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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eferi의 생각 모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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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6 Nov 2009 08:09:2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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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eferi의 생각 모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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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공리주의는 틀렸으며, 국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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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공리주의를 상징하는 말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함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행복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데에 이미 주관적인 편의성(bias)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br><br>어떤 사람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윤리의 원리로 삼고 행동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뿐만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주는 행동을&nbsp;, 나아가서는 자신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이 최대 다수에게 행복을 준다면 그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의도한 행동이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지 아닌지를 누가 측정할까요? 그런 측정은 결국 행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nbsp;본인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공리주의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그런 측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며, 공허한 최대 다수의 행복만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행동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br><br>사회주의 혁명이 바로 공리주의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혁명가는 자신의 몸은 고달프지만 자신이 이룬 혁명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이 희생되더라도 절대 다수는 행복하리라 믿어서 각종 숙청작업에 참여했지만 결국 행복해진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즉,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람이 타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은 거대한 오류일 뿐입니다.<br><br>즉 행복을 정의하는데 제 3자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행복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정의할 수 있을 뿐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내가 정의했을 때, 타인이 그러한 행복을 인정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 행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의도한 타인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br><br>고로 공리주의는 윤리의 원칙으로 부적절합니다. 오로지 자기 행복의 원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 즉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또한&nbsp;자신의 행복은 타인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이루어주어야 합니다. <br><br>이러한 개개인이 인정한 개인의 행복이 모두 모인 것이 공익이며 다수의 행복이 되는 것이지 어떤 이가 최대 다수의 행복을 강변하더라도 그것이 최대 다수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공익을 위한다 하면 타인이 자신의 행복을 찾는 과정에 대한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타인의 행복을 정의해서 제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br><br>지금 한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최대 다수의 행복 개념은 국익일 것입니다. 국가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국가의 이익과 손해가 개별 국민의 이익과 손해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개별적인 국민에게 이익과 손해가 돌아가서 이익을 보는 국민이 손해를 보는 국민에게 이익을 이전하고도 이익이 남는 사람이 있을 때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나는, 혹은 다른 사람은 국가의 이익 때문에 손해를 볼 지 모르지만 국가적 관점에서&nbsp;이익이 손해를 초과하기 때문에 국익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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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잡생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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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6 Nov 2009 08:09:2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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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주류경제학의 이론적 한계, 베이비시터 조합 관련된 사고실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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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유명한 경제학 주제로 베이비시터 조합이 있습니다. 변호사 부부로 이루어진 이 조합은&nbsp;아기를 한번 맡을 때 쿠폰을 지급받고, 나중에 쿠폰을 주고 아기를 맡길 수&nbsp;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조합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모두가 언제 할 지 모르는 외출을 대비해서 여유 쿠폰을 가지고 있으려고만 하고 아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외출을 할 수 없었죠.&nbsp;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주에 두번씩 아기를 맡기는 것을 의무화하자&nbsp;아기를 맡는 일도 많아지고 아기를 맡기고 외출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nbsp;나중에는 인플레이션의 조짐까지 보였다고 하죠.<br><br>이 일화는 화폐와 거래간의 지나치기 쉽지만 지나칠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화폐가 없으면, 거래도 없다는 거죠. 아무리 재화가 있더라도 화폐 보유자에게 화폐를 주고 매각하지 않으면 다른 재화를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br><br>주류경제학은 항상 무한한 수요/공급능력을 가정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것도 실제로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전체 경제규모에 비해 너무나 작아 무시할 수 있는 개인을 가정한 이론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정한 것이지, 실제로는 공급도 유한하고 수요도 유한하죠. 화폐 공급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류경제학은 항상 개인이 화폐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현실과 먼 가정이죠.<br><br>만일 베이비시터 조합의 쿠폰양이 제한되어 있으며, 쿠폰의 절반 이상을 특정한 개인이 보유하고 있고, 각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쿠폰양은 개인이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적립해 놓고자 하는 양보다 작다면 어찌 될까요? 개인은 쿠폰을 보유하려고만 하고 아이를 맡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거래는 위축되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때 절반 이상을 보유한 특정한 개인은 쿠폰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겠죠. 개인이 보유한 쿠폰이 필요양에 미치지 못할수록, 신규 쿠폰이 발행되지 않을수록 이자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대부가 없을 때보다는 거래가 활성화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쿠폰을 빨아들여서 거래가 더욱 위축되고 쿠폰대부에 의존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죠.&nbsp;따라서 화폐 발행이 제한된다면 화폐 소유자의 횡포가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한된 재화에 따른 이익이라고 하여 화폐지대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br><br>역사적으로&nbsp;20세기 이전은&nbsp;금본위제의 시기였으며 중상주의와 맑스주의가 등장했지요. 중상주의는 중금주의라고 하는데 수출을 많이 하고 금을 비축하려는 정책을 말합니다. 아담 스미스는 금은 국부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생산물이 국부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금이 부족하면 화폐도 부족하고 거래가 일어나지 않아 국부가 증진되지 않습니다. 또한 금이 부족한 나라에 금을 빌려주고 이자도 받을 수 있죠. 금은 채굴할 수는 있으나 원하는 대로 채굴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br><br>반면에 20세기 이후 케인즈의 등장으로 금본위제가 폐기되어 인류는 디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 고리대금의 굴레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출/수입 분쟁에도 금본위제보다 효과적이었죠. 누군가 화폐를 축적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화폐가 시장에서 사라지기에 인플레 걱정 없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적자가 누적되면 문제가 발생하지만 바로 화폐가 시장에서 사라져서 거래를 위축시키는 금 유출보다는 나은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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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경제</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3400016#comments</comments>
		<pubDate>Wed, 28 Oct 2009 17:00:42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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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그라민 은행에서 배우는 현 사회를 개선하는 방법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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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효과적인 사회 개선 방법으로 그라민 은행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그라민 은행처럼 소액대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라민 은행은 처음에는 조그많게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속가능성과 보편성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처음에 조그많게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일 크게 시작했다면 크게 주저앉았을 때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br><br>그라민 은행의&nbsp;교훈을 바탕으로 사회를 개선하는 데 쓸 수 있는 방법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br><br>첫번째는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br>어떤 사람들은 제로베이스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설계한 다음에 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가 실제로 도달하자 기존의 현실에서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왜냐, 현실에서는 해결된 문제가 제로베이스에서 설계하면서 설계자가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목표로서 가능할 지 몰라도 이를 그대로 현실로 만든다는 것은 위험면에서나 지식면에서나 옳지 않은 것입니다. 사회 전체를 뜯어고쳤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날 지 모르며 그런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지식은 실제로 운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회 전체를 뜯어고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아직 고쳐지지 않은 문제를 하나하나 푸는 것이 진정한 개선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br><br>두번째는 작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br>작다고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이라도 얼마든지 크게 키워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욕망도 충족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작게 시작하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식이 부족하기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 손해를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출발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동안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작은 규모로 해서 성공한다면 자신이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현실에서 증명한 것이고 좀 더 큰 위험을 지고 규모를 더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큰 규모의 일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작은 일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br><br>세번째는 지속가능성을 고려한다는 것입니다.<br>일을 시작할 때 일회성인가, 지속가능한가는 엄밀하게 검토하여 지속가능한 방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특정인의 일방적인 희생이 필요하다면 일반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예를 든다면 기부에 의존하는 비영리법인 모델입니다.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인해 어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부금을 계속 낼 수 있는 유인이 없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더라도 기부금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련 당사자들을 전부 만족시킬 수 있다면 지속가능합니다. 그라민 은행과 같은 영리법인은 투자자에게 이익을 분배하고 고객에게는 타 대부업체보다 저렴한 이자율의 대부를 제공하며 직원에게는 월급을 제공하여 관련 당사자에게 만족을 제공할 수 있는 모델입니다.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고객을 늘인다면&nbsp;이윤이 늘어날 것이며 투자금 유치도 쉽게 할 수 있고 직원도 많이 채용할 수 있으며 고객 역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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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3398655#comments</comments>
		<pubDate>Wed, 28 Oct 2009 06:19:19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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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좌파 정치경제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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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좌파 정치경제이론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맑스의 이론에 기반하고 노동과 노동자를 중시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기성 체제에 저항하는 것&nbsp;등을 포괄하고 있는 이론을 말합니다. 좌파와 우파이론이 동등한 가치가 있고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며, 좌우의 날개로 비유하며 한쪽이 없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br><br>그러나, 좌파 정치경제이론은 결코 우파의 이론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 않습니다. 좌파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곧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에 대한 죄이며 전 인류에 대한 죄이기도 합니다. <br><br>어째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로 좌파이론은 과학적 사고방식에 근거하지 않고 음모론과 권위주의에 근거하였기 때문입니다.<br><br>음모론의 정의를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br><strong>음모론</strong>(陰謀論)이란 <a title="사회" href="http://ko.wikipedia.org/wiki/%EC%82%AC%ED%9A%8C">사회</a>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조직이나 비밀스런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음모론의 정의는 바로 좌파이론의 전개방식과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노동자가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를 배후의 거대한 지배계급의 문화 헤게모니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br><br>좌파이론은 현실의 부조리를 음모론으로 설명합니다.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원인은 부르조아 계급의 기득권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더 못사는 이유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산업예비군을 만들어 노동자를 더 잘 착취하기&nbsp;위한 것이다.&nbsp;이렇게 부조리한 현 체제가 유지되는 원인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요소 - 정부, 제도, 문화, 철학, 각종 사회이론 등 -가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nbsp;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혁명으로 현 체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 좌파이론의 주된 내용입니다. 즉 현재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전부 악한 누군가의 책임이고, 현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도 악한 누군가를 위한 거대한 음모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br><br>또한 좌파는 권위적입니다. 이는 이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현실을 관찰하여 이론을 검증하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대비되는 것으로, 권위있는 누군가가 한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맑스입니다. 맑스의 이론이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좌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비판적인 자세를 가진다면 예의 음모론이 힘을 발휘합니다. 즉 맑스이론에 대한 비판은 부르조아의 착취를 숨기려는 부르조아의 모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좌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아니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즉 현재의 문제점만 보고, 그 문제점이 부르조아 때문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뒤에 그 결론을 잘 설명하는 것 같은 이론을 취사선택합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입맛에 맞는 이론이 선택되면 그 이론은 현실의 관찰로 검증하지 않고 무조건 참으로 믿고 권위를 부여합니다.<br><br>그렇기 때문에 좌파는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스탈린의 숙청, 중국 혁명후 마오쩌둥의 숙청, 베트남의 적화통일후 숙청, 공산주의사회에서 한결같이 일어나는 독재와 빈곤은 무시하거나 도마뱀꼬리를 짜릅니다. 즉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집권해서 비극이 일어났고, 맑스주의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의 음모론을 설파합니다. 즉 부르조아가 공산주의를 폄하하기 위해 침소봉대한다거나,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반대한 공산주의자가 있었음에도 부르조아의 공작으로 밝혀지지 않았다거나 등등.<br><br>이론은 옳은데 현실에 맞지 않는다거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말은 좌파이론에 결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좌파 이론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음모론에 휩싸여 비판적 검토를 할 수 없는 이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론이 틀려서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고, 국가는 좌우 스펙트럼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이론을 퇴출시키고 올바른 이론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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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3398587#comments</comments>
		<pubDate>Wed, 28 Oct 2009 05:33:02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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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도덕은 새로운 의미에서 필요할 것입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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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a title="" href="http://kassapa.egloos.com/2528634">그러고보니 단멸교의 주된 이념을 소개하지 않았군요.</a><br><br>글을 잘 보고 있습니다. 다만 도덕부정론에 대해서는 이견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br>분명 하늘이 내린 도덕이라는 것은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에서 도덕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어져 오지 않았을까요.<br></p><p>사람은 미래와 무한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거나 강간하거나 도둑질하거나 하는 일이 반복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는 것이 용납된다면 서로 살인해서 살인을 잘하거나 잘 막을 수 있는 사람만 남을 것이며, 강간하는 것이 용납된다면 장기적인 남녀관계와 아이의 양육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도둑질하는 것이 용납된다면 성실하게 자신의 노력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도둑질하거나 도둑질당하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이 뭉쳐서 벌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크나큰 자선과 보시를 베푸는 것을 계속한다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등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이롭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뭉쳐서 권장한 것이겠지요. 또한 서로서로를 약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서로를 약탈하며 살아가지 않는 집단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즉 도덕은 인간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만, 오래된 도덕은 지금과 맞지 않는 규정이 많아서 고쳐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br></p><p>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도덕부정론보다 욕망긍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욕망 그 자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실현되어야 하는 일이며, 그런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에도 다른 사람의 욕망 실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올바른 방법은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과 충돌함에도 이를 해소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실현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그저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욕망과 충돌하지 않고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열등한 방법을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다른 사람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nbsp;다른 사람의-전자와 동일인일 필요는 없음-&nbsp;도움을&nbsp;자신이 준 도움에 근거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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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잡생각</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3379375#comments</comments>
		<pubDate>Sun, 18 Oct 2009 13:52:32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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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결혼이후 합가(合家)의 문제점과 대안 ]]> </title>
		<link>http://kmte.egloos.com/335786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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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요즘의 여성들은 시부모와 같이 사는 것을 정말 싫어하고 있습니다. 여성관련 게시판에 보면 합가를 지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같이 사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공존 공영할 수 있는 올바른 규칙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br><br>지금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옛 유교적 규칙은 이렇습니다. 가정의 위계관계에서 상위에 있는 사람은 하위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것이든 지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br><br>이제 유교적 규칙은 21세기 대한민국에는 결코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유교적 규칙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남아 있으며, 유교적 규칙이 일반적인 사회의 여론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이 현대의 가족관계와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가 가장 극명한 것이 여성인 것이죠.<br><br>그러면 어떤 규칙이 필요한 것일까요? 자유롭고 이기적이며 평등한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타인과 호혜 협력한다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적 인간관에 근거한 규칙이 필요합니다.&nbsp;며느리는 결코 시아버지의 아랫사람이 아니며, 시아버지는 결코 며느리의 윗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라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한 적이 있다면 당신의 머리속은 아직도 유교적 위계관계가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br><br>가족은&nbsp;혈연과 부부관계로 이어진 집단이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자신은 별로 가사일 안하고 같이 살고 있는 타인의 대접을 받으며 그 타인과 평화롭게 살고 싶다-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결코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 욕구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해관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내가 가사일을 덜하면 타인이 가사일을 더해서 자신이 더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사일을 누가 할 것이냐로 첨예하게 다투게 되며, 현재 그 갈등의 해결은 현실에 맞지 않는 유교적 규칙을 어거지로 적용하여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strong>'네가 며느리니까, 네가 내 아내이니까, 네가 아랫사람이니까,&nbsp;네가 일해라.'</strong>가<strong> </strong>남편과 시부모가 주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분가시에는 그래도 덜하지만 합가시 문제점이 심각해지는 것은 남편과 아내는 이제 동등하다는 것이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으나 시부모와 며느리가 동등하다는 것은 잘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1인 1표제라고 할지라도 아내의 권한은 분가시의 50%보다 더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내는 이혼하거나, 참고 살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지경에 몰리게 되죠.<br><br>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단기적으로는 이해상충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해의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냐구요? 서로의 욕구를 솔직히 인정하며,&nbsp;서로의 욕구를&nbsp;충족시킬 수 있는&nbsp;수준이 되기까지 공정을 개선하거나,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풀릴 수 있습니다. 시부모나 남편은 며느리, 아내에게 일시켜서 편하게 살려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부모는 유교적 윤리관, 즉 자신은 윗사람 입장에서 나름대로 아랫사람을 배려하고 있다고 자신을 변호할 지 모르나, 본인의 자의적 배려와 타인의 객관적 만족은&nbsp;결코 쉽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배려는 며느리가 만족할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관계는 다른 쪽에도 적용됩니다. 며느리 역시 같이 사는 사람이 만족할 때까지 배려할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가족 구성원 전원이 만족할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소수라고 할지라도 불만족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가족을 떠난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대응하기 때문입니다.&nbsp;공정 개선은&nbsp;청소는 며칠에 한번 해야 하는가, 어느정도까지 해야 하는가, 음식은 누가 하고 어느 정도의 맛을 가져야 하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타인이 자신을 만족시키는 만큼 자신은 어떻게 가족에 기여할 것인가, 등등&nbsp;다수가 머리를 짜내면 일하는 시간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가사공정개선은 연구조차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nbsp;그리고 아예 통크게 돈을 더 많이 벌어서 가정부를 고용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br><br>이런 방법이 기존의 유교적 규칙의 강제적 적용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적 인간을 인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족 내에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그 불행은 전염됩니다. 또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가족을 떠나게 하는 유인을 제공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기적 인간관에 기초한 규칙은 유교적 규칙보다 우월합니다.<br /><br />&nbsp;물론 유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라 하여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라는 표어를 내세워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 윤리적 통제를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윤리적 통제를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신하는 임금에게 반항할 수 없으며 오직 조언만 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혁명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혁명은 평상시에 이루어지는 민주적 통제와는 정반대입니다. 민주적 통제는 통제하려는 사람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으나 혁명은 통제하려는 사람이 실패하면 3족, 9족몰살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nbsp;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마찬가지의 규칙이 적용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 없습니다. 반항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보다 상위의 권위, 즉 가문의 어른이나 임금의 뜻을 토대로 반항을 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결코 반항해서는 안됩니다. 이 관계를 아버지-어머니-형-본인-동생-본인의 배우자 로 확장한 것이 유교의 가족제도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통제하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 없습니다. 유교적 규칙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모범적 케이스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계모에게 효도한 조헌의 케이스입니다. 계모가 조헌을 구박해도 조헌은 효도를 그치지 않아 마침내 계모도 마음을 고쳐먹고 조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미담이 되는 이유가 바로 유교적 규칙의 핵심입니다. <br><br><strong>"자식은 친모든 계모든 친부든 계부든 잘해주든 구박하든 간에 부모에게 반항하여서는 절대로 아니된다. 신하는 임금이&nbsp;명군이든 폭군이든 간에 임금에게 반항하여서는 절대로 아니된다. 자식이나 신하는 윗사람을 잘 모실 의무만 있을 뿐이며 윗사람은 아무리 어리석은 행동을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거역해서는 아니되고 윗사람이 바뀔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모셔야 한다."<br><br></strong>이런 규칙이 마냥 어리석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몇천년 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내는 규칙을 전혀 몰랐거든요. 그래서 양육에서 발생하는 권위를 기준으로 모든 위계관계의 기준을 삼았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반항해서는 아니되는 것처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국가기구에 반항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위계관계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그 관계에서 일방적인 통제만 가하는 것이 아니라 위계질서의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 윤리적 교육을 통하여 위계관계의 인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완화하려고 시도한 것이 유교적 규칙입니다. 이 규칙은 너무도 안정적이어서 몇천년간을 계속해서 수정없이 버텨왔지만, 최근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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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잡생각</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3357864#comments</comments>
		<pubDate>Fri, 09 Oct 2009 07:37:12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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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늦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부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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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저는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창한 햇볕정책과 그 지지자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은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br><br>실로&nbsp;그는 역사의 장난으로 인하여 아이러니한 인물이&nbsp;되고 말았습니다. 그가&nbsp;힘써 추구한 민주화는 이미 전임 대통령 김영삼이 하나회 척결, 역사 바로세우기,&nbsp;공직자 재산공개 등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펼쳐서 본인의 임기중에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이렇다할 민주화 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가 심혈을 기울인 햇볕정책과 남북관계개선은 북한의 핵개발로 인하여 그 빛이 바랬습니다. 지역등권론을 주장했지만, 그의 임기중에는 수도권지역과 타 지역의 격차가 더욱 커졌습니다. <br><br>그렇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nbsp;그가 등장할 것이라고는 그 자신도&nbsp;예측하지 못할 상황, 즉 IMF 외환위기를 맞아 훌륭하게 극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위기극복은 물론 미래를 향한 비전까지 남겼습니다. 대기업의 부채비율 축소, 빅딜, 부실금융기관 퇴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개선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수행하였고 국내 경제의 대외개방과 자유변동 환율제도를 채택하는 등 국제시장에 좀 더 다가가기도 하였습니다. 구조조정의 장기적&nbsp;귀결은 지금 보고 있는 대로입니다.&nbsp;미국과 유럽의 금융기관과 기업이&nbsp;미국발 부동산위기로 휘청일때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은 버텼습니다. 그 원동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실시한 구조조정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정보통신기술과 벤처산업의 육성도 빼놓지 못할 업적입니다. 기업과 국가경영의 투명성, 글로벌 스탠다드, 지식경제와 창의적 기업가의 모험정신은 아직도 유효한 비전입니다. <br><br>이 비전은 당대 미국의 비전을 수입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전을 수입해서&nbsp;위기를 극복하면서&nbsp;이만큼 정착시키는 것은 아무나 못하는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정치생활을 해 온 사람이지만, 그는 현대적이며 미래를 바라보는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해왔다는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br><br>그의 재임시 이러한 개혁을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수행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보를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점진적인 개혁이 오히려 대한민국이 그 이전으로 쉽게 돌아갈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br><br>그러나 이 업적은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업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적 제도가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정착한 유럽을 오매불망 그리고 있었던 소위 개혁세력들, 민주당의 새로운 주류세력에게는 한국의 미국화는 퇴보로 여겨졌으며 IMF극복을 위한 미국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이 상황을 빠르게 타파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이 오히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전을 수입했으나, 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창시자를 환영할 수 없었습니다. <br><br>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이 많이 희석되고 오히려 민주화 투사로서 더 많은 조명을 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지혜이지, 당장 일어나 싸워야 한다는 행동력과 압력에 굴하지 않는 굳센 의지가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시에도 민주화 투사적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해서 더 많은 문제를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민주화 투사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를 알고 실천했지만, 그 추종자는 아직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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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3085467#comments</comments>
		<pubDate>Wed, 26 Aug 2009 08:58:44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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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역시 햇볕지지자는 악이고 현대아산은 망해야 한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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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현정은이 북한에 가서 멋대로 5개항의 합의를 하고 왔다고 한다.<br><br>합의 사항은 ▲금강산 관광의 조속한 재개와 비로봉 관광 개시 및 북측의 관광에 대한 편의와 안전 보장 ▲육로통행과 체류 관련 제한 해제 ▲개성관광 재개와 개성공업지구 사업 활성화 ▲백두산 관광 개시 ▲추석 때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다.<br><br>대체 누가 이따위 합의를 하랬나? 현정은 당신이 국민이 뽑은 대표자인가, 아니면&nbsp;대표자의 위임을 받았나? 우리가 북한을 믿을 수 없어서 이 5개항을 안하는 것이지 북한이 허락을 안해줘서 안하는 건가?<br><br>김정일이 금강산 사건 재발방지 약속을 했다고? 김정일이 약속을 한두번 깨는 위인인가? 그럼 애초에 금강산 관광 할때는&nbsp;북한에서&nbsp;알아서 사람 쏴죽여도 된다고 하고 보낸건가? <br><br>금강산 관광 재개는 북한의 당국이 사건의 진상조사에 협조하고, 북한당국의 책임이 있을 경우(확률은 100%에 수렴한다) 그에 합당한 사죄와 보상을 하더라도 북한을 믿고 금강산관광을 보낼 수 있을 지 없을 지 불확실한 사안이다. 개성공단에서 발생한 인질사태도 그 해결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가? 더군다나 연안호도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 아닌가?<br><br>그런데 사죄도 보상도 없이 재발방지 약속 하나만 덜렁 받고서 '합의'를 했다고? 그건 현정은 당신의 권한을 벗어난 행위이다. 당신은 현대아산의 회장으로서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을 살리기 위해 그런 합의를 해야 한다고 쳐도,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와 권리는 국가에 있으며, 국민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이런 행동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br><br>또한 북한은 2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대한민국의 안보와 대한민국의 동맹국인 미국의 안보뿐만 아니라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는 국가이다. 그런 북한을 제재하고 국제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유엔이 제재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합의를 하는 것은 완전히 엇나가는 행동인 것이다.&nbsp;대체 북핵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대한민국이 대북한제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에 대북한제재를 하자고 설득할 수 있겠으며, 한미공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br><br>결론은 명확하다. 현정은의 합의는 그대로 이적행위이며, 요행 현정은이 구속을 면한다고 해도 당연히 합의는 무시해야 하고, 그럼으로서 현대아산이 망할 수밖에 없다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햇볕의 미망을 버리지 못한 세력이 있어서 현정은의 합의를 남북관계의 개선이니, 정부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니 하며 괴설을 퍼트리고 있다.<br><br>대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북한과 거래를 하면 무엇이 좋을 게 있는가? 북한의 개혁개방? 돈맛을 보여주자? 10년간 햇볕정책을 꾸준히 시행했어도 북한체제가 자본주의로 향하는&nbsp;개혁개방은 매우 느리게 이루어졌다. 또한 햇볕정책기간중 북한의 핵개발이 이루어졌으며, 햇볕정책기간중&nbsp;한미일 협의체는 붕괴되었고 한미동맹은 분열했으며&nbsp;북핵은&nbsp;기정사실이 되어갔다. 과연 북한은 햇볕으로 인해 대한민국에 긍정적으로 변화했는가? 결과는 명확하다. 북한은 부정적으로 변화했다. <br><br>햇볕지지자는 햇볕의 긍정적인 부분만 모아서 북한이 이렇게 변했으니 햇볕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북한에 부는 남한문화바람, 이산가족상봉, 금강산관광, 개성관광, 개성공단, 이런 것은 햇볕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재래식 전력의 위협이 건재하고 핵위협까지 추가된 상황에서 북한에 맞서 안보를 보장하는 동맹국과 긴밀히 협의하기는 커녕 북한이 쳐들어오면 동맹국과 협의안해도 동맹국이&nbsp;알아서 지켜줄 것이니 동맹국이 북한을 쳐들어가는 상황만 막아야한다는 정신분열적 행태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하는 것은 햇볕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북핵문제를 미국과 북한간의 문제라고 하며 안보당사자인 대한민국이 빠지고 민족공조라는 미명하에 북한에 대한 공동전선을 포기하는 정책의 채택 역시 햇볕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행태가 북핵의 기정사실화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해악을 미친 것이다.<br><br>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볕지지자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예전 레퍼토리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과 거래하면 무조건 좋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북한과 거래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실수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뻔히 잘못되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잘못이 아니라고 눈감아버리고, 다른 이의 탓을 하는 행태는 악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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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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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7 Aug 2009 13:25:09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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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지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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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title="" href="http://ellesar.egloos.com/5026767">수도권 집중의 문제는</a><br><br>결국 문제는 사람들이 수도권외 지역, 즉 지방에서 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며, 그 문제의 근원은&nbsp;지방 직업, 교육, 문화, 생활환경에서 뒤떨어지는 것입니다.&nbsp; 그 중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받는 점은 교육입니다. 지방에는 좋은 대학이 없기 때문에 서울로 가려고 하고, 서울에서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br><br>하지만 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일단 서울에서 지방으로 소위&nbsp;명문대학이 내려온다고 해도 현 상황에서는 계속 명문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지방에 세워서 교육기능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nbsp;<br><br>그렇기&nbsp;때문에 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것 보다 교육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nbsp;대한민국에서 교육의 제 일의 목적은 좋은 직장을 가지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가 자식을 기를 쓰고 명문대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 다 그 때문입니다.&nbsp;<br><br>그렇기에 지방교육문제는&nbsp;먼저 직업에 초점을 두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일단 지방이 좋은 직업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직업에 필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지방교육기관을 만듭니다. 이런 해결방법이 기껏 좋은 교육기관을 만들어보았자 서울로 인재유출을 시킬 수도 있는&nbsp;교육중심의 해결방안보다는 훨씬 더 지방문제해결에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방안입니다. <br><br>그리고 현재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대기업의 직원도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고용안정을 얻기 위해 박봉의 9급 공무원에도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 바로 지방의 기회입니다.&nbsp;서울과 수도권이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방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자식도 지방에서 교육해서 자식에게도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할 수 있는 삶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40살 되면 퇴출되어 치킨집 사장해야 한다는 위험을 느끼며 사는 삶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늘어나고 소득이 늘어나면 지역경제가 성장하여 서비스산업과 문화산업은 저절로 성장합니다. 지방이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서울의 프리미엄은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사실, 본인과 자식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할 수 있는&nbsp;곳이 있다면 서울과 경쟁하는 정도가 아닌&nbsp;전국의 인재가 몰릴 것이라고 예상합니다.<br><br>그렇다면 어떻게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할까요? 민간 기업은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IMF사태 이후로 드러났습니다.&nbsp;민간 기업은&nbsp;계속기업을 목표로 하지만 언제든지 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기업과 공무원은 한정된 예산으로 고용해야 하며, 공조직의 방만한 행태는 계속적으로 개혁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간기업이 나서서 고용하되 민간기업의 부침으로 인한 고용의 위험은 민간기업보다 더&nbsp;영속적인 조직에서 흡수해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 조직은 국가이면 좋을 것이나, 지방자치단체나 지방에 기반을 둔&nbsp;다른 조직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br><br>지방자치단체에서 나서서 해고된 근로자의 취업을 알선하고, 교육을 실시하며, 고용할 회사가 정 없다면 창업을&nbsp;도우며, 실직기간에도 급여를 제공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개인의 경제적 위험을 최소화한다면 안정적인 직장에 상응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현재 정부 주도로 희망근로사업이나 근로자 훈련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큰 효과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만큼 쉽지 않더라도 연구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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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2815910#comments</comments>
		<pubDate>Thu, 30 Jul 2009 09:04:5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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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성경에서 찾은 흥미로운 생각 - 현재주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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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기독교를 과거에는 믿었으나 현재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많은 세월을 버텨온 텍스트인만큼 그 안에는 중요한&nbsp;철학적 통찰도 들어가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없이도 적용이 가능한 것입니다.<br><br>제가 정의하는 현재주의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현재의 사건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영향을 주며 현재의 사건이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인과주의와 대비되는 생각입니다. <br><br>성경에는 이런 현재주의에 대해 많은 구절이 있습니다. <br><br>믿음으로 죄사함과 병고침을 얻은 마태복음 9장 20~22절<p>&nbsp;<sup class="versenum" id="ko-KOREAN-105844" value="20">20</sup>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p>&nbsp;<sup class="versenum" id="ko-KOREAN-105845" value="21">21</sup>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p>&nbsp;<sup class="versenum" id="ko-KOREAN-105846" value="22">22</sup>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br>&nbsp;<br>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양 옆의 죄수중 회개한 한명이 구원받은 루가복음 23장 40~44절<br>&nbsp;<sup class="versenum" id="ko-KOREAN-108420" value="40">40</sup>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p><p>&nbsp;<sup class="versenum" id="ko-KOREAN-108421" value="41">41</sup>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p>&nbsp;<sup class="versenum" id="ko-KOREAN-108422" value="42">42</sup>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p>&nbsp;<sup class="versenum" id="ko-KOREAN-108423" value="43">43</sup>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br><br>이러한 구절은 현재의 믿음으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교리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죄악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의한 결과는 현재의 믿음이라는 현재의 사건에 의해 무너지는 것입니다.<br><br>마태복음 14장 1~14절 혼인잔치의 비유나 마태복음 24장 36절의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구절은 미래에 닥칠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가르칩니다.&nbsp;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미래의 사건은 현재의 사건에 의해 예측할 수도 없으며, 미래의 사건으로 인한 미래의 결과는 그 미래사건을 맞을 때의&nbsp;상태에 달려 있지 현재의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nbsp;<br><br>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 34절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구절은 이러한 생각의 당연한 귀결인 것입니다. 즉, 오늘 내일 일을 염려한다고 하여 내일의 일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br><br>이러한 사상은 과거 구약의 율법에 비교해서&nbsp;보면 그 연원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마치 현대의 법규정과 같습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율법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어기게 된다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처벌은 부작용이 심한 반면 행동을 교정하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또한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에 열거하지 않은 것은 해도 된다고 해석하게 되며, 율법의 정신에 따른 융통적인 적용을 할 수 없고 문자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해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br><br>예수의 가르침에 들어있는 현재주의는 종교적으로는 이런 율법의 부작용을 상당부분 없앴습니다. 일단 과거의 율법을 어긴 사건이 현재에 처벌받는 일을 없애서 누구나 쉽게 회개하고 개종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의 정신을 담은 핵심적인 사상을 강조함으로서 회개한 사람이 속일 수 없는 절대자의 기준에 비추어 율법의 정신대로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회개만으로 미래에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얻고 미래에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언젠가는 재림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해 계속적으로 현재의 행동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런 현재의 연속이 바로 영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종교적 가르침을 동원하여 사람의 현재 행동을 율법적 방법보다 더 효과적으로 영원하게&nbsp;조정한 것입니다.<br><br>현재주의에는 중요한 통찰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이 통제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일어난 일에 불과하며, 미래는 그 순간이 와야 아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든 간에 현재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예측하기 위한 그림자에 불과하며, 종교적 절대자의 관점을 도입한다면 현재의 모든 정보를 안다면 과거의 정보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어지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에 행했던 현재행동에 불과하며 미래는 그때가서 행할 현재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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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omments>http://kmte.egloos.com/2692117#comments</comments>
		<pubDate>Mon, 20 Jul 2009 08:17:35 GMT</pubDate>
		<dc:creator>teferi</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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