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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알프스 요새 ver.이글루...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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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見敵必戰 特攻! Sojwa's Spirit!-LB장병일동-</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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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Jul 2008 10:58:2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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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알프스 요새 ver.이글루...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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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6)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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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table style="TABLE-LAYOUT: fixed"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tbody><tr><td valign="top"><p align="left"><strong>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6)<br><br>언덕과 숲속에서 계속된 혼란스러운 싸움 속에서 프랑스 5군단 병사들은 8월 29일 Novart마을 일대에서 작센 7군단과 조우전을 벌였다. 바로 다음날에도 바바리아 1군단과 4군단이 프랑스군과 세당 남쪽의 Beaumont마을에서 접촉해 교전을 벌였다.<br><br>계속되는 작센과 바바리아 군과의 교전에 맥마흔은 세당으로 전군을 철수시켰고, 프랑스 병사들은 그날 밤과 다음날 새벽에 걸쳐 후퇴에 성공했다.<br><br>아직 서쪽으로의 탈출 가능성이 남아 있었음에도 맥마흔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이후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되게 되는 가능성을 남기게 된다.<br><br>31일, 프랑스군이 농성에 대비해서 재편성과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프로이센 11군단이 뫼즈강을 건너 세당서쪽의 Donchery마을을 점령, 바바리아 1군단은 동쪽의 Bazeille마을에 목전에 있었고, 작센4군단과 12군단이 그보다 좀 더 동쪽에서 대기중이었다. 프로이센 근위대는 강 북안에서 서쪽으로 기동하는 와중이었고, 비스마르크는 그동안 벨기에 정부를 외교적으로 압박해 프랑스군이 궁지에 몰리더라도 벨기에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었다.<br><br>9월 1일, 대망의 세당전투가 시작되었다. 병력,화력,사기면에서 모두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압도하는 가운데 프로이센 2개군 224,000명에 대항해 절반규모의 프랑스군은 그래도 나름대로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strong></p><p align="left"><strong></strong>&nbsp;</p><p align="left"><strong><img style="WIDTH: 716px; HEIGHT: 462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378369_1.JPG"></p><p align="left"><br></p><p align="left"><br>(9월1일, 세당전투의 전체적 상황도)</p><p align="left">&nbsp;</p><p align="left"><br>몰트케가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시킨 가운데 동틀녘에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뜨자 제1바바리아 군단이 Bazeille마을에 교량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다.<br><br>현지의 프랑스군과 시민군들을 치열한 총격전끝에 바바리아군이 격퇴시키고, 작센 7군단이 그 뒤에 도착하고, 프랑스군은 이 조우전이 패배로 돌아가자 세당으로 일제히 후퇴했다. 같은 시간에 프로이센 11군단은 Bonchery마을에서 프랑스군을 압박하고 있었고, 5군단이 그 뒤에서 북쪽방면의 벨기에 국경을 봉쇄하고 얼마뒤면 도착할 근위대와의 연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br><br>프로이센군은 세당에서 갇혀버린 프랑스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보병의 돌격보다는 500문을 집결시킨 대규모 야포를 동원해 마을과 프랑스군 진지를 때려댔다. 빌헬름1세와 주요 참모진들이 남쪽의 Frenois마을에서 이 장관을 구경하는 동안 초조해진 프랑스군은 남아있던 기병사단을 출격시켜 탈출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의 포위망은 굳건했고 프랑스군은 돌격을 반복할때마다 큰 사상자를 냈다. 그런 모습에 빌헬름1세마저 '용감한 사내들이었다'라며 감탄했고, 프랑스 기병대의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을때까지 돌격을 계속하자 프로이센군 보병들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일부 생존자를 포위망에서 통과시켜 주기까지 했다. <br><br>몇시간만에 프랑스군의 저항은 끝나고, 프랑스군은 쏟아지는 프로이센군의 포격에 몸을 지키기 위해 숲속이나 건물, 그리고 중세때 지어진 세당의 성채에 들어가 웅거해 버렸다.<br><br>세당 북쪽의 Garenne숲에서 처음으로 백기가 오르자 연이어 다른 곳에서도 항복하는 프랑스군들이 속출했다. 오후 5시경, 나폴레옹 3세는 휘하 장병들에게 싸움을 중지할것을 명령하고, 프로이센측에 항복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프랑스 병사들이 항명하고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프랑스군을 공격중이던 바바리아군은 일시적으로 잠시 전진을 멈추고 약간 물러났다.<br><br>백기가 세당의 성채에 오르고, 몰트케는 빌헬름1세에게 이를 알리는 사절을 보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비스마르크가 나폴레옹3세를 회견하고 그 자리에서 나폴레옹3세는 9월2일 오전 11시자로 샬롱야전군이 항복한다고 선언했다.</p><p align="left">&nbsp;</p><p align="left"><img style="WIDTH: 716px; HEIGHT: 703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378369_2.JPG"><br></p><p align="left">&nbsp;</p><p align="left">(프로이센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비스마르크와 회동중인 나폴레옹3세, 프랑스군 병사들의 표정이...)</p><p align="left"><br><br>17,000명이 죽고, 21,000명이 포로가 된 상태에서 83,000명이 추가로 항복한 프랑스군은 고작 3천명만이 벨기에 국경을&nbsp;&nbsp;통해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황제인 나폴레옹3세가 포로로 잡힘으로서 프랑스군에서 더이상 야전에서 회전을 벌일수 있는 야전군은 전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버렸고, 메츠에 갇힌 바젠의 라인야전군에 대한 구원가능성도 사라졌으며, 파리에서는 유제니 황후가 하야하고 제3공화정이 성립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p><p align="left">&nbsp;</p><p align="center"><img style="WIDTH: 336px; HEIGHT: 435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378369_3.JPG"></p><p align="center">&nbsp;</p><p align="center">('영광은 끝장났군' 10월 15일 프랑스 신문에 만평이다. 빌헬름1세의 뒤에 있는건 나폴레옹1세와 루이14세...)</p><p align="left">&nbsp;</p><p align="left"><br><br><br>Trochu장군이 제3공화정의 거국정권의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온건 공화주의자인 Jules Faure가 부통령으로 취임해 9월 6일 공식적으로 프랑스 정부는 계속 프로이센을 상대로 저항할 것임을 천명했다.<br><br>샬롱야전군이 세당에서 항복하고, 몰트케는 제3야전군과 제4야전군(뫼즈 야전군)을 움직여 파리로 진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동은 샬롱야전군 전면항복뒤 닷새 뒤였고, 프랑스 거국정부도 그 시간동안 도시의 방어준비를 실시하고 있었다. 파리를 둘러싼 16개의 보루가 정비되고, 수병,해병을 비롯한 10만의 병력과 35만의 국민방위군이 소집되었다. <br><br>식용으로 쓸만한 동물들이 모두 시내에 모아지고, 가로수들은 베어져 연료나 바리게이트의 제작용도로 쓰였다. 정부 주요기구들은 오를레앙 방면의 투르로 이전했고,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 몇명만이 남아 수도를 사수하기로 결의했다.<br><br>첫 프로이센군은 9월 17일에 파리 외곽에 도착했다. 4군이 북쪽, 3군이 각자 남쪽을 둘러싼 가운데 9월 19일 28,000의 프랑스군이 남쪽의 샤틸롱방면을 공격해 보았지만 조직력이 결여된 이 공격은 금세 격퇴당했고, 다음날 포위망이 완성되어 빌헬름 1세는 참모진과 함꼐 도시 서쪽의 베르사유궁에 사령부를 꾸렸다. <br><br>한편 바젠의 군대는 나폴레옹3세의 항복소식과 파리포위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7주를 더 견뎠다. 독일은 란트베어와 기타 예비병력으로 점령지들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고, 9월 25일에는 독일에서 파리간 철도도 개통되어 프랑스 영내에서의 철도보급도 가능해졌다. 다만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여전히 4만의 프랑스군이 농성중인지라 신편 13군단이 주요 철도라인을 보호해야만 했다.<br><br>비스마르크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우월한 상태로 강화협상을 맺고자 했고, 이미 패배의 충격을 통해 그런 입장을 상대에게 강요해본 1866년의 경험이 프로이센에게는 있었다.<!--"<--></strong></p></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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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전쟁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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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Jul 2008 10:58:21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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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5)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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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trong>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5)<br><br>-기적을 창조한 기병돌격<br><br>프로이센 3군단 군단장 콘스탄틴 폰 알벤슬레벤(Alvensleben) 소장은 프랑스군 후위의 서진을 막고자 시도했다.<br><br>바젠은 직접적으로 베르덩으로 가는 루트는 프로이센군에 봉쇄되었고, 메츠일대에서 남쪽으로도 프로이센군 주력이 접근해 오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오가 되자 프로이센군 10군단 병력들이 전장에 도착해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투를 개시했다. 하지만 그들의 병력은 물과 3만 남짓으로, 프랑스군에 비해서 1/4도 안되는 규모였다.<br><br>파리를 등진 프로이센군과 국경을 등진 프랑스 대군이 격돌하고, 프로이센군에게는 그날따라 악재가 겹쳐서 제2야전군 주력마저 행군방향을 잘못잡고 길을 헤매고 있었다. 누가봐도 그동안 패배를 이어온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을 밟아버릴 절호의 설욕기회였다.<br><br>바젠은 3군단과 6군단이 남서쪽 방향으로 프로이센군을 포위해 밀어붙이려고 시도했고, 자신이 직접 선두에서 싸우며 2군단과 근위대로 프로이센군 증원병력의 투입도 적절히 봉쇄하고 있었다.<br><br>연거푸 돌격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프로이센군의 공격에서 점점 예기가 사라져가고, 중앙일대의 버온빌,르존빌 일대에 돌격을 계속했지만 점점 상황은 프로이센군에게 절망적으로 다가왔다.<br><br>마침내 오후가 되어 탄약마저 떨어져가고, 증원군마저 멀리서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알벤슬레벤 소장은 프랑스군이 그랬듯이 기병대를 돌격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기병돌격은 이후 유럽 군사사에서 마지막 기병의 대승리중 하나로 기록되게 된다.<br><br>그는 휘하의 예비여단의 2개 중기병연대를 차출해서 프랑스군 중앙의 깡로베르 원수의 프랑스 6군단 일대에 돌격시켰다. 이들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들의 용감한 돌격은 프랑스군을 큰 혼란에 빠트렸고, 혼전이 이어졌다.<br><img id="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133858_1.JPG" height="701" alt="이미지를"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133858_1.JPG" width="716"><br></strong></p><p align="center"><br><strong>(돌격중인 프로이센 중기병들... 프랑스군 기병들과 달리 이들은 결국 기적을 만들어냈다.)</strong></p><p align="left"><br><strong><img id="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133858_2.JPG" height="986" alt="이미지를"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133858_2.JPG" width="716"><br></strong></p><p align="center"><br><strong>(오스프리 시리즈에 묘사된 프로이센 중기병들)<br></strong></p><p align="left"><br><strong>몰트케,비스마르크,빌헬름1세도 휘하 참모들을 대동하고 전장에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전투중 이 기병돌격에 참가했던 아들 허베르트(Herbert)가 부상당하자 전투가 끝날때까지 전사한줄 알았고, 빌헬름1세가 타고있던 말마저 총에 맞을 정도의 대 혼전이었다.<br><br>그러나 그들의 돌격은 결국 프로이센군 주력이 증원될 시간을 벌어주어 저녁무렵 전장의 프로이센군은 9만5천까지 증원되어 있었다.<br><br>결국 견디다 못한 바젠은 근위대를 예비대로 배치하고 메츠방면으로 물러나 재정비를 시도했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물러나는 사이에 제1야전군의 7,8군단을 속속 증원받은 프로이센군은 23만의 대군이 프랑스군이 물러난 St-Privat방면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br><br>(St-Privat전투는 생략하겠습니다... 방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따로 비중을 두고 쓰고자 합니다.)<br><br>-St-Privat전투 생략-<br><br>프랑스 주력군이 메츠요새에 틀어박혀 포위당하고, 누가 봐도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승리였다.<br><br>그러나 아직 전쟁이 끝난건 아니었다. 8월 19일, 몰트케는 프랑스 영내에서의 전쟁의 다음 국면을 시작했다. 제1군에 일부 2군 병력을 배속시켜 프랑스군이 농성중인 메츠를 포위하게 하고(병력 17만, 지휘관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 카를),제2군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해서 신편 제4군을 편성했다. 병력은 86,000명 규모로 지휘관은 작센 왕세자(Crown Prince) 알베르트(Albert)공, 병력구성은 작센군 12군단과 4군단, 프로이센 근위대 등이었다.<br><br>8월 20일까지 새 편제를 정리한 프로이센군은 신편 제4군(뫼즈 야전군이라 칭함),이 제3군과 함께 뫼즈강 서안으로의 진격을 개시했다.이에 대응하는 프랑스 샬롱 야전군에는 1,5군단과 7군단, 그 이외의 주력병력 밖에도 신편12군단(수병,해병,갓 소집된 신병들로 구성된 급조군단), 2개 기병사단의 병력에 5백문의 포와 미트라예즈 제사총등을 보유하고 있었다.<br><br>이런 상황에서 달아나던 나폴레옹 3세는 퇴위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상 파리의 황후와 전쟁성 장관등과 함께 계속 전장에서 야전군 지휘관들에게 간섭하고 있었다.<br><br>맥마흔(불어식 발음에 관해서 태클이 들어왔습니다만 일단 썼으니 끝장을 보겠습니다...)군은 사기가 최악에 달해 있었지만 파리로의 퇴각은 군사적으로는 안전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패배이자 제정붕괴와 혁명을 불러 일으킬게 틀림없는 일이었기에 나폴레옹3세는 꼭 피하고 싶었다.<br><br>그는 맥마흔군이 포위된 메츠와 연결되어 바젠군을 구원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제2제정은 끝을 보이고 있었고, 공화정이 태동되고 있는것이나 다름없는 가운데, 거기에 전황을 재기불능으로 만든 결정적인 사태가 8월 21일 발생했다. 샬롱야전군이 아직 북서방향으로 이동중에 야영을 하다가 급작스럽게 나타난 프로이센의 야전군 2개에 포위당해 버린 것이다.<br><br>사기도 낮고 장비고 부족한데다 기타 식량,피복류도 행군에 필요한 양 이상은 모두 소각해 버린지라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nbsp;&nbsp;샬롱야전군 주력은 22일까지 복동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Bheims에 머물렀다. 다행히 현지와 철도에서 보급품을 찾아내는데 성공했지만 프로이센군이 역시 베르덩으로 가는 루트를 틀어막았고, 하는수없이 맥마흔은 쏟아지는 여름비를 맞으며 Monmedy방향으로 행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br><br>바젠과 맥마흔의 군대는 서로 연결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실제로 바젠도 메츠에서 포위를 풀려고 2차례정도 시도했다. 처음 시도는 8월 22일 북동방향으로 시도하다가 폭우로 취소하였고, 2번째 시도는 31일 새벽을 틈타 동쪽으로 기습을 가해보았지만 프랑스군 3,500에 프로이센군 2,500의 사상자만을 내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br><br>몰트케는 맥마흔군은 2개 야전군을 이용해 벨기에 국경방향으로 도망칠수 없게 교묘히 궁지로 몰아넣었고, 3군과 4군에 의해 형성된 포위망 속에서 맥마흔은 황제와 파리로부터 바젠군과의 합류를 독총당했지만 이미 뮤즈강의 교각과 몽메디 일대의 도로는 모두 프로이센군의 손에 있었고, 프로이센 기병들은 악착같이 행군중인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가하며 안그래도 폭우로 인해 진창으로 변한 길에서 프랑스군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strong></p><p align="center"><br><strong><img id="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133858_3.JPG" height="743" alt="이미지를"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6133858_3.JPG" width="716"><br><br><br></strong></p><p align="center"><strong>(대(大)몰트케, 19세기 중후반의 유럽 최고의 명장)</strong></p><p align="left"><br><br><strong>그렇게 우왕좌왕하면서 괴롭게 프로이센 기병들과 교전하고 진창길을 뚫으며 프랑스 병사들은 점차 지휘관들에 대한 신뢰감을 잃고 그들을 멸시하게 된 가운데 점차 벨기에 국경으로부터 11km가 떨어진 세당(Sedan)이라는 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br><br>(토요일날 낙뢰로 모뎀이 나가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업데이트 문제등이 겹쳐서 오늘에야 연재를 하게 됐습니다... 번역이나 편집작업 자체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올릴 방법이 없으니...)<!--"<--></strong></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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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전쟁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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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5 Jul 2008 15:03:49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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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4)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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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trong>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4)</strong></p><p><br><strong>-순식간에 붕괴한 프랑스군의 전선<br></strong></p><p><strong>&nbsp;8월 2일, 프랑스 제2군단이 전선중앙에서 전진해 자르뷔르켄을 점령하고 먼저 기세를 올렸다. 전장을 참관한 아직 어린 황태자에게는 즐거운 선물이 되었겠지만 보급과 조직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프랑스군은 취약한 상태로 프로이센군의 반격을 받을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br></strong></p><p><strong>&nbsp;폰 슈타인메츠 지휘하의 프로이센 1군이 프랑스 제2군단에 대해 반격을 개시, 그리고 또한 그 반대편 전선에서 몰트케의 명령에 따라 제2군이 전진을 시작했다. 프랑스 2군단은 속절없이 밀려나 Spicheren-Stierius 일대의 고지에서 프로이센 제1야전군의 맹공을 받아야했다. 32,000의 프랑스군은 굳게 방어선을 갖춘데 대해서 프로이센군은 좁은곳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2배가 넘는 67,000의 병력을 투입하고, 프랑스군 소총 밖에서 퍼부어진 대규모 프로이센 포병대의 맹사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 측면을 우회해 파고들었다.<br></strong></p><p><strong>&nbsp;견디다 못한 프랑스군이 해질녘 부렵부터 후퇴를 시작, 그동안 그보다 남쪽방면에서 대기중이던 프로이센 제3군도 전진을 시작했다.<br></strong></p><p><strong>&nbsp;8월 4일, 뷔젬부르크(Wissembourg)에서 맥마흔 원수의 프랑스 제1군단 소속의 상대적으로 약한 사단들과 조우한 프로이센 3군은 주저없이 공격을 개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삼림이 우거진 언덕을 방패삼아 프랑스군은 맹렬이 저항했지만 프로이센군은 방어선을 돌파, 5만의 병력이 5천에 불과한 프랑스군을 포위해 버렸다.<br></p><div style="TEXT-ALIGN: center"><p><strong><img style="WIDTH: 653px; HEIGHT: 406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701797_3.JPG"></strong>&nbsp;</p><p><strong>(Wissembourg전투를 묘사한 프랑스측의 그림이다. Abel Douay준장이 지휘하는 주아브들이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분전중이다.)</strong></p></div><div style="TEXT-ALIGN: center"><img style="WIDTH: 652px; HEIGHT: 724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701797_2.JPG"></strong><br><strong>(초반 국경에서의 전투상황, 멋모르고 달려들었던 프랑스 2군단은 신나게 깨져나갔다.)<br><br></strong></div></strong><p><strong>&nbsp;다음날 그런 상황이 프랑스군 최고사령부에 전달되고, 맥마흔 원수는 그가 지휘하는 남쪽방면의 3개군단을 Worth방면에 능선에서 13만의 병력과 100여문의 포병지원을 받는 프로이센군을 45,000 자신의 병력으로 막으려고 시도했다.<br></strong></p><p><strong>&nbsp;Worth전투(독일측 명칭 Battle of Frœschwiller)는 Spicheren방면 전투와 같은 시간에 양군이 격돌하고 있을때 벌어졌다. 프로이센과 바바리아 포병대가 프랑스군에게 맹포격을 가하고, 거침없는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절반도 안되는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br></strong></p><p><strong>&nbsp;맥마흔은 급히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병력을 샬롱일대에서 재편하려고 후퇴를 선택했고, 프랑스군 기병대는 이러한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위해서 자살적인 돌격을 연거푸 반복했다.<br></strong></p><p><strong>&nbsp;나폴레옹3세는 이 후퇴명령을 승인하며 전군의 샬롱으로의 후퇴도 승인했고, 이는 동프랑스 일대의 상당부분을 포기하는 결정이었다.<br></strong></p><p><strong>&nbsp;무질서한 패주, 특히 중앙의 제2군단은 벌써 메츠방면으로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은 다시 메츠야전군과 샬롱야전으로 재편되었지만 전선은 더욱 혼란에 빠져 총체적 붕괴가 이어지고 있었다.<br></strong></p><p><strong>&nbsp;발트해로의 야무진 꿈에 젖어있던 원정은 취소되고, 수병과 해병들은 하선해서 파리일대에 혹시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동원되었다. 국민병들 역시 소집되고 있었고, 성급한 혁명주의자들은 파리 곳곳에서 공화정에 관한 논의를 풀어놓기 시작했다.<br></strong></p><p><strong>&nbsp;그러나 8월 7일부터 갑자기 폭우가 시작되었고, 이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이나 전진하는 독일군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독일군은 제1야전군과 제2야전군은 전진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기병정찰에 진력했다.<br></strong></p><p><strong>&nbsp;이에 반하여 제3군은 맥마흔군을 맹렬히 추격중이었다. 이 와중에 일시적으로 제1,2군과 2군이 보주(Vosges)산맥에서 연결이 단절되기도 했다. 연결자체는 회복되었지만 보주산맥의 프랑스군의 요새중 Phalsbourg요새는 12월 12일, Bitsch요새는 이듬해 3월 26일까지 바바리아군에 공략당할때까지 항전하며 프랑스군의 자존심을 그나마 살리기도 했다.<br></strong></p><p><strong>&nbsp;제3군이 8월 14일 스트라스부르크 남쪽방면을 포위했지만 철도보급등이 여의치 않았기에 몰트케는 제3군이 어떻게든 현지징발로 버티라고 요구했다.<br></strong></p><p><strong>&nbsp;그 이전인 8월 12일에는 메츠야전군 사령관 바전원수가 모젤강을 건너 자신의 군을 재편하려고 시도하려는걸 나폴레옹3세에게 승인받았다. 3개군단고 근위대가 계속 메츠에서 버티고 있었고 깡로베르 원수도 6군단을 이끌고 샬롱방면으로부터 합류(다만 포병,공병장비는 거의 상실)했고 나폴레옹 3세도 아직 떠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근위대의 지휘를 겸해 이것저것 원수들에게 간섭하고 있었다.<br></strong></p><p><strong>&nbsp;한편 가교가 부설된 모젤강 일대는 비로인해 불어난 유량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조직력을 상실한 프랑스군의 패주가 이어졌다. 8월 14일까지 반수의 프랑스군이 7개의 다리를 통해 진창길을 따라 철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맥마흔군을 제3군이 악착같이 따라붙어 공격해대고 있었고 모젤강을 경계로 새 전선이 구성되어 8월 14일 오후에는 프로이센 7군단이 모젤강 동쪽에 남아있던 프랑스군 병력들을 소탕했고, 15일에는 다음 주요 요새인 베르덩 일대로 30마일 정도를 후퇴하려는 바젠의 메츠야전군을 상대로 몰트케의 명령에 따라 전열을 정비중이던 프로이센 제2군이 뫼즈강을 도하해 베르덩-메츠간 가도를 탈취하려고 시도했다.<br></strong></p><p><strong>&nbsp;8월 15일, 드디어 폭우가 멈추고, 2,6군단과 근위대가 메츠 서쪽에서 야영하는 사이, 3,4군단은 북서쪽을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10마일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한 사이에 프로이센 2군은 신속한 기동으로 이들을 따라잡아 프랑스군 행군대열 측면을 후려갈겼다.<br></strong></p><p><strong>&nbsp;8월 16일, 프랑스군의 고참병들은 '맥시코에서보다도 뜨거웠던 하루'라고 기억하는 날이 되었다. 양군이 치고박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결국 질려버린 나폴레옹3세는 마침내 메츠야전군을 내버리고 철도로 샬롱으로 향했다. 바젠에게는 베르덩으로 최대한으로 신속하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남기긴 했지만 이 명령의 실현가능성은 바젠이 보기에는 거의 없었다.<br></strong></p><p><strong>&nbsp;바젠은 황제가 떠나기가 무섭게 기병정찰을 시행해서 아직 자신의 남쪽방면에는 적이 없으며 2군단과 6군단의 마지막 부대가 숙영지에 합류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머지 부대들의 행군을 중지시키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남쪽방면에 적이 없다는 기병대의 보고는 잘못된 것으로, 프로이센 기병대는 이미 메츠야전군 남쪽방면에 등장, 6군단을 견제하다가 2군단을 향해서 프로이센 기병사단의 기병포가 불을뿜기 시작했고 바젠은 결국 결전을 결심할수밖에 없었다.</strong></p><div style="TEXT-ALIGN: center"><p><img style="WIDTH: 654px; HEIGHT: 601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701797_4.JPG"><br><strong>(메츠일대의 상황, 과연 바젠은 어느쪽을 택할것인가?)<br></strong></p></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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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전쟁사◀</category>

		<comments>http://parkjimm.egloos.com/1858098#comments</comments>
		<pubDate>Thu, 10 Jul 2008 14:59:01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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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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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br>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2)</p><p><br>-양군의 준비태세<br></p><p>&nbsp;프랑스로서는 1차적으로 전선이 독일 접경인 알자스와 로렌 일대가 될수밖에 없다고 판단, 당장 가용가능한 병력은 독일연합군보다 적지만 이곳에서 방어태세를 갖추는것이 프랑스측의 주요 승리방법이었다.<br></p><p>&nbsp;사실 아직 프랑스는 전쟁자체가 즉흥적으로 결정된지라 군사적 행동을 취할만한 준비가 완벽하지 않않은 상태에서 프로이센에 비해서 전쟁계획도 세부적이지 못했다. 이전의 전쟁들과 다르게 몰트케는 대규모 병력을 전선으로 급히 수송해야 할것을 예측하고 전쟁 전부터 이미 물자를 전선 일대에 비축해두고 있었다.<br></p><p>&nbsp;그가 예상한 최악의 경우는 이러한 준비가 끝나기 이전인 7월 25일 이전에 프랑스가 15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해 독일국경을 넘는 것이었따. 그는 8월 1일까지 프랑스가 공격하지 않을경우 순조롭게 방어전을 치르는게 가능하고, 8월 4일까지 아무 행동이 없을 경우 무난히 공세가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br></p><p>&nbsp;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장군들에게는 3가지 해결해야할 군사적 문제가 있었다.<br></p><p>&nbsp;첫째는 철도 종착역 이후로부터 이어져야 하는 보급이었다. 양국 모두 대군을 운용했고, 병력과 군마들 모두 탄약뿐만 아니라 대량의 식량과 물까지 필요했다. 두번째로 지휘관의 수에 비해서 예하제대가 너무 많아서 효율적인 지휘가 불가능했고, 마지막은 날로 증가하는 포병과 보병화력에 의한 사상률의 증가였다.<br></p><p>&nbsp;프랑스는 이미 1859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전선으로 급파해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참모본부가 전시 철도운용에 대한 세부계획이 전무했고, 종점 이후에는 여전히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루에 10마일(16km)씩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br></p><p>&nbsp;나폴레옹1세때부터 프랑스군은 전통적으로 군단이 행군시에는 분산되어 기동하며 보급의 부담을 줄이며, 중간중간의 보급거점과 현지에서 보급을 해결하는(결론은 징발이나 약탈) 방식을 택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몰트케에게 큰 호재로 작용할 것이었다.<br></p><p>&nbsp;프로이센측은 클라우제비츠 이후로 기동전과 병력의 집중을 신조로 삼아왔고, 몰트케는 병력을 분산시켜 행군시키는 프랑스군의 특성을 이용해 프랑스의 각 군단을 분산시켜 포위해 '섬멸전'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br></p><p>&nbsp;양측의 보병화력은 니들건을 사용하는 프로이센-독일군이나 샤스포(Chassepot)소총을 사용하는 프랑스군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근소하게 우세하다고 볼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병에 있어서 1866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포병과 상대해본 프로이센군은 크루프사에서 개발된 신형 강철제 후장포를 장비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서 프랑스 포병은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청동주조제의 전장포를 대규모로 운용했다.<br></p><p>&nbsp;기병은 양측 모두에게서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많았고 당시에도 20년 내로 사라질 병종으로 보고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찰등에서 유용한 존재였고, 이는 상위제대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또한 1866년 전쟁의 경험으로 이들이 패주하는 적의 추격에는 유용한 존재라고 몰트케는 판단하고 있었다.<br></p><p>&nbsp;프로이센 참모본부는 1869년-70년 기간에 걸쳐 3개 야전군을 라인강과 코블렌츠 북쪽, 칼스루헤 남쪽일대에 배치시키고, 팔츠등을 통해 프랑스군을 노릴 준비를 갖추었다. 프로이센군은 연대를 편성지역에 따라 근거를 두고 대대는 Parish에 근거를 두고 편성하는 향토근거의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성공적으로 기동전 명령을 이행 개전 18일만에 란트베어를 포함 1,183,000명을 동원해(어지간한 당시 유럽 대도시 인구 수준의 병력) 그 중에서 462,000의 병력이 1선에 배치되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프랑스 영내로 진입한 독일군 병력은 85만이었다.<br></p><p>&nbsp;7월 말까지 프랑스군은 소규모 기병정찰 외에는 행동이 없었다. 프로이센군은 1군(65,000)을 Wadern 인근에, 2군(174,000)을 Neunkirken 인근에, 3군(141,000)을 란다우(Landau)인근에 배치하며 국왕 빌헬름1세는 총사령부와 합류 7월 31일 마인츠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br></p><p>&nbsp;몰트케는 제2군이 중앙의 자그부르켄 방면으로 전진, 1군이 그 북쪽을 따라 전진하고, 3군이 스트라스부르크 방면으로 진격할 심산이었다. 2군이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면 그 양익을 나머지 야전군이 측면에서 받쳐준다는 것이 프로이센군의 계획이었다.<br></p><p>&nbsp;그 동안에 프랑스군은 역시 3개 야전군으로 나뉘어 알자스 야전군(Army of Alsace)을 맥마흔 원수가, 로렌야전군(Army of Lorraine)은 메츠에서 바젠 원수의 지휘하에 주둔해 있었고, 샬롱야전군(Army of Chalons)은 깡로베르 원수의 지휘하에 있었다.</p><p>&nbsp;나폴레옹3세는 이중 샬롱야전군을 제외한 나머지 2개 야전군을 합하여 라인야전군(Army of the Rhine)으로 재편하고 3명의 원수들에게 각각 7개의 군단을 나누어 지휘토록 했다.(튀는 사람없이 무공은 자신이 가질수 있도록 -_-;;;)</p><p>&nbsp;<br>&nbsp;하지만 이러한 군 전투서열 변화는 큰 혼란을 야기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예비역 소집,보급조차 충분하지 못했다. 거기에 프랑스 주력인 라인 야전군은 구릉성 지형때문에 3개군단과 근위대가 북쪽, 남쪽에 나머지 3개군단으로 양분되어 있었다.<br></p><p>&nbsp;이런 심란한 상황의 와중에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메츠에서 황태자, 전쟁성 장관인 르뵈프 원수등과 참모들을 대동하고 도착, 독일군에 맞설 준비를 갖추었(을까?) </p><p>&nbs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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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전쟁사◀</category>

		<comments>http://parkjimm.egloos.com/1855960#comments</comments>
		<pubDate>Wed, 09 Jul 2008 20:37:46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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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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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tbody><tr style="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5px"><td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20px" colspan="2"><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9pt"><strong><img id="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525825_1.JPG" height="986" alt="이미지를"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525825_1.JPG" width="716"><br><br><br>(프로이센의 3인방, 좌측부터 몰트케,빌헬름1세,비스마르크이다.)<br><br></p></strong></span></td></tr><tr style="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5px"><td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10px" colspan="2" height="80"><span style="LINE-HEIGHT: 160%"><table style="TABLE-LAYOUT: fixed"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colgroup><strong><col width="100%"></col></strong><tbody><tr><td valign="top"><strong><p><br><span style="FONT-SIZE: 9pt">-외교의 달인, 칼을 뽑아들고 유럽을 요리하다.</span></p><p><span style="FONT-SIZE: 9pt"></span><br>&nbsp;</p><p align="center"><img id="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525825_2.JPG" height="882" alt="이미지를"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525825_2.JPG" width="448"></p><p align="center">&nbsp;</p><p align="center">(유럽 최고의 모사? 프로이센 수상 Otto von Bismarck)</p><p align="left"><br><span style="FONT-SIZE: 9pt">프로이센 수상으로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이런식으로 힘을 증강시켜 나갈경우 필연적으로 프랑스와 충돌하게 될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프로이센보다 좀 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독일 남부지역, 특히 카톨릭을 신봉하는 바바리아와 기타 바덴,뷔르템베르크등의 통일등에 있어 그를 위해서도 프랑스를 격파하면서도 독일 자체의 이미지에는 손상을 가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고 이에 있어서 비스마르크는 어떠한 방법을 사용함에도 주저가 없었고, 또한 그에게는 그것을 받쳐줄 몰트케의 전략과 군대가 있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에 반해서 나폴레옹 3세와 제2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평화를 표명했지만 내심 1815년 비엔나회담 이후 프랑스에 가해진 금제를 폐기하고, 프랑스의 영광을 만천하에 떨치기를 바랬으며, 프로이센군을 얕보고 있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런 와중에 룩셈부르크 대공국(군사적으로 프로이센군 주둔중, 형식상으로는 네덜란드 왕실의 영토), 프러시아와 바바리아의 영토 일부를 프랑스에 합병시켜 주겠다는 애매한 약속을 나폴레옹 3세에게 했던 비스마르크는 이 정보를 고의로 흘려보냄으로서 이 지역들에서의 대 프로이센 반감을 고취시키면서 동시에 1867년 영국과 런던에서 협상을 벌여 룩셈부르크의 중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러한 일연의 외교적 사건들은 마침 동시기 멕시코 제국의 붕괴와 함께 나폴레옹 정권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어졌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그리고 1868년 스페인에서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스페인 군주였던 이사벨라2세(Queen Isabella II)가 명예혁명으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스페인 민중들은 좀 더 자유주의 성향의 군주와 정권을 원했고, 이들은 호엔촐레른(Hohenzollern) 왕가의 레오폴트(Leopold)공을 새로운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길 원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레오폴트공은 아버지 카론 안톤 대공은 비스마르크 이전의 프로이센 수상, 그의 아내는 포루투갈의 공주였고, 형제중 한사람은 루마니아 왕위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럴 동안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사이를 중재하며 동맹국들을 얻으려 노력하면서 또한 스페인에 친 독일적 정부가 들어서는걸 여러가지 공작으로 막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에 1870년 4월, 레오폴트 대공에게 헌납된 스페인 왕관을 당시 호엔촐레른의 당주였던 빌헬름1세가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프랑스의 반대공작이 더해져 레오폴트 대공은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비스마르크는 교묘하게 프랑스와의 대결구도로 이어나가는데 성공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5월, 프랑스에서는 스페인에서의 기분좋은 소식과 함께 자유주의 내각이 선거에서 압승하면서 나폴레옹3세의 '자유제정'은 힘을 얻고 있었고, 그에 맞춰 프랑스 내에서의 프로이센에 대한 경각심은 바닥에 떨어져 있을때 비스마르크는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6월 9일, 프랑스 대사 빈센트 베네디티 백작(Count Vincente Benedetti)이 팔츠의 온천도시인 엠스(Ems)에서 휴양중이던 빌헬름1세를 방문했다. 여러차례의 회동이 있었고, 이 와중에 프랑스 대사는 이후에도 호엔촐레른 왕가의 인물이 스페인 왕위를 이어받지 않을것이다는 확약을 본국에 전해도 좋겠냐고 빌헬름1세에게 요청해왔다. </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에 빌헬름 1세는 6월 13일 아침 마지막 만나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확답을 거부하고 그를 조용히 돌려보냈다. </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 사실이 전보로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전달되자 그는 전쟁성에서 총참모장 몰트케와 전쟁성 장관 론 장군등을 불러 이후의 행보를 의논하고 연방의회등에 마지막 13일에 있었던 회동의 결과를 상세히 덧붙여, 특히 프랑스 대사의 요청을 강요로 바꾸어 발표하는 행동을 저질렀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마침 6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을 기념해서 파리 시내에서 군대가 퍼레이드를 벌이던중 각국 언론에 이 사실이 발표되자 당장 프랑스 여론이 들끓었고, 바로 다음날 프랑스 의회가 대 프로이센전에 대비한 예산안을 가결시키고, 나폴레옹3세는 예비역 소집령을 전국에 선포했다. 또한 이에 이어 전쟁성 장관 에드몽 르뵈프(Edmond Leboeuf) 원수는 '각반의 단추만 채우면 모든것이 끝난다'라는 말로 여론을 호도하며 프랑스 의회는 결국 245대1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 프로이센 선전포고를 가결시켰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그리고 이 소식이 전해지기를 마치 기다렸다는듯 프로이센은 당장 몰트케의 주도아래 전략플랜을 발동시키며 6월 19일 정식으로 양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span><br></p><!--"<--></strong></td></tr></tbody></table></span><img id="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525825_3.JPG" height="1048" alt="이미지를"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525825_3.JPG" width="716"></td></tr></tbody></table><p>&nbsp;</p><p align="center"><strong>(유제니 황후, 나폴레옹3세의 황비였다... 올린 이유는 그냥 이뻐서...)</strong></p>			 ]]> 
		</description>
		<category>▶전쟁사◀</category>

		<comments>http://parkjimm.egloos.com/1852483#comments</comments>
		<pubDate>Tue, 08 Jul 2008 14:56:00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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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Franco-Prussian war(1)  ]]> </title>
		<link>http://parkjimm.egloos.com/184951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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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에<span lang="EN-US">... </span>그동안 게시물이 워낙 뜸했던지라<span lang="EN-US">... </span>방학도<span lang="EN-US"> 1</span>주일 좀 넘게 남고 해서 보불전쟁사를 마음먹고 해보려고 합니다<span lang="EN-US">.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대략적으로 보불전쟁사를 쓰고<span lang="EN-US">... </span>방학이 시작되면 중요 전투였던 생 프리바 전투를 해서 몇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끝장을 한번 보려는 마음을 먹고 써보겠습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1870~71</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년 프랑스<span lang="EN-US">-</span>프로이센 전쟁<span lang="EN-US">(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span>의 대략적 개요<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1870</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년 발발한 프랑스<span lang="EN-US">-</span>프로이센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과<span lang="EN-US"> 1</span>차대전 전간기 시기의 전쟁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으로서<span lang="EN-US">, </span>새로운 독일제국의 성립과 종말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이 기간<span lang="EN-US"> '</span>프로이센<span lang="EN-US">'</span>군에는 독일내의 다른 공국과 왕국군들이 다수 참전했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것은 프로이센 이었고<span lang="EN-US">, </span>결국 프로이센은 수백년만에 다시 통일독일을 성립시킬수 있었으며 또한 다음 세기까지 이어질 유럽정치의 주요 전환점의 하나이기도 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전쟁은 크게<span lang="EN-US"> 3</span>국면으로 나눈다<span lang="EN-US">. 1870</span>년<span lang="EN-US"> 7</span>월 개전과 그에 비롯한 작은 사건들이 벌어진<span lang="EN-US"> 12</span>월까지의 시기<span lang="EN-US">, </span>주요 전투들이 발생했던<span lang="EN-US"> 1</span>월까지의 시기<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에 이어진 파리코뮌의 등장과 이어진 제<span lang="EN-US">3</span>공화국의 코뮌에 대한 진압등이다<span lang="EN-US">. <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프랑스는 자국내의 정치 문제로 전쟁에 그리 관심이 깊지 못했고<span lang="EN-US">, </span>이에 반해 독일측은 비스마르크와 그 지원을 받는 북독일 연방<span lang="EN-US">, </span>기타 남독일의 주요 국가들이 전쟁준비가 충분치 못했던 프랑스를 손쉽게 격파할수 있었다<span lang="EN-US">. </span>프랑스는<span lang="EN-US"> 2</span>개 야전군이 메츠에서 포위되어<span lang="EN-US"> 1</span>월부터<span lang="EN-US"> 2</span>달간의 농성끝에 항복<span lang="EN-US">, </span>나머지 군대도 나폴레옹<span lang="EN-US"> 3</span>세와 함꼐<span lang="EN-US"> 1</span>월 초에 세당에서 패배해 항복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프랑스는 그와 동시에 제<span lang="EN-US">2</span>제정이 붕괴하면서 제<span lang="EN-US">3</span>공화정이 수립되었고<span lang="EN-US">, </span>프로이센군은 파리공성전을 시작해 시작했고<span lang="EN-US">, </span>공화국은 남부<span lang="EN-US">,</span>북부<span lang="EN-US">,</span>남동부의 군대를 긁어모아 파리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이러한 시도들은 알자스<span lang="EN-US">,</span>로렌 지방에 대해 이를 점거한 독일군에 대한 구축의 포기로 이어지고 말았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거기에 이러한 구원작전들도 실패했고<span lang="EN-US">, </span>이를 견디다 못한 프랑스측이 항복을 받아들여 공식적인 전쟁은 끝났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새로운 독일제국의 성립과<span lang="EN-US"> 3</span>월<span lang="EN-US">, </span>평화가 정착될듯 보인 파리에서의 농성과 패배로 인한 치욕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 국민들은 코뮌을 성립시켜 프랑스 공화정에 도전했고<span lang="EN-US">, </span>이는 독일군이 여전히 파리 북쪽에 주둔한 가운데 피비린내나는 공화국군의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span lang="EN-US">. <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이러한 경험들로 프랑스는 크나큰 혼란에 휩싸였으며 결국<span lang="EN-US"> 1</span>차대전이 시작할 때까지도 양국모두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전쟁전의 각국의 상황<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1850</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년대 프로이센은 독일연방의 수장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공작에 열을 내고 있었고<span lang="EN-US">, </span>그 기간동안 프랑스의 나폴레옹<span lang="EN-US">3</span>세는 군대를 동원해 나폴레옹<span lang="EN-US">1</span>세 시절의 치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그렇지만 프랑스의 지위향상을 위한 그러한 노력들은 점점 프랑스를 수렁에 몰아넣고 있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프랑스의<span lang="EN-US"> 1818</span>년에 채택된 이래 이미 구시대적인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28</span>만<span lang="EN-US"> 8</span>천의 고참병을 보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신병들은 대게 질이 낮았고<span lang="EN-US">, </span>추첨식 병역제에 병역을 치르게 된 병사들은 대게 자신들이<span lang="EN-US"> '</span>불운한 번호<span lang="EN-US">'</span>를 뽑았다고 비아냥 거렸다<span lang="EN-US">. </span>거기에 돈을 지불하고 대리인을 입영시키는 일까지 가능했다<span lang="EN-US">.(</span>남북전쟁 시기 북군 병역제 최대의 오점으로 알고 있습니다만<span lang="EN-US">... </span>뉴욕폭동의 원인의 한가지이기도 하고<span lang="EN-US">... </span>이놈들은 이 시기까지 이 버릇을 못고쳤군요<span lang="EN-US">...) </span>거기에 징병된 인적자원의<span lang="EN-US"> 20~30%</span>가 문맹자였고 이로인해 훈련과정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었다<span lang="EN-US">.<span style="mso-spacerun: yes">&nbsp; </span><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장교단의 질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고 연대급 이하의 장교들 중에서는 괜찮은 지휘력을 가진 장교도 많았다<span lang="EN-US">. </span>하지만 장군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았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거기에 병력 자체도 알제리<span lang="EN-US">, </span>코르시카 등을 비롯한 넓은 프랑스의 영토 전체에 흩어져 있었고<span lang="EN-US">, </span>자국 내에서조차 국경보다는 불안한 정정 때문에 자국내의 보급거점에 상당수 부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이로서 볼수 있듯이 보급과 교통문제는 상당한 혼란에 빠져있었고<span lang="EN-US">, </span>나폴레옹<span lang="EN-US">1</span>세 시절에 비해서 별로 개선된것이 없는<span lang="EN-US">(</span>적어도 병역제에 관해서는 병역의무 거부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박탈시킨 혁명전쟁 시기만도 못하다고 판단합니다<span lang="EN-US">.) </span>군대로<span lang="EN-US"> 1870</span>년대의 새로운 적에 직면하게 된 프랑스의 패배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img style="WIDTH: 716px; HEIGHT: 759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441208_3.JPG"></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 align="center"><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span></o:p></span>&nbsp;</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 align="center"><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주아브Zouve 본래 알제리 식민지병들이었지만 본토에서나 심지어는 알제리하고는 별 상관없는 미국 친구들도 따라했다.)</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span></o:p></span>&nbsp;</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나폴레옹<span lang="EN-US"> 3</span>세는 군사적 영광과 자신의 자리의 유지를 위한 성공이 필요했고<span lang="EN-US">, </span>이는 그의 군대와 파리의 여론에 달려있었다<span lang="EN-US">. </span>프랑스군은<span lang="EN-US"> 1854-56</span>년 기간 크림전쟁에서 영국<span lang="EN-US">,</span>투르크<span lang="EN-US">,</span>샤르데냐 왕국등과 함께 러시아를 격퇴했고<span lang="EN-US">, 59</span>년 프랑스<span lang="EN-US">-</span>오스트리아 전쟁기간에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전<span lang="EN-US">, </span>이 전쟁은 철도가 최초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전쟁이기도 했다<span lang="EN-US">. </span>또한<span lang="EN-US"> 60</span>년<span lang="EN-US"> 2</span>차 아편전쟁에서는 영국과 함께 중국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서 전세계에서 영광을 구사하고 있었다<span lang="EN-US">. </span>하지만 미국 남북전쟁을 틈타 진출한 멕시코에서 추대했던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이<span lang="EN-US"> 67</span>년 총살당하면서 이러한 정국에는 암운이 감돌기 시작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해군력은 굴지의 해군국 영국과 한때 경쟁하며 장갑함 글로와르를 선두로<span lang="EN-US"> 70</span>년 개전당시<span lang="EN-US"> 49</span>척의 장갑함을 보유해<span lang="EN-US"> 5</span>척의 장갑함과 기타<span lang="EN-US"> 39</span>척의 함선을 보유한 프로이센을 크게 압도했다<span lang="EN-US">. </span>하지만 대규모 교전은 내륙국인 프로이센을 상대로 거의 없었고<span lang="EN-US">, </span>수병들마저 하선해서 파리포위전에 참가해야 했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span lang="EN-US">. <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1860-61</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년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물리치고 통일왕국을 건설했던 이 시기<span lang="EN-US">, </span>인기가 없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span lang="EN-US">4</span>세의 형제이자 섭정이 프로이센 왕조의 신왕으로 등극했다<span lang="EN-US">. </span>이 신왕 빌헬름<span lang="EN-US">1</span>세<span lang="EN-US">(William I)</span>는 즉시 즉위 다음해인<span lang="EN-US"> 62</span>년 비스마르크를 자신의 왕국의 수상자리에 임명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프러시아군은<span lang="EN-US"> 13</span>만의 정규군을<span lang="EN-US"> 3</span>년제의 징병제로 운용중이었으나 나폴레옹 전쟁시기 이미 대규모 민병대를 란트베어라는 이름으로 동원해본 경험이 있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img style="WIDTH: 716px; HEIGHT: 767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441208_1.JPG"></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span></o:p></span>&nbsp;</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 align="center"><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이놈들이 란트베어Landwehr 이게 예비역들의 군장인가?)</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span></o:p></span>&nbsp;</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58</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년 헬무트 몰트케가 총참모부 참모총장으로<span lang="EN-US">, </span>차음해 알베르트 론<span lang="EN-US">(Albrecht von Roon) </span>장군이 전쟁성 장관으로 취임하였고<span lang="EN-US">, </span>란트베어를 정규군 휘하로 편입시키며 열성적으로 군의 개혁에 나섰다<span lang="EN-US">. <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몰트케는 그의 참모본부를 엘리트<span lang="EN-US">, </span>정예화 시켰고<span lang="EN-US">, </span>신속한 예비역 동원체제가 확립되었다<span lang="EN-US">. </span>그리고 그렇게 단련된 군대는<span lang="EN-US"> 64</span>년 덴마크와 벌어진 슐레히스비히 홀슈타인<span lang="EN-US">(Schleswig and Holstein)</span>전쟁에서 단기간에 독일연방의 승리를 이끌었으며<span lang="EN-US">, </span>그 와중에 비스마르크의 공작으로 대다수 다른 독일연방의 국가들을 포섭해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켜 전쟁이 발발<span lang="EN-US">, </span>신생 이탈리아 왕국마저 프로이센 측으로 돌아선 가운데 열차를 통한 대규모 병력이동을 성공시킨 몰트케는 쾨니히스그라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span lang="EN-US">. <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p></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 align="center"><img style="WIDTH: 448px; HEIGHT: 735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441208_2.JPG"></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 align="center">&nbsp;</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새굴림">(프로이센 정규군 보병 소총은 드라이제 니들건이다.)</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 align="center">&nbsp;</p></span></p></o:p></span><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이후 빈에서 승전퍼레이드를 벌이겠다는 몰트케를 설득<span lang="EN-US">, </span>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킨 비스마르크는 기존의 독일연방을 해체<span lang="EN-US">, </span>북독일 연방<span lang="EN-US">(North German Confederation)</span>을 성립시키고<span lang="EN-US">, </span>소규모 공국과 소왕국들을 흡수<span lang="EN-US">, </span>프로이센의 영토는<span lang="EN-US"> 2</span>배이상 증가했고<span lang="EN-US">, </span>남독일의 바바리아<span lang="EN-US">,</span>뷔르템베르크<span lang="EN-US">,</span>바덴등의 주요 왕국들도 프로이센과 군사동맹관계가 되었다<span lang="EN-US">.(</span>같은 시기 패전으로 베네치아를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넘겨준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span lang="EN-US">-</span>헝가리<span lang="EN-US"> 2</span>중제국 성립<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그 동안 파리에서 영광을 구가하고 있었던 황제의 권력은 정점에 달해있었다<span lang="EN-US">. </span>그러나 이미 파리는 유일한 유럽문명의 중심지가 아니었고<span lang="EN-US">, </span>국내는 정치적으로 무정부주의자<span lang="EN-US">, </span>사회주의자<span lang="EN-US">, </span>권위주의 왕정주의자등으로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o:p><span style="FONT-SIZE: 100%; COLOR: #000000; FONT-FAMILY: Arial">&nbsp;</span></o:p></span></p><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새굴림"><span style="mso-spacerun: yes">&nbsp;</span></span><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이런 가운데<span lang="EN-US"> 69</span>년 나폴레옹<span lang="EN-US"> 3</span>제는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에밀 올리비에<span lang="EN-US">(Emile Olliver)</span>를 수상에 임명하며 멕시코 동란의 영향으로 압박받아온 군비의 감축에 들어선 가운데<span lang="EN-US">, </span>새로운 신흥강국 프로이센의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span lang="EN-US">.<o:p></o:p></span></span></span></span></span></p><p><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Arial"></span>&nbsp;<img style="WIDTH: 716px; HEIGHT: 503px" onclick="parent.BodyImgLayerPop(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7/1215441208_4.JPG" align="top"></p><p>&nbsp;</p><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새굴림">(돌격중인 프로이센군... 유럽유수의 육군강국이었다.)</span></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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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전쟁사◀</category>

		<comments>http://parkjimm.egloos.com/1849511#comments</comments>
		<pubDate>Mon, 07 Jul 2008 14:48:23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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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독일군의 대전차 전투법...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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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embed src="http://www.youtube.com/v/PtuRwMqaleQ" width="425" height="355"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mode="transparent"><br><br>러시아 전차들이 그냥 맞아주는군요... 실전은 저리 녹녹하지 않을텐데?<br><embed src="http://www.youtube.com/v/ikT4LrUgzYE" width="425" height="355"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mode="transparent"></embed><br><br>흐음... 리인액트 삘이 나는데?</div></emb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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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동영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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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1 Mar 2008 12:45:55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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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2초만에 면도하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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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object id="563435" codebase="htt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 height="418" width="450"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param name="_cx" value="5080"><param name="_cy" value="5080"><param name="FlashVars" value=""><param name="Movie" value="http://ucc.sunzio.com/player/dongpy_player.swf?playerType=3&amp;seq=563435&amp;skinID=skin0001&amp;pumID=diozzang"><param name="Src" value="http://ucc.sunzio.com/player/dongpy_player.swf?playerType=3&amp;seq=563435&amp;skinID=skin0001&amp;pumID=diozzang"><param name="WMode" value="Transparent"><param name="Play" value="-1"><param name="Loop" value="-1"><param name="Quality" value="High"><param name="SAlign" value=""><param name="Menu" value="-1"><param name="Base" value=""><param name='allowScriptAccess' value='never' /><param name="Scale" value="ShowAll"><param name="DeviceFont" value="0"><param name="EmbedMovie" value="0"><param name="BGColor" value=""><param name="SWRemote" value=""><param name="MovieData" value=""><param name="SeamlessTabbing" value="1"><param name="Profile" value="0"><param name="ProfileAddress" value=""><param name="ProfilePort" value="0"><param name="AllowNetworking" value="all"><param name="AllowFullScreen" value="false"><embed src="http://ucc.sunzio.com/player/dongpy_player.swf?playerType=3&seq=563435&skinID=skin0001&pumID=diozzang" width="450" height="418" id="563435" wmode="transparent" allowscript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embed></object><br><br>부흥에 올라와 있던... 따라하지 맙시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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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동영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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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2 Feb 2008 02:57:52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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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바그라티온]44년 중부군집단 붕괴(11)-민스크 해방-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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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3366ff">[바그라티온]44년 중부군집단 붕괴(11)-민스크 해방-</span></div><p><span style="COLOR: #3366ff">&nbsp;6월 말, 벨로루시 방면으로의 공격이 국지적인것이 아니라는게 명백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노르망디에서는 서방연합군과의 치열한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북부우크라이나의 정세도 안정적이지 못해 중부군집단으로의 더 이상의 증원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민스크는 전략적으로 포기할수 없는 요지였고, 그 방어를 위해 지친 5기갑사단이 다시 전장으로 나섰다. </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2개 전선군이 노리는 도시의 방어에 선두에 서야하는 중책을 맡게된 것이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소련군은 민스크-모스크바간 가도와 철도 탈취를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소련군 기갑부대가 3방향에서 도시를 압박해 들어왔고, 도시 북서부에서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다. 505중전차대대의 지원을 받은 5기갑사단 주력이 7월 1,2일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과 교전했고, 5기갑사단은 295대의 기갑차량을 격파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중 128대는 505중전차대대의 전과였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그러나 피해도 커서 125대의 전차가 18대로 감소했고, 티이거 전체를 상실하며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 힘들정도의 대타격을 입었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헛된것이 아니라 독일군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마침내 7월 2일 저녁에 일부부대에 히틀러가 내린 철수명령에 맞춰 상당수 병력을 민스크에서 탈출시킬수 있었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7월 3일 02시,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도시 남단으로 제4근위전차여단과 보병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걸 신호탄으로 제1근위전차군단 11근위군,31군이 속속 진입함으로서 공세의 첫장이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제3벨로루시전선군에 의해 잔존한 많은 독일군들이 포위되어 그로부터도 2주간의 치열한 시가전이 이어졌다. 베레지나 강을 건너 탈출한 병력도 많았지만 남은 병력들도 상당했고, 소련군은 이러한 독일군에 대해 전차와 박격포로 응전해주었다. 7월 9일 대략적인 민스크에서의 조직적인 대규모 저항은 분쇄되었다. </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많은 독일군들이 포로가 되었지만 잔존병력 대다수는 끝까지 저항하는쪽을 택했다. 15,000의 포위되었던 제4군 병력들중 900명만이 도시를 탈출해 독일군 전선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br><br></span></p><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3366ff"><img style="WIDTH: 510px; HEIGHT: 328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950314_1.JPG"><br><br><img style="WIDTH: 510px; HEIGHT: 271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950314_2.JPG"><br><br>제1우크라이나전선군 병사들이 lvov공략중 도강중이다<br><br><img style="WIDTH: 510px; HEIGHT: 314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950314_3.JPG"><br><br>7월 3일 해방된 민스크에 진입중인 제2근위전차군단 소속 T-34/85<br><br><img style="WIDTH: 510px; HEIGHT: 333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950314_4.JPG"><br><br>(소련군 병사들이 노획한 하노마그에 탑승해 있다. 뒤로 지나가는 건 GAZ-1M 참모차량)<br><br><img style="WIDTH: 510px; HEIGHT: 355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950398_5.JPG"><br><br>(불타버린 민스크에서... 제3근위전차군단 소속의 셔먼들... 적기가 발코니에서 휘날리고 있다.)</span></div><p><span style="COLOR: #3366ff"></span>&nbsp;<span style="COLOR: #3366ff">바그라티온 작전기간 독일군은 350,000 가량의 병력이 죽고 150,000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 포로들 대다수는 캠프에서 사망하고 5,5000명만이 모스크바등지로 철도로 이송되었고, 그러한 생존자들도 대다수가 1950년대 중반까지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시베리아 등징에서 유형을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소련군측은 이에 대해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서만 65,779명을 잃고,ㅡ 전 전선군에서는 178,507명이 전상했다고 한다. </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누가보나 2차대전중의 독일 국방군의 단일 패배로서는 최대규모였고 이는 스탈린 그라드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span></p><p><span style="COLOR: #3366ff">p.s얼마 남지 않긴 했는데 컨디션이 나빠서 그런지... 떼먹은 부분이 이번편은 너무 많군요...</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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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parkjimm.egloos.com/1321235#comments</comments>
		<pubDate>Mon, 21 Jan 2008 21:27:12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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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바그라티온]44년 중부군집단 붕괴(10)-로코소프스키의 초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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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3366ff">[바그라티온]44년 중부군집단 붕괴(10)-로코소프스키의 초진-</span></div><p><span style="COLOR: #3366ff">&nbsp;제3벨로루시 방면군이 북쪽에서 민스크를 향하고 있을무렵, 로코소프스키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 역시 남쪽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제3군이 24일 독일 9군 134사단 구역을 10km이상 돌파해냈고, 9군은 뷔히원수의 특별조치로 20기갑사단을 소련군 예봉을 꺾기위해 증원받았다. 당시 사단전차전력은 판터없이 4호전차만 71대를 장비한 상태였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20기갑사단은 당장 보브뤼스크로 남부방면으로 진격하며 독일군 방어선을 밀어붙이던 소련 65군을 상대로 덤벼들었다. 돌파구가 깊어지고, 로코소프스키는 제1근위전차군단을 히든카드로 돌파구로 밀어넣었고, 이 사실에 독일 9군측은 20사단을 소련군 기갑부대 저지를 위해 황급히 투입했다. 이 지역의 열학한 도로는 피난민들과 철수하는 독일군들을 괴롭히고, 보병들이 선두에 선 가운데 20기갑사단은 보브뤼스크 남단의 슬로보드카에서 소련군과 조우했다. 전초전끝에 소련군은 60대의 전차를 읽고 공세가 정지되었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그러나 소련군은 가차없이 이번에는 북쪽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왔고 그 사이에 소련측은 다시 3군에 제9전차군단을 배속시켜 독일군을 향해 투입했다. 뷔히원수는 히틀러가 격노할것을 우려해서 서쪽을 향해 후퇴를 거부했고, 26일 20기갑사단이 보브뤼스크 교외에서 물러난 가운데 소련 제1근위전차군단고 제9전차군단이 각각 남쪽과 동쪽에서 독일군을 빈사상태로 몰아넣었따.</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27일 아침, 9전차군단이 베레지나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출해 독일군 보병사단들을 소탕했다. 돌파가 성공적이라고 판단한 로코소프스키는 기병기갑집단을 제1근위기병군단과 제1기계화군단으로 편성해 독일군이 증원되기 전에 서쪽으로 밀어붙이려고 시도했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26일 최전선으로 날아와서 9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뷔히원수는 완고한 히틀러의 생각을 바꾸는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9군 사령관 요르단(Jordan)장군역시 동조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9군 전열이 걷잡을수 없이 무너지고, 야전지휘관들의 이러한 생각을 알게된 히틀러는 요르단 장군을 27일, 다음날 뷔히원수를 해임시켰다. 중부군집단 사령관 후임은 전날 중부군집단 소속으로 르제프 지구에서 소련군을 저지해냈던 발터 모델원수였다.<br></span></p><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3366ff"><img style="WIDTH: 510px; HEIGHT: 364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727685_1.JPG"><br><br>(이것이 동부전선이다... 아직도 불타오르는 T-34를 뒤에두고 독일군 보병이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br><br><img style="WIDTH: 510px; HEIGHT: 288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727685_2.JPG"><br><br>(소련군 T-34지뢰제거전차)<br><br><img style="WIDTH: 510px; HEIGHT: 313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727685_3.JPG"><br><br>(한쌍의 3호돌격포가 승무원들에 의해서 버려진채 방치됐다.)<br><br><img style="WIDTH: 510px; HEIGHT: 324px" onclick="window.open(this.src)" alt="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hspace="0" src="http://blogfile.paran.com/BLOG_415344/200801/1200727685_4.JPG"><br><br>(독일군 병사들이 격파된 소련군의 M4A2셔먼을 관측소로 사용중이다...)</span></div><p><span style="COLOR: #3366ff">&nbsp;9군과 보브뤼스크 인근의 상황은 매우 다급해서 소련군이 형성한 25km의 포위망속에 독일군은 4만이상의 병력이 갇혀버렸고,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제1벨로루시전선군 포병이 퍼부은 사격과 소련공군의 맹습으로 베레지나강 주변과 도시내에서는 지옥을 방불케하는 도살극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소련측은 1만명을 사살하고 6천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고, 탈출로가 막힌가운데 수비대를 구출하기 위해서 히틀러는 급히 북부군집단에서 12기갑사단을 차출해냈다.(당시의 전력은 3&amp;4호전차 44대 일부병력이 독일에서 판터를 수령하기 위해 귀환해 있었다.),허나 그들은 결국 도시의 구원에 실패했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27일, 소련군이 도시를 탈취하기 위해 31기갑군단에 맹공격을 퍼부었고, 독일군은 이에 28일 23시 돌파작전을 개시했다. 먼저 5천명의 독일군들이 그나마 남은 20기갑사단의 잔존전차대를 선두에 세우고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소련군 포위망에 몸을 던졌다. 공격으로 소련군 포위선을 뚫어내는데 성공하고, 새벽무렵 몰려온 소련군 증원군마저 뿌리친 독일군은 20km떨어진 Svisloch강에 도달해있던 12기갑사단과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총 15,000의 병력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대다수 병사들이 장비를 상실하고 사기가 바닥을 기어 당장 방어전에 투입하기는 무리였다.</span></p><p><span style="COLOR: #3366ff">&nbsp;보브뤼스크는 그로부터도 잔존부대에 의해 치열한 저항끝에 29일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다. 벨로루시 전선군은 366대의 기갑차량, 2,664문의 독일군 화포를 파괴하고, 5만명을 사살, 2만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독일 제9군은 괴멸되었다. 스타브카는 로코소프스키에게 민스크로 향하도록 명령했고, 바야흐로 벨로루시의 고도 민스크가 해방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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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무단번역◀</category>

		<comments>http://parkjimm.egloos.com/1309886#comments</comments>
		<pubDate>Sat, 19 Jan 2008 07:32:58 GMT</pubDate>
		<dc:creator>뚱보소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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