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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eaming Prot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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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he Sound and The Fury in Nebrask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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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10:11:2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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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eaming Prot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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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he Sound and The Fury in Nebrask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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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돌봄과 보살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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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세상의 근원에는 사람들의 세상이 있으며, 사람들의 세상은 마음의 돌봄에 있다. Sorgen은 하이데거의 용어중에서 가장 애매한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영어로는 care이라고 번역이 된다. 그러나 영어번역은 오해와 이해를 동시에 도와준다. 하이데거의 돌봄은 현상학의 지향성에 대한 그만의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관심을 지니고 지향을 하며 그 현상들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 차원의 마음의 문제는 상당히 육적인 것이다.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며 마찬가지로 그 사물에 손을 내밀고 그 사물을 잡고 도구로 사용하거나 사랑을 한다.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우리는 마음으로 다가선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돌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돌봄이 우리말의 의미처럼 애뜻한 정서를 가지지는 못한다. 다만, 다가서고 그 사물과 현상학적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정도이다.<br />
<br />
그러나 한국어로의 돌봄이라는 해석이 의미가 없지는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가 보지 못한 현상을 더욱 잘 설명한다. 우리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지향성은 오히려 돌봄이라는 윤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돌봐야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반대는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기에 돌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을 돌볼 마음의 준비와 비도구적인 타인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기에 이해라는 장을 열 수가 있다. <br />
<br />
사랑을 하고 그 사람을 걱정하고 갈등을 느끼면서도 그 사람의 존재를 내 마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손내밈과 돌봄과 그 마음씀에서 발생한다. 사랑은 육체에서 출발해서 현상으로 나타나고 존재의 근원을 보여준다. 두 팔이 없어도 사랑하는 이를 안으려는 돌봄의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 <br />
<br />
그 가능성에 가장 큰 인간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순간 순간의 돌봄들에 우리는 왜 인간이 특별한 현존재들일 수 있는지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돌봄의 인간이 되려 한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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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10:11:25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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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생일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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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생일이 지났습니다. 어제였군요. 아침에 여자친구가 끓여준 미역국과 그녀가 밤에 사가지고 온 아이스크림케잌을 먹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생일날들 중의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생활 속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녀가 선물로 직접 그려 준 우리의 그림을 들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하루의 흐름이 이토록 행복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사랑해! D<br />
<br />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19/73/a0001973_4b0514aa27b93.jpg" width="273" height="35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19/73/a0001973_4b0514aa27b93.jpg');" align="left" /><br />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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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09:50:43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아니면 말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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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p>정연주 사장의 해임이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YTN 노조에 대한 해고의 불법성도 밝혀졌다. 노무현 정권을 통해 그들이 배운 것은 하나였다. 방송과 언론을 장악해야 정권이 편하다는 인식이였다. 특히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족벌 언론들에 대한 애정공세는 이번 미디어법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친정부적 판결에서도 불법이었다.<br><br>그런데도 그들은 입도 씻도 눈도 씻도 듣도 보도 못하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면 말고라는 식이다. 죽을 때까지 때리고 나서 때린 것에 대한 후회도 한마디 없이 아니면 말고라는 식이다. 무슨 쌍8년도식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식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것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야간집시금지가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조에 대한 탄압과 용산에서의 진압이 불법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흔드는 그들로서 이번 정권에서 그들의 권력이 끝나는 것은 용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br><br>불법임을 알면서도 불법을 일부르 저지른다면 우리 사회에 정의란 없다. 그저 힘의 논리로만 움직인다고 인정해야 한다. 법이 법의 구실을 못하고 국회의 다수가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돈없고 빽 없는 놈들 두들겨 패 놓고 아니면 말고 라고 한다면,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논할 필요가 없다.<br><br>최근 유엔에 간 대한민국의 대표단들이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용산문제와 각종 시위에 대한 과잉진압과 불법 행위들과 언론에 대한 탄압에 대해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들은 소귀에 경읽기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이딴 소리들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침묵의 외침은 절대로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촛불의 힘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을 인권 후진국으로 만들고 국제적으로 망신살 뻗치게 한 그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발악을 하는 것이다. 시대가 너무 어둡다. 어두운 시대에 검은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촛불들이 넘실대는 것을 보는 것은 오직 나뿐일까? <br><br>이 겨울 4대강 사업으로 깍인 복지예산에 굶고 있을 이웃들과 탄압과 억압속에서 살고 있을 그들과 그 안에 속한 나를 생각해 본다. 이 겨울은 춥다. 그러나 촛불의 따스함은 아직 나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미래를 비춰준다.</p>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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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Nov 2009 17:54:30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그녀와의 시간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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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행복한 시간들이다. 인생에서 누구와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장기간 이어진 것은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다. 일상의 대부분을 같이 지내며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던 나만의 공부와 나만의 세계를 그녀와는 소통하게 된다. <br><br>사랑은 소통의 가장 애매하면서도 가장 행복한 형태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소통할 수 있는 순간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바람이 불듯 그녀의 말과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생각이 나에게 늘 다가오고 나의 삶을 시원하게 해준다. 벅차다. 그녀의 눈과 미소와 조용한 목소리에 나의 시간들은 꽃이 되고 산들바람이 된다.<br><br>시간이 향기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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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daimon100.egloos.com/1967092#comments</comments>
		<pubDate>Wed, 11 Nov 2009 01:25:03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왜 친일이 문제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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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레비나스를 비롯한 근대, 혹은 탈근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전기로 본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의 불가함을 논했고, 레비나스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유럽에 더 이상의 전통적 윤리의 불가함을 논했다. <br />
<br />
대한민국에서 박정희와 친일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이유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는 식민과 친일, 군사 쿠테타와 독재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장본인이자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철학과 그 이전의 사유가 그가 집권하고 육신이 환락 가운데에서 사라졌던 그 사건 (event) 이후의 철학과 사유와 같을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br />
<br />
박정희는 세 가지 문제점을 남겼다. 성공한 쿠테타는 정당한가라는 문제와 친일이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는가와 죽은 독재자가 어떻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가라는 점에서 이다. 이 세가지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분명히 관계가 되어 있고, 우익들의 절규와도 관련이 있다. 친일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류들에 대한 저항이며, 쿠테타를 부정하는 것 역시 대한민국의 과거 지배세력들에 대한 부정이고, 독재자를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과거의 비민주적 통치에 대한 부정이다.<br />
<br />
이러한 의미에서 박정희는 죽을 수 없는 상징이며, 죽을 수 없는 담론이다. 그의 친일이 용인되고 숭고하게 여겨진다면, 우리는 일제시대를 대한제국과 근대의 발생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극우 세력들이 주장하는 일제시대의 근대화에 대한 논의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무지몽매한 조선민중을 식민시대를 통해 계몽시킨 자랑스러운 천황폐하께 감사기도를 올려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의 논리이다.<br />
<br />
만일 그의 쿠테타가 성공한 것이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정당화된다면, 우리는 이후의 모든 성공한 쿠테타 역시 인정해 줘야 한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구별이 용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공한 쿠테타는 그들의 꿈이고 그들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 극우 세력들은 나약하다. 그들은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기 힘들다. 그들이 유일하게 기댈만 한 혁명의 방법은 군사정권과 같은 무시무시한 방법 뿐이다. 노무현 탄핵과 복귀 당시에 쿠테타를 운운하던 그들의 논리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제2의 제3의 박정희를 기대하고 다시 만들려 한다. 그 역사의 순환을 기대하기에 그들은 박정희의 군사쿠테타가 성공한 쿠테타여야 한다.<br />
<br />
세째로, 결국 문제는 대한민국의 주류와 지배세력이 누구였는가와 관련이 된다. 영남에 편파적이었던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이념 지형을 지역의 분열로 만들었고, 세대간의 대립의 틀을 만들었다. 박정희시대를 살고 박정희에게 세뇌당한 세대들은 박정희라는 이름에 담긴 그들의 근대화에 대한 로망과 담론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 근대화의 영웅들은 박정희의 신격화가 그들의 인생의 가장 활동적이던 그 시대와 상통된다고 본다. 적어도 그들에게 무수한 대한민국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베트남 파병과 전통적 커뮤니티의 파괴와 근대화의 각종 부작용을 부른 박정희식 계획 경제 발전이 그들의 시대를 물화시키며 신화화시키기 때문이다. 엠비가 끝없이 자신의 과거 근대화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br />
<br />
결국 박정희는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그 시대의 상징이며, 그의 시대를 살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우리가 모두 그를 잊게 되는 순간까지 절대로 논의가 끊이지 않을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대한민국의 가장 암울했던 시절, 혹은 그들에게 가장 찬란했던 시대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극우 세력들이 박정희를 부정하는 이들을 아비를 팔아먹고 과거를 부정하는 호로새끼들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와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차차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과 같은 신화를 공조하는 우파청년들로 인해 논쟁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박정희와 더불어 자신들의 삶을 보상받으려는 세대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도 하나의 역사의 흐름일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이 노무현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말이다.<br />
			 ]]> 
		</description>

		<comments>http://daimon100.egloos.com/1966374#comments</comments>
		<pubDate>Sun, 08 Nov 2009 21:32:20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그들의 거대한 심볼! 박정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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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p>박정희의 친일논란이 아주 즐겁게도 다시 재점화되었습니다. 박정희라는 거대한 팔루스가 얼마나 우리의 욕망의 근저에 박혀 있었는지 다시 한번 기억해 봅니다. 우리는 아직도 40년대의 친일, 만주군 군관 박정희와 50년대 남로당의 배신자 박정희와 60년대의 쿠테타의 박정희와 70년대의 유신의 박정희와 80년대의 전두환의 박정희와 90년대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던 신화화된 박정희와 2000년대의 우파 청년들의 히틀러가 된 박정희와 그의 딸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총체적 역사에 대한 질문의 핵심에 있습니다. 근대화라는 가명하에 수많은 민중을 착취했던 식민시대와 이념으로 얼룩진 전쟁과 또다시 일본식 조국근대화를 외치던 새마을표 민중동원과 요정에서 술을 마시다 숨진 어느 독재자의 초상은 사실 우리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p><p>&nbsp;</p><p>부끄럽다고 잊을 수 없으며, 잊는다고 잊혀지지도 않는 이유는 아직도 그가 많은 이들의 우상이기 때문이겠죠. 그 우상들을 파괴할 수 있는 증거들이 아무리 나온다고 해도, 아무리 많은 혈서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믿어온 대한민국을 잊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정권의 이념 노선과도 관련이 분명히 있는, 근대사 미화 작업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대표하는 개발독재와 인권탄압의 역사에 반대하는 저와 같은 이들의 끝없는 비판 작업도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는 둘의 타협을 용서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에 만일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독재와 민중탄압과 유신과 친일과 배신에 역사의 진리가 있다면, 우리는 윤리나 도덕따위를 공부할 필요가 없으며,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은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p><p>&nbsp;</p><p>너무나 근원적인 문제이기에, 우리는 이 싸움에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우파 수정주의자들의 "정치는 그래도 경제는 최고였다"는 논리는 결국 지금의 피폐한 남미와 아프리카와 심지어 북한의 독재자들에게도 통할 논리입니다. 민중의 피땀으로 이룩한 경제는 독재자 일인의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민주주의의 가치와 인권과 삶의 행복의 문제를 제쳐두고, 그가 만든 고속도로와 그가 만든 수천만의 공순이, 공돌이들과 파괴된 환경과 사라진 문화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그 많은 청년들, 탄압받던 반대파들과 학생들이 박정희라는 거대한 우상의 발 밑에 수근거리고 있습니다.</p><p>&nbsp;</p><p>아주 간단한 상식으로 독재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입니다. 시이저를 죽여야 했던 부르터스의 유명한 연설을 기억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이저는 반드시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헌법은 분명 주권을 국민에게 두었지, 국민의 일인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가장 근본적 국가의 기반을 생각해 봅니다.<br><br>추신: 우습지도 않게 혈서 조작설이 유포되는가 봅니다. 몇몇&nbsp;블로그들이 박정희를 되살리려고, 그의 죽은 상징을&nbsp;열폭하며 살려보려 합니다.&nbsp;그냥 웃어봅니다. 세계적으로 독재자에 대한 미화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왔죠. 차우세스크를 미화하려던 어떤 이의 글도 기억이 나네요. 그러나 말입니다. 이런 극우 세력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인지도 새삼 느껴지네요. 이글루스가 점점 황폐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몇명 되지 않는 이들의 글들이 성지순례를 떠나 컬트가 되어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니는 현상이 문화적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서구에서의 우파들의 행태들을 떠올리게 하네요. 그저 황망할 따름입니다.</p>			 ]]> 
		</description>

		<comments>http://daimon100.egloos.com/1966329#comments</comments>
		<pubDate>Sun, 08 Nov 2009 15:59:59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폭소 대한민국 - 사법부의 웃음유발자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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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아무리 봐도 소도 웃고 개도 웃고 말도 웃고 지나가는 심봉사가 웃다가 눈뜰 일이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법관들이라는 양반들이 내린 결론이 절차는 위법이나 제정되면 니들 맘이란다. 그럼 무엇하러 토론을 하고 입법기관을 거치나? 그저 다수당이 내린 결론이 바로 법으로 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당신들이 주장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준법정신이라면 말이다. <br />
<br />
조삼모사도 이보다는 유치하지 못하다. 구타유발자보다 더 저열한 웃음유발자들이 모인 저 사법부에 누가 신뢰를 보내겠는가? 경국대전을 들먹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하는 짓이 함무라비 법전까지 올라가려고 그러나? 차라리 위법을 저질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태형을 내린다고 하시지 그러나? <br />
<br />
대한민국이 웃음 천지이다. 지금 이러한 저질유머가 신종플루보다 무섭게 퍼지고 있다. 죽은 이들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가해자라고 징역을 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7명의 죽음은 개죽음이고 1명의 죽음은 국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하고 있다. 매일 경제경제하던 대통령은 주가가 떨어져도 또 경제경제 하신다. <br />
<br />
나라빛은 늘어나도 나라살림이 잘된다고 하질 않나, 4대강 다 죽이는 법을 들고 국가발전을 한다는 박정희시대에도 안 써먹던 유머를 하지 안나, 선거법위반 의원에게 의원적 상실인 100만원 보다 쬐끔 모자라게 벌금을 때리지 않나, 그들의 핍밥속에 돌아가신 전직 대통령들을 깔아뭉개지 않나, 하는 짓이 걸주의 시대에도 없던 행위들이다. <br />
<br />
웃다가 코가 삐뚫어지고 머리가 멍해질 정도이다. 이딴 사법부 있어서 뭐하려고 그러나? 가진자들과 정권의 편에만 서려고 하는 사법부에게 구역질을 느끼는 것이 비단 나만일까? 정의라는 것을 권력의 편이라고 보는 것이 그들의 사고일지인데, 우리는 도대체 어떤 정의를 위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법을 운용하는 이들이 그 법을 곡해하고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도대체 법안에서의 투쟁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유전무죄의 법칙이 법의 제1 해석의 틀이 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br />
<br />
헌재 재판관들이여! 역사를 두려워해라. 너희들에게 역사의 매서운 평가는 그대들의 행위에 분명히 답을 해 줄 것이다. 정의를 웃음유발 바이러스로 변환시키는 그대들에게 이 시대의 웃음이 다음 시대의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제발, 더 이상 웃기지 마라. 사람죽겄다.<br />
			 ]]> 
		</description>

		<comments>http://daimon100.egloos.com/1963473#comments</comments>
		<pubDate>Thu, 29 Oct 2009 16:27:49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도적질한 물건은 장물이 아니다.  ]]> </title>
		<link>http://daimon100.egloos.com/196329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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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헌재가 언제나 그렇듯이 경국대전에나 나올만한 판결을 내리셨다. 도둑질을 해도 도둑질한 물건은 장물이 아니란다. 절차가 위법해도 법이 통과되면 그 법은 법이란다. 이제 국회에서 투표하지 말아라. 토론도 하지 말자. 그냥 딴나라당 하고 싶은대로 하시지 그러시나. 1당 독재라도 좋다. 어차피 너희들이 생각하는 세상이 그게 편할테니까. 그냥 다수당 하고 싶은대로 다 해라. 다수가 원하면 그대로 하시면 된다. 엠비가 원하면 그대로 하시면 된다. 토론이고 나발이고 투표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그딴 거 하면 뭐하냐? 헌재의 유머는 끝날줄을 모른다. 니들의 법리가 경국대전에서 못 벗어난다면, 그렇게 해라. 나중에 역사가 너희들을 어떻게 판단할지 그건 너희들의 몫이 될 것이다. 너희들을 반드시 기억하고, 나의 아이들에게 꼭 전해줄것이다. 어떻게 그런 오욕의 역사가 이어졌는지를.<br />
			 ]]> 
		</description>

		<comments>http://daimon100.egloos.com/1963291#comments</comments>
		<pubDate>Thu, 29 Oct 2009 06:05:29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용산과 선거 ]]> </title>
		<link>http://daimon100.egloos.com/196307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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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노무현이 탄압없는 세상으로 간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용산의 그들은 가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죽은 이들의 시체를 뒤로 하고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이 정권의 현상태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br />
<br />
선거가 있다. 이번 선거의 의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정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지율 50퍼센트를 넘었다고 좋아하는 그들에게 진실의 종을 울릴 시간이 와야 한다. <br />
<br />
투표를 독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번 투표가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을 가벼이 넘어서려고 하는 그들에게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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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결과가 그리 나쁘게 돌아가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멈추지 말아야 한다. 약자가 짙밟히는 나라, 올바르지 않은 일들이 올바름의 탈을 쓰고 자행되는 나라,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고 현직 대통령이 아무런 비젼도 제시하지 못하는 나라, 그것이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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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어떻게 되든, 이 정권에서 노무현의 유령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사라지는 날까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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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8 Oct 2009 13:20:49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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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노무현의 주소지 없는 편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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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 href="http://news.nate.com/view/20091008n00698">http://news.nate.com/view/20091008n00698</a><br><br>노무현 대통령의 미완성, 아니 완성은 되었으나 보내지 못했던 편지가 공개되었다. 편지란 소통의 도구이다. 작성한 이의 마음이 우체국과 우체부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되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낭만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그는 부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그 편지들을 뒤로 남기고 피안의 세계로 갔다. 그의 죽음을 계속 왈가불가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부치지 못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외침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br><br>박연차 수사가 웃기지도 않게 흐르고 있다. 애초에 참여정권의 가장 큰 스캔들로 비화시키려던 그들의 목표는 흐지부지 되었다. 어쩌면 노무현이 죽음 마당에 더 이상 이런 수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참하게 매장될 뻔했으나 참혹하게 싸우다가 극적으로 사라진 한 영웅에게 그들은 이제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한 시대는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br><br>현대의 이론적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큰 테마는 실제에 대한 문제이다. 라깡으로 대표되는 이론가들은 우리의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체계의 근원에는 실제계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언어학적 전환 이후로 모든 것을 언어와 기호로 파악하려 하던 구조주의에 대한 가장 큰 공격은 사실 실제계에 대한 주장에서 나왔다. 실제는 사물로, 욕망하는 몸으로, 감추어진 죽음으로 존재하며, 드러나는 순간 감추어져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실제는 바로 진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br><br>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원래 나타나자 마자 감추어질 운명에 처해 있다. 진리를 본 인간은 외디푸스처럼 눈이 멀게 된다. 진리는 그만큼 무섭고 기괴하고 (uncanny) 치명적이다. 포우의 잃어버린 편지에 대한 분석에서 라깡은 뒤팽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누구도 보지 못한 사물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의 욕망의 실제를 논한다. 미디어에서 연일 쏟아지는 죽음의 이미지는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실제로 죽어서 썩어가는 육체들이 있다. 이라크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다. <br><br>노무현의 시체를 본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시체는 실제를 담고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잔재물들 (정신분석적으로 흔적, 혹은 오브제 아라고 불리는)은 남아 있다. 그 잔재물들은 이념의 덮개를 쓰고 우리의 근간에서 실제와 진리의 존재를 말해준다. 노무현의 편지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의 편지는 그의 육체라는 실제의 흔적이고 부분이다. <br><br>이명박 정권은 그 편지를 절대로 받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무현은 그의 이 정권에서의 운명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노무현이나 김대중은 육체 조차도 용인될 수 없는 실제들이었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이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민주주의와 어떤 가치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의 담론들 속에서 이 둘의 운명은 죽음으로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살해라고 하지 않겠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정권을 탄생하게 한 우리들의 집단 살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예정된 어떤 역설적 운명이었다.<br><br>편지들은 수신자가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 편지들, 즉 노무현의 파편들은 그가 목적으로 한 곳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장과 국장을 통해 지지율이 40퍼센트에 이르렀다는 이 정권안에서, 그리고 그 정권을 떠받들고 있는 세력들 속에서 그들의 편지는 부치지 못한 편지로 영원히 남을 수 밖에 없었다. <br><br>그러나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 편지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꿈과 그들의 이상은 번개라고 표현한 김대중의 촛불 민중들 속에서, 그를 탄핵과 죽음과 재생으로 이끄는 이들의 고요한 실천들 속에서 살아있다. 육체와 뜻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속의 진리와 글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이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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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7 Oct 2009 20:06:51 GMT</pubDate>
		<dc:creator>다이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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