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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ontender's Lif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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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두려워하지마라
그러기엔 당신은 아직 너무나 젊고 잃은 건 없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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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Nov 2009 13:46:1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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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ontender's Lif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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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조선 '근대화' 담론의 이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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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a href="http://pds16.egloos.com/pds/200911/20/94/ChosunModern.hwp">ChosunModern.hwp</a><br><br><!--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한국근대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한국의 근대가 어느 시기인지 혼란스러웠다. ‘근대’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이 가지고 있는 시기가 한국사에서는 언제부터 형성이 되어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는 강화도 조약 이후 일제 강점기 직전의 조선왕조까지로 분류한다. 그러나 때로는 일제 강점기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시작 시기 역시 실학이 형성되어져 가는 시기, 강화도 조약, 혹은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등 논란이 다양하다. 이렇게 ‘한국의 근대’라는 단어는 그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성격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학계에선 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근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근대화’는 구체적으로 국민국가의 성립, 자본주의의 발달과 산업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시민사회, 이성과 과학기술의 발달, 그로부터 야기된 세속화, 도시화 등을 이뤄내는 하나의 과정이다. 어원상 "Modern'은 Ancient'에 대립되는 의미로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이른 ‘오래된 것’에 대립되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 ‘오래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의미한다. ‘근대’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과거와의 단절, 진보, 발전 그리고 혁신 등의 개념이 새로운 시간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근대화’는 문을 넘으면 근대, 넘지 못하면 전근대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한국 사학계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조선은 이러한 과정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에 흡수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자주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고, 뉴라이트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에 의해서 근대성이라는 과정을 이뤄냈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 이들 모두 한국에게 근대화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서 근대화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 수 있었음을 주장 속에 내포하고 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러나 한국사학계가 주장하는 ‘근대화’를 이뤄낸 국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거나 몇몇 국가밖에 되질 않는다. 근대화의 표본이자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경우, 여왕이 존재했으며 영국의 근대화 과정은 농민을 실업자로 만드는 잔혹한 ‘인클로저 운동’이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전제정치를 경험한 뒤 나폴레옹이 자유를 유럽대륙에 전파한다는 명분 아래 황제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교황과 왕과 자유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등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아래 묶였으며 스페인은 이러한 세력들로 인한 심각한 내전을 경험했다. 러시아는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미국은 전제주의 성격을 가진 남부와 자유주의 성격을 가진 북부와의 남북 전쟁이 있었고,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에 합병이 되었으며, 독일과 일본은 나치즘과 군국주의를 경험하고 이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다. 이렇게 당시 국가들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말하는 ‘근대화’라는 시험을 통과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가 지나도록 조선이 멸망한 이유는 ‘근대화의 실패’로 보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의 한국 역시도 ‘근대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해서 ‘전근대’와 ‘근대’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탈근대’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한국사학계가 말하는 ‘근대화’라는 것을 이룬 국가들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작은 사건이나 단어 하나로도 크게 논쟁을 벌이고 민감한 모습을 취하던 한국의 사학계의 모습으로서는 이 ‘근대화’라는 단어 역시 크게 논쟁이 일어나고 적당한 단어로 대체가 되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심각하게 ‘근대화’ 담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이 비정상적인 ‘근대화’ 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볼까 한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span><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근대화’ 담론의 탄생과 역사</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어에서 'civilize‘라는 단어는 17세기에 나타났고, 이 단어는 한 세기 전부터 시작된 프랑스어 ’civiliser'에서 따온 것이다. 이 단어의 기원이 ‘도시민’ 혹은 도시의‘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civis', 'civilis'라는 사실에서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이란 도시적 삶을 의미하며 도시 밖 야만에 대한 도시 안 문명의 자기 우월감을 표현하는 단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18세기 이래 문명이라는 개념은 근대적 정치, 경제체제, 매너나 행동거지의 세련됨과 더불어 사회적 질서, 체계적 지식 및 과학과 동일시되었으며, 19세기 초에 이르면 이에 덧붙여 진보, 발전, 시민적 자질을 가진 개인들의 존재 등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영국인들이 문명화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헌법적 체제, 즉 법과 시민적 질서의 지배, 자유 무역, 상업과 경제의 발달, 기독교, 교육, 기술 발달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영국인들이 제시한 문명화는 영국적 삶의 방식, 곧 모든 제도, 정치, 과학, 사회적 면에서 영국의 예를 따르고 자유주의적 심성을 가지며,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를 돕는 근면과 자조의 가치를 실천하며 차를 마시고, 남자다워지고, 분별 있는 빅토리아적 삶의 양식을 채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은 문화(Kultur)라는 개념을 개발해 보편성을 역설하는 문명에 도전하며 개별성을 강조하였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일본인들은 19세기 중반 전통적으로 야만이라 칭해왔던 서양을 문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870년대 초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 순방 이후 ‘문명개화’라는 말이 유행어로 떠올랐다. 그들은 서양 문명을 ‘참 문명’으로, 동양 문명을 ‘반 문명’으로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의 근대를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었다. 서양과 사회와 문화, 역사적 풍토가 다른 일본 입장에서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왜곡된 근대를 받아들이게 된다. 예를 들어 개개인의 개별적 권리를 뜻하는 인권(불어로 droit civil)의 경우 인민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의 민권(people's right)로 번역되었으며 스펜서의 Social Statics의 서명을 사회정학(社會靜學)이 아닌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로 오역되었다. 이처럼 일본은 자유등과 같은 사상적 개념들에 대한 혼란 등으로 인해 사회, 문화적인 근대화는 왜곡된 근대화가 형성이 된다. 그러나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근대화가 이루어 진 것은 군대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명이라는 것은 단순한 풍속 개량이나 서양 양식의 서구적 차원이 아닌 국제법상 독립을 인정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문명은 국가 존망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였다. 그는 일본인들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길이라며 일본의 목적은 독립이고 국민의 문명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천명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일본인들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화를 이끌지 못했고 서양의 기술 혁신 등만을 따라하는 ‘문명개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의 ‘문명개화’는 ‘근대화’라는 단어보다 서구의 물질적인 측면을 모방하는 ‘서구화’라는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의회 제도를 만들고, 영어를 국어로 만드는 등의 문화, 정치적인 면에서 ‘근대화’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켰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사회의 하부구조만을 모방한 것일 뿐 자유와 인권이라는 상부구조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은 서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를 두고 서양과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문명이 아닌 일본 문화를 찬양하게 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승만이 본 조선</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조선은 서양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문명화’의 논리와 일본에서 들어온 ‘문명개화’의 논리, 그리고 기존에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오류들이 뒤섞인 이중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살펴보면 문명에 대한 관점이 후쿠자와 유키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에서 문명개화란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여 없던 것을 만들어 내며, 있던 것을 향상시키며 좋은 것은 더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며 이런 문명은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화를 하지 못할 경우 국제 법에 의해 자주와 독립이 침해받을 것이라며 자주와 독립을 위한 조건으로 조선이 문명개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흥미로운 건 이승만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의 관점은 상당히 서구적인데, 이것은 배재학당을 통해 선교사로부터 습득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는 문명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도 강하면서 윤리, 도덕적으로도 정의로운 존재들로 보고 따라서 문명국가가 비문명국들에게 간섭하는 건 당연한 일로 보고 있다. 한 예로 과거 미개한 사회이던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된 후 훌륭한 법으로 인민을 가르친 덕분에 영국이 이전보다 번성하고 인구도 증가했다고 본다. 이에 비해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게으르고 무지하며 독립정신이 없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들을 개화시키는 것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보고 있다. 그리고 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서양인의 관점과 매우 비슷하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승만은 무지한 조선 백성들과 관료들로서는 조선이 독립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선 외국과 많이 접해야 되고 배워야 하며 이들과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럴 경우 조선이 위험한 일을 당해도 도덕적인 문명국들이 국제 법을 가지고 항의를 하며 조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04년에 쓰인 ‘독립정신’에서 나타난 일본에 대한 관점은 모순적인데 동양에서 가장 문명개화된 국가이다. 일본이 청나라, 러시아와 싸워 이겼기에 조선의 독립을 지킬 수 있었다고 본다. 동시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에 대한 야욕을 보이는 국가로 보고 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러일전쟁 당시의 대한제국’편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일본이 조선 땅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조선 민중은 그것이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거나 혹은 전쟁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통탄을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서 춤을 추며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의 심장을 가지고는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을 뿌리고 돌아왔다.”, “죽어서 그런 나라의 개라도 되어 태어나는 것이 낫겠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서 하루빨리 조선도 일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과 맺은 조약에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데에서 굴욕감과 일본의 야욕에 대한 경계심을 보인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마지막 부분에서 ‘조선은 일본과 다른 나라에 빚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루바삐 그것을 되갚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을 증오하기만 한다면 조선은 손해를 보고 일본은 이득을 볼 것이며, 그렇다고 일본을 마냥 고마워만 할 수 없다고 하며, 진정 성공하는 길은 조선이 다른 국가처럼 부강해져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개화인들에게 개화는 독립을 위한 조건이라고 보았으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문명관을 받아들여 조선이 빨리 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다른 국가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선 역시 일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근본적으로 조선이 문명화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교육이 무척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더 시급한건 조선이 독립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것이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국인이 본 조선</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일그러진 근대』라는 책을 보면 영국이 본 조선을 알 수 있다. 일본이나 청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조선은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영국인들의 인식에 잡히기 시작된다. 그러나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상상력을 부추기지도 않고, 모험을 자극하지도 않는 산문의 땅”, “빈곤이 어디서나 발견되며 게으름이 국민적 특성인 나라”, “‘근세 중국’에서 ‘중세 중국’으로 옮겨 온 것으로 착각되는 나라‘등으로 표현되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처음 조선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식은 일본과 중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았었다.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등으로 잘못 알려지다가 차츰 한국이 한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본에 앞섰고, 중국 다음으로 문명화된 동양 국가였으며, 일본 문명의 많은 요소들이 조선에서 전해졌던 것을 알게 되면서 조선은 ‘문명 퇴화’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조선의 예술품을 보면서 ‘미개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러한 문명국이 야만국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조선인들은 게을렀으며 그들이 입는 흰옷은 ‘여자들이 부지런히 빨래를 하기 위해서’ 혹은 ‘과거에 누리던 영광을 애도’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조선인들에 대해서는 ‘고집이 세고 도덕심이 부족하며, 남녀가 다 더럽고 씻기를 싫어하고 단정치 못하며, 표정은 미련하고 뚱하며, 시선은 둔감하고 멍한 채 무관심을 드러낸다.’ 혹은 ‘그들은 누워서 빈둥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고, 소를 몰거나 혹은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사색을 즐기는 타고난 철학자‘라는 조롱조의 평을 받는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조선 정부에 대해서는 더욱 부정적이다. 영국의 정치인 커즌은 1893년 한국을 방문한 후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부해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에는 너무나도 쇠약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영국인들은 한국 정부의 행동에 경악했다. 조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로 보였고 ’동양적 전제정치‘의 원형이며 ’웃음거리‘ 왕국이었다. 한국 국왕과 지배층은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본 지도자들과 비교되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국 외교관들은 조선의 시급한 개혁이 당면한 우선 과제로 보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무능과 지배층의 파벌 싸움에 실망한 영국인들은, 한국인들은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보았다. 이런 과제들을 앞두고 외교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얻으려 한 고종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고종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자. 주일 영국 대사 새토우는 고종이 서울 땅의 1/4을 차지하게 될 새 궁정을 짓기 위해 궁정 주변의 모든 땅을 사려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황제가 하는 “가장 최근의 미친 짓”이라 부른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1896년부터 1905년 서울 주재 총영사 및 주한 영국공사였던 존 조든은 독립 협회의 개혁운동에 기대했지만 고종이 “그의 위엄을 건드리는 문제에는 대단히 민감”하다고 관찰하면서, 만약 “이런 문제에 기울이는 관심을 국가 통치에 쏟는다면 한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애석해하였다. 고종 즉위 40주년 행사에서 조든은 “황제는 정말로 희망이 없다. 한국 궁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교하면 로마가 불에 탈 때 네로가 바이올린을 켠 것은 차라리 위엄 있는 행동이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906년부터 주한 총영사로 부임한 헨리 코번은 고종에 대해 선하고 타고난 위엄이 있으며 영리하기는 한데 누구를 신뢰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정리하였다. 비숍은 고종의 성격이 좀 더 강하고 지적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면 좋은 군주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성격상 결함은 운명적이라고 내린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국인들은 이런 조선을 “완전 붕괴 상태에 있는 동양 국가”로 표현하였다. 1904년 이후 조선에 대해선 사실상 모든 기회를 놓쳐버린 것으로 보았고 자체적인 개혁은 불가능한 국가로 보았다. 이런 한국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 3천 마리의 소를 키우면서 30년간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는 ‘아우게이아스 왕의 마구간’에 비유되었고 일본이 그 마구간을 청소해줄 적임자로 판단하였다. 1905년 갱신된 2차 영일동맹에서 일본이 한국에 지도, 통제, 보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게 된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국이 조선에게 내린 평가는 지금 우리가 보면 기분이 나쁠 정도로 가혹하다. 영국의 이러한 관점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와 태평양 전쟁 중 임시정부가 미국에게 국가로서의 승인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 미국이 이것을 영국에게 자문을 구하자 영국은 한국인들이 그러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조언하고 미국은 이것을 받아들여 국가로서의 승인을 하지 않았다. 이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신탁통치를 이끌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러한 영국의 관점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편향된 시선이 밑바탕에 깔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중에서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에 비해 너무나 비교되는 후진국이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국인의 시선 뒤에 숨어있는 ‘박지향’의 관점</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우리가 『일그러진 근대』를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 책의 저자, 역사학자 ‘박지향’이다. E.H 카가 말했듯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영국인이 본 조선’에 대한 관점은 분명 사실이나 그것을 다시 재구성한 역사학자 ‘박지향’은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일그러진 근대』를 저술했는지 알아야 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사실 그녀가 말하는 영국인의 관점은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것도 많으나, 대다수는 그녀 역시 암묵적인 동의가 있으며, 동의하지 않는 관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다. 저자가 이러한 영국인들의 관점 혹은 이야기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저자가 책에서 ‘영국인들이 바라본 조선’을 소개하는 챕터의 제목은 ‘영원히 클 수 없는 어린 아이의 나라’다. 이 챕터의 결론은 영국의 소설가 드레이크의 평으로 끝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어떤 민족이 강압적으로 통치 받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내부에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조선이 악의 무고한 희생자들이라고 심약하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머리말에서는 저자의 의도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한국에 대해 가장 동정적이던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조차 “아무런 편견이 없는 관찰자라면 오늘날 한국이 독립을 상실한 것은 대체로 구 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영국인들의 이러한 관찰은 우리 역사의 비극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비록 한국과 일본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이 편견으로 왜곡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적하는 우리의 모습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냉엄한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겸허하게 인정하자.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타산지석으로 삼도록 하자. 우리 역사의 실패의 책임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게 되는데 이 책이 기여하기를 바란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저자는 영국인들의 관점을 통해 조선이 일본에게 흡수된 책임을 일본이 아닌 조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며, 당시 중요했던 것은 외교가 아닌 내부적 개혁이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조선 붕괴의 이류를 외부에서 찾는 민족주의 사학계의 주장과도 배치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외교를 중요시한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개화인들의 관점과도 다르다. 물론 내부적인 개혁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며, 조선이 멸망한 것에 대해 내부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러나 내부적 개혁만으로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근대화’는 것은 순수하게 자생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유럽에서 만들어진 기준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순간 조선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그러했듯 유학생을 보내고, 외교를 통해 접하며, 그것을 배워와야지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근대화라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흥선대원군 이전부터 조선은 이미 국가 시스템이 흔들리는 상황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하느냐’였고 개혁을 통해서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였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변화는 Modern이 말해주듯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고, 접하지 않는 새로운 것에 대한 방향 설정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도 근대화 과정에서는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의 전제정치와 남북전쟁을 겪었던 것이다. 조선 역시 고종 및 개화파들은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그것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눈에 접하지 않는 변화를 추진하는 세력도 분열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리고 ‘조선의 근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와 ‘조선이 근대 국가가 되지 못했다.’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나름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식 근대화 혹은 서구화는 추진할 수 없었다. 일본의 ‘천황’처럼 온 국민을 집결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고 ‘단발령’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주의 세력의 저항이 심한 형편에서 빠른 근대화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당시 최강국이자 가장 근대화가 된 국가가 보았을 때 조선의 내부적 개혁이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또한 ‘근대화’는 지금의 한국을 만들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조선을 살릴 수 있었던 방편인지는 한 번 더 고민해봐야 한다. 당시 강대국들은 ‘근대화’를 이룬 국가들이지만 ‘근대화’를 이룬 모든 국가들이 강국으로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근대화’가 성공했더라면 조선은 일본에 흡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 하지만, 근대화가 이루어졌는데도 멸망한 국가들도 역사상 그 사례는 너무 많다.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최근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 자체가 붕괴하는 것도 소련을 통해 보았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조선 역시 ‘근대화’를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남는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근대화’ 자체가 조선의 붕괴를 촉진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 사학계 내부에서는 ‘근대화’는 조선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경로였으나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조선이 붕괴되었다고만 보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이승만 및 당시 개화 지식인들처럼 보편적인 문명화를 추구하면서도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 원했던 일본식 근대화, 서구화, 군사적인 근대화가 이중으로 겹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우리 역사 최전선』에서 최전방에 서 있는 ‘박노자’와 ‘허동현’</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번엔 『우리 역사 최전선』을 살펴보자. 이 책은 이상주의자 ‘박노자’와 현실주의자 ‘허동현’의 논쟁 집으로서 저자들의 관점이 전면적으로 앞에 드러나 있다. 이 둘은 모두 ‘근대’가 어쩔 수 없는 것임에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긍정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박노자는 갑신정변의 주체를 ‘폭력과 살육을 서슴지 않는 근대화 지상주의자’라고 칭하자 허동현은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는 없다고 답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좀 더 근대화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인 견해를 알 수 있다. 기존의 사학계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근대화를 늦춘 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먼저 박노자는 흥선대원군을 근대화의 잣대로 평가 할 수 없다고 한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전통시대의 인물인 대원군에게 왜 일찌감치 서구식 개화를 지향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것은 물고기에게 왜 새처럼 날아다니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격이지요. 서구식의 근대식 군사주의 국가 건설이나 자본화가 비 서구 지역에서 꼭 자생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역사의 법칙도 없고, 서구적 근대국가를 선으로 볼 이유도 없습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러나 허동현은 이런 박노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그러나 같은 조선에서 일본은 어떻게 ‘새’가 된 것일까요?……일본처럼 우리에게도 시간과 기회가 일찍 주어졌다면, 서구 근대가 이식될 수 있었다고 말이죠. …… 당시 민중 물고기들에게 인권과 경제적 생존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잔혹하긴 해도 서구 근대를 따라 하는 것 말고 다른 현실적 대안이 있었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대원군에게 왜 새가 되려 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따져 묻는 것입니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저자 모두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박노자의 경우는 한발 더 나아가 서구식 근대화가 꼭 선이며 그것을 따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대신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라는 이상주의적인 근대화를 말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본식 근대화는 상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러나 허동현은 이상적인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시대는 먹거나 먹히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가 되어야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근대화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 책만으로 그 둘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관점은 적어도 일반적인 민족주의 역사학계에서 상당히 벗어난 관점이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근대화’ 담론을 넘어서</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한국에서 쌓아져온 ‘근대화’ 담론은 서양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문명화’의 논리와 일본에서 들어온 ‘문명개화’의 논리, 그리고 기존에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오류들이 뒤섞인 이중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당시 개화기 지식인들은 한편으론 영국에서 만들어져 온 보편성의 성격을 가진 ‘문명’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조선을 넘보고 있는 일본에게서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식 ‘문명개화’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에게 병합된 후 일본은 독일식 ‘문화’ 개념을 받아들여 일본식 ‘문화’를 강조하였고 한국 역시 이 영향을 받아서 ‘근대화’의 ‘근대’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상호 모순적으로 접해져 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동시에 조선의 ‘근대화’ 담론은 근대식의 이분법적 논리로 이뤄져 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었던 존재들-독립협회, 갑신정변, 개화파 등등-은 선했던 것이고, 그 반대 세력들-대원군, 위정척사파-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결국 근대 국가에 도달하지 못했던 조선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러나 현실은 그것과는 다르다. 살아남기 위해선 근대화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근대화가 생존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프랑스가 왜 독일에게 무너졌는가. ‘근대화’ 담론은 이 이유를 설명해주질 못한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 버금가는 근대화를 이뤄낸 최강대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세계는 누군가를 잡아먹거나, 혹은 잡아먹히는 시기였다. 결국 식민지를 둘러싼 대립은 최강대국끼리의 전쟁으로 이어져왔고 결국 그들 중 대다수는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이차 세계대전 이후 살아남은 국가는 미국, 소련, 영국 밖에 없으며 영국은 만신창이가 되어 과거에 누리던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근대화’가 조선을 지킬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화’가 반드시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이분법적 근대성 논리인 ‘근대화’ 담론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조선 후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나도록 ‘근대화’ 담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국은 과거 ‘근대화’에 대한 교훈을 계기로 빠른 성장을 이뤘고 결국 세계의 강국이 되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한국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한국도 제국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독수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나는 제국주의 시대의 결말을 보면서 지금 이 시기에 우리가 얻어야 할 새로운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는 결국 극소수의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로 만들었고, 최강대국이던 영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등국가로 강등되어 버렸다. 이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지양시켜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근대적 이분법성의 논리인 ‘근대화’ 담론을 넘어선 진정한 의미의 ‘탈 근대적’ 담론이 필요하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참고문헌</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박지향, 『일그러진 근대』, 푸른역사, 2003<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청미디어, 2008<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허동현·박노자, 『우리 역사 최전선』, 푸른역사, 2003</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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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역사. 오래된 미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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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Nov 2009 13:42:4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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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롤스의 정의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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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nbsp;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복지주의를 적합 시키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롤스는 사회제도의 제 1덕목이 정의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의 이론을 전개한다. 롤스는 정의의 개념을 한 사회제도 안에서 모든 개인이 완전하게 평등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정의론은 사회 구성원 간의 이익의 충돌과 갈등을 제도적 원리를 통해 해결하는 절차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롤스는 근대의 사회계약론을 새롭게 변형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nbsp;롤스에 따르면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 1덕목으로서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로크의 사회계약설처럼 사회는 개인들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사회 없이 개인만으로는 인간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기에 사회란 그 구성원간의 구속력을 갖는 어떤 행동 규칙을 인정하고 사회적 협동은 필연적이다.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사회적 협동 과정은 분명히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인 이익으로 인해 충돌을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이 얻을 수 있는 빵을 키우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함께 협력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최대한 빵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절한 분배의 원칙에 합의를 해야 한다. 만약 그런 합의가 아니라면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지배가 되며 그것은 정의의 원칙에 어긋난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nbsp;롤스가 제시한 큰 두 가지 원칙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과 사회적 경제적인 불평등, 예를 들면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소수자의 노고가 전체의 보다 큰 선에 의해 보상된다는 이유로 어떤 제도를 정당화하는 일을 배제한다.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렇게 정의의 원칙을 수립하기 위해선 사회계약론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원초적 입장’을 설정하고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사회를 지배하는 공정한 법칙을 만들기 위해 다 같이 모였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그 사회에 태어날지 모르는 ‘무지의 베일’뒤에 가려진 ‘초기 상태’에 있는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nbsp;‘무지의 베일’이 없는 상태에서 사회계약을 하려한다면 능력이 있는 자라면 성공하는 자가 최대한 많이 얻도록 합의를 하려고 할 것이며 능력이 없는 자라면 약자에게 최대한 많은 혜택이 올 수 있도록 합의를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과 성공 여부, 지위, 권력 등을 모르는 ‘무지의 베일’을 통과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가 사회적 약자에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게 된다. 능력이 있을 때의 상태와 그렇지 않을 때를 모두 고려하게 되고 이에 따른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차등의 원칙’이다.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br>&nbsp;그의 정의관은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 우연성이 최대한 배제시켜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회는 역사적인 맥락이든, 여러 가지 선천적인 조건들로 인해 누군가는 이미 시작 지점부터 너무나 앞서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너무나 뒤에 서 있다. 만약 이러한 상태에서 그대로 경쟁을 시킨다면 뒤쳐진 사람은 계속해서 뒤쳐질 수밖에 없고, 앞서 있는 자는 앞서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 계급의 상하 이동은 불가능해지며 가난은 대물림되어 진다. 롤스에 의하면 이런 우연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정의가 부재한 사회다. </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따라서 적어도 경쟁의 시작은 최대한 같게 만들어 주는 것, 기회의 평등을 통해 사회적 약자도 충분히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우연성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권력을 가진 강자들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사회이며 진정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합의를 이뤄낸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nbsp;‘차등의 원칙’과 관련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할당제’다. 미국에서 1970년대에 소수인종 특례입학과 관련해서 인종 할당제가 논란이 되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가 된 흑인 및 소수인종을 위한 ‘적극적 평등실현 조치’의 일환으로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정 수 이상을 뽑아 소수인종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려는 취지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할당제로 인해 탈락된 백인들이 늘어나자 이것이 역차별이라며 이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울대가 지방 아이들을 위한 할당제를 시행하자 이것이 역차별이라며 소송이 일어났다.&nbsp;<br></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br>&nbsp;만약 롤스의 이야기를 따른다면 이런 할당제는 찬성을 해야 한다. 모든 이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회의 평등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보듯이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은 비싼 사교육을 받지만 가난한 집안의 자식의 경우 비싼 사교육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수능을 치게 될 경우 당연히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경쟁의 시작점에서 이미 저만치 앞 서 있다. 더군다나 지방의 경우는 기본적인 사교육 시설마저도 부족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흑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노예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신분적인 해방은 이루어졌지만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할당제는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상하기 위한 적절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인종이나 집안의 부유함, 출생지에 의한 사회적 우연성을 최대한 배제시킴으로써 불평등한 자연적 자산에 대해 보상의 원칙을 적절하게 적용한 경우이기 때문이다.<br></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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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역사. 오래된 미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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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Nov 2009 13:36:0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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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자유주의 정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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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a. Liberalism</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로크, 스미스, 스펜서, 밀 등의 주장들에 담긴 사상을 당초에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정부 및 사회의 침해를 반대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로크에서 밀에 이르는 사상가들의 주장을 자유주의라고 정상적으로 호창해온데 반해 미국에서는 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비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주장들이 담긴 사상노선을 자유주의라고 호칭해왔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의 군사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고 그에 따라 미국의 언어 문화적 영향력이 커졌다. 그로 인해 미국식 용어법이 유럽식 용어법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미국식 자유주의를 ‘자유주의’로 부르는 관행이 보다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b. New Liberalism</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New Liberalism은 19세기 중반부터 세계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영국의 경제가 1875년부터 장기적인 불황을 겪게 되고 그에 따라 영국 사회의 빈곤과 실업의 증가를 비롯한 많은 경제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한 것과 관련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경쟁적 시장이 좋은 결과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고, 법률에 기록되어 있는 자유가 파산, 실업, 빈곤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 결과 영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정부가 소극적인 야경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서 민간영역으로 간주되어온 분야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앞장서서 전개한 대표적 지식인이 토마스 힐 그린, 존 홉슨, 레오나드 홉하우스 등이다. 이러한 New Liberalism은 경제이론 면에서는 존 메이나드 케인즈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이러한 New Liberalism노선은 미국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언론은 이러한 New Liberalism을 Liberalism이라고 호칭했고 이에 따라 본래의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c. Neoliberalism</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영국에서 자유경쟁시장의 폐단으로 인해 그에 대한 반성적 보완을 주장하는 New Liberalism가 등장하던 시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일단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자유경쟁시장을 옹호하는 이론이 주장되었다.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의 이론적 약점들을 보완하고 보다 정교한 논리로 옹호했다. 고전적 자유주의를 보완하고 옹호하는 노력의 중심에는 루드빅 폰 미제스와 하이에크가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처음에는 그 영향이 미비했으나 시카고학파와 접목되면서 비로소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미제스, 하이에크, 시카고 학파의 주장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공통점이 많은 반면 미국에서 ‘자유주의’로 호칭되는 노선과는 상반되는 요소가 많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이들의 노선을 미국의 기존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Neoiberalism으로 호칭하게 되었다.</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d. Libertarianism</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미제스-하이에크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Neoiberalism보다 Libertarianism으로 호칭되는 노선이 있는가 하면 간혹 미국 언론에 의해 Neoiberalism으로 호칭되면서도 위에 설명한 미제스-하이에크-시카고학파의 노선과는 상이한 노선이 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Libertarianism은 애인 랜드, 로버트 노직, 머레이 로드버드 등에 의해 표방되는 노선이다. 그들은 미국서 자유주의의 핵심요소인 개인주의가 멀어지는 것에 반발해, 자신들의 자유주의 노선이 미국의 기존 자유주의 노선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사상적 노선을 Libertarianism이라 호칭했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존중한다는 뜻에서 자기들의 노선에 관한 명칭에 Liverty라는 용어를 넣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Libertarianism이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존중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것을 서술의 편의상 ‘자유지상주의’라고도 한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자유지상주의는 19세기 중반 스펜서가 로크와 스미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던 것과 유사하게 미제스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의 노선은 Liberalism이나 Neoliberalism과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 자유경쟁시장의 효율성 신뢰, 사유재산권 강조, 법치 강조, 개인 존중 등에 있어서 동일하다. 다만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보다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 존중을 강조한 나머지 마약의 복용과 거래, 매춘 등과 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는 행위를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설사 도덕 사회적으로 문제를 야기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타인에 피해를 주는 행위가 아니므로 개인의 자유영역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국가의 역할 축소를 강조한 나머지 국가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한다.</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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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역사. 오래된 미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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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Nov 2009 13:35:0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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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미실, 영웅의 찬란한 죽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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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11/94/e0015994_4afab7eca7420.jpg" width="500" height="333.3333333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11/94/e0015994_4afab7eca7420.jpg');" /></div></p><p>&nbsp;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지금까지의 실질적인 주인공 미실이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전에 말했던 부숴지는 옥처럼 찬란한 죽음이었다.&nbsp;미실은&nbsp;사람을 보는 뛰어난 통찰력과&nbsp;누구보다도&nbsp;차가운 냉정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nbsp;사랑할 줄 알고 누구보다 뜨거웠다. 그에 비해 덕만은 어떠한가. 미실에 비해 경험도 없고 능력도 부족하다.&nbsp;덕만의 인재들은&nbsp;덕만과 비담을 제외하고는 미실의 인재들에&nbsp;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nbsp;덕만이 미실을 이길 수 있었던 건&nbsp;하늘 때문이다.&nbsp;하늘의 힘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했던 미실에게 하늘은 조금도 편을 들어주질 않았다. 하늘이 미실을 눈꼽만치라도 도와줬더라면 미실의 화살은 덕만의 가슴을&nbsp;꿰뚫수 있었을 것이다.<br><br>&nbsp;자신의 편에 서지 않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nbsp;오히려 하늘을 이용하며, 하늘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그녀는 진정한&nbsp;영웅이었다. 그러나 덕만은 어떠한가. 그녀는 단지&nbsp;아슬아슬하게&nbsp;하늘의 힘을 빌려 위기를 극복하고, 황실이라는 정통성을 이용하여 여왕이 되고자하며 하늘의 힘과 명분으로 그녀를 이긴다. 덕만 역시&nbsp;온갖 고초끝에 여왕이 되겠지만 그 고초는 그저 하늘이 내린 시련이었기에&nbsp;비인간적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가질수 없는 것을 갖고자 애를 쓰는, 그러기 위해&nbsp;사람을 볼 수 있는 휼륭한 안목으로 거둔 인재들과, 냉정한 판단으로 맞서는, 하늘에 맞서기 위해 인간성을 버린&nbsp;미실이 더욱 인간적으로 보이며 정이 간다.&nbsp;<br><br>&nbsp;미실이라는 캐릭터는 '하얀 거탑'의 장준혁과 묘하게 겹치기도 한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술수를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그 꿈을 좇아가는 모습은 그 것을 이루기 위해 인간성을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를 보이면서&nbsp;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nbsp;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nbsp;그들의 실패를&nbsp;슬퍼한다. 그렇기에 '하얀 거탑'에서 가난한 자들의 기적적인 승리에 감동하기보다 장준혁의&nbsp;죽음에 눈물을 흘리고,&nbsp;덕만의 승리를 기뻐하기보다 미실의 죽음을 슬퍼한다. 이런 그들은 지금 이 시대의 영웅들의&nbsp;상이며 그들의 이야기는 영웅들의 비극이다.&nbsp;<br><br>&nbsp;한편 미실은&nbsp;황후 혹은&nbsp;여왕이라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시대를 가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보였으며 마지막은 자존심을 지키며 그녀가&nbsp;말했던&nbsp;부숴지는 옥처럼&nbsp;찬란함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싸울 것을 가지고 있었다.&nbsp;그러나 지금 나는 어떠한가. 나는 나의 시대는 커녕 나의 시간도 없다. 나의 시간은 언제인지도 모른채, 꿈도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내가 원하는, 즐거운 그런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언제부턴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nbsp;운명 혹은 무엇인가에 점점 이끌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린다.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달려왔지만 사회 혹은 시간이라는 무언가가 다시 제 자리로 돌려 놓는듯한, 아무리 그 힘으로부터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결국 되돌아오는 것만 같다. 그래서 한 동안 그 슬픔이 내 몸을 감쌌다. <br><br>&nbsp;그러나 다시 미실의 이야기를 생각 해보면서,&nbsp;미실이&nbsp;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느끼면서 나 역시 이렇게 끌려다닐 수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nbsp;운명이라는 울타리를 넘을 수 없더라도, 결국&nbsp;질 수 밖에 없더라도, 실패 할 수 밖에 없더라도, 다시 나를 움직이는 그 무엇인가에 그냥 이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늘과 싸울만한 능력을 가진 영웅은 아니지만,&nbsp;그것이 나라는 한 인간을 느낄 수 있게 하는&nbsp;삶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br><br><br>미실의 어록<br><br>"하늘을 이용하나 하늘을 경외치 않는다. 세상의 비정함을 아나, 세상에 머리 숙이지 않는다. 사람을 살피고 다스리나,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다."<br><br>"비겁한 자에겐 삶도 죽음도 정면으로 오지 않는다.<br>옆구리를 푹 찔리고 뒷통수를 맞으면서야 살아있었나 혹은 죽어가나 흐리마리 느낄 뿐<br>오직 삶의 즐거움을 맛본자만이 두려워하지 않으리라."<br></p><p>"마지막이라면 깨지는.. 옥처럼 찬란하게.. 뭐 그런거."<br></p><p>"싸울 수 있는 날엔 싸우면 되고<br>싸울 수 없는 날엔 지키면 되고<br>지킬 수 없는 날엔 후퇴하면 되고<br>후퇴할 수 없는 날엔 항복하면 되고<br>항복할 수 없는 날엔<br>...<br>그날.. 그날 죽으면 된다."</p><br/><br/>tag : <a href="/tag/미실" rel="tag">미실</a>,&nbsp;<a href="/tag/선덕여왕" rel="tag">선덕여왕</a>			 ]]> 
		</description>
		<category>The FILM</category>
		<category>미실</category>
		<category>선덕여왕</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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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1 Nov 2009 13:39:16 GMT</pubDate>
		<dc:creator>Contender</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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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푸코가 덱스터를 만났을 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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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nbsp;살아가면서 쌓여진 나의 지적 테두리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을 고르라면 나는 미셀 푸코를 주저하지 않고 꼽을&nbsp;것이다. 대학교&nbsp;2학년 때 배운 '감시와 처벌'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위대한 책이다. 내가 어떻게 감시를 피하면서 살 수 있는지, 또한&nbsp;반대로 내가 어떻게 상대방들을 감시하고 처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그와 함께 배운 포스트 모더니즘은 나의 외골수적인 반항심과 맞물려 아버지와 같은&nbsp;담론에게 조롱하고 장난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br><br>&nbsp;푸코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보자. 누구나 그러하듯이 푸코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의 이론들을 이해하는데&nbsp;도움이 된다. 그는 에이즈가 처음 퍼지던&nbsp;시기에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이였다. 그는 사회적으로 반 동성애적인 분위기에 맞물려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었는데 정신병원의 생활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nbsp;동성애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nbsp;그는 치유되어야 할 환자 취급을 받게 되었고, 병원은 인간이 가진 욕망 중&nbsp;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것들을 금지시키고, 사회가 허용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로 정화되도록 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동성애적인 욕망을 숨겨야 했을 것이다.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알게되어 그를 신고할 경우&nbsp;다시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숨막히는 구조 속에서 사회 시스템이 구성원들을 어떻게 감시를 하고 처벌을 하는지에 대해&nbsp;고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이 나오게 되었다.<br><br>&nbsp;혁명 이전 앙시앵 레짐이라는 체제 하에선 왕이라는 강력한 권력 아래 반 사회적인 행동을 했을 경우, 그것은 왕의 이름으로, 왕의 소유권을 침해한 대가로서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그가 보는 앞에서 태우고 난 뒤 그도 화형에 처하는 방법이라던가 여러가지 잔혹한 방법을 실행했었고 그것을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행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중들에게도 한편으로는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nbsp;권력자들은 대중들에게 공포를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함부로 반사회적인 행동 -그것은 도둑질, 살인등에서부터 반란까지 포함된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꼭꼭 숨어서 혁명을 일으켰고 최고 권력자인 왕의 목을 잘랐다. 공포로는 더 이상 권력을 지킬 수 없었고 사회 통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br><div style="TEXT-ALIGN: center">&nbsp;</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01/94/e0015994_4aed9b06d1c90.jpg" width="500" height="312.74509803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01/94/e0015994_4aed9b06d1c90.jpg');" /></div>&nbsp;혁명 이후&nbsp;시스템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체제 변환을 하게 된다. 변화된 근대 시스템의 특징은 권력은 왕이라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시화되면서&nbsp;쉽게 찾을 수 없도록 숨으면서 반 사회적인 인물들은 거리로 나오게 하는&nbsp;것이다. 혁명이 일어나 왕의 목을 자름으로서 체제가 끝난 것을&nbsp;본 이후&nbsp;어느 한 사람으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게 함으로서 반란이 일어나도 사회가 또다시 뒤집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런 가능성을 가진 민주화나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거리로 나올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감시가 좀 더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nbsp;공포로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으로&nbsp;머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육을 시키고 군대에서 재교육을 한다. 그럼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은 교도소나 병원에서 재교육을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여주듯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욕망, 우리의 의사에 따라 고르는 선택이 사실은 시스템의 통제 아래에서 한정된 그리고 만들어진 선택을 할 뿐이다.&nbsp;동시에 개인들의 선택이&nbsp;말썽의 여지가 없도록 철저한 감시 구조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컴퓨터로 반 사회적인 행동을 하자 스미스가 와처 그에게 압력을 가한다. 이렇게 권력은 혁명 이전보다 훨씬 세밀하고 정교하게 우리들의 삶에 침투되어 있다.<br><br>&nbsp;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욕망이라는 건 평등한 것이다. 사람들은 제 각각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사실 귀하고 천한 것은 없다. 다만&nbsp;사회가&nbsp;귀한 것과 천한 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살인은 보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신을 모욕하는 자를 죽이는 건 정당화되었고,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살인 역시 정당화되었다. 조선 시대에서는 바람 피는 아내를 죽이는 건 정당화되었지만 바람핀 남편을 아내가 죽이는 건 정당화 되지 못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자가 먹고 살기 위해 빵을 훔치는 장발장식 도둑질은 정당화되지 않지만 그런 자가 간절하게 호소를 하는 것을 거부하여 그들이 죽도록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 이름 아래 정당화 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권력을 가진 자가 사회적 약자에게 행해진 폭력과 살인은 정당화되었지만 약자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 반기를 가했을 땐 정당화되지 못한건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이루어져왔다. 이처럼 시대와 공간에 따라 욕망들은 옳고 그른 것이 갈려져왔고 절대적인 판단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다.<br><br>&nbsp;드라마 '덱스터'의 주인공인 덱스터는 이러한 사회에서 사회가 허용되지 않는 욕망, 사람을 살인하는 욕망을 가진 자이다. 반사회적인 이들을&nbsp;잡아내는 경찰인 아버지 해리는 어릴 때 그런 그의 본능을 보고서 사회의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나쁜 이들을 죽이라는 조건 아래 그가 전기의자에 앉지 않고 살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덱스터는 아버지를 이어서 범죄 현장에서 혈흔을 분석하여 범죄자들을 찾는 경찰이 되었고 동시에 그의 욕망에 따라 살인을 죽인다. 단 범죄자들을. 반 사회적인 이들에 대하 감시를 하는 주체이자 감시를 피해야 하며, 반사회적인 이들을 잡아내 살인을 하는 그는 푸코가 발견한 근대 시스템의 특징들이 모두 모여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사회의 감시와 처벌를 하는 위치에서 감시와 처벌을 교모하게 피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반사회적인 욕망을 이뤄내는 모순적인 위치에 서있다.<br><br><div style="TEXT-ALIGN: cente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01/94/e0015994_4aed9b19bb809.jpg" width="396" height="55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01/94/e0015994_4aed9b19bb809.jpg');" /></div><div style="TEXT-ALIGN: right">&nbsp;<div style="TEXT-ALIGN: left">그의 눈에서 본 사람들은 어떠할까. 제각기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즐기고 또한 그 욕망을 이루지 못했을 땐 고통받는 것을 목격한다. 어떤 이들은 남들 눈을 피해 바람을 피우고, 어떤 이들은 변태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아내를 사랑하지만 경찰이라는 힘든 직업 때문에 이혼을 요구받아 괴로워하는 것들을 본다. 또한 어떤 이들은 범죄자들을 찾아내는 것에 광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제각각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예를 들어 범죄자들을 찾는 것을 즐기는 욕망과 같이 사회적으로 허락된 것을 즐기는 자는 정의로운자로, 사회적으로 허락받지 않는 욕망을 즐기다 사회의 눈에 발견된 것을 보는 자들은 나쁜놈, 나쁜년으로 취급받고 그 댓가를 받는다.&nbsp;<br><br>&nbsp;덱스터는 처음에는 살인이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nbsp;즐기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깨닫게 된 순간을 만난다. 그&nbsp;순간&nbsp;그동안 욕망을 통제해왔던 룰에서 벗어나라는 강력한 유혹을 받는다(시즌1). 그리고&nbsp;욕망의 원인을 깨닫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신에게 룰을 만들어준 아버지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또한 아버지 역시도 자신을 완전히 허용하지 못했음을 알게되면서 아버지가 만든 통제의&nbsp;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룰을 만들어 가게 된다(시즌 2). 아버지에게 벗어나 자신이 만든&nbsp;룰에는 부족한 무언가 때문에 실패점도 보인다(시즌 3).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점점 어떻게 인생 살아가야하는지&nbsp;깨달아 가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덱스터의 사회화가 이뤄진다. 하지만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가족이라던가 재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생에 대한&nbsp;짐들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을 조여온다. 그 짐이 너무나 무거워 자신들의 가족을 살인하는 이들도 보는 한편 가족 앞에서는 다정한 남편과&nbsp;멋진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밤에는&nbsp;너무나 잔인한 살인을 하는 이들도 보게 된다.&nbsp;자신과 똑같은 욕망을 가진 이들을 보게 되지만 동시에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존재들을 건드리게 되면서 그들을 허용할 수 없다. 이러한 모든 모순점을 다 가지고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덱스터는 우리의 삶과도 연결된다.<br><br>&nbsp;좋은 직장에 들어가, 많은 돈을 벌고, 좋은 남편 이쁜 마누라를 얻어서, 자이나 타워팰리스 같은 좋은 집에 들어가, 자녀들을 명문대로 보내서 좋은 사람과 결혼시킨다는 사회가 만들어 둔 욕망의 구조 속에 포함되지 않는,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욕망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그것을 말한 순간 미친놈으로 낙인찍혀 버리는 욕망들은&nbsp;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푸코와 같이 동성애일 수도 있고 덱스터와 같이 살인일 수도 있으며,&nbsp;그 외에&nbsp;다른 어떤 욕망일 수도 있다. 덱스터 식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당신의 어둠의 동반자이다. 당신과 함께 인생의 끝까지 당신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치며 당신을 괴롭히며 당신을 만들어가는&nbsp;어둠의 동반자(Dark Passenger)이다.&nbsp;그것이 어떠하든&nbsp;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에&nbsp;이 사회가 만들어 둔 정교하고 세밀한 감시에서 벗어나&nbsp;어떻게 풀 것인가. 또한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맞춰서 휼륭한 사람이 되면서도 이러한 욕망을 해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글을 끝까지 읽어온 당신은 어떠한가. 덱스터의 한 대목을 소개시켜주며 긴 글을 끝낸다.<br><br>"자 얘기해봐요. 당신 대체 얼마나 개자식이에요? 거기서 연기가 장난이 아니던데요. 거기서 연기가 장난이 아니던데요 그런 연기는 어디서 배웠나요? 중독자 닷컴?"<br>"이봐요. 제가 왜 거짓말 하겠어요?"<br>"아뇨. 완전 거짓말쟁이면서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죠."<br>"제가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는군요."<br>"거야 모르죠. Bob"<br>"어차피 익명이잖아요."<br>"거기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살아온 것보다 훨씬 더 극악한 삶을 보고 듣고 겪어왔다구요."<br>"그건 동의 못하겠는데요."<br>"오. 그럼 당신은 완전 약에 쩔었다?"<br>"제 말은 당신이 겪은 힘든 상황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에요."<br>"그렇지만 당신이 겪은 일을 제게 말해주겠단 말도 아니죠? 전 그런 욕구는 상상도 못하겠네요. 수천개의 숨겨진 목소리가 속삭이는 거죠. '이게 바로 너야'. 그러면 당신은 압박감과 싸우게 되고 서서히 일어나는 욕구가 파도처럼 당신을 집어삼키면 먹이를 달라고 당신을 쿡쿡 찌르고 얼얼하게 쑤셔되며 괴롭히는 거죠. 하지만 속삭임은 점점 커져만가고 그러다가 '지금이야'라고 소리를 질러요. 그 목소리는 오직 당신만이 들을 수 있고 당신만이 듣길 원하고 당신은 거기에 사로잡혀 있어요. 당신의 그림자에.."<br>"어둠의 동반자(Dark Passenger)"<br>"예... 당신의&nbsp;어둠의 동반자(Dark Passenger)"<br></div></div></div><div style="TEXT-ALIGN: cente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01/94/e0015994_4aed9a444aa64.jpg" width="500" height="31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01/94/e0015994_4aed9a444aa64.jpg');" /></div></div><br/><br/>tag : <a href="/tag/푸코" rel="tag">푸코</a>,&nbsp;<a href="/tag/덱스터" rel="tag">덱스터</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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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1 Nov 2009 04:11:4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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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최문순 의원 홈피에 쓴 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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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id="writeContents">안녕하세요. <br><br>&nbsp;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최문순 의원은 지지하는 한 대학생입니다. 미디어법을 위해 열심히 싸워주시는 모습, 그 일관된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그 자세를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nbsp;미디어법안의 싸움은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민주당을 비롯한 여러 야당들이 모두 한나라당의 논리에 끌려다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미 프레임이 한나라당이 장악한 상태에서 그것만을 반대하는 식의 논리로서는 한나라당을 이길수도 없고 어떤 협상을 받기도 거의 불가능 해보입니다.<br><br>&nbsp;이런 상황에서 그런 프레임을 야당으로 들고오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똑같은 이름의 미디어법안을 하나 더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법처럼 언론 시장의 활성화와 공정함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의 조중동을 공격할 수 있는 법안 말입니다.&nbsp;예를 들어 언론은 오너 일가에서 세습될 수 없도록 4%등 정도로 최고 지분량을 설정해두고 기업이 10% 이상의 지분을 가질 수 없는 등등의 방법 말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방씨 일가의 조선일보와 삼성의 중앙일보 등은 커다란 타격을 받겠죠. 같은 명분으로 조중동의 핵을 건드려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프레임이 언론을 통해 이슈화된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br><br>지금처럼 미디어법안이 한나라당과 정권을 위한 법안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잡혀있는 상황에서 조중동의 핵심을 공격하는 것은 민심으로부터 일단 긍정적인 여론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제시했을 때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강하게 반발할수록 국민들은 이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런 법안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조중동을 공격하는 미디어법안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라당은 조중동을 개혁시킬 수도 없고 법안을 거부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겠죠. <br><br>&nbsp;어찌보면 지금은 그동안 풀지못했던 조중동을 공격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었기 때문이죠.&nbsp;이러한&nbsp;계획이 성공된다면&nbsp;언론들을 지켜낼 수 있는 새로운 협상틀을 얻어내거나 혹은 조중동을 개혁시킬 수 있는&nbsp;본격적인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nbsp;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하시지 못한 일을요.<br><br>&nbsp;날씨가 점점 추워집니다. 정치도 점점 싸늘해지고 민심은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nbsp;지금과 같이 열심히 하셔서 이 차가워진 정국와 민심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nbsp;</span> <!-- 테러 태그 방지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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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Economic&amp;Political</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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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31 Oct 2009 06:26:5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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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국의 지식인 이념지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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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30/94/e0015994_4aeaad2554abc.jpg" width="500" height="503.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30/94/e0015994_4aeaad2554abc.jpg');" /></div><br>싸이월드에서 퍼왔어요. 흥미롭네요. 난 어딜까.</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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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Economic&amp;Political</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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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30 Oct 2009 09:08:5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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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용산의 비극은 어디까지인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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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30/94/e0015994_4aea9d44427a1.jpg" width="500" height="7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30/94/e0015994_4aea9d44427a1.jpg');" /></div>&nbsp;얼마 전 사법부가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시키는 재판을 연이어 벌였다.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판결과 용산 참사에 대한 판결이 그것이다. 특히 용산 참사에 대한 재판은&nbsp;한국의 법이 이 사회의 약자들을 권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함을&nbsp;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결과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인간적인 분노를 느끼며 한국이 과연 민주공화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해주는 사례였다. 법이라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함께 만든 타협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로 치우쳐 진다면 법은 그 존재성을 상실해 버린다. 법은 자신의 존재성을 지키기 위해서 칼같은 공정함을 유지해야 하며 그들의 양심이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이 사회를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그러나 법이 그 존재성을 상실해버릴 때, 더 이상 사법부가 이 사회의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함을 확인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혼란스럽다.<br><br>&nbsp;어찌보면 사법부에게 과잉적인 기대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한국은 이미 민주주의라고 불려지기 어려운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국민 스스로 파시즘과 권위주의의 경계에 있는 정부에게 지지를 하고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법부는 권력에게 엎드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사법부는 연이어서 권력자를 위한 판결을 계속하고 있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신영철 대법관은 삼성 문제, 문국현 판결 등에서 여전히 판결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용산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선의 혹은 진실을 기대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었을지도 모른다.<br><br>&nbsp;결과는 나왔다. 용산의 비극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며 그 종착지는 어디인가. 그 가족들의 비극은 끝이 보이지 않는 현재진행형이고 그들의 한은 그들을 지켜줘야 하는 국가에 의해 더욱더 커지고 있다. 그들의 시신은, 그들의 눈물 맺힌 절규는 경찰과 검찰과 국가에 의해 가로막히고 있다. 아무런 힘이 없는 나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들었다. 만약 용산 참사의 문제를 법원에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했을까.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 본다면 용산 범대위쪽에 대해서도 일부 책임이 있지 않을까.<br><br>&nbsp;용산&nbsp;참사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그것은 정부가 그들을 진압하면서가 아니다.&nbsp;그들은 왜 망루에 올라갔는가. 그들은 재벌들의 공사에 거부하여 삶의 터전을 지키려 했고 재벌들은&nbsp;구청, 경찰등의&nbsp;권력과&nbsp;좋게 말하면 용역업체, 나쁘게 말하면 깡패의 폭력을 규합해 그들을 내쫓으려고 했다.&nbsp;그들에게 있어서 국가의 법은 없었고 그저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힘없는 자들의 설움을 그들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망루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nbsp;힘 없는 자들은 땅에서 쫓겨나 망루로 올라간 것이고&nbsp;망루 아래에서는 경찰과 용역업체들이 그들을 완전히 내쫓기 위해 그들과 대치중이었다. 용역업체와 경찰의 혼합, 폭력과 권력의 혼합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용역과 경찰을 뒤에서 조정하는 재벌이 국내 최고의 기업,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br><br>&nbsp;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생략된채 그들이 올라가서 경찰과 본격적인 저항이 일어난 그 짧은 시간만을 가지고 재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왜 삼성은 사라졌고 왜 용역업체의 이야기는 사라졌는가. 이 이야기는 판결문에서 '사회적 약자'라는 다섯글자로 대치되어 버리면서,&nbsp;그들은 망루로 올라가 국가 질서에 저항한 테러단체로 되어버렸고, 경찰과의 저항과정에서 일어난 경찰들의 사망은 중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용산 참사 유가족측에서 제시된 이야기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경찰과 검찰이라는 권력자들이 피의자이면서 피해자로 탈바꿈해 법원에서 쇼를 했고, 법원은 그 쇼의 주연으로서 해야 할 일을 보여주었다.&nbsp;<br><br>&nbsp;참사를 겪으면서 지도자들을 잃고 정신없었던 과정이었지만 만약 범대위가 삼성과 용역업체에 좀 더 치중을 하였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지금처럼 막나갈 수 있는, 아니 막나가야 하는 권력자에 비해 잃을 것이 많은 가진 자로서의 삼성은 이들과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삼성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권력자들도 그만큼 피할 수 있었던 구멍이 생겨버렸고 그런 점에서 그들이 더 큰 피해를 겪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용산 범대위측의 전략에 대한 아쉬움이 든다. 이번 용산 참사로 인해 나 역시도 많은 충격을 받았고 고민이 들었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사법부가 권력의 편만을 들 때 또 하나의 사법 살인을 행할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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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Economic&amp;Political</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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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30 Oct 2009 08:28:50 GMT</pubDate>
		<dc:creator>Contender</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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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국 사법부가 아무리 막장이라도 이건 아니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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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29/94/e0015994_4ae8ec394cd92.jpg" width="500" height="356.77966101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29/94/e0015994_4ae8ec394cd92.jpg');" /></div>» <b>그치지 않는 ‘용산의 통곡’ </b>‘용산 참사’로 구속기소된 이충연 용산철거민대책위원장이 28일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받자, 이 위원장의 어머니 전재숙씨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오열하고 있다. 고 이상림씨의 부인인 전씨는 “제 아비를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한겨례<br><br><br><br>진실에 눈감은 용산참사 재판<br><br><br>법원이 어제 ‘용산 참사’ 재판에서 농성자 9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피고인들의 주장은 모두 이유 없다고 배척했다. 공판 과정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과 이런저런 논란을 송두리째 외면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이건 재판이 아니다”라는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br><br>1심 재판부의 판결은 그동안의 공판 과정을 스스로 무시한 것이다. 지난 4월 이후 계속된 공판에선 검찰의 공소사실과 전혀 다른 증언이 잇따라 나왔다. 핵심 쟁점인 발화 원인을 두고 검찰은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 불길이 망루 3층 바닥의 인화물질에 번져 불이 났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경찰특공대원들은 ‘불이 날 당시 화염병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농성자들이 인화물질을 뿌렸다는 검찰 발표와 달리, 경찰특공대원은 망루 3층 바닥이 꺼지면서 시너 통이 넘어진 탓이라고 증언했다. 화재 전문가들은 발화 원인이나 발화 지점이 어딘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이런 증언들을 배척했다. 대신, 뚜렷한 근거도 없이 화염병 투척이 화재 원인이라고 ‘추정’했다. 공정한 판단도 아닐뿐더러,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 원칙에도 어긋난다. </p><p>과잉진압 논란에서도 재판부는 한쪽 귀만 열었다. 경찰이 아무런 협상이나 설득 절차도 없이, 위험성에 대한 사전점검조차 하지 않은 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조기 진압을 강행했다는 사실은 경찰 증언에서도 드러났다. 참사를 막으려면 아예 그런 진압을 말았어야 했다는 증언도 여럿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모른 체했다. 그러면서 정당한 공무집행이라는 검찰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런 재판에 승복하긴 어렵다. </p><p>재판 절차의 공정성도 의심을 받는다. 경찰의 과잉진압 및 직권남용 혐의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사기록 3000여 쪽을 공개하라는 법원 명령을 검찰이 태연히 거부하는데도, 재판부는 좀더 적극적인 조처를 취하려 들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방어권 행사를 제한하는 중대한 절차상 흠결을 방치한 셈이다. 재판부가 공판 내내 갈등 조정은커녕 스스로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법원이 일단 그런 의심을 받게 되면 사법 정의나 사법부의 권위는 회복하기 힘들어진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1심 판결을 사법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br></p><p align="justify"></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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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Economic&amp;Political</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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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9 Oct 2009 01:14:12 GMT</pubDate>
		<dc:creator>Contender</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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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어제 쓴 시험 답안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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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경제사를 서술하고 현재의 금융위기와 향후 전망을 분석하라.<br><br>&nbsp;19세기부터 시작된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 시대는 독일이 후발 주자로 뛰어들면서 기존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후 열강들의 갈등은 러일 전쟁과 청일 전쟁을 통한 대리전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1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유럽은 1차 대전에서 전쟁의 끔찍함을 깨닫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그러나&nbsp;각국들에게 평화는 다른 의미였다. 프랑스에게 평화란 독일을 처참히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러시아는 계급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영국, 미국등은 또 다른 의미의 평화를 추구했고 그런 상황에서 유럽 주도하에 베르사유 조약과 미국 주도하의 국제연맹이 탄생했다. 이 두 기구는 대립적인 모습을 나타냈는데 특히 독일 문제에서 그러했다. 더군다나 미국이 국제 연맹을 창설하면서도 가입을 하지 않고 고립주의를 선택하면서 국제연맹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따. 최강국으로서 미국의 고립주의는 결국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었고 그 결과 29년 대공황과 39년 2차대전을 불러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br><br>&nbsp;2차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시스템을 국제법 체제에 따른 재편성을 하는데 IMF와 세계은행의 설립, GATT등이 생겼다. 미국은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최강대국이 되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내세우는 브레튼우즈 체제도 탄생했다. 그러나&nbsp;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면서 다른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하기 위해서는&nbsp;달러를 얻는 무역흑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달러가 너무 유출될 경우 그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환율 조정이 필요한 트레핀의 딜레마가 생겼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일본은 미국과의 무역흑자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고, 이것은 뉴딜 정책부터 시작된 큰 정부의 예산에 베트남전까지 더해져 달러의 금태환이 이뤄질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고 결국 닉슨의 금태환 중지 선언을 통해 브레튼우즈 체제는 막을 내린다.<br><br>&nbsp;70년대 들어 일어난 석유파동은 흔들리는 달러화의 가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용감한 볼커'는 강력한 긴축정책으로 이것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케인스주의를 대체할 시카고 학파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들은 레이건 노믹스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레이건 정부는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복지를 줄였지만 동시에 추진한 감세 정책때문에 그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자 유럽과 일본에게 환율 협상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유럽과 미국은 경기 후퇴를 맞이한다. 유럽은 미테랑을 중심으로 한 유럽통합이 추진되었고 유럽중앙은행과 협력환율제도가 시작된다. 일본은 아시아에 기술 원자재를 판매하는 정책과 내수부양책을&nbsp;추진한다. <br><br>&nbsp;특히 내수부양책은 일본의 부동산 거품을 만들었고 90년대 초반 거품이 붕괴하면서 디플레이션 시대로 진입한다. 일본은 양적 통화완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유동성 함정에 빠져 나오질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이 통일을 하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현실 사회주의는 막을 내린다. 중국 역시 시장경제 체제를 선언하며 죽의 장막을 거두고 유럽은 EU를 창설하고 유러화라는 단일 통화를 만든다.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그 잔류들은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로 들어갔고 이것은 97년 투기세력들의 태국 바트화 공격이 시작되면서 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을 만든다. 이런 시기를 바탕으로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기술투자, 혁신정책등을 업고 안정된 물가, 낮은 실업률, 정부 흑자, 경제 성장을 이루는 New Economy 시대를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94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나 WTO 출범등의 Globalization과 EU, NAFTA, ASEM 등과 같은 지역주의가 동시에 일어난다.<br><br>&nbsp;New Economy는 IT 버블로 이어졌고 그것은 한국이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대미 수출을&nbsp;매우 높은 흑자 구조로 개선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다.&nbsp;그러나 IT 버블이 붕괴하고 9.11 테러가 일어나면서 미국은 심각한 혼란을 겪고 난 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일방주의를 걷는다. 또한 경기 후퇴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초저금리 정책은 부동산 거품을 만들었고 이것은 규제 완화등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겹쳐 탄생한 파생상품과 맞물려 2006년 서브프라임으로 시작된 위기는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되면서 대공황에 버금될만큼 심각해졌다. <br><br>&nbsp;이러한 상황속에서&nbsp;변화를 약속한 오바마 행정부가 탄생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신속한 협조를 얻기 위해 과거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버리고 Reset 외교를 선언한다. 그리고 G6와 UN 사이의 G20 시대가 열리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금융 제도, 경제 불균형, 환경 문제에 대한 논의와 결과물이 나올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과거 선진국들은 G20 국가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며, 신흥국 역시 더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요구하는등의 불안정성을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G20이 빛을 발할수록 UN이라는 국제기구의 무력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br><br>&nbsp;이번 경제위기로 인해 중국이 미국에 대적할 새로운 강자로서 인정받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거대한 인구, 자원, 외환보유액등을 바탕으로 한 높은 잠재력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 민족, 빈부격차, 권위주의적인 정부는 심각한 내재적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경제가 성장할수록 자유주의적인 요구는 높아질텐데 그것을 지금처럼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누를 수 만은 없을 것이다. <br><br>&nbsp;2008년 경제위기는 단순한 금융 사고라기보다는 투자은행과 금융공학을 앞세운 미국의 달러화 중심 시스템이 증권화 관련 금융상품의 부실화와 투자은행의 몰락으로 인해 그 기능이 마비될 수 밖에 없는 내재적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위기가 대공황까지 올 수도 있다는 우려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빠른 경제 회복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각국들의 긴밀한 협조 체제, 달러본위제 아래에서 달러 및 각국들의 통화 양적완화 정책들이 빛을 본 결과이다. 이렇게 통화량이 남발함에도 불구하고 통화 가치가 하락하지 않는 것은 기존의 경제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처럼 보인다. <br><br>&nbsp;굳이 그 현상의 이유를 찾아낸다면 우선 지난시간 과도하게 부풀었던 화폐 시장이 잃어버린 부피를 찾으려는 관성 작용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용만이 떠받쳐주는 지금의 화폐제도에서 화폐 시장의 가장 강력한 주체들인 정부들이 달러 및 다른 통화들의 불안정성을 알면서도 넘어가주면서, 즉 상부 구조에서 그것을 유지해주면서 통화량 남발에 대한 대가가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인플레이션도 상쇄받고 있다. 그러나 자산 가격은 다시 치솟고 있으며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2008년부터 시작된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은 여전히 심각하다. 아무런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통화량 남발로 얻은 대가는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이며 나아가 경제적 주기 - 슘페터 식대로 표현하자면 콘트라티에프-가 짧아지거나 심각하게&nbsp;손상되진 않을까.<br><br>&nbsp;이런 상황에서 G20은 경기 후퇴를 각오하면서, 위기 때처럼 협조적으로 함께 '출구전략'이라는 카르텔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써온 통화정책은 가능하다면 정부들은 실행시키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수부양책으로 이어지고 결국 정부의 지지율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구전략은 이야기가 다르다. 금융시장에서의 긴축이 발생할 것이고 그렇게 일어난 경기 후퇴는 정부의 지지율을 깎아먹기 때문에 국민들의 표를 생각해서는 쉽지가 않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출구전략을 하고 있는데 어느 한 국가에서 그 카르텔을 깬다면 더 큰 이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개 국가가 모두 그 카르텔을 지킬 수 있을지는&nbsp;의심스럽다.<br><br>&nbsp;만약 세계 정부들이 출구 전략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실패한다며 이것은 정부부채, 자산거품과 맞물려 화폐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고&nbsp;하이퍼 인플레이션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 도 있다. 1세기 전&nbsp;유럽은 전쟁의 위기를 맞이하면서 헤이그 평화회의 등을 개최하면서 평화를 외치지만 결국 1차 대전을 막을 수 없었다. 1차 대전 이후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를 시도하지만&nbsp;각국들의 이기심으로 2차 대전은 결국 일어났다. 이런 반복이 또 다시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과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nbs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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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Economic&amp;Political</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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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6 Oct 2009 15:52:1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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