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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역사는 변하고 만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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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誠心을 다하는 역사학도가 되자.</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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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Nov 2009 18:41:0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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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역사는 변하고 만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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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대동아전쟁'이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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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유인촌 문광부 장관이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을 써서 물의를 빚었다. 배경 설명은 아래 기사 링크로 대신한다.<br><br><a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5521" target="_blank">유인촌 장관 "대동아전쟁" 발언 논란(오마이뉴스)</a><br><br>유인촌 장관의 발언은 일단은 '말실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어떤 확고한 신념으로 이 용어를 사용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기사에서 비판하는대로 역사인식이 '천박하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 적어도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대동아전쟁' 대신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가 더욱 널리 쓰이고 있고, 후자가 그나마 '탈식민적인' 용어이다. 아마 유인촌 장관은 예전에 어디선가 언뜻 본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쓴 모양인데,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역사 공부를 좀 해야할 터이다. 더불어 이번 사건을 보며 우리 역시 자신의 인식을 되짚어보면 전화위복도 되리라. <a href="http://orumi.egloos.com/4282770" target="_blank">초록불 님 포스팅과 덧글을 </a>보면 위 오마이뉴스 기사의 소스가 신뢰도가 낮다는 지적이 있다. 이 점을 부기해둔다.<br><br>나는 '태평양전쟁'이라고 생각해왔다. 나 역시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유포되는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일관계사를 공부하면서,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그 전쟁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도 무언가 문제점이 있다는 뜻이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br><br>링크한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는 '대동아전쟁'의 정의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일본의 침략전쟁(태평양전쟁)'이라고 간략하게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 어디서 벌어진 전쟁이며 누가 일으키고 누구와 싸운 전쟁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신문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마 대동소이할 것이라 생각한다. 바쁜 기자들이 굳이 해프닝에 가까운 이 기사를 가지고 심층 연구할 여유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br><br><span style="COLOR: #ff0000">'대동아전쟁'은</span>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로써 정의한 용어이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식민지 침탈을 시작하면서 '아시아연대론' 등의 논리들을 운위하면서 침략을 합리화했다. 동양의 황인종들은 서양 백인종의 제국주의 침탈에 저항하여 연대를 이루어 싸워야 하는데, 그 저항의 선두에는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나서야 하고 일본의 선도 아래 모든 황인종이 뭉쳐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대동아공영'의 논리이다.<br><br>일본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전쟁은 바로 1941년 진주만 침공으로부터 비롯되어 1945년 8월까지 전개되었던 일본과 미국간의 전쟁을 뜻한다. 이때 일본은 귀축미영(鬼畜米英)을 부르짖으며 서구 백인종들의 침탈로부터 동양 민족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이러한 주장은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실제 그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지지를 얻기도 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태평양전쟁'이란 용어는</span> 바로 이 '대동아전쟁'이란 용어에서 최대한 '대동아공영'이라는 침략사상을 탈각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제시된 용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본과 미국이 맞붙은 주된 전장이었던 태평양이란 중립적인 지리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다만 침략 사상의 배제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일본이 1941년 미국을 침공함으로써 주로 태평양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는 용어의 범주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br><br>'태평양전쟁'이란 용어도 문제가 있다는 견해는, 그 전쟁의 범주도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1941년 일으킨 대미전쟁은 길게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 대외 침략사의 한 부분이고, 좀 더 엄밀하게 보면 1931년 만주 침략으로부터 비롯된 중국 전역에서의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 침공을 결단케 한 직접적인 원인인 미국의 대일 금수 조치가 일본의 중국침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br><br>일본사회에서는 대체로 '태평양전쟁'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는데, 그 현상이 지닌 함의는 우리의 경우보다 자못 복잡하고 무겁다.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이란 용어를 쓸 경우, 그것은 일본의 전쟁 행위를 1941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 본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일본의 중국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서로 관계가 없는 행위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실제 이렇게 구분하려는 인식은 1945년 '종전' 직후부터 꾸준히 만들어지기 시작해 오늘날까지도 지배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왜 실제와 다른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을까?<br><br>거두절미 하고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일본인들이 대미전쟁으로 인한 피해자의식은 강렬하게 느끼면서도 지난 제국주의 침략을 저질렀다는 가해자의식은 제대로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피해자의식은 일견 이해할 만 하다. 일본 정부가 무리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시 총동원 체제를 가동했기 때문에, 일본 민중의 삶은 매우 고달팠다. 전시동원은&nbsp;1930년대&nbsp;중반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1941년 이후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일본인들에게는 공습의 기억과 원폭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다. 일본인들에게는 미국과의 전쟁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br><br>그런데 일본사회는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하여 지난 식민지 침탈의 역사는 거의 망각하게 되었다.(짧게 풀기는 어려운 주제이다) 태평양전쟁이 자신들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 역시 조작, 왜곡, 은폐되었다. 그 작업을 주도한 주체들이 있었으며, 대다수 일본 민중은 그러한 왜곡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문제 역시 짧게 풀기는 어려운 주제이다. 일본인들이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패한 것이지 중국과 조선에 패한 것이 아니다', '중국인(대만인)과 조선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승리자인 것 마냥 오만하게 구는 게 경멸스럽다'라는 주장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사례만 언급해둔다. <br><br>암튼&nbsp;이렇게&nbsp;가해자의식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1941년 시작된 태평양전쟁과 그 이전의 사건들이 구분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일본인들이 쓰는 '태평양전쟁'이란 용어에는 식민지 침략 기억의 망각이라는, 우리에게는 아쉽기 그지없는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br><br>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본의 중국 침략과 대미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태평양전쟁관을 가진 연구자들은 대미전쟁을 분석하면서 태평양전선만 다루고 중국전선은 다루지 않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연구 경향을 비판하는 이들은 중국전선이 일본의 전쟁수행에 커다란 부담을 지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비록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은 정규전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중국 인민과 조선 인민들이 줄기차게 벌인 게릴라전으로 인해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수십만 명의 일본군이 중국전선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게 된 정치적 배경이나 군사적으로 고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면,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는 역시 사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용어라고 보아야 한다.<br><br><span style="COLOR: #ff0000">'아시아-태평양 전쟁'.</span> 학계 일각에서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 용어를 비판하면서 부르고 있는 용어이다. 연구해보면 어떤 더 적합한 용어가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암튼 일제 식민지기 간단없이 전개되었던 민족해방운동을 기억하고자 하는 우리들이라면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보다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는 일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일본의 패전 후, 미국은 조선을 연합국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패전국, 즉 적국의 일원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미국에게 조선인들은 '해방민족'이자 '적국민'이기도 했던 것이다. 실제 자의든 타의든 전쟁에 협력했던 조선인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충분히 할 말이 있고, 또 열심히 할 말을 해야 할 터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도 과연 전쟁이 무엇이었으며 또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를 차분히 되물어보아야 한다. 미국이 말했듯이 '태평양전쟁'에 가해자로 참전했던 역사가 있었고, 유인촌 장관도 말했듯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억압받는 민족으로서 나름대로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역사도 있었다. 우리는 그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br><br/><br/>tag : <a href="/tag/유인촌" rel="tag">유인촌</a>,&nbsp;<a href="/tag/대동아전쟁" rel="tag">대동아전쟁</a>,&nbsp;<a href="/tag/태평양전쟁" rel="tag">태평양전쟁</a>,&nbsp;<a href="/tag/아시아태평양전쟁" rel="tag">아시아태평양전쟁</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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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한국사를 보는 시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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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Nov 2009 18:25:09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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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박원순의 '국민공천' 제안을 어떻게 볼 것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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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COLOR: #ff0000">0. 박원순의 인터뷰를 보고</span><br><br>대학원 첫 학기, '공부에 치이는' 차원이 학부 때와는 다르다. 글도 더욱 많이 쓴다. 글쓰기에 이력이 날 정도랄까. 게다가 잘 아는 주제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한창 공부하는 주제로 글을 쓰다보니 스트레스도 꽤 많이 받는다. 시간적 여유는 있을지 모르나 정신적 여유가&nbsp;없어 블로그질도 거의 포기 상태였다. 다루고 싶은 사건과 주제들이 꽤 있었지만 미처 쓰질 못했다. 정말 싸질러 버리는 식으로라도 끄적거려보아야 할까? 뭐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들르는 곳도 아니고, 방문자 수에 미련은 없다.<br><br>오늘 오전에 수업이 하나 있고, 그 수업에 제출할 글을 지금 완성했다. 잠을 좀 자 두는 게 현명한 일이겠지만, 지금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아 관두련다. 에고......<br><br>오마이뉴스 들어가보니 박원순 인터뷰가 있다.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 대신 국민공천을 하자고 제안하는 발언이 담겨 있어 눈에 띈다.<br><br><a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3474&amp;PAGE_CD=N0000&amp;BLCK_NO=3&amp;CMPT_CD=M0006" target="_blank">"지방선거, 정당공천 대신 국민공천 하자"(오마이뉴스, 2009-11-18)</a><br><br>예전에 '반MB연합' 혹은 '민주대연합'을 주제로 정치평론 격의 글을 몇 편 쓴 바 있는데, 이후로 한동안 쓰지 않았다. 별로 더 쓸 말도 없었고, 돌아가는 정세가 나로 하여금 고민을 좀 하게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난 달 시민운동 영역에서 '희망과 대안'이 출범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름대로의 전망을 써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링크한 박원순의 제안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최근 전개되는 일들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고 싶은데, 일단 &lt;희망과 대안&gt; 이야기가 나왔으니만큼 시민운동의 前史를 잠깐 되짚어봐야 할 것 같다. 한국 '시민운동'을 논한다면 2000년 낙천낙선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90년대 등장한 시민운동을 전성기로 이끈 운동이고, 참여연대라는 단체를 시민운동의 상징으로 만든 운동이기도 했다. 박원순이란 인물을 일약 한국사회의 주요 리더 중 한 명으로 부각시킨 운동이기도 했다. 내가 보기엔 지금 박원순이 제안하고 있는 '국민공천'운동은 낙천낙선운동의 역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1. 낙천낙선운동의 배경</span><br><br>시민운동 영역의 중요 활동가들이 결집한 &lt;희망과 대안&gt;은 출범 일성으로 "좋은 후보를 발굴하겠다"고 천명했다. 나는 그걸 보고 조금 놀랐다. 아니 웬 갑자기 포지티브 운동!??이라는 감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시민운동은 지금까지 낙천낙선운동이라는 네거티브 운동을 성공으로 이끈 전력은 가지고 있지만, 낙선운동에 비해 한 단계 높은 제도정치 개입 운동인 당선운동은 아직 성공시킨 전력이 없다. 사실 제대로 시도조차 해본 적도 없다. 2004년 총선에서 '물갈이연대'라는 당선운동 연대체가 출범한 적은 있지만, 탄핵정국에 휩쓸려 유야무야되었다.<br><br>90년대 등장한 시민운동을 전성기로 이끌었고, 참여연대란 조직을 시민운동의 대표체로 발전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2000년 낙천낙선운동은, 갖은 진통 끝에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한국 시민운동은 제도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정책제안과 사회개혁운동(소액주주운동과 같은 경제개혁운동을 포함한)을 벌여왔었다. 이른바 '정치중립성'은 90년대 시민운동의 주요한 이념적 토대였다. '막나가는' 제도정치에 이력을 내고 있었던 시민들은 '합리적 개량주의'를 표방하며 정치중립의 위치에서 나름대로의 사회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운동에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90년대 시민운동은 89년 출범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94년 출범한 참여연대가 양대 축을 이루면서 전개되었다. '정치중립성', '합리적 개량주의'와 함께 90년대 시민운동의 세 번째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경실련, 참여연대처럼 '중앙집중식-백화점식' 시민운동이 발전했다는 점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시민운동의 본래 토대라 할 수 있는 지역 단위의 생활밀착형 시민운동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br><br>정치중립을 표방하면서 사회개혁을 모색하던 시민운동은 부실한 제도정치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연대나 경실련 등은 꾸준히 국회모니터링 활동을 하면서 기자회견, 정책제안 등의 간접적인 방식으로 정당들에 압력을 가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정당과 국회의원들은 시민단체를 무시할뿐만 아니라 대놓고 깔보기까지 했다. 99년 국회 국정감사를 맞아 모니터링활동을 벌이려 했지만, 시민단체들은 방청 자체를 불허 당하는 등 핍박 받았다.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했지만 외부감시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99년 9월 국정감사모니터링이 원천봉쇄 당하자, 시민운동 활동가들은 더욱 강력한 정치개입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의 회의 끝에 결국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부패한 의회권력의 교체가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낙천낙선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br><br><span style="COLOR: #ff0000">2. 낙천낙선운동의 전개</span><br><br>99년 말 참여연대가 먼저 나서서 비합법적 수단까지 동원하는 적극적인 유권자운동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2000년 1월 참여연대의 주도로 &lt;총선시민연대&gt;(총선연대)가 결성되었다. (참고로 박원순은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었으며, 총선연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총선연대를 진두지휘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총선연대 결성 이틀 후 YMCA가 총선연대에 가입함으로써 조직력이 크게 확충되었다. 412개 시민단체가 모여 출범했지만 종국에는 참여단체 수가 981개에 이르렀다. 활동기간 동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낸 후원금 총액은 3억 5천만원에 달했다. 총선연대는 활동 기간 동안 선거법의 제약으로 인해 온라인 활동에 비중을 두었는데, 3개월 여의 활동기간 동안 총선연대 사이트 접속건수는 925,000건에 달했다. 온라인 지지서명도 28,000명을 넘었다.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한국 시민사회의 인터넷 정치가 첫 선을 보인 사례이기도 했다.<br><br>총선연대는 낙천낙선 후보를 선정하는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반부패'를 설정했다. 부정부패는 당시까지의 제도정치가 가지고 있던 가장 고약한 고질병 중 하나였고 시민들의 반감도 심했다. 게다가 '반부패'는 정치중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정치개입의 수준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주제였다. 사실 낙천낙선운동을 결정하면서 시민운동 진영 내부에서 정치중립성을 둘러싼 논의가 분분했다. 결국 반부패를 최대기준으로 설정함으로써 낙천낙선운동은 정치편향을 근거로 한 비난을 비켜갈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부정부패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민주화운동 경력을 가졌지만 부패 전력으로 인해 선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반부패 기준 이외에도 민주적 태도, 성실성, 인권친화적 태도 등이 고려되었다.<br><br>낙천낙선운동은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국회로부터는 견제를 받았다. 특히 선거법 때문에 애를 먹어야 했다. 총선연대는 공익 활동이라 주장했지만 선관위는 선거법을 엄격하게 해석하여 낙천 후보 명단 발표 등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총선연대는 낙천낙선운동과 함께 선거법 개정운동도 활발히 펼쳐나갔다. 그러나 국회는 오히려 선거법을 '개악'하여 시민단체는 '옥내에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당시 국회에서는 한나라당과 자민련, 민국당 등 절대다수가 낙천낙선운동에 반발하고 있었고, 그나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쪽은 민주당뿐이었다. 상대적으로 대상 낙천 후보가 적었기 때문이었다.<br><br>총선연대는 개악된 선거법에 대항하여 불법을 불사하는 '시민불복종'을 천명했지만, 중앙 차원에서만 실행하고 지역단위 차원에서는 최대한 합법적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낙천운동 단계에서 공천부적격자로 총 102명이 발표되었고 이중 64명이 공천되었다. 총선연대는 여기에 22명을 추가하여 총 86명의 낙선운동 대상자를 선정했다. 낙선운동은 해당 지역구 차원의 시민운동 조직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총선연대는 서울-수도권 지역의 22곳을 '전략지역'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낙선운동을 벌여나갔다. <br><br><span style="COLOR: #ff0000">3. 낙천낙선운동의 결과</span><br><br>낙선운동의 외형적 성과는 대단했다. 86명의 낙선 대상자 중 59명이 낙선하여 68.6%의 낙선율을 기록했다. 특히 수도권 지역에서 20명 중 19명이 낙선한 것이 고무적이었다. 22개 전략지역 중에서는 15명이 낙선하여 68.2%의 낙선율을 보여주었는데, 수도권의 전략지역 7곳은 모두 낙선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는 총선연대 활동가들의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br><br>낙천낙선운동의 성과는 국회를 일정하게 변화시켰다. 기존 정당정치구도는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자민련이나 민국당 등 오로지 지역주의에 기대어 존속하던 정치세력들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은 누구도 거스르기 힘든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 부분은 2년 후 노무현이 계승하게 되는 가치이기도 했다. 아울러 반부패의 가치가 크게 중시되는 계기를 맞았다. 이 운동을 계기로 2001년 부패방지법이 통과되어 정부의 투명성이 높아지는 토대를 마련했고, 정치문화 역시 검은 돈의 비중을 줄이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부분 역시 2년 후 노무현이 덕을 보는 부분이 된다.<br><br>노무현이 덕을 봤다는 얘기를 했는데, 기왕에 또 하나 언급하자면 인터넷 정치의 개화이다. 총선연대의 온라인 활동과 그에 대한 커다란 반향은 시민운동 진영이나 시민들에게 모두 놀라운 현상이었다. 인터넷 공론장의 형성은 시민운동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했다. 낙천낙선운동을 계기로 개화한 인터넷 정치는 2년 후 노사모를 탄생시키는데&nbsp;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민후보' 노무현의 탄생이 바로 인터넷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제3자의 활약 없이 오로지 보수 대 개혁 1:1로 맞장 뜨는 상황에서 노무현이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써 인터넷 정치와 그것을 이끈 젊은 세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br><br>덧붙여 시민운동 차원에서의 성과를 지적해보자면, 이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지역 단위의 풀뿌리 시민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낙선운동의 성과는 지역 단위의 시민운동 역시 열심히 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낙천낙선운동 이전의 지역단위 시민운동은, 제도정치와 그에 종속된 지역유지들에 의해 농단되어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을 계기로 비로소 지역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풀뿌리 시민운동의 가능성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시민운동에서 연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성과도 지적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면서도 중대한 사회 의제가 부상하면 언제든 연대하며 투쟁해야 하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제는 2008년 촛불시위 때까지 꾸준히 이어진 시민사회의 전통이라 이를만 하다.<br><br>낙천낙선운동이 가진 한계라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사실 당시 상황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nbsp;이유라고도 할 수 있지만, 바로 정치개혁에 개입하되 정치중립성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전술했다시피 정치중립성이란 가치는 시민들로 하여금 시민운동에 신뢰를 갖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만약 낙천낙선운동에서 총선연대가 정치적인 가치를 가지고 후보 선정과 낙선운동에 나섰더라면, 필연적으로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제도정치권의 논쟁에 빨려들어가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시민들의 지지가 그만큼 컸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치중립성의 고수, 반부패 가치의 지향은 부패한 제도정치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의 지지를 최대로 끌어낼 수 있는 운동방법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낙천낙선운동이 남긴 과제가 "그렇다면 정치개혁의 완수를 위해서는 누구를 찍어야 하는가?"라는 적극적인 질문에 답하는 민주주의 운동의 필요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br><br><span style="COLOR: #ff0000">4. 박원순의 새로운 제안이 가진 의미</span><br><br>위 인터뷰에 담긴 박원순의 주장을 낙선운동과 비교해보면, 운동의 성격이 낙천 및 낙선이라는 네거티브에서 공천 및 당선이라는 포지티브로 바뀌고, 운동의 범위도 전국차원에서 지역 차원으로 좁혀진다는 점이다. 물론 낙선운동 역시 지역 차원에서도 전개되긴 했지만, 지방선거에서의 포지티브 운동은 시작부터 끝까지 지역 단위로 전개될 것이라는 점에서 비중의 차이가 있다. <br><br>지난 달 &lt;희망과 대안&gt;에서 포지티브 원칙을 발표했을 때에는 솔직히 뜨악한 감상이 있었지만, 위 인터뷰를 보고나니 조금은 납득이 간다. 아무래도 지역정치 차원에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의제가 여러 부분으로 분산될 것이기 때문에 당파성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제도정치권 내부에서 제기되는 좁은 의미의 당파성을 뜻한다) 연대의 절차가 합리적으로 설계된다면 당선운동은 효과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다.&nbsp;현실정치 차원에서 '반MB' 혹은 '민주연합' 문제는 제기될 수밖에 없겠지만, 지역정치 차원에서는 4대강 관련 문제나 공교육 문제, 복지 문제&nbsp;등 좀 더 세부적인 정책을 통해 연대를 성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박원순이 인터뷰에서 '시민사회의 가치관부터&nbsp;바꾸자는'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br><br>그는 일단 '국민공천'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주민공천'이라고 불러주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은데, 주민공천이 성공하기 위한 관건은 지역 풀뿌리 시민운동의 상태일 터이다. 나보다야 박원순이 시민운동의 실황을 더 잘 알 테니, 아마도 그는 충분히 역량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주민공천을 제안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박원순은 지난 낙천낙선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주민공천운동을 제안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 낙천낙선운동이 제도정치의 '정상화'를 이루기 위한 정치개혁운동이라면, 오늘의 주민공천운동은 한국민주주의의 '퇴행'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개혁운동이라 볼 수 있다. 정치개혁의 기치는 같지만, 당면한 정세가 달라졌고 그에 따라 운동의 범위 또한 달라졌다.&nbsp;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겹쳐지는 모습은, 새롭고 신선한 운동을 필요로 하고 있는 침체한 시민사회의 현재 모습이다. 박원순의 구상은 과연 어떤 반향을 몰고 올 것인가.</p><br/><br/>tag : <a href="/tag/박원순" rel="tag">박원순</a>,&nbsp;<a href="/tag/낙천낙선운동" rel="tag">낙천낙선운동</a>,&nbsp;<a href="/tag/참여연대" rel="tag">참여연대</a>,&nbsp;<a href="/tag/희망과대안" rel="tag">희망과대안</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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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Nov 2009 22:35:0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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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대운하 제발 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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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3 Nov 2009 14:41:1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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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헌법재판소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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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한겨레나 경향, 오마이뉴스 등 진보 성향의 언론들이 연일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을 비판하고 있다. 일리 있는 비판이고, 많은 시민들이 거기에 호응하고 있다. 누리꾼들이 창의력을 동원하여 갖가지 수사로 헌재의 판결이 보인 비논리를 비꼬아대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주당이 처음에 동원한 수사인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가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 오늘 본 "당선은 되었지만 대통령은 아니다"라는 수사도 꽤나 걸작으로 느껴진다.<br><br>헌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한편으로, 헌재에 애초부터 너무 큰 기대를 걸었다는 냉정한 분석도 가끔씩 보인다. 사실 나 역시 처음부터 헌재에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는 축이었다. 물론 마음 한편으로 기대를 하기는 했다. 만약 헌재가 어떤 형태로든 미디어법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부 남은 기간 동안 미디어법은 꾸준히 살아움직이며 설사 다음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더이상 되돌릴 수 없는 형국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헌재가 나름대로 절차의 부당성을 지적했는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정부여당의 행태를 보면, 한국 미디어의 미래는 정말 암울해 보인다. 미디어법이 정말로 통과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헌재가 결국 정부여당의 독주를 막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br><br>최장집이 노무현 탄핵 판결이나 행정수도 위헌 판결을 사례로 들며 '제왕적 사법부'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나는 최장집의 이러한 견해에&nbsp;동감하는 편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자 태생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사법부에 한국민주주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쥐어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nbsp;문제의식이 '제왕적 사법부' 개념의 요체이다. 미디어법 문제는 누구나 알듯이 한국민주주의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혹자는 헌재가 법리적인 판결을 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판결했다고 하여 비판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결했다고 하여 마냥 비판만 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에도 우리는(혹은 민주당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헌재에 정치적 판단을 맡겼고, 헌재는 판단을 했다. 비록 정부여당이 그 판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영 마뜩치 않긴 하지만, 우리가 헌재더러 왜 이럴 걸 예상하지 못하고 비논리적으로 절충해버렸냐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만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br><br>나는 오히려 헌재가 정부에게 완전히 무릎을 꿇고 미디어법을 옹호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인지 비논리를 감수하고라도 절충을 하여 절차의 부당성이나마 꼼꼼하게&nbsp;지적한 헌재가 할만큼&nbsp;한 것이 아닌가 하는&nbsp;인상을 받고 있다. 과연 이번 미디어법 판결에서 드러난 헌재의 행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br><br>헌재가 사법기관인 만큼, 판례를 근거로 하여 법리적인 측면에서 헌재의 과거와 현재를 평가할 수 있겠는데, 그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역사학도인 나는 역사적인 견지에서 헌재의 과거와 현재를 평가해야 하리라. 87년 민주화가 꽃피운 열매 중 하나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최후 보루라는 사명을 띠고 19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가 어떠한 판결을 통해 한국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지속해 왔고, 그런 가운데 한국민주주의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할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세히 살펴볼 여력이 없어 아쉽다. 그저 인상비평 정도만 적을 수밖에 없겠다.<br><br>정치학의 논의 틀을 빌려와 생각해보면, 87년 민주화는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였고 그렇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는 고수하되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노력에는 소극적인 정치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몫은 여전히 비판의 끈을 놓지 않은 진보적 시민사회의 것이었다. 독재정권 시기의 보수독점 정당구조가 기본적으로 해체되지 않고 이어진 까닭이었다. 한편으로 사법부 차원에서 87년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헌법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독재정권 시기는&nbsp;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태도로 국가가 국민을 억누른 시기였고, 사법부는 그 책임의 일부분을 지고 있었다. 헌재의 임무는 강대한 정부 앞에 선 나약한 국민 개개인을 가장 후방에서 지켜주는 일이었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의 붕괴를 가장 마지막에 저지할 책임을 맡은 기관이라 볼 수 있다.<br><br>헌재는 많은 진보적인 판결을 내려온 바 있다. 거칠게 구분하면 크게 두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상술한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판결이고, 또 하나는 독재정권 시기 노정되어온 한국사회의 '비정상성'을 수정하는 판결이었다.(물론&nbsp;두 기준 사이에는 많은 중첩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nbsp;전자의 경우에는 주로 정부의 위법하거나 부당한 행정처분에 대한 구제 판결들을 들 수 있다. 헌재는 수많은 판결을 통해 헌법에 명시된 자유권적 기본권이나 청구권적 기본권의 범주를 확정하고 보호해왔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집시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을 들 수 있다. 그동안 헌재는 여러 차례 집시법의 독소조항들을 비판하면서도 한정 합헌 등의 판결을 통해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지 않아왔는데, 그나마 이 정부의 독선을 가만 두지 않고 헌법불합치 판결(그나마 이마저도 절충을 가했지만)을 내린 것은 의의가 있는 대목이다.<br><br>후자의 경우에도 많은 사례를 들 수 있겠는데, 당장 떠오르는 사례는 호주제 위헌 판결이다. 호주제는 전근대적인 제도였고, 한국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논쟁이 있었고, 반대세력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논쟁이 민감하게 전개되는 와중에서 헌재는 용단을 내렸다. 약간만 과장하면 '국민의식을 배반하는' 진보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한국사회가 과거의 질곡을 벗고 '정상사회'가 되는데 헌재가 기여한 바가 분명 적지 않았다.<br><br>거칠게 주장하자면, 헌재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최장집이 제기한 '제왕적 사법부'의 문제의식 안에서 사고한다면 헌재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한국사회의 정상화를 이끄는 그 이상으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지 않기도 하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끄는 힘은 시민사회의 원동력과 정당정치의 민주화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는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진전시키지 못한다.<br><br>최장집의 논의를 끌어들이면 흔히 지나치게 원론적인 논지라고 비판받곤 하는데, 암튼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탄핵 판결이나 행정수도 판결, 그리고 미디어법 판결 등은 모두 헌재에게 지나치게 기댄 사안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진행되는 극히 민감한 민주주의 갈등의 문제들은 헌재가 모두 감당하기 힘들다. 비용 대 효율로 따져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법적 판단으로만 민주적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면 결국 그 갈등은 미봉될 뿐이다. 행정수도 문제나 군가산점 문제가 위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초미의 갈등 사안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바가 있다. 아마도 미디어법 문제 역시 앞으로 그러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br><br>현실적으로 정부의 힘이 강한데다가 그 힘을 견제할 사회적 통로가 넓지 못하고, 이명박 정부 들어 좁은 통로는 오히려 더더욱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사회든 야당이든 비용 대 효과가 뛰어난 사법적 판단을 어느 정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극히 원론적인 시각일 테지만,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선출된 권력'을 만들고 견제하는&nbsp;정치참여의 힘이 아닐까. </p><br/><br/>tag : <a href="/tag/미디어법" rel="tag">미디어법</a>,&nbsp;<a href="/tag/헌재" rel="tag">헌재</a>,&nbsp;<a href="/tag/위헌" rel="tag">위헌</a>,&nbsp;<a href="/tag/헌법재판소" rel="tag">헌법재판소</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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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30 Oct 2009 17:47:0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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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민중의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억하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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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span style="COLOR: #006600">(아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투쟁 투쟁 투쟁 투쟁 투쟁!<br>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br>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br>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br>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br>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br>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br>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br>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br></span><br><span style="COLOR: #ff0000">1. &lt;임을 위한 행진곡&gt;을 떠올려보다</span><br><br>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린 노래로서, 대개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져간 수많은 이들을 다함께 추모하는 의미로써 불리는 민중가요이다. 백기완의 시를 가사로 하여 광주지역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이 작곡한 노래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 윤상원과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영혼 결혼을 하는 두 이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처음 발표되었다. 그후 민중운동/시민운동/학생운동 차원에서 어떤 행사나 집회를 할 때마다 여는 노래로서 불러왔다.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C%9E%84%EC%9D%84_%EC%9C%84%ED%95%9C_%ED%96%89%EC%A7%84%EA%B3%A1" target="_blank">위키피디아</a> 참조)<br><br>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요이지만, 9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서도 많이 불리는 민중가요이다. 특히 방글라데시, 태국, 버마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민중이&nbsp;한국 민중가요를 수입하여 자기네 식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70~80년대 초반 태동한 민중가요는 크게 나누어 찬송가풍과 러시아민요풍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노래는 처연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지닌 러시아민요/행진곡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민중문화가 러시아민요를 '번역'한 이 노래를 동남아시아에서 다시 '번역'하여 불렀으니 요즘 일각에서 흔히 말하는 '삼중번역'된 민중가요이기도 한 셈이다.<br><br>한국사회에서 민중운동이 위축되고 민중문화가 침체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역시 예전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낮아졌다. 내가 대학을 다닌 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가 이미 그러했다. 그나마 내가 속한 과/반의 경우에는 민중문화가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어서 나는 이 노래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새내기 시절 어떤 과/반 학생회 행사에 참여했을 때, 서로들 정신 없이 막 웃고 떠들다가도 행사 시작과 동시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엄숙해지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위화감이 새삼 기억난다. 선배가 되어 이 노래를 부를 경우에도 후배들의 익숙치 않은 팔뚝질과 더듬거리는 입모양을 보며 역시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br><br>전경이 교정에 상주하고&nbsp;사복형사들이&nbsp;이야기를 엿들으며 배회하는 탓에&nbsp;마음 놓고 웃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 노래가 대학사회의 분위기에 딱 들어맞았지만, 대학문화가 좀 더 발랄해지고 경박해진 오늘날에는 분명 잘 맞지 않는 노래이다. 다만 상징이란 게 대개 그러하듯이, 이 노래 역시 '그때의 기억'을 잠시나마 일부러 되새기기 위한 노래이고 그래서 굳이&nbsp;국민의례의 애국가 대신 불리는 노래이다. 윤하가 야구장에서 멋들어지게 애국가를 부른다고 분위기 자체가 바뀌지는 않듯이, 임을 위한 행진곡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어색함을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br><br>지금은 내가 속했던 반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거의 잊힌 노래이다. 올해 1학기 초 학생회 행사 중 하나인 '교양학교'(새내기를 위한 교양 세미나 기획이다)를 마무리하는 '졸업식'에 놀러갔었는데, 칠판에 적힌 식전 의례에 무려 '애국가 제창'이 있었다. 내가 전역 후 복학하여 느낀 대학사회의 여러 상전벽해들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사례였다. 모르면 차라리 부르지나 말 일이지, 하필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애국가란 말인가. 나는 친한 후배 한 명에게 간곡히 부탁하여(아마도 그이에게는 압박으로 다가갔겠지만) 애국가 제창을 취소시켰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아무도 모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는 없는 일이고, 아예 식전의례 자체를 생략해버린 바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고학번의 '꼬장'이 없는 이상 앞으로는 학생회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일이 많아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아쉽고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br><br><span style="COLOR: #ff0000">2. &lt;임을 위한 행진곡&gt;을 둘러싼 기억들의 엇갈림</span><br><br><a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46315&amp;PAGE_CD=N0000&amp;BLCK_NO=3&amp;CMPT_CD=M0006" target="_blank">개그하는 정부, 국민의례로 애국심 기르려 하나(오마이뉴스)</a><br><br>정부가 공무원노조를 압박하는 여러 꼬장 중 하나로 민중의례를 선택하여 공세를 가했다. 신지호 의원의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행위는 대한민국 공무원이기를 포기한 것"이라는 비난이 이러한 공세가 가진&nbsp;성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나름대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색깔론 공격이다.<br><br>나는 상식을 가진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이러한 색깔론 논리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색깔론이 대놓고 횡행할 만한 사회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사태를 바라보면서 조금 딴 생각을 해본다. 많은 이들은 비록 색깔론 논리로써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반드시 애국가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민중의례 자체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br><br>상술했듯이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민중의례가 거의 잊혀 온&nbsp;상황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할 것이고 민중의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정부의 민중의례를 소재로 한 꼬장은 분명 삽질이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혀 왔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이미지는 이 사태를 통해 사람들 앞에 다시 불려나왔다. 그 이미지는 과연 어떠한가? <br><br>모르긴 몰라도, 다시금 불려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과 민중의례의 이미지는 분명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저항의 기억, 민주화의 기억과 맞닿아 있을 터이다. 위 기사의 필자는 &lt;국기에 대한 맹세&gt; 이야기까지 끌어오며 민중의례는 경직된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의 자주적인 애국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지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80년대에는 이러한 주장이 그 시절 표현으로 '즉자적'으로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고, 그래서 보편적인 문화로 정착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때 그 시절의 많은 경험들을 말이다. 기억과 공감이 부족하다면 민중의례 또한 많은 이들에게 국민의례 만큼이나 어색하고 억압적으로 다가가기 마련이 아닐까.<br><br>만약 정부의 이러한 공세가 기본적으로는 색깔론 삽질로 여겨지더라도, 한편으로 민중의례 또한 뭔가 어색하고 철지난 것이라는 이미지가 유포된다면, 그것으로 이미 이 논란은 극우세력의 승리가 될 터이다. 기억과 공감이 시도되기도 전에 이미지와 선입견은 널리 유포된다. 소위 '운동권'의 딱딱하고 진지하기만한 어투와 비타협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이 또한 이미지와 선입견의 문제가 있지만)은 양념이 되어 그 유포에 일조할 것이다. <br><br><span style="COLOR: #ff0000">3. 불편한 기억을 불편하지 않게 추억하기 위하여</span><br><br>기억은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면서 감성적 공감의 영역이기도 하다. 어떤&nbsp;'불편한' 史實을 발굴하고 배우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그 '불편함'을 기꺼이 참는 공감에서 우러나온다. 민중의례, 사실 너무나 불편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실 불량하기 그지 없는 노래이다. 위 기사의 필자는 이 노래가 일반적인 민주화 열망을 표현하고 있는 건전한 노래라고 변명하지만, 그렇지 않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노래라는 점부터 그러하다. 국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총칼을 겨누고 다가오고 있는데 무슨 알량한 애국심 타령인가. 광주 시민들은 무기를&nbsp;쥐고 항쟁의 깃발을 올렸고, 처참하게 살육당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가 가장 나쁜 태도로 자신 앞에 다가섰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노래했다. 이 노래는 한국사상 최악의 기억 중 하나인 사건을 굳이 일부러 잊지 않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굳이 미화할 필요도 없고, 몇 가지 수사만으로는 미화하기도 힘든 노래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무시무시한 가사로&nbsp;점철된 라 마르세예즈를 자신들의 역사 속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노래로 여겨 수백 년간 불러왔듯이, 우리들 역시 이 불편한 노래를 굳이 잊지 않기 위해 불러온 것이다. <br><br>나는 엄숙하기 짝이 없는 민중의례와 불편하기 그지 없는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민중가요를 어떤 상황에서든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광장'이 출현하는 시점에 발맞추어&nbsp;YB가 구슬프기 짝이 없는 아리랑이라는 전통 민요를 새롭게 '번역'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새로운 '아리랑'의 인기는 한국사회에서 레드 컴플렉스를 넘어 비로소 광장 문화를 체험하기 시작하는 시민들의 '여유'를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만약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이 그만한 여유를 허락받을 수 있다면 70~80년대 민중문화를 새롭게 '번역'하기 위해 나설&nbsp;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여유는 전혀 없다. 김제동 쫓겨나는 걸 보면 더 할 말조차 없다.<br><br>민중의례를 소재로 하여 공무원노조를 탄압하고 있는 이번 사건에 대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다면, 2007년 개봉했던 영화 &lt;화려한 휴가&gt;나 다시 한 번 보자고 권하고 싶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주인공의 '가상결혼식' 사진을 배경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장중하게 울려퍼진다. 바로 이 노래의 등장 배경을 모티프로 삼은 장면이다. 감독은 실제로 윤상원을 모델로 하여 남주인공을 설정했다가 너무 영화가 무거워질 것을 염려하여 '평범한 서민'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만은 이 노래를 틀기 위해 설정을 바꾸지 않았다. <br><br>가상의 사진 속에서, 현실에서 죽어간 이들은 모두 밝게 웃고 있지만 살아남은 단 한 명인 여주인공은 무표정할 뿐이다. 그 표정들 사이의 괴리를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불편함'을 되새겨보면 좋지 않을까. 그러한 공감이, 불편했던 기억을 불편하지 않게 추억해내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27/95/b0064195_4ae5c2135c47b.jpg" width="460" height="7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27/95/b0064195_4ae5c2135c47b.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선덕여왕은 올 겨울방학 때나 좀 볼 수 있을런지...(<a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mid=sec&amp;sid1=106&amp;oid=109&amp;aid=0000079430" target="_blank">출처</a>)</div><br/><br/>tag : <a href="/tag/민중의례" rel="tag">민중의례</a>,&nbsp;<a href="/tag/민중가요" rel="tag">민중가요</a>,&nbsp;<a href="/tag/광주민주화운동" rel="tag">광주민주화운동</a>,&nbsp;<a href="/tag/임을위한행진곡" rel="tag">임을위한행진곡</a>,&nbsp;<a href="/tag/화려한휴가" rel="tag">화려한휴가</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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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同時代史를 헤치며</category>
		<category>민중의례</category>
		<category>민중가요</category>
		<category>광주민주화운동</category>
		<category>임을위한행진곡</category>
		<category>화려한휴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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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6 Oct 2009 15:26:0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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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어떤 記憶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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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조부는 1921년 음력 1월 강원도 인제 남면에서 태어났다. 본래&nbsp;증조부 가족이 살던 곳은&nbsp;경기도 파주였다. 증조부는 만세운동을&nbsp;했다가 일제 헌병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몸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결국 핍박을 못 이겨 강원도 인제의 어느 산골로 피신했고, 거기서 조부를 낳았다. 조부는 삼형제 중 막내였다. 조부가 어릴 적에 가족은 서울로 이사 갔다. 지금의 신촌역 부근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br><br>조부의 큰형은 장남 답게 성실한 기질을 지녔다. 그러나 작은형은 깡패였다. 종로를 휘어잡고 있던 김두한 밑에서 깡패질을 하고 돌아다녔다. 행동대장 격의 지위까지 오르면서 근방에서는 꽤나 악명 높은 깡패였다고 한다. 조부는 1944년 징용 당해 일본 사세보 해군기지로 끌려갔다. 활주로를 닦는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미군 폭격기의 공습 때문에 여러번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거기서 해방을 맞았는데, 일본군이 징용자들을 방치한 채 퇴각해버리는 바람에 귀국을 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결국 기지 근방에 살던 일본인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다.<br><br>해방 직후 혼란스런 정국, 큰형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작은형은 김두한을 좇아 우익청년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조부는 전쟁 발발&nbsp;직전 중매를 통해 조모와 만나 결혼했다.<br><br>전쟁 직후, 가족은 제때 피신하지 못했다. 인민군은 우익청년단 활동을 했던 작은형을 잡아갔고, 그후로 소식이 끊겼다. 큰형과 조부는 가까스로 피신했다. 인민군은 매일 집으로 와 큰형과 조부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가족은 때를 보아 증조모의 친척들이 살고 있던 경기도 양주로 야반도주했다. 1951년 음력 1월 한겨울, 미군 폭격기가 쏟아붓는 폭탄으로 인한 굉음과 진동 속에서 조모는 부친을 낳았다.<br><br>부친이 태어나자마자&nbsp;가족은 남쪽으로 피란을 가야했다. 1.4후퇴의 여파였다. 가족은 국군의 퇴각 행렬을 따르는 피난민 무리에 합류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인민군과 중공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험한 산길로 이동했는데, 부친이 자지러지게 울 때마다 조모는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피난 와중에 큰형 부부 내외는 미군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맞아 폭사했다. 조부는 그&nbsp;장면을 생생히 목격했다고 한다. 조부는 전쟁 와중에 두 형을 모두 잃었다.<br><br>가족은 피란 중에 엉겁결에 떠내려왔던 대전에 그대로 정착했다. 가족은 대전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집도 땅도 친척도 모두 서울과 그 근방에 있었다. 조부는 언제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왠일인지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부는 대전방직에서 목수 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가난에 찌든 생활이었다. <br><br>손자가 웬만큼 머리가 굵어졌을 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꺼낸 말은 "결혼해서 자식을 많이 낳아라"였다. 그때는 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손자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언제인가, 비로소 징용시절을 비롯한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손자이지만, 그 이야기에 담긴 삶의 무게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조부는 손자에게 두어 차례 징용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br><br>손자는 언젠가 차례상 앞에서 조부의 형제들에 대해 여쭈었다. 전쟁 때 돌아가셨다고만 들었기 때문에 궁금했었다. 하지만 조부는 손자에게 자신의 형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손자는 조부의 영정 앞에서 부친의 입을 통해 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같이 듣고 있던 사촌 동생은 꼭 드라마 속 이야기 같다며 웃었다. <br><br>부친은 가족이 어디 한 곳에 발붙이고 살지를 못했기 때문에 번성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한다. 파주에서 인제로, 서울로, 양주로, 그리고 대전으로. 혼란했던 시절 여느 가족이 그렇지 않았겠느냐마는 우리 가족도 참 많이 고생했다. 조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손자에게 결혼해서 자식 많이 낳으라고 훈계했고, 조모는 손자에게 밥은 절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하는 법이라고 이르곤 했다. <br><br>노무현 정부는 일제시기 징용자 보상 정책을 시행했다. 부친이 서류를 꾸며 제출해보았지만, 생존자의 경우에는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란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다. 조부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부가 실망한 이유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들이나 손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어쩌면 그 한편으로는 새삼 느낀 상실감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징용자 보상 이야기는 조부로 하여금 젊은 시절의 고난을 상기시켰을 것이고, 거기에는 징용 시절 뿐만 아니라 전쟁 시절의 기억 역시 사무쳐 있을 것이다.<br><br>조모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신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롭게 삶을 견디셨던 조부는 2008년 음력 9월 27일 세상을 하직하셨다. 손자는 조부 생전에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조부는 손자가 결혼하고 출세하는 걸 보고싶다 하셨지만, 손자는 조부 생전에 그 모습을 보여드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알고 있었을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소상(小喪)을 앞두고 내가 다짐할 일은 가족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언젠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다면, 때를 보아 짐짓 심드렁하게 옛날이야기 하듯 기억을 전해주는 일이다. 그나마 조부의 손자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들 중 하나이리라.</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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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얕은 단상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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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6 Oct 2009 12:54:0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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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이산가족 상봉에 부쳐 - 오영재 시인을 기억하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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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9/26/95/b0064195_4abe299e3dbe1.jpg" width="406" height="26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9/26/95/b0064195_4abe299e3dbe1.jpg');" /></div><br><br>북한의 '햇볕정책' 덕에 오랜만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실질적으로는 17차 이산가족 상봉(화상 상봉은 7차례). 그러나 이번 상봉에서는 공식적으로 차수를 붙이지 않았다. 전문가들 분석으로는 6.15공동선언의 위상을 격하시키려 하는 정부의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분에 차근 차근 제도화 되어가고 있던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사업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졸지에 '일회성 행사'로 전락했다. 지난 두 정부는 16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과연 또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답답하다.<br><br>이산가족 상봉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한 편의 시를 떠올려왔다. 혹시 오영재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2000년 6.15공동선언이 합의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이산가족 상봉 때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남한에 살아계신 어머니의 소식을 접하고 절절한 사모곡을 지어 발표했었지만, 끝내 생전에 만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영전 앞에 자신이 지은 사모곡들의 육필원고를 바치며 오열했던 오영재 시인.<br><br>1990년 재미 문인 김영희 씨는 북한 방문 중 이북의 문인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한겨레에 기고했다. 이 기고문에 오영재 시인의 사연이 실렸다. 오 시인의 동생 형재 씨는 그 사연을 읽고 형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오형재 씨는 김영희 씨를 통해 오 시인에게 편지와 가족사진을 전달했다.<br><br>&nbsp;어머니(곽앵순 씨)의 생존을 확인한 오 시인은 이듬해 5월 &lt;아, 나의 어머니 -&nbsp; 40년만에 남녘에 계시는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gt;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미주 지역의 문예지 &lt;통일예술&gt;에 발표한다.&nbsp;&nbsp;&nbsp;&nbsp;<br><br>그러나 어머니 곽 씨는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위의 사연을 계기로 첫 상봉단에 포함된 오영재 시인은 가족들이 들고 나온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남의 많은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br><br>2000년은 내가 고3이었던 때이다. 문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이 시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이 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콱 막혀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하셨다. 측량할 수 없는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서였을까. 나 역시 그 선생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고, 첫 이산가족 상봉 방송을 보면서 눈물을 쏟으시던 내 어머니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따라 울었던 나 자신의 모습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br><br>천 만 이산가족이 짊어져온 상처 입은 삶의 무게는, 우리가 앞으로 몇 방울의 눈물을 더 흘려야 온전히 덜어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산가족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일만 따져도, 지난 두 정부가 남북화해를 위해&nbsp;썼던 매년 1인당 5천원 꼴의 비용은 너무나도 값싼 것이라는 점이다.<br><br><span style="COLOR: #006600">오영재 시인의 연작시 中</span><br><br><span style="FONT-FAMILY: 바탕체">늙지 마시라<br>늙지 마시라, 어머니여<br>세월아, 가지 말라&nbsp; <br>통일되어 <br>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도</span><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체">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br>이 가슴이 아픈데<br>세월아, 섰거라&nbsp; <br>통일되어<br>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체">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br>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br>나에게 다오&nbsp; <br>내 어머니 몫까지<br>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체">검은머리 한 오리 없이<br>내 백발이 된다 해도&nbsp; <br>어린 날의 그 때처럼 <br>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체">그 다음엔<br>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어<br>통일 향해 가는 길에 <br>가시밭에 피 흘려도<br>내 걸음 멈추지 않으리니</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체">어머니여&nbsp; <br>더 늙지 마시라<br>세월아 가지 말라&nbsp; <br>통일되어 <br>내 어머니를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br>오마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div class="autosourcing-stub"><p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FONT-WEIGHT: normal; FONT-SIZE: 12px; PADDING-BOTTOM: 0px; MARGIN: 11px 0px 7px; PADDING-TOP: 0px; FONT-STYLE: normal; FONT-FAMILY: Dotum"><strong style="PADDING-RIGHT: 7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0px">[출처]</strong> <a href="http://blog.naver.com/ngokorea/120019851092" target="_blank">칠천만 온 겨레를 울린 사모곡(思母曲)</a><span style="PADDING-RIGHT: 7px; PADDING-LEFT: 5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0px">|</span><strong style="PADDING-RIGHT: 7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0px">작성자</strong> <a href="http://blog.naver.com/ngokorea" target="_blank">바다</a></p></div></span><p></p><br>오영재 시인 관련 참고 기사 - 최재봉, &lt;오영재 시인 육필원고 공개&gt;, 한겨레, 2000-8-17일 5면, 언론재단 검색.<br/><br/>tag : <a href="/tag/이산가족" rel="tag">이산가족</a>,&nbsp;<a href="/tag/상봉" rel="tag">상봉</a>,&nbsp;<a href="/tag/6.15" rel="tag">6.15</a>,&nbsp;<a href="/tag/공동선언" rel="tag">공동선언</a>,&nbsp;<a href="/tag/오영재" rel="tag">오영재</a>,&nbsp;<a href="/tag/어머니" rel="tag">어머니</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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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同時代史를 헤치며</category>
		<category>이산가족</category>
		<category>상봉</category>
		<category>6.15</category>
		<category>공동선언</category>
		<category>오영재</category>
		<category>어머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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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6 Sep 2009 15:29:0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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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政黨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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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두통을 못 견뎌 어떻게든 잠을 청하고자 밑에 잡담까지 써봤지만 별무소용이다. 그냥 손 가는대로 글이나 더 써볼까.<br><br>나는 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지금까지 어떤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본인의 정치적 지향은 스스로 정의하기 참 어렵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넓은 의미에서 진보적이고, 정당에 가입한다면 그 대상은 진보정당이 될 것이다. <br><br>어릴 적에 어떤 선배가 "나중에 회사에 취직한다면 노조 활동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길로 나간다면 정당 활동을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었는데, 나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게 해야겠다고 막연하게나마 여겼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전에는 정당에 가입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했었다. 돌이켜 보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어쨌든 줄곧 그런 생각을 가져왔었다.<br><br>군복무를 마친 이후에는 고시 공부를 하느라 정당에 대한 고민은 유보했었다. 어차피 공무원이 되면 정당 활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고시를 포기하고 학자의 길을 걷기로 했으니, 정당 가입 역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학술 연구자로 살면서 어쩌다 보면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정당에 가입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럴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br><br>이제 단속적인 일들로나마 돈을 벌어가면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내 돈으로 당비 내고 정당에 가입할 수 있다. 여전히 대상은 진보정당이다. 친노신당 어쩌구 하는 개혁적 정당이 출범했지만, 앞날도 불안하거니와 지향도 확실치 않다. 아직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br><br>진보정당 중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관심의 대상이다. 만약 두 정당이 분당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가입했겠지만, 기왕 분당이 되었으니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할 처지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 선택은 쉽지 않은 일이다.<br><br>새삼스레 두 정당의 홈페이지에 들러 강령과 정책들을 읽어보지만, 두통 때문에 잘 읽히지 않을 뿐더러 읽어봐야 큰 효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두 정당을 현실적으로 운영하는 주체들의 성격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br><br>나는 여전히 민족의 문제와 분단극복-평화통일의 문제를 중요시하지만, 민노당의 소위 '자주파'가 보이는 경직성과 편협성을 편들어줄 생각은 없다. 나는 비록 외부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진 못하지만, 수 년 간의 갈등을 견디지 못해 결국 분당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고 만 이들의 처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개인적으로 신뢰가 가는 강기갑 의원이 대표가 되고, 이정희 의원이 헌신을 보여주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내부에서 민노당이 어떤 혁신을 시도하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br><br>진보신당 역시 외부자의 입장이라 그 실태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듣기로는 촛불을 거치며 민노당 이탈 당원보다 소위 '촛불 당원'들이 더욱 많아졌다고 들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지향에 전반적으로 비판적이며, 아울러 친노무현 성향이라고 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진보신당 내에서 우파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들이라 할 것인데, 진보신당 입장에서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 중이라고 들었다. <br><br>작년 촛불 정국 때 진보신당은 당내 최대 의견 그룹인 '전진'의 총노선 제출로 인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나는 '전진'의 지극히 '운동권스러운' 총노선 문건을 살펴보면서, 도그마에 빠진 민노당을 뛰쳐나온 이들 중에도 여전히 '또 다른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씁쓸했다. 물론 전진 측을 옹호하는 이들의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계급은 중요한 문제이다"라는 주장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역시 그놈의 '소통'인 것이다. 작년의 총노선 논쟁은 진보신당 역시 '소통 부재'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라는 점을 증명했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br><br>원론적인 측면에서 나는 두 진보정당이 통합하길 원하지만, 그것이 두 정당의 당원들에게 있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거니와, 통합을 요구하고 마냥 기다리는 일이 능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고 나의 견해가 결정된다면 나는 어느 정당에 가입하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어떤 정당에 가입하든 나는 연대와 통합을 추구하리라는 점이다. 현재 한국의 제도정치 지형에서 미루어볼 때 진보정당들이 서로 높은 수준에서 연대하고 통합을 추구해야한다는 나의 생각은, 솔직히 합리적인 정세 전망이라기보다는 어떤 '믿음'에 가깝다. 지난 재보선에서 울산 시민들이 무조건적인 후보단일화를 요구했던 사례처럼 말이다. 나는 그 울산 시민들의 요구 역시 합리적인 정세 판단이라기보다는 '약자는 일단 무조건 단결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br><br>어떤 블로거는 이글루스 블로거들의 전반적인 정치적 지향이 리버럴에 가깝다고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글루스에서는 두 진보정당 모두에 대한 비난과 냉소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내가 정당 가입의 의지를 조금씩이나마 굳혀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모습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다. 밖에서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진보와 민주주의의 터전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거대한 적'의 전횡보다 조금 덜 위험할 뿐, 그 '거대한 적'을 암묵적으로 추종하는 태도와 동일한 정도의&nbsp;위험을 내포한 태도이다. 본인이 충분히 경계하지 않는다면, 비난과 냉소의 태도는 어느새 '쿨한 합리주의'로 자기합리화되며 내면화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겁났고, 그래서 차차 정당 가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br><br>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났건만 한국정치는 여전히 개인들로 하여금 예측 가능한 전망을 활용하여 적당한 시기에 참여할 수 있게 할 만큼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당장 다음 선거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고, 심지어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조차 예측하기 힘들다. 나는 여전히 모색하고 있지만, 나중에 너무 늦었다는 후회를 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b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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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얕은 단상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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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5 Sep 2009 18:59:05 GMT</pubDate>
		<dc:creator>자유로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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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잡담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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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 나는 두 종류의 술버릇이 있다. 하나는 자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잠이 쏟아진다. 대개 1차에서 술에 한 번 취하면 잔다. 그러다가 2차에서 다시 깨어나 또 마신다. 지인들은 나의 이런 술버릇을 일러 '리인카네이션'이라고 불렀다. 학생회 활동을 하던 시절엔 술자리마다 매번 이런 패턴을 반복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참 몸을 망치는 일이었지만, 그땐 그렇게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br><br>또 하나는 지독하게 머리가 아픈 것이다. 술마신 다음 자고 일어나 숙취를 겪는 게 아니라, 술에 취하면 곧바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예전엔 자주 있지 않았다. 아마 몸상태가 매우 좋지 않을 때 술마시면 이랬던 것 같다. <br><br>요즘은 예전에 비해 술 마실 기회가 적은데, 전자의 술버릇도 계속 가지고 있지만 후자의 술버릇도 많이 겪고 있다. 그저께 후배들이 하는 장터에서 술을 마신 후 그랬다. 저녁에 공부할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집에 내려왔다. 술을 마신 후 약 5시간여 동안이나 머리가 아파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br><br>오늘 학과에서 관악산 일일 답사를 다녀오고 뒤풀이에서 술을 조금 마셨다. 평소의 주량에도 미치지 않을 만큼 조금 마셨는데, 자리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니 다시 머리가 아프다. 몸은 피곤한데 잠을 자기가 힘들다. 주말에 할 일이 많은데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몸이 병신이 되어가는 듯한데 정말 모 선배 충고대로 보약이라도 지어먹어야 하나. <br><br>2. 오늘 학과에서 관악산 일일 답사를 갔다왔다. 본래 정례 행사이던 2박3일의 가을 답사가 계획되었었지만, 신종 플루 때문에 전격&nbsp;취소되고 그 대신 다녀온 일일 답사였다. 답사라고 해봐야 코스는 관악산의 한우물 유적 하나였다. 사실상 등반/야유회 성격이었달까. 암튼 오랜만의 등산은 좋았고, 생각보다 많이 참여한 학부 친구들과의 어울림도 좋았다. 뒤풀이에서의 푸짐한 음식 역시 좋았다.&nbsp;&nbsp;<br><br>한우물 유적에 관한 이야기도 쓰고 싶지만, 진지한 글을 쓰기엔 머리가 너무 아프다.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오늘 답사에서 특히 기억나는 이야기들은 선생님들의 한우물 유적 소개와 아울러, 휴식 중 송기호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서울의 유적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산성 대목이 등장하자 선생님께서는 "학부생 시절 동안 최소한 북한산성 한 번, 남한산성 한 번, 수원 화성 한 번은 걸어서 돌아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변의 문화재/유적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들리기도 했다. 나는 학부생 시절 남한산성만 한 번 돌아보았었다. <br><br>나는 서울에서 6년여 동안 생활하면서도 서울에 소재한 유적지들을 많이 돌아보지 않았다. 몇몇 돌아본 유적지 중에서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동묘이다. 조선시대 민간신앙의 흔적으로서, 관우신을 모신 사당이다. 관우신앙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중 파병된 명군 병사들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후 조정 차원에서 관우신앙을 인정하고 국가적 제례로써 모셨다.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관우신앙은 국난의 극복을 기원하는 국가 제례로써 받들어졌다. 이 역시 자세한 이야기가 하고 싶지만 뒤로 미루기로 한다. <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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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얕은 단상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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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5 Sep 2009 17:26:44 GMT</pubDate>
		<dc:creator>자유로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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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서울대 법인화 단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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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title="" href="http://taeppo.egloos.com/4238196">중앙대 이사장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라 이사장"</a>(젠카 님 글 트랙백)<br><br>할 일은 산더미 같지만 몇 마디라도 적어본다. 서울대 법인화 이야기이다.<br><br>며칠 전에 이글루스에 들렀다가 위에 트랙백한 글을 읽었다.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칼럼이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그 칼럼을 읽고 그야말로 '뿜었다'. 작년 명박산성 사진을 보자마자 '뿜었던' 이후로는 처음이다. 2003년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가 사측의 노조 분쇄 기도에 맞서 분신을 했을 때,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분노어린 목소리로 여러 번 외쳤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는 그다지 행적을 알지 못했는데, 어느새 중앙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여기 저기 풍문을 들으니 그가 이사장이 된 덕에 중앙대 건물들이 좀 화려해지고 있나 보다.<br><br><a h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747788" target="_blank">[중앙시평] 대학 발전과 참된 주인의식(박용성, 중앙일보, 2009-8-28)<br></a><br>찾아보니 대학에 기업경영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또 다른 칼럼이 동 신문에 실렸다.<br><br><a href="http://news.joins.com/article/829/3781829.html?ctg=2002" target="_blank">[중앙시평] 대학에 기업의 효율성 필요하다(박용성, 중앙일보, 2009-9-18)</a><br><br>시간이 있다면 대학사회의 정체성과 대학사회의 주체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정리해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 다음 기회를 바라야겠다.<br><br>서울대 법인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한편에서 위 칼럼에서 드러나는 류의 논리와 주장들이 횡행하고 있다. 말은 화려하고 그럴 듯하다. 박용성은 두 번째 칼럼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br><br><span style="COLOR: #006600">"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체득해온 기업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대학 운영에 도입하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지 대학을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다."</span><br><br>박용성 본인의 진의야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테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주장의 함의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대학을 기업으로 만들 수는 없다.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수월성 편향을 경계하는 주장은 바로 위 인용문장의 전자를 비판하는 것이다. 지록위마의 고사가 새삼 연상된다. 하기야 대운하 사업을 4대강 사업이라 바꿔부르고 전혀 문제 없다는&nbsp;세상이니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닌가.<br><br>서울대 법인화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이장무 총장의 수사 역시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온갖 장밋빛 전망이 넘실댄다. <br><br><a href="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296" target="_blank">"학생들이 법인화에 동의해 주길 바란다"(이장무 총장 인터뷰, 대학신문, 2009-9-12)<br></a><br>그의 유혹은 교묘하다. 서울대 법인화가 지닌 사회적 함의는 무시한 채, 학생들에게 "너희들에겐 좋은 일만 생기니까 걱정말고 동의해 줘"라면서 욕망을 부추긴다. 진보신당이 적절히 비판했듯이, 서울대 법인화는 서울대의 이기주의가 작동한 측면이 있고, 이장무 총장은 그 이기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학생들을 꼬드긴다. 콩고물이 맛있을 거라면서 말이다.<br><br>법인화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가 논란이 많다. 자본주의 상품 생산과는 거리가 먼 기초학문은 과연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학문과 학습의 자유권은 침해당하지 않을 것인가? 학습의 자유권에 포함되는 문제이지만 특히나 중대한 문제인 등록금은, 과연 얼마나 많이 오를 것인가?<br><br>법인화 찬성론자들이 흔히 말하는대로, 위의 걱정들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근거는 확고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찬성론자들은 흔히 반대론자들에게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지 말고 토론의 장으로 나오라고 촉구한다. 한 사례만 링크해본다.<br><br><a h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91401371" target="_blank">[사설] 서울대 법인화 반대할 명분 없다(한국경제, 2009-9-14)</a><br><br>이것 역시 지록위마라 아니 할 수 없다. 법인화에 비판적인 교수사회와 학생사회는, 법인화에 대한 우려를 표출함과 동시에 법인화를 논의할 사회적 기구를 만들자고 제의해왔다.&nbsp;법인화를 절대 반대한다는 주장은 대세가 아니었다.&nbsp;반대 측에 선 대부분의 인사들은 법인화로 인해 구성될 이사회가 충분히 민주적인 의사결정기구로 기능하고 대학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법인화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천명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측의 제의를 묵살하거나 뿌리쳐온 쪽은 법인화 추진세력이었다. 법인화 추진세력은 법인화의 사회적 공론화를 꺼려했고, 가능하면 밀실행정을 통해 추진시키려 해왔다. 이번에도 밀실행정으로 법인화 법안이 만들어졌지 않은가. 이장무 총장은 인터뷰에서&nbsp;충분한 절차를 거친 것처럼 주장하지만, 말그대로 요식행위였을&nbsp;뿐이다.<br><br>반대 측에서 꾸준히 논의를 제안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묵살한 채 공론의 뒤편에 숨어 몰래 해치우려 하는 추진세력의 작태를 보면서, 어떻게 법인화가 멋진 수사 대로 그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리라 믿을 수 있겠는가?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그 제도를 실천해나가는 주체가 올바로 서지 못한다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해온 허다한 교육정책들의 말로가 대개 그러하지 않았던가.<br><br>나는 법인화 자체를 반대하는 축은 아니다. 법인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학의 경영이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학사회의 주체는 교수, 교직원, 그리고 학생이다. 박용성은 학생은 대학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설사 그러한 시각을 받아들인다 해도 학생은 마땅히 대학사회의 한 주체이다. 소비자는 시장의 한 주체 아니었던가?<br><br>현재 법인화를 추진하고 있는 이들의 독선적인 태도를 보면, 법인화 이후의 대학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게 될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반대 측에서는 다소 거친 구호를 동원해가며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서로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nbsp;많다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욕하는 일은 줄어들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법인화 논의를 통해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만들 수&nbsp;있다면 대학경영의 효율성은 더욱 높아질 수&nbsp;있다. 갈등의 민주적 관리가 가지는 효용성이란 정치학에서 많이들 이야기하는&nbsp;상식&nbsp;아니던가?<br><br>오늘 총학생회가 법인화 총투표를 시작했다. 학생들의 전반적인 관심도는 낮은 것 같다. 나는 투표하고 싶어도 학부생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사실 법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대상이 나와 같은 대학원생인데, 좀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br><br>학생사회에서의 논의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학생정치조직 측에서 내건 현수막을 보면 충격을 전달하기 위함인지 강경한 반대 구호 위주이다. 혹시 법인화에 대해 근본적인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셈이다. 상술했듯이 나는 법인화를 조건부 찬성하는 축에 속하니 말이다. 다만 그 조건이 현 상황에서는 까다롭고 성취하기 힘든 것이라 문제지만 말이다.<br><br>법인화 반대 구호 중에 비중이 높은 것은 역시 등록금 문제로 보인다. 최근 중요해진 문제인 등록금 인상이란 주제를 법인화 문제와 결부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구호가 구체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조금 애매하다. 현재 재학 중인 학생에게 법인화 문제와 등록금 인상 문제를 결부시키는 주장은 잘 와닿지 않는다. 법인화는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 대부분이 졸업한 이후에 시행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배들을 걱정하는, 사회적 연대의식에 호소하는 주장이 되는 것인가? 현재 학생사회의 조건 상 대학생의 사명감과 연대의식에 호소하는 주장은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등록금 인상 문제라고 해서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세심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br><br>지금은 논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공세가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인화와 서울대생의 관계, 또 법인화와 사회의 관계를 돌아보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다. 내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그러다보면 법인화에의 참여와 저항을 적절히 조합하면서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지향점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br><br>무관심에 괴로워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일부 뜻 있는 학생들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하다. 학생운동의 정치력을 담보해 주는 가장 큰 요소인 학생들의 지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법인화에 대해 전향적인 고민을 해보라는 요구는 자칫 적당히 타협하고 투항하라는 조소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nbsp;하지만&nbsp;오직 하나의 출구만 보며 내달리는 일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역사 63년, 그보다 더 긴 서울대의 미래를 규정할 법인화에 우리의 목소리는 반영되어야 한다. 곧 있으면 선거 기간이다. 선거 공간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br/><br/>tag : <a href="/tag/서울대" rel="tag">서울대</a>,&nbsp;<a href="/tag/법인화" rel="tag">법인화</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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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同時代史를 헤치며</category>
		<category>서울대</category>
		<category>법인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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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2 Sep 2009 15:19:01 GMT</pubDate>
		<dc:creator>자유로픈</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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