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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철구의 세상보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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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강철구의 세상보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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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7 Sep 2009 15:32:0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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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철구의 세상보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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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서평 '강철구의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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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DCM_TITLE--><h4>[화제의 책] 강철구의 &lt;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 1&gt;</h4><p class="inputdate">&nbsp;<!-- ************ overture article top banner ************ --><!-- ************ overture article top banner ************ --></p><div class="viewstep03" id="newsBODY"><!-- 본문 우측 광고 끝--><!--DCM_BODY-->우리의 서양사 연구는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대학에서 역사를 <a class="con_link" title=""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공부</a>한 1세대들이 서양사 연구를 시작하여, 20세기 한국이 그랬듯이 짧은 시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1970년대까지도 서양사 연구를 위한 2차 연구서조차 구하지 못해 어렵게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복사</a>해서 읽었고, 외국에 나가 1차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사료</a>를 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br><br>이렇듯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1~2세대 학자들은 서양사 연구의 기본을 충실하게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다지</a>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들에게는 서양사의 큰 줄기를 이해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운 작업이었던 만큼, 서양학자들의 연구를 우리의 눈으로 비판하는 작업들은 어찌 보면 사치에 가까왔으리라.<br><br>80년대에 3세대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전보다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수월</a>해진 외국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유학</a>길에 올랐다. 90년<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대부</a>터는 외국 유학을 다녀온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해외유학</a>파들이 서양사의 새로운 흐름들과 그동안 소홀했던 서양사의 영역들을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1차 사료 분석을 통한 예전보다 훨씬 깊은 연구물들을 생산해내었다.<br><br>또한 70~80년대의 국내문제에 천착하여 고민하고 있던 국내파들이 서양사의 사례들을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좀 더 세련되게 발전시킴으로써, 국내 서양사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br><br>하지만 3세대 학자들도 여전히 우리의 눈으로 서양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부족했다. 특히 해외유학파들은 유학국가에서 배운 새로운 서양사 영역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에만 급급하였고, 서양학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br><br>그런 의미에서 강철구 교수가 유럽중심의 세계사를 비판하고 우리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보려는 노력을 해온 것은 무척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반가운</a> 일이다. 강교수는 국내파로 특히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문제를 중심으로 고민해오면서 오래전부터 서양사학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연구해왔다. 어쩌면 강교수가 서양사학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그가 국내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필자만 하더라도 오히려 프랑스 학자들의 연구에 매몰되어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br><br><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15px 10px 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left"><tbody><tr><td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994268_10" width="270"><img id="userImg8085259" style="WIDTH: 270px; HEIGHT: 371px" onclick="popview(this.src)" hspace="0" src="http://pic.pressian.com/images/2009/08/27/40090827134217.JPG" onload="'setTimeout(" ?resizeImage(8085259)?,200)?></td></tr><tr><td style="FONT-SIZE: 10pt; COLOR: #777; LINE-HEIGHT: 15px; FONT-FAMILY: 994268_10; LETTER-SPACING: -0.05em" width="270">▲ &lt;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gt;(강철구 지음, 용의숲 펴냄). ⓒ프레시안</td></tr></tbody></table>강 교수는 이미 &lt;역사와 이데<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올로</a>기&gt;라는 저서를 통해 서양학자들의 역사학에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학계의 논쟁들을 국내학계에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그동안 외면해왔던 '우리 눈으로 서양사보기'에 불을 지핀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br><br>강 교수의 이번 저서는 &lt;프레시안&gt;을 통해 그동안 발표해왔던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칼럼</a>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서양학자들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서 대중을 상대로 다양한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그림</a>들과 사진들을 통해서 흥미롭고 알기 쉽게 서술했다는 점이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대형<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사진과</a> 그림들,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친절</a>한 설명은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br><br>두 번째 장점은 쉽게 서술하면서도 학계의 깊이 있는 논의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다 보면 정작 학계에서 논의되는 중요한 논점들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을 남기곤 했는데, 강교수는 학계의 논의를 중심으로 균형감각을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유지</a>하면서, 대중을 상대로 알기 쉽게 그러나 심도 있게 글을 썼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하겠다.<br><br>세 번째 장점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논의를 서양<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고대</a>사부터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현대</a>사까지 골고루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제 1권에서 강교수는 고대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그리스</a>문명, 유럽중세도시,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르네상스</a>, 유럽의 해외 팽창, 근대 자본주의 발전,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와 같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역사 전반에 걸쳐 어떤 논의가 있는지 소개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서 매우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고무</a>적이다.<br><br>그의 논의는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사에 대한 기본 상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본 상식이 과연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를 묻는다. 예전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이다. 기본 상식 속에 유럽중심주의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나서, 강교수는 기본 상식에 대해 최근 학계의 비판적 논의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기본상식을 뒤엎는 신선한 주장들을 펼친다.<br><br>예컨대 그리스문명은 서양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스문명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독창적이며 인간중심적인 문명으로 서양문명의 본질을 차지한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다. 과연 그렇게 독창적인 문명일까?<br><br>강 교수는 마틴 버널의 &lt;블랙 아테나&gt;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실제 그리스문명은 대부분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이집트</a>문명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은 것으로 이제 알고 있는 것처럼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권 57~97쪽) 매우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마턴 버널의 주장에 대한 학계의 비판도 잊지 않고 소개하는 학문적 신중함을 더하여 학문적 논의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br><br>그의 논의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그의 비판적 논의 대부분이 서양학자들의 비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총론에서 칼 맑스, 헤겔, 막스 베버 등에 대한 비판도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서양학자들로부터, 그리스문명 비판도 마틴 버널로부터, 그리고 르네상스에 대한 비판도 서양학자들의 주장에서 시작하고 있다.<br><br>이에 대해 강교수도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제 3세계 출신이기는 하나 서양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서양 학문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1권 53쪽). 그러면서도 서양의 대표적인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이론에 지레 겁을 먹고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감연히 맞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br><br>시작단계인 현 상황에서 "당장은 서양 사람들이 해 놓은 자기반성의 수준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강교수의 입장에 약간 옹색해 보이는 점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도 규모나 연구수준에서 서양의 학계보다 턱없이 열등한 국내학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지당</a>한 주장이다. 사실 유럽중심주의 비판은 한국인으로서 서양사를 공부할 때에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학문적 자세가 아닐까? 근, 현대 부문을 다루는 제 2권의 빠른 출간을 기대한다.<!--/DCM_BODY--> <p class="author">&nbsp;</p><p class="author">/백인호 <a class="con_link" h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27134217" target="_blank">서강대</a> 사학과 교수</p></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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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논문 및 저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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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4 Sep 2009 15:21:33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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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 20세기의 민족주의 발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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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71&gt;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⑦<br><br><!--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컴돋움; mso-fareast-font-family: 한컴돋움; mso-hansi-font-family: 한컴돋움"><span style="FONT-FAMILY: 굴림">프랑스혁명은 민족주의가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C%BA%C0%E5&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성장</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혁명을 통해 민족주권과 민족의 자율성이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이론상으로는 민족 전체가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근대적 민족주의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br><br>그럼에도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주로 대외적인 전쟁을 통해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을 뿐 아니라 강화되었다. 프랑스가 1792년 4월부터 대외적인 혁명전쟁을 시작함으로써 프랑스뿐 아니라 그 상대편 나라들에게도 민족적 감정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br><br>그것은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이 시작되며 더 강해졌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정복했던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0%AF%B7%B4&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유럽</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여러 나라에서 그 반발로서 저항민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영국은 이 시기에 프랑스와 22년간이나 지속적으로 싸워야 했다. 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잉글랜드 침공의 위협 등으로 인해 이 시기에 민족 감정이 크게 증대되었다.<br><br>독일에서도 1806년 이후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으며 민족주의가 발전했다. 피히테, 슈타인 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독일인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당시 독일의 민족주의는 아직은 문화적 민족주의이다. 그것은 독일이 수십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5%B6%C0%CF%BE%EE&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독일어</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와 그 문화가 민족주의의 기초가 되었다.<br><br>이탈리아도 나폴레옹이 그 상당부분에 이탈리아왕국을 세우고 지배함으로써 많은 고통을 받았다. 또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많은 병사들의 징집, 이탈리아 예술품의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6%C4%B8%AE&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파리</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반출 등에 분개했다. 그래서 일부 시인들이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외쳤으며 곧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1%F6%BD%C4%C0%CE&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지식인</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들이나 군사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F%A4%B8%AE%C6%AE&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엘리트</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들이 그 뒤를 따랐다.<br><br>빈회의에 의해 1815년에 확립된 메테르니히체제는 절대주의적인 구질서를 다시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A%B9%B1%B8&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복구</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하고 프랑스혁명이 열어 놓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힘을 막기 위해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0%FC%B7%C2&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전력</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을 다했다. 그 이데올로기들이 전통적인 군주국가들을 붕괴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br><br>아직 소수였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에 대해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그 싹들은 아직 자라기도 전에 짓밟혔다. 그렇다고 민족주의 이념이 점차 유럽 각지로 확산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br><br>1820년대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중남미의 각 지역에서 식민지인들의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두 나라가 나폴레옹에게 오랫동안 지배되어 그것을 진압할 힘이 없었으므로 중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는 1826년까지는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br><br>유럽에서는 터키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에서 1815년 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1%D7%B8%AE%BD%BA&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그리스</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가 1830년에 독립하고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0%CC%C1%FD%C6%AE&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이집트</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가 자치를 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터키를 약화시키려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같은 나라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br><br>유럽의 중심부에서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같은 중요한 나라들이 민족주의의 발전을 가로 막았으므로 그 운동은 느리게 진전했다. 그리하여 1848년의 독일 3월혁명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br><br>19세기의 민족주의 운동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다른 민족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 분열되어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통합, 또 이미 정치적 통일을 이룬 민족국가의 경우에는 그 발전과 팽창을 추구하는 것이다.<br><br>첫 번째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와 같이 다민족국가로 구성된 나라에서 소수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추구한 운동이다. 두 번째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분열되어 있는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이다. 세 번째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이 이미 형성된 민족-국가를 더욱 발전시키려 하는 움직임으로 이는 결국 제국주의와 연결되었다.<br><br>독일 3월혁명은 두 번째 경우이다. 독일은 중세 이래 분열되어 있었으나 이제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진 근대세계에서 분열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멸을 의미했다. 나폴레옹의 통폐합에도 불구하고 31개 국가와 4개의 자유도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상태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br><br>이 혁명을 주도한 것은 대체로 부르주아 계급인데 그들은 민족통일과, 입헌군주제를 통한 국가의 자유화를 같이 추구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주도권 경쟁과, 또 아직 구지배계급이 완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통일은 당분간 뒤로 미뤄졌다.<br><br>혁명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마자르족, 여러 슬라브족들, 또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이 해방과 독립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황제도 이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우선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7%EB%B0%A1%B8%AE&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헝가리</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인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이 탄생했다.<br><br>이탈리아도 독일과 같이 중세 이래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고 북부지역에서 가장 큰 나라가 사르디니아-삐에몽트였다. 베네치아와 주변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마는 교황령국가였다. 또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는 시실리왕국이 있었다.<br><br>통일작업을 정치적으로 실천한 것은 사르디니아-삐에몽트의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C%F6%BB%F3&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수상</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인 카부르이다. 그는 통일전쟁을 일으켜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막아내고 1860년에 롬바르드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여 일차적인 통일을 완수했다.<br><br>그 해에 민족주의자인 가리발디가 천여명의 붉은셔츠 단을 이끌고 시실리왕국으로 쳐들어가 이를 사르디니아에 통합시켰다. 베네치아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확보했고 로마는 1870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함에 따라 병합되었다.<br><br>독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미 1828년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내 많은 나라들을 하나로 묶는 관세동맹이 맺어졌는데 이것이 통일을 위한 경제적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3%CA%BC%AE&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초석</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이 되었다. 통일과업을 떠맡은 것은 프로이센의 수상이었던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F%C0%C5%E4&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오토</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폰 비스마르크였다.<br><br>그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북부 독일 국가를 북독일연맹으로 묶었다. 또 1871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남부의 4개 국가를 더 합쳐 독일제국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하나로 합쳐짐으로써 통일이 완수되었다. 이는 독일이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br><br>또 한편에서 중, 동부유럽의 많은 소수민족들이나 아일랜드 같은 억압민족들은 지배민족에게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두 나라는 이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억압을 강화하고 언어나 문화 등의 동화정책을 강행했다.<br><br>민족주의는 1848년에도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일부 대중이 혁명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대체로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1%B3%BE%E7&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교양</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있는 부르주아계급에 제한되었다. 그러나 1870년 이후에는 점점 대중적인 현상으로 바뀌었다.<br><br>그것은 19세기 후반에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국가 사이의 다툼이 더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의 중요한 강대국들은 서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그 국민들의 충성심이나 통일성을 끌어내기 위해 민족주의 이념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관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br><br>여기에서는 교육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의 경우 비스마르크는 통일 이후에 공립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3%CA%B5%EE%C7%D0%B1%B3&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초등학교</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편에 속했다. 이 학교들에서 독일어 교육을 시킴으로써 문자해득자가 크게 늘어났다. 한 편에서는 덴마크어, 폴란드어, 알사스어 같은 소수민족 언어의 사용을 금지시켰다.<br><br>러시아도 언어와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통합을 국가의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폴란드의 카톨릭 교회,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발틱지역의 루터파 교회들이 그 종교정책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br><br>그리하여 민족주의의 추구가 유럽에서 하나의 대세가 되었으며 19세기 말의 제국주의 팽창은 이러한 경쟁의 단순한 확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해외 식민지의 확보는, 특히 대중적 민족주의의 시대에는 민족적 영광을 나타내는 필수적인 징표로 보였기 때문이다.<br>제국주의 정책을 주로 추구해 나간 것은 우익세력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의 성격도 과거보다 보수화했다.<br><br>많은 국가의 우익 정치인들은 제국주의를 민족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국내적인 긴장을 해외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5%B5%BF%F2&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도움</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는 좌익과 싸우는 무기가 되며 보수화했다.<br><br>그래서 그들은 민족감정을 극단적으로 고취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역자로 몰아 붙였는데 이런 태도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 반유대주의를 가져오는데도 기여했다. 이런 극우민족주의의 발전은 1920년대에 파시즘이 자라나는 온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좌익이 민족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다.<br><br>제국주의적 지배와 억압은 식민지에서도 점차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식민지인들은 민족의 자주성과 경제적 착취의 반대, 문화의 자율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와 민족주의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이유이다. 특히 1950, 60년대는 민족해방운동이 식민지역 각지에서 일어나며 민족주의를 크게 강화시킨 시기이다.<br><br>그러나 1947년 이후의 냉전체제는 한 편에서 새로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의 자율성도 크게 제약시켰다. 미국은 한국이나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A%A3%C6%AE%B3%B2&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베트남</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 중남미 지역 등에서 끊임없이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부심했다. 민족주의가 자기네의 세계전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br><br>소련도 사회주의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0%C7%BC%B3&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건설</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을 위해 영토내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무차별적으로 짓눌렀다. 그러나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갑자기 구소련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요구가 분출한 것이다. 이는 체첸의 독립요구 등 이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br><br>유고슬라비아가 </span><a class="dk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7%D8%C3%BC&amp;article_num=40090609113401&amp;media=test" target="_blank"><span style="FONT-FAMILY: 굴림">해체</span></a><span style="FONT-FAMILY: 굴림">된 뒤 보스니아에서는 대규모 종족학살까지 벌어져 세계인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이는 민족주의적 요구라는 것이 매우 뿌리 깊은 것으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br><br>21세기가 합리성의 시대이고 지구화의 시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종족이나 민족에 대한 요구가 종족성이라는 뿌리 깊은 힘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당연한 현상이다. <br><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강철구 / 이화여대교수</span></span></p><br/><br/>tag : <a href="/tag/민족주의" rel="tag">민족주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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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category>민족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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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9 Jun 2009 06:45:46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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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프랑스 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시작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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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trong>[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70&gt;민족주의의 근대적 해석 비판 ⑥<br><br><br>프랑스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시작<br><br></strong><a class="adlink" title=""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1%D9%B4%EB&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근대</a>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민족 개념은 이미 17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루소의 &lt;사회계약론&gt;의 영향으로 민족의 개념이 사회계약의 원리와 결합했기 때문이다.<br><br>그래서 민족은 이제 인민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구성체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나온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1%D6%B1%C7&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주권</a>적인 것은 민족이다', 또는 '프랑스 민족은 사회계약이다'라는 이야기들은 그런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br><br>루이 15세는 1771년에 귀족의 이익을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4%EB%BA%AF&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대변</a>하여 왕에게 대립하던 고등법원들을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7%D8%BB%EA&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해산</a>시켰다. 그러나 1774년에 그가 죽자 뒤를 이은 루이 16세는 그것들을 원상 복구시켰다. 그럼에도 고등법원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권위를 누릴 수 없었다. 이제 귀족을 배제한 프랑스인 전체로 생각되는 민족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br><br>그래서 혁명 직전인 1788년 5월에 자크 고다르라는 사람은 '이제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6%C4%B8%AE&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파리</a>와 전 왕국에는 세 개의 당파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0%CC%B8%A7&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이름</a>이 있다. 그것은 왕당파, 고등법원파, 민족파이다' 라고 쓰고 있다. 제3신분으로서의 민족이 독자성을 과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br><br>1788년에 루이 16세는 왕실의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해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약속했다. 이때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가 1614년의 각 부별 방식으로 소집되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분란을 일으켰다. 귀족계급의 특권을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0%AF%C1%F6&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유지</a>하기 위해서였다.<br><br>그러자 지금까지 왕권과 싸우면서 맺어진 귀족과 제3신분 사이의 동맹관계가 깨졌다. 부르주아들은 이제 왕의 전제를 비판하는 대신 귀족계급을 새로이 적으로 돌리고 공격하기 시작했다.<br>이로부터 새로운 민족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운동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직전에, 사회계약설에 의존한 이 민족의 개념을 뚜렷한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발전시킨 사람이 당시에는 아직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9%AB%B8%ED&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무명</a>의 신부였던 아베 씨예스였다.<br><br>그는 1789년 1월에 &lt;제3신분이란 무엇인가&gt;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거기에서 '제3신분 대표는 인구의 대다수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므로 민족의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1%F8%BD%C7&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진실</a>한 대표'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부르주아계급의 큰 호응을 받았다. 덕분에 그도 삼부회 대표로 선출될 수 있었다.<br><br>1789년 6월17일에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그의 발의에 따라 그들 회의체의 이름을 '국민의회'로 바꾸고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7%E5%B9%FD&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헌법</a>을 만들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때 제3신분 대표들이 스스로를 민족의 대표로 자임했기 때문이다.<br><br>(<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F%B5%BE%EE&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영어</a>나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A%D2%BE%EE&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불어</a>의 nation을 동아시아에서는 '민족'과 '국민'의 두 단어로 사용하는데 이는 19세기 말에 일본인들이 nation 가운데 종족적 공동체의 의미를 민족으로, 사회계약적 공동체의 의미를 국민으로 구분하여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9%F8%BF%AA&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번역</a>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사용하는 nation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종족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사회계약에 의한 민족의 개념이 만들어지며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양인들이 n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문맥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1789년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전통적인 의미를 따른다면 '민족의회'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으나 관용적으로 '국민의회'로 쓰므로 그대로 사용하겠다)<br><br>그래서 혁명 초기에 '프랑스는 1789년에 진실로 민족이 되었다'라든가 '프랑스는 마침내 진정한 조국이 되었다'라는 등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8%F1%BC%D2%B8%AE&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목소리</a>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민족의 이름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br><br>그렇다고 당시의 프랑스인 모두가 이런 태도에 찬성한 것은 아니다. 사회계약론적 민족 개념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전통적 정치질서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왕을 조국이나 민족과 분리시키는데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삼부회 소집 과정에서 작성된 까이에(청원서)들을 보면 알 수 있다.<br><br>제3신분의 까이에들에는 인민주권을 키워드로 하여, 모든 권력은 민족에게서 나오고 제3신분이 민족을 구현한다는 주장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프랑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까이에는 그런 이야기가 거의 없다. 수만 개에 이르는 까이에 전체로 보면 민족의 구심점은 아직도 왕이었다.<br><br>그럼에도 혁명가들은 7월의 혁명이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C%BA%B0%F8&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성공</a>한 후 인민주권을 새로운 체제의 이념적 기틀로 만드는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리하여 1789년 8월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그 제 3조에서 '모든 주권의 원리는 민족에게 있다. 어떤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4%DC%C3%BC&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단체</a>나 개인도 분명히 민족에게서 나오지 않는 한 그 권위를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7%E0%BB%E7&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행사</a>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런 규정은 1791년 헌법, 국민공회의 1792년 9월 25일자 선언, 1795년 헌법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된다.<br><br>민족주권을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민족의 주권이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며 이제 왕도 민족주권의 지배 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논리적 귀결은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인민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사회계약이라는 허구만을 가지고 민족을 구성할 수는 없었다. 영토, 종족, 문화 등의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A%F1%C0%DA&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비자</a>발적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F%E4%BC%D2&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요소</a>들도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br><br>비자발주의적 요소 가운데 우선 중요했던 것이 민족의 영토적 경계선 문제였다. 만약 인민의 '자발적 의지'에만 의존하면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사람들은 프랑스 민족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국가의 해체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br><br>이를 피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모든 주권이 민족에게 있다는 논리로부터 민족적 단일체의 불가침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프랑스 민족이나 영토로부터의 어떤 분리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혁명 구호 가운데 '민족의 불가분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된 이유이다.<br><br>또 민족의 성원을 결정하는 데에는 종족적 기준이 적용되었다. 식민지에서 그런 상황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식민지 흑인들 가운데에는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하여 프랑스인의 자격기준으로 '자유에 대한 사랑이라는 피'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br><br>그리고 자신들을 프랑스인으로 생각하며 프랑스인으로 끼워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 민족의 일원으로 식민지 의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식민지인들의 요구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br><br>문화도 비자발적 요소로서 중요했다. 여기에서는 정치적, 문화적 연대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E%F0%BE%EE&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언어</a>가 특히 강조되었다. 그래서 혁명기의 문화정책을 주도했던 아베 그레고어는 '어떤 개인이 프랑스 민족에 속하고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가 프랑스의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D%C9%C0%E5&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심장</a>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심장이란 바로 불어를 의미했다.<br><br>그러나 1790년의 언어조사에 의하면 불어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전체 2,5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3/4에 불과했다. 또 불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혁명기의 많은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9%AE%BC%AD&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문서</a>들은 오키탄어 등 각 지역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야 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실패하기는 했으나 다언어적인 프랑스 사회를 불어로 통일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br><br>그러므로 혁명기 프랑스 민족의 탄생을 민족의 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 즉 자발주의에만 귀착시키고 거기에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서양학자들의 상투적인 설명은 큰 한계를 갖는 것이다. 명목적으로는 종족적 요소들 대신 의지를 내세웠으나 공동의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1%E2%BF%F8&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기원</a>에 기초한 역사적 정체성 없이 민족의 형성은 불가능했다.<br><br>그러면 당시의 프랑스인이 모두 자신을 민족의 일원으로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그것을 자신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농촌은 반혁명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런 반혁명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0%A8%C1%A4&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감정</a>은 대외전쟁이 시작되며 더 커졌다.<br><br>그래서 식량이나 가축의 공출을 거부했고 징집도 가능하면 피하려 했다. 1793년에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은 강제 징집 때문이다. 또 병사들의 탈영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1794년 여름에 프랑스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1%BA%B4%EB&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군대</a>의 총병력은 70여만 명이었으나 1797년에는 근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전쟁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B%E7%BB%F3%C0%DA&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사상자</a>를 뺀 나머지는 탈영 때문이다. 프랑스 농민들이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들어와서이므로 혁명기의 민족의식을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0%FA%C0%E5&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과장</a>해서는 안 된다.<br><br>혁명기에는 많은 혁명<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3%E0%C1%A6&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축제</a>들이 각지에서 벌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790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여 파리에서 열린 연맹제였다. 여기에는 수십만 명이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5%BF%BF%F8&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동원</a>되었다. 이런 축제들은 모두 혁명 열기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br><br>또 혁명을 상징화한 마리안느 같은 여성상이 수없이 만들어져 세워졌다. 혁명을 선동하는 수많은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6%CA%C7%C3%B7%BF&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팜플렛</a>이나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1%D7%B8%B2&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그림</a>들이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C0%CE%BC%E2&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인쇄</a>되어 배포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민족은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이런 행위들이 필요했던 것은 민족이 되려는 의지만으로는 민족형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br><br>프랑스혁명은 근대적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에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br><br>첫째, 민족을 이론적으로 프랑스인 전체 인구로 확장했다. 과거에 왕이나 귀족에 제한 되었던 민족 개념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전체 인구를 포괄할 가능성을 갖게 했다. 그리 하여 민족에 평등주의적 개념이 들어갔다.<br><br>둘째, 민족주권 이론을 통해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형성된 민족을 정치권력의 유일 한 원천으로 만들었다.<br><br>셋째, 혁명기에 만들어진 민족자결권 개념은 민족의 자율성을 주장함으로써 19세기에 자율적 인 민족-국가가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도록 했다.<br><br>넷째, 혁명전쟁은 프랑스의 민족주의를 고조시켰다. 또 혁명전쟁이 점차 프랑스의 정복전쟁으로 변질하며 유럽 각 지역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19세기와 20세기를 민족주의의 시대로 이끌었다.<br><br>그러나 혁명기 프랑스 민족과 민족주의의 한계도 분명하다. 실제로 민족은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민족감정이나 민족주의가 전체 국민으로 확산되는 것은 제3공화국 시대인 19세기 말에 가서이다.<br><br>자발적인 의지만으로는 민족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 민족 형성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족, 영토, 역사, 종교, 언어, 관습 등 과거 수백 년 동안 만들어져온 비자발적 요소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에서 보듯 그 민족적 동질성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다. 1864년에도 프랑스의 <a class="adlink"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3%B2%BA%CE&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남부</a> 1/3선 지역 사람의 40%는 불어를 하지 못했다. 브레타뉴나 알사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br><br>불가분의 민족을 정치권력의 원천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치적 폭력과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 프랑스 민족을 합의에 의한, 자유스러운 서유럽형 민족형성의 <a class="adlink" title="" href="http://search.keywordsconnect.com/?keyword=%B8%F0%B5%A8&amp;article_num=40090508113446&amp;media=pressian" target="_blank">모델</a>로 삼는 것은 허구의 산물이다. 또 말로는 민족자결을 주장했으나 실제로 그것은 곧 포기되었다. 그리고 이웃국가에 대한 병합주의, 나아가 제국주의로 발전했다. <p class="autho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br>]<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 </p><br/><br/>tag : <a href="/tag/민족주의" rel="tag">민족주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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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category>민족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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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5 May 2009 07:55:35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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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 만들어졌나? (3)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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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align="justify"><strong>[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69&gt;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⑤ -(3)<br><br><br>근대 초 프랑스의 민족형성과 민족주의<br><br></strong>15세기 말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가장 기독교적인' 프랑스왕의 백성이라는 점, 프랑스어를 말하고 쓰는 것, 프랑스 영토, 살리 법, 고대로부터의 문화적 전통, 프랑스 정치제도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무엇보다도 왕 개인이었다.<br><br>이런 추세는 16세기 전반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왕이 카톨릭교회의 '큰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로마교회로부터의 독립성을 추구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카톨릭의 1516년 볼로냐 공의회가 프랑스왕을 명목으로는 아니라 해도 실질적으로 갈리칸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함으로써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br><br>16세기 전반에는 왕의 중앙집권도 강화되었다. 이는 프랑소아 1세가 시작한 관직이나 귀족 칭호의 판매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의 권력이 약화되며 전문 관료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이를 싫어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국가(etat)라는 단어도 그 이전의 '신분(身分)'이라는 뜻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정부'나 '정치영역'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br><br>1560년대에 이런 추세에 제동이 걸렸다. 신, 구교도 사이의 유그노 전쟁(1562-1598)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는 유그노로 불린 칼뱅 교도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1562년에 는 그 교회가 약 2천 개를 헤아릴 정도로 확대되었다.<br><br>그러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1560년대 초부터 카톨릭연맹이 지방 단위에서 생기기 시작했고 1576년에 전국적인 카톨릭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559년에 국왕인 앙리 2세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혼란이 시작되었다.<br><br>이미 1560년이면 귀족이나, 삼부회의 제3신분은 중앙집권화와,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에 대해 왕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것이 유그노에 대한 적대감과 결합하며 30여년에 걸친 유그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br><br>이 종교전쟁으로 프랑스인들은 1572년의 바톨로뮤 대학살을 포함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카톨릭과 유그노의 두 세력은 모두 왕을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을 뿐 왕을 공격하지는 않았다.<br><br>이 전쟁은 두 세력의 타협으로 끝났다.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왕이 카톨릭 편만을 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그노인 나바르공 앙리 3세가 1589년에 카톨릭으로 개종한 뒤 앙리 4세로 왕위에 오르고 그가 1598년에 낭트 칙령으로 유그노에게 관용을 베풂으로써 분란은 가라앉았다.<br><br>이때 앙리 4세는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나는 프랑스인으로서의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나의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똑같이 나의, 그리고 프랑스왕의 충실한 종복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이며 같은 나라의 동료-시민들이다"라고 말했다. 왕이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br><br><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tbody><tr><td width="350"><img class="resize3" height="438" alt="" hspace="0" src="http://pic.pressian.com/images/2009/03/13/40090313122108.JPG" width="350"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350">▲ 앙리 4세</td></tr></tbody></table><br>17세기에 들어오며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종교전쟁 가운데에서 고통을 겪은 프랑스인들이 왕의 강력한 권력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권신수설에 의존했는데 왕권신수설은 1588년에 Pierre de Belloy의 &lt;왕의 권위&gt;라는 글에서 처음 나타난다.<br><br>이 이론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왕에게서 나오며 백성에게는 복종 외에 다른 권리는 없었다. 정당한 통치자는 정의로우므로 왕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은 신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으므로 왕권에 저항하는 것은 십계명과 신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br><br>왕권신수설은 그 후 한 세기반 동안 강력한 힘을 행사하며 프랑스 절대왕정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역설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권을 파괴하고 민족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br><br>그것은 왕권신수설이 신에게 의존했으나 그때의 신은 탈카톨릭화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신성이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추상화됨으로써 프랑스 왕의 권위가 세속성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오면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점차 종교로부터 떠나 정치로 옮겨가게 된다.<br><br>이는 루이 13세의 섭정으로서 국가이성을 추구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하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또 루이 14세(재위 1643-1715)시기에 가면 교황이나 예수조차 군주권의 우월성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왕이 민족적 정체성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다.<br><br>1715년에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파리 고등법원은 '전체 국가는 그의 안에 있으며 인민의 의지는 그의 의지 안에 있다'고 언명했는데 이는 왕이 최고 충성의 대상이고 신성함의 구현이며 개인화된 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는 말이었다.<br><br>이것은 17세기에 유럽국가들의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공화국에 대한 사랑과 공동의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인식되었던 고대로부터 내려온 공화주의적 애국주의가 쇠퇴하고 그것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된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조국(patria)이 반드시 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애국주의(patriotism)가 공화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바뀐 것이다.<br><br>그러나 1750년경부터 이런 사정이 바뀌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이 시기에 민족의 주체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과 귀족이 서로가 민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br><br>루이 15세가 친정을 하기까지 섭정(1715-22)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은 절대왕정 하에서 크게 성장한 국가기구를 고위 귀족의 통제 하에 집어넣음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과거에 스스로를, 왕권을 제약하는 불가결한 힘으로 간주해 왔던 고등법원들이 다시 전통적인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br><br>왕권에 비판적인 귀족들은 자신들을 민족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AD 5세기 이래 그들이 간직해 왔다고 믿은, 군주의 행위를 견제하거나 무효화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주장했고 그것을 민족의 권리로 포장했다. 그리하여 1730년대에는 고등법원을 민족의 '원로원'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br><br>이에 대해 군주주의자들은 프랑스 '민족'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은 군주의 개인에 의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은 이미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1766년에 루이 15세가 고등법원들에 대해 그들이 '민족의 기관(organ)을 대표하고, 민족의 자유와 이익, 권리의 보호자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반대로 민족의 권리와 이익은 -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군주와 분리시키려고 하지만 - 필연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이미 왕이 민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는 지난 것이다.<br><br>다른 하나의 요인은 영국과의 경쟁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7년전쟁(1756-63)에서의 패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에 유럽에서의 지도권을 점차 상실했으나 이제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br><br>이리하여 이 시기에 불붙은 민족주의에는 영국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큰 역할을 했다. 루소, 마블리, 디드로, 돌바흐, 마라 같은 지식인들이 모두 반영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루소가 그렇다.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에도 반영감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br><br>이는 참전 프랑스군의 사령관이었던 라파예트 장군이 '내가 아메리카의 대의에 참여한 것은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 그 적에게 굴욕을 주려는 나의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br><br>1765년에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연된 '깔레의 포위'라는 애국적 연극은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또 이 시기의 언론들은 반영적인 태도와 함께 애국심을 매우 강조했고 대중들은 이에 열렬히 반응했다. 이렇게 1770, 80년대의 프랑스는 민족적 감정이 매우 고조되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상당히 확산된 상태에 있었다.<br><br>이런 감정과 의식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 가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대중성이 훨씬 커지며 더 이상 왕이나 귀족이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적 민족주의의 시대가 열린다. 혁명 속에서의 이런 변화를 살펴보자.&nbsp;<br><br><br><br><br><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강철구 / 이화여대교수 </p><br/><br/>tag : <a href="/tag/민족주의" rel="tag">민족주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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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category>민족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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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Mar 2009 06:34:26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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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 만들어졌나? (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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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trong>&nbsp;</strong><h3><span style="FONT-SIZE: 100%">[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lt;68&gt;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⑤ - (2)</span></h3><div><strong></strong>&nbsp;</div><div><strong>근대 초 잉글랜드의 민족 형성과 민족주의<br><br></strong>근대 초 민족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이다. 유럽은 16세기 초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며 커다란 내적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럽사회가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서로 경쟁했기 때문이다.<br><br>이것은 각 나라에서 국내적으로 큰 정치, 사회적 갈등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6, 17세기에 서유럽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스페인, 프랑스 사이에 지속적인 불화가 생겨났다.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 사이, 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신교 국가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졌기 때문이다.<br><br>또 17세기 전반에 독일 지역에서는 30년전쟁이라는 대규모의 국제적 종교전쟁까지 벌어졌는데 여기에는 독일 외에,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었다.<br><br>이 종교적 갈등은 근대 초 각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뚜렷하다. 이미 1520-30년대에 종교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가 시작되었고 1534년 수장령에 의해 헨리 8세가 앵글리칸 처치(영국 국교회)의 기초를 마련한 후에는 로마교황 및 카톨릭국가인 스페인과의 대립이 노골화했다.<br><br>그리하여 이 시기에 런던 거주 외국인 수공업자에 대한 폭동을 비롯해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감정은 John Bale이나 Roger Ascham의 글에서 잘 볼 수 있다. 또 문화적으로도 14세기 후반 사람으로서 영어로 처음 제대로 된 문학작품을 쓴 초서의 글이 편집, 출간 되는 등 민족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br><br>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많은 영어 번역판 성경이나 기도서들, 성경주해서들이다. 이것들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데 공헌했다. 그리고 성경의 번역 과정에서 라틴어의 'natio'가 'nacyon'이나 'nacion'으로, 나중에는 'nation'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이 시기에 유럽 각 나라에서 영어를 비롯하여,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vernacular)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민족의식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br><br>그리하여 1533년에 헨리 8세는 자신의 선조들이 '진정한 민족'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치세 1558-1603) 때에 오면 왕과 민족은 더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다. 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과 그 승리는 잉글랜드의 대부분 지역에 잉글랜드 민족의 감각을 퍼뜨리는데 기여했다.<br><br>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역사와 잉글랜드적 생활방식, 잉글랜드의 땅이나 강 등 잉글랜드적인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새로이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애국적인 열정이 시나 소설, 희곡(섹스피어를 포함하여) 등으로 표현되었다.<br><br></div><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tbody><tr><td width="350"><img class="resize3" height="418" alt="" hspace="0" src="http://pressian.ofscdn.com/images/2009/02/20/40090220115511.JPG" width="350"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350">▲ 그림 1. 엘리자베스 여왕. 엘리자베스 시대는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해외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때로 국민들의 자부심이 매우 높아진 시기이다. 민족의식이나 민족문화의 발전은 그런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td></tr></tbody></table><div><br>여기에 참여한 저자들이나 학자들 가운데에는 귀족 출신만이 아니라 평민 출신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민족 문화의 건설자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이런 민족문화적 경향의 폭발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br><br>그리하여 민족은 점차 잉글랜드의 주권을 가진 '인민(pepole)'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조국(country)이나 국가(empire)라는 단어도 대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empire는 로마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같은 보편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권력이라는 의미이다.<br><br>이렇게 대략 1600년경이면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의식과 민족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나고, 민족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리아 그린펠드 같은 학자는 잉글랜드에서는 이 시기까지는 민족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br><br>17세기에 가면 영국혁명(1642-1646)이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을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영국혁명은 스튜어트 왕조에 들어와 찰스 1세의 전제가 엘리자베스가 이룩한 잉글랜드인의 통합을 깸으로써 비롯된 것이다.<br><br>이에 의회가 반기를 들고 나서며 전국 방방곡곡이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싸우는 내전으로 발전했고, 결국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1세가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 혁명기는 영국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뚜렷한 백가쟁명의 시기이다. 수많은 정치이론들이 나타나고 경쟁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과정에서 직접 정치를 경험했다.<br><br>그 과정에서 민족의식은 더 넓은 지역으로 또 더 하층계급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으며 그와 함께 민족의식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민족의 구심점으로 존재해 온 왕이 처형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br><br>그리하여 이제 민족과 관련된 문제는 종교나 왕의 권력과 분리되어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이 제 1차적 충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민족이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설 수 있게 되었으므로 - 종교나 왕권 같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요소는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br><br>18세기가 되면 민족이라는 말은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지 경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강화시키고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br><br>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던 것이 18세기 중반의 7년 전쟁(1756-1763)이다. 두 나라 모두 전쟁에 대해 자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으므로 전쟁 과정에서 인쇄물에 의한 선전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br><br>또 두 나라에서 1750, 60년대의 전쟁문학은 이 전쟁을 왕실이나 종교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두 민족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민족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단어 외에 조국(patrie), 애국자(patriot), 애국주의(patriotism) 같은 단어들이 함께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br><br>애국주의라는 단어에는 고대적 전통에서 비롯하는 특유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이것은 뒤에 설명할 것이다) 그것을 반드시 민족주의와 등치시키기는 어려우나 그 안에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이면 두 나라 모두에서 민족주의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단어는 1790년대부터나 쓰이기 시작한다. </div><div>&nbsp;</div><div>&nbsp;</div><div>&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강철구 / 이화여대교수</div><br/><br/>tag : <a href="/tag/민족주의" rel="tag">민족주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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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category>민족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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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Feb 2009 07:35:19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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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 만들어졌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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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strong>[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67&gt;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⑤-1</strong></div><div><strong></strong>&nbsp;</div><div><strong>전근대 시기 민족의 중요성<br><br></strong>근대주의자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중세시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대체로 부인한다. 그것을 18세기 말 이후 근대의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의미를 매우 과소평가한다.<br><br>따라서 근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긴요하다. 만약 단 몇 개의 민족이나 민족주의만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대주의적 해석의 기초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br><br>전근대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존재는 비유럽지역의 민족과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민족의 존재를 서양만이 아니라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유럽지역의 민족주의도 서양으로부터의 수입 이데올로기라는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할 가능성을 갖는다. 즉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서양에서 받아들였으므로 그 민족들은 인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br><br>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감정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1960, 70년대만 해도 민족주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생각되던 한스 콘에게서 비롯했다. 그가 1944년에 낸 &lt;민족주의의 이념&gt;에서 중세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보편주의 때문에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세인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생활했으므로 기껏해야 지역 공동체의 감각만을 느꼈다는 것이다.<br><br>그도 중세 말에 민족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후대에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첫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다. 대부분의 근대주의자들은 그의 이런 관점을 받아들였다.<br><br>그러나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중세 시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중세에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역사학 훈련을 받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접근하기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수고스러운 작업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독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옳은 태도는 아니다.<br><br>중세사가들은 대체로 중세시대에도 민족이나 민족감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요한 호이징하나 마르크 블로크 같은 20세기 전반 중세사의 대가들뿐 아니라 현재의 많은 중세사가들도 그렇다.<br><br>근대주의자들 가운데 앤소니 스미스가 전근대 민족의 존재에 대해 비교적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은 그가 역사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겔너의 수제자라고 할 스미스의 이런 접근은 근대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예외적인 현상에 속한다.<br><br><b>중세시대 서유럽의 민족과 민족주의</b><br><br>서유럽에서 민족의 기원은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8세기에 잉글랜드인(gens Anglorum)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5세기 이후 영국섬으로 이주해 온 앵글, 색슨, 쥬트 등 여러 게르만 종족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공동의 관습과 법, 생활양식을 발전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br><br>그리하여 9세기의 앨프렛대왕 때에는 왕을 '잉글릿쉬(잉글랜드인)의 왕'으로 불렀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잉글릿쉬로, 그들이 사는 땅을 잉글랜드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정치적 통일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나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br><br>1066년의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수립했다. 그것은 정복자 윌리엄과 그 계승자들이 과거의 앵글로-색슨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토착 엘리트들을 그 통치체제 속에 잘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적이고 응집력이 있으며 효율적인 국가체제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br><br>이렇게 집권적 국가가 민족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보통법, 중세의회인 파러먼트, 그리고 영어의 사용(1363년에 파러먼트의 개회연설에서 영어가 공식 언어로 처음 사용되었다)도 역시 중요했다. 민족적 정체성은 14세기에 중반에 시작되어 한 세기나 이어진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으로 더 강화되었다.<br></div><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tbody><tr><td width="500"><img class="resize3" height="284" alt="" hspace="0"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09/02/03/40090203121835(0).JPG" width="500"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500">▲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에 민족감정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td></tr></tbody></table><div><br>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 참석한 잉글랜드 대표단은 "민족이 다른 사람들과 혈연이나 관습, 언어에서 구분되는 사람들로 이해되든 말든, 또 민족이 프랑스 민족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영토로 이해되든 말든 잉글랜드 민족은 진정한 민족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 개념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혈통, 관습, 언어, 영토 같은 요소가 다 망라되고 있는 것이다.<br><br>그러나 당시의 민족은 아직 잉글랜드인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략 전체 인구의 5% 정도인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만이 민족적 정체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 14세기 말과 15세기에 나타나는 많은 애국적인 글들에서 민족으로서의 잉글랜드인은 국왕과, 또 조국(patria)은 왕국(regnum)과 연결되어 논의되었다. 그 점에서 당시의 민족과 민족주의의 구심점은 왕과 왕국이었고 그 민족주의는 아직 대중적 지반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br><br>유럽대륙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분해가 중세왕국이 등장하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카롤링왕조의 프랑크왕국이 843년의 베르덩 조약으로 동, 서, 중프랑크 왕국으로 나뉘며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중세왕국의 기초가 마련되기 때문이다.<br><br>프랑스지역에서는 987년에 카페왕조가 카롤링왕가를 대체하였으나 초기에는 왕권이 매우 미약하여 프랑스인 전체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대영주들이 계속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또 브레타뉴, 노르망디, 가스코뉴, 플랑드르 같이 종족적으로,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지역들도 남아 있었다.<br><br>13세기 초의 필립2세 시기부터 왕권이 강화되고 영주들의 영지를 빼앗으며 왕령지도 점차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왕령지들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이 이루어졌다. 왕령지는 14세기에 프랑스왕국이 다스리는 백성이 약 2천만 명에, 그 면적은 20만 제곱킬로 이상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br><br>그리하여 13세기부터 프랑스왕국 또는 Francia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왕과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프랑스 민족이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13세기 중반에 프랑스 법학자들이 유럽의 보편권력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황제의 권위를 부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br><br>언어, 문화, 영토에 따라 국가가 나누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1324년에, 이탈리아 출신인 마르실리우스가 쓴 &lt;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gt;라는 책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각 민족들의 분화과정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br><br>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은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통해 더 강해졌다. 또 이탈리아인들과 14세기에 벌인 문화논쟁도 그에 기여했다. 페트라르카가 로마를 기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주장한 데 대해 프랑스인들은 문화의 중심지가 이미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졌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15세기에는 프랑스내의 오키탄어나 브레타뉴어, 바스크어, 플랑드르어 등 다른 언어에 대한 불어의 지위 상승과 결합하며 민족문화라는 생각도 등장했다.<br><br>15세기 후반의 Robert Gaguin이라는 사람의 글을 보면 당시의 민족적 정체성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France)를 조국(Patria)이라고 부르며 조국에 대한 사랑, 프랑스의 영광과 명예가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 프랑스의 영토, 역사, 민족성과 관련해 열렬한 민족감정을 토로하고 있다.<br><br>이런 것들을 보면 1500년이면 프랑스지역에도 잉글랜드보다는 못해도 민족적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것은 아직은 좁은 엘리트 집단에 한한 것으로 생각된다.<br><br>여기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만을 다룬 것은 두 민족의 규모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 때문이다. 그러나 해스팅스(A.Hastings)같은 학자는 서유럽 대부분의 주된 민족들이 15세기까지는 성립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들과 근대의 민족들과의 관계는 너무 밀접해서 그 상관관계는 결코 우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의 출현에 더 중요한 시기는 18세기까지의 근대 초 시기이다. </div><div>&nbsp;</div><div>&nbsp;</div><div>&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강철구 / 이화여대교수</div><br/><br/>tag : <a href="/tag/민족" rel="tag">민족</a>,&nbsp;<a href="/tag/민족주의" rel="tag">민족주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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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category>민족</category>
		<category>민족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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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3 Feb 2009 06:50:15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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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은 무엇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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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strong>[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66&gt;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④&nbsp;</strong></div><div><strong></strong>&nbsp;</div><div><strong>근대주의적 해석의 등장<br><br></strong>근대주의적 해석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기본적 원리들을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였던 기존 해석에 대한 불만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또한 2차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들이 해방되며 '민족 내지 국가형성'이 사회과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싹텄다. 이 과정에서 민족을 인위적 구성체로 보는 생각이 자라난 것이다. 새로운 민족주의 이론이 사회과학자들, 특히 사회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유이다.<br><br>이들은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즉 최근 2세기의 산물로 보며 그 원인으로는 산업화, 자본주의, 근대국가, 도시화, 세속화와 같은 여러 근대적인 현상들을 든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요인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같은 요인을 받아들여도 사람에 따라 그 비중은 각각 다르다.<br><br>그래서 이들을 뭉뚱그려 근대주의자로 부르기는 하나 견해 차이가 크므로 일반적인 규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근대주의적 해석의 내용을 가장 널리 알려진 세 사람의 주장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자.<br><br><b>어네스트 겔너와 산업화</b><br><br>겔너(Ernest Gellner)는 다른 학자들이 민족주의 이론에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60년대부터 민족주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가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가계 출신으로 나치 독일의 박해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사가 그의 학문적 관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br></div><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tbody><tr><td width="438"><img class="resize3" height="400" alt="" hspace="0"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08/12/26/40081226142155.JPG" width="438"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438">▲ 그림 1. 겔너(1925-1995): 그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영국 런던경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지냈다. 말년에는 프라하에 민족주의연구센터를 만들고 그 소장직을 맡았다. 그는 우파적인 성향이 강하고 강한 유럽중심주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td></tr></tbody></table><br>그 전의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로 보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스 콘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사회학적, 구조적 접근을 처음 시도했다. 그가 민족주의 연구의 새로운 길을 연 개척자로서 많은 찬사를 받고 있는 이유이다.<br><br>그는 민족주의를, 전통사회와 근대사회를 명확히 구분하는, 에밀 뒤르껭이나 막스 베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 사회학의 전통 속에서 보았다. 그래서 농업사회와 산업사회를 엄격히 구분하고 민족주의는 산업화의 결과로서 농업사회에서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농업사회는 신분으로 나눠진 수직적 사회이므로 동질적인 문화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br><br>반면 산업사회는 산업화에 의해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갖는 수평적인 사회이므로 동질적인 문화의 형성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 위에서 민족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br><br>그것은 고도의 분업이 이루어지는 산업사회의 요구 때문이다. 고도로 분화된 산업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전문화된 노동이 필요하고 그 전제는 숫자계산이나 문자의 해득이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다루기 위해 최소한의 지침을 읽을 수준은 되어야 하고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br><br>그러므로 산업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런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통의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그 대규모성 때문에 국가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국가가 주도하는 대중화된 공공교육을 통해 신분이나 지역을 넘어선 동질적인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고도(高度)문화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민족주의의 기반이 된다.<br><br>민족주의란 이 고도문화에 정치적 보호막을 만들려는 노력이다. 산업화와 함께 이미 낡아 버린 왕조국가 대신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만들려고 할 때 이렇게 고도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적 이념이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부구조를 구성하는 것이 민족주의적 교육과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체계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보호하는 유일한 기관인 국가이다.<br><br>이렇게 보편적인 문자해득이나 중앙집권적 국가, 대중교육 등 산업사회의 여러 요소들에 의해 민족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민족이 민족주의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기존의 상식을 넘어서는 매우 도발적인 것으로 그 후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br><br><b>베니딕트 앤더슨과 상상의 공동체</b><br><br>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인류학자이나 1983년에 &lt;상상된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고찰&gt;이라는 책을 통해 민족주의 논의에 뛰어 들었다. 그는 시간이나 죽음, 영속성 같은 인류학에서 많이 다루는 개념들을 민족주의 연구에 도입하여 그 나름으로는 민족주의 연구를 풍부하게 했다.<br><br><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tbody><tr><td width="300"><img class="resize3" height="457" alt="" hspace="0"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08/12/26/40081226142155(0).JPG" width="300"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300">▲ 그림2. 앤더슨(1936-)의 &lt;상상의 공동체&gt; 표지: 영국계로 중국 곤명시 출생인 맑시스트 인류학자 앤더슨은 미국 코넬 대학 교수이다. 유명한 맑시스트 역사학자인 페리 앤더슨의 형이다.</td></tr></tbody></table><div><br>그는 근대에 들어와 전통적인 종교공동체나 왕조적 질서가 사라진 빈 공간을 메운 것이 민족이라는 대체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이건 공동체적 결속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br><br>민족의 등장에는 시간관의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초월적인 시간관 대신, 근대에 들어와서는 사람들이 현세적인 시간관을 갖게 됨으로써 같은 시간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시성을 느낀다는 것이다.<br><br>또 하나의 요인은 16세기 이래 발전한 인쇄자본주의이다. 인쇄자본주의가 만든 문화적 동질성이 소설이나 신문 같은 인쇄 매체들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어 한번도 본 일도 없고 또 평생 만날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br><br>이렇게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생기며, 본국인들로부터 차별을 받던 식민지 태생의 백인들에 의해 18세기 후반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가 처음 생겨났다. 민족 형성은 그 결과물이다.<br><br>유럽에서는 1820년경부터 민족주의가 나타나는데 그것도 각 나라의 개별 문어(文語)와 그 확산을 뒷받침하는 인쇄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한 것이 문자해득의 증가, 상공업의 발전, 통신이나 국가기구의 성장 등 다른 요인과 함께 각 왕조의 영토 내에서 언어적 통일을 가져오도록 하는 강력한 자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br><br>유럽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이다. 그러나 민족의 형성은 대중과의 연관 하에서 이루어졌다. 초기의 민족주의가 인민주권, 농노제의 폐지, 대중교육, 선거권의 확대를 요구함으로써 대중을 끌어 들일 수 있었고 그리하여 대중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br><br>그러나 초기의 대중적 민족주의는 곧 지배 엘리트나 정부에 의한 관제 민족주의에 의해 대치되었다. 그것은 유럽국가들이 다종족국가들로서 왕조들의 정통성이 민족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br><br>그래서 19세기 후반에 많은 왕조들은 지배종족의 언어를 국어로 정착시키고 다른 종족들을 동화시킴으로써 왕조의 정통성을 민족과 결합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관제 민족주의이다. 러시아의 로마노프왕가가 벌인 러시아화정책이 대표적이다.<br><br>관제 민족주의는 유럽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의 광범한 식민지역에서도 행해졌고 식민화를 면한 일본이나 태국 같은 나라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모방되었다. 또 2차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많은 신생국가에서도 받아 들여졌는데 이것은 유럽 제국주의의 의해 창조된 비정상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역시 언어는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고 특정한 민족적 결속체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br><br>이렇게 앤더슨은 민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언어와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19세기 후반 이후의 민족주의를 관제 민족주의라는 틀로 설명한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다.<br><br><b>에릭 홉스봄과 발명된 전통</b><br><br>홉스봄(Eric Hobsbawm)은 저명한 맑스주의 역사학자로 그 전에도 민족주의에 대한 여러 글들을 썼으나 자신의 민족주의 이론을 체계화 한 것이 1990년에 낸 &lt;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gt;이다. 이 책은 서양에서도 민족주의 이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읽히는데 그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이론을 구체적인 역사현실과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자들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br><br>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이론에 크게 독창적인 점은 없다. 대체로 겔너의 주장을 뼈대로 하고 여기에 동유럽 민족주의의 발전과 관련한 미로슬라브 그로흐의 이론을 결합하고 있다. 그로흐의 이론은 관제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된다.<br><br>그는 민족주의를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지방분권을 벗어난 근대적인 영토국가와 관련해서 설명한다. 또 근대적인 특정단계의 기술이나 경제발전과 관련해서 본다. 이렇게 산업화, 자본주의와 관련해서 보면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br><br>또 위의 사람들과 비슷하게 민족은 민족주의에 의해 형성되며 그 과정에서 가공이나 발명, 사회공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발명된 전통'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이유이다. 스코틀랜드인의 체크무늬 치마 같이 많은 민족적 전통들이 실제로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인위적으로 발명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br><br>또 민족의식은 대중이 민족적 관념의 주창자들에게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형태를 취한다고 본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공식이념만을 통해서는 알 수 없고 하층계급이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br><br>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1830-70년 시기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대체로 프랑스혁명기의 혁명가들을 본뜬 것으로 대중주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br><br>따라서 혁명기 프랑스인들을 프랑스인이 되게 한 것이 프랑스어가 아니라 자유와 법,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의지였던 것과 같이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종족, 언어, 종교, 영토, 역사적 경험 같은 것에 덜 의존했다고 믿는다.<br><br>그러나 그 이후 1914년까지는 민족주의가 급속히 뿌리 내렸고 종족과 언어가 민족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으며 종족주의가 인종주의 때문에 강해진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이후의 시기가 그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기는 어려웠다.<br><br>그래도 1950년까지의 민족주의는 통일지향적이고 해방적이며 역사변화의 중심 역할을 한 데 비해 20세기 후반의 시기는 분열적이고 부정적이며 역사변화의 주된 힘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br><br>이 시기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민족이라기보다 대개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종교적-문화적 동일지역의 해방을 위해 싸운 초민족주의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채용했다는 점에서만 민족주의적이며 국가나 민족과는 전혀 무관한 지식인들의 건축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br><br>이렇게 그는 민족주의 원리와 운동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전 세계로 확산된 20세기 후반의 민족주의 운동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또 1990년 이후 사회주의 붕괴 후의 민족주의 재발도 1차대전 이후의 미결된 민족문제의 재정리라는 입장에서 본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20세기 말에 지구화에 직면하여 급속하게 힘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br><br><b>근대주의적 해석의 문제점들</b><br><br>먼저, 겔너는 민족주의를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되어야 한다고 믿는 원리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의 영토적 경계선과 민족적 경계선을 일치시키려는 운동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홉스봄도 겔너의 정의를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br><br>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들이 민족주의를 어느 국경선 내부만의 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 종족이 다른 종족들을 억압하는 관제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민족주의를 억압이데올로기라고만 생각한다.<br><br>반면 왜 많은 민족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는가 하는 동기의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다. 사실 민족주의 운동은 역사적으로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의 경쟁이나 억압에서 촉발되는 예가 많다. 이런 경쟁이나 억압은 근대에 와서 심해졌고 내부적인 갈등들도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 이 점을 도외시하면 민족주의에 대해 반쪽자리 이해 밖에 할 수 없다.<br><br>둘째로, 이들은 기본적으로 비역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종족주의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 산업화나 자본주의 발전 이전에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도 홉스봄은 역사학자이므로 그 이전에 있었다고 믿는 원(原)민족에 대해 일부 언급하기는 하나 실제의 이론 구축에서는 그것도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br><br>셋째로, 이들의 주장은 많은 경우 역사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 겔너는 산업화가 민족주의를 만들었고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의 주장은 그만두고라도 산업화가 왜 민족주의를 만드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다.<br><br>더 중요한 것은 산업화와 민족주의의 선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족주의는 산업화보다 먼저 나타났을 뿐 아니라 많은 지역의 민족주의는 산업화와 전혀 관계가 없다.<br><br>앤더슨도 민족주의가 18세기 말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개인적인 추리에 불과하다. 또 민족이 종교나 왕조가 쇠퇴한 빈자리를 대치했다고 하는데 이는 인류학적인 상상이다. 종교나 왕조적 전통과 결합한 민족주의 운동도 많다.<br><br>또 인쇄 자본주의가 상상된 공동체를 만든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전근대의 많은 공동체들이 갖고 있는 문화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문자가 아니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은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유럽의 발전한 지역도 19세기 말에 가서야 일반인들이 문자해득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18세기 말까지 소급하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br><br>넷째로, 이들은 프랑스혁명을 본뜬 대중주의적·자발적 민족주의와, 종족이나 언어 등 객관적 요소에 의존한 종족적 민족주의 사이를 구분하고 전자를 높이,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서유럽형과 동유럽형 민족주의의 구분이다. 동유럽형에는 비유럽지역 민족주의도 포함된다.<br><br>그러나 둘 사이의 구분은 그렇게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프랑스혁명기의 프랑스 민족주의에 자발주의적 요소가 나타나기는 하나 그것은 명목일 뿐이지 그 본질을 이루는 것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족적 민족주의이다. 이것은 민족주의 이론에서 끈질기게 나타나는 서유럽중심주의로서 이런 미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민족주의에 바로 접근할 수 없다.<br><br>다섯째로, 홉스봄에게서 분명히 나타나지만 민족주의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다. 지구화가 진전 중이므로 얼마 안가 민족주의는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진한 생각으로 역사의 근본적인 동인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br><br>지구화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세계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억압성이 강화된 국제사회를 가져온다. 이것은 우리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확대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억압이 강화될수록 반발도 커질 수밖에 없다. 선진국에 의해 강요되는 지구화는 쉽지 않다.<br><br>또 지금과 같은 국제적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나아가 온난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하면 민족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훨씬 강화될 수밖에 없다. 모든 민족들이 살아남으려고 애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홉스봄도 문제의식이 있는 척하나 이런 것을 보면 영국이라는 혜택 받은 선진국의 책상에서 세계의 불평등에는 눈감고 공론이나 하는 서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div><div>&nbsp;</div><div>그러면 이제 민족주의 문제와 관련한 개별 논점들을 살펴보자. </div><div>&nbsp;</div><div>&nbsp;</div><div>&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강철구 / 이화여대교수</div><div><br>&nbsp;</div><br/><br/>tag : <a href="/tag/민족주의" rel="tag">민족주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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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category>민족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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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Dec 2008 06:15:17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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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민족주의를 보는 관점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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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strong>[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65&gt;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③</strong></div><div><strong></strong>&nbsp;</div><div><strong></strong>&nbsp;</div><div><strong>민족주의 이론의 논쟁점<br><br></strong>오늘날 민족주의 이론에서 가장 본질적인 논쟁점은 민족과 민족주의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최근에 등장한 근대주의적 해석이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br><br>이렇게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적인 현상으로 보면 종족성과의 관련은 별 의미가 없어지고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도 크게 이야기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근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민족은 인위적인 산물, 사회공학의 산물이라고 해도 별 문제가 없고 이제 지구화에 따라 용도 폐기되고 있는 중이므로 금방 사라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근대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이 자기네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매우 훌륭한 도구가 되는 셈이다.<br><br>그러나 만약 전근대에도 민족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또 전근대적인 형태의 정체성이나 민족의식이 근대에 와서 민족주의나 근대적 민족의식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이런 주장을 계속하기는 어렵다.<br><br>따라서 전근대적인 민족 정체성이나 전근대적 민족의 존재 여부와 함께, 전근대적인 요소들이 존재했다면 그것이 근대의 민족이나 민족주의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가 중요한 쟁점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영속주의, 원초주의, 근대주의가 그것이다. 이것들을 간단히 살펴보자.<br><br><b>영속주의적 해석</b><br><br>우리는 보통 민족이 기억할 수 없는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게는 수천 년, 또 짧아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최근까지도 민족에 대해 소박하게 갖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가 단군을 민족의 조상으로 생각하며 민족이 그때부터 존재해 왔고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관점이 영속주의(perennialism)이다.<br><br></div><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WIDTH: 381px; BORDER-BOTTOM: #ccc 1px solid; HEIGHT: 656px"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tbody><tr><td width="513"><img class="resize3" style="WIDTH: 356px; HEIGHT: 582px" height="857" alt="" hspace="0"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08/11/28/40081128122039.JPG" width="513"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513">▲ 우리는 우리 민족을 단군의 자손으로, 또 그 역사가 5천년이나 되었다고 믿는다. 이렇게 민족의 오랜 역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영속주의적, 또는 원초주의적 태도이다.</td></tr></tbody></table><div><br>영속주의는 오늘날에는 서양에서 '근대주의적' 해석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민족주의 연구에서 주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도 민족의 긴 역사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각 중요 민족의 기원을 중세시대에 기원을 둔 각 지역의 종족들과 연결시켜 생각했다.<br><br>영속주의는 지속적 영속주의와 재발적 영속주의의 둘로 나뉜다. 앞의 것은 민족이 그 기원을 고대, 또는 중세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되 지속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단절이나 불연속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지속성이 보다 강조된다.<br><br>그러나 재발적 영속주의는 반드시 지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족이 역사상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항상 발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다른 시기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지는 몰라도 그 공동체는 언제나 같은 형태의 집단적인 문화적 정체성의 발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영속주의는 대체로 역사가들이 좋아하는 해석이다. 역사적 현상의 연속성을 믿기 때문이다.<br><br><b>원초주의적 해석</b><br><br>원초주의(primordialism)는 민족을 원초적인 사회적 결속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은 가족이나 친족 같은 자연적인 조직으로서 그것에 대한 애착은 우리의 체질 속에 항상 존재하며 자연의 질서와 같은 원초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친족을 친족이 아닌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유전인자를 남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유전적이며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이다.<br><br>원초주의자들에게는 개인이 민족에 대해 갖는 정체성의 감각은 이 공동체 안에 속해 있는 그의 위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연히 종족공동체는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덕적 의무를 갖는 윤리적인 공동체이다.<br><br>그러므로 종족의식이야 말로 개인적 정체성의 중심적인 부분이며, 유일한 진짜 민족주의는 공동의 조상과 생김새, 언어, 종교를 가진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애착인 종족적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다.<br><br>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류학자들이나 사회동물학자들이다. 개미나 벌이 하나의 군집을 형성하고 사회적으로 살듯이 인간도 그런 원초적인 사회적 본능을 갖고 있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민족주의라는 것이다.<br><br>영속주의와 원초주의는 민족의 오랜 기원을 주장하는 점에서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래서 자주 혼동되고 또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영속주의와 원초주의는 분명히 구별된다.<br><br>영속주의자가 원초주의적 개념을 가질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영속주의자들은 민족을 자연적, 유기적, 원초적이라고 보는 비역사적인 설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원초주의자는 영속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br><br><b>근대주의적 해석</b><br><br>근대주의적 해석은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보는 견해이다. 대체로 그것을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로, 즉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 근대국가의 형성이나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200여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를 갖는 셈이다.<br><br>이런 견해는 1960년대에 영국의 사회학자인 어네스트 겔너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짧은 기간에 많은 추종자들을 얻으며 지금은 민족주의 연구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겔너가 당시까지 이데올로기로만 취급되던 민족주의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민족주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br><br>그래서 그가 1983년에 쓴 &lt;민족과 민족주의&gt;라는 책은 이 해석에서 고전 역할을 하고 있으며 80년대 이후에 많은 민족주의 연구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lt;상상의 공동체(1986)&gt;라는 책을 통해 그 말을 유행시킨 베네딕트 앤더슨이나,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는 &lt;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0)&gt;를 쓴 에릭 홉스봄도 모두 근대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br><br>근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사회와 관련시켜 논의하고 전근대적 요소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전근대에도 근대의 민족과 비슷한 원(原)민족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은 근대의 민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믿는다.<br>또 보통 생각하듯이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민족은 근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며 그 기능을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br><br>또 많은 경우 민족은 19세기의 민주화 시대에 지배계급이 대중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민족공동체를 내세우며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으로 만든 것이므로 억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윤리적으로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br><br>그들이 민족적 정체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족이 인위적 구성물이므로 그 정체성도 강인한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며 쉽게 생기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적 정체성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러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서 클럽, 학급, 갱단 등의 정체성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br><br>이제 지구화 시대에 들어와서 초국적 기업이나 국제적 기구가 점차 강화되고 있고 유럽연합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경계도 약화되고 있으므로 민족은 당분간은 남아있다 해도 그 전성기는 이미 지났으며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고 전망한다.<br><br>이렇게 근대주의적 해석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으며 대체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 근대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div><div>&nbsp;</div><div>&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강철구 / 이화여대교수<!-- 기사 본문 출력 end --></div><br/><br/>tag : <a href="/tag/민족주의" rel="tag">민족주의</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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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category>민족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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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8 Nov 2008 07:58:40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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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민족, 민족적 정체성, 민족주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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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rong><span style="FONT-SIZE: 100%">[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64&gt;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②<br><br><br></span></strong><strong><font size="3"><span style="FONT-SIZE: 100%">개념의 혼란<br><br></span></strong><span style="FONT-SIZE: 100%">우리가 민족, 민족주의와 같은 단어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는 하나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구분해서 쓰지는 않는다. 일반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같은 현상을 설명하며 여러 단어들을 뒤섞어 혼용한다. 또 같은 단어를 매우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br><br>민족을 종족이나 인종과, 민족적 정체성을 민족성이나 민족의식과, 또 민족주의를 애국주의 등과 섞어 사용하는 것이 앞의 예이다. 이것은 민족이나 민족주의와 관련한 단어들이 매우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여러 개념을 제멋대로 뒤섞어 쓰면 어떤 사실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진다. 따라서 가능한 대로 단어를 잘 가려 쓸 필요가 있다.<br><br>또 최근에 와서는 같은 단어를 아주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민족을 전통적인 혈연공동체 대신 '상상의 공동체' 하는 식으로 정의하는 경우이다. 이는 특히 근대주의적 해석의 결과이다. 그래서 이런 새 개념들은 과거의 전통적인 개념들과 큰 대립상을 보인다. 물론 이것은 민족이나 민족주의와 관련되는 대상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정치, 사회적 현상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br><br>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정치적인 문제가 개재해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첨예한 정치, 사회적 문제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의를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고 다른 주장들은 배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정의를 취하건 정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br><br></span><b><br><span style="FONT-SIZE: 100%">종족, 민족, 인종</span></b><br><br></font><span style="FONT-SIZE: 100%">이 세 단어들은 민족을 말할 때 뒤섞어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 영국인들을 자기네 민족을 english race라고 race(인종)라는 단어를 넣어 부르기도 했다. 또 19세기에 미국에서는 이민 온 각각의 종족집단을 인종으로 불렀다. german race, italian race 하는 식이다. 지금도 인류(human race)라는 단어에는 race라는 단어가 들어간다.<br><br>그러나 오늘날 인종은 일반적으로 피부색이나 신체의 모습, 용모의 차이에 따라 인간을 여러 종류로 분류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으로 나누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민족과 관련되는 논의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br><br>종족과 민족은 많이 혼용된다. 비슷한 인간의 공동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구분선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인 구분은 가능하다. 종족과 민족은 혈연공동체이고 역사적 기억과 문화, 영토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br><br>그러나 종족은 보다 큰 사회의 하위문화를 구성하고 또 큰 사회 내부의 일정 지역에서 거주한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서 다른 종족과 뒤섞여 사는 경우도 있고 영토와 관련 없이 떠도는 종족들도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거나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br><br>유럽의 많은 다종족사회에서 보듯 만약 이들의 문화적 통일성과 정치적 대표권이 인정받는 경우에는 큰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아 그런 요구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역의 경우에는 정치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br><br>민족은 종족보다 더 포괄적이고 공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역사적 기억도 글로 쓰인 표준화된 민족사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다른 민족의 문화와 구분되며 민족 구성원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 공공문화를 가지고 있고, 구획된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 단일한 경제권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이 어느 민족에나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br><br>현대 세계에서도 종족은 민족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다종족으로 구성된 민족이 세계 모든 민족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 같이 단일 종족으로 구성된 민족은 드문 현상이다.<br><br>그래서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스위스와 벨기에 같은 경우 그 국민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종족의 개별적인 정체성과, 모든 종족을 함께 포괄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종족적 정체성이 민족적 정체성보다 더 큰 경우도 있으며 이럴 때에는 분란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br><br>부족이라는 말은 특히 아프리카의 경우에 많이 볼 수 있는 소규모 종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나 식민주의 시대의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br><br>민족은 국가와는 구분된다. 민족은 그 구성원들의 살아있는 공동체로서 문화적인 성격이 강한데 비해 국가는 자신의 자율적인 정부를 가지는 법적 실체로서 일정 영토 안에서 합법적으로 강제력을 독점한다.<br><br>민족이 국가를 가질 때 그것을 민족-국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국가를 가지지 못한 민족들도 있다. 반면 2차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와 같이 식민지 해방으로 인해 여러 종족이 국가를 형성하고 나서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을 때는 국가-민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br><br><b>민족적 정체성</b><br><br>민족적 정체성이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어느 민족에 속한다고 의식하거나 믿는 태도를 말한다. 과거에는 이 의미로 '민족적 성격'이나 '민족의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요사이에는 '민족 정체성'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아마 현대의 개인주의 경향으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br><br>민족적 정체성을 만드는 요소들은 여러 가지이다. 혈연, 언어, 영토, 종교, 역사, 관습 등의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은 금방 만들어져서 금방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상당히 느린 장기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민족적 정체성이 고정되고 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역사 현상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느 정도는 변화하고 해체되고 다시 만들어진다.<br><br>요사이에는 개인의 다중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사람들이 가족, 성, 지역, 직업집단, 정당, 종파, 종족, 민족, 인류의 많은 정체성을 갖고 있고 상황 변화에 따라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쉽게 넘어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br><br>특히 근대주의적 해석에서는 민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므로 민족적 정체성도 미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족적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기껏해야 부차적인 요소이지 중심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제 지구화 시대에 들어왔으므로 그것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br><br>그러나 이런 다중 정체성의 강조가 서양의 잘 살고 힘이 강하며 민주주의가 이미 자리 잡아서 국내외적인 차별을 적게 받는 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에 의해 억압을 받고 착취를 받는 대부분의 나라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외세에 대항하는 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민족을 하나로 묶는 보다 큰 정체성이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도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br><br><b>민족주의</b><br><br>민족주의는 요사이 애국주의와 섞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9.11 사건 이후 미국인들이 애국주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때 그들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분리시켜 애국주의는 자유주의적인 것이므로 좋은 것이고 민족주의는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것이므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국인 가운데에도 미국인들의 그런 용법을 받아들이는 사 람들이 있다. </span><table style="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tbody><tr><td width="492"><span style="FONT-SIZE: 100%"><img class="resize3" height="550" alt="" hspace="0" src="http://image.pressian.com/images/2008/11/18/40081118125049.JPG" width="492" border="1" name="img_resize"></span></td></tr><tr><td style="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width="492">▲ 9·11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애국주의'가 부쩍 강화되었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 특별한 것이 아니다.</td></tr></tbody></table><br>그런데 18세기 이전에 애국주의라는 단어가 사용되던 용례를 보면 민족주의와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사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점령은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행태로서 자유나 인권, 민주주의의 옹호로 포장을 하고는 있으나 공격적 민족주의의 매우 나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미국인들의 애국주의 사랑은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시쳇말의 의미를 매우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br><br>우리는 보통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것을 민족의 복리와 안녕을 추구하는 이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이보다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대체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br><br>하나는 민족적 감정이나 의식을 가리킨다. 이는 자기가 어느 민족에게 특별히 느끼는 공감이나 어느 민족 집단에 속한다는 귀속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체성의 문제이다. 이런 감정이나 의식 없이는 민족주의의 다른 행위들이 가능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민족 정체성의 의식은 민족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br><br>두 번째는 민족에 대한 언어화와 상징화로서 이는 민족을 언어로, 또는 이미지로 나타내는 작업이다. 어느 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겪어 왔는지, 어떤 운명을 갖고 있고 그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예술적 작업들을 말한다. 시인이나 소설가, 역사가, 미술가들이 이렇게 만들어내는 공통의 상상력이 민족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br><br>세 번째는 민족을 위한 원리나 이데올로기이다. 이것이 민족주의라는 개념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형태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민족을 구성하거나 구성하려 하는 일정 지역 주민들이 그 자율성, 통합, 정체성을 확보하고 유지하려는 이념적 운동을 말한다. 그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구체적 개념이나 전략, 전술까지도 포함한다.<br><br>네 번째는 민족주의 운동이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이것은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넓은 범위의 운동을 포괄한다. 민족문화를 강조하는 문화운동, 이민족의 억압에서 벗어나거나 자민족의 통합을 위한 정치적·사회적 운동이나 무장투쟁, 또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한 국산품 애용운동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민족주의 운동이야말로 민족주의를 완성시키는 실천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 <br><br><br><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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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9 Nov 2008 06:22:1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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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lt;63&gt;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①<br><br><strong>민족주의로부터의 탈주<br></strong>&nbsp;&nbsp;<br>&nbsp;&nbsp;민족주의는 10여년전만해도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대의(大義)였다. 민족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르기는 해도 누구나 그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만 해도 민족이나 민족주의라는 말에는 약간 성스러운 분위기조차 있었으므로 대놓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br>&nbsp;&nbsp;<br>&nbsp;&nbsp;그런데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민족주의를 비판 내지 공격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지식인들 가운데에는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민족주의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아가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br>&nbsp;&nbsp;<br>&nbsp;&nbsp;또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일반 청년남녀들도 민족주의가 불편하다고 말한다. 민족주의가 전쟁과 종족학살, 외국인 차별을 가져오는 비윤리적인 이념인 만치 어쩐지 받아들이기에 거북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오늘날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로, 낡은 유물 취급이나 받으며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br>&nbsp;&nbsp;<br>&nbsp;&nbsp;그래서 너도 나도 민족주의 비판 대열에 서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조급증을 보인다. 약간이라도 민족주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시비의 대상이 된다. 2002년 월드컵 때 젊은이들이 붉은 악마 옷을 입고 일사불란한 응원을 벌이자 일부 성질 급한 사람들이 이를 파시즘으로 몰아 붙였을 정도이다. 당시의 응원이 유별나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렇지 파시즘이라니? 독재자도 없고 선전, 선동도 없는 파시즘이라는 것이 있단 말은 금시초문이다.<br>&nbsp;&nbsp; <table class="article_copy"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tbody><tr><td style="PADDING-RIGHT: 3px; PADDING-LEFT: 8px; PADDING-BOTTOM: 2px; PADDING-TOP: 3px" width="500"><img height="322" hspace="0" src="http://www.pressian.com/images/2008/10/31/40081031150118.jpg" width="500"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PADDING-RIGHT: 8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2px; PADDING-TOP: 3px" width="500"><rimgcaption>▲ &lt;그림 1&gt; 붉은 악마의 응원이 파시즘이라니? 이들은 단지 축구를 잘 하는 한국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부르며 즐겁게 논 죄 밖에 없다.</rimgcaption></td></tr></tbody></table><br>&nbsp;&nbsp;<a onclick="javascript:window.open('http://www.lawmarket.co.kr/temp/list.asp?site=pressian&amp;person_name=황우석','personpop','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yes,menubar=no,scrollbars=yes,resizable=yes,width=1,height=1');"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1031150118#none"><span style="COLOR: #660000">황우석</span></a> 신드롬도 비판의 대상이다. '경제지상주의, 국가주의 등 민족주의의 모든 부정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나타난 그것은 민족주의의 맹목성과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불치병 환자들의 가족이 황우석씨의 주된 지지자라고 들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민족주의와 그렇게 큰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br>&nbsp;&nbsp;<br>&nbsp;&nbsp;또 작년에는 지금까지 그 이름에 민족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온 듯한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작가 단체가 그 이름에서 민족을 쏙 빼버렸다. '민족'이 이제 철지난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단체도 유행을 타는 모양이다. 가위 민족이나 민족주의로부터의 탈주라고 할만한 일이다.<br>&nbsp;&nbsp;<br>&nbsp;&nbsp;일부 비판적인 역사학자들은 국사 서술에까지 칼을 들이대고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 국사 책들이 너무 민족주의적으로 서술되었으므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국사를 해체하라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언론들도 이런 움직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파신문이고 좌파신문이고 마찬가지이다. 좌파신문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렇다 해도 우파신문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좌파 지식인의 글을 실어주는 파격을 보이기까지 한다. 민족주의만 비판하면 된다는 식이다.<br>&nbsp;&nbsp;<br>&nbsp;&nbsp;2007년 12월에 한겨레신문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지상논쟁을 마련했다. 여러 명의 학자들이 나와서 자기 나름의 소신을 피력했다. 그런데 여섯 명의 참가자 가운데 민족주의를 옹호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다른 한 명은 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나머지 네 명은 대체로 민족주의를 용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 논쟁의 주제가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인 모양인데 참가자들의 구성을 그렇게 짠 것을 보면 신문사측에서는 민족주의가 유효하지 않다는 결론을 미리 내려 버린 것 같다.<br>&nbsp;&nbsp;<br>&nbsp;&nbsp;<b>민족주의가 비판받는 이유들</b><br>&nbsp;&nbsp;<br>&nbsp;&nbsp;그러면 민족주의가 이렇게 갑자기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최근 들어서 부쩍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같은 지구화의 영향을 들 수 있다.<br>&nbsp;&nbsp;<br>&nbsp;&nbsp;20세기 후반에 전 세계적인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구가 과거보다 상당히 좁아졌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인터넷이나 장거리 전화, 또 위성 TV같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지구가 점점 하나의 조밀한 망으로 짜여지고 있다. 항공산업이나 해운산업의 발전으로 국제적인 인적, 물적 교류도 크게 늘었다. 그러니 얼핏 생각하면 지구가 하나가 되고 있다는 미국 지구화론자들의 주장이 먹혀 들어갈 소지가 크다.<br>&nbsp;&nbsp;<br>&nbsp;&nbsp;이런 생각의 변화에서 한국은 특히 돋보이는 나라이다. 외환위기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마치 점령군처럼 진주하며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금융을 자유화하여 가능한 한 외국자본을 많이 들여오고 시장개방을 확대하여 외국 상품을 많이 사서 쓰고 젊은 사람들이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글로벌 인재가 되는 것이 절대명제가 되었다.<br>&nbsp;&nbsp;10년 동안 쓸개 빠진 지식인들이나 관료들, 언론이 계속 그렇게 떠들어 대고 국민들을 오도했으니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마치 지나간 시대의 쓰레기쯤으로 착각하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다른 하나는 공산권 붕괴 이후 구 소련지역이나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벌어진 민족분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보스니아에서의 종족적 대량학살은 대규모의 유혈사태를 가져왔다.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체첸인들의 독립전쟁도 그 원인이야 어쨌든 종족이나 민족분쟁을 유혈과 연결시키는 나쁜 선입견을 심어주는데 기여했다.<br>&nbsp;&nbsp; <table class="article_copy"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tbody><tr><td style="PADDING-RIGHT: 3px; PADDING-LEFT: 8px; PADDING-BOTTOM: 2px; PADDING-TOP: 3px" width="420"><img height="289" hspace="0" src="http://www.pressian.com/images/2008/10/31/40081031150118[1].jpg" width="420"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PADDING-RIGHT: 8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2px; PADDING-TOP: 3px" width="420"><rimgcaption>▲ &lt;그림 2&gt; 종족분쟁에서 비롯한 보스니아의 학살은 현대사의 끔찍한 기억의 하나로 민족주의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rimgcaption></td></tr></tbody></table><br>&nbsp;&nbsp;국내 정치도 한몫하고 있다. <a onclick="javascript:window.open('http://www.lawmarket.co.kr/temp/list.asp?site=pressian&amp;person_name=김대중','personpop','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yes,menubar=no,scrollbars=yes,resizable=yes,width=1,height=1');"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1031150118#none"><span style="COLOR: #660000">김대중</span></a>, <a onclick="javascript:window.open('http://www.lawmarket.co.kr/temp/list.asp?site=pressian&amp;person_name=노무현','personpop','toolbar=no,location=no,directories=no,status=yes,menubar=no,scrollbars=yes,resizable=yes,width=1,height=1');" href="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1031150118#none"><span style="COLOR: #660000">노무현</span></a> 정권 하에서 우익세력은 계속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해 왔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훨씬 심했다. 북한에 대해 경제 원조를 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미국을 멀리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사용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을 끄집어내며 끊임없이 민족주의를 헐뜯고 조롱했다. 민족주의를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폐쇄적인 이념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매우 정략적인 태도이다.<br>&nbsp;&nbsp;<br>&nbsp;&nbsp;그러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학문세계에서 비롯했다. 1980년대 이후 서양에서 '근대주의적 해석'이라는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며 기존의 민족주의 이론들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90년대에 번역서들을 통해 한국에도 전파되며 민족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만들어 냈다. 한국에서 민족주의와 관련해 가장 많이 읽히는 에릭 홉스봄의 &lt;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gt;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br>&nbsp;&nbsp;<br>&nbsp;&nbsp;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민족은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또 우리는 보통 우리 민족이 5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믿어 왔는데 이들은 민족이라는 것의 역사가 고작 200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br>&nbsp;&nbsp;<br>&nbsp;&nbsp;또 우리는 상식적으로 민족이 먼저 있고 나서 민족주의가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들은 반대 입장을 취한다.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이 이렇게 지배계급에 의해 대체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니 그 성격도 억압적이고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영토내의 소수 종족들을 억압하고 이웃 나라를 공격하고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게다가 이제는 지구화 시대이다. 국경의 문턱이 낮아지고 모든 나라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시대이다. 수많은 국제기구나 유럽연합 같은 것이 이미 그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민족국가는 멀지 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만약 근대주의적 해석의 이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민족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로부터 탈출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br>&nbsp;&nbsp;<br>&nbsp;&nbsp;<b>근대주의적 해석은 유럽중심적인 해석</b><br>&nbsp;&nbsp;<br>&nbsp;&nbsp;그러면 '근대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이 그대로 받아 들여도 좋은 이론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상당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을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들어와 산업화나 자본주의의 발전,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br>&nbsp;&nbsp;<br>&nbsp;&nbsp;그런데 실상 이미 16세기에 영국에서는 오늘날과 거의 같은 의미로 민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또 17,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민족주의가 patriotism(애국주의)이라는 단어로 이미 나타난다. 산업화나 자본주의, 근대국가는 이런 경향을 촉진시킨 것이지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 점에서 비역사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br>&nbsp;&nbsp; <table class="article_copy"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tbody><tr><td style="PADDING-RIGHT: 3px; PADDING-LEFT: 8px; PADDING-BOTTOM: 2px; PADDING-TOP: 3px" width="500"><img height="346" hspace="0" src="http://www.pressian.com/images/2008/10/31/40081031150118[2].jpg" width="500" border="1" name="img_resize"></td></tr><tr><td style="PADDING-RIGHT: 8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2px; PADDING-TOP: 3px" width="500"><rimgcaption>▲ &lt;그림 3&gt;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7년전쟁(1756-1763)은 두 나라의 민족주의를 고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근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프랑스혁명이나 산업혁명 이전의 일이다. (그림은 1759년 9월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지금 캐나다의 퀘벡을 공격하는 영국군)</rimgcaption></td></tr></tbody></table><br>&nbsp;&nbsp;이들은 민족이 인위적으로 지배계급의 '사회공학'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민족의 본질은 언어, 종족성, 역사, 관습, 종교 같은 객관적 요소들이다. 특히 종족성이 중요하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왜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이나 캐나다에서 아직도 종족적 분리주의가 힘을 얻고 있는지 설명 할 수 없다. 또 구소련 지역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민족주의가 왜 폭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br>&nbsp;&nbsp;<br>&nbsp;&nbsp;이들은 민족주의를 전체적으로 비판하기는 하나 그래도 서유럽의 민족주의와 동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주의를 구분한다. 전자를 시민적 민족주의로 좋은 것으로, 후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로 나쁜 것이라고 규정한다. 전자는 합리적 평화적이고, 후자는 혈통에 의존하여 맹목적,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민족주의도 실제로는 종족성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이런 구분은 정도의 차이일 뿐 큰 의미가 없다.<br>&nbsp;&nbsp;<br>&nbsp;&nbsp;이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나서 독립을 쟁취하려 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주의를 매우 과소평가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을 서양 교육을 받은 인텔리겐챠들이 무식한 대중을 선동한 결과로 본다. 이 지역에서는 산업화나 자본주의, 공공교육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통사회의 문화능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만이 문화능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이들은 민족주의를 주로 내부적인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비윤리적인 이데올로기로 폄하한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강대국들이므로 외부세계를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 속의 민족주의는 대외적인 경쟁과 억압, 저항을 통해 나타나고 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억압에 저항해야 하는 민족이나 나라들에게는 아직도 큰 도덕적 정당성을 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제3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러한 경쟁과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민족주의도 사라지기 어렵다.<br>&nbsp;&nbsp;<br>&nbsp;&nbsp;이들은 지구화 때문에 민족주의의 남은 생명이 얼마 안 된다고 주장하나 지구화가 그렇게 절대적인 과정은 아니다. 지금의 지구화는 세계적인 정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만약 지금의 금융위기가 경제공황으로 발전한다면 지구화는 크게 후퇴할 것이고 나라마다 문을 걸어 잠그게 될 것이다. 또 지금의 지구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선진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런 불평등한 형태의 지구화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br>&nbsp;&nbsp;<br>&nbsp;&nbsp;위의 이야기로 근대주의적 해석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유럽중심주의적인 이론으로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또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이런 이론이 우리 사회에서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 지식인들이 서양이론에 대해 별로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 이론을 보편이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br>&nbsp;&nbsp;<br>&nbsp;&nbsp;그래서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니 '발명된 전통'이니 '사회공학'이니 하는 단어들이 지식인들의 상투어가 되어 있고 민족주의는 모든 악덕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서양 강대국들 사람들의 입장과 한국인의 입장이 같을 수 있는가.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있으나 정말 그런가. 우리가 요사이 또 다시 외환위기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렇게 고민하지 않는 우리 지식인들, 정치인, 관료들이 우리에게 바친 기막힌 선물 덕택이다.<br>&nbsp;&nbsp;<br>&nbsp;&nbsp;<span style="COLOR: #003399">* 필자의 말 : 잠깐 바쁜 일을 처리하려고 쉰 것이 너무 오래 되었군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글은 약 10회를 예정하고 있고 주 1-2회 게재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span><!---- //기사 본문 끝 ----><!---- 관련링크 기자 시작----><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tbody><tr><td width="10">&nbsp;</td><td>&nbsp;</td></tr></tbody></table>&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강철구 / 이화여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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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강철구의 세계사 다시보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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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31 Oct 2008 09:13:57 GMT</pubDate>
		<dc:creator>한국 혁명</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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