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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산하의 썸데이서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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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기대도 실망도 하지 말자. 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크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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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May 2012 09:11:3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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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산하의 썸데이서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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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61,5.16 이한림 장군의 5.16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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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br><br>1961년 5월 16일 이한림 장군의 5.16 <br><br><br>선글라스를 낀 작달막한 투스타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들이 방송국을 장악한 뒤 숙직 아나운서를 시켜 발표한 대로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일부가 행동을 개시한 순간이었다. 한강 다리를 지키던 헌병대는 쿠데타군에 가담한 해병대의 기세에 눌려 다리를 내 주었고 불과 3천 명에 불과했던 쿠데타 군은 삽시간에 <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서울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쥐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각 책임제 하의 실권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뛰어들어 머리카락 보일까 꽁꽁 숨어 있었다. 대통령 윤보선이 쿠데타 소식을 접한 후 일성은 “올 것이 왔구나. ”였다. 올 것(?)이 왔는데 그를 막아야 할 사람은 수녀 치마폭에서 나올 줄 몰랐으니 볼짱 다 본 셈이었다. <br><br>하지만 쿠데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물론 군 곳곳에 쿠데타에 호응하는 이들이 박혀 있었지만 60만 대군 중 쿠데타군 측이 동원한 병력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5월 16일 새벽 3시 강원도 1군 사령관 관사에서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잠에서 쌔어나 “이런 괘씸한 놈들”이라고 부르짖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휘하의 병력은 수십만 명이었다. 하필이면 전날, 5월 15일은 제1군, 즉 제 1 야전군의 창설 기념일이었다. 당연히 장면 총리도 참석했었고 군 고위 지휘관들이 집결한 축하 분위기에서 술잔도 적잖이 오간 터였다. 그런데 만주군 동기이며 오랜 동안 친구였고빨갱이로 몰려 죽다 살아났을 때에는 밤새 통음하며 위로한 적도 있었던 박정희 녀석이 바로 그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한림은 분노했다. <br><br>예나 지금이나 제 1야전군이라면 한국군 최강의 병력이다. 이들이 움직인다면 해병대 몇 명이 껍적거리는 쿠데타군은 간단히 진압될 수 있었다. 이한림은 1군단장 임부택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병력을 이동하여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쿠데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만 내려온다면 언제건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들은 연락이 닿질 않았다. 총리는 앞서 말했듯 수녀원에서 머리카락 보일까 숨어 있었고, 국방장관도 소식이 없었으며 육군 참모총장은 쿠데타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진압을 시작한다면 국군끼리 피를 볼 일이었고,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으로서 ‘출동하라’ 한 마디면 족하겠는데 그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br><br>다음 날이 되어서야 윤보선 대통령, 내각 책임제 하의 사징적인 대통령이던 윤보선의 특사가 1군 사령부에 닿았다. 대통령의 친서는 공자님 말씀이되 알멩이는 없는 소리였다. <br>“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군의 불통일로 대공역량을 감소 시켜서는 안됩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됩니다. 귀하는 무엇보다도 공산군의 남침 대비에 만전을 기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이한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해졌을 것이다. 한국군끼리 피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문제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헌정을 무너뜨린 상황 아닌가. 그런데 불상사나 희생은 안된다니 뭐 이런 손발 묶고 자유형 헤엄치기가 있는가 말이다. “한국군끼리 충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제에다가 대통령의 명령까지 곁들여지니 이건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원도까지 날아온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쿠데타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이미 이한림의 결기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한림은 5월 17일 국기 하기식에서 이렇게 연설한다.<br><br>“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 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에의 개입을 반대합니다. 있어서도 안되고 용서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여러 장병들에게 알립니다.” <br><br>이로써 불법적인 쿠데타를 막아설 민주공화국의 무력은 사라졌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의 그의 위치는 명확히 반란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한림은 자신의 친구 박정희를 막아서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히 맞는 말 같지만 너무나도 무책임한 소리,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선 안된다”는 대통령의 친서 앞에 그 결심은 무뎌졌고, 결국 이후 근 30년에 이르는 군부 통치의 서막은 활짝 열리고 만다. <br><br>어느 때에나 마찬가지다. 공자님 말씀하기는 참 쉽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거기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봐야 아무 도움이 안되는 우리 모두의 과오인 것이라고 폼 잡기는 정말로 쉽다. <br><br>하지만 대개 역사에서 이런 공자님 말씀들은 대개는 누군가의 장식품으로만 빛나게 마련이고 사실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끄는 지름길 노릇도 불사한다. 바로 윤보선이 한 소리였다. 국군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훌륭했으나 그 국군이 헌정질서를 밧다리 한판으로 무너뜨릴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명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2012년 5월 16일 50여년 전 쿠데타군이 긴박한 분위기에서 한강다리를 건너던 날,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다 같이 성찰해보자,”는 말이 때로는 무지하게 어리석은 것처럼 말이다. <br><br>이한림 장군은 며칠 전 아흔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명복을 빌며 5.16을 보낸다.</span><br/><br/>tag : <a href="/tag/산하의오역" rel="tag">산하의오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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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May 2012 09:11:3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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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88,5.15 한겨레신문의 창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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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산하의 오역 <br><br>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 <br><br>대학 신입생 시절 부산에 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닥 좋은 점이 못되었다. 대학생이 됐답시고 전국을 헤매고 다니던 대학 친구들의 여행의 종착지가 대개 부산이었고 나는 손님 치르다가 여름 방학을 다 보냈으니까. 그 중에 지금은 미국에서 교수하고 있는 광주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 녀석이 부산을 떠나던 날 터미널에서 조금 낭패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신문이나 하<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나 사야 쓰겄다.”라는 말을 남기고 매점으로 간 녀석이 주인과 말을 꽤 오래 섞는 걸 보고 뭘 하나 싶어 다가갔더니 약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의 말인즉슨 이랬다. “한겨레가 왜 없어요? 그것이 진짜배기 신문인디.” 87년 대선으로 전라도 김대중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전라도 말 징하게 써 가면서 한겨레를 찾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녀석을 억지로 끌고 나오긴 했는데 나오면서도 녀석은 소리를 질렀다. “한겨레 신문 꼭 갖다 노씨요 아저씨.”<br><br>그 녀석이 원하던 ‘진짜배기 신문’ 한겨레 신문이 1988년 5월 15일 태어났다. 그 창간호를 주워들던 순간의 느낌은 지금도 첫 미팅 나가던 숙대 앞 정경처럼 눈에 선하다. 백두산 천지 위에 판화같은 글씨로 쓰여진 한겨레신문은 사실 신문이라기보다는 좀 세련된 인쇄물처럼 보였고, 논조도 신문이라기보다는 팜플렛을 보는 것처럼 생경하고 뚝뚝했다. 하지만 신문이었다. 일간신문이었다. <br><br>한겨레신문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곡절이 있었겠지만 한겨레라는 제호가 정해지는 것도 꽤 오랜 진통을 겪었다. 물망에 오른 후보작은 4개였다. 한겨레신문, 민주신문, 독립신문, 그리고 자주민보. 유신정권 시절 동아일보 기자들이 해직당할 때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 일갈하며 사표를 던졌던 편집국장이자 초대 한겨레 사장을 지내는 송건호는 ‘독립신문’을 선호했다고 하고, 수십 명의 추진위원들이 뽑은 제호는 ‘자주민보’였다. (오늘날의 자주민보를 알기에 나는 앙천대소한다. UFO가 조선인민공화국의 비밀 병기라는 판타지 언론이 자주민보다) 하지만 이 고리타분한 제호 자주민보에 당시 젊은 축들은 일제히 반발했다고 한다. “하여간 노땅들은 안된다니까!” 이들이 제시한 것은 젊은 층에 대한 여론조사였다. 어디에 의뢰에서 전국적으로 수만 명을 조사할 깜냥은 못되고, 직원 등 200명과 대학생 200여명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한겨레’로 낙착을 본다. <br><br>이 한겨레 창간 정신의 시원(始原)을 따지자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한 해직기자의 꿈을 들 수 있겠다. “새 시대가 오면 온 국민이 골고루 출자해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민중을 위한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전용을 해야지요!” 이 말을 한 사람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안종필. 경남고등학교를 나온 부산 사나이였던 그는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잘린 뒤 신문에 나지 않는 소식들을 모아 ‘민주인권일지’를 냈다가 콩밥을 먹는데, 그 감방 안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접하고서 이런 예언같은 사자후를 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석 달 뒤 세상을 떴다. <br><br>6월 항쟁의 불바다가 지나간 후 들이닥친 무더위 속에서 안종필의 외침은 극적으로 되살아난다. 국민 모두가 주식을 형식으로 창간에 참여하고 그 종잣돈으로 신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문을 만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저주와 “50억을 모아요? 그럼 재야와 운동권 자금은 씨가 마르겠군요.” (이해찬) 같은 우려와 “그 돈이 있으면 정권타도투쟁을 해야지 새 신문이 더 급한가?”(고 박현채 교수)라는 호통까지 한겨레의 시작에는 많은 시선과 발언들이 얽혀 있었다. <br><br>한겨레 신문 창간 기금 마련 광고가 나가면서 많은 이들의 호응이 있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투쟁 이후 바른 말 하는 신문과 옳은 글에 목숨 거는 기자들에 굶주렸던 이들이 한 푼 두 푼 금자탑의 밑돌이 되었는데 한 대학생의 이야기는 가슴을 찡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87년 1월 고문치사당한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씨의 이름으로 주식 100주(50만원)을 청약한다. 무슨 사연인지 밝히지도 않고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돌아가려는 학생을 붙들고 설득한 끝에 박정기씨와 통화를 하게 했는데 대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성금으로 보내려고 틈틈이 모은 돈인데 이렇게 전해 드리는 게 더 뜻있는 것 같아서......” 박정기씨도 울고 통화를 지켜보던 기자들도 울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겨레신문은 점차 그 형상을 스스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br><br>87년 대통령 선거의 실패 이후의 분위기는 요즘 말로 ‘멘붕’이었다. 지난 총선에서의 ‘멘붕’이 축대가 무너진 정도라면 87년의 멘붕은 63빌딩과 삼풍백화점을 합친 멘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상에 6월항쟁 그 난리를 치고도 군부의 후계자가 대통령이 되다니, 아니 우리 스스로 그걸 만들어 주다니. 한겨레 신문 기금 모금도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가히 짐작이 간다. 야 이런 거 해서 뭐하냐는 한탄부터 엽전들이 뭘 한다고 하는 절망까지. 그때 한겨레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의미 있는 모금 카피 하나로 사람들의 눈을 찌른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br><br>대통령 선거 전 10억이 모였는데 대선이 끝난 후 두 달 동안 40억이 몰려들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웅크리고 있어 봐야 별 수 없고, 대통령 선거 졌다고 세상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은 그 거대한 자각이 분출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 준 것이다. 역사는 승리로 인해 한 발 당겨지지만 패배로 인해 두 발 거리를 건너뛰기도 하는 재주를 부린다. 한판의 승부에서 졌다고 슬퍼하고 술 마시고만 있지는 않았던 사람들 모두의 작은 승리, 그것은 국민주신문 한겨레 신문의 탄생이었다. 1988년 5월 15일이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1.egloos.com/pds/201205/17/96/a0106196_4fb4bfe037280.jpg" width="279" height="18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1.egloos.com/pds/201205/17/96/a0106196_4fb4bfe037280.jpg');" /></div><br></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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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May 2012 09:07:5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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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75.5.13 긴급조치 9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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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산하의 오역 <br><br>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 <br><br>20대들이 박근혜 대표를 일컬어 유신공주 운운하는 걸 들으면서 나도 유신을 잘 모르는데 쟤들은 유신을 어떻게 상상하고 저런 표현을 쓰는 걸까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봐야 알겠냐마는, 사실 유신이란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내 또래나 그 이후 세대가 실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1973년 5월 13일 근엄하게 발표된 긴급조치의 결<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정판, 마치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처럼 유신 독재의 열정(?)과 혼(?)이 담긴 걸작품 긴급조치 9호를 읽으면 조금은 그 시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물론 그래봐야 접시물에 손가락 담그는 정도겠지만. <br><br>긴급조치 9호 <br><br>①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br><br>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br>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br>다.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예외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 <br>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br><br>② 제1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br>③ 재산을 도피시킬 목적으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국외에 이동하거나 국내에 반입될 재산을 국외에 은닉 또는 처분하는 행위를 금한다.<br>④ 관계 서류의 허위 기재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 이주의 허가를 받거나 국외에 도피하는 행위를 금한다.<br>⑤ 주무부장관은 이 조치 위반자·범행 당시의 그 소속 학교·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명령이나 조치를 할 수 있다. <br><br>가. 대표자나 장에 대한, 소속 임직원·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명령<br>나. 대표자나 장·소속 임직원·교직원이나 학생의 해임 또는 제적의 조치<br>다. 방송·보도·제작·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 조치<br>라.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br>마. 승인·등록·인가·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 조치<br><br>⑥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이 조치에 저촉되더라도 처벌되지 아니한다. 다만 그 발언을 방송·보도·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한 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br>⑦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br><br>⑧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br><br>⑨ 이 조치 시행 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뇌물죄의 가중처벌)의 죄를 범한 공무원이나 정부관리·기업체의 간부직원 또는 동법 제5조(국고손실)의 죄를 범한 회계관계직원 등에 대하여는, 동법 각조에 정한 형에, 수뢰액 또는 국고손실액의 1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병과한다.<br><br>⑩ 이 조치 위반의 죄는 일반법원에서 심판한다.<br>⑪ 이 조치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주무부장관이 정한다.<br>⑫ 국방부 장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다.<br>⑬ 이 조치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br>⑭ 이 조치는 1975년 5월 13일 15시부터 시행한다<br><br>그러니까 유신 헌법에 대한 ‘비방’조차 금지되며,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 압수 수색될 수 있으며, 국회의원도 술 한 잔하며 말하는 거까진 괜찮은데 언론에 대고 떠들면 똑같이 취급되며, 계엄도 아닌데 시장과 도지사가 군 병력을 부르면 달려갈 수 있으며, 이 조치에 따른 장관의 명령은 사법적 심사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가히 요즘으로 따지면 카자흐스탄이나 이름도 들먹이기 어려운 아프리카쯤의 어느 나라 정도는 되어야 감히 견줄만한 독재의 걸작품이다. 새마을 운동이 전 세계 몇 개국에 수출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긴급조치 9호 역시 그 이상의 수의 나라에 수출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 퍼스트 레이디 노릇을 하던 영애께서는 유력한 공화국의 대통령감으로서 오늘도 일로매진 중이시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대한민국을 때렸다.</span><br/><br/>tag : <a href="/tag/산하의오역" rel="tag">산하의오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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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May 2012 09:06:3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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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56.5.12 한국 TV방송의 시작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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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5월 12일 한국 TV 방송의 시작 <br><br>사연은 태평양 전쟁까지 거슬러 오른다. 처음에는 기고만장 잘 나갔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후 기세가 꺾이고 차츰차츰 밀리다가 가미가제와 반자이 돌격으로 연명하며 패전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던 일본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무진 애를 썼다. 조선총독부는 그런 정세가 한국인에게 전파될까 봐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교사를 추방하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방송을 알았던’ 경성방송국 한국인 직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과 중국 국민정부가 송출하는 중경방송국 한국어 방송을 듣고 있었다. <br><br>꼭 그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만은 아니었겠지만 일본은 망한다는 소문이 꽤 파다하게 퍼졌고, 일본 관헌들은 꼭 60여 년 뒤 “누가 양초값을 댔느냐”고 물은 아무개처럼, “누가 외국 방송을 듣고 있는 거냐?”고 이를 갈았고, 자연스럽게 경성방송국 직원들이 그 성마른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1942년 말부터 1943년에 걸쳐서 경성방송국은 쑥대밭이 됐다. 경성방송국 직원 6명을 비롯 150여 명의 방송인과 민간인 수백 명이 체포됐다. 당시 방송인 150여명이라면 거의 조선 땅에서 방송을 안다는 사람의 대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 6명은 창살 안에서 숨져 갔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br><br>이 광풍에 휩쓸린 사람 가운데 황태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안도 출신의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며 방송 기술을 익혔고, 1935년 경성방송국에 입사했다가 전북 이리 (요즘은 익산) 방송국의 기술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단파수신기를 만들 줄 알았던 그는 수신기를 만들어 집에서도 듣고 회사에서도 듣고 하다가 그만 된서리를 맞는다. 다행히 감옥살이는 면했지만 엄청난 벌금을 물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방송 업계에 종사하면서 미국 RCA사 한국 지사를 운영하던 중 정부로부터 방송 장비 수입을 의뢰받고 미국에 간 길에 동전을 넣고 TV를 보는 미국인의 모습을 보고 색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도 TV 방송국을 만들어 보자.” <br><br>배고파서 죽는 아이들이 속출할만큼 전쟁의 뒤안길에서 헤매던 나라에서 TV 방송이라니! 관련 기관 공무원들은 단호히 황태영의 꿈을 거부했다. 하지만 황태영도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한국어 문장에는 뜻밖에 서툴렀지만 영어와 한자에는 능통했던 희한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영문으로 구구절절 상소를 써서 올렸고, 이승만이 공무원들에게 “님자들 이거 한 번 해 보라고 하지 그럽네까?” 한마디 하면서 마침내 황태영은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의 방송국 설립자가 된다. HLKZ TV 라는 이름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태국 필리핀에 이은 4번째. <br><br>이 방송국의 방송 제작을 지휘한 사람이 최창봉이다. 1990년대 초 손석희가 구속되었던 MBC 파업 투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이름도 귀에 설지 않을 것이다. 그때 MBC 노조가 물러가라고 목이 쉬었던 사람이 바로 최창봉 당시 MBC 사장이다. 그의 머나먼 미래는 그렇다고 치고, 그는 한국 TV 방송의 산파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최창봉의 얘기를 옮겨 보자. “6월의 방송 개시를 앞두고 5월 12일부터 3일간의 시험 방송준비 지시가 하달된 것은 요원들이 정시 출근을 시작한 5월 1일이었다. 장님들이 코끼리 다리를더듬어 볼 시간적 여유는 11일 뿐이었다. ” 그 장님들이 그린 코끼리가 마침내 5월 12일 시험방송 겸 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둔중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탄 프로그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경린씨가 지휘한 만파식적지곡과 수제천의 아악 연주였다. 전국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이 극장 하나의 관객 수보다 적은 TV 방송의 시작이었다. 이후 2시간 동안 영화와 가요 등이 어우러진 국내 최초의 ‘버라이어티 쇼’가 펼쳐졌다. 이때 신카나리아, 박시춘 남인수 등이 출연했는데 이들의 소속사에는 출연료 대신 ‘무료 광고’의 혜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br><br>그러나 대한민국을 통틀어 TV 수상기가 수백 대를 넘지 못하던 시절의 TV 방송국이란 개미 다리 위에 얹어진 코끼리 몸집같은 존재였다. 가장 큰 수입 중의 하나가 가두에 설치된 TV를 신기하게 보고 몰려든 사람들을 노린 광고료였다고 하니 알만하다. 1년을 버티던 HLKZ-TV는 한국일보에 넘어갔고 DBC로 재단장하여 제법 방송국다운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면서 한국 TV 방송을 개척해 갔으나 그만 불의의 화재를 만나 홀라당 다 태워 먹고 문을 닫는다. <br><br>케이블 티븨까지 치면 수십 개에 달하는 채널들을 이리저리 재핑하다 보면 그 명징하고도 화사한 화면과 사람들의 혼을 빼는 재미와 감동으로 무장한 수백 개의 프로그램의 홍수에 질려 결국은 전원 버튼을 꺼 버릴 때가 있다. 그 큰물의 시작이 1956년 5월 12일이었다. 사진은 8세난 윤복희 어린이가 열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그 윤복희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1.egloos.com/pds/201205/17/96/a0106196_4fb4bf4ad16a0.jpg" width="480" height="49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1.egloos.com/pds/201205/17/96/a0106196_4fb4bf4ad16a0.jpg');" /></div></span><br/><br/>tag : <a href="/tag/산하의오역" rel="tag">산하의오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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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May 2012 09:04:46 GMT</pubDate>
		<dc:creator>산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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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94.5.11 김순경의 복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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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br><br>1994년 5월 11일 김순경의 복직 <br><br>1992년 한 여인이 모텔방에서 살해당한 채로 발견됐다. 당연히 수사 방향은 두 가지다. 강도에 의한 것, 또는 면식범에 의한 치정살인. 그런데 살해당한 여인은 현직 순경의 애인이었고 신고자는 김모 순경 자신이었다. 김모 순경은 전날 모텔에 함께 투숙한 뒤 아침 일찍 근무를 7시경 근무를 나갔다 고 하고, 10시경 되돌아와보니 애인이 죽어 있었다고 신고한 것이다.<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 부검 결과 김모 순경의 거짓말(?)이 밝혀진다. 부검 결과 사망 시간이 새벽 3시에서 5시로 추정된 것이다. 즉 김순경이 애인과 함게 모텔에 있었던 시간이었다. CCTV를 틀어보니 김순경이 모텔을 나간 시간은 그의 증언대로 7시였다. 경찰은 그 부검 결과를 들이대며 김순경을 족치기 시작했다. <br><br>경찰은 사흘에 잠을 세 시간 가량 밖에 재우지 않으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시체가 말을 해 주는데 왜 거짓말을 해. 너 7시에 나갔다며. 니 애인은 최소 5시에 죽었어. 빨리 불어." 그리고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 했다. "너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면 죽음이야. 그나마 한솥밥 먹은 우리한테 불어. 모든 정황과 증거가 불리하니 20년 징역도 기본이야. 하지만 빨리 시인하고 유족하고 합의하면 집행유예도 가능해." 김순경은 버티다 못해 견디다 못해 자신의 범행(?)을 시인한다. 하지만 서울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서 다시 혐의를 부인하게 되는데 역시 서울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면 죽음이라는 동료 경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수갑을 뒤로 채워 의자에 앉히고 거의 나흘 동안 잠을 못자게 하는 심문으로 비몽사몽간에 자백을 받아 냈다. <br><br>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처음에 자살로 신고했고,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도 범행을 인정했으며, 현장 검증까지 했다."며 기소를 밀어부쳤다. 자살로 신고한 것은 겁이 나서였으며 범행을 인정한 것은 담당 형사의 고문 협박 때문이었다는 김순경의 항변과 현장 검증을 저 좋아서 한 건 아니라는 객관적 사실은 깔끔하게 무시된다. 판사 또한 비슷했다. 물증 외에 자백 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만 판사들은 기이한 신념으로 범인이 김순경임을 선언했다. 징역 12년이 김순경이 받은 형량이었다. 1심과 2심 모두에서였다. <br><br>문제는 이 사건에 증거가 없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모텔방에서 다른 남자의 정액이 묻은 휴지가 발견됐고 침대 위에서 다른 남자의 발자국도 나왔으며, 피해자의 지갑에서 수표가 사라졌음에도 그 수표의 사용처를 추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망 시간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었지 '확정'은 아니었다. 김순경이 범인이 아니라는 정황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깡그리 무시되었던 것이다. 저 녀석이 범인이야! 라는 주관적인 예단 아래. <br><br>웃기는 일은 3심이 진행 중이던 상황 하에 벌어졌다.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서모군(당시 18세)이 취조를 받던 도중, 자신이 작년에 있었던 경찰관 애인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이다. 실제 사건은 사망 추정시각인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가 아니라 오전 7시에 김모 순경이 여관을 나간 직후, 서모군이 여관방에 침입해 혼자 자고 있던 애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금품을 빼앗아 도주한 것이 사건의 진상이었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서모군은 피해자의 수표를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범인이면 알지 못할 현장 상황을 진술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으로 김순경을 옭아맸던 사망 추정 시각은 검시의가 시신을 보고 작성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보고 내용을 토대로 검시 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발생했던 오류였다. 10대 강도범의 자백 하나에 경찰,검찰 그리고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피고인의 범죄 사실은 살인의 고의를 포함하여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기록을 살펴 보아도 원심의 사실인정 및 판단 과정에 아무런 위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시한 재판부까지 하루 아침에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br><br>1994년 5월 11일 김순경은 경찰에 복직했고 연고지인 수원에 배치돼 근무를 시작한다. 아니할말로 그쪽 방향으로 오줌도 누기 싫을 처지였겠으나 그는 경찰 복직을 원했다. 이유는 감옥 안에서 겪었던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의 범인보다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사법기관의 일이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수형 생활 중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20 여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써 주며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돕기 위해 경찰을 하고 싶다." <br><br>한 청춘을 지옥으로 몰아넣을 뻔 했던 대한민국이 김순경에게 어떤 보상을 했는지, 그리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협박하고 으르댔던 이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김순경이 지금까지 꿋꿋하게 과거의 다짐대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애쓰는 경찰로 살아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 이상한 정치인이 인용해서 그 값어치가 현저하게 왜곡되긴 했으나 "유죄로 추정할 증거가 없으면 무죄"는 형사 사건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진리다.<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205/17/96/a0106196_4fb4bee57354f.jpg" width="352" height="24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205/17/96/a0106196_4fb4bee57354f.jpg');" /></div></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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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산하의 오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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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May 2012 09:03:38 GMT</pubDate>
		<dc:creator>산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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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89.5.10 이철규를 살려내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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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산하의 오역 <br><br>1989년 5월 10일 의문의 죽음 이철규 <br><br>1989년 5월 10일 광주직할시 청옥동에 있던 제 4 수원지의 관리인은 집에서 기르던 개가 다급하게 짖어대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는 뭔가를 보고 짖어대고 있었다. 도대체 뭘 보고 저러나 양미간을 모으던 관리인의 얼굴은 곧 창백해졌다. 물에 둥둥 떠 있던 것은 사람의 시신이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은 이철규.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집장이었다. <br><br>광주항쟁 때 고교생으로서 부상자 후송 등을 하며 항쟁의 전말을 지켜보았던 그는 조선대학교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을 시작해서 이미 2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한 전력이 있는 이였다. 또 교수 이하 전 교직원을 새벽 출근시켜 몽땅 운동장 구보를 시킨 것으로 유명한 박철웅에 맞서서 100일이 넘게 진행된 학내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를 위험에 몰아넣었던 것은 그 많은 활동 가운데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의 편집장으로서 그가 쓴 기사였다. '북한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내용의 기사는 광주 지역 공안당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교지 편집부 전체에 수배령이 떨어진다. 조선대 관할 광주 동부경찰서 뿐 아니라 북부경찰서, 서부경찰서 전체가 이철규에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한다. <br><br>그러던 그가 새까맣게 탄 얼굴, 물고기가 파먹고 퉁퉁 불어버린 몸, 그리고 튀어나온 눈의 끔찍한 모습으로 수원지 물 위에 떠오른 것이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1주일 전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시신 앞에서 경찰은 처음에는 "좌경 세력 내부의 살해 가능성"을 들먹이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즉 이철규를 조종하던 불순분자가 증거 인멸과 꼬리 자르기의 목적으로 이철규를 죽였다는 스릴러같은 상상력이었다. 하지만 5월 3일 이철규를 근처까지 태우고 갔던 택시 기사가 등장하고, 그의 입에서 이철규가 경찰들에게 검문을 받은 사실이 있음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자살로 말을 바꿨다가 비슷한 시각 풍덩 소리와 어푸어푸 소리를 들었다는 청원경찰의 말이 나오자 실족 익사로 최종 정리가 된다. <br><br>말 그대로 의문사였다. 그의 죽음의 정확한 정황은 지금도 밝혀져 있지 않다. 처음 검안했던 의사와 부검팀도 발견하지 못했던 돈 20만원이 곱게 접혀져 바지 주머니에서 뒤늦게 '발견'된다던가 하는 이상한 일도 있었고 경찰이 밝힌 이철규의 마지막 행적도 미심쩍은 점이 많았지만 그의 시신에는 커다란 의문 부호만 붙었을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에서는 그의 검게 탄 얼굴과 튀어나온 눈 곳곳에 난 생채기들을 근거로 전기고문 끝에 죽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철규의 시신은 대문짝만한 벽보의 머리 사진이 됐다. "이것이 어찌 익사란 말인가." <br><br>나 또한 시위대의 일원이었다. 새까맣게 변해버린 시신과 준수한 청년의 생전 모습을 비교하며 치를 떨었고 고문 정권 살인 정권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고 일껏 외쳐 댔고 툭하면 벌어지던 가두시위에 참여했었다. 5월 3일의 동의대 참극 이후 화염병 사용이 전대협 차원에서 금지되었지만 한 청년을 참혹한 시신으로 바꿔 놓은 정권에 대한 분노는 한껏 타올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시신을 시민들 코 앞에 들이밀며 정권 타도를 외치던 현장이었다. 말 잘하고 목청 큰 학생 하나가 피를 토하며 어찌 이 사진을 익사라고 할 수 있느냐면서 부르짖은 뒤 모여 있던 시민들 중 한 백발 희끗희끗한 아저씨가 말을 걸어 왔다. "학생. 혹시 익사한 시체 본 적 있어?" 순간 학생의 말이 끊겼다가 다시 기운차게 말이 이어졌다. "예" <br>"그래 어떻던데?" <br>"(사진을 가리키며)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br>"한 보름 썩었다가 떠올라 봐. 이렇게 돼. 햇볕에 타고 가스가 차서 말이야." <br>이쯤 되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뭡니까? 하는 소리도 튀어나왔고, 그런데 그 아저씨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br><br>"그리고..... 학생들 이철규라는 학생이 잡힌 데가 어디라고 했어?" <br>"저수지죠." <br>"그래. 안기부든 경찰이든 그 학생을 잡아가서 전기 고문을 해서 죽였다고 쳐. 학생들이 안기부 같으면 그 시체를 하필이면 그때 그 장소 (검문이 있었던 곳) 에 도로 갖다 놓겠나? 떠오르기 좋게 돌덩이 하나 안 달고?" <br><br>고문치사라면 분명히 이철규를 체포했다는 얘기고, 모처에 가서 전기고문 물고문을 실컷 한 뒤에 죽여 버렸다는 것인데, 그 시체를 굳이,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발견된 그 장소로 끌고 가서 언젠가 떠오르렴 하듯이 풍덩 던지고 왔다는 말이 아니냐? 그게 말이 되느냐는 항변이었다. 그 질문에 우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 잘하던 학생이 "사태의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를 부르짖어 봤지만 "이것이 어찌 익사란 말인가?"를 외치던 목소리에 비교해서는 확연하게 힘이 빠졌다. 반드시 익사여야 하는 공안당국과 이것은 고문치사일 수 밖에 없는 그 반대 진영 사이에서 결국 이철규의 사인은 미궁에 빠졌고, 178일간의 '사인규명 투쟁'이 지나고서야 이승과의 이별 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학생운동권은 또 평양에도 꼭 다녀와야 했으므로, 역사에 남을 기이한 구호 하나를 창출해 냈었다. "열사의 시신 부여안고 가자 축전의 도시 평양으로" 그로테스크의 극치라고나 할까. <br><br>지금도 이철규의 기일은 5월 3일이 아니라 5월 6일로 기념된다고 한다. 그날은 검문에 불응하고 어둠 속으로 달음박질친 날이 아니라 어머니의 꿈 속에 나타난 날이라고 한다. 그날 어느 음습한 대공분실이나 경찰서 지하실에서 죽음을 맞았으리라는 믿음이 반영된 날이기도 할 것이다. 멀쩡하던 젊은이가 글 하나 쓴 죄로 도망다니던 중 처참한 시체로 물 위에 떠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여행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이내창 중앙대 총학생회장) 했던 불우한 시대. 그 시대는 그렇게 오래 전이 아니다.</span><br/><br/>tag : <a href="/tag/산하의오역" rel="tag">산하의오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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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7 May 2012 09:01:4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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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51.5.9 위대한 부통령의 사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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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class="바탕글">산하의 오역 <br></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1951년 5월 9일 위대한 부통령의 사임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br>‘대한민국 부통령’이라는 단어는 웬지 낯설다. 하지만 한국의 50년대는 정,부통령의 시기였다. 대통령은 이승만 혼자서 독상을 차렸지만, 부통령은 인촌 김성수부터 만송 이기붕까지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자리를 지켰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이름을 꼽으라면 역시 성재 이시영을 들지 않을 수 없겠다. 그는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경주 이씨 집안 6형제 중의 한 사람이다. 이시영이 속한 경주 이씨 백사공파(이항복의 후예)는 무려 9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그야말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다. 이시영의 아버지도 이조판서였다. 조선 팔도 어느 대갓집에 견줘도 그 떵떵거림이 수그러들지 않을 이 명문가의 형제들 가족 60여명은 요즘 물가로 따지면 수백억에 해당하는 재산을 처분한 후 압록강을 건넜고 이후 치열한 항일투쟁에 나선다. 우리 역사에서 정말로 진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가문이었다. (이를 주도한 이회영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해야 할 것 같고)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br>6형제 가운데 살아서 해방을 본 것은 이시영이 유일했다. 한때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로 잘나가던 신하였던 그가 36년의 일제 강점기를 버텨내고 해방을 맞았을 때의 나이는 이미 일흔 여덟이었다. 이승만조차 성재 어른이라고 존대할 정도의 연륜이었다. 다섯 형제를 이국 땅에 묻고 자신도 죽을 고생을 하고 온 처지였지만 권력의 중심에서도 이시영이라는 인물됨은 흔들림이 없었다. 청렴결백의 표상이었고, 이승만의 절대권력 앞에서도 할 말을 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br>　그러던 그가 1951년 5월 9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중의 하나인 국민방위군 사건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긴 후 사임한다. 전쟁을 치른다는 나라의 정부가 자국의 젊은이들 수만 명을 생으로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던 이 엄청난 사건을 통절하게 규탄하는 그의 성명에는 서릿발 같은 선비의 기상이 뚝뚝 떨어져 글자 한 자 한 자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br>“.....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p><p class="바탕글"></p><p class="바탕글"><br>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p><p class="바탕글"></p><p class="바탕글"><br><br>얼마나 한스러웠을 것인가. 자신의 형제들을 다 잡아먹혀가며 이루고자 한 해방된 조국. 그나마 반쪽으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자신이 부통령을 맡고 있는 공화국 정부는 자신의 동량같은 청년들을 건사하기는 커녕 길거리의 원혼으로 만들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힐 돈은 기생들의 치마폭과 장군들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래놓고도 국방장관의 친구에게는 무죄가 선고되는 판이었으니 노구의 그가 겪어야 했을 실망과 분노는 오죽했을까.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nbsp;부통령을 그만둔 순간부터 그의 가족들은 반넘어 굶어야 했다. 서울 중구 일대 2만 평의 땅을 소유했던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후예들은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를 타고넘어야 했다. 이시영의 둘째 아들 이규열은 피난지 부산에서 병으로 숨을 거뒀고 그 딸은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됐다. 그 뒤를 이어 이시영이 서거하고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에도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울로 이사와서도 스무 번도 더 이사다니며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했다. 어엿한 경기고등학생이 된 손자는 생활고로 대학에 등록할 수 없었고, 가난에서 탈출해보고자 캐나다로 이민간 손자는 중환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월간조선 2008년 5월호에 나온다. 한국 축구가 브라질을 이기는 확률로 월간조선도 좋은 일을 한다. 물론 마냥 좋으면 월간조선이 아니다. 남북협상에 반대한 이시영의 면모를 부각시킨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빨갱이 싫어한 애국자 이시영이었던 것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br>2008년 당시 아흔 아홉 살이던 며느리는 이시영의 묘 앞에 움막을 짓고 32년째 묘소를 관리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며느리의 소원은 국립묘지로의 이장이었다. 그것도 안된다면 묘역이라도 이제 국가가 관리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이승만의 수족으로 악질 노릇을 도맡아 했던 김창룡도, 전두환 경호실장하던 안현태도 묻혀 있고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의 주역들도 간다면 말리지 못할 국립묘지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그때껏 들어가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쯤되면 개그콘서트의 불편한 진실의 소재감이 될 것도 같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br>61년 전 백발 성성한 대한민국 부통령이 남긴 일갈을 다시 음미해 본다.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하지 않는다......... 이 말이 왜 자꾸 곱씹어지는지 모르겠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1.egloos.com/pds/201205/10/96/a0106196_4faaaf1038ab0.jpg" width="500" height="313.16725978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1.egloos.com/pds/201205/10/96/a0106196_4faaaf1038ab0.jpg');" /></d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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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산하의 오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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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9 May 2012 17:53:32 GMT</pubDate>
		<dc:creator>산하</dc:creator>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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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54.5.7. 디엔비엔푸의 한국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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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산하의 오역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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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의 한국인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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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혁명의 나라 프랑스지만 식민 지배의 끈질김과 잔혹함, 그리고 집착은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웠다. 독일에게 맥없이 무너진 뒤 일본에게 자신의 식민지를 무력하게 내 줬지만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는 또 다시 그 추잡한 발길을 베트남에 들이밀었다. 여기에 단호하게 대응해 싸운 게 호지명의 월맹이었고, 초기에는 월등한 화력을 앞세워 기세를 올리던 프랑스군은 끈질기게 게릴라전으로 맞서는 월맹군에게 점차 수세에 몰려 갔다. <br />
... <br />
프랑스군은 이 판세를 역전시킬 원대한 작전 하나를 세운다. 중국이 월맹을 지원하는 보급 루트가 인근의 라오스를 관통하는 것에 착안, 라오스 인근의 디엔비엔푸 지역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그를 장악하고 월맹의 보급루트를 차단하여 월맹의 목을 죄겠다는 것이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프랑스 외인부대를 비롯한 정예병력이 하늘을 덮는 낙하산으로 디엔비엔푸에 내렸고 월맹군은 일단 후퇴했다. 프랑스 군 사령관 나바르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마초적 발언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전쟁이란 건 여자와 같아서 덮칠 줄 아는 자에게 몸을 맡긴다고!” <br />
<br />
그러나 나바르가 덮친 건 여자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월맹군은 기가 질린 것도, 마냥 후퇴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차근차근 병력을 집중시켰고, 맨등으로 포탄을 지고, 자전거로 박격포를 나르고, 사람의 몸을 이어 늪의 다리를 만들면서 프랑스군에 대한 포위망을 소리없이 완성시켜 갔다. 현재 백 살이 넘어 생존하고 있는 월맹군의 명장 보구엔지압 장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를 확정지은 다음에야 포위 공격을 시작했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베트남 민족해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고지대에서 내려퍼붓는 월맹군의 포격은 나폴레옹 이래 빛나는 공훈을 세웠던 프랑스 포병대를 침묵시켰고 급기야 프랑스 포병 사령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수없이 죽어 나가면서도 월맹군들은 쇠심줄처럼 디엔비엔푸를 죄어 들어갔고 마침내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은 전면 항복한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끝이었다. <br />
<br />
이 전투에는 프랑스의 정규군은 물론 프랑스가 운용해 온 외인부대들도 대거 투입됐다. 여기에는 ‘프랑스 대대’라고 해서 한국 전쟁 때 참전한 부대원들도 있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서 전설적인 용맹성을 과시한 바 있는데 1951년 1월 25명의 프랑스군이 총검 돌격을 감행하여 인민군 1개 대대를 혼비백산 쫓아낸 일은 그 대표적이다. 이에 감동한 미군은 은성 훈장으로 그 공훈을 기렸는데 프랑스 지휘관 몽클라르 중령 (원래는 장성인데 대대를 지휘하느라 스스로 강등했다는)은 “총검 돌격은 보병의 기본인데 뭘 훈장까지 주고 그러나” 하며 잘난체(?)를 했다는 후문이다. <br />
<br />
이 용맹한 부대도 한국 전선을 떠나서 디엔비엔푸에 배치됐다가 쓴맛을 보게 되는데, 한국을 떠날 때 프랑스 대대에는 한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경도 함주가 고향이었던 전병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무작정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온 이후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된 그는 프랑스대대의 행정병으로 배속됐고 그들과 함께 2년간 전투를 치른다. 휴전은 됐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타향살이 신세였던 그는 프랑스 장교의 제의로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베트남 땅을 밟고 디엔비엔푸의 참극의 현장에 있게 된다. 디엔비엔푸의 혈전에서 그와 함께 베트남으로 왔던 한국인들은 거의 전사했지만 그는 살아남는다. 디엔비엔푸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손을 뗀 뒤 그는 이번에는 알제리로 배치된다. 프랑스 식민지 경영 역사의 가장 큰 오점, 알제리 전투에서 제국주의 군대의 일원으로 싸우게 된다. 뭐 이런 기구한 인생이 다 있을까. <br />
<br />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알제리 인들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썼고 그를 벗을 길이 없자 탈영을 선택했다. 1960년 그는 체포됐고 외인부대원으로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 훈장은 물론이고 프랑스 국적까지도. 그 이후 프랑스에서 살면서, 트럭 운전도 하고 제빵 기술도 배워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는 여지껏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 어떤 서류에는 북한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서류는 그를 남한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 어느 쪽에도 그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는 한국말을 거의 잊었지만 가끔 한국 물건 파는 슈퍼에 가서 라면을 사서 끓여 먹으면서 고향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가 한국에 있을 때에는 라면 같은 것이 없었지만, 한국 라면 특유의 매운 맛이 까마득히 숨어 있던 그의 옛 미각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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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 백기가 휘날리기 전의 전황은 그야말로 지옥같은 백병전이었다.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각오로 월맹군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프랑스군의 마지막 거점 이자벨 고지가 떨어졌다. 그 와중에 시체로 변한 사람 가운데에는 어쩌다 프랑스군의 일원이 되어 영문도 모르는 나라 베트남까지 와서 누구인지도 모를 적과 싸운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알제리까지 싸우다가 지금은 무국적자로 프랑스에 살고 있다. 한반도는 참으로 풍운의 땅이었고, 거기 살았던 이들의 운명도 여러 바람에 휘날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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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끄적임은 중앙일보 2008년 4월 14일자, 그리고 <br />
http://blog.ohmynews.com/gompd/tag/%EB%94%94%EC%97%94%20%EB%B9%84%EC%97%94%20%ED%91%B8 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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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1.egloos.com/pds/201205/08/96/a0106196_4fa86eb88dffd.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1.egloos.com/pds/201205/08/96/a0106196_4fa86eb88dffd.jpg');" /></div><br/><br/>tag : <a href="/tag/산하의오역" rel="tag">산하의오역</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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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산하의 오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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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8 May 2012 00:54:31 GMT</pubDate>
		<dc:creator>산하</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1980.5.4 티토 사망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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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980년 5월 4일 티토, 부러운 이름의 최후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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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을 다 합친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의 면적은 22만 제곱<br />
킬로미터다. 그리고 그 가운데 70 퍼센트가 산지다. 이 조건과 가장 비슷한 나라를 꼽으라면 지금은 갈기갈기 찢겨 사라진 한 나라를 들 수 있겠다. 그건 유고슬라비아다. 왕년의 유고슬라비아의 넓이는 25만 제곱 킬로미터에 역시 70퍼센트는 산악 지대였다. 국토의 조건은 비슷한지 모르나 그 안의 내용물(?) 즉, 국민들의 구성은 180도 달랐다. 비록 일본과 여진, 몽골, 거란, 위구르 피까지 섞였을망정 어쨌든 단일 언어와 문화를 지닌 단일민족이 살아가던 한반도와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그야말로 삼선짬뽕같은 나라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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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아, 그리스 정교를 믿는 슬라브족의 나라 세르비아, 한때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자를 말해 주는 보스니아에다가 알바니아인들도 적잖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 선 나라가 유고슬라비아였다. 이 나라를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를 들어보자. ”1개의 연방, 2개의 문자(라틴/키릴), 3개의 종교(가톨릭/정교회/이슬람), 4개의 언어(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 5개의 민족(4+보스니아), 6개의 공화국(5+몬테네그로), 7개의 접경국"<br />
<br />
<br />
우리와 유고슬라비아와는 몇 개의 공통점이 더 있다. 외국의 무수한 침략을 받아 왔으며 또 그 와중에 내부 구성원들끼리 처참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2차대전 중 독일이 침략했을 때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도들은 그에 붙은 민병대 우스타시를 창설했고 이 우스타시는 독일 나찌군들도 경악할 잔인함을 발휘하며 유태인과 나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을 학살했다. 우스타시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그 집무실 책상에 학살된 자들의 눈알 20킬로그램을 상시 두고 다녔다는 전언이 있을 정도니 알쪼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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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맞선 좌익 빨치산들도 점차 세력을 키웠으니 그 대표가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다. 티토는 그의 많은 가명 중의 하나였다. 스탈린조차 죽을 때까지 그를 ‘발터’라는 가명으로 기억하고 불렀거니와 그 때문에 그는 한때 김일성이 받았던 오해를 받는다. “저 티토가 그 티토 맞아? 아닌 거 같은데?”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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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철같은 의지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빨치산을 이끌었고, 나찌와 우스타시, 그리고 독일에 저항하는 목표는 같으나 좌익에 더 적대적이었던 우익 빨치산 체트닉 모두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를 탐탁지 않아 했던 미국과 영국의 일치된 지원을 받을 만큼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티토는 자신의 조국을 자신의 무력으로 해방한 몇 안되는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물론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사회주의 조국 소련에 한때 충성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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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문제 많은 지도자가 다스리던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헌신적인 충성을 받았던 것은 일종의 비극이기까지 하다. 독일 공산당은 “나찌당이 집권하면 서방 세계를 휩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이 여유있게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는 스탈린의 한 마디에 나찌에 대한 저항을 실질적으로 조직해 내지 못한다. 중국 공산당이 뼈를 깎고 피를 토하며 대장정을 벌이고 장개석 군과 맞서는 동안 소련은 요지부동으로 장개석 정부를 지지했다. 또 소련의 지시 한 마디에 만리타향의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원수로 갈려 죽고 죽이는 참극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했다. 그건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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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티토 자신도 그랬다.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때 우리를 지켜 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 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br />
<br />
당시의 공산주의자 태반이 그랬다. 그 절대적인 믿음 위에서 스탈린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매달아 죽이고 쏘아죽였으며 그 시산혈해 위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그 피비린내가 자신의 코를 찔러도, 그 참극을 직접 목도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은 그 교조,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과 추앙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점에서 티토는 달랐다.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킨 티토는 외국 군대의 유고슬라비아 진주를 막아 냈고, 사회주의 조국 소련의 일방적인 지시에도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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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우리는 소련 체제를 연구하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극히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조국을 그보다 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br />
<br />
그때만 해도 스딸린 대원수 만세를 부르짖고 있던 김일성보다 앞선 ‘주체사상가’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는 속이 얕고도 강퍅했다. 자신의 입 안의 혀같이 놀지 않는 이들은 모조리 혓바늘처럼 골치 아픈 존재로 취급했고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공산주의자 지도자 티토의 나라를 코민포름에서 축출했을 뿐 아니라 티토를 개인적으로 죽이려고 암살단까지 파견했다. 이에 티토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br />
<br />
<br />
. “"나를 죽이라고 사람을 자꾸 보내지 마시오. 벌써 다섯 명이나 붙잡았는데...... 중지하지 않으면 나도 모스크바에 한 사람 보낼 거요. 나는 딱 한 사람만 보낼 거요. 더 필요가 없을 테니까."<br />
<br />
<br />
그는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등의 천조각들을 유고슬라비아라는 그럴 듯한 식탁보로 짜낸 정치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가 그때껏 자신을 지탱해 왔고, 믿어 왔으며, ‘복음’으로 여겼던 대상에 대하여 반항할 수 있었던 데에서 인간 티토의 탁월함을 본다. 앞의 두 일에 비해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죽어간 이들은 사실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많다. 그러나 자신이 지켜온 ‘교조’로부터 유연하게 벗어나고, 그 교조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이익과 독립을 지킨 예는 오히려 많지 않은 것이다. 1980년 5월 4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티토는 그 일을 했다. <br />
<br />
<br />
교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티토가 있었듯 단파방송을 들으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한민전의 기치를 높이 올려라 조국의 해방이 동터오른다” 가사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 떨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인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고, 지금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 속에서도 핵무기 개발과 인공위성 쏘아올리기에 돈을 때려붓고 있는 왕정국가의 현실을 보면서도 그 교조를 버리지 못한다면, “이제 그만하시오. 이건 주석님의 뜻이 아니잖소?”라고 묻지 못하고 미련하게 상부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것을 대견한 일로 아는 치들이라면, 현실에 눈 감은 채 신념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우리의 공적은 과오보다 크다.”운운하는 이들은 티토에게 다음과 같은 욕설을 면하기 어려우리라. “쓰레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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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산하의 오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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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5 May 2012 02:22:10 GMT</pubDate>
		<dc:creator>산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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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86.5.3 인천에 모인 사람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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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5월 3일 해방구(?) 인천의 사람들 1985년 2.12 총선은 정국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관제야당으로 불리우던 민한당은 새롭게 부상한 신민당이라는 블랙홀에 허무하게 빠져들어갔다. 신민당은 여당이었던 민정당과 맞먹을만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그들은 2.12 총선 1주기를 맞아 71년 이래 대한민국 국민의 숙원 중 하나였다 할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명 서명 운동을 시작할 것을 결의한다. 부산에서 이 행사가 열렸던 것은 서면의 대한극장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지닌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추정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은 적어도 그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김대중의 육성 연설이 쩌렁쩌렁 스피커를 울렸고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박수가 터져 나왔었으니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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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 주체는 당연히 신민당이었지만 그 판에 뛰어든 것은 신민당원 뿐이 아니었다.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가 된 학생들, 재야 단체 등 당시 전두환에 맞서 싸우던 거의 모든 세력이 개헌촉구 대회의 주력을 이뤘다. 쌍방간에 윈윈할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보수야당 신민당은 ‘과격한’ 그룹의 참여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특히 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으로 대변되는 대학가의 비극 이후 그 눈살 찌푸림은 더욱 노골화됐다.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과 만난 자리에서 과격한 좌익 세력에 대해 공통적인 우려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격 세력’ 쪽도 신민당에 눈살을 찌푸리긴 마찬가지였다. “니들이 고와서 함께 한 줄 아니?”<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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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년 5월 3일은 인천 지역 개헌 추진위원회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날이었다. 신민당 인천 지역 관계자들도 가슴 설레며 기다린 날이었겠지만 그들 말고도 무지하게 많은 이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지역 학생운동 그룹은 물론, 경인가도를 따라 늘어선 공장 지대에 촘촘히 박혀 있던 ‘위장취업자’들과 그들의 동지가 된 노동자들, 각종 재야 단체 회원들에게는 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학생과 재야 중심이었던 시위에 노동자들이 대거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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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시작도 전, 이미 수천 명 규모의 시위대가 시민회관 앞에 형성돼 있었다. 집회에 참가했던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동근의 꼼꼼한 회고에 따르면 5.3에 참여한 ‘조직 대오’로 사회운동 진영 1천여명, 노동운동 2천여명, 학생운동 4천여명으로 추산하고 신민당원 등 나머지 주체들을 2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즉 조직 참가자가 1만. 그리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약 5만 정도의 시위대가 집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 인천 시내는 “단군 이래 최대의 화염병”으로 뒤집힌다. 민정당사가 불탔고 신민당 승용차도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신민당 대표부는 이 난리법석 와중에 정작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개헌 추진 대회를 치르지도 못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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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TV 뉴스에서는 한 장면이 대략 스무 번도 넘게 리플레이됐다. 운 나쁘게 시위대에게 포위된 페퍼포그에 매달린 한 전경을 수십 명의 각목 부대가 잔인하게 두들겨 패는 광경이었다, 물론 시위대가 한 번 잡히면 “일단 맞고” 시작하는 시절이었고, 그 끔찍한 경찰의 폭력성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였지만, 그 장면에서 악마는 각목부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악마들은 메인 뉴스 시간 내내 반복해서 브라운관에 출현했다. “저게 학생이냐?” 일대 검거 선풍이 불었다.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의 삼총사는 경쟁을 하듯 찍어 두었던 이들을 뜰채로 건져 냈고 서빙고에서, 남산에서, 장안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소리와 사람 살 타는 냄새, 그리고 두들겨 패는 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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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와중에 등장하는 한 사람에 대한 회고는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5.3 인천 사태 3일 후 보안사 수사팀에 체포됐었다. “그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전기고문과 고춧가루 물 먹이기 고문을 당했다. 견디다 못해 엉터리 약도를 그려 주자 앰뷸런스에 싣고 그리로 데려갔다가 속은 것을 알고는 앰뷸런스 안에서 전기방망이로 온몸을 지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 후 법정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모두진술에서 2시간 동안 전두환 정권을 맹폭했다. 전두환 이름 앞에다가 매번 ”광주학살과 군사반란을 저지르고“라는 수식어를 달아붙였다. 실로 용기백배해주는,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진술이었다. 당시 변호사가 내게 물었다. ”저 사람은 평소 뭘 먹고 살았길래 저렇게 힘이 좋아요?“” ( 유시춘씨의 증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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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운차고 견결했던 사람의 이름은 김문수다. 맥빠지는 소리들이 귀에 어른거리지만, 김문수가 맞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만큼 헌걸차고 용맹한 투사도 없었다. 26년이라는 세월은 참 길고도 매정했던 것 같다. 인천 5.3 당일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차명진 의원의 젊은 날도 있었고, 요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는 장기표씨는 그 선봉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요즘 보면 새누리당 체질같기도 한 박계동 전 의원도 이 사건의 여파로 구속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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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역시 “사람의 죽을 때를 보아야 한다.”는 옛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말은 기가 막히게 맞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지만 우리는 그 사람 변했네 라는 말을 일삼아 하고 살기도 한다.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진 가운데 인천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없었지만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 , 체포되어 전기찜질을 당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 과거에 무색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슬프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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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지 ‘저쪽으로’ 넘어간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제딴엔 견결하게 진보진영에 남아 있다고 자부하는 주제에 대리투표부터 소스 열람까지 부정선거 백화점을 차린 주사파들 역시 김문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날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인천 거리를 누비던 ‘자민투’ 소속 학생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오늘날 “자 자 할머니 찍으시고...... 어 안되면 내가 대신 투표해 드리지 뭐,” 따위로 놀고 자빠진 자들이 운동을 합네 진보를 합네 놀고 자빠지고 있었음을 어제 오늘 우리는 잘 알게 되지 않았는가. 86년 5월 3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참 스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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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산하의 오역</category>

		<comments>http://nasanha.egloos.com/10881809#comments</comments>
		<pubDate>Sat, 05 May 2012 02:04:51 GMT</pubDate>
		<dc:creator>산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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