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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백랑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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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있었던 일 그대로...</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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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7 Mar 2009 09:22:2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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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백랑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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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있었던 일 그대로...</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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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평양성(6)작성중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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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 지나 사서의 평양성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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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단군조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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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5 Dec 2008 03:16:38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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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평양성(5)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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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 왕험성과 평양성<div>한나라 무제 유철은 기원전 109 년 위만의 왕험성을 공격합니다. 몇차례의 전투 결과 성과 없는 전장을 지휘할 총감독들을 파견하여 재정비하여 전열을 가다듬어 보지만 결국은 조선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무너집니다. 이윽고 기원전 108 년 조선 땅에 삼군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기원전 107 년에는 현토군이 설치됩니다. 이로써 대략 2200 여년 간 이어온 조선이라는 국호는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왕험성은</div><div>이로부터 약 340 여년이 지나서야 사서에 재등장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왕험성이 아닌 평양성이며 평양성의 주석으로 나타납니다.</div><div>그 사서는 바로 삼국사기이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의 기사입니다.</div><div>`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거쳐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div><div>평양은 본래 신인 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이르기를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하였다.`</div><div>평양성을 쌓은 곳이 신인 왕검의 택지로 혹은 왕험으로 알려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단군왕검 조선의 도읍이긴 한것 같은데 첫 도읍인 평양성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백악산 아사달이나 장당경으로 볼 근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백악산 아사달이나 장당경 또한 왕의 도읍이라는 왕험성으로 불려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양이라는 땅이름이 아무데나 무시로 튀어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삼국유사에서 고기를 인용한 첫 도읍인 평양성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div><div>단군 왕검 조선의 왕험성. 평양성에 관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단락을 바꾸어서 더 구체적으로 위치를 규명해 보겠습니다.</div><div>2) 고구려의 평양성</div><div>- 장수왕의 평양성</div><div>그러면 정작 궁금한 왕험성인 평양성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전무하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동천왕의 평양성 천도 후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이거하고, 다시 평양성 동쪽의 황성으로 재이거합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시에 전방위로 영토를 넖히며 강성기에 들어섭니다. 뒤를 이은 장수왕은 확장된 영토를 기반으로 북위. 남송. 북제 등 지나국들과는 노련하고 자존적인 외교로 안정적 기반을 다지며, 쇠약해지는 북연을 통째로 접수하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합니다.</div><div>이러한 과정에서 천도한 장수왕의 평양성은 동천왕의 평양성 보다 수명이 더 길고 고구려의 대표적인 도성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래서인지 장수왕의 평양성에 대한 기록이 많고, 따라서 그 위치를 가늠해보기가 수월합니다. 동천왕의 평양성.왕험성이 장수왕의 평양성과 동일한지의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div><div>우선 삼국사기 잡지 4 지리 고구려.백제 기록을 보겠습니다.</div><div>`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인 것 같고 패수는 대동강이 옳다`</div><div>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성과 왕험성 사이의 관련성은 기록된 바 없습니다. 삼국사기는 단군조선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div><div>그런데 고조선 왕검조선을 수록한 삼국유사는 위서를 인용한 첫도읍 아사달을 `혹 개성 동쪽 지금의 백악궁이 맞다`라고 하였고, 고기를 인용한 첫도읍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이라고 단정적으로 비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위만조선의 설명글에서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는 왕험의 주에 `이기는 땅 이름이라 했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div><div>그렇다면 일연스님은 고조선.왕검조선이 개성과 평양을 오간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또 위만이 도읍한 왕험이 낙랑군 내라면 개성이나 평양 지역이 낙랑군이라고 생각했을까요?</div><div>왕험성이나 평양성에 대하여 예전이나 현재나 위치 비정은 위 내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 사학 전문인들이나 두계의 학맥을 잇는 현재의 강단사학 전문인들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자료 수집의 한계나 역사 현장을 지금처럼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고려 당대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읽어보면 김부식과 일연이 비정한 대동강 옆의 평양이나 개성지역을 떠올리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나의 정사와 사찬사서와 주석들을 볼라치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div><div>그러면 지나의 정사와 사서들의 지리서들은 어디라고 했는지 본격적으로 보겠습니다.</div><div>우선 고구려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당시의 기록인 구당서를 보겠습니다. 구당서 고려전에</div><div>` 고려는 부여의 별종으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한 낙랑군의 고지이다....중략... 동쪽으로는</div><div>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은 말</div><div>갈에 이른다.` 라고 하였습니다.</div><div>위 기록의 평양성이 지금의 대동강 평양시를 묘사한 글일까요?</div><div>------------------------------------------------------------------------------------------------------------------------</div><div>&lt;三國史記高句麗本記東川王條21年&gt; `王以丸都城經亂不可復都 平壤城移民及묘社 平壤者本神人王儉之宅也 或云王之都王險`</div><div>&lt;三國史記雜志第6地理4高句麗百濟&gt;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卽大洞江是也`</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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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단군조선</category>

		<comments>http://elpaso.egloos.com/8769352#comments</comments>
		<pubDate>Thu, 04 Dec 2008 07:49:09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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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평양성(4)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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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 패수沛水와 패수浿水
<div>
<div>위 단락에서 본 것처럼 험독과 왕험성은 분명히 다르며, 또 조선성과 왕험성도 다른 곳입니다. 사마천이 말한 왕험성은 만(위만)의 도읍이었습니다. 그러면 왕험성은 평양성과 관계가 없을까요? 위만조선의 왕험성을 추적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위만이 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험성에 도읍했다는 것은 왕험성이 준왕의 도읍이기도 하며, 또 단군조선의 도읍도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관계로든 평양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div>
</div>
<div>왕험성과 평양성을 찾는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바로 패수입니다. 패수는 지나 전국시대 부터 언급되며 지나와 조선 사이의 국경선으로 혹은 도읍에 인접한 물줄기로 등장합니다. 우선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을 보겠습니다.</div>
<div>`조선왕 만은 과거 연인이었다. 연나라가 전성기일 때 진번.조선을 침략하고 장새를 쌓고 관리를 두었다. 진나라가 연을</div>
<div>멸하고 요동외요에 편입시켰다.</div>
<div>한漢이 건국되니 이곳은 멀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보아 요동의 옛새를 다시 수리하고 <font color="#FF0000">패수浿水</font>를 경계로 삼고 연에</div>
<div>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니 만도 천여인을 모아 상투를 하고 만이복장을 입고 동쪽으로</div>
<div>나아가 새를 넘고 <font color="#FF0000">패수浿水</font>를 건너 예전에 일시 진나라 땅이었던 주인 없는 상하장 땅에 거주하였다. 점차 진번의 일을</div>
<div>하면서 조선만이와 옛 연.제 망영자들의 왕이 되고 왕험에 도읍하였다.`</div>
<div>위 조선열전의 글은 아주 쉬운 설명문입니다. 그런데 글 중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란 만이 건넌 강이름이 <font color="#FF0000">패수浿水</font>가 아닌 <font color="#FF0000">패수沛水</font>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정해야 만 이후의 사서 기록들이 모순 없이 쉽게 이해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div>
<div>전국시대 때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의 영토를 약간 침략하여 장새를 쌓고 관리를 두고 경계를 삼은 곳은 `만번한`이라는 곳입니다. 출처는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서 한韓에 관한 글 중 조선후 준에 대하여 위략을 인용한 주석에 있습니다.</div>
<div>`후에 자손이 점점 교학하여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보내어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2000 여리를 얻고 만번한에 이르러</div>
<div>경계하니 조선이 드디어 쇠약해졌다.`</div>
<div>만번한은 후일 한나라 요동군의 속현들인 문현과 번안현을 합쳐 부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염철론에는 `조선이 요(요동외요)를 넘어 연의 동쪽을 침범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은 양국의 격전장이었을 것입니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지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다시 이 지역을 확보하고 이어서 한나라가 일어서면서 이곳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보고 약간 후퇴하여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이 기록한 것입니다.</div>
<div>하지만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동군의 속현들 중 문현과 번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번한현에 짧은 설명문이 있는데 바로 반고 본인이 직접 기록한 것입니다. `패수沛水가 새외에서 흘러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사마천은 패수浿水라고하고, 반고는 패수沛水라고 말한 것입니다. 넓지 않았을 번한현이라는 지역에 2개의 강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만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아니면 모두 옳은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역사 기록을 소설 읽듯이 한다면 일이 나도 단단히 납니다.</div>
<div>한서 지리지에는 요동군과 낙랑군의 속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패수沛水는 요동군 번한현에서 흐르는 강이고 패수浿水는 낙랑군에 속하는 현의 이름입니다. 후한서 군국지를 보면 낙양에서 요동군과 낙랑군 까지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요동군은 3600 리이고 낙랑군은 5000 리 입니다. 당시의 리수이지만 각군의 치소가 기준이 된 것으로 보이며, 대략 1400 리가 떨어진 요동군과 낙랑군 등을 흐르는 강 이름이 한글 종씨라고 혼동하여 같은 물줄기라고 본다면 사기는 소설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div>
<div>지루하지만 위의 사기 조선열전을 근간으로 여러 사서의 내용을 첨가하여 재구성해 보겠습니다.</div>
<div>`연나라 사람 위만은 동쪽으로 장새를 탈출하여 <font color="#FF0000">패수沛水</font>를 건넙니다. 예전에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침공하여 쌓았다는 상하장에 거주합니다. 그곳에서 진번에 속하여 변경 막일을 하다가 조선왕의 신임을 얻어 사방 백리의 땅을 하사받고 번병을 자처합니다. 점차 조선만이와 연.제.조의 망명자들을 규합하더니 한나라 군대가 공격해 온다면서 왕성에 들어가 숙위를 한다며 준왕의 허락을 구합니다. 결국은 사기질로 조선의 준왕을 내쫒고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한나라 요동태수와 밀약을 맺습니다. 그 내용이란 한나라의 경계를 지키는 외신을 자처하며 한나라와 진번등 주위 나라들이 글을 올린다든가,조공?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안보를 보장받은 위만은 세력을 키워 인근의 소읍들을 복속시킵니다. 진번과 임둔과 같은 대읍들도 자진해서 굴복을 하고 맙니다. 이리하여 위만의 영토가 사방 수천리에 이르게 됩니다. 도읍은 왕험성이었습니다. 약 90 여년 후에는 한나라의 무제 유철이 병사를 보내 왕험성을 공격합니다. 누선장군은 열구에 상륙하며 좌장군은 <font color="#FF0000">패수浿水</font>를 건너 왕험성에 도달합니다.........`</div>
<div>위만은 당연히 한나라 영토인 요동군의 반대 방향으로 영토를 넓혔을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낙랑군이며 인근 요동군과 1400 리씩이나 차이가 나게된 것입니다. 삼국지 한조에서 인용한 위략에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고 중국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번병이 되겠다고 하니 준왕이 위만을 신임하고 총애하여 뱍사로 보임해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주어 조선의 서쪽 변경을 지키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위만의 백리 땅은 당연히 한나라 요동군과 인접했었을 것입니다. 위만이 완충 역활을 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정황으로 보아 조선 준왕의 영토는 결코 좁지 않았고, 방향과 거리가 어느 정도 여유있게 확보된 땅입니다.</div>
<div>이러한 조선국 준왕의 왕험성이 위만이 도망올 때 건넜다는 패수浿水 옆에 있었을까요?</div>
<div>넒은 영토를 가졌던 조선이 도읍을 국경선에 두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사마천은 위만이 건넌 패수沛水와 준왕과 위만의 도읍인 왕험성 부근의 패수浿水를 혼동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반고의 패수沛水를 제쳐두고 사마천의 패수浿水를 사실인 양 읽혀지고 믿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역사지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논리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div>
<div>전 단락에서 말한 험독과 왕험이 다르듯이 패수浿水와 패수沛水는 분명히 다릅니다. 사마천과 반고는 기원전후로 160년 가량 차이가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학 전문인들입니다. 사마천은 `4군을 설치하였다`라고만 기록하였으며 반고는 한서 지리지에서 미주알 고주알 세세하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패수에 관한한 사마천 보다 반고를 더 믿는 이유입니다.</div>
<div>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위만은 <font color="#FF0000">沛水</font>를 건너 진나라 때에 설치한 상.하장 공터에 머물다가 조선인과 연.제.조의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한나라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오니 궁성에 들어가 지켜주겠다고 사기쳐서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되어 <font color="#FF0000">浿水 변에 있는</font> 준왕의 왕험성에 도읍하였다`라는 기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div>
<div>-----------------------------------------------------------------------------------------------------------------------</div>
<div>&lt;史記 朝鮮列傳&gt; `朝鮮王滿者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障塞 秦滅燕屬遼東外요 漢興爲其遠難守復修遼東</div>
<div>故塞至<font color="#FF0000">浿水</font>爲界屬燕 燕王盧관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추結蠻夷服東走出塞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div>
<div>稍役屬眞番 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div>
<div>&lt;漢書 地理志 遼東郡 番汗顯&gt; `沛水出塞外西南入海`</div>
<div>&lt;後漢書 郡國志 遼東郡&gt;`秦置 낙陽東北3600里`</div>
<div>樂浪郡&gt;`武帝置 낙陽東北 5000里`</div>
<div>&lt;三國志魏書烏丸鮮卑東夷...韓&gt;`後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중략...(-) 魏略曰...중략...後子孫稍驕鶴 燕乃遣秦開</div>
<div>攻其西方取地二千餘裏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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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ategory>단군조선</category>

		<comments>http://elpaso.egloos.com/8769353#comments</comments>
		<pubDate>Sun, 30 Nov 2008 03:11:28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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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평양성(3)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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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font size="2">- 조선성과 조선현 그리고 왕험성</font>
<div><font size="2">그러면 지나 당시대의 학자들은 평양성,왕험성을 어디라고 생각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조금 인내가 필요합니다. 저들의 사서를 시대별로 훑어봐야 합니다. 우선 조선을 어느 곳이라고 보았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가까운 시대에 편찬된 사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명明의 역사서인 대명일통지에</font></div>
<div><font size="2">`<font color="#FF0000">조선</font>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1)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명시대 영평부에는 난주.<font color="#000000">노룡현</font>.천안현.무녕현.창려현.낙정현등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면 정작 궁금한 것은 조선성이 있다는 영평부가 현재 어디냐?인 것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중화민국 지도를 보면 신기하게도? 명시대의 지명들이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전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난현.노룡.천안.무녕.창려 등등... 이 지명들은 하북성 동북부의 아주 좁은 지역에 이웃하고 있으며 난하 하류 좌우측으로 만리장성의 남쪽이며 대도시인 당산과 진황도 사이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조선성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있었을까요? 기자를 조선 제후로 봉했다는 기록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주류사학에서 말해오던 북한 평양시가 아니고 왜 중화민국 땅, 하북성 동북지역 구석일까요?</font></div>
<div><font size="2">대명일통지는 청나라 옹정제의 최측근인 장?이 편찬한 것이며, 중원인인 장?이 이 지역을 더 잘 알았을 수도 있었을 만주인인 옹정제에게 거짓을 고하였을까요? 또 이 당시에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저들의 동쪽 바다 건너편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시간을 거슬러 올라 수서隋書를 보겠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하여 신창.<font color="#FF0000">조선</font> 두현을 통령하였는데 후제 시대에 이르러 <font color="#FF0000">조선</font>현을 폐하고 신창현에 편입시켰으며...</font></div>
<div><font size="2">중략...개황6년(서기 586년)에 또 비여현을 폐지하여 신창에 편입시켰고 개황18년(서기 598년)에는 노룡현으로 개명하였다.</font></div>
<div><font size="2">...중략... 장성이 있고 관관이 있고 임유궁이 있고 복주산이 있고 갈석이 있고 현수.노수.온수.윤수.용선수.거량수가 있고</font></div>
<div><font size="2">바다가 있다.`(2)</font></div>
<div><font size="2">결국 위 글은 조선현이 노룡현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대명일통지와 수서 두 기록을 합쳐보자면 조선성은 조선현에 있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명나라 시대의 영평부 노룡현 현명縣名이 수나라 시대 부터 700여년을 이어 온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수서는 고맙게도 장성과 임유궁,갈석산, 그리고 바다 등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힌트도 준비했네요. 한가지 우려할 만한 것은 조선현을 편입한 노룡현이 옮겨오지는 않았을까요? 흔히 강단사학에서 말하는 이치移置현은 아닐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택도 없는 소립니다. 물음 자체가 모순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조선성이 있다는 명나라 시대의 영평부와 수나라 북평군 노룡현은 동일한 지역입니다. 조선성이나 조선현을 차치하고서도 명시대의 영평부와 수나라 때의 북평군은 같은 땅이며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갈석은 갈석산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산의 위치는 현재의 창려이며 현수.노수.온수는 현재의 난하 지류입니다. 모두 현재 하북성 동북부 구석진 곳입니다. 근거는 아래에서 보게 됩니다.</font></div>
<div><font size="2">다시 700 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서한 시대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우선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를 보겠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사마천은 조선열전에서 만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왕험에 대하여 사기의 주석서들은</font></div>
<div><font size="2">사기집해 - `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다.`(3)</font></div>
<div><font size="2">사기색은 - ` 위소는 말하기를 옛읍의 명칭이라고 하였고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font></div>
<div><font size="2">한서지리지에 주석하기를 요동의 험독현은 <font color="#FF0000">조선</font>왕의 구도라 하였다.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font></div>
<div><font size="2">패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4)고 하였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간략하게 정리하면 조선왕의 구도인 요동의 험독현과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 왕험성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험독현은 한漢나라 시대, 정확하게 서한시대에는 요동군 소속이었으며, 창려는 진晉 시대에 들어 동한시대의 요동속국을 창려군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요동군과 창려군은 명칭 다른 같은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동군과 낙랑군이 다르듯이 험독현과 왕험성은 다른 곳이라는 것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이 편찬한 회남자에</font></div>
<div><font size="2">` 갈석을 넘어 <font color="#FF0000">조선</font>을 지나면 대인들이 사는 나라에 이른다.`(5)라는 기록이 있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갈석산은 만리장성의 동쪽 종착지입니다. 수서에 등장하는 노룡현에 있는 산이름입니다. 여기의 조선은 수서 노룡현에 편입된 조선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 정도의 좁은 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대인들이 사는 나라`라는 표현은 단군조선의 조선국을 말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좁은 지역을 지칭하는 조선도 회남자를 편찬할 당시에는 한漢의 세력권 밖이었습니다. 요동군은 진시황이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요동군 험독현은 당연히 한漢 세력권 안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그래서 이글은 갈석산 동쪽 끝에 조선이라는 동네가 나오는데 이 동네를 지나 더 가면 대인? 혹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인 단군왕검의 조선국에 이른다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군자의 나라이고 불사의 나라이며 공자가 말했던 가서 살고 싶다는 나라였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유안은 한 무제의 종숙뻘로 무제가 즉위 초에 신임과 존경을 받았지만 동중서와의 노선차이와 정쟁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가 편찬한 회남자는 사마천의 사기보다도 더 신빙성이 높다고 정평이 난 사찬사서입니다. 위 기록은 아주 짧지만 저 위의 기록들과 더불어 많은 시사를 던집니다. 당시는 위만의 조선 치세기로 아마 위만은 수명을 다하였을 시기였고 한나라가 위만의 조선을 침공하기 전 상황입니다. 유안이 말한 `대인들이 사는 나라`는 아마 위만이 통치하는 나라는 아니었을 것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회남자의 조선은 응소가 주석한 조선왕의 구도라는 요동군 험독현이 아니며 후에 낙랑군에 속한 조선현인 것입니다. 한나라 요동군을 넘어 낙랑군 조선현 보다 더 동쪽?으로 가면 `대인들이 사는 나라`에 도달하는데 이 나라는 단군왕검 조선에 이은 소위 위만조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색은에서 신찬은 `너희들 서광과 응소는 틀렸다. 왕험은 요동이나 창려의 험독이 아니다. 왕험의 위치는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고 한 것일 겁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은 조선현과도 다르며 조선현 보다 더 멀다라는 것이 위 글의 내용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그렇다면 조선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는 주석이 달린 낙랑군 조선현은 아마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조선인들이 살고있는 좁은 지역을 지나인들이 습관적으로 호칭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따라서 기자조선이란 말도 아주 맹랑한 말입니다. 기자가 주나라에 살기 싫어서 조선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을 들은 주나라 무왕이 이처럼 좁은 지역인 조선현에 가서 `살던지 말던지 맘대로 하라!`는 표현을 사가들이 `조선에 봉封했다`라고 너스레를 떤 것입니다.</font></div>
<div><font color="#FF0000" size="2">주나라 시대에는 단군조선은 커녕 후일 조선현이 되는 아주 좁은 지역 조차도 저들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font></div>
<div><font size="2">-----------------------------------------------------------------------------------------------------------------------</font></div>
<div><font size="2">(1)&lt;大明一統志 券5 永平府 古蹟&gt; `<font color="#FF0000">朝鮮</font>城在境內 相傳箕子受封之地 `</font></div>
<div><font size="2">(2)&lt;隋書 券30 地理志 北平郡 盧龍縣&gt; `舊置北平郡 領新昌<font color="#FF0000">朝鮮</font>二縣 後齊省<font color="#FF0000">朝鮮</font>入新昌 ...중략...開皇6년又省肥如入新昌 18年改</font></div>
<div><font size="2">名盧龍...중략...有長城有關官有臨兪宮有碣石 有玄水盧水溫水閏水龍鮮水巨梁水 有海</font></div>
<div><font size="2">(3)&lt;史記 卷115 朝鮮列傳 王險의 註釋. 史記集解&gt; `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font></div>
<div><font size="2">(4)&lt; 史記索隱&gt; `韋昭云古邑名 徐廣曰昌黎有險瀆縣 應邵註地理持 遼東險瀆縣<font color="#FF0000">朝鮮</font>王舊都</font></div>
<div><font size="2">臣璨云王險城樂浪郡浿水之東也`<br /></font></div>
<div><font size="2">(5)&lt;淮南子&gt; `踰碣石過<font color="#FF0000">朝鮮</font>貫大人之國</font>`</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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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단군조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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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6 Nov 2008 03:12:23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평양성(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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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font size="2">2. 평양성의 위치</font>
<div><font size="2">현재 한반도에서 평양은 북한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시가 유일합니다.</font></div>
<div><font size="2">그렇다면 단군왕검께서 조선을 개국하고 도읍한 평양성이 대동강변의 평양시일까요? 또 한국의 진정한 삼국시대인 지나 수나라 때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내린 조서에 `평양에 총 집합하라`는 평양도 대동강변의 평양시일까요? 또 신라가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공격한 평양성 역시 대동강변의 평양시일까요? 아니면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말했다는 요동에만도 2~3개의 평양이 더 있는 것일까요?</font></div>
<div>1) 단군조선의 평양성</div>
<div>- 첫 도읍 평양성</div>
<div><font size="2">한국의 문헌유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지금의 서경` ,즉 현재의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지나의 정사들을 보자면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으며,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정황들이 쉼없이 나타납니다. 저들의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요?</font></div>
<div><font size="2">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조선( 이하 조선이라 함)의 도읍은 첫번째 평양성, 두번째 백악산 아사달, 세번째가 장당경입니다. 이어서 아사달로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려시대까지에도 전해내려 오뎐 이 땅의 역사책인 고기를 인용한 이 문장은 조선의 도읍지가 세군데였다고 말합니다. 아사달은 돌아갔다는 표현으로 보아서는 백악산 아사달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그러면 지나의 사서들은 조선의 도읍명을 무엇이라 했을까요? 우선 삼국유사에는위서魏書를 인용하여 아사달 한 곳 만을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일연스님의 견해인 듯한 설명글이 이어집니다. `경에는 무엽산이라 하였고 또한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경經이란 지나의 전문 지리서인 산해경을 말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 확인 중입니다.) 이 문장 만으로는 무엽산이 백악과 같은 곳처럼 보입니다. 또 백악이 고기가 전하는 조선의 두번째 도읍인 백악산 아사달을 지목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지나의 위서와 산해경?은 조선의 첫도읍을 아사달. 무엽산. 백악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들의 위치가 평양성과 같은 곳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산해경과 위서는 각각 기원전 3~2세기. 기원후 5세기 경에 저술되었습니다. 조선의 두번째 도읍인 백악산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천도한 때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후의 일로 무려 800 여년~ 1400 여년 전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물며 백악산 아사달 직전의 도읍이라는 평양을 저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알 수 없었을테고 그런즉 기록 또한 불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font> <font size="2">평양과 조선의 명칭은 시작은 같았지만 조선은 평양보다야 유명세를 탓습니다. 기원전 7세기의 내용인 관자나 기원전 5세기에 저술되었다는 상서에도 `조선`은 언급이 되어도 장당경이나 백악산 아사달, 평양성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도 조선열전에서 겨우 왕험 만을 언급한 것으로 봅니다.</font></div>
<div><font size="2">사마천은 조선열전에서 ` 패수를 건너 진국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거주하고 점차? 진번에 속한 일?을 하다가, 조선만이와 옛 연.제(濟)국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문장의 주인공인 만(위만)이 도읍한 왕험은 과연 어느 곳일까요?</font></div>
<div><font size="2">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font></div>
<div><font size="2">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적전분열로 신하에게 살해되면서 조선은 멸망합니다. 한나라는 이곳에 4군을 설치합니다. 낙랑.진번.임둔.현토군입니다. 처음 3군을 설치하고 1년 후에 현토를 설치하였습니다. 아마 1년동안 맹렬하게 싸운 끝에 조선 땅을 더 빼앗은 모양입니다. 이로부터 32년 후 기원전 75년에는 이맥. 즉 조선유민의 항쟁으로 4군이 2군으로 축소 개편됩니다. 또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으로 옮기고 진번과 임둔군을 낙랑과 현토군으로 흡수합니다. 현재는 이러한 내용이 상식에 속합니다. 하지만 상식이라고 모두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사기 진시황본기 중에 조선에 대한 사기정의의 주석에서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려가 통치하는 평양성은 본래 한 낙랑군의 왕험성인데 바로 옛 조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기정의는 당나라 시대 장수절이, 괄지지는 당 태종의 아들인 위왕 태등이 편찬하였습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보다 대략 500 여년 전에 저술된 것입니다. 또 이같은 말은 같은 시대 두우도 통전에 기록하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인의 상식은 한쪽으로 심각하게 쏠립니다. 왕험성.평양성이 바로 지금의 북한의 평양시라고...</font></div>
<div><font size="2">과연 그렇습니까?</font></div>
<div><font size="2">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모두 평양성.왕험성을 지금(고려시대)의 서경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김부식과 일연의 지리지식의 한계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현재 정통 사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정리하자면 당나라 시대의 지나 학자들이나 고려시대의 유.불교 학자들은 조선의 첫 도읍인 평양성과 멸망시의 왕험성을 같은 장소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인들은 한반도의 서경인 지금의 북한 평양시로 보았지만 지나 당시대인들은 서경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font></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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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단군조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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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4 Nov 2008 10:41:34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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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평양성(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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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font size="2">머릿글</font>
<div><font size="2">올해로 `평양성`의 춘추는 4342 세나 됩니다. 단군왕검 조선의 개국시기가 기원전 2333 년이라 하고 금년 2008년을 감안하니 단군조선의 첫 도읍인 평양성의 나이가 저렇게나 많네요. 현존하는 한반도 내 도시 중에서 평양성의 이름을 이어받은 북한의 평양시처럼 오래된 도시 이름도 없습니다. 아마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예는 아주 드물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숨쉬며 똑같은 이름으로 남아있는 연륜 4000 여년 이상된 도시가 과연 세계에 몇이나 될까요?</font></div>
<div><font size="2">그런데 이처럼 오래된 평양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학자 대다수는 북한의 평양시 한 곳으로만 비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사유로는 우선 중국과 일본의 자국 중심 사관이라는 소아병적인 해석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들 외국학자들의 역사관을 뭐라하기 이전에 정작 문제는 한국학자들의 실정입니다. 일본 사관에 매몰되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 상황이 한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학맥의 존속이라는 틀 때문인지, 혹은 반발심에, 또 한편으로는 튀어보려는 독불장군식 해석 등등 그야말로 입맛대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해지는 역사문헌을 순수하게, 또 논리적으로 본다면 지금까지의 상식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한국의 고대사 영역에서 평양성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척 큽니다. 그 위치를 규명하는 일은 한국 고대사 부분의 오래된 숙제이며 , 비정하는 위치에 따라서는 고대사의 체계가 뒤짚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살아 남았고, 또 지금도 수도로서 역할을 하는 `평양성`에 대하여 문헌학적으로 또 고고학 발굴 유물을 통하여 되짚어보고자 합니다.</font></div>
<div><font size="2">목차</font></div>
<div><font size="2">1. 평양성의 연혁</font></div>
<div><font size="2">2. 평양성의 위치</font></div>
<div><font size="2">1) 단군조선의 평양성</font></div>
<div><font size="2">2) 고구려의 평양성</font></div>
<div><font size="2">3. 대동강변 평양의 고고학적 유물 비판</font></div>
<div><font size="2">1. 평양성의 연혁</font></div>
<div><font size="2">평양성은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 왕검조선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기록된 시기를 따진다면 삼국사기가 먼저겠지요. 삼국유사 보다는 삼국사기가 100 여년 먼저 편찬되었으니까요.</font></div>
<div><font size="2">삼국사기를 보자면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서 관구검의 침공으로 당시의 도읍인 환도성이 파괴되어 복구하기 어렵게 되자 평양성을 쌓고 천도하면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선인 왕검의 댁`이라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삼국사기 기록 중에서는 평양성이란 단어가 AD 247년에 일어난 사실 기록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부연해서 설명한 선인 왕검의 댁이라는 구절을 제외하고는 삼국사기 전체 기록 중에서 선인 왕검이 누구인지, 또 활동한 시기는 언제인지 등에 대한 설명문은 물론이려니와 그 흔한 단어 한 마디 남아 있지 않아 단군 혹은 왕검은 짐작하기조차 불가능합니다.</font></div>
<div><font size="2">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은 魏書를 인용하면서, `지금으로부터 2000 여년 전`이라고 하여 대략 기원전 1600 여년 경으로 그 시기를 짐작할 수가 있고, 또 古記를 인용하면서 단군조선의 첫도읍이라고 확정적으로 언급하였으며, 더구나 단군조선의 개국시기를 堯와 같은 시기라고 하여 머릿말에서 말한 4000 여년 이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최근 중화민국은 `하상주단대공정`을 끝마치면서 하나라의 개국을 기원전 2046년이라고 확정하였습니다. 하나라를 개국한 우는 순에게서, 순은 요에게서 지나 천하를 물려 받았습니다. 비록 요임금의 제위 시기를 확정하지 않았지만 단군조선 개국년도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것은 위처럼 몇 안되는 문헌과 현대의 역사.고고학계의 연구물들이 서로 논증하고 있으니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군조선의 첫도읍인 평양성의 나이 역시 대략 4000 여세 이상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올해로 4342 년째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조선의 첫 도읍을 위서를 인용하여 아사달이라고 하였고, 古記를 인용하여서는 평양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고기는 두번째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하였고 위서는 첫도읍 아사달 하나만 기록하였습니다. 고기의 평양성이 위서의 아사달인지의 여부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고기는 계속해서 세번째 천도는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주나라는 기원전 1046 년에 건국하였다고 최근 중화민국 정부가 확정 발표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평양성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언제 옮겼는지, 혹은 옮긴 사유는 무엇인지 등등 그 시기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는 구절은 전혀 없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아주 간단한 추정을 해보자면 첫 도읍 평양성은 기원전 1046년 이전 어느 시기에 수도로서의 기능을 백악산 아사달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첫 도읍 평양성의 최대 생몰기간은 1200 여년이라는 이야깁니다.</font></div>
<div><font size="2">그 이후 도읍으로서 평양성이 나타나는 시기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 21 년 AD 247 년 입니다. 대략 1300 여년을 건너뛰어 수도의 위상으로 복귀하는 셈입니다. 고구려는 동천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환도성과 황성으로 천도하였으며, 장수왕 때에 평양성으로 다시 환도합니다. 이후 평원왕 때에 장안성으로 천도합니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시의 삼국사기 기록은 이상하게도 평양성 공략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치 평양성이 수도인 것처럼...</font></div>
<div><font size="2">결국 평양성의 함락은 곧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식되었으며, 평양성 역시 수도로서의 명성을 잃어버리고 이후에는 변방의 주요 거점 정도로 그 위상이 격하됩니다. 이후 북한 정권의 수도 명칭이 되기까지 또다시 대략 1300 여년 이상의 공백 기간을 거칩니다.</font></div>
<div><font size="2">이처럼 `평양`이라는 지명은 이 땅에서 도읍으로서의 명맥을 무려 4000 여년 이상을 이어왔으며, 켜켜히 쌓인 세월의 무게를 실감케 합니다. 이렇게 오래된 평양성의 위치를 놓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현 상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북한 대동강변의 평양시라고 비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요? 찾지 못한다는 것보다는 않찾는다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다음 절에서는 단군조선을 조명하면서 평양성의 위치를 찾아가겠습니다.</font></div>
			 ]]> 
		</description>
		<category>단군조선</category>

		<comments>http://elpaso.egloos.com/8769358#comments</comments>
		<pubDate>Fri, 14 Nov 2008 05:58:19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무엽산(無葉山)과 홍산(紅山)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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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font face="바탕" size="3">`8.10.27 수정</font>
<div><font face="바탕" size="3">무엽산은 단군조선의 도읍지 중에서 백악산 아사달의 다른 이름으로 언급이 되었던 곳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 왕검조선의 본문 첫 단락은 이렇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에 도읍하고 새로</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font><font face="바탕" size="3">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고와 같은 시기였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위 문장에서 아사달이라는 단어에 작은 글씨로 설명문이 붙어 있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font size="3">`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font size="3">한</font></font><font face="바탕"><font size="3">다. 지금의 백악궁이다.`</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위서는 삼국지의 주인공인 조조가 기초를 닦은 위나라에 대한 역사서이며, 경은 어떤 서적인지 밝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국시기와 단군왕검, 그리고 조선이라는 국호 등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아사달이라는 첫 도읍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무엽산無葉山이란 ` 잎파리가 없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잎파리만 없다? 약간 바꾼다면 `잎파리가 없는 나무 만 있는 산` 곧 침엽수 만이 있는 산으로, 혹은 잎파리 뿐 만 아니라 아예 나무 한그루 없는 벌거숭이 산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침엽수림 만 있다는 산이 그리 흔할까요? 조선 한반도에서는 찾기가 어려울 듯 싶은데요. 또 아예 나무가 없는 산이란 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산불이 났을까요? 네이팜탄도 없었을테고...</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그런데 적봉시에 있다는 홍산의 사진과 설명문을 읽어보니 그럴듯해 보입니다. 무엽산이 `지금의 요하 상류인 노합하에 위치한 적봉시 홍산이 아닐까?`하는 기대감이 서서히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홍산의 설명문에는 이 산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군요. 철 성분이 많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산 색도 붉기 때문에 이름도 `홍산`. `적봉`이라고 이름 붙혀졌다고 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위서에는 조선의</font> <font face="바탕" size="3">첫 도읍지로서 아사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font> <font face="바탕" size="3">현재까지는 아사달에 관한 어원 연구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안호상의 아시밝, 두계가 제시한 아침.해 뜨는 자리입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자리.언덕`쯤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뜻의 한자어가 조선朝鮮이라고 주장하며 이와 비슷한 내용의 한자가 조양朝陽이 있지요.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해가 오르는 자리`, `아침의 신선함` `아침 해가 비추는 기슭` 등은 거리감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font></div>
<div>
<div><font face="바탕" size="3"><font face="바탕" size="3">그렇다면 백악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한문 뜻은 `하얀 큰 산`이니까 붉은 봉우리 뜻인 적봉. 홍산과는 거리가 있잖아요. 아무래도 무엽산과 백악은 다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도읍지가 백악일 수도 있겠다는 이야깁니다. 혹 말 그대로 백악이라면 잎파리도 나무도 있을 수 없겠네요. 여기까지는 경에 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백주에 있다` `개성 동쪽에 있다` `지금의 백악궁이다`라는 말은 아마도 일연스님이 들은 전문을 기록한 것 같습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font></font></div>
</div>
<div><font face="바탕" size="3">그런데 1980년대 부터 중화민국 땅인 요녕성과 내몽고자치구 홍산지역에서 전 세계가 깜짝놀랄 만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저들 문명의 기윈지를 황하나 양자강에서 이 요하지역으로 옮기는 작업에 돌입합니다. 소위 중국 고대 문명 탐원 공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구를 마치고 세계에 홍보하려고 국제 학술 대회를 잇달아 개최하고 있습니다. 요하문명과 홍산문화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이 연구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저들의 동북지역 지방정권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이러한 동북공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한다는 경철화는 통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 부소장 겸 교수랍니다. 경철화외 2인이 2000년에 집필한 `고구려역사 귀속문제 논고`라는 논문에서 몇 구절을 옮기겠습니다.</font></div>
<div><font size="3"><font face="바탕">` 사서는 상나라 사람들의 시조로 고양씨와 고신씨의 두 씨족 부락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박, 즉</font></font></div>
<div><font size="3"><font face="바탕">지금의 하북과 요녕이</font></font> <font face="바탕" size="3">교차하는 유연지역에서 살면서 북방민족들의 시조가 되었다. 따라서 요서</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지역의 홍산문화, 우하량,동산취의 제단유적,</font> <font face="바탕" size="3">여신묘, 적석총등의 발굴은 전욱,제곡,상나라 사람,</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동북민족의 형성 및 발전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증거가 되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 고구려 민족의 기원이라 추측되는 여러 민족들이 한결같이 고대 동북지역, 혹은 산동반도에서 생</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활하였다는 것을 알 수</font> <font face="바탕" size="3">있으므로, 그들은 모두 우리 역사상의 북방민족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해 그들은 모두 전설 속의 동북 부락신인 전욱,</font><font face="바탕" size="3">즉 고양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 고구려 건국 이전 민족의 형성과 발전의 모든 과정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이루어졌다.상나</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라 시대부터 동북에</font> <font face="바탕" size="3">대해 이미 봉건제를 실시하였고, 서주 시대에는 그 관리가 계속해서 강화.확</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대되었다. 그러다가 한 무제에 이르러서는</font> <font face="바탕" size="3">군현제 체제가 자리 잡음으로써 동북지역의 판도가 확</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정되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 따라서 고구려 민족은 중국 동북의 고대 민족이며, 고구려라는 나라는 고대 동북 지역의 민족 정</font></div>
<div><font size="3"><font face="바탕">권이라고 자신있게</font> <font face="바탕">말할 수 있다.`</font></font></div>
<div></div>
<div><font face="바탕" size="3">위 내용은 한국인이</font> <font face="바탕" size="3">알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공자부터 시작하자면 지금까지 2500여년 동안에</font> <font face="바탕" size="3">수많은 지나 역사가들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주장 한 자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위 글들은</font> <font face="바탕" size="3">고구려 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은 부차적인 목표이며, 이보다 더 다급하고 쐐기를 박아둘 필요가 있는 지역은 바로 예전부터 동이와 북적 오랑캐 땅이라는 만리장성의 동북쪽 지역인 홍산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홍산과 부근지역의 문화와 문명이 저들의 황하와 장강의 문화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중화민국 고고학계의 태두라는 소병기가 통한의 심정으로 인정한 내용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저들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홍산 지역이 조선의 터전이라는 것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단군왕검이 개국한 조선이라는 것도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저들이 고고학 전공자라 하더라도 저들의 역사문헌을 외면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삼국유사를 뒤적이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상서, 상서대전, 국어, 오월춘추, 관자, 회남자, 전국책, 산해경,수경, 염철론 등과, 정사인 사기,한서, 후한서,삼국지,진서, 남북조사,수서,신당서,구당서 까지와 위략, 사기 주해서인 사기집해, 사기정의 등등</font> <font face="바탕" size="3">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을 정도의 방대한 지나 역사서적들이 있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이 문헌들 속에 등장하는 조선과 후예국들은 저들의 전통적 영토인 중원에서 바로 동쪽과 동북쪽에 인접하였습니다. 현재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 바다 건너 있는 반도 땅에 있는 나라들이 아닌 것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산해경의 표현대로 조선은 해내북경편에 있습니다. 해내海內란 바다를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다는 표현이지요. `東海之內 北海之隅有國 名曰朝鮮` `동쪽 바다이며 북쪽바다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즉 지금의 발해만 북쪽이며 만리장성의 동북쪽 방향에 조선이 있다는 말입니다. `해내`라는 표현은 천하의 중심인 중원에서 보자면 동쪽 바다의 안쪽이며 변두리 지역이라는 표현이며, 지나 중원과는 결코 소원할 수 없는 인접 지역이라는 표현입니다. 그곳이 북쪽 바다이며 지금의 발해입니다.그곳에서 황하.장강과는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이며, 더 이르고 훨씬 찬란한 문화와 문명이 존재하였습니다. 이 문화의 중심이 홍산이며, 시기는 기원전 4500 ~3000년 대 문화입니다. 이러한 홍산문화에 이어서 기원전 2500년대의 하가점 하층문화로 발전합니다. 홍산과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들의 특징이 곰.여신상.용.봉.옥기.적석묘제.비파형 청동단검.빗살무늬토기 등인데, 이것은 삼국유사의 단군왕검 관련 기록과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입니다. 중국과 한국의 문헌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물들이 조선이라는 국명과 홍산이라는 지역에서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font color="#FF0000">곧 무엽산을 홍산으로 비정합니다.</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이곳의 고고학적 발굴 유물들은 결코 황하문명과 장강 하모도문명의 특징들이 아닙니다. 중원 땅에도 용과 관련한 유물들이 발굴됩니다. 훨씬 후대의 유물이며 수도 적습니다. 지나인들의 전통 묘제는 토광묘이며 청동단검은 동주식 단검이라는 검몸과 자루가 일체식이며 검날도 직선입니다. 또 저들의 기본 신화는 모계계통 신화로 서왕모가 받들어 집니다. 주나라 무왕이 방문하여 노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이 화하족 조상으로 기록한 황제 헌원의 활동지도 중원이 아니며 `염황자손`이라는 말에 있는 염제 신농 역시 중원에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중원의 북쪽 지역에서 차용한 것들입니다. 북경의 서북쪽에 탁록.회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귀근원과 삼조당을 건립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요즘 중화민국의 역사,고고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한국의 명박스러운 것을 뛰어넘는 호모 에렉투스인 같은 사고방식이랄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font></div>
<div><font face="바탕">-------------------------------------------------------------------------------------------------------</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참고 1.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 왕검조선</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魏書云 乃往二千載 在壇君王儉 入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與高同時`</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2. 예군민.경철화.양춘길 `고구려역사귀속문제논고` 통화사범학원학보 2000년 제 1기</font></div>
<div><font face="바탕"><font size="3">우실하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241쪽에서</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font size="3">3. 山海經 海內北經 ` 朝鮮在列陽東 海北山南 列陽屬燕`</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 東海之內 北海之隅有國 名曰朝鮮`</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4. 淮南子 時則訓 ` 東方之極 自碣石山過朝鮮 貫大人之國`</font></div>
			 ]]> 
		</description>
		<category>홍산문화</category>

		<comments>http://elpaso.egloos.com/8769359#comments</comments>
		<pubDate>Mon, 20 Oct 2008 09:53:45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강림산방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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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font face="바탕체" size="3"><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4.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271c1.jpg" width="250" height="18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4.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271c1.jpg');" /></div>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4.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49670.jpg" width="250" height="18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4.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49670.jpg');" /></div><br />
<br />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4.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5ab66.jpg" width="250" height="18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4.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5ab66.jpg');" /></div><br /></font>
<div><font face="바탕체"><font size="4">산골의 호젓함을 즐기기에는 괜찮은 곳입니다.</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4">보름 밤에 벗과 함께 마시는 곡주 맛이 그럴 듯 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3">------------------------------------------------------------------------------------------</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찾아 오시는 길은</font></div>
<div></div>
<div><font size="2"><font face="바탕체">영동고속도로 새말 IC에서 내려와 평창가는 국도를 이용하여 전재고개를 넘어 안흥면으로 들어옵니다.</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이곳에서 411번 지방국도를 타고 강림면 방향으로, 왼쪽에 주천강을 끼고 들어 오시면 오른편 쪽에 아담한 폐교가 보입니다. 폐교 정문 앞에서 오른쪽 샛길로 들어오셔야 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강림면에서 제일 이름있다는 강림순대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순대집으로 가시지 말고 왼쪽에 개천을 낀 좁은 아스팔트 길을 3.8 Km 정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수레넘어 야영장이 나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이 야영장 오른쪽 개천 건너편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황토집이 바로 제 집, 강산방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이 곳은 치악산 국립공원 지역입니다. 그래서 물고기 잡으면 잡혀 갑니다. 또 개구리도 안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쉬~는 후미진 곳에서 됩니다. ㅎㅎ</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font></div>
<div><font size="2"><font face="바탕체">주위의 명소로는</font></font></div>
<div></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강산방에서 다시 411번 지방도로로 나와 오른쪽으로 쭉 가면 부곡리라는 곳인데, 이곳에는 후조선 3대 태종이 스승 원천석을 찾아와 만나지 못하고 경치만 구경했다는 <font color="#FF0000">태종대</font>와, 태종에게 거짓말을하게 된 노파가 괴로움 끝에 몸을 던졌다는 <font color="#FF0000">노고소</font>가 있습니다. 태종대에서 부터 부곡리까지의 하천변 경치가 제법 훌륭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부곡리에서 시작하는 부곡계곡 등산길은 아주 깨끗하고 호젓합니다. 치악산맥의 중앙에 위치한 고둔치로 오른 다음 비로봉 정상으로도 상원사 뒤 남태봉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font></div>
<div></div>
<div><font size="2"><font face="바탕체">부곡리에서 도로 나와 강림면 사무소에서 영월로 가는 길에는 주천강과 부곡천이 만나 흐르기 때문에 수량이 풍부하여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몇군데 있습니다. 길은 영월로 이어집니다. 도중에 <font color="#FF0000">사자산 적멸보궁</font></font><font face="바탕체">도 보실 수 있고요, 영월읍에 가시면 한우도 맛 보실 수 있습니다.</font></font></div>
<div></div>
<div><font size="2"><font face="바탕체">강산방에서 411번 지방도로에 나와서 왼쪽 길은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면으로 가는 길입니다. 안흥면에서</font> <font face="바탕체">전재를 넘어 새말 IC 쪽으로 가시면 <font color="#FF0000">치악산 국립공원 구룡사계곡을</font>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구룡사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사다리병창 능선.계곡길을 올라 <font color="#FF0000">1288m 치악산 비로봉</font> 정상에 설 수가 있습니다.</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구룡사 계곡에서 나와 횡성읍으로 가시면 유명한 <font color="#FF0000">횡성한우</font>와 <font color="#FF0000">태기산더덕</font> 맛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font></div>
<div></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또 골프.스키.수영.드라이브 등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안흥면에서 둔내로 가는 샛길을 이용하여 성우리조트. 피닉스파크로 가실 수 있고요, 넉넉잡아 30분~ 1시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또 둔내에서 영동고속도를 이용하면 대관령 넘어 <font color="#FF0000">낙산사</font> <font color="#FF0000">바닷가</font>까지는 밟아서 30분? 거리라네요. <font color="#FF0000">밟아서리...</font></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ㅎㅎㅎ 밟으실 때 조심하시구요. 아무리 가슴이 뻥 뚤리는 동해라도.</font></div>
<div><font face="바탕체" size="2">권하고 싶은 것은</font></div>
<div><font size="2"><font face="바탕체">강산방 바로 뒤 산속으로 경사진 능선길을 1시간 오르면 주능선을 만나고, 여기에서 다시 1시간 정도 호젓한 길을 걷다보면 <font color="#FF0000">1084 m의 매화산</font>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매화산 정상에서 치악산 비로봉 까지는 꼬박 10시간 거리입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호쾌한 능선길입니다. 철죽가지가 볼을 때립니다. 겨울엔 그런 고문이 없습니다.</font> <font face="바탕체">요즈음에 금지하는지 모르겠습니다.</font> <font face="바탕체">저는 막 댕깁니다. 강림면 사람이거든요.</font></font></div>
<div><font size="2"><font face="바탕체">막으면</font> <font face="바탕체">밤에 가면 되요. 불 키고 ㅎㅎㅎ 이 코스 정말 죽여줘요.</font></font></div>
<div></div>
<div></div>
<div></div>
			 ]]> 
		</description>
		<category>삶</category>

		<comments>http://elpaso.egloos.com/8769365#comments</comments>
		<pubDate>Mon, 13 Oct 2008 08:50:07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홍산문화와 예맥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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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font face="바탕" size="3">2007년 12월 8일자 경향신문 `코리안 루트를 찿아서`라는 역사탐방 연재물이 있었습니다.</font>
<div><font face="바탕" size="3">이 연재물에서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이야기하기를 ` 우리 것이라고 굳이 주장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쓰면 됩니다.`하였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아마 홍산문화의 핵심지역인 건평과 능원 부근의 우하량 유적을 보면서 말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이형구는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 풍납동에서 고대 왕국의 도읍일 것이라는 유적, 즉 백제의 초기 도읍지라고 알려져 있는 귀중한 유적을 발굴한 실력있는 대한민국 고고학자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그런데 연재물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은 홍산문화를 중화민국 화하족의 문화인 앙소문화나 황하문명과는 다른 동이족의 문화라고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막상 철기시대의 백제 초기 도읍이 대한민국 땅, 서울에 있다는 말이었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또 이야기 하기를 `조선이라는 국명? 지명?이 있었고 지나의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 땅에 왔기 때문에 조양시 객좌현 북동 등지에서 은말.주초의 기후.고죽으로 읽을 수 있는 청동 예기가 발굴되었고, 지금의 요하 이동에서는 그 흔적이 없다`라고 하였고, `그러니 기자가 북한 평양에 왔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결국 기자조선이 실재했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조양시 객좌현이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결론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워 ` ~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라 한 것으로 다소 애매한 말을 했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대한민국 역사학계는 고조선 운운하지만 단군왕검을 신화로 취급하며, 단숨에 2000여 년을 건너뛰어</font> <font face="바탕" size="3">내려와 겨우 BC 195년에 있었던 위만의 조선 탈취와 한사군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고대사 인식으로는 홍산지역의 고고학적 의미와 가치를 깨닫기에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font> <font face="바탕" size="3">단군왕검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건국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계속 신화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기자에 대한 논쟁은 위만에서 800 여년을 거슬러 올라 단군조선의 역사를 찾아 가는 중요한 시작점이 됩니다. 활발한 토론을 다시 시작하여 역사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고죽.기후 명문의 청동예기가 출토되었다는 요녕성 객좌현 북동유적은 1973년 발견되었으니 35년간이나 뭉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끄집어내서 결론을 내야 합니다.</font> <font face="바탕" size="3">아울러서 이 부근의 BC 2500~1300 년 청동기 문화 유적인 하가점 하.상층 문화를 눈여겨 본다면 기자의 동래 시기로부터 1300 년을 더 거슬러 오르는 것이며, 같은 시기 단군의 조선 개국이 신화인지 사실인지의 여부도 판가름 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공자는 요임금의 성품을 간략하게 서술하며 화하족의 시조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로부터 370여년이 지난 서한시대 사마천은 사기에서 요임금에서 황제 헌원을 시조라고 주장하며 시기를 앞당깁니다. 근거가 무엇인지 언급도 없이 소급했습니다. 공자나 사마천 모두 요임금과 황제를 저들 중원지방의 화하족 조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만리장성 이남 지역의 황하 중.하류 지역민의 조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중화민국 당국과 역사 관련학자들은 중원 뿐만이 아니라 만리장성 동북방 지역에 살았던 북적.동이 까지도 황제의 후손이라고 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이형구의 주장과 같이 만일 기자가 왔다면 대릉하 상류 지역이였으며, 기자조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결국 산해관 동쪽에서 지금의 요하 사이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단군조선도 이 지역에서 건국되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여러 문헌에도 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현대인들이 좋아하는</font> <font face="바탕" size="3">과학적 근거인 고고학적 유적들이 엄청난 량으로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들의 전반적인 특징들은 만리장성의 동북방 끝인 연산을 경계로 판이하게 갈라집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같은 신석기 문화인 황하나 장강유역의 앙소.하모도문화는 서요하 상류의 홍산문화와는 그 규모와 질적인 면, 그리고 전성기 등 모든 면에서 열등하였습니다. 중화민국 고고학의 태두라는 소병기는 눈물을 머금고 중화 문명의 기원은 황하.장강이 아닌 요하에 있다고한 소이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이렇게 중원과 비교하여 독자적이고 월등한 문명지역인 홍산 부근의 신석기 시대 전기간과 옥기.청동기.철기시대를 요하문명이라고 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그런데 `있는 그대로 쓰면된다...`라는 이형구의 온순한? 학문적 열의를 저들이 순수하게 받아들일까요? 홍산문화에 이은 하가점하층문화를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규정하지 않으면 영토보다 더 중요한 역사를 잃는 것입니다. 홍산문화의 핵심지역인 건평.능원현 경계 지역인 우하량에서 발굴된 단.묘.총과 부하문화인 하가점 하.상층 유적의 성격은 곰 관련 신앙과 여성 숭배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의 곰과 웅녀를 대비시키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운지요? 아주 쉬운 예로 석관.석곽과 적석총의 묘제와 비파형동검을 화하족의 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흉노나 선비.말갈의 문화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는지요?</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백제는 중국의 문헌기록에 대방고지에서 건국했다고하였습니다. 이형구의 주장대로 기자가 동쪽으로 온 곳이 대릉하 상류라면 그 곳이 조선이 있었으며, 위만이 탈취한 조선이며, 한 무제가 4군을 설치한 곳이 됩니다. 대방군은 낙랑군의 남쪽 황무지에 설치한 군이며, 대방고지란 대방군의 옛땅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백제의 초기 도읍이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이라니... 너무 황당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구석기시대 부터 신석기시대를 거쳐 옥기시대, 동석병용시대,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을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제대로 된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철기를 사용한지도 한참이나 경과한 삼국시대 초기의 해석을 강단의 주류 역사학자들 논리에 빠져버린 고고학자의 역사 인식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최근 임병태.한창균과 같은 젊은 고고학자들이 홍산 지역을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만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며 역사학계를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실정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고고학적으로 홍산이 있는 북쪽의 적봉시와 남쪽의 능원,건평현 지역과 동쪽의 조양, 부신시 그리고 더 동쪽의 심양과 통화 부근을 동이의 문화권으로 이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화민국 25 정사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을 해석하며 단군조선에 이은 부여를 포함한 열국들의 위치를 지금의 요동지역이나 북한지역의 압록강. 대동강 부근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그동안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문헌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후조선시대 다산,성호,연암,단재,위당이 그들이며 최근에는 북한의 리지린, 러시아 유엠뿌진 등과 국내의 단국대 윤내현이 그랬고,최근 사회학 전공인 항공대 우실하가 그랬습니다. 그렇</font><font face="바탕" size="3">지만 최동, 문정창, 임승국, 박창범, 김종서 등등, 이 지역을 눈여겨 보며 문헌학적 연구와 해석을 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단시하는 눈길 뿐이었습니다. 패수를 난하로 비정하거나 요서 백제설을 주장한다던가 대륙삼국설을 주장.지지하는 자들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풍토가 정말 역겹습니다. 환단고기를 참고하면 환빠라고 매도하고 단군세기,규원사화를 인용하면 미친 놈 취급합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홍산문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연구하지도 않아, 유물과 유적들에 대한 연구 논문 하나 발표하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합니다. 도대체 누가 미친 놈입니까?</font></div>
<div><font face="바탕" color="#FF0000" size="3">질문 하나 하겠습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color="#FF0000" size="3">만리장성 이동에서 요하 사이, 현재 요서지역이라는 곳에 있는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font></div>
<div></div>
<div><font face="바탕" size="3">흉노? 숙신? 말갈? 거란? 여진? 이들의 선조 족명은 문헌에 있기나 합니까?</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홍산문화가 저들 유목민의 문화입니까?</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빗살무늬토기,세석기 도구, 석관.석곽등의 적석총, 용과 곰.봉.돼지를 표현한 옥기 세공품들과 곰과 관련된 여신상, 비파형 청동단검, 고인돌문화 등등... 이와 같이 황하문명과도 또 유목민의 문화와도 본질적으로 다른 문화권인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삼국유사 기이1에 기록된 환국과 단군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강원도 고성 문암리와 여수 ?에서 발굴된 기원전 6000 년대의 c자형 옥기의 주인공들과 홍산의 주인공들은 같은 문화권의 신석기인들입니다. 한반도 전체를 덮고 있는 고인돌과 석관.석곽의 적성총과 비파형.세형 청동단검들의 주인공들은 홍산인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일까요?</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중화민국은 9.5, 10.6 계획의 일환으로 하상주단대공정.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을 진행시키면서, 단군과 주몽도 저들 조상인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 제 전욱과 고신씨 제 곡의 후손이라고 합니다.또 대한민국 개천절의 주인공인 조선 단군의 역사까지도 훔치는 중인데도 말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size="3">제 주장이 틀려도 좋습니다.</font> <font face="바탕" size="3">제발 관심가지고 다시 고대사를 연구합시다. 4300년 전 단군조선을 훨씬 뛰어넘어 8000년 전부터 홍산에 살았던 사람들을 왜 중화민국 사람들이 관심을 가집니까?</font></div>
<div><font face="바탕" color="#FF0000" size="3">이 땅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이 홍산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 color="#FF0000" size="3">관심 갖고 보아야 할 의무가 있으며, 또 권리가 있는 사람들은 바로 대한민국 사람들입니다.</font></div>
<div><font face="바탕"><font size="3"><font color="#FF0000">중화민국 학자들이 실토하듯이 홍산문화는 예.맥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font></font></font></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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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홍산문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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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7 Oct 2008 09:21:36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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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요하문명권 지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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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a5f3f.jpg" width="500" height="3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903/03/24/a0115324_49acd31ea5f3f.jpg');" /></div><br />
<div>요하문명의 시기별 지역별 분류</div>
<div><br />
- 신석기 시대 문화</div>
<div>1. 소하서 문화 - BC 7000 ~ 6500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소하서</div>
<div><font color="#FF0000">반지혈식 주거지와 동북지역에서 최고古의 흙으로 만든 얼굴상 발굴</font></div>
<div>2. 흥륭와,사해문화 - 6200 ~ 5200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보국토향 흥륭와촌, 요녕성 부신시</div>
<div>- 흥륭와 : <font color="#FF0000">세계 최고古 옥 귀걸이 발굴</font></div>
<div>현재 중국 영토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집단주거지 발굴 : 중화제1촌</div>
<div>중원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는 <font color="#FF0000">평저통형 지자문 빗살무늬토기 발굴</font></div>
<div>- 사해 : <font color="#FF0000">중화 제 1 룡인 석소룡 발굴</font></div>
<div>흥륭와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 이 곳에서 발굴된 옥. 집단 주거지가 세계제1옥</div>
<div>과 화하제1촌으로 불려짐</div>
<div>3. 신락문화 - 5500 ~ - 요녕성 심양시</div>
<div>4. 부하문화 - 5200 ~ 5000 - 내몽고 통료시 파림좌기 호얼토향 부하구문</div>
<div><font color="#FF0000">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복골卜骨 발굴</font></div>
<div>5. 조보구문화 - 5000 ~ 4400 -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고가와포향 조보구촌</div>
<div><font color="#FF0000">중화제1봉鳳 토기발굴</font></div>
<div>요서지역 최초의 채도 토기 발굴 : <font color="#FF0000">앙소문화(BC 4512 ~ 2460) 채도와 같은 문양으로</font></div>
<div><font color="#FF0000">중원 지역보다 빠름</font></div>
<div><font color="#FF0000">존형기와 기하문 장식과 신령도안</font> : 홍산문화 보다 세련되고 아름다움</div>
<div>- 동석병용기 시대 문화</div>
<div>6. 홍산문화 - 4500 ~ 3000 - 내몽고와 요녕성 접경지역 적봉, 조양, 능원, 객좌, 건평 등</div>
<div>7. 소하연문화 - 3000 ~ 2000 -</div>
<div><font color="#FF0000">갑골문 이전의 원시 상형문자인 도부문자 발굴</font></div>
<div>- 청동기 시대 문화</div>
<div>8. 하가점하층문화 - 2000 ~ 1500 -</div>
<div><font color="#FF0000">고급 문명사회</font> : 유국상 주장</div>
<div>9. 여명문화 - 2000 ~ - 길림성 통화현</div>
<div>-------------------------------------------------------------------------------------------------------------------</div>
<div>참고자료</div>
<div>- 항공대 우실하 `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div>
<div>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유국상 2006 년 논문 `서요하 유역 신석기 시대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의 고고학 문화 개론`</div>
<div>- 경향신문 `코리안 루트를 찿아서`</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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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홍산문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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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6 Oct 2008 03:04:25 GMT</pubDate>
		<dc:creator>백랑수</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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