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
<?xml-stylesheet href="http://rss.egloos.com/style/blog.xsl" type="text/xsl" media="screen"?>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공간</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link>
	<description>Wondering-Revering-Immersed-Breakthrough</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11 Nov 2009 07:06:12 GMT</pubDate>
	<generator>Egloos</generator>
	<image>
		<title>공간</title>
		<url>http://pds10.egloos.com/logo/200808/29/99/e0053799.jpg</url>
		<link>http://phiinvcen.egloos.com</link>
		<width>80</width>
		<height>60</height>
		<description>Wondering-Revering-Immersed-Breakthrough</description>
	</image>
  	<item>
		<title><![CDATA[ 도대체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745891</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745891</guid>
		<description>
			<![CDATA[ 
  인간 정신의 대상은 무엇인가?<div><br />
</div><div>인간 정신이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div><div><br />
</div><div>정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극히 혼재한다.</div><div><br />
</div><div>막연하고 아득하다.</div><div><br />
</div>			 ]]> 
		</description>
		<category>사색공간</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745891#comments</comments>
		<pubDate>Wed, 11 Nov 2009 07:06:12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Martin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743315</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743315</guid>
		<description>
			<![CDATA[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M.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Lecture 10</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하이데거의 사유의 도정에서 우리가 지나쳐야 할 마지막 길의 이름은 Eon Emmenai, 결국 “being : to be”이다. 우리는 이제야 진정으로 존재의 길로 한 걸음 내딛게 된다. 하이데거는 과연 being, “~으로서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묻는다. 책상부터 나무, 하늘까지 그 모든 것들이 being으로 지칭될 수 있지만, being에 대해서 말하라는 순간 우리는 잠시 ‘그 단어를 둘러싼 냉기’를 느낀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르메니데스가 다른 곳에서 자주 Emmenai로 Eon을 대신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Eon Emmenai를 Eon Eon로 바꾸어보자고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being : being 이라는 동어반복이다. 이 동어반복이 단지 강조를 위한 반복이나 중얼거림이 아니라면, 즉 진정 우리가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라면, being은 하나의 의미를 가지지 않고 적어도 양립할 수 있거나 나란히 쓰일 수 있는 두 개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이 존재의 길을 벗어날 수 있는 징표Sign는 주어졌고 우리는 그것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br />
</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모든 징표Sign는 그 자체로 의미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매개자를 통해서만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문법을 매개자로 하여, being의 의미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being은 분사이고, 분사Participle는 명사적 의미와 동사적 의미, 그 두 의미를 가지고,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그 두 의미는 서로를 지시한다고 한다. 즉 Blossoming의 경우, Something that is blossoming의 명사적 혹은 실체적인 의미와, The act of blossoming 이라는 동사적 혹은 술어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분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br />
</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Rather these words are participles because what they state it always applied to what is in itself twofold. Blossoming in its meaning as a nout designates a being that is blossoming. Blossoming in its meaning as a verb designates "to be in bloom." When the word is used in its nominal meaning, "something blossoming," it is no longer specifically stated that this something is, of course, a being; no more does the word "to be" find expression when the word "blossoming" is used as a verb. What is the upshot of all this?”</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분사의 의미를 검토하면서 하이데거는 일단 분사가 명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그 분사로 지시받는 것은 더 이상 따로 그것이 존재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적한다. 더하여 하이데거는 분사가 동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이 있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그리고 하이데거는 한 번 크게 비약하여 being이란 다른 모든 가능한 분사를 자신 안으로 모으는 분사라고 하면서, being의 두 의미로부터 다른 모든 분사들의 두 의미가 비롯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크게 비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In keeping with that dual nature, a being has its being in Being, and Being persists as the Being of a being." </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잇달은 두 번의 비약으로 하이데거는 길 위에서 우리를 한참 앞서고 있고, 우리는 그가 남긴 자취들에 조금 더 천착해보아야 한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Thus, our current distinction between nouns and action words, substansives and verbs, does not arise from grammar. Nor does it come out of logic textbooks. It comes to light for the first time, deliberately and laboriously, in one of the most profound dialogues Plato has left us, the "Sophist." The Latin term </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font-style:italic;">Participium </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is the translation of the Greek Methoxe. The taking part of something in something is called Methexein. This is fundamental to Plato's thinking. It designates the participation of any given being in that through which it -say, this table- shows its face and form (in Greek, Idea or Eidos) as this being. In this appearance it is in present being, it </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font-style:italic;">is</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According to Plato, the idea constitutes the Being of being. The idea is the face whereby a given something shows its form, looks at us, and thus appears, for instance, as this table. In this form, the thing looks at us. </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 'what is particular being in its Being?' The struggle to answer this unique question determines the fundamental character of the history of philosophy.</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우리는 여기서 하이데거가 남긴 자취들을 모아볼 수 있다. Participle은 라틴어 Participium에서, Participium은 Methoxe로부터 유래하였다. 그 어원으로서 Methexein이란, 어떤 하나의 존재자가 어떤 것에 참여하여, 그로부터 이 존재자로서 얼굴과 형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현상 속에서 그것은 present being 속에 있고, 그것은 있다. 플라톤은 Idea가 존재자의 존재를 이룬다고 보았고, 주어진 사물들은 Idea에 참여하여 현상하고 특정한 사물이 된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being과 Being의 관계는 무엇보다 해석되어야 할 사태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한다, 혹은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 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태이며, 그 사태 자체가 아니라 그 사태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비록 제시된 질문은 What-Question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태 자체일 뿐 사태에 대한 해석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 질문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들이 "그 자신의 존재함 속에서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그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 재구성은 오직 양자의 관계를 통한 해석에서만 올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모든 철학적 문제는 여기에, 즉 존재하는 존재자들에 대한 해석에 달려있다. 사태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며, 플라톤은 이 문제를 개별 사물과 Idea의 관계로 해소하려고 하였다.&nbsp;</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플라톤의 경우를 보다 세밀히 살펴보면 개별 사물들은 Idea에 참여하여 스스로 ‘어떤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자는 존재에 참여하고 존재로부터 얼굴과 형태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얼굴과 형태로 우리에게 어떤 것으로서 드러나고 현상한다. 그리고 그 때에 그것은 present being 속에 있다. 즉 그것은 있다.  </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br />
</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존재는 존재자를 그 속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에게 얼굴과 형태를 준다. 그리고 존재자는 그것들을 보이고, 그 모습으로서 바라본다. 누구에게 보이고 누구를 바라보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에게 드러나는 현상 속에서만 존재자들은 있다. 그리고 그 존재자들은 현상 속에서 언제나 얼굴과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그 얼굴과 형태를 마주한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얼굴을 보고 서로를 알아보듯, 얼굴과 형태는 단지 있을 뿐인 존재자를 바로 그 사물로 만들어준다. 또 우리가 얼굴과 몸짓을 보고 사람을 이해하듯, 우리는 존재자들의 얼굴과 형태를 통해서 존재자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다. 현상이라고 불리는 이 하나의 사건 속에서 인간과 존재자는 만나게 되고, 인간은 존재자의 무엇임과 어떠함을 이해한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그리고 In this appearance it is in present being, it </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font-style:italic;">is</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우리는 여기서 it을 존재자, 즉 being 중 명사적으로 파악된 의미로 이해하고 present being에서 being은 동사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파악된 문장의 의미는 "이 현상 속에서 존재자는 그 현전의 존재하기 속에 있다, 즉 그것은 있다."이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br />
</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present란 현전 혹은 ‘바로 지금, 여기에’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현상 속에서 자신의 얼굴과 형태를 드러낸 존재자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즉 그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여기서 얼굴과 형태가 존재자 그 자체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존재에 참여하여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것은 있다. 즉 ‘it is’의 의미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it is란 존재자가 현상 속에서 인간을 마주하여 얼굴과 형태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단정적으로, 독립적으로, 필연적으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있음의 사태 자체에는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이 있다’는 규정은 의미를 넘어 사태 자체를 지시하게 된다. 더하여 그것은 present, 즉 현전하는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br />
</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결국 존재자는 존재를 통하여 자신의 얼굴과 형태를 얻어 현상하고, 인간은 존재자의 드러남을 통하여 그들을 이해하지만, 이 드러남과 이해가 교차하는 순간 존재자는 자신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그렇지만 여기서 애초에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밝히려던 시도가 마치 자신의 길에서부터 멀어져 존재자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기된 사태를 뒤집어 언급할 필요가 있다. </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존재자는 어떤 존재자로서 나타나서 자신의 의미로부터 인간에게 현상한다. 그러나 현상하지 않는 존재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어떤 것으로 드러난다거나, 인간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는 무의미의 존재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게 어떤 것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인간으로부터 의미도 부여받을 수 없으므로, 얼굴과 형태를 가지지 않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얼굴과 형태는 존재자가 존재에 참여하여 존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므로, 현상하지 않는 존재는 결국 존재에 참여하지 않는 존재자이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인간, 존재자, 존재의 관계는 여기에서 불명확하게나마 간취할 수 있다: 존재자는 존재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간에게 현상하고, 결국 있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우선 being이라는 분사가 가지는 의미의 이중성(명사적, 동사적 의미)는 Methexis를 통해 존재와 존재자(존재 속의 존재자)의 이중성으로 변형되었다. 일견 명백한 사실은 ‘존재에 있어서 파악된 존재자’라는 것은 ‘동사적 의미의 있기로부터 조망된 명사적 의미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마지막 강의에서 제시한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nbsp;  <o:p></o:p></p>			 ]]> 
		</description>
		<category>-/책과 생각</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743315#comments</comments>
		<pubDate>Mon, 09 Nov 2009 06:07:04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The Way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726489</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726489</guid>
		<description>
			<![CDATA[ 
  길, 길이 다르다.<div><br />
</div><div><br />
<div><br />
</div><div>생각하기는</div><div><br />
</div><div>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는 것일 필요도,</div><div><br />
</div><div>모든 것을 한 손에 움켜쥐는 것일 필요도 없다.</div><div><br />
</div><div><br />
</div><div>다만 생각하기는</div><div><br />
</div><div>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고,</div><div><br />
</div><div>모든 것을 아울러,</div><div><br />
</div><div>대지의 공명을 하늘로 보내는 일이다.</div><div><br />
</div><div><br />
</div><div>길, 길이 다르다.</div><div><br />
</div><div>노심초사 할 것 없다.</div></div>			 ]]> 
		</description>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726489#comments</comments>
		<pubDate>Mon, 26 Oct 2009 11:19:28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태도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711884</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711884</guid>
		<description>
			<![CDATA[ 
  입다물고 성실하게 사뿐사뿐<div><br />
</div><div><br />
</div><div><br />
</div><div>인정할수밖에 없게 한다.</div><div><br />
</div><div><br />
</div><div><br />
</div>			 ]]> 
		</description>
		<category>-/삶의조각,감정</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711884#comments</comments>
		<pubDate>Sun, 18 Oct 2009 15:46:28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legein, noein, transition to the Eon Emmenai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549465</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549465</guid>
		<description>
			<![CDATA[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nbsp;하이데거는 &lt;What is Called Thinking?&gt;의 제2부 제9강에서 Legein과 Noein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서양철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하면서 최종적인 문제의 종착지로 Being과 being을 언급하고 있다.</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우선 이 강의에서 가장 먼저 논해지는 것들은 앞서 legein과 noein의 의미를 각각 Letting-lie-before-us 와 Taking-to-heart로 제시하면서, 이렇게 번역하는 경우 우리가 간취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간략하게 네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1) "Letting things lie before us is necessary to supply us with what, lying thus before us, can be taken to heart. … Rather, Legein also surpasses Noein, in that it once again gathers, and keeps, and safeguards in the gathering, whatever Noein takes to heart; for Legein, being a laying, is also legere, that is, reading."</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한편으로는 이 말은 매우 명확하게 보이나 Legein이 Noein을 넘어서는 이유가 Legein이 Reading(읽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Legein - Legere - Reading으로 가는 계열에서 가장 핵심적인 Gathering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모으기”이다. 하이데거가 뒤에서 설명하고 있듯, 우리는 그렇게 말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서 그것들의 의미를 형성하고 그렇게 우리 앞에 놓는다. 사물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2) "Thus Legein and Noein are coordinated not only in series, first Legein then Noein, but each enters into the other. Legein, the letting-lie-before-us, unfolds of its own accord into the Noein. What we are talking about here is anything but leaving something where it lies while we pass by indifferently. … Legein is tacitly disposed to Noein."</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By taking to heart and mind, we gather and focus ourselves on what lies before us, and gather what we have taken to heart. Whence do we gather it? Where else but to itself, so that it may become manifest such as it of itself lies before us."</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위에서 설명한 Gathering의 의미는 인용된 첫 문단에서 보다 명확하게 이해된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동안 사물을 자신이 놓인 곳에 내버려두는 것”외의 모든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을 모은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것들은 의미를 형성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 속으로 가져가서 사물들은 자신을 &lt;우리 앞에 놓여있는&gt; 그대로 분명해진다.</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3) “The saying does not presuppose what is called thinking, but first indicates the fundamental traits of what subsequently defines itself as thinking. … Legein and Noein, both by virtue of their conjunction, achieve what later, and only for a short time, is specifically called Aletheia : to disclose and keep disclosed what is unconcealed.</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The veiled nature of Legein and Noein lies in this, that they correspond to the unconcealed and its unconcealedness.</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 The conjunction of Legein and Noein, however, is such that it does not rest upon itself. Letting-lie-before-us and taking-to-heart in themselves point toward something that touches and only thereby fully defines them. Therefore, the essential nature of thinking cannot be adequately defined either by legein, taken alone, or by noein, taken alone, or again by both together taken as a conjunction." </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Legein과 Noein은 모두 “드러남과 드러난 것의 드러난 채로 있음”에 상응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하기의 본질을 각각에게 혹은 둘의 결합으로부터 사유를 규정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Legein과 Noein이 “놓기와 가져가기”라면 도대체 “무엇을?”이라고 묻고 있고, 그것이 “드러남”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며, 이것을 통해 Legein과 Noein의 결합과 생각의 본성을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 “드러남”을 지시하는 것이 바로 "Eon Emmenai"이다.  </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에서 Legein과 Noein이 어떻게 develop, 즉 전개되어 발전되어 왔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그에 따르면 생각하기는 명제의 의미에서 Logos의 Legein을 가지고, 이성에 의한 이해라는 의미에서 Legein을 가진다. 그리고 로마시대로 오면서 이 둘은 Ratio로 합쳐지는데, 그곳에서 생각은 Rational한 것으로 여겨진다. “Ratio comes from the verb reor. Reor means to take something for something―Noein and this is at the same time to state something as something―Legein." 여기서 Ratio는 Reason이 되고, 이성은 논리가 된다.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논리와 변증법을 통하여 순수이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하이데거는 이러한 생각하기를 Ratio로부터 규정하는 경우에 그 본래적 의미로서 Legein과 Noein의 의미가 모호해진다고 하면서, 바로 이런 모호함 속에서 성장한 것이 계몽주의 철학이며 따라서 그 속에서는 ‘의심’을 생각하기의 기초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즉 생각하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론적 조건을 도외시하고 생각하기를 주체의 주관적 활동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인간이 의심하게 되고, 흩어져버린 것 속에서 붙잡을 것(Begriff, concept, grasping, Apprehension)을 찾게 되며, 그렇게 다시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System에 의존하게 된 것, 그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근대철학이다. "This reassuring combination is the system. The systematic and system-building way of forming ideas through concepts takes control."   </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결국 우리는 먼 길을 왔고, 그 속에서 생각하기는 자신의 탄생과 멀어졌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생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각하기의 본질적 속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도대체 생각하기는 무엇 때문에 그러한 길을 갔는가, 그 무엇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그는 비개념적으로 사유했던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으로 자신의 답변과 물음을 한꺼번에 대신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Thinking keeps to its way of thinking. It is the way toward what is worthy of questioning, problematical. What particular beings in their Being might be, still remains an everlasting question even for Aristotle. ……</span></p><p class="바탕글">  &nbsp;  <o:p></o:p></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And so it remains something to be looked for, from of old and now and forever, and thus something that offers no way out: what is being." "&nbsp;</span></p>			 ]]> 
		</description>
		<category>-/책과 생각</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549465#comments</comments>
		<pubDate>Thu, 08 Oct 2009 05:00:16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Martin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II. <noein>의 의미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496447</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496447</guid>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 left;">&nbsp;" "Perceive" here means the same thing as receive. &lt;Noein&gt; so translated--to use Kantian distinction for the sake of convenience--is pointing toward perception in the sense of receptivity, as distinguished from the spontaneity with which we assume this or that attitude toward what we perceive. In receptive perception we remain passive, without the active attitude to what is perceived. But such passive acceptance is precisely what &lt;noein&gt; does <i>not</i> mean. This is why, in lectures I gave years ago, I insisted that &lt;noein&gt;, as perceiving, included also the active trait of undertaking something.</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nbsp;In &lt;noein&gt;, what is perceived concerns us in such a way that we take it up specifically, and do something with it. But where do we take what is to be perceived? How do we take it up? We take it to heart. What is taken to heart, however, is left to be exactly as it is. This taking-to-heart does not make over what is takes. Taking to heart is : to keep at heart. "</div><div style="text-align: left;"><br />
</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노에인의 의미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매우 단적인 규정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lt;legein&gt;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legein이 "존재론적 만남"의 사태를 Lay 와 Lie의 시차를 통해 은유적으로 제시하였다면, 노에인의 의미에는 이 사태를 대하는 현존재로서 인간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nbsp;</div><div style="text-align: left;"><br />
</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하이데거에 따르면, 노에인의 영역은, 칸트적 의미의 지각, 즉 우리가 단지 수동적으로 남을 뿐인 수용성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우리의 마음 속으로 데려고 그 속에서 유지하고 보존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자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이 강의의 보충에서 한 언급을 제시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div><div style="text-align: left;"><br />
</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Authentic divination is the mode in which essentials come to use and so come to mind, in order that we may keep them in mind. This kind of divination is not the outer court before the gates of knowledge. It is the great hall where everything that can be known is kept, concealed."</div><div style="text-align: left;"><br />
</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noein"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자들을 마주한 사태 속에서, 존재자들을 마음 속으로 데려와 모든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본질을 담고 그 속에 숨기는 것이다. 이 넓은 방 속에서는 모든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이 보존되고, "숨겨진다." 하이데거는 대상의 본질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존재의 모호함 혹은 끝을 알 수 없는 존재의 심원함"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란 끊임없이 추동되지만 그로써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통해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존재자들에 대한 판단이 끊임없이 유보되는 채로 그것들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도저히 존재자들을 마음 밖으로 내어놓을 수 없는 현존재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nbsp;</div><div style="text-align: left;"><br />
</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div><div style="text-align: left;">"The thing that matters when we lay something, the thing by which laying comes to be laying, is this: what must be laid &nbsp;lies there, and henceforth belongs to what already lies before us. And what lies there before us is primary, especially when it lies there before all the laying and setting that are man's work, when it lies there prior to all that man lays out, lays down, or lays in ruin."</div><div style="text-align: left;"><br />
</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Laying, thought as a letting-lie in the widest sense, relates to what in the widest sense lies before us, and speaks without a sound : there is."</div><div style="text-align: left;"><br />
</div><div style="text-align: left;">&nbsp;</div>			 ]]> 
		</description>
		<category>-/책과 생각</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496447#comments</comments>
		<pubDate>Thu, 24 Sep 2009 01:06:33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Etude : Heideggerian Allegory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495662</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495662</guid>
		<description>
			<![CDATA[ 
  &nbsp;여름날 뜨겁던 태양의 열기가 지나고 하늘의 푸른 빛이 한결 깊어지면서 지상의 나무들은 마치 이제야 자신이 태양의 자손인 것을 알았다는 듯, 잎의 끝자락부터 노랗게,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태양의 강렬함의 한가운데를 지나, 그보다 한 발 늦게, 저 하늘보다 낮은 곳에서 나무들은 저 천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절정을 맛보려 하고 있다. 그들은 곧 여름날의 태양 같이 둥글고 농익은 자신의 완성을 하나, 둘 품기 시작할 것이고, 이제 동물들은 다시 저 하늘의 태양을 볼 날을 기다리며, 지상에 주어진 그 천상의 대리자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살아갈 것이다. 곧 다가올 시간동안 멀어져갈 저 태양을 직접 마주볼 수 있는, 또한 직접 다룰 수 있는 지상의 물질로 붙잡는 삶의 방책으로서 이 태양의 대리자인 열매는 한 해 동안 이 나무가 맺을 수 있는 모든 결실과 그 자신까지도 그 속에 씨앗으로, 즉 가능성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실로 상실과 수확이 교차되는 바로 이 시점에 우리는 하나의 매듭이 지어지는 지점을 목도하면서 지나간 것들과 다가올 것들을 생각하며 삶을 마련하게 된다.<div><br />
</div><div>&nbsp;모든 것들이 그 생장력으로 충만하여 하늘과 땅이 모두 뜨거운 여름의 한복판에서,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 생각하는 자 역시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 성장과 활동의 시간을 침잠하여 보낸다는 것은 어쩌면 순리에 어긋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시간은 항상 순행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은 오직 결과에서 원인으로 역행하며, 이렇게 역행한 이후에라야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결과를 마주하지 않으면 도저히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혹은 대상을 주어진대로 묘사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가 계절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고, 생각하기의 근원적인 특성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우리들이 목적론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은 아닐까? 생각하기에 있어서는 끝이 시작처럼, 시작이 끝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div><div><br />
</div><div>&nbsp;그러나 목적론이야 어찌되었든 태양의 열기를 머금은 저 단풍잎들은 가을에 익어 그 끝자락에는 바닥으로 떨어져 이 대지로 들어가 다시금 추위와 얼음을 견디는 온기와 양분이 되어주며, 그렇게 그가 한 해간 체화한 태양의 빛줄기와 온기는 그 살아있는 나무를 보다 높고 깊고 넓게 만들어줄 것이고, 결국 그 나무는 다시금 깨어남, 성장, 완성, 몰락을 동시에 그리고 순차적으로 거듭 또 거듭하면서 한 그루의 나무로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의 한 절기의 목표로서 열매란 한 해의 지나감에서 보면 완성으로 보이면서도 전체에서는 최상의 자기목적성에 가닿아야 할 일순간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나무는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게 될 때까지 최상의 것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을 체화하면서 높게, 깊게, 넓게 되어갈 것이다. 그렇게 나무는 더 깊은 대지와 더 높은 하늘과 자신의 옆에 놓인 자신의 동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div><div><br />
</div><div>&nbsp;어쩌면 최상의 질서라고 일컬어질 무엇인가와 최하의 미물들은 실로 일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 자기동일성, 자기목적성, 그리하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무엇인가는 여기 있는 것들 전부들인지도 모른다. 미물이 없다면 최상의 질서가 어디 있겠으며, 최상의 질서가 없다면 도대체 티끌 하나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각하기는 어쩌면 "의견을 막아서는(paradox) 이 문제" 안에서 그것을 해결할 어떤 수단도 없이(aporia) 단지 수없이 많은 근원적 사태를 표현하는 allegory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삶 자체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하염없이 살아야만 한다.</div>			 ]]> 
		</description>
		<category>사색공간</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495662#comments</comments>
		<pubDate>Wed, 23 Sep 2009 05:10:48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Martin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II. <legein>의 의미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495370</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495370</guid>
		<description>
			<![CDATA[ 
  &nbsp;하이데거는 "legein"의 사전적 의미가 "To State"임을 언급하면서 과연 "to state"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를 묻는다. "To state"는 일반적으로 "진술하다"라는 의미로 언어적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서 "진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진술한다면 우리는 이런저런 표상들을 통해 그것을 제시, 즉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들을 우리 앞에 내려놓는 것(to lay)이다. 하이데거는 이 "내려놓기"를 통하여 근대의 초월론적 주체의 인식을 중심으로 하는 주체-대상의 인식론적 도식에서 경시되어 왔던 대상의 존재론적 의미와 존재론적 만남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한다.<div><br />
</div><div>&nbsp;"When we lay something down or out, we make it lie. Then it lies before us. But something may lie before us also without our first coming on the scene to lay it down. ...... Only a minute fraction of what lies before us in this way has been laid down by man, and even then only with the aid of what was lying there before."</div><div><br />
</div><div>&nbsp;"Laying, "Legein", concerns what lies there. To lay is to let lie before us. When we say something about something, we make it appear. This making-to-appear and letting-lie-before us is, in Greek thought, the essence of 'legein' and 'logos'."</div><div><br />
</div><div>&nbsp;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사태를 기술하는 다른 동사들로서 타동사 lay와 자동사 lie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다시 한번 관점교환의 변증법 혹은 은유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자는 그 자신의 입장에서 그곳에 그렇게 놓여있다. 그러나 그것이 거기에 그렇게 있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그곳에, 즉 우리 앞에, 있게끔 놓는다. 마치 고개를 돌렸을 때 바로 그곳에 있는 사람과 마주하게 되고, 진정으로 서로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놓고 놓인다. 즉 존재자와 현존재의 만남, 이 존재론적 만남의 사건을 통해 마주한 양자는 서로 앞에 놓이고 놓음으로써 서로에게 드러나고, 그것이 바로 현상이라는 사태이다.</div><div><br />
</div><div>&nbsp;여기서는 "주체"와 "대상"의 대립과&nbsp;Idea-forming Subject를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활동으로서 인식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하지만, 오히려 하나의 사태, 즉 있는 것들의 만남만이 있다. 존재자는 놓여있는 것이자 그곳에 놓인 것으로, 현존재는 놓는 것이자 놓여있는 것을 마주친 자가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감각과 지성이 아니라, 이 사태를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이다.&nbsp;</div><div><br />
</div><div>&nbsp;그런데 하이데거는 바로 이 만남의 사태가, 유용Useful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용함Usefulness이 죽는 자로서 인간이 살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라면, 도대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 관점에서 대상을 그 곳에 놓고(lay) 그것을 사용(use)하여 거주(inhabitation)의 수단(measure)을 마련하고, 순수한 것(the pure)과 조야한 날 것(the crude)를 매개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아직 추측에 불과하다. 곧 밝혀질 noein의 의미와 관련할 때에만, 우리는 이 사태를 부족하나마 기술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이는 뒤로 미룬다.</div><div><br />
</div><div>&nbsp;더하여 legein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사 속에서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 왔는지를 밝히는 의미있는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div><div><br />
</div><div>&nbsp;1. Thesis, Hypothesis와 존재자들의 근원적 장소성(상황)</div><div><br />
</div><div>"The Greek word &lt;Thesis&gt;, accordingly, does not mean primarily the act of setting up, instating, but that which is set up; that which has set itself up, has settled, and as such lie before us. &lt;Thesis&gt; is the situation in which a thing is lying. ...... For example, when Plato speaks of &lt;Hypothesis,&gt; at the end of the sixth book of The Republic where he describes the method of mathematics, &lt;Thesis&gt; means neither hypothesis(assumption) in the modern sense, nor does it means a "mere suppostion"; rather the &lt;hypothesis&gt; is the underlying foundation, the situation of the foundation, that which is already given to and lies before the mathmaticians : the odd, the even, the shapes, the angles. These things that lies already before us, our models, the &lt;hypothesis&gt;, are described as &lt;hos paneda&gt;: as what is evident to everybody - the things we let be.</div><div>&nbsp;These things that lie already before us are not, however, what lies farther back in the sense of being remote. They are supremely close by to everything. They are what come close by, beforehand. But normally we fail to see them in their presence."</div><div><br />
</div><div><br />
</div><div>&nbsp;2. Logos와 Language</div><div><br />
</div><div>"The essential nature of stating is not determined by the phonetic character of words as signs. The essential nature of language is illumined by the relatedness of what lies there before us to this letting-lie-before-us."</div><div><br />
</div><div>&nbsp;- 언어의 본질은 바로 이 언어를 통해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우리 앞에 놓일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다.</div><div>&nbsp;</div><div>&nbsp;3. Krinein</div><div><br />
</div><div>"What is demanded here is not the nimble tongue chattering away of all and everything, but a &lt;legein&gt; of the &lt;logos&gt;, and only through these &lt;krinein&gt;: to discriminate one thing from another, to bring out one thing and put another into the background. This is the crisis that constitutes criticism."</div>			 ]]> 
		</description>
		<category>-/책과 생각</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495370#comments</comments>
		<pubDate>Tue, 22 Sep 2009 17:44:18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과학철학 과제1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495342</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495342</guid>
		<description>
			<![CDATA[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nbsp;김 동우, 2007110220</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확증의 논리적 조건들을 밝혀내려는 이 논문에서 헴펠은 Nicod의 기준에 기초하되, 거기서 나타난 형식과 내용의 모순에 의해 발생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동치조건을 도입하는데, 여기서 “까마귀의 역설”이 나타난다. 헴펠은 이 까마귀의 역설이 논리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해에 근거한 외관상의 역설일 뿐이기에 주어진 자료들로부터 정확히 판단이 이루어진다면 이 역설은 극복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달리 말해 헴펠은 까마귀의 역설이 사실상 역설이 아니며, 이것은 우리의 논증 속에 이미 실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외의 다른 요소들이 개입하여 판단이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하에서 이것을 보다 상세히 살펴본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우선 과학에서 가설의 일반형식은 보편조건문, 즉 "(x)(P(x)⊃Q(x))"의 형식인데, Nicod의 확증기준은 이 명제의 전건과 후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증거가 이를 확증해준다는 것이다. 더하여 헴펠의 동치조건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가설의 동치로서 대우명제 "(x)(~Q(x)⊃~P(x))"의 전건과 후건을 만족시키는 증거가 대우명제를 확증하는바 그와 동치관계인 원명제 또한 확증한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까마귀의 역설이 나타나는데,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이 있다면 그 가설과 동치에 있는 “검지 않다면 까마귀가 아니다”라는 가설 또한 타당하게 성립하고 더하여 동치조건을 통해 후자의 확증을 통해서도, 즉 검지 않고 까마귀가 아닌 모든 대상을 통하여 전자가 확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자의 전건과 후건을 모두 만족하는 대상, 즉 검지도 않고 까마귀도 아닌 갈색 책상, 파란 연필 등의 대상을 통해서도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마치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의 확증에 부적절하거나 중립적인 자료들로부터 확증이 가능하다는 것은 일견 당연히 역설처럼 느껴지나, 헴펠에 따르면 이는 단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논증의 절차 속에 개입시키는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즉 우리는 이미 갈색 책상 혹은 파란 연필 따위의 검지도 않고 “까마귀도 아닌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을 판단에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대상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즉 어떤 것 X가 있는데 이 X가 검지 않고 게다가 까마귀도 아닌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면 X는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확증하는 증거의 구성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소금은 노랗게 탄다”는 가설의 동치인 “노랗게 타지 않으면 소금이 아니다”는 가설이 있다면, 어떤 대상 X가 노랗게 타지 않았는데 그것이 알고 보니 소금도 아닌 경우 이는 모든 소금을 노랗게 탄다는 것을 확증해줄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다. 즉, 까마귀의 역설이 역설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는 이미 책상과 펜 따위가 까마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로 이 선행지식이 어떻게든 확증절차에 개입하였기 때문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바탕;"> 이 탁월한 논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의문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확증하든 그 대우명제를 확증하든 어쨌든 우리는 까마귀가 무엇인지를 판단할 기준, 즉 까마귀의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제시된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은 까마귀에 “검다”는 속성을 적극적으로 부여하여 까마귀에 대한 정의를 형성하는 하나의 계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자신의 확증을 위해 스스로를 원용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메타정의, 이를테면 DNA구조 등에 의해서만 판단되는 처지에 놓인다. 그렇다면 어떤 가설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이 가설에, 이 가설의 확증을 위해서는 저 가설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여기서 과학은 언제까지고 유보되는 가설들의 체계이자 무한연쇄로 드러나게 되며, 그것을 끝맺는 매듭가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확증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만일, 그러한 매듭가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경험적으로 확증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확증적인 어떤 것일까, 아니면 믿어지는 어떤 것일까?&nbsp;</span></p>			 ]]> 
		</description>
		<category>사색공간</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495342#comments</comments>
		<pubDate>Tue, 22 Sep 2009 17:01:00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Martin Heidegger, <What is Called Thinking?> 18, I. Useful의 의미 ]]> </title>
		<link>http://phiinvcen.egloos.com/2494397</link>
		<guid>http://phiinvcen.egloos.com/2494397</guid>
		<description>
			<![CDATA[ 
  Part II, Chapter VII<div><br />
</div><div>&nbsp;이 절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What is Called Thinking?"이라는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매우 적극적인 규정들을 제시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적극적 규정들을 통하여 하이데거는 "생각하기"가 가지는 위상을 완벽하게 변화시키기 위한 선결과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문제는 "생각하기"의 위상이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가는가이며, 나는 지금부터 이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div><div><br />
</div><div>&nbsp;8절의 전개는 크게 세 갈래으로 나뉘며, 그 첫째는 Useful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둘째는 레게인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고, 셋째는 노에인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 순서에 따라 논의를 진행하도록 한다.</div><div><br />
</div><div><br />
</div><div>I. Useful의 의미</div><div>&nbsp;</div><div>&nbsp;하이데거는 7장에서 횔덜린의 시를 제시하면서 Useful의 의미를 넌지시 제시한다.</div><div><br />
</div><div>&nbsp;"It is useful for the rock to have shafts,</div><div>&nbsp;&nbsp;And for the earth, furrows,</div><div>&nbsp;&nbsp;It would be without welcome, without stay."</div><div><br />
</div><div>&nbsp;그리고 하이데거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div><div><br />
</div><div>&nbsp;" 'It is useful' says here : there is an essential community between rock and shaft, between furrow and earth, <i>within</i>&nbsp;that realm of being which opens when the earth becomes a habitation. The home and dwelling of mortals becomes a habitation. ...... But its situation is not determined by the pathless places on earth. It is marked out and opened by something of another order. From there, the dwelling of mortals receives its measure. "</div><div><br />
</div><div>&nbsp;여기서 Useful, 즉 유용하다는 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유용하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답은 다음과 같다. "누구에게?"--"Mortals죽는 자들" "무엇을 위해?"--"Inhabitation거주" 그런데 여기서 유용하다는 것은 "오직 그것들이 있어야만" 죽는 자들의 거주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해석을 하는 한에서 우리는 유용함을 필요함으로 새겨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우리가 "길"을 대지에 물을 흐르게 하고 곡식이 자라날 수 있는 고랑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한에서 거주지 혹은 거주의 상황은 "길"이 없는 장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길'은 땅 그 자체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질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길"이 만들어진 그곳에서만 죽는 자들의 거주가 가능하다.</div><div><br />
</div><div>&nbsp;일단 하이데거에 있어서 "Useful유용한"의 의미는 "죽는 자들로서 인간이 바로 이 세계에 살 수 있게 해주는"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div><div><br />
</div><div>&nbsp;하이데거는 바로 8절에서 횔덜린의 다른 시를 제시하는데, 이는 하이데거가 위에서 언급한 "another order"와 "measure"를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해주고 있다.</div><div>&nbsp;</div><div>&nbsp;" For under the firm measure,</div><div>&nbsp;The crude, too, is useful,</div><div>&nbsp;That the pure may know itself."&nbsp;&nbsp;&nbsp;</div><div>&nbsp;</div><div>&nbsp;여기서 "the firm measure"란 바로 하늘을 의미하며 바로 그 아래에 지상, 즉 죽는 자들이 사는 곳이 있다. 바로 이 하늘과 지상과의 연관 속에서 하이데거는 the pure와 the crude의 변증법을 제시한다.&nbsp;</div><div>&nbsp;</div><div>&nbsp;"The crude is not an addition to the pure. Nor does the pure have need of the crude. But the crude must be there in order that the pure may become manifest to itself as the pure and thus as that which is other, and thus may have its own being. "Under the firm measure," on the earth under the sky, the pure itself can be the pure only as it admits the crude close to its own essence and there holds it. This does not affirm the crude. Yet the crude exists by rights, because it is being so used with essential rightness."</div><div><br />
</div><div>&nbsp;" ...... 'under the firm measure' there exists neither the splendid self-sovereignty of the pure, nor the self-willed power of the crude, each cut off from its counterpart which it uses."</div><div>&nbsp;</div><div>&nbsp;첫 번째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야한 날 것들"(the crude)과 "순수한 것"(the pure)는 상호규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그것들은 정의상 각자가 서로의 반대편으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것을 순수한 것으로 드러낼 수 있게 하고, 조야한 것과 다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조야한 것들이 있어야만 하고, 그리하여 순수한 것은 자신의 현존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수한 것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조야한 것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가져와 품으며, 조야한 것들은 그렇게 사용된다(used)는 것이다.</div><div><br />
</div><div>&nbsp;두 번째 인용문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순수한 것은 Self-Sovereignty와 연결되는 반면 조야한 것들은 Self-Willed Power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현존하지 않는 것은 순수한 것의 자기주권성과 조야한 것들의 자기의지적 힘(능력)이 아니라, 서로 각자의 대응물로부터 잘려져 나온 그것들이다.&nbsp;</div><div><br />
</div><div>&nbsp;나는 이러한 특징들을 하늘과 땅의 비유를 통해서 풀어보고자 한다. 우선 순수한 것들의 영역은 바로 저 하늘이다. 반면 조야한 날 것들의 영역은 바로 이 땅이다. 그것들은 각자 있다. 그러나 이 땅에 죽는 자들이 거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땅 위에 흙만이 아니라 공기와 물과 그 물이 흐르는 길 등이 필요하며, 그것은 "또 다른 질서," 즉 오직 저 하늘에서만 올 수 있다. 그러나 저 하늘은이 땅을 지배하는 질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자신의 현존을 가질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는 오직 자신을 땅위에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순수한 것들은 조야한 것들을 자신의 본질에 가까이 가져와 그 안에 품는다. 즉 하늘은 언제나 땅과 맞닿아 땅을 품고 있다. 그리고 죽는 자들이 자신의 땅 위에서의 거주를 위해 사용(use)하게 되는 모든 방책과 수단들은(measure) 바로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이게 된다. 순수한 것과 조야한 것들은 그 정의상 가장 먼 것으로 규정될지라도, 그 현존양식에 있어서는 바로 맞닿아 있기에 절대로 떨어질 수 없고, 만일 양자가 떨어진다면 하늘은 흩어질 것이고 땅은 흙이 되어버릴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nbsp;우리는 여기서 하늘에서 오는 순수한 것의 자기표현으로서 "Self-Sovereignty"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자기주권성은 순수한 것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조야한 날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div><div>&nbsp;그러나 우리는 바로 하이데거의 "Self-Willed Power of the Crude"와 "each cut off from its counterpart which it uses"에서 it은 하늘을 의미하는 동시에 땅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조야한 것들이 순수한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Self-willed power"이다. 이 의미는 확실히 불분명하나, 우리가 이 "self-willed"와 "power"의 조합을 앞선 제1부의 하이데거의 니체해석과 연관지을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이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전망 하에서 이 과제는 뒤로 미루도록 한다.</div><div><br />
</div><div>&nbsp;그러면 the pure와 the crude의 변증법은 "죽는 자들의 거주를 위한 순수와 조야의 상호사용의 변증법," 즉 양자가 맞닿아있는 measure방책들을 사용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이 사용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div><div><br />
</div><div>&nbsp;"Xraomae means turning something to the thing in hand according to its nature, thus letting that nature become manifest by the handling. &nbsp; ...... &nbsp;The user lets the used thing enter into the property of its own nature, and there preserves it. ...... all mortal doing belongs within the realm in which the xre makes its appeal."</div><div><br />
</div><div>&nbsp;하이데거는 이에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거나 그 은유적 설명방식을 풀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방책과 수단(measure)들을 사용함을 통해서만, 우리는 대상을 자신의 본성 속에서 지켜줄 수 있고, 실로 우리가 산다는 것 혹은 우리의 모든 행위는 이 사용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전환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useful에서 use로의 전환이다. 그것은 사용되는 것으로부터 사용하는 자로의 전환과 일치한다. 우리는 존재자들 혹은 하늘과 땅에 속한 Usefulness로부터 죽는 자들의 구체적 행위로서 Use로 옮겨오게 된다. 실제로 순수한 것과 조야한 것은 스스로 행위하는 자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렇게 있는 것들, 그리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 즉, usefulness는 use에서 오는 것으로 오직 죽는 자들로부터, 그들의 입장에서부터만 저것들은 useful한 것으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usefulness와 use의 변증법 또한 발견하게 된다. 즉, 죽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사용을 통해 대상은 유용하게 되고 유용한 것으로서 의미를 획득하지만, 동시에 오직 대상들이 유용하고 유용한 것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경우에만 죽는 자들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체에 있어 순수한 것과 조야한 것의 변증법은 바로 죽는 자들의 사용하기와 존재자들의 유용함의 변증법을 매개로 해서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중의 변증법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방향전환의 변증법)</div><div><br />
</div><div>&nbsp;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서술방식에 관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확실히 논증적인 말하기 방식보다는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언어의 유희를 통하여 문제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고 동시에 감추고 있다. 그의 말하기 방식은, 그가 시를 인용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땅, 하늘, 거주, 죽는 자들, 순수한 것, 조야한 것 등의 고도로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시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인 말하기를 통하여 그는, 비트겐슈타인적인 의미에서, 단지 "말하려는 것" 뿐만 아니라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보여주고 감추는 언어의 시적 형식 그 자체를 통하여 언어를 존재자를 기술하는 것에서 존재의 소리를 들려주고 존재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nbsp;</div><div><br />
</div><div>&nbsp;결국 하이데거는 useful의 의미를 말하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현존조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것은 순수한 것과 조야한 것의 변증관계 사이에 놓여있는 죽는 자로서의 지위이다. 그는 존재자의 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존재 세계의 질서를 향해 존재자들을 사용하는 존재자이며, 동시에 존재 세계의 질서를 자신의 의지를 위해 사용하는 존재자이다. 여전히 의미는 모호하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모습들을 하이데거는 "생각하기"를 통해서 규정하려고 하고 있다고 나는 기대하는 바이다.</div><div><br />
</div>			 ]]> 
		</description>
		<category>-/책과 생각</category>

		<comments>http://phiinvcen.egloos.com/2494397#comments</comments>
		<pubDate>Mon, 21 Sep 2009 13:30:24 GMT</pubDate>
		<dc:creator>동우</dc:creator>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