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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ay To Day</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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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4 Nov 2009 15:33:1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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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ay To Day</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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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Roman Republic → Empire ...0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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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a1a4ba01.jpg" width="500" height="37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a1a4ba0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lps Mountains Lanscape</span><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a5fc9afd.jpg" width="500" height="37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a5fc9af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eneas-Having Reached Cumae On His Travels, Visited the Sibyl</span><br>Italian Peninsula를 기반으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훗날 Empire으로서 <br>발돋움한 Urbs Roma의 발전과 역사는 대다수 유럽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지리적 <br>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가 Alps- <br>Mounatain의 존재이다. 인종적으로는 Aryan(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Latin 족속에 속하게 <br>되며, Tiber River 유역의 평야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이기도 했고, <span style="COLOR: #ffffff">"농경과 목축"</span>을 행하던 <br>촌락 민들이 구릉지대(일곱 개의 언덕)를 각각 장악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들 개별 촌락들이 <br>점차로 성장하여 기원전 8 C-기원전 7 C 동안에 "Gens Claudia(씨족) 중심의 촌락"들이 마치<br>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탈-공동체적인 형태로 진화되었고, 도시 국가로서 통합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br><br>그 후 Palatinus 언덕을 중심으로 Southern-Eastern-Northern의 정착지<br>들을 흡수하여 규모가 커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점에 <span style="COLOR: #ff0000">Pomerium</span><span style="COLOR: #ffcc00">(일정한 경계)</span>의 <br>주변 영토와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미 !! <br>이러한 지역에는 <u>선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서</u> 그러한 족속들 중 Etruria People <br>들은 지중해의 고대 해양 족속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대략 기원전 1200년 이 후 Italian- <br>Peninsula 각지에 분포 되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6 C 경에 이르면 <br>서-지중해에서 해상 상업 활동을 전개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Latin Type의 "로마 인"들은 <br>북쪽에 인접해 있던 Etruria People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더불어 당대 <span style="COLOR: #33ff33">Italian Peninsula</span><br>(남부)의 Sicilia에는 Greece People들이 식민시(Colony)를 건설하여 거주하고 있었는데... <br>Roma People 들은 이러한 지역을 Magna Graecia라고 불렀다고 한다. 반면에 Italian Peninsula <br>북부 지방과 유럽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지대에는 또 다른 Aryan(인도-유럽어족) Type <br>Gallia(갈리아) People들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아가고 있었고, Greece &amp; Roma People 들은 <br>이들을 Celt(켈트) People이라고 불렀다. 전승에 의하면 대략 기원전 509년까지 Urbs Roma는 <br>왕정체제 하에 있었으며, 정치적으로&nbsp; <span style="COLOR: #ffffff">Rex(왕), Senatus(원로원), Comitia Curiata(민회)</span>를 중심으로 <br>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또한 Romulus를 포함하여 왕이 7명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br>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실존했던 왕은 따지고 보면...그들 가운데 3명의 왕 뿐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br>필요가 있다. 아무튼 전승 그대로 인정하면 Romulus 이 후 처음 3 명의 Rex(왕)는 Latin People, <br>"사비눔 출신"이었고, 마지막 3 명(3 - 1 = 2)의 왕은 Etruria People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br>이들...Etruria 출신들은 초기 로마 정치, 경제, 문화 체제에 주요 특징을 확립시켰고, 이렇게 전승된 <br>특징은 도시의 역사가 지속되면서 존속 되어졌다. Etruria People들은 현재의 Toscana에서 <br>상당한 수준의 자체 문명을 가지고 여러 개의 도시국가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Urbs Roma 사회를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b4a86a89.jpg" width="500" height="24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b4a86a8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Forum Romanum<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bde45c66.jpg" width="500" height="36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bde45c6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emple of Vesta-Rome</span><br>정치적으로 지배하였는데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br>통일국가를 성립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종국에는 Roma People 들에게 <br>도시를 송두리 채 파괴당하기에 이르렀으며,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서는 변방의 <br>보잘 것 없는 족속으로 전락되었다. Urbs Roma 성립 초기 이 후 2 C 동안 <br>커다란 범주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이다. 대내적으로 <br><span style="COLOR: #ffffff">"귀족과 평민"</span>의 <u>신분 투쟁이 본격화 되었던 점이</u> 그 하나이고, 대외적으로는 <br>Roman의 <u>지배권의 팽창이</u> 이루어진다는 사실인데 점차로 귀족들과 평민들 간의 <br>정치적 투쟁은 역사 서술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신분투쟁 과정에서 질서 있고 <br>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갔으며, 양자 간에는 어김없이 양보를 얻어내는 세력이 있었고, <br>그때마다 법의 제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훗날 <span style="COLOR: #ffffff">"토지 귀족과 평민"</span>들이 대규모 <br>권력투쟁이 전개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 공화정 초기에 있었던 "신분 투쟁"은 <br>그 성격에 있어서 하나의 파벌이 득세하면 정치적 활용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br>것이다. 특징적인 사실로서 Latin &amp; Roma People 들의 관계는 초기 역사에서 그 의미에서<br><br>대단히 중요하였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통상을 하고 전투를 치루거나 통혼이 <br>가능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 설명하자면 왕정 시기에 <br>Urbs Roma는<span style="COLOR: #ffffff">"알바누스 산"</span>에서 Jupiter Latiaris 신에게 "공동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br>만들어진 동맹체를 주도하게 된다. 또한 동등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br>조약을 <span style="COLOR: #ff0000">Foedus Cassianum</span><span style="COLOR: #ffcc00">(카시아수스)</span>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청동 서판"에 새겨져 <br>Cicero 시대까지 Urbs Roma의 중심지에 남겨져 있었다. 의미적으로는 동등 자 사이의 조약 <br>이라고도 했고, "평등 조약"의 고전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Latin League<br>이라는 명확한 토대 위에서 Roma People 들은 <span style="COLOR: #33ff33">Etruria, Sabini, Aequi &amp; Volsci People</span> <br>들에 대하여 우월적 관계를 설정하였으며, 그러한 중심에는 <span style="COLOR: #ff0000">Disciplina Etrusca System</span>이 존재<br>하게 된다. 초기 "로마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족속은 Sabini People 들로서 가장 근접<br>되어 대립관계에 있었고, "사비니 여인의 강탈 사건" 이 후 Romulus와 공동 통치를 하였던 <br><span style="COLOR: #ff0000">Titus Tatius</span><span style="COLOR: #ffcc00">(타티우스)</span> 왕은 Sabini Type에서 배출한 3 명의 왕중에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또한 <br>Sabini People 중에서 가장 지명도 있는 이주민은 Attus Clausus(아투스 클라우수스)으로서 <br>훗날 막강한 권력을 행사 하게 되는 <span style="COLOR: #ff0000">Gens Claudius</span><span style="COLOR: #ffcc00">(클라우디우스)</span>의 선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br>기본적으로는 이주되지 않은 Sabini People들과 반목했으며, 수많은 전투를 거친 후 팽창하는 <br>Urbs Roma 세력에 의해 기원전 290년에 이르러서야 마지막 거점이 함락되었고, 그 후 Urbs Roma <br>시민<span style="COLOR: #ffffff">(기원전 260)</span>으로 편입되었다. 이외에 Central-Italy을 기반으로 하던 호전적 선주민이었던 <br>산악 족속으로 분류되던 Aequi(아이퀴) &amp; Volsci(볼스키) 들이 차례로 복속시키고, 바로 !! 이들이 <br>거주 하였던 지역에 Roma People 들은 식민시를 건설했는데 대표적적인 것으로&nbsp; <span style="COLOR: #33ff33">Alba Fucens</span>가 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c4022c0a.jpg" width="500" height="37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c4022c0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 Etruscans, Etruria and the Genesis of Rome-Liber Linteu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c88a0fb6.jpg" width="500" height="48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c88a0fb6.jpg');" /></div>Decumanus Maximus Archway<br></span>아무튼... Roman은 "에트루리아 인"들의 영향을 받아 경제, 문화, <br>정치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하였으며, 이제는 초기에 조잡한 촌락들이 <br>결합된 Small Polis가 아니라 Tiber River 하구를 따라 상당한 면적을 차지<br>하였고,<span style="COLOR: #ffffff">Latium</span> 평야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Polis로 새롭게 탄생<br>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원전 6 C-기원전 5 C에 마침내 Central-Italy Peninsula <br>지역의 핵심적인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 혹은 신화적 <br>다수의 인물들이 교차하며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으로 Aequi, Volsci의 침입을 저지한 <br>인물로서 Coriolanus(코리올라누스)와 Cincinnatus(킨킨나투스) 그리고 Gallia = <br>Gaul People 들의 침입을 사실상 저지한 인물으로 Camillus(카밀루스)가 있었다. <br>Urbs Roma 왕정의 정치, 사회적 제도들은 기원전 6 C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br>Etruria People 출신 그러니까 사실상 3명(3 - 1 = 2)의 Rex(왕)치세 동안 전환기를 맞이<br>했는데 대략 이러한 시기 Roma People의 씨족과 원로원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12 개 <br>도시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던 Etruria People들의 힘(권력)은 기원전 6 C에 절정에 이르러 <br>점차로 <span style="COLOR: #ffffff">North→Po River, South→Palatium 지역, Campanis(캄파니아)</span> 지역까지 <br>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Etruria People 들은 Aegean Sea→ Greece-Phoenicia-Eyght <br>People 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더불어 Etruria의 도시<br>들을 모방하여 Roman에서는 많은 공공건물과 산업적 용도의 건물, 신전이 세워졌고, 이러한 <br>시기부터는 외국의 상인과 수공업자(거류 외국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br>왕정 말기에 이르면 Urbs Roma는 "카르타고" 와도 의미있는 해외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어느 <br><br>시점부터는 군대 조직을 강화 시키는 목적으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br>당대 Roman의 군대 조직이라고 하면 혈연적 단위이었던 Comitia Curiata<br>(코미티아 켄투리아)를 기초 자원으로 활용하고 심지어 Etruria 치세 시기에는 <br>용병을 받아들여 군사적으로 봉사(용병)하는 대가로 시민권을 제공하기도 <br>했다. 왕정(王政)시대 이래 Urbs Roma은 기본적으로 혈연적인 3 개의 Tribus<br>(부족)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러한 부족은 다시 열 개의 Curia로 분할되며, Curia는 <br>다시 열 개의 <span style="COLOR: #ff0000">Gens</span><span style="COLOR: #ffcc00">(씨족)</span>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br>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계층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Patricci(귀족)들은 스스로를 <br>진정한 시민 혹은 고유의 Roma People이라고 일컫고 넓은 토지를 소유하며, <br>참정권을 독점하였고, 점차로 Plebs(평민)들과의 통혼을 절연하고, 봉쇄적이며, <br>배타적인 집단이 되어 갔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6 C 중엽 <span style="COLOR: #ffffff">Servius(세르비우스)</span> 치세<br>시기에 기존의<u> 씨족에 의한 부족 제를 폐지하고 분리시키기에</u> 이른다. 따라서<br>시민들을 20 개의 거주 단위 속에 등록시켜 지연적인 4개의도시 Tribus, 16개의 농촌 <br>Tribus(트리부스)의 경우 Census-도시의 기초 단위로 구성하였다. 이러한 <br>제도상의 특징은 Tribus 별로 시민을 등록시키고 "군대 소집과 징세"를 위한 것으로 <br><br>동시에 시민들의 재산과 연령 등을 면밀하게 평가하는 제도로서 이러한 제도를 <br>바로 Census(센서스)제도 라고 했다. 따라서 Urbs Roma 은 과거 씨족들이 기초한 <br>사회에서 공동체와 군대의 구성원들인 시민에 기초를 두는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던 셈이며, <br>이때 부터 <span style="COLOR: #ffffff">"재산 상태"</span>에 따라 시민들을 몇 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마다 일정 수의 <br>Centuriata(백인조)<u>를 조직하여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동시에 백인조마다 한 표의 의결권을</u> <br>부여하는 것으로 전체 시민들로부터 병사들을 소집하는 새로운 시민 군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br>바로 !! 이러한 시스템을 Hoplite Phalanx(중무장보명 밀집대)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br>군사 개혁은 당대에 모두 완성 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기원전 6 C 후반 동안 점차적으로 <br>이루어졌다고 평가되며, 기원전 5 C 초기에 거의 완성되지 않았나 싶다. 여기서 눈여겨 <br>볼 것은 도시 국가 형성 초기의 군대라면 가장 부유한 지주 귀족들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br>하였겠지만 복잡한 주변의 상황으로 전술의 변화의 가져오며 씨족들의 정치, 군사적 역할이 감소<br>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체로 강력하였던 왕정이 기원전 6 C 말엽 무너지고 있다는 <br>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당시 공화정으로 이행한 이유를 여기서도 부분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br>.<br>.<br>.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d836732e.jpg" width="500" height="36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d836732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hianti- Orcia Pieeza. Toscana<br></span><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0f4aa5b6.jpg" width="500" height="754.71698113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0f4aa5b6.jpg');" /></div>Gens ...<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e58262a3.jpg" width="500" height="338.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e58262a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ista Ruinas Romanas y Castillo Alba Fucens</span><br><span style="COLOR: #cc33cc"><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FONT-SIZE: 85%"><span style="FONT-SIZE: 130%">Turning Point</span> </span></span><br></span><span style="COLOR: #66ffff">01. Rex(왕)</span><br>Rex(왕)이라는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을 담당한 사제<br>(= Pontifex Maximus)로부터 출발되어진다. 초기 Urbs Roma <br>국가의 통일과 권력 그리고 권위를 상징하였으며, 종신직으로서 세습<br>되지 않고, 능력에 따라 대 귀족 가문의 <span style="COLOR: #ff0000">Paterfamilias<span style="COLOR: #ffcc00">(가부장들...)</span></span>에 <br>의해 귀족 중에서 선출되는 방식이었으며, 민회에서 확정된 듯하다. 또한 <br><span style="COLOR: #ffffff">"길흉 판정 권"</span>의 확보는 선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왕은 <br>신들의 지지를 확인(신탁)하여야 진정한 의미의 권한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br><br>그러므로 Urbs Roma의 왕은 Greece Polis 들의 왕들과 <br>달랐을 뿐만 아니라 왕권은 사실상 귀족들에 의해 제한 되었음을 <br>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선출되면 왕의 권한은 나름대로 막강<br>하였던 것이다. Rex(왕)의 사후에는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먼저 돌아<br>가면서 Interrex(간왕)를 선출하였고, 어차피 귀족 가문에서 배출한 <br>인물이 선출되는 방식이었기에 아마도 돌아가면서 한번 씩 집권하지 않았나 <br>싶다. 일단 왕이 선출되면 "민회의 시민"들은 창과 방패를 치켜들고 <br>함성을 질러 새로운 왕에게 Imerium(지휘권)을 부여하였으며, 충성과 <br>복종을 맹세하게 된다. 또한 <span style="COLOR: #ff0000">Pax Deorum</span><span style="COLOR: #ffcc00">(신들의 평화)</span>를 유지하는 고위 <br>사제이자 최고 행정 수반이기도 했다.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였고, 전쟁터에서는 <br>총사령관이 되었고, 대외적 업무(외교)에 관한 책임도 함께하였는데 <br>왕의 권한은 가정에서 가부장의 권한과 배치된다고 보면 적절하다. 당시 왕권<br>이라고 함은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에서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할 필요성이 있었기 <br><br>때문에 군사적 분야에서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행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br>귀족사회 씨족 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통제를 하는 권한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br>보여 진다. Rex(왕)는 필요하다면 원로원의 자문을 받을 수 있었고, 이러한 <br>권한들은 Etruria People 출신의 마지막 왕들에 이르면 그 권한이 강력해 진다. 애초 <br>왕정의 시작은 Romulus가 스스로 Rex(왕)이 되는데 동의한 100명의 가부장들로서 <br>원로원을 구성되었고,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을 <span style="COLOR: #ff0000">Patres Conscripti </span><span style="COLOR: #ffcc00">(소집된 가부장들...)<br></span>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초기 원로원은 씨족 장들의 모임이었을 뿐이었으나 그 후 <br>씨족사회가 많은 수의 가문들로 나뉘어 짐에 따라 원로원에서도 변화에 대응하여 <br>새로운 구성원들이 충원된다. 기원전 575-기원전 450 사이 어느 시점부터 300명 <br>정도의 규모가 관례화되었으며, Sulla(술라, 기원전 85-기원전 80)이전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br><br><span style="COLOR: #66ffff">02. Senatus(원로원)<br></span>원로원의 권고가 항상 왕에 의해 수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br>가장 중요한 임무는 역시 !! <u>왕이 자문을 구할 때 순수 자문 기관으로</u> <br>충실하게 응하는 것으로 공식적 입법권은 없었으나 원로원이 가문과 <br>정치적 영향력에서 뛰어난 종신 원로원 의원들의 협력 체 임을 감안하면 <br>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Rex(왕)에 의해서 거부권이 행사된다고 <br>가정하면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작동되었을 수도 있었고, 사실상 왕정 초기 <br>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왕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특권을 누렸던 것으로 볼 수 있다. <br><br><span style="COLOR: #66ffff">03. Curia(민회)</span><br>무장 가능한 전체 성년 남자 시민의 총회로서 민회가 있었다. 그러나 <br>시민들의 의사가 자유롭게 표출되거나 민주적인 의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br>로마 사회에는 <span style="COLOR: #33ff33">"혈연관계"</span>가 시민의 공적, 사적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에 <br>"가부장"은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기본적 단위이기도 한 Familia(가족)의 <br>구성원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지만 공동의 조상에 대한 결합된 가족들로 <br>Gens(씨족)의 통제를 받았다. Curia(쿠리아)회는 특정지역에 거주하는 씨족들로 <br>이루어졌거나 생각되는 단위로서 총 30개가 있었다고 한다. 10 개의 Curia가 하나의 <br>Tribus(족속)를 이루고, <span style="COLOR: #ff0000">Tities, Quirltes, Luceres<span style="COLOR: #ffcc00">( 3 족속)</span></span>이 전체 Populus Romanus<br>(로마 시민) 혹은 Quirltes를 구성하였다.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의사를 표현할 때에는 각각의 <br>Curia 단위가 되어 Curia에 한 표를 행사하였고, 각 Curia의 표는 구성원의 과반수에 <br>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투표를 통한 입법 활동은 할 수 없었다. Curia는 "혈연을 통해 <br>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민회로서 수동적인 기구이었을 뿐이다. "전쟁과 평화"에 <br>대한 선포, 국정 청취, 왕의 취임식, 왕에게 Imerium을 부여하는 의식, 충성과 복종의 맹세, <br>초기 혈연적 유대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Curia는<span style="COLOR: #ffffff">"시민의 유언과 양자 상속"</span>을 확인하는 <br>기능도 지녔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보적인 민회는 공화정 초기에 이르면 정치적으로는 유명무실해진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ec9cf356.jpg" width="500" height="37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ec9cf35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ircus Maximu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4118b5ab.jpg" width="500" height="610.9979633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4118b5ab.jpg');" /></div>Lucretia<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ef06a3c4.jpg" width="500" height="34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ef06a3c4.jpg');" /></div>Circus Maximus<br></span>.<br>.<br>.<br>Vicus Tuscus(비쿠스 투스쿠스) = Etruria Area<br>Esquilinus, Quirinalis, Aventinus, Palatinus Hills <span style="COLOR: #33ff33">→ Toscana<br></span><br>지도를 펼쳐보면 <span style="COLOR: #ff0000">Italian Peninsula</span>의 자연 환경은 단순해 보인다. Alps Mountain이<br>거대한 호(弧)를 그리면서 Northern-Italy &amp; Central-Euripe으로 나뉘고, 서쪽 끝에는 <br>Maritime Alps(메리팀-프랑스, 이탈리아 국경을 따라 약 190 km 뻗어 있다.)가 <br>"아펜티노 산맥"과 연결되며, 양대 산맥 사이에는 Po River 유역의 평원이 Adriatic Sea<br>(아드리아 해)를 향해서 이어지고 있다. Genova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Italian Peninsula가 <br>남동부 쪽으로 뻗어 있는데 남서쪽 끝에 오면 Italian Peninsula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br>두고, Sicilia와 분리되었다. "아펜티노 산맥"은 Italy의 등뼈로서 "메시나 만"을 가로 질러서 <br>Sicilia의 좀 더 높은 산맥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이러한 외형적인 통일성 밑에서 기후와 <br>토양의 다양성이 전개되며, 지역적인 차이가 가져다 준 커다란 혜택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br><br>지리적으로 Po River 유역은 유럽 대륙에 속한다. "아펜티노 산맥"은 산들이 <br>단순히 연결되었다기 보다는 다양한 산들이 복합적인 형태로 모여 있는 듯 보이고, <br>멀리 떨어진 계곡, 깊은 골짜기 그리고 높은 고원지대는 고립된 채 오래전부터 <br>목축 생활을 하는 공동체들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특별히 산맥의 서쪽면과 바다 사이의 <br>지역에는 농경 생활에 유리한 평원과 낮은 구릉들을 가진 3 지역 즉 !! Arno &amp; Tiber River <br>사이의 Etruria, Roma = Rome-Latium, Campania-Napoli 지방이 자리 잡고 있다. <br><span style="COLOR: #33ff33">Latium-Campania</span>의 비옥한 화산토는 일찍이 이곳에 경작이 시작되었을 때 풍성한 수확을 <br>보장 했던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 동쪽으로는 산들이 해안에 가까이 위치하고, 양떼와 <br>소떼로 유명한 "아풀리아 평원" 만이 유일하게 펼쳐져 있다. Italian Peninsula 내륙으로 흐르던 <br>강들은 비교적 짧았기에 항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주로 육로와 바닷길이 주요 통로가 <br>되었으며 좋은 항구들은 모조리 서쪽에 위치했다. 에컨대 <span style="COLOR: #ffcc00">Genova-Napoli</span> 대형 항로 선박들을 <br>위한 항구이고,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항구들에는 작은 선박들이 몰려 들었다. Venezia는<br>Roman Empire 이 후 세워진 도시이다. <span style="COLOR: #ff0000">Venezia</span>는 여러 가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해 주고 <br>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Italian Peninsula의 북동쪽으로는 Julian Alps(줄리안-<br>유고슬라비아 북서부와 이탈리아 북동부)를 가로지를는 용이한 고갯길을 넘어서면...Donau-<br>Sava River 유역으로 연결되고, 계속해서 나아가면 "헝가리 대평원과 흑해"가 나온다. 북쪽... <br>북서쪽에서 Fracce &amp; Swiss로 통하는 길은 상당히 높게 느껴지지만 통행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br>Pennine Alps(펜닌-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있는 알프스 산맥)의 고지대 통로마저도 민족 <br>이동이나 외부의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침입에 이용되었다고 하며, 남쪽으로는 Sicilia로 <br>연결되었는데 North-Afica와 인접되어 있고, Tunisia-Cape Bom(본 곶)이 가장 가깝게 위치한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f9329278.jpg" width="500" height="357.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f932927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alkan Mountains</span><br><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deea365f.jpg" width="500" height="37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deea365f.jpg');" /></div>Angel Carrying Fasces<br></span>.<br>.<br>.<br>자 !! 이제부터 마치 미궁(迷宮) 속 같은 Italian Peninsula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br>풀어 나가도록 하겠다. 하나의 국가가 성립되면서 어느 곳이나 마찬가로 건국 신화 또한 <br>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건국 신화라고 하면 양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br>해야 하는데 은폐하는 측면도 강하게 작용하지만 사실적인 부분들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서 <br>일부 섞이게 됨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보면 Roma People 들도 <br>예외일 수 없이 기원전 350년 자신들의 도시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말해주는 신화을 만들어<br>내었다. <span style="COLOR: #ffffff">"암-늑대"</span>가 쌍둥이 형제를 젖을 먹여 길렀다는 신화가 말해주는 것은 당대에 <br>이미 !! 원시적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Italian- <br>Peninsula가 비교적 낙후된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br>Romulus(로물루스) &amp; Remus(레무스) 시대 보다 먼 과거로 돌아가 소급하여 찾으려 <br>했던 점에 비추어 <span style="COLOR: #ffcc00">"국가라는 틀"</span> 속에서 그 이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거나 적어도 최소한의 <br><br>문명도 없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br>진정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North-Italian Peninsula에 근접된 현재의 <br>서-유럽을 이루고 있는 <span style="COLOR: #33ff33">France &amp; Deutschland</span> 지역에도 역시 여러 족속과 <br>문명의 불빛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기에 전방위 적으로 <br>역사적 인식을 함양해야 함은 당연하다. 역사의 기록은 전적으로 승리자에 의해 <br>남겨지는 흔적으로서 어느 시기부터 Roma People 들은 주변의 인근 족속들을 통합<br>하더니 절대 강자로 올라서는데 결과적으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적 신화도 함께 <br>그들의 역사 속에 압축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Italy Peninsula 전체를 아우르는 <br>절대 패권자로의 완벽한 위치는 갖고 있지는 않았고, 지역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br><br><span style="COLOR: #33ff33">→ Lgurians-Veneti-Umbrians-Piceni-Sabines-Samnites-Latin People</span>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15ef03c4.jpg" width="500" height="32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15ef03c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Wolf ...</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173362b0.jpg" width="500" height="515.46391752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173362b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omulus &amp; Remus<br></span>당연하지만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8 C</span> 문명의 중심지는 동부-지중해의 Persia &amp; <br>Egypt이었다. Levant(동부 지중해)의 Phoenicia People 들은 North-Africa <br>연안에 "카르타고"를 그들의 교역 기지로서 건국(속국)하였으며, 지중해의 <br>북쪽과 남쪽에는 역동적이며 창의적인 Greece Polis 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br>Phoenicia People들이 Sicilia, Southern-Italian Peninsula까지 식민지를 개척<br>하고,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Italian Peninsula 나머지 지역에서는 동방의 <br>문화에 견주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반도 중부"에는 <span style="COLOR: #ffcc00">Etruria People</span> 들이 인근 족속<br>들에 비해 선진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Sicilia를 중심으로 혼란스럽게 <br>널려 있던 Greecce의 식민지 즉 !! Magna Graecia(마그나 그라에키아)가 공존하면서 당대 <br>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참고로 Sicilia(Siracusa)의 경우 "알렉산드리아"와 <br>더불어 Hellenism 세계 최대 도시 이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마그나 그라에키아"는 <br>쇠퇴기에 접어든 Greece 본토에서 보다 발전된 문명을 누리고 있었던 것 같다. 즉 !! <br>외연적인 Greece 식민지이었을 뿐 정확하게 인식하면 Italian Peninsula 지역으로 옮겨온 <br>Greece 문명이었던 셈이다. 또한 "마그나 그라에키아"는 Greece 본토의 장점과 단점를 <br>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장점 → 지중해 무역을 통한 경제 번영과 문명의 발전을 의미했고, 단점 <br>→Polis 간에 분열과 다툼이었다고 정리될 수 있으며, 이러한 모든 것은 Roman의 발전에 <br>좋은 양분이 되어 주었던 것이고, 가장 확실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선진 문명을 전해주면서도 <br>자체 통일을 이루지 못한 Italian Peninsula에 정치적인 위협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br>그렇지만 점진적으로 접촉의 빈도가 증가하게 되면서, Roma People 들은 스스로 Greece <br>문명에 포함되고 싶어 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Greece 문명을 답습한 표준화된 국가 체제를 갖기를 <br>원했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목표를 달성 하는방법 가운데 하나로 Roman &amp; Greece People이 <br>만나는 모든 경위를 "Greece 신화"와 공통으로 다룰 수 있는 건국 신화 하나를 채택하는 것이었다.<br><br>그래서 탄생한 것이 <span style="COLOR: #ff0000">Troy &amp; Aeneas</span>의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따라서 <br>이러한 시점이 Old Greece 세계가 Urbs Roma의 새로운 질서로 변형되기 <br>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전승에 의하면 Italian Peninsula 거의 대부분 지역은 <br>오지나 다름없었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대의 상황에 대해 한줄의 <br>문자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나 <span style="COLOR: #ffffff">"일곱개 언덕을 중심으로..."</span> Urbs Roma가 탄생<br>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Persia War &amp; Alexandros의 동방 원정이 있은 후 Greece <br>문명은 본토를 벗어나 동부-지중해 전역에 문명의 확산을 도모하였으며, 비록 <br>사람들이 발붙이는 모든 땅을 포괄적으로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0b470d2.jpg" width="500" height="466.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0b470d2.jpg');" /></div>Magna Graecia<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57d1062.jpg" width="500" height="37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57d106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amnium-Aglianico del Taburno Bue Api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2d846808.jpg" width="500" height="420.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2d84680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 Greece City-States' Maritime Power In General Declined During The Roman</span><br></span>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유럽 문명을 키워내는 것은 Greece 문명의 <br>몫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 Greece가 오래전부터 Orient 문명을 <br>받아들여 좀 더 향상된 문명을 이루었듯이 지중해 서쪽의 중심 지역이였던 곳에서 <br>앞서 언급되었듯이 작고, 놀라운 변화들이 감지되었는데 Italian Peninsula<br>(중서부 지역) Tiber 강변의 Latium(라티움) 평야에 세워진 작은 도시 국가에서<br>부터 마치 사실처럼 가공되었거나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예컨대 <br>왕정(王政)의 마지막 왕이었던 <span style="COLOR: #66ffff">Lucius Tarquinius Superbus</span> 시절 도시 Urbs Roma의 <br>크기는 동-서 48 km, 남-북 24 km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Italian- <br>Peninsula에서 조차 보잘 것 없는 세력에 불과하였다. 또한 이러한 시기 고대 역사가 혹은 <br>연대기 작가 들에게마저 관심을 끌만한 지역도 아니었고, 더구나 구성원들은 대부분 <br>문맹이어서 자신들의 역사 조차도 기록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 로마에 관한... <br>이야기는 모두 민간에 전승 되어진 구전과 신화, 허구 따위를 모아 놓은데 불과 한 셈이었다. <br><br>주로 사용된 언어는 당시 Italian Peninsula내의 모든 종족들이 사용<br>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움브리아어 + 오스카어, 라틴어와같은 방언이었으며, <br>그중에서 오스카어는 기원전 1 C 까지 Italian Peninsula 중부와 남부의 <br>공식 언어이었다고 한다. Urbs Roma의 전설적인 이야기에 온전히 의지하면 <br>기원전 1184, 10년간 저항해온 Troy → Greece에 의해 장악됨으로써 역사의 흔적으로 <br>남겨졌고, 미(美)와 사랑의 여신 Venus(베누스) = Aphrodite(아프로디테) &amp; <br>Anchises(안키세스)의 아들이자 Troy 왕족이기도 한 Aeneas(아이네아스)가 부친과 <br>함께 초-자연의 안내를 받아 불타는 Troy를 빠져 나오게 된다. 이제 Aeneas는 <br>같은 시대 인물 <span style="COLOR: #ff0000">Odysseus</span>와 마찬가지로 길고 긴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운명의 <br>장난이었는지 모르나 배가 태풍을 만나면서 North Afica Carthago 해안까지 떠밀려 <br>왔고, 이때 Carthago 여왕 Dido(디도)가 마침 Aeneas 일행을 환대 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br>묶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곧 !! 짧지만 굵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br>그렇지만 도시를 건설해야만 했던 운명이 Aeneas를 계속 방랑의 길로 내몰아 그는 어쩔 수 <br>없이 떠나야만 했다. 한편 그가 떠난 빈자리 슬픔을 이기지 못한 Dido 여왕은 자결하게 <br>되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이것이 훗날 <span style="COLOR: #33ff33">Roman &amp; Carthago</span>의 반목의 "씨앗"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d67113f.jpg" width="500" height="36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d67113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rthago</span><span style="COLOR: #ffcc00">Antoninus Pius Thermen<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f9b0463.jpg" width="500" height="66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2f9b046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Magna Graecia, Cosenza-Reggio Calabria-Taormina</span><br>어찌되었든지 Urbs Roma의 건설에서부터 공화정 초기의 역사는 지극히 <br>모호한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중요한 역사서이기도 한 <br>Livius(리비우스)의 "로마 사"와 Dionysius(디오니시우스)의 "고대 로마 사"가 구전과 <br>전설에 입각한 신빙성 없는 사료들을 근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그 내용이 <br>의도적으로 가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로로 유랑자들이 Septem Montes<br>(셉템 몬테스, 일곱개 언덕)에 도착되었는지 확인된 기록도 없다. 전승에 따르면 Urbs- <br>Roma는 3 번의 시기에 걸쳐 이룩되었다고 하는데 Aeneas(아이네아스)가 Carthago를 <br>떠난 후 여러 해를 방랑한 후 Latium 평야지역에 도착하여 그곳의 실권자 Latinus(라티누스)를 <br>만났으며, Rex(왕)의 딸 Lavinia(라비니아)와 혼인에 성공하며, <span style="COLOR: #ff0000">Lavinium</span><span style="COLOR: #ffcc00">(라비니움)</span>을 건설<br>하였고, 그의 아들 Ascanius(아스카니우스) 또한 <span style="COLOR: #ff0000">Alba Longa<span style="COLOR: #ffcc00">(알바롱가)</span></span>라는 도시를 건설<br>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span style="COLOR: #ff0000">Romulus</span>에 의해 Urbs Roma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br>건국 과정은 Greece에서 들여온 <span style="COLOR: #ffffff">"분리되어진 집"</span>이라는 뜻을 가진 <span style="COLOR: #ff0000">Apoikia<span style="COLOR: #ffcc00">(아포이키아)</span></span>라는 식민시<br><br>즉 !! Polis Model과 일치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도시의 12대 <br>Rex(왕) Numitor(누미토르)는 아우 이자 야심가이기도 했던 Amulius<br>(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면서 내쫓기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Rhea- <br>Silvaia(레아 실비아)라는 딸이 있었다. 여기서 Amulius는 그녀가 차후 <br>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을 아이를 갖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녀를 아예... <br>"처녀 사제"로 만들었는데 졸지에 처녀 사제가 된 <span style="COLOR: #33ff33">Rhea Silvaia</span>는 곧 !! <br>죽을 운명에 이르렀으나 "신의 유혹"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중에게 <br>신뢰감을 얻어 간신히 죽음만은 묘면했다. 자 !! 이렇게 되어서 "전쟁의 신" Mars<br>(마르스)와 처녀 사제 사이에서 쌍둥이 Romulus &amp; Remus가 태어나게 되었지만 쌍둥이<br>들은 바구니에 넣어져 곧 바로 Amulius에 의해 Tiber River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br>표류하던 쌍둥이는 공교롭게도 극적으로 어미늑대에게 구조되어 늑대의 젖을 먹고 성장<br>하게 되었고, 이 후 Faustulus(파우스툴루즈)라는 반-유목민에게 발견되면서 왕의 <br>혈통을 갖고 태어났으나 양치기 아들로서 성장하였으며, <span style="COLOR: #ff0000">Plutarchus</span><span style="COLOR: #ffcc00">(플루타르코스)<br></span>영웅전의 개념대로 이해하면 비천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Urbs Roma는 <br>간단히 말해서 살인 위에서 세워진도시이며, <span style="COLOR: #ffffff">"Asylum(피난처)"</span>를 구하는 자들에 의해 <br>세워지게 된 도시 라는 의미도 갖게된다. Urbs Roma의 건국 신화는 Persia Cyrus의 탄생 <br>비화와 대부분 일치하기도 하지만 Romulus에 의해 선택된 Palatinus 언덕이 Roman <br>최초로 촌락이 형성된 곳이라는 사실들이 점차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유적들이 발견됨으로써 <br>신빙성을 지닌 사실들로 증명되어진다. 또한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753 → 04월 21일</span><span style="COLOR: #ffcc00">(건국일)</span> 이전에도 <br>사람들이 살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흔적들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이 지역에 가장 오래된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3ab96a93.jpg" width="500" height="37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3ab96a9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alatine Hill...</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3bad46ef.jpg" width="500" height="385.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3bad46e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Lapis Niger...</span><br>"공동 묘지"들은 기원전 11 C-기원전 10 C 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br>사실을 믿어야 한다. Urbs Roma에서는 오래전부터 <span style="COLOR: #ffffff">"지하 묘지 = 장례 유물" <br></span>들을 가장 오래된 거주 흔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Froum 지역의 상당 <br>부분을 차지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잔해들이며, 철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br>또한 다수 발견 되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고고학 적으로 기원전 13 C-기원전 <br><span style="COLOR: #ffffff">12 C 중-청동기 시기부터</span>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점으로서 <span style="COLOR: #33ff33">Macedonia</span>의 상인들과 식민시 <br>개척자들이 "아펜티노 산맥"에 출몰하였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어찌 되었거나 촌락<br>들은 가파른 비탈면을 따라 물이 있는 곳 근처에 생겨났으며, Capitolinus 언덕의 돌출부와 <br>Forum Romanum을 굽어보던 Tabularium(타불라리움)의 반대쪽 지역에서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br><br>Palatinus 언덕은 역사 속에서도 의미 있는 장소로서 존재하였고, <br>종교적인 장소이었으며, 최고의 주택가마저도 이곳에 형성되었다. 훗날 <br>대략 그곳에 살던 몇 사람을 예로 든다면 <span style="COLOR: #ffcc00">Octavianus-Cicero-Marcus Antonius-<br>Crassus</span>등이 이곳에 자신의 저택을 지었고, 말 그대로 제국의 중추적인 장소<br>(신성한 곳)가 되었다. 또한 앞서 언급되었듯이 Septem Montes(일곱 언덕)에 형성된 <br>도시가 고고학적 증거와 유사한 일치를 보인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는 사안이라는 <br>것만큼은 분명하다. 참고로 당시 Alba Longa의 시민들을 비롯하여 Latin 족속 들에게는 <br><span style="COLOR: #ffffff">"신성한 봄"</span>이라고 하는 관습(종교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조상의 땅에는 자기 <br>몫이 없으므로 새로운 땅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그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여 주는 곳<br>(도시)이나 전쟁으로 정복한 땅을 자신들의 국가로 여기고 그곳에 정착하기도 했다. <br>또한 이러한 전통에 따라 Latin People 들은 촌락의 성원 들이 증가하면 새로운 개척지를 <br>찾아 가도록 했는데 "신성한 봄"이라는 말은 <u>봉헌의식을 치르던 계절을 차용 한 것으로</u> 어쩌면 <br><br>건국신화에 관한 수많은 전설들은 놀랍게도 어쩌면 역사적 사실을 <br>담아내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Roma People들의 원초적 고향으로 <br>알려진 <span style="COLOR: #66ffff">Troy</span>의 경우도 전설 상에서만 존재하다가 고고학자들이 19 C에 이러한 <br>지역을 발굴하면서 허구가 아닌 사실로 드러났지 않은가 !! 전설 속에서 Aeneas의 <br>눈길이 닿은 곳은 Tiber River 어귀 에서 24 km 떨어진 장소 즉 !! 일곱 개의 언덕<br><span style="COLOR: #ffffff">(기원전 7 C)</span>이기도 했다. 이곳은 해상 교역로에 직결되는 항구도 없었으며, 해발 50 m <br>언덕 기슭의 습지로 Tiber River가 자주 범람하는 곳으로서 정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br>먼저 물을 빼야만 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장래 황제들의 주택이 들어설 Palatinus <br>언덕에는 기원전 1000년 즈음 그곳에 살기 시작한 반-유목민들과 나무로 지은 움막들이 있었다. <br><br>또한 지속적으로 그곳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주었는데 <br>무엇보다도 이곳의 커다란 잇-점은 침입자들에 대한 천연적인 방어 시설이 <br>되어 주었다는 사실로서 Tiber River 계곡은 비옥한 농경지 Latium 평야로 이어졌고, <br>북쪽에 있던 Etruria라는 또 다른 지역을 이어주었던 다리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br>주목되는 곳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span style="COLOR: #ff0000">Romulus &amp; Remus</span>는 작은 무리를 이끌고, 자신들이 <br>버려진 장소에서부터 도시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먼저 방어시설(성벽)을 쌓았으며, 대략...<br>이러한 시기부터 <span style="COLOR: #ffcc00">"권력의 단맛"</span>을 알게 된 Romulus &amp; Remus가 변해 가고 있다는 <br>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새로운 도시의 주인으로 누가 더 적합할까 !! 전승에 <br>의하면 Jupiter 신은 그곳의 수호신에게 결정권을 넘겼다고 하는데 Romulus &amp; Remus는 결국<br>"새가 날아가는 방향과 숫자"에 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암시 받게 된다. 그래서 Romulus-<br>Palatinus VS Remus-Aventinus 언덕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사실 "레무스가 로물루스"보다 <br>우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Romulus가 먼저 Palatinus 언덕을 중심 지역으로 정하고 요새화 <br>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성한 경계선이 그어졌으며, 그것이 바로 !! 사각형의 <span style="COLOR: #ff0000">Roman Quadrata</span><br><span style="COLOR: #ffcc00">(로마 콰르라타)</span> 이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Remus가 재빨리 침범함으로써 <br>신성성을 부정하게 되었고, Romulus는 즉시 !!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고 그 장소를 4개의 돌기둥으로 <br><br>둘러싸인 신성한 "울안의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도시는<br>"존속살인" 위에 세워졌으며, 이제 도시를 채울 성원들이 필연적으로 <br>요구되었는데 Romulus는 성벽 안에 신전을 세우고, 그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br>체포를 면할 수 있다고 선포하여 인근 족속들의 주변의 도시에서 망명한 <br>자와 낙오한 자 들을 끌어들였다. 즉 !! 원하기만 하면 모두 받아들여 시민으로 <br>인정 했던 것이다. 반면에 변칙적인 방법에 의해 남성들을 채워졌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br>여성들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무법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이었고, 그것은 <br><span style="COLOR: #66ffff"><span style="COLOR: #66ffff">"사비니 여인의 강탈"</span></span>이라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다. 사실 !! 기원전 753년 04월 21일<br>이라는 숫자도 사실상 500년 후 역사가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된 계산 이 후 나온 숫자에 불과 <br>하다는 점에 비추어 실제 있었다고 인정 하기 어렵지만 "사비니 여인의 강탈" 이라는 고대적 <br>사건이 개인적으로 흥미롭기만 한 이유는 Korean Type의<span style="COLOR: #ffffff">"보쌈과 일맥상통"</span>하는 것이기 때문이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48a88826.jpg" width="500" height="222.77777777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48a8882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lessandro Sabini</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47a6fd98.jpg" width="500" height="194.2286348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47a6fd98.jpg');" /></div>.<br>.<br>.<br><span style="FONT-SIZE: 85%"><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Septem Montes = Seven Hills of Rome</span> <br></span><span style="COLOR: #33ff33">Aventine-Aventinus, Caelian-Caelius, Capitoline-Capitolinus <br>Esquiline-Esquilinus, Palatine-Palatinus, Quirinal-Quirinalis, Viminal-Viminalis <br></span><br>Palatinus-Latin People + Quirinalis-Sabines 정착과 같은 역사적 <br>장면들...만으로 Urbs Roma의 창건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Latium은 <br>대략 1,000,000년 전 화산이 폭발하여 생겨난 응회암과 화산재를 주요 기반 층으로 <br>하는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충적토로서 형성된 편평한 바닥 위의 완만하게 <br>경사진 계곡으로 넓은 굴곡을 그리며 강이 흐른다. 전승으로 보면 Romulus에 의해 <br>초기 시대의 "도시의 틀" 이 형성되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에 의해 정치, <br>종교적 행위로서 정확하고 엄숙한 의식에 따라 실행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br><br>암소 한쌍에 멍에를 씌우고 청동 쟁기를 잡고, 위대한 쟁기질을 했다는 <br>사실로서 이때 땅 바닥에 생겨난 선(線)이 Urbs Roma의 경계선이기도 한<br><span style="COLOR: #ff0000">Pomerium</span><span style="COLOR: #ffcc00">(포메리움)</span>이 되었다. 또한 경계선 안에 위치한 가장 높은 곳(언덕)에 <br>수호신의 거처가 마련되었고, 동-서를 이어주는 Decumanus(데쿠마누스) <br>거리와 남-북을 관통하는 Cardo(카르도) 두 개의 도로가 만들어짐로써 그렇게 구획 <br>된 종교적 관념의 영역은 이상화되어졌으며, Urbs Roma Type의 "아크로폴리스"<br>이기도한 Capitolinus 언덕에 Etruria People의 가장 위대한 신이었던 Jupiter(유피테르)-<br>Juno(유노)-Minerva(미네르바) 신전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Urbs Roma의 발달은<br>Central-Italy In Etruria- People로 부터 비롯되어졌다는 사실이 실제로 그 어떤 증명된.. <br>사실들 보다 확실해 보이는데 아마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Etruria People 한 사람에 <br>의해 주도적으로 초기 "국가의 틀"이 형성 되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현 시점에서 가능해 보인다. <br><br><span style="COLOR: #ffcc00">Etruria People</span>에 대해서 고대 역사가 Herodotos(헤로도토스)는 Persia- <br>Empire의 영향을 받은 "리디아"의 Tyrrhenus(티레누스)가 일단의 족속들을 인솔<br>하여 서쪽으로 이주하였다고 말한다. 반면에 Diogenes(디오게네스)는 그들이 <br>살던 애초의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이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주장은 고고학적 증거를 <br>토대로 분석된 것으로 Vulci(불치)에 있는 <span style="COLOR: #ffffff">Villanova(빌라노바)</span> 문화를 바탕으로 한 철기 <br>시대 민족이라는 사실이 배경으로 설명 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br>기원전 1200년 경 동부 지중해를 주름 잡았던 바다의 족속 그러니까 해적 무리들 중 "투르샤" <br>족이 있었는데 기원전 6 C Asia Minor 해안에 있던 "램노스 섬" 사람들의 언어와 유사한 <br>언어 체계를 사용했음을 볼 때 그들 일부가 청동기 시대 말기 Toscana로 이주했을 <br>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 <br>추정하면 Etruria People들은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8 C-기원전 7 C</span> 역사의 수면위에 떠올랐다고 확인 된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5a82cae8.jpg" width="500" height="739.82737361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5a82cae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lutarch-Alcibiades<br></span><span style="COLOR: #66ffff">Boustrophedon(부스트로페톤) 서법 →&nbsp; <br></span>마치...소가 밭 고랑을 갈듯이, 왼 쪽에서 오른 쪽으로 그 다음 <br>줄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식을 일컫는 고대의 좌우 <br>교대 서법이며 읽을 때는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만 하는 비문(석비)<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61f52498.jpg" width="500" height="33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61f5249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Karkemish ...</span><br><span style="COLOR: #66ffff">Karkemish →</span> Hieroglyphic Luwian-Read Boustrophedon <br>Into the Faces of Animals or Body Parts-Some Exceptions-<br>Starting at Top Right—of the Left Stele-Lines 1 3 5 7 9 Read Right–to–Left<br><br>무엇보다도 그들은 건축의 귀재였으며 고대 Urbs Roma의 장점으로 꼽히는<br>대규모 <span style="COLOR: #66ffff">Colaca Maxima(하수시설)</span>은 물론이고, Greece People 들도 경탄해 마지 <br>않는 수도관을 주도적으로 건설하였고, Tiber River를 걸어서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br>했지만 당시 !! Italian Peninsula에서 가장 번영한 Etruria-Campania를 연결시켜 <br>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 했을 것이라고 판단(정치, 경제, 군사) 되는 최초의 "목조 다리" <br><span style="COLOR: #ff0000">Pons Sublicius</span><span style="COLOR: #ffcc00">(수브리키우스)</span> 마저도 그들이 이룬 성과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 석조 <br>다리도 아니고 목조 다리 이었을까 ? 그 이유는 유사시 적들과 전투를 치루면서 파괴<br>하기 용이하고 쉽게 복구가 가능 했기에 목조다리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 Italian- <br>Peninsula의 통일을 이루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었을 때 비로써 석조 다리가 들어서게 <br>되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점은 어떻게 보면 군사적인 충족 요건으로 <br>Etruria People들의 지배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라는 점인데 그들은 과학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br>문화적 침투로 애당초부터 지배 영역을 넓혀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보적 <br>문명의 우수성은 결과적으로 문명을 발달시키는 발판이 되어 주었으며, 이미 !! 경제, <br>문화 적으로 당대에는 별다른 저항없이 식민지화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일련의 <br>집단에 의해 <u>정치적으로도 완벽한 지배 구조를 확립</u>(기원전 616)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이러한<br><br>시기는 Forum 지역을 안정시킨<u> 건조 공사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u> 하였다. Forum- <br>Romanum을 중심으로 모든 Forum 들이 연결(소시장, 약용식물과 야채시장, 생선시장) <br>되었고, 북-동쪽 또 다른 길은 Tiber 계곡으로 연결되었는데 Tiver River 하구 근처 <br>"오스티아"의 통하는 <span style="COLOR: #ffffff">"소금의 길"</span>로서 Ostia는 말하자면 "소금의 도시"로 불리던 곳으로서 <br>당시 재정적 이유로 중요하게 다뤄지던 전략적 상품의 산지이기도 했다. 기원전 6 C → <br>Roman 최초의 정치적 혁명은 Rex(왕)을 몰아내고, 자유를 획득한 것 이었으며, Urbs Roma는 <br>공화정을 확립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는 듯 했고, Rex(왕)의 축출이 <br>이루어지던 시기가 바로 !! 모든 면에서 촌락에서 도시화 되어 가는 첫 번 째 단계로이기도 <br>했으며 또한 Roman의 초기 역사 전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하였다. <br>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일인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감은 표면적으로 <span style="COLOR: #ff0000">Octavianus</span>에 의해 <br><br>제정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지속 되었고, 이러한 자유이념을 지키기 위해 <br>귀족들은 주목할 만 한 원칙에 합의 한다. 그것은 왕정(王政)이 가진 고질적인 <br>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권력이 한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서로를 <br>독점적 권력으로부터 방어하도록 한 것으로 궁극적으로 두 명의 행정관에게 <br>권력을 분산시켰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혁신은 과거와 완전하게 단절<br>시킬 정도의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span style="COLOR: #ffffff">"군주제"</span>는 철폐되었으나 몇 가지 <br>것들은 여전히 남겨져 있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정치체제이기도 한 "Republic<br>(공화정 = 공화국)"의 제도가 갖는 연원은 아주 오래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br>이러한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 <br>"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국가를 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초기 Republic(공화정)은<br>근대적 의미의 공화정이라기보다 귀족들이 주도한 <span style="COLOR: #ffffff">"과두 정치"</span>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br>점에서 주목된다. 권위에 의한 수탈에 항거한 혁명 이 후에도 평민들은 군주에게 압제를 당한 <br>것처럼 귀족들의 독재에 시달리게 된다. Rex(왕)의 색깔이라 할만한 <span style="COLOR: #cc33cc">"Royal Color"</span>로 Toga<br>(토가)의 단을 대는 것은 그들의 최고 행정 고위직의 특권이었다. 고대 도시국가에서는<br>대체로 모든 권한이 세분화 되어 있지 않았고, 권력의 집중을 가져 왔는데 Republic(공화정)에서 <br><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bf302e9c.jpg" width="500" height="66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bf302e9c.jpg');" /></div>Andalucia<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6dda4f48.jpg" width="500" height="31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6dda4f4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 Aqueduto dos Pegoes in Tomar-Portugal<br></span>집정관은 군사령관이었으며, 법관이자 수상이기도 했고, 주교(사제)가 <br>되기도 하였다. 귀족을 중심으로 한 최고위층은 "점이나 주술, 점성술"을 <br>신봉하여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이 "신의 후손"<br>이라는 주장까지 일삼게 되었으며 공히 Urbs Roma 사회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전승<br>되어온 의례에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Tarquinius에 의해 남겨지고 <br>Jupiter 사원에 보관된 <span style="COLOR: #ff0000">Sibyl</span><span style="COLOR: #ffcc00">(시빌)</span>의 신탁이라고 불리던 신비로운 예언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br><br>어찌되었든지 Roma People 들은 예언서를 소중하고, 엄격하게 보관 <br>했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Republic에 심대한 재앙이 예고된 경우, 그 어떤 <br>대안도 모조리 사라져 버렸을 때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희미한 Greece Alphabet<br>으로 된 문자를 손가락으로 확인하며, 예언을 해독하였다고 전해진다. <br>기본적으로 왕정 통치 → 과두 체제로의 접근은 약화되었던 Gens을 바탕으로 한 <br>귀족 가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잘 알려진 전승에 의하면 Roma People <br>가문이 중심이 되어 Etruria 출신의 거만한 왕이었던 <span style="COLOR: #66ffff">Lucius Tarquinius-Superbus<br></span>(타르퀴니우스)의 "왕정(王政)"에 대항하였으며, 그의 아들 Sextus에 의해 <br>귀족 부인 Lucretia(루크테리아)가 강간당하자 Lucius Iunius Brutus(브루투스)를 <br>중심으로 귀족 가문들이 봉기하여 왕을 추방하고 왕정을 종식되었던 것으로 <br>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u>상업적 이해 관계자들에 대한 토착 귀족들의 항거이었으며</u>, <br>기원전 525년경에 Etruria People들의 느슨했던 도시 연맹이 "캄파니아" 지역의 <br>도시 Cumae(쿰마이)를 장악하려다 군사적으로 심각한 패배를 당하면서 본의 아니게 <br>활발하게 전개되던 Etruria &amp; Campania 간의 육로 통상을 단절시켰고, 이러한 <br>시기에 “삼니움인”들과 그 밖의 산악지대 족속들이 Latium 지역을 침입하기에 이르렀는데 <br><br>이런 상황은 Etruria의 영향력 하에 경제적으로 확장되던 <br>Roma People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br>이러한 분쟁은 공화정 초기 신분 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로서 작동<br>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가문을 이끌고 있었던 귀족들은 <br>번영의 시기에는 참을 만 했으나 점차로 경제적인 환경이 부정적인 <br>상황에 노출 되자 의식하지 않았던 Rex(왕)의 억압적 통치에 대해 불만을<br>토로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자신들의 <br>권리를 되찾으려 집단적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Rex(왕)를 <br>추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정(王政)의 붕괴는 어느 날 갑자기 <br>특정한 사건에 의해 촉발 되었다기보다는 경제적 침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br>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이러한 시기 귀족 계층은 자신들이 헌신하는 <br>목표가 충돌하는 과정에 정치적 원리를 만들어 내었고, 일차적으로 국가 혹은 <br>좀 더 커다란 사회 보다는 Gens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다. 대체로 귀족들은 <br>동료나 가족(= 친척)들을 수행원으로서 가능한 장소에서 함께하였는데 이들은 하나의 <br><br>가문에 포함되어 있었고, 모두 같은 <span style="COLOR: #ffffff">"선조의 후손"</span>이기도 했다. <br>그래서 이러한 비-공식적인 Network 내의 성원들은 지속적으로 <br>정치 권력, 신분, 국가에 핵심적인 위치를 점유하였으며, 존속<br>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span style="COLOR: #cc33cc">Gens Julius<span style="COLOR: #33ff33">(율리우스)</span>-Claudius<span style="COLOR: #33ff33">(클라우디우스)</span> <br></span>일족의 경우 말하자면 공화정 시기부터 Urbs Roma의 황제 계보를 <br>구성하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고대 Etruria People 왕정(王政)<br>시대에서는 명성 혹은 명예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Rex(왕)에게 집중된 <br>"권력"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 → 공화정으로 옮겨가서도 <span style="COLOR: #ffffff">"권력"</span>이 <br>Roman Republic(공화정)의 정치 구조에서 지배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던 셈이다.<br><br>예컨대 Roman의 권력(공권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span style="COLOR: #ff0000">Fasces</span><br><span style="COLOR: #ffcc00">(파스케스)</span>는 1.5 m 길이의 "느릅나무 혹은 전나무" 막대기를 여러 개 <br>묶은 다발인데 막대기 다발로 도끼를 감싸고, 붉은 색 가죽 끈으로 묶었다. <br>이러한 막대기 다발이 상징하는 <span style="COLOR: #ffffff">"전제 주의"</span>는<span style="COLOR: #ffffff">"Fascism(파시즘)"</span> 이라는 용어 <br>속에 근대에 이르러서도 살아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 Etruria Rex(왕)<br>들이 사라진 이 후에도 Imperium(임페리움)의 권력은 존속되었고, Roman의 <br>입장에서 그것은 정복을 합법화하고 정당화 시켜준 요소이기도 했다. 또한 <br>Pons Subliclus(수블리키우스) <u>목조다리의 전설적 전투 신화는</u> 모든 것의 출발<br>이면서 그에 걸 맞는 역사적 흔적으로 작동되었다. 훗날 Gallia = Caesar 병합이든지, <br>Dacia(루마니아) = <span style="COLOR: #cc33cc">Trajanus</span> 침공이든지 황제의 Imperium은 항상 정의의 실행<br>이라는 명예로운 외관 뒤에서 거침없이 실행되었고 Republic(공화정) 초창기부터 모든 <br>공직은 위대한 Patricci(귀족)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그들의 "순혈주의"가 강조 <br>되었으며, 그들의 말에 의하면 Etruria People의 왕정 시기 부터 정치적 직무를 수행하는 <br>자리에는 자신들이 가장 적합 하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또한 신들과 통할 수 있는 <br>것은 오직 Patricci 뿐이며, 그렇기에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Patricci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7426ffdd.jpg" width="500" height="679.50169875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7426ffd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First Consul-Brutus</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755cd0a8.jpg" width="500" height="38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755cd0a8.jpg');" /></div><span style="COLOR: #66ffff">Republic of First Consul / Lucius Iunius Brutus<br></span>(루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 기원전 545-기원전 509<br><br>01. Romulus → 기원전 753-기원전 716 / Remus<br>02. Numa Pompilius(누마 폼필리우스) → 기원전 715-기원전 673<br>03. Tullus Hostilius(툴루스 호스틸리우스) → 기원전 673-기원전 641<br>04. Ancus Marccius(앙쿠스 마르키우스) → 기원전 641-기원전 616<br>05. Tarquinius Priscus(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 기원전 616-기원전 579<br>06. Servius Tullius(세르비우스 툴리우스) → 기원전 579-기원전 535<br>07. Tarquinius Superbus(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 기원전 534-기원전 459<br>.<br>.<br>.<br>건국이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서 <span style="COLOR: #ff0000">Roman Republic</span><span style="COLOR: #ffcc00">(공화정)</span>은 더 많은 사회적<br>격변과 시민 대다수의 시민권 확대 요구, 법의 개혁에 지속적으로 대응했고,<br>혁신적인 변화의 몸부림을 치게 된다. 보수적이었으나 유연하기도 했던 Roma People <br>들은 실효성 있는 것들을 택하였으며, <u>실패에 적응하고, 과잉이 되어버린 것도</u> 다소 <br>있었으나 그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신성하게 여기며, 자신들의 영역 안에 소중하게 보관하게 <br>되었고 선조들의 관습에 충실 하게 따르는 것이 다른 어떤 방식보다 현명함과 동시에 <br>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당대 Roman Republic(공화정)은 내전과 혁명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br>파괴되던 Greece Polis들과 비교하여 말하자면 Roman Republic이 세워진 뒤에도 처음 100년 <br>동안 온갖 소요와 시민들의 피가 거리에 흘렀으나 Roman Republic 자체는 전혀 영향을 <br>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span style="COLOR: #ffffff">"Civitas(시민권)의 공유"</span>라는 발상은 Greece People 들의 발상이기도 <br>했으나 Roma People들이 보기에 그보다 소중했던 것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들의 <br>정의가 되었으며, Roman Republic에서 훌륭한 시민이라는 개념은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듯하게 <br>훌륭하게 보이는 시민이기도 했고, 일단은 도덕적 잣대와 평판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br>Old Roma People 들에 의해 사용되던 언어에서 이러한 개념은 동일한 단어 <span style="COLOR: #ff0000">Honestas</span><br><span style="COLOR: #ffffff">(명예로움, 고귀한, 존경스러운, 덕성스러운, 훌륭한, 탁월한)</span>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에 찬 시민<br>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마다 그러한 행동의 목적은 언제나 더 많은 영광과 커다란 명예를 <br>얻을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최고의 공포도 있었는데 그것은 "굴욕"이었다고 한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11735d7.jpg" width="500" height="700.11668611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11735d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mphorae</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2f3321a.jpg" width="500" height="671.14093959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2f3321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Maritime Alps<br></span>Roman Republic 시민의 90 %를 차지한 계층은 자신들이 열등하다고 <br>생각하지 않았던 평민으로서 피-지배 계급으로서 참정권이 없었고, 당연하게도 <br><span style="COLOR: #ffffff">"병역과 남세의 의무"</span>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던 <br>귀족들은 여전히 왕정시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획득한 <span style="COLOR: #ff0000">Ager Pulicus<br></span><span style="COLOR: #ffcc00">(아게르 푸블리쿠스, 공유지)</span>를 분할하여 독점할 뿐 아니라 평민의 토지를 불법으로 <br>빼앗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계에 천적이 존재하여 왔듯이 <br>어느 한 순간 "부"를 축적하여 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한 경제력을 가진 Plebs를 <br>중심으로 기원전 5 C 중 선동적인 조직체가 만들어졌고,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 <br>한 걸음 더 나아가기에 이르렀는데 그들의 저항이 이뤄졌던 장소는 Aventinus Hills<br>이었다. 이처럼 치열한 신분투쟁이 전개 되면서 평민들의 정치적 힘(권력)이 증대 <br>되었으며 점차로 "신분 투쟁의 긍정적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367년 <br>국가의 최고위 공직자로 입후보 할 수 있는 권리가 시민(평민)들에게 주어졌다. 앞서 <br>설명되었듯이 귀족들은 Senate(원로원)의 성원으로서 과두 정치를 공식화 했는데 <br>순수 혈통 가문의 귀족들 중에서 다수의 Magistrate(정무관) 그리고 두 명의 Consul(집정관)을 <br>임명하여 그들에게 정치를 맡겼다. 또한 왕정을 혐오 했던 탓에 정무관과 집정관을 <br>철저히 임기제로 운영하며 독재를 막았다. 국가 비상사태 시에는 집정관이 일시적으로<br>Dictator(디타토르, 독재관)가 되면서 전권을 장악하였지만 그러한 기간을 6개월이 넘지 않도록 했다.<br><br>"민회" 또한 있었으나 초기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이 집정관에게 있었으므로 다소 <br>정치적 목적에 의해 사실상 평민들의 발언은 원천 봉쇄되었다. 더구나 평민 중 일부는 <br>귀족들과 Clientes(피호 관계)를 맺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것은 경제적 자립 능력이 없는 <br>사람(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은 귀족과 <br>신의와 의무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일반적인 평민과는 달리 귀족의 <br>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훗날 중세 시대에 도달하면 이와 같은 관계가 영주와 기사 <br>계급에 의한<span style="COLOR: #33ff33">"계약관계"</span>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또한 원로원 명단이기도 한 Album(알붐)을 <br>재검토하는 감찰관-Censor(켄소르), 재무관-Quaestor(콰이스토로), 법무관-Praetor<br>(프라이토르)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로의 유지를 책임지는 고위 고관에 해당하는 공공건물<br>관리인이기도 하였던 조영관-Aedilis Curulis(아이딜리스 쿠룰리스)가 있었다. 이들을 <br>제외한 평민으로는 도시와 장인, 자유로운 농민, 부유한 상인, 가난한 이주민 등이 구성되어 <br>있었는데 이해관계가 달라서 행동 통일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기원전 5 C 초기 <br>Urbs Roma의 상황은 Solon의 개혁이 실시된 80년 전의 Greece In Athens 보다는 중벌주의<br>(重罰主義)로 대변되던<span style="COLOR: #ffffff">"Drakon 법전"</span>이 생겨날 무렵 그러니까 200년 전의 Athens와 비슷하였다.<br><br>신분투쟁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 되었다는 것은 과정이 결코 순탄치 <br>않았음을 의미하지만 당시만 해도 평민들에게 가장 고통을 준 것은 정치적 <br>권한에 앞서 "법체계"로서 현실적으로 명문화된 법전(성문법)이 없었으므로 <br>모든 법은 관습적 족쇄가 되었고, 귀족이 임의대로 입맛에 맞게 처리하는 방식<br>이었다. 그저 귀족들의 편의에 의해 악의적으로 법이 시행되고, 있었던 <br>것이다. 그리하여 평민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폭력 <br>저항운동(집단 이탈)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것(기원전 494)이다. 귀족들의 권력을 <br>제어 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수단이기도 한 파업이라는 <br>수단을 가지고 비-폭력적이었으나 선동적으로 호소했고, 외부의 위험요소가 있을 <br>시기 시민(평민)들은 그냥 무기를 내려놓고, 집단적으로 Urbs Roma를 빠져 <br>나가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span style="COLOR: #ffffff">총-파업(Secessio, 철수)</span>을 시도 한 것이다. 그저 그들은 <br>신성한 언덕으로 향했으며, 이것은 싸우기를 거부한 것으로 기존의 공화정을 <br>탈퇴한 동시에 일시적이었으나 언덕 위에 자신들만의 또 다른 공화정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cacd57a.jpg" width="500" height="311.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cacd57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oscana Lanscape ...</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f196fee.jpg" width="500" height="33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8f196fe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anta Maria Capua Vetere</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19e514e60.jpg" width="500" height="33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19e514e6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oscana Lanscape-Val di Cecina</span><br>더구나 Urbs Roma를 빠져 나온 평민들은 "곡물과 대지의 여신" <br>Cres(케레스) 신전이 있던 성스런 언덕에 모여 있었으므로 물리적으로 <br>군대를 동원해 해산시킬 수도 없었다. 이것은 원로원의 정치 귀족들과 민중 <br>사이의 권력 균형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공화정 역사에 한 획을 <br>긋는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평민들은 이러한 단 한방의 파업의 <br>결과 많은 것을 얻게 되었는데 먼저 자신들의 순수 정치 조직이기도 한 "Concilium- <br>Plebis(평민회의)"를 구성하게 되었고, 훗날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으나 <br>그들의 대변인 격인 호민관-Tribunus Plebis(트리부누스 플레비스)이라는 행정관직을 <br>신설하게 되었고, Tribunus 들은 이렇게 해서 행정, 사법, 군사, 모든 분야에서 <br>태생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귀족들의 관습법 악용을 방지하기 위하여<br><br>성문법의 제정을 요구하였는데 마침내 기원전 449년에는 Urbs Roma <br>최초의 성문법 이기도한 Lex XII Tabularum(12 표법)이 Decemviri(데켐비리) <br>/ 10인 위원회에 의해 제정 되기에 이르렀다. 이 후 평민은 민법상 귀족과 <br>동등한 권리를 보장 받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그저 평민들이...<br>대승을 거둬 이뤄진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국가 속의 국가를 세우기를<br>원했던 귀족들은 자산들의 이상에 따라 국가를 형성할 것을 고집함으로써 평민들을 <br>배제 시키려 했는데... 그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 것이 호민관이 선출 되었음에도 <br>불구하고 원로원은 평민들을 고려하지 않고, 국가 공동체를 운영하려 했다는 사실이며, <br>"귀족들의 주요 목표는 귀족 자신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와 국가의 <br>질서 속에 평민들을 재-통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4년 뒤 Lex-Canuleis(카눌레이우스법)<br>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통혼이 이뤄지게 되었고, Struggles of the Order(신분 투쟁) <br>혹은 Conflicts of the Order(t신분 분쟁)의 결과로서 절정기 즉 !! 기원전 367년에 "시민의 <br>평화"로 일컬어지는 Lex Licinia-Sextia(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되면서 부터로 볼 수 있다. <br><br>어찌되었든지 결과적으로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4 C-기원전 3 C</span> 전반기에 <br>이르게 되면 귀족과 평민 간의 법적인 평등이 마침내 실현된다. 이것은 <br>당시 Urbs Roma의 외적인 팽창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상황에서 <br>평민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며, 귀족들은 <br>평민들의 요구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나 평민들이 <br>주도 하던 신분 투쟁의 고삐도 늦춰야하는 중대한 위협이 닥치게 되는데 그것은 <br>건국 후 Urbs Roma로서도 처음 겪게 되는 최대 강적의 압력이었다. 어쩌면 Etruria <br>Rex(왕)들이 축출되었고, 힘의 공백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 <br>볼 수도 있으나 상대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Greece와는 달리 주변의 족속들과 <br>생존 경쟁에 나서야 했던 Roman은 일치감치 군사적 측면이 강조 되어왔고 <br>이미 신분 투쟁의 결과로 오래전부터 개혁이 진행되어 군대 또한 "중장보병 밀집 대형"<br><br>전술의 활용도가 증대 되었던 상태이었다. 또한 상비군적인 <br>성격을 갖추고, 외형적으로는 정복 국가로서 자리매김했으나 사실 <br>기원전 390년 무렵 Gallia가 걸떡 거릴 때만해도 "상호 불가침 평화조약"을 <br>외교 노선으로 정할 정도로 허약한 국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 <br>이러한 시기 갑자기 Italian Peninsula Po River 인근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던 <br>Gallia 족속이 보잘 것 없던 Roman을 치게 된 것일까 !! 그 이유는 간단<br>하지만 중요하다. Latin League(라틴동맹) 배경을 믿고, Italian Peninsula의 <br>"곡창지대와 소금 생산" 지역을 방어하며, 독점하려는 Roman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br>개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Gallia가 <br>신생 로마가 감당할 수 없는 힘(군사력)을 갖춘 강적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Etruria <br>People들은 몰아내고 Latin League를 주도했던 Roman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br>갖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호전적이었던 Celt = Sens(상스인) 전사들에게 박살나고 <br>말았다. Roman의 영토는 약탈과 방화로 유린당했고, 광장의 12 표법 청동 판은 <br>이때 유실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이로써 "갈리아"는 Roman을 최초로 정복한 이민족이 <br>되었으며, Roman으로서는 역사상 최대의 참극이기도 했다. 어찌되었거나 Gallia People <br>들은 그저 배상금만 챙기고 철수하는데 급급하였다는 사실은 대략 난감 하지만 Urbs <br>Roma이 살아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민중의 권력-평민 화 되었던 귀족 등장 <span style="COLOR: #33ff33">→ Populares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9b40b2a6.jpg" width="500" height="299.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9b40b2a6.jpg');" /></div></span><span style="COLOR: #ffcc00">Cadiz ...Spai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ca31d8d2.jpg" width="500" height="710.90047393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ca31d8d2.jpg');" /></div>Pompeii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c87011d2.jpg" width="500" height="36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c87011d2.jpg');" /></div></span>그러나 Urbs Roma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았다. Gallia People 들에게 <br>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Roman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균열(평민→신분 투쟁)의 <br>조짐을 보였고, 배상금도 문제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경제적 침체가 찾아왔고, <br>그리하여 정복활동이 중지된 것이 치명적으로 다가선 때이기도 하며, 토지 부족과<br>부채에 대한 관습법의 가혹성, 대지주와 소작농들의 이해 충돌 등이 중요한 쟁점이 되던 <br>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Latin League 소속이면서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던 <br>"Samnium"이 "로마 인"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가장 먼저 반기를 들게 된다. 그러나 <br>Roma People 들은 "삼니움"정도는 언제든지 상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였다. →<br>Samnium에게 승리한 후 <span style="COLOR: #ffcc00">Campania , Neapolis(= Napoli)</span>를 접수한 이 후→캄파니아 <br>지역 지배권을 획득 하게 되자 이번에는 또 다른 Latin League의 자잘한 세력들이 평화적으로 <br>경제적 분배와 Foedus Cassianum 자체의 수정을 요구하며 도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br>독점력이 강했던 Roman의 입장에서 그러한 조약의 수정은 도저히 들어줄 수 있었던 입장이 <br>아니었는데 그래서 해결 방식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끝없는 전쟁의<br>연속이었는데 "삼니움 전쟁"을 치룬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던 기원전 340년의 일로서 "로마 인" <br>들은 또 다시...오뚜기 처럼 일어나 또 다시 동맹도시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힘든 전쟁을 <br>치러야 했으며, 여기서 Roma People 들은 참으로 놀라울 만큼 신속한 회복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br><br>이러한 힘은 어쩐지 과거와는 판이한 차이를 보였으며 거의 Italian Peninsula <br>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참고로 삼니움 족속을 처리하는데 Roman은 집요함을 <br>드러내었지만 실제 3회의 전투 중 한 차례 정도는 산악지재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br>삼니움의 창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치욕스런 시기(기원전 321)도 있었다고 한다. → <br><span style="COLOR: #ff0000">Samnium</span>에서 분화된 족속(사비눔) → 70년 / 3회 전쟁, The Inexpiable(씻을 수 없는 전쟁) <br><br>기원전 338년 전쟁 능력을 상실한 "동맹 시"들은 마침내 강화 조약을 제안<br>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사실상 백기투항이었던 셈으로 Italian Peninsula 위치는 <br>확고해졌으며, 그들의 앞에는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따라서 이제 Italian Peninsula의 <br>패자가 되기 위한 수순으로 마지막 마무리 만 남겨졌다. 그것은 아직도 완전히 복속<br>되지 않았던 Samnium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과 과거와 같지 않던 Magna Graecia를 접수<br>하는 일이었다. 이 후 Roma People 들은 남-북으로 거의 행군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 저항<br>하는 모든 국가들은 모조리 붕괴시켰다. 그렇지만 기원전 295(센티눔 전투 이 후) 앞으로만 <br>내달리던 불굴의 전사들 앞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장애물이 들장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장화처럼 <br>생긴 Italian Peninsula의 발굽 모양에 해당하는 부유했던 항구도시 <span style="COLOR: #ff0000">Tarentum<span style="COLOR: #ffcc00">(타렌툼)</span></span>이 <br>Urbs Roma이 새로운 주인이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주인 Greece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br><br>그러나 Greece는 이미 !! 기원전 338년에 Macedonia에 굴복해 있던 <br>상황으로 이때 Tarentum의 요청을 받아들인 곳은 Greece의 북-서부에 위치한 <br>"Epirus(알바니아)"의 왕 Pyrrhic(피로스)이었다. 애당초에 그는 역사 속에서 <br>Alexandros 사 후... Hellenism 세계를 정복 하려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br>급작스런 타렌툼의 요청으로 서부-지중해의 상황을 주시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br>Italian Peninsula의 정복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장래 광대한 <br>Empire를 건설하게 되는 Roman 세력과 과거 화려하고 꿈같은 나날을 보냈던 Hellenism <br>세계의 군사력과 정면(그리스 용병 + 마케도니아 + 알바니아)으로 충돌(기원전 275)<br>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span style="COLOR: #ff0000">Pyrrhic</span>는 코끼리를 앞세워 진격하였고 승리를 초기에 확신한 듯 <br>했지만 Greece에서 받아들인 후 발전을 거듭하며 무수한 전공을 세웠던 "밀집대형 <br>전술과 장창"에는 코끼리도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한 Roman은 <br>Pyrrhic가 물러간 뒤에 Tarentum = Taranto을 접수하며 드디어 기원전 272년 Italian Peninsula의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ab36198e.jpg" width="500" height="33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ab36198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pan style="COLOR: #ffcc00">Tarentum = </span>Taranto...<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37b80da2.jpg" width="500" height="661.52149944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37b80da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mpania-Itay Emily Glatter</span><br><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f1c926b4.jpg" width="500" height="33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f1c926b4.jpg');" /></div>Tarentum = Taranto...</span><br>정치적 영토통일을 달성하였고, 이러한 정복 전쟁으로 얻어진 부수적인 소득은 <br>다양하였다. 우선 땅(토지)은 병합되고 쪼개져 Roman 시민들에게 분배되었고 또한 <br>자치 공동체와 동맹 관계 맺기도 했는데 이러한 동맹은 외형적으로 양쪽 모두 <br>상대방의 요구가 있다면 군사지원을 해준다는 조약을 토대로 하였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br>현대 국제관계에서 가끔 언급되는 <span style="COLOR: #ffcc00">"핵 우산"</span>과 같은 개념으로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면 <br>Urbs Roma은 상대를 보호하거나 후원해주는 관계가 자동으로 설정되었다. 때로는 완전한 <br>시민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경우는 양 공동체의 시민권을 동시에 가지며, "로마 연합"으로 <br>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정복에서 요구되었던 것으로 Urbs Roma에 대한 <br>충성도가 절대적이었다. 반면에 저항하는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중립적인 도시는 <br>그저 자치권<span style="COLOR: #33ff33">(Key Word / Monroe Doctrine)</span>만 부여하였다. 기원전 753년 04월 21일 건국하여 <br>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509 한차례의 혁명적 시기를 보낸 Roman은 무자비한 영토 팽창<br>의지를 보이면서, 시선을 한곳에 집중 하였는데 얼마 후면 지중해를 피바다로 만들고, 전 지역을 <br><br>흡수 통합(기원전 3 C)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으며, 기원전 1 C가 <br>되면 지중해 전역의 패권자로서 등극하게 된다. 대략 지금까지의 강대국 <br>Urbs Roma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방위와 전쟁을 <br>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국가체제를 조직적으로 대응시켰는데 가장 <br>먼저 Gallia People들의 침입과 내란으로 힘을 상실한 Etruria People를 간단히 <br><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4 C</span> <u>굴복시켰으며, 이어서 남쪽 Campania(캄파니아) 평야를</u> 차지하고 <br>있던 Samnite People 들과 3회에 걸쳐 전쟁을 벌여 기원전 290년에 이르러서야 간신히<br>안정시킨다. 그리고 기원전 270 까지 Tarentum(타렌툼)을 비롯한 Southern-Italy &amp; <br>Magna Graecia(Sicilia)를 정복하고 동시에 Northern-Italy →Po River 지역까지 <br>진출하여 기원전 265년에 이르러 Rubicon River 이남의 Italian Peninsula의 지배자가 <br>되었다. 이때 정복지의 통치 방식은 <span style="COLOR: #ff0000">Devide et Imperra<span style="COLOR: #ffcc00">(분할하여 통치)</span></span>한다는 수평적 원칙에 <br>따라 서로 예우를 달리 하는 동맹자로 받아들이는 간접 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이렇게 <br>함으로써 피-정복민들이 상호 단결하는 것을 막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동족 의식을 <br>갖게 하여 Urbs Roma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시켰다. 또한 Greece Polis들이 외부인에 <br>대한 시민권을 거부함으로써 상호 배타적이고 폐쇄적이 되어 대립과 분쟁을 거듭하였던 것과는 <br><br>달리 Roman은 주변의 족속들에 대한<span style="COLOR: #ffffff">"시민권"</span>의 확대와 동맹 정책을 <br>통하여 Italian Peninsula 전체를 <span style="COLOR: #33ff33">"Romanized(로마 화)"</span>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br>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를 그들의 체제 내에 통합하였다. 따라서 걸릴게 없었던 Roma- <br>People 들은 이 후...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꾼 일련의 전쟁을 주도적으로 추진<br>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Numidia(누미디아)로부터 Gibraltar <br>해협에서 North-Africa 해안에 걸쳐 있는 Carthago↔Roman 3차에 걸친 Punic War이었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cc5cee9d.jpg" width="500" height="647.24919093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cc5cee9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oman Helmet<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d1eb9a38.jpg" width="500" height="40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d1eb9a3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ladiator</span><br>Phoenicia의 식민지(기원전 800)로 애초에 수립되었으나 기원전 6 C<br>Persia에 흡수된 Phoenicia와 단절하고 점차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로 <br>변신하였다. Carthago의 번영은 <span style="COLOR: #ff0000">Spain &amp; Britannia</span>으로부터 나오는 은과 주석,<br>등의 자연 자원과 North-Africa의 열대성 작물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교역에 의존했다. <br>당시 Carthago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핵심적 권력을 <br>상인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뇌물과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정부의 거의 모든 <br>조직을 통제하고 있었다. 즉 !! 금권을 바탕으로 한 과두 정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br>이러한 정치적 결함에도 비옥한 농지를 갖추고, 도시는 아름다운 원형의 항구와 더불어 <br>고층의 사원들과 건물들로 가득 찬 Africa의 최대 도시이기도 했다. 또한 어떤 면에서 <br>Carthago는 자신들만의 영혼이 없는 도시이었으나 지중해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적 업적과 <br>호사스러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참고적으로 Baal Hammon(바알 함몬) &amp; <br>Tanit(타니트)를 숭배하고 있었는데 알려진 바로는 Tanit(타니트)가 "아기의 살"을 원한다고 <br>믿고 있었으므로 빈번하게 유아 희생 제의를 행하였다. → Carthago(정신) = 상업적 모험과 황금. <br>피, 쾌락 추구 자 !! 그럼 흥미로운 역사 속의 Roman-Carthago의 대결 상황에 대해 <br>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다. 사실 "로마 인"의 입장에서 Carthago와 생사가 걸린 전쟁은 그들이 <br><br>지금까지 겪어 왔던 잔챙이 세력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또한 가장 지독한 전쟁<br>이기도 했다. North-Africa 연안에 일찍이 정착한 <u>셈-족 계통의 도시</u> Carthago는 이미 <br>당대 서부-지중해의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최소한 Roman 만큼 어쩌면 좀 더 <br>위대한 위치에 있었던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갖고 있었다. 또한 막강한 물적, 인적 자원은 <br>물론이고, 해군력에서는 거의 적수를 찾기 힘들만큼 압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br>중요한 것은 <span style="COLOR: #33ff33">Magna Graecia</span>세력과 수세기를 거쳐 오면서 유일하게 승부를 벌이고는 했는데 <br>Roman의 함대가 Messina해협 너머에 집결하면서부터 Sicilia 주변의 군사적 균형관계가 <br>혼탁스러워지기 시작 했다. 일찍이 <span style="COLOR: #ffcc00">Sicilia Island In Greece People</span> 들은 끝도 없는 Carthago<br>와의 분쟁에 Urbs Roma의 힘을 끌어 들이고 싶은 유혹을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일단 분쟁에 꼬여 <br>들어가면서 Republic(공화국)의 원칙은 파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원전 264을 기점으로 <br>Roma People 들은 지금까지는 지루하게 소모적인 분쟁을 전면전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br>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Greece 문명의 붕괴를 가져온 <br><span style="COLOR: #ff0000">Peloponnesos War</span>의 발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Greece 양대 동맹과 무관한 <br>지극히 단순한 지역적 문제로 당시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었던 도시국가들이 개입 되었으며, 마치 <br>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되듯이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갈등 구조를 만들었고...<br><br>이것이 화약고가 되어 폭발한 것 아닌가 !! 마찬가지로 Carthago ↔ <br>Roman 분쟁의 초기 구도가 그렇게 의도되지 않거나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br>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Roman의 원로원은 아마도 <br>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Roman의 사정은 정치, 사회 <br>경제적으로 폭발 일보직전이었고,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을 평민층에서 찾았던 것이다. <br><span style="COLOR: #ffffff">"까지 것 인생 뭐있어...한번 붙어 보자 !!"</span> 아마도 Roman의 평민층은 이렇게 생각<br>하지 않았나 싶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도 심각한 경제난이 평민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게 <br>된 것이다. 오로지 "토지" 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던 평민과 농민(하층민)들을 과거에는 <br>정복하여 얻어진 공유지가 풍족하였기에 분배하는 것으로 Control 할 수 있었으나 <br>과밀한 인구 팽창(도시화)으로 토지는 갈수록 부족해 졌고, 점차로 쌓여져 가는 부채에 <br>시달려 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가난한 농민(하층민)들은 빚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채무가 <br><br>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자 귀족들의<span style="COLOR: #ffffff">"채무 노예"</span>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br>없었다. 반면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채권자로서 있었기에 살아가는데 <br>문제가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평민 혹은 농민(하층민)들은 이러한 빈부의 격차에 <br>대해 상대적 박탈감 회복하지 못하고 사회적 박탈감 더욱 커져만 갔던 것 갔다. 때문에 <br>어떤 돌파구가 필요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전쟁이었고, 결과적으로 Carthago<br>와의 전쟁은 평민들이 주도한 전쟁이 되었던 셈이었다. 일견 인류 역사에서 대표적인 <br>정복 활동은 예외 없이 모두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층의 결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Urbs Roma<br>의 경우는 다르다, 설명되었듯이 Roman의 정복 활동은 전적으로 평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br>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식민지를 얻어야만 평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br>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국력을 키운다는 의미만 있었던 것이 <br>아니라 생존과 결속을 위한 것이었다. 제국으로서의 팽창은 모든 Roma People들에게 선택의... <br>여지가 없었던 필연적 요소이었다. Greece의 경우 국가건설 주체들이 주로 경제적 동기<br>(이윤추구)에서 스스로 이탈되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때 Roman의 식민도시들은 근본적으로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21749dd9.jpg" width="500" height="40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21749dd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abularium</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d4dd5a92.jpg" width="500" height="32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d4dd5a9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oman Army</span><br>국가적인 차원에서 건설되었으며, 영토 개척을 통해 과잉 인구를 식민화 <br>시킨다는 필요성이 강하게 작동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동기보다는 전략적인 측면이 <br>두드러졌고, 하나의 예로서 Greece 식민시들이 주로 해안(항구)에 집중되었다면 <br>Urbs Roma의 경우 내륙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 해주고 있다. <br>더불어 Greece의 식민도시들은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묶인 정도이지만 <br>Urbs Roma의 식민도시들은 정치, 군사적으로 본국과 분리될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Punic- <br>War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도 정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고, <span style="COLOR: #ffffff">"모든 길은 로마로 <br>통한다는 말"</span>이 있듯이 정복하여 개척한 식민도시들을 이어 주는 돌 벽돌을 수직으로 박아 <br>넣은 방대한 거대한 도로망이 설계되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br><br>있는 "Roman Capua = Santa Maria Capua Vetere" 까지 <br>200 km에 달하는 Via Appia(아피아 가도)이다. 도로의 주 목적은 <br>군대와 보급물의 수송에 있었다.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3 C</span> 무렵 지중해 세계는 동-서로 <br>양분되어 있었는데 반도를 중심에 두고 동쪽으로는 문명의발원지이었으며, <br>전통적으로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으로서 Macedonia-Egypt-Syria →<br>Hellenism 3 강이 지배하던 세계이었다. 그렇다면 정복자 Alexandros가 서쪽으로 <br>발길을 돌리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는 지리적 잇 점 때문이기도 했으나 <br>그가 33 살이라는 나이에 요절을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만약 Alexandros가 최소한 <br>10년만 더 생존했어도 Roman-Carthago 세력이 서부-지중해 지역을 양분하고, <br>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역사 속에서 탁월한 정복자로 남겨졌던 <span style="COLOR: #66ffff">Alexandros</span>는 <br><br>지구상에 없었다. 그리고 당대 서부-지중해의 패권은 Carthago가 <br>쥐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br>실제로 Roma People들은 기회가 오면 신흥 시장(서부-지중해)으로 언제든지 <br>진출하고자 했다. 반면 기원전 4 C 이 후 Hellenism 세계를 통합한 동부-지중해는 <br>무역 도시들로 인해 포화 상태에 있었는데 당시 Carthago의 독점적 지위를 <br>누리고 있던 강역은 Spain-Corsica-Sardegna-Malta-North Afica-Afica(중부, 콩고)의 <br>미개발 지역 까지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나마 Urbs Roma 이전에 견줄 수 <br>있던 세력이 Magna Graecia이었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구도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br>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하는 Urbs Roma의 승부욕이 <br>불타올랐고 가장 먼저 곡창지대 Sicilia를 손에 넣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을 법 하다. 따라서 <br>어차피 맞서야 하는 상황이고 명분만 갖추어진다면 언제든지 선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싶다. <br><br>그러나 방아쇠를 당긴 것은 <span style="COLOR: #ff0000">Sicilia</span>이었다. 당시 Roman은 적어도 <br>외형적으로는 지중해 진출을 꾀하기는 힘에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반도 <br>통일"을 이룬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상대는 그렇고 그런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br>그들의 용병과 기병의 전투력은 이미 지중해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던 때이기도 했다. <br>더구나 Roma People 들은 반도 통일 이전 까지 Carthago와 대외적으로 평화적 <br>조약을 통한 선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조약의 내용은 Roma- <br>People들이 서부-지중해무역에 진출하지 않는 대신에 Italian Peninsula의 정치적 <br>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Roman에게 명분과 실리를 <br>가져다 준 것은 서부-지중해 완충지역으로서 양측에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Sicilia이었다. 즉 !! <br><span style="COLOR: #ffcc00">Messina &amp; Siracusa</span>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서 한쪽이 Roman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그나마 <br>묶여 있던 족쇄를 풀어주게 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 속의 Punic War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br><br>기원전 217년 이 후 "Lake Trasimenus(트라시메누스 호수)"<br>에서 30,000명의 Roma People들이 전사한 대참사 이 후 절망적인 <br>외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Hannibal ad Portas(한니발 아드-포르타) <br>"Hannibal이 성문 앞에 있다." Roma People 들로서 "굴욕"적인 현실이기도 했다. <br>.<br>.<br>.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090a318f.jpg" width="500" height="629.59076600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090a318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emple of Vesta, Tivoli</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17d8aa65.jpg" width="500" height="372.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17d8aa65.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art of Asprovalta &amp; Via Egnatia</span><br><span style="COLOR: #ff0000">Punic War</span>은 “카르타고-로마”의 전쟁이기도 했으나 <span style="COLOR: #33ff33">Gens Scipio-Barcr</span> <br>가문의 대결이기도 했다. 20년에 걸친 전쟁(First Punic War)에서 예상치 못한 <br>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은 Roma People 들이다. 더구나 내륙에서 이뤄진 전쟁도 <br>아니었기에 Carthago의 충격은 컸을 것이다. 반면에 Roman은 강력한 해상 국가를 <br>물리쳤다는 경험이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연결되어 사기가 충천하였고, 정복<br>전쟁에서 커다란 전환점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일단 1 차전은 Roman의 평민들이 <br>승리한 전쟁이기도 했다. 이 후 내륙에서 대패하는 아픔(본토 공략 실패)도 있었으나... <br><br>Sicilia에서 전개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단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br>중요한 것은 배상금과 전리품으로 Sicilia는 물론이고 Corsica-Sardegna-<br>Siracusa를 확보하게 되면서 최초의 속주를 거느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br>또한 이러한 식민시 정책은 Roman의 기본적인 식민지 경영체계로서 자리 잡게 <br>되었다. 또 다른 사실은 대규모 함대를 육성해야한다는 자각과 함께 수많은 <br>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정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br>통해 경험이 축적되었으며, 뒤이어 벌어진 제 2차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br>동기부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반면에 뜻하지 않게 처참하게 패전하고, Sicilia를 빼앗겨 <br>불확실해진 Carthago의 전략적 무대는 이제 Spain 땅이 되었으며, 기원전 237년 <br>최고 장군 <span style="COLOR: #ffcc00">Hamilcar Barcr</span>는 당시 9 세이었던 Hannibal을 데리고 삼림지대 곳곳에 떼 지어 <br><br>살던 난폭한 족속들을 휘어잡으면서 "귀금속 채굴"에 나서 이를 바탕으로 <br>8년의 기간 동안 번영하는 국가 기틀을 마련하고 상당한 규모의 방어 군을 양성<br>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Sicilia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그는 이번에도 불행함으로 부터 <br>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르나 기원전 229년 배후에 Roma People들의 간계가 <br>있었음직 한 죽음을 당한다. 이로써 Hamilcar Barcr(하밀카르 바르카)아들이기도 한 <br><span style="COLOR: #ff0000">Hannibal</span>과 "로마 인"들은 철천지원수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절치부심"26살의 나이로 <br>Carthago의 최고 장군으로 성장한 복수심에 불타는 "한니발"장군은 점차로 Roman을 <br>향해 압박해 들어가면서, 어떤 환상도 배제했다. 또한 무조건 전면전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고, <br>Urbs Roma을 철저히 파괴시키지 않는다면 승리는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br>기원전 218년 Hannibal이 이끄는 Carthago 군대가 Spain → Gallia(남부) 즉 !! 현재의 France <br><br>남부 해안을 끼고, French Wine의 본고장 Rhone River 유역을 거쳐서 <br>Alps Mountain(브리앙송, 몽제네브레 고개)을 넘어 간 것은 이와 같은 전술적 <br>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장군은 일반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 <br>넘는 전술로서 "로마 군단"에 접근 했으며, "티치노 강 평원, 트레비아 강 좌안"<br>전투로 North-Italy(= Gallia Cisalpine)지역을 획득하고, "한나발 원정"의 전환점이 <br>되었던 Lake Trasimenus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더욱이 Battle of Cannae<br>(기원전 261)에서는 로마군단(Legion) 여덟 개를 전멸시켰는데 이것은 Roman Republic <br><br>역사상 최악의 패배이었으며, Roman의 피의 가문들이 몰살할 지경에 <br>이를 정도로 그 파괴력은 엄청난 현실을 동반하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br>Hannibal 에게도 고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커다란 고민은 Italy(남부)로 <br>진격하면서 멀리 떨어져나간 병참선(보급) 문제로서 도시 Capua에 교두보는 <br>확보했으나 마지막 한방을 날릴 수 없었다는 것인데 그러한 고민은 Punic War(2차)의 <br>Key Word이기도 했다.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의 전쟁은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br>의미한다. 따라서 일시적 혹은 단기적으로 더 이상의 진격을 유보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br><br>이것이 패착이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Roma People 들은 지루한 <br>치고... 빠지는 전술<span style="COLOR: #ffcc00">(Qunintus Fabius Pictor)</span>을 구사하면서 전력을 재-<br>정비하는 시간을 벌었고, Hannibal과 싸우는 법을 터득하였으며, 새로운 <br>영웅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웬만해서 그런 치명적 패배를 당하면 당대의 <br>관례상 Hannibal의 승리를 인정하고 평화협상을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br>Roma People은 실제로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을 받아들이라는 권유를 받아<br>들이지 않았고, 파국에 직면해 있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지언정 그들은 <br>지속적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순간에 당연한 일이었으나 Roman의 <br>최고위층들은 Sibyl(시빌)의 예언서에서 조언을 구하면서 Carthago Army와 <br>전면적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때 권토중래(捲土重來)의 <br>꿈을 꾸는 난세의 영웅의 용틀임이 시작되었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뒤의 물결을 <br>후려친다고 했다. Battle of Cannae 전투 당시 19 살의 <span style="COLOR: #ff0000">Scipio Africanus</span>는 그의 부친과 <br>삼촌이 열어둔 Spain 영토를 발판으로 공격을 가하며, 이렇게 해서 600년 동안 지속<br>되는 Spain 지배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Scipio Africanus 그는 자격을 갖춘 영웅이었다. <br><br>한때는 자신의 개인적 우상이기도 했던 Hannibal의 초승달 포진을 모방하여 <br>역으로 Spain을 정복하고 개선하였으며, 이러한 시점부터 대체로 일방적이었던 <br>전황을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고, Hannibal은 Italy(남부)에서 고립되는 위기에 처해<br>졌다. 여기서 한때는 항복을 권유했던 원로원은 총 공격을 주장했으나 Scipio는 <br>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그것은 받은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br>"한니발"이 Pyrenees-Alps Mountain을 넘어 예상치 않았던 공세를 취한 것처럼 <br>이미 Spain을 접수한 상태에서 Carthago 본토를 공약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Scipio는 <br>원로원의 불신을 신뢰로 극복하며, "전쟁의 신 마르스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에게 <br>집정관 자격으로 제례를 올리고, Carthago로 함대를 띄우게 된다. 그는 기원전 204년 North-<br>Africa 해안에 상륙하였으며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Carthago를 유린하였다. 이제 <br>"한니발"도 더 이상 Italy(남부)에만 머물 수 없었고, 그것은 Carthago의 부패한 상인귀족<br>들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 속의 두 영웅은 기원전 202년 "자마 평원<br>(Second Punic War)"에서 숙명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양측의 병력은 비슷했으나 기병을 <br><br>좀 더 많은 수 확보하고 있던 Scipio가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렇게 <br>해서 한니발의<span style="COLOR: #ffffff">"초승달 포진"</span>은 기병 전술에 막혀 무의미해 졌고, 코끼리 부대는 <br>Roman의 나팔 수 들에 의해 힘을 쓰지 못했다. 마치 과거 공화국이 "Epirus(알바니아)<br>의 피로스”의 침입을 막아내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1차전에서 내분으로 Urbs Roma에 <br>예상치 못한 승리를 안겨 줬던 “백전백승”의 Carthago의 용병들은 Scipio의 충성도 높은 <br>기병과 보병 앞에서 그들의 전투 기량이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전쟁의 승리 이 후<br><br>Urbs Roma은 평화조약이라는 미명 하에 Carthago를 무장해제를 시키고, <br>다른 국가와 전쟁을 금지하였으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마저 물렸다. 그러나 <br>이것으로 전쟁은 종결 된 것이 아니었다. "로마 인" 들은 그들의 땅에서 <br>벌어진 <span style="COLOR: #ff0000">Battle of Cannae</span>에서의 패배를 되새김질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당한 <br>시간이 흘러 잊을 만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어쩌면 "한니발"이라는 인물 <br>보다 전쟁에서의 패배 자체를 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br>더불어 "한니발" 또한 그렇게 쉽게 잊혀질만 한 인물이 아니었던 셈이었는데 그들에게 <br>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기 때문으로 오죽했으면 그들의 심장부에 동상을 세워 무려 <br>수 백 년이 흐른 뒤에도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잔인한 <br>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Second Punic War 이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이제 Carthago...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4f960c8e.jpg" width="500" height="31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4f960c8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o River<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5392c71c.jpg" width="500" height="30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5392c71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loaca Maxima</span><br>배상금을 모두 갚고, 또 한번의 비상을 꿈꾸고 있을 때이었다. 바로 !!<br>그런 순간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던 <span style="COLOR: #ff0000">"Cato"</span>의 선동적이며 정치적인 연설이 <br>파장을 일으켜 도저히 Carthago를 묵인할 수 없게 되었다. 자 !! 그렇다면 이제 <br>남은 것은 전쟁이었으나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자신들의 속국이었던 Numidia를 <br>부추겨 Carthago를 공격하도록 만들었고, 여전히 타국과의 전쟁 금지조항(Casus-<br>Belli, 전쟁의 빌미)에 묶여 있던 Carthago가 방어와 공격을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 조약 <br>위반이 되면서 또하나의 전쟁이 기획되어진 그대로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br>Urbs Roma에게 명분을 챙겨준 "꼴"이 되면서 거의 학살에 가까운 만행으로 Third Punic- <br>War은 시작되고, 순식간에 끝난 셈이다. 그들이 주장한 것처럼 잠재적 적국으로 전락한 <br>Carthago는 유적지에서 동맹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소생 불능의 황무지화 되었으며, 역사 <br>속에서 Roman의 공격은 그만큼 잔인하고 일방적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훗날 그 와중에 <br>불타오르는 Carthago의 도시를 배경으로 총사령관이었던 "Scipio Aemilianus의 눈물"이 서정적인 <br>수준에서 묘사되었으나 아마도 대다수 Roma People 들은 정복된 땅에 "Salt..."을 뿌렸을 것이다. <br><br>이제 Carthago는 지상에서 사라졌고, Roman는 전설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다. <br>또한 진정한 승리자는 Scipio 가문이 되었다. 반면 패장 "한니발"은 지중해 일대를 <br>떠돌면서 망명 생활을 하며, 기원전 184 역사가 Plutarch가 묘사한 대로 말기에는 너무 <br>늙어 버린 한 마리 새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평생을 "로마 인" 들의 증오를 떨쳐<br>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자결(64 세)한다. 흥미롭지만 같은 해 Scipio Africanus도 <br>죽음을 맞이한다. 공식적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고 추앙되었지만 권모술수<br>(權謀術數)가 난무하던 정치판은 그에게 전장보다 혹독한 곳이었으며, 결국 그는 뇌물을 <br>받았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고발 당했는데 아마도 그 또한 자살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훗날 <br>그의 양자이기도 했던 Scipio Aemilianus도 Tiberius Gracchus개혁이 추진되던 시기에<br>그의 아내와 Roman의 서자(노예와 새롭게 시민권을 획득한자)들의 공모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e1dd863f.jpg" width="500" height="677.96610169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e1dd863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orec-Decumanus<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41aef192.jpg" width="500" height="34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41aef19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hess<br></span>결과적으로 생사가 걸린 전쟁에서 Roma People 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br>것은 무엇보다도 해상을 장악하는 힘<span style="COLOR: #33ff33">(해상의 권력)</span>이 Roman에 있었기 때문이다. <br>"한니발"이 Italian Peninsula에 10여년간 머물며 소모전을 벌이면서도 그 어떤 소득도 <br>없이 없었던 것은 당시 !! 강력하게 부상한 Roman 함대의 해상 봉쇄로 본토의 지원을 받을 수 <br>없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비록 <span style="COLOR: #ff0000">Macedonia</span>와 연합 전선(Philippos 5세)을 구축<br>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으나 본국의 보급이 전무한 상태에서 모든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었던 <br>것이다. 해상이 봉쇄 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 !! 참고로 "한니발"은 정복 전쟁 <br>초기에 <span style="COLOR: #ffcc00">Macedonia-Carthago-Spain</span>의 전력을 가동하여 Italian Peninsula를 삼면에서 압박<br>하는 전술을 추진하고 있었고,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br>어느 순간 해상 강국이 되어버린 Roman의 함대 앞에서 기본적인 전략과 전술 구도가 물거품이<br><br>되었던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Punic War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기원전 190년 부터 <br>이미 "로마 군단"은 <u>동시 다발 적인 전쟁을 수행할 정도로 패권적인</u> 모습을 보였는데 이들은 <br>Asia로 몰려 들어가서 지방 독재자들의 전투 조직을 파괴시켜 버렸으며, 당시 그러한 <br>지역의 강대국 <span style="COLOR: #33ff33">Egypt-Syria</span>는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며 공화국의 지배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는 <br>사실이다. 그저 Roman은 제한적이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Macedonia-Sicilia-Spain를 비롯하여 <br>기원전 140년경에 이르면 로마 본토에서도 낯 설은 먼 지역까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br>패권적 힘이 강성하게 확립되어 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Carthago의 패전은 Urbs-<br>Roma의 패권적 힘 앞에서 어쩌면 당연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결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br><br>Cartago의 본토 공략과 함께 맞물려 Roman의 패권적적 행보(기원전 149)는 도시가 <br>있던 장소에 누구도 도시를 세울 수 없다는 경고와 함께 메아리치게 되었는데 Cartago를 <br>황무지로 만든 사실은 특히 주변의 Greece 도시 국가 들로서는 엄청난 현실이 되어 다가선다. <br>아울러 점차 제국주의적인 전쟁으로 숨 가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갔는데 이 후<br>Roma People 들이 발 빠르게 정복의 움직임을 보였던 곳은 Oyster의 산지<span style="COLOR: #ffffff">Adriatic Sea</span><br>(아드리아 해)를 가로질러 도착한 Balkan Peninsula이었고, 그곳에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지 <br>못했던 Greece &amp; Macedonia가 있었으며, 가장 먼저 Greece People 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br>주지시키는 작업부터 시작(기원전 146)하게 된다. Titus Quinctius Flamininus(티투스 큉크티우스 <br>플라미니누스)가 기원전 197 <span style="COLOR: #33ff33">Cynoscephalae </span>언덕에서 Philippos 5세로부터 Achaean League <br>해방시킨 이 후 한참 지난 일로서 즉 !! Roma People 들이 확립한 세력균형의 원칙을 남쪽의 Greece-<br>Polis 들에게 알린다는 것으로 시작하기 무섭게 끝나버린 전쟁에서 Greece는 참담하게 패하고 <br>말았다. 대표적으로 Corinthos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돌무더기 신세로 전락되었고, 약탈된 도시에서는<br>&nbs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3166e717.jpg" width="500" height="398.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33166e71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oma = Rome Plan(Lapis Niger)</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f21b8374.jpg" width="500" height="37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f21b837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stel d'Angelo-Tiber</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dea3c3ef.jpg" width="500" height="37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dea3c3e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oma El Palatino</span><br>엄청난 전리품과 전쟁포로(노예)들이 확보되었다. 더불어 순식간에 <br>지중해의 도시 두 곳을 파괴시킨 사실은 경악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후 <br>잠시 "한니발"과 동맹을 구축하기도 했던 Macedonia는 4개로 쪼개져 200년 <br>동안 지배 당하게 된다. 또한 집요하리만치 잔인하게 진행된 대소 전쟁의 출발을 <br>알리고, 가해지는 압박전술은 단지 !! 영토의 병합 차원이 아니라 평화유지를 위한 명분을 <br>내세워 전개되었으며, Roman Republic의 위상을 각인시키는 노림수가 배경에서 작동<br>되었다. 대략 이러한 시기부터 Roman의 도로망이 거의 윤곽을 드러내었는데 "돌과 자갈"로 <br>이루어진 <span style="COLOR: #ffffff">"Via Egnatia(비아 에그나티아)"</span>는 <span style="COLOR: #ff0000">Balkan</span>의 황무지를 관통하고 Adriatic Sea →<br>Aegean Sea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연결시키게 된다. 이러한 도로는 Greece &amp; Roman을 <br>완벽하게 연결시켜 주었으며, Aegean Sea 푸른 색 너머에 있는 지평을 열어주는 출구가 <br>되어 주었다. 더불어 그 너머에서는 "금과 대리석"으로 번쩍이는 도시, 예술과 철학 사상이 공존<br>하는 도시들이 특별한 저항도 없이 Roma People들을 맞이하여 주었다. 앞서 설명 되었듯이 <br>기원전 197 -Macedonia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Greece는 기원전 146 "자유와 평화"를 상실한다. <br><br>같은 시기에 Cartago의 식민지령은 모조리 Roman Type의 속주(Afica)가 <br>되었으며, 양다리 걸친 Celtiberia People(켈티베리아)들에게 Roman의 존재를 존중<br>시키기 위해 기원전 133 Spain-Numantia(누만티아)가 불태워진다. 그러는 동안 <br>지중해 반대쪽에서 "페르가모의 왕"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왕국을 고스란히 Urbs Roma에 <br>바치는 역사상 드문 일까지 벌어졌다. 이리하여 Roman은 화려한 도시 <span style="COLOR: #ff0000">Ionia →Ephesos</span><br>(에페수소)를 차지하며, 기원전 125년부터는 Gallia로 눈을 돌렸고, 그곳에도 Provincia<br>(프로빈키아)는 어김없이 건설되었다. 따라서 당대 국제적인 세력 판도가 이렇게 바뀌자 정복을 <br>계속 할 때마다 Roman의 "부와 권력"은 더해갔다. 더욱이 Roman의 팽창은 기원전 396년 <br>"티베르 강 계곡"의 통제권을 얻기 위하여 경쟁자 Etruria People의 도시 <span style="COLOR: #ff0000">Veium = Veio</span>을 10년간의 <br>포위 끝에 파괴시키고 얻어진 "부"가 현실화 되면서 지속된 것이기도 했는데 경제적으로는 <br>사실 이러한 시기만 해도 도시 시민들의 생활이 그저 농업만으로도 충분히 유지되고, 이미 !! Urbs- <br>Roma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참고로 습지를 통해 경작지를 <br>얻은 Roma People 들에게 배수 기술은 필수적이었는데 이들은 실제로 운하체계(Cuniculi)를 설계<br>하였고, 활용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Urbs Roma 최초의 곡물 공급지 → Tiber River의 동쪽의 <br>Rus(시골, 영역)과-서쪽의 야니쿠룸 언덕과 바티칸 언덕을 포함한, 지역이었으며, 훗날 대부분은<br>Latium 평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곡물 경작이 농업의 근간을 이루었고, Fresh Vegetable <br>또한 재배되었으며, Greece 농업의 영향으로 Grape &amp; Olive Tree 재배가 전략적인 환금 작물로 <br>취급되었다. 반면에 산간 목초지 에서는 "소와 양" 그리고 숲지대 등에서는 Pork가 사육되었다고 한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b5a80886.jpg" width="500" height="335.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b5a8088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Wolf Romulus &amp; Remu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d550d840.jpg" width="500" height="377.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d550d840.jpg');" /></div>Via Appia Rom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b26ca5e9.jpg" width="500" height="37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2b26ca5e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PQR...</span><br>어찌되었든지 기원전 2 C-기원전 1 C경에 이르면 Urbs Roma <br>도시의 보물 창고에는 Gold &amp; Silver로 살찌워 졌고, Empire의 모습을 <br>변해가는데 동시에 많은 전쟁 포로(노예)들이 도착하였다. 나열해 보면...<br>기원전 201-35,000 → Cartago People, 기원전 177-1,700 → Corsica People, <br>기원전 167-150,000 → Macedonia People, 기원전 104-140000 →Cimbri(킴브리) / <br>Teutoni(테우토니) People 따라서 이러한 많은 자산과 노동력을 이용하여 기원전 <br>2 C 부터 Greece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과 대등해지려는 야망을 가지고 훗날 위대한 <br>도시에 걸 맞는 건축물과 신전 등을 세우게 된다. 또한 이러한 시기 건축된 모든 <br>건물이나 장소에는 <span style="COLOR: #cc33cc">One’s Initials of SPQR</span> 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지게 된다. 한마디로 <br>원로원과 민중의 동반자적 의미를 강조한 상징성을 갖는 뜻으로서 Roman의 법체계 <br>장엄 함을 나타내는 가장 "로마적인...Initials이라고 할 수 있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것이기도 했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23504cec.jpg" width="500" height="83.888888888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23504cec.jpg');" /></div><br><span style="COLOR: #ffcc00">The Stranger / Billy Joel<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23c321c0.jpg" width="500" height="83.888888888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4/67/d0006967_4ad5123c321c0.jpg');" /></div><br></span><embed src="http://www.egumi.org/mboard/mboard/down.asp?bid=board_111&amp;idx=639" width="300" height="68" hidden="true" type="audio/x-ms-wma" autostart="true" showstatusbar="false" loop="true" volume="0"><br/><br/>tag : <a href="/tag/Roman" rel="tag">Roman</a>,&nbsp;<a href="/tag/Aryan" rel="tag">Aryan</a>,&nbsp;<a href="/tag/Palatinus" rel="tag">Palatinus</a>,&nbsp;<a href="/tag/Gens" rel="tag">Gens</a>,&nbsp;<a href="/tag/Populares" rel="tag">Populares</a>,&nbsp;<a href="/tag/Samnium" rel="tag">Samnium</a>,&nbsp;<a href="/tag/Romanized" rel="tag">Romanized</a>,&nbsp;<a href="/tag/SPQR" rel="tag">SPQ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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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3 Oct 2009 17:01:2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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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062043ee.jpg" width="500" height="652.17391304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062043e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Monte Palatino<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04787ae7.jpg" width="500" height="32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04787ae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Loutra Harbour Nisos Kythnos<br></span>강대국의 사전적 의미는 <span style="COLOR: #ffffff">"병력이 강하고,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span> 고대 세계에서 <br>바로 그러한 의미에 부합되는 적합한 국가가 Urbs Roma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역사는 <br>전쟁의 역사이자 군대의 역사(평민)이기도 했다. 왕정기(王政期)를 제외하고 공화정<br>(共和政)이 설립된 기원전 509 년에서 West Roman Empire의 마지막 황제가 잘려나간 407년 <br>까지 10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내전 혹은 외부와의 전쟁을 수행하였던 기간은 대충 어림<br>잡아도 600년이 넘는다. 간헐적인 전투, 사소한 분쟁을 제외시키더라도 이러한 수치는 <br>대단한 것이으며, 그야말로 줄기차게 전쟁에 임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으로서... <br>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6 C Urbs Roma는 당시 문명의 중심을 이루던 Greece- <br>People 들에게 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보잘것 없는 세력이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3 C 무렵<br><br><span style="COLOR: #33ff33">Italian Peninsula</span>를 평정하고, 점차로 서-지중해에서 동방으로 진출하게 <br>되었는데 그 순간부터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br>200년 사이 Urbs Roma는 제정(원수정)이라는 독자적인 정치 지배체계를 확립하고 <br>Hellenism 세계 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포함한 Roman Empire를 수립하였다. <br>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span style="COLOR: #ff0000">Alexandros</span><u>의 후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지위의</u> 거대 국가의<br>탄생이 이루어진 것으로 Hellenism 세계의 영토적 범위를 넘어서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며, <br>그 족적을 커다랗게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온전한 <br><span style="COLOR: #ffcc00">"국가 형성의 틀"</span> 내에서 생성된 Christianity가 훗날 정치적인 지배 구조에 녹아 들어 유럽 문명의 <br><br>기본적인 성격을 결정하는 하나의 사회적 System으로 작동되었다는 사실로서 <br><span style="COLOR: #ffffff">"중세→근대"</span>를 거치며, 생성된 대부분의 도시 탄생의 기원이 역사 속에서 Urbs Roma에 <br>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근거로 자리잡게 되었다. 더불어 Christianity는 광대한 <br>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는 문명의 숙주로서 문화와 제도는 물론이고, Roman Empire이라는 <br>거대한 "틀" 속에서 그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렇다면 당대 !! 보잘 것 없던 Italian Peninsula의 한 <br>귀퉁이 틈새에서 성장한 Urbs Roma가 어떻게 해서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지배적인 위치를 <br>차지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단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2 C</span> 쯤 되면 Italian Peninsula의 통일이라는... <br>하나의 마침표를 찍게 되는데 Urbs Roma는 대략 기원전 3 C부터 반도 최강국 입장에서 동맹국<br>들의 안전을 확보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했을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영토의 지배적 위치를 <br>점유하고 유지하려는 행위에 앞서 선행된 것으로 방위적 형태의 동맹체를 위한 "국가의 틀"을<br>완고하게 가져가려 했던 정책의 일환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시기 무엇보다도 Urbs Roma의 경제적 <br><br>상황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며,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선 <br>Hannibal Barcr와의 전쟁의 결과이면서 저주이기도 한 <span style="COLOR: #ffcc00">자본, 토지, 노예, 시장</span>의 <br>유동성 문제로서 소위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한 Latifundium(라티푼티움) 경영으로 <br>인하여 새롭게 부각된 문제들 그러니까 <u>토지와 관련된 채무관계</u> 그리고 빈곤과 <br><u>조세 및 장기간의 군복무(전쟁)에</u> 시달려 온 평민들의 인구감소 추세가 근본적으로 <br>사회의 불안감을 형성하면서 일차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정치적 두통거리가 되었고, 몰락한 <br>소작농들의 도시로의 이주 현상으로 경제적으로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br>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146년만 해도 꿈 같은 일로서 당시에는 제법 규모 있는 토목 공사가 <br>진행되던 시기로 호-경기는 아니라도 최소한 경제적으로 대규모로 유입된 인구를 국가 <br>차원에서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기원전 130년 대에 <br>이르러 대, 소규모의 전쟁을 치루면서 손실이 누적되자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찾아왔다. 더구나 <br><br>정복활동이 답보상태에 놓이며, 정치, 사회 불안, 과잉 인구로 인하여 <br>곡물 부족 사태로 가격 폭등이라는 최악의 예기치 않았던 사태가 발생하였다. <br>또한 자연 재해가 찾아들어 흉작이 지속되면서 국가의 비상 대권이 필요할 정도로 <br>궁지에 몰리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점이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390년</span> 호전적이었던 Gallia People <br>들의 침입 이 후 찾아온 또 하나의 위기 상황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발생한 일이었기에 <br>Urbs Roma의 혼란 상황은 그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br>전쟁에도 승리해야 했지만 경제적 난국을 돌파해야 할 중차대 한 문제는 점차로 해소되어 <br>가는데 먼저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오기 시작하였고, 곡물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도 <br>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면서 회복되기 시작하게 되며, <span style="COLOR: #ffcc00">Carthago</span>의 몰락으로 속주들이 건설<br>되고, 주요 곡창지대 까지 확보되면서 위기를 타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br>왜 !! 찾아온 것일까 !! 그 이유는 Urbs Roma 곡물 수급 정책에 있었다. 당대...Urbs Roma의 <br><br>주요 곡물 공급지는 <span style="COLOR: #ff0000">3 곳<span style="COLOR: #ffcc00">(Sicilia, Sardegna, North-Africa)</span></span>이었는데 <br>만약 하나라도 곡물 수급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처럼 결정적인 타격을 <br>받을 수 있었던 구조적 문제가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는 Hannibal Barcr의 <br>반도 침공으로 "캄파니아 지역(Neapolis-Capua)" 의 일부 동맹시 들의 배신과 <br>Sicilia에서의 노예들의 반란이 결정적으로 작동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가 <br>개혁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던 때(기원전 134)이고, <span style="COLOR: #ffffff">"농지 정책과 곡물 정책"</span> 등이 <br>이 후 Roman Republic의 핵심적인 정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혁 세력은 <br><span style="COLOR: #33ff33">농지 분배 = 농지 개혁</span>을 추진하며, 항구적으로 Urbs Roma의 곡물 부족 문제를 해결<br>하고자 했고, Tiberius-Gaius Gracchus 형제는 출세가 보장된 자신들의 정치적 <br>입지를 포기하고, 개혁에 올-인 하게 되었는데 Tiberius의 경우 원거리 분배에 이용할 <br>토지가 많았음에도 굳이 시민들을 Land Nearer Rome에 정착 시키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곳에 <br><br>시민(평민-소작농)들을 정착 시키는 것은 토지 귀족들의 <br>Latifundium의 몰수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br>죽음이 앞당겨진 것이라고 확인된다. 반면 Gaius의 Lex Frumentaris- <br>Sempronis(곡물법)는 Roma People들에 대한 곡물 공급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br>Urbs Roma에서는 물론 !! 서양사회에서 최초의 곡물 배급이라는 점이 <br>눈에 띈다. 또한 이것은 귀족, 평민을 망라한 모든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기위한 <br>뜻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어찌되었든지 상당 기간 지속되었던 혼란은 <br>기원전 121-기원전 120년이면 종말을 고하게 된다. <span style="COLOR: #33ff33">→유증된 동방의 왕의 재산의 일부 활용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1a66dc90.jpg" width="500" height="40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1a66dc9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iolet Sugar ...Royal Colo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10b9942a.jpg" width="500" height="35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10b9942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is is Alexander the Great on Horseback During<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0c7a20cd.jpg" width="500" height="32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0c7a20cd.jpg');" /></div></span><span style="COLOR: #ffcc00">Trésor de Gourdon<br></span>애당초 초기 건국 당시 부터 Urbs Roma의 역사는 합법적이든지 그렇지... <br>않든지 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되었고, 그것은 Roman Empire의 성립 시기까지 <br>커다란 변화없이 벌어지던 국가운영의 목적이면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br>그러면 왜 !! Urbs Roma는 끝없이 싸우고 투쟁해야 했을까 ? 만약 "로마 인"이 정당한 <br>전쟁 만을 수행하였다면 어쩌면 이렇게 끊임없이 싸우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br>일이다. 우선 그들의 가치관 속에서 <span style="COLOR: #ffcc00">"군사력"</span>이 차지하는 비중이 정도 이상이었고, 특정 <br>지배 세력 집단에서 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예컨대 <span style="COLOR: #ff0000">Laudatio<br></span><span style="COLOR: #ffcc00">(라우다티오, 칭찬)</span>, 혹은 <span style="COLOR: #ff0000">Dignitas</span><span style="COLOR: #ffcc00">(디그니타스, 영예)</span>라는 언어는 온전히 군사적 영역에 <br>속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가족이라는 단어가 많은 것에서 보듯이<br><span style="COLOR: #33ff33">"부계와 모계"</span>를 확실히 구분 하는 것 만큼 군사적 측면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된다는 <br>사실은 그 자질이 뛰어난 인물을 의미 했다. 또한 이러한 자질은 그들의 사회적 출세에 <br>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었으나, 지배 계층은 나름대로 치열한 경쟁 사회에 놓여져 어느 시점부터 <br><br>명문가에 태아난 것만으로는 사회적 출세가 약속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br>Urbs Roma의 지도자 계층이라고 함은 재무관에 취임하는 것을 첫 단계로 <span style="COLOR: #ffffff">호민관 → <br>감찰관 → 법무관 → 집정관으로</span> 이어지는 승진 단계를 거친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br>출세 길이었고, 꿈의 길이라고 불려지던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Urbs Roma의 대외적 <br>팽창 시기 집정관은 2 명이었으므로 누구나 이러한 꿈의 길을 성공적으로 밟게되는 <br>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로서 이러한 관직(행정관)에 오르려 한다면 <br><span style="COLOR: #ffffff">"선거"</span>에서 <u>반드시 승리 해야만 했다</u>. 또한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자신에게 뛰어난 <br>자질이 있음을 Urbs Roma의 시민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던 것이며, <span style="COLOR: #ffffff">군사적 역량을</span> 뜻했다.<br>또한 집정관의 가장 중요한 직무 증 하나가 무엇보다도 군단의 사령관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br>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고, 그러한 기회의 장이 되었던 곳은 피튀기는 전쟁터이었으며, <br>결과적으로 전쟁이 없다는 점은 자신의 능력을 내보일 수 없었다는 사실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br><br>더구나 Urbs Roma의 제도는 그들에게 절실한 문제를 노출시켰는데 <br>먼저 그들의 임기가 1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중임은 불가능 하였기에 <br>관직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span style="COLOR: #ffffff">10 년이라는</span> 공백 기(空白期)를 주사위 놀이를 하며 보내야 <br>했다. 그러므로 군사적 활약에 의해 명성을 쌓을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고, 특별히 <br>집정관 같은 군사 작전권과 명령권을 가진 관직(행정관)의 경우 <span style="COLOR: #ffffff">"개선식 거행의 권리"</span>가 <br>있는 만큼 심리적 압박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따라서 인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br>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전쟁을 수행했으며, 애초부터 이들은 평화적 계약관계가 아니라면 <br>오히려 국익과 자신의 경력 관리를 위해서 망설임없이 군사적 행위 !! 전쟁을 감행 했던 것이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24f826d5.jpg" width="500" height="33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24f826d5.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pua Antica Amphitheatr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4bca8a31.jpg" width="500" height="35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4bca8a3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arquinia ....</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2fd2fa29.jpg" width="500" height="33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2fd2fa2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 Ruins of Utica</span><br>따라서 이러한 사례들이 가감없이 증명된 것이 기원전 5 C 까지 <br>주변의 족속들과 치룬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 빈번했던 개선 식 행진이었다. <br>또한 Republic...으로 이행되며, 평민과 귀족의 신분 투쟁에서도 그 점을 <br>엿볼 수 있는데 대외 전쟁에서 평민은 군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계층(군사력 <br>유지 목적 / 보병 단위)이었다. 즉 !! 귀족이 평민들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br>것이 있었다는 사실은 Urbs Roma의 군제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 된다. 그러한 <br>사정에 의해 토지귀족들은 평민들은 철저히 탄압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을 것이다. <br>그리하여 혜택 받은 계층으로 불리는 돈 많은 평민의 탄생을 양산시키게 된다. <br>반면 평민들도 극단적으로 저항하여 귀족들의 <span style="COLOR: #33ff33">"권위" </span>를 무시하면 공격의 빌미로서 제공<br>될 수 있었던 여건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사회적 붕괴로 연결될 수도 이었던 위험 <br>요소가 있어 사회 구조를 혁신하려는 다소 과격한 투쟁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지 <br>않는 한 자제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평민의 입장에서도 군사적 요소가 지도자에게 <br>있어서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지배 계층의 강군 일변도의 정치적 가치를 <br>성립시킨 사회적 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확인되는 되는 셈이다. 물론 !! 여기에 더해서 <br>전쟁의 승자가 가져오는 "부"에 대한 기대와 영토적 개념의 "토지 획득"이 성립되었기에...<br><br>무엇보다도 귀족이나 평민이나 할 것없이 귀중하게 여겼던 <br>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설명되었듯이 전쟁은 전리품을 비롯해서 <br>막대한 "부"를 Urbs Roma에 가져 왔다. 그렇지만 전쟁의 승리 = 패전국<br>이라는 공식에서 경제적 착취가 선행되었던 시기는 지중해의 패권이 <br>성립된 이 후의 일이었다. 또한 경제적 이익에 따라 대외적인 문제에도 개입<br>되어진 시점이 바로 이때이기도 하다. 그것은 초기 Roman Republic <br>사회의 형성기의 경험과 해외 진출 이 후 많은 노예가 Italian Peninsula에 유입<br>되면서 형성된 경제 구조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신분 투쟁의 원인으로서 평민<br>들의 경제적 비참함이 있었던 것은 그 해소 방식과 전쟁이 크게 연관되어 있음을 <br>명확하게 보여 준다. Urbs Roma는 기원전 4 C 초기 Etruria People의 도시 <span style="COLOR: #ff0000">Veium = <br>Veio</span>를 점유하면서 최초의 공유지가 확보된 후 귀족들은 평민들의 문제(토지) 해결 방식에 <br>있어서 자신들의 영지를 나누기 보다 정복을 통해 얻어진 영토를 기반으로 공유지를 몰수하여 <br>그곳에 Urbs Roma 시민이나 Latin League의 반-시민권을 확보한 시민들을 정착시켰던 셈이다. <br><br>즉 !! 전쟁에 참여한 병사(평민)가 퇴역병이 되면 아예 그곳에 정착시키는<br>방식으로 유도(이주)되었다고 이해 해도 무방하다. 예컨대&nbsp;<span style="COLOR: #ffffff">&nbsp;"마리우스의 노새" <br></span>들을 → <span style="COLOR: #ffcc00">Gallia Cisalpina</span> 지역에 한정해서 정복과 함께 확보된 공유지를 퇴역 <br>병에게 분배하며, 이주를 장려 했던 정책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만 않다. 그리고 <br>전쟁 포로들을 노예화 하면서 어느 정도 까지의 사회적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br>것인데, "채무 시민을 노예 신분"으로 낮추어 매각되는 사례를 방지할 수 있었던 것 효과도 <br>거둘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전쟁에 의한 승리는 궁극적으로 <br>경제적 이익과 함께 Urbs Roma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불평등 요소까지 해소시키는 지대한 공을 <br>세우게 된다. 다시 말해 귀족과 평민이 Win-Win 하고자 했던 정책적 수단의 꼭지점에서 <br>최우선 고려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전쟁이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Urbs Roma가 <br>팽창하며, "제국주의화" 되어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준 셈이었다. <span style="COLOR: #33ff33">→ 멈출 수 없었는 전쟁과 시민권 배급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4eb0c5f1.jpg" width="500" height="556.07043558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4eb0c5f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ome Colosseum Inscription</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3ac93f73.jpg" width="500" height="33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3ac93f73.jpg');" /></div></span><span style="COLOR: #ffcc00">Etruscan Chariot Wheel</span><br>한편 이미 경제 구조에서 중요한 윤활유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노예"의 확보에도 <br>절대적으로 작용된 것이 전쟁이었다.&nbsp;따라서 이쯤되면 도저히 질 수 없었던 전쟁을 수행<br>해야 했던 것이 귀족(지배 계층)이었고,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위대한 Gens를 통해 <br>인재들이 배출되며, 사람과 사람 간의 경쟁에서 구조적으로 집합과 집합과의 대결이 전개<br>되었서 이 후 모든 것을 묶어 권력 투쟁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눈에 띄는<br>사실은 훗날 노예와 노예의 전쟁도 성립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br>노예는 거의 필수적인 존재로서 위치를 다져 나가며, 어찌되었든지 이러한 문제는 Urbs Roma <br>사회의 특성이라는 점에서 인식하고 있었어야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여지며, 마지막으로<br>Urbs Roma가 전쟁을 필요로 했던 상황은 그들의 동맹관계, 대외적 지배의 전개 과정에도 있었다. <br><br>일단 그들은 패배시킨 상대에 대해 지배적인 정책을 취하는 일이 없었다. <br>즉 !! 군사적 동맹국으로 대우하는 것으로서 영토의 일부가 공유지로 접수되고, <br>공납을 의무화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의무적으로 이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br>Urbs Roma가 전쟁을 수행할 때 "보조적인 군단"을 지원해 주는 일이었다. 따라서 <br>당시 군사적 Network의 핵심을 이해할 때 경제적 착취보다는 지휘관을 "로마 인"으로<br>하였던 관계를 말하며, 이러한 사실은 온전히 전쟁터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br>지배적이며 우월적인 원리로서 정교하게 발전시켜 갔다. 다시말해 만약 !! 전쟁이 <br>없다면 어쩌면 서로의 관계가 불확실해져 누가 주도적인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구분<br>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 상황을 상정할 수도 있을 듯 싶은데 전쟁은 권력의 중심에서 <br>필수적인 도구로서 작동되었던 것이다. 반면 정복 지의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권력 <br>기반을 Urbs Roma 권력 내부에 설정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인식시켜 주었던 방식도 <br>전쟁이었다. 따라서 반란은 있을 수 있었지만 이미 정복한 지역이 직접적으로 Urbs Roma에 <br>압력으로 작용 되어진 것은 아니다. 참고로 Urbs Roma는 <span style="COLOR: #ffffff">선전포고 시...</span>적국과의 <br>경계에서 <span style="COLOR: #ff0000">Fetiales</span><span style="COLOR: #ffcc00">(페티알리스)</span>라고 하는 사제가 선전 포고를 하는 규정을 준수하고, <br>Jupiter 신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말해야 할 때만 <span style="COLOR: #ff0000">"Bellum Justum<span style="COLOR: #ffcc00">(정당한 전쟁)</span> "<br></span>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로마 인" 들이 전쟁을 맹종하는 성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br>구실(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며, 기본적으로 Urbs Roma는 전쟁을 시작함에 있어서 <br>종교적인 절차를 거쳐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고 개전의 이유가 정당하지 안다면 그것이 <br>Urbs Roma의 이익에 해당되는 전쟁이라고 해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br><br>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Urbs Roma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들이 수행한 <br>전쟁은 모두 정당한 전쟁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진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br>무엇보다도 전쟁의 기회가 많이 주어졌던 것은 이미 정복되었거나 로마의 영향력 <br>하에 있던 수많은 약소국들의 정치적 요구에 의해서인데 당시 !! 세계는 Urbs- <br>Roma에게는 언제나 기회의 땅이 되었던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최강 대국이 되어버린 <br>Urbs Roma의 국제 관계는 근대 이 후의 국제 관계와 엄격하게 구분해 다른 <br>것이었다. 유럽에서 각국이 제각기 국가의 주권을 존중해 국제 관계를 전개하게 된 <br>시기는 30 년 전쟁 이 후 <span style="COLOR: #33ff33">17 C</span> <span style="COLOR: #ff0000">Peace of Westfalen<span style="COLOR: #ffcc00">(베스트 팔렌 조약)</span></span> 이 후 부터이다.<br>그러므로 그 이전 상대국 주권을 존중하여 외교가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대 <br>상황을 이해하는데 위험적 요소를 갖고 있다. "로마 인"들의 자치와 자유에 대한 인식은 바로 <br>이점이 우선 시 되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Dignitas(위엄) 있는자에게 <br>주어진 <span style="COLOR: #ff0000">Auctoritas<span style="COLOR: #ffcc00">(권위)</span></span>로서 명령하는 것은 상대가 누구이든지 문제 있는 행위로 전혀 생각<br>되지 않고, 상식적으로 평등, 대등과 같은 감각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로마 인"들은 <br>자신들에게 권위가 있다면 그곳이 세력 범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개입하는 <br>것을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제 3국의 자치를 침해(주권)하고 있다고는 전해 생각하지 <br>않았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관점이 상대적으로 주요 세력들에게는 하나의 알력으로 작동되었고, <br>곧 !! 개전에 이르는 이유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반란에 대한 응징(로마의 권위) 위상 회복과 연결<br></span><br>결과적으로서 Urbs Roma에는 애초 국가 성립 초기부터 전쟁을 원하는 <br>고도로 <u>군사적인 사회 구조와</u> 전쟁을 불가피하게 연결시켰던 <u>경제 구조가</u> 작동<br>되었고,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br>아무리 수행한다고 해도 승리 하지 못한다면 말짱 꽝...아닌가 !! 이러한 점에서 <br>패전의 기록보다 승리의 기록이 우월했던 Urbs Roma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전략과 <br>전술이 뛰어난 군대가 있었고, 거대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다. 인재 수급... 이것은 <br>이미 Latium 동맹이 이뤄지고, 하나의 조약이 청동 서판에 새겨졌다는 사실이 증명해<br>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3 C-기원전 2 C</span>의 영토와 영향력은 모두 제국의 형성 <br>길목에서 확실한 위치를 점유한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이면에는<br>(평민 = 소작농)이 주축이된 군사력이 위치 한다는 점이다. 강조 하지만 이것은 귀족과 <br>평민 간의 권력 투쟁의 정점에 이르러서도 변함없이 추구되었던 그들의 가치이기도 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57a7bc25.jpg" width="500" height="831.02493074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57a7bc25.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ividale Statue of Julius Caesar by Cathedral<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5990b92a.jpg" width="500" height="39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5990b92a.jpg');" /></div>Bocca Della Verita<br></span>.<br>.<br>.<br>공화정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집정관에 오른 <br>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이외는 요람에서부터 이미 <br>집정관으로 만들어진 사회이기도 했다. <span style="COLOR: #33ff33">→ Marcus Tullius Cicero <br></span><br>귀족은 혈통이 아니라 업적에 따라 불후의 존재가 된다. 귀족의 <br>생활은 격렬하게 힘든 시련의 연속이었고, 고위 행정직에 오르지 못하거나 <br>원로원의 의원직 마저 상실한다면 귀족의 후광은 덧없는 것이 된다. <span style="COLOR: #33ff33">→ Arrivistes<br></span>.<br>.<br>.<br>기원전 154년 의 영웅 !! <span style="COLOR: #ffcc00">Tiberius Sempronius Gracchus</span> 장례식이 <br>거행되었다. 그의 사체는...Triumphator(트리움파토르) 개선 장군의 의복에 <br>싸여 Forum Romanorum(포룸 로마눔)에 운구 되었고, "은빛 별"이 새겨진 <span style="COLOR: #cc33cc">Royal- <br>Color Toga</span>가 입혀진 채로...&nbsp;옆에는 그의 경력에 어울리는 관직의 상징인 <br>막대기와 도끼가 놓여 있었다. 뒤를 따르는 귀족들은 존경의 표시로 수염을 깎지 <br>않았으며,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베일" 을 둘렀다. 여성들은 슬픔에 잠겨 <br>가슴을 두드리며...헝클어진 머리를 쥐어 뜯고,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었는데 직업적으로 <br>곡을 하는 사람 들과 무희, 과장된 몸짓으로 죽은 이를 흉내내는 연기자도 있었다.&nbsp;<br>또한... 행렬에서 걸어가는 많은 남성들의 차림에서 가장 무섭게 보였던 것은 그들이 쓴 <br>"장례 가면"이었다. 그것은 <span style="COLOR: #ffcc00">Large-Gracchus</span>와 선조 들의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br>닮게 만든 밀랍 가면이었으며, 이렇게 해서 Roman Republic의 부자와 평민들이 지켜<br>보는 앞에서 가면을 쓴 남성 들은 Forum의 연단 위에 모셔져 있는 사자(死者)와 놀랄 만큼&nbsp; <br>닮은 일종의 <span style="COLOR: #ffffff">"가족 유사성을 표현"</span> 하게된다. 가문의 조상을 대표하는 이들이 연단 위의 <br><span style="COLOR: #ffffff">"상아 의자"</span>에 앉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사자(死者)가 생전에 이룩한 업적을 기리는 연설이 <br>시작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영광으로 뒤덮은 온갖 업적에도 불구하고, Large-Gracchus는 <br>개인적인 성공을 추구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은 다른 무엇보다도 <br>한 가지 덕성을 공적으로 찬양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Roma People 들은 그를 개인적인 <br>야심보다 Roman Republic에 대한 봉사를 앞세웠던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했다. 따라서 장례 <br>연설은 <span style="COLOR: #ffffff">"밀랍 가면"</span>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였다.&nbsp;그리고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켰다. <br><br>"용감한 사람의 영광스런 기억은 계속 <br>새로워진다. 고귀한 행위를 한 사람의 명성은 결코 <br>죽지 않는다. 국가에 훌륭한 봉사를 행한 사람의 명성은<br>누구에게나 알려지고, 후손들에 남겨지는 유산의 일부가 된다." <br><br>당연하지만 장례식에는 그의 후손들이기도 한 아들이 있었고, <br>그와 혈연으로 묶인 가족이 있었다.<span style="COLOR: #ffffff">"아버지"</span>가 Roman Republic을 <br>위해 봉사함으로써 이룬 성공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동기부여<br>(動機附與)의 자리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장례 절차가 끝나며 사자(死者)는 <br>화장되었다. 이것으로서 당시 아홉 살 난 사자(死者)의 아들은 "아버지" 와 <br>같은 비슷한 조사(弔死)를 얻기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도 감내하리라는 욕구가 서서히 <br>차 올랐을 것이다. 이제 그는 <span style="COLOR: #ffffff">"아버지"</span>의 이름과 영광을 지켜나갈 책임을 지게 <br>되었다. 또한 그 책임의 무게를 능가하는 것은 오직 또 하나의 가문, 즉 !! <br>그의 <span style="COLOR: #33ff33">"어머니"</span>이기도 한 "코르넬리아"의 가문의 특권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br>책임 외에는 없었으며, 그들이 항상 그랬듯이 장례식이 끝나게 되면서 Large-Gracchus의 <br><br>"분골"과 그의 <u>선조들의 밀랍 가면은 가문의 저택에 안치되었다</u>. <br>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을 통해 Small-Gracchus는 가장 위대한 3 개의 <br>Gens !! 귀족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150년이 못미치는 기간 동안 이러한 <br>3 개의 가문은 서로 힘을 합쳐 Roman Republic의 위치가 Italian Peninsula → <br>Mare Nosrtum(우리의 바다) 전역의 패자로 바귀는 과정을 주도 했으며, Large-<br>Gracchus의 장례식이 진행될 무렵 "로마 인"들은 지중해는 물론이고, 바다를 <br>둘러싸고 있는 내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례식에서의 소년은 그의 부친과 <br>같은 성대한 장례식을 갖지 못한다. 그 후로부터 22년 뒤 그의 시체는 토막난 채 <br>Tiber River에 던져졌다. 그를 살해한 자들은 "적"이 아니라 장례식에서 보았던 원로원 <br>의원들이었다. Gracchus의 짧고 논란이 많은 생애가 Roman Republic의 역사에 <br>결정적 전환점 즉 !! <span style="COLOR: #ffffff">"위기와 교차"</span> 했던것은 결과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달성한 혜택을 <br>누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 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부의 분배 결정의 시기"에 <br>직면하여 부유층(귀족) 혹은 빈민층(평민) 들이 신분 투쟁을 넘어 권력 투쟁에 근접하였고, 당대 <br>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좀더 많은 <span style="COLOR: #ffcc00">"부와 권력"</span> 획득에 집중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br>Roman Republic 패권을 장악하는 순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준 가치들을 포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630c4fd6.jpg" width="500" height="35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630c4fd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 Tomb of Cecilia Metella<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69cdbf4a.jpg" width="500" height="542.00542005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69cdbf4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ornelia Scipionis Africana<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6dd8360e.jpg" width="500" height="35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6dd8360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onte Rotto</span><br><span style="COLOR: #33ff33">"자유 도시"</span>는 인간이 최대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의미하였고, <br>Civitas(시비타스)를 가진다는 것은 문명화되었다는 사실을 뜻하였으나 지중해 <br>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통일을 구축한 Roma People 들은 "적"들에게 그러 했듯이... <br>시민 들에게도 냉혹하였다. 정복 전쟁을 통해서 평민들이 피를 흘리며 가꾼 황금<br>열매는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소수 귀족(= New Nobiles, 노빌레스)들에게 집중되었는데 <br><span style="COLOR: #ffffff">"정복과 속주"</span>의 경영에서 획득한 경제적 기회(이윤추구)를 최대한 활용한 System이 <br>사회적 불균형을 낳았다. 신비스런 존재감으로 생명력을 얻은 신전처럼 도시의 바탕은... <br>공동체 적 삶에 의존되어야 했으나 현실 속에서의 상황은 냉정하기만 했다. 점차로 <br>상류층의 군중에 대한 비웃움은 노골화 되어 갔으며, 대체로 그 대상은 궁핍으로 인해 <br>낙오한 시민 = 씻기지 않은 대중이라는 뜻의 Plebs Sordida(플레브스 소르디다)들에게 집중<br>되었다. 더구나 "노예 노동"을 통한 Latifundium(라티푼디움)으로 귀족들은 정복의 결실로 <br>얻어진 "토지"를 독점하게 된 효과를 누리게 되면서 사회 전체는 불평등한 "부와 권력"의 구조적 <br>모순을 드러내며, 취약해져 갔는데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 곳이 있다면 Italian Peninsula <br>통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span style="COLOR: #ff0000">"Legion<span style="COLOR: #ffcc00">(로마 군단)</span>"</span>이었다. Urbs Roma의 계급과 <br>신분의 구분은 사실 도시의 건설과 기원에서도 뿌리 박혀 있었다. Urbs Roma "일곱언덕"은 <br><br>외부에서 들어온 자 들의 결국 자리잡게 되는 상륙 항구이었고, 서로 간에 <br>본능적으로 이끌려 혼란을 공유하는 구역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Urbs Roma<br>에서는<span style="COLOR: #ffffff">"중산계층"</span>과 같은 존재는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일곱 언덕 중 하나는 <br>가장 배타적인 곳이며, 부유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할 수 <br>있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span style="COLOR: #ff0000">Insulae</span><span style="COLOR: #ffcc00">(인술라)</span>라고 불리는 무허가 밀집 건물 들이 들어서 <br>삶에 도전적인 사람들이 살아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Palatinus <br>언덕의 경우 승자를 위한 곳으로서 존재 가치가 뚜렸했으며, Aventinus 언덕은 패배자를 <br>위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span style="COLOR: #33ff33">Roman Republic ↔ New Nobiles</span>들과 대외 <br>팽창에서 이익을 나누어 가졌고, 일부 혜택받은 평민들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귀족<br>들과는 달리<span style="COLOR: #ffffff">"토지 소유"</span>보다는 정복의 부산물로써 귀족들이 신분 상 손댈 수 없었던 <br>해상무역, 군납, 군대의 수송, 토목공사, 속주에서의 징세 청부 등을 독차지하여 재력가로 <br>성장하게 된다. 또한 훗날 "<u>서구 자본주의의 원형으로서</u> 징세 청부업(금융업)"은 <br>그들에게 가장 커다란 수익원이 되어주었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Equites(에퀴테스)라고 <br>하였는데 그 뜻은 돈이 가장 많이 드는 <span style="COLOR: #33ff33">"기병 부대"</span>에 복무 할 수 있는 자격 즉 !! 금전적 능력<br>(신흥 부호)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 값비싼 장비를 자비로 마련할 수 있었던 그들은 <br><br>일반적으로 귀족<span style="COLOR: #ffcc00">(중세 = 영주 + 기사)</span>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고위 관료 <br>혹은 원로원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으나 인적 구성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br>지배 계급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종 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민들은 <br>정복으로 국가의 영토가 증가 될수록 경제 구조가 "소비중심 사회로 형성" 되면서 오히려 <br>가난해졌으며, 당대 Urbs Roma 사회는 "사치와 방종"이 지배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br>사회로 변모되어 있었다. 따라서 빈부의 차이는 과거보다 확대되었고, 공화정 특유의 <br>전통적인 봉사와 헌신은 사라지고, 풍요로운 향락적 가치를 맹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br>가운데 Marcus Porcius Cato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원로원의 <span style="COLOR: #ffffff">"공화주의적 토지 귀족"<br></span>들을 중심으로 "선(善)"을 회복함과 동시에 과거의 모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잠시나마 <br>포착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제로 신흥부유층을 통렬하게 비난하며, 자신의 농장에서 <br>중-노동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생활을 제시 하였으나 애당초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span style="COLOR: #ff0000">Stoa <br></span>학파의 금욕적인 철학을 비난하는 내재적인 모순 때문에 어떠한 성과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7a64bdb9.jpg" width="500" height="34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7a64bdb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ensus Friez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7665cbfc.jpg" width="500" height="37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7665cbf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halanx...<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794c176a.jpg" width="500" height="32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794c176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Forum Romanum</span><br><span style="COLOR: #ff0000">Punic War</span> 말기 대략 기원전 146부터기원전 30년 까지의 기간은<br>Italian Peninsula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br>기원전 133을 기준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계급 투쟁, 권력다툼, 암살, 반란 그리고 <br>전쟁 등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시대 그러니까 보편적인 상황<br>인식을 가능하도록 돕고 있던 시기 사회적 위기를 절감한 귀족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br>Greece Type의 <span style="COLOR: #33ff33">"자유와 평화"</span>를 표명하면서 나타난 평민의 지도자(호민관)이기도 <br>했고, 이들은 평민은 물론이고, 진보적 성향의 일부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br>이끌어 내고 있었다. 또한 사회의 병폐는 "중소 자영농민층"의 몰락 때문이라고 확신하며, 개혁 <br>성향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시기적으로 동방의 "뜨거운 감자"이면서 <br>부유한 속주들을 거느린 도시 <span style="COLOR: #ff0000">Pergamon</span><span style="COLOR: #ffcc00">(페르가몬)</span>이 기원전 133에 Roman에 유증(遺贈)<br>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 또한 Roma People 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손에 쥐게 <br>되었고, 동시에 비운의 Gracchus(그라쿠스) 형제들에 의해 때이른 개혁이 진행 되었다. <br>그렇지만 이러한 국가적 재산의 처리 여부를 앞두며, 행복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br>한 번에 입안에 넣어 나눠 먹기에는 떡이 컸던 셈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민중의 지도자로 <br><br>호민관에 선출된 <span style="COLOR: #ffcc00">Tiberius Sempronius Gracchus</span>가 그 많은 국가재산을 개혁 <br>비용으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며, 아마도 이러한 시기부터 그나마 유지되었던 <br>귀족과 평민의 느슨했던 결속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br>"자유 농민"이 몰락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은 <br>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군사력이었다. 다시 말해 !! 아무리 유능한 "장군과 <br>기사 (기병)"들이 있다고 해도 평민들로 이뤄진 병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더구나 <br>"Roman Legion(로마 군단)"의 기본전술은 병력에 의존하는 군단 단위의 System이었다는 <br>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Roman Republic을 위대하게 이끌었으며, 토지(땅)로 부터... <br>뿌리를 찾았던 투박한 손을 가진 사람(평민)들을 살리지 않느다면 미래는 없다고, 단정하게 <br>된 것이고,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에 선출된 Tiberius Grachus(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러한 사회적 <br>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혁의 선례를 찾아 본 듯하다. 따라서 Tiberius는 <span style="COLOR: #ff0000">Pericles</span><span style="COLOR: #ffcc00">(페리클래스)</span>의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9da7a04a.jpg" width="500" height="34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9da7a04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 Last Day of Pompeii<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90c5feeb.jpg" width="500" height="38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90c5feeb.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thena-Schale Hildesheimer Silberfund<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9f1c7633.jpg" width="500" height="279.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9f1c7633.jpg');" /></div>Julius Caesar<br></span>민주적 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기원전 367-366 통과된 <span style="COLOR: #33ff33">Lex Licinia-Sextia</span> 법을 <br>부활시켜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는 방법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즉 !! 기본적으로 토지를 <br>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유지를 분배 하려는 의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법률에 <br>의해 정해진 초과 분은 정부가 몰수하며, 소규모로 분할하여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br>의도가 배경에 깔려 있었던 것(토지 상한선-1000 유게라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30 <br>유게라 씩 토지를 추첨분배 방식)이었다. 어찌되었든지 이러한 혁신적 치유 책은 보수적인 계층<br>(귀족)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비-합법적인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수반하는 <br>것으로 마침내 보수계층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에 의해 좌절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br>희망은 9년 후 쯤에 비참한 최후를 당했던 형을 대신한 Gaius(가이우스)에 의해 새롭게 기획<br>되어 민중의 몫"을 찾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애초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먼저 <br>Pergamon(페르가몬)으로부터 곱게 유증(遺贈) 된 엄청난 국가 재산이 Gaius시기 일부나마 <br>민중의 몫으로 활용가능해졌다는 의미인데 형만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Gaius는 한술 더 떠서...<br>Tiberius를 죽인 원로원 의원들이 살려 놓은 <span style="COLOR: #ff0000">Lex Sempronia Agraria<span style="COLOR: #ffcc00">(농지법)</span></span>에 더해서 사회 <br>개혁을 더욱 확대하여 강력하게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함께... <br>좀 더 조직적인 개혁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재판을 거치지 않고 "로마 시민"을 처벌<br>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법률과 민회에서 해임된 행정관은 다시는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법률적 규정은 <br>다분히 Tiberius의 죽음과 관련 있는 인물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 Roman Republic는... 여러 <br>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곡물"을 거의 수입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가 재정의 고갈을 염려 <br>했던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재정은 건실하였다. 그 이유는 Anatolia(= Pergamon)의 속주에서 막대한 <br><br>세금을 징수해 국고에 채웠기 때문으로 이를 위해 Gaius는 입찰을 통해 선정한 <br>Publicanus(= 푸플리카누스, 에퀴테스의 민간 조합)에게 속주의 세금 징수를 일임시키고, <br>징수된 세금의 1 할을 내주는 법안을 발의하여 법제화 했다. 이른바 Tax Farming(징수도급)<br>이라고 불리던 이러한 제도는 공화정이 끝날 때 까지 존속시키는 한편 "에퀴테스"가 <br>주축이 된 이러한 조합은 원로원의 가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법규와 함께 제정되었다. <br>재미있는 사실은 호민관에 입후보하지 않았던 Gaius가 시민들의 자발적 지지로서 재선<br><span style="COLOR: #ffffff">(기원전 123 →기원전 122)</span>할 수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사실에 고무되어 Gaius는 그 어떤 <br>조절없이 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해 다양한 법을 제정했다. 한편으로 Gaius는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br>위하여 거대한 곡물 저장소를 Tiber River 유역에 세우며, 빈민자들을 위해 곡물을 저렴한하게 <br>판매하고, 무산시민을 새로운 식민지에 이주를 유도하였으며, 시민들을 속주에서 착취하는 <br>총독들을 재판할 수 있도록 배심원에 포함시키는 혁신을 단행하였고, 동맹국 시민들에게도 Roman-<br>Republic의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제안 하였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갈 때까지 간것 아닌가 싶다. <br>이처럼 <span style="COLOR: #33ff33">Gaius Gracchus</span>의 급진적이며 단세포적인 정책은 평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br>반면에 시간이 갈수록 원로원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으며, 졸도하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br><br>Gaius는 보수계층의 제거 대상 명부에 올라 꼿곳한 원로원 의원들의 저주를 받기에 <br>이르렀으며, 꼭두각시 호민관을 내세워 각종의 방해공작과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이간질 <br>술책 등의 비열한 방식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Carthago 식민시의 <span style="COLOR: #ffffff">"농지 분배 문제"</span>와 <br>공공시설 건설지를 결정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Gaius 제거 작업을착수하였다. <br>과정은 정교하게 진행되었으며, 먼저 <span style="COLOR: #ff0000">Senatus Consultum Ultimum<span style="COLOR: #ffcc00">(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span></span>을 <br>발동 하여 집정관을 통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는데 비-공식적으로 집정관이 어떤 <br>조치를 취하더라도 원로원이 승인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개혁세력들은 <br>졸지에 모두 제거되었고, Gaius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명확하지만 Gaius Gracchus는 <br>자신의 개혁정책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span style="COLOR: #33ff33">"개혁의 실패"</span>가 법 체계를 <br>초월하여 팽창하고 있었던 공화정의 위기를 가속화 시켰다는 사실로서 민회의 권력이 확대 되던 시점<br>에서도 귀족들은 사회적 불화의 원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억압과 기존의 체제 유지 만이 <br>유일한 해결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대략 이러한 시기 Urbs Roma의 정치적 구조는 <br>끝없는 귀족과 평민의 대치 상황으로 몰렸고, 충돌을 피하면서 평화적으로 대응하는 대신에 서로 <br>간에 세력 확장을 꾀 하게 되었다. 단순하게 접근하자면 이제는 당파(Optimates, 옵티맡테스-벌족파 / <br>Populares, 포풀라레스)-평민파 양분된 구조)를 결성하여 치열한 신분투쟁을 넘어 권력 투쟁이 <br>전개 되었다는... 사실로서 Roman Republic는 이제부터 군사력을 통해 적대적 권한을 추구 할 수 <br>있는 선례를 만들게 된다. Tiberius Grachus가 예견한 대로 개혁의 실패는 군사력의 쇠퇴로 이어진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a2a4c9b3.jpg" width="500" height="33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a2a4c9b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erman Belgian Shepherd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b2570501.jpg" width="500" height="41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b2570501.jpg');" /></div>Pontic Kingdom<br></span>Roma People는 지중해를 정복하였으나 당대의 기반은 견고하다고 <br>볼 수 없었다. 더구나 Gallia(켈트) &amp; Germania(킴브리인과 튜턴인) 지역의 <br>위협이 상존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Roma People 들은 벌족파와 민중=평민파으로 <br>나뉘어 당쟁이 심화 되고, 혼란속에 빠져 들어 내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br>이러한기회를 틈타서 무능한 원로원을 배제하며, 지배자로 우뚝 솟은 인물은 민중의 장군<br>이기도 한 Marius(마리우스)이었다. 그는 Numidia의 반란을 진압한 후 국민적 명성을 <br>얻었으며, <span style="COLOR: #ffffff">"자유 농민의 몰락"</span>으로 약화된 "로마 군단"를 개편하여 정복 국가 <br>Roman Republic의 명성도 회복하고자 했으며, 당시 !! 이러한 움직임은 긍정적인 것이기도 했다. <br><br>그렇지만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2 C</span>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사실이 결국 화근 덩어리가 <br>되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Roma People 들은 기원전 1 C에 이르면 동맹 시들의 <br>반란과 함께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양대 전쟁에서 <br>위대한 승리를 하지만 내부적인 취약성이 드러나며 Roman Republic은 원하지 <br>않았던 방향으로 곤두박질 치게 되었다. 당시 위기로 보여진 일련의 사건은 오래 전부터 <br>불만을 삭이고 있던 산악지대 족속들이 무장을 갖추고,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br>그들의 선조가 그랬던 것 처럼 평원을 휩쓸며, "캄파니아 지역"을 압박해 들어간 사건이 <br>그 하나이고, "한니발" 이래 최대의 강적 <span style="COLOR: #33ff33">Pontus(= Mithridates)</span>가 공공연하게 선전<br>포고에 나선 것이 두 번째 사건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Roma People 들 입장에서는 <br>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Anatolia→Black Sea 연안에서 도발한 "전제 주의" <br>국가 Pontus의 경우 무적의 "로마 군단"을 앞세워 무찔러 버리면 그만이었으나 Italian- <br>Peninsula 내부의 혼란 상황은 위협적이었고,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span style="COLOR: #ffffff">"사비니 여인의 강탈"<br></span><br>사건을 따로 언급 하지 않더라도 이로인한 <span style="COLOR: #ffcc00">Roma People VS Sabini Pwople</span> <br>간의 전쟁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사비니 여성"들이 아버지와 남편들 사이에서 <br>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고 호소했던 순간...그러한 호소가 받아 들여져 종국에는 <br>함께 일곱 언덕에 정착하게 되었던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들을 담아내고, 있으며 아름다운 <br>이야기로서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일찍이 고대 사회를 <br>통털어<span style="COLOR: #ff0000">Ci<span style="COLOR: #ff0000">vitas</span></span><span style="COLOR: #ffcc00">(시비타스)</span> 문제에서 "로마" 만큼 관대한 도시는 사실 없었다. 더불어 도시의 <br>진정성에 있어서도 일곱언덕에는 언제나 다양한 과거가 공존되었는데 나름대로 사연을 <br>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Urbs Roma의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면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br>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선택하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었는지도<br>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로마 인"으로 인정 받고 살아 간다는 사실감이 전달해 주는 상징성 보다 <br>어느 시기부터 이들이 성립시킨 도시와 그 배경 속에는 "경멸"이라는 단어가 잠복하기 시작<br>되었던 것 같다. 기원전 1 C Italian Peninsula 전역을 자치 자치 도시화 시키려 한다거나 끊임...<br>없었던 과격시위, 살인 그리고 비-시민을 추방한다는 법령이 통과된 순간 소외된 계층으로 <br>분류되었던 족속들이 Samnium People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폭력 사례는 반란의 형태로 진화<br>되어 급속한 속도로 진행되었고, Clam &amp; Oyster만 보면 정신을 못차리는 Roma People들의 <br>Balneae Pensiles(공중 목욕탕)시설을 갖춘 저택들이 몰려 있던 Campania 지역을 급습하게 된 것<br>이다. 당시 !! 정복지(속국)에게 노획한 물품을 실은 배들이 Italian Peninsula를 향할 때 대개 Vesuvio<br>(베수비오)의 매끈한 뿔 형태의 모습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고 하며, 선원들은 수평선을 살피면서 <br><br>항해의 온갖 위험을 뚫고, 목적지(Napoli-Capua- Nola)에 도착하면 안전하게 <br>돌아 올 수 있게 해준 신들에게 감사기도를 드렸다고도 한다. 고대 도시의 성벽 너머에는 <br><span style="COLOR: #cc33cc">Grape Vineyard &amp; Olive Tree</span>, 산, 바다, 들판이 있었으며, 대략 이러한 곳을 당대 <br>Italian Peninsula의 보석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그처럼 비옥하고 풍요스러웠으며 사치<br>스러웠던 곳이 통칭 Campania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호사스런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br>있어서 그저 산악지대에서 생긴대로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던 족속들은 "비웃움의 대상"이 <br>되었고 실제로 그러한 인식들은 그들이 쏟아놓는 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오호∼통재로다... !! <br>Italy Latin People 들의 시민권에 대한 갈망과 자유와 평화에 대한 욕망은 상대적으로 깊은 사회적 <br>갈등 구조를 작동시켰으며, 한때는 전쟁터에서 힘을 합쳐 적을 섬멸했던 관계가 이러한 반란 <br>사건을 계기로 양자간에 검과 창을 겨누는 사태로 진전된 것이다. 산악 족속들의 반란이 진행되던 <br>시기 Roman Republic 최고 군-통수권자는 Maius Marius(가이우스 마리우스)이었다. 또한 <br>이러한 시점에 Roman Republic 내부에서는 심각한 권력 투쟁이 두 사람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b771525b.jpg" width="500" height="718.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b771525b.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lackswan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bd03e8a2.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bd03e8a2.jpg');" /></div>Cornelia Mother of the Gracchi 1785 Angelica Kauffman<br></span>물론 !! <span style="COLOR: #ff0000">Social War</span>의 발발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기는 하였으나 Urbs Roma <br>시민들 입장 에서는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일이었고, Maius Marius !! 그는 군인으로서는 <br>뛰어난 인물이었는지 모르나 정치력의 한계 시점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Roman Republic <br>역사에 치명적으로 다가섰다. 말하자면 Urbs Roma의 역사 속에서 자유와 평화라는 <br>목표의식과 함께 완성도 높은 팽창의 역사를 써 내려 갈 즈음 투박한 손의 주인공들은 공화국의<br>이익과 그들만의 몫을 위해 자신의 "집과 토지(땅)"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런데 Roman- <br>Republic 확장되는 것과 비례하여 집과 토지(땅)를 떠나 있는 기간이 길어졌고, 이제는 기약없이 <br>여러 해가 흘러가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재산(토지)은 타인에 의해 쉽게 상실될 수 밖에 <br>없었으며, 사회적 무-질서가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즉 !!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들의 것을 쉽게 <br>강점할 수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고, 소규모 자작농(평민)들은 자신들의 경작하던 Grape Vineyard <br>대신에 광대한 농장이 들어서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훗날 "스파르타쿠스"가 행군하면서 <br><br>지나간 곳들은 대체로 대규모의 경작지이었고, 그곳에는 노예 집단이 노동력을 <br>착취 당하고 있었으며, 거의 무인지경 속의 도시를 벗어난 지역(시골)에는 자유민, <br>자영농, 목동이 사실상 사라진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거울 속의 야만이 판을 치며, <br>심각한 경제난과 채무 노예의 양산으로 사회적 혼란만이 가중 되던 시기에 바로 !! <br>이러한 현실의 불합리성을 치유하고자 뜻있는 개혁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br>동료 시민들에게 Roman Republic의 위대한 군사적 기반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경고 <br>하였으며, 자영농이 상실되는 것은 바로 Roman Republic가 병사(군인) 하나를 잃는 <br>것과 같다는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점에 Roman Army의 개혁의 불가피<br>성이 강조 되는 시점에 이르렀는데 Maius Marius는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설혹 자신이 <br>원치 않았던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수용해야 했다. "로마 군단"은 과거 무산 자들의 징집을 <br>제외 시키기도 했으나 이제는 무산자, 유산자를 가리지 않고, 개방시켰고, 전투 장비는 국가가 제공<br>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군단은 직업적 병사들로 채워졌고, 이러한 순간부터 토지의 소유는 더... <br>이상의 징집 요건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보상이 되었다. 반면에 Gracchus 형제의 개혁 <br>실패 이 후 "로마 인"들 사회에서 귀족들을 적대시 하는 다소 과격한 호민관 들이 연이어 등장하게<br>되었으며, 당시 인구는 크게 증가하여 곡물의 국내 생산량 만으로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br>.<br>.<br>.<br><span style="COLOR: #cc33cc; FONT-SIZE: 130%">Turning Point</span><br>Roman Republic의 속주에 대한 착취 구조는 일반적으로 동방은 <br>세금이 주류를 이뤘고, 서방의 경우 광산 채굴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br>실용적인 만큼 냉정하기도 했던 세금 체계는 능동적으로 탐욕을 부추겼는데 <br>동방의 군주국들처럼 속민들을 쥐어짜내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거대한<br>관료 집단이 없었기에 Republic(공화정 = 공화국)은 필요한 전문가를 선발<br>하여 활용했다. 또한 <span style="COLOR: #ffffff">"징세 도급"</span>이기도 한 "계약"이 공식적으로 경매에 붙여졌고, <br>그러한 징세권을 구매한 사람은 국가에 징수금 전액을 선지급 했어야 했다. <br>따라서 천문학적인 액수이었던 만큼 웬만한 거부가 아니라면 이러한 특혜를 누릴 수 <br>없었으며, 대체로 Consortium을 형성하고, 집단적 자본을 갖춘 일정한 대표자에 <br>의해 재정 규모에 걸맞는 수탈적 경영이 이뤄졌다. 속주에 파견된 자들은 먼저 <br>징세 업무를 핵심적으로 다뤘고, 우편업무까지 처리 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span style="COLOR: #ff0000">Publicanus<br></span><span style="COLOR: #ffcc33">(푸블리카우스)</span>라고 불리던 세금 징세원들은 오로지 과도한 이윤추구에 집중하였던 <br>나머지 국가에 선납한 공식적인 징세액수 그대로 거두는 목적을 두었다기 보다는 <br>약탈하는 자의 특권을 이용하여 속주민의 팔을 비틀어 추가분을 강요하였으며, 필요<br>하다면 직접적인 폭력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결국 과도한 세금이 하나의 채무 형태로<br>반전되고, 살인적인 이율의 빚으로 남겨졌는데 가진 것은 몽땅 털리고 종국에는 <br>노예 신세가 되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 멀리 떨어진 속주(Orient ↔ Spain)등에서 벌어진 <br>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예속민들이 불합리한 착취구조에 항거할 수 있는 최소한의 <br>방식이 일부 이상주의 적인 귀족 들에 의해 형식적 가치로서 보장되기는 했으나 이러한 <br>비상수단도 제공되는 뇌물의 양이 엄청나다 보니 엄격한 원칙마저 무색해지고 오히려 <br>원로원에서 파견한 행정관들의 빼먹기 방식에 의한 착취구조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br><br><span style="COLOR: #cc33cc">Large-Marcus Porcius Cato</span> 시대부터 "로마 인" 들은 자본가라는 속성을 <br>이해한 듯 싶다. 자본이나 성장, 재-투자, 법인체 등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요소를 <br>이해하고 실행하였는데 공화정시대에 대표적인 인물로서 Marcus Licinius Crassus를 <br>꼽을 수 있다. 한마디로 "자신이 군대를 거느려야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br>가진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군대를 가진 듯하며, 정치, 경제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br>거둔 것으로 확인된다. 참고적으로 Roman 상류 층이 대체로 통상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br>것이 지배적인 견해이었고, 진정한 "부"를 획득하는 수단은 "농업"이라며 상업을 천시했으나 <br>부유한 평민 계층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던 대량 통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br><br>당시에는<span style="COLOR: #33ff33">Wine, Olive Oil, Garum, Grain. Ceramics</span> 같은 종류의 물품을 거래<br>되었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상품은 Amphora(암포라)라는 항아리에 담겨져 해상을 <br>통하여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는 원거리 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원로원 의원<br>들이 통상에 개입되면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정책을... 임의로 변경하 수 있었기 <br>때문에 통상 개입을 규제하는 법과 대형 선박 소유를 막는 법안을 통과(기원전 100)시킨 것으로 <br>보아서 상당 규모의 교역이 진행된 것은 확실하며, 귀족들은 변칙적으로<span style="COLOR: #ff0000">Negotiator<span style="COLOR: #ffcc00">(네고티아토르)<br></span></span>라고 불리던 중간 거래상들을 통해 자본을 투자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여 법적인 문제를 <br>해결했다. 따라서 중간 거래상들은 자본금을 지원 받는 대가로 자신들의 명의로 통상을 하였고, <br>거의 모든 위험적인 요소를 떠안은 반면에 귀족들은 투자가 성공하면 막대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2e9894b.jpg" width="500" height="819.67213114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2e9894b.jpg');" /></div>Andalucia<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4d49188.jpg" width="500" height="377.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4d4918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cueducto-Segovia</span><br><span style="COLOR: #cc33cc; FONT-SIZE: 130%">Turning Point</span><br><u>고대 동, 서양의 어떠한 정치적 공동체를 막론하고</u>, 하나의 조직이 유지<br>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 포함된 성원들이 세금을 내주야 했다. 그러나 <br>그것은 유쾌하지 못한 의무로서 그들에게는 일종의 필요 악이었다. 당시 로마는 <br>Polis에 속한 건물, 토지의 매매에서 생기는 돈, 임대료로서의 농지세와 방목세 <br>그리고 통행세, 관세, 염세 등 간접세 등을 거두어 국가를 경영해 갔다. 그러나 <br>문제는 <span style="COLOR: #ffffff">기원전 406-기원전 398년</span> 사이의 9년 간 치러진 전쟁 즉 !! <span style="COLOR: #ff0000">Veium = Veio</span>을 <br>포위 공격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대의 Urbs Roma 군대는 상비군이 아니었다는 <br>점을 기억하자 !! 기본적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면서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로서 "야니쿨룸 <br>요새" 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순간 그리고 나팔 소리가 들리면 즉시 !! 시민들은 평소 <br>자비로 마련해 둔 무장을 하고 Campus Martius(군신의 광장)에 모여 총-사령관이었던 <br><span style="COLOR: #ff0000">Consul<span style="COLOR: #ffcc00">(집정관)</span></span>의 지휘아래 적을 물리치고 나면, 자동적으로 해산되어 생업(농업)에 곧바로 <br>임하였던 것이 <span style="COLOR: #ff0000">Citizen Militia<span style="COLOR: #ffcc00">(시민 군)</span></span> 형태의 병제 체제이기도 했다. 전투는 대부분 <br>단기전으로 치러졌고, 그래서 국가는 병사들에게<span style="COLOR: #ffffff">"생계 유지"</span>를 위한 봉급을 줄 필요도 없었다. <br><br>그러나 이제 9 년이라는 장기 전을 치루면서 학습된 결과로 새로운 <br>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원로원은 곧 !! <span style="COLOR: #ff0000">Tributum<span style="COLOR: #ffcc00">(트리부툼)</span></span>이라는<br>전쟁세를 징수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러한 문제가 바람직스럽게 해결<br>되었고, 전쟁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부과한 직섭세이었던 셈이다. <br>그것을 통해 이제부터는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며, 장비를 갖춰주는 수단을 마련<br>하는 제한된 특수 목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기 때문에 <span style="COLOR: #ffffff">"목적세"</span>라고할 수 있었고, <br>영구적인 방식이 아닌 한시적 개념으로 1 년 단위로 부과되는 특성을 보인다. 사실 <br>Tributum은 기원전 167년에는 징수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Urbs Roma가 속주와 <br>동맹국 들로부터 얻어진 "부"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br><br>기원전 43-기원전 36년 사이의 내란 사태가 촉발되었을 때 원로원의 <br>의결에 따라 Tributum이 다시 징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Tributum은 <br>국가의 일반적 예산에 들어 있지 않은 특별세이었으므로 오직 "전비"를 <br>마련하고자 했던 하나의 목적을 위해 과세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br>모든 <u>세입, 세출을 장악(국고)하고 있던 원로원의</u> 결정에 의해 부과 되었다는 것이다. <br>세금의 성격이 이렇다보니 Tributum의 납세자도 무장할 수 있는 성년의 남성<br>(시민)들에게 집중되었고, 17-45세 이하의 청년 조(Luniores), 46-60세 까지의... <br>노년 조(Seniores) 모두를 포함하여 병사로서 동원될 수 있었던 시민들<br>(Les Mobilisables), Assidui(아씨두이)가 병사로 동원된 시민들(Les Mobilises)에게<br>&nbsp;<br>봉급을 주기 위해 Tributum을 납부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 면제 <br>혜택(Immunis Militae)을 받은 Proletarii et Capite Censi는 "트리부쿰"을 <br>납부할 자격이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법률상 "트리부쿰" 면세자가 되었던 셈이다.&nbsp; <br>따라서 돈많은 과부 혹은 고아들의 경우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하더라도 <br>트리부쿰의 납부가 권리상 불가하였다. 다만 그들의 후견인을 통해 그들의 재산을 <br>국가에 공탁하고, <u>공탁금으로 기병의 기마 유지비로 사용하게 되는 길이</u> 열려 <br>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이것은 재산의 비율에 따른 직접 부과세로서 재산 비례 정치의 <br>논리에 맞춘 것이기도 했다. 가장 부유한 자는 가장 무거운 부담을 그렇지만 가장 <br>커다란 영예와 가장 큰 책임들을 소유하게 된다는 개념은 재산 비례원칙이 <br>정치제도의 근간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많이 가진 자가 세금을 <br>많이 내고, 적게 가진 자가 적게 내는 것이 공익에 유리하고, 정당하다고 판단하였기 <br>때문이었고, 그래서 재산이 많을수록 시민들은 Tributum을 더 많이 납부해야 <br>했던 것(가변 세율의 원리)이다. Tributum 기본적으로<span style="COLOR: #ff0000">Census</span>에 기록된 재산 평가에 <br>근거하였으며, "부" 에 따라서 확실하게 시행되었다. 또한 Tribuni Aerarii<br>(트리부니 아이라리이)에 의해 국고에 선납 한 후... 납세자에 대해 징수되었던 점이 <br>특별해 보인다. 그들은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할 돈을 할당 받은 사람들로서 <br>의무를 지닌 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일단 재산이 많은 자로 분류될 수 <br>있는데 기원전 46년 Julius Caesar에 의해 폐지되었으나 기원전 70년에 제정된 <br>Lex Aurelia에 기초해서 보면 센서스의 재산 평가 기준으로 가장 부유한 평민들을 의미 했을 것이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735d91c.jpg" width="500" height="381.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735d91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rocheta de Verduras con Couscous-Garum<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a16761a.jpg" width="500" height="718.56287425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ea16761a.jpg');" /></div></span><span style="COLOR: #ffcc00">Fish Sauce = Garum</span><br>곡물이 평민 생활에 차지하는 커다란 비중 때문에 원만한 곡물 공급이 바로... <br>정치적으로는 선거에서 "표"로 연결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것을 관장<br>하였던 <span style="COLOR: #ffffff">"Cura Annonae(쿠라 안노나이)"</span>는 어떤 야심에 찬 정치가도 노릴만한 <br>고위 행정직이 되어준다. 대표적으로 이러한 시점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인물 중에 <br>온전히 평민들의 지지로 선출된 Appuleius Saturninus(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우스)<br>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귀족들에 대한 반감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비례화 하여 <br>성장시켜온 인물로서 여러 법안을 적용 시키며, 토지 귀족 세력을 압박하였다. 또한 <br>그는 Gaius Marius를 귀족에 대한 공격과 방어 그리고 견제 정책을 함께 할 수 있는 적합한<br>인물로 보고, "마리우스"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br>발의하는 등 평민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준다. 영토적 개념에서 귀족들에 비해 땅 한 조각이라도 <br><br>소유하지 못했던 대다수 평민들 중에서 "마리우스" 휘하의 병사들 즉 !! <br><span style="COLOR: #ffffff">"무산자 계층"</span>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제대 이 후 돌아 갈 땅이 사실 없었던 <br>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호민관이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은 해석<br>하기 나름이지만 대단한 정치적 효과를 거뒀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 <br><span style="COLOR: #ff0000">Capite Censi<span style="COLOR: #ffcc00">(머릿 수)</span></span>는 정치적으로도 Gaius Marius의 군-개혁에 필연적이었고, 매력적인 <br>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배경에는 군대의 개혁으로 "권력"이라는 거대한 "힘"이 작동<br>됨으로써 자신의 정치, 사회적 입지에도 직,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핵심적 가치<br>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100년 Appuleius Saturninus가 호민관에 재선 되면서 상황은 <br>더 나빠졌다. 원로원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본격적인 권력 투쟁 양상으로 전개되는 아찔한 <br>장면들이 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당대 원로원 의원들의 불만을 뒤로 하고, 가장 먼저 <br>시행된 법안이 <span style="COLOR: #33ff33">"토지 개혁안"</span>이었다. 왜 !! 그는 이처럼 무리수를 둬 가면서 토지귀족들과 <br>대립하여만 했을까 !!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인구 분산을 노리고, Gallia Transalpine<br>(갈리아 트란살피나)지역에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함이었는데 병사로서는 전투에서 살아 <br>남는다면 일단은 약속한 토지가 주어졌으며, 한정된 지역에서만 싸워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 <br>수혜자가 되었고 그 자신은 정치적 권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르타고" 를 <br>초토화 시킨 Scipio Aemilianus의 촉망받던 부관이었던 <span style="COLOR: #ff0000">Marius &amp; Sulla</span>의 정치, 군사적 <br>알력은 기존에도 존재 했다. 기원전 91년 초기 동맹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Marius는 "벌족파"의 <br><br>지원을 받은 자신의 부관이자 경쟁자 이기도 했던 <span style="COLOR: #33ff33">Lucius Cornelius Sulla<br></span>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강력한 경쟁자의 제거를 시도 하고자 했으며, 이 때 <br>그을 막아선 것은 기원전 90년 동맹 시들이 연대하여 일으킨 Social War이다. <br>또한 이러한 내분 양상의 전쟁은 Marius &amp; Sulla가 동시패션으로 치룬 전쟁으로서 <br>이로 인해 양자 사이의 갈등이 봉합되었으면 좋았겠으나 이들의 갈등관계는 기원전 88년 <br>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당시 !! 동맹시들은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최소한의 목적은 <br>이루게 되었는데 마침내 그들은 <span style="COLOR: #ffcc00">Roman Republic Civitas</span>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어찌되었든지 <br>이렇게 힘겹게 하나의 고비를 넘길즈음 그러니까 기원전 89년 갑자기 Marius Aquilius <br>마리우스 아킬리우스)가 속주 총독으로 있던 Anatolia→Black Sea 연안 지역에서 <br>다급한 파발이 도달되었다. 그것은 변방의 군주국의 도발을 알리는 것으로서 결코 만만한 <br>상대라고 볼 수 없는 인물의 도발에 기인한다. 일찍이 그는 Greece와 연합을 이루고, <br>Asia Minor에 남아 있던 Roma People 들을 학살하였다고 전해지며, 녹여진 "Gold(금)"을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5e711d7c.jpg" width="500" height="37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5e711d7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akantie Peloponnesos</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76751ee9.jpg" width="500" height="38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76751ee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Marcus Tullius Cicero</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16f66074.jpg" width="500" height="370.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16f6607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ergamon ...<br></span>속주 총독의 입안에 부어 넣어 절명시킬 정도로 잔인하였고, <br>이러한 행위를 Roman Republic에 대한 "전제 군주의 판결"이라고 <br>공헌 했다. 그리고 포악함의 주인공이었던 <span style="COLOR: #ff0000">Mithridates</span>는 평소 암살이 <br>두려워 소량의 독약을 먹고 내성을 길렀을 정도로 평소 자신의 관리에 철저<br>했던 인물로서 스스로 Persia 왕가의 후손임을 자처 했으나 실상은 <br>동양의 한(漢)-제국에서 안식국(安息國)이라고 불리던 <span style="COLOR: #33ff33">Parthia</span>의 하나의 <br>가문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총사령관 직을 <br>두고, 잠복하고 있던 양자 간 갈등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초기에는 Tribunus-<br>Plebis(호민관)과 결탁한..."마리우스"가 단순무식하게 Asia Minor 정벌의 <br>지휘권을 얻었으나 Consul(집정관)들은 종교 상 이유로서 휴회를 선포<br>하고 당일 통과된 법을 잠정적으로 유효 시키며, 또 다른 법안 통과도 저지하기에 <br>이른다. 따라서 "마리우스"는 자신의 권력을 향한 진일보한 행위를 서슴치 <br>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긴장감이 고조되고, 마리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Forum- <br>Romanum으로 가서 "유스티티움"철회를 주장하며 집회장을 아수라장으로들었다. <br>역시 !! 권력의 달콤함을 잊지 못한 몸부림은 위대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여우 <br>같은 "술라"는 그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하여 아예 "범(虎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갈 <br>궁리를 했고,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술라의 도주 그리고 총사령관 <br>직책의 향방은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제 술라의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한 반격이 이어진다.<br><br>참고적로 "로마 인" 들의 입장에서 Parthia는 지독한 적대국이었던 것이다. <br>Roman Republic → Roman Empire으로 넘어가면서 집요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br>동쪽 변방에서 Empire과 공존하던 강력한 전제-군주국이었다. Asia Minor를 근거지로 <br>하여 Mithridates는 순식간에 Greece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손에 넣었는데 <br>Roma People들에 의해 지중해 세계를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대 문명의 중심지는 <br>아직도 동부 지중해이었던 데다가 이러한 지역은 "로마 인" 입장에서는 알짜배기 속주<br>이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u>속주에서 착취하는 세금이 없었다면</u> Roman의 재정은 파탄났을 것이다. <br>.<br>.<br>.<br>몰락한 <span style="COLOR: #33ff33">Patrici </span>가문의 여성과 결혼한 Gaius Marius는 실제로 그 자신은 <br>별볼일 없던 시골 가문 출신이었으나 단 한번의 기회를 멋지게 자신의 성공적 <br>삶과 연결시켰던 인물이었다. 반면 Lucius Cornelius Sulla 역시 !! 성장 과정에 <br>있어서는 다수의 굴곡진 저항의 흔적을 갖고 있었지만 당대 "술라"의 Role-Model은 <br>"마리우스" 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그 시대에 그만한 입지전적인 인물도 없기도<br>했지만 결과론적으로 양자가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을 비극적인 <br>헤어짐으로 이끌었다. 동맹시 전쟁에서 술라에게 모든 권한과 공적을 침탈 당했을 <br>당시 사실 "마리우스" 는 조용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Campania 지역의 자신의 호사스러운 <br>별장에서 SPA를 즐기면서 침거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br>그가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 당연하지만 그것은<span style="COLOR: #ffcc00">"권력"</span>이었을 <br>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서 이미 모든 것을 소유했었던 그가 무엇이 부족해서 미치광이 <br><br>마냥 권력을 탐 했는지 알길 없지만 그는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했어야 <br>옳았다는 점이다. 만약 !! 술라에게 자신의 영광스러웠던 자리를 자연스럽게 <br>물려주었다면 역사적 평가는 좀 더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겠지만 그의 선택은 <br>그렇지 못했다.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 기원전 458년 국가 위기 <br>상황에서 6일 만에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고, 아무런 미련없이 원래 있던 곳(전원 생활)로 <br>돌아간 <span style="COLOR: #33ff33">Cincinnatus = Lucius Quinctius Cincinstus</span>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br>그는 현실 속 보다는 과거 Roman Republic의 역사 속에서 정답을 찾아야 하였던 것이다. <br>비교되지 않은가 !! 지나칠 정도로 "권력" 에 대한 집착을 보였던 인물과 "권력" 앞에서 <br>초연한 모습을 보였던 위대한 인물의 차이를 말이다. Gaius Marius의 마지막 모습은 옹졸해 <br>보이기 까지 하다. 그는 술라에게 완전히 밀린 후 Italian Peninsula를 떠돌며, 노예 병사<br>(용병)들을 모집했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Roman Republic에 대한 적개심 !! 개인적 복수로 <br>연결시켜, 추잡한 인물이 되고야 말았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보낸 노-장군의 <br>마지막 순간은 역사 속에 초라하게 기록되었으며, 그나마 곁에 Lucius Cornelius Sulla가<br>남겨져 있었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했다. Greece-Anatolia 출정에 앞서 "술라" 는 결과적으로 <br>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켰고, 호민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br><br>차기 집정관이기도 한 Gnaeus Octavius(그나이누스 옥타비우스), <br>Cornelius Cinna(코넬리우스 킨나)에게 신뢰성을 요구 했는데 이것은 유효<br>한 것으로 원정을 떠나기전 실권자로서 당연히 요구하는 적절한 행위이기도 했다. <br>그러나 "술라" 가 떠난 후 그중 한 명이 Poularis(포풀라리스, 민중 정치가) 성향을 곧 !! <br>들어낸다. 이 후 집정관들 끼리 대립이 이뤄졌는데 카이사르의 장인이기도 했던 <br><span style="COLOR: #ffffff">Cornelius Cinna &amp; Gaius Marius</span>의 결탁이 성립되었으며, 앞서 언급되었던 그대로 <br>절대 복종하는 군대 (마리우스의 노새)를 거느리고, Urbs Roma에 입성하여 참혹한 살육을 <br>전개하였다. 반면에 술라는 기원전 87년 뛰어난 군단 전술을 선보이며 Greece를 탈환<br>하는 예상밖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제 Asia Minor 까지 정복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배자가 <br>될 수 있었겠지만 "미트리다테스" 의 예상 밖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기원전 84년 원로원의 <br>승인이 없이 Treaty of Dardanus(다르다우스)라는 평화 조약을 맺고 물러서게 되었다. 하지만 <br><br>이러한 시점은 Urbs Roma에서 또다시 Marius가 득세하여 반대 파를 <br>숙청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어쩌면 "술라"는 Urbs Roma의 사정을 첩조를 통해 <br>평화조약 체결 이전에 알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당장 눈앞의 <br>전투에서 승리보다 전략적으로 그저 반란세력이 되어버리고 만 Marius가 우선 시...<br>되었을 것이다. "술라"는 급거 귀국하고 또 다시 다시 피의 숙청 작업에 몰입하게 <br>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던지 훗날 Croisade- <br>War의 "리처드왕과 살라딘"과 미묘했던 대결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여지는데 <br>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술라"의 원정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으니 절반의 성공이었던 <br>셈이었다. 따라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된 개선장군 "술라"는 가장 먼저 반대파를 또 다시 <br>쥐 잡듯이 숙청하고, 자신의 병사들에게 의례적이었으나 충분한 논공행상(論功行賞)을 <br>마친 뒤 그는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전통적 Roman Republic의 <br>위상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대략 10,000명의 친위대와 막대한 "부" 와 원로원 의원들 <br>마저 임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술라"의 "공포 정치"에 맞설자는 Urbs Roma에서 <br>이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최초의 고대적 군사 독재가 성립되었던 셈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반동적 법률 제정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2191d772.jpg" width="500" height="36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2191d772.jpg');" /></div></span><span style="COLOR: #ffcc00">The Theatre As Seen From the Ancient Main Road<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690e817c.jpg" width="500" height="35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690e817c.jpg');" /></div></span>"술라" 는 한때는 <span style="COLOR: #ffffff">"Insula(인술라)"</span>에 살았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영위한 <br>인물이다. 그러 면에서 그의 성공은 입지전 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부유한 여성의 <br>정부로서 계모의 유산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도약한 지독한 승부욕과 냉철한<br>이성을 갖춘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는데 일인자가 된 후 그가 펼쳐보인 개혁 Program을 <br>살펴보도록 하자 !! 우선 그는 Italian Confederacy(이탈리아 연합 = 라틴 연합) 세력의 <br>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는데 주력하였고, 실제로 그의 전투 이력에서도 드물게 가혹한 처벌이 <br>뒤 따랐다. 그러나 <span style="COLOR: #ff0000">Social War</span>의 마지막 시점에 가서는 양측이 모두 지쳐 지쳐 있던 상황<br>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술라" 는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으나 <span style="COLOR: #ffcc00">Gaius Gracchus &amp; <br>Livius Drusus(리비우스 드루수스)</span>가 주장한 "로마 시민권 허가"를 신중하게 고려 했고, 수용<br>해야만 했다. 또한 강력한 정치 개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원로원 숫자는 → 300 명으로 <br>"에퀴테스 계급" 에서 충원시켰으며, 점차로 증가하여 600 명으로 하였다. 행정관 20 명, 법무관 <br>8 명을 두며, 재무관 당선자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자격을 갖도록 하였고, 원로원에는 <br>매년 20명의 신규 대상자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호민관의 권한 축소, 호민관이 발의한 모든... <br><br>법안은 원로원 승인 후 발효를 하게 하였는데 거부권 행사에 대한 <br>제한, 호민관 직 후 다른 행정직은 절대 불허하는 법령이 발효되었다. 즉석 <br>재판의 수와 규모 확충을 시도했으며, <span style="COLOR: #ff0000">Censor<span style="COLOR: #ffcc00">(감찰관)</span></span> 직 마저 폐지되었고, 그러한 <br>직무가 가졌던 원로원 입회에 관한 통제의 권한도 당연하게 박탈 되었다. 주목<br>되는 것은 당시 "술라" 는<span style="COLOR: #ffffff">"곡물의 분배"</span> 를 폐지하였는데 이것은 Urbs Roma의 평민의 <br>인구 수를 줄이기 위한 조치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에퀴테스 계급"의 부당취득 <br>재산 반환 법정의 통제권은 다시 원로원으로 이관되었고, 실제로 술라의 이러한 "법적 <br>제도"에 대한 개혁은 유용하였다고 전해졌다. 따라서 과도한 직권권한 남용의 부정<br>축제를 하였던 일부 토지 귀족이나 야망을 숨기고 있던 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br>왕정시대에나 있었던 순서에 따라 행정직을 나누어 갖는 순환 구조를 갖게 된다. <br>무엇보다도 가장 치명지적이었던 것은 역시 !! 30세 이전에는 그 누구도 정무관직에 나설 수 <br>없었다는 조항으로 하나의 관직을 갖고 임기 후 새로운 관직에 입후보 하기위해서는 <br><span style="COLOR: #ffffff">10 년 이라는 간격을</span> 두어야 했었다고 한다. 즉 !! 마리우스 처럼 계속해서 집정관이<br>됨으로써 생겼던 권력의부작용을 상당부분 감소시켰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대규모 <br>군대도 Italian Peninsula 내부에 주둔시킬 수 없게 하였던 것이고 차후 전쟁에서 승리<br>하고 개선하는 장군들은 명령권을 반납하고 사적인 신분으로 Italian Peninsula에 들어 올 수 있었다. <br><br>다시 말해 무력으로 정부를 장악 하려는 또 다른 "술라" 는 필요<br>없다는 것이었으며, 이제 Urbs Roma는 <span style="COLOR: #ffffff">"과두주의 자"</span>들을 위한... <br>안식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개혁을 전개한 이 후의 술라는 마리우스와 <br>달리 일단은 모든 주요한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후 기원전 78년 사망에 <br>이르렀다. Roman Republic은 그를 위해 국장이 치뤘는데 그의 묘비 명에는 <br>그의 성과들이 빼곡하게 새겨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당대 술라와 그가 <br>살던 시대의 정치적 증거(권력)이기도 했다. <span style="COLOR: #33ff33">→ 술라의 독재관 은퇴(정계)가 주었던 의미 !!<br></span>.<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4002370fe.jpg" width="500" height="776.19663648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4002370f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aius Marius</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2dfd2eb2.jpg" width="500" height="295.50827423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2dfd2eb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ax Romana-Julius Caesar ...</span><br><span style="COLOR: #cc33cc; FONT-SIZE: 130%">Turning Point <br></span><span style="COLOR: #66ffff">Campus Marzio(캄포마르치오) = 개선식의 행렬</span><br>Triumphator(트리움파토르)들이라고 하면 전쟁터에서 Imperatores<br>(임페라토레스)를 의미하였는데 승리를 거둔 장군들에게 부여되었다. 이 후 <br>원로원의 비준을 받아 그러한 사실을 인정 받는 절차를 반드시 거쳤다. <br>"월계 관"을 쓴 개선 장군은 Jupiter의 옷을 입고, 금으로 치장된 Royal Color <br>웃옷과 망토 그리고 금박의 신발 Jupiter를 상징하였던 독수리로 장식된 상아로 만든 <br>왕-홀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게 된다. 귀족 행정관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앞세운 <br>행렬은 Campus Marzio를 떠나서 Forum Boarium(포룸 보아리움)를 통해서 Pomerium <br>안으로 들어서며, 그곳에서 무적의 Heracles 신전 옆을 따라 가다가 Via Sacra<br>(비아 사크라)로 들어서는 Velis(벨리아) 언덕을 거쳐 Roman Forum을 가로 지른다. <br>그리고 마침내 Capitolinus의 언덕 길을 지나서 최고의 인정을 받은 의식이 거행될 Jupiter <br>신전에 이른다. 이처럼 승리자의 행로는 도시 초기 시대의 역사를 따라서 경건한 <br>Palatinus 언덕부터 Capitolinus까지 이어지며 이러한 행렬에 부여된 의미는 공화정 시대의 <br>모든 로마인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br>사람은 엄청난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다음 시대 즉 !! 제정(원수정)에서 <br><br>황제에 오른 인물들은 그러한 특전을 독점하려 했다. Imperator<br>(임페라토르)는 고대 로마에서 <span style="COLOR: #ff0000">Imperium<span style="COLOR: #ffcc00">(임페리움, 명령권)</span></span>의 소지자<br>라는 뜻으로 로마의 상층부 관리(행정직)가 가지는 고유한 권한이기도 했다. <br>그러나 최고의 군 지휘권이라는 의미만이 강조되어 점차로 전공을 세우고, 개선<br>하는 장군의 총칭이되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 말기에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br>된다. 예컨대 카이사르는 이러한 칭호를 평생 사용하였으며 여기서 군대의 지휘권, <br>개선식의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의 <span style="COLOR: #ff0000">Imperator</span><span style="COLOR: #ffcc00">(임페라토르)</span>가 황제권을 나타내는 칭호가 되었다. <br>.<br>.<br>.<br><span style="COLOR: #33ff33">Gaius Marius</span>는 기원전 107년 정치적으로 Novus Homo이었다. <br>그러나 그는 최고 관직을 7회에 걸쳐 역임했고, 병제 개혁을 하였다는 <br>점에서 주목받을만 하다. 애초에 그는 기사 신분으로 Gens Lucius- <br>Caecilius Metellus(메텔루스) 가문에 의해 보호와 지원을 받다가 “유구르타 <br>전쟁”을 계기로 "메텔루스"를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br>이 후 집정관이 되면서 병제 개혁을 하였는데 역시 재산 평가액에 따라 징병 시 <br><span style="COLOR: #ff0000">Assidui</span><span style="COLOR: #ffcc00">(아씨두이)</span>만이 소집될 수 있었던 제도하에서 병역에서 면제된 상태에 <br>있던 <span style="COLOR: #ff0000">Proletoarii</span><span style="COLOR: #ffcc00">(프로레타리이)</span> 들의 자원하면 지원병으로서 받아들이게 징집 대상이 <br>되었던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군단이 전원 이들로 구성된 것은 <br>아니며, 종전처럼 "아씨두이"들이 징집 대상이었는데 이들도 지원하면 가능해지게 <br>되었다는 것(미봉책)이다. 이렇게 되면서 빈민들도 군대에 징집되면서 종전의 <br>로마군단는 일종의 직업군대로 변질되어 사령관인 장군의 사병화되는 단계로 진입<br>되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기원전 111년에 제정된 “농지법”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 <br><br>전쟁과 관련된 부분에서 소토지, 소규모 가축의 소유자에 <br>대한 관대한 조치 !! 이것은 토지 분쟁의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함으로써 <br>병력 동원의 장애를 제거하고자 했던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로서 <br>국가의 공유지를 매각하는 규정이 함께 마련되었는데 전쟁지원 목적 또한 <br>매각된 토지를 사유화 하면서 동시에 일정의 농지세 납부의 의무를 부과 또한 <br>여기에 조세 청부업자가 개입되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제도를 통해<br>(111) 로마의 정치판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또한 Gaius- <br>Marius의 병제 개혁 기존의 정치 세력에 대한 기사 신분의 세력을 과시하였던 <br>중요한 단계로 확인된다. <span style="COLOR: #33ff33">무산자의 재정문제 → 청부업자(기사 신분) → 정치적 성공<br></span>.<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8fdeeed.jpg" width="500" height="348.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8fdeee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Jean Leon Gerome Pollice Verso-Gladiator</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7dbe5b1.jpg" width="500" height="316.85678073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7dbe5b1.jpg');" /></div>Italian Peninsula의 통일(기원전 272), Carthago의 붕괴(기원전 146)에 <br>직접적으로 작용하면서 서부(西部) 지중해의 패자로 다가선 Roman Republic !! <br>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던 위치에 올라섰으나 그들의 정복욕은 Carthago의 지배 영역<br>이었던 모든 곳을 흡수하고, Spain 마저 "속주"로 건설하였으며, North-Africa 역시 <br>영향권 아래 두게 되었다. 이러한 Roman Republic에서 기본적으로 항상 중요시 되었던 <br>정치적 결정은 토지 개혁안과 곡물 정책에 관계된 것이었는데 <span style="COLOR: #ffffff">"가족의 혈통" </span>못지 않게 다뤄지던<br>것들로서 Roman Republic의 이해를 돕는 핵심적 요소이기도 하다. Citizen-Ship(시민권) <br>문제로 세계 최강의 군대가 둘로 쪼개져 싸운 내란 상태의 동맹시 전쟁이 발생되었던 것은 Roman- <br>Republic 말기 최악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span style="COLOR: #33ff33">Populares(포풀라레스) &amp; Optimates<br>(옵티미테스)</span>의 반목은 <span style="COLOR: #ff0000">"공화정 붕괴의 씨앗"</span>을 제공했던 Lucius Cornelius Sulla(기원전 79) 사후에도 <br>무한하게 지속되었고, 원로원에 의한 "과두 지배체제"가 불안정 속에서 지속되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br>이러한 시기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내부의 혼란 상황에서 비롯된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br>외부로부터 가중된 "적대 적 세력"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었다고 확인된다. 정리해 보면 동부(東部)-<br>Mithridates(미스리다테스)가 기회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하고 있었고, 서부(西部) 지역에서는 <br><br>한 때 원로원 총독에 의해 축출 되어 기반을 상실한 "마리우스"의 추종자 <br>Quintus Sertorius(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반란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여 "술라"의 <br>지배로부터 숙청된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근거지를 마련 후 Lusitania People<br>(루지따니아)과 함께 Spain 지배권을 획득하며, 본토의 통제를 벗어난 채 속주 총독 <br><span style="COLOR: #ff0000">Pro-Consul<span style="COLOR: #ffcc00">(전직 집정관)</span></span>으로서 독립된 형태로 모국에 위협을 가중시켰다. 또한 본토에서는<br>Spartacus(스파르다쿠스)의 노예 반란이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고, 지중해에서는 해적의 <br>활동으로 인하여 Roman Republic의 "곡물 무역 교류"를 위축시키며, 정체(停滯) 상태에 추락<br>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비상 대권"이 필요해 졌고, <br>사회적으로는 영웅의 출현에 목말라 했다. 난세가 영웅들을 부른다고 했다. Lucius Cornelius-<br>Sulla가 남긴 "군사 독재" 의 경험에 의해 마침내 "군인 정치"의 전통이 승계 되었으며, 등장<br>하게 된 인물들은 대략 <span style="COLOR: #33ff33">Pompeius-Crassus-Caesar</span>이었다. Lucius Cornelius Sulla"가 마리우스의 <br><br>부관이었듯이 Pompeius(폼페이우스)는 술라의 부관이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br>정치적 도약을 이루게 되었는데 Sulla가 미스리다테스의 전쟁에서 권력의 실마리를 <br>잡았듯이 그 역시 군인으로서 충분한 족적을 남길만한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br>기원전 76년 원로원의 요청으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4년 만에 진압하게 된 것으로서 <br>그 덕택에 그는 첫 번째 월계 관을 머리 위에 올려 놓게 되었다. 하지만 술라에 비견<br>할만 한 인물은 아니었던 같다. 더구나 당시 Roman Republic 분위기는 결코 "일인 집권"을 <br>허용할 만큼 구조적으로 취약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하자 !! 부유한 가문 출신의 <br>자산가이며, "술라 시대" 숙청된 사람들의 재산을 사들여 최고의 부자가 된 인물이기도 했던 <br>Crassus와 혹시나 전제 군주가 될뻔 했던 Pompeius는 그 누구도 술라는 대신할 수 <br>없었기 때문에 양자는 경쟁자라기 협력자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었으며, 훗날 동시에 집정관이 <br>되었던 두 사람이 이룬 공동의 성과는 역시 !! 고대 사회 최대의 노예반란을 진압한 것인데 <br>바로 <span style="COLOR: #ff0000">Spartacus</span><span style="COLOR: #ffcc00">(스파르다쿠스)</span> 반란을 완벽하게 진압한 것이다. Latifundium(라티푼디움)의 발달로서<br><br>Urbs Roma로 유입되는 노예의 숫자는 크게 증가될 수밖에 없었고, <br>당대 노예들의 용도와 종류, 다양성에 비추어 반란을 일으킨 노예는 바로 <br>"로마 인" 들의 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span style="COLOR: #ff0000">"Gladiator<span style="COLOR: #ffcc00">(검투사)</span>"</span> 들이었으며, <br>기원전 73년 검투사들은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다쿠스를 지도자로 삼아 <br>반란(킴브리인과 튜턴인 주축)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에 의해 Central-Italy = <br>지역이 직접적으로 유린되었는데 이때 Crassus의 용병과 Spain 반란 진압의 공을 <br>세운 불굴의 Roman Legion(로마 군단)이 노예 반란을 진압하였다는 것이다. <br>그러나 상대 적으로 부유했던 "크라수스" 보다 자격에서 결코 앞서지 못했던 Pompeius는 <br>이러한 시기부터 좀더 커다란 전공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때마침 "술라" 와 <br>맺은 조약이 파기된 사실에 분노(기원전 74)하며, 몸부림치던 Mithridates가 속주 <br>공격(비티니아)을 시도하였고, 그러던 중 "로마인"들이 <span style="COLOR: #66ffff">Black Sea</span> 지역으로 부터 축출<br>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따라서 당시 해적들과 동맹 관계 유지하며 호전적으로 나서던 <br>Mithridates를 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원정군이 조직되었고, Syria-지중해 일대의 해적들을 <br><br>아우르는 초대형 원정이 기획되기에 이르렀다. 시작은 기원전 67년, 해적 <br>소탕부터 이루어졌으며, 비슷한 시기 원로원은 미스리다테스와의 1차 전쟁에서 <br>"술라의 부관" 이었고, 훗날 Pompeius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식도락가로 전락한<br>Licinius Lucullus(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소-아시아 지역 비상 대권이 주어<br>진다. 그는 기원전 64년 Pompeius에 의해 <span style="COLOR: #ffffff">"예루살렘"</span>이 점령 당하였던 비슷한 시기 <br>도주하는 Mithridates(미스리다테스)를 추격 Armenia까지 진격하였고, 그곳에서 생소한 <br>세력과 첫 번째 전투 기록을 세웠으며, <span style="COLOR: #ffffff">"바빌론과 니네베"</span> 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br>위해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지역에 세워진 장엄한 도시 <span style="COLOR: #ff0000">Tigranocerta<span style="COLOR: #ffcc00">(티그라노케르타)</span></span>를 <br>정복한 것은 온전하게 그의 공적이었다. 또한 군사적인 성과이외도 "술라 시대" 황폐화 <br>된 속주의 재정을 재 정립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span style="COLOR: #33ff33">→ 징세 청부 업자와 대금 업자 통제<br></span>.<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b264692.jpg" width="500" height="688.07339449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b26469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ladiator Helmet<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da0c66d.jpg" width="500" height="33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3da0c66d.jpg');" /></div>Geek Amphorae<br></span>그런데 결과적으로 Mithridates의 파멸을 주도한 자는 Pompeius이다. <br><span style="COLOR: #ff0000">Pompeius</span>의 경우 이미 서쪽으로 Portugal, North-Africa을 발 아래 두었으며, <br>Antioch(안티오크)에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던 Hellenism 세계의 "Seleuco<br>(셀레우스코)의 왕"을 폐위시키고, Syria를 병합시켰으며, Parthia을 견제할 목적으로 <br>Licinius Lucullus가 건드려 보았던 Armenia 마저 정복하고, "트란스-카프카즈" <br>까지 진격하였고, "알바니아 및 이베리아 인" 들과도 전쟁을 수행하였다. 한 마디로 <br>전쟁의 화신이었는지 그는 전설속에서나 나오던 땅, Amazon 전사들의 터전,<br>Caspie Sea까지 원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시기 동쪽으로 Egypt... <br>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로마 속주"의 재편을 일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주목<br>되는 사실은 Jerusalem 점령과 동시에 <span style="COLOR: #ff0000">Roma People &amp; Jews</span>의 만남이 역사상 <br>최초로 성사되었다는 점으로서 뒤이어 "Jericho &amp; Petra" 에 대한 원정이 뒤따랐고,<br>Mithridates의 허무한 죽음 이 후 마침내 Asia Minor에서의 자신의 사명(기원 전 62)을 <br>완수했다. 참고적으로 훗날 <span style="COLOR: #33ff33">India &amp; China</span>에서부터 이어지던 대상로 중 하나는 <br>Black Sea 남쪽을 따라 Kavkaz &amp; Caspie Sea를 따라 이어진 길이었으며, 이곳은<br>이제부터 Roman의 지배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br>그는 불운하였다. 기원전 62년 로마에 개선(Triumphator, 개선장군)하며, 군대까지 <br>해산시키는 충성도를 보였지만 Roman Republic 이익과는 상관없이 "로마의 표상"이라고 <br>칭송되던 Marcus Pocius Catoffm 중심으로 한 원로원의 공화주의자 세력은 그를 <br>승인하려 하지 않았고 당연스럽게 그의 요구를 묵살한다. 한편 이러한 시기 공화주의자로서 <br><br>대표적인물로서 Republic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토대 <br>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던 인물도 다수 눈에 띄었는데 대표적으로 <br>앞서 언급되었던 <span style="COLOR: #33ff33">Lucullus &amp; Cato</span>도 포함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혼란스러운 <br>모습을 보이던 지방 도시 "아르피눔" 출신으로 법률적 재능을 눈부시게 활용<br>하였던 <span style="COLOR: #ff0000">Marcus Tullius Cicero</span> 등은 당대 Pompeius-Crassus-Caesar 더불어 <br>주목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찌되었거나 Pompeius의 불운을 절대적 호기로 <br>삼은 인물은 Gaius Julius Caesar(율리우스 카이사르)이었다. 일찍이 Lucius-<br>Cornelius Sulla는 카이사르의 인물 됨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보기에 카이사르는 <br>"위험 인물" 이었던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라의 <span style="COLOR: #ff0000">Official Gazefte</span><span style="COLOR: #ffcc00">(처벌자 명단, <br>관보)</span>에서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모계 쪽-Gens의 구호 활동에 의해서이다. 서슬퍼런 <br>시기가 지나고, 기원전 80년 시민 들의 원성을 사기전 <u>독재관 직 반납 후 잠시 집정관</u> 직에 <br>머물기도 했으나 결국은 그가 가장 선호하던 화류계(花柳界)에서 놀기 좋아하는 <br>시민으로 돌아간 이 후 권력의 공백기가 찾아들었는데 "술라의 독재관" 시기 경제적 <br>이익을 취득한 Crassus(크라수스)와 군사적으로 나름대로 성공시대를... 구가<br>하던 Pompeius, "마리우스" 의 Gens로 묶여 있던 자로서 잠시 술라의 숙청자 명단에 <br>포함되기는 했으나 사면된 Caesar(카이사르) 이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전통적인 지배력을 <br>회복한 평민 세력(호민관)의 지지로 집정관에 입후보 되었고, 당선되기도 하였으며, Lucius-<br>Cornelius Sulla 사후에는 이들의 세상이 되었으며<span style="COLOR: #ff0000">The First Triumvirate<span style="COLOR: #ffcc00">(삼두 정치)</span></span>를 이끌게 된다. <br><br>이들이 결속된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계기가 작용했는데 그것은 <br>영민한 두뇌 소유자이며,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Caesar가 <br>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권 후보로서 "카이사르는 <br>명문 귀족 가문이라는 점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br>다른 인물들에 비하여 나이도 가장 어리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Roma- <br>People(대중) 들은 탁월했던 정치적 감각, 교양있는 지식인, 원로원의 뛰어난 <br>웅변가이라는 모습과 그 이전 다소 혈통에 의한 결과이었으나 "마리우스"에 <br>의해 반-어거지로 13 살의 어린 나이에 떠 앉게 된 감투<span style="COLOR: #ff0000">Roman Pomtifex- <br>Maximus</span><span style="COLOR: #ffcc00">(폰티펙스 막시무스, 대신관)</span>에 머물렀던 그의 신분에 대한 특별한 사실을 <br>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기본적으로 "공화국 최고의 관직"에 <br>오르는데 필요한 만큼의 정치적 인기를 얻으려면 합리적 평판을 얻어야 한다는 <br>사실을 알고,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 그만한 가치가 있는 관직(행정직)을 하나씩 선점하여 왔다. <br><br>쉽게 말해 "술라"를 피해야 했던 시대에는 조영관, 법무관 등과 같은 <br>관직(행정직)을 주로 선호하였고, "술라" 사후 돌아온 그는 마침내 기원전 61년 <br>속주 총독(자신의 빛을 갚는데도 필요했던 직책과 군사적 경력 관리)으로 <br>Spain으로 부임하였으며, 이곳에서 훌륭한 전사이면서 장군이라는 사실을 증명<br>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집요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축소시키려는 정적이 또한 <br>있었는데 그가 바로 <span style="COLOR: #cc33cc">Small-Marcus Pocius Cato</span>이다. 사실 카이사르가 요구 했던<br>개선식과 집정관 직의 요구는 법률적으로도 두 가지 모두를 얻을 수 없기도 했지만 Cato의 <br>의견에 따라 결국 한 가지를 선택하여만 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여기서 Roman- <br>Republic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만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화려한 개선식<br>보다는 집정관 후보직을 선택한 사실로서 주사위 던지는데 있어서는 아마도 선수<br>이었지 않았나 싶다. 반면 앞서 언급되었듯이 성공적인 원정에서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br>Pompeius는 결코 평탄하지 못한 정치구조(원로원의 권한 남용) 속에서 뭔가 자신이 원하지 <br><br>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는데 <br>그렇지만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구현할 우월한 존재이었던 것은 <br>당대 Republic에서 그 뿐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br>그에게 손을 내밀며, 크라수스를 이끌어, 비밀회동을 추진하고 그들에게 <br>탈출구를 제시하였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재정적이며, 대중적 지원을 약속하고 <br>집정관 선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에 의해 원한던 <br>두 가지 즉 !! 퇴역병에 대한 토지 분배와 동방에서 맺은 협정의 원로원 비준을 획득하게 되었다.<br><br>그러나 삼두의 후광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br>민회를 통해 정책을 처리 했으며, 간혹 민회마저 무시하는 사례를 보인다. <br>즉 !! 때 이르게 독재의 색깔을 드러내었던 것으로 집정관을 지냈고, 철학자이면서 <br>정치가이기도 했던 Marcus Tullius Cicero는 당시 카이사르의 전횡을 사실상의 <br>왕정(Regnum)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직을 <br>상실한 후 세력이 약화되어 미미한 존재가 되기를 바랄뿐이었으며, 관례에 따라 <br>집정관 임기가 종료된 후 원로원이 골라주는 속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우선 먼저 야심<br>만만하고 정치적 계산이 빠른 카이사르를 통제하기 위하여 조용한 시골(공공 방목지와 가축 <br>이동로를 관리하는 업무)로 보내려 했는데 그곳은 카이사르 입장에서 경력 관리가 전혀 <br>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자신에게 충실한 호민관을 내세워 평민회의에서 <br>새로운 법안을 상정 하도록 했는데 그러한 법안에 의해 그는 잠재력은 있었으나 조롱<br>거리나 다름없던 Gallia Cisalpina 속주의 5 년 임기의 속주 특별관리권이 주어졌으나 그에게 <br>굉장한 행운이 그에게 찾아온다. 그것은 로마의 법이 통하지 않는 땅으로 가는 통로가 <br>되었던 Gallia Transalpina의 총독이었던 인물이 갑자기 기원전 59년 사망하는 바람에 시급히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52c39bf3.jpg" width="500" height="330.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52c39bf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order Collie Baby<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5473bbf8.jpg" width="500" height="511.0732538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5473bbf8.jpg');" /></div></span><span style="COLOR: #ffcc00">Amphorae ...</span><br>지휘관을 파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고, 그곳은 카이사르 입장에서 <br><span style="COLOR: #ffffff">"전쟁의 결과에 따른 경력 관리와 부"</span>를 획득 할 만한 요소가 두루 산재하고 <br>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지 여기서 또 한번의 도약의 바판이 마련된... <br>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 의해 <span style="COLOR: #33ff33">Gallia Transalpina &amp; Illyricum<br>(일리리쿰)→Dalmacija(달마치야)</span>의 속주 통치권과 3개의 군단 병력에대한 명령권, <br>자신의 부관을 선택할 권한, 그리고 식민지를 건설할 권한을 민회를 통해 부여 <br>받았으며, 이 후 2개 군단을 더 확보 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결과가 만들어지기 까지 <br>집정관과 호민관이라는 꼭두각시를 조정하여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상정 법안을 입안<br>시키거나 폐지시킬 수도 있었던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이었던 삼두 체제의 권력의 힘을 확인<br>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기 즈음 정력적 결혼 전략이 성립(카이사의 딸 + 폼페이우스의 결혼) 하며, <br>단세포적이기만 했던 "Cato"의 복수의 날은 멀게만 느껴졌다. 또한 폭넓은 인기를 얻었으나 <br>내세울만한 업적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Transalpina(트란스알피나) 총독 직에 오른 직 후<br>부터 마치 물 잘 만난 물고기가 되었던 셈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군사적 업적을 필요로 했던 <br>Gaius Julius Caesar에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와 같은 기회가 제공된 것 이었다. <br>따라서 Caesar는 다시 올 수 없었던 금쪽 같은 기회를 군사적 부분의 공적이 전무한 상황에서 <br>뛰어난 재능으로 순식간에 휘하 장교들을 휘어잡고, 탁월한 전술운용과 Leadership을 발휘<br>하여 또 다른 그의 경력을 쌓아가게 되었다. 아무튼 카이사르는 드디어 칼을 빼어들게 된다. <br>그것은 기원전 58년 헬베티 족속의 이주를 트집잡아 속주 총독으로서 의도적으로 국경 16 km <br>지점에 군대를 배치시킨 것으로 교묘한 음모가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그들이 지나는 길목이기도 했고,<br><br>그가 쳐 놓은 덫에 걸려든 "Helvetian(헬베티 족속)"들은 <br>로마 군단을 즉각적으로 공격 하였다. 그 순간 카이사르는 Roman- <br>Republic을 방어하고 있으며 자신의 존엄성에 가해진 위해로부터 방어<br>한다는 목적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관장하는 5개 로마 군단을 <br>동원하여 신속하게&nbsp;Helvetian 족속 들에 대한 의도된 가혹한 전투적 교훈을 <br>남겨주게 되었으며, 명분이 세워지고, 이것은 한마디로 북방 영토가 완전히 <br>평정되기 까지 전투를 수행하겠다는 뜻으로 그 후 8 년동안 카이사르는 완전한 <br>자신감과 야심을 결합, Roman Republic에 대항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br><u>쳐들어간 속도 만큼 빠르게 퇴각하는</u> 전술을 앞세워 기원전 53년 Gallia Transalpina <br>&amp; Gallia Cisalpina 지역을 평정 하고야 말았다. Gallia-Transalpina는 특징적으로<br>이곳은 Old Wine 무역의 중심지로 Rhone &amp; Garonne River를 따라 높은 수익을 <br>가져다 주었던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이 주목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br>과거부터 껄끄러운 호적수인데다 부유한 전사 귀족이 주축이된 영웅 문화가 생겨난 <br>곳으로 <span style="COLOR: #ff0000">Rhine &amp; Donau River</span> 상류 지역이 그들의 본 고향이라고 확인 된다. <br>드넓은 지역에 수많은 족속이 산재해 있었고, 사실 이러한 지역이 정치적 통일을 <br>이루었다면 어쩌면 Roman가 지중해 지역의 패자가 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 했을 지도 모른다. <br><br>Gallia Transalpina = France, Gallia Cisalpina = North-Italy, <br>Illyricum(일리리쿰)→ Dalmacija(달마치야)의 지역이 공략하기 쉽지 <br>않았던 것은 외형적으로 60여개의 소국 Civtates로 나눠져 있었지만 공동체의 <br>종교의식으로 하나의&nbsp;<span style="COLOR: #ff0000">Druds<span style="COLOR: #ffcc00">(드루이교)</span></span>를 신봉하며, 제의를 함께 했던 곳 <br>이라는데 있었고, 하나의 조상들을 두었던 호전적인 족속 들이 정치적으로는 <br><br>분열되었으나 충분한 군사적 잠재력을 보이고 있던 이유에서도 <br>찾을 수 있다. 더구나 Gallia Transalpina 지역은 Old Celt People <br>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족속들이 호전적으로 대응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br>또한 기원전 390 년의 참화를 Roma People 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점도 <br>작동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에 의해 "한니발"으로 부터도 <br>당하지 않았던 <span style="COLOR: #33ff33">"굴욕"</span>을 당하기도 했지 않은가 !! 아무튼 "카이사르"는 절망적<br>이었던 이러한 지역에 공세를 펼쳐 주축 세력을 라인 강 너머로 몰아내는데 성공<br>하였고, 곧이어 벨가이인(= 벨기카)과 베네티인(France 서쪽 지역에 살던 족속)<br>을 정복하였다. 또한 도주하는 Celt People 들을 추격하여 기원전 55년에는 <br>"United Kingdom Channel"을 건너 Britannia까지 공략하였다. 드디어 Roma People의 <br>영향력이 세계의 서쪽 끝에 이른 것이며, 이렇게 해서 오늘날 United Kingdom <br>역사에서 첫 부분을 장식한 Roman → Britannia 침공이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br><br>카이사르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고, 원로원과 <span style="COLOR: #ffcc00">Pompeius &amp; Crassus</span>는 <br>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 체체의 이해 관계를 굳건히 하고, 원로원은 <br>공동으로 견제한다는 방침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반동으로 똘똘 뭉친 <br>원로원이 원하던 것은 아니었기에 강력한 대응을 취하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Pompeius를 <br>제거하려던 중 The First Triumvirate(삼두 정치)가 깨지는 사태가 발생 했다. 그간에 <br>남편과 부친을 결속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span style="COLOR: #ffffff">"율리아"</span>가 난산(難産)을 겪다 사망했고, <br>이러한 순간에도 훗날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Octavia(옥타비아) 까지 폼페이우스에게 주며, <br>끝까지 삼두 정치체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카이사르의 정략적 "혼인동맹"은 그의 거부로 <br>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마침내 위태롭기만 했던 두 인물들 간의 동맹은 이것으로&nbsp;박살 <br>난&nbsp;것이었다. 더구나 "크라수스"가 <u>기원전 53년 카레(터키 남동부 하란) 전투에서 </u><span style="COLOR: #33ff33">Parthia</span>의 <br>기마 궁수병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군기마저 빼앗기는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며, 급반전이 <br>이뤄졌고, Publius Clodius Pulcher가 살해되면서 Roman Republic의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었으며, <br><br>그후 기원전 52년 원로원은 다목적 포석으로 먼저 제거하려던 Pompeius를 <br>단독 집정관에 앉혀 "카이사르" 를 견제하면서 배제시키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br>이것은 술라의 "종신 집정관" 처럼&nbsp; <span style="COLOR: #ffffff">"단독 집정관"</span> 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br>이것으로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정" 정치체제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반면 <br>카이사르는 Roman Republic 공화정에서 마지막으로 Gallia 최후의 무장 봉기이었던 알만한 <br>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span style="COLOR: #ff0000">Vercingetorix</span><span style="COLOR: #ffcc00">(베르킨토릭스)</span>를 진압한 것<span style="COLOR: #33ff33">(기원전 52→ <br>Cote d`Or→코트 도르) / Alise-Ste Reine→알리스 생레느)</span>을 끝으로 그의 임무 또한 <br>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이로써 Roman의 영토는 Rhine River → United Kingdom of Channel <br>까지 확장되었으며, 그 지배력은 확고히 설정되었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개선은 Pontus를 <br>정복한 "술라", Spain 정복시기의 Pompeius의 성과 보다 무게감에 있어서 앞섰던 셈이다. 그러나<br>법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군대를 거느린 채 개선 하면 안 되었다. Pro-Consul(속주 총독) <br>사임과 함께 군사지위 권을 반납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전 49년 Gallia &amp; Roman의 <br>경계선이기도 한 <span style="COLOR: #ff0000">Rubicon</span><span style="COLOR: #ffcc00">(피스키아텔로)</span>까지 진군한 카이사르는 이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러한 <br>시점에 Urbs Roma에서는 "그라쿠스"를 죽음으로 몰았던 비상 결의가 발동되어 Gaius Julius- <br>Caesar는 한마디로 국가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span style="COLOR: #33ff33">→ Senatus Consultum Ultimum</span> 따라서 강을 건널 <br>것인지 혹은 군대를 해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으며, 지휘관으로서 로마 군단의 선두에 선 그는 <br>이렇게 말한다. "신의 목소리와 적들의 불의가 우리를 부르는 곳으로 떠나자 !! 주사위는 던져 졌다 !!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46632287.jpg" width="500" height="673.40067340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4663228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Jewish Rabbi<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a9589149.jpg" width="500" height="326.79738562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a958914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ino Nobile di Montepulciano</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f7f0003f.jpg" width="500" height="418.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f7f0003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naeus Pompeius Magnus<br></span>결국 그는 군대를 거느리고 Rubicon River을 건넜고, 공화정 몰락의 시점에 <br>다가선 것이다. 8년 동안 오지에서 한몸 처럼 전투 경험을 함게 쌓으며, 생사고락<br>(生死苦樂)을 같이나누었던 당대 최강의 진용을 자랑하던 Gaius Julius Caesar &amp; <br><span style="COLOR: #ffcc00">Roman Legion</span>는 거침없이 Urbs Roma로 쳐들어 갔다. 이때 원로원 의원들과 Pompeius는 <br>"술라" 와 인연이 있던 장소 인 "브룬디시움"으로 가서 Adriatic Sea 를 건넌 후 도주하였다. <br>여기서 카이사르는 Adriatic Sea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알고, Pompeius의 권력 <br>기반이기도 한 Spain을 향했다. 자유도시 Marseille(마살리아)는 진격하여 도중 안정 시켰으며, <br>"피레네 산맥"을 넘어 Pompeius의 수석 부관들이 "대리 통치"하고 있던 "로마군단"을 번개불에 <br>콩... 구워 먹듯이 진압하고,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일전 만이 남겨져 있었다.<br><br>Greece Thessalia의 "파르살루스" 평원 전투의 패전 이 후 집정관 직<br>(기원전 48)에 오른 카이사르는 이제 본격적으로 Greece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br>그러자 Pompeius는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Egypt의 지배자는 <br>카이사르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카이사르의 이집트 <br>원정은 그저 Pompeius의 죽음을 확인하는 요식 절차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기서 세기 <br>만남이 이뤄진다. 당시 Egypt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통치되고, 21 살의 <br>그의 <u>이복 누이이며, 아내이자 공동 통치자이었던</u> Cleopatra라는 추방 상태에 있었다고 <br>한다. 그런데 Cleopatra가 중재 요청을 하면서 사태는 급진전 되었다. 카이사르는 <br>그녀를 끌어들여 첩으로 삼고, 이에 이집트 왕이 분개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전투가 벌어<br>졌으며, 기원전 47년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이집트 군"을 격파시키며 원정의 완성도를 높였다. <br><br>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nbsp;Cleopatra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 <br>(프톨레마이오스 14세)을 공동의 통치자로 카이사르는 지배자로서 지정하게 <br>되었는데 주변에 수석 부관이었던 비운의 <span style="COLOR: #33ff33">Marcus Antonius</span>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br>사실이다. 자 !! 이렇게 해서 로마 재정의 서쪽 날개 Spain에 이어 동쪽의 Egypt<br>마저 석권한 카이사르는 먼저 신경쓰이던 세습된 <span style="COLOR: #ff0000">Pontus → Mithridates</span>의 악재를 이번 <br>기회에 털어버리고자 했다. 그래서 로마군단(7 군단)을 이끌고 Syria-Anatolia <br>북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진군하였는데 하마터면 그것은 재앙으로 끝날뻔 했다. <br>그 이유는 기원전 47년 Anatolia 중부 지역(젤라 /&nbsp;질라)에 도착한 후 막사를 세우고 있던 <br>"로마 군단" 을 Pontus 군대가 기습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로마 <br>군단" 은 군기와 노련함으로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카이사르가 원했던 <br>Pompeius의 죽음과 성공적인 Egypt 원정 그리고 부수적인 Anatolia 지역의 안정을 기하고 <br>Urbs Roma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개선한다. 기원전 46년 그는 국가 비상 사태시...<br>임시로 임명하던 <span style="COLOR: #ffffff">"독재관"</span> 이라는 행정직의 임기를 6 개월에서 10년으로 연장시켜 차지했고, <br><br>2년 뒤 아예 종신 독재관직에 오르며 사실상 Urbs Roma의 왕의 자리에 <br>우뚝서게 된다. 그는 무관 출신 "술라" 처럼 공포 정치를 앞세웠으나 공화정 시절<br>보다 훌륭한 진보적인 정치<span style="COLOR: #ffffff">(속주안정을 위한 좋은 정부 구상)</span>를 구현하고자 <br>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병사를 포함한 군대에 물질적 보상을 <br>함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안정시킨 뒤 Urbs Roma의 시민권을 확대하여 "전-로마 <br>영토"의 통합을 모색하였다<span style="COLOR: #ffcc00">(Gallia → 시민권부여)</span> 이제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Urbs- <br>Roma는 급속도로 번영하였으며, 당시 Urbs Roma의 인구는 무려 10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br><br>원로원은 형식적인 국가의 기관으로 전락되었지만 그대로 명맥을 <br>유지 시켰는데 의원수는 900명으로 증가되었으나 대다수는 카이사르가 <br>임명하였기에 정치적 상징성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왕정을 <br>이끈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존속시키면서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존중하였으나 <br>결과적으로 기능만 마비 시키면 될줄 알았던 원로원이 그의... 목숨을 <br>앗아가게 되었다. 기원전 44년 Gaius Julius Caesar의 마음 속에는 오직 <br>Parthia 뿐 이었다. <u>"크라수스"의 사망 이후 </u>Urbs Roma에서는 복수에 대한 인식이 <br>확산되어 있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재정 문제에 있어서 <span style="COLOR: #ff0000">Syria</span>는 결코 놓아<br>두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종신 독재관"으로 오른지 두 달도 되지 않았지만 그... <br>기간은 "참주 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공화정의 과거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던 자들에게 <br>카이사르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키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span style="COLOR: #33ff33">Parthia <br></span>원정을 앞두고 연설을 위해 원로원을 찾은 카이사르에 대한 Terror가 이뤄졌다. <br>결국 이렇게 해서 그에게 권력을 안겨 중었던 Rubicon River의 주사위는 <br>그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고, Marcus Junius Brutus는 그의 선조가 Etruria People의 <br>왕정을 몰아내고, Republic을 확립시켰던 사실을 지지하여 공화정을 지켜내려 <br>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미 !! 대세는 기울어져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화정의 <br>이상이 Urbs Roma의 영토을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팽창되어 있었던 점이 치명적이었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cc6b2883.jpg" width="500" height="683.37129840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cc6b288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rutus-Ghost of Caesar<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d74914cc.jpg" width="500" height="20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d74914cc.jpg');" /></div><span style="COLOR: #ff0000">암살자</span><span style="COLOR: #ffcc00">(해방자 = Liberators)</span>들은 Gaius Julius Caesar만 죽을면 <br>Roman Republic이 회복될 것으로 여겼던것 같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br>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span style="COLOR: #ff0000">Gaius Julius Caesar</span>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br>바치던 군대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Gaius Julius Caesar의 죽음은 군대를 <br>장악하고 있던 Marcus Antonius에게 <u>뜻하지 않은 권력을</u> 가져다 주었는데 그러나 <br>절대 권력자 사후 전반적으로 Urbs Roma의 정치 환경은 그 충격으로 인해 <br>매우 혼난스러워졌다. 이를 틈타서 살인자 무리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Greece로 <br>도주하였던 것이다. 반면 Marcus Antonius는 어찌되었거나 권력을 안정시키기 <br>위해 카이사르의 기병 대장이었던 <span style="COLOR: #ffcc00">Marcus Aemilius Lepidus</span>와 결탁되어진다. 그런데 <br>예기치 않은 인물이 끼어들었는데 그가 바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누이의 외손자" <br>"Octavianus"이었다. Augustus는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던 "아폴로니아"에서 돌아와 <br>브룬디시움(브린디시)에서 후계자로 인정 받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Antonius &amp;<br>Lepidus와 함께 기원전 43년 무서운 추방을 실시하여 반역자들을 응징하며,<span style="COLOR: #ff0000">Second- <br>Triumvirate</span><span style="COLOR: #ffcc00">(삼두 정치)</span>를 형성 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앞서 Gaius Julius Caesar의 <br>삼두와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죽어서 까지도 대중에게 영향력을 발휘한<br>카이사르라는 강력한 Charisma를 등에 업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이들의 위상은 균등<br>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주목할 것은 Urbs Roma 시민들이 신격화하는 카이사르의 혈육보다 <br>더 정통성을 갖춘인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면에 Octavianus가 <br>떠오르게 되었다. 반면에 실질적으로 사망한 카이사르에게 더욱 충직스러웠던 인물은<br>표면적으로는 Marcus Antonius로서 그는 "권력"이 정점에 이르자 복수에 나섰고, 기원전 <br>42년 Macedonia 까지 출정하여 살인자 일당을 일망타진 하였고 그 이전에는 "키케로의 <br>죽음" 마저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그리고는 언론의 자유가 지나치면 어떤 대가를 치루는지 <br>보여주는 의미에서 그의 머리와 손을 잘라 로마의 연단 앞에 전시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br>여기서 언급한 것은 단순하게 <span style="COLOR: #ffffff">"키케로의 죽음"</span>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인데 <br>공화주의자 들의 학살의 전주곡으로서 이후로 "카이사르의 제단" 위에 수백명의 공화주의자<br>들의 목숨이 바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전쟁(내란)이 일단락되고<br>얼마지나지 않아 기원전 40년 Second Triumvirate(삼두 정치)는 기원전 43년에 맺은 협정을 <br>갱신하여<span style="COLOR: #33ff33">First Triumvirate</span>처럼 영토를 나눠 가졌다. 대략 당시 !! 구도는 Marcus Antonius-<br><span style="COLOR: #ff0000">Eastern</span>, Marcus Aemilius Lepidus-<span style="COLOR: #33ff33">Africa</span>, Gaius Octavianus-<span style="COLOR: #ffcc00">Western</span>으로 세력 분할이 <br>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시기는 기반이 취약 했던 "옥타비아누스" 가 정치적으로 성장한 기간이었다. <br><br>역사 속의 땅 따먹기 판도에서 만족한 자와 만족하지 않은 자의 싸움에서 <br>대개 후자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점은 만고불변(萬古不變)의 원칙인지 <br>모르나 세명의 인물 중 가장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인물은 의외로 Octavianus<br>로서 가장 커다란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싶다. 일차적으로 <br>기원전 36년 그는 Lepidus 군대를 회유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로써 손, 발 잘린 <br>"레피두스"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고, 남은 두 사람의 경쟁은 좀 더 노골 화 되었다.<br>하지만 승부는 명확해 보였다. Octavianus는 동갑으로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br><span style="COLOR: #66ffff">Marcus Vipsanius Agrippa</span>와 같은 참모를 거느린 채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었고,<br>"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소유에 만족 하면서 Parthia에 마저 패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br>이집트로 가서 Cleopatra의 치마 폭에서 지내게 된다. 반면에 Octavianus는<br>이러한 시기 Antonius에 대한 격하운동이 진행되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는데&nbsp; <br>기원전 36년 마침내 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 낼만 한 커다란 전과를 올리게 된다. 그것은<br>함대를 보유하고 식량 공급지을 위협하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을 Sicilia Naulochus<br>(나울로쿠스)에서 제거한 것이다. 따라서 Octavianus는 시민의 명예로운 환대를 받게 된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0b85e65a.jpg" width="500" height="686.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0b85e65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Olive Oil From Oneglia</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d0d95686.jpg" width="500" height="37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d0d95686.jpg');" /></div><span style="COLOR: #ffff00"><span style="COLOR: #ffcc00">Pharaoh Amenhotep<br></span></span>결정적으로 <span style="COLOR: #33ff33">Octavianus &amp; Antonius</span>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종교적 <br>가치관이 달랐던 두 사람의 행보에 기인하고, 옥타비아와 이혼(기원전 32)이<br>성립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Antonius는 <br>로마의 법이 인정하지 않았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 이집트 왕을 표방<br>하였고, Hellenism Type의 호화로운 생활에 중독되어 있던 상태이었다. 반면에 <br>Octavianus는 대조적으로 서방의 자유수호자 <span style="COLOR: #ff0000">Vindex Libertatis<span style="COLOR: #ffcc00">(빈덱스 리베르타티스)</span></span><br>처럼 신분이 이상적으로 격상되어진다. 또한 동방의 군주제도에 대한 원로원의 <br>반발로 자연스럽게 Octavianus의 지지 세력이 결집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br>드디어 원로원의 주도 아래 전쟁이 선포되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실질적인 총사령이<br>되어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바로 !! 역사적인 <span style="COLOR: #ffffff">Battle of Actium(기원전 31)</span>을 <br>말함이고, <span style="COLOR: #33ff33">Antoniusms-Cleopatra-Octavianus</span>의 운명적인 관계에서 승리자는 <br>"옥타비우스"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Antoniusms-Cleopatra는 전쟁의 전리품이 <br>아니라 자살(칼과 독)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로써 Egypt Ptolemaeos(프톨레마이오스)는 <br>대가 끊기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가슴아픈 현실로서 수 천 년에 이르는 Egypt 왕국의 <br>역사가 절명했다는 사실이다. 이때가 <span style="COLOR: #ff0000">Menes</span><span style="COLOR: #ffcc00">(메네스)</span> 왕이 첫 번째 왕조를 연 이 후 <br>왕국을 세운 이래로 3000년이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영웅의 삶은 청년기에 만개하는 것<br>인지 모르나 Alexandros가 동방원정을 완성한 것과 같은 33 살에 Octavianus는 <br>권력의 최정점에 서며, Urbs Roma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 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br>으로 부터 월계관과 방패 그리고 군대 지휘권을 포함하여 속주의 지배권(기원전 27년)을 받았다. <br><br>따라서 내전이 종결된 기원전 27 그는 사실 상의 황제이었으나 "왕정"을 <br>극도로 싫어하는 시민들을 고려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span style="COLOR: #ff0000">Princeps</span><span style="COLOR: #ffcc00">(프린켑스)</span> 즉 !! <br>최고 시민이라는 공식 직함을 헌정하고 아울러 Augustus(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의 <br>존엄한 자 라는 존칭을 바치게 된다. 이때의 제정을 Principatus(원수정)이라고 <br>부르기는 하지만 이는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br>이었을 뿐이고, 사실적인 제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식명칭 <span style="COLOR: #33ff33">→ Imperator Caesar- <br>Divi Filus Augustus Imperator</span>의 뜻은 소유자(명령권, 행정권)라는 뜻의 <br><span style="COLOR: #ff0000">Imperium<span style="COLOR: #ffcc00">(임페리움)</span></span>은 정복의 임무를 완수한 사령관을 의미하는 호칭이 되었다.<br>설명하자면<span style="COLOR: #66ffff">Divi Filus</span>는 신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span style="COLOR: #ffcc00">Caesar →</span> 새로 바뀐 그의 이름이기도 했다. <br><br>참고로 고대 고대국가에서 달력은 매우 중요 했다고 알려져 왔다. <br>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달력"이 없으면 불가능 하였고, 더구나 중요한 <br>제사는 물론이고 왕의 생일, 각료들의 회의 소집일 같은 것들은 또한 "달력"이 <br>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달력은 천문학의 지식이 있어야만 했으므로 만들기도 <br>어려웠지만 아무나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Roman Empire의 <br>경우 기존의 있던 것을 카이사르가 지역마다 다른 것을 통합시켜 확정(16 C 까지 <br>지속된 정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렇게 창안된 달력을 "율리우스 력"이라고 <br>하였으며, 7월을 뜻하는 <span style="COLOR: #ff0000">July</span>는 바로 그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그전 까지 <br>"로마의 달력"은 1 년을 12 개월로 하고, 4 년에 한번씩 13 개월로 했는데 "율리우스 력"은 <br><br>오늘날까지 1년을 12 개월로 하였고 365 일을 윤년마다 2월을 <br>29일로 하는 방식으로 하였다. <span style="COLOR: #33ff33">Octavianus</span>는 7월의 이름이 되어 있는 <br>양-아버지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8월의 이름으로 정해졌다. 8월을 뜻하는 <br>영어 단어 <span style="COLOR: #ff0000">August</span>는 여기서 비롯되어진 말이다. 이들 부자 덕분에 7월에서 <br>10월 까지의 이름들은 오늘날 모두 두달 씩 뒤로 밀려서 9월에서 12월<br>까지의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Italian Peninsula의 틀안에서 Urbs Roma가 <br>머물던 시대에 어울리는 정치체제가 "공화정"이었다면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Urbs- <br>Roma에 맞춤 정치 체제는 바로 “Imperial(제정)”이었고, 위대한 제국이 탄생된 것이다. <br>.<br>.<br>.</p><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c5ed77c1.jpg" width="500" height="331.07142857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c5ed77c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esar Augustus</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c6981540.jpg" width="500" height="768.24583866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2c698154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leopatra Before Caesar</span><br>원로원과 Urbs Roma의 시민들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은 Augustus<br>(아우구스투스)는 단지 <span style="COLOR: #ffffff">"좋은 결정을 구현하는 사람"</span>이 되었을 뿐이다. Princeps<br>이기를 받아들이면서 외형적으로는 모든 "권력" 을 원로원에 넘겨주는듯 했으나 <br>실상은 "카이사르" 가 1000명 까지 확대한 원로원의 구성을 줄이고 <span style="COLOR: #33ff33">Tribunus, Consul, <br>Pro-Consul, Pontifex Maximus, Censor</span>의 권력 까지도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br>하면서 자신의 손안에 모든 정치적 결정권(임페리움)을 스스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br><span style="COLOR: #ffffff">"학살과 복수" </span>시대의 종결을 선언하고 황제로서 많은 것을 용서하였지만 과거의 과두 정치<br>(Potentia Paucorum, 포텐티아 파우코룸)의 독재에 대항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br>시민의 투쟁의 본질이 상실시킨&nbsp;것 또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훗날 "로마 인"들은 <br>예전에 자신들이 누리던 <span style="COLOR: #cc33cc">"자유"</span>가 멀어져 있음을 체감하게 되었고, 그보다는 평화와 번영을 <br>더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span style="COLOR: #ffcc00">Caesar Augustus</span>는 해방자들에 의해 살해된 <br>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에서 경의를 표하는 일을 추진하였으며, 그곳에서 가까운 <br>장소에 아버지(양-아버지)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립했는데 Urbs Roma가 한 인간의 죽음에<br>이토록 <u>신격화된 예찬을 바치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도</u>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점 <br>부터는 삼두 정치 시대의 내전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시점이 되었던 것이다.<br><br><span style="COLOR: #ff0000">Tempio di Geasare<span style="COLOR: #ffcc00">(템피오 디 줄리오 체사게)</span></span> 신전 앞에 <br>"아우구스투스"는 Rostra ad Divi Iulii(로스트라 아드 디위 율리)<br>라는 연단을 만들었는데 훗날 그곳에서 그가 세운 Gens Julius-Claudius <br>왕조에 대한 추모 연설이 행해졌다. 그리고 기원전 29 / 08 월 18 일에 헌정된 <br>이러한 신전의 대리석 기둥에 새겨진 <span style="COLOR: #66ffff">조국의 아버지에게...</span>라는 글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9b53abb3.jpg" width="500" height="447.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20/67/d0006967_4add39b53abb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oyal Color-Viole</span><br>.<br>.<br>.<br><span style="COLOR: #ffcc00">It`s A Man`s World</span><br><embed height="68" type="application/octet-stream" hidden="true" width="300" src="http://cfs7.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Eg3dFNAZnM3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IvMjE1LndtYQ==&amp;filename=215.wma&amp;filename=Patricia+Kaas+-+It%27s+A+Man%27s+World.wma" autostart="true" showstatusbar="false" loop="true" volume="0"></p><br/><br/>tag : <a href="/tag/Christianity" rel="tag">Christianity</a>,&nbsp;<a href="/tag/Latifundium" rel="tag">Latifundium</a>,&nbsp;<a href="/tag/Etruscan" rel="tag">Etruscan</a>,&nbsp;<a href="/tag/Fetiales" rel="tag">Fetiales</a>,&nbsp;<a href="/tag/Westfalen" rel="tag">Westfalen</a>,&nbsp;<a href="/tag/Caesar" rel="tag">Caesar</a>,&nbsp;<a href="/tag/Augustus" rel="tag">Augustus</a>,&nbsp;<a href="/tag/Alexandros" rel="tag">Alexandro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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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3 Oct 2009 17:00:1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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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Alphabet Story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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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77cda7d4.jpg" width="500" height="34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77cda7d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esuvius from Plane<br></span><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9eb88100.jpg" width="500" height="21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9eb88100.jpg');" /></div>Cartouche Regnaudin Amelot de Bisseuil<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f1d24758.jpg" width="500" height="35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f1d24758.jpg');" /></div>Thebes Map<br></span>고대 유물은 간헐적으로 유럽인들의 관심(1485년 이 후)을 <br>끌었지만 본격적인 유물 발굴 작업은 먼 훗날에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br>그렇지만 기원 후 79년 <span style="COLOR: #ff0000">Vesuvio</span><span style="COLOR: #ffcc00">(베수비오)</span> 화산의 폭발로 매장된 <br><span style="COLOR: #ff0000">Pompeii</span>의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이미 !! <u>발굴의 역사는 시작되었던</u> 것이다. <br>직접적인 계기로 작용된 것은 역시 Pompeii 유적의 발굴에 있었다. <br>Pompeii <u>거대한 도시가 땅속에 묻혀 있다면</u>&nbsp;또 다른 고대문명&nbsp;역시... 땅 속에 <br>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러한 생각들은 사료와 유물의 흔적을 통해 <br>실제 적용되었으며, 대략 이러한 시기부터 고대 문명에 대한 인식이 <br>바뀌며 박굴 작업을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굴 계획도 해당 <br>유물이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모르면...허당 중요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br>그러한 면에서 발굴의 최종적인 성과는 해당 문명이 사용하던 문자의 해독 <br>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하였으며, 당시 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br>고대 문명의 탐사와 함께 고대 언어의 해독작업에 나서 상당한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br><br><span style="COLOR: #66ffff">Napoleon Bonaparte</span>의 "이집트 원정(1798)"은 애초에 순전히... <br>Napoleon 자신의 자의식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다. 당시 France는<br>혁명 정부가 들어서며 혁명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는데 구-체제 <br>동맹 세력이기도 한 <span style="COLOR: #33ff33">Austria </span>공략을 수차례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br>어찌되었거나 "빈"으로 공격해 들어간 Napoleon Bonaparte에 의해서 Austria는 <br>굴복되었고, 한 순간 Napoleon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에 혁명<br>정부는 Napoleon도 견제하면서 United Kingdom의 "인도 영토"에 대한 지배력 <br>약화를 노린 다원적인 계획이기도 한 Egypt 원정을 추진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br>원정 길에 많은 학자들을 포함시켜 떠난 행운을 달고 다녔던 사나이 Napoleon은 <br>원정도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고, 뜻하지 않게 돌덩어리 하나를 획득하는데 <br>그것은 <u>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니었으며 고대</u>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준다. <span style="COLOR: #ffcc00"><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7f099c51.jpg" width="500" height="630.91482649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7f099c5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The Bather 1808</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82370b46.jpg" width="500" height="32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82370b4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ketch by Jacques-Louis David of the Tennis Court Oath. <br>David later Became a Deputy In the National Convention In 1792<br></span>이로 인하여 <span style="COLOR: #ff0000">19 C</span> 초기에 유럽에서는 Nile River 유역의 <br>경이로운 고대 세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br>하였으며 상류사회에서는 여행은 물론이고, 이집트 유물의 수집이 <br>활성화 되었다. 더불어 점차로 문자 해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br>많은 학자들이 참여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정치적 결정이 인류 최고의 <br>비밀에 다가서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셈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br><span style="COLOR: #33ff33">Champollion</span>에 의해 문자 해독이 이뤄졌고, 그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br><u>지속적으로 문자 해독에</u> 전념하였다는 점이다.&nbsp;또한 지나칠 정도의 Egypt <br>옹호주의자로서 그는 보수적 Christianity &amp; Hellenism의 학파와 마찰을 <br>일으킨다. 그러한 배경으로서 초기의 폭발적 관심 이 후... 상형문자 해독은 <br>경시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지만...1850년대 그의 해독결과가 되살아나면서 <br>다수의 학자들은 Egypt에 대한 매력과 Champollion의 빛나는 연구 실적 <br>그리고 당대의 강렬한 <span style="COLOR: #ff0000">인종주의</span>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보이게 되었는데... <br>일부에서는 1880년대 까지 Egypt 문화를 정적이며 창조력이 빈곤한 문화의 <br>막다른 길로 보았고, 19 C 동안 수많은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은 <span style="COLOR: #ffcc00">Pyramid</span>의 <u>수학적 <br>우아함에 이끌려 보다 수준 높은 고대 지혜의 보고라고</u> 믿기까지 하였다. <br>이러한 상황인식을 설명하는 다른 것으로 "흑인 노예와 인종주의" 발흥으로 <br>유럽 사상가들은 Africa 흑인을 가능한 유럽 문명에서 배제하려 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br><br><span style="COLOR: #ffffff">"중세, 르네상스"</span>시대에는 Egypt People 들의 피부색을 몰라서 <br>그저 "백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Egypt에 대해 <br>많은 애정을 갖고 있던 <span style="COLOR: #ff0000">Freemason</span>은 Egypt People이 백인이라고 <br>여겼으며, 그 뒤 전통적인 Greece 문화 추종자들에 의해 Egypt People의 <br>피부색이 백인이라는 사실에 부정적인 의견을&nbsp;반영하게 되었고, 심지어 <br>그들이 문명 인이었다는 사실마저 은폐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span style="COLOR: #ff0000">18-19 C</span> 초기 <br>"낭만주의 학자"들은 다소 경멸적인 시선으로 평가절하 하기도 하였는데 <br>이러한 현상은 유럽인이 <span style="COLOR: #ffcc00">Africa People</span>&nbsp; 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 <br>Egypt People을 바라보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또한 당시... 유럽 사상의 <br>중심으로 이루던 "낭만주의 학파"의 Egypt에 대한 고정된 시선이기도 했다. <br>따라서 어떤 경우든지 흑인과 유럽 문명 사이에서 뚜렷한 경계선이 있었음을 <br>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Mycenae-Knossos" 문명이 차례로 <br>발견되고,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면서 나타난 현상들도 결코 가볍지만 않았다.<br><br>그들은 철저하게 셈-족 문명(Phoenicia)을 부정하고, <span style="COLOR: #66ffff">Creta</span>가 <br>상당 부분 고대 셈-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고대 전승마저 무시한다. <br>즉 !! Greece에 대한 Phoenicia의 영향은 1920년대에 이르면 "신기루"에 <br>지나지 않은 것으로 완전히 배제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시기는 Russia... <br>혁명과 제 3세계에서 <span style="COLOR: #ff0000">Jews People</span> 들이 수행했거나 수행했음직한 역할로 <br>인해 반-유대주의가 점차로 거세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9 -8 C</span> <span style="COLOR: #33ff33">Aegean Sea <br>&amp; Italy Peninsula</span>에 "페니키아인들이..."존재 하고 있었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br>말이다. 또한 Greece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사실조차 의문시 되었다. 그리고 Greece <br>Alphabet 어휘와 단어들이 셈-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전의 주장들이 완전히 부정<br>되었다.&nbsp;이렇게 되서&nbsp;현실적으로 차용하여 사용된 Alphabet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데 <br>주력한다.&nbsp;또한 그들에 의해 가장 먼저 시도 된 것이 Greece People 들이 "모음"의 <br>창조이었다. 이것은 마치 진짜 같은 허구이다. 두 번째로 Alphabet을 차용한 <br>지역이 <span style="COLOR: #ffcc00">Rhodes → Cyprus</span>로 옮겨지더니 마침내 그 존재마저도 의심스런 "시리아 <br>해안"의 Greece 식민지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차용이 사회적 혼합을 <br>수반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인종적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순혈주의"가 등장한 것이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aa1bfc8f.jpg" width="500" height="28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aa1bfc8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treets of Luxor</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a2e36f0c.jpg" width="500" height="649.35064935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a2e36f0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Jews People<br></span>그리고... Alphabet이 전래된 시기가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720년경...</span>으로 <br>도시국가와&nbsp;Old Greece 문화의 형성기 이 후로 안전하게 낮춰<br>졌다는 점이다. 이로써 Creta 선문자가 사라지고 나서 Alphabet이 <br>도입되기 까지 오랜 문명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br>고대 세계에서는 "인종주의"라는 개념이 없었다. 검은 피부색은 <br>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으며, <span style="COLOR: #33ff33">Old Egypt &amp;</span> <span style="COLOR: #33ff33">Greece-Roman</span> 시대의 <br>예술품들은 각 인종의 특징과 피부색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만 <br><u>어두운 피부색을 열등함의 상징으로</u> 여겼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br>유럽 열강들이 Africa 대륙을 식민지화 한 시점(19 C) 이후에야 <br>학자들에 의해서 <span style="COLOR: #ff0000">Egypt &amp; Nubia People</span> 들의 피부색에 관심을 갖기 <br>시작하였고, 그들에게 부정적 Image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Roman의 <br>"노예 제도와 피부색"에 대한 차별의식은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것이 <br>아니었다.&nbsp;예컨대 "반-유대주의"에 시달려온 유대인들은 1949년부터 점차로 <br>완전한 유럽인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러한 사실도 최소한 대학살의 <br>참혹함과 Israel <u>건국이 선행된 이 후의 일이었다</u>. 더불어 1950년대에는 <br>자신들의 뿌리(셈-족)에 대한 자긍심이 눈에 띄게 증가 되었으며, 이러한... <br>맥락에서 "정통 유대주의 혹은 시오니즘"의 배타성을 받아들일 수 <br>없었기 때문에 셈-족 문명 전체를 옹호하면서 극단적으로 공격적 성향을 <br>보이는 학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학자들 중 고대 지중해 동부 지역에... <br><br>정통한 위대한 학자 일인은... Hebrew 문화와... <br>Hellenes 문화 사이의 상호교류 관계를 증명하는 <br>일을 자신의 평생의 사명으로 여길 정도이었다. 이러한 <br>과정에서 그가 상정한 가교는 "시리아 해안"의 고대 도시이기도 한 <br><span style="COLOR: #66ffff">Ugarit &amp; Creta </span>이었다. 기원전 14-13 C에 Ugarit에서 기록된 <br><u>가나안 신화(해독)속에서</u> 성서 및 Homeros의 연결성을 발견하였으며, <br>정통적 견해를 거슬러 Creta 선문자를 셈-어로 읽어냄으로써 공격을 <br>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Ventris의 선문자 B 해독은 <br>Greece <u>문화의 지리적 폭과 역사적 깊이를 확증하였다는</u> 점에서 환영 받기도 했다.<br>.<br>.<br>.<br>"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속하는 Aegean Sea <br>유적에서 Levant 유물이 점차로 많은 수 발견됨에 따라 상황은 <br>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985년에 이르면 서부 셈-족이<br>Greece Islands 뿐만 아니라 본토... 적어도 <span style="COLOR: #ff0000"><span style="COLOR: #33ff33">Thebes</span></span>에도 Phoenicia<br>People 들이 정착하였다는 점은 받아들여진다. 또한 철기시대에 Greece에 <br>대한 Phoenicia의 영향이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8 C</span> 이전에 아마도 이르게는 기원전 <br><span style="COLOR: #ff0000">10 C</span>에 시작한 것으로 이제는 믿게 되었다. 아울러 Greece 적인 어휘에는 <br>셈-어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으며, 최소 Thebes에 Egypt 식민지가 <br>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Egypt 언어 및 문화 또한 Greece 문화 형성에 <br>셈-족의 언어 및 문화 못지않게 심지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가설을 비로써 인증되었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511ad0cd.jpg" width="500" height="68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511ad0c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lphabet...<br></span><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Wikipedia / Alphabet</span><br><a href="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the_alphabet#The_Semitic_alphabet"><span style="COLOR: #ffcc00">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the_alphabet#The_Semitic_alphabet</span></a><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905908ef.jpg" width="500" height="39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905908e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ssaloniki Saint Gregory Palamas</span><span style="COLOR: #ff0000"><br>21 C</span>&nbsp; <span style="COLOR: #33ff33">"</span><span style="COLOR: #33ff33">세계의 문자"로서 Alphabet !! <br></span><u>언어 혹은 부호를 구성하는 기호</u>가 이미 !! 정의 된 <br>유한 집합으로 E-mail 주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br><span style="COLOR: #ffffff">(한글 자모의 전체, 영어의 "ABC" 영문 26자, 2진 부호의 0과 1)</span> <br>Alphabet의 기원이나 배경을 살펴보면 "Roman Empire" &amp; <br>Old Greece 등의 고대 문명과 다양한 민족의 명운과 함께 해오면서 <br>논란의 중심에 있기도 하지만 대략 인정받고 있는 몇 가지 <br>이유에 대해 인지하고 있어야 할 듯싶다. <span style="COLOR: #33ff33">→ 4천년 역사의 세계 문자의 원형<br></span><br>"ABC"로 시작되는 Alphabet(로마자)의 26 자는 현재 <br>지구상에서 말하면 "세계 문자"이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br>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하면 절대적으로 사용되는 기본적인 언어 <br>표현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적은 문자수로도<br>모든 문장을 기록하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반면 <span style="COLOR: #ff0000">South Korea, China, <br>Japan</span>처럼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는데 필요하지 않더라도 Internet <br>Home Page, E-mail 주소(Languages html) 등에 현재 사용된다는 것을 <br>감안하면 세계 인구 수십억 명 이상이 Alphabet(로마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br><br>Alphabet은 기본적으로 <span style="COLOR: #ff0000">26 </span>자를 알고, 이해한다면 문장과 <br>낱말을 만들고, 기록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Alphabet의 <br>"A" "B" 등의 각 글자는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하나의 음"을 <br>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하나의 문자를 <br>조합함으로써 낱말이 만들어지고, 문장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결국 <br>Alphabet은 <span style="COLOR: #33ff33">"ABC"</span> 와 다른 문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표음 문자<br>(소리글자)"로 낱말을 만드는 문자 System을 의미하게 된다. "<span style="COLOR: #ff0000">표음문자<br><span style="COLOR: #ffcc00">(表音文字)</span>"</span>에는 소리를 <span style="COLOR: #ffffff">"음소"</span>단위로 표기하는 음절 문자가 있으며,<br>음소 문자에는 Alphabet, "한글, 가나" 등이 있고, <span style="COLOR: #ff0000">"표의문자<span style="COLOR: #ffcc00">(表意文字)</span>"</span>라고 <br>불리는 "뜻 글자"는 글자 하나...하나... 일정한 뜻을 나타내는 문자를 <br>말하며 고대의 회화 문자, 상형 문자가 발달되어진 것으로 <span style="COLOR: #ffffff">"한자(漢字)"</span>가 <br>대표적이다. 따라서 Alphabet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자 체계는 세계 거의 <br>모든 지역, 국가, <u>민족에 의해 사용되어지는 표음 문자</u>(음소 문자)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br><br><span style="COLOR: #33ff33">표음문자(表音文字) <span style="COLOR: #ffcc00">/ Phonogram,</span> 표의문자(表意文字) </span><span style="COLOR: #ffcc00">/ Ideogram</span><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c220f07c.jpg" width="500" height="751.87969924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c220f07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ncient Egyptian Cartouche of Thutmose III, Karnak, Egypt</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c3e25e59.jpg" width="500" height="335.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c3e25e5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emple of Artemis<br></span><span style="COLOR: #cc33cc"><span style="FONT-SIZE: 130%">Phonemic Writing / 음소 문자(音素文字)</span><br></span>Armenian, Avestan, Bassa(Vah), Beitha Kukju, <br>Coptic, Cyrillic, Elbsan, Etruscan, Fraser, Georgian<br>(Asomtavruli &amp; Nuskha-Khucuri), Georgian (Mkhedruli), <br>Glagolitic, Gothic, Greek, Hungarian Runes, Irish,<span style="COLOR: #ffffff">Korean,</span> <br>Latin, Manchu, Meroïtic, Mongolian, N'Ko, Ogham, Old Church- <br>Slavonic, Oirat Clear Script, Old Italic, Old Permic, Orkhon, <br>Pollard Miao, Runic, Santali, Somali, Sutton SignWriting, Tai Lue, Thaana, Uyghur<br><br><span style="COLOR: #ffffff">"세계인의 언어"</span> Alphabet의 공통점은 역시 !! 영문자 <span style="COLOR: #ff0000">A → Z <br></span>까지 26 자로 United Kingdom에서는 A → Z 26 자, Deutschland<br>에서는 30 문자로 구성되어지고 France에서는 40 문자가 사용<br>되고 있는데 26 자 이외의 다른 문자들은 필요에 의해 추가 되었다고 <br>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부터 영문자(Roman Alphabet)는 <br>왜 !! 세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점에 대해 <br>풀어나가기로 하자 !! A→Z 까지 26 자는 기원전 1 C에서 약 500년 <br>동안 유럽의 대부분과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였던 <span style="COLOR: #33ff33">Roman Empire</span>에서 <br>사용된 문자라고 할 수 있는데 Roman Empire를 세운 Italy People<br>"Latin People"에 덧붙여 "Latin Alphabe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Empire <br>말기에 Christianity 기록을 통해서는 392년 Empire의 국교가 된 Christianity의 <br>포교에 사용된 성서, 성가에 Latin Alphabet이 쓰였다고 하며, 최초 Roman의 <br>공용 문자로 사용되었다고 한 기록과 이후에는 <span style="COLOR: #ff0000">Christianity</span>의 문자로도 사용되었다는 <br>점 이러한 두 가지 정도의 이유에서 현재 유럽 각지에 Latin Alphabet의 영향이 남아 <br>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 Empire에서 확장된 Christianity 세력, 포교에 사용된 특별한 서체 !!<br></span><br>United Kingdom → 26, Spin → 33, <br>Deutschland →30, France →40, <br>Italy → 26, Russia →33, Greece → 24<br><br>North-America(16 C), South-America(16 C), <br>India(15 C), Africa(15 C), Oceania, Southeast Asia(16 C)<br><br>España(Spain), United Kingdom(England), <br><span style="COLOR: #ff0000">Finland</span>, Deutschland(Germany), France, Italia → Latin Alphabet<br><br>그럼 !! 시작하기 전에 자랑스러운 <span style="COLOR: #33ff33">Korean Alphabet</span>의 <br>훌륭한 점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한글의 뛰어난 점은(훈민정음) <br>표음문자 중에서도 음소 문자이면서 동시에 음절 당위로 묶어 쓸 수 <br>있다는 사실이다. 한글에서는 "ㄹ"과 "ㅗ"라는 음소를 합쳐 "로" 만들고 <br>"ㅎ"와 "ㅏ" 를 합쳐 “하”라는 문자가 만들어진다. 같은 원리로 "라", "호" 등 <br>수많은 문자를 조합하여 문자가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단순 명쾌한 <br>System은 다른 문자 체계에서는 만날 수 없다. 같은 음소 문자이기도 한 <br><span style="COLOR: #ff0000">English Alphabet</span>에서는 각각의 문장의 "음"이 경우가 달라져 문자만으로 완전한 <br>발음을 알 수 없는 경우 많은데 한글에서는 이러한 일이 없다. 또한 자음과 모음을 <br>몇 개의 기본적인 "기본자"를 바탕으로 다른 글자를 만드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br>즉 !! 자음 <u>ㄱ, ㄴ, ㅁ, ㅅ, ㅇ</u> 등을 바탕으로 여기에 획을 더해 다른 글자를 만들고 <br>모음은<u> ㅡ, ㅣ</u> 등을 바탕으로 이를 조합하여 글자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ㄷ, ㄸ, ㅌ처럼 <br><u>비슷한 발음의 글자는 서로 비슷하게 생겨 모양만 보고도 발음을</u> 짐작 할 수 있다. <br>그래서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우며, 실로 다양한 소리로 문자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br>.<br>.<br>.<br><span style="COLOR: #66ffff">Egypt(기원전 32 C)</span> → Egypt-South(기원전 20 C) → 원-Sinai(기원전 16 C) <br>→ Sinai Peninsula(기원전 15 C) → Phoenicia(기원전 11C) → <br>Greece(기원전 8 C, Cyrillic) → <span style="COLOR: #ff0000">Etruria(기원전 7 C)</span> → Latin(기원전 6 C)<br>.<br>.<br>.<br><span style="COLOR: #33ff33">Hieroglyph(기원전 32 C) <span style="COLOR: #ffcc00">↔ Wadi el-Hol(비문의 문자) ↔</span> 설형문자(楔形文字, 기원전 14 C)</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d1f57b4f.jpg" width="500" height="422.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d1f57b4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 Town of Ortahisar<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d52764dc.jpg" width="500" height="673.40067340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d52764d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ppadocia</span><br>문자의 발생은 인류 문명사에서 혁명적인 대사건이기도 <br>하였다. 흔히 문자 이전의 시대를 역사 시대라고 구분하기도 <br>하지만 선사 시대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중요한 사실은 문자 체계를 <br>좁은 의미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인류 최초의 문자라고 하면 <br>일견 Sumer<u>의 설형문자(쐐기)</u> 혹은 Old Egypt<u>의 상형문자를</u> 말하고 <br>있다. 그러한 점에 근거하여 기원전 3,000년 무렵을 역사 시대의 시작이라고 <br>정의한다. 최초의 문자는 처음부터 문자로 규정되지 않았으며 특별한 <br>문법 체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즉 !! 문법 이전에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와 <br>어휘가 먼저 생겨난 것으로 또한 특정한 사물(새, 나무, 왕관)을 묘사하는 <br>그림이었다는 점이다.<span style="COLOR: #ff0000">"은(殷)"</span> <u>나라 시대 갑골문으로 시작된 </u>China의 한자(漢字)는 <br>실제로 그림을 기원으로 하며, 흔히... Alphabet을 그러한 상형 문자와 <br>다르다고 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Alphabet 역시 !! 그림과 같은 원리로 탄생되었다. <br><br>원칙적으로 Alphabet의 탄생은 고대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던 <br><span style="COLOR: #ff0000">Phoenicia People</span> 들의 <u>장부 기재를 목적으로 완성된 문자이기도</u> 하다. <br>사물을 지칭하여 단어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단어들을 구성하여 <br>어휘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문법체계가 생겨난 과정은 상형문자, Alphabet도 <br>마찬가지인 것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Sumer의 점토판(기원전 24 C), "은(殷)" 나라의 갑골문(기원전 16 C) <br></span><br>"문자의 원형"을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아득히 먼 곳으로 <br>좀 더 가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배경은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80 C</span> 까지 <br>거슬러 올라가는데 억지스러울 수 있으나 문자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br>2 cm <u>전후의 "토-큰" 이라고 불리는 점토 제품이라는</u> 것이다. 이러한 <br>사실은 <span style="COLOR: #ffcc00">Anatolia, Greece, Iraq, Iran</span> 등 지역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br>다양한 형태(원뿔 형, 원반형)로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같은 <br>장소에서 지름 10 cm 정도로 그 속이 비어 있는 <span style="COLOR: #ffffff">"점 토 구"</span>도 발견되었고 "토-큰"은 <br>때로는 점토구 안에 넣어져 있었다고 하며, "토-큰"이야말로 "그림 문자"의 <br>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서 증가한 인구, 가축 등 다양한 물품<br>들을 관리할 필요에 의해 <span style="COLOR: #ffcc00"><span style="COLOR: #ff0000">"토-큰"</span></span>을 이용해 기록을 시작하였고 토-큰은 상품의 <br>전표 대신에 사용되었으며 "점 토 구" 안에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점차로 <br>보관하는 행위가 다양해지면서 <span style="COLOR: #ffffff">"점 토 판"</span> 등에 기호로 써넣은 행위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98b7ca83.jpg" width="500" height="372.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98b7ca8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Ebla-Syria</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e2740e82.jpg" width="500" height="33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e2740e8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Ephesus</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e9040b27.jpg" width="500" height="377.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de9040b2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odrum Castle<br></span>핵심적으로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가면서 "가족"이나 <br>친족 집단과 달리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br>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향유하며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br>"사회"이다. 낯모르던 사람을 만나 그림을 소통의 수단으로 <br>활용하려면 객관적이고 단순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림은 <br>추상화 되었고, 기호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 <br>사람들은 "새 그림"을 제각각 그리다가 점차로 공통적인 모양을 갖추어 <br>가면서 정형화시켰고, 단순화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추상적인 <br>형태를 확립시키며, <u>단순화 되었던 문자는</u> 그림과 점차로 단절된다. <br>기본적으로 문자는 그림의 연장으로 생겨났으며, 그림의 직접성을 잃어<br>가는 대신에 객관적인 의미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문자의 <br>형성과정에서 중요했던 것은 <u>그 자체로의 발생이 아니라 통용이기도</u> 하였다. <br><br>즉 !! 문자를 만들려고 한다면 이제 누구나 <br>못 만들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자를 <br>문자이도록 하는 것. 문자의 통용은 개인의 힘으로 <br>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문자는 사회적 약속이자 개인의 <br>의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도구인 셈이다.<span style="COLOR: #ffffff">"문자의 탄생"</span>을... <br>문자 기호가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고, 문자가 통용된 <br>것으로 보면 문자의 성립보다 사회적 확립이 앞선다는 사실을 <br>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span style="COLOR: #ffffff">역사의 시작(문명 출발)</span>은 <br>사회가 처음 형성되었을 시기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br>문자의 발생을 하나의 혁명으로 본다면 사회의 탄생은 그보다 <br>좀 더 포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문자 이전의 혁명은 우선 두 가지 <br>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핵심적인 것은 "도시 혁명"이었다. <br>도시라고 하면 원칙적으로<u>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공간을</u> 의미하며, <br><br>인류 최초 도시는 <span style="COLOR: #ffcc00">Mesopotamia, Anatolia, Syria <br></span>일대에서 기원전 8,000년 경 무렵에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br>있다. 중요한 점은 문자도 그렇지만 도시도 특정한 <br>개인이나 집단이 처음부터 출발점을 정하고 시작한 것은 <br>아니라는 것이 것이다. 도시는 단지 사람들이 모여 이룬 촌락과는 <br>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일차적으로 도시라는 명칭을 <br>사용하기 위해서는 <u>경계선이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u>. 경계선이라고 <br>함은 "성곽"을 말하는데 그러한 점에서 역사학에서는 Jordan River... <br>인근의 <span style="COLOR: #ff0000">"Jericho<span style="COLOR: #ffcc00">(예리코)</span>"</span> 를 최초의 도시로 간주 하고 있다. 참고로 <br>인류학에서는 현재 Iraq 남부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span style="COLOR: #ff0000">"Eridu<span style="COLOR: #ffcc00">(에리두)</span>"</span>를 <br>최초의 도시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인류 최초의 도시가 어디인지는 <br>사실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건물터도 70개 정도에 불과하고 수용 인구 <br>역시 1,000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그래도 Jericho는 어엿한 도시인 것은 확실하다. <br><br>그러한 근거는 기원전 8,000년경에 이미 성벽과 성문, <br>망루를 갖추고 있었다는데 있다. 주요 관점으로 성곽을 도시<br>형성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 것은 오로지 서양적인 도시의 개념이다. <br>동양이 초기 도시들은 성벽으로 <span style="COLOR: #ffffff">"시"</span>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곳도 <br>많다. 하지만 서양식 도시의 개념을 수용한다고 하여도 그러한 도시가 <br>Jericho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 Jericho에 남아 있는 성곽의 유적은 <br>기원전 8,000년 전의 것이지만 같은 장소 지하에는 그 이전의 시대에 <br>속한 다른 도시가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Anatolia 지역의 고대 도시 <span style="COLOR: #33ff33">Troy <br></span><u>유적은 19 C 후반 </u><span style="COLOR: #ff0000">Heinrich Schliemann</span>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지만 <br>이 후 발굴이 진행되면서 같은 장소에서 여러 시대의 도시들이 마치 벌집 <br>형태로 층층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것은 지진이나 전쟁과 <br>같은 자연적, 인위적 변화로 도시가 버려졌다가 다시 건설되는 과정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br><br>도시의 형성은 의식적인 약속의 소산이 아니다. 그렇다면 <br>비슷한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도 도시가 생겨났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br>즉 !! 기후와 지리적 여건을 종합하면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br>먼저 열대 지역은 수 백 년 만년 동안 인간이 살아온 방식인 수렵-채집 <br>생활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대규모로 몰려 살아 갈 필요가 없는 지역<br>이었고, 마지막 <u>빙하기가 끝난 시기가 대략 기원전</u> 13,000년 이라고 할 때 <br>오늘날 온대 지역에 포함되는 Europe &amp; China는 추웠을 것이다. <br>따라서 도시가 발생할 만 한 지역은 <span style="COLOR: #ff0000">Middle East</span> <u>지역 밖에는 없다는 것을 추정할</u> 수 있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1aa4e71b.jpg" width="500" height="687.28522336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1aa4e71b.jpg');" /></div><span style="COLOR: #ffcc00">Herculaneum-Hercules<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aad827c7.jpg" width="500" height="309.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aad827c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bu Simbel</span><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Fertile Crescent<br></span>아랍권에 있는 Mesopotamia 문명과 지중해 문명의 <br>발상지 !! 실제로 Mesopotamia 지역과 Nile River 유역은 <br>농업 생산성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인류가 알고 <br>있는 최초의 문명이 유래하는 곳으로 1948년 이후 <span style="COLOR: #ffcc00">"방사성 <br>탄소 연대 측정법"</span>이 향상되면서 과학적으로도 확인된 지역이기도 하다. <br><br><span style="COLOR: #ff0000">Greece-Roman</span> 문명의 토대가 된 고대국가인 <br>Mesopotamia, Assyria, Egypt, Phoenicia도 이곳에 <br>자리 잡고 있었고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는 비교적 비옥한 <br>지역을 말하며, 창세기에 나타나는 <span style="COLOR: #33ff33">Hebrew People</span>들의 이야기에서 <br>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남쪽의 <br>Arabia Desert와 북쪽의 Armenia 산맥 사이에 자리 잡고서 Babylonia, <br>Persia 남서지방에서 <span style="COLOR: #ffcc00">Tigris-Euphrates River</span>를 거슬러 올라가 Assyria까지 <br>뻗어 있다. Assyria 동쪽에 있는 Zagros Mountains로 부터 서쪽으로 <br>Syria를 지나 지중해에 이르고 남쪽으로 Palestine 남부까지 내려간다. Palestine <br>&amp; Egypt 사이에는 <span style="COLOR: #ff0000">Sinai Peninsula</span> 가 있으나 Mesopotamia &amp; Syria 사이에 <br>놓여 있는 사막보다 큰 것은 아니기 때문에 Nile River 유역까지 비옥한 <br>초승달 지대로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u> 대체로 문자는 고도의 문명권에서 발달되기</u> 시작한다. <br><br>반대로 문자는 문명권의 발달에도 커다란 도움이 <br>되었다. 어떻게 보면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 강하게 작용<br>되었는데 <span style="COLOR: #ffffff">상형문자 + 설형문자</span>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br>이러한 문자 체계는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수없이 많은 기호<br>들이 사용되었고, 이렇게 복잡한 요소가 작용되었기 때문에 상당 <br>기간 훈련하고 연습해야만 했다. 그래서 문자를 익힌 사람들은 모두... <br>지식인들이었으며 무제한 적인 권력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br><span style="COLOR: #ff0000">Mesopotamia</span> 일대에서는 그들을 <span style="COLOR: #ffcc00">"서판의 군주"</span>라고 하기도 하였다. 문자의 <br>발명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셈족의 땅" 서쪽 지역에서 발생<br>되어진 것은 분명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 기원은 Egypt의 상형문자와 <br>Sinai Peninsula에 남아 있고 해독하기 어려운 비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br>할 것이다. 대체로 Alphabet을 발명한 사람은 아주 현명한 자로 추정할 수 있을 듯싶다. <br><br><span style="COLOR: #33ff33">"두음"</span>에 맞춰 명칭을 붙였고,&nbsp; <span style="COLOR: #ffffff">"소, 집, 갈고리..."</span>등의 형태를 <br>갖추고, 몇 개의 획, 곡선이나 원으로 단순화시켜 문자 기호를 만든 <br>것이다. 초기 Alphabet의 경우 <span style="COLOR: #ffcc00">Phoenicia-Canaan-Hebrew-Aram<br>People</span> 등이 사용하였으며, 설형문자의 경우 Assyria Empire에도 보급<br>되었다. Aram Language로 된 <span style="COLOR: #ffffff">"사해의 두루마리"</span>의 저자들은 "서판의 <br>군주"처럼 존경을 받았고, 특권을 누렸다. 또한 지중해 <span style="COLOR: #ff0000">Cyprus</span>에서 전래 된 <br><span style="COLOR: #ff0000">Elamite Language</span><span style="COLOR: #ffcc00">(엘람)</span>은 여전히 몇 세기에 걸쳐서 사용되었으며 <br>일반적인 상황(행정)이라면 Alphabet이 널리 활용되고, 최고의 가치를 <br>누리게 되었다. 대략 기원전 4000-3000 ...문명은 Mesopotamia로부터 거대한 <br>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설형문자가 체계화<br>되기 전에 이미 !! 동부-지중해의 여러 지역과 India에서 문자에 대한 관념이 <br>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상형문자는 기원전 4000-3000년의 중-후반기에 이르러 <br>Nile River 계곡에서 발전되었고, 사료가 불충분하지만<span style="COLOR: #ff0000">Hittite</span>의 상형문자가 <br>형성된 시기는 "수메르-셈족" 문화가 기원전 3000-2000년 Syria에 나타나기 전이었다는 것이다.<br><br>또한 <span style="COLOR: #ff0000">Levant-Cyprus-Anatolia</span>의 "음절 문자"의 <br>원형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gypt <br>문명은 명백하지만 <span style="COLOR: #ffffff">"상-이집트와 누비아"</span>의 풍요로운 왕조 <br>이전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더더욱 그러한 문화가 Africa에서 <br>기원 했다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왕조 이전 <br>말기와 <span style="COLOR: #ffcc00">제 2 왕조</span> <u>유물에서 보이는</u> Mesopotamia의 엄청난 영향은 <br>Egypt 문명이 동쪽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왕조의 통일과 확립이 촉발<br>되었음을 확인(기원전 3250)시켜준다. 때문에 문화적 혼합이 더욱 <br>복잡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Mesopotamia 문명을 이루는 셈족의... <br>요소와 Egypt 사이에 언어와 <u>문화적으로 근본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했기</u> 때문이다. <br><br>기원전 2500년경의 문서는 Kurdistan(쿠르디스탄)에서 <br>Cyprus(키프로스) 까지 뻗어있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br>문자를 사용한 부유하고 세련된 국가들 간의 제휴를 묘사한다. <br>고고학에서 알려주는 것과 같이 이러한 시기에 인류 문명은 좀 더 <br>멀리까지 뻗어나갔으며, 궁극적으로 <span style="COLOR: #33ff33">Indus → Afghanistan</span>에 <br>걸친 <span style="COLOR: #ff0000">Harappa<span style="COLOR: #ffcc00">(하라파)</span></span> 문화 그리고 Caspie Sea → Black Sea → <br>Aegean Sea의 <span style="COLOR: #ffffff">"금속 문화권(청동기)"</span>까지 확장되었다. Mesopotamia-<br>Sumer <u>문명은 공동의 문자와 문화도 단단하게 확립하였고</u>, 주변부 <br>문명 역시 !! 동일하게 문명화 하였지만 고유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문화적 <br>독자성을 보유하였다. 예컨대 Creta에서는 "토기시대" 구분이기도한<br>Minoan 1기 초창기 그러니까 기원전 3000-2000년의 시기로 접어들 무렵 <br>Levant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문화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br>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형문자는 지배적인 문자가 되지 못하였으며, "Creta"는 <br>결국 Mesopotamia-Syria 문명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다. 물리적인 <br>거리를 제외할 때 가장 타당한 이유는 Creta People(원주민)의 문화적 탄력성 <br>그리고 지리적으로 "이집트-셈족"의 문화적 영향권 사이에 위치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3998891d8.jpg" width="500" height="33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3998891d8.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inai Peninsula<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39ab2edc2.jpg" width="500" height="36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39ab2edc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King of the Narmer Palette</span><br><span style="COLOR: #ff0000">Levant-Africa</span> 사이에서 동시에 관계를 가졌다는 <br>사실은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그대로 노출되었다고 한다. <br>Creta &amp; Aegean Sea 여러 지역에서 Egypt-Syria 유물이 다량 <br>출토 되었다. 근동과 마찬가지로 <span style="COLOR: #66ffff">Creta Island</span>에서도 기원전 3000년 경 <br>"구리와 비소"를 혼합시켜 <u>청동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u> 항아리 제조에 <br>물레를 이용하기 시작하며, Cyclades(키클라데스)의 축성술과 Palestine에서 <br>발견된 같은 시기의 축성술은 놀랄 만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br>변화가 근동에서 다소 일찍 발생한 것이 분명하고 두 지역의 접촉이 의심의 <br>여지가 없음을 감안할 때 독립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br><br>그러한 이유로는 차라리 <span style="COLOR: #66ffff">Aegean Sea People</span> 들이 교역과 <br>정착 과정을 통해 자극을 주었고, 그러한 자극에 반응하여 독창적 <br>지역문화를 발전 시켰다는 주장이 좀 더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br>기원전 3000-2000년 청동기를 사용한 곳에서는 대부분이 문자들을 사용<br>하였다. 그러한 시기 Aegean Sea 지역에선 문자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 <br>Greece &amp; Anatolia 반도의 기후는 중동이나 북-서 인도와 같이 건조한 <br>지역에서도 증거(사료)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이었다. 1975년 <span style="COLOR: #ff0000">"Ebla<br><span style="COLOR: #ffcc00">(에블라)</span>"</span>에서 점토판을 발견할 때 까지 Syria에서 기원전 3000-2000년경에 문자를 <br>사용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Syria에 교양을 갖춘 문자 <br>사용자층이 있었으며 "에블라"의 학교에서 학습받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사람이 찾아<br>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u>청동기 시대</u> Aegean Sea 지역에 문자가 있었음은 <br>의미 하는 보다 심화된 논점은 기원전 2000-1000년의 문자체계인 선문자 A, 선문자 B, <br>Cyprus의<span style="COLOR: #33ff33">"음절 문자"</span>는 동일한 원형을 공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또한 커다란 <br>차이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글자체의 발전과정을 비추어 볼 때...<br>그 정도의 차이가 나타낸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초기 청동기 문명은 <br><span style="COLOR: #ffffff">기원전 23 C</span>에 붕괴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Egypt는 제 1 중간에 위치한다. Mesopotamia <br>북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고, 문명세계 전체가 침입과 급작스런 기상...악화로 <br>인한... 소요와 내부의 폭동으로 고통을 겪었다. 아마도 Phrygia Language 혹은 <br>Armenia Language를 사용 했다고 여겨지는 족속들이 Anatolia를 침입한 것도 이때쯤일 것이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356012d2.jpg" width="500" height="600.60060060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356012d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aalbek...<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3973a011.jpg" width="500" height="338.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3973a01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House In Cappadocia<br></span>순수한 Alphabet의 탄생과정을 살펴보면 지중해 동쪽의 <br>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이동한 셈이 되는 것이다. Egypt 남부에서 <br><span style="COLOR: #33ff33">Sinai Peninsula</span>로 전해지고 그곳에서 현재의 State of Israel가 있는 <br>Palestine(Phoenicia)으로 이어졌다. 여기 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br>500년에 이르고, 문자는<span style="COLOR: #ffffff">"원-시나이 반도"</span>에서 Phoenicia Alphabet으로 <br>변환되었다. 그 뒤 문자는 지중해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는데 <span style="COLOR: #ff0000">Phoenicia → <br>Greece → Etruria → Latin People</span>에게 전해진다. 이들은 Roman Empire를 <br>세우고 400년 이상 서-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지중해 연안의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br><br>결과적으로 그들의 문자이기도 한 Latin Alphabet은 제국의 <br>지배를 받던 지역에 영향을 주었으며, Latin Alphabet은<span style="COLOR: #ff0000">15 C <br></span>대항해 시대에 탄력을 받아 Spain-United Kingdom 등에 의해서 <br>South-North America, Africa, Asia로 그들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br>함께 유입되었고, 식민지역의 문맹을 퇴치한다며 종속된 원주민들의 <br>교화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더불어 종교 또한 강요하였으며,&nbsp;Alphabet <br>진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지중해 한복판에서도 한 때는 해독되지 않았던 <br>문자가 널려있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고고학자 <span style="COLOR: #ffcc00">Arthur- Evans</span>에 의해 <br>8년에 걸쳐 Creta 문자의 해독작업이 이뤄지는데 내용은 발굴 작업을 통해 <br>확보한 Creta Island의 3종의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선문자 A, <br>선문자 B, Phaistos Disc...(파이스토스 원반)...</span> Phaistos Disc(원반형) 점토판 <br>표면에는 앞뒤 합계 45 종, 242개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문자의 원형은 완전한 <br>그림 문자이지만 문자의 수효가 적은 것은 이러한 문자가 표의 문자가 아님을 의미한다. <br>그렇지만 <u>미 해독 문자는 그림 문장으로</u> Alphabet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br><br>기원전 2000년 Greece, Creta Island 궁전의 웅장함, 놀라울 <br>정도의 "부"와 세련된 문화적 감각, 거대한 건축물, 다양한 회화적 <br>요소는 현재에 이르러 발굴 작업을 통한 연구 과정을 통해서 완전한 <br>의미를 얻을 수 있었으며, 당시에는 유럽 문화가 전성기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br>이러한 시점에 중요한 것은 <u>인도-유럽 어 족속들이</u> Greece 땅에 정착<br>하기 이전 바로 그곳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학계에서는... <br>그 사람들을 Aegean People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Greece 뿐만 아니라 지중해 <br>동쪽에 위치한 섬들과 Anatolia 남서쪽에 거주하였는데 "인도-유럽 어 족속"은 <br>현재의 Poland &amp; Turkistan 중간 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던 것으로(지중해 남서쪽), <br>추정된다. 이들은 여러 식물이 이름과 강과 산, 섬의 명칭을 원주민의 언어를 차용하여 <br>활용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강과 산은 어느 지역, 국가이든지 가장 영속적인 <br>경향을 지니는 지명이다. <span style="COLOR: #33ff33">Great Britain</span>의 경우 강과 산의 명칭이 대부분 <span style="COLOR: #ff0000">Celtic Language</span>로 <br>이루어져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선, 인도-유럽 어인 것도 보인다. 따라서 "이집트, <br>셈-어"로 된 강과 산 이름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깊은 문화적 침투를 암시하는 것이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32e3039.jpg" width="500" height="46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32e303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haistos Disc ...Creta<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4489b52.jpg" width="500" height="312.0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4489b5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Hieroglyph ...Egypt</span><br>또한 도시의 명칭이 자연의 명칭보다도 문화에서 <br>문화로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되었다. Greece에 인도-유럽 <br>어의 도시 명칭이 거의 없고, 동시에 도시 이름의 경우 이집트, <br>셈-어에서 그렇듯 한 어원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교역 <br>차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강한 접촉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br>당시 !! 선문자 A로 쓰인 문자 체계에도 혼용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br><span style="COLOR: #33ff33">Homeros</span>의 "오디세이아"를 통해 Creta의 원주민 "시돈, 도리스 족속"이 <br>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Herodotos를 통해서는 펠라스기 족속이 <br>야만적인 족속으로 그들만의 언어 체계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Aegean <br>People 들은 도시를 이미 기원전 3200-기원전 2500 경에 Aegean Sea <br>주변에 형성시키고 Greece 지역 까지 영향을 미친다. Creta Island에서는 유럽 <br>최초의 고급스런 문화가 탄생하였고 섬세하게 다듬어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후... <br><br><span style="COLOR: #66ffff">Hellenism</span>의 도시국가 등에 Aegean 들의 축성술이 <br>전해지고,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문화, 정치적 업적 등이 <br>두드러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Greece 질그릇(토기)은 여성적인 <br>Line이 강조된 점이 특징인데 Greece 조형 예술에 대한 재능은 모두 <br>Aegean Sea 문명에 기인하고 있다. 즉 !! Greece의 독자적인 문명<br>체계라기보다는 그 배경에 Old Aegean Sea 문명의 숨결이 확실히 살아<br>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초기 발굴 과정에서 <br>발견된 이전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두 개골은 기원전 1900-기원전 1580에 <br>이르면 부분적으로 인도-유럽 어 족속과 함께 <u>혼합된 형태로 구성되어</u> 있었다고 한다. <br><br>이러한 사실은 <span style="COLOR: #ffffff">"정복의 시기"</span>에 흔희 그렇듯이 이주한 족속들이 <br>원주민 여성들과 맺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남성들의 두 개골은 <br>주로 인도-유럽 어 족속 것이었고, 여성들의 두 개골은 Aegean People <br>족속들 것이었다. 참고로 이러한 지역의 인류 정착에 관한 유물은 Neanderthal <br>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span style="COLOR: #66ffff">Thessalonica</span>로부터 동쪽으로 37 km <br>떨어진 Petra<u>의 석순 동굴에서도 이러한 유골들이</u> 발견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br>초기 Greece 문화 형성기에 근동이 Aegean Sea 문명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br>끼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객관적인 사실에 비추어 다소 간의 흔적을 <br>찾아 볼 수 있는 최초의 절정기는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21 C</span>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br>이러한 시기 Egypt 역사는 제 1 중간기의 와해에서 회복하여 이른 바 새로운 11 <br>왕조가 확립되어 있었다. 제 11 왕조는 Egypt를 재통합하였을 뿐만 아니라<br>Levant를 공략하였으며, 고고학적 증거를 거론하면 더 먼 지역 까지 영역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br><br>한편 Creta는 확실히 그러한 범위에 포함되었는데 Greece <br>본토 역시 !! 그러한 추론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시 "검은 <br>피부"를 가졌던 상-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수대에 걸쳐&nbsp; <span style="COLOR: #ffffff">"매와 황소"</span>의 신... <br>"멘추"를 신성한 후원자로 삼았다. 같은 시기 Creta에서도 왕궁이 <br>세워졌고, 궁전 벽에는 황소 숭배 사상을 엿 볼 수 있는 그림이 발견되기도 <br>했다. Minos People들의 왕과 Creta에 관한 Greece 신화에서도 황소 숭배는 <br>그 중심에 위치하였으며, 역설적이지만 Creta의 번영이 Egypt Empire의 융성을 <br>직 간접적으로 반영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br>그러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 <span style="COLOR: #33ff33">Thebae </span>바로 북쪽에 예로부터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br>둔덕이 발굴된 사실로서 둔덕을 흙으로 만든 계단식 Pyramid로 꼭대기에는 <br>벽돌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기념비적인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21 C</span>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었다고 <br>한다. Homeros가 언급한 고대 전승도 일치하는 것이 "Amphion(암 피 온), Zethos<br>(제 토 스)"가 Thebae의 최초 건설 자이었고, 그 도시가 파괴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br>또 다른 건설 자 신화 속 인물 Cadmos(카드모스)도 근동에서 건너 왔다는 사실이다. Egypt <br>Pyramid처럼...<span style="COLOR: #ffcc00">Amphion &amp; Zethos</span>의 무덤은 태양과 관계가 있고, Greece Thebae도 <br>Sphinx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욱이 Thebae<u>는 12 궁의 황소자리와 어떤 식으로든지</u> 연결되고 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bc3398b3.jpg" width="500" height="37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bc3398b3.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bes By Charles Francois Jalabeat</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b294d458.jpg" width="500" height="328.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b294d458.jpg');" /></div><span style="COLOR: #33cc00"><span style="COLOR: #ffcc00">Abu Simbel<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bd96d7e7.jpg" width="500" height="33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bd96d7e7.jpg');" /></div></span>또한 <u>학자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지만</u> Thebae의 <br>황소 숭배 사상과 Creta의 황소 숭배는 유사한 것으로 볼 수밖에 <br>없다는 사실<span style="COLOR: #33ff33">(11 왕조와의 연관성 주목 !!)</span>이다. Creta에서 이 후 600년 <br>동안 황소 숭배로 제식을 유지한 반면에 Egypt는 기원전 2000년 직 후... <br>제 12 왕조의 발흥과 더불어 왕실에서 "멘추 숭배사상"을 폐지하였다. <br>그 대신 새로운 왕조는 상-이집트의 숫양 신 <span style="COLOR: #33ff33">Amon</span>을 수호신으로 삼았다. <br>Amon = 멘데스(숫양 / 염소) 숭배의 흔적도 Aegean Sea 주변에서 발견되었고, <br>대개는 <span style="COLOR: #ff0000">Zeus</span><u>와 관련된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영향인 듯하다</u>. 그만큼 Egypt- <br>Pharaoh 들의 영토 확장이 왕성하게 이어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br>"예" 라고 할 수 있다. 또한 Athens의 최초 건설 자 Cecrops(케크롭스) 사이에도 <br>미묘한 연관성이 보이며, 실제 고대 사료에서는 그를 Egypt People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br><br>파급의 물결이 크게 작용했던 것은 <span style="COLOR: #ff0000">Hyksos </span>시대에 <br>이르러서였는데 이에 관한 전승은 더욱 명확하다. 이들은 <br>북쪽에서 온 침입자로 기원전 1720-기원전 1575년 까지 최소한 <br>하-이집트를 지배하고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압도적으로 셈-어를 <br>사용하던 족속이기도 했다. 후기 고대(기원 후 3-6 C)이래 연대기 <br>작가들은 훗날 <span style="COLOR: #66ffff">Egypt 제 18 왕조</span>가 증오의 대상이었던 Hyksos를 쫓아<br>냈다는 기록과 Israel People 들이 Egypt에 억류(노예)되었다 탈출하였다는 <br>성서의 전승 그리고 "다나오스"가 "아르고스"에 도착했다는 Greece 전설 <br>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보았다. Greece 전승에 따르면 Danaos는 Egypt &amp; <br>Syria People이지만 Egypt에서 건너온 것은&nbsp; <span style="COLOR: #ffffff">"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 <br>수령 연대학"</span>에 의하면 사실로 보여 진다. 따라서 Greece에 새로운 정착민이 <br>나타난 시대를 Hyksos 시대 말기로 잡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도 사실이다. <br>또한 양 연대 측정법에 따른 결과 Creta Island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는 Greece <br>도착 시점이 Hyksos 시기 초기인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18 C</span> 말엽이기도 하다. Greece 전승은 <br>"다나오스"를 관개시설 도입과 "카드모스"를 특정 유형의 무기와 Alphabet <br>그리고 수많은 종교의식과 연결 짓는다. 그렇지만 "관개"는 좀 더 일찍 진전<br>되었고, <span style="COLOR: #ffffff">"전차와 칼"</span> 도입을 포함하여 다른 차용물 또한 Aegean Sea 주변으로 유입되었다. <br><br>종교의 경우 이러한 시기 도입된 제식은 <span style="COLOR: #ff0000"><span style="COLOR: #33ff33">Poseidon &amp; Athena</span></span>에 <br>집중되었으며, Poseidon이 황야와 바다의 신으로써 Hyksos의 숭배를 <br>받았던 Egypt의 "세트" 그리고 셈-족의 "얌, 야훼"와 일치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br>Athena는 이집트의 네이트 셈족의 신으로는 "아나트"이었을 것이다. 또한 <br><u>Aphrodite(아프로디테), Artemis(아르테미스)</u> 같은 다른 신의 숭배 의식도 <br>일반적으로 Greece에서는 기원전 17-16 C에 형성되어진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 <br>Greece 어는 인도-유럽 어의 구조 및 기본적 어휘에 복잡한 비...인도 유럽어가 혼합된 <br>형태를 갖고 있다. 이러한 언어체계 자체도 Egypt와 서부 셈-어에서 상당 부분 <br>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 오랜 시간 지속한 Egypt, 셈-족 <br>정복자의 지배시기와 들어맞기 때문이다.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15 C</span> 중반 18 왕조는 Levant 에서 <br>강력한 제국을 확립한 이 후 에게 해 지역에서 공물을 받았다. 때로는 그들의 유물이 쉽게 <br>발견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Egypt의 영향력이 지속되었다는 의미인 셈이다.그리고... <br><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12 C</span> 역사 속에서 <u>파괴적인 단절의 시기가</u> 도래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사건을 <br><span style="COLOR: #ffcc00">Doris People</span>의 침입이라고 하는데 고대에는 Heracles 가문의 귀환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br><br>이러한 파괴적인 이주자들은 Greece 북서 변경에서 <br>온 것이 분명하며, 그들이 파괴한 Mycenae 궁정의 "중동..." <br>문화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br><span style="COLOR: #33ff33">Heracles</span> 가문이라고 한 것은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Heracles의 <br>신성한 자손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쫓겨난 왕가에 <br>대한 권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복자의 후손이기도한 <br>고전기와 Hellenism 시기의 Doris Type 왕들은 자신을 Egypt &amp; <br>Phoenicia의 후손이라고 믿었을 것이 확실하다. 참고로 도시국가와 훗날 <br>Marxism People들이 말했던 <span style="COLOR: #ffffff">"노예제 사회"</span>가 비로써...&nbsp;<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9-8 C</span> <span style="COLOR: #33ff33">Phoenicia<br></span><u>에서 기원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u> 또한 Phoenicia의 과학, 철학, 이론 정치학이 <br>이러한 분야를 선도하였던 Greece People에 의해 전달된 과정에 대해 생각할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c0b50e6.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c0b50e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Fortress In Sidon-Lebanon<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51277a3d.jpg" width="500" height="677.20090293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51277a3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erseus, from Pompei-Mycenae</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df78e0c.jpg" width="500" height="369.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4df78e0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oseidon, Erectheus, Cecrops</span><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Turning Point</span><br><span style="COLOR: #66ffff">Egyptian Hieroglyph</span> <br>한마디로 <u>사람 혹은 동물 등의 형태로 표시되는</u> 문자이며,<br>오래된 것은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32 C</span>, 후대의 것으로는 기원전 5 C에 발견된 <br>것 까지 알려져 있다. 문자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고 하는데<br>적을 때는 700 종 많을 때는 6,000 종이 넘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문자수로 <br>인하여 "문자 해독"을 위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으며, <br>보편적이지만 30 개 전후로 글을 쓸 수 있는 Alphabet System과는 연관성이 없어 <br>보이는 한자(漢字)와 같은 <span style="COLOR: #ffffff">"스스로 뜻을 가진 문자(표의 문자)"</span>라면 이러한 <br>숫자는 많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대략 <span style="COLOR: #ff0000">"은(殷)"</span> 나라 시대 문자수가 비교적 <br>적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수(隋) 왕조 시대에 가장 적은 수<br>(4,000 종)의 표의문자가 활용되었다. 따라서 Hieroglyph의 어중간한 문자수가 <br>해독을 더욱 어렵게 하였던 셈이다. 시대적으로 유럽에서 Greece-Roman 시대에 <br>대한 관심과 애정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 즉 !! <span style="COLOR: #66ffff">16 C Renaissance</span> 시대 <br>이 후... 이러한 수수께끼에 많은 학자들의 도전이 줄지어 이어졌으며 대다수는 실패하고 말았다. <br><br>Abu Simbe(아브심벨), Karnak(카르낙) 대 신전, <br>Pyramid 등 각지의 유적이나 발굴되고 있는 유적에는 <br>어김없이 사람 혹은 동물을 형성화 한 문자 Hieroglyph가 <br>그려져 있다.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span style="COLOR: #ff0000">King of the Narmer <br>Palette</span><span style="COLOR: #ffcc00">(화장 접시)</span>로서 기원전 32-31 C 때의 것으로 알려져 <br>있으며 가장 후대의 것은 &nbsp;<span style="COLOR: #ffffff">"피라"</span>에 새겨진 비문이다. 이것으로 알 수 <br>있듯이 Egypt에서는 30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거치면서 Hieroglyph가 <br>사용되었는데 "피라"의 신전에 쓰인 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br>쓰이지 않아 그 읽는 방법마저 수수께끼가 되었다. <span style="COLOR: #66ffff">Hieroglyph <br></span>이외에도 <span style="COLOR: #ffcc00">Hieratic</span>(히에라틱), <span style="COLOR: #33ff33">Demotic</span>(데모틱)이라는 고대 문자가 있었다.<br><br>이러한 3 종류의 문자는 병용되어 쓰이기도 하였고, <br>Hieratic은 Hieroglyph를 분해해서 사용된 문자인데 말하자면 <br>행서체에 속한다. 반면 Demotic은 위에 언급한 Hieratic을 더욱 분해<br>하여, 그린 문자로서 같은 표의 문자 체계이기도 한 한자(漢字)로 <br>말하자면 <span style="COLOR: #ff0000">"초서체"</span>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span style="COLOR: #ff0000">Hieratic &amp; Demotic</span>은<br>점차로 분해 사용됨에 따라 Hieroglyph가 가진 그림 문자의 느낌이 희석<br>되어 지면서 해독이 어려운 문자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참고적으로 Hieroglyph <br>+ Demotic + Greece Alphabet으로 구성 된 <span style="COLOR: #33ff33">Rosetta Stone</span>(1799, 3 종류의 문자체)이 <br>발견되었고, <u>빛의 파동설로 알려진 물리학자</u> Thomas Young(1773-1829)이 <br>1814년 처음 도전한 이 후 <span style="COLOR: #ff0000">France Jean Champollion<span style="COLOR: #ffcc00">(1780-1832)</span></span>이 해독작업에 <br>도전하게 되었는데 이들 모두 "고유명사"에 주목하였고, 고유명사 부분을 다른 <br>지역에서 발견된 Hieroglyph와 비교하면서 분석하여 하나의 글자마다 "음"을 특정 하는데 성공한다.<br><br>그리고 해독 결과를 전체 Hieroglyph의 해독에 응용<br>하였다. 결과적으로 1,500년 동안 풀리지 않던 Hieroglyph <br>System이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1822</span> 또한 "와 디 엘 홀" 비문 <br>발견 이후 Hieroglyph는 더 이상 완전한 Alphabet이 아니었지만 Hieroglyph의 <br>일부를 <u>표음 문자의 일부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은</u>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32 C</span>에 이미 존재하였던 것이다.<br><br><span style="COLOR: #ff0000">Jean Champollion</span>의 문자 해독 결과 Hieroglyph는 상당히 복잡한 <br>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함께 알려졌다. Alphabet 적인 요소, 표의<br>문자 요소(문자의 뜻을 그대로 읽는 것), 이외에 1자 2음, 1자 3음을 가진 <br>문자도 있었다. 또한 발음을 하지 않지만 남성, 여성 등의 뜻을 첨가하는 문자도 <br>있었고, Hieroglyph는 모음이 없는 문자(자음만으로 연결된 구조)로 밝혀진 것이었다. <br>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Hieroglyph,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br>Hieroglyph,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는<span style="COLOR: #ffffff">"Cartouche(카르투슈)"</span>에 넣어 표기하는 것이 <br>일반적이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쓰기, 위에서 아래로 <br>세로쓰기 등을 할 수 있었는데 가로쓰기에서는 쓰기 시작한 방향으로 문자를 향하게 <br>하였다.그리고 마지막에는 성별을 나타내는<u> "결 정 사(발음하지 않은 기호 형태)"</u>가 첨가 <br>된다. 주목되는 것으로 배열이 특이한 것은 당시 "필경사(서기)"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해서 라고 한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0f2b6484.jpg" width="500" height="749.06367041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0f2b648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List of Ugarit Gods AO29,393</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11daf714.jpg" width="500" height="45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11daf71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AR Creta-Giovani<br></span>고대 근동에 존재했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중 <span style="COLOR: #66ffff">Ugarit</span>는 가장 <br>아름다웠고, 번영하였던 도시이었다. 그것도 기원전 2000년 무렵에 말이다. <br>따라서 Ugarit 유적의 발굴은 삶과 죽음, 신과 이승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제공<br>하는 기회의 장이었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역사적으로도<br>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span style="COLOR: #ff0000">Israel People</span><u>보다 먼저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민족이기도</u> <br>하다. 그 당시 막강하기만 하였던 대표적인 항해 도시 Sidon &amp; Tyros도 역시<br>그들의 것이었으며, 그들은 기원전 814년에는 고층 건물의 도시 Cartago를 건설하기도 <br>하였으며 또한 성경이 쓰이기 전부터 살았고, 성경에서 이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br>후손이기도 했다. 이들을 Christian들은 그저... "페니키아 사람"이라고 하였다. Phoenicia- <br>People 들은 기원전 1250년 항해를 시작하게된다. 최초로<span style="COLOR: #cc33cc">"보라 색"</span>을 만들어낸 제작자<br>이며, 상인, 도시 설립자, 위협적인 항해 세력으로 지중해에서 군림하였다. Canaan People이 <br>바로...그들의 선조(조상)가 된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Palestine-Syria 등지에서 살았던 <br>이들은 잿더미가 된 고대 폐허의 도시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 후 Israel People <br>들이 유입될 시점에 그들의 도시는 짜임새 있고 섬세한 사회 질서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Ugarit <br><br>문명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span style="COLOR: #33ff33">Canaan </span>땅의 모든 유적 발굴이 <br>현실화 되었으며, 유적에서 출토된 점토판의 해독이 완벽하게 <br>이루어졌다. 발견된 유적은 5개 층으로 구조를 형성(층서학)하고, <br>있었으며, <u>석기 시대부터</u> Ugarit가 멸망(기원전 1100년)하기 까지 인류의 <br>다섯 단계의 문화를 보여준다. 다섯 번째 층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며 <br>당연하지만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제일 위에 위치한 첫 번째 층은 기원전 <br>1500-기원전 1100사이의 뛰어난 도시들의 형태를 보여주고 이곳에서 <br>Babylonia의 "설형문자"와 "아카드 어"로 쓰인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br>문서들은 대부분 경제와 통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고,<span style="COLOR: #ff0000">Babylonia</span>의 <br>설형문자로 쓰인 사전적 문서에는 Sumer 언어 같은 문자 체계에 대한 설명이 <br>기록되어 있다. 그 이외에도 선문자 B에 대한 기록들과 다양한 토기 종류들 <br>Egypt Hieroglyph가 새겨진 동상들도 발견 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br>설형문자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Phoenicia People<u>의 선조(조상)가 사용하였던 문자이기도</u> 하다. <br><br>표기 방식은 Mesopotamia 방식이고 단어의 종류와 <br>목록들은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Mesopotamia의 <br>점토판의 문자는 수 백 개의 글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러한 <br>글자들은 각각 하나의 음절 혹은 단어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Ugarit <br>문자는 대략 28-30개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기원전 1400년 까지 <br>거슬러 올라가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 최초의 Alphabet<br>이라 할 수 있겠다. Ugarit Alphabet은 <u>가나안 알파벳으로서</u> 28개의 "음"으로 <br>구성되었고, 그 중에서 26개가 "자음"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Hebrew 23 자, Phoenicia 22 자로서 구성<br></span><br><u>발견된 점토판은 두 가지 종류가</u> 있는데 커다란 점토판에는 <br>전설과 신화 작은 점토판에는 편지, 계산서, 지시문, Oil &amp; Wine <br>같은 상품 품목, 입양증서, 판매에 관한 법적 계산서 등이 쓰여 있었다고 <br>한다. 또한 발견된 점토판 문서를 통해서 이미 당시에도 "노예"가 거래된 <br>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고, 흔하지 않던 <span style="COLOR: #ffffff">"은화"</span>로 결제가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br>되었다고 한다. <span style="COLOR: #33ff33">(3000년 전 Ugarit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span> 점토판에 <br>기록된 내용은 <span style="COLOR: #ff0000">기원전 14 C</span>에 기록되었지만 담겨진 내용은 좀 더 오래된 것이었다. <br>그 내용들이 구전되어 왔거나 Alphabet 체계가 아닌 고대 표시 체계를 통해서 <br>전해져 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민족"이 같은 땅에서 살며 <br>비슷한 삶의 형태를 갖췄고, 같은 신화를 알고, 같은 신화를 섬겼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br><u>두 족속이 동일한 근원을 가진다고 추정할 수 있다</u>. 때문에 Ugarit 점토판은 유대 민족의 <br>가장 오래된 역사의 현장으로 인도해준다. 참고로 Sumer 문명에서도 이미 문자가 있었으나 <br>음절이나 하나의 완전한 단어를 통해서 언어를 표현 했으므로 <span style="COLOR: #ff0000">Canaan = Phoenicia</span><br>사람들이 최초로 Alphabet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의 Alphabet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br>않은 고대문자 중에 <span style="COLOR: #ffcc00">"1자 1음"</span>이라는 Alphabet의 특징을 갖고 있는 문자가 있었던 셈이다. <br>사실 Latin 계열의 문자와 관계없어 보이지만 고대의 Alphabet으로서 상실시킬 수 없는 문자 체계이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5fa6ce20.jpg" width="500" height="676.43742953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5fa6ce2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Portrait of Andrea Doria as Neptune</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60d4053f.jpg" width="500" height="34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60d4053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emple of Hadrian Ephesus</span><br>당대의 New Alphabet은 지중해 동부 연안의 북부에 위치했고 <br>정치적 중심지이었던 고대 도시 Ugarit 유적에서 발견된 "설형문자"<br>체계인 것이다. 해독된 결과는 30자(1자 1음)로 구성되어 있었고, Ugarit <br>설형문자는 Alphabet이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br>증명이라도 하듯이 이러한 설형문자가 ABC 순으로 배열된 점토판이 <br>발견됨으로써 배열된 순서를 보면 Phoenicia 문자와 비슷한 순서이었다고 <br>하는데 설형문자가 사용된 지역에서는 문서 창고와 같은 유적이 발견되고 있었고, <br>그러한 곳에서는 <u>설형문자로 새겨진 다수의 점토판이 함께</u> 발견되고 있었다. <br>그럼 여기서 같은 시대에 공존하였던 국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 지중해 동부 연안 <br>Syria에서는 "우가리트 왕국"이 번영하였고, Egypt에서는 18 왕조의 꽃피던 <br>시기로서 훗날 번영한 Phoenicia People 들은 당시만 해도 확고한 지역적 세력을 <br>갖고 있지 않았던 때이기도 하다. 설형문자는 Ugarit 뿐만 아니라 다른 고대 <br>도시들에서도 사용되고 있었으며, 마치 현대 유럽에서 Latin Alphabet를 기반으로 <br>각국의 문자가 있었듯이 Iraq-North(= Assyria), South(= Persia, Babylonia) 등 국가마다 <br>미세하게 문자 자체가 변용,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Hieroglyph 해독에 있어서 <br><span style="COLOR: #ff0000">"Rosetta Stone"</span>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듯이 설형문자에도 해독의 돌파구가 된 비문이 <br>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West-Iran Zagros Mountains의 암벽에 새겨진 <span style="COLOR: #ff0000">Behistum<span style="COLOR: #ffcc00">(베이스툰)</span></span>의 비문이다.<br><br>그렇지만 1자 2음으로 구성된 문자체계로 밝혀짐으로써 결과적으로 <br>설형문자 등에는&nbsp;Ugarit&nbsp; 문자만이 Phoenicia 문자와 유사한 Alphabet인 셈이다. <br>특히나 Egypt가 패권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상황에서 <span style="COLOR: #66ffff">Ugarit</span>는 주변의 여러 <br>왕국과 관계를 맺고, 정치, 외교, 경제(교역)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자연스럽게 성립<br>시키고 있었으며, Creta와는 활발한 무역이 선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원 부국<br>(구리)Cyprus와 마주보던 <span style="COLOR: #ffffff">"시리아 연안"</span>의 작은 도시로서 군사적으로도 결코 물러섬이 <br>없었던 고대 강소국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어찌되었던 Ugarit는 다양한 족속들을 연결시켜 <br>주면서 국제적인 도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고대 부국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br>또 다른 의견으로 믿거나 말거나 Ugarit...Ceta<u>의 식민지이었거나 무역 중심지</u> 이었다는 사실이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79cc8d61.jpg" width="500" height="634.24947145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79cc8d6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hessaloniki-Greec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c96c2f94.jpg" width="500" height="37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c96c2f94.jpg');" /></div>앞서 설명되었듯이 문자의 가장 초기 용도는 사물에 <br>대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사물의 성질을 기록<br>하거나 그러한 사물의 소유권자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는데 <br>실제로<u> 일인칭 형태로 기록되어 진 사례</u>(도자기, 비문)를 발견<br>할 수 있다. 또한 귀족들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일반 대중을 <br>위한 것 일 수도 있었다. 쉽게 오늘날의 시각으로서 Communication은 <br>현대적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용어는 <span style="COLOR: #ff0000">14 C</span>에 등장하는 개념<br>이지만 처음에는 <span style="COLOR: #ffcc00">"함께 있는 방식"</span>이라는 뜻 이외에는 없었다. 이 후 16 C <br>전달된 내용 혹은 의사소통된 내용을 뜻하였고, 20 C에 들어서면서 비로써 <br>중요한 용어로서 인식되어 그 의미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Communication<br>이라는 단어가 점차로 중요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 "대중적 매체라는 <br>전달 방식의 진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오랜 시간을 거쳐 양적 질적으로 발전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br><br>역사학자들이 암흑기라고 부르는 최소 <span style="COLOR: #ff0000">3 C</span> 시대 동안 <br>문자가 없었다. 암흑시대라고 불리던 이유도 쇠퇴기이었기 <br>때문이라기보다는 <u>남아 있는 문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u>. 전쟁<br>혹은 화제로 유실되어 버리고 자연 재해가 쓸어가기도 했다.<br>오늘날 Alphabet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문장 형태로 발견<br>되고 있다. Creta Island의 점토판(선문자 A, 선문자 B) 그리고 <br>그림문자로 보이는 <span style="COLOR: #33ff33">Phaistos Disc(기원전 17-16 C)</span>의 발견은 Minos <br>문명의 발굴, 문자 해독이라는 사실보다 인류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br>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공로는 <span style="COLOR: #ff0000">Sir Arthur Evans<br><span style="COLOR: #ffcc00">(1851-1941)</span></span>, Michael Ventris(1922-1956)에게 돌려져야 한다. "에번스 경"은 <br>이러한 문자를 선문자 A, B라고 명명하였다. 굳이 선문자라고 한 것은 <br>문자가 선을 따라 정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 → 오른쪽으로 씌어져 있는 <br>선문자 B의 문자 체계는 선문자 A에서 파생되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br><span style="COLOR: #ff0000">15-13 C</span>의 것으로서 "에번스 경" 강의를 듣던 Michael Ventris가 분석(해독)을 <br>시작하여 누구보다도 빨리 해독 하였다. 선문자 B는 표의 문자 + 음절 <br>문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대적으로 Phoenicia Alphabet(기원전 11 C) 보다 앞선다. <br><br>반면 선문자 B의 모체 문자이기도 한 선문자 A는 <br><u>미해결된 문자로서</u> 기원전 17-16 C 의 것이며 대략 700종의 <br>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선문자 B를 통해서 90 %의 문자를 <br>읽을 수는 있으나(발음을 할 수 있는 정도) 주변의 언어와 분명<br>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해독은 불가하다고 한다. 해독이 완료된... <br>선문자 B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Greece People 들이 첫 문자<br>체계로서 뜻을 나타내는 기호와 발음을 나타내는 기호 그리고, 단어와 <br>단어 사이를 구분 짓는 막대와 같은 한정 기호 이렇게 3 부분으로 되어 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ceb2c82d.jpg" width="500" height="37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ceb2c82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antorini Sunset</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7e31622c.jpg" width="500" height="37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7e31622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Linear A</span><br>가장 중요한 것은 발음을 나타내는 기호로서 그 숫자가 <br>80개에 이르며, 각각의 하나의 음절-모음 혹은 자음과 모음을 <br>표시한다. 그래서 음절 문자 체계라는 명칭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br>뜻을 나타내는 기호는 사물을 뜻하는데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br>못한 점으로 미루어 선문자 B는 기본적으로 표음 문자이며 같은 <br>시기에 <span style="COLOR: #ffcc00">Egypt-Mesopotamia</span>에서 사용한 문자보다 좀 더 단순화된 체계로 <br>되어 있다. 이를테면 표의 문자에서 22-24개로 구성되어 가장 경제적인 <br>Alphabet으로서 향하는 중간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음절체계는 <br>Greece Language를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발음 구조와 <br>음절 구조와는 다른 구조를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Greece Alphabet에는 <br>말이라는 뜻의 hippos와 같이 <span style="COLOR: #ff0000">"s"</span>로 끝나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 이 유는 "s"는 <br>음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문자 B는 Creta People 들이 사용한 <br>선문자 A를 답습하였던 것으로 아마도 초기 그리스인들이 변형하여 사용한 것으로 <br>볼 수 있는데 선문자 A가 발전된 시기는 Mycenae 문명이 꽃피던 시절이다. <br>당시 문명을 Mycenae 문명이라고 부른 까닭은 Mycenae가 수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br>Mycenae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장소이면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의 하나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br><br><span style="COLOR: #ff0000">Palais</span><span style="COLOR: #ffcc00">(궁정)</span>이라고 불리는 행정 중심지들이 Mycenae를 <br>둘러싸고 있는 도시들은 다스리며, 국가의 경제, 군사, 종교를 <br>관장하였다. 특히 Palais는 거대한 관청의 역할까지 맡아서 영토 내의 <br>모든 재산을 수용하였으며, Greece Alphabet 체계는 이러한 <br>맥락에서 탄생되었다. 궁극적으로 Greece 문자 체계는 사회 구성원들 <br>간의 문학적인 혹은 종교적인 Communication 위한 것은 아니었다. <br>즉 !! <u>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u> 즉 !! 앞서 언급되어진 것처럼 <br>기록을 위한 목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궁전은 점차로 방대한 영토와 <br>많은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나아가 하나의 지욕 전체의 자원을 관리하게 되었다. <br><br>원칙적으로 <span style="COLOR: #ff0000"><span style="COLOR: #ffffff">Palais</span></span>이 생겨난 것은 거대한 창고로서 <br>생산물을 저장하고 재분배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역할<br>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국가를 위해 일하던 관료 직을 수행한 <br>사람들에게는 분배 되어야할 식량의 양이나 납부된 세금 액수에 <br>대해 파악하고 있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계에서 행정관의 <br>기억만으로 모든 것을 관리하고 처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br>더구나 방대한 정보가 형성됨으로써 영토 내의 국가 재산을 추적할 <br>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필요에 의해 Data 화 하기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br><br>그래서 "미케네 궁전" 주변에서 행정적인 용도로 <br>사용되던 기존의 문자들을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다. <br>선문자 B는 놀라울 정도로<u> 일관성 있는 문자 체계이었으나</u> <br>문자를 이해하고 사용하였던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 하였고, <br>대략 미케네 왕국의 고위 관료들과 매일 장부에 뭔가를 <br>기록해야 했던 행정관(필경사) 정도가 포함된다. 또한 시대 <br>혹은 공간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글자라도 모양, 단어 구조, 뜻을 <br>나타내는 단위까지 흡사하였기에 선문자 B가 제한된 사용자에 의해 <br>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일례로 <span style="COLOR: #ffcc00">Egypt-Mesopotamia</span> <br>상황도 같았으나 문자라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확실히 권력자들만이 <br>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시간 공간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하고 <br>있었기 때문에 상호간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는지는 단정할 수가 없다. <br>초창기 문자는 <span style="COLOR: #33ff33">Knossos, Mycenae, Tiryns, Pylos, Thebes</span> 등... <br>당시의 행정 중심지에서 발견될 화병(도자기), 점토판에 새겨진 비문 등을 <br>비롯하여 대부분의 것이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13 C</span> 궁전의 화재 시 잘 구워졌기 때문에 잘 보존될 수 있었다. <br><br>당시 상황을 고려할 대 점토판은 "파피루스 혹은 <br>양피지", 나무 조각의 영구적 기록 재료에 기록하기 전에 <br>한시적으로 기록하는 임시적인 방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br>파피루스, 양피지, 장부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Greece 토양의 특성 상 <br>이러한 재료가 오래 보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br>애초부터 파기하도록 만들어진 문서들만이 우연성을 갖고, 보존<br>된 것이다. (점토판 / 원래 불에 굽지 않은 상태이었다.) 또한 <br>당시 Egypt-Mesopotamia-Mycenae 사이에 오간 상업적 문서는 <br><u>이러한 것 밖에 남겨진 것이 없다.</u> 선문자 B는 대부분 상업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br><br>그것은 이제까지 발견된 4,000여개의 점토판 중 단 !! <br>4 점만이 행정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해준다.<br>"미케네 궁전"을 휩쓸어 버린 대화재는 선문자 B라는 문자체계도 <br>앗아가 버렸다. 오랜 시간 선문자 B가 유실된 경위를 <span style="COLOR: #ffffff">"도리아"</span>의 침입<br>으로 돌려 왔으나 사실은 인구의 대이동에 기인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p>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12 C</span> 이 후부터 Greece Alphabet이 탄생하기 까지 시기의 <br>고문서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암흑시대). 선문자 B는 설명 되어진 <br>것처럼 경제 활동을 위해 만들어졌고, 또한 이것을 탄생시킨 사회 경제적 조직과 <br>함께 소멸되었다. 즉 !! 재산의 목록의 기록과 보관을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br>더 이상 재산을 관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사용자가 소수에 <br>그쳤기에 권력을 상실한 순간 선문자 B는 소멸되었다. Roman Empire에서 <br>발견된 가장 오래된 Latin Alphabet 비문의 대략 연대는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7 C</span>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0edbfcd.jpg" width="500" height="663.71681415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0edbfcd.jpg');" /></div><span style="COLOR: #ffcc00">Mycena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233080f.jpg" width="500" height="35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233080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abine Women</span><br>사실 이러한 시대 Roman Empire는 성립되지 <br>않았지만 그 이전 Roman의 한 지역에서 살고 있던 <br>소수 민족으로 보여 지는 족속들의 것으로서 Latin Alphabet <br>이전에 사용되었던 문자 체계(Etruria)를 확인할 수 있다. <br><span style="COLOR: #66ffff">Etruria</span>는 기원전 8-6 C 말에 Italy 북부지역을 지배하였던 족속<br>이기도 하다. 그들의 문자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7 C 것이 <br>현재 Persia 근교에서 실제 발견되고 있는데 "A"를 비롯하여 "B"가 좌, <br>우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Latin Alphabet과 비슷한 문자로 <br>확인되고 있으며, 현재 발견된 것으로 Etruria 보다 오래된 문자는 <br>기원전 8-5 C 지중해 각지에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던 Greece 문자로 <br>가장 오래된 것은 South-Italy 등지에서 발견(8 C) 되었다. <span style="COLOR: #33ff33">Greece Alphabet → Etruria → Latin Alphabet<br></span><br>Latin Alphabet에는 Etruria 문자를 참조하지 <br>않으면 생기지 않았을 발음의 문자가 있고, 이러한 <br>경우... Etruria 문자가 없었다면 문자의 현실화가 되지 <br>않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결론적으로 Latin Alphabet의 뿌리는 <br>Greece 문자에 비롯되어 있으며, Greece 문자에서 만들어진 <br>Etruria 문자가 필연적으로 작용되어지는 것이다. 처음 Latin Alphabet가 <br>만들어질 당시 초기 문자는 "20 자"였다고 한다. 이후 영토 확장으로 <br>다양한 민족이 말(언어)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문자가 증가하게 <br>되었다고 하며, 1,000년 이상의 시공간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br>"26"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span><span style="COLOR: #33ff33"><span style="COLOR: #33ff33">영토 확장</span> </span>특히 활발한&nbsp; Ireland 수도사들의 <br>포교 활동에 영향을 받은 바 크고, 특별한 서체가 사용되었다. <span style="COLOR: #33ff33">→ Pope Gregory 1세(540-604)<br></span><br>Greece People 들은 문자를 발명한 대상을 <br>신화 혹은 가설을 통해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br>구전되어 내려온 것들 중에는 실제로 역사저인 근거를<br>갖춘 이야기도 공존하고 있다. 뭐...거의 확실해 보이기도<br>하지만 그것은 앞서 반복 설명되어진 것처럼 Phoenicia <br>문자로부터 Greece 문자가 파생되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의 <br>아버지 <span style="COLOR: #33ff33">Herodotos</span>의 구전되어 오던 신화를 이용하여 이러한 가설들을 <br>증명하고자 했던 흔적이 있었고 그러한 배경에는 Phoenicia + <br>Greece People 간에 왕의 아들 Phoenicia Kadmos(카드모스)가 <br>일정부분 역할을 하였다는데 기인하여 설명할 수 있다. 더불어 Greece에 <br>Alphabet이 도입된 시기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br>Greece People 들이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9 C 이전이<br>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도 실질적으로는 사료가 남아 <br>있지 않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현재로서 가장 정확한 흔적이라 <br>할 수 있는 것은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8 C</span> 것으로 <u>추정되는 토기 등에 새겨진 비문이라고</u> 할 수 있겠다. <br><br>더구나 "미케네 문명" 시대에서 볼 수 있듯이<br>쉽게 썩어 버릴 수 있는 재료에 새겨진 문서는 아무런 <br>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존재한다. <br>그러나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Greece의 다양한 <br>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다가 미세한 차이를 고려하면 <br>"문자"가 좀 더 일찍 만들어져 사용될 수 있었다는 가설을 전개<br>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서 문자가 다양한 형태로 파생<br>될 수있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br>했기 때문이다. Greek Alphabet는 "페니키아 문자"가 수차례 변형된 <br>결과로서 이러한 문자가 어떤 경로로 전달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e31885f1.jpg" width="500" height="372.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e31885f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rojan Horse</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c3a6304.jpg" width="500" height="377.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c3a630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asilica Cistern<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cf73917.jpg" width="500" height="331.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8cf7391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odrum(Halicarnassos)-Blogcu</span><br>즉 !! Greece 내부에서변형된 것인지... 혹은 <br>Phoenicia 해변이나, Ionia 해변, Rhodes, Creta, <br>Thira Island 등에서 변형된 것이 아닌지 여러 가지 의문을 <br>가질 수 있는데 현재 이러한 사실에 반박할 아무런 사료 <br>또한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나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br>사실은 Phoenicia에서 사용된 문자 체계가 Greece에서 사용되기 <br>이전에 수많은 변형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고, Alphabet이 <br>조금씩 알려지고, 확대되면서 다양하게 전개된 것은 부정할 수 <br>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초기 Greece &amp; Phoenicia People <br>들은 <u>상업적으로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u> 학자들은 문자 도입 <br>계기도 이러한 방식의 연장선에서 추정하였고, 지금으로서는 가장 <br>믿을 만한 가설이라고 보여 진다. 다시 말해서 Phoenicia People 들이 <br>간편하고 실용적이었던 Communication 도구로서 받았던 혜택을 <br>목격한 Greece People 들이 차용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br>흔적에서는 상업적 목적의 비문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적 용도만으로는... <br><br>Phoenicia 문자에 있었던 변형이 설명되지 않는다. 먼저 <br>문자의 명칭은 같지만 Phoenicia People들은 명칭에 커다란 <br>의미를 부여하였다. 예컨대 aleph(알파) → Alpha는<span style="COLOR: #ffcc00">"소"</span>를 뜻하고, <br>beth(베타) → Beta는 <span style="COLOR: #33ff33">"집"</span>을 듯하며, gimmed(감마) → Gamma는 <br><span style="COLOR: #66ffff">"막대기"</span>를 뜻하였다. 반면 Greece People 들은 그러한... 명칭에 아무런 <br>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문자의 순서는 "페니키아 인들이 정해 <br>놓은 것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형태 도한 커다란 변화가 없었지만 <br>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즉 !! 어떤 지역에서는 문자의 형태가 <br>마치 뒤집어 쓴 것처럼 반대로 되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90°로 틀어진 형태마저 보인다. <br><br>또한 단순화 되거나 복잡해진 지역도 있었다. 특히<br>Alpha가 그랬다. 가장 중요한 체계로 Alphabet에 "모음"이 <br>도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셈족 어와 마찬가지로 Phoenicia<br>에서는 "자음"이 의미의 매개 역할을 하며 "어근"을 이루어 <br>같은 어족의 단어를 만들게 됨으로써 "모음"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br>그러나 Greece People 들은 "인도-유럽 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br>"모음"은 자음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모음"까지 기록할 <br>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하여 Greece People들은 Phoenicia 문자 중에서 <br>"자음" 혹은 "반 자음"이기도한 문자 다섯 개를 지정하여 "모음"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br>.<br>.<br>.<br>기원전 7 C에는 글을 알고 있는 직업적인 <br>시인과 음악가가 존재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음표가 <br>발명된 시기도 기원전 6 C 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br>기원전 500년경부터는 초급 교육이 실시되었다. 또한 <br>그 무렵 Athens에서 화끈한 <span style="COLOR: #ff0000">Ostrakismos</span><span style="COLOR: #ffcc00">(도편 추방)</span>가 시행된 <br>것을 보면 시민들에게 문자가 널리 퍼져 있음을 확일 할 수 <br>있다는 사실이다. 문자를 아는 인구는 기원전 5 C중에 꾸준히 증가<br>하였으며 기원전 <span style="COLOR: #ff0000">4 C</span> 이 후에는 대다수가 문맹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br>.<br>.<br>.<br><span style="COLOR: #66ffff">aleph(a), he(e), Yod(i), ayin(o), waw(u)<br></span>이러한 문자들은 Greece 지방 방언에서도 같은 <br>소리를 내게 되었다. 특이할 점은 이러한 과정이 소수의 <br>사람 혹은 고대인들이 추축하였던 것처럼 위에서도 잠시 <br>언급 되었으나<u> 단 한사람에 의해 정리되었다고</u> 말할 수 있다. <br>"모음" 도입 이후 다른 변화들은 비교적 작은 것들이다. Phoenicia <br>문자에는<span style="COLOR: #33ff33">"치 찰 음"</span>이 4 개 있었는데 Greece에 유입되고 부터는 <br>"치 찰 음"을 줄이고, 원래 있던 "s"와 "zd"만을 사용하였다. 또한 "유성 자음"<br>이기도 한 소, ph, kh, ps, x의 발음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추가<br>하였는데 이러한 변화들은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각 지역에서 다른 <br>방식으로 전개되었다. Greece에 유입된 "페니키아 문자"는 <br>고정된 시대를 거쳐 지역별로 변환 되다가 기원전 4 C에 이르러 비로써 통일 된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25a5636e.jpg" width="500" height="30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4/67/d0006967_4a4ee25a5636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Luxor ...Egypt<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eca7efd2.jpg" width="500" height="761.42131979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eca7efd2.jpg');" /></div>Jericho Skull<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eb98695b.jpg" width="500" height="32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eb98695b.jpg');" /></div>Cnossos Palais<br></span>기원전 6 C / 20자<br>ABCDEFHIKLMNOPQRSTVX → 초기</p><p>기원전 3 C / 21자<br>ABCDEF<span style="COLOR: #66ffff">G</span>HIKLMNOPQRSTVX → G 추가</p><p>기원전 1 C / 23자<br>ABCDEFGHIKLMNOPQRSTVX<span style="COLOR: #66ffff">YZ </span>→ Y, Z 추가</p><p><span style="COLOR: #33ff33">기원후 10 C </span><span style="COLOR: #ff0000">/ 26자<br></span>ABCDEFGHI<span style="COLOR: #66ffff">J</span>KLMNOPQRST<span style="COLOR: #66ffff">U</span>VX<span style="COLOR: #66ffff">W</span>YZ → J, U, W 추가<br>.<br>.<br>.<br><span style="FONT-SIZE: 130%"><span style="COLOR: #cc33cc">Turning Point</span></span><br><span style="COLOR: #66ffff">Sinai Peninsula-Palestine</span>에는 거대한 문명은 <br>없었지만 원(原)시나이 문자(원 가나안 문자)라고 불리는 <br>문자로 쓰인 비문이 "광산의 터" 등에서 발견되었다는 <br>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이 땅에는 이미 문자가 <br>사용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gypt Pharaoh가 통치하는 왕국이 <br>2,00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고, 그곳에는 Hieroglyph 등이 <br>있었다. Creta Island에도 문명이 있었고, 그곳에서도 독특한 형태의 문자가 발견되었다. <br><br>Phoenicia 본토(지중해 동쪽 해안)에서 <br>발견된 것으로 그 외 North-Africa, Turkey, <br>Greece, Italy, France 등에서 비문이 다수의 발견 <br>되고 있는데 Greece Alphabet, Phoenicia Alphabet는 <br>시대와 장소에 따라 문자의 형태가 일부 다르고,<br>현재 스스로 다른 민족과 동화되어 사라졌다는 Phoenicia <br>Alphabet보다 오래된 문자에서 "모음"을 나타내주는 <br>기호는 없다고 한다. 11세기 지중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br>있었던 Phoenicia인들의 "문자 탄생"은 11세기 이전으로 <br>추정되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Creta Island 섬의 <br>상형문자, Middle East-Mesopotamia의 설형문자, Sinai <br>Peninsula의 원(原)시나이 문자, Egypt Hieroglyph(히에로글리프)를 <br>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Phoenicia 문자의 <br>뿌리로 유력한 것은 원(原)시나이 문자이며, 문자의 유사성에 근거로 하고 있다. <br><br>그렇다면... <span style="COLOR: #ff0000">원(原)시나이</span> 문자의 뿌리가 되는 <br>문자는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 까 !! 증거로&nbsp;Egypt <br>Wadi el-Hol(와디 엔-홀 )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비문에 <br>쓰인 문자는 Sinai 문자와 유사한 것이 발견되었고, 이러한 <br>문자를 당시 Sinai Peninsula에&nbsp; 살았던 사람들의 언어<br>(셈-어)로 읽게 되면 <span style="COLOR: #33ff33">Phoenicia Alphabet</span>로 이어진다고 한다. <br>따라서 Alphabet은 Hieroglyph의 기호를 참고하고 있으며 <br>Egypt People 이 외의 외국인이 자신들의 언어에 맞춰 만들었다는 것이다.<br><br><span style="COLOR: #66ffff">Wadi el-Hol = Egypt&nbsp; Luxor</span> <br>북서쪽 약 30 km 지점, <u>석회 암질의</u> 사막으로 <br>비가 오면 물이 흐르는 강이었다. (이집트 왕국의 바깥 <br>가장자리 !!) 이곳에 Asia People의 부대가 머물고 있었다고 함 !!</p><p><span style="COLOR: #ff0000">Latin Alphabet</span>에는 Etruria 문자를 참조하지 않으면 생기지 <br>않았을 발음의 문자가 있고, 이러한 경우 Etruria 문자가 없었다면 <br>문자의 현실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결론적으로 Latin 문자의 <br>뿌리는 Greece 문자에 비롯되어졌으며, Greece 문자에서 만들어진 <br>Etruria 문자가 필연적으로 작용되어지는 것이다. 처음 Latin 문자가 <br>만들어질 당시 초기 문자는 <span style="COLOR: #ffcc00">"20 자"</span>였다고 한다. 이후 영토 확장으로 다양한 <br>족속이 말(언어)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문자가 증가하게 되었다고 하며,<br>1,000년 이상의 시공간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span style="COLOR: #33ff33">"26"</span>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br><br><span style="COLOR: #66ffff">Old Greece Alphabet</span>의 특성으로 극명한 <br>것은 첫째 줄은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쓰면 <br>다음 줄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식이라고 <br>하는데 이러한 방식을 말할 때 <span style="COLOR: #ffcc00">"소가 논을 가는 방식" <br></span>이라고 한다. Phoenicia Alphabet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고, 쓰고 한다.</p><p>.<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d773c499.jpg" width="500" height="35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d773c49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Wadi el-Hol<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d9bb8ead.jpg" width="500" height="329.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d9bb8ead.jpg');" /></div>Latin People<br></span><span style="COLOR: #66ffff">01. Languages Cyrillic Alphabet<br></span>동-유럽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자 체계 <br>구-소련, 소비에트 연방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던 <br>국가에서 혹은 포함되는 족속<span style="COLOR: #ffffff">(Bulgaria, Serbia)</span>에서 널리 <br>사용되던 문자로 Russia 정교회의 책에 쓰여, 이 지역의 <br>필수적인 문자체계라고 할 수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 왼쪽에서 오른 쪽 방향<br></span>&nbsp;<br><span style="COLOR: #66ffff">02. Languages Arabic Alphabet</span><br>Islam 각국에서 사용되는 문자 체계<br>서-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br>Islam의 <span style="COLOR: #ffcc00">"코란"</span>에 사용되어 있기에 Muslim들에게는 <br>특별한 종교적 의미 있는 글자라고 할 수 있으며, <br>특징은 모음이 없고, 자음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br></span><br><span style="COLOR: #66ffff">03. Languages Latin Alphabet</span><br>United States of America, Europe, Africa <br>등지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자 체계 사용하는 <br>언어에 따라 문자의 수가 다르게 나타난다. 세계 <br>70개국 이상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br>"A"에는 "a" 소문자가 뒤따르고, 각 국가마다 <br>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A→Z 까지 문자 26자가 <br>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br></span>&nbsp;<br><span style="COLOR: #66ffff">04. Languages Chinese Character &amp; Hangeul</span><br>한자(漢字)와 한글(훈민정음) East-<br>Asia에서 사용되는 한자(漢字)와 한글이라는 <br>문자 체계 한자는 중국 및 역사적으로 <br>China의 영향력이 강했던 대한민국 혹은 <br>일본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문자의 수는 수만 가지가 <br>넘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이 주체적으로 <br>사용되며 "일본"에서는 한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br>일본의 문자 <span style="COLOR: #ff0000">"Ghana"</span>가 사용되고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3a66511ec.jpg" width="500" height="715.99045346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3a66511e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rtouche</span><br></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d4ae0a66.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06/67/d0006967_4a512d4ae0a6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emple of Artemis</span><br>.<br>.<br>.<br><span style="COLOR: #ffcc00"><embed src="http://pds4.cafe.daum.net/download.php?grpid=cdvX&amp;fldid=2ib&amp;dataid=1828&amp;fileid=1®dt=20070106110633&amp;disk=20&amp;grpcode=peoplewhite&amp;dncnt=Y&amp;.wma" width="300" height="68" hidden="true" type="application/download" autostart="true" showstatusbar="false" loop="true" volume="0">La reine de Sava / Paul mauriat</span><br/><br/>tag : <a href="/tag/Alphabet" rel="tag">Alphabet</a>,&nbsp;<a href="/tag/Ostrakismos" rel="tag">Ostrakismos</a>,&nbsp;<a href="/tag/Ugarit" rel="tag">Ugarit</a>,&nbsp;<a href="/tag/Hieroglyph" rel="tag">Hieroglyph</a>,&nbsp;<a href="/tag/Jericho" rel="tag">Jericho</a>,&nbsp;<a href="/tag/Greece" rel="tag">Greece</a>,&nbsp;<a href="/tag/Pompeii" rel="tag">Pompeii</a>,&nbsp;<a href="/tag/Creta" rel="tag">Creta</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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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Mediterranean Sea ...In Genova & Venezia-a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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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bd6d322b.jpg" width="500" height="37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bd6d322b.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rnival of&nbsp; Venice</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6ef5165f.jpg" width="500" height="329.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6ef5165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Republic Into the Roman Empir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c7384789.jpg" width="500" height="318.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c738478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enezia Gondola</span><br>지중해는 지구상에서 육지로 둘러싸여 있는 바다 중 <br>가장 커다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span style="COLOR: #ffffff">길이 4,000 km, 최대 <br>너비 1,600 km, 평균 수심 1,458 m</span>에 이르고 비교적 좁은 <br>바다라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깊은 곳으로 알려진 지점은 <br><span style="COLOR: #ff0000">5,092 m</span>로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지중해는 3개의 대륙과 인접<br>되어 있지만 기후 혹은 생태에 다양성을 보이고, 포괄적으로 공통적 <br>요소도 갖고 있다. 또한&nbsp; <span style="COLOR: #ffcc00">"지중해 성 기후"</span>와 이곳만의 특이한 <br>해류는 지중해 전체를 연결시켜 독자적인 생태 환경을 갖추게 하였다. <br>지리적으로 닫힌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의 유일한 통로는 <br><span style="COLOR: #33ff33">Strait of Gibraltar</span>로 그 범위는 바다뿐만 아니라 인접되어 있는 육지에 <br>이르기 까지 포괄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East → Syria, West → <br>Iberia Peninsula, North → Alps, Pyrenees, South → Sahara(이북지역)의 <br>North Africa Maghreb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나 &nbsp;이렇게 경계된 지중해는 <br>협소하게 제한된 범위 설정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지중해는 <br>Roman Empire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용하였던 Sahara 이남의 <span style="COLOR: #ffffff">"수단"</span> 지역 <br>혹은 South Africa Sahel 지역을 포함하고 서유럽, 전부 혹은 North-Europe <br>일부에 이르기 까지 광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Roman Empire <br>시대 이전에는 Old Orient 지역<span style="COLOR: #ffffff">(적갈색 피부를 가졌던 백인)</span> → Africa을 <br>흡수한 그야말로 역사 속에서 백인 중심의 인류문명의 핵심적인 곳이라 이를 만하다. <br><br>반면 Egypt <span style="COLOR: #ffffff">"흑인 문명"</span>에서 해답을 찾는 다면 Greece, <br>Roman Empire는 사실상 Orient Empire의 판박이라는 주장을 <br>대입시켜&nbsp;볼 때...&nbsp;지중해의 지리적 공간은 백인과 유럽 중심으로 이해<br>하여 왔던 지중해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br>사실이다. 그렇지만 생태적으로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br>긍정적으로 고대 역사 속에서 지중해의 "시간과 공간"은 Old Africa, <br><span style="COLOR: #33ff33">Orient, Hellenism &amp; Hebraism,</span> 중세 유럽과 Byzantine &amp; Islam에 이르기 <br>까지 아우르는 활발한 문명교류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낭만적으로는 <br>푸른 바다, 강렬한 햇빛, 온화한 기후 조건, Greece의 바다, Islam의 바다, <br>Roman의 바다 이전에는 Africa의 바다이기도 하였다. <span style="COLOR: #ffffff">"판-구조 론"</span>에 의하면... <br>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지중해는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br>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Africa 대륙이 <br>유럽&nbsp;대륙 방향으로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상&nbsp;때문으로 <u>지중해가 닫히게 되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u>.&nbsp;&nbsp;<br><br>그러나 현재 중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nbsp; 언어(문자), <br>생태 모습마다 "팔색조"와 같은 다변성이 존재하였던 지중해 문명의 <br>교류는 <span style="COLOR: #ffffff">"수평적"</span>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떠한 문명이 중심이 되고 <br>주도 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 흡수되는 가운데 새로운 변화들이 발생 되었다는 <br>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교류를 실현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환경 생태적인 <br>측면에서 지중해 성 기후가 작용하는 가운데 지중해는 지역적으로 성장하였고, 단적인 <br>예로서...&nbsp;Olive Oil<u>의 교역은 지중해의 문명적 교류를 이루어 확산되는</u> 동시에 <br>지역적으로도 하나로 묶어지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확실한 것은 지중해 자체로는 <br>그들 모두가 공유하였던 지역이었음이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럽 대륙<br>(내륙)이 역사상 단 한 번의 통일이 되었던 적이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 8 C </span>그러나 그것은 정치, 경제, <br>문화적으로 묶여지는 구조적인 통일이 아니라 강렬한 Charisma에 이끌렸던 일시적인 통일이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036e4095b.jpg" width="500" height="33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036e4095b.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oloseum ...Roma</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03768ff3a.jpg" width="500" height="371.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03768ff3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trait of Gibralta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cfd1f62d.jpg" width="500" height="35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cfd1f62d.jpg');" /></div></span><span style="COLOR: #ffcc00">Florence Duomo</span><br>따라서 유럽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통일성을 갖게 <br>되었던 것은 오래전...<span style="COLOR: #33ff33">Platon &amp; Aristoteles</span> 시대 이후 Roman- <br>Empire가 지중해 전역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흡수한 <span style="COLOR: #ff0000">Cartago, Greece</span> <br>남쪽으로 Sahara까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면서 이뤄진 영토 확장 <br>작업을 두고, 사실상 유럽 최초의 통일을 이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br>지중해라는 용어 자체가 떠오른 것은 Roman Empire 시대이었고, <br>문헌상으로는 기원전 6 C에 나타나고 있다. 개념적으로는 Islam과 분리<br>시키려는 경향 속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나 지중해는 어느 하나의 <br>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바다가 아니고, 모두의 바다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br><span style="COLOR: #ffcc00"><span style="COLOR: #ff0000">Late Antiquity</span>(후기 고대)</span>에 이르러 Roman Empire가 와해되는 한편 "동-로마"<br>제국이 성립되면서 지중해 전반에 걸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충돌과 교류가 <br>활발하게 발생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Germanic People의 <br>"고트 족"의 남하가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로서 분명 <br>그것은 "서-로마"의 몰락과 "동-로마"의 존속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br><br>이점에서 Roman의 존속 여부는 Germanic People의 <br>호전성과 Arab 세력의 확장에 따른 것이며, 참고로 <span style="COLOR: #ff0000">7 C</span>에 <br>이뤄진 Islam 세력의 확장으로 인한 동, 서양의 교류는 주목되는데 <br>이전의 활발하였던 지중해의 무역을 후퇴 시켰으나 8-9 C에 <br>이르러 지중해 무역(교류)은 되살아난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중해는 <br>North Africa, Middle East를 포괄하는 또 다른 질서의 지리적 표현이 되었다. <br>사실상 Islam이 지중해와 공간적으로 합치되는 양상은 역사적으로도 <br>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span style="COLOR: #ff0000">Hun-Turk-Mongolia</span> 세력(유목민)의 확장에 <br>따른 동, 서의 또 다른 접촉은 전면적이라 할 수 없어도 많은 부분 지중해 지역과 <br>연관되어 있고,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Osman Empire는 <br>South Anatolia와 남동부 유럽의 Byzantine 영토를 차지하고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br>하였는데 <span style="COLOR: #ff0000">15 C</span>에 이르면 발칸 속국들을 직접적으로 통치하며, Constantinople <br>= Istanbul을 정복(1453)하게 된다. 그리고 동쪽으로 Euphrates River &amp; Hungary <br>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렇게 해서 16 C 말엽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 <br>중부 유럽 <span style="COLOR: #33ff33">→ Hungary, Middle East, North-Africa</span>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br><br>이처럼 Osman Turk의 확장은 지중해 "해상 로"를 위협하였고, <br>교역로가 교란되는 가운데 15 C 유럽은 드디어 <span style="COLOR: #ffffff">"희 망 봉"</span>을 접하게 된다. <br>결과적으로 북-서 유럽과 동방이...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서도 안전하고 쉽게 <br>연결되는 등 지중해의 지리적 기능이 16 C 이래 적어도 19 C 중반까지 <br>약화되는 현상을 갖게 되었지만 <span style="COLOR: #ff0000">16 C</span> 까지도 지중해의 바다는 그냥 바다가 <br>아니었다. 무역망(교역)이 깔린 공간으로서 단일 세계 경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br>비록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구분 되어 있었으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의 <br>경제 단위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span style="COLOR: #ffffff">Genova, Venezia, Milano, Firenze</span>같은 North-<br>Italy의 도시 국가들이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실로 모든 경계를 초월한 무역상의 <br>구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 경제 주도권은 점차로 소멸(1650)되면서 <br><span style="COLOR: #ff0000">18 C</span>에 이르면 대서양 시대가 열리면서 <u>새로운 세계질서가</u> 혼란스러운 가운데 지속되게 되는데 <br>그 중심의 핵심적인 국가들은 다음과 같다. <span style="COLOR: #33ff33">→ Portugal → Spain → Netherlands → England → France<br></span>.<br>.<br>.<br><span style="COLOR: #ff0000">Romulus</span><span style="COLOR: #ffcc00">(로물루스)</span>가 끊임없이 <br>바다로 흘러가는 강 근처에 도시를 세운 <br>것은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바닷가라는 위치에서 <br>얻을 수 있는 온갖 이점을 활용하면서도 단점은 <br>모두 피해 가지 않은가 !! Roman에 없는 물건은 바다를 <br>통해 수입하고, 반대로 남아도는 것은 수출할 수 있다. <br>이렇게 해상교역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토지를 최대한 경작할 수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 Cicero(키케로)<br></span>.<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09fdd842.jpg" width="500" height="37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09fdd84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emple of Romulus<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08da4559.jpg" width="500" height="655.02183406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08da4559.jpg');" /></div>오래전부터 유럽은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국가들로 구성되었고,<br>유럽 문명의 시초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지중해 지역에서<br><span style="COLOR: #33ff33">Egypt-Cnossos</span> 정도가 최초로 국가 형태를 이루고 발전을 시작하였다. 즉 !! <br><span style="COLOR: #ff0000">Maghreb</span> 지역과 Creta Island에서 진정한 의미의 도시 문명이 탄생되었다는 의미이다.<br>그 뒤 <span style="COLOR: #ffffff">Aryan People</span> 들이 Asia에서 서쪽으로 확산되어 Greece 도시국가 그이외의 지역으로<br>유입되었고, 현재 Old Greece People 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Aryan Type의 Greece<br>People 들이다. 애초의 그들은 아마도 그 이전에 India로 내려온 Aryan Type의 사람들과 크게<br>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감지되었고, Aryan 족속의 양대<br>계통 설은 점차로 달라져 갔다. India-Aryan Type은 그들이 오기 전에 있었던 India Civilization과<br>Mohenjo-Daro(모헨조다로)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문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는데<br>Aryan + Dravida(드라비다인) People은 서로 많은 것을 주고받았으며, 공통된 문화를 탄생 시킨 것이다.<br><br>이와 마찬가지로 Greece + Aryan People도 그들이 Greece에 <br>도달되어 있을 때 이미 그곳에서 번영하고 있던 Cnossos Civilization<br>에서 깊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Cnossos- <br>Civilization을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span style="COLOR: #ff0000">Cnossos Civilization</span>과 그 주위의 문명을 <br>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자신들의 문명을 세웠다. 참고적으로 Aryan Type의 <br>족속들은 모두 일당백의 전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br>호전적이기도 했던 그들은 온순하고 개화된 여러 민족을 파괴해서 흡수해버린 <br>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Cnossos Civilization은 <u>기원전 1000년경에 멸망하였고</u>, 새로운 <br>Greece People 들이 그 주변일대의 섬들에 정착하게 된다. 그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br>Asia Minor = Anatolia 서해안과 South-Italy Sicilia Island, South-France(Gallia) <br>까지 진출하였고, <span style="COLOR: #33ff33">Gallia-Marseille</span>는 그들이 세운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지역에서는 <br>그들 보다 먼저 해상 무역을 위해 멀리까지 항해하던 Phoenicia People 들이 <br>정착하고 있었다.&nbsp;또한 그들은 좁은 Strait of Gibraltar 해협을 통과하여 Britain 까지 <br>진출하였고, Greece 본토에서는 Athens &amp; Sparta, Thebes(테베), Corinth(코린트) 등으로 확산되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3f218917.jpg" width="500" height="740.74074074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3f21891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Male Limestone Bust Mohenjo-Daro</span><span style="COLOR: #ffcc00"><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d563a132.jpg" width="500" height="537.1530886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3d563a132.jpg');" /></div>Mediterranean Sea<br></span>중요한 점은 전반적으로 고대 유럽 국가들은 점차로 도시<br>국가, 제국, 왕국 등으로 전환되어갔으며, 그것은 전쟁의 수단에 <br>의한 정복활동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br>또한 유목 + 정착민(Central Asia)이 혼재한 양상으로 전개 되었는데 <br>Middle East 지역에서는 Mesopotamia = Asia Minor(소아시아)의 <br><span style="COLOR: #33ff33">Hittite, Assyria, Babylonia</span> 왕국 등이 있었고, Persia(기원전 500년경)에<br>의해 거대한 Empire가 건설되었으며, Alexandros the Great는 지중해 <br>동쪽 지방이 Greece에 영향을 받기 이전까지 India → Egypt가 광대한 지역을 <br>장악하고 대제국의 위용을 확립시켰다. 주목되는 것은 <span style="COLOR: #33ff33">Alexandros the Great</span>의 <br>동방 원정이 지속되면서 본격적으로 <span style="COLOR: #ff0000">Egypt → India</span>에 걸쳐 민족이 혼합되기 <br>시작하며 "Hellas People"들에 의해 도시 국가 Greece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br><br>또한 앞서 설명되어진 것처럼 Aegean Sea, <br>Creta Island와 같은 곳에서는 이미 !! 호화로운 <br>궁궐을 건설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던 인류의 자취가 <br>남아있었다. 이러한 도시국가, 제국, 왕국이 위치<br>하게 되었던 지역은 전반적으로 고원이나 산록지역에 <br>살던 <u>유목민들이 </u>Minor &amp; Mesopotamia에 정착하면서... <br>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침략과 약탈에 <br>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였다. 따라서 <br>유럽의 초기 왕국들 또한 Greece의 도시국가들이 하나, 둘 증가<br>하는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확보해 갔으며, 진정한 Empire의 <br>형태는 Roman Empire가 지중해에 접한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광대한 <br>영토를 차지하며 성립되었다. 인류 최초의 도시는 기원전 4,000년경 <br><span style="COLOR: #33ff33">Tigris-Euphrates River</span> 사이의 <u>비옥한 초승달 지역인</u> Mesopotamia에서 발생되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01933179.jpg" width="500" height="33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0193317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Hellas Peopl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03bdeb0c.jpg" width="500" height="37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103bdeb0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antorini ...</span><br>그 후에 Indus → Nile River, China → Yellow River <br>유역에서 차례로 도시들이 세워졌고, 예컨대 Indus River에서 <br>생긴 도시 <span style="COLOR: #ff0000">Mohenjo-Daro</span><span style="COLOR: #ffcc00">(모헨조다로)</span>에는 6 만 명 정도의 인구가 <br>밀집되어 거주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특히!! Mohenjo-Daro의 <br>가옥에는 "목욕탕과 화장실" 같은 문화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br>China의 경우 <span style="COLOR: #ffffff">"상 왕조 마을"</span>이 형성(기원전 1900) 되었다고 한다.<br>초기 제국 화 되었던 문명을 보면 Mesopotamia Akkad(아카드), <span style="COLOR: #ff0000">Sumer</span><br>(수메르)이고, 가장 널리 퍼진 제국은 Egypt이며,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br>있는 것들은 Creta Island → Cnossos, Mesopotamia → Uruk(우르크), <br>Stonehenge(기원전 3,000년경), Ziggurat, Pyramid =&nbsp; Egypt / Inca / Aztec / <br>Maya 나열해 볼 수 있을 듯싶다. 이러한 것들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며, <br>기본적으로 "노예, 장인, 상인, 농부" 등이 총 동원되어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br>지중해는 Europe, Asia, Africa를 이어 주었던 상징적인 시공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br><br>지중해 문명이 서방(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br><span style="COLOR: #33ff33">Old Celt Civilization</span> 이래로 해상 무역과 국제화를 통해... <br>하나의 문명을 이뤄 왔다는 것으로 Hellenism &amp; Hebraism이라는 <br>사상에 의해 견고해 졌고, 커다란 변화를 이룬다. 대략 이러한 <br>시기부터∼역사가 서방(서양) 중심으로 재편되는 놀라운 변화의 <br>시점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 Hellenism &amp; Hebraism = Renaissance <br><br>Roman Empire가 창건 될 무렵 혹은 그 보다 먼저 <br>고대 세계에 또...하나의 대도시가 건설되었는데 그것은 <br><span style="COLOR: #ff0000">Maghreb</span> 지역의 Carthago이었다. 이러한 도시 국가는 마침내 <br>커다란 해상세력이 되어 Roman과 격렬하게 대항하며, 크고 작은... <br>전쟁을 거듭하게 된다. 그렇지만 Roman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며 <br>Carthago를 초토화시켜 버린다. 그리고 Egypt-Assyria-Babylonia이 <br>끊임없이 충돌하던 Palestine 땅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Cnossos <br>Civilization이 파괴될 무렵 Palestine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던 Judah <br>왕국의 왕은 <span style="COLOR: #ffcc00">"Saul"</span>이었다 그 뒤에 David → Solomon으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다. <br><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118438d5.jpg" width="500" height="779.22077922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118438d5.jpg');" /></div>Florence Piazza della SignoriaStatue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177e22a0.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177e22a0.jpg');" /></div>Strait of Gibraltar<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1f9b4d31.jpg" width="500" height="907.71558245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1f9b4d3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Hannibal ...<span style="COLOR: #ffcc00">Battle of Cannae</span></span><br>특징적으로 Greece People들은 커다란 형태의<br>왕국 혹은 제국 형태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br>도시 국가들을 좋아했으며 말하자면 각 도시들마다 하나의 <br><u>독립된 국가체제를</u>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도시는<br>작은 공화국이었으며, 중심에 도시가 있고 주변에 농지가 있어서 <br>식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국가들에는 왕이 <br>없었다. 부유한 시민 계급(귀족)에 의해 다스려 졌고, 보편적으로 <br>일반인들은 정치에 대해 발언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는데 참정권 없는 <br>많은 <span style="COLOR: #ff0000">"노예"</span> 그리고 여성들 또한 이에 대한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br>못했으며 훗날 대의 정치가 실현된 것은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지 <br>모른다. 또한 Greece People 들은 Sicilia Island, South-Italy 그리고 <br>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이러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지배<br>하는 하나의 정부를 갖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별개의 도시국가를 세웠던 것이다. <br><br>Persia의 경우도 그렇고 India의 경우도 상당한 규모를 <br>자랑하는 왕국들이 등장하지만 Greece에서는 한사람에 의해 <br>세계를 정복하려는 마음을 먹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을 흘려보내게 된다. <br>정복자 그는 바로 위대한 <span style="COLOR: #33ff33">Alexandros the Great</span>이었다. 또한 이들은 <br>서로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부지런히 서로 싸우게 되는 모습으로 보였는데 <br>그들 사이에는 격렬한 투쟁의 일환이었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br>참으로 난해한 사람들 아니었나 싶다. 무엇보다도 이들 도시국가들이 결합<br>될 수 있는 공통점(언어, 문화, 종교)을 분명하게 소유하고 있었건만 집요하리만치 <br>투쟁으로 일관하였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외부의 압력이나 침략이 있어서 <br>위험이 닥칠 경우 곧 !! 하나로 뭉쳐져서 막아내게 된다. 그 한 가지 예로서... <br><span style="COLOR: #ff0000">Persia Darius</span>가 <u>Scythian 정벌에 실패한 후</u> Aegean Sea의 여러 섬들을 굴복 시키고, <br>Greece Athens를 침공하였을 때가 그러했다. 반면에 <span style="COLOR: #ff0000">Tiber River</span> 근처에 있는 <br>일곱 개의 언덕 위에 마을을 세운 Roman(Aryan People)은 점차로 도시국가 형태로 <br>성장하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는 발전을 거듭하여 Italy Peninsula에 <br>그 세력을 뻗히게 되면서 Sicilia Island 건너편 Messina(메시나)에 까지 세력을 확장시키기에 이른다. <br><br>이러한 시기 지중해에는 Roman의 식민 도시가 건설되고 <br>세우려 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Greece 도시<br>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Roman 자체는 <br>특수한 통치 구조를 갖고 있었다. 당시 Roman은 방대한 토지를 소유<br>하고 있던 소수의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일종의 공화국 <br>형태를 갖춘다. 정치는 <span style="COLOR: #ff0000">Senate</span><span style="COLOR: #ffcc00">(원로원)</span>에서 행해졌고,이러한 원로원은 <br>선거를 통해 선출된 두 사람의 Consul(집정관)의 지명으로 원로원<br>위원들이 뽑혀졌다. 또한 이들의 자격은 오랜 시간 귀족으로만 제한되고 있었다. <br>Roman은&nbsp;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하나는 많은 토지를 보유한 Patrici <br>즉 !! 부유한 귀족이며, 또 하나는 <span style="COLOR: #ff0000">Plebs<span style="COLOR: #ffcc00">(플레부스)</span></span> 일반 시민 계급이었다. 때문에 <br>Roman(공화정)의 역사는 수 백 년 동안 이러한 두 계급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br>귀족들은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권력이 있는 곳에 재물이 뒤따랐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336b03bc.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336b03b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iber River<br></span><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3d4b3e13.jpg" width="500" height="30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3d4b3e13.jpg');" /></div>Venezia Flooding<br></span>"평민"들은 패배자로서 권력도 재물도 없었다. 어찌되었든지 <br>훗날 다소 간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낸 평민과 귀족들이 결과적으로 <br>위대한 도시건설을 이루어냈으며, 어느 시기부터는 평민들도 고위 관료 <br>혹은 원로원의 될 수 있었다. 또한 Roman에는 방대한 숫자의 노예 <br>계급<span style="COLOR: #ffffff">(Slave)</span>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부여되지 않았다. 그들은 <br>Citizen(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거권도 없었고, "소나 개"처럼 그저 <br>주인의 사유재산 목록에 포함되는 신세이었다. 주목 되는 것은 거래의 대상으로도 <br>존재하였고 만일 !! 이들이 해방되면 <span style="COLOR: #ff0000">Freedmen</span><span style="COLOR: #ffcc00">(자유민)</span>의 지위를 얻게 되고 <br>이러한 지위는 특별한 계급으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고대 서양 사회에서는 언제나 <br>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노예 시장"이 <br>설치되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원정대를 조직하여 생포 작전(인간사냥)에 <br>나서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쉽게 팔아치우기도 했다. Egypt 역시 !! 마찬가지로... <br>Old Greece-Roman의 성장 배경에는 반드시 <u>광범위한 노예 제도</u>를 먼저 언급해야만 한다.<br><br>Roman(공화정)은 농업이 국가 경제의 기반이었고, 생산량에 <br>있어서도 입에 풀칠할 정도이었다고&nbsp;하는데 기술은 하나같이 원시적인 <br>수준의 것들뿐이었다. 거의 밑바닥에서 부터 시작한 그들은 자신들 보다 <br>좀 더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강한 적들과 맞붙어 싸워야 할 때가 많았고, <br>명예를 중시하고 미신을 신봉하며... <u>잔인하면서도 타협을 모르던 강인한 자들로</u> <br>때로는 무모할 정도의 용맹성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가장 <br>문명화 된 사회였던 것은 확실한 듯싶다. 설명되었던 것처럼 최고 통치자는 신권, <br>세습 권에 의해 계승되지 않았으며, <span style="COLOR: #ffffff">"군인 출신의 공화정 지도자"</span>들은 "시민의 동의"를 <br>얻어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고 기본적으로 권력은 법의 통제를 받았다고 <br>전해진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까지 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br>권리를 대체로 존중 받았다. 현실적으로 Italy 반도와 지중해를 제패 할 당시 !! <br>군대를 지휘한 사람들은 <span style="COLOR: #ffffff">Fabius(파비우스), <span style="COLOR: #ff0000">Scipio<span style="COLOR: #ffcc00">(스키피오),</span></span> Claudius(클라우디우스)<br></span>가문 같은 <u>명문 귀족의 가문의 후손들이었고</u> 그들은 전쟁이 발생하면 위험으로부터 <br>항상 노출된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병사와 항상 함께 있었고,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br>있었으나 이미 패색이 짙은 전투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으며,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br>않는 강인함을 보였다고 한다. 즉 !! 칼에 맞아 숨통이 끊어진 다음에도 무릎을 꿇지 않아 <br>어쩔 수 없이 밀어서 넘어뜨릴 정도이었다고 하는데 그 강인한 정신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br><br>반면에 Janus(야누스)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br>하였는데 예컨대 Licinius Crassus(리키니우스 크라수스) <br>같은 인물은 온화하고 다정한 남편인 동시에 "노예"를 수 천 명씩 <br>십자가형에 처한 잔혹한 인물이었고 또한 청렴결백하기로 <br>명성을 얻기도 하지만 외국인 혐오와 여성차별이 유독 심했던 <br>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적으로 Roman Army의 최고의 정예 <br>부대원 <span style="COLOR: #ffcc00">"평민계급"</span>이었으며, 이들은 임전무퇴(臨戰無退) 절대 수동적이지 <br>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평민이든지 귀족이든지 Roman People들은 <br>나약함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나약함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br>않았고,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서도 엄격하였으며 커다란 수치감을 가졌다. </p><p>어찌 보면 이러한 오만한 민족이 매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br>그들의 사전에 패배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br>자부심 강했던 이들은 "외 국 인"들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br>Roman Empire가 번영 하게 된 것은 <span style="COLOR: #ffffff">"산적, 노예, 용병"</span>으로 대변되던 최하층에 <br>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리들이 바로 뿌리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화정 <br>말엽에는 피 정복 민과 "노예"들에게도 Roman People과 똑같은 시민권을 <br>부여 하였지만 이러한<u> 포용정책을 포기하는 순간</u> Roman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nbsp;&nbsp;&nbsp;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45fa128ef.jpg" width="500" height="653.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45fa128e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Frank Frazetta Egyptian Queen</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43a3ec41c.jpg" width="500" height="275.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43a3ec41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abylonian Marriage Market</span><br><span style="COLOR: #66ffff">Italy Peninsula</span>에서 도시국가들이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동안 <br>Carthago는 North-Africa에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br>Phoenicia의 전통을 이어받아 상업과 항해에 능했고, Carthago <br>또한 공화국 체제이었으나 부유 계급만의 공화국이라는 <br>색채가 실질적으로 Roman 보다는 강했다. 또한 공통적인 것으로 <br>거대한 노예 인구를 거느린 도시공화국이기도 하였다. 과거에는 <br><span style="COLOR: #ff0000">R</span><span style="COLOR: #ff0000"><span style="COLOR: #ff0000">oman</span>-Carthago</span> 중간에 Greece의 식민지들이 있었지만 양국이 힘을 <br>합쳐 Greece People 들을 몰아낸 뒤부터 급격하게 대립 양상을 <br>보이기 시작하였다. 기본적으로 Carthago<u>는 Sicilia Island를 차지</u>...<br>하였고, Roman은 South Italy를 점유하게 되지만 이미 이들 사이에 <br>Fire Whirl(화제 선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도권은 Roman이 <br>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팽팽한... <br>긴장감 속에서 드디어 맞-짱을 뜨게 되었는데 제1 차 "포에니 전쟁"은 <br>264-241 까지 지속되며, Roman이 승리하였고, 22년 뒤 제2차 "포에니 전쟁"<br>에서 Carthago는 위대한 Hannibal 장군에 의해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대세를 <br>주름잡게&nbsp;된다. 또한 <span style="COLOR: #ff0000">Cannae</span><span style="COLOR: #ffcc00">(칸나에)</span>에서 승리와 동시에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br>이 후&nbsp; Hannibal 장군은 뱃길을 봉쇄한 Roman의 전략적 우위를 극복하지 못했고, <br>결과적으로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본국의 원조 없이 홀로 고군분투(孤軍奮鬪)를 하게 된다. <br>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불구대천(不俱戴天)의 원수 Hannibal에 대한 두려움으로 <br>정면 승부를 거부하고 오로지 보급로를 차단시키는데 집중하였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br><br>이러한 작전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span style="COLOR: #ff0000">Fabius</span><span style="COLOR: #ffcc00">(파비우스)<br></span>로서 집요하게 10년 간 지속한 끈기를 보여줬다. 한마디로 <br><u>만사를 무리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았던 전술로</u> 완만한 충돌을 <br>통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span style="COLOR: #ff0000">19 C</span> United Kingdom에서 <br><span style="COLOR: #ffffff">"사회주의"</span><u>를 신봉하되 돌발적인 변화를 배격하는</u> Fabius Club가 <br>있었는데 그 명칭의 기원이 바로 Hannibal을 당황하게 만든 Fabius이다. <br>Hannibal은 North-Italy를 초토화 시켜 성공한 듯 보이지만 Roman의 <br>완강한 저항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span style="COLOR: #33ff33">Hannibal</span>은 Zama(202, 자마) <br>전투에서 패전하고 쫓기다가 독배를 마시고 사망하게 된다. 그로부터 <br>반세기 동안 양국은 접전 없는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점차로 Carthago는 <br>국운이 다하게 되었고 Roman에 이제는 대적할 최소한의 힘마저 상실하였다. <br>그런데도 Roman은 마지막 강펀치를 날려 Carthago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br>학살을 자행하였다. 이것이 "포에니 3차 전쟁"이며, "지중해의 여왕"이었던 <span style="COLOR: #ff0000">Carthago</span>는 <br>몰락하였다. 이제 지중해에서 Roman을 대적할 상대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으며,<br>이미 !! Greece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정복한 Roman은 Carthago가 보유하고 있던 <br>영토들마저 병합하였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후 Spain도 Roman이 차지하였지만 <br>Roman은 <u>지중해 연안을 지배 하였을 뿐 북부와 중부 유럽에는</u>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br><br>Roman의 승리는 국가에 <span style="COLOR: #ffffff">"부와 사치"</span>를 <br>불러왔다. 영토가 확대되면서 이들의 "부" 또한 <br>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류 최초의 <br><span style="COLOR: #ffffff">"부익부빈익빈"</span>&nbsp; 현상이 가중되고 노예의 수 또한 증가<br>하다보니 사치와 빈곤이 공존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br>분쟁은 첨예화되어 인간의 인내가 역사의 시험대에 서게 <br>되는 일도 무수히 목격하게 되었으며 빈민의 눈을 현혹시키는 <br>다양한 놀이&nbsp;문화가 탄생하고, 마침내 검투사들이 많은 관객 <br>앞에서 목숨을 내걸고 미치광이처럼 칼을 휘둘렀고, 이렇게 <br>죽어나간 <span style="COLOR: #ffcc00">"노예와 전쟁"</span>의 수확물로서 인간은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br>&nbsp; <br>폭동, 학살, 투표권 매수 그&nbsp; 의 부정적 요소들이 <br>당시 Roman의 부정적 요소들을 판단할 수 있게 한다. <br>가난하고 짓밟힌 노예 까지도 <span style="COLOR: #ff0000">Spartacus</span><span style="COLOR: #ffcc00">(스파르타쿠스)</span>라는 <br>검투사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br>무참하게 진압 되어 Roman의 거리에서 십자가(6,000 명)에 매달려 <br>죽어갔다고 전해진다. 한편 상인이나 군인들이 점차로 득세하게 되었고, <br>이제는권력에 있어&nbsp; <span style="COLOR: #ffffff">"원로원"</span>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부터 <br>군인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시작하며, 내란이 발생되며, 국가는 황폐 화<br>되었는데 기원전 53년에 <span style="COLOR: #33ff33">Parthia</span>에서는 Roman Army가 크게 패전하고, 국가의 <br>존립 자체가 위험수위에 근접되어 위기 상황으로 내달렸다. 바로 이때가 <br>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정치 형태로 <span style="COLOR: #ffffff">"삼두 정치"</span>가 <br>본격적으로 점화되며, 삼인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이제 남겨진 것은 오직 <br>한명의 군주가 탄생하는 순간만 존재하게 된 셈이었다.<span style="COLOR: #33ff33">→ Pompeius, Julius Caesar, Crassus<br><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e7b9cdbd.jpg" width="500" height="805.36912751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e7b9cdbd.jpg');" /></div>Firenze Piazza Signoria<br></span></span></p><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184a6a2.jpg" width="500" height="345.4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184a6a2.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reen Salad ...Caesar</span><br><span style="COLOR: #66ffff">Julius Caesar</span>의 업적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는 Gallia &amp;<br>Britain을 평정하였으며, <span style="COLOR: #ffcc00">Pompeius</span> 또한 동방 원정에서 커다란<br>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상황으로 <br>모두 야심가이었고, 적을 용서 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이러...저러 해서<br>Julius Caesar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그 또한 Forum 광장에서<br><span style="COLOR: #33ff33">Brutus</span> 일파의 기습 공격을 받고 피살(44)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라는<br>것이 참 묘하다. 모든 것이 잘 이뤄져 공화정을 지켜낸 듯싶었는데<br>그의 양자이며 조카인 <span style="COLOR: #ff0000">Octavianus</span>와 그의 친구 <span style="COLOR: #ffcc00">Antonius</span>는 Julius Caesar의<br>처참한 죽음의 보상을 받아내며, 왕정을 세우려는 움직임에 탄력을 받게<br>하였다. 여기서 Octavianus가 국가의 원수이기도 한<u> Princeps(프린켑스)</u> 즉 !!<br>Chief(제 1인자) 자리에 오르며 공화정은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원로원"은 형식적으로 <br>유지되었고, Octavianus가 국가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오르며, Augustus- <br>Caesar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 후계자들은 모두 Caesar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br><br>Caesar는 곧 !! 황제를 의미하였고, Deutschland-<br>Kaiser(카이저), Russia-Czar(차르)라는 말도 Caesar에서 <br>유래된 셈이다. Augustus는 스스로 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자칭 <br><span style="COLOR: #ff0000">Imperator</span><span style="COLOR: #ffcc00">(임페라토르)</span> "총 지휘관"이라고 했으며, Imperator라는 <br>의미는 이 시기부터 최고의 칭호가 되었다. 그리고 아예 세계의 Boss<br>(통령)이라는 의미에서 한 시대에는 한사람의 황제 밖에 있을 수 <br>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Roman = Romaka는 "세계의 여왕..."<br><span style="COLOR: #ffffff">Mistress of the World</span>이라고 일컬어지며 서방(서양)에서는 전 세계가 <br>Roman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렇지만 Roman- <br>Empire는 거의 지중해 지역 일대에서만 자리 잡은 Empire로서 동쪽으로 <br>Mesopotamia를 넘본 적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China-India에 좀 더 <br>강대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왕국들이 있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방<br>(서양)에서 Roman Empire는 절대적인 존재이었으며, 세계제국을 의미<br>하는 것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Augustus Caesar 시대에서 부터 <br>유럽 사회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며, 원로원이 파기된 뒤 완전한 <br>전제 군주제를 표방하였다. 또한 황제가 생존에 있을 시... "반신"으로 숭배 <br>대상이었으며, 사후에는 글자 그대로 "신..."이 되었다. <span style="COLOR: #33ff33">→ Augustus = Pax Romana<br></span><br>영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Roman Empire <br>역시 !! 어느덧 최후의 날을 앞두게 되었는데 치명적으로 <br>작용된 것이 거의 Roman Empire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br>"군부의 부패와 무능"에 있었다. 찬란한 Empire를 성립시키는데 <br>커다란 공을 세운 군부가 <span style="COLOR: #ffffff">"양날의 검"</span>이 되어 Empire의 목에 <br>칼을 겨눈 꼴이었다. 더구나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사실은 잔인<br>하면서도 타협을... 모르던 강인한 자들로 때로는 무모할 정도의 용맹성을 <br>보이기도 했던 Roman Army의 기강이 사라져 버린 일이다. 도무지 <br>싸우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군대의 기피현상이 가속화<br>되면서 부족한 인력을 "야만인"으로 치부하던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br>국경지대에 배치하였는데 "고양이에게 생선 물려준 격"이었다. 때문에 <br>야만스런 적국과 내통이 이뤄지며, 국경지대에서는 끊임없이 압박당하는 <br>형국으로 변했으며 이처럼 Roman Empire가 사실상 약화되는 상황에서 <br>야만인 들은 좀 더 강해지고 대담해졌다. 동방으로부터 여전히 위협은 <br>상존하였고, 국경은 멀리 있었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던 현상에 무기력하기만 하였다.&nbsp;<br>.<br>.<br>.<br></p><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61eabc79.jpg" width="500" height="748.1296758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61eabc7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Augustus Octavianu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7cf19391.jpg" width="500" height="247.22222222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7cf19391.jpg');" /></div>Attila ...Huns<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b1ccc578.jpg" width="500" height="626.95924764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906/04/67/d0006967_4a272b1ccc578.jpg');" /></div>The Reichs College of Princes and Counts of The Holy Roman Empire<br></span>.<br>.<br><span style="COLOR: #66ffff">Octavianus&nbsp; Caesar</span> 이 후 300년이 지난 뒤 Constantinus <br>황제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정책을 내놓았는데 수도를 Roma에서 <br>동방으로 옮기기로 했던 것이다. Black Sea와 지중해 사이의 Bosphorus <br>해협 연안 Byzantine 근처에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곳은 이 후 Constantinople<br>이라고 명명되었고, 이곳을 Roman Empire(East-Roman)의 수도로 한 <br>것이다. 현재도 Asia 지방에서는 Constantinople을 <span style="COLOR: #ff0000">"Rum"</span>이라고 부르고 있다. <br>이로써 <span style="COLOR: #33ff33">Gaul = Gallia + Britain</span>과 멀어지게 되었고, 완벽하게 Roman은 <br>동-서로 분할되었다. 참고로 Roman Catholic &amp; Greek Orthodox Church가 <br>분열된 것은 우상 숭배 채택에 관한 것이었으며, Roman Catholic은 성자 상 특히 <br>예수의 모친 <span style="COLOR: #ffffff">"마리아 숭배"</span>를 장려하였으나 정교회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br>또한 Roman은 여러 세대에 걸쳐 북방의 여러 족속들에게 점차로 점령되어 갔지만... <br>그들은 모두 Constantinople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편 Roma Bishop는 <br>권력을 강화하여 마침내 그 위세가 격상되었다. 우상숭배에 관한 분쟁에서 <br>교황은 Roman과 동방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시기 <br>신흥종교 Islam이 창시되어 <span style="COLOR: #ff0000">Maghreb &amp; Spain(Castile)</span>을 접수하고 유럽의 중심부를 뒤흔들게 된다.&nbsp;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14/67/d0006967_4a345e844176a.jpg" width="500" height="615.38461538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14/67/d0006967_4a345e844176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Camel<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14/67/d0006967_4a345efc35211.jpg" width="500" height="665.6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14/67/d0006967_4a345efc35211.jpg');" /></div><span style="COLOR: #ffcc00">Mongol Army</span><br><span style="COLOR: #66ffff">Hun-Turk-Mongolia</span>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여러 <br>민족의 이동한 것은 <span style="COLOR: #ff0000">3-4 C</span> 부터이다. 북유럽, 동유럽에서 <br>넓게 분포 되어 살던 Goths(고트족), Burgundians(부르군트족), <br>Langobard(랑고바르드족), Angle(앵글로), Sachsens(작센족), <br>Franks(프랑크족) 등이 서서히 Roman의 국경 부근에 몰려들었고<br>혼란 이전의 평화가 구축되었다. 이처럼 Roman Empire와 이민족 간의 <br>대립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에 Roman은 지속적으로 변화를 겪었고 <br>이 시기부터 박해를 받던 Christian 들은 황제의 결단에 따라 자유롭게 <br>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고 새로운 Roman의 상징화 작업의 일환으로 <br>Constantinus 황제 자신도 Christian로 개종<span style="COLOR: #ffffff">(313)</span>을 단행하게 된다. 또한 <br>노예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종교에서 점차로 대 가문과 귀족들도 황제의 종교를 <br>갖게 되면서 드디어 Christianity는 Roman Empire의 국교가 되었다. <br>강조 하지만 Empire의 분리(395)는 서서히 진행되었고 그것은 지중해 동쪽에 <br>위치하며 Greek Language를 사용하던 제국과 Latin Alphabet를 사용하던 <br>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됨을 뜻한다. Hun의 영향으로 Germanic People의 이동이 <br>가시화 되었던 것이다. Hun은 유럽대륙 중앙을 차지하고 거대한 "유목민 제국"을 <br>건설하였는데 결국은 이들에 의해 Roman-Germanic 왕국이 생겨났으며, 서쪽 <br>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Hun의 위협을 피하여 서로마 제국으로 이동해 간 여러 <br>민족에 의해 새로운 이름의 왕국 즉 !! Roman-Germanic 왕국들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쯤이다. <br><br><span style="COLOR: #ff0000">Hun</span>과 대접전이 있은 후(대략 40년 후)<span style="COLOR: #ff0000">Theodoric</span><span style="COLOR: #ffcc00">(테오도리크)</span>이<br>Roman의 왕이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Roman(West-Roman)은 종말을 <br>고한 것이다. 훗날 East-Roman의 Justinianus 치세 Italy 반도를 합병하는데<br>성공하고 <span style="COLOR: #33ff33">Sicilia Island</span>마저 정복하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br>그 이유는 당시 East-Roman 또한 Islam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해지면서 <br>힘겨워 했던 것이다. Roman Empire의 종말은 허영과 사치의 결과이기도 하였다.<br>겉만 화려하고 속이 텅 빈 경박했던 문명(West-Roman)은 이처럼 허무하게 멸망되었다.&nbsp; <br>어찌되었든지 <span style="COLOR: #ff0000">6 C</span>에 이르면서 <span style="COLOR: #ff0000">Roman &amp; Constantinople</span>은 시대의 조류에<br>떠밀려 멀리멀리 간극이 벌어졌고, West-Roman은 앞서 설명된 것처럼 북방의<br>Germanic People 들에게 점령되었으며, Constantinople은 허울만 Roman이었을 뿐<br>Greece Empire의 중심지가 된다. 또한 한찬 번성하였을 시기 <span style="COLOR: #ffffff">"야만인"</span>이라고 경멸<br>하던 정복자와 다름없는 문화 수준으로 격감된다. Constantinople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의<br>전통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문화 수준에서 보면 내리막길로 접어들던 시기이었다.<br>그리고 Christianity 종파들의 분열로 시작된 종교적 갈등을 치유하지 못한 채 <span style="COLOR: #ffffff">"암흑기"</span>에 <br>접어들고 만다. 이러한 와중에도 <span style="COLOR: #ffcc00">Christianity</span>는 학문과 예술을 중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br><br><span style="COLOR: #ffffff">"불교의 사원"</span>과 비슷한 수도원들이 다수 건립<br>되면서 그나마 시대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더불어 <br>이러한 수도원 내부에서 조용하게 먼 훗날 갑자기 부상하는 <br>새로운 예술이 싹트게 된다. 만약 !! 이러한 시기 수도사들의 노력이 <br>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nbsp; <br>.<br>.<br>.&nbsp;&nbsp;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6ab7cae.jpg" width="500" height="7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6ab7ca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Fish Meat &amp; Lime<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7ca27e5.jpg" width="500" height="750.6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7ca27e5.jpg');" /></div>Obika Mozzarella<br></span>이렇게 전혀 새로운 <span style="COLOR: #ff0000">Roman-Germanic</span> 왕국들은 지도자가 속한 <br>부족에 따라 명칭이 정해졌고 국가의 명칭과 국경은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br>Germanic People에 의해 세워진 왕국으로서 최초로 세워졌으며, 가장 <br>중요한 의미를 갖는 왕국은 Burgund, Franks, West-Goth 등의 "삼 왕국"이며, <br>그 가운데 West-Goth 왕국은 <span style="COLOR: #ffcc00">Loire River → Spain</span> 남부 지역에 이르기 까지 광대<br>하게 분포 되었고, Langobard은 North Italy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Anglo-<br>Saxon은 현재의 Britain Island에 정착되었으며, 이들에 밀려서 바다를 건너 Bretagne<br>(브르타뉴) 지방에 Celt People이 정착하기도 하였다. 또한 Hun처럼 Asia Steppe <br>지역에서 온 부족이 있었는데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던 Hungarian 들은 초원의 <br>절대 세력 <span style="COLOR: #ff0000">Mongol-Empire</span>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고, 서유럽까지 밀려와 Donau River <br>유역에 정착하게 된다. <span style="COLOR: #33ff33">Charlemagne</span>가 죽고 난 후 결국 Franks 왕국은 왕위를 두고, <br>Carolingian Dynasty 그리고 Rhine River <u>건너편을 통치하였던</u> Robert 가문과 갈등 관계가 되었다. <br><br>여기서 <span style="COLOR: #33ff33">Hugues Capet</span>는 East-Franks 왕국의 왕이 되는데 <br>그는 Charlemagne의 직계손이 아니었지만 주교의 지지로 Franks의 <br>왕으로 축성(987) 받게 되면서 France 시조가 된 왕조로 위치를 잡게 된다. <br>분열된 Franks 왕국은 왕이라는 칭호이외에 여러 가지 호칭을 갖고 있었고... <br>그 가운데 하나가 "신성로마제국"의 왕이라는 호칭이다. 교황에 의해 황제가 된 <br><span style="COLOR: #ff0000">Otto 1세(962-973)</span>는 Charlemagne의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탄생한 <br>제국이 바로 <span style="COLOR: #ff0000">"The Holy Roman Empire<span style="COLOR: #ffcc00">(신성로마제국)</span>" </span>이다. 신성로마제국은 <br>Italy에 속하는 넓은 지역과<u> Provence, Bourgogne, Alsace, Lorrain(로렌),</u> <br>현재의 Netherlands까지 지배하에 둔다. "신성로마제국 너머 동유럽 지역은 여전히 <br>유목민들의 영토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그곳에는 새로운 부족인 <span style="COLOR: #ffcc00">Slav People</span>이 <br>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북쪽에서 이동한 Slav 족은 서로 다른 무리를 이루고 <br>살았는데 사용한 언어도 비슷하였다. 이들이 정착한 땅은 Czech, Slovenia, Croatia, <br>Poland, Russia, Ukraina 등으로 나눌 수 있고 그밖에 Central Asia 출신의 <br>Bulgaria People 들은 "East-Roman Empire" 즉 !! Byzantium Empire의 북쪽에 정착하게 된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ea43c799.jpg" width="500" height="334.67202141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ea43c799.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enezia Woman</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ccae120.jpg" width="500" height="47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ccae12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Gold Ring ...Cleopatra<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d750613.jpg" width="500" height="377.07390648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bd750613.jpg');" /></div><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Turning Point</span><br><span style="COLOR: #66ffff">Currency(주조 및 발행)</span><br>Germanic People의 대이동으로 많은 도시들이 파괴 되기도 <br>하였지만 모든 도시들이 존속되었고, 주교들의 노력으로 도시의 <br>기능은 점차로 회복되었다. 당시 도시는 종교 및 행정의 중심지였을 <br>뿐만 아니라 상업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중세의<span style="COLOR: #33ff33">Champagne</span> <br>같은 "정기 시"는 없었지만 소규모의 정기 시들은 존재하였고, 유통 세는 <br>"화폐"로만 지불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span style="COLOR: #ffcc00">"유통 세, 염세"</span>는 <br>국왕의 수입이 되었는데, 재정적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기에 <br>이러한 국가의 재정 수입(징세)에 관해서는 징세 원을 두고 관리가 이루어졌고 <br>Roman Empire의 "금화"가 여전히 사용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Empire의 <br>경제 단위가 존속하였다는 사실이 이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금 단본위제"에 <br>의해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지만 "은화 단본위제"는 "중세의 화폐제도"라고 할 수 있다. <br><br>Germanic People →&nbsp;Roman Empire의 화폐제도(금 단본위제)<br>Roman Empire → Carolingian Dynasty <br><span style="COLOR: #33ff33"><span style="COLOR: #ffcc00">Solidas(솔리두스, 금화) →</span><span style="COLOR: #66ffff">Triens(트리엔스, 금화) →</span> <span style="COLOR: #ff0000">Denrias(데나리우스, 은화)<br></span></span><br>Roman Empire의 "화폐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은 <br>경제적 필요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br><span style="COLOR: #33ff33">Marseille</span>와 그 인접지역에서 다른 곳보다 오래 지속되었다는 <br>사실에서 알 수 있다. Germanic People들이 지속적으로 <br>금화를 발행하였고, 국왕 혹은 교회, 개인들의 재산 상황에 관한 <br>사료에 <span style="COLOR: #ffcc00">"Gold"</span>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서방에 상당량의 금이 축적<br>되어 있었음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금"이 금광에서만 나온 <br>것이라고 볼 수 없고 당시 활발한 교역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br>증명(재화 유통)되는 것이다. 국왕들은 많은 양의 "금"을 보유하고 <br>있었고 효율적으로 정책을 펼 수 있었는데 그런 막대한 재원은 <span style="COLOR: #ffffff">"정복 <br>전쟁"</span>을 통한 전리품으로 확보되기도 하였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상업 활동을 <br>통해 얻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풍부한 재원과 지속적인 금화 유통에 <br>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세금은 화폐로 지불되고 있었고, <br>그리고 "대부 업"도 성행하였다고 한다. 시대적으로 "이자"는 합법적으로 용인되었던 <br>것으로서 심지어는 교회, 성직자들 세속인들에게 고리를 받고 대부하는 것을 금지하지 <br>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Hebrew들이었다. <span style="COLOR: #33ff33">→ 대부 업 성행, 이자증가</span><br>.<br>.<br>.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21863b0.jpg" width="500" height="594.05940594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21863b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Bedouins ...Arab People<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3d65f5f.jpg" width="500" height="35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3d65f5f.jpg');" /></div><span style="COLOR: #ffcc00">Seljuk Turk...</span><br><span style="COLOR: #33ff33">Islam → Jihad</span> 개념이나 <span style="COLOR: #ffcc00">Christian → Crusade<br></span>개념은 비슷한 유사성을 보인다. 포교를 위한 <br>전쟁에 적극적이었으며, 복종 강요하였다. 전쟁<br>만큼 야만적인 행위는 없지만 인류는 “신의 이름으로...” <br>무수한 전쟁을 해왔고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미화<br>시켜 왔던 것이다. 대략 Islam의 침략 전쟁의 흐름을 파악해 보자 !!<br><br>Syria-Palestine, Jerusalem 함락(638)→Byzantine <br>해군기지 Alexandria 공격(Egypt 병합, 639-640)<br>→Sasan Persia, Babylonia(641)→Cyprus(654)→Rhodes(652) <br>함락→Creta Island(672)→Italy South, Sicilia 공격→<br>North Africa, Cartago 장악(698)→Iberia Peninsula(711)<br>→South France 공격(720-732)→Persia를 통과 한 후 Turkistan <br>돌격하며, Indus River, China 서부 지방 도달(724)→Central Asia <br>사막지대→Black Sea 연안으로 진출→Black Sea-Caspie Sea사이의 <br>Armenia 까지 병합 그리하여 Islam Empire는 Arabia Peninsula, <br>India, Iberia Peninsula, Black Sea-Caspie Sea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br><br><span style="COLOR: #ff0000">Crusade = Seljuk Turk<span style="COLOR: #ffcc00">(원인 제공)</span></span> 참고로 Marmara Sea에 <br>침입한 Islam 함대는 Byzantine을 해상 봉쇄하였다. <br>7년여에 걸친 해상 봉쇄로부터 Byzantine을 구한 것은 <br>Greece Fire이었는데 이로써 Arab의 제해권은 일시에 붕괴된다. <br>Arab People들은 대체로 <span style="COLOR: #ff0000">7-10 C</span> 에 걸쳐 정치, 문화적으로 <br>전무후무한 번영을 이룬다. Osman Turk의 지배를 벗어난 이후 <br>정치, 문화적으로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한 19 C 이 후의 Arab <br>세계를 볼 때 Islam Empire의 비약적 성장의 배경은 그저 흥미로울 뿐이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b9cf806.jpg" width="500" height="651.46579804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b9cf806.jpg');" /></div><span style="COLOR: #ffcc00">Femme De Constantinople<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eda531b.jpg" width="500" height="329.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eda531b.jpg');" /></div>Temple of Jupiter<br></span>고대의 전통적인 가치가 단절되고, 결과적으로 동방 / <br>서방이 최종적으로 분리 되었던 것은 여러가지 이유들이 <br>동시 패션으로...성립되어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게 발생되었는데...&nbsp;<br>그러한&nbsp;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 Islam 세력의 확장과 경제적<br>폐쇄 정책에 따라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lslam 공동체 일부로 형성<br>되었던 <span style="COLOR: #33ff33">Africa, Iberia Peninsula</span>의 경우 Baghdad의 궤도 속에 <br>진입하였고, 지중해적 통일성 종말을 고하는 시점이 되었다.&nbsp;이러한&nbsp;<br>지역에서는 전혀 다른 문화가 출현하게 된다. 이제 지중해는 Islam의 <br>호수가&nbsp;되었으며, 서-지중해는 유럽의 사상과 교역의 통로로써 위치를 상실<br>하였으며, <span style="COLOR: #ffcc00">"서방은 봉쇄" </span>되었다. 따라서 스스로 자생하는 도리밖에 <br>없었는데 이로 인해 역사상 최초로 생활의 축이 북-유럽으로 옮겨졌으며 <br>왕권을 상실한 왕조가 쇠퇴하며, Germanic People적인 새로운 왕조인 <br>Carolingian Dynasty가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위기 의식을 느낀 교황은 East-<br>Roman 황제가 Islam과의 투쟁에서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br>그와 결별하고 새로운 왕조와 "짝짓기"를 시도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질서와 <br>결연을 맺게 되는데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결과가 Charlemagne <br>이후에... 명확해 진다는 점이다. 또한 Roma Church의 봉건성에 지배된 <br>유럽은 지역별로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Middle Ages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br><br>고대의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떠오른 것은 <br>바로 이러한 혼란기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새로운 <br>제국이 건설<span style="COLOR: #ffffff">(800)</span>되고 완성됨으로써, 서방에 새로운 Empire를 <br>탄생시키고, 서방과 동방의 단절을 확정지었다. 이것은 <br>Byzantium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최후의 증거이기도 하다. <br><span style="COLOR: #ff0000">7 C</span> Asia Minor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부 지역은 확대되고 있던<br>Islam Empire로 흡수된다. North Africa를 횡단하여 전역으로 <br>확대 되었는데 성장이 시작되던 첫 번째 세기만에 <span style="COLOR: #33ff33">Morocco</span>에 도달<br>하였고, 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South Spain 까지 이르렀다.<br>동쪽으로는 Islam 공동체가가 Persia, Afghanistan, 그리고 India, China의 <br>서부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더불어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경제는 <br>좀 더 확장된 개념으로 그 역할을 하였으며, 훗날 유럽도 가세하게 되었으며,<br><span style="COLOR: #ff0000">Venezia, Genova, Milano, Firenze</span><span style="COLOR: #ffcc00">(남부 지중해 연안 국가)</span>는 북서 <br>유럽과 중동 체제와 연결시키는 고리로 존재하게 되었다. <span style="COLOR: #ff0000">8 C</span>에 이르면 <br>Charlemagne가 이미 발달된 체제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재편을 시도한다. <br><br>그는 스스로 서방의 황제임을 자임(800)하였고, 교황은 <br>이를 승인한다. 따라서 서유럽은 Roman Empire 붕괴(서로마) <br>이 후에 침체되어 있던 파편적이고 고립된 위치에서 벗어나기 시작<br>하였으며, 점차로 일정부분 발전을 이룬다. 그러나 Charlemagne <br>사후에 다시 제국은 분열되었고, 이민족의 침입을 겪게 되면서 9 C <br>말경에 북서 유럽에서만 초기 봉건제라고 할만한<span style="COLOR: #ffffff">"방위 체제"</span>가 확립되었다. <br>그것은 Roman-Germanic적 선례를 융합시킨 것이다. 이 후 France와 <br>저지대 지역에서 봉건제라고 불리는 사회 형태가 실질적으로 제도화 되게 되었다. <br>또한 <span style="COLOR: #ffcc00">"봉건제"</span>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견고한 기반을 수립하였고,<br>소규모 교역 중심지, 성곽이나 수도원의 보호 구역 내에서 성장하거나 부활하였다. <br><br>이곳에서는 지방 영주들에게 상업상 봉사하는 답례로 <br>특별한 혜택과 보호를 받았던 상인에 의해 상품들이 교환<br>될 수 있었는데 10 C 말에 이르면 유럽은 약탈자들에 의해 <br>혼란을 겪게 되며, <span style="COLOR: #ffffff">West-Viking, East-Hungarian, South-<br>Islam</span>세력이 동시 패션으로 몰려들었고, 하류지역 Normandie <br>지역에 정착하게 되는데 Norman의 경우 Seine River 그렇게 해서 <br>세워진 것이 Normandie 공국이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 Italy <br>Sicilia Island를 점령하기도 하였으며&nbsp;Britain의 경우...&nbsp;Guillaume<br>(기욤)에 의해 점령(1066-1087) 되고, 그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span style="COLOR: #33ff33">→ William 1세 <br></span><br>국제 교역의 소규모 상품 교환 장소 → 육로, 해로가 <br>교차되는 정주지 사실 그때만 해도 도시들은 두려움 속에서 <br>있었지만 이제는 요새화(군사적) 규모의 고립된 영토를 넘어서 <br>팽창할 수 있게 된다. <span style="COLOR: #ff0000">11 C</span> 북서유럽은 자급자족적인 봉건 영지들로 <br>분열되어 있었으나 교환을 위해서 더 많은 잉여 생산품을 생산할 <br>능력을 갖추었고, 더 큰 규모의 통합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수는 <br>급증하였고, 몇몇 도시는 해안까지 내려와 자리 잡게 된다. <span style="COLOR: #33ff33">→ Dark Ages(암흑시대)<br></span>.<br>.<br>.<br><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49bd1edd.jpg" width="500" height="371.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49bd1edd.jpg');" /></div>Carnival of Venice<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4e7cecd6.jpg" width="500" height="366.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4e7cecd6.jpg');" /></div>Francesco Hayez<br></span><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Turning Point<br></span><span style="COLOR: #66ffff">Germanic People</span>이주민들이 놀랄 만큼 빠르게 Romanizacao<br>되었던 시기가 현실화되었던 것은 Latin Alphabet를 사용하던 <br>토착 여성(Roman)들과 결혼에 의해 남성들(Germanic)이 <br>Latin Alphabet를 습득해 가면서 가능해졌다. 즉 !! 농업, 법류, <br>수렵, 전쟁 등에 관련한 Latin Alphabet 어휘들 이외에 일상에서 사용<br>되던 언어의 중심에는 Latin Alphabet가 있었다는 개념이다. 반면에 <br>Islam 침공이 후 지중해 세계에서 초래된 혼란 중 가장 심각한 <br>것은 언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span style="COLOR: #33ff33">Latin Alphabet → Arab Language</span>로 <br>대체되었고, Spain에서 Latin Alphabet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Islam <br>세력에 의해 박탈당하고 만다. 이제 Iberia Peninsula 에서는 더 이상 <br>"학교, 수도원"등이 존재하지 않았고 교양 있는 성직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br>피 정복 민들은 "문어"가 아니라 Romance Languages의 "방언" 만을 사용하였고, <br>정복 이전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던 Latin Alphabet는 사라져 버렸다. 예컨대 <br>Gallia 지방의 혼란 상황은 심각할 정도이었는데 Merovinger Dynasty Latin <br>Alphabet는 조잡스러울 정도로 부정확하였고 당시만 해도 그것이 상용 Latin Alphabet이었다고 한다. <br><br>주교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여전히 <span style="COLOR: #ffffff">Classic Latin Alphabet</span>를 <br>사용하였고 일반적 대중(속인)들은 문맹 화 되어갔다. Roman Empire <br>내에서 어디에 있거나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던 Latin Alphabet는 <br>"문어"인 동시에 "구어"였던 것이다. Latin Alphabet는 특별히 교회에서 <br>사용하였는데 세속인들도 Latin Alphabet를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br><span style="COLOR: #ff0000">8 C</span> 에 이르면 이러한 Latin Alphabet는 혼란 와중에 소멸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br>정치적 무정부 상태 도시와 상업 및 행정조직 그리고 학교의 소멸 등으로 <br>Latin Alphabet 자체의 존속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span style="COLOR: #ffffff">Latin Alphabet</span>는 세속화 되어 <br>각 지방에 따라 다양한 방언들로 변모되었으며,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br>누구도 Latin Alphabet를 사용(800)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러한 <br>시기 Latin Alphabet는 일상어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방언들이 난무하게 <br>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언에 의해 후일 여러 개의 언어체계가 갖추어졌고, <br>수세기를 거치며, Latin Alphabet는 그저 학문적인 언어로써 위치하게 되었다. <br>이것이 "중세"의 특징 중 하나이면서 이러한 현상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시기 <br>부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Britain Anglo-Saxon의 개종이다. <br><br>이것은 Gallia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지중해를 통해 전파된 <br>Christianity에 의한 것이다. <span style="COLOR: #ff0000">Ireland<span style="COLOR: #ffcc00">(Celt)</span></span> 출신 수도사들에 의해 <br>시작된 개종운동을 촉진시킨 것은 Pope Gregorius가 파견한 <br>수도사(596)들에 의해 의해서 이었다. Latin 종교와 문화가 소개되었고, <br>Roma의 영향력 아래 개종되면서 그들은 매력적인 언어를 습득하게 되었다. <br><span style="COLOR: #ff0000">7 C</span> 경 Anglo-Saxon은 그 학식이 전 유럽을 통해 놀라울 정도의 향상을 <br>가져 왔는데 Charlemagne 치세에 일어났던 <span style="COLOR: #ffcc00">"학예 부흥"</span>은 Anglo-Saxon의 <br>수도사들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의 목적은 Merovinger Dynasty Church가 <br>하지 못했던 Christianity을 전파(Germania)하는 것이었으며 이전 목적은 <br>Carolingian Dynasty 정책과도 일치한다. 그 자신 또한 문맹이었던 Charlemagne는 <br>교회를 부흥시키고, 학예를 일으키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이렇듯 그의 노력으로 <br>북-서유럽은 학예 상의 중심지로 정치사상의 중심지로 남방을 대신하게 되었고, <br>지금부터 <u>지중해에서 계승한 문화를 전파시켜 나간 사람들은 북방의</u> <span style="COLOR: #33ff33">Anglo-Saxon</span>이었다. <br>해협을 건너 대륙에서는 일상어이었던 Latin Alphabet가 세속 생활의 필요에 따라 <br>변형된 <span style="COLOR: #ffffff">Latin Alphabet</span>가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학교 등에서 그 시기 통용되었던 Latin <br>Alphabet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Anglo-Saxon은 언어의 개혁자인 동시에 교회의 개척자가 되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Carolingian Dynasty</span>의 Renaissance는 고대 <br>전통의 부활인 동시에 Islam 교도가 지중해 지방을 <br>장악함으로써 초래된 Roman 전통의 단절이기도 하였다. <br>이러한 지적인 움직임은 대체로 문맹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br>발생되어 졌으며, 교육의 부재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조차... <br>귀하게 여기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귀족들조차 Latin Alphabet로 <br>대화가 불가능하였고 읽고, 쓸 줄 몰랐다. 따라서 지중해 <br>연안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들은 북서 지역으로 이동<br>하였고, 이러한 시기(중세)의 <u>세련된 것들은 모두 북-서지역을</u> 통해 이루어졌다. </p><p>.<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fe0a3197.jpg" width="500" height="33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fe0a3197.jpg');" /></div><span style="COLOR: #ffcc00">Lost Kingdoms of the Christian Orient<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f365f3a6.jpg" width="500" height="37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f365f3a6.jpg');" /></div>Poland Wieliczka<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f213d17d.jpg" width="500" height="334.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f213d17d.jpg');" /></div>Sicily Selinunte Temple Hera<br></span><span style="COLOR: #ff0000">Middle Ages</span>&nbsp;"폐쇄 경제"가 나타나기 이전 상당량의 Grain이 <br>여전히 유통되고 있었다. Vandal이 지배하던 Africa는 <br>Grain &amp; Olive의 재배로 여전히 번성하였고 Gallia도 이전과 <br>마찬가지로 경작이 유지되고 있었다. Roman시대 Grape 재배가 <br>이루어졌던 곳에서 지속적으로 재배되고 있었던 상황으로 <br>Roman Empire(동방 / 서방) 가운데 동방의 문명은 서방의 문명<br>보다 뛰어났으며, Byzantine Empire가 중심이 되어 해로를 통해 <br><span style="COLOR: #33ff33">Venezia</span> 및 서방과 교류가 이어졌다. 당시 Syria는 "대상"이 <br>China &amp; Arabia에서 도착하는 곳이었기에 지중해 연안 상업지역 <br>중에서도 가장 활발하였던 곳이다. Syria 선박을 통해서 동방의 향료와 <br>공산품(생필품)들이 수출되었고, 거의 모든 지중해 항구에서 Syria People<br>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내륙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그들이 활동하던 <br>지역은 Damascus, Antioch, Alexandria, Spain(Castilla), France(Gallia), <br>Cartago, Britain, Roman Danube River 주변에서도 정착 하였다고 알려져 왔다.&nbsp; <br><br><span style="COLOR: #66ffff">Syria, Jews, Greece, Phoenicia(Cartago) People <br></span>들은 주로 부유한 자(상인)들로서 엄청난 "부"를 이루고 <br>있었다고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해로를 통해 이동되었고 <br>정착하였다. 특별히 지중해 연안의 섬들과 인접하고 있던 곳에서 <br>상당수의 Jews 들이 분포(Diaspora)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br>것을 파악할 수 있다.<span style="COLOR: #ff0000">Jews</span>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지만 압도적 <br>다수는 해양 산업과&nbsp; "노예 상업"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상업 및 <br>금융업에 기여하였고 유럽사회에서 상당한 Issue를 만들어낸 족속<br>들이라고 할 수 있다. Jews에 해당한 강제 개종, 추방정책과 Council of- <br>Clermont(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Jews 들은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br>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Merovingian Dynasty 시대에는 Hebrew &amp; Christian의 <br>결혼조차 금지시켰고, 연회에 참가할 수 없었던 부당한 규정도 있었다. <br>그리고 Jews들은 Christian 노예를 소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항해는 일반적으로 <br>Bordeaux, Nantes와 같은 작은 항구를 거쳐 Britain을 향하였고, Roman <br>치세에서 활발하였던 Belgium-Utrecht(위트레흐트), Quentovic(캉 토 빅)은 <br>여전히 해운 운송지의 중심지로서 살아남게 되었다. 이곳은 주로<span style="COLOR: #ff0000">Flandre </span>"직물"이 <br>유통되었던 곳으로 Syria, Jews 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해당지역 <br>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러한 시기 상업이 사치품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고가의 <br>사치품들은 주로 동방으로부터 유입되었던 것이며, 모든 것의 중심은 Constantinople에 의해 주도된다. <br><br>주목되는 것은 당시 교역 품 중에는 <br><span style="COLOR: #ff0000">Syria Wine</span><span style="COLOR: #ffcc00">(Gaza)</span>에 대한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br>상당량의 Wine이 유통되고 있었음을 인식시켜주고 <br>있다. 이러한 사실은 교역이 "보석과 의류" 제품에 국한<br>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동방과 교역에서 <br>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span style="COLOR: #33ff33">"Spices"</span>이었다. Roman 시대에는 <br>India, China, Arabia로부터 많은 종류의 Spices가 전해졌고, <br>Germanic People 시대 때에도 여전히 Spices가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br><br><span style="COLOR: #66ffff">일반적으로 유통되었던 것들 →</span> <br>Papyrus, Oil, Pepper, Cumin, Clove, <br>Cinnamon, Herb, Pig, Almond, <br>Date Palm 주목되는 것은 부유하지 <br>않더라도 Pepper는 Salt 만큼이나 필수적인 <br>것으로 여겼으며,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br><br><span style="COLOR: #ff0000">Papyrus</span>의 경우 Pepper처럼 대량으로 소비<br>되던 상품으로 Egypt Empire 전체에 사용되었던 <br>Papyrus를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던 시기이기도하며, <br>당시에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참고적으로 <br>Oil도 상당부분 소비되고 있었는데 Oil은 식용 자체적으로도 <br>흔하게 사용되었지만 Gallia, Spain으로 많은 양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br>Oil은 <u>생산량이 풍부하여 교회의 조명에도</u> 사용되었는데 당시 <br>Oil의 최대 생산지는 Africa이었다. 이러한 상품의 유통은 Islam <br>침공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당연하지만 Africa와 활발한 교역이 <br>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구나 Gallia, Spain에서는 "내륙 교역"에 <br>"낙타"를 이용 하였다는 사실은 그저 흥미로울 따름이다. → Cartago를 통해 유입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ff22b26e.jpg" width="500" height="351.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ff22b26e.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enezia Camauro</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50016e41a.jpg" width="500" height="284.58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50016e41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Venezia Rialto<br></span><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5071c09e6.jpg" width="500" height="41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5071c09e6.jpg');" /></div></span>한편 내륙지방에서는 Syria, Jews 상인들이 <br>동방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한 듯 보이지만 그들은 <br>서방에서 동방으로 상품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br>상품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것은 "노예"이다. <br>5 C 이후에도 가내 "노예 제도"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br>있었고, Germanic People 침략 이 후 노예 제도와 농업 제도는 <br>상식화 되어갔다. 물론 전쟁도 노예의 수를 증가시키는데 일정<br>부분 역할을 해주었는데 이러한 관행에 교회는 성사를 허용하고 혼인할 <br>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노예의 주변 여건을 개선하였지만 원칙적으로 <br>노예제도를 비난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노예는 모든 분야에서 <br>부유한자들을 위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span style="COLOR: #33ff33">→ Marseille, Praha = Slav, Moor<br></span><br>Import → Spices, Silk, Papyrus <br>Export → Salt, Slave, Woven Stuff, Dress, Wood, Dyes<br><br>지중해 지역의 "예술"은 Roman Empire <br>지배하에 Egypt, Persia, Syria의 영향아래 <br>점차 뚜렷해지고 있던 동방 화 과정이 계속되고 <br>있었다. 따라서 서방도 이러한 점진적인 동방 화에 <br>벗어나 있지 않았는데 특히 Goth People은 Russia의 <br>평원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Black Sea를 경유해 그들에게 <br>도달한 동방적인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br>Brooch, Necklace, 금 세공품들은 <span style="COLOR: #ff0000"></span><span style="COLOR: #33ff33">Samaria &amp; Persia</span> 장식 <br>예술품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Roman- <br>People들의 <span style="COLOR: #ff0000">Ars Barbarica</span><span style="COLOR: #ffcc00">(만족의 예술)</span> 이라고 일컫던 예술을 <br>배우게 되었고, 이러한 예술은 Germanic People의 Roman <br>침공이전에도 Empire 내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서방은 Byzantium, <br>Syria, Egypt에서 대규모로 유입된 금 세공품이나 상아 제품들로<br>부터...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6 C-7 C, 8 C에 <br>이르면 점차로 Syria, Byzantium 예술의 흔적들이 확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br><br>Persia 예술의 영향은 Persia Rug의 수입에 <br>의해 지중해 연안에 도입된 것이다. Egypt Copt Art의 <br>영향은 주로 직물과 <span style="COLOR: #ff0000">Alexandria</span>의 상아 제품을 통해 <br>도입되었다. 예컨대 지중해를 경유하여 유입된 동방예술은 <br>역시 <span style="COLOR: #ffffff">"동방적인 만족의 예술과 접목 상호 침투"</span>가 이루어졌던 <br>것이며, 남쪽에서 들어와 예술이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br>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세한 영향을 끼쳤다고 알 수 있다는 <br>사실이다. 이러한 동방의 예술은 France(Gallia), Italy, Africa, <br>Spain의 어디에서나 눈에 띌 정도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br>서방 예술 전체는 Byzantium의 자취가 남겨지게 되었다. 또한 <br>결론적으로 서방의 예술은 Byzantium Art 쪽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br>셈이다. 따라서 지중해는 Constantinople의 "예"를 따르게 된다고 보면 된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3ab5060.jpg" width="500" height="654.30752453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3ab5060.jpg');" /></div><span style="COLOR: #ffcc00">Egypt Art...<br></span><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0f6bccb.jpg" width="500" height="37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e0f6bccb.jpg');" /></div><span style="COLOR: #ffffff">Strait of Gibraltar-Aegean Sea</span>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br>Egypt-Africa 해안, Italy, Gallia, Spain의 연안까지 Roman <br>Empire에 의해 건설된 문명 공동체가 종말을 고하는 징후는 최소한 <br><span style="COLOR: #ff0000">7 C</span>에는 없었다. Germanic People의 침입 이후에도 유럽 세계는 <br>고대 지중해적 성격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모든 활동은 지중해 연안에 <br>집중되어 있었고, 육성되기도 하였다. Muhammad가 출현하기 이전 <br>시기 Roman Empire는 Arabia 반도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막의 <br>유목민에게 대항하여 Syria를 보호하는 성벽을 쌓은 것으로 Syria 장성은 <br>Rhine, Danube River에 이르는 장성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br>지역을 취약 지역으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지도 않았는데 <br>반도의 Bedouin People는 부족 문명 수준에 있었고, 종교도 주상 숭배 <br>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서로 반목하였으며, Roman <br>Empire 입장에서 이들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Muhammad가 <br>새로운 종교를 창시 하였을 때 내부의 혼란 때문에 그의 종교적 활동에 주목하지 않았고, <br><br>그가 사망(632)하고 얼마 뒤 일어날 재앙의 조짐은 <br>예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방위를 강화하는 조치가 <br>취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Germanic People의 위협이 <br>항상 Byzantine 황제의 주목을 받은 반면 Muslim의 침공은 <br>황제로서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Islam의 침공의 성공 요인은 <br><span style="COLOR: #ff0000">Byzantine, Persia Empire</span>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br>양 제국 모두 약화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Europe &amp; <br>Asia의 격변을 초래한 Muslim의 진출은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br>그들의 신속한 승리 획득은 <span style="COLOR: #33ff33">Hun(Attila), Jinghis Khan, Timur Empire</span>가 <br>거둔 승리에 필적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제국들은 Islam Empire에 <br>비하면 단명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Islam의 급속한 확산은 <br>Christianity의 완만한 전파에 비하면 진정한 기적이었다. Muslim들은 <br>무너지고 있던 Byzantine Empire의 핵심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하였으며, <br>이러한 현상은 Islam 침공이 예기치 않았다는 점, Byzantine 군대의 혼란 상황, <br>Syria의 <span style="COLOR: #ffffff">"단성론 자"</span>들과 Nestorius(네스토리우스파) 및 Egypt Copt <br>Church의 Byzantine Church에 대한 종교적, 민족적 불만, Persia Empire의 <br>허약성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Germanic People보다 수가 많던 <br>Arab People들은 정복한 문명 선진국의 주민들에게 동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는데<br><br>그것은 Germanic People은 Christianity에 반대할 <br>이유가 없었지만 Arab People들은 새로운 종교에 의해 <br>고무 되어 있었던 상태로 그들의 동화를 막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br>그 이유는 종교 이외에 다른 분야에서 Arab People들은 피정복 <br>문명에 대해 Germanic People과 마찬가지로 편견을 가지지 않았기 <br>때문이다. 그들은 초기에는 광신적이지도 않았다. 피 정복 민들을 <br>개종시키는 것도 기대하지 않아 보였고, 오직 <span style="COLOR: #ffcc00">"유일신 알라"</span>와 선지자 <br>Muhammad에게 복종할 것만을 요구하였다. 개종이 아니라 복종 정복 이후 <br>그들은 피 정복 민들의 과학, 예술을 받아 들였으며, 자신들이 유용<br>하다고 생각되면 피 정복 민의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br>지배하였다는 점에서 Germanic People과는 달랐다. 피 정복 민들은 그들의 <br>종속 민이었으며, 이들에게만 세금이 부과되었다. 또한 이들은 신자 공동체에서 <br>배제되었고 그 장벽은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피 정복 민과 Arab People들 사이에서는 <br>융합이 가능하지 않았다. Muslim 정복지역에서는<span style="COLOR: #33ff33">Islam→Roman Law, Arab Alphabet→Greek <br></span><br>결과적으로 Islam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가 <br>지중해 유역에 세워졌다. 완벽한 단절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br>단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상이하고 적대적인 문명이 <br>지중해 유역에 존재하며, Christianity 중심의 지중해가 장벽이 <br>되었다. 바로&nbsp; !! 지중해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br>Islam 세력은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려 하였고, Caliph의 함대가<br>Byzantine 해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함대는 Cyprus를 점령하였다. <br>Asia Minor 연안에서 황제가 직접나선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들은 <br>Rhodes Island를 점령하였고, Creta &amp; Sicilia를 공격하게 된다. Cyprus <br>Island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고 나서 Constantinople을 포위하였으며, <br>Constantinople은 해전 용 <span style="COLOR: #ffffff">"액체 화약"</span>을 이용해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br><br><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Battle of Islam</span><br><span style="COLOR: #ff0000">Arles &amp; Avignon</span> 함락 이후 불세출의 인물에 의해 <br>Avignon은 탈환되고, Narbonne에서도 승리하지만 도시를 <br>탈환(739)하지는 못하였다 이어서 Provence 공격이 이어지기도 <br>하지만 Lombards의 도움으로 그들은 격퇴시킨다. 그 후 Provence <br>해안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고, 결국 장악<br>하지만 Pippin 3세가 격퇴시킴으로써 Provence 원정이 종말을... <br>고했는데 적어도 서유럽부터 Islam의 팽창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점이다. <br><br>한편 Muslim은 수차례 Sicilia 원정을 감행하였고, 결국 <br>Palermo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어서 <span style="COLOR: #33ff33">Siracusa → Messina</span>도 <br>함락함으로써 Sicilia는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비잔티움이 <br>Sicilia에서 Muslim과 싸우는 동안 Charlemagne는 Spain 국경에서 Muslim <br>Army과 격정을 벌였으며 그는 Zaragoza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후위 부대<br>마저 궤멸된다. 이후 그는 방어에만 치중하였다. Charlemagne 사망 후 사태는 <br>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로 치닫는데 Italy가 Islam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br>Brindisi, Taranto 등이 약탈(838)에 휩싸였고, Bari 정복(840) 그리고 Byzantine &amp; <br>Venezia 함대는 패배한다, 이 후 Islam 세력의 정복활동이 지겹도록 계속되면서 이 후 <br>서-지중해는 Islam의 호수가 되었다. 함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Franks 제국은 무력하였으며, <br>Napoli와 같은 도시는 상업적 이익을 고려해 Byzantine과 협력하기보다 Islam과 관계를 <br>맺고 있었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Sicilia가 정복당한 것도 Napoli와 같은 도시의 배신 때문이었다.<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9b8e804.jpg" width="500" height="736.1963190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9b8e804.jpg');" /></div><span style="COLOR: #ffcc00">Orthdox Church Temple Saint Sava</span><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a7e9d2a.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cca7e9d2a.jpg');" /></div><span style="COLOR: #ffcc00">Temple Mountain</span><br>.<br>.<br>.<br><embed src="http://cfs12.planet.daum.net/upload_control/pcp_download.php?fhandle=N040SkhAZnMxMi5wbGFuZXQuZGF1bS5uZXQ6LzExOTIzNjEzLzAvNzAuYXN4&amp;filename=70.asx" width="300" height="68" hidden="true" type="application/octet-stream" volume="0" loop="true" showstatusbar="false" autostart="true"></p><br/><br/>tag : <a href="/tag/Byzantine" rel="tag">Byzantine</a>,&nbsp;<a href="/tag/Maghreb" rel="tag">Maghreb</a>,&nbsp;<a href="/tag/Hannibal" rel="tag">Hannibal</a>,&nbsp;<a href="/tag/Cannae" rel="tag">Cannae</a>,&nbsp;<a href="/tag/Fabius" rel="tag">Fabius</a>,&nbsp;<a href="/tag/Octavianus" rel="tag">Octavianus</a>,&nbsp;<a href="/tag/Antonius" rel="tag">Antonius</a>,&nbsp;<a href="/tag/Genova" rel="tag">Genova</a>,&nbsp;<a href="/tag/Venezia" rel="tag">Venezia</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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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2 Jun 2009 03:06:3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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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Mediterranean Sea ...In Genova & Venezia-b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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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COLOR: #ffcc00"><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b9dd98796.jpg" width="500" height="329.1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b9dd98796.jpg');" /></div>Republic Into the Roman Empire<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beef4c086.jpg" width="500" height="370.8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beef4c086.jpg');" /></div></span>.<br>.<br>.<br>지중해가 <span style="COLOR: #ffcc00">Christianity</span>의 수중에 있을 때 동방 / <br>서방의 상업적 교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방<br>으로의 항해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span style="COLOR: #ff0000">Syria, Egypt</span>는 <br>동방 항해의 중심지 이었지만 이곳이 Islam에게 가장 먼저 <br>정복당한다. 그렇지만 그곳의 모든 경제 활동이 종식<br>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당한 혼란이 뒤따랐고, 많은 Syria <br>People 들이 서방으로 이주하였지만 경제 조직은 붕괴되지 않았다.<br>Spices는 여전히 수입되었고, Papyrus도 여전히 제조되었으며, <br>항구에서의 교역은 여전히 활발하였다. 이것은 Arab People들이 <br>Christian 상인들에게 세금을 지불하면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br>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일이다. 따라서 상업 활동은 지속되었다. <br>Islam의 &nbsp;<span style="COLOR: #ffffff">"정복 활동"</span>으로 열린 새로운 Caspie, Baltic Sea를 연결하는... <br>교역로를 중심으로 상업이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시기 Africa는(643-708) <br>지속적인 약탈로 상업 활동이 종식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Islam의 <br>Spain 정복(711)과 그 직 후 Provence 해안에서의 불안하였던 상황으로 <br>서-지중해에서 해상 교역은 거의 가능성마저 상실되어 간다. 동방으로의 항해는 <br>중단(650)되었고 8 C 초기가 되면 완전히 사라진다. Byzantine 해안을 <br>따라 행해지던 교역을 제외하면 더 이상 지중해에서는 어떤 교역도 없었던 셈이다. <br><br>이후 지중해는 <span style="COLOR: #33ff33">Saracen</span>의 해적들에 의해 좌지우지...<br>되는 형편에 놓이게 된다. <span style="COLOR: #ff0000">9 C</span> 그들은 지중해 섬들을 점령<br>하였는데 항구를 파괴하였고, 모든 곳에서 약탈이 지속되었다. <br>그리하여 이전의 동부 지중해(Levant)와 서방 사이에 행해지던 교역의 <br>중심지 Marseille는 텅 비어 있게 된다. 어떻게 서방이 저항할 수 <br>있었겠는가 !! Franks 왕국은 함대를 보유하지 않았고, Visigoth의<br>함대는 파괴되었다. Christian들은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한<br>Islam에 대항하여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었다. <span style="COLOR: #33ff33">→ 서-지중해 폐쇄 = 서유럽<br></span>Syria 혹은 "동방의 상인"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br>사료는 없다. 게다가 Islam 침공 이전에 수입되었던 상품들이 8 C부터 <br>더 이상 Gallia 등지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Papyrus 가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되었고,<br>당시 일부 작품에 쓰여 졌던 것들은 6-7 C의 것들이었다. → 양피지 사용<br>즉 !! Gallia에서 Papyrus 가 사라진 것은 <u>상업이 쇠퇴하고 이어서 사라졌다는 사실에</u> 기인한다.&nbsp;<br><br>Spices는 지중해에서 상업이 재개된 것은 12 C가 되어서야 <br>가능해지게 되었다. Gaza 지방의 Wine도 마찬가지로 Olive Oil <br>또한 더 이상 Africa에서 유입되지 않았다. 당시 사용되었던 Olive Oil는 <br>Provence에서 생산된 것으로&nbsp; Silk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되어서 <br>Charlemagne 조차 소박한 의복을 걸쳤다고 한다. 그의 의복은... <br>Merovingian Dynasty 시대의 국왕들의 화려한 의복에 비하면 대조를 <br>이루는 것이었다. 동방으로 수입이 금지되었거나 어려웠던 상황으로 추정된다. <br>한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은 "Gold"이 점차로 드물어졌다는 사실인데 8 C <br>Merovingian Dynasty에서 이러한 점을 볼 수 있다. 금화는 "은과 합금"되어 <br>주조되었고, "은"의 분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Gold"이 동방으로부터 유입<br>되지 않았기 때문인데<span style="COLOR: #ffffff">"Gallia"</span>의 경우 금화가 드물어져 더 이상 통화로 사용될 수 없었다. <br>따라서 <span style="COLOR: #ff0000">Pippin &amp; Charlemagne</span> 시대에는 은화(Denarius)만 주조되었다는 <br>사실이다. 금화의 "유통은 상업의 결과"이다. 그러한 이유로 상업이 존속되었던 <br>South-Italy에서는 여전히 금화가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span style="COLOR: #33ff33">→ Venezia &amp; Genova<br></span><br>한 가지 특별한 사실은 당시 상업에 종사<br>하던 주요 인물들에 관한 것으로 Islam 상인들이 <br>대체로 지배국 내에서 상업 활동에 전념한 반면에 Syria, <br>Africa, Spain People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Syria <br>People들은 Italy 쪽으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며, 그나마... <br>과거와 같은 빈번한 상업 활동을 지속하였던 사람들은&nbsp;역시 !!&nbsp;<br>Jews&nbsp;들이었다. 이들이 사업으로 살아가던 유일한 계층으로... 분류된다. <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63f1b37c.jpg" width="500" height="668.15144766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6/08/67/d0006967_4a2c463f1b37c.jpg');" /></div><span style="COLOR: #ffcc00">Doge's Palace</span><span style="COLOR: #ffcc00"><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bf4705e21.jpg" width="500" height="337.91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6/06/67/d0006967_4a29bf4705e21.jpg');" /></div>San Marco...<br></span><span style="FONT-SIZE: 130%; COLOR: #cc33cc">Turning Point</span><br><span style="COLOR: #66ffff">양쯔 강(揚子江)</span>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해안 가까운 곳에 <br>Hangzhou(항저우)가 위치한다. 항저우는 South-China을 지배<br>하던 남송(南宋)의 중심지역으로 1268년 당시에는 Mongol People <br>들에게 아직 정복되지 않고 있었다. <span style="COLOR: #ff0000">Venezia</span>와 마찬가지로 항저우도 <br>석호 위에 서 있었고, 무수한 운하에 의해 사방으로 연결되어 <br>있었다. 이곳은 주변지역을 제외하고도 둘레가 160 Km에 이르렀으며, <br>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항저우에는 12개의 커다란 성문이 <br>있었는데 성문 안에 있던 <u>12개의 주거지역은 모두 서방의</u> Venezia <br>보다는 규모면에서 압도하였다. 또한 폭이 60 m에 이르던 간선도로는 <br>도시를 완전하게 관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도로의 매 6.4 km 지점마다<br>커다란 관장이 있었고, 그 양옆에는 주택, 정원, 궁전, 12개의 대규모 <br>동업 조합에 의해 통제되는 직인들의 공방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간선도로와 <br>나란히 커다란 운하가 뻗어 있었고, 그 주변에는 India와의 무역에 종사하던 <br>상인들이 사용하는 창고들이 즐비하였다. 수로양안에는 돌다리로 연결되어 <br>있었는데 도시의 서쪽으로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호수 <span style="COLOR: #33cc00">"시후(西湖)"</span>가 있었다.&nbsp;&nbsp;&nbsp;&nbsp;&nbsp; <br><br>Venezia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항저우 사람들은 이곳에 <br>와서 배를 타고 물놀이를 즐겼다. 정크선(바닥이 편평한 중국의 <br>범선)은 38 km 떨어진 항구에 입항한 뒤에 강을 따라 북상해 도시로 <br>진입하였는데 성의 항구이기도 한 <span style="COLOR: #ff0000">Zayton<span style="COLOR: #ffcc00">(자이톤, 샤먼)</span></span>에 집결한 <br>다수의 선박이 모였다. 해마다 Zayton 항에 들어오는 Pepper의 양은 <br>Levant 지방의 항구를 통해 Christianity 권역에 유입 되는 양의 100 배가 <br>넘었다고 알려졌다. 그곳에는 Indochina &amp; India 제도에서 Spice, Aloe, <br>White Sandalwood(백 단 향), Nutmeg(육 두 구), 감송 향(甘松香), Ebony<br>(흑단)을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는 귀한 재화가 흘러 들어왔다. 이밖에도 <br>Turk-Osman-Musk(사향), Mansi-Silk 꾸러미를 실은 대형 정크 선은 Spice의 <br>냄새를 머금은 미풍을 타고 East-India 제도의 바다를 지나 Ceylon(스리랑카)까지 갔다.&nbsp;<br><br><span style="COLOR: #66ffff">Malabar</span><span style="COLOR: #66ffff">&amp;&nbsp;India </span>남부의 커다란 상업 도시에서 온<br>상인들은 Ceylon에서 자기 화물을 선적하여 Arabia 상인<br>들에게 팔았고, Arabia 상인들은 다시 Levant 항구에서 그것을 <br>Venezia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러한 규모는 유럽인들이 보기에<br>그저 놀라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동방의 전체가 그들의 교역<br>장소가 되었으며,&nbsp;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