 다양한 무늬세계를<br><br>펼치고 있다. 당시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폭넓고 생생하게 전해줄 뿐만 아니라,<br><br>그들이 지닌 심미의식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늬를 배치하는 방식도<br><br>조형적으로 대단히 세련되어 있다. 예컨대, 찻잔의 경우 그릇 안쪽을 당초무늬로<br><br>가득 채우면 바깥쪽에는 국화무늬를 사방으로 돌림으로써 그 조화로움이 한눈에<br><br>안겨온다. 무늬 가운데 연꽃무늬나 당초무늬, 포도무늬 같은 것은 원래가 서역에서<br><br>들어온 것들로서 우리의 장식무늬 속에 남아 있는 전형적인 융합문화다.<br><br><b>빼어난 세련미·정감 넘치는 무늬</b> <br><br>이와 함께, 고려청자는 기형에서 오는 아름답고 균형 잡힌 조형미가 일품이다.<br><br>청자가 갖는 특유의 질감이나 미감 때문에 그 기형은 예술적인 조형을 포함해 실로<br><br>다양하다. 찻잔과 술병을 비롯해 음식용기가 가장 많지만, 그 외에도 제기나 등잔,<br><br>베개, 향로, 벼루, 연적 등 일상 생활용품, 심지어 기와나 타일 같은 건축자재나<br><br>주거용품도 들어 있다. 원숭이 모자의 정감을 재미있게 묘사한 연적은 조형미가<br><br>넘치는 예술작품의 한 보기다.<br><br>이러한 독창성과 특색을 반영하여 제품의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도 남다른 일이다.<br><br>예컨대, ‘청자 상감운학문매병’이나 ‘청자 양각대마디문병’ 같은 제품의<br><br>이름에서 보다시피,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명칭은 먼저 재질(청자)을 구분한 다음<br><br>장식기법(상감, 양각)과 무늬(운학문, 대마디문)를 알리고 나서 마지막으로<br><br>그릇모양(매병, 병)을 식별하는 차례를 띤다.<br><br>고려청자는 시대를 넘기면서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로 그 맥을 넘겨주었다.<br><br>적어도 17세기까지 세상에서 자기를 만들어 쓰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뿐이었다.<br><br>그것도 우리는 여러 면에서 중국을 앞섰다. 이렇듯 문명간의 융합성을 최상의<br><br>수준에서 구현한 고려청자는 ‘코레아’의 상징으로, ‘미스 고려’의 화신으로<br><br>우리의 문화사뿐만 아니라, 세계 도자사를 빛나게 수놓고 있다.<br><br>정수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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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기사 모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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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Feb 2009 13:00:20 GMT</pubDate>
		<dc:creator>redcat100</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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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정조 '막후정치' 입증 비밀편지 발굴(연합뉴스, 2009. 2. 9)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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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우의정 심환지에게 299통 발송..보물급 문화재 <br>(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正祖)가 재위 말년에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를 치밀하게 펼쳤음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그의 비밀 편지 299통이 무더기로 공개됐다. <br><br>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9일 오전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조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沈煥之.1730-1802)에게 보낸 어찰첩(御札帖)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br><br><div class="GS_conC" style="WIDTH: 500px"><p class="ph"><img alt="" src="http://photo-media.daum-img.net/200902/09/yonhap/20090209114513104.jpg" width="500" h="299" w="500"><span></span></p></div><div class="GS_conC" style="WIDTH: 433px"><p class="ph"><img alt="" src="http://photo-media.daum-img.net/200902/09/yonhap/20090209114513157.jpg" width="433" h="750" w="433"><span></span></p></div>개인이 소장해오다 공개된 이 어찰첩은 탈초(脫草.정자체로 풀어쓰기)와 번역을 거쳐 내용을 분석한 결과,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되었으며, 그 전부가 정조의 친필로 심환지에게만 보낸 보물급 문화재로 드러났다. <br><br>이번 자료발굴과 분석에 관여한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이 편지들은 조선시대의 어찰로는 분량이 최대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실은 정조가 지속적으로 없애라고 명령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라며 "국왕과 대신 사이에 국정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고 첩보를 수집하며 여론 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br><br>이 편지들은 수신자인 심환지 쪽에서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 장소를 기록해 두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br><br>이번 어찰첩이 발굴됨으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조시대 정국 동향은 물론이고, 정조 자신의 성격이나 정국 구상과 그 추진 방식 등이 상당 부분 베일을 벗게 됐다. <br><br>무엇보다 심환지가 정조와는 날카롭게 대립했으며 심지어 그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낭설'로 판명났으며, 정조가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에 능수능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br><br>이 편지들에 의하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 편지를 보내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때로는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br><br>이런 맥락에서 정조는 심환지의 큰아들을 과거시험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고 했으나 (아들이 그러지 못해) 심히 안타깝다"고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br><br>아울러 이 편지들에서 정조는 건강에 심대한 이상이 있음을 여러 차례 토로한 것으로 밝혀졌다. <br><br>정조가 1800년 6월28일 타계하기 13일 전인 6월15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중략)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br><br>어찰첩 분석에 참여한 조선사 전공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자료가 공개되면서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국가 편찬 연대기 자료에만 토대를 둔 역사 연구는 방향 전환이 불가피해졌다"고 밝히고 "나아가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로 대표되는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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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기사 모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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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9 Feb 2009 07:29:2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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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백제 최대사찰 ''비밀의 문'' 열렸다(조선, 2009. 1. 20)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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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class="edit11" id="newsContent"><font size="3">기록 거의 없던 미륵사, 639년 창건 밝혀져 발굴된 유물들 1400년전 모습 완벽하게 간직 塔양식·금속공예사 연구에 기준 마련해줄 듯 </font><p>설화에서 역사로―. <p>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백제 최대의 사찰인 전북 익산 미륵사의 창건 과정이 이번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을 통해 소상히 밝혀졌다. 이번 발굴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1400년 전의 타임캡슐을 꺼낸 것과 같다. 서기 639년 탑을 만들 때 창건내역을 밝힌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나온 것을 비롯해 사리를 넣은 병과 머리장식용 액세서리, 장식용 칼과 유리구슬 등 505점의 유물이 대량으로 한꺼번에 발굴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봉건 소장이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해주는 유물들"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p>미륵사의 경우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 무왕(武王)이 재위 35년에 왕흥사(王興寺)를 준공하고, 궁 남쪽에 못을 팠다는 등의 역사(役事) 기록은 있지만 초대형 사찰인 미륵사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미륵사 창건설화가 간략히 소개돼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span style="BACKGROUND: #c9e3f7">석탑</span>을 두고도 서기 7~8세기경으로 건립연대를 막연히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준 것이 가로 15.5㎝, 세로 10.5㎝짜리 금판에 쓰여진 한자 194자(字)인 것이다. 적어도 서탑(西塔)의 경우 건립된 때가 서기 639년이라는 점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다. <p><p><img id="mainimg0"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0" src="http://nimg.empas.com/orgImg/ch/2009/01/20/2009011901955_1.jpg" width="480" align="center" border="0" name="newsimg" no="1"> 이 때문에 이번 발굴은 건축사, 금속공예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뚜렷한 기준을 마련해준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span style="BACKGROUND: #c9e3f7">미륵사지</span> 서탑의 경우, 목탑에서 <span style="BACKGROUND: #c9e3f7">석탑</span>으로 옮겨가는 전형적인 유물이다. 이번 해체발굴과정을 통해 당시 탑 건축 방식을 알게 됐을 뿐 아니라 앞으로 삼국시대 말기와 통일신라 시대의 탑 양식 연구에 기준을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 배병선 <span style="BACKGROUND: #c9e3f7">미륵사지</span><span style="BACKGROUND: #c9e3f7">석탑</span> 보수정비사업단장은 "보통 목탑에서는 심초석(心礎石) 주변에 사리기(舍利器)를 안치하는데 이번엔 심초석까지 내려가기도 전, 1층 심주석(心柱石)에서 사리기가 나왔다"며 <span style="BACKGROUND: #c9e3f7">미륵사지</span> <span style="BACKGROUND: #c9e3f7">석탑</span>의 특징을 설명했다. <p>다양한 문양이 표면에 새겨진 금제사리호(金製舍利壺),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은제관식(銀製冠飾) 등은 서기 7세기 전반, 절정에 이르렀던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척도가 될 전망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에 발굴된 금속유물들이 모두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백제에서 자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p><p><img id="mainimg1"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0" src="http://nimg.empas.com/orgImg/ch/2009/01/20/2009011901955_2.jpg" width="480" align="center" border="0" name="newsimg" no="2"> 엄청난 양으로 쏟아져 나온 유물의 의미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이제부터다. 특히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백제왕후좌평사택적덕녀'라는 구절은 '백제 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정확한 해석이 나오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배 단장은 말했다. 김봉건 소장도 "보존처리를 마치고 문헌기록과 비교검토 후 관련 학계와 심화연구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p><strong>무왕(武王) <p></strong>무왕(武王)은 백제 말기 왕권을 강화한 국왕으로 평가된다. 그에 앞선 혜왕과 법왕이 즉위 이듬해 사망한 것과 달리 무왕은 41년에 이르는 재위기간 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빈번하게 신라를 공격하고 이를 통해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대규모 역사(役事)도 일으켰다. 서기 630년 사비궁(宮)을 중수(重修)하고 634년에는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인공 섬을 만들고, 선대인 법왕 때 착공했던 왕흥사(王興寺)도 완공했다. 또 재위 후반기에는 현재의 익산지역을 중시해 왕궁평성(王宮坪城)을 건설하는 등 장차 도읍을 옮길 움직임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발굴로 익산지역에 총면적 1338만4699㎡(약 404만8870평)에 이르는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한 것도 무왕 재위 중의 일이었음이 확인됐다. <p><p><img id="mainimg2"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0" src="http://nimg.empas.com/orgImg/ch/2009/01/20/2009011901955_3.jpg" width="480" align="center" border="0" name="newsimg" no="3"> <p><p><br><center><object id="V000275327" codebase="http://f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version=9,0,28,0" height="345" width="400"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param name="_cx" value="5080"><param name="_cy" value="5080"><param name="FlashVars" value=""><param name="Movie" value="http://play.tagstory.com/player/TS00@V000275327"><param name="Src" value="http://play.tagstory.com/player/TS00@V000275327"><param name="WMode" value="Window"><param name="Play" value="-1"><param name="Loop" value="-1"><param name="Quality" value="High"><param name="SAlign" value=""><param name="Menu" value="-1"><param name="Base" value=""><param name="AllowScriptAccess" value=""><param name="Scale" value="ShowAll"><param name="DeviceFont" value="0"><param name="EmbedMovie" value="0"><param name="BGColor" value=""><param name="SWRemote" value=""><param name="MovieData" value=""><param name="SeamlessTabbing" value="1"><param name="Profile" value="0"><param name="ProfileAddress" value=""><param name="ProfilePort" value="0"><param name="AllowNetworking" value="all"><param name="AllowFullScreen" value="false"><embed src="http://play.tagstory.com/player/TS00@V000275327" width="400" height="345" name="V000275327"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quality="high"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embed></object></center><br><span style="FONT-SIZE: 9pt">전북 익산시 금마면 <span style="BACKGROUND: #c9e3f7">미륵사지</span> <span style="BACKGROUND: #c9e3f7">석탑</span>에서 발견된 금제사리호. 2009년1월14일 1층 해체조사 조사중 심주석 상면 중앙(가운데 십자모양 가운데 정사각형 안)에서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가 나왔다.</span></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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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기사 모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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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1 Jan 2009 13:10:29 GMT</pubDate>
		<dc:creator>redcat100</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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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신라 선화공주-백제 무왕 ‘사랑의 유물’ 대거 찾았다(헤럴드, 2009. 1. 19)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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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99%" border="0"><tbody><tr><td style="WORD-BREAK: break-all" valign="top" align="left" width="575"><img id="mainimg0"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11" src="http://nimg.empas.com/orgImg/hm/2009/01/19/200901190023.jpg" align="bottom" vspace="5" border="0" name="newsimg"> <img id="mainimg1"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11" src="http://nimg.empas.com/orgImg/hm/2009/01/19/200901190024.jpg" align="bottom" vspace="5" border="0" name="newsimg"> <img id="mainimg2"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11" src="http://nimg.empas.com/orgImg/hm/2009/01/19/200901190025.jpg" align="bottom" vspace="5" border="0" name="newsimg"> <img id="mainimg3"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11" src="http://nimg.empas.com/orgImg/hm/2009/01/19/200901190026.jpg" align="bottom" vspace="5" border="0" name="newsimg"> <img id="mainimg4" style="CURSOR: hand" onclick="GoImg(this.src)" onerror="HideImage(this)" hspace="11" src="http://nimg.empas.com/orgImg/hm/2009/01/19/200901190027.jpg" align="bottom" vspace="5" border="0" name="newsimg"> <br clear="all"><!--DCM_BODY--><font class="edit" id="font"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3px"><span class="edit11" id="newsContent">익산 미륵사는 백제 서동왕자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왕비를 위해 용화산(龍華山) 아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삼국유사가 기록을 통해 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도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시기와 목적 등은 언급돼 있지 않다.<br><br>그동안 설화로만 전해져온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사실로 입증해주는 유물들이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대거 발굴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국보 11호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무려 500여점에 달하는 국보급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고 19일 밝혔다.<br>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지난 14일 미륵사지석탑을 해체보수하던 중 석탑 1층 심주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선화공주)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br><br>이 사리장엄을 통해 그동안 창건시기와 내력이 삼국유사 등에 ‘시선을 끄는 설화’로만 전해져온 익산 미륵사가 설화가 말하는 골격 그대로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무왕의 지원 아래 왕후(선화공주)가 창건한 것으로 규명됐다. 그동안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이같은 백제와 신라를 뛰어넘는 러브스토리를 설화로 채록한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지만 이번 사리장엄 발굴로 무왕 재위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확인됐다.<br><br><br><br>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金製 舍利壺)와 석탑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관식 등 다양한 유물 500여 점이 나왔다. 이중 금제사리호는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여실히 입증해주는 병 모양의 사리호.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던 금제사리호는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이 덮여 있었다. X선으로 사리호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하됐다.<br><br>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처럼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금석문(金石文) 자료로 평가된다.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br><br>이건무 청장은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 출토됐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돼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고 평가했다.<br>이어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됐다"고 반겼다. 아울러 매납(埋納)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編年)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br><br>문화재청은 이번 발견이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br></span></font></td></tr></tbody></t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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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기사 모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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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9 Jan 2009 07:14:12 GMT</pubDate>
		<dc:creator>redcat100</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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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100년전 조선 극장은 `외설의 온상`(헤럴드 생생뉴스, 2009. 1. 6)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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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
<tbody>
<tr>
<td align="middle"><img id="mainimg0" style="CURSOR: hand" omclick="GoImg(this.src)" omerror="HideImage(this)" hspace="11" src="http://nimg.empas.com/orgImg/hm/2009/01/06/200901060111.jpg" align="center" vspace="5" border="0" name="newsimg" /></td>
</tr>
</tbody>
</table>
<!--DCM_BODY--> <font class="edit" id="font"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3px"><span class="edit11" id="newsContent"></span></font>
<div><font class="edit" id="font"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3px"><span class="edit11" id="newsContent">100년 전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br />
‘경성의 극장은 음굴(淫窟)’ ‘음부탕자(淫婦蕩子)의 오락장’ ‘극장에서의 풍속괴란’ ‘사회풍기와 연예계, 어떻게 하면 좋을까’….<br />
<br />
약 100년 전 사회문제로 비화된 극장 세태를 보도한 신문기사의 제목들이다. 신문에 나타난 기사들로 볼 때 극장은 성적 방종이나 폭력을 부추기는 ‘풍기 문란의 온상’으로 지목돼 당국과 번번이 마찰을 빚었다.<br />
<br />
한국에 영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만들어진 일제 강점기의 영화 관련 신문기사 자료를 통해 당시 신문물인 극장가의 천태만상과 영화ㆍ연예업의 면면을 담은 저서가 최근 발간돼 눈길을 끈다.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조선희)이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매일신보에 나타난 영화, 연극, 연예 관련 보도를 정리해 펴낸 ‘신문기사를 통해 본 조선 영화 1911~1917’이다.<br />
<br />
▶외설과 퇴폐의 온상=영화, 연극의 외설과 폭력성, 남녀가 뒤엉킨 낯 뜨거운 객석의 세태, 이를 막기 위한 경찰의 단속은 당시 가장 빈번하게 보도된 이슈였다. 1916년 4월 1일자 매일신보는 “요새 경성 내에 연극장 활동사진관의 상황을 보면 폐해되는 일이 많이 있다고 할 만한 바, 연극을 흥행할 때에 참혹한 것이나 또는 외설한 행동을 하야 관객의 악감정을 일으키는 일”과 “남녀석 간에 혼란한 일이라든지 동석하는 일과 활동사진 변사로 풍속을 해케하는 설명하는 등이 있으면 바로 소관 경찰서에서는 엄중히 취체하여 풍기를 숙정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br />
<br />
▶당대의 톱스타들도 물의=심지어 극장에서 당대의 톱스타라고 할 수 있는 창극, 신파극의 배우가 매춘부들과 함께 파티를 벌여 물의를 빚거나 유력인사들이 도박ㆍ노름판을 벌여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br />
<br />
1911년 4월 22일엔 “근일 각 연극장에서 고용하는 창부(倡夫) 등은 남북촌 모모 대관의 별실에 모이고 밀매음녀를 연락하여 연극을 무료로 관광케 하마 하고 연극장으로 동행 관광한 후에 비밀한 처소로 회동하여 부정한 행위가 있다는 소문이 낭자함으로 경찰서에서는 창부 등을 엄정히 단속하기 위해 목하 협의하는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br />
<br />
이보다 이른 1913년 4월 16일에도 연예계의 성문란 풍조를 강도 높게 질타하는 긴 사설조의 기사가 게재됐다. “요새 각 방면으로 탐문한 바에 의하면 경성 내 각 연극장은 곧 음굴”이라며 “교묘하고 간할한 무리들은 떼를 이뤄 돌아다니며 상풍 패속의 악품을 고취하여 동물 중 가장 귀한 가치를 스스로 타락케 한다”고 했으며 이를 “광대배의 음잡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br />
<br />
또 “소위 성주풀이로 음부탕자의 탕정을 고발하는 조진영이라는 자는 밤마다 공연할 때 부인석을 곁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전후 음잡한 거동으로 비밀스럽게 추파를 전하는 못된 색마의 놈”이라며 연예인의 실명을 들어 ‘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경성의 한 유력 인사가 장안사 연극장 내에서 투전판을 벌여 돈내기를 한 혐의로 북부경찰서에 잡혀 볼기를 15대 맞고 풀려나는 등 극장 내 도박사건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기도 했다.<br />
<br />
▶각양각색 관객들의 추태=극장가에서는 연예인뿐 아니라 젊은 일반 관객들의 ‘추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1913년 9월에는 31세 된 남자가 21세 된 여성 관객을 꾀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극장 색마의 실패’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br />
<br />
“꽃같이 고운 얼굴에 마음을 어떻게 뺏겼던지 속으로는 그 계집을 어떻게 하면 불러다가 하루를 놀까 하다가” 결국 피해 여성의 고발로 범인이 잡힌 해프닝이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광무대 연극장에서 이십세가량 된 젊은 여인 두 명이 술에 대취하여 광언망설을 주절이다가 토악질을 해 더러운 냄새가 장내에 충만했으며 모든 구경꾼들은 코를 막아가며 욕설을 쏟아냈다”는 짧은 기사가 ‘참 못된 계집들이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다.<br />
<br />
▶영화의 모방범죄는 100년 전에도=영화의 모방범죄 논란도 오늘의 일만은 아니었다. 1917년 8월 매일신보는 ‘소학생도의 살인강도, 무서운 활동사진의 악영향’이라는 제하로 일본 신사현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들이 13~16세의 소학생 집단으로 밝혀졌다는 뉴스를 보도하며 “이와 같이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는 활동사진의 좋지 못한 영향으로 또한 이 아이들은 항상 절도로 군것질하기가 일이었다 하니 놀랍지 아니한가”라고 전했다.<br />
<br />
▶공동 프로모션, 특수효과 등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이 밖에도 치약 발매 기념 영화 특별 상영이나 궐련 신제품 출시 기념 활동사진관 입장권 증정행사와 같은 공동 프로모션 광고도 당시 신문에서 눈에 띄었으며, 극장 개관 및 단장(사진), 단성사 소실(1915년) 같은 일도 보도됐다. 1916년에는 ‘보기에 놀라운 최신의 활동사진 이렇게 박힌다’는 제목으로 특수효과, 촬영과정을 담은 기획 기사도 있었으며, 외화를 소개하는 코너도 1910년대 후반에 급증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면모를 보였다.<br /></span></font></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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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기사 모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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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6 Jan 2009 09:34:10 GMT</pubDate>
		<dc:creator>redcat100</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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