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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을파소의 역사산책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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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을파소,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국상. 농사를 짓다가 고국천왕에게 파격적으로 등용되어 진대법 등의 여러 정책 실시. 을파소가 죽자 온백성이 통곡하였다고 전한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at, 07 Nov 2009 06:58:0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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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을파소의 역사산책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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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을파소,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국상. 농사를 짓다가 고국천왕에게 파격적으로 등용되어 진대법 등의 여러 정책 실시. 을파소가 죽자 온백성이 통곡하였다고 전한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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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9)-아들 이면의 죽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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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nbsp;명량대첩 후 어외도로 진을 이동한 이순신은 19일에는 법성포를 거쳐서 홍농 앞바다, 20일에는 위도, 21일에는 고군산도로 이동한다. 그 후 다시 10월 3일 법성포를 거쳐서 9일에 우수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이동은 비록 명량대첩으로 일본에 <span class="pops" id="POPS5078_141">대하</span>여 압승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화약 등의 소모도 많았기에 물자와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일본 수군이 한 번 더 대규모로 몰아치면 이순신이라도 난처한 지경에 빠지겠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건 겨울이 다가온다는 이유도 있지만, 일본 수군이 명량대첩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br><br>&nbsp;그리고 수군 재건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중인 10 14일 새벽, 이순신은 꿈을꾼다.&nbsp;꿈에서 이순신은&nbsp;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가로 떨어졌는데, 막내아들&nbsp;이면이 엎드려서 자신을 안는 듯한&nbsp;모습을 보았다. 이 꿈이 무슨 조짐인지 알 수는 없고,&nbsp;내수사의 종이&nbsp;기르던 소 중 12마리를 일본군이 끌고 갔다는 보고를 받는 등 공무를&nbsp;보았다.<br><br>&nbsp;그 날 저녁에&nbsp;&nbsp;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안 <span class="pops" id="POPS41456_267">편지</span>를 전달한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이순신은 봉한 것 을 뜯기도&nbsp;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편지를 쓴 이는 둘째 아들 이열이었는데, 편지 겉봉에는 통곡(痛哭)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내용을 짐작하였다. 바로 막내아들&nbsp;이면의 전사소식을 전하는 편지였다. 이순신은 편지롤 보고 목 놓아 통곡하였다.<br><br>&nbsp;이면은 충청도 아산의 본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아산을 급습하자 다른 가족들은 피신시키고 맞서 싸우다가 숨을 거둔 것이다.&nbsp;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보복 작전으로 많이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랬다는 입증자료는 없다.&nbsp;<br><br>&nbsp;이면은 다른 아들들이나 조카들과 함께 이순신이 머문 진영과 아산집 사이를 여러번 왕래한 바 있다. 그렇게 이면이 아산집으로 갔을 때, 이순신은 아들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걱정되어 전전긍긍하였다. 한번은 이면이 피까지 토하는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매우 걱정하여&nbsp;점까지 쳐보았다. 그 결과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strike>그 때 임금은 선조긴 하지만 어쨌든</strike> 매우 좋은 괘였다. 다시 해보니 이번엔 '밤에 등불을 얻은&nbsp;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역시 좋은 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이면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br><br>&nbsp;그런 아들이 비명횡사하였다.&nbsp;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lt;<span class="pops" id="POPS89231_196">난중일기</span>&gt;에서 그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br><br>&nbsp;<span style="COLOR: #993399">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 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殃禍]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span class="pops" id="POPS51768_875">어머니</span>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span class="pops" id="POPS105349_90">명이</span>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span><br><br>&nbsp;17일에는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19일에는 고향집 종이 내려오니 그걸 보고 아들 생각이 나서 다시 통곡하였다.&nbsp;날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리고, 밤에 앚아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났다. 아직 어머니의 상중인데다가 아들까지 잃어 그 슬픔이 더할 수 박에 없었다.&nbsp;<br><br>&nbsp;11월 7일에는 자정 무렵 자는데 꿈에서 이면이 죽는 것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 23일에는 아산집으로 편지를 쓴느데 죽은 아들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 척의 배로 수백척의 적선에 당당히 맞서는 용장도&nbsp;아버지로서는 여느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br><br>&nbsp;이분의 &lt;행록&gt;에는 이면의 죽음에 관한 드라마틱한 장면이 나온다. 이면의 전사 4개월 후, 이순신의 꿈에 이면이 나타나서 “날 죽인 적을 아버지께서 죽여 주십시오!”라고 울면서 말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이 “네가 살아 있을 때는 장사였는데, 죽어서는 그 적을 죽이지 못 하겠다는 말이냐?”라고 하니, 이면은 “제가 그 놈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겁이 나서 그놈을 못 죽이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저승과 이승이 무슨 간격이 있을 것입니까?”라고 말하고는 슬피 울면서 사라졌다. 잠에서 깬 이순신이 잡혀온 일본 포로들을 조사하니, 그 중에 이면을 죽인 장본인이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그 일본군을 죽임으로 이면의 복수를 하였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lt;행록&gt;에만 전하기에 이순신의 조카이자 이면의 사촌인 이분이&nbsp;사촌의 죽음과 그 일로 가슴 아파 한 숙부를 안타깝게 여겨 넣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br><br>&nbsp;아들의 죽음은 가슴아프지만, 백의종군 길에 오르면서 어머니의 상도 모시지 못한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통제사이기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 슬픔은 표출하지는 못 해도 더했을 것이다. 그도 위대한 장군이기 전에 아들이요, 아버지였으니까. 그리고 이런&nbsp;모습을 찾는 것이&nbsp;이순신의 진짜 인간적인 모습을 찾는 것이다.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순신이 먼저 원균을 모함한 거라고 모르면서 아는 척&nbsp;인간 이순신을 복원한다고 개소리하는 게 아니라.&nbsp;<br/><br/>tag : <a href="/tag/인간이순신" rel="tag">인간이순신</a>			 ]]> 
		</description>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category>인간이순신</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7274#comments</comments>
		<pubDate>Sat, 07 Nov 2009 06:44:32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제가 법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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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span style="color: rgb(153, 51, 153);">도대체 학생이라 용서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span><br style="color: rgb(153, 51, 153);"><br style="color: rgb(153, 51, 153);"><span style="color: rgb(153, 51, 153);">요새 학생이라는 놈들 외국인 강간도 쳐 하고 다니는 것들입니다.</span><br style="color: rgb(153, 51, 153);"><br style="color: rgb(153, 51, 153);"><span style="color: rgb(153, 51, 153);">인정사정 보지말고 대한민국 법의 냉혹함을 알게 해야 합니다.</span><br />
<br />
.....저쪽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역사관을 피력하는 것이 외국인 강간에 준하는, 그래서 대한민국 법의 냉혹함을 느껴야 하는 극악한 범죄행위인가요?<br />
<br />
대한민국이 특정역사관을 금지하고 있나요? 지금 집권당이 한나라당인 줄 알았는데, 국가사회주의대한노동자당으로 교체됐나요?<br />
<br />
출처는 다들 짐작하시는 그 사이트 그 게시물의 덧글.<br />
<br />
그러고보니 아이피차단 아직 안 당했네?<br />
			 ]]> 
		</description>
		<category>을파소의 역사이야기</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6651#comments</comments>
		<pubDate>Fri, 06 Nov 2009 09:08:00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8)-명량대첩에 얽힌 잘못된 속설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66160</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66160</guid>
		<description>
			<![CDATA[ 
  &nbsp;<span id="POPS51620_165" class="pops">이글루</span>스 역밸 유저라면 당연히 비웃고 넘어가겠지만, 명량대첩에는 몇 가지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하나는 조선군이 철쇄를 사용해 승리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강수월래의 기원이 이 때 멀리서 우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려고 한데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br />
<br />
&nbsp;이런 속설은 몇년 전의 모 사극에서도 명량대첩 부분에 나온바 있으며, 심지어 철쇄 사용설은 같은 방송국의 역사 다큐에서도 신빙성있는 거처럼 다뤄진 적도 있다.<br />
<br />
&nbsp;흔히 명량대첩에 <span id="POPS5078_11" class="pops">대하</span>여 미리 설치한 철쇄에 일본 배들이 걸리고, 그 틈을 타서 조선군이 맹공격을 하였다는 식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판옥선은 평저선이지만, 일본 배들을 침저선이라 조선 배는 철쇄에 안 걸리지만 일본 배는 걸린다 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br />
<br />
&nbsp;오늘날의 해군은 기뢰부설함이 있고, 잠수함 같은 배로도 기뢰 부설이 가능하기에, 철쇄 같은 건 필요 없이 기뢰를 통하여 적 해군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변변한 기계 장치가 없는 조선시대라면 모든 걸 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좁은 수로라지만, 매우 강한 조류가 흐르는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길게 철쇄를 거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그걸 걸더라도 배 몇 척 걸리고 나면 사람이 설치해놓은 것이 끊어지거나 풀리지는 않겠는가? 기계의 도움 없이 그런 일을 해내려면 조선 수군에 화가 나면 녹색거인으로 변신하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나, 녹색 운석 앞에서는 힘이 약해지는 외계인이라도 있어야지 가능하다. 아니 그런 애들 있으면 철쇄 놓기 전에 그냥 적군을 다 쓸어버리면 되잖아?<br />
<br />
&nbsp;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실제로도 철쇄 가설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없다. &lt;<span id="POPS89231_163" class="pops">난중일기</span>&gt;나 &lt;선조실록&gt;, &lt;징비록&gt; 등 신빙성 높은 사료에는 철쇄 얘기도 나오지 않으며, 당시 급하게 진지를 이동한 조선 수군에게 철쇄를 만들고 설치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모든 게 부족한 조선 수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철쇄를 만들 철이 있으면 화포나 여타의 무기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다.<br />
<br />
&nbsp;철쇄 가설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이중환의 &lt;택리지&gt;나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용력으로 철쇄를 가설했다는 &lt;호남절의록&gt;,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초에 기록한 &lt;현무공실기&gt; 등이 있다.<br />
<br />
&nbsp;하지만 &lt;택리지&gt;는 기본적으로 역사서가 아닌 지리지로서 철쇄 얘기도 지방의 설화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못 하다.<br />
<br />
&nbsp;뛰어난 용력으로 김억추가 철쇄를 가설했다는 &lt;호남절의록&gt;의 기록도 당연히 현실성 제로.<br />
<br />
&nbsp;&lt;현무공실기&gt;는 여타의 행장류가 그러하듯이 조상을 터무니없이 칭송하는 기록에 불과하다. 그나마 당대도 아닌 후대의 기록이다. 게다가 &lt;현무공실기&gt;에는 김억추가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선 수백척을 격침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br />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05/03/d0017203_4af2d3bac8249.jpg" width="300" height="2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05/03/d0017203_4af2d3bac8249.jpg');" /></div>....그러니까 현무공의 정체가 실은 얘였다거나? 철쇄가 실은 철쇄아의 와전이라면 그럴 듯 하다.(어디가!)<br />
<br />
&nbsp;그리고 그 정도 철쇄는 만들려면 많은 양의 철이 필요하다. 그러나 명량대첩 당시의 조선 수군은 모든 게 부족한 상황. 그럴 철이 있으면 무기라도 더 만드는 게 낫다.<br />
<br />
&nbsp;좌수영에서 발견된 수중장애물의 흔적을 근거로 철쇄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울돌목은 물살도 거세고 당시 조선 수군은 자원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 사이 그 지형에 철쇄를 설치할 여유는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없다.<br />
<br />
&nbsp;그럼 강강수월래는?<br />
<br />
&nbsp;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전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속설에 불과한 것이 유력한 학설인양 둔갑을 하고 있는데 그 실체를 알아보자.<br />
<br />
&nbsp;이순신과 관련된 걸로 몇년전 방영한 모방송사의 드라마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명량대첩 시 병력이 부족하자 이순신은 아낙네들을 동원하여 강강수월래를 추게 하여 아군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속설이 전한다. 이것은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여 산봉우리에서 강강수월래를 했다는 것, 갯마을에서 했다는 것 등이 있다.<br />
<br />
&nbsp;결론부터 말하자면 속설일 뿐이다. 우선 &lt;난중일기&gt;어디에도 강강수월래에 관한 기록이 없다.<br />
<br />
&nbsp;게다가 명량대첩 처럼 아군은 부족하고 적군은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여자들을 병사로 위장시키는 작전은 매우 위험하다. 단병접전에 강한, 게다가 공성전이나 수성전에서는 패한 일도 많지만 야전에서는 대부분 이긴 일본군이 육지의 병사들을 본다면, 병력도 충분하니 후방 함대의 병력을 상륙시켜 도륙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변변한 훈련도 못 받은 여자들의 운명은 비참한 꼴을 맞이할 것이다.<br />
<br />
&nbsp;그리고 일본군 눈이 다 시력 마이너스만 모여있었겠는가? 처음엔 단순히 빙빙 도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속는다고 치자.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순히 손 잡고 도는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거기에 그렇게 병력이 많으면 포구에 방치된 판옥선을 더 끌고 나오던가, 육지에서라도 <span id="POPS102957_448" class="pops">화살</span>과 포를 쏘며 공격하던가, 아니면 매복이라도 할 일이지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면 일본 장수들이 아무런 의심을 안 할 리가 있을까? 내 머리 속에서도 나오는 생각인데, 이순신이 이런 걸 생각 못할 리가 없으니 여자들을 무리하게 끌어들이는 작전을 구사하지는 않을 것이다.<br />
&nbsp;<br />
&nbsp;또한 실제 작전이었다면 &lt;난중일기&gt;나 &lt;징비록&gt;,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lt;행록&gt;에 기록되던가, 당시 수군 장수들의 가문에서 쓴 &lt;행장&gt;에라도 ‘우리 조상이 강강수월래 제안 했습니다.’라는 조작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br />
<br />
&nbsp;그럼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가?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추석의 유래는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고구려나 부여, 백제 등 다른 고대국가들 역시 제천 행사들을 가졌는데, 이런 행사들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리는 축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리는데 모두 손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춘다는 발상은 고대인들의 시각에서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br />
&nbsp;<br />
&nbsp;&lt;삼국지&gt; 위지 동이전에도 마한에 대하여 ‘5 월에 씨를 다 뿌리고 귀신을 제(祭)한다. 때를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밤낮 쉬지 않고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다 같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며 손발을 맞추어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 이와 같이 탁무(鐸舞)와 비슷한 춤을 10월 농사를 끝낸 후에 또 다시 춘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강강수월래의 원형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한이면 지금의 전라도 일대와 일치한다.<br />
<br />
&nbsp;결국 강강수월래는 전라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다가 이 곳이 이순신의 주 활동무대와 겹치면서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퍼진 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백성들 사이에야 이런 속설이 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강강수월래에 관한 속설 소개라면 몰라도 진짜 유래인양 설명한다면 그건 문제이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공영방송국의 정통사극에 이런 속설이 그대로 반영되는 건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확고히 해줄 수 있으니 역시 문제이다. <br />
<br />
&nbsp;결국 명량대첩은 단 13척의 판옥선으로 5,6백 척의 적을, 후방에 있는 수송선들을 제외하고라도 300척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하는 전투였다. 더불어 철쇄 같은 건 없고, 강강수월래를 출 일도 없다. 칠천량해전의 여파로 <span id="POPS24139_623" class="pops">사기</span>는 바닥이다. 조정은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부하장수들도 모두 겁을 먹은 지라 통제사 이순신이 믿을 건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만일 이것이 역사가 아니라 어느 소설의 줄거리였다면, 그 소설을 리얼리티가 형편없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소설이 아닌 역사였다. 누가 봐도 절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싸움, 그 앞에 이순신은 고독하게 맞서고 있었다. 하긴 그런 싸움에 압도적으로 이겼으니, 이런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납득이 간다.<br />
			 ]]> 
		</description>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6160#comments</comments>
		<pubDate>Thu, 05 Nov 2009 13:47:03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7)-명량대첩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65274</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65274</guid>
		<description>
			<![CDATA[ 
  &nbsp;조선 수군이 벽파진으로 이동한 후에도 일본 함대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1597년 9월 7일에는 탐망군관 임중형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그 뜻이 수군에 있는 것이라.”라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적선 13척이 있는 곳으로 하였는데,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응을 하지 않고 도망하였다. 먼 바다까지 추적하였지만, 역류를 거스를 수 없고, 복병도 우려되어 더는 좇지 않았다.<br />
<br />
&nbsp;하지만 이순신은 적이 야습을 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장수들을 모아 이에 대비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어길 시 군법음 엄히 시행할 것이라 밝혔다.<br />
<br />
&nbsp;과연 그 예상대로 일본 수군은 밤 중에 기습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이미 야습에 대비하라는 지시가 있었음에도 조선 수군은 겁을 먹은 거 같았다. 이를 본 이순신은 마시 엄명을 내리면서 직접 배를 이끌고 지자포를 쏘면서 공격하니, 적선들은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를 반복하면서 공격을 하다가 새벽에 물러났다. <br />
<br />
&nbsp;이틀 후인 9월 9일. 이 날은 중양절이라 병사들에게 고기를 먹였는데, 그 날 저녁 적선 두 척이 조선 수군의 형세를 탐색하다가 영등포만호 조계종의 추격을 받고 싣고 있던 물건까지 버려가며 달아난다. 이런 소규모 전투는 그야말로 대결전을 앞둔 전초전일 뿐. 아니 상식적으로는&nbsp;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을 밀어버리는 전투가 됐어야 할 것이다. 조선 수군에는 전라우수사로 새로 임명된 김억추가 끌고온 판옥선 한 척을 합쳐도 고작 13척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br />
<br />
&nbsp;9월 13일 이순신은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자세히 전하지는 않지만, 임진년 승전할 때의 꿈과 대략 같은 꿈이었다고 &lt;<span id="POPS89231_202" class="pops">난중일기</span>&gt;에는 적고 있다.<br />
<br />
&nbsp;9월 14일. 척후군관 임준영이 보고하기를, “적선 2백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으로 들어왔다.”라 하면서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김중걸이 전하는데, 중걸이 이 달 초6일 달야의산[達夜依山]에서 왜적에게 붙잡혀서 묶여 가지고 왜선에 실렸던바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 된 김해 사람을 만나 왜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한밤중 왜놈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그 김해 사람이 귀에다 대고 몰래 이야기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들이 &lt;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혹은 쏘아 죽이고 또 배를 불태웠으니 극히 통분한 일이다. 각처의 배를 불러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더라.’ ”라는 보고를 덧붙였다. 이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아주 안 믿을 수도 없어서 전령선을 보내어 피난민들을 육지 위로 올라가도록 조치하였다. <br />
<br />
&nbsp;9월 15일. 진을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 이유는 벽파정 뒤에는 명량이 있었는데,&nbsp; 소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싸우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진을 옮긴 이후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 라는 유명한 훈시를 남겼다. 그날 밤 꿈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이 역시 꿈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승전의 암시가 되는 꿈인 듯 하다.<br />
<br />
&nbsp;1597년 9월 16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에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라고 하였다. 그 대의 조류는 북서류로 일본 수군이 전진하기에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보고를 접한 이순신은 즉시 수군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이전의 해전들은 대부분 조선 수군이 공세적인 입장에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일본 수군의 대규모 공세에 의한 해전이었다. 조선군의 전력은 고작 13척의 판옥선뿐이었다. 뒤에 백여 척의 피난선과 어선 등이 있었지만, 전투에 크게 보탬이 될 수는 없었다.. <br />
<br />
&nbsp;일본 수군의 총대장은 옥포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한 도도 다카도라, 선봉장은 당항포에서 죽은 구루지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지마 미치후사, 그 뒤를 한산도에서 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안골포에서 패한 가토 요시이키가 따랐으니, 이순신에게 한 번 이상 패배한 무장들이 복수를 위해 모인 격이 되었다. 이런 수군 전투함대 뒤를 시마즈 요시히로 같이 충청도 서해안에 상륙할 예정이던 육군과 이미 충청도까지 북상한 일본 육군에게 보급할 식량과 탄약을 실은 수송함대가 따르고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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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먼저 적선 133척이 해협을 지나 조선 수군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으로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러자 겁을 집어 먹은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좌선만을 남겨둔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차상급<span id="POPS101585_341" class="pops">자인</span>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무려 2마장이나 물러나서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사실상 이순신의 좌선 혼자서 수백 척의 배에 맞서는 것이었다. <br />
<br />
&nbsp;이순신의 좌선에서는&nbsp;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등의 화포를 쏘니 그 탄환이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은 갑판 위에 총총히 서서 <span id="POPS102957_298" class="pops">화살</span>을 빗발같이 쏘아 대니, 적선들은 감히 좌선에 접근하지 못하고 후진과 전진을 거듭하기만 하였다. 수많은 적을 단 한척의 배로 막아내는 말도 안 될 듯한 일을 이순신의 좌선이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적은 너무 많았다. 좌선에 탄 사람들도 겁이 나는 게 당연했다. 좌선이 여러 겹으로 포위되어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자, 배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나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라고 격려하였다. <br />
<br />
&nbsp;그리고 돌아보니 다른 배들은 여전히 뒤로 물러나 있었다. 군령을 집행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호각을 불어 중군에 군령을 내리는 기[中軍令下旗]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도록 했다. 그러자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좌선 근처로 다가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 보다 먼저 다가왔다. 이순신은 안위에게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라고 호통 치니, 이 말을 들은 안위는 자기 일신만의 안위가 아닌 백성들과 나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용감히 적진 속으로 돌진한다. 이런 장면을 일부만 모고 안위를 비겁하게 묘사하는 소설도 있지만, 엄연히 안위는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다음으로 적을 맞이하여 싸운 인물이고, 그래서 이후로도 이순신의 큰 신임을 받은 무장이다.<br />
<br />
&nbsp;안위에게 호통을 친 다음 이순신은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 너는 중군[中軍]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라고 말하니 김응함 역시 안위와 함께 용감히 전진한다.<br />
<br />
&nbsp;적군의 입장에서는 상대할 적이 3배로 늘어난 셈이다. 한 척에서 세 척으로 늘어난 게 뭐 대단하냐 싶을 수 있지만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쩔쩔 매던 상황에서 두 척이 더 전투에 가다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남은 배들도 더 가담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적장은 휘하 배 두 척을 보내 안위의 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니, 안위의 배는 곧 포위당하고 만다. 적군들이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배에서는 사람들이&nbsp; 있는 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또 혹 수마석[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치고 막다가 배 위의 사람이 기진맥진하였고, 격군 일여덟 명이 공포를 못 이기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를 본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쫓아 들어가서 마구 화포와 화살을 쏘았다. 적선 3척을 거의 제압하였을 무렵,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 명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br />
<br />
&nbsp;이 때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 준사가 바다를 보다가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에 있던 적장 마다시라고 말하였는데, 이 마다시란 바로 적군의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였다. 이에 이순신이 김돌손에게 명하여 갈고리로 그 시체를 건져 올리니 준사는 마다시가 맞다고 좋아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그 시체의 목을 베어다가 배 위에 효수하니, 형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형 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하고 만 것이다. 같은 사람에 의해 형과 아우 모두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였으니 아, 참으로 불행한 형제이다.<br />
<br />
&nbsp;이렇게 선봉장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판에 조류는 조선군에 유리한 남동류로 바뀐다. 전투가 벌어진 진도 울돌목은 하루에도 몇 번씩 조류의 방향이 바뀌는 곳이었으니, 이순신은 이점을 염두에 두며 불리함 속에서도 유리한 전장을 선택한 것이리라. 이쯤 되면 일본 수군의 기세가 꺾이는 것이야 당연했다. 뒤에서 구경만 하던 조선 전선들도 하나 둘 씩 전투에 참가하여 적선을 격파한다. 승기를 탄 조선 수군은 적의 진격을 막는 정도를 넘어 아예 추격전까지 펼치니, 일본 수군은 감히 조선 수군에 대항하지를 못 하고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br />
<br />
&nbsp;이 전투에서 조선군 사상자는 좌선에서 순천 감목관 김탁과 영노 계생이 전사하고 박영남, 봉학 및 강진현감 이극신 등 3명이 부상당하였고, 안위의 배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넉넉히 잡아 합쳐도 백명을 넘지 않았다. <br />
<br />
&nbsp;그렇다면 일본군은 얼마나 참전하였으며,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br />
<br />
&nbsp;일본 수군에서는 몇 척이나 참전하였는가? 이는 책에 따라서 엇갈리는데 크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br />
<br />
&nbsp;1. 133척(난중일기 초서본, 선조실록)<br />
&nbsp;2. 333척(난중일기 전서본)<br />
&nbsp;3. 5,6백척(재조번방지, 연려실기술)<br />
<br />
&nbsp;차이가 꽤 나는데 어느 게 옳을까? 보기에 따라서 "1번도 맞고 2번도 맞고 3번도 맞느리라. 허허허"라는 것도 가능하다.<span style="text-decoration: line-through;">(이 분위기에 적절한 짤방은 본격 제2차 세계대전 <span id="POPS5378_419" class="pops">만화</span> 49쪽 마지막 컷을 볼 것) </span><br />
<br />
&nbsp;먼저 133척이라고 나온 &lt;난중일기&gt;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br />
<br />
&nbsp;9월 16일[갑오] 맑다. 이른 아침 망군이 와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백여 척이 명량[鳴梁]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를 불러 약속을 밝힌 다음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후략)<br />
<br />
&nbsp;이 내용을 토대로 보자면, 전투 초반에 133척이 조선 수군을 포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부분이나 이후 부분이나 적선이 총 133척이라 단정하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즉, 전투 초반 133척이 들어온 이후 추가로 전투선이 온 것을 생략하고 133척만 참전한 것 인양 보이게 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일본 수군 무장들이 전사한 구루지마 외에도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상당한 동원능력을 가진 자들인 것을 볼 때, 전투선이 133척보다 더 많이 동원되었다고 봐야 한다.<br />
<br />
&nbsp;그럼 왜 실록에는 133척이라 기록되었는가? &lt;신조실록&gt;에서도 &lt;난중일기&gt;처럼 적선의 총 숫자를 확정한 게 아니라 ‘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라고 하여, 역시 전투 초반의 진입한 선박만 130여척인지, 전투에 참가한 총 선박이 130여척인지가 애매하다. 이는 이순신이 축소보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임금에게 밉보여 죽을 고비를 넘긴 이순신이기에 자신의 공이 크다고 강조하면 또 다시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전공을 축소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결국 다른 상황도 함께 고려하여 볼 때, 133척은 전투 초반에 해협에 진입한 숫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순신은 선조의 경계심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 장계는 물론, 나중에 타인이 볼 수도 있는 일기에까지 <span id="POPS89556_923" class="pops">전과</span>를 축소 기록했을 가능성도 높고, 전서본 &lt;난중일기&gt;는 이를 바로잡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br />
<br />
&nbsp;그럼 5,6백척이라는 기록은? 이렇게 적은 &lt;재조번방지&gt;나 &lt;연려실기술&gt;은 전투를 바라보던 백성의 입장에서 적고 있다. 인근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조선 수군의 시야에는 안 들어온 배까지 볼 수 있어 더 많은 배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br />
<br />
&nbsp;결국 명량대첩에 참전한 일본 배들의 숫자는 초반에 진입한 함대 133척에 총 전투선박 330여척, 해협에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인근까지 온 비전투선박을 포함 시에는 5,6백 척에 달하는 숫자였을 것으로 보인다.&nbsp; <br />
<br />
&nbsp;그럼 일본의 피해는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일본 수군의 피해는 31척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 기록된 공식전과 역시 적선 31척 격침에 수급을 8개를 취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게 격침을 확인한 적선의 수이고, 실제 전과는 더 크다.<br />
<br />
&nbsp;조경남의 &lt;난중잡록&gt;에서는&nbsp;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라고 적고 있으며, &lt;연려실기술&gt;에서도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10여 척만이 도망갔다는 건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일본군의 피해가 컸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br />
<br />
&nbsp;일본군의 피해상황은 일본군에 사로잡혔던 조선인 포로의 증언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lt;선조실록&gt;에는 정유년에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려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하였는데, 산도는 정유년 6월에 전선 12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해전과 남원성 전투에도 참가하였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대첩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며. 산도의 배가 120척이라고 해도 이것이 전투선과 비전투선 모두 합친 수치일수도 있다.<br />
<br />
&nbsp;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실록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명량대첩에서 죽지 않았고, 일본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였으며 120척의 선단을 이끌었다고 전풍상이 증언하는 걸 보면 산도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나 그 휘하 장수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즉, 구루지마 이외의 영주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일본의 실제 피해는 31척을 넘어가는 것이다.<br />
<br />
&nbsp;강항의 &lt;간양록&gt;에도 칠천량해전과 명량대첩을 모두 본 조선인 포로의 증언이 나온다. 여기서 그 포로는 “..(전략) 급기야 여러 왜장이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전라도우수영(全羅道右水營)에 당도하였는데, 이순신이 과선(戈船) 십여 척을 이끌고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장 내도수(來島守)가 패전하여 죽고, 민부대부(民部大夫)는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그 나머지 작은 장수도 죽은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강항은 정유년어 쳐들어 온 적장들의 명단에서도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죽은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일본군의 피해는 구루지마 미치후사 휘하 병력 이외에도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br />
<br />
&nbsp;결국 일본군 피해 31척이라는 건 의도적인 축소보고이거나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만 31척이라는 의미이지, 전체 피해는 그 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완침은 면했다 하더라도 일본 선박들은 승선인원이 대거 몰살당하여 전투력은 상실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명량대첩 이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게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단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명량대첩에서 일본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br />
<br />
&nbsp;명량대첩은 이순신도 천운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속에서 이루었기에 더 값진 승리였다. 이런 엄청난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싸우던 곳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풍랑이 심하고 탄약 소모량도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북쪽 당사도로 진을 이동한다. 다음날에는 어외도로 진을 옮기는데, 3백 척의 피난선들이 먼저 와서 수군을 환영하였으며, 나주진사 임선 등이 찾아와서 승리를 치하하고 군사들에게 먹일 양식을 주었다. 명량대첩의 모습이 백성들에게는 매우 인상적으로 각인된 것이다.<br />
<br />
&nbsp;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북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서해로 진입하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본이 얻은 것이 있다면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강항을 포로로 잡았다는 거 정도. 그것도 결과적으로 봤을 때 얘기지, 전쟁에 있어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 수군은 끝내 전라도 해안을 벗어날 수는 없었고, 따라서 충청도의 육군에게 보급도 해줄 수 없었다. 더 이상 바다로부터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일본 육군에게 서서히 겨울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어느 누구도 임진년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충청도까지 올라간 일본군은 다시 남하하여 남해안 일대의 왜성에 머문다. 명량대첩은 단순히 소수로 다수의 적을 물리친 게 아니라 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은 전투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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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5274#comments</comments>
		<pubDate>Wed, 04 Nov 2009 10:08:28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세상 참 불공평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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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얼마전부터 역밸에 '슨상님이란 놈현 바빠.', '전라도도 나빠.'라고 하고 싶은 듯한 포스팅 보내는 블로그가 나타났는데 거기는 잘만 무시하면서 사론곡필은 왜 포스팅만 올리면 밸리 인기글 최정상이야?<br />
<br />
저런 것들은 반론이고 뭐고 그저 무시가 제일.<br />
<br />
환빠라던가 원균옹호론 반박하는 것도 그걸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낚일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사실상의 목적인데, 저런 블로그들은 제정신이면 도저히 낚일 사람이 있을 거 같지가 않음.<br />
			 ]]> 
		</description>
		<category>을파소의 잡담</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4642#comments</comments>
		<pubDate>Tue, 03 Nov 2009 12:58:42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드라마 선덕여왕에 어차피 역사성 따지기 힘들고..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64633</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64633</guid>
		<description>
			<![CDATA[ 
  <span id="POPS88749_298" class="pops">미실</span>은 진서로 인정 못 받은 화랑세기랑도 달라졌지만...<br />
<br />
돌아다니다 어느 블로그에 미실이 당나라 사신에 당당히 맞서는 걸 장면을 보고, 정변이 성공했으면 성군이 됐을수도, 라고 하더군요.<br />
<br />
물론 실제로는 그럴리 없고(일단 미실이 실존했어야...)덧글 보면 그 점은 인지하고 드라마 상으로만 따진다고 하지만..<br />
<br />
다 떠나서 강대국에 맞선&nbsp; 모습에서 성군의 자질을 볼 수 있을까요?<br />
<br />
21세기에도 집권했었거나 아직 집권 중인 <span id="POPS8065_570" class="pops">지도</span>자자 단체 중에서도 강대국 미국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경우는 좀 있죠.<br />
<br />
김정일이라거나, 탈<span id="POPS54928_887" class="pops">레반</span>이라거나...<br />
			 ]]> 
		</description>
		<category>을파소의 잡담</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4633#comments</comments>
		<pubDate>Tue, 03 Nov 2009 12:46:26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새로운 밸리 개척하기...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63868</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63868</guid>
		<description>
			<![CDATA[ 
  참 어렵군요.<br />
<br />
성공은 아니지만 실패도 아닌....계속 성공과 실패를 판가람할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꼬임.<br />
<br />
그래도 다음 기회는 마련해두고 있는 상황임.<br />
<br/><br/>tag : <a href="/tag/무슨밸리일까" rel="tag">무슨밸리일까</a>,&nbsp;<a href="/tag/역밸은당연히아니겠지" rel="tag">역밸은당연히아니겠지</a>,&nbsp;<a href="/tag/에라포스팅이나날로먹자" rel="tag">에라포스팅이나날로먹자</a>			 ]]> 
		</description>
		<category>을파소의 잡담</category>
		<category>무슨밸리일까</category>
		<category>역밸은당연히아니겠지</category>
		<category>에라포스팅이나날로먹자</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3868#comments</comments>
		<pubDate>Mon, 02 Nov 2009 14:42:56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한국박물관 개관100주년 특별전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62948</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62948</guid>
		<description>
			<![CDATA[ 
  &nbsp;오늘 한 번 더 다녀왔습니다.<div><br />
</div><div>몽<span id="POPS103821_694" class="pops">유도</span>원도 때 있던 줄은 오늘은 안 보이더군요.</div><div><br />
</div><div>역시 특별전시인 강산무진도와 태조 이성계 어진, 그리고 그 밖에 지난번에는 미처 보지 못한 전시물들을 보고 왔습니다.</div><div><br />
</div><div>강산무진도는 몽유도원도가 있던 그 자리에 전시중인데, 그 때와는 달리 한산해서 여유있게 볼 수 있어 좋더군요.</div><div><br />
</div><div>개인 차원으로는 여유롭게 관람하는 건 좋은데, 몽유도원도만 오는 전시회가 아닌데 거기에만 집중된 건 좀 씁쓸하다는 이중적인 생각이...ㅡㅡ;<br />
<br />
추가: 청룡도 모사본 설명에 이렇게 나온 걸 오늘에야 봤네요.<br />
<br />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br />
<br />
'일제는 우리나라가 고대에는 강성햇으나 점점 쇠약해져 식민지로 전락...역설적으로 우리 고<span id="POPS1629_978" class="pops">대문</span>화 우수성 강조...'<br />
<br />
이 설명대로면, '나날이 줄어든 영토'를 주장하는 환빠들은 일제의 계획에 21세기까지도 충실하다는 뜻이네요?<br />
</div>			 ]]> 
		</description>
		<category>을파소의 잡담</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2948#comments</comments>
		<pubDate>Sun, 01 Nov 2009 14:16:50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펌글이라는 거 보면... ]]> </title>
		<link>http://history21.egloos.com/2462937</link>
		<guid>http://history21.egloos.com/2462937</guid>
		<description>
			<![CDATA[ 
  열편 중 일곱편은 뻥이었던 거 같음.<div><br />
</div><div>특히 유명인물이나 단체 관련이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짐.</div><div><br />
</div><div>상식적으로도 아무리 혈액관리가 막장이라도 사람피가 <span id="POPS24772_527" class="pops">새우</span>깡도 아니고 "환자분 수혈해야하니까, 보호자분이 가셔서 피&nbsp;<span class="Apple-style-span" style="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 line-height: 19px; color: rgb(39, 50, 26); ">400ml 두<span id="POPS98411_741" class="pops">봉지</span><span class="Apple-style-span" style="color: rgb(0, 0, 0); font-family: 굴림; line-height: 15px; ">&nbsp;사오세요."랄 병원이 있을 리 있나?&nbsp;</span></span></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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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을파소의 잡담</category>

		<comments>http://history21.egloos.com/2462937#comments</comments>
		<pubDate>Sun, 01 Nov 2009 14:10:04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6)-통상의 귀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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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nbsp;해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해산하다시피 전멸하자, 조선은 놀랐다. 명나라도 놀랐다. 일본도 놀랐다. 전쟁 기간 동안 불패를 자랑하던 수군이 하룻밤 만에 허망하게 사라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이라크에 있는 미군이 하룻밤 만에 궤멸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칠천량 해전은 세계역사에 있어서도 보기 드문 최고의 황당한 패배로 길이 남을 것이다.</div><div><br />
</div><div>&nbsp;한산도로 돌아온 경상우수사 배설은 한산도를 불태우고 서쪽으로 물러난다. 더 이상 일본군을 막을 건 없었다.</div><div><br />
</div><div>&nbsp;수군의 궤멸은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비상사태였고, 이는 반드시 수습해야 했다. 칠천량 해전을 보고 받은 도원수 권율은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급하게 찾아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라면서 뜻을 정할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은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라고 대답한다. 이순신은 이 심각한 사태를 수습할 적임자였으니 권율은 당연히 기뻐하였다. 이순신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을 데리고 길을 떠나 사태 수습에 나선다. 아직 조정에서 논의를 하고 결정을 내릴 시점은 아니었기에, 아직은 백의종군 신분이었지만, 권율의 참모자격으로 일에 나섰다 할 수 있다.</div><div><br />
</div><div>&nbsp;7월 22일에 패전사실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전사한 충청수사 최호의 후임에 임진년에 전라좌수영 휘하였던 순천부사로 있은 권준을 임명한다. 하지만 정작 충청수군은 한동안 이순신과는 합류할 수 없었다.</div><div><br />
</div><div>&nbsp;이순신을 다시 삼도통제사로 임명할 것을 결정한 건 7월 22일이지만, 이순신이 그 명령을 수령한 것은 8월 3일이었다. 그 전날인 8월 2일의 일기에서는 이순신이 임금의 명령을 박을 징조의 꿈을 꾸었다고 적고 있으니, 하루 뒤의 일을 예감한 것일까?</div><div><br />
</div><div>&nbsp;선조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면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임명하였다.</div><div><br />
</div><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993399">&nbsp;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span id="POPS2853_479" class="pops">울타리</span>를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아직도 재앙을 거두지 아니하여 흉포한 무리가 다시금 성하매, 마침내 삼도 수군도 한 번 싸움에 모두 없어<span id="POPS8059_640" class="pops">지니</span> 그 뒤로 바다 가까운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주랴. 한산을 이미 잃었으매 적이 무엇을 꺼리리요.</font></div><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993399">&nbsp;눈썹을 태울만큼 급박함이 조석에 닥쳐온 이제 계책이라 할 것은 뿔뿔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모으고 군함을 거두어 들여서 급거 요해처로 가서 웅거하여 엄연히 큰 군영을 이룸일 뿐일 것이다. 그래야만 도망하여 숨은 백성들도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 것이고, 바야흐로 세력이 강성해진 왜적을 조금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font></div><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993399">&nbsp;그러나 이 책임을 맡은 자는 위풍과 인애와 지략과 재능을 갖추고서 평소부터 안팎으로 백성의 따름을 받던 자가 아니더면 능히 이 임무를 수행해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오직 그대의 명성만이 일찍이 병사의 직을 맡을 때부터 두드러졌으며, 그 전공과 업적이 다시금 임진년의 큰 승전이후로 떨쳐져서 변방의 군사들이 의지하기를 만리장성처럼 굳게 하였다.&nbsp;</font></div><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993399">&nbsp;그럼에도 지난 번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사람의 꾀가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font></div><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993399">&nbsp;이제 특별히 그대를 상복 입은 채로 기용하여 또한 백의에서 뽑아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겸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도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한 자들을 찾아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가 요해지를 지켜 군대의 위풍을 새로 한번 떨치게 하면 이미 흩어졌던 인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고 적도 또한 아군의 방비가 있음을 듣고 감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font></div><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993399">&nbsp;수사 이하는 모두 다 지휘 관할하되 일에 따라 규율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일체 군법대로 처단하려니와, 그대의 나라 위해 몸을 잊고 시기에 따라 나가고 물러옴 같은 것은 이미 다 그 능력을 겪어 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많이 <span id="POPS94033_667" class="pops">하리오</span>.</font></div><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993399">&nbsp;어허 저 오나라 때 장수 육항(陸抗)이 국경의 강 언덕을 두 번째 맡아 군략 상 할 바 일을 다 했으며, 또 저 왕손(王遜)이 죄수의 명목에서 일어나 능히 적을 소탕하는 공로를 세운 것 같이,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건져주기를 원하는 소원을 풀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조칙을 내<span id="POPS73839_329" class="pops">리노</span>니 그렇게 알 지어다.</font></div><div><br />
</div><div>&nbsp;그러게 잘 싸우는 사람 왜 파직시키고 지지리도 무능한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했던가? 통제사로 복직하기는 했지만, 대체 뭘 가지고 싸우라고? 하지만 어명을 받은 이상 고지식하게 그 어명을 수행하는 이순신이었다. 그리하여 돌아온 통제사 이순신은 수군 수습의 길에 나선다.</div><div><br />
</div><div>&nbsp;그러나 그게 쉬울 리가 없다. 흩어진 배들과 병사들도 모아야하는데 칠천량 해전 이후로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휘하 군사도 얼마 없으니 이들을 또 잘 피해서 다녀야 한다. 때로는 하루 차이로 일본군과 어긋나 길을 지나기도 하니, 참으로 위험한 시기였다. 그렇다고 조정에서 지원이라도 해주는가? 모든 건 이순신 혼자 해결해야 했다.&nbsp;</div><div><br />
</div><div>&nbsp;그리고 이순신은 부지런히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병<span id="POPS34980_984" class="pops">장기</span> 등을 수습하면서, 이 과정에서 순천부사 우치적 등의 수군 장수들 및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병사나 군관을 보내 사라진 관리들도 찾아보았다. 그리고 회령포에 이르러서는 경상우수사 배설의 판옥선들도 수습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게 부족했다. 판옥선들은 배설이 이끌었던 배들 말고도 배설과는 따로 도망친 판옥선들에 포구에 방치된 판옥선들도 있었지만, 배가 있어도 움직일 사람이 부족하거나, 그 배들을 끌고 와야할 책임자가 격군 부족을 핑계로 회피하여 배가 있어도 전투에 투입하기가 힘들었다.</div><div><br />
</div><div>&nbsp;8월 19일에 회령포의 전선을 수습할 때 다른 모든 장수들이 임금의 교서에 숙배를 할 때, 배설만은 숙배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그 벌로 배설 대신 그 밑의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아마 배설은 임금에게 불만이 많았나 보다. 그런 임금이라면 필자라도 불만 많겠다. 배설의 영리 외에도 이 날 판옥선을 상인 위덕의를 위해 사사로이 이용한 회령포 만호 민정붕도 곤장을 맞았다. 몇년 전 어느 드라마에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지 판옥선으로 상당의 짐을 운송했다는 내용은 이런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처사임을 알 수 있다.&nbsp;</div><div><br />
</div><div>&nbsp;이순신이 수군을 수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안, 일본군은 전라도를 침탈해갔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수군까지 동원해가면서 명나라 군사도 주둔한 남원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8월 13일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3일간에 걸쳐 저항이 이어지지만,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수와 군사, 백성들이 죽었으며 명나라 총명 양원이 이 남원성에서 달아났다가 참수형에 처해진다. 남원서의 함락 이후 전주성을 비롯한 전라도는 철저히 일본군에게 짓밟힌다.</div><div><br />
</div><div>&nbsp;이런 상황에서 지원도 없이 수군을 수습하고 재건하는 이순신이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병이 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nbsp;실제로 이순신은 곽란 증세로 며칠 앓아눕기까지 하였다.&nbsp;</div><div><br />
</div><div>&nbsp;8월 25일에는 훔친 소를 끌고 가던 백성들이 “왜적이 왔다.”라고 말을 하고 다니자 이순신은 이들의 목을 벤다. 다음날에는 척후군관 임준영이 적의 진격상황을 보고하니, 이순신이 전날 백성들의 목을 벤 것이 무리하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죽은 백설들이야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이순신이나 다른 군관에게 적군의 동태를 정식으로 제보한 것도 아니고, 다른 백성들 사이에서 크게 떠벌렸다. 이것이 사실을 말한 것이라 해도, 수군에게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적군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민심이 흉흉해지고 군사들 사기에도 도움이 안 되기에, 경계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그랬기에 이순신은 그 백성들을 처형시킨 것이다. 그래도 곤장도 있지만 사형은 심하다 할 수도 있지만, 이순신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nbsp;</div><div><br />
</div><div>&nbsp;26일에는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후임인 김억추가 왔다. 한산도도 불탄 시기, 남은 수군이 주둔하는 지역이 관할인 전라우수사라도 좀 믿음직한 인물을 보내주었더라면 좋을 텐데, 김억추는 이순신이 겨우 만호감이나 될 가라며 할 정도로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nbsp;</div><div><br />
</div><div>&nbsp;28일에는 적선 8척이 나타나는 일이 있었다. 적의 출현에 조선 수군은 당황하고 겁을 먹었으나, 적선을 쫓아가니 도망갔다. 그 후 수군은 벽파진으로 주둔지를 옮겼지만, 사정이 나아진 건 없었다.</div><div><br />
</div><div>&nbsp;9월 2일 새벽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이후 전쟁이 끝난 후까지 수차례에 걸쳐 배설을 잡아야한다는 논의가 조정에 있다가, 1599년에 이르러서야 도원수 권율의 군사들에게 붙잡혀서 처형된다. 배설의 처형 이유는 흔히 탈영으로 알려져 있지만, 1598년의 &lt;선조실록&gt;에는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소문에 대한 보고가 있다는 점을 본다면, 오히려 역모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nbsp;</div><div><br />
</div><div>&nbsp;정작 그 누구보다도 역심을 품을만한 이순신은 묵묵히 자기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하지만 배도 없고, 그나마 있는 배도 움직일 사람이 없고, 조정은 아무런 지원도 안 해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지원이 다 뭔가? 선조는 오히려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으로 편입하여 싸우라는 어명을 내린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자면 수군은 이미 전력이 있으나 마나 하다. 하지만 바다를 포기한다는 건 적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고, 그래서 이순신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말을 남기게 되는 장계를 올리면서 수군 철폐령을 거부한다. 이는 오로지 나라를 위한 결단이었다.&nbsp;</div><div><br />
</div><div>&nbsp;그러는 동안 전라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충청도까지 북상하면서 세자와 내전 등이 먼저 피난을 가고, 조정도 피난여부를 논의를 한다. 한양의 백성들도 피난 행렬이 이어지는 등, 조선은 임진년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에 봉착하였다.&nbsp;</div><div><br />
</div><div>&nbsp;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도 큰 고비가 다가오고 있었다. 남원성 전투에 참가한 일본 수군이 다시 바다로 돌아오면서 임진년에 이루지 못한 서해진출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의 목적은 서해로 북상하여 충청도에 있는 육군에게 보급을 하고 서해안으로 추가적으로 육군을 상륙시키는 것이다. 이 계획이 달성되면 일본군은 무리 없이 북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는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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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이순신/임진왜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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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31 Oct 2009 15:08:20 GMT</pubDate>
		<dc:creator>을파소</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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