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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봉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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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세월은 좆같은데 
계절은 꽃같구나</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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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Nov 2009 23:29:5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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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봉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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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꽃같구나</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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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마지막 호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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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br>언론에 호소합니다.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부탁합니다. 그것은 제게 남은 최소한의 인간의 권리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저의 집은 감옥입니다. 집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저의 집에는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아이들</span><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도</span><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친척들도, 친구들도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사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상한 해설도 함께 붙겠지요.</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오래 되었습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이런 상황을 불평할 </span><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처지는 아닙니다</span><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저의 불찰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span><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지켜야 할</span><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최소한의 사생활은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창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자유, 마당을 걸을 수 있는 자유, 이런 정도의 자유는 누리고 싶습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그런데 저에게는 지금 이만한 자유가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카메라가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며칠 전에는 집 뒤쪽 화단에 나갔다가 사진에 찍혔습니다. 잠시 나갔다가 찍힌 것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24시간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어제는 비가 오는데 아내가 우산을 쓰고 마당에 나갔다고 또 찍혔습니다. 비오는 날도 지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방 안에 있는 모습이 나온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커튼을 내려놓고 살고 있습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먼 산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보고 싶은 사자바위 위에서 카메라가 지키고 있으니 그 산봉우리를 바라볼 수</span><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조차</span><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없습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br>언론에 </span><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부탁</span><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합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제가 방안에서 비서들과 대화하는 모습, 안 뜰</span><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에서</span><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나무를 보고 있는 모습, 마당을 서성거리는 모습, 이 모든 것이 다 국민의 알권리에 속하는 것일까요?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한사람의 인간으로서 간곡히 호소합니다. 저의 안마당을 돌려주세요. 안마당에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자유, 걸으면서 먼 산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자유, 최소한의 사생활이라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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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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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Nov 2009 23:29:58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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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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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FONT-SIZE: 100%; COLOR: #474747">‘법조기자’라는 블로거 명으로 다음 view에서 활동하면서 김준규(<strong>사진</strong>) 검찰총장이 법조 출입기자들에게 추첨형식으로 돈봉투를 나눠준 것과 관련해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이라고 여겨져&nbsp;글을 올립니다. 몇몇 블로거가 이 문제를 다뤘지만,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100%; COLOR: #474747">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과&nbsp;소회를 적습니다.&nbsp; </span><br></strong><br><span style="COLOR: #474747"><span style="FONT-SIZE: 100%">사건은 지난 3일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열린 김준규 총장과 법조팀장 기자단과 간담회를 겸한 만찬 자리에서 발생했습니다. 기자 22명과 대검 간부 8명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김 총장이 추첨 형식으로 50만원이 든 ‘돈봉투’를 기자 8명에게 나눠준 것이 사건의 핵심 내용입니다. <br><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strong>● 참석한 법조기자는 경력 15년 안팎</strong></span></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참석한 기자단인 법조팀장을 소개하려면 법조 출입 기자단의 구성을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언론사마다 사회부에 법조팀이 있고, 그 팀에 기자 5~8명이 속해 있습니다. <strong>경력 15년 안팎의 기자가 법조팀장을 맡습니다. </strong>팀장을 비롯한 법조팀 소속 기자들은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으로 매일 출근해 법원과 검찰을 취재합니다. 기자실은 대법원과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과 서울중앙지법 등 네 곳에 있습니다. 팀장(1진)은 대법원을, 현장반장(2진, 경력 10년 안팎)은 서울중앙지검을, 나머지 기자들은 대검찰청이나 서울중앙지법, 서울중앙지검을 출입합니다. </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span style="COLOR: #474747"><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김준규 총장이 사건 당일 만난 기자들은 대법원을 출입하는 팀장(1진)입니다. <strong>김 총장은 대검찰청 출입기자(3진이나 4진)는 몇 번 만났지만, 팀장을 만난 것은 그날이 처음입니다. </strong>언론사별로 한 명씩 22명의 기자가 참석했고, 4개로 분리된 테이블에 대검 간부(8명)와 기자들이 함께 앉아 만찬과 함께 폭탄주를&nbsp;4잔 돌렸습니다.<br></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strong>●&nbsp;조중동, 한겨레·경향 등 포함</strong></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만찬이 마무리될 때쯤 김준규 총장이 갑자기 이벤트를 제안했습니다. 티켓을 준비했는데 추첨 형식으로 나눠주겠다고 말입니다. 냅킨에 똑같은 번호를 두 개 적고, 반씩 찢어서 하나는 기자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조그만 통에 넣었습니다. 김 총장과 대검 간부들이 돌아가며 통 속의 냅킨을 뽑았고 같은 번호가 적힌 4명의 기자가 호출됐습니다. 반응이 괜찮자 한번 더 추첨해 모두 8명의 기자가 당첨됐습니다.&nbsp; 그리고 앞뒷면에 ‘격려’ ‘검찰총장 김준규’라고 쓰여 있는 봉투가 전달됐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문화상품권쯤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공식 만찬은 거기서 끝났고 2차 술자리에 일부 기자가 참석했고, 그곳에서 ‘격려 봉투’ 2개가 더 뿌려졌습니다.</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trong>‘격려 봉투’에 당첨된 기자의 소속 언론사는 다양합니다. 조선·중앙·동아 가운데 한 언론사도 있고, 한겨레·경향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방송사도, 경제지도 있지요. </strong>추첨이었다는데 어쩜 그렇게 다양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span style="COLOR: #474747">　봉투에서 현금과 수표 50만원이 나오자&nbsp;한 기자가&nbsp;다음날 대검찰청 대변인실로 찾아가 항의하고 ‘격려 봉투’를 놓고 나왔습니다. 문제가 공식적으로 불거지자 나머지 기자들은&nbsp;그 돈을&nbsp;봉사단체에&nbsp;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nbsp; 대변인실에 기자가 반납했던 봉투도 여기에 더해졌습니다. 당시 대변인실은&nbsp;김 총장이 즉흥적으로 제비뽑기를 제안해&nbsp;‘격려 봉투’에 현금이 들어있는줄 몰랐다고&nbsp;설명했습니다. 봉투는 앞서 방문했던 서울서부지검에서 쓰고 남은 것이라고 했습니다.&nbsp;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려고 공식적으로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는 해명입니다. <br></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strong><br><span style="COLOR: #474747">● 돈봉투 반환·기부로 엇갈려&nbsp;</span></strong></span></span></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br><span style="COLOR: #474747">　‘격려 봉투’&nbsp;를 기부하기로 기자들이 정리했지만,&nbsp;한겨레신문은 이 사건을 보도하겠다고 법조 출입 기자단에 밝혀왔습니다.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김준규 총장의 행실이 부적절했음이 분명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nbsp;것입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도 보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6일 아침,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고, 인터넷 언론이 잇따라 받아 보도했습니다. 결국 김 총장은 대변인실을 통해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었다.”며 유감을 표명합니다. </span></span></span><br><span style="COLOR: #474747"><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span style="COLOR: #474747">　서울중앙지검을 출입하는 법조팀 2진 기자인 저는 문제의 그 만찬자리에 가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법원을 출입하는 1진(법조팀장)만 언론사당 한 명씩 참석하는 자리였으니까요. 법조팀장들은 김준규 총장이나 대검찰청과 관련한&nbsp;기사를 쓰지 않습니다. 대검 출입기자들이 따로 있으니까요. 김 총장 측이 ‘뇌물이나 촌지가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span><strong><span style="COLOR: #474747">법조팀장들이 대검 출입기자들이 쓰는 기사를 ‘데스킹’하다는 점에서,&nbsp;대검의 해명이 딱히 설득력이 있지는 않습니다.<br></span></strong></span></span><br><span style="COLOR: #474747"><strong><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Georgia">● 만연한 ‘패밀리 문화’가 원인</span></strong><br></span><span style="COLOR: #474747"><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김준규 총장의 그날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strong>기사생활 8년 가운데 5년을 법원과 검찰을 출입했지만, 저는 ‘돈봉투’를 뿌리는 법조인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strong>구설수’에 민감한&nbsp;검사, 판사들이&nbsp;그런 일을 버린다는 건&nbsp;상상하기도 힘듭니다.&nbsp; 언론인에게 ‘촌지’를 건넸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그건 먼 과거 이야기입니다. 요즘처럼 옆집 숟가락도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시대에…. 미친 짓이죠.</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span style="COLOR: #474747"><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trong>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법조팀에 만연한&nbsp;‘패밀리 문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strong>기자가 검찰이나 법원 등을 오래 취재하다 보면&nbsp;취재원과 가까워지고, 그만큼 그 문화에&nbsp;젖어 듭니다. 판검사와 가까이 지내며 자연스레 그들의 애환에 마음을&nbsp;열고 그들을 견제하고 비판해야 할 사명을 점점&nbsp;게을리할 수 있습니다.&nbsp; 매일 얼굴보는 사람을 비판하는 ‘아픈 기사’를 쓰기가 참 민망해질 수도 있죠.&nbsp;기자가 그렇게 ‘패밀리’가 되면 ‘특종’도 수월해집니다. ‘밀월관계’에 있는&nbsp;기자에게&nbsp;뉴스감을&nbsp;흘려주는 거지요. 먹이사슬처럼 먹고, 먹히는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nbsp; <br></span></span><br><strong><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Georgia">● ‘집안어른’이 주는 용돈</span></strong><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준규 총장은 법조팀장을 ‘패밀리’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지방검찰청에 방문해 직원들에게 격려금을 주듯 ‘기자 패밀리’에게 격려금을 나눠준 것입니다. <strong>오히려 이 같은 ‘가정 문제’를&nbsp;누설한&nbsp;일부 언론사를 ‘패륜아’로 여기고&nbsp;야속해할 수도 있습니다. </strong></span></span><br><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　</span></span><br></span><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eorgia"><span style="COLOR: #474747">　‘검찰총장 돈봉투 추첨 사건’의 1차적 책임은, 그래서 &nbsp;기자들에게 있습니다. 검찰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 결과 검찰총장이 기자들을 ‘패밀리’로 오해하도록 했으니까요. 또 돈봉투를 검찰총장에게 되돌려주지 않고 기부단체에 보냄으로써 기자들 스스로도 ‘검찰 패밀리’임을 자인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strong>집안 어른’께서 주신 용돈을 돌려드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서 기부하는 편법을&nbsp;동원한 것이라고 봅니다. </strong>돈봉투가 살포된 그 현장에서 기자들이 강하게 항의하며 문제제기를&nbsp;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nbsp;‘공연 티켓’이나 ‘문화상품권’인 줄 알았다고 해명했는데&nbsp;정말 돈인줄&nbsp;받는 순간, 혹은&nbsp;만찬자리가 끝날 즈음&nbsp;몰랐을까요?&nbsp;</span><span style="COLOR: #474747"><strong>&nbsp;<br><br>&nbsp;&nbsp;&nbsp; </strong>그래서 이 사건의 발생부터 마무리까지 저는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고, 또 법조기자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많은 고민과 과제를 남겨준 사건이라 마음이 무겁습니다. </span></span></span><br><br><div class="entry-ccl" style="CLEAR: both; MARGIN-BOTTOM: 10px; TEXT-ALIGN: right"><!-- RSS 링크 및 배너 --></div><div id="sidebar"><div class="side_item" id="side_item"><div class="btn"><a onclick="window.open(this.href); return false" href="http://ejung.blog.seoul.co.kr/rss"></a>&nbsp;<a onclick="window.open(this.href); return false" href="http://iendev.kr/"></a>&nbsp;</div></div></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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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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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Nov 2009 22:58:53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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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겨레 경향? - 개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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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노무현은 박연차가 조카사위에게 퇴임 송금했다는 500만불은 퇴임 이틀을 앞둔 대통령에게 무슨 특혜를 기대할 것도 아니고 그저 오해를 받을까봐 미루었던 사업가끼리의 거래일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하고, 하지만 아내가 수십년 후원자에게 100만불을 빌린 것은 차용증을 썼고 대가성이 아니었어도 사실이고 잘못이었다고 사과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돈을 빌린 사실을 재임중에는 몰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겨레, 경향은 노무현을 아내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다. <p>경향의 유인화라는 기자는 노무현 부부의 가상 대화라면서 노무현이 “걱정 마. 내가 막무가내로 떼쓰는 초딩화법의 달인이잖아. 초지일관 당신이 돈 받아서 쓴 걸 몰랐다고 할 테니까.”라고 소설을 썼다. 한겨레 김종구 논설위원은 당신의 부패로 진보 가치까지 덩달아 똥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마지막 승부수”를 기대한다며 사실상 노무현에게 자살을 권했다.&nbsp; </p><p>노무현을 죽인 것은 언론이다. 특히 한겨레와 경향의 죄가 엄중하다. 봉하마을에서는 한겨레, 경향만 구독했다. 부인한테 죄를 덮어씌우고 죽지도 않는 비굴한 놈으로 몰아세운 것이 경향이고 한겨레였다. 그런데도 사정을 모르는 국민은 오늘도 한겨레와 경향에 노무현 추모 광고를 실어준다.</p><p>내일이라도 노무현처럼 행동하고 노무현처럼 말하는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한겨레와 경향은 개과천선하여 그가 하는 말에 진정으로 귀기울일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언론이 진보의 가치를 독점하는 한 노무현은 다시 죽는다. 그리고 추모광고는 다시 실릴 것이다. 노무현을 죽인 똑같은 신문에.</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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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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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5 Oct 2009 14:59:18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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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자본주의 사회주의 -개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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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929년 2조9980억달러 규모였던 세계무역은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1930년에는 2조7390억달러, 1931년에는 1조8390억달러, 1932년에는 1조2060억달러, 1933년에는 9920억달러로 급감했다. <p>세계무역이 1930년과 1931년 사이에 무려 1조달러 준 것은 1930년 6월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개정 관세법의 영향이 컸다. 미국은 자국 노동자를 보호하려고 2만개 품목의 관세를 크게 올렸다. 그러자 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보복 관세를 물렸다. 보호무역을 했지만 실업자는 더 늘었다. 1930년에 7.8%였던 미국의 실업률은 1931년에는 16.3%로 껑충 뛰었고 1932년에는 24.9%, 1933년에는 25.1%로 악화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약과였다. </p><p>변변한 자원도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식민지도 없이 1차대전 이후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갚느라 허덕이던 독일에게 대공황은 재앙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국 금고에만 금을 쌓아두고 타국의 어려움은 외면했다. 전쟁배상금과 경제난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독일은 극도의 경제난에 봉착했다. 독일 국민은 독일의 존립을 위협하는 무국적 자본주의와 무국적 공산주의로부터 독일을 지켜주겠다며 국가사회주의를 부르짖은 히틀러에게 빠져들었다. </p><p>히틀러는 처음부터 "생존공간" 확보를 부르짖었다. 체코나 폴란드 같은 약소국에게 독일의 생존공간론은 위협이었지만, 1차대전에서 진 독일에게는 다른 의미도 있었다. 대공황기를 거치면서 히틀러는 불안한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에 기대지 않는 독일만의 자립경제를 세워야 하고 그러자면 원료와 시장 확보를 위한 생존공간 마련이 급선무라고 믿었다. </p><p>히틀러는 자립경제를 위한 생존공간 확보를 위해 폴란드와 체코처럼 국경을 맞댄 나라를 야금야금 삼켰다. 나치의 자립경제는 타국을 등쳐먹은 사이비 자립경제였다. 자기의 어려움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은 북한의 자립경제와는 달랐다.</p><p>일본이 1930년대 초 만주로 쳐들어간 것도 면제품 수출 시장이 미국과 영국의 보호주의로 막히면서 체제 유지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무솔리니도 1922년에 정권을 잡았지만 바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국제 금융이 와해되고 각국의 보호주의가 확산되면서 이탈리아도 생존공간론을 내걸고 1930년대 중반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경제 위기 자체가 파시즘을 낳은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를 빌미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채택한 보호주의가 파시즘의 큰 원인이었다. </p><p>WTO(세계무역기구)에 따르면 금년 들어 무역 규제가 급증하고 있다. 각국은 보호주의를 추구하면 공멸이라고 국제회의에서는 말해도 막상 자기 나라에서는 자국 기업과 자국 노동자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려고 한다. 오바마도 기업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미국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중국 정부도 중국 기업들에게 비슷한 지침을 내리고 있다. WTO는 올해 세계무역이 작년보다 10%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보호주의가 확산되면 앞으로 무역량은 더욱 급감할 수밖에 없다.&nbsp; </p><p>보호주의의 파도가 거세져도 영토가 넓고 자원이 많은 나라는 타격을 덜 받는다. 미국인은 해외여행은 못 다닐지 몰라도 굶어죽지는 않는다. 러시아도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도리어 큰소리를 칠지 모른다. 영국은 자원은 별로 없지만 영연방이라는 기댈 언덕이 있다. 루마니아처럼 별볼일없는 나라도 전에는 나치 독일에 빌붙었지만 지금은 유럽연합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다. 중남미 국가는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기에 공동체 의식이 짙고 아세안도 그렇다. 이슬람권은 말할 나위 없다. 쿠바나 북한처럼 자립경제를 추구해온 나라도 새삼 어려울 것이 없다. 한국은 다르다. </p><p>한국은 자원이 없다. 자체 시장도 좁다. 전세계를 시장으로 삼아 제조업으로 급성장한 나라다. 보호주의의 벽이 높아져서 수출길이 막히면 고립무원이다. 90년대 초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걸은 것은 돈이 없어서였다. 어제까지 현물로 거래했던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현금결제를 요구하자 북한은 아무것도 들여올 수가 없었다. 한국도 보호주의로 수출길이 막혀 돈을 못 벌면 아무것도 들여올 수가 없다. 아니, 돈이 있다 하더라도, 막대한 부채를 안은 미국이 달러를 마구 찍어내면서 한국이 많이 보유한 미국 채권이 휴지가 되면, 한국은 아무것도 못 들여온다. 휴지조각이 된 달러 대신 상대국에서 현물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무역 체제에서 다른 나라 자원을 들여와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면서 먹고 살아온 나라다. 보호주의 체제에서 한국은 풍요를 못 누린다.</p><p>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꼭 모순이 아니다. 나라 밖으로는 개방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의 강점을 살리고 나라 안으로는 복지와 안정이라는 사회주의의 강점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영리한 나라는 실제로 그렇게 한다. 자유무역의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이나 중국이 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같은 나라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무역의 파도를 타고 전세계를 수출 시장으로 삼아 급성장했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지만 세계화의 수혜를 소수가 독점하지 않고 다수가 나누어가진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 나라의 발전 조건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서로가 양보하는 타협의 문화가 있었고, 그것을 주도한 것은 언론이었다. </p><p>그러나 한국의 언론은 자기 나라의 조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다. 보수 언론은 아무리 세계화를 통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은 오직 부자의 몫이며 서민은 떡고물만 받아도 감지덕지라고 떠든다. 진보 언론은 세계화 자체를 부정하고 자원이 없는 한국더러 자원 부국 베네수엘라 같은 사회주의적 노선을 요구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면 신자유주의자라고 몰아붙인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로 안다. </p><p>노무현은 개방과 무역을 통한 한국 공동체의 기회 확대를 부르짖었다가 친미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로 진보 언론에게 지탄받았고, 복지와 안전망 구축을 통한 개인의 기회 확대를 부르짖었다가 수구 언론에게 친북 빨갱이로 난도질당했다. 저질 자본주의와 저질 사회주의를 맹신하는 저질 한국 언론이 합심해서 노무현을 죽였다. </p><p>김대중 전 대통령은 추모사에서 국민이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지 않는다고 했지만 깨어 있는 국민을 만드는 것은 깨어 있는 언론이다. 깨어 있는 언론을 지금이라도 만들지 못하면 노무현은 영원히 죽는다. <b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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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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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5 Oct 2009 14:53:56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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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확보외교와 탕진외교 - 개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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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앞으로 100년 뒤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지금의 경제 전문가들이 가장 간과하는 것은 자원의 중요성일 것이라고 <a href="http://mit.edu/krugman/www/BACKWRD2.html" target="_blank"><span style="COLOR: #3366ff">갈파하는 글</span></a>을 오래 전에 썼다. 100년 뒤로 갈 것도 없이 자원의 중요성은 이미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a href="http://business.timesonline.co.uk/tol/business/industry_sectors/natural_resources/article6812818.ece" target="_blank"><span style="COLOR: #3366ff">타임스지 보도</span></a>에 따르면 중국 공업정보기술부가 앞으로 중국에서 채굴되는 희귀 광물의 수출 금지를 건의하는 백서를 내놓았다. </p><p>특히 란탄 함유 광물은 전기차, 풍력발전설비, 아이포드, 레이저, 초절전전구, 레이다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데 중국이 전세계 공급량의 95%를 장악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년 전부터 희귀 광물을 독점한다는 장기 국가 전략을 세웠다. 란탄은 과거에는 미국, 호주, 남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정련 생산했지만 까다로운 공정과 환경 규제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포기하는 바람에 중국이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p><p>중국은 지난 10년 동안 희귀 광물의 수출량을 해마다 6%씩 줄였다. 중국은 물론이고 인구 대국 인도와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의 소비 시장이 커질 경우 자원을 둘러싼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크루그먼은 19세기가 산업 생산으로 돈을 벌었고 20세기가 기술로 돈을 벌었다면 21세기는 땅과 자원으로 돈을 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제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p><p>이런 상황에서 땅과 자원이 부족한 한국 같은 나라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노골적인 친미, 친일 행각으로 자원 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을 샀다. 미국은 자원 부국이지만 자기가 쓰기에도 모자라다. 일본은 한국만큼이나 자원 빈국이다. 중국의 희귀 광물 수출 중지로 가장 타격을 받는 나라가 일본이다. 반면에 러시아와 중국은 한국이 중도적 입장만 취해주어도 크게 고마워하고 적어도 자원면에서 한국에게 큰 도움과 기회를 줄 수 있는 나라다. </p><p>실제로 김대중 대통령은 우주항공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러시아와의 협력으로 미국의 견제를 뿌리치고 단시일 안에 한국의 우주공학이 급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다져놓았다. 이번에 나로호 발사가 실패한 것도 이명박이 차기 발사체 제작을 일본으로 넘겨주면서 러시아가 협력에 소극적으로 나온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경계심을 파고들어 남북이 손을 잡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노무현 대통령의 원대한 구상도 이명박의 실속 없는 친미 행각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p><p>노무현 대통령은 예멘에서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까지 오로지 자원 외교만을 위해 17개국을 돌아다녔다. 덕분에 참여정부 5년 동안 역대 정부가 25년 동안 확보한 기름보다 2배 가까이 많은 110억배럴의 석유를 확보했다. 한국의 한 해 석유 소비량이 8억배럴이니 소비증가량을 감안하더라도 10년이 넘게 쓸 수 있는 원유를 노무현 대통령은 후손을 위해 길게 보고 움직였다. 확보외교였다. </p><p>반면 이명박은 잘 사는 나라만 찾아다니면서, 노무현이 힘들여 쌓아놓은 자원부국과의 신뢰 관계를 허물어뜨린다. 탕진외교다. 그렇지만 오늘도 이명박은 세일즈 외교의 달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그렇게 떠들어주기 때문이다. <br><b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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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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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5 Oct 2009 10:18:27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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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콜레라 외교 - 개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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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조지워싱턴대학의 경영학교수 토머스 나지는 미국 국방정보국이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수도 시설을 의도적으로 폭격하고 또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로 이라크 당국이 수돗물 정수에 들어가는 화학약품을 수입하지 못하여 이질과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이 창궐하여 어린이를 비롯한 수많은 이라크인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기밀문서를 입수했다.<br><br>&lt;이라크의 식수 처리 약점&gt;이라는 제목으로 1991년 1월 22일 작성된 이 문서는 이라크는 물을 정수하는 특수 설비와 일부 화학약품을 수입하는데 만약 유엔 경제 제재로 이를 조달하기 어려울 경우 깨끗한 식수 부족으로 이라크 국민이 곤경에 처할 것이고 전염병도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입이 금지된 품목에는 수돗물 정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염소도 들어가 있었다. 보고서는 또 깨끗한 물이 부족하면 식품과 전기제품, 특히 약품 생산도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불순물이 섞인 물은 이들 제품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또 제재 효과로 인한 이라크 수돗물 사정 악화는 갑작스럽지는 않아도 6개월 안에 현실화할 것으로 내다보았다.<br><br>그리고 실제로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한 10년 동안 100만 명의 이라크인이 약품 부족과 위생 환경 악화로 인한 질병 만연으로 죽었다. 이 가운데 50만 명이 어린이였다. 미국은 경제 제재로 필요한 의약품과 화학약품을 이라크가 구입하지 못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어린이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경제 제재를 풀지 않았다. 이라크 국민이 정권에 불만을 느끼고 사담 후세인을 무너뜨리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량살상 "제재"에도 불구하고 후세인 정권이 건재하자 대량살상 "무기"가 있다는 이유를 붙여서 무력으로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이 안심하고 이라크로 쳐들어간 것은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br><br>짐바브웨에서도 지금 콜레라가 번지고 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참는 데도 한도가 있다면서 무가베 정권의 무능을 성토한다. 그런데 짐바브웨에서 콜레라가 번지는 것은 수돗물을 포함한 위생 여건이 악화되었기 때문이고 그 근본 원인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경제 제재에 있다.<br><br>무가베가 국토의 알짜배기 땅을 독점한 수천 명의 백인 지주들한테서 땅을 되찾지 않고서는 천만이 넘는 흑인의 삶이 개선될 가능성이 요원하다고 보고 토지 구입 대금을 대주기로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영국에 반발하여 토지 회수에 들어가자 미국은 2001년 12월 짐바브웨 민주주의와 경제 회복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짐바브웨에는 어떤 국제 금융 기구에서도 지원을 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었다. 짐바브웨 돈은 똥값이 되었고 짐바브웨 정부는 최소한의 필수품도 구입하지 못하는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이라크처럼 화학약품과 의료품을 수입하지 못하게 한 제재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돈줄을 말려서 미국이 의도한 결과는 똑같았다. 짐바브웨 국민의 입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나올 때까지 짐바브웨 경제를 압살하는 것이었다. 콜레라는 그런 경제 봉쇄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결과다. <br><br>이런 공갈 외교는 확실히 효력을 발휘한다. 짐바브웨의 이웃나라이며 백인 대지주의 소유권을 고스란히 인정해준 남아공은 흑인이 보유한 토지가 겨우 4%에 불과하다. 당연히 실업률이 엄청 높다. 남아공은 조폭 천국이다. 조폭은 멀쩡한 아파트를 강탈해서 임대료를 주민들에게 강제로 받아낸다. 그러면 아파트 건물 주인은 다른 조폭을 고용해서 다시 아파트를 빼앗는다. 공권력이란 것이 없다. 그저 돈 많은 놈, 주먹 센 놈이 최고다. 만델라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흑인 지도자 가운데 상당수는 백인들이 던져둔 떡고물을 받아먹고 기업인으로 변신하여 부패의 성을 높이 쌓고 있다. 그나마 생각있는 흑인 지도자들이 짐바브웨처럼 남아공도 결국 토지를 백인들로부터 몰수하는 것 말고는 실업률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짐바브웨가 서방한테 사냥 당하는 꼴을 보면서 무서워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br><br>미국은 아무리 인류 보편의 기준으로 보아 최악의 인권 유린을 자행해도 자국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이슬람 정당도 못 만들게 하고 자기를 독재자처럼 그렸다는 언론인들을 잡아 가두어도 서방은 매년 수십억 달러씩 경제 지원을 해준다. 에티오피아 독재자 멜레스가 아무리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정적을 죽이고 시위대에 총을 쏘아도 미국은 열심히 군사 지원을 해주면서 이웃나라 소말리아에서 민주적 선거로 들어선 이슬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써먹는다. 반면 서방의 이익을 건드리는 나라 지도자는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든 제거하려고 혈안이 된다. 이것이 서방의 인권 외교다. 그것은 전염병을 퍼지게 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콜레라 외교이기도 하다. <br><br>북한 주민이 북한 당국에 의해 부당한 탄압을 받는다면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권리가 한국 시민에게는 당연히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한국의 일부 기독교 광신도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그들이 북한의 인권을 집요하게 거론하는 것은 북한 주민이 걱정스러워서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목적이 있어서다. 그들이 북한에 들이미는 인권 외교는 북한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 쾌재를 부르는 콜레라 외교의 다른 얼굴이다. <br><br>이라크에서 미군은 수감자에 대한 구타, 고문, 살해를 숱하게 저질렀다. 그러나 처벌받은 병사는 거의 없다. 미국은 타국의 인권을 걱정하기 전에 자국 군인의 타국민에 대한 인권 유린부터 단속해야 마땅하다. <br><br>누구에게나 인권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인권에 대해서 떠들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라크 국민이 무더기로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대량살상제재"를 가했고 지금도 짐바브웨에서 그런 공작을 펼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한국전쟁 때 북한 사람을 벌레처럼 죽인 친일 기독교 광신도들은 북한 사람의 인권을 거론할 자격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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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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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1 Oct 2009 15:06:22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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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윌슨과 노무현의 고독 (개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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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노동당 의원 해롤드 윌슨은 야당 시절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반대했다. 50년대 초 그는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를 지키는 데 영국의 군인 한 명 총 한 자루 보낼 수 없다"면서 "미국 상원의 광신적 매파들 때문에 아시아에서 협상을 통한 사태 해결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반미 색채를 드러냈다. 그러나 1963년 노동당 당수가 되고 나서는 영미 공조를 강조하는 발언이 부쩍 늘어났다. 그래도 베트남 전쟁의 부당성을 성토하는 기본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br><br>1964년 10월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윌슨이 총리에 오르자 영국 외무부는 반미 발언을 자제해줄 것을 총리에게 요청했고 윌슨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미국이 저러다가 큰 곤경에 처한다고 말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미국을 이해한다는 입장을 보일 때가 많았다. 특히 소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럽의 다른 정상들하고 만난 자리에서는 일관되게 미국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br><br>그러나 베트남전이 확대되어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자 노동당 여론과 국민 여론은 안 좋게 돌아갔다. 1967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미국이 베트남에서 추구하는 정책에서 노동당 정부가 완전히 돌아설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영국 국민의 66%도 영국이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동당 지도부도 정부에 불만을 강하게 나타냈다. 하지만 윌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br><br>윌슨이 좌파 정치인으로서 전쟁을 혐오하는 개인적 소신과 핵심 지지자들의 반미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지지를 끝까지 접지 않은 것은 영국 경제와 파운드화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2차대전을 끝으로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미국에게 완전히 넘겨준 영국은 이제 미국의 뒷받침이 없으면 경제적 안정을 장담하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br><br>물론 윌슨은 공식적으로는 영미 동맹과 영국 경제 문제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했다. 1965년 미국 방문을 앞둔 외무장관에게도 만약 미국 대통령이 두 가지를 연계하려는 조짐이 보이거든 이것이 앞으로 영미 관계에 심각한 균열을 빚어낼지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라고 당부했다.<br><br>그러나 1965년 9월 파운드화가 곤두박질치면서 영국은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 미국측은 당초 영국의 파병까지 요구했다가 한 발 물러섰지만 그렇지 않아도 베트남 상황이 안 좋은데 존슨 대통령의 심기가 굉장히 안 좋은 상태라면서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행위를 해서는 곤란하다고 으름짱을 놓았다.<br><br>미국의 험프리 부통령은 윌슨 총리에게 존슨 대통령은 이 문제를 굉장히 개인적 차원에서 보고 있으며 만약 영국 총리한테서 "배신"당했다고 볼 만한 충분한 사유가 나타날 경우 그 반응은 상당히 거칠게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운드화는 이듬해 여름 다시 한번 위기를 겪었고 윌슨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국내 반전 여론과 미국의 고압적 요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br><br>윌슨은 그러나 영국이 미국 정책을 한결같이 지지하는 것이 영국 경제의 불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자서전에서조차 극구 부인했다. 딱 한 번, 윌슨이 속내를 비춘 것은 베트남 문제를 놓고 한 노조지도자 출신의 각료와 부딪쳤을 때였다. 이 자주파 각료가 영국이 미국 정책에 단호히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자 윌슨은 분통을 터뜨리면서 전주한테 성질을 부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받아쳤다.<br><br>노무현이 대통령 시절에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을 보고 지지를 철회했다는 사람을 많이 보았고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는 아직도 이것을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지난 참여정부가 미국의 전투병 파병 요구를 뿌리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나라가 통화의 주도권을 쥔 나라의 압력에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미국의 영원한 동맹국을 자처해온 영국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영국도 저런데 하물며 한국이랴.<br><br>패배주의에 젖어서가 아니다. 혈기왕성한 청년이라면 이라크 파병으로 지지를 접는다 해도 할 말은 없고 그런 패기가 젊음의 특권인지도 모르지만, 집권을 염두에 두는 정치 세력이라면 냉정한 현실을 놓고 국익을 위해 소신을 접어야 하는 지도자의 심정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모르긴몰라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영국의 윌슨 총리에게 했던 협박보다 더 지독한 공갈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에게 했을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그런 공갈을 당하는 한국 대통령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지 한 번이라도 곰곰히 생각해보고 나서 심상정이든 권영길이든 한국의 진보 정치인들도 노무현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욕하기 바란다. 만약에 자기가 집권을 해서 대통령이 되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그런 진보 정치 운동은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다시 대학교에 편입해서 학생 운동이나 평생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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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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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1 Oct 2009 15:02:41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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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롤링스톤즈 (oimusic 김경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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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class="contents tx-content-container">2002년 10월, 롤링 스톤즈의 새로운 베스트 앨범 [Forty Licks]가 발매되었다. 40년에 이르는 밴드의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최초의 앤솔로지식 앨범이라는 의의를 지니는 이 2장짜리 앨범에는 그들의 음악적인 변천을 담은 대표적인 작품들 외에 4곡의 새로운 작품이 수록되어, 밴드 결성 40주년을 기념한 새로운 세계 투어 소식과 함께 롤링 스톤즈의 많은 팬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즐거운 건 지난 8월, 밴드의 실질적인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데카(Decca)]와 [런던(London)] 레이블 시절의 모든 앨범들이 새로이 리마스터된 완벽한 음질의 SACD(Super Audio CD)로 재발매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존 CD 플레이어와의 호환이 가능한 포맷의 이 새로운 리마스터 시리즈는 생생한 현장감을 표출하는 놀라운 음질과 멋진 디지팩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물론 롤링 스톤즈라는 그룹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난 생소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As Tears Go By''나 ''Ruby Tuesday'', ''Angie'' 등 몇 곡의 발라드와 TV 시리즈에 사용되어 친숙해진 ''Paint It Black''과 같은 작품들, 또는 간간이 들려온 믹 재거(Mick Jagger)에 관련된 가십기사-가십성 기사로 주로 언론에 오르내리던 그는 오랜만에 지난 6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로 유명한 그룹. 그저 이런 정도의 위상만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롤링 스톤즈가 비틀즈(Beatles)에 버금가는 위대한 록 밴드이고 이들의 음악이 대중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말은 아무런 공감을 얻지 못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 탁월한 그룹이 만들어낸 사운드는 분명 오랜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짜릿한 감흥을 전해주었고 여전히 그들의 이름은 상상 이상의 카리스마와 힘을 지닌다.<br><br><br>롤링 스톤즈는 ''60년대 말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라 규정했을 정도로 자신 만만하고 (어찌 보면)건방진 태도를 보여왔던 그룹이다. 깔끔하고 고상하며 매너 좋은 청년의 이미지로 출발했던 비틀즈와는 대조적으로 롤링 스톤즈는 숱한 여성 편력과 마약에 관련된 스캔들, 다분히 마초적인 반골 기질로 충만한 보컬리스트 믹 재거의 거친 쇼맨십과 더불어 무례하고 반항적이며 난폭하고 통제할 수 없는 악동의 이미지로 일관해왔다. <br>물론 밴드의 이러한 개성은 믹 재거에만 집중되어 있던 건 아니고 대부분의 멤버들이 제각각 무대 매너나 사생활의 측면에서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음악 외적인 이미지는 사운드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반영이 되고 있다. 이들이 당시의 여느 그룹들처럼 비틀즈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롤링 스톤즈의 사운드는 비틀즈와는 다른 출발점과 지향점을 가진다. ''60년대 이후 미국의 대중 음악시장을 강타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중추에 섰던 주인공으로서 비틀즈가 ''50년대의 고전 로큰롤과 영국의 스키플(skiffle) 사운드를 바탕으로 한 흥겨운 리듬과 가벼운 선율을 특징으로 했다면, 롤링 스톤즈는 흑인들의 음악인 리듬 앤 블루스를 철저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한 거칠고 야성적인 록 음악으로 특유의 사운드를 완성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리듬 앤 블루스와 블루스, 소울의 감각으로 무장된 이들의 음악 성향이 가 닿은 곳은 로큰롤의 영역이었지만 그 곁가지에는 하드 록과 사이키델릭, 포크와 컨트리 앤 웨스턴, 가스펠, 팝, 레게, 그리고 뉴 웨이브와 댄스에 이르는 다채로운 장르의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느 록 보컬리스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믹 재거의 ''퇴폐적인'' 음색은 뚜렷하지 않은 발음과 함께 롤링 스톤즈의 중요한 정체성을 이루고 있으며 키스 리처즈(Keith Richards)와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의 꽉 짜여진 강렬한 기타 연주, 그리고 빌 와이먼(Bill Wyman)의 섬세한 베이스와 찰리 와츠(CharlieWatts)의 파워풀한 드럼 연주가 ''60년대의 밴드 사운드를 완성해주었다.<br>밴드의 사운드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리듬 앤 블루스를 바탕으로 한 로큰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밴드의 역동적이고 격한, 또는 흥겹거나 감미로운 사운드의 바탕에는 늘 리듬 앤 블루스나 블루스가 자리한다. 때문에 롤링 스톤즈의 음악에는 항상 깊고 풍부하고 짙은 감성이 배어 있다. 결국 미국에서 파생된 음악적 요소들을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섹시한 리듬감이 가미된 로큰롤은 대중 음악계에 전에 없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 <br>이들이 탁월한 음악으로 확고한 명성을 얻고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리며 1960년대라는 전성기를 보낸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렀지만 여전히 밴드의 재능과 창의력은 건재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활동을 멈춘 적이 없으며,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를 중심으로 잦은 멤버 교체 없이 오래도록 꾸준한 생명력을 유지해오고 있다. 수많은 록 그룹들 중에서 이들만큼 오랜 역사와 음악성과 창조력과 세대를 초월한 대중적인 인기를 한꺼번에 거머쥐고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이들의 공연은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보고 싶어하는 록 콘서트의 1순위로 자리매김되어 있고 앨범은 늘 잘 팔려나간다. 밴드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총 5,350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림으로써 미국 시장에서 열 다섯 번째로 많이 팔린 아티스트에 랭크되어 있다.<br>기존의 체제에 대한 극도의 반항을 담은 펑크 록과 그로부터 파생된 스타일은 ''70년대의 후반을 정리하는 문화였다. 그런데 롤링 스톤즈의 음악과 행동 양식과 이미지는 그들이 이미 ''60년대에 ''펑크적''인 방법론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이들은 항상 화가 나 있는 듯 격한 에너지를 발산했으며 거칠고 퇴폐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귀에 쏙 들어오는 예쁜 멜로디와 매력적인 미성의 보컬로 소녀 팬들을 사로잡았던 당시의 여러 뮤지션들과는 달리, 롤링 스톤즈는 멜로디 대신 연주에서의 테크니컬한 측면을 강조했고 귀에 쏙 들어오는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거친 샤우트로 자신들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당시의 공연들을 담은 TV 쇼나 콘서트 필름들을 통해 우리는 감미로운 발라드조차 거친 목소리로 부르며 리드미컬한 몸짓을 하는 믹 재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노랫말에서 드러나는 성적인 의미들, 냉소적이고 풍자적이거나 부정적이고 허무한 내용들과 무대에서의 퇴폐적인 행동 등은 이들의 공연장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폭동이나 멤버들의 섹스, 마약에 얽힌 끊이지 않는 스캔들과 더불어 밴드의 악명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보수적인 언론이나 대중들은 이러한 이들의 모습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반대편에서 롤링 스톤즈는 숭배에 가까운 지지를 보내는 골수 팬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바탕에 탁월한 음악적 재능이 자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이지만 말이다. <br>밴드의 사운드는 멤버 교체와 음악적인 변화에 의한 특유의 스타일을 기준으로 한 시대적 구분이 가능하다. 우선 이들의 데뷔 시점부터 [December''s Children (And Everybody''s)](''65)에 이르는 시기로, 이 때에 밴드는 주로 척 베리(Chuck Berry)를 위시한 리듬 앤 블루스의 고전들을 리메이크 하여 연주했다. 단순한 비트와 연주 패턴, 거친 리프 중심의 멜로디와 믹 재거의 외쳐대는 듯한 강렬한 보컬 등 초기 롤링 스톤즈의 정체성이 확연히 자리를 잡은 시기이다. 자신들의 오리지널 곡들로 구성된 최초의 앨범 [Aftermath](''66)에서 [Let It Bleed](''69)까지의 시기는 록계에 전반적으로 사이키델릭의 열풍이 불어닥친 때이기도 하다. 이들 역시 신비주의와 약물에 의한 환각상태로 대표되는 사이키델리아의 흐름에 몸을 맡겼고, 전에 없던 효과음과 일렉트릭 사운드가 강조된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다. 전반적으로완성도 높은 사운드 프로덕션과 보다 안정된 테크닉, 그리고 더욱 복잡하고 치밀한 기타 연주로 특징 되는 ''70년대에 밴드는 전에 없던 다채로운 사운드를 선보인다. 자신들의 레이블 &lt;롤링 스톤즈&gt;를 설립한 후 발매한 [Sticky Fingers](''71)부터 [Emotional Rescue](''80)까지 해당되는 이 시기에는 요절한 브라이언 존스의 뒤를 이은 기타리스트 믹 테일러(Mick Taylor)가 자리했었고 이후 론 우드(Ron Wood)로 교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Tattoo You](''81)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보다 상업적이고 스케일 큰 사운드를 담아낸 ''현대적인(동시대적인 감각의) 사운드''를 표출해오고 있다.<br><br>밴드의 역사는 1960년, 런던 대학교 경제학과 학생이던 믹 재거(Michael Phillip Jagger, 1943년 7월 26일 켄트주 다트포드 생)와 시드컵 예술학교에 다니던 키스 리처즈(1943년 12월 18일 다트포드 생)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던 이들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뒤 서로가 리듬 앤 블루스, 특히 척 베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믹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R&amp;B 그룹 리틀 보이 앤 더 블루 보이스(Little Boy &amp; The Blue Boys)에 키스를 맞이하여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의 블루스 인코포레이티드(Blues Incorporated)에서 연주를 했던 브라이언 존스(Lewis Brian Hopkin-Jones, 1942년 2월 28일 글로스터주 첼튼햄 생)를 우연히 만나 친해지게 된다. 결국 이들은 1962년 4월, 당시 밴드의 멤버였던 딕 테일러(Dick Taylor)와 브라이언의 동료 피아니스트 이언 스튜어트(Ian Stewart), 기타리스트 제프 브래드포드(Geoff Bradford)와 함께 새로운 그룹을 결성한다(당시 믹 재거는 블루스 인코포레이티드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 중이었다). 새로운 밴드의 이름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한 노래 제목에서 차용한 ''롤링 스톤즈''로 정해졌다(처음에는 ''g''가 빠진 ''Rollin'' Stones''였다). <br>같은 해 10월, 믹과 키스, 브라이언, 이안, 그리고 클리프튼스(Cliftons)라는 그룹의 드러머였던 토니 채프먼(Tony Chapman)으로 구성된 밴드는 런던 하이베리의 스튜디오에서 첫 녹음을 시작한다. 당시 이들이 연주한 곡은 머디 워터스와 보 디들리(Bo Diddley)의 작품들이었다. 12월에는 클리프튼스 출신의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William Perks, 1936년 10월 24일 런던 생)이 가입을 했고 곧이어 블루스 인코포레이티드 출신의 드러머 찰리 와츠(Charles Watts, 1941년 6월 2일 런던 생)가 합류하여 롤링 스톤즈의 새로운 라인업을 완성한다. <br>1963년 1월 14일, 런던 소호의 한 재즈 클럽에서 최초의 공연을 한 이래 이들은 여러 클럽에서의 연주를 통해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결국 비틀즈의 홍보 일을 했던 19살의 앤드류 루그 올드햄(Andrew Loog Oldham)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은 밴드는 &lt;데카&gt; 레코드와 계약하고 첫 싱글로 척 베리의 ''Come On''을 녹음한다. 앤드류 올드햄은 음악에 정통하지는 못했지만 탁월한 프로모션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밴드를 비틀즈에 반하는 ''악동''의 이미지로 포장하고 순한 이미지의 이안 스튜어트를 그룹에서 탈퇴시켰다(하지만 그는 198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롤링 스톤즈의 세션맨과 투어 멤버로 활동을 했다). ''Come On''은 영국 차트 21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고, 두 번째 싱글인 존 레논(John Lennon)과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곡 ''I Wanna Be Your Man''은 12위를 차지했다. 여러 페스티벌과 투어, TV 프로그램 출연 등을 통해 인기를 얻게 된 밴드는 그 해 말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ew Musical Express) 지의 독자 투표에서 ''영국 최고의 보컬 그룹''으로 선정되었다. <br>이듬해인 1964년, 버디 홀리(Buddy Holly)의 곡을 리메이크 한 ''Not Fade Away''가 영국 차트 3위에 올랐다. 곧이어 발표된 데뷔 앨범 [The Rolling Stones]가 10만 장의 선주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이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준다. 밴드는 초기에 주로 고전 R&amp;B 곡들을 연주했지만 점차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콤비의 곡 쓰는 재능이 빛을 발하며 자신들의 색깔을 갖춰나가게 된다. ''Time Is On My Side'', ''Heart Of Stone'', ''(I Can''t Get No)Satisfaction'', ''As Tears Go By'', ''19th Nervous Breakdown'' 등을 포함한 멋진 곡들로 영국은 물론 미국 시장에서의 인기몰이에 성공한 밴드는 비틀즈와는 확연히 다른 카리스마를 지니게 되었고, 새로운 트렌드 메이커로서 대중과 매체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에 이른다. 그들의 공연장에서는 늘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며 멤버들은 여러 법적인 문제들과 스캔들에 휘말렸다. 하지만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체제에 반항하는 이들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이들의 영웅이었고 우상이었다. 밴드의 음악적 재능이 절정에 달해 있던 시기의 작품들, 즉 [Aftermath]와 [Between The Buttons](''67),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67), [Beggars Banquet](''68), 그리고 [Let It Bleed]에 이르는 탁월한 앨범들은 롤링 스톤즈가 단순히 가십거리만을 제공하고 음악적으로는 내세울 것 없는 밴드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주었다. ''Paint It Black'', ''Lady Jane'', ''Under My Thumb'', ''Jumpin'' Jack Flash'', ''Sympathy For The Devil'' 등과 같은 제목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br>1969년 6월, 심각한 약물 중독에 의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와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그룹을 떠나야 했고 그의 자리는 곧바로 존 메이올(John Mayall)의 블루스브레이커스(Bluesbreakers)를 거친 믹 테일러(Michael Taylor, 1948년 1월 17일 하트퍼드주 웰윈 가든 시티 생)로 대체되었다. 브라이언 존스는 얼마 후인 7월 3일, 자신의 집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천재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던 브라이언 존스의 안타까운 죽음과 더불어 롤링 스톤즈에게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은 이 해 말에 일어났다. 1969년 12월 6일 밴드는 미국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무료 콘서트를 캘리포니아주의 앨터몬트 고속도로에서 개최했는데, 무려 30만 명의 관객이 몰린 이 콘서트의 무질서한 혼돈 속에서 권총을 꺼내 난동을 부리던 한 흑인 청년이 밴드가 고용한 폭주족 경호원에 의해 칼에 찔려 살해당한 것이다. 난장판과 같았던 무대의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당시의 끔찍한 혼란과 더불어 1970년 12월에 공개된, 밴드의 ''69년 미국 투어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Gimme Shelter''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br>이후 1971년 4월 밴드는 자신들의 그룹명을 그대로 레이블 이름으로 사용하여 [롤링 스톤즈] 레코드를 설립했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디자인을 맡은, 혀를 내밀고 있는 입을 그린 ''불손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의 레이블 로고는 이후 그대로 밴드의 상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첫 앨범 [Sticky Fingers]와 이들의 유일한 더블 앨범 [Exile On Main Street](''72)는 중반기 밴드의 모든 것이 농축되어 담긴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이후 밴드는 [Goats Head Soup](''73)와 [It''s Only Rock ''n'' Roll](''74), [Black And Blue](''76), [Some Girls](''78), 그리고 [Emotional Rescue] 등 보다 세련되고 성숙한 감성과 풍성한 사운드를 담은 일련의 앨범들을 통해 기술적인 진보를 선보였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변화로는 믹 테일러의 탈퇴를 들 수 있다. 그는 롤링 스톤즈라는 슈퍼 그룹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결국 1974년 12월 밴드를 떠나게 된다. 이후 그의 자리는 페이시스(Faces) 출신의 론 우드(Ronald Wood, 1947년 6월 1일 런던 생)가 대신했다.<br>''80년대 이후에 발표된 롤링 스톤즈의 앨범들은 사운드의 미학적인 완성도라는 측면보다는 감각적인 스타일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대히트를 기록했던 [Tattoo You]의 탁월한 사운드 메이킹을 끝으로 밴드의 음악에서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매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상당 부분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의 음악적인 갈등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이는데, 시대적인 흐름을 좇고자 한 믹 재거의 성향과 기존의 록 음악으로 회귀하려 했던 키스 리처즈의 바람은 서로 충돌했고 결국 롤링 스톤즈의 사운드는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해야 했다. [Undercover](''83)와 [Dirty Work](''86)는 괜찮은 몇 곡을 포함한 평범한 팝 앨범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솔로 활동에 전념하던 밴드의 두 중심이 다시 의기 투합하여 만든 [Steel Wheels](''89)는 그나마 나은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라이브 앨범 [Flashpoint](''91)의 발표 후 빌 와이먼이 그룹을 탈퇴했지만 1994년,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와 스팅(Sting) 등의 세션 베이스 주자였던 대릴 존스(Darryl Jones)가 멤버로 참가한 새 앨범 [Voodoo Lounge]가 발표되어 좋은 반응을 얻는다. 이 앨범은 ''9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록 앨범''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꾸준히 활동을 계속해온 이들은 보다 현대적인 감각의 [Bridges To Babylon](''97)과 이 앨범의 투어를 담은 라이브 앨범 [No Security](''98)를 발표하며 사그라지지 않은 전설을 이어오고 있다. <br><br><b>Discography</b><br>롤링 스톤즈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23장의 스튜디오 앨범-초기에는 영국과 미국의 앨범이 차이를 보이는데, 이 숫자는 미국 발매반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밴드의 ''60년대 앨범들은 영국에서는 [데카], 미국에서는 [런던]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다-과 7장의 라이브 앨범-[Got Live If You Want It!](''66)과 [Get Yer Ya-Ya''s Out!](''70), [Love You Live](''77), [Still Life](''82), [Flashpoint](''91), [Stripped](''95), 그리고 [No Security](''98)가 포함된다-을 발매했다. 베스트 앨범이나 싱글 모음집 등의 컴필레이션은 정식으로 발매된 것만 수십 종에 이르는데 그 중 주목할만한 작품들로는 [Big Hits: High Tide and Green Grass](''66), [Flowers](''67), [Through The Past, Darkly (Big Hits, Vol. 2)](''69), [Hot Rocks, 1964-1971](''72), [More Hot Rocks (Big Hits And Fazed nulls)](''72), [Singles Collection: The London Years](''89), 그리고 [Forty Licks](2002)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라이브와 편집 앨범을 제외한 정규 스튜디오 앨범들 중 밴드의 음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72년까지의 작품만을 수록했다.<br><br><b>The Rolling Stones(''64, Decca)</b><br>록음악 사상 가장 성공적인 데뷔작의 하나로 꼽히는, 정통 리듬 앤 블루스와 블루스 곡들로 가득한 이 앨범을 통해 우리는 롤링 스톤즈가 어디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부분 ''50년대와 ''60년대 초반의 R&amp;B 곡들로 이루어진 이 앨범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롤링 스톤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오리지널 곡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완벽하게 해석해내는 그들의 역량은 충분히 주목할만하다. 두 명의 기타리스트가 만들어내는 탁월한 리프들과 리듬 라인은 이들의 탄탄한 연주력을 가늠케 한다. 윌리 딕슨(Willie Dixon)의 ''I Just Want To Make Love To You''를 비롯하여 척 베리의 흥겨운 로큰롤 ''Carol'', 그리고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의 멋진 발라드 ''Tell Me''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국 발매 버전에는 커버에 그룹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England''s Newest Hitmakers]라는 표제를 달고 발매가 되었다. 미국반에는 영국반에 있는 ''I Need You Baby'' 대신에 영국에서의 히트 싱글인 버디 홀리의 ''Not Fade Away''가 수록되었다. 앨범은 영국에서 1위에 올랐고 미국에서는 11위를 기록했다. <br><br><b>12 X 5(''64, London)</b><br>미국에서 발매되어 차트 3위를 기록한 밴드의 두 번째 앨범은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정통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로큰롤 사운드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강조된 기타 사운드는 이들의 음악적 방향이 블루스에서 록으로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어마 토마스(Irma Thomas)의 곡을 자신들 특유의 스타일로 리메이크 한 ''Time Is On My Side''이다. 브라이언 존스의 감칠맛 나는 슬라이드 기타와 믹 재거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 곡은 미국 차트 6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 외에도 척 베리의 ''Around And Around''나 미국 차트 26위를 기록했던 ''It''s All Over Now'', 소울 감각의 ''If You Need Me'' 등 멋진 곡들이 포함된다. 영국에서는 이듬해인 1965년에 [Rolling Stones No. 2]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어 또 다시 1위를 기록했는데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커버에 아무런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영국반에는 미국에서 발매된 [12 X 5]와 [The Rolling Stones, Now!]에서 고루 발췌된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br><br><b>The Rolling Stones, Now!(''65, London)</b><br>역시 미국에서만 발매된 세 번째 앨범은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정통 리듬 앤 블루스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믹 재거의 보컬은 어느 때보다도 흑인들의 감성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 듯 깊은 울림을 표출해낸다.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콤비의 곡 쓰기에 대한 재능이 확연히 드러나는 싱글 ''Heart Of Stone''(미국 19위)이나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의 ''Pain In My Heart''를 채우는, 믹 재거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끈끈한 감성은 너무도 매력적이며, 보 디들리의 ''Mona (I Need You Baby)''나 바바라 린(Barbara Lynn)의 ''Oh Baby''를 수놓는 흥겨운 감흥 역시 앨범을 빛내주는 요소들이다.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한 윌리 딕슨의 ''Little Red Rooster''를 감싸는 브라이언의 슬라이드 기타 솜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작품이다. 앨범은 미국 차트 5위에 올랐다. <br><br><b>Out Of Our Heads(''65, Decca)</b><br>첫 곡 ''Mercy Mercy''를 채우는 기타 리프와 보컬 하모니는 이들이 이제 완연한 록 밴드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여전히 그 뿌리를 이루는 음악은 R&amp;B와 블루스지만, 적어도 트윈 기타 사운드가 곡을 이끌어 가고 록의 리듬감에 충실한 여러 곡들은 밴드의 새로운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 앨범에서도 밴드의 작품은 단 네 곡에 불과하지만, 마빈 게이(Marvin Gaye)의 ''Hitch Hike''나 샘 쿡(Sam Cooke)의 ''Good Times'', 오티스 레딩의 ''Cry To Me'', 그리고 포크 성향의 ''Play With Fire'' 등 멋진 작품들 외에 밴드의 모든 가능성을 단숨에 드러내버린 ''(I Can''t Get No) Satisfaction''만으로도 앨범은 가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잊을 수 없는 기타 리프와 더불어 밴드를 미국에서 슈퍼스타로 만들었던 이 곡은 미국과 영국 양쪽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이 앨범 역시 미국반과 영국반이 수록곡의 차이를 보이는데, 더 늦게 발매된 영국반에는 ''Satisfaction'' 등이 빠지고 [December''s Children (And Everybody''s)]에 포함되는 몇몇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앨범은 영국에서 2위, 미국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br><br><b>December''s Children(And Everybody''s)(''65, London)</b><br>미국에서만 발매된 이 앨범은 차트 4위에 오르며 골드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대부분의 수록곡들은 영국에서 발매된 싱글이나 EP, 또는 앨범에 포함되었던 작품들이다. 여기엔 어쿠스틱한 발라드와 열정적인 로큰롤, 정통 R&amp;B와 블루스 등 다양한 요소들이 담겨 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멋진 소울 발라드 ''You Better Move On''이나 척 베리의 ''Talkin'' About You'' 등도 멋지지만, 역시 가장 돋보이는 작품들이라면 1964년 믹 재거의 연인이었던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이 불러 히트했던 아름다운 발라드 ''As Tears Go By''(미국 6위)와 한 번만 들어도 잊을 수 없는 탁월한 멜로디와 흥겨운 리듬의 ''Get Off Of My Cloud''(미국, 영국 1위)라 할 수 있다.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의 더욱 견고해진 작곡 솜씨가 돋보이는 여러 곡들이 담긴 멋진 앨범이다. <br><br><b>Aftermath(''66, Decca)</b><br>원래 [Could You Walk On The Water?]라는 타이틀로 기획되었던 이 앨범이 가지는 외적인 의의는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콤비의 곡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들이 단순히 본격적인 록 밴드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다양한 악기의 도입(브라이언 존스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과 사운드의 섬세한 배치를 통한 미학적인 구성의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채워진 이 앨범은 밴드 최초의 걸작으로 꼽을만하다. 여러 영화나 드라마 등에 사용되어 친숙한, 브라이언 존스의 몽롱한 시타 연주가 포함된 사이키델리아로의 첫걸음, 미국 차트 1위를 기록한 ''Paint It Black''은 미국반에만 담겨 있고 영국반에는 마약을 다루어 논란이 되었던 ''Mother''s Little Helper''(미국 8위)를 포함한 4곡이 수록되어 있다. 브라이언 존스의 역량은 이국적인 마림바 연주가 포함된 ''Under My Thumb''과 감미로운 발라드 ''Lady Jane''의 덜시머 연주에서도 확연히 돋보인다. 그 외에 11분 35초에 달하는 블루스 잼 ''Going Home''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앨범은 영국 차트 1위와 미국 차트 2위에 올랐다. <br><br><b>Between The Buttons(''67, Decca)</b><br>롤링 스톤즈는 비틀즈를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고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는 이 앨범과 이어지는 작품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이 앨범의 사운드는 많은 이들에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는 약간의 사이키델릭과 더불어, 비틀즈는 물론 킹크스와 밥 딜런의 스타일이 곳곳에 배어 있으며 전에 없이 팝적인 성향이 앨범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앨범을 처음 접하면 그 취약한 (듯 느껴지는) 사운드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멋진 코러스가 담긴 ''Yesterday''s Papers''나 부드러운 발라드 ''She Smiled Sweetly'', ''All Sold Out'', 그리고 실험적인 ''My Obsession'' 등 여러 곡들에 담긴 섬세한 편곡과 은은한 감흥은 앨범의 가치를 높여준다. 앨범 최고의 작품들은 역시 흥겨운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영국 3위)와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했던,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콤비가 만들어낸 최고의 멜로디 라인으로 평가되는 발라드 ''Ruby Tuesday''라 할 수 있다. 영국에서 더블 사이드의 싱글로 발매됐던 이 두 곡은 미국반에만 포함되어 있다. 앤드루 올드햄이 마지막으로 프로듀스를 맡은 이 앨범은 영국 3위, 미국 2위를 기록했다. <br><br><b>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67, Decca)</b><br>롤링 스톤즈의 사이키델리아는 밴드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이 앨범을 통해 활짝 꽃을 피웠다. 많은 이들은 이 앨범을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퍼부었고 덕분에 꽤나 낮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상 밴드가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 이루어낸 음악적 성과는 더할 수 없이 독특하고 완벽한 구성을 지닌 사운드의 실험이었다. 여기에 담긴 아프리카의 타악기 리듬과 현악 오케스트레이션, 브라이언 존스에 의해 펼쳐지는 키보드 사운드에 의한 다양한 효과음들은 더할 수 없는 풍성함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실험적인 효과음과 이어지는 아름다운 멜로디, 영롱한 건반,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의 현악 사운드가 포함된 ''She''s A Rainbow''(미국 25위)는 최고로 손꼽을만하다. 빌 와이먼의 변조된 목소리가 인상적으로 사용된 ''In Another Land''(미국 87위)나 편안한 멜로디에 실리는 ''Gomper'', 음울한 멜로트론 사운드와 다채로운 효과음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하는 ''2000 Light Years From Home''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앨범은 미국에서 선주문만으로 골드를 가볍게 넘어섰으며 영국 차트 3위와 미국 차트 2위에 올랐다. 사이키델리아에 걸맞은, 3D를 사용한 몽환적인 커버 아트워크 역시 돋보이는 부분이다. <br><br><b>Beggars Banquet(''68, Decca)</b><br>전작을 통해 자신들의 고유한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도''를 했던 밴드는 이 앨범에서 사이키델릭의 향취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파워풀한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낙서로 가득한 더러운 화장실 벽의 모습을 담은 커버 아트는 발매 지연의 원인이 되었을 정도로 큰 논란을 불러왔고 결국 흰 바탕에 그룹명과 앨범 타이틀만 덩그러니 담긴 커버로 발매가 되기도 했다. 밴드의 원초적 향기 가득한 역동적인 록 사운드와 블루스, 컨트리의 요소를 바탕으로 한 어쿠스틱한 곡들은 수많은 매체를 열광시켰다. 사회적 혼란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미국의 많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금지되었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을 반영한 강렬한 록 트랙 ''Street Fighting Man''(미국 48위)과 특히 평론가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던 두 말할 나위 없는 작품 ''Sympathy For The Devil''은 앨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를 떠난) 브라이언 존스가 들려주는 예의 슬라이드 기타에 어우러지는 어쿠스틱한 발라드 ''No Expectations''와 ''Salt Of The Earth''를 비롯하여 전형적인 델타 블루스 스타일의 ''Dear Doctor'', ''Parachute Woman'', 그리고 잊을 수 없는 ''Stray Cat Blues''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앨범은 영국 차트 3위와 미국 차트 5위를 기록했다. <br><br><b>Let It Bleed(''69, Decca)</b><br>전작에 이은 또 하나의 걸작으로 브라이언 존스의 사망 후인 1969년 가을에 발매되어 영국 1위와 미국 3위를 기록했다. 이 앨범에서 밴드는 블루스에 기반 한 사운드에서 나아가 보다 록적인 감성을 담았는데, 여러 곡들에서 들려오는 풋풋한 어쿠스틱 사운드 역시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온다. 앨범의 탁월한 사운드는 밴드의 멤버들 외에 라이 쿠더(Ry Cooder)와 알 쿠퍼(Al Cooper), 리온 러셀(Leon Russell), 니키 홉킨스(Nicky Hopkins), 도리스 트로이(Doris Troy), 마들린 벨(Madeline Bell) 등 여러 슈퍼 뮤지션들과 세션맨들의 참여로 완성되었다. 키스의 탁월한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Gimme Shelter'', 편안한 발라드 ''Love In Vain'',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던 싱글 ''Honky Tonk Women''을 컨트리 앤 웨스턴으로 새롭게 연주한 ''Country Honk''와 바비 키스(Bobby Keys)의 색소폰 연주가 담긴 ''Live With Me''(믹 테일러는 이 두 곡에만 참여했다), 들을수록 매력적인 블루스 ''Midnight Rambler'', 그리고 키스 리처즈가 처음으로 리드 보컬을 맡은 편안한 ''You Got The Silver'' 등이 돋보인다. 하지만 역시 가장 주목할만한 곡은 철학적인 노랫말을 담은 서사적인 구성과 관악기, 런던 바흐 합창단의 코러스가 포함된 7분 28초의 감동적인 대곡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라 할 수 있다. <br><br><b>Sticky Fingers(''71, Rolling Stones)</b><br>전작 [Let It Bleed], 그리고 이후의 [Exile On Main Street]와 더불어 롤링 스톤즈가 이루어낸 최고의 음악적 성과로 꼽히는 이 앨범은 밴드의 레이블 &lt;롤링 스톤즈&gt;를 통해 발매된 첫 작품이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과반수는 마약에 관련된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커버의 선정성(앞에 달린 ''진짜 지퍼''를 열면 부풀어오르는 풍선)과 함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것들과는 별개로 앨범의 미학적 완성도는 다시금 찬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반적으로 블루지한 색채를 드러내는 사운드가 펼쳐진다. 전작에 이은 지미 밀러(Jimmy Miller)의 프로듀스와 바비 키스, 짐 프라이스(Jim Price)의 참여로 인한 관악기 사운드의 강조는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레이블에서의 첫 싱글 ''Brown Sugar''(영국 2위, 미국 1위)나 편안한 분위기의 ''I Got The Blues''를 비롯하여 멋진 어쿠스틱 기타와 믹의 감성적인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발라드 ''Wild Horses''(미국 28위), 음울한 선율과 라이 쿠더의 블루지한 기타 연주가 포함된 ''Sister Morphine'', (엘튼 존(Elton John)과 의 작업으로 유명한) 폴 벅마스터(Paul Buckmaster)의 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이 포함된 ''Moonlight Mile'' 등이 수록되었다. 앨범은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br><br><b>Exile On Main Street (''72, Rolling Stones)</b><br>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많은 팬들과 평론가들은 이 앨범을 롤링 스톤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는다. 전형적인 로큰롤 사운드와 블루스, 소울, 컨트리 등 밴드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던, 또는 음악적 지향점에 위치한 장르의 요소들이 복합되어 이 더블 앨범을 통해 화려하게 펼쳐지는데, 여기에서 드러나는 결과물은 이들이 그 동안 행했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18곡의 수록곡들은 하나같이 꽉 차 있는 듯하며, 오히려 믹 재거의 보컬이 묻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풍성한 사운드와 각각의 연주 파트(특히 키스 리처즈와 믹 테일러의 기타 솔로)가 강조된다. 앨범의 분위기를 단숨에 드러내주는 흥겨운 첫 곡 ''Rocks Off''와 원래 ''Good Time Women''이라는 제목이 붙었던 멋진 로큰롤 ''Tumbling Dice''(영국 5위, 미국 7위), 언제 들어도 편안한 선율과 연주의 ''Sweet Virginia'', ''Torn And Frayed''와 ''Loving Cup'', 그리고 전형적인 로큰롤 사운드를 담은 키스 리처즈의 ''Happy''(미국 22위)와 몽롱한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가스펠 성향의 ''Let It Loose'' 등, 한 번만 들어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와 각 곡들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연주는 절로 듣는 이의감정을 지배하는 듯하다. 앨범은 어김없이 영국과 미국에서 1위에 올랐다.<br><br><br>글.김경진<br><br><b>oimusic</b> 2002년 11월호 김경진 </div>resizeImgGaiaReadContent()<!-- 플레이어 --><div class="conPlay"></div><!-- 지식 연동 여부 --><div class="qnaPosted" id="qnaPosted"><div id="qna_qna_"></div><input id="qnaPosted_conLength" type="hidden" value="120"> </div><!-- 추천/신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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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음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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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8 Oct 2009 08:16:19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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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루츠 록 명반들 (임진모 웹진 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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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tbody><tr><td height="24"><span class="black_b_t03">루츠 록</span></td></tr><tr><td height="15"></td></tr><tr><td class="black_t01" height="10"><span class="black_t01">옛 것에서 새로움을 찾자. 1990년대 초반 대중 음악계의 최대 화두는 ’복고’였다. 너도나도 과거를 들먹였고, 현재로 끌어오기에 바빴다. 너바나(Nirvana)에 의해 폭발한 그런지는 1970년대 하드록과 펑크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린 데이(Green Day)의 네오 펑크 역시 말 그대로 펑크 리바이벌이었다. 오아시스(Oasis)와 블러(Blur)는 브릿 팝이라는 이름 하에 비틀즈(Beatles)를 대표로 하는 브리티시 전통 록을 부활시켰다.<br><br>루츠 록 또한 이에 편승해 등장한 복고 장르이다. 컨트리, 포크, 블루스, 서던 록, 소울 등 미국 고유의 음악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인테리어 하여 되살려냈다. 다분히 미국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br><br>루츠 록을 대표하는 그룹으로는 카운팅 크로우스(Counting Crows), 월플라워스(The Wallflowers), 데이브 매튜스 밴드(Dave Matthews Band), 후티 앤 더 블로우피시(Hootie And The Blowfish) 등을 들 수 있다. <br><br>리드 싱어 아담 듀리츠(Adam Duritz)가 이끌고 있는 <strong>카운팅 크로우즈</strong>는 컨트리와 블루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로큰롤 사운드로 미국의 올드 팬과 신세대 팬들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흥겨운 어쿠스틱 기타와 담백한 음색이 빛을 발하는 스매시 히트곡 ’Mr. jones’가 담겨있는 1993년 밴드의 데뷔작 <strong><span style="COLOR: #000099">&lt;August And Everything After&gt;</span></strong>는 미국에서만 700만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고, 그들은 단숨에 록 스타의 반열로 올라섰다. 얼터너티브의 대세 속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이다. <br><br><strong>월플라워스</strong>는 일단 리더 제이콥 딜란(Jacob Dylan)이 밥 딜런(Bob Dylan)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톡톡한 홍보 효과를 본 그룹이다. 하지만 정작 딜란 부자의 관계는 어머니 문제로 인하여 냉랭한 상태에 있다. 허나 음악은 아버지의 영향권내에 있는 게 사실이다. 포크, 블루스, 컨트리 등 루츠 록의 전형적인 사운드이다. 가사 쓰기도 그렇다. 둘 다 시인으로 통한다. 피는 속일 수 없다! ’One headlight’, ’6th avwnue heartache’, ’The difference’의 연이은 히트로 600만장이나 팔아치운 1996년 2집 <strong><span style="COLOR: #000099">&lt;Bringing Down The Horse&gt;</span></strong>가 대변한다.<br><br>또한 각각 1994년 내놓은 데뷔 음반 <strong><span style="COLOR: #000099">&lt;Under The Table &amp; Dreaming&gt;</span></strong>과 <strong><span style="COLOR: #000099">&lt;Cracked Rear View&gt;</span></strong>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strong>데이브 매튜스 밴드</strong>와 <strong>후티 앤 더 블로우피시</strong>도 루츠 록의 확산에 큰 몫을 했다. <br><br>이들 외에도 <strong>블루스 트래블러(Blues Traveler)</strong>, 세릴 크로우(Sheryl Crow), <strong>진 블로섬(Gin Blossoms)</strong>, 빅 헤드 토드 앤 더 몬스터스(Big Head Todd &amp; The Monsters), 에드윈 맥케인(Edwin McCain) 등이 루츠 록에 맞닿아 있다.</span> </td></tr><tr><td height="20"></td></tr><tr><td class="black_t01"><p>&nbsp;<b>안재필</b></p><p><strong></strong>&nbsp;</p><p><strong>출처 : 임진모웹진</strong></p></td></tr></tbody></t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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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음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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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3 Oct 2009 18:02:07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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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문화생활과 범죄 (어느 간행물에 기고한 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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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문화 산책 - 문화생활과 범죄 </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우리는 종종 신문과 방송에서 이런 기사들을 접한다. ‘주유소 턴 젊은이들, 영화 &lt;주유소 습격사건&gt;를 본 뒤 모방했다고 진술’, ‘영화 &lt;친구&gt;를 보고 동급생을 칼로 찌른 범죄 발생’, ‘음란행위를 조장하는 소설을 쓴 소설가 장정일 기소’ 등등..</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이런 기사들을 본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소위 ‘불건전한’ 영화, 소설들을 다 없애버리면 우리 사회의 범죄가 조금은 줄어들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영화야 안 봐도 그만이지만 사람의 인생을 끝장낼 수도 있는 범죄는 단 한 건이라도 덜 일어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사실 이런 논의는 매우 해묵은 것이다. 1996년, 마이클 잭슨이 내한공연 왔을 때에도 몇 몇 기독교 계열 사회운동가들의 주도로 “지금 결식아동이 몇 명인데 귀한 외화를 낭비해가며 기껏 퇴폐나 조장하는 이런 공연을 해야 하느냐”라는 여론이 강하게 일기도 했는데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nbsp;</span>&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우리 삶에서 영화를 비롯한 문학예술, 문화생활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탈’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문화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술, 마약, 섹스, 폭력, 반사회적 활동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일탈을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그러다간 종종 범죄와 연결되고 몸을 심하게 망칠 수도 있으며&nbsp;가까운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전한 ‘가상적 일탈’을 즐기기 위해 문화활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상적 일탈도 100%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이 내심 바라는 ‘일탈’이란 궁극적으로는 ‘리얼한’ 어떤 것을 지향할 가능성이 있고 최소한 기존의 사회가치관에 반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표현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과의 경계선이 모호할 때도 많고.</span>&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우리가&nbsp;지금 걸작으로 여기는 많은 예술작품들은 그 작품들이 처음 나왔을 당시엔 논란거리가 많았던 그런 것들이었다. 이광수의 &lt;무정&gt;은 발표당시 자유연애를 주장했다고 해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루소는 &lt;에밀&gt;을 발표한 후 당국의 체포령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가기도 했다.&nbsp;중세의 기독교 세력들은 어떤 형상, 이미지를 만드는 것 자체를 불경스럽게 생각해서 하느님이나 예수, 천사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그림, 조각들을 금지했다. </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이런 현상은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인데 1974년, 프랑스 성인영화 &lt;엠마뉴엘 부인&gt;은 처음 개봉할 당시엔 자국인 프랑스에서도 상영이 금지되어서 당시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다른 나라로 비행기를 타고 갈 정도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lt;시계태엽 오렌지&gt;란 영화를 개봉할 당시엔 이 영화 주인공들의 행태를 모방한 청소년 범죄가 실제로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영국 정부에서는 이 영화를 상영금지 시켰다. </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lang="EN-US" style="FONT-SIZE: 11pt; mso-fareast-font-family: 바탕">&lt;무정&gt;, &lt;에밀&gt;의 경우는 언급조차 하기 싫고, &lt;엠마뉴엘 부인&gt;에서 논란이 되었던 여러 가지 성에 관한 문제의식들은 지금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결국 이 영화는 여성의 자유로운 섹스를 주장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lt;시계태엽 오렌지&gt;는 현재 걸작영화의 반열에 올라있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상영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화학교에서 수업교재로 사용하고 있다.</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우린 여기서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관, 즉 통념이란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과거에 사회문제가 되었던 예술작품들이 오히려 과거의 사회문제들을 개선하는데 순기능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비롯한 예술작품들 속의 폭력이 실제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통계가 있다. 미국의 강간범들을 조사한 결과 그 강간범들이 어릴 적부터 포르노를 전혀 접하지 않았던 비율이 일반인들에 비해 매우 높았다는 조사결과가 그것이다. 즉 표면적으로 ‘유해한’ 영상물에 직접 영향을 받은 경우는 사회적으로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큰 반면에 그 반대쪽의 측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포르노가 합법화되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강간범죄율은 포르노가 합법화되어있는 대다수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유교적인 관습이 힘을 발휘하는 ‘근엄한’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성매매 환경은 세계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과연 ‘불건전한 영화’가 범죄를 더 조장할까, 아니면 근엄하고 위선적인 사회가 범죄를 더 조장할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져볼만 하다. 물론 범죄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나온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불건전한 문화풍토’도 사회의 타락에 한 몫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일반적인’ 결론도 내릴 수 있을 것이다.&nbsp;</span>&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문학예술 작품들을 비롯한 문화현상들은 사실 실제 현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물론 상상은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닥쳐올 현실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상력이 현실에 미치는 악영향을 염려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문학예술의 사회적 순기능을 막게 되는 것 뿐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된다. </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인간의 기본욕구 중에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이것은 의미를 지향하는 본능적인 행동양식의 일부이고(인간의 기본욕구를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로 처음 본 것은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 빅터 프랑클 Viktor E. Frankl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행복과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인간은 비록 불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할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의 종교적, 유토피아적 결정론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갈 신성한 자유를 그 자신의 권리로서 가져야만 비로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생각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span>&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영화 &lt;친구&gt;를 보고 친구에게 칼질을 한 사람과 &lt;주유소 습격사건&gt;을 보고 주유소를 습격했다는 아이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보다 표피적이고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기사거리에만 침을 흘리는 언론의 천박함도 문제다. 장정일이 음란물 배포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nbsp;난 그런 생각을 했다.&nbsp;실제 생활에서 장정일이 더 음란할까, 장정일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저 검사와 판사가 더 음란할까. </span></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영화나 문학 작품을 모방해서 누군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 범죄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이다.&nbsp;문학예술의 본질인 '가상적 일탈'을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범죄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교육을 통해 예방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지 인간 본연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표현의 자유에 제재를 가할 문제는 아니다. 이건 마치 재즈라는 음악이 퇴폐적이라고 해서 재즈음악을 모두 없애자는 주장이나 드라마의 악역배우에게 실제로 욕을 하고 계란을 던지는 일부 시청자들 때문에 드라마를 모두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사회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올더스 헉슬리의 &lt;멋진 신세계&gt;에 나오는 유토피아처럼 ‘완전하길’ 바라지 않는다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nbsp;</span>&nbsp; <o:p></o:p></p><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6pt"><span style="FONT-SIZE: 11pt; FONT-FAMILY: 바탕">문화생활의 의미는 ‘가상적 일탈’에 있다고 했다. 일탈은 일탈다워야 한다. 가상적이기 때문에 범죄에 가까운 일탈을 해도 되고 또 하는 것이 바람직한 면도 있다. 그리고 가상적 일탈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일탈은 현실에서 출발해서 현실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차원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삶에서 출발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면 좋겠다는 말이다. 가상적 일탈이란 정신적 운동과 같은 것이고 이 운동이 부족하면 정신은 황폐해진다. ‘가상적 일탈’의 반대말은 ‘현실안주적 장식거리’ 정도가 될 것이고&nbsp;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문화활동을 하는 것을 문화적 치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풍요로운 문화활동의 적이다. 이 적들은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생활의 진짜 즐거움을 망친다.</span></p><p class="바탕글">&nbsp; <o:p></o: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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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category>

		<comments>http://jackstudio.egloos.com/4221480#comments</comments>
		<pubDate>Fri, 28 Aug 2009 07:00:46 GMT</pubDate>
		<dc:creator>박봉팔</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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