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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兵者國之大事, 不可不察也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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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5 May 2012 16:26:1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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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오징어 해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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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4346d7.jpg" width="480" height="3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4346d7.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63f31b.jpg" width="480" height="3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63f31b.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8e23f0.jpg" width="480" height="3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8e23f0.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ab2384.jpg" width="480" height="3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ab2384.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e49afa.jpg" width="480" height="3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205/16/07/c0036507_4fb281de49afa.jpg');" /></div></p><br><br>* 첫째(9세)가 과학책을 보다 개구리 해부에 흥미를 느꼈다. 요즘은 해부용&nbsp;개구리도 5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지만, 산 개구리를 해부하고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대신 선택한 것이 냉장 오징어. 둘째(7세)가 아이패드로 보는 것은 어느 블로그에 올라온 오징어 해부 포스팅. 셋째(5세)가 돋보기로 뭘 봤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br><br><br><br><span style="COLOR: #dcdcdc">* 올해 상반기는 바싸서 포스팅 하나 제대로 못했군요. 6월부터 슬슬 다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br></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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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번동아제의 사랑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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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5 May 2012 16:21:0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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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작동중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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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2/27/07/c0036507_4ef9c3dee1b26.jpg" width="342" height="44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2/27/07/c0036507_4ef9c3dee1b26.jpg');" /></div><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2/27/07/c0036507_4ef9c3d2a2a9f.jpg" width="342" height="44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2/27/07/c0036507_4ef9c3d2a2a9f.jpg');" /></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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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번동아제의 사랑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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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7 Dec 2011 13:12:19 GMT</pubDate>
		<dc:creator>번동아제</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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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북표 라마동 부여족 인골과 가장 가까운 집단은 한국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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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ed589c45.jpg" width="500" height="534.42340791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ed589c45.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요서 내륙 지역에 위치한 라마동 유적의 위치 (A표시) </strong></div><br><br><br><span style="COLOR: #3333ff">■ 요서 라마동 거주민이 부여족이라는 폭탄 발언</span> <br>지난 2010년 4월30일 길림대의 주홍 교수가 경남 김해에서 열린 제16회 가야사 세미나에서 이상한 발언을 했다.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의 족속문제에 대한 생물고고학적인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br><br>삼연은 전연(前燕 337~370)과 후연 (後燕 384~409), 북연 (北燕 409~438)을 지칭한다. 삼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비족이 주체가 되어서 생긴 국가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고고학자들이 간헐적으로 라마동 삼연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부여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계속 언급해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는데, 중국 형질인류학의 대가인 주홍 교수가 직접 우리나라에 와서 아예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고 폭탄성 발언을 한 것이다.<br><br><span style="COLOR: #3333ff">물론 주홍은 삼연이 부여족이라거나, 선비족=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선비족계 전연이 여러차례 부여를 공격해 대량으로 포로를 잡아왔고, 이들 부여 포로들이&nbsp;선비족 정권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고분을 조성한 지역이 라마동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층 중 일부가 당나라에서 고위 장수를 지냈듯이 선비족에게 포로로 잡혀간 부여족들도 모두 노예처럼 거주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밀집 고분을 조성할 정도로 삼연(특히 전연) 지배층 외곽에 자리잡은 집단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삼연에 부여계 관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연 산기시랑 여울 등의 사례가&nbsp;&nbsp;이미 문헌에서도 확인된 사례가 있다. <br><br></span>그렇다면 왜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했을까. 사실 라마동 유적 자체가 선비족이 주체가 된 유적이 아니라 종족적으로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라는 것 그 자체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라마동 유적이 동아시아 한/중/일 고대 갑옷, 마구 역사와 계보에서 차지하는 압도적이고 선도적인 위상을 이해한다면 라마동 유적이 부여계 유적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충격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br><br>하지만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특정한 지역에서 출토된 대량의 인골을 두고 중국 학계, 특히 형질인류학 전공자들이 부여족이란 구체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폭탄성 발언"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br><br>사실 형질인류학적으로 부여족 혹은 고구려족, 혹은 부여인, 고구려인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한 영역이었다. 부여-고구려계 고분에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기법을 적용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의 인골이 대량 출토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br><br><br><span style="COLOR: #3333ff">■ 그동안 모호했던 부여-고구려계 집단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span><br>다만 현대 만주족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토대로 볼 때 그 중간지역에서 거주하던 집단인 부여-고구려계 집단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a href="http://lyuen.egloos.com/4117885">"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의 유전적 관계 2008.1.29" http://lyuen.egloos.com/4117885</a>")는 점은 이미 예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br><br>하지만 이같은 나의 정황론을 뒷받침할만한 형질인류학적 증거는 지금까지 없었다. 특히 고구려나 부여하기 존재하기 이전 단계인 기원전 10~기원전 4세기 중국 길림성 서단산 유적의 인골이나 기원전 16~11세기의 요령성 본계 유적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과 비교하기 애매한 특성이 많아 논란이 되었다. 북한 사회과학원 "조선사람의 기원" 150쪽의 표를 보면 서단산 유적의 인골은 머리뼈 높이가 평균 132.0mm에 불과했다. 이는 북한 학계에서 산출해낸 이른바 "조선 옛 유형 사람"의 머리뼈 높이 평균 140.3mm보다 두드러지게 낮아서, 과연 서단산 인골을 "조선 옛 유형 사람의 한 지방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지 망설이게 만들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c6e71764.jpg" width="500" height="301.87940485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c6e71764.jpg');" /></div><br><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strong>북한 학계가 분석한 서단산 인골의 정체. </strong>도표 원출처 "조선 사람의 기원, 1989". </span><br><br>북한 학계는 서단산 인골이 "조선 옛 유형 사람의 한 지방유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으나 위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단산 인골이 퉁구스족과 현대 한국인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음을 숨길 수는 없다.<br><br>그렇다고 서단산 유적 인골을 퉁구스계 집단으로 보기에는 두장경이 175.mm, 두폭경이 138.1mm로 너무 작았다. 다시 말해 서단산 유적은 한국인과 관련시키기에도, 반대로 퉁구스계(역사상의 숙신-말갈)와 관련시키기에도 다소 애매한 특이한 유형의 인골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 학계에서는 "조선사람의 기원" 155쪽에서 매우 복잡한 계산을 거쳐 서단산 유적 인골과 현대 한국인 사이의 집단적 쌍거리가 5.1인데 퉁구스와는 6.2라는 수치를 제시하면서 상대적으로 서단산 유적이 현대 한국인에 끌리는 경향이 존재함을 강조해 왔다. <br><br>서단산 유적 외에도 요령성 본계 유적에서 나온 인골이라도 현대 한국인 내지 한국인과 유사한 만주족과 비슷한 유형의 인골이 나왔으면 논란이 종식되었을 텐데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요령성 본계 유적의 인골도 북한 학계가 주장하는 이른바 "조선 옛 유형'이나 현대 한국인, 현대 만주족과 관련이 있다기 보다는 일본 고대 죠몽, 일본 고대 야요이 인골 중 일부, 일본 현대 아이누 등 세 집단을 삼각점에 두고 야요이와 조몽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본계 유적 인골의 상대적 위치에 대해서는 주홍, 东北亚地区古今居民种族类型的比较研究, 길림대 사회과학학보 1998-5기 4쪽 참조)<br><br>이들 유적은 기본적으로 부여-고구려 건국보다 훨씬 이전 단계의 것이고, 부여나 고구려의 유적이 분명한 곳에서는 막상 형질인류학적인 연구를 안정적으로 진행할 정도로 많은 수량의 인골이 출토된 사례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은나라 지배집단, 동호족, 선비족, 탁발선비족, 거란족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면서 형질인류학적 특징을 나열하던 중국 고고학계나 형질인류학계에서도 부여나 고구려의 형질인류학적 정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구체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던 중국 학계에서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왔길래 느닷없이 북표 라마동 삼연문화를 조성한 주민 집단이 부여족이라는 발언을 한 것일까. 어떤 형질을 가진 집단이 부여족이란 이야기도 하지 않던 중국 학계에서 왜 부여 본거지도 아닌 엉뚱한 요서 북표 라마동 유적을 놓고 부여족을 거론하는 모험을 한 것일까. 부여의 영토가 아님이 분명한 요서 내륙지역에서 출토된 인골을 놓고 부여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br><br>2010년에 주홍 교수가 국내에서 발표했던 논문 전문은 열람할 수 없었지만 발표 요지에 적힌 "고화북유형과 고동북유형의 혼혈" 운운하는 설명은 부여족이라고 결론을 내린 근거로는 다소 약하다고 느꼈다. 사실 길림대 형질인류학 연구자들이 말하는 고화북유형과 고동북유형 두 집단의 혼혈로 형성되었음직한 역사상의 집단은 그 외에도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br><br><br><span style="COLOR: #3333ff">■ 라마동 유적을 놓고 중국학계가 부여족이란 이야기를 한 이유</span> <br>사실 중국 학계에서 라마동 유적을 순수한 선비계 유적이 아니라 부여계 유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었던&nbsp;출발점은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유물 양상이 전형적인 선비족 무덤의 그것과는 달랐다는 점 때문이다. 동시에 라마동의 유물이 송화강 유역의 부여권 유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에서 먼저 부여계라고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고학자도 아니고 형질인류학 전공자들까지&nbsp;굳이 "부여족"이란 표현을 직접적으로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nbsp;&nbsp;&nbsp;<br><br>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중국 길림대에서 2010년에 공개한&nbsp;박사 논문(라마동 삼연문화 거주민의 인골연구 2009)을 보고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왜 부여 본거지도 아닌 요서 지역 내 부여 포로 집단의 무덤을 놓고 중국 형질인류학계가 굳이 부여계로 못박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말이다. <br><br>아래 표를 보자.<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1.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7f6ad5a0.jpg" width="500" height="642.97520661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1.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7f6ad5a0.jpg');" /></div><br>위 표는 동북아시아 제 집단과 라마동 유적 인골의 주요 측정치와 지표 총 19개를 Morant 기법을 이용해 비교한 것이다. 표에서 화북조는 1920~30년대 측정 자료에 기반한 중국 북방 한족, 조선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형질인류학계가 측정한 식민치하의 한국인을 지칭한다. 기타 몽고조는 몽골족, 애사기마조는 에스키모족, 통고사조는 퉁구스족, 나내조는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을 의미한다. 보는 바와 같이 비교 집단 중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한국인이다. 그 다음 가까운 것이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고, 그 다음이 북방 한족, 몽골족이고, 퉁구스족은 가장 멀다. <br><br>1920~30년대 화북조 다시 말해 북방 한족의 측정치는 현대 이후 중국 학계의 측정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장경이 짧은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비교 데이터를 다른 것으로 사용했다면 부여족과 북방 한족의 거리는 더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남부 퉁구스계 만주족이 형질인류학적으로 한국인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위 표에서 한국인 다음으로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 라마동 부여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7fd3836e.jpg" width="500" height="218.03278688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7fd3836e.jpg');" /></div><br>위 표는 같은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지표를 유클리드 거리로 계산한 것이다. 역시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가장 가까운 집단으로 나온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80b55875.jpg" width="500" height="228.54785478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1/29/07/c0036507_4ed4e80b55875.jpg');" /></div> <br>위의 계산결과 수지형 표로 그리면 당연하게도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한 그룹으로 묶인다. 에스키모와 나나이족이 한 그룹으로 묶이고 한 단계를 건너 뛰어 북방 한족과 연결된다. 퉁구스족과 몽골족이 그와 구별되는 그룹으로 묶인다.<br><br><span style="COLOR: #ff0000">다시 말해 중국 길림대 형질인류학 연구팀은 자신들의 분석 기법상 요서 북표 라마동에서 나온 인골이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 유적의 종족적 주체를 부여족이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논문은 부여족(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인 고구려족 내지 고구려인)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점을 사실상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막연하게 부여-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론 내지 역사 계승의식 차원을 넘어서서 형질인류학적으로도 부여-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의 연관관계를 한 차원 더 진전된 상태(최종 결론은 아니다)에서 논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것에 이 논문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br><br></span><br><br><br><br><br><br><br><br><br><span style="COLOR: #3333ff">■ </span><strong>예상되는 질문과 지적에 대한 Q&amp;A</strong><br><br><span style="COLOR: #3333ff"><strong>➀ 부여-고구려계와 현대 한국인이 동일 계통의 집단이었음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나?</strong></span><br>증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측정한 인골 개체수는 426건에 이르고, 이중 성별이 명백한 404개의 예를 연구에 이용했다. 그 중에서도 두장폭 지수등 형질인류학적 주요 측정치와 지표를 비교하는데 사용한 남성 성인 인골의 수는 대략 40~73개체에 이른다. 이 정도 많은 고인골을 이용한 연구는 흔하지 않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워낙 인골 보존 상태가 좋았다. 다만 머리높이가 136mm라는 점은 한국 학계나 북한 학계에서 공개한 한국인 인골 머리 높이 평균치(140mm 내외)와 비교해 다소 낮은 것이다. 물론 서단산보다 높지만 현대 한국인과 비교해서는 눈에 띄는 점이다. 이것이 순수 부여족의 인골이 아니라 당시(3~5세기) 선비족 내에 포로로 끌려 왔던 부여계 집단과 현지 주민과의 어느 정도 혼혈이 된 집단이라면 상대적으로 낮은 머리 높이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중국 학자들이 개별 데이터들의 측정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고동북유형과 고화북유형 운운하는 것을 봐선 현저히 다른 특성을 지닌 인골이 혼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치로 봐서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란 결과가 나온 것을 볼 때&nbsp;부여-고구려계 집단과 현대 한국인 사이에 연결고리가 존재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span style="COLOR: #3333ff">다시 말해 부여-고구려계와 현대 한국인이 동일 계통의 집단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지 몰라도 모종의 강한 연결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종의 강한 연결관계라는 것은 결국 문헌 사학계에서 말하는 "한국인의 3원적 구성설, 즉 고대 예-맥-한 3개 종족의 결합체가 현대 한국인의 뿌리"라는 주장과 "고대 삼한은 북방의 예맥족(부여-고구려의 주류 종족)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지역화한 종족으로 본질적으로 예맥족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이라는 주장을 의미한다.<br><br><br></span><span style="COLOR: #3333ff"><strong>➁ 동일 계통의 집단이라고 단정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strong></span><br><span style="COLOR: #3333ff">오늘날 유전자 인류학이 발달한 상태에서 고전적인 형질인류학적 측정치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라마동 유적의 mtDNA를 분석해 제 집단과의 상호거리를 분석한 연구결과는 이미 일부 공개가 되고 있지만 각 하플로그룹을 특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데이터는 아직 부분적으로만 공개되고 있어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span> 그리고 애당초 현대 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은 형질인류학적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두 집단을 두고 동일 종족, 내지 동일 민족이라고 표현을 사용하는 연구자나 학자는 전혀 없다. 양 집단의 언어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계통론 내지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와 모종의 연결고리가 존재하지만 고구려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집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주장이 엇갈린다. 퉁구스-한국-일본을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안에 고구려어를 포함시키는 학자도 있고, 한국-일본어를 한 그룹으로 묶으면서 고구려어는 상대적으로 일본어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반대로 고구려어와 몽골어나 퉁구스어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 학계 일부와 북한 학계에서는 고구려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한국어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와 신라어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관점에서 고구려어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연구는 현재 진행형 내지 좀처럼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다만 부여-고구려계 집단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했고, 아마도 유전자 인류학으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앞으로 고구려인내지 고구려족과 고대 한국인(삼한)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이라는 점 정도는 증명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span style="COLOR: #3333ff">정확한 용어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고구려인과 백제인, 신라인은 형제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가 진척될 가능성은 있다.</span><br><br><br><span style="COLOR: #3333ff"><strong>➂ 형질인류학은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고학 전공인 S대의 L교수도 과거에 이런 연구에 대해 혹평하지 않았나?</strong></span><br>형질인류학에서 사용하는 각종 측정치와 지표들이 유전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에 의해서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형질인류학이 완전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도 동의하기 힘들다. 지난 2008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과에서 나온 학회지에도 한반도 고인골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게재됐다. 우리나라는 형질인류학을 상대적으로 박하게 평가했던 영미권 학계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 인류학은 인정하면서 형질인류학은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강한데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지난 2008년 이후 동래성 해자 발굴 때도 칼에 부서진 인골들의 국적을 확인할 때 결국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지표를 동원해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 인골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았나. 무용하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막상 고인골을 손에 들었을 때 형질인류학적 연구방법론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중국 학계에서 동일 지역에서 비슷한 생활환경을 가지고 있는 만주족과 한족 대학생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비교 연구한 결과를 보면 종족별로 형질인류학적인 차이가 분명히 식별된다. 다시 말해 생활환경이 형질인류학적 측정치를 변화시킨다할지라도 유전적 영향을 완전 배제할수는 없다. 서구권보다 형질인류학적 연구자료가 많이 축적된 러시아와 중국의 각종 통계자료를 보면 동북아 지역의 제 종족집단의 상호관계를 비교할 때 형질인류학적 연구결과는 유전자 인류학의 연구결과와 상반된다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요서지역의 인골이 형질인류학적으로 고동북유형이 고화북유형으로 교체되거나 고몽고고원유형으로 교체될 때 유전자 인류학적 관점에서도 하플로그룹의 비율과 구성에 급격한 변동을 일으키는 현상이 확인된다. <span style="COLOR: #3333ff">다시 말해 형질인류학적 연구가 다른 연구와 연계해서 보조적인 참고 자료로 이용되는 한 무용하다고 비판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span><br><br><br><span style="COLOR: #3333ff"><strong>➃ 우리 학계의 형질인류학적 연구결과, 특히 국편위의 한국사 시리즈를 비롯해 여러 중요한 개설서와 논문집에 실린 P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신석기, 청동기, 철기, 고려, 조선시대 각 인골의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주요 지표들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현상이 있다. 막상 한국인 내지 그 조상임이 분명한 인골에도 이처럼 지표가 요동치는데 이런걸 어떻게 해석해야하나?</strong></span><br>측정에 사용한 인골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점은 이미 관련 연구자도 인정한 사례가 있다. 현대 한국인이 단두라고 해서 한국인 100명을 측정해서 단두가 100%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인골은 해당 유적에서 1~2개 샘플 정도 수집한 경우가 많아 일반화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물론 늑도 인골 같은 경우 단순히 샘플 타령은 하기에도 너무 벗어난 측정치를 보여준다. 이런 인골은 종족 이동, 민족 이동 현상이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상대적으로 머리 높이가 높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br><br><br><span style="COLOR: #3333ff"><strong>➄ 왜 하필이면 부여족 포로인가. 부여 영토가 요서 라마동까지 미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strong></span><br><span style="COLOR: #3333ff">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당시 문헌이 묘사하는 시대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라마동 유적 이외에는 당시 요서 일대에 전형적인 선비족풍의 유적이 많이 존재한다. 라마동 유적 외에 당시 요서지역 유적에서 나오는 인골도 고몽고고원유형-고시베리아유형-북아몽고인종 계통이어서 라마동의 인골과 전혀 달라 선비족 계통의 유적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라마동 유적이 기본적으로 선비족의 정치적 영향권 내에 있었던 부여족의 유적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span><br><br><br><span style="COLOR: #3333ff"><strong>➅ 왜 하필 부여족인가. 요서에서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인골이 나왔다면 백제 요서진출설의 증거로도 활용할수 있지 않나.</strong></span><br><span style="COLOR: #3333ff">이런 질문도 나올줄 알았다. 인골 자체만 보자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의 양상이 한성 백제 내지 그 이전단계의 한강 유역 일대의 유물과 비교할 여지는 없다. 선비족 유물과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송화강 유역의 유적들과도 강한 관련성이 있는 유물들이어서 부여 외에 다른 집단을 생각하기 힘들다.</span><br><br><br><span style="COLOR: #ff0000"><strong>➆ 이런 연구기법으로 중국의 대문구문화 등 동이족이 건설했다는 유적에서 나온 인골과 현대 집단을 비교할 수 있지 않나. 다시 말해 중국의 선진 동이족이 한국인과 정말 관련이 있는지 분석할 수 있지 않나. </strong></span><br>연구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이미 중국학계에서도 연구한 적이 있고 북한 학계에서도 연구한 적이 있다. 우선 북한 형질인류학계는 이미 앙소문화의 반파유형 고인골이나 대문구-용산문화의 대문구, 서하후 고인골의 특징을 연구해 조선 옛 유형사람이나 현대 한국인과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nbsp;<span style="COLOR: #ff0000">다시 말해 북한 형질인류학계는 선진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이 관련있다는 주장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span>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하다면 1989년간 &lt;조선사람의 기원&gt;, 2009년간 &lt;조선사람의 체질&gt;, &lt;조선사람의 기원과 형성&gt;을 참조하면 된다. 우리 학계에서는 한국 신석기 시대 인골과 중국 신석기시대 용산 문화 인골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언급을 한 논문(한림과학원총서41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수록)이 있지만 세부적인 비교를 하지 않아 큰 의미는 없다. 중국 학계의 연구결과는 조금 복잡하다. 대문구 문화인골에 대해 동아몽고인종과 남아몽고인종이 혼혈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폴리네시안적인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견해를 부인하면서 모두 고중원유형의 아형으로 앙소,대문구, 용산 문화 유적에서 나온 인골이 형질인류학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시 말해 중국 학계의 연구결과는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이렇게 논쟁이 진행되는 이유는 대문구문화권 내에서 출토되는 인골이 편두 등 인공적 변형이 된 경우가 많아서 정상적인 형질인류학적 접근법으로 분석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골을 유전자인류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야 최종적인 결론이 나올 것이다. <p></p><br/><br/>tag : <a href="/tag/부여" rel="tag">부여</a>,&nbsp;<a href="/tag/고구려" rel="tag">고구려</a>,&nbsp;<a href="/tag/형질인류학" rel="tag">형질인류학</a>,&nbsp;<a href="/tag/한민족" rel="tag">한민족</a>,&nbsp;<a href="/tag/기원" rel="tag">기원</a>,&nbsp;<a href="/tag/선비족" rel="tag">선비족</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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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9 Nov 2011 15:26:4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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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삼형제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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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9.egloos.com/pds/201111/16/07/c0036507_4ec3c98ac8e0e.jpg" width="500" height="331.8181818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9.egloos.com/pds/201111/16/07/c0036507_4ec3c98ac8e0e.jpg');" /></div><br>셋째가 이번달로 36개월이 되었다. 2004년 이래 7년 만에 처음으로 집 안에 36개월 미만의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은 낯선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한 집에 사는 다섯 사람이 모두 말로 정상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br><br>몇년간 지겹도록 익숙했던 사물들도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다. 젓병, 기저귀, 이유식...그리고 이제 내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는 서서히 과거형으로 사라져 갈 참이다. 집 안에 아기가 없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가슴 한 구석이 허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br><br>아기들과 뒹굴면서 보낸 7년은...때로는 엄청난 육체적 피로를 수반했을지라도....정신적으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아기 냄새, 어설프지만 듣기에 무척이나 유쾌한 아기들 특유의 발음....오랫동안 아련히 그리워할 것 같다. <span style="COLOR: #dcdcdc"><span style="COLOR: #dcdcdc"><blockquote><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dcdcdc">.<br>이제 서서시 다가오고 있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한 단계를 겸허히 기다려 본다<br><br></span><span style="FONT-FAMILY: '궁서','Gungseouche'"><span style="COLOR: #dcdcdc; FONT-SIZE: 170%">인생 제5장 사춘기 몬스터들과의 동거 <strike></strike></span></span></div></blockquote></span><blockquote><div style="TEXT-ALIGN: center"></div></blockquote></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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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번동아제의 사랑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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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6 Nov 2011 14:32:5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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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서 험독현 주석의 해석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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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BORDER-BOTTOM: #cccccc 1px solid; BORDER-LEFT: #cccccc 1px solid; PADDING-BOTTOM: 15px; PADDING-LEFT: 15px; PADDING-RIGHT: 15px; BACKGROUND: #dddddd; BORDER-TOP: #cccccc 1px solid; BORDER-RIGHT: #cccccc 1px solid; PADDING-TOP: 15px"><span style="FONT-SIZE: 130%">險瀆</span> (본문. 이하는 주석)<br><br>①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br>② 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br>③ 師古曰瓚説是也浿音普大反.<br></div><br><br>위 인용문에서 큰 글자는 한서의 본문이고, 작은 글자들은&nbsp;한서 주석서에 나온 해설들입니다. 한서 본문은 후한대의 인물인 반고(AD 32~92)와 그와 연계된 인물 수 명이 공동 집필한 것입니다. 주석은 본문에는 없고, 후대의 학자들이 언급한 내용을 모은 것인데 원래 구별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험독현에 대한 주석은 크게 응소, 신찬, 안사고 세 사람의 주장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br><br>이중 응소는 후한대의 인물입니다.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184년, 191년 이런 때 관직에 있었던 기록이 보이고 대략 200년대 초반이전에 사망합니다. 신찬은 대략 서진(AD 265~316)대의 인물인데 정확한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는 불확실합니다. 안사고(AD 581~645)는 당나라 초기의 인물입니다. <br><br>즉 1세기 후반대의 인물인 반고가 지은 한서의 본문을 2세기 후반, 3세기 후반대, 7세기 전반대에 주로 활약한 인물들이 보충 설명한 것이죠. 논쟁은 2세기 후반대의 응소가 주장한 내용을 3세기 후반대의 신찬이 반박한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출발합니다. <div class="autosourcing-stub">&nbsp;&nbsp;<br><br>1) 자시(自是)의 의미 <br>한서 주석서들이 한서 지리지 험독현조에서 언급한 自是는 "마땅히", "당연히", "원래", "애당초" 정도의 의미로 해석하면 될듯합니다. &nbsp;이미 일부 분들이 설명하셨듯이 "이곳은 마땅히 험독이다"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뜻입니다. 한서의 각종 주석서에서 自是가 "마땅히" 정도의 의미로 쓰인 예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br><br>&lt;한서 권64하&gt; <br>越裳氏重九譯而獻。&lt;張晏曰 越不著衣裳，慕中國化遣譯來著衣裳也，故曰越裳也。師古曰張說非也, 越裳自是國名。&gt;<br><br>한서 본문에서 9번 통역을 거쳐 조공을 해왔다는 월상씨에 대해 주석에서는 장안이라는 사람은 원래 의상을 입지 않은 월(여기선 일종의 종족명)이 중국 (문화를) 사모해서 의상을 입고 왔기 때문에 '월상'이라고 했다는 것이고, 안사고는 "장안의 이야기는 틀렸다, 월상은 마땅히 나라 이름이다"라는 취지로&nbsp;반박한 것이죠. 이처럼 한서 주석서에서 自是는 마땅히 외에 애당초, 당연히, 원래 이 정도의 뉘앙스로 쓰이고 있습니다. <br><br><br><br>2) 차(此)를 왕험성으로 볼 경우의 해석 <br>결국 한서 주석서의 험독현 주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自是라기 보다는 오히려 此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느냐가 관건이겠죠. 일반적인 용법이라면 此가, 바로 앞의 구절(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을 지칭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br><br>만약 신찬이 말한 "王險城在樂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에서 차(此)를 왕험성이라고 본다면 해석은 아래와 같이 됩니다. <br>=&gt;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곳(왕험성)이 마땅히 험독이다." <br><br>다만 이렇게 해석할 경우 한서 본문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사학계의 해석론과 충돌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구절은 기본적으로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입니다. 결국 이미 본문에서 험독현이 요동군에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번째 주석을 "이곳(왕험성)이 마땅히 험독이다"라고 해석한다면 논리적으로 왕험성=낙랑군 패수의 동쪽=험독=요동군 험독현으로 연결될 소지가 생깁니다.<br><br>이렇게 되면 험독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면서 동시에 요동군 험독현이기도 하다는 뜻이 되어 한서 본문과 해석상 충돌 문제가 생깁니다. 동시에 이것은 결국 문헌사학계의&nbsp;일반적인 입장인&nbsp;고조선 최후기 중심지가 낙랑군 영역 내에 있었다는 통설(조법종 선생 등 이를 부인하는 소수 견해도 있음)과도 미묘하게 충돌하는 부분이 생기죠.<br><br><br><br>3) 차(此)를 험독으로 볼 경우의 해석<br>결국 한서 주석서의 험독현 주석에서 말한 차(此)는 험독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해석은 고구려사 전공자이면서 동시에 고조선 문제에 대해서도 문헌사학 측면에서 관련 논문과 저서를 다수 집필한 서울대 국사학과의 노태돈 선생도 인정한 것입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1/07/07/c0036507_4eb7e2320749e.jpg" width="500" height="258.66495507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1/07/07/c0036507_4eb7e2320749e.jpg');" /></div><br><br>예를들어 노태돈 선생이 &lt;한국사론 23호&gt;에 기고한 &lt;고조선 중심의 변천에 관한 연구&gt;를 보면 차(此)를 전후한 문맥에 대해&nbsp;위와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노태돈 선생은 此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있으나 부연설명하면서 "왕험성이 아니라"라는 구절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노태돈 선생은 결국 "이곳(험독)은 (왕험성이 아니라) 원래 험독이다"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죠. <br><br>이렇게 차(此)를 험독으로 볼 경우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br>=&gt;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곳(요동군 험독현이)은 마땅히(애당초/원래) 험독이다." <br><br><br><br>4) 주석의 차(此)가 한서 본문의 험독을 지칭하게 된 논리 구조 <br>차(此)가 왜 바로 앞구절을 받지 않고, 엉뚱하게 다른 단어를 받았는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논쟁이 되는 문장 자체가 본문의 험독현조에 붙은 보충설명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을듯합니다. <br><br>해당 문장은 응소,신찬, 사고가 말하는 주장 ①②③만 봐서는 안되고 이것이 기본적으로 험독현에 대한 주석, 다시 말해 험독현에 대한 보충설명이라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즉 한서 본문과 주석서의 기본적인 서술 구조와 흐름을 풀어쓰면 아래와 같습니다. <br><br><br><div style="BORDER-BOTTOM: #cccccc 1px solid; BORDER-LEFT: #cccccc 1px solid; PADDING-BOTTOM: 15px; PADDING-LEFT: 15px; PADDING-RIGHT: 15px; BACKGROUND: #dddddd; BORDER-TOP: #cccccc 1px solid; BORDER-RIGHT: #cccccc 1px solid; PADDING-TOP: 15px"><br>본문: 한서 본문에서 요동군에 속한 현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험독도 언급. <br><br>&lt;험독현에 대한 보충설명&gt;<br>① 응소는 말하길 (험독현은:주어 험독현 생략)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라고 말했다. 강의 험함에 의지해 험독이라고 했다. <br>② 신찬은 말하길 왕험성은&nbsp;낙랑군&nbsp;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 곳(험독현:주어 험독현을 此로 표현)은 마땅히(혹은 원래) 험독일 뿐이다. <br>③ 사고는 말하길 신찬이 맞다고 했다. <br></div><br><br>결국 ② 번은 조선왕 만의 도읍은 왕험성이고,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므로, 그와 동떨어진 이곳(요동군 험독현: 주어)은 (왕험성이 아니라) 마땅히 험독일 뿐이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구절인 것이죠. 이렇게 해당 책의 전체 구조를 보면 此는 험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고 이처럼 此가 본문을 받는 것은&nbsp;한서 지리지 임진현 등&nbsp;다른 지명 관련 설명에도&nbsp;유사한 사례가&nbsp;보입니다. 此가 앞문장이 아니라 주석의 대상이 되는 본문의 지명을 지칭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죠. <br><br>아래를 보시면 좀 더 분명히 이해가 되실 겁니다. 주석에 나오는 此는 본문의 험독(푸른색 표시 부분)을 지칭한다는&nbsp;해석이&nbsp;일반적인 문장론만으로 보면 어색해 보이지만, 본문과 주석의 글자를&nbsp;다른 크기로 편집한 전체 서술 구조와 편집 구조를 이해한다면 그리 어색한 것은 아니죠.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2.egloos.com/pds/201111/07/07/c0036507_4eb7e29de0b4f.jpg" width="443" height="84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2.egloos.com/pds/201111/07/07/c0036507_4eb7e29de0b4f.jpg');" /></div><br><br><br><br></div>			 ]]> 
		</description>
		<category>역사잡설</category>

		<comments>http://lyuen.egloos.com/5569636#comments</comments>
		<pubDate>Mon, 07 Nov 2011 14:53:20 GMT</pubDate>
		<dc:creator>번동아제</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백제 웅진성 출토 중장기병용 말갑옷과 장식 칼  ]]> </title>
		<link>http://lyuen.egloos.com/556714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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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가죽제 찰갑이 출토된 충남 공주 공산성(추정 백제 웅진성)에서 이번에는 중장기병용 가죽제 말갑옷과 함께 장식도가 출토됐다. 7세기대 가죽제 찰갑과 말갑옷, 장식 칼은 국적이 어디라도 초희귀 유물이 분명하므로 이번 발굴은 거의 동래성 해자 발굴에 육박할 정도로 발굴의 의의가 커진 것 같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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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009900">■ </span>추정 백제 웅진성 출토 가죽제 말갑옷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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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2.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c55dcac7.jpg" width="500" height="332.03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2.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c55dcac7.jpg');" /></div> <div align="center"><strong>앞에서 본 가죽제 말갑옷 전체 모습</strong></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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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dc63060c0.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dc63060c0.jpg');" /></div> <div align="center"><strong>옆에서 본 가죽제 말갑옷 전체 모습</strong></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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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dc716c485.jpg" width="500" height="332.03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dc716c485.jpg');" /></div><div align="center"><strong>말갑옷을 가까이에서 본 모습</strong></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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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dcc47de76.jpg" width="500" height="311.035156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dcc47de76.jpg');" /></div> <div align="center"><strong>말갑옷 구성 갑찰을 확대한 모습</strong></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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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산성(추정 백제 웅진성)에서 출토된 말갑옷도 기본적으로 가죽제라는 점, 옻칠을 했다는 점은 저번 공산성(추정 백제 웅진성) 출토 찰갑과 동일하다. 참고로 저번에 출토된 찰갑도 마찬가지지만 이번에 출토된 마갑도 황칠 갑옷이라고 말하기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각종 문헌사료에서 백제 갑옷과 관련해 황칠과 연계시켜 설명한 기록이 많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번에 출토되는 실물 갑옷의 색깔은 전형적인 옻칠 색깔일뿐 황칠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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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유사에 漆曰黃漆이란 표현이 있긴해서 우리나라에서 한때 옻칠을 황칠이라고 부른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백제에서 황칠은 일반적인 옻칠과 구별되는 용어였던 것이 분명하다. 백제에서 유명한 황칠은 통전에서 "百濟有三島, 生黃漆,六月刺取漆,色若金光奪人目"한데서 알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황금빛 내지 금속성 광채가 나는 빛깔이다. 그렇지만 이번에 나온 것은 전형적인 옻칠 색깔로 이른바 황칠과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국내 황칠공예 복원자들이 제시하는 황칠의 색깔도 문헌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황금색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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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2.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83ce615d.jpg" width="333" height="41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2.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83ce615d.jpg');" /></div> <div align="center"><strong>국내 황칠공예 복원자들이 제시하는 황칠의 색깔</strong> </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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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8be21854.jpg" width="500" height="328.28282828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8be21854.jpg');" /></div> <div align="center"><strong>공산성 출토 찰갑의 색깔.</strong></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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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산성(추정 백제 웅진성) 출토 찰갑의 색깔은 주칠 부분을 기준으로 그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보면 보면 황칠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옻칠 색깔이 명백하다. 갑옷이나 무구류에 옻칠을 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고분에서 이미 확인되며, 우리나라에서 원삼국 무기류에서 확인되고 갑옷 표면에 옻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는 가야 찰갑과 판갑에서 이미 확인된 사례가 있다. (김점숙-합천 옥전고분군 출토 5세기대갑주의 표면처리 기법, 용인대 석사 학위 논문 2005)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옻칠은 조선시대 유성룡 찰갑에서도 확인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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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8.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94c42ca2.jpg" width="440" height="29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8.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94c42ca2.jpg');" /></div> <strong><div align="center">가야 갑옷 조각의 투과광 현미경 사진. </div></stron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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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오른쪽 윗부분은 가죽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중앙은 국내 연구자에 의해 옻칠층으로 추정되는 부분. 아랫부분은 금속 부분이다. 백제 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가야 갑옷에도 일반적으로 옻칠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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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죽제 말갑옷에 옻칠을 한 사례는 8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 법륭사 전래 금박마갑 (金箔貼り馬甲)에도 전례가 있다. (王権と武器と信仰 , 일본 同成社, 2008. 831쪽) 뿐만 아니라 중국 춘추시대 M2 초묘의 전차용 가죽제 말갑옷에 옻칠을 한 사례(甲胄复原, 중국 大象出版社,2008. 33~43쪽)나 중국의 전국시대 전차용 말갑옷 중 말머리에 씌우는 가죽제 마주에도 흑칠을 한 사례가 있다. (古代兵器通论, 중국 紫禁城出版社, 2005. 61쪽)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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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ff0000">다시 말해 가죽 갑옷에 옻칠을 하는 것은 한,중,일 공통의 표준적인 갑옷용 가죽 처리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옻칠의 유무 자체는 갑옷의 국적을 확인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span>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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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번에 발견된 말갑옷의 제작 기법은 분명하지 않지만 전반적인 보존 상태에 비해 각 갑찰의 투공(끈 연결용 구멍)이 명확하게 식별되지 않는다는 점은 눈길을 끄는 점이다. 일부 구멍이 보이긴하지만 상당히 불규칙적이어서 과연 각각의 갑찰이 직접 끈으로 연결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혹 직물제의 대형 밑바탕에다가 갑찰을 덧붙이는 방식이거나 끈 이외의 다른 방법도 추가로 이용해서 갑찰을 부착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정도 해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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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겉모습으로는 개별 갑찰이 구별되어 보이지만 찰갑 제조 기법(수결식, 혁결식)이 아니라 다른 연결 기법을 사용한 것이 아닌지도 의심해 볼만하다. 전체적인 형태는 현재 사진으로만 보자면 T자형으로 목부터 몸체까지 하나로 일체화된 형식의 말갑옷처럼 보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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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009900">■ </span>추정 백제 웅진성 출토 장식도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8.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d0b8c914.jpg" width="500" height="201.09439124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8.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ed0b8c914.jpg');" /></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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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말갑옷과 함께 길이 55cm급의 장식도도 출토됐다. 장식도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공개된 사진으로는 방두도(方頭刀) 내지 규두도(圭頭刀)의 일종으로 보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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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f1d09f244.jpg" width="500" height="363.89413988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1/01/07/c0036507_4eaff1d09f244.jpg');" /></div> <div align="center"><strong>한국 삼국시대 원두-규두-방두도 </strong></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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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유사한 칼로 원두도라는 칼도 있다. 원두도의 경우 공주 송산리 1호에서 출토되어 백제에서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고, 신라권의 양산부부총, 신라와 가야의 고고학적 특성이 교차로 나타나는 창녕 교동 10호분에서 출토되어 가야권의 사용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는 상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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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ff0000">하지만 원두도의 경우 손잡이 끝이 원형이나 타원형을 이루며 상단 끝부분 측면 선이 뚜렷한 구분이 없이 둥글게 처리된 칼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방두도는 측면으로 내려가는 선이 뚜렷하게 경계선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한국의 칼 특별전도록, 국립대구박물관, 2007. 95쪽/ 구자봉-삼국시대의 장식대도연구, 북방사논총 5호 243쪽) 이번에 나온 칼은 측면과 끝단의 선이 명확하게 구별되므로 원두도의 일종으로 볼 수 없다. </span><br />
<br />
결국 이번에 출토된 것은 원두도는 아니며 규두도 내지 방두도의 일종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규두도는 칼 손잡이 끝이 산처럼 불룩 솟아있는 모양이다. 규두도는 국내에서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 7호 석실에서 제한적으로만 출토되어 일부에서는 일본제 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한국의 규두도와 일본 규두도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에서도 규두도는 총 90여점이 출토되었고 新堂社 고분, 龍王山 고분, 전 天理市 출토품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br />
<br />
<span style="COLOR: #ff0000"> 이번에 출토된 칼은 손잡이를 수직으로 윗면에서 찍은 사진이 없어서 조금 자신이 없긴 하지만 지금 사진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규두도라기 보다는 방두도에 가까운 칼처럼 보인다. 상부 끝단이 튀어나왔다기보다는 약간 호형을 이루면서 측면과의 경계가 뚜렷하다는 점이 그 근거다. 일반 방두도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보고, 사진이 추가로 공개되면 규두도로 판단을 수정할 여지는 남겨두고 싶다. <br />
<br />
방두도도 국내에서는 출토 사례가 매우 드물어 창녕 명리 III-1호분 등에서만 뚜렷한 출토 사례가 있다. 일본에서는 7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梨本 2호분에서 출토된 사례가 있다. 일본에서 방두도는 7세기 1분기(601~625년), 7세기 중반, 7세기 3분기(651~675)에 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원류는 중국 당나라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王権と武器と信仰 , 일본 同成社, 2008. 773~778쪽) <br />
<br />
국내에서 방두도는 원두도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으며, 일본에서는 당나라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본 방두도의 직접적인 계보는 규도도의 변형에서 출발했다는 견해도 있다. <br />
<br />
결국 안타깝게도 말갑옷과 마찬가지로 이번 장식도(추정 방두도)도 국적을 따지는데 명확한 기준점으로 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방두대도의 경우 중국에서도 명확한 실물 유물 출토사례를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벽화나 각종 공예품을 기준으로 볼 때 570년대의 북제묘에서 처음 보인다. 이 때문에 사용시기는 6세기 중후반부터 시작해서 8세기 초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두 끝에 2단으로 구획선이 있는 分銅형의 경우 조금 더 후대까지 사용되었다. </span><br />
<br />
* 한줄요약-언론 보도와 달리 장식도로 국적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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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3333ff">* 이번 발굴의 의미-가죽제 찰갑, 가죽제 말갑옷, 방두도 혹은 규두도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초희귀 유물이다.<br />
<br />
</span>			 ]]> 
		</description>
		<category>무기/갑주/성곽/함선</category>

		<comments>http://lyuen.egloos.com/5567145#comments</comments>
		<pubDate>Tue, 01 Nov 2011 13:36:11 GMT</pubDate>
		<dc:creator>번동아제</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645년명 백제 찰갑에 대한 잡설  ]]> </title>
		<link>http://lyuen.egloos.com/556414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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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명광개라는 소리까지 나왔던 찰갑 유물을 놓고 온갖 추정이 나오고 있다. 일단 가장 먼저 따져봐야할 것은 형태적인 특징일 것 같다. 당시 문화재청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길쭉해서 장방형에 가까운 찰과 길이가 다소 짧은 방형에 가까운 찰(한쪽은 원형인데 전체적인 형태를 식별할 정도는 아니다) 등 최소한 2종 이상의 소찰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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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0/26/07/c0036507_4ea6d3cf9d5e2.jpg" width="500" height="579.03225806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0/26/07/c0036507_4ea6d3cf9d5e2.jpg');" /></div> <div align="center">상하 길이가 짧아 방형에 가까운 소찰</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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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방형에 가까운 찰은 상단에 2개의 수결공을 식별할 수 있는 사진도 있으므로 상하 신축성이 있는 4~5세기대 이후 만주-한반도 양식 찰갑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소찰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방형에 가까운 소찰은 전체 형태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아 약간 애매하지만 곡선 부위가 식별되는 부분이 상단처럼 보이는데 이 부분에 수결공이 아래 위로 복수로 뚫려 있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삼국시대 소찰은 아니다. 사진상에 소찰이 부분적으로만 보이지만 상단으로 보이는 부분에 좌우로 평행하게 2개의 구멍이 뚫린 모습을 볼 수 있어 투공만 보자면 언뜻 중국 한대의 어린갑 종류의 소찰을 연상시키는 점도 있는 모양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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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0/26/07/c0036507_4ea6d3a9538b9.jpg" width="423" height="26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0/26/07/c0036507_4ea6d3a9538b9.jpg');" /></div> <div align="center">상단에 수결공도 식별되는 전형적인 장방형 소찰</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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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와 별개로 우리나라 삼국시대 전형의 장방형 소찰도 분명하게 확인되었으므로 전체적인 갑옷 형태를 중국 한대 어린갑 계열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상단에 수결공이 있는 전형적인 장방형 소찰을 수결기법으로 엮어 갑옷 본체인 신갑을 만들고, 그 아래 부분에 방형 소찰을 덧붙여 상대적으로 매우 짧게 만든 상찰 내지 요찰 부위를 구성하는 방식(내몽고 呼和浩特 출토 철갑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아니라면 장방형 소찰을 수결기법으로 엮어 신갑을 만든 것은 동일하지만 길이가 짧은 방형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작은 소찰로 만든 부속갑을 어깨 부위 혹은 소매 부위에 덧붙이는 방식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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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으로 구별하기가 대단히 애매하지만 방형 소찰이라고 간주했던 소찰이 폭만 넓을 뿐 길이가 장방형 소찰과 동일한 것이라면 하북성 임장현 출토 북조 철갑들과도 비교해볼만하다. 다만 글자가 적힌 부분은 소찰이 무척이나 커 보여서 이것이 착시가 아니고 실제로 다른 장방형 소찰보다 큰 것이고, 이것이 갑옷을 구성하는 소찰의 일부분이라면 마치 중국 전국시대 피갑을 연상시키는 요소도 있어서 무척이나 생경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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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찰 도면 하나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공개된 사진만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무리해보이지만 개인적으로 워낙 궁금증이 커져서 불확실한 잡설을 한번 풀어 보았다. 여하간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당나라 실물 찰갑 갑옷의 전체적인 형태가 확인되지 않았고, 백제의 경우에도 7세기대 온전한 찰갑 실물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소찰만으로 국적을 언급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은 방형의 소찰에 뚫린 투공의 전체적인 배치가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스럽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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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3333ff;">1) 공산성 출토 찰갑이 지금까지 출토된 백제 찰갑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가?</span><br />
아니다. 이번에 출토된 것은 가죽제라서 눈길을 끌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공산성 출토 찰갑이 최상의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찰갑은 소찰 자체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소찰끼리 겹친 상태로 출토되어 최초 원형 상태를 식별할 수 있어야하는데 이번 것은 소찰이 완전히 흩어진 상태이고 극히 일부의 찰들만 겹쳐진 상태로 출토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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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갑을 복원할 때는 소찰을 연결하는 가죽끈내지 직물끈이 흔적이 남아있는지 여부가 매우 중요한데 현재 공개된 사진으로 보면 그 같은 끈의 결속 흔적도 전혀 식별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라면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고, 설사 복원한다해도 관련 연구자들의 의견이 수렴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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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면 1994년에 발굴보고서가 공개된 화성백곡리 찰갑(소찰 개수 270여개 이상 잔존)이나 2008년 고고학대회에서 약보고 형식으로만 공개된 오산 수청동 주구목관묘 출토 찰갑(소찰 개수 100개 이상 잔존)보다 보존 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수청동 백제 찰갑은 소찰이 온전히 겹쳐진 상태로 나왔기 때문에 사진상으로만 판단하자면 이번 공산성 찰갑보다는 차라리 수청동 찰갑의 복원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보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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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3333ff;">2) 갑옷에 옻칠이 최초로 발견되었나?</span><br />
그것도 아니다. 가야 갑옷에서도 종장판갑은 물론이고 찰갑을 구성하는 소찰에서 옻칠로 추정할 수 있는 유기물의 흔적이 식별된 사례가 있다. 그러므로 옻칠 흔적이 발견된 갑옷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눈으로 옻칠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찰갑 조각이 국내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참고로 중국은 이미 전국시대 가죽 갑옷에 옻칠한 사례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옻칠 여부만으로는 갑옷의 국적 유무를 따지는데 어떠한 기준이 될 수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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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3333ff;">3) 명광개라고 단정 할 수 있나?</span><br />
여전히 No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중국에서도 명광개 실물은 발견된 사례가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학계에서는 호심경 내지 그와 유사한 원형의 금속 장식물 내지 방호재를 부착한 갑옷을 명광개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명광개가 찰갑 형태의 갑옷 위에 원형 금속체를 붙인 것인지 아니면 신갑 부위 상단(가슴 부분)에 완전히 별개의 부속갑을 덧붙이는 방식인지도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을 벗어나 타 지역의 유사 갑옷을 본다면 쇄자갑, 경번갑, 찰갑 형태의 갑옷에 원형 금속체를 붙인 갑옷도 있지만 판갑 형태의 갑옷 위에 원형 모양을 타조한 경우도 있어서 명광개라고 불리는 갑옷의 기본 형태에 대해 뭐라고 단정적인 표현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느 경우라도 원형의 금속제 장식물 내지 방호재가 식별되지 않은 갑옷을 명광개라고 표현하기는 무리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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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3333ff;">4) 중국제인가, 아니면 백제 것인가</span><br />
이미 댓글에서도 썼지만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 중에 연호를 명기한 사례는 단 1건도 없다. 유일한 예외가 실체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전해오는 칠지도 뿐이다. 극히 이례적으로 중국 연호가 나온 이상 매우 조심스럽게 국적을 고민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당나라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지만, 지금 상태로는 백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기도 매우 조심스럽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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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0/26/07/c0036507_4ea6d404a88b1.jpg" width="249" height="28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0/26/07/c0036507_4ea6d404a88b1.jpg');" /></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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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李○銀라고 적힌 인명 윗 부분에 馬자의 아랫부분 처럼 보이는 글자 흔적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목간을 포함한 백제 금석문에서 인명 표기법은 출신지+인명(사택지적비의 경우)이거나 아니면 관직+인명(서광암 계유명삼존천불비상), 출신지+관등+인명(부여 능산리 목간) 등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일단 관등의 경우 平, 率, 德, 督, 軍, 武, 虞 등으로 끝나야하는데 인명 바로 위에 적힌 글자의 흔적 중 비슷한 것이 전혀 없으므로 갑옷에 적힌 글자를 백제 관등의 일부라고 볼 수는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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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관직의 경우 변수가 너무 커서 추정의 범위도 너무 넓다.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할수 있는 것은 司馬의 馬자 하단부라고 추정하는 방법인데 백제의 경우도 한때 중국 남북조 스타일의 막부체제의 관직명을 사용한 적이 있고, 당나라의 경우도 도독부 사마 등의 관직명을 사용했으므로 이 글자만으로 국적을 식별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백제왕의 속료로써 사마, 참군 같은 막부체제 스타일의 관직명이 7세기대에도 존재했는지는 의문이 남을 것 같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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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지만 주제 넘게 서체에 대한 감상도 말하자면 북조풍이 다소 남아있는 사택지적비에 비해 이번 것은 전형적인 당나라 전성기의 서체처럼 보여서 이 서체를 백제 것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백제가 최신 문화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해석해야할 것 같다. 다시 말해 현재 남아있는 글자로는 중국 것이라고 단정하기 힘들지만 백제 것이라고 단정할만한 요소도 전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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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무기에 붉은 색 주칠 글자로 부대 명칭과 제조 연도 혹은 수리 연도를 기입한 사례는 조선시대 유물(칼에서 2건)에서도 확인된 사례가 있다. 구체적인 문헌기록을 찾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 같은 관행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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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줄요약-모르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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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scription>
		<category>무기/갑주/성곽/함선</category>

		<comments>http://lyuen.egloos.com/5564140#comments</comments>
		<pubDate>Tue, 25 Oct 2011 15:14:39 GMT</pubDate>
		<dc:creator>번동아제</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645년명 백제 가죽 갑옷(찰갑) 출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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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공주대박물관이 공산성 내부를 발굴하다가 가죽제 찰갑을 발굴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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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3.egloos.com/pds/201110/12/07/c0036507_4e9585ff8bb9a.jpg" width="500" height="328.28282828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3.egloos.com/pds/201110/12/07/c0036507_4e9585ff8bb9a.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1.egloos.com/pds/201110/12/07/c0036507_4e958602849cd.jpg" width="500" height="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1.egloos.com/pds/201110/12/07/c0036507_4e958602849cd.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0/12/07/c0036507_4e95860583acd.jpg" width="500" height="358.39843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0/12/07/c0036507_4e95860583acd.jpg');" /></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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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이 많은 지역이라 부패하기 쉬운 유기질제의 갑옷인데도 온전히 보존이 되었네요. 그동안 고고학계에서 줄기차게 삼국시대 유기질제 갑옷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거론했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가죽제 찰갑이 나오니 역시 느낌이 새롭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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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분에서 경갑 등 부분 갑옷만 나오는 사례가 무척이나 많은데, 그렇다면 나머지 부분은 이번에 나온 것처럼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었지만 부식되어 보존되어 있지 않다고 봐야하겠지요. 어찌나 상태가 좋은지 마치 옷칠을 한 가죽 질감과 탄력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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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경주에서 상태가 아주 좋은 신라 철제 찰갑이 말갑옷과 같이 나오고, 이에 앞서 2007년 부산 동래성 해자에서도 상태가 극상 수준이 조선 전기 철제 찰갑이 나온데 이어 이번에 상태가 비교적 좋다는 백제 가죽제 찰갑까지 나왔으니...최근 몇 년은 삼국~조선시대 찰갑 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획기적인 시대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몽촌토성에서 나온 골제 찰갑과 아직 복원을 못하고 있는 파편 상태의 수많은 찰갑까지 조합하면 몇 년안에 삼국시대 찰갑에 대한 연구가 빠르게 진전될 것 같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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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채화칠기처럼 붉은색으로 표면에 적혀 있는데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李○銀○ 같은 글자들입니다. 정관 19년이면 645년이죠. 다만 혹 모종의 이유로 중국 갑옷이 섞여 들어간 것이 아닌지를 규명하려면 王武監, 大口典 같은 관부 혹은 관직 명칭이나 李○銀 같은 인명이 백제와 어떻게 결부되는지 따져봐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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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tag : <a href="/tag/갑옷" rel="tag">갑옷</a>,&nbsp;<a href="/tag/찰갑" rel="tag">찰갑</a>,&nbsp;<a href="/tag/피갑" rel="tag">피갑</a>,&nbsp;<a href="/tag/삼국시대" rel="tag">삼국시대</a>,&nbsp;<a href="/tag/백제" rel="tag">백제</a>,&nbsp;<a href="/tag/공산성" rel="tag">공산성</a>			 ]]> 
		</description>
		<category>무기/갑주/성곽/함선</category>
		<category>갑옷</category>
		<category>찰갑</category>
		<category>피갑</category>
		<category>삼국시대</category>
		<category>백제</category>
		<category>공산성</category>

		<comments>http://lyuen.egloos.com/5558401#comments</comments>
		<pubDate>Wed, 12 Oct 2011 12:20:41 GMT</pubDate>
		<dc:creator>번동아제</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기원전 3세기 연나라와 고조선-기타 토착 세력의 경계선 ]]> </title>
		<link>http://lyuen.egloos.com/555798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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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연나라 장군 진개의 요서-요동 공략 이후 연나라와 고조선 내지 기타 토착 세력과의 경계선에 대해 문헌사학계에선 오랜 논쟁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문헌 기록의 모호함 때문에 추정 지역의 지리적 범위가 수십~수백 km 정도는 우습게 오가는 현실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지명 몇개를 놓고 비슷한 수준의 논박이 오고가는 논쟁도 오랫동안 반복되어 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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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사학적 접근이 무용하다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이제 지금까지 문헌사학에서 축적한 연구결과를 고고학적 관점에서 비교해 보거나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이 논의의 진전을 위해 필수적일 것 같다. 하지만 고고학으로 영역 문제를 논의할 때는 '문화적 요소의 분포 범위를 정치적 국경으로 치환해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 정리가 있어야한다. 즉 개별 유물보다는 유적과 유물의 공반양상을 종합적으로 비교하고 그에 대한 개별적이고 종합적인 해석이 뒤따라야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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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상고사학보에 실린 오강원 선생의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문화의 관계'는 이 같은 요청과 질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진전된 해답을 담고 있는 논문인 것 같다. 이 논문은 각 유형의 차이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는지 직접적인 해석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지만 연나라 군현에 편제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그리고 그 중간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 어느 정도 해답을 내놓은 논문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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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2.egloos.com/pds/201110/11/07/c0036507_4e9457ab325e1.jpg" width="500" height="477.69784172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2.egloos.com/pds/201110/11/07/c0036507_4e9457ab325e1.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기원전 3세기 요서-요동 지역 문화 양상 (위 논문에 수록된 도면을 토대로 직접 그림)</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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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ORDER-BOTTOM: #cccccc 1px solid; BORDER-LEFT: #cccccc 1px solid; PADDING-BOTTOM: 15px; PADDING-LEFT: 15px; PADDING-RIGHT: 15px; BACKGROUND: #dddddd; BORDER-TOP: #cccccc 1px solid; BORDER-RIGHT: #cccccc 1px solid; PADDING-TOP: 15px"><br />
<span style="COLOR: #009900">■</span>미안구유형 (노란색 점선 내부)<br />
연나라계통의 장성, 성보, 군현성지, 취락지, 매납유구가 복합적 연결. 연나라 군현 내 직할 통치 지역.&nbsp;<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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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009900">■</span>윤가촌유형 (1번 / 요동반도 남부)<br />
같은 지역내에 토착 문화+연문화 혼합 유형과 순수 연나라 유적이 공존. 대련에는 토착 유형의 고분군과 연나라 고분군이 1~2개의 구릉을 사이에 두고 근접 배치된 양상이 확인됨. 유물 양상으로 볼때 시간적 차이가 나지 않은 동시대의 유적임. 같은 시기 같은 공간 내에 두 유형이 공존. 토착 문화에 기반을 둔 집단과 연나라 문화에 기반을 둔 집단들이 시종일관 폭력적이고 갈등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음. 중국 지배 세력과의 우호적 관계와 협조를 통해 자신의 부와 권위를 유지한 토착 집단 수장층의 존재 확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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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009900">■</span> 유가초유형 (2번 / 본계 일대)<br />
확실한 연나라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 순수 토착문화와 연나라 영향을 받은 일부 문화 요소 복합. 토착 수장묘에서 연나라 계통의 철곽 등 철제 농기구와 명도전이 발견. 직접적인 연나라풍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임가보 유형에 비해 연나라 계통 유물이 많고,사가가 유형보다도 더 많음. but 윤가촌처럼 직접적인 연나라 유적이 발견된 것은 아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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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009900">■</span>사가가유형 (3번 / 창도, 개원 북부)<br />
순수 토착문화와 연나라 영향을 받은 일부 문화 요소 복합. 연나라 풍의 고병두를 전제로 제작된 토기, 점토 태도 효과를 내기 위한 화강암 풍화 태도 사용, 철곽을 비롯한 철제 이기의 사용 등 연 요동군과의 활발한 문화교류 흔적. but 대석개묘, 석관묘 등 토착 묘제의 지속. 토착 토기의 지속적인 사용이 확인됨.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도 발견이 안됨. 예외적으로 이수 이용호에서 연나라 풍의 토성이 발견되었으나 다른 연나라 계통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성내에 건축 기대나 수공업 공방 흔적이 없으며, 구조적으로도 다른 연나라 성곽과 차이가 있음. 이로 미루어 볼때 이 성곽은 연나라 성곽이라기보다는 연나라와 사가가 유형 집단 사이에 교역 목적으로 설치된 특수한 성지로 추정됨. 즉 사가가 유형은 연나라 요동군 외연에서 연나라와 교류가 빈번했던 토착 문화 유형으로 추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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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009900">■</span> 대전자유형 (4번 / 혼강 유역 일대)<br />
명도전 등 연나라와의 문화 교류 흔적이 발견되나 대석개묘, 초기적석묘, 심발형 토기 등 토착 문화 요소가 훗날 고구려로 연결. 요동 지역 토착 청동기 문화에 기반을 둔 청동제품이 최고조에 이르는 등 토착성과 보수성이 가장 강함.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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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009900">■</span>임가보유형(5번 / 청원과 신빈 일대)<br />
확실한 연나라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 순수 토착문화와 연나라 영향을 받은 일부 문화 요소 복합. 토기 면에서 재래식 전통에서 벗어난 태도, 색조, 기형이 확인되나 연나라와의 적극적 교류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음. <br />
<br />
&lt;출처- 오강원,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문화의 관계, 한국상고사학보 71, 2011&gt;<br />
</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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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논문은 기원전 3세기에 요서-요동 지역 중에 연나라 장성, 군현 성지, 취락지, 고분군 등을 토대로 연나라 유형(미안구 유형)의 문화가 나타나는 지역을 우선 식별하고 있다. 지도에서 노란점선의 남쪽과 서쪽 지역이 바로 이 지역에 해당한다. 특히 이 지역에서도 연나라 성곽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지역(주황색 표시)을 표시해 이 지역 내에 연나라의 거점 지역이 어디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br />
<br />
흥미로운 것은 요동반도 남단지역이다. 오 선생이 윤가촌 유형으로 분류한 요동반도 남단지역은 같은 지역에서 토착 문화와 연나라 유형의 문화가 동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언덕 몇개 떨어진 정도의 거리에서 뒤섞여 나타난다. 즉 연나라 유형의 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이 존재하는 지역에 토착문화가 완전히 말살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위 논문은 "중국 지배 세력과의 우호적 관계와 협조를 통해 자신의 부와 권위를 유지한 토착 집단 수장층의 존재가 확인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요동 중심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 대해서는 연나라가 토착 세력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같은 지역 내에 연나라 고분이 출현하는 상황을 볼 때 토착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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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교할만한 지역이 요동의 본계와 그 동쪽 지역이다. 이 지역에선 연나라 문화와 토착 문화가 복잡적으로 나타나는데 직접적인 연나라 성곽, 고분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나라풍 유물의 공반 정도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구별된다. 즉 요동반도 남단 지역처럼 연나라 직접 통치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고유의 문화도 유지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연나라풍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 논문은 "연나라 요동군이 직접적으로 통치했다기 보다는 복속을 전제로 자치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한다"고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있다. 결론부에서는 좀 더 직접적인 어조로 "연나라 요동군의 범위 안에 포괄되어 있으되 사실상 토착집단의 수장들의 복속의 대가로 자치를 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부연하고 있다. 즉 요동군의 군현 내로 편제되었지만 사실상의 자치지역(이른바 한대 이후의 변군 속국 정도의 의미인듯)이라고 해석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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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가 유형에 대해서는 토착요소와 연문화적 유물 요소가 공존하지만 직접적인 연나라 유적의 경계 밖이고, 사가가 유형 내부의 유일한 연나라 풍 성곽도 전형적인 연나라 성지로 보기엔 특이한 구조라는 점에서 요동군 범위 밖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토착 지역의 정치-문화적 질서와 전통이 유지되는 가운데 연나라와 교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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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 유형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스러운데 대전자 유형에 속하는 유적 중 관전이나 봉성 등 일부의 외곽 지역의 경우 연나라 유적과 인접한 것으로 볼 때 연나라에 예속된 상태이지만 이 유형의 범위 전체를 연나라 군현 지역이라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연나라와 활발히 교류했지만, 이 같은 교류가 토착 집권 수장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고 표현한 것이 그 예다. 즉 연나라와 적대적 관계가 있지는 않았지만 토착 집권 수장이 여전히 군현 범위 외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임가보 유형의 경우 연나라 유적도 없고, 연나라풍 유물도 매우 적어 연나라 군현 밖임과 동시에 교류도 활발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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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3333ff">정리하면 1) 노란색 선 남쪽과 서쪽이 연나라 군현의 직접적 통치 범위이지만 2) 연 군현 범위 내에서 정치적 자치도 보장 받지 못했지만 부와 권위를 유지한 토착 수장층이 일부 잔존한 지역(1번 윤가촌유형), 3) 연나라 군현 내지만 지역 수장층이 복속을 전제로 자치권한 행사한 지역(2번 유가초유형), 4) 연나라 군현 밖이지만 연나라와 교류를 유지한 지역(3번 사가가유형, 4번 대전자유형), 5) 연나라 군현 밖이면서 연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하지 않은 지역(5번 임가보유형)이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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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 논문의 의미를 내가 잘못해석했을 수도 있지만 유적이나 유물의 종합적인 해석 없이 명도전 하나, 연나라 풍의 도끼 하나, 칼 하나만 나와도 해당 유적이 출토된 지역을 연의 세력범위로 해석하는 식의 즉물적인 해석보다는 이 논문이 진전된 해석 방법론을 적용한 점은 분명한 것 같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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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지난 2010년 중국 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의 '조양 원대자' 발굴보고서의 출간으로 요서-요동지역 전국~서한대 유적의 시대별 구분과 편년이 다소 재조정될 여지가 생겼다는 점에서 향후 관련 분야 논의의 전개가 위 논문의 세부적인 논지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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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역사잡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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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1 Oct 2011 14:00:17 GMT</pubDate>
		<dc:creator>번동아제</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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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택근V횽과 그 똘마니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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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24.egloos.com/pds/201110/09/07/c0036507_4e9192a402e98.jpg" width="500" height="393.03482587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24.egloos.com/pds/201110/09/07/c0036507_4e9192a402e98.jpg');" /></div><span style="COLOR: #dcdcdc"><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dcdcdc"> 갤럭시 K로 촬영. 마횽과 V횽의 결투 </span></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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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번동아제의 사랑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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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9 Oct 2011 12:20:39 GMT</pubDate>
		<dc:creator>번동아제</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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