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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름다움을 추구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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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시공을  구성하는 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도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예술이 자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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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7 May 2009 15:21:1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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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름다움을 추구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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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시공을  구성하는 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것도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예술이 자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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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3)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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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제 13서한<br><br>&lt;감성적 충동&gt;은 변화를, &lt;이성적 충동&gt;은 불변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둘은 반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nbsp; 이 두 충동은 인간성의 개념을 전부 차지해버립니다. 그래서 이 두 충동을 중재할 수 있을 제 3의 기본충동은 단연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lt;두 충동간의 &gt;근원적이고 철저한 대립을 통해서 완전히 지양되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인간 본성의 통일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br><br>이 두 충동의 경향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은 동일한 대상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것은 서로 충돌할 수 없는 법입니다. 감성적 충동은 사실 변화를 요구하지만, 그 변화가 인격과 그 영역에까지 미치는 것, 즉 원칙들의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형식충동은 통일성과 지속성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형식충동은 인격과 더불어 상태 또한 고정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감수의 동일성을 바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충동은 본질상 서로 대립되어 있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선 본성의 영역을 제멋대로 침범함으로써, 즉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본성과 기능을 잘못이해하여 자신들의 유효범위를 혼란시킴으로써 생긴 일입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이 두 충동에게 각각 그들의 경계선을 보호해주는 것이 문화의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문화&lt;=교육&gt;는 이 두 충동에게 불편부당한 공정을 지킬 책임이 있고, 감성적 충동에 대항하여 이성적 충동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 충동에 대항하여 감성적 충동을 주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문화의 업무는 이중적입니다. 요컨데 문화의 업무는 첫째, 자유의 간섭에 대해서 감성을 수호하고, 둘째, 감정의 압력에 대해서 인격을 안전하게 보호해야합니다. 문화는 감정능력의 함양을 통해 전자에 도달하고, 이성능력의 함양을 통해 후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br><br>세계는 시간속의 외연, 즉 변화이기 때문에 인간을 세계와 결합시키는 그 능력의 완성은 최대의 가변성과 외향성&lt;=확장성&gt;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격은 변화 속에서 지속이기 때문에 변화에 대항해야하는 그 능력의 완성은 최대의 자주성과 내향성&lt;=집중성&gt;이어야 할 것입니다. 감수성&lt;=수용력&gt;이 다양하게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것이 가동적이면 가동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현상들에게 더 많은 표면을 제공하면 제공할수록, 인간은 더욱 더 많은 세계를 파악하고 더욱 더 많은 소질을 자신 속에서 발전시킵니다. 인격이 힘과 깊이를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이성이 자유를 많이 얻으면 얻을 수록 인간은 세계를 더욱 더 많이 파악하고 더욱 더 많은 형식을 자기 밖에 창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문화의 실체는 첫째, 감수능력&lt;=수용능력&gt;에게 세계와의 가장 다양한 접촉을 마련해주고 감정측에서 수동성을 최고도로 강화하고, 둘째, 규정능력에게 감수능력으로부터의 최고의 독립성을 얻게하고 이성측에서 능동성을 최고도로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특성이 결합될 때, 인간은 존재의 최고의 충만함을 최고의 자주성 및 자유와 결합하고 ,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온갖 무한한 현상들과 함께 그 세계를 자신 속으로 끌어들여 자기 이성의 통일에 종속시킬 것입니다. <br><br>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lt;감성적 소재충동과 이성적 형식충동의 &gt;관계를 전도시켜서 이중의 방식으로 자기규정을 그르칠수 있습니다. 그는 능동적인 힘이 요구하는 내향성을 수동적인 힘에게 부여할 수 있고, 소재충동을 통해서 형식의 기선을 제압하여 감수능력을 규정능력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또한 수동적인 힘에게 제격인 외향성을 능동적인 힘에게 지정할 수 있고, 형식충동을 통해서 소재충동의 기선을 제압하여 감수능력의 자리에 규정능력을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경우에 인간은 결코 자기자신이 되지못할 것이고, 두번째 경우에 그는 결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못할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때문에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그는 둘중 어느 쪽도 되지 못할 것이며, 결국에는 영의 상태&lt;=아무것도 아닌 상태&gt;가 될 것입니다. <br><br>왜냐하면 감성적 충동이 규정하는 충동이 된다면, 즉 감각이 입법자의 역할을 하고 세계가 인격을 억압한다면, 그 세계가 권력이 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대상이기를 중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단지 시간의 내용에 불과한 순간부터 이미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아떤 내용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의 인격과 더불어 그의 상태도 지양됩니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상관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불변의 원리를 요구하고 제한된 현실성은 무한한 현실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형식충동이 감수하는 충동이 된다면, 즉 사고력이 감수의 기선을 제압하고 인격이 세계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그 인격이 대상의 자리에 침입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자주적인 힘과 주체이기를 중단합니다. 왜냐하면 불변의 원리는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순간부터 이미 그는 어떤 형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따라서 상태와 더불어 인격도 지양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오직 자주적인 한에서만 현실성이 그의 외부에 존재하며, 그는 감각적이됩니다. 반면에 그는 오직 감수적인 한에서만 현실성이 그의 내부에 존재하며, 그는 사고력이 됩니다. <br><br>그러므로 이 두 충동은 견제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들이 정력으로 간주될 때에는 이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소재충동은 입법의 영역에 침입하지 못할 것이고, 형식충동은 감정의 영역에 침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성적 충동의 이완이 결코 물리적 무능력이나 우둔한 감정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이완은 언제나 멸시만을 받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행동, 즉 인격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인격이 그 도덕적인 내향성을 통해서 저 감성적인 내향성을 완화시키고 인상들을 지배함으로써 그 인상들에게서 깊이를 빼앗는 대신에 그들에게 표면을 부여해야 합니다. 성격은 격정적 기질을 제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정신을 위해서만 감각이 위축되어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식충동의 이완이 정신적인 무능력과 둔화된 상상력이나 혹은 의지력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이완은 인간성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충만한 감수는 그 명예로운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감성이 스스로 승리하는 힘을 가지고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고, 정신의 강압적인 활동에 의해서 자기에게 흔히 가해질지도 모르는 폭력에 저항해야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재충동을 인격이, 그리고 형식충동을 감수성 혹은 자연이 적절하게 제한하여야 합니다. <br>==============<br>이분법에 따라 구분하고 있으며, 각각의 본성에 충실하여야 감성적 충동과 이성적 충동이 조화를 이루어 인간 존재가 최고로 충만한 상태를 이룰 수 있다. 다만 이 두 충동은 적절하게 상호 제한하지않으면 안된다. </p><br/><br/>tag : <a href="/tag/실러" rel="tag">실러</a>,&nbsp;<a href="/tag/인간의미적교육에관한서한" rel="tag">인간의미적교육에관한서한</a>,&nbsp;<a href="/tag/형식충동" rel="tag">형식충동</a>,&nbsp;<a href="/tag/이분법" rel="tag">이분법</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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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7 May 2009 15:21:14 GMT</pubDate>
		<dc:creator>나시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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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아방가르드, 어디까지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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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세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자주 새로운 시도로 재현되는 연극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br>심리드라마에서 미스테리에 이르기까지.<br>하지만, 때로 그 새로운 시도는&nbsp;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했던 기억에 때로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br><br>이제는 원작을 그대로 보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정도로&nbsp;너무도 자주 '현대적 해석'이라는 이름으로&nbsp;관객을 부른다. <br><br>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2.egloos.com/pds/200904/25/14/f0064014_49f320cbbe80b.jpg" width="216" height="31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2.egloos.com/pds/200904/25/14/f0064014_49f320cbbe80b.jpg');" align="left" /><br>성인이 된 남자의 가슴 속에는 어린 날의 트라우마에 의해 얼룩진 커다란 상처가 있다. 그 치명적인 상처로 인해 불행하다. <br>그 문제의 원인에는 성적 억압과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혼란과 소외와 단절이 있다. <br><br>어린이는 그&nbsp;자체가 애처롭다. 작고, 여리고,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문제 상황에서 늘 약자이기 때문에...늘 작고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해지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존재는 남자아이에게 있어서 늘&nbsp;어머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언제나 배신감을 준다. 사춘기의 남자에게 어머니는&nbsp;성적으로 왜곡되어&nbsp;비하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 존재에게 의존해서 어린 날의 고통을&nbsp;파묻었고, 부정할 수 없는 그 따사로운 기억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와 비슷한 체온을 찾는다. 그러나,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찾아온 한마리 작은 새처럼 사랑스러운 여자도 어머니가 줄 수 있는 온기를 주지는 못한다. 어쩌면 그러한 존재에게 일부일처제는 가혹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어린여자와 살지만,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이 없이는 찬물을 몸에 뒤집어쓴 것 처럼 오돌오돌 떨리는 추위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nbsp; 내일까지 혜화동 로터리 아름다운 극장에서 공연중인 '김현탁의 햄릿'에서 느낀 것이다.&nbsp;<br>이 햄릿에서는 <br>'갈매기'의 뜨리고린이 오필리어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배신과 의심을 다룬 부분이다. 어린 햄릿이 바라보는 가운데, 머리를 감는 오필리어. 막대사탕을 주어 꽃다발처럼 손에 들고 사랑을 고백하는 햄릿.그런데,&nbsp;오필리어는 뜨레플레프의 니나가 되어 뜨리고린과 모스크바로 가버린다.&nbsp;오버랩이다. 갈매기의 뜨레쁠레프와 햄릿이. &nbsp; <br>그 느낌으로 배신감과 상실감을 표현하다니... <br><br>유년기의 혼란과 고립이 비극적인 삶의 원인이 되어 고통을 주는 것이며, 원인이 과거에 있고, 고통은 현재에 있고, 해결은 미래에 있는 것이 비극이며, 연극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연출가는 말한다.<br>...맞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br>그 유년기의 원형이 시대성과 역사성을 넘어서 하나의 구조처럼 자리잡고 있는&nbsp;혼란과 고립이라면. <br>그리고, 그 원인의&nbsp;치유가 미래에 달려 있다면. <br>정작 어린날에는 그 혼란이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되지도 않으며, 고립도 원인을 해석할&nbsp;수 없는 허전함과 슬픔의 정서일 수&nbsp;밖에없다면. 어린날...꿈을 가꾸는 꽃밭에 나비가 나는 향긋하기만한 시절이 결코 아니므로...<br><br>그런데<br>무대의 새로운 시도는 참으로 불편했다. <br>편안하고 아름다운&nbsp; 연극을 보려고 기대했던 것은&nbsp;아니다. <br>다만, 이 무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nbsp;진짜 어린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누구의 말처럼 진정한 리얼리티의&nbsp;표현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nbsp;리얼리티에 대한 욕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nbsp;<br>어린 배우들의 열연으로 애처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nbsp;조차 연출가의 의도였다면&nbsp;&nbsp;성공적이다.&nbsp;<br>그런데, 햄릿 역을 맡은 배우가 아팠던 것 같다. 입안에 물집이 생기고 입술이 부어올라 그러잖아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을 그 어린 배우의 대사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아무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조차 의도라고 봐달라기에는&nbsp;무리가 있다. 그건 사고다. <br>관객들은 몹시 불편했고, 연극을 보는 동안 햄릿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원형이 아니라, 어린배우가 애처롭다는 느낌만 강하게&nbsp;전해졌다. 어린날이 애처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날의 트라우마, 그 원형을&nbsp; 과연 진짜 어린이가 표현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의문이&nbsp;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맴돌았다. <br><br>어린 배우도 배우이기 이전에 어린이다. 이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어린 배우에게&nbsp; 생겼을지도 모르는 트라우마가&nbsp; 걱정되었다.&nbsp;물론아닐 수도 있고, 아니길 바란다. <br>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배우와 연기에 대한 것이다....리얼리티가 지나치면 무대가 보여주려는 진정성에 혼란이 생긴다. 예술가들의 불행과 비극은 그 자신이 작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객관화 시키지 못해서 생겨나는 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대개 몰입해서 연기하는 경우에 작품의 캐릭터가 자신에게 내재화되어 한동안 작품 이후에도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그 작품 속의 캐릭터를 체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조금 인식이 다르다. 배우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배우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br><br><br>이 작품에서 대사는 없고, 소리만이 옹알이가 되어&nbsp;메아리 치고 있었다.<br>옹알이하던 유년시절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 의도는 충분하게 전달되었다. <br>그래서 그 시절의 혼란과 고립에 대해 성숙한 어른들이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마음을 갖도록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면...더더욱 성공이다. 어른과 어린이의 언어가 어디까지 소통될 수 있을지, 평범한 어른들이 얼마나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시선의 각도를 맞추고 다가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더우기 상상력이 참으로 부족한 한국의 어른들에게는 엄청난 과제일테지만. <br><br>연출가에게 '왜?'냐고 질문할 수 있는 배우가 연기하기를 바라며....<br>가늘고 여린 팔의 어린 배우에게, 입술이 부르터가면서 연기하였던 그 배우에게 따뜻한 존중의 마음을 보낸다. 진지한 눈빛으로 커튼콜을 받던 그 시선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궁금했다. 훈련인가, 성장에 의한 성숙인가...<br><br>아방가르드...변방의 연극으로 시도와 해석은 손색이 없었으나, 배우와 관객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과 미적정서에 대한 배려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nbsp;혼란스런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nbsp;<br><br>바람이 차고, 비가 내렸다.&nbsp;<br>어린날 책가방과&nbsp;신발주머니, 게다가 폐품가방까지 들고 학교가던 길에 우산을 떨어뜨려 울음이 나왔던 시절이 생각났다. <br>얼마나 춥고 힘들었던가...무언가 제도화되고 만들어진 형식을 그저 배우고 따라야만 했던 그 시절이. <br><br>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인가. <br><br>이 모든 정서와 해석은 <br>어디까지나&nbsp;모든 것을&nbsp;교육의 문제로 환원하고야 마는 내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일런지도 모른다. <br><br>아방가르드...경계를 허무는 연극을 보고 난 감상이다. <br><br><br></p><br/><br/>tag : <a href="/tag/햄릿" rel="tag">햄릿</a>,&nbsp;<a href="/tag/아방가르드" rel="tag">아방가르드</a>,&nbsp;<a href="/tag/변방의연극" rel="tag">변방의연극</a>,&nbsp;<a href="/tag/김현탁의햄릿" rel="tag">김현탁의햄릿</a>,&nbsp;<a href="/tag/유년기" rel="tag">유년기</a>,&nbsp;<a href="/tag/트라우마" rel="tag">트라우마</a>,&nbsp;<a href="/tag/연기" rel="tag">연기</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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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5 Apr 2009 15:17:3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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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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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2 서한 <br><br>우리들 내부에 있는 필연적인 것을 현실화하고 우리들 외부에 있는 현실적인 것을 필연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이중의 임무를 실현하도록 우리는 상반된 두 힘으로 부터 강요를 받게 됩니다. 이 상반된 두 힘은 제각기 자신의 대상을 실현하도록 우리를 독려하는 까닭에 아주 적절하게 충동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충동들 가운데 제가 감성적 충동 sinnlicher Trieb 이라고 부르려 하는 첫번째 충동은 인간의 물리적 현존 또는 그의 감성적 본성으로 부터 출발하고, 인간을 시간의 제한 속에서 두고 물질로 만드는 일&lt;=오로지 자연법칙의 지배만을 받는 물리적 세계의 구성요소로 만드는 일&gt;에 종사합니다. 그렇지만 이 충동은 그에게 물질을 받아들이고 불변하는 존재인 자기 자신과를 구별하는 인격의 자유로운 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질이란 시간을&nbsp;채우는 변화나 또는 현실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충동은 변화가 있을 것과 시간이 내용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단지 내용으로 채워진 시간에 불과한 이러한 상태는 감수(感受)라고 불리우며, 물리적 존재가 현신 (顯身)하는 것은 오직 그 상태 뿐입니다. <br><br>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존재함으로써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이 배제됩니다. 우리가 어떤 악기로 하나의 음을 내며 그 악기가 낼 수 있는 모든 음들 가운데 오직 이 유일한 음만이 실현된 것입니다. 인간이 현재적인 것을 느낄 때에는 그의 모든 무한한 규정 가능성들은 이러한 유일한 방식의 현존에 한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감성적 충동이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최고의 제한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양(量)의 단위, 즉 시간의 채워진 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격은 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시간이 그를 잡아채는 한 지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br><br>인간이 유한한 존재인 한, 이 감성적 충동이 지배합니다. 그리고 모든 형식이 단지 물질에만 나타나고, 모든 절대적인 것이 단지 제한의 매개를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물론 인간성의 전 현상이 궁극적으로는 감성적 충동에 매어 있습니다. 비록 이 충동만이 인간성의 소질을 환기 시키고 신장시키시는 하지만, 인간성의 완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이 감성적 충동입니다. 파괴할 수 없는 끈으로 이 충동은 더 높이 지향하는 제 정신을 감각세계에 결박하고, 그리고 추상을 무한 속으로의 그 가장 자유로운 편력으로부터 현재의 제한 속으로 도로 불러들입니다. 사고는 이 충동을 순간적으로 회피할 수 있고, 확고한 의지는 감성적 충동의 요구에 대항하여 승리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억압된 본능은 곧 바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존재의 현실성, 즉 우리들 인식의 내용과 우리들 행동의 목적을 강요합니다. <br><br>저 충동들 가운데 형식충동 Formtrieb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두번째 충동은 인간의 절대적 존재 또는 그의 이성적 본능으로부터 출발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의 현상의 다양성 속에 조화를 가져오고, 그리고 상태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격을 주장하려고 애씁니다. 인격은 절대적이고 불가분의 통일체로서 자기 자신과 결코 모순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인격의 주장을 강요하는 이 충동은 자기가 영원히 요구해야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식충동은 자기가 지금 결정하는 것처럼 영원히 결정하고, 자기가 영원히 명령하는 것을 지금도 명령합니다. 따라서 이 충동은 시간의 전 연속을 포괄하며, 그것은 이 충동이 시간을 지양하고 변화를 지양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 충동은 현실적인 것이 필연적이고 영원하기를 , 그리고 영원한 것과 필연적인 것이 현실적이기를 바랍니다. 달리 말해서 형식 충동은 진리와 정의를 지향합니다. <br><br>전자&lt;=감성적 충동&gt;는 단지 여러가지 경우들을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면, 후자&lt;=형식충동&gt;는 법칙들을 부여합니다. 다시 말해서 형식 충동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각각의 판단을 위한 법칙들을, 행위&lt;=실천&gt;의 문제에 있어서는 각각의 의지를 위한 법칙들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든지, 즉 우리가 우리들 주관의 어떤 상태에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하든지 혹은 우리가 인식에 의해서 행동하든지, 즉 우리가 객관적인 것을 우리들 상태의 규정동기로 삼든지 간에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상태를 시간의 관할권에서 빼내어 , 그 상태에 모든 인간과 모든 시대에 타당한 현실성, 즉 보편성과 필연성을 부여합니다. 감정은 오직 이 주관에게 있어서 그리고 이 순간에는 진실하지만, 그러나 다른 순간 다른 주관이 나타나면 현재의 감수 (感受)의 진술을 철회할 수도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상&lt;=이성&gt;이 한번 그렇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은 영원히 그렇게 결정한 것이며, 그 진술의 타당성은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인격 자체를 통해서 보증된 것입니다. 성향은 오직 너 개인을&nbsp;위해 그리고 너의 현재의 욕구를 위해서 좋지만, 너 개인과 너의 현재의 욕구는 변화를 통해 일소될 수도 있고, 네가 지금 열렬하게 욕구하는 것은 언젠가는 너의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감정이 한번 그래야만 한다 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은 영원히 그렇게 결정합니다. -네가 진리를 진리인 까닭에 고백하고 정의를 정의인 까닭에 실행한다면, 너는 이미 하나의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경우에 타당한 법칙으로 만든 셈이고, 너의 삶의 한 순간을 영원으로서 취급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br><br>그러므로 형식충동이 지배하고 우리 내부에서 순수객관이 활동할 때, 존재는 최고도로 확대되고 ,모든 제한이 사라지고, 그리고 인간은 보잘것 없는 감각에 의해서 제한되었던 양의 단위에서 벗어나 현상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이념의 단위 Ideeneinheit로 향상됩니다. 이러한 조작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이상 시간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끝없이 연속적으로 우리들 내부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개체가 아니고 종(種)이 됩니다. 즉 모든 정신들의 판단이 우리들 정신을 통해서 표현되고, 모든 심정들의 선택이 우리들의 행동을 통해서 대표됩니다. <br>==============================================<br>칸트...! 다시 공부해야 겠다. <br>진정한 자유를&nbsp;위해... '21세기 소년이 생각난다. 켄지...' 켄지들...요시츠네...요시츠네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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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3 Apr 2009 14:14:17 GMT</pubDate>
		<dc:creator>나시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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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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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제 11서한<br><br>추상은 언제나 최고의 높이까지 올라가면 정지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두가지 종국개념에 도달합니다. <br>추상은 인간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것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구분합니다. 추상은 지속적인 것을 그의 인격이라 부르고, 변화하는 것을 그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br><br>인격과 상태-자아와 그 규정요소-는 절대적 존재&lt;=신&gt;에게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유한한 존재&lt;=인간&gt;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인격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상태는 변화하면, 상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격은 지속합니다. 우리는 휴식으로부터 활동으로, 격정으로 부터 무관심으로, 조화로부터 모순으로 옮겨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머물러 있으며, 그리고 우리들에게서 직접 생겨나는 결과 역시 그대로 지속합니다. 오로지 절대적인 주체에게 있어서만 인격과 더불어 일체의 그 규정요소도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까닭에 불변합니다. 신성이란 모든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신성입니다. 따라서 신성은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히 전부인 것입니다. <br><br>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 인격과 상태는 서로 상이하기 때문에, 상태가 인격을 근거로 할 수도 인격이 상태를 근거로 할 수도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인격은 변화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전자의 경우라면 상태는 불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인격이나 또는 유한성이 지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고하고 의욕하고 감각하는 까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존재하는 까닭에 사고하고 의욕하고 감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까닭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는 감각하고 사고하고 의욕합니다. <br><br>그러므로 인격은 자기 자신의 근거라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것은 변화로부터 흘러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절대적이고 자기 자신속에 근거를 둔 존재의 이념, 즉 자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상태는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근거를 가져야 합니다. 상태는 인격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번째로 모든 의존적인 존재나 또는 생성의 조건, 즉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생성의 조건이다." 라는 말은 동일성의 명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연속이란 그 무엇이 뒤따라서 생겨나는 조건이다라는 것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br><br>영원히 불변하는 자아속에 나타나고 그리고 오직 그 속에서만 나타나는 인격은 생성될 수 없고, 시간 속에서 시작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시간이 인격속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어떤 불변적인 것이 변화의 근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면 변화할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무엇은 그 자체가 절대 변화일 수가 없습니다. 꽃이 피고 시든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꽃을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불변하는 것으로 삼는 동시에, 그 꽃에게 저 두가지 상태를 나타내는 인격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우선 생성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반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인격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상태 속에 있는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태, 즉 모든 일정한 존재는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으로서의 인간 역시 비록 자신속의 순수지성이 영원할지라도 그렇게 시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시간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하나의 특정한 존재가 되지 못하겠지만, 실제 속에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로지 연속적인 표상을 통해서만 불변하는 자아는 현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br><br>그러므로 인간은 활동의 재료, 다시 말해서 최고의 지성&lt;=신&gt;이 자기 스스로로 부터 끌어낸 현실성을 먼저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은 지각의 도정에서 그 활동성을 공간상으로는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시간상으로는 자기 내부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내부에서 변화하는 소재를 결코 변화하지 않는 그의 자아가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변화 속에서 그가 항상 자기 자신을 지속하는 것, 모든 지각을 경험으로, 즉 인식의 단위로 만드는 것, 그리고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모든 현상방식을 영원히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이성적 본능에 의해서 인간에게 부과되어 있는 명령입니다. 오직 변화함으로써만 인간은 존재합니다. 또한 오직 변화하지 않은 채로 있음으로써만 그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은 변화의 큰 물결속에서 영원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 불변의 통일체일 것입니다. <br><br>비록 무한한 존재, 즉 하나의 신이 될 수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신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 즉 그 능력의 절대적인 알림(모든 가능성의 현실성)과 그 현상의 절대적인 통일(모든 현실적인 것의 필연성)을 자신의 무한함 임무로서 가지는 하나의 경향을 신적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 신성에 이르는 소질을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인격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신성에 이르는 소질을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인격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신성에 이르는 길은,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하나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인간의 감성속에 열려 있습니다. <br><br>인간의 인격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고 모든 감성적 소재로 부터 독립해서 관조될 때에는 그의 본성의 무한한 표현가능성을 위한 소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은 직관과 감각을 못하는 한 형식과 비어 있는 능력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감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고 정신의 모든 자아 활동으로부터 분리해서 관조될 때에는 감성이 없이는 단지 형식에 불과한 인간을 재료로 만드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 재료를 인간과 결합시키는 일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단순히 감각하고 욕구하고 그리고 단순한 욕구에의해서 활동하는 한, 만약 우리가 세계라는 명칭을 시간의 형식없는 내용만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세계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활동력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감성 뿐이지만, 오직 그의 인격만이 그의 활동을 그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세계&lt;=자연세계&gt;이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재료에 형식을 부여해야합니다. 반면에 단순한 형식이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소질에 현실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시간을 만들어 내고 불변하는 것에 변화를, 그의 자아의 영원한 통일성에 자연세계의 다양성을 대립시킬 때, 인간은 형식을 실현합니다. 시간을 다시 지양하고, 변화 속에서 불변을 주장하고 또 세계의 다양성을 그의 자아의 통일성에 예속시킬 때, 인간은 재료를 형성합니다. <br><br>이것&lt;=이러한 두 가지 존재론적 요소&gt;으로 부터 이제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요구, 즉 감성적&nbsp;· 이성적 본능의 두가지 기본법칙이 생겨납니다. 첫번째 법칙은 절대적 현실성Realität을 지향합니다. 즉 인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것 일체를 세계로 만들어야만 하고, 모든 자신의 소질을 발현시켜야 합니다. 두번째 법칙은 절대적 형식성Formalität을 지향합니다. 즉 인간은 단지 세계에 불과한 것 일체를 자신 속에서 말살해야만 하고, 모든 자신의 변화 속에 조화를 이룩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일체의 내면적인 것을 외면화하고 일체의 외면적인 것에 형식을 부여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 임무가 가장 완전하게 실현될 경우, 우리는 제가 출발점으로 했던 그 신성의 개념에 다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br><br>==================================<br>이분법<br>절대적 불변의 가치와 변화하는 상태<br>외부의 존재에 의해 감각하고 사고하고 의욕하는 인간의 근거는 불변의 인격, 즉 자기 자신의 근거.<br>영원히 불변하는 자아, 인격은 생성되거나 시간 속에서 시작될 수 없음<br>그러나 인간이 하나의 특정한 존재가 되려면 시간 속에서 생성될 수 밖에 없음 <br>오로지 연속적인 표상을 통해서만 불변하는 자아는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됨<br><br>인간은 지각활동에서 공간상 자기 외부의 존재에 대해, 시간상 자기 내부의 변화로 받아들임<br>이 내부의 변화에 동반하는 것이 그의 자아임<br><br>인간은 모든 변화 속에서 자신을 지속시키고, 모든 경험, 즉 인식의 단위로 만들며,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모든 현상 방식을 영원히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만드는 것이 이성적 본능에 의하여 인간에게 부과되어 있는 명령임. <br><br>완전한 인간은 변화의 큰 물결 속에서 영원히 자기 가신으로 남아 있는 불변의 통일체<br><br>신적인 것이란 그 능력의 절대적인 알림 (모든 가능성의 현실성)과 그 현상의 절대적인 통일(모든 현실적인 것의 필연성)을 자신의 무한한 임무로서 가지는 하나의 경향임<br>이 신성에 이르는 소질을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인격 속에 포함하고 있음<br>인간의 감성 속에 열려 있는 형태인 하나의 길<br><br>감성적 본능의 법칙은 절대적 현실성을 지향<br>이성적 본능의 법칙은 절대적 형식성을 지향<br><br>내면적인 것의 외면화, 외면적인 것에 형식부여가 완전하게 실현되면 神性 의 개념에 이르게 됨<br/><br/>tag : <a href="/tag/시간" rel="tag">시간</a>,&nbsp;<a href="/tag/공간" rel="tag">공간</a>,&nbsp;<a href="/tag/변화" rel="tag">변화</a>,&nbsp;<a href="/tag/지속성" rel="tag">지속성</a>,&nbsp;<a href="/tag/현실성" rel="tag">현실성</a>,&nbsp;<a href="/tag/형식성" rel="tag">형식성</a>,&nbsp;<a href="/tag/神性" rel="tag">神性</a>,&nbsp;<a href="/tag/감성적본능" rel="tag">감성적본능</a>,&nbsp;<a href="/tag/이성적본능" rel="tag">이성적본능</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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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0 Apr 2009 14:35:04 GMT</pubDate>
		<dc:creator>나시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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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10)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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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제 10서한<br><br>당신께서는 인간이 상반된 두 길로 자신의 목적을 이탈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시대는 실제로&nbsp;이 두 사도(邪道)를 헤매며 한편으로는 조야의, 다른 한편으로는 이완과 전도의 희생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 저와 일치하시고, 또 저의 앞 선 서한들의 내용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중의 혼란으로 부터 우리 시대는 미를 통해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br><br>그러나 어떻게 미적 교육은 이 상반된 두 결함과 동시에 대처해서 이 모순된 두 특성을 자신 속에서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br>미적 교육은 과연 야만인의 경우 본성&lt;=자연적 충동&gt;을 쇠사슬로 묶어 놓고 비문화인의 경우 그것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적 교육이 구속과 동시에 해방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미적 교육이 이 두가지 일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그것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br><br>미에 대해 발달한 감정은 풍습을 세련시킨다는 주장을 우리는 이미 넌더리 나도록 들었습니다. <br>이러한 주장은 명쾌한 지성, 활발한 감정, 관용 및 심지어는 품위있는 태도마저도 거의 일반적으로 세련된 취미와 결합시키고, 그 반대의 것은 보통 세련되지 못한 취미와 결합시키는 일상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의 가장 교화된 민족&lt;=희랍인&gt;의 경우 미적 감정 역시 최고로 발달했다는 실례와 동시에, 그 반대로 일부는 야만적이고 일부는 미개한 민족의 경우 미에 대한 무감각의 댓가로 조잡하거나 무뚝뚝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실례를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들의 생각은 때때로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혹은 그 사실로부터 도출된 결론의 합법성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미개한 민족들이 비난받는 저 야만을 전적으로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개화된 민족들이 칭찬받는 이 세련된 전적으로 그렇게 좋게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고대에 미적 문화를 결코 은총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상상력의 예술가들이 자기들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lt;=예컨데 플라톤의 [국가론]은 부분적으로 예술가들이 그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gt;<br><br>저는 오직 자신들이 고대 로마의 우미의 세 여신들&lt;=희랍신화에서는 Aglaia, Euphrosyne, Thalia&gt;이 베푸는 은총을 결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여신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획득의 노고와 손에 잡을 수 있는 이득 이외에는 어떤 다른 가치척도를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인간의 내부와 외부에 대한 취미의 조용한 노력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미적 문화의 우연한 단점들 때문에 그 본질적인 장점들을 도외시하지 않겠습니까? 형식을 갖추지 목한 인간&lt;=세련되지 못하고 예의 범절과 격식을 갖추지 못한 조야한 인간&gt;은 모든 우아한 화술을 아첨이라고, 모든 세련된 사교를 위장이라고, 모든 섬세하고 고결한 태도를 지나친 긴장과 점잖뺌이라고 하여 경멸합니다. 그는 우미의 여신들의 총아가 자신의 동반자로소 모든 행동 반경을 명랑하게 하고, 사무가로서 모든 두뇌들을 자기의 의도대로 지배하고, 그리고 작가로서 자신의 세기 전체에 자신의 정신을 불어 넣은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근면의 희생자인 그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서도 결코 주목받지 못하고, 그 자리로부터 어떤 장해물 하나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저 우미의 총아로부터 쾌적하게 지내는 독창적인 비밀을 결코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질보다는 오히려 가상을 섬기는 전도된 인간의 본성을 한탄하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br><br>그러나 미의 작용에 반대하고 그리고 경험에 기반을 둔 이 논지를 반박할 무서운 근거를 갖추고 있는 주목할 만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인즉, "미의 매력은 착한 사람의 손에 들어 있으면 찬양할 목적을 위해 작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경우에는 정반대의 것을 행하여 그 현혹적인 힘을 과오와 부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미의 본질에 모순되지 않는다. 취미는 단지 형식에만 주목하고 내용은 간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심정에게 결국에는 모든 현실성을 대체로 소홀히 하고, 매력적인 표현 때문에 진리나 도덕성을 희생하게 될 위험한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사물들 사이의 모든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지고, 오직 현상만이 사물들의 가치를 결정한다. "<br>그들은 또 계속해서 말합니다."미의 현혹적인 힘 때문에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진지하고 긴장이 되는 활동으로 부터 이탈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활동을 피상적으로 취급하려는 과오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겨나고, 어떤 전통적인 인습도 국민의 의견을 속박하지 않고, 인위가 자연본능을 억압하지 않는 하나의 시적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에는 흡족하기 때문에, 많은 나약한 지성은 시민제도와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인들의 상상의 세계에 있어서 정열이 가장 화려한 색채를 과시하고 법칙과 의무와 싸워서 보통 영역을 확보한 이래, 그 정열은 어떤 위험한 웅변술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진실이 지배했던 사교의 법칙을 이제는 미가 제시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공적만이 받아야&nbsp; 마땅할 존경을 외부적인 인상이 결정한다면, 사회는 과연 무엇을 얻게 되겠는가? 현상에 있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고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 미덕이라면 모든 것이 번창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모든 탈선이 횡행하고 아름다운 겉치장과 타협하는 모든 악덕이 유행함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술이 번창하고 취미가 지배하는 역사상 거의 모든 시대에 잇어서 인간성의 타락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한 민족에게 있어서 높은 정도로 널리 보편화된 미적 문화가 정치적 자유 및 시민적 미덕과, 아름다운 관습이 선한 관습과, 그리고 태도의 우아함이 그 진실성과 융합되어 원만하게 발전한 실례를 단 하나도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br><br>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제각기 독립을 주장하고 율법의 존중이 그들의 국가제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동안에 , 취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예술역시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고 미가 인간의 심정을 지배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물론 시문학은 이미 숭고한 비약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천재의 날개에 의해서만 비상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그것은 야만과 가장 가까이 경계를 이루고 흔히 암흑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빛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시대의 취미를 위해서 유리한 증언보다는 오히려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lt;=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499-429 B.C)&gt;나 알렉사드로스&lt;=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356-323 B.C&gt;의 치하에서 예술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취미의 지배력이 널리 보급되었을 때, 그리이스의 힘과 자유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고, 웅변술은 진실을 왜곡했고, 지혜는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나왔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고 미덕은 포키온 장군의 태도에 나타났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인들은 맨 처음에는 시민전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소모하고, 그 다음에는 동양의 사치를 통해서 무기력해지고, 결국에는 행복한 주권자의 멍에에 굴종한 연후에 희랍예술은 그들의 성격적 경직성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라비아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압바스 왕조&lt;=750-1280년 사이의 바그다드 회교도 교주들의 왕조, 모하메드의 백부 압바스의 후손들&gt;의 왕흘 하에서 그들의 전투적인 정신의 기력이 완화될 때까지는 전혀 문화의 서광이 비치지 않았습니다. 근대 이탈리아에서는 찬란한 롬바르디아 자유도시 국가동맹이 깨어지고, 플로렌츠가 메디치 가문에 종속되고 자주정신이 저 용기가 넘치는 모든 도시에서 불명예스러운 항복에 자리를 양보한 후에 아름다운 예술이 나타났습니다. 근대국가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자주성이 종식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만큼 그들의 세련미가 증가한 실례는 너무나 많으므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거의 쓸데없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디로든 항상 과거의 세계로 시선을 돌리면, 거기에서 우리는 취미와 자유가 서로 반목하고, 미는 단지 영웅적인 미덕의 몰락위에만 그 지배의 토대를 구축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br><br>하지만 미적 문화를 얻기 위해서 보통 희생되곤 하는 이 영웅적 성격의 기력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우수하고 위대한 것들 가운에 가장 효율적인 용수철이며, 이것의 손실은 다른 어떤 훌륭한 장점을 가지고도 보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미의 영향에 관해서 가르쳐주는 것에만 오로지 집착할 경우, 실제로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문화에 매우 위험한 감정의 발달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br>우리는 세련된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의 이완적 작용을 허락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야와 무정이라는 성격상의 손해를 보더라도 미의 융화적인 힘을 습득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경험은 이와 같은 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말하는 증언에 대해서 중요성을 인정하기 전에, 우선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미와 저 역사적 실례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는 미가 동일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대상은 경험과는 다른 원천을 가진 미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아름답다고 불리우는 것이 정당하게 그 명칭을 가질만한 것인지 어떤지는 오로지 저 개념에 의해서 판별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br><br><br>미의 이 순수이성 개념은, 만일 그러한 것이 제시될 가능성이 있다면-이 개념은 하등의 현실적인 경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실적인 경우에 관한 우리들의 판단을 먼저 바르게 시정하고 지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그리고 감성적.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미는 인간성의 하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합니다. 경험은 단지 개별적 인간들의 개별적 상태만을 제시할 뿐 결코 인간성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경험의 개별적이고 가변적인 현상방식으로 부터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리고 모든 우연한 한계를 제거함으로써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장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한동안 우리를 친숙한 현상세계와 사물의 생생한 현재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르르 획득하지 못할겁입니다. <br><br>=========================<br><br>칸트의 원리에 입각하다.<br>미의 순수 이성 개념은,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감성적 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해야 한다. 미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으로 제시도어야 하며, 이제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br>경험은 개별인간의 개별적 상태만 제시할 뿐이므로 절대적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순수 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br>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br><br>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된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우연성을 배제하고 절대적인 인식의 확고한 근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br><br>그렇게 얻은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현재 세계의 이중적인 문제(구속과 해방을 주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br><br/><br/>tag : <a href="/tag/미의순수이성개념" rel="tag">미의순수이성개념</a>,&nbsp;<a href="/tag/인간성의순수개념" rel="tag">인간성의순수개념</a>,&nbsp;<a href="/tag/인간의필연적조건으로서의미" rel="tag">인간의필연적조건으로서의미</a>,&nbsp;<a href="/tag/선험적방법" rel="tag">선험적방법</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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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7 Apr 2009 15:50:1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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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9)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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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제 9서한<br></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그러나 여기에는 어쩌면 하나의 순환논법&lt;=이론적 문화와 실천적 문화 사이의 순환논리&gt;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론적 문화가 실천적 문화를 &lt;=지적 교육이 도덕적 교육을&gt;유도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천적 문화는 이론적 문화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p><p class="바탕글">정치적 영역에서의 모든 개선은 성격을 고귀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만적인 국가제도의 영향하에서 어떻게 인간의 성격이 고귀해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가 아직까지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도구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정치적 부패에도 불구하고 순수무구하게 보존된 원천을 열어야만 합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이제 저는 지금까지의 모든 저의 고찰이 추구해 온 그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이 도구는 다름아닌 순수예술이고, 이 원천은 바로 예술이 보여주는 불멸의 모범 속에 열려 있습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예술은 학문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모든 것&lt;=보편 타당한 순수이성원리에 입각한 형식과 대립되는 역사적, 지역적 제한을 받는 기존의 형식&gt;과 인간의 인습이 도입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인간의 독단으로부터 절대적인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법자는 예술과 학문의 영역을 차단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 자체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진리의 애호가를 추방할 수 있을지언정, 진리 그 자체는 계속해서 존속합니다. 그는 예술가를 굴욕시킬 수 있을지언정, 예술자체를 위조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 두가지가, 즉 학문과 예술이 시대정신에 굴종하고 창작의 취미가 비판의 취미로부터 지배를 받는 것보다 더 비열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격이 냉혹하고 경직된 시대에 학문은 자신의 경계를 엄격히 감시하고, 예술은 규칙의 가혹한 속박을 받게 됩니다. 그 반면에 성격이 무력하게 이완되어 있는 시대에 학문은 호감을 사려고 할 것이고, 예술은 만족을 주려고 애쓸 것입니다. 전 세기 동안 철학자들 및 예술가들은 진리와 미를 저속한 인간성의 심연속에 빠뜨리는 일에 분주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그 일에 실패했지만, 진리와 미는 자신의 불멸의 생명력으로 그런 것을 타개하고 향상하려고 투쟁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예술가는 사실 자기 시대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가 동시에 시대의 제자이거나 시대의 총아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자비로운 신이 젖먹이를 제때에 그의 어머니의 가슴에서 떼내어 보다 나은 시대의 우유로 길러서 그를 멀리 떨어진 희랍의 하늘의 아래서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어른이 되면 그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자기 시대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시대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가멤논의 아들&lt;=오레스테스, 그는 타국에서 자랐지만 고향에 돌아와 간부인 어머니와 그 애인을 살해하여 이들에게 피살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불의와 저주로 더럽혀진 자기 가문의 명예를 회복함&gt;처럼 무시무시하게 자기 시대를 정화하기 위함입니다. 소재는 비록 현대에서 택하겠지만, 형식은 한층 더 고귀한 시대나 또는 모든 시대의 저편에서, 즉 그의 본질의 절대적인 불변의 통일체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여기 그의 수호정령의 순수한 에테르로부터 미의 원천이 흘러내리고, 그것은 저 아래 혼탁한 소용돌이 속에서 뒹구는 인류와 시대의 타락에 오염되지 않은 채 흘러내리는 원천입니다. <br>일시적인 변덕에 의해서 그의 소재는 고귀해질 수도 타락할 수도 있겠지만, 순수한 형식은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세기의 로마인은 이미 자신의 황제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으나 조각상들은 여전히 의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신들이 이미 오래전에 웃음거리가 되었는데도 사원은 그의 눈에 신성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로와 코모두스와 같은 악인의 파렴치한 행동을 덮어주었던 건축물의 양식은 이들의 비행을 수치스럽게 만들 정도로 고귀했습니다. 인간성은 그 존엄을 상실했지만, 예술이 그것을 구원해서 의미있는 돌 속에 보존했던 것입니다. 진실은 가상&lt;=예술작품&gt;속에 존속하며, 모사품에 의해서 원형이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고귀한 예술이 고귀한 자연보다 오래 살아남았던 것처럼, 고귀한 예술은 또한 감흥에 있어서도 사물의 모양을 형성하거나 각성시킴으로써 고귀한 자연을 능가합니다. 진리가 승리하는 빛을 깊은 심정 속에 보내기도 전에 시인의 창작능력은 그 진리의 빛을 가로채서 골짜기에는 아직도 축축한 밤이슬이 남아 있는데 인간성의 산봉우리는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그러나 어떻게 예술가는 사방에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부패한 시대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겠습니까? 그는 시대의 판단을 무시하면 됩니다. 위를 향해서 주신의 품위와 율법&lt;=영원히 필요불가결한 이성법칙의 지상명령&gt;을 주시하고, 아래를 향해서 행운과 욕심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일시적인 순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지도 모르는 무가치한 일을 기꺼이 삼가는 동시에 초조하게 시대의 보잘것 없는 소산에 절대적인 척도를 사용하는 광신도 삼가야 합니다. 현실문제를 거기에 정통한 오성에게 위임하고, 가능한 것과 필연적인 것을 결합시켜서 이상을 낳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 이상을 예술가는 가상과 진리속에, 상상력의 유희와 행동의 진지함 속에, 또 모든 감각적 형식과 정신적 형식 속에 부각시켜서 그것을 말없이 무한한 시간 속에 투입해야 합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그러나 이러한 이상이 자신의 영혼 속에서 불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 이상을 침묵의 돌 속에 새겨넣거나 또는 진지한 말로 토로하여 시간이라는 충실한 손에 위임하는데 필요한 창조적인 휴식과 강한 인내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여유있는 수단을 거쳐가기에는 너무나 성급해서 신성한 형성충동은 흔히 직접 현실이나 행동적 생활과 충돌하여 도덕적 세계의 무형식의 소재를 변형하려 듭니다. 인류의 불행은 그것을 느끼는 인간에게 절박하게 호소하고, 인류의 타락은 더욱 더 절박하게 호소합니다. 그리하여 활력이 넘치는 영혼속에서 열광이 불타오르고, 불타는 열망이 조급하게 그를 행동으로 몰고갑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도덕적 세계의 무질서가 자신의 이성에 불쾌감을 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자신의 자애에 고통을 주지나 않는지를 스스로 자문했겠습니까? 그가 아직까지 그 대답을 모른다면, 특정하고 신속한 결과를 주장하는 자신의 열의를 보면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순수한 도덕적 충동은 절대성을 지향하며, 그 도덕적 충동에게 있어서 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현재로부터 불가피하게 전개되는 순간 그 충동에게 있어서 미래는 현재가 되는 것입니다. 전혀 제한을 모르는 이성 앞에서 방향설정은 곧 완성인 동시에, 그 길은 사람이 일단 들어서기만 하면 벌써 다 지나가 버린 것이 됩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진리와 미에 대한 젊은 애호가가 저에게 어떻게 하면 시대의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lt;학문과 예술의 &gt;고귀한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대가 영향을 미치는 세계&lt;=자신의 시대와 주변&gt;를 향해 선의 방향을 제시하여라. 그러면 시대의 조용한 리듬이 그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그대가 선도를 통해서 시대의 사상을 필연적이고 영원한 사상으로 향상시키고, 행동이나 혹은 창조를 통해서 그 필연적이고 영원한 사상을 구체적인 시대의 충동의 대상으로 만든다면, 그러면 그대는 이미 이러한 방향을 시대에게 부여한 셈이다. 망상과 독단의 구조가 기울고 있다고 그대가 확신하는 순간, 그 구조는 무너질 것이고, 무너져야만 하고, 그리고 그것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인간의 외부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그러한 구조는 무너져야 한다. 얌전하고 고요한 그대의 심정 속에 승리하는 진실을 육성하여 그것을 그대 밖으로 미속에 제시하여라. 그러면 사상이 그 진실을 섬길 뿐만 아니라 감각도 그 진실의 출현을 기꺼이 움켜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현실에 부여해야만 하는 모범을 현실 세계로부터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대의 마음속에서 이상 세계의 호위자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감히 의심스러운 현실사회로 나서지 말아라. 그대의 세기와 더불어 함께 살아라, 그러나 세기의 피조물이 되지는 말아라. 그대의 동시대인들을 위해 일하여라. 그러나 그들이 칭찬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행하여라. 그들의 죄를 분담하지 않도록 하되, 고귀한 체념으로 그들의 형벌을 분담하고, 그들이 없어서도 곤란하고 동시에 짊어져도 곤란한 멍에에 자유롭게 굴복하여라. 그대는 그들의 요행을 경멸하는 의연한 용기를 통해서 그대가 비겁함 때문에 자신들의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입증할 것이다. 그대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야 할 경우에는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자세를 마음 속에 생각해라.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행동하려고 할 경우에는 그들의 현재의 모습을 마음 속에 생각하라. 그들의 품위를 통해서 그들의 갈채를 구해라.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그들의 무가치에 관계하고 있음을 참작하여라. </p><p class="바탕글">그러면 한편으로는 그대 자신의 고귀함이 그들의 고귀하을 일깨워 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타락이 그대의 목적을 근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대의 진지한 원리들을 꺼려하지마는 유희&lt;=예술적 활동이나 표현&gt; 가운데라면 그대의 진지한 원리들을 감당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취미는 그들의 마음 보다 더 순수하다. </p><p class="바탕글">바로 이 점에 있어서 그대는 비겁한 도망자를 붙잡아야 한다. 그대는 그들의 원칙을 공격해도 소용이 없고, 그들의 행동을 저주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한가한 틈을 노려서 그대는 그대의 교화의 창조적인 수완을 발휘할 수가 있다. 그들의 오락에서 방자, 경솔, 조야함을 추방하라. 그러면 그대는 부지불식 중에 그들의 행위로부터,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의 성향으로부터 그것들을 추방하게 되리라. 만약 그러한 특성들이 발견되거든 고상하고 위대하고 정신적인 형식들로 감싸주고, 그것들을 우아한 상징을 가지로 포위하여라. 가상이 현실을, 예술이 자연을 극복할 때까지. <br><br>===================================<br><br>이론적 문화가 실찬적 문화를 유도해야 한다. 정치적 영역에서의 모든 개선은 성격을 고귀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br>정치적으로 부패해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예술의 순수성과 보존된 원천 속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학문과 예술은 정치적으로 어떤 차단을 받더라도 그 순수한 영역은 보존해왔고, 불멸하기 때문이다. <br>예술가는 시대와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 시대 안에서 떨어져 나와 그 시대를 정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닐 때까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일시적인 명예를 위해 시대의 보잘것 없는 소산에 절대적인 척도를 사용하거나 행운과 욕심을 가져버도 안된다. <br>예술가는 현실문제를 오성에게 위임하고, 가능한 것과 필연적인 것을 결합시켜서 理想을 낳도록 노략해야 한다.&nbsp; 이 이상을 예술가는 가상과 진리 속에, 상상력의 유희와 행동의 진지함 속에 , 또 모든 감각적 형식과 정신적 형식 속에 부각시켜서 그것을 말없이 무한한 시간 속에 투입해야 한다. <br><br>칭찬하는 일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행하라. <br>형벌을 분담하고 멍에에 자유롭게 굴복하라.<br>영향을 미쳐야 할 대상들의 현재의 모습을 마음 속에 생각하고 영향을 줄 때에는 마땅히 되어야 할 자세를 마음 속에 생각하라. <br>고귀함을 일깨우되 예술적 활동이나 표현의 방식을 통해서 하라.<br>그래서, 현재 그들의 오락에서 방자, 경솔, 조야함을 추방하라. <br><br>가상이 현실을, 예술이 자연을 극복할 때까지.<b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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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5 Apr 2009 09:10:39 GMT</pubDate>
		<dc:creator>나시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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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누가 대한민국의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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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사회가&nbsp;암울한 때 일수록 뜻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문화 아이콘들이 생겨나 희망의 불씨를 만들어주곤 한다.&nbsp;<br>지난 몇년 동안&nbsp;사회전반에 대해 참담한 심정을 그저 안고 답답해 하고만 있었다.&nbsp; <br>그런데, 최근 몇일&nbsp;사이에 희망을 느끼고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br>그 하나는 '장기하와 얼굴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오늘, 마지막날 , 마지막회로 겨우 턱걸이 해서 본 연극 '누가 대한민국의 20대를 구원할 것인가?'였다. <br><br>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무대를 통해서 시대와 함께 아파한다. <br>동시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 시대를 함께 이루고 있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문제가 던져주는 공포에 맞서 함께&nbsp;싸울 힘을 주고 받는 것이다. <br>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사회에 대해 갖는 책무성은 문제와 그 공포를 이겨낼 힘과 희망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주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감동을 정서에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자극과 도덕적인 자극을 주어 숭고함으로 이끌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nbsp;참으로 아름답게 구조화된 작품은 세상에 총체적인 반성을 이끌어주고, 다시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단초가 된다.&nbsp;<br><br>'혜화동 1번지' 4기 동인 페스티벌에서 '마피아 게임을 하다'라는 타이틀로 5편의 연극을 이어간다고 한다. <br>오늘의 '누가 대한민국의 20대를&nbsp; 구원할 것인가?' 는 그 첫 무대였고, 오늘 막을 내렸다. 안타깝다. 좀더 빨리 알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권했을 것을...<br><br>이제 감히 희망을 얘기하고싶다. <br>그동안은 내적강제로서 다짐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동시대를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로 부터 구체적인 희망의 새순을 보았기에 자신이 생긴다. <br>20대에게...기성 세대들은 그동안 너무 차가왔다. 고생없이 자란 세대라서 어려운 줄 모르고, 어려운 일 안하려 한다고, 버릇없다고 타박만 늘어놓았다. <br>같이 살아가야 하고, 그들은 기성세대가 그렇게도 사랑(?)함을 자처하는 '국가'의 미래가 아닌가 말이다. <br><br>그들이 숨쉬는 곳에서 희망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 <br><br>전부 13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된 '코믹-다큐-파노라마 형식'의 연극은 지금의 언어코드와 맞고, 전세대를 포괄하는 포용성과 대중의 정서를 따뜻하게 배려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다. 지적, 도덕적, 미적 감동을 매우 상큼한 터치로 던져주는 센스.<br>각 장의 제목만 보아도 얼마나 시대의 언어에 민감한가를 알 수 있다. <br><br>1장&lt;10대와 촛불소녀&gt;<br>-나는 네가 지난 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br>2장&lt;그럼, 누가 2MB를 찍었나?&gt;<br>-나는 네가 그때 누굴 찍었는지도 알고 있다. <br>3장&lt;고해성사&gt;<br>-취직만 시켜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 <br>4장&lt;20대는 찌질이인가?&gt;<br>-이노무시키들, 니네 때문에 대한민국이 이 모양이잖아!<br>5장&lt;대한민국 20대의 라이프 스타일&gt;<br>-어느 대학생의 통장 잔고<br>6장&lt;낭독의 재발견: 시낭송&gt;<br>-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br>7장&lt;대한민국 20대 미션2; 알바의 지옥&gt;<br>-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두 희망을 버려라.<br>8장&lt;대한민국 20대 미션1:취업 6종세트&gt;<br>-제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br>9장&lt;100번 토론:20대 요즘 것들&gt;<br>-그래 우리 무식하다. 무식한데 뭐, 보태준 거 있냐?<br>10장&lt;비교체험 극과극: 당신들의 천국1&gt;<br>-70년대 유신세대, 그 때를 아십니까?<br>11장&lt;비교체험 극과 극 : 당신들의 천국2&gt;<br>-80년대 386세대, 그때를 아십니까?<br>12장&lt;On Air:Fucking Korea Radio&gt;<br>-결국, 제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br>13장&nbsp;&lt;20대 권리선언&gt;<br>-노동권, 주거권, 보건권, 교육권을 보장하라.<br><br>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에서 편하고 좋은 조건의 일자리만 찾으려고 하지 말라고, 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하려는 의지, 구하는 자가 얻을 것이라고 격려(?)한다.&nbsp; 20대가 원하는 것은 편하고 쾌적하지 않더라도, 안정된 일자리, 제 2의 가정을 원하는 것이다. 선택된 5%(6종세트를 다 갖춘-‘ 학점·영어(토익·해외연수)·학벌·인턴·봉사활동’ 등 ‘취업 5종 세트’에 ‘부모 배경’이 추가된것이 &nbsp;‘취업 6종 세트’다.)를 제외한 나머지 95%가 절망하고 있다. <br><!--StartFragment--></p><p class="바탕글">월평균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 20대,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현실이다. 국민소득 ‘3만달러로 가자’는 시대에서 (지금은 그렇게 말할 처지도 아니지만) 젊은이들은 시급 3500원으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는다.&nbsp;‘알바’나 ‘임시직’은 이미 ‘정규직’으로 가는 임시 징검다리가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평생 ‘저임금 비정규직’을 전전해야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nbsp; <br><br>우리 시대의 20대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재민'인 이나라의 국민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런데, 그들이 묻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br>'20대의 인권선언'을 보면, 마치 70년대&nbsp; 고 전태일 열사의 외침을 듣는 것 같다.<br>&nbsp;<br>이렇게 외칠 수 있고, 비정규행 티켓을 찢을 수 있고, 새로운 대안을 말하고 있는 무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br>세상이 젊은이의 불안이 초래할 사회적 위기에 무심하고 후속세대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희망이 아닌, 절망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br><br>=========================<br>연출가의 &lt;작품을 고민하면서&gt;를 그대로 옮겨본다. <br><br>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지난 2008년은 촛불의 정치로 기억될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이다. <br><br>이 작품은 이제 그 뜨겁던 촛불의 행렬이 시작된 지 한 해가 지난 이 시점에서 그날 거기에 갔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서 시작된다. 거기에는 엄마, 아빠를 따라 손잡고 나온 꼬마들도 있었고, 교복을 입은 남녀 중고생들도 있었고, 학교를 빼먹은 대학생 커플들도 있었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채 퇴근길의 스트레스를 푸는 회사원들도 있었고, 그 회사원 남편을 기다리다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님들도 있었고,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청장년층의 아저씨들도 있었고,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있었다. 이리저리 따져보자면, 명절때나 한 번 다 모일 듯한 대 가족이 한꺼번에 다 나온 셈이었다. <br>왜 온 가족이 거기에 나간 것일까? <br><br>이 작품은 그들 가운데 전염병처럼 번지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공포로 절망의 88만원 세대를 체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유례가 없는 '버려진 세대인 지금의 20대들의 절망에 주목한다. 40대와 50대의 남자가 주축이 된 한국 경제의 주도세력이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형국이라고 한다. 경제적 활동의 맨 밑바닥에서 생산과 유통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20대가 그에 적합한 대우를 지금 받지 못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뒤늦은 세대 독립과 경험의 부족, 강요된 승자 독식 게임으로인한 획일성으로 앞으로의 미래도 암울하기 짝이 없다는 20대, 지금의 20대는 30, 40대가 거쳐 간 자화상이었고, 또 그들의 자녀들인 10대가 앞으로 거쳐가야할 인생의 중요한 통과제의다. 20대는 인생의 꽃이라고 흔히 말한다. 청춘이라는 말 앞에서 누구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누구도 믿지않는 20대, 누구도 밝은 전망을 선뜻 약속할 수 없는 20대, 꿈을 강요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20대, 이젠 정말 개천에서 용이 나지않는 20대들에게 우리는 무슨 얘기를 건넬 수 있을까? <br><br>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고도의 성장지상주의자들은 앞으로 더 강력한 무한경쟁의 시나리오를 예고하고 있다. 승자가 독식하는 게임에서 20대는 빈손으로 이미 뒤처져서 출발하는 루저의 운명을 타고났다. 무한경쟁의 시대는 세대 내에서의 경쟁 뿐만 아니라 세대간의 경쟁도 불사한다. 과연 경쟁에서 살아남은 30, 40대가 20대들에게 손을 잡아주겠는가? 당신은 혹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요즘 젊은 애들이 어떤 애들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마 누구도 2009년 대한민국의 20대에게 차근차근 말을 걸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손가락질이라도 안하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br><br>이 작품은 대한민국의 20대를 바라보는 각 세대들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의 20대의 초상화를 그려본다. 그리고 그 꽃다운 청춘들이 서 있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들을 구원할 마지막 선택을 찾아본다. 병든 청춘들이 그늘져 있는 사회가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한 소망이다. 누가 대한민국의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그 몫은 바로 당신에게 달려 있다. </p><br/><br/>tag : <a href="/tag/20대" rel="tag">20대</a>,&nbsp;<a href="/tag/누가대한민국20대를구원할것인가" rel="tag">누가대한민국20대를구원할것인가</a>,&nbsp;<a href="/tag/비정규" rel="tag">비정규</a>,&nbsp;<a href="/tag/혜화동1번지" rel="tag">혜화동1번지</a>,&nbsp;<a href="/tag/마피아게임" rel="tag">마피아게임</a>,&nbsp;<a href="/tag/루저" rel="tag">루저</a>,&nbsp;<a href="/tag/청춘" rel="tag">청춘</a>,&nbsp;<a href="/tag/20대인권선언" rel="tag">20대인권선언</a>,&nbsp;<a href="/tag/연극실험실" rel="tag">연극실험실</a>,&nbsp;<a href="/tag/장기하와얼굴들" rel="tag">장기하와얼굴들</a>,&nbsp;<a href="/tag/희망" rel="tag">희망</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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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2 Apr 2009 15:05:2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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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8)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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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8 서한<br><br>그렇다면 철학은 아무런 용기도 희망도 없이 이 &lt;정치적&gt;영역에서 물러나야합니까?<br><br>그렇지 않습니다! 이성 그 자체는 사실 자신의 무기에 대항하려는 난폭한 권력과 직접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사투른의 아들&lt;=제우스&gt;이 그러했듯이 이성도 스스로 이 암담한 투쟁장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우스가 자신의 손자&lt;=아킬레스&gt;에게 한 것처럼 이성은 투쟁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엄있는 인물을 선정해 신의 무기로 무장시켜 그의 승리하는 힘을 통해서 중대한 결정을 합니다. <br><br>이성은 법칙을 발견하고 제시하면 그의 임무를 다한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용기있는 의지와 활발한 감정이 집행해야 합니다. 진리가 여러 힘들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진리 그 자체는 먼저 힘이되어야 하고 자신의 대행자로 현상계에 충동을 제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충동은 감각세계에 있어서의 유일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직까지 자신의 승리하는 힘을 입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진리를 드러낼 줄 몰랐던 지성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린 심정과 진리를 대행하지 못한충동의 잘못입니다. <br><br>철학과 경험이 밝혀준 모든 빛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반화된 편견들의 지배와 정신의 암흑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br>현시대는 계몽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 우리의 실천원리들을 바로잡기에 충분할 만큼 지식들이 발견되어 널리 퍼져있습니다. 자유로운 연구정신은 오랜동안 진리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고 있던 허망한 개념들&lt;=망상적인 생각들&gt;을 일소했고, 광신과 기만과 거짓된 궤변으로 부터 자신을 정화했으며, 맨처음 우리들로 하여금 자연을 배반하게 했던 철학자체는 이제 자연의 품속으로 되돌아 오도록 우리를 큰 소리로 절박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아직까지도 여전히 미개인으로 머물러 있단 말입니까? <br><br>그러므로 진리가 제 아무리 밝게 빛날지라도, 또한 진리가 제아무리 활발하게 납득시킬지라도 그 진리의 수용과 수취를 방해하는 무엇인가가 사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의 심정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 고대의 현자&lt;=호라티우스&gt;는 인간의 심정 속에서 진리의 수용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디 현명하여라 sapere aude'라는 그의 의미심장한 표현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대담하게 현명하라는 뜻입니다. 나태한 본성&lt;=관능적 타성에 젖어서 안일만을 탐하는 자연&gt;과 비겁한 마음이 우리의 진정한 계몽에 반대해서 제시한 방해물들과 싸우는 데는 적극적인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고대신화는 완전무장을 갖춘 지혜의 여신을 주피터의 머리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최초의 행동은 호전적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순간에도 이미 지혜의 여신은 감미로운 휴식에서 억지로 쫓겨나기를 꺼리는 감각들과 힘겨운 투쟁을 해야합니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궁핍과의 싸움에서 너무나 지치고 의기소침한 나머지, 새롭고 보다 더 힘든 오류와의 투쟁을 위해서 분기할 의욕조차도 없을 정도입니다. 스스로 매우 힘든 사고를 회피하는 일에 만족한 채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 기꺼이 자신의 사고에 대한 후견인 역할을 맡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 속에서 보다 더 고귀한 욕구가 생긴다면, 국가와 승려가 이런 경우를 위해서 마련한 상투적인 사고 형식들을 목마른 신념으로 붙듭니다. 이러한 불행한 인간들은 우리의 동정을 받을만 합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운명에 의해서 물질적 욕구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되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그 아래에 굴종하는 다른 인간들을 우리는 마땅히 경멸할만합니다. 이러한 인간들은 자시의 꿈의 쾌적한 환영을 쫓아내 버리는 진리의 밝은 빛 보다는, 더욱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공상이 제멋대로 안락한 형태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희미하고 불명확한 개념을 더 선호합니다. 적개심에 가득찬 인식의 빛이 일소해야만 할 바로 이러한 기만상태 위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의 완전한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에게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빼앗는 일부터 시작하는 진리를 그들이 매우 비싼 값으로 사겠습니까? 지혜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미 현명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에 그 명칭을&nbsp;붙인 현자 &lt;=철학에 '철학Philosophie'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gt;가 이미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br><br>그러므로 오성의 모든 계몽은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한도내에서만 존경을 받을만 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오성의 계몽도 어느정도까지는 성격에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두뇌에 이르는 길은 마음을 통해서 열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수능력의 함양은 현시대의 보다 더 절실한 요구입니다. 그 이유는 감수능력의 함양이 삶을 위해서 보다 더 효과적인 통찰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 통찰력의 향상을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br><br>===============================<br>어제 당선된 경기도 교육감님은 '&nbsp;창의성 향상이 학력신장이다. '<br>삶을 위한 통찰력의 향상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이었다. 통찰...감수능력의 함양을 위해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적어도 경쟁을 부추겨 몇가지 지식을 더 주어넣는다고 해서 함양될 능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br>공부에 투자하는 비용과 시간은 많은데, 정작 함양되어야 할 능력은 고사하고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목적의식조차 주체적으로 찾지못한다. 두뇌에 이르는 길은 마음을 통해서 열려져야 한다. <br/><br/>tag : <a href="/tag/감수능력함양" rel="tag">감수능력함양</a>,&nbsp;<a href="/tag/창의성교육" rel="tag">창의성교육</a>,&nbsp;<a href="/tag/경기도교육감" rel="tag">경기도교육감</a>,&nbsp;<a href="/tag/경쟁교육" rel="tag">경쟁교육</a>,&nbsp;<a href="/tag/경쟁과서열" rel="tag">경쟁과서열</a>,&nbsp;<a href="/tag/오성" rel="tag">오성</a>,&nbsp;<a href="/tag/쉴러" rel="tag">쉴러</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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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9 Apr 2009 15:29:4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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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7)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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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제 7서한<br><br>우리는 이러한 활동&nbsp;&lt;=전술한 보다 높은 예술, 미적 교육을 통한 인간성의 총체적 발달이라는 과업&gt;을 과연 국가로부터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현재의 성격으로 보아서 폐단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성이&nbsp; 이념 속에서 자신의 임무로 부과한 국가는 이러한 보다 나은 인간성을 구축할 수 있기는 커녕, 오히려 그 자체가 먼저 그 &lt;종합적&gt; 인간성 위에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저의 연구는 한동안 멀리했던 그 지점으로 다시 저를 데려온 것 같습니다. <br>현시대는 우리에게 국가를 도덕적으로 개선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제시한 원리들이 타당하고, 그리고 경험이 현시대에 대한 저의 저술을 뒷받침해준다면, 인간 내부의 분열이 다시 회복되고 인간의 자연이 스스로 예술가&lt;=국가의 고안자&gt;가 되어 이성의 정치적 창조의 현실성을 보장해줄 수 있을만큼 완전하게 발전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러한 국가개선에 대한 모든 시도를 시기상조이고 그리고 그것에 근거를 둔 모든 희망을 망상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br><br>자연은 그 물리적 창조의 과정에서 우리가 도덕적 창조에 있어서 걸어나가야 할 길을 미리 보여줍니다. 보다 저속한 조직들 속에서 원소적인 힘들간의 투쟁이 진정되기 전에는 자연은 물리적 인간의 고귀한 형성의 단계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윤리적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원소들간의 투쟁, 즉 맹목적인 충돌들 간의 갈등이 우선 중단되고 조잡한 대립이 그의 내부에서 중단된 연후에 우리는 다양성의 촉진을 감행해도 괜찮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윤리적 인간의 성격의 독립성이 보장되고 타인의 압제적인 형식에 굴종하지 않고 기품있는 자유를 획득한 연후에 그 자신 속에 있는 다양성이 그의 자의를 제멋대로 남용하고 있는데 그에게 자신의 자유를 보여주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문화인이 그의 자유를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데 그에게서 자신의 자의성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자유로운 원칙들이라는 선물이 격분하는 힘과 결탁해서 이미 막강한 자연의 힘을 더욱 강화한다면, 그러한 선물은 전체에 대한 반역이 될것입니다. 반면에 조화의 법칙이 이미 지배적인 나약함 및 물리적인 제한과 결합해서 독립성과 개성의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꺼버린다면, 그것은 개체에 대한 독재가 될 것입니다. <br><br>그러므로 현시대의 성격이 우선 자신의 깊은 타락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맹목적인 폭력으로부터 탈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의 단순, 진실 및 충만으로 복귀해야합니다. 이것은 한 세기 이상 계속될 임무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시도들은 개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기꺼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lt;=그 많은 시도들의 개별적인 성공&gt;에 의해서 전체에게는 아무것도 개선되는 점이 없을 것이며, 행동의 모순이 항상 원칙들의 일관성에 위해되는 사실을 입증할 것입니다. 세계의 다른 쪽에서는 흑인의 인간성을 존중하는가 하면 유럽에서는 사상가들의 인간성을 모독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lt;=북미대륙에서는 흑인의 노예해방이 성공하는가 하면 유럽에서는 볼프와 루소 등과 같은 사상가들이 박해를 받고 있는 형편을 의미함.&gt;옛날의 케케묵은 원칙들이 그대로 남아서 다만 시대의 옷을 걸치고서는 예전에는 교회의 권위로 이루어지던 억압을 앞으로는 철학이 그 명분을 내세울 것입니다. 처음의 시도에서 항상 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유에 질겁하여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편안한 예속상태에 몸을 맡길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사건건 자질구레한 일에 간섭하는 후견인에 절망하여 거칠고 방종한 자연상태로 달아날 것입니다. 인간본성의 나약함을 구실로 찬탈이 이루어지고, 인간본성의 위신을 구실로 삼아 폭동이 일어나고, 그 맹목적인 히이 간섭해서 있지도 않은 원리들간의 투쟁을 마치 평범한 주먹싸움을 다루듯이 해결할 것입니다. <br>=================<br><br>옛날에는 교회의 권위가, 이후에는 철학이 인간을 억압했다면...요즘은 데이타가 인간을 억압한다. <br><br><br/><br/>tag : <a href="/tag/압제적인형식" rel="tag">압제적인형식</a>,&nbsp;<a href="/tag/물리적제한" rel="tag">물리적제한</a>,&nbsp;<a href="/tag/조화의법칙" rel="tag">조화의법칙</a>,&nbsp;<a href="/tag/적의모습으로나타나는자유" rel="tag">적의모습으로나타나는자유</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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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7 Apr 2009 13:42:5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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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6)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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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제 6서한<br><br>문화화된 모든 민족들은 이성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궤변을 통해 자연으로 부터 이탈하려고 합니다. <br><br>우리가 단순한 자연에 대해 자랑으로 여기는 교양과 세련의 명성도 희랍의 자연에 비하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희랍인의 자연은 우리 근세인의 자연과는 달리 희생되지 않고, 예술의 모든 매력과 지혜의 모든 위엄이 잘 배합되어 있었습니다. 희랍인들은 단순히 우리 시대에 낯설은&lt;=현시대와는 관계가 먼&gt; 단순성을 통해서만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경쟁자인 동시에 흔히 우리의 모범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형식과 동시에 내용이 완전하고, 철학적인 동시에 창조적이고, 부드러운 동시에 정력적으로 희랍인들은 젊은이다운 상상과 남성다운 이성을 훌륭한 인간성 속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br><br>그 당시는 감각과 정신이 엄격하게 구분된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시문학은 아직 지혜와 겨루지않았고, 사변은 아직 궤변에 의해서 모욕당하지 않았습니다. 양자는 필요한 경우에 서로 자신들의 기능을 교환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만 진리를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아무리 높이 올라갈지라도 이성은 항상 물질을 끌어당겼으며, 이성이 아무리 정교하고 예리하게 물질을 분리할지라도 결코 그 물질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은 인간의 본성을 분해해서 각각을 훌륭한 신의 영역속에 확대하여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의 본성을 산산조각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혼합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인간성이 개별적인 신에게 있어서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br>우리 현대인의 경우 사정이 정말로 다릅니다!&nbsp; 우리 현대인의 경우에도 종의 형상은 개개인들 속에 확대되어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하게 변화된 혼합이 아니라 절단된 조각들의 형태로 투사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lt;=인류&gt;의 총체성을 주워 모으기 위해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일일이 묻고 돌아다녀야만 합니다. 여러가지 정서 능력, 소질들 가운데 일부분만 발전시키고 나머지 소질들은 마치 발육이 정지된 식물처럼 퇴화되어 희미한 흔적만이 암시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br><br>현재의 종족들은 훌륭한 장점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쇄된 구성원들 속에서 경쟁해야 하고, 전체는 전체와 경합해야 합니다. 어떤 현대의 개인이 인간성을 내걸고 아테네의 개인과 맞서 인간 대 인간으로 싸우려고 나서겠습니까? <br><br>도대체 어째서 희랍인은 한사람 한사람이 다 자기 시대의 대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데, 현대인은 감히 그렇게 될 수 없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희랍인은 일체를 융합하는 자연이 형식을 부여한 까닭이요, 후자는 일체를 분리하는 오성이 형식을 부여한 까닭입니다. <br><br>문화자체는 현대의 인간성에 이러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한편으로는 확대된 경험과 보다 정확한 사고방식이 학문들 사이의 보다 첨예한 분리를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라는 훨씬 복잡해진 시계장치가 계층과 업무의 보다 엄격한 분리를 불가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인간 본성의 내적인 연대가 끊어졌고 해로운 투쟁이 그 본성의 조화로운 힘들을 불화케 했습니다. 직관적 오성과 사변적 오성은 현재 적개심을 품고 그들 각자의 상이한 영역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그 경계를 불신과 질투로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활동을 제한하는 영역과 더불어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도 하나의 지배자를 부여했는데, 이 지배자는 흔히 억압에 의해서 우리의 나머지 소질들을 말살시키곤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사고력이 힘들여 얻은 오성의 식민지를 황폐시키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추상정신니 심정을 따뜻하게 해주고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줄 불꽃을 꺼버립니다. <br><br>문명과 학식에 의해 인간 내부에서 시작된 이와 같은 혼란은 새로운 통치정신에 의해서 완성되고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최초의 공화국의 단순한 조직이 최초위 도덕과 상황들의 단순성보다 오해 살아남으리라고는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더 높은 동물적 생명체로 향상되기는 커녕 하찮고 조잡한 기계장치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희랍국가에서는 모든 객체가 독립된 생활을 누리면서도 유사시에는 전체적인 단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이제 정교한 시계장치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제 국가와 교회, 법률과 관습이 서로 분리되었습니다. 즐거움이 노동에서, 수단이 목적에서, 노력이 보상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영원히 전체의 개별적이고 작은 부품에만 얽매인 체 인간은 스스로 단지 부품이 되고 영원히 자기가 돌리는 바퀴의 단조로운 소음만을 귀에 들으며 그는 자기 본질의 조화를 결코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의 본성 속에 있는 인간성을 발현하는 대신에 단순히 그의 직업이나 전문적 지식의 복제품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구성원들을 전체에 결합시켜 주는 보잘것 없는 단편적인 관여조차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부여하는 형식에 의존하도록 하지 못하고(왜냐하면 어떻게 그들의 자유에게 저토록 인위적이고 개화를 꺼려하는 시계장치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의 자유로운 판단을 구속하는 정식이 가차없고 엄격하게 그 개체들에게 미리 규정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문자가 살아있는 지성의 대리를 맡고, 연습은 쌓은 기억력이 독창력과 감수력보다도 더 안전한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br><br>만약에 &lt;국가라는&gt; 공동체가 직책을 인간의 척도로 삼는다면, 공동체가 그 한 시민에게서는 오직 기억만을, 다른 시민에게서는 사무적인 지성만을, 또 다른 시민에게서는 오직 기계적인 숙련만을 존중한다면...이렇게 곳곳마다 그 곳에서 요구하는 능력만을 요구한다면...공동체가 확장성이라는 점에서 주체의 발전을 면제해주는 정도에 비례하여 집중성에로 이러한 개인의 능력이 내몰려지기를 바란다면, 이 때 존경과 보수를 가져오는 유일한 소질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느라고 정서가 지닌 나머지 소질들은 소홀히 여겨진다는 사실에 우리가 놀랄 수 있겠습니까? <br>원기왕성한 천재는 자기 직무의 한계를 자기 활동의 한계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은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에 자신의 보잘것 없는 힘을 온통 소모해버립니다. 그리하여 평범한 사람은 자기 직업에 지장을 주지 않고서는 어떤 변변한 취미 하나 제대로 가지기 힘든 형편입니다. 더욱이 어떤 인간의 능력이 자신의 직무를 능가하거나 또는 비범한 인간의 보다 높은 정신적 욕구가 자기 직책에 경쟁자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보는 바로는 좀처럼 훌륭한 추천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국가는 자기 시민을 독점하는 일에 질투심이 강해서 그 시민을 비너스 우라니아&lt;=정신적인 숭고한 사랑의 역신&gt;보다는 비너스 키테리아&lt;=관능적인 사랑의 여신&gt;와 공유하는 것을 더 쉽게 결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 국가의 부당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br><br>이렇게 전체의 추상이 자신의 하찮은 생존을 연장하기 위해서 개인의 구체적인 삶은 점차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영원히 그 시민들에게 낯선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lt;시민 개개인의 &gt;감정 속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시민들의 다양성을 분류함으로써 단순하게 처리하고 그리고 오직 간접적으로 나온 대표를 통해서만 인간성을 받아들여야 할 처지에 있는 지배자측은 그 인간성을 지성의 단순한 졸작물로 혼동하면서, 궁극에 가서는 이 인간성을 시야에서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반면에 피지배자측은 자기 자신과는 관계가 별로 없는 법률을 냉담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국가가 자신의 짐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는 이러한 연대를 지지하는 데 넌더리가 난 실제 사회는 (이미 오래 전 부터 대부분의 유럽국가의 운명인 것처럼) 도덕의 자연 방임상태로 전락합니다. 이 상태에서 공권력은 당파가 하나 더 많을 뿐,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부터는 미움을 받고 기만당하며, 오로지 그것을 필요로하지 않는 사람으로 부터만 존경을 받습니다. <br>인류는 내부와 외부로 부터 자신을 억압하는 이러한 이중의 권력 앞에서 과연 자신이 실제로 취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을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br><br>사변적인 정신은 이념세계에서 절대적인 소유물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이에 감각세계에서는 이방인이 되어야 했고, 형식을 위해서 물질을 상실해야 했습니다. 사무적인 정신은 물질적 대상들의 단조로운 영역 속에 갇혀 서식을 통해 더욱 더 제한되고, 자류로운 전체의 이념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동시에 자신의 활동영역을 빈약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br>전자&lt;사변적인 정신&gt;은 공허한 세밀화의 희생이 되고, 후자는 고루한 편협성의 희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전자는 너무 높이 있어서 전체를 분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방면의 폐단은 비단 지적 생산활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에 못지않게 이것은 또한 감정과 행동의 분야에 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알고 있듯이, 심정의 감수성은 그 정도에 따라서 상상력의 활발성에 의존하고, 그 범위에 따라서 상상력의 풍부함에 의존합니다. 분석능력의 과중은 필연적으로 상상력으로부터 그 힘과 불꽃을 빼앗고, 대상들의 보다 한정된 영역은 상상력의 풍부함을 감소시킵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사상가는 흔히 차가운 마음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원래 하나의 전체로서만 영혼을 감동시키는 인상들을 분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에 사무가는 흔히 편협한 마음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상상력이 직업의 단조로운 영역 속에 갇혀서 다른 낯선 표상방식대로 확대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br><br>희랍인의 인간성의 현상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단계에 머무를 수도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없는 하나의 극치였습니다. 그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지성이 이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축적된 모든 지식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감성과 직관으로부터 분리되어 명확한 인식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단계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는 이유는 , 오직 어느 정도까지의 명쾌함만이 특정한 충만함 및 온화함과 결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희랍인들은 바로 이러한 단계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보다 더 높은 교양을 향해서 발전하기를 원했다면, 그들도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본질의 총체성을 포기하고 분리된 길로 진리를 추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br><br>인간이 지닌 다양한 소질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 능력의 이러한 대립은 문화의 큰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대립&lt;=감수와 직관, 분석력과 상상력의 대립&gt;이 지속되는 한, 인간은 단지 문화에 이르는 도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닌 개별적인 능력들이 서로 분리되어서 배타적인 입법을 감히 제 것으로 삼음으로써만 그 능력들은 사물의 진리와 대립하게 되고, 보통 게으른 만족감으로 표면적인 현상에만 안주하는 상식을 대상의 깊이 속으로 침투하도록 강요합니다. 순수지성은 감각세계의 권위를 찬탈하고, 경험적 지성은 그 순수지성을 경험의 조건들에 예속시키는데 몰두하면서, 이 두가지 소질은 가능한한 가장 완전하게 성숙해서 그들의 모든 영역을 피폐시키고 있습니다. <br><br>여러 능력들의 일방적인 실행은 사실 개인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오류에 빠지게 하지만, 그러나 전체로서의 종족을 진리로 인도합니다. 오직 우리의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하나의 초점에 집중시키고, 우리의 모든 본질을 유일한 능력에 집약시킴으로써만 우리는 이 개별적인 능력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그것으로 하여금 자연이 지정해준 것으로 보이는 한계를 인위적으로 훨씬 넘어서도록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연에 의해서 부여된 시력을 모두 합쳐도 망원경에 의해서 천문학자가 발견한 목성의 위성을 탐지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성이 그러한 일을 하는데 적임인 개체들에게서 분리되어, 모든 소재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극도로 긴장된 추상을 통해서 절대적인 것을 통찰하는 시선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사고력은 결코 무한한 것의 분석&lt;=나이프니쯔나 뉴튼의 미분학등을 시사함&gt;이나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저술을 제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지성과 동시에 순수직관 속으로 해체된 그러한 정신이 과연 논리의 엄격한 속박을 창작능력의 자유로운 활동과 교체하고, 사물의 개성을 충실하고 순수한 의미로 파악하는데 쓸모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자연은 심지어 우주적인 천재에게 조차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류를 예방하는 대책을 강구하는 일을 철학이 가장 고귀한 직책으로 삼지않는 한, 진리는 계속해서 순교자를 낳게 될 것입니다. <br><br>그러므로 인간의 여러 능력의 이러한 분담적 발달에 의해서 세계 전체는 아무리 얻는 바가 많을지라도, 그것을 당하는 개인들은 이러한 세계목적이라는 저주를 받고서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br>개별적인 정신능력의 긴장은 사실 비범한 인간을 낳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오직 여러 정신능력의 균형있는 율동&lt;=조화로운 발달&gt;만이 행복하고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br><br>그러나 인간이 어떤 한 목적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하도록 규정되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br>이성이 자기목적을 위해 우리들에게 지정한 완전성을 자연이 자기목적을 위해 우리들로 부터&nbsp;빼앗아 갈 수 있단 말입니까? <br>그러므로 개별적인 능력의 발달이 그 총체성&lt;=그들 능력의 종합적 발전&gt;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오류임에 틀림없습니다. 혹은 자연법칙이 아무리 그것을 지향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문화&lt;=희랍의 균형있는 자연과 반대되는 일방적으로 인위적인 문명&gt;가 파괴해 버린 우리의 본성의 총체성을 보다 더 놓은 예술&lt;=미적 교육&gt;을 통해 회복해야 합니다. <br><br>==============<br>인위적인 문명이 파괴해버린 본성의 총체성...<br>오늘날 전인적 인간이 총체성을 잃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nbsp;가능할까? <br>아주 세밀하게 나누어져 있는 노동의 과정, 심지어 상호작용이&nbsp;온라인으로마저&nbsp;이루어지는&nbsp; 감각적 경험의 세계에서.<br>전면적접촉이 불가능한 인간관계가 대부분인 현대의 인간 상호작용의 유형은&nbsp;총체성의 획득을 매우 어렵게 한다. <br>'본성의 총체성보다 더 높은 예술'을 통해 그것을 회복한다는 것은<br>모든 감각적 세계와 지성의 세계를 총괄하여 포용하는 총체적인 것이 미적 세계이며, 미적&nbsp;교육을 통해&nbsp;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nbsp;<br>감각과 지성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미적 세계의 경험과&nbsp; 미적교육이 그러한 인간의 삶에 총체성을 부여해서 본래의 인간성을 찾고, 도덕적 가치의 붕괴에서 인간 사회를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br>환멸로 가득한 부조화의 극치가 현대인의 조각난&nbsp;인간 관계이며, 그 삶의 파편을 부여잡고 세상의&nbsp;구석구석&nbsp;귀퉁이에서 웅크리고, 저마다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또다시 대상화하는 인간 삶의 현주소가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nbsp;실마리를&nbsp;미적 교육에서 찾고 있다.&nbsp;<br>거기에 희망이 있다고.&nbsp;&nbsp;<br/><br/>tag : <a href="/tag/본성의총체성" rel="tag">본성의총체성</a>,&nbsp;<a href="/tag/희랍의조화" rel="tag">희랍의조화</a>,&nbsp;<a href="/tag/인위적인문명" rel="tag">인위적인문명</a>,&nbsp;<a href="/tag/능력의분담적발달" rel="tag">능력의분담적발달</a>,&nbsp;<a href="/tag/순수이성비판" rel="tag">순수이성비판</a>,&nbsp;<a href="/tag/순수직관" rel="tag">순수직관</a>,&nbsp;<a href="/tag/순수지성" rel="tag">순수지성</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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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4 Apr 2009 17:24:4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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