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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을파소의 역사산책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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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을파소,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국상. 농사를 짓다가 고국천왕에게 파격적으로 등용되어 진대법 등의 여러 정책 실시. 을파소가 죽자 온백성이 통곡하였다고 전한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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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Nov 2009 14:01:0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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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을파소의 역사산책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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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을파소,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국상. 농사를 짓다가 고국천왕에게 파격적으로 등용되어 진대법 등의 여러 정책 실시. 을파소가 죽자 온백성이 통곡하였다고 전한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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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그러고보니...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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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디데이가 지났는데 왜 이리 조용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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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23/03/d0017203_4b0a95922edbd.png" width="294" height="19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23/03/d0017203_4b0a95922edbd.png');" /></div><br />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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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Nov 2009 14:01:04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결국 지르고 말았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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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2/03/d0017203_4b08f72db37d0.png" width="500" height="220.61328790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2/03/d0017203_4b08f72db37d0.png');" /></div><br />
<br />
....이게 정말 나오다니.<br />
			 ]]> 
		</description>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78289#comments</comments>
		<pubDate>Sun, 22 Nov 2009 08:33:16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역시 쓰레기책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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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얼마전 나온 신간도서라는 물건을 서점에서 확인해보니 말이죠.<br />
<br />
원균 관련은 80년대 나온 낡은 떡밥에서 발전한 게 없으므로 그걸 쓰려고 키보드 치자니 손만 아플 거 같아 패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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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에서 보니 난중일기에서 달랑 '김억추가 2마장 떨어졌다.' 한 줄 인용하고는 "이게 이순신보다 뒤로 멀어졌다는 건지, 앞으로 더 나갔다는 건지 불분명하게 기록했는데 향토사학자가 도망친 거라고 왜곡했음" 이라고 하는군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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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5413031a.jpg" width="407" height="30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5413031a.jpg');" /></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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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읽긴 읽은 거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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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부분을 좀 제대로 보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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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gb(204, 51, 204);">(전략)「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곧바로 우리 배에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심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그리고 여러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1마장 가량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했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 잘라 효시하고 싶었지만은,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달려들게 되어 사세가 낭패될 것이라 중군에 군령 내리는 기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나는 뱃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느냐, 물러가면 살 듯 싶으냐」했더니, 안위가 황급히 곧바로 들어 싸우려 할 때(하략)</span><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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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이 부분을 읽어보면 한문 번역본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감안해도 좌선을 제외한 다른 배는 다 뒤에 있었다, 김억추 배가 제일 뒤로 갔다, 라는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br />
<br />
&nbsp;그런데 그걸 달랑 한 줄 인용하고는 뒤로 간 건지 앞으로 간 건지 불확실한 걸 왜곡했다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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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566d976d.jpg" width="457" height="34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566d976d.jpg');" /></div><br />
<br />
&nbsp;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난중일기 부록에 나오는 거라며 인용한 글을 요약하면 "왜적이 오는데도 다들 안심하는데 전라우수사로 임명된 김억추만이 걱정하였음. 그래서 울돌목에 쇠사슬을 걸고 거북선을 창제하였는데 덮갤르 덮고 그 위에 칼침을 박아 적이 오르면 찔려 죽게 했음'라는 걸 보여주며 "김억추도 숨은 영웅"이란 얘기를 하더군요.<br />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2b170402.jpg" width="336" height="25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2b170402.jpg');" /></div>&nbsp; 철쇄야 말할 것도 없고, 거북선의 최초출전은 임진년 사천해전, 김억추가 전라우수사로 온 건 정유년, 이거만 봐도 저 기록은 그냥 김억추 띄우려고 쓴 걸 가져다 붙인 걸 알 수 있는데, 그걸 가지고 김억추가 영웅이네 하면서 띄웁니다.<br />
<br />
&nbsp;허참, 어지간한 ㅄ도 감히 깍아내리지 못 하는 명량대첩에서의 통상의 활약상까지도 다른 인물 띄우기로 돌리는 수준이라니...이 부분으로 보자면 이 저자는 다음 중 하나로 추정 됩니다.<br />
<br />
1. 책을 읽을 때 아주 대강대강 읽는다.<br />
2. 난중일기를 실제 본 적 없고, 다른 책에서 확인도 안 하고 가져다 썼다.<br />
3. 의도적인 왜곡이다.<br />
<br />
&nbsp;그야말로 이걸낸 출판사 이름대로 해주고 싶은 책이지만....아직 조일전쟁이라는 괴서 만큼 팔리는 거 같진 않으니 혹시나 홍보효과 될까봐 제목을 언급 안합니다. 어차피 안 해도 아실 분은 아실 거고, 그 분들은 이런 허접한 낚시에 낚일 리가 없으니까요.<br />
<br />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59475807.jpg" width="300" height="2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1/03/d0017203_4b07f59475807.jpg');" /></div> <br />
그냥 얘가 김억추였다고 하지.<br />
			 ]]> 
		</description>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77891#comments</comments>
		<pubDate>Sat, 21 Nov 2009 14:14:48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4대강 소송 참가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77320</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77320</guid>
		<description>
			<![CDATA[ 
   법치를 강조하는 정권이니 불법적인 수단 말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의사를 알리는데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일요일 마감이라니 참가하실 분은 이미지의 참여하기를 누르시면 되겠습니다.<br />
<br />
<br />
<img src="http://kfem.or.kr/notic_board/091116_notic.jpg" usemap="#Map" width="700" border="0" height="680"><br />
<map name="Map"><br />
  <area shape="rect" coords="242,610,458,663" href="http://nocanal.org/law/" target="_blank"><br />
<br />
</map>			 ]]> 
		</description>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77320#comments</comments>
		<pubDate>Fri, 20 Nov 2009 15:01:20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43)-이순신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76517</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76517</guid>
		<description>
			<![CDATA[ 
  &nbsp;서로군과 수로군의 합동작전은 서로군의 무능력과 무의지로 실패하였지만, 고니시 유키나카는 여전히 속이 탔다. 일본으로의 철군 명령은 떨어졌고, 고향으로 가려면 당연히 일단 순천부터 떠야한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군이 삽질을 많이 했다지만, 그 병세를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수많은 병력이 육지로 이동한다는 것은 이리저리 무리한 일이었다. 남는 방법은 배타고 바다는 건너는 것. 그러나 이 방법에는 치명적인 하자가 있었으니 바다에는 무수무시하기 짝이 없는 이순신이 있는 수로군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지휘할 때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고, 명 수군은 조선 수군에 방해만 되어 보이지만 적어도 그 숫자는 일본군을 압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바다로 무턱대고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br />
<br />
&nbsp;그래도 고니시에게 한 가지 희망적인 일은 명군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전쟁에서 원래 삽질도 많이 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끝판이니 적극적으로 싸울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명군과 화의를 추진해가면서 철군을 준비하고, 고니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nbsp; 고니시는 이를 위해 서로군의 유정과 협상을 꾀한다. 이러한 결과 유정은 고니시의 철수를 묵인하는 대신 예교성을 넘겨받기로 약속하며, 고니시 진영에 인질 40여명을 보내기까지 한다.<br />
<br />
&nbsp;그러나 문제는 육군이 아니라 수군이었다. 조명연합수군은 순천 예교성 전투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고니시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고니시와 협상을 한 유정은 진린에게 “행장이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풀어 보냄이 좋겠소.”라고 전하지만,&nbsp; 진린은 “수군과 육군은 각각 책임이 다르니 각자 행동하는 것이 옳겠소.”라고 말하면서 유정의 제안을 거부한다. 진린은 유정에 대한 이전의 전투에서의 불만에 전공 다툼, 그리고 이순신이란 걸출한 장군의 영향으로 명나라 장수답지 않게 전투에 적극 나설 의사를 보이는 거 같았다. 심지어 11월 8일에는 이순신에게 적이 11월 10일 전후로 철수하려한다는 정보가 왔으니 이를 막자는 제안까지 하게 된다. 결국 조명연합함대는 출동하여 순천 앞의 유도에 정박한다.<br />
<br />
&nbsp;11월 12일, 고니시는 선발대 10척을 내보내지만 조명연합함대에 의해 여지없이 궤멸당하고 만다. 그러자 고니시는 분노하여 자신의 진영에 있던 명군 인질 40명을 구속하고, 그 중 두 명의 팔을 잘라 유정에게 보내면서&nbsp; “제독이 나를 속이기를 전후에 이와 같이 하니 나는 가지 아니하겠소.”라고 전한다.<br />
<br />
&nbsp;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순천에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수군의 위협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고니시는 유정에게 사람을 보내서&nbsp; “수병이 화해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급히 약속을 정합시다.”라고 전한다. 이는 유정이 수군을 설득시켜주길 원한 것이지만 진린과의 사이가 껄끄러운 유정은 “화해를 빌면 진린 장군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오.”라며 진린에게 알아서 뇌물을 바칠 것을 시사한다.<br />
<br />
&nbsp;고니시는 이에 따라 진린에게 은 백냥과 보검 50구를 바치면서 “전쟁에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길을 빌려 주어 환국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한다. 이와 함게 고니시는 유정에게는 수급 2천을, 진린에게는 수급 1천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는데 진린은 결국 뇌물에 마음이 넘어가서 수급 2천을 주면 길을 열어주겠다 말한다. 그러자 고니시는 연일 뇌물을 바치면서 “남해(南海)에 사위가 있는데 그와 만나 의논해야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하니 이곳의 배를 내보내주기 바란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속임수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위를 불러 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하려는 것이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고니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반대하였으나, 진린은 듣지 않고 끝내 14일 일본군 8명이 탄 배의 통과를 허용하고 만다. 이에 대한 보답인지 고니시는 14일 저녁에는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바치고 15일과 16일에도 꾸준히 진린 진영을 오가며 뇌물을 바친다. <br />
<br />
&nbsp;그리고 고니시는 16일에 다시 군량을 가득 실은 중선을 출항시켰으나 소비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의 추격을 받아 결국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도망간다. 조선 수군이 노획한 배와 군량은 명군에게 뺏기고, 소계남과 조효열은 빈손으로 이 사실을 이순신에게 보고 한다.<br />
<br />
&nbsp;고니시는 진린에게 왜 강화하기로 해 놓고 공격하는 것이냐며 항의하지만, 진린은 그 공격은 자신이 아니라 이순신이 한 것이기에 자신은 알 바 아니라고 대답한다. <br />
<br />
&nbsp;하지만 이미 14일에 순천 예교성을 빠져나간 배가 있다. 이는 일본군 구원 병력을 불러올 게 분명하니, 곧 도착할 것 이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과의 논의 끝에 고니시를 구원하러 올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순천 앞바다에서 머물 경우 순천의 고니시군과 후방에서 오는 구원군을 상대로 앞뒤의 적에게 포위당할 우려가 있기에, 수군은 노량 해협 인근으로 함대를 이동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진린에게도 통보된다. 진린은 고니시에게 소소한 뇌물을 받은 외에는 타협에서 별 진전도 없거니와, 이순신이 출전하는데 자신은 가만있으면 상국의 장수로서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걱정했는 지 이순신을 따라 출전을 결정하게 된다.<br />
<br />
&nbsp;전투를 앞두고 진린은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그 우려를 담은 편지를 이순신에게 보냈다고도 한다.<br />
<br />
&nbsp;「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인사를 살피는바,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 가니 머지않아 공에게 화가 미치리이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르리요. 어찌하여 무후(=제갈량)의 기도로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습니까?」<br />
<br />
진린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자신의 수명이 다 했음을 알고 하늘에 기도를 하여 이를 연장했다는 고사를 들어 이순신도 이를 따를 것을 제안하였지만, 이순신은 답장을 보내면서 이를 정중히 거절한다.<br />
<br />
「나는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가 모두다 무후만 못하매, 비록 무후의 기도법(祈禱法)을 쓴다 한들 하늘이 어찌 들어줄 리가 있으리까?」<br />
<br />
&nbsp;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일본군은 사천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그와 함께 남해에 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그리고 부산에 있던 데리자와 마사나리와 다카하시 무네마스 등의 무장들이 고니시 구하기에 나선다. 그 병력은 배 500 여척에 이르렀다. <br />
<br />
&nbsp;조명연합수군은 조선의 판옥선 80여척에 9월말 합류한 유격 왕원주의 배 100여척을 포함한 명나라 수군 300여척이었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 명나라 군선은 사실상 수적인 압박을 가하는 게 전부였고, 주력은 조선의 판옥선인 게 당연했다. 이 때 진린과 그의 부장 등자룡은 조선 수군으로부터 판옥선을 각각 한 척씩 받아서 이것을 타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들의 출발은 경상우수사 입부 이순신에 의하여 보고 되어 조명연합수군은 전투체제로 들어간다.<br />
<br />
&nbsp;구원군이 순천으로 향하자면 반드시 노량해협을 지나야만 했다. 이순신은 바로 이 곳을 전투의 적지로 보고, 조선 수군은 남해 관음포에 주둔하고 명군은 곤양 죽도에서 매복한다. 조명연합군인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에는 방어래를 물고 조용히 이동하였다.<br />
<br />
&nbsp;11월 19일 새벽 2시경, 양측 함대가 노량해구에서 만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인데다가 달빛도 없었기에 전투는 어둠 속에서 혼전의 양상을 띄었다. 조선 수군은 어둠 속에서 시야 확보를 위해 화포 사거리보다 더 가까이 적군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수군은 화포 사격은 물론 불붙은 섶을 마구 적선에 던져가며 맹공을 가하였다. 바람도 조명연합수군에 유리한 북서풍으로 불어서 이 화공은 더욱 효과적이었다.<br />
<br />
&nbsp;고니시 목숨 구하러 왔다가 자기들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게 된 일본 수군은 형세를 지탱할 수가 없는 와중에 조명연합수군의 포위망 너머의 넓은 바다를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그 곳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일본 수군은 넓은 바다가 아닌 남해도 관음포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관음포는 지금은 간척사업의 영향으로 바다가 깊지 않으나 과거에는 포구 입구에서 안쪽까지 거리가 멀어서 잘못 보면 수평선과 지평선을 혼동할 지경이었다. 일본군은 어둠 속에서 이를 혼동하고 스스로 포구 안에 갇히고 만 것이었다.<br />
<br />
&nbsp;뒤늦게야 자신들이 지옥으로 들어온 걸 안 일본군은 일부는 남해도로 상륙하여 도주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병력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안 그래도 어둠 속의 전투에 이런 필사적인 싸움으로 전투는 이전의 해전에서 보기 어려운 혼전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전투 중에 한 때는 진린의 배가 포위당하여 일본군이 배 위에 까지 올라와 진린을 노렸지만 아들 진구경이 몸으로 막고 부상을 당하였다. 진린은 당장의 위기는 면하였지만 배는 여전히 위험하였다. <br />
<br />
&nbsp;이런 전투 중에 진린의 부장 등자룡이 탄 배는 일본군의 공격에 의하여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그 배는 완전히 불태워졌다. 이전에 육지 가까이 접근한 판옥선에 일본군이 불을 던진 적이야 있었지만, 이순신이 참전한 해전에서 적군의 공격으로 판옥선이 완전히 불타 버린 건 이것이 처음이었다.<br />
<br />
&nbsp;포위된 진린의 배를 구하려 나선 이순신은 적선 중에 다른 배보다 높고 위에는 붉은 천이 있으며, 금 갑옷을 입은 무장이 전투를 감독하는 배를 발견하고, 그 배를 공격하여, 장대 위에 있던 적장수 세 명 중 한 명이 쓰려졌다.. 그러자 진린의 배를 포위한 적선들이 포위를 풀고 이순신이 공격하는 배를 구원하러 나서니, 덕분에 진린은 무사할 수 있었다.<br />
<br />
&nbsp;전투가 계속되는 중에 서서히 날이 밝았다. 이순신은 혼전 중이었다지만 조선 수군의 최고위 장수임에도 직접 북채를 들고 독려하면서 앞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당연히 이순신의 좌선도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배 위로 탄환이 날아오면서 군관 송희립이 이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쓰러졌다.<br />
<br />
&nbsp;탄환이 노린 건 송희립만이 아니었다. 경황없는 전투의 와중에 적 조총수가 쏜 탄환에 이순신이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순신은 즉시 주위에 방패로 신체를 가리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다.<br />
<br />
&nbsp;“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br />
<br />
&nbsp;이 유언을 끝으로 위대한 영웅은 눈을 감는다. 하지만 이순신의 유언을 받은 큰 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이 전투를 독려하고, 쓰려졌던 송희립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서 전투에 임하였다. 전투는 여전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br />
<br />
&nbsp;결국 11월 19일 정오경, 간신히 살아남은 일본 군선들이 물러나고 전투는 조명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는 자신을 구하러 온 구원군이 몰살당하는 중에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하여 남해도 남쪽으로 우회하여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고니시는 자신이 살아남는데 크게 기여한 유정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순천 예교성 전투에서 서로군이 잘 싸웠으면 고니시는 전사나 할복 혹은 항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테니...아 천주교 신자라서 할복은 선택할 수 없었다던가? 고니시의 생명의 은인 유정은 텅 빈 예교성을 접수하고 큰소리치지만, 서로군에 종군 중이던 이덕형을 통해 모든 사실을 파악하던 선조와 조정에서 보자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웃기는 일이었다. 물론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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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고니시를 구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소 요시토시 등은 수많은 부하와 배들을 잃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달아났다. 이순신이 금 갑옷을 입은 적장이 있는 큰 배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을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나 적어도 그에 버금가는 무장이 이순신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히도, 조선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살아 돌아갔지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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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일본의 피해는 &lt;선조실록&gt;에 실린 좌의정 이덕형의 보고로는 적선 200척 격침에 전사자 수천 명, 명나라 군문이 통보한 내용은 100척 포획에 200척 분멸, 수급 500여급 참수에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수를 알 수 없다 하였고, 조경남의 &lt;난중잡록&gt;에는 적선 50여척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엇갈리는 면이 있지만, 이덕형은 서로군에 종군 중이었기에 자세한 전과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이며 조경남은 의병장으로 순천 예교성 전투에 참전하였기에 역시 단순히 소문만 듣고 노량해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확인된 전과 200척 격침에 피해 없이 온전히 살아 돌아간 배가 50척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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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조명연합군의 피해는 명나라는 등자룡 등 세 명의 장수의 전사가 확인되고, 이 외에 등자룡과 동승한 군사들이 전사하였을 것이다. 조선군은 30여명이 전사하였는데 그 중 10여명이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 장수급 인물이었으며, 좌선에 동승한 송희립, 탄환을 여섯 발이나 맞고도 분전한 유형 등의 군관 중에서 부상자도 있었다. 배의 피해는 등자룡의 판옥선 소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 가장 큰 손실은 통제사 이순신의 전사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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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전투가 끝난 후 진린은 이순신에게 구해준 것에 대하여 사례를 하려 하였으나, 전사소식을 전해 듣고는 세 번이나 쓰러지면서&nbsp; “나는 노야(老爺 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라 말하면서 통곡하였다. <br />
<br />
&nbsp;군사들도 이순신의 전사사실을 알고 바다가 떠나가도록 통곡하였고, 백성들도 이순신의 전사소식에 노인에서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골목을 메우고 통곡하였다. 시장에 나간 자들은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술자리를 피하였으며, 명나라 병사들까지도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 이순신의 상여가 들어오자 호남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nbsp; 관을 운반하려 하면 백성들이 수레를 잡으면서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라며 말하면서 우니, 관을 실은 수레가 나갈 수가 없었다. <br />
<br />
&nbsp;명나라 군문 형개는 “바다 위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표창하여야 할 것이다.”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바닷가 백성들이 스스로 사당을 지으니 이것이 현재 전남 여수에 있는 충민사이다. 백성들이 죽음에 통곡하고 백성들이 사당을 지은 영웅, 이순신은 요즘 일부에서 우기고 있는 것처럼 지배층의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위에서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지배층인 사대부들이나 피지배층인 백성, 상국인 명나라까지 누구나 인정하는 진정한 영웅이었다.<br />
<br />
&nbsp;명량대첩 이후로는 서인이나 북인들도 이순신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으며, 조선을 지배하는 사대부들도 이순신을 비판할 수 없었다. 명나라 장수들도 종전 후 선조가 찾아가서 명군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고 하니, 그 오만한 명나라 장수들이 자신들을 낮추고 이순신을 더 칭송하였다. 선조는 이런 명나라 장수들의 말에도 이순신을 인정하는 말은 하지 않고 명군만 높이거나 화제를 돌렸지만, 사실 선조가 그토록 이순신을 시기하고 괴롭힌 것도 이순신의 능력과 업적, 그리고 백성들의 존경이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br />
<br />
&nbsp;전투 종료 후 경상우수사 입부 이순신이 임시로 함대를 지휘하여 귀환하였고 충청병사로 있던 이시언이 일단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아직 경상도 해안에는 수많은 적이 남아 있었지만 이순신이 없는 이상 더 이상의 전투는 이어지지 않았고, 일본군이 자국으로 모두 철수하면서 7년간의 전란은 막을 내렸다. &nbsp;<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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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항간에는 노량해전을 이순신이 도망가는 적을 공 좀 세우려고 쫓으려다 죽은 것으로 폄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이다. 이 전투는 엄연히 고니시 구원군을 맞아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전투였다. 이순신이 일본군을 끝까지 위협한 것은 복수의 의미도 있지만, 언제 재침할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적 전력을 감소시킬 필요가 있은 것이다. 실제로 전후에도 몇 년간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였으며, 강항 같은 귀환포로들의 보고를 보면 일본 내에 조선재침을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물론 포로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내분을 빚는 일본 내의 정치상황으로 보아 재침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으며 실제 역사를 돌아보면 그 판단이 정확했지만, 종전 직전 시점에서는 일본의 재침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끝까지 일본군의 악몽으로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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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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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15:23:12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42)-순천 예교성 전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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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1598년 2월에는 도요토미가 죽었다는 첩보가 죽었다는 첩보가 조정에 도착한다. 그러나 선조는 도요토미가 정말 죽었다면 적들은 이를 숨기려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 이는 적들의 계책일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성은 더럽지만 머리는 좋은 임금이라 그런지 도요토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정확하였다. 이 때의 정보는 5공 시절에 있었던 김일성 사망설 같이 넘어갔겠지만,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도요토미는 이미 병들어 서서히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br />
<br />
&nbsp;강항의 &lt;간양록&gt;에는 도요토미가 7월에 죽었다는 말이 있다. 또한 8월 5일자의 &lt;선조실록&gt;에도 도요토미가 이미 죽었다는 포로의 증언을 말하고 있는 의병장 임환의 보고가 첨부된 전라병사 이광악의 장계가 실려 있다. 이외에도 입부 이순신이 도요토미가 7월초에 죽었다는 보고를 하는 등 조선군은 여기저기서 귀환포로 등을 통해 도요토미 사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다만 도오툐미의 사망일자에 대한 정설은 8월 18일이니, 포로들의 증언과는 어긋난다. <br />
<br />
&nbsp;도요토미의 죽음은 곧 극비리에 일본군에 알려짐과 함께 철수명령도 내려진다. 하지만 조명연합군도 도요동토미의 죽음을 인지하고, 이런 가운데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계획한다. 그것은 1차 울산성 전투 직후 경리 양호가 입안한 사로병진이었다. 이 작전은 조선의 지형적 조건 상 군사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우므로 군사들을 나누어 각 지역을 책임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본래는 육군을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나누고 수군은 각 육군에 배속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1차 울산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연합한 명군이 오래만에 제대로 싸워 가토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면서도&nbsp; 결국 섬멸하는데 실패하고 후퇴한 후, 수군의 지원 필요성을 느끼면서 수군을 수로군으로 독립시켜서 사로군을 이루었다. <br />
<br />
&nbsp;각군의 대장은 모두 명나라 장수가 맡아서 동로군의 대장은 마귀, 중로군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매, 서로군은 유정이 맡았으며 수로군 대장은 진린이었다. 이 중 중로군 대장은 이여송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이여매를 형을 대신하게 되면서 동일원이 후임으로 중로군의 대장이 된다. 이 사로군이 각지의 일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사로병진이다.<br />
<br />
&nbsp;사로의 대장 중 진린이 가장 먼저 내려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류한 것에 이어서 8월 18일에는 육군의 대장들이 한양을 출발한다. 마귀의 동로군은 경상좌병사 김응서와 함께 9월 중순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의 도산성을 포위한다. 9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만, 울산성의 가토군은 동로군의 유인작전에도 넘어가지 않고 성곽에 의지하며 수성전을 계속한다. 일본군이 해안가에 축조한 왜성은 종전 후 조선 조정에서도 그 양식을 본받아 축성을 하자 할 정도로 견고하고 수성에 효율적이기에 함락은 쉽지 않았다.&nbsp; 여기에 부산에서 일본 구원군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마귀는 동로군을 이끌고 경주로 철수하였다. 1차 울산성 전투가 가토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붙인 것과는 다르게 2차 울산성 전투는 이렇게 맥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br />
<br />
&nbsp;동일원의 중로군은 경상우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사천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사천성의 일본군을 지휘하는 무장은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보다 딸리는 무장에 한낱 <span id="POPS1678_957" class="pops">도자기</span> 도둑으로 비쳐지지만, 실제 역사의 시마즈는 전국시대의 이름난 무장으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자신이 가담한 서군이 도쿠가와의 동군에 의해 패배에 직면하자, 도쿠가와군의 본진을 정면으로 가르면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시마즈의 후퇴’를 감행한 맹장이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야 조선에 침입한 장수이며 그 후예들이 메이지 유신 후 정한론을 주장한다는 걸 생각하면 원수로 분류되겠지만, 그 능력까지 폄하할 이유는 없다. <br />
<br />
&nbsp;동일원의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하였다. 성주와 고령을 거쳐서 9월 18일에는 진주로 진격하였고, 20일에는 남강을 넘어서 일본 진영을 점령하였다. 9월 28일에는 조선의 정기룡을 선봉으로 삼아 시마즈군이 주둔한 사천성을 포위하였다.<br />
<br />
&nbsp;시마즈는 적들의 병력 규모가 큰 것을 보고 자신의 휘하 병력들을 사천 신선으로 후퇴시켰다. 여기서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시미즈군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이는 시마즈의 유인에 넘어간 결과였다. 결국 중로군은 시마즈군은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중로군의 피해는 일본 기록은 3만8천여 명, 명나라 기록은 3~4천명, &lt;선조실록&gt;에 나온 기록은 7~8천명이다. 사천성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무장으로서의 위엄을 떨쳤지만, 명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체면도 구기고 말았다.<br />
<br />
&nbsp;유정의 서로군은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군을 치기 위하여 9월 중순 전주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남하하였다. 서로군에는 2만의 명군과 6천의 도원수 권율 휘하 조선군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동로군, 중로군과 다른 점은 조명연합함대로 구성된 수로군이 예교성 앞바다에 있는 유도에 주둔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 최초이자 최후인 조명 연합 수륙합동 작전이 실시되는 것이었다.<br />
<br />
&nbsp;조명연합함대가 유도에 이른 것은 9월 20일, 유정의 서로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어느 드라마에서는 조선 수군의 지휘권을 유정에게 주려고 하자 이순신의 수군이 반발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nbsp; 실상은 그 반대였다. 이순신이 진린 때문에 작전을 못 한다고 하니 조정에서는 유정에게 지휘권을 주는 것이 수군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고 시행하려 했으나, 진린 측이 눈치 채면서 무산된 것이다. 물론 싸울 생각이 없는 건 유정도 마찬가지라서 결국 제대로 싸울 의지와 능력이 있는 고위지휘관은 이순신 뿐이었다. <br />
<br />
&nbsp;유정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강화회담을 <span id="POPS105549_51" class="pops">미끼</span>로 하여 고니시 유키나카를 유인하여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명나라 중군을 유정으로, 도원수 군관으로 권율로 구미서 군사 수백을 거느리게 하고 적군도 안면을 아고 있는 전라도 순찰사 황신은 가짜를 꾸미지 않고 고니시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둘기 20마리를 숨겨두었다가 고니시가 막사로 들어오면 날려 보내면, 이를 신호로 적을 공격하고 고니시를 생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멀리서 군사의 형세가 강해보임을 보고 의심을 하여 쉽게 접근하지를 않았고, 잠시 후 비둘기가 날아가고 명나라 군대가 실수로 포를 쏘니 고니시가 함정을 눈치 채고 달아나면서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nbsp; 유정은 곧 서로군을 움직여 적들을 추적하였으나 고니시는 잡지 못 하고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한 적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거둔 수급이 98개였으며, 명군의 피해도 많았다. 이렇게 하면서 육지에서 서로군이 순천 예교성을 포위하자 바다의 수군도 움직여서 바다에서 성을 봉쇄하였다. 수군은 검은 베로 돛을 만들고 여러 가지 모양의 깃발을 그 사<span id="POPS65_16" class="pops">이사</span>이에 세워두니 매우 웅장해 보였다.<br />
&nbsp; <br />
&nbsp;다음날인 21일에는 서로군은 목책을 설치하고 해자를 파려했으나 적이 막아 싸워서 성에 접근하지는 못 했다. 일본군은 성위에 포루를 설치하면서 짤막한 목채를 같이 두어 그 안에 허수아비를 세우면서 발포하여 서로군의 접근을 막았다. 수군은 아침부터 진격하여 활과 포를 쏘며 하루 종일 싸웠지만 물이 얕아서 적군을 추적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적군 경쾌선이 정찰을 위해 접근하자 이를 바로 추격, 적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배와 배에 있던 물건들은 진린에게 바쳐졌다. 이날 밤, 유정은 횃불을 들고 공격할 듯 진격하다가 불을 끄고 다시 진으로 돌아오는 폼만 잡고 싸우지는 않는 행위를 지속하였다. 적은 여기에 연달아 포를 쏘아 불이 성 밖으로 번졌다가 한참 후에 꺼졌다.<br />
<br />
&nbsp;다음날 수군이 다시 진격하여 예교성을 공격하니, 일본군은 죽기를 각오하면서 물 가운데로 나아가 수군을 포위하였으나, 수군은 많은 수급을 거두고 조수에 맞추어 물러났다. 그러나 이 날의 전투에서는 유격 계금이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명군 11명이 전사하였다. 조선군도 옥포만호와 지세포만호가 부상을 당하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음날인 23일, 진린은 명군의 전사와 부상에 화를 내면서&nbsp; 천만호 및 홍주대장과 한산대장을 각각 곤장 7대를, 금갑도, 제포, 회령포만호에게 15대씩을 때렸다. 진린의 이런 행동은 명군의 피해에 대한 분풀이 외에도 유정에게 수군 지휘권이 넘기려는 논의도 있은 점을 감안한 지휘권 확립도 목적을 둔 듯 하다.<br />
<br />
&nbsp;그 후 며칠간은 유정이 공성무기를 준비한다며 전투를 중지하였기에, 수군도 유도에서 대기한다. 계절은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강한 바람이 불었기에 며칠간 배를 움직이기도 힘든 날씨도 이어졌지만, 수군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다. <br />
<br />
&nbsp;10월 1일, 유정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lt;난중일기&gt;에 이 날 새벽 진린이 유정에게로 가서 잠깐 얘기하고 왔다는 걸로 보아 진린과도 협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 <br />
<br />
&nbsp;다음날인 10월 2일, 육지에서는 유정이 동틀 무렵부터 서로군을 지휘하여 진격하였고, 수군 역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육지의 서로군의 공격은 그다지 신통치가 않았다. 적 성안에 진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하거나 성안으로 끌려가는 명라나 군사들이 속출하고, 방위를 해야 할 군사들이 밤에 자지를 못해서 졸다가 습격을 받기도 하니 이날 죽은 명군이 8백 명이었다. 수군은 진격하여 적극적인 공격을 감행, 많은 적을 죽였지만&nbsp; 사도첨사 황세득과&nbsp; 이청일 등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와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 등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br />
<br />
&nbsp;3일에는 유정이 진린에게 비밀서신을 보내어 조수를 틈타 수력협공을 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래서 초저녁에 출동한 수군은 조수를 타고 적군의 수채에 육박하여&nbsp; 포탄이 막사까지 맞추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동쪽으로 몰리니 서쪽은 자연히 비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육지의 서로군은 별다른 공격을 취하지 않아 성을 함락시키지 못 하였다.<br />
<br />
&nbsp;그러는 동안 해안 가까이 접근한 명 수군은 곧 바닷물이 빠지면서 갯벌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군이 이 배들을 공격하여 불을 지르니, 사선 19척과 호선 20여척이 불타게 되었다. 명나라 수군들은 꼼짝도 못 하고 적군을 상관(上官)이라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육지에까지 들렸다. 조선 지형에 어두운 명 수군의 실책으로 이들이 위기에 빠진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명군만 피해를 입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을 생각하여 조선 판옥선도 7척을 일부러 갯벌에 갇히게 한다. 판옥선은 배가 높고 견고하고 활과 포를 쏘며 대항하니 적군이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판옥선이 성벽 같은 역할을 한 셈이었으니 그 덕분에 조선 판옥선은 무사히 다음 조수를 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br />
<br />
&nbsp;다음날인 4일, 수군은 분노한 진린은 수군을 다시 출동시킨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서로군의 공격이 없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이에 진린은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서로군에 대하여 분노해 육지에 올라 유정의 막사에 가서 손으로 유정의 수자기(帥字旗)를 찢으면서, “마음속 심사가 좋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곧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군문에 알리니 유정은 얼굴빛이 흙빛과 같이 되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장관 중에 능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홀로 어찌하겠소.” 라며 변명하였다. 아마도 진린도 적군보다도 더 도움 안 되는 아군의 행태에 분노했을 테니, 이순신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는 않았을까? 이리하여 두 명나라 장수들은 깊은 불화에 빠지게 된다.<br />
<br />
&nbsp;수군의 공격은 예교성을 위협하였지만 서로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6일에는 권율이 이순신에게 유정이 달아나려 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과연 다음날인 7일 서로군은 유정의 명령에 의해 군량과 병장기도 내버려 둔 채 퇴각한다. 군량을 불태우라는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미처 타지 못한 것은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넘어가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br />
<br />
&nbsp;이렇게 하여 7년간의 전쟁 중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륙협공 작전은 육군의 무성의로 별 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수군은 해안에서 싸우느라 육지의 포와 조총사거리에 노출되면서도 적군을 크게 위협해가면서 용감히 싸웠지만, 서로군이 대응을 하지 않으니 계사년부터 소강기에 있은 다른 해전들처럼 바닷가에서 위협을 하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br />
<br />
&nbsp;이 전투를 어느 누구는 "거 봐. 이순신도 패배한 적 있다니까."라고 말하는 근거로 든다. 물론 고니시군을 잡는데는 실패했지만, 수군은 예교성의 막사에까지 포탄을 날릴 정도로 큰 위협을 가했다. 수군이 이 정도 했으면 육군인 서로군이 성을 점령하든가 해줘야 하는데, 그걸 못 했다. 이렇게 이순신의 발목을 잡는 건 대개는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br />
			 ]]> 
		</description>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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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Nov 2009 15:58:59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그 떡밥은 지겨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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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모 신간도서에 나온다는 글 일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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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more_contents" style=""><span style="color: rgb(204, 51, 204);">원균이 흩어 버릴 수 있는 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어디에있었다는 말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미 전국의 군사는 10만을 훨씬 넘어 50만에 이르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그렇다면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할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이는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혈족인 이식이오히려 원균을 모함한 치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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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건 니 맘대로 추측하지 말고 사료를 따르란 말이야. 아니 이건 추측을 하더라도 말이지, 왜구 침입 많은 지역이니 당연히 좌우수영까지 나눠가며 수근이 더 배치된 거지, 팔도에 균일하게 배치됐겠니? 그럼 대한민국 휴전선 이남에 육군 60만이 있다는 말에 따르면 휴전선 이남은 경기도와 강원도니까, 대한민국에는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하고도 9개도가 있으니 대략 270만 대군이 있겠다? 그리고 같은 가문이래봐야 이순신과 이식은 별로 가깝지도 않아. 이명박 대통령이랑 민주당 이종걸 의원도 가문은 같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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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span class="more_contents" style=""><span style="color: rgb(204, 51, 204);">아래의 기록을 통해 곧 이순신의 거짓말이 드러났음을 알 수있다. 「선조실록」 30(1597)년 2월 4일자에 〈이덕형이 왕에게 아뢰기를 이순신이 당초에 원균을 제함?陷하여 말하기를??원균이 조정을 속인다. 그의 아들이 열두 살인데도 군공이 있다고 보고하였다고 하니 원균이 말하기를 내 아들의 나이 열여덟이며이미 궁마의 무술이 능하다고 하면서 이순신을 추궁하며 서로 힐난하는데 원균이 옳았으며 이순신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하는 기록이있으며 …… --- 「제4부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 중에서</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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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에 바로 이덕형이 원균 말만 듣고 이순신에 대해 오해했다고 고백한 거 나오거든? 그게 바로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소리고. 선조수정실록이 아니라 선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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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역사가지고 떡밥 뿌리는 것들은 발전이 없어. 환빠고 원균빠고 낡은 떡밥 가지고 지가 역사의 진실을 깨달은 거 처럼 큰 소리치지. 그게 나같은 아마추어에게 조차 비웃음 당할 정도로 쉬어빠졌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아님 모르는 척 하는 거든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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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75809#comments</comments>
		<pubDate>Wed, 18 Nov 2009 15:14:48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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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그럭저럭 생일날 먹을 건 먹었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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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점심 때 식당에서 문어비빔밥을 시켰더니 국물로 미역국을 줬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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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회사에서 케잌을 사 와서 먹었음. 다만 초길이 하나가 맘에 안 들음. 나이는 '만'으로 따지는 게 글로벌 스탠다드인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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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그럭저럭 챙겨먹긴 했네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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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우는 끝내 그 시간에 일어나는데 실패해 못 봤지만요. 새벽형인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떻게 존재한다는 거지? 다 지어낸 걸 거야.(...)<br />
			 ]]> 
		</description>
		<category>을파소의 잡담</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75662#comments</comments>
		<pubDate>Wed, 18 Nov 2009 12:00:05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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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자정이 넘었네요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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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고로 이제 생일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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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도 못 먹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생일은 생일이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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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으로 하늘에서 유성우 내려준다던데 새벽에 그걸 볼 수 있을런지....(그게아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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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러고보니 이제 쥐약살포 D-1인가?<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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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을파소의 잡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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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15:08:57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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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선덕여왕보니까 말이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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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조만간 의자왕이 즉위할 모양이던데, 아마도 극중에 직접 등장하진 않을 거 같지만, 신라에 대한 공격은 나오겠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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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면 당연히 대야성 함락도 나올텐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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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가 대야성주 장인으로 딸 내외의 죽음에 분노해야 하는 거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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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희, 문희는 끝내 안 나올 듯....심지어 차기국왕도 대사로만 나올 거라던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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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옥문지(玉門池) 얘기나 해주지. 당연히 여왕의 해설로......(퍽)<br />
			 ]]> 
		</description>
		<category>사극에 대한 잡상들</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74981#comments</comments>
		<pubDate>Tue, 17 Nov 2009 14:14:37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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