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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 Tribute to Life's Trivial Pleasure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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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8 Jan 2009 15:39:3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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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 Tribute to Life's Trivial Pleasure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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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Jazz Age Stories], F. Scott Fitzgerald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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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1/09/88/a0006888_49661cce45f1a.jpg" width="500" height="5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1/09/88/a0006888_49661cce45f1a.jpg');" /></div><!--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 mso-fareast-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재즈 시대’The Jazz Age는 1차 대전 종전 직후에 시작해서 미국 증시 사상 최대의 호황을 타고 흘러가 1929년 주식 대폭락과 함께 꿈처럼 사라진 시대다. 금융 자산으로 유한계급이 폭증한 이 시기는, 태생적으로 금욕주의와 실용성을 강조해온 미국 사회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시각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호사스러운 시기였다. 재즈 시대는 로라 멀비의 표현대로 “세계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대중문화의 시각적 아이콘들로 그득하다. 하얀 플란넬 양복, 축음기를 타고 흐르는 재즈 음악, 로맨틱한 아르데코의 유행,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전혀 새로운 여인의 모습. 머리에 착 달라붙는 짧은 단발머리, 팔다리가 드러나는 헐렁한 미니드레스 차림에 진주 목걸이를 걸친 신여성의 탄생. 무성영화의 스타 루이즈 브룩스에서 시작해 그레타 가르보, 나아가 [위대한 갯츠비]의 데이지로 대표되는 이 새로운 젊은 여성들을 사람들은 “플래퍼”라고 불렀다. 전형적인 플래퍼는 조금은 당돌하고 조금은 순진하며, 무엇보다 인습적인 모든 것들을 경멸하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모던’ 여성이었다. 진한 화장을 하고 폭음을 하고 줄담배를 피우면서도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한 매력을 품은 그녀들은, 어지러우리만큼 급속하게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하고 있던 시대상의 소산이었다. 단순히 패션과 도덕관념의 변화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재즈 시대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하나의 현상이었던 셈이다. 무도회장에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유연애를 즐기며 술과 담배와 장미의 나날들을 보내는 여인 플래퍼는 영원한 젊음의 컬트였다. 과거의 인습과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의 틀을 찾지 못한 세대는 전례 없는 기술의 발전과 물적 풍요를 극단적인 카르페 디엠의 정서로 불태웠던 셈이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그리고 플래퍼가 표상하는 현란한 시대정신을 포착해 ‘재즈 시대’로 명명한 작가가 바로 F. 스콧 핏제럴드였다. 핸섬한 수다쟁이였던 프린스턴 졸업생 핏제럴드는, 그 자신 당대 유명한 플래퍼였던 18세의 남부 처녀 젤다 세이어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른다. 바야흐로 파격과 방종, 정신병과 중독으로 점철된 두 사람의 무모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권위와 경건에 대한 조롱과 무절제한 쾌락의 탐닉은 명성과 부를 함께 누리던 젊은 작가의 삶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몰고 갔다. 핏제럴드 부부는 방종한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했다. 공공장소의 분수대에서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거나, 택시의 후드에 타고 달리기도 하고, 심지어 연극의 슬픈 대목에서 큰 소리로 깔깔 웃고 우스운 대목에서 엉엉 우는 기괴한 짓마저 하고 다녔다. 젊은이들의 자유연애와 파티들을 그려낸 핏제럴드의 책들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고 부부는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유명해져서, 마치 왕족처럼 대우받았다. 하지만 젤다가 원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 핏제럴드는 무수한 단편들을 써서 부지런히 잡지에 기고해야 했다. 재즈 시대가 끝나고 공황이 닥치면서, 화려한 나날은 가고 두 사람은 중독과 정신병, 막대한 부채 속에 허덕이며 미국 사회와 함께 과소비와 방종의 대가를 무섭게 치러야 했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핏제럴드를 사로잡은 플래퍼의 매혹은 돈, 혹은 부에 대한 애증이 뒤섞인 시니컬하면서도 매료되는 특유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핏제럴드의 문학과 당대의 키워드였던 돈은 마치 샴 쌍동이처럼 얽혀 있었다. 글을 써서 젊은 나이에 엄청난 대성공을 거두고도, 그는 청년기부터 죽을 때까지 절박하게 돈을 벌기 위해서 글을 써야 했던 작가다. [재즈 시대 이야기들]에 소개된 단편들을 비롯해 많은 핏제럴드의 작품들은, 문학에 대한 순수한 꿈보다는 쉽게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에서 쓴 글들이기도 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핏제럴드의 작가 경력 자체가 시작부터 돈이 넘쳐나는 재즈 시대의 환락, 플래퍼에 대한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핏제럴드가 작가로 성공하는 걸 기다리지 못한 젤다가 파혼을 선언했을 때, 세 번째로 고쳐 쓴 [낙원의 이편]이 간행되어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 데뷔작이 출간된 지 일 주일 만에 결혼했다. 글쓰기는 핏제럴드에게 곧 돈과 사치, 생계를 뜻하는 노동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자기 입으로 [낙타의 엉덩이] 같은 작품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시계를 사려는 명백한 목적”으로 썼다고 실토하기까지 했을 정도인데, 하지만 이 말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참으로 재즈 시대다운 창작의 동기가 아닌가.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하지만 짧은 순간 엄청나게 넘쳐난 돈과 모더니즘의 유혹이 만들어낸 이 시대는 저항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핏제럴드는 돈을 위해서 돈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그 치명적인 돈의 아름다움을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탐욕과 환멸, 타락을 시인하면서도 이 전무후무한 과잉의 시대에만 가능했던 사치의 일장춘몽, 젊음과 쾌락에 덧씌워진 우아하고 세련된 스타일, 그 자기 파괴적인 매혹에서, 중산층의 무료한 일상을 뛰어넘는 어떤 판타지, 일종의 미학적 시적 황홀경을 읽어낸 것이다. 핏제럴드의 이야기 속에서 그 판타지는 언제나 플래퍼, 여성의 매혹으로 화해 드러난다. [젤리빈]의 무료한 실존을 뒤흔드는 낸시 라마, 보잘 것 없는 서점 직원 멀린 그레인저의 평생을 지배하는 판타지가 되는 적갈색 머리칼의 마녀 캐롤라인, 하루하루가 신나서 결혼은 생각도 없는 [낙타의 엉덩이]의 여주인공 베티 메딜, 그리고 [릿츠 호텔만한 다이아몬드]의 키스민처럼. 재즈의 시대에 플래퍼라 불리웠던 이 처녀들은, 그냥 남들처럼 정주행하든 벤저민 버튼처럼 역주행하든 어차피 다 쓸쓸하고 피로한 삶의 여정에, 덧없이 스러질 꿈이라도 찰나의 열정이라도 태울 수 있게 해줄, 그리하여 꿈꾸게 하고 환멸하게 하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줄, 개츠비의 초록 불빛인 셈이다. 핏제럴드에게는 그게 문학이었고 그게 시였고 그게 꿈이 아니었을까.</span> <br><br><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당혹스러울 정도로 독창적인 - 그리고 품질도 들쭉날쭉한 - 이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즐기되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고전이라든가 거장이라든가 정전이라든가,&nbsp;후대가 핏제럴드의 문학에 붙인 이런 저런 권위의 딱지들을 떼어버리고 다시 보면, 이 가볍고 팔랑거리면서도 미묘하게&nbsp;축축한 환멸과 슬픔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은 우리 눈앞에 이제는 사라진 한 시대의 풍경들을 쓱쓱, 하지만 선명하게 스케치해 보여주고 있더라, 심판도 비난도 해설도 덧붙이지 않고.&nbsp;바로 재즈 시대의 이야기들을.&nbsp;&nbsp;</span></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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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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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8 Jan 2009 15:38:39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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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삶을 바쳐 시를 짓다: 실비아 플라스의 [벨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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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strong><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901/03/88/a0006888_495ed0ef5b569.jpg" width="251" height="36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901/03/88/a0006888_495ed0ef5b569.jpg');" /></div>실비아 플라스, 삶을 바쳐 시를 짓다</strong><br><br>세상에는 어쩌면 두 종류의 작가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언어로 창조하는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삶 사이에 안전망을 단단히 칠 줄 아는 작가와, 삶과 문학의 경계를 한없이 흐리며 삶의 경험을 끝없이 착취해 글을 쓰는 작가, 아니 삶 자체로 문학을 짓는 작가. 기형도, 아르뛰르 랭보, 혹은 그렇다, 바로 실비아 플라스 그녀 같은. 1932년 태어나 1963년 세상을 떠난 실비아 플라스의 삶 자체가, 어느 기자의 표현을 빌면 소위 대중을 매혹하는 “고급 연속극의 아우라”를 띠고 있다. 세계적인 땅벌 권위자였던 생물학자 아버지의 때 이른 죽음, 명문 스미스 대학을 최우등생으로 졸업, 우울증과 자살기도, 풀브라이트 장학생, 천재 영국 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 그리고 전쟁 같은 불화 끝에 이혼, 기적 같은 창작력으로 시작(詩作)에 몰두, 하지만 결국 다시 찾아온 우울증으로 두 아이를 옆방 침대에 놓아둔 채 오븐에 머리를 처박고 가스를 틀어 겨우 서른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마침내 자살. 거짓말처럼 드라마틱한 그녀의 삶은 그래서 그녀의 글들만큼이나 신화적으로 유명해졌고 대중적으로 소비되었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실제로 그녀가 남긴 작품들을 보아도 실비아 플라스는 이런 삶의 경험들을 게걸스럽게 수집해 문학으로 다듬는 데 목숨을 지탱하는 최후의 에너지까지 쏟아 부은 느낌을 준다. 아니, 심지어 독자로 하여금 문학을 완성하기 위해 극적인 경험을 수집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할 정도다. 그 정도로 극단적인 자전적 작가였고, 결벽증처럼 집요하게 자신의 삶을 문학의 소재로 파헤쳤다. 그 결과 유명한 일기는 물론이고, 로버트 로웰의 고백시 전통을 계승했다는 평을 듣는 시들도, 나아가 심지어 유일한 소설인 [벨 자]까지도 속속들이 자서전적인 설정과 감정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의 삶이란 오로지 그녀 자신의 언어와 의식을 통해 투영된 상(像)이라는 점이다. 문학적 페르소나는, 방탕한 유혹녀가 되었다가, 순진한 소녀가 되었다가, 우등생이 되었다가, 파티걸이 되었다가, 타인과 외부 세계를 향한 폭력성을 보여주다가, 내면적 자기 파괴 충동을 보이다가, 끊어질 듯 팽팽한 신경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같기도 한, 그야말로 무수한 자아를 마치 옷가지처럼 바꿔 입어 가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유동적인 자아상이다. 조울증의 증후인지, 일기 속에서마저 수많은 가면들을 바꿔 쓰듯 기묘하게 작위적인 자아 인식을 드러내기 일쑤다. 그렇지만 이기심과 허영까지를 포괄한 불안한 자아의 유동성을 이처럼 실감 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작가로서 그녀의 찬탄할 만한 정직함 덕분이다. 적어도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정직하다.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아에게도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독설과 냉소를 던질 줄 안다. 치졸한 생활인의 욕망도 드러나고, 코를 파고 질투하고 허영에 들뜨는 인간성의 약하고 추한 측면들도 스스로 가감 없이 인정하고 기록한다. 나아가 병든 의식으로 자아의 기틀이 붕괴하는 순간에도, 그 의식의 병증이 움직이는 흐름을 기록해내는 힘을 발휘한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남편인 테드 휴즈가 일기의 서언에서 쓴 표현을 빌자면, 그녀의 삶/문학은 마치 무수한 거짓 가면들로 점철된 삶 속에서 침묵하던 참된 자아가 느닷없이 백열처럼 타오르며 언어를 찾아 말하는, ‘눈부신 사건’처럼 느껴진다.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적이고 치졸하고 이기적이고 비루한 생활의 흔적들을 모조리 감싸, 순연한 신화로 승화시키는 것은 바로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 존재의 욕망이다. 플라스의 삶/문학은 바로 “시”를 쓰고 싶다는 단 한 가지 갈망으로 하얗게 연소한다. 시로 자아를 표현하고, 자아를 완성하고, 명성과 불멸을 성취하고 싶다는 절대적인 욕망. 이 욕망 이외의 모든 것이, 생활과 사랑과 행복마저도,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이 욕망의 절대성과 숭고함이 실비아 플라스를 범속한 인간들과 영원히 갈라놓았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때문에 바로 이 절대적 욕망의 좌절은, 욕망이 존재의 본성과 직결된 만큼 곧장 죽음의 충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또한 실비아 플라스가 하필이면 바로 그 시대에 태어난 ‘여성’이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여성주의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 보수적인 가정 담론이 미국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1950년대를 살았던 실비아 플라스는 시인으로서 독립적인 자아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의 규준과 걸맞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끊임없이 절망했다. 그리고 멋진 남자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갈망과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당대의 미국 사회 풍토에서는 양립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하지만 양립 불가능한 욕망들 어느 쪽도 포기하지 못하고, 여성으로서도 시인으로서도 끝내 타협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스가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드러낸 감정은 지독한 애증이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속속들이 내면화했던 증후가 작품 세계 곳곳에서 드러난다. 내면화된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시인으로서의 본성이 자아표현을 하려는 참된 자아의 싸움은 불가피한 자기 파괴로 치달은 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플라스를 읽는 시각은, 그녀를 순교자나 희생자로 신화화하지 않아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nbsp;<br></span></span><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nbsp;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절망과 고독은 저항하는 자의 낙인 [벨 자]</span></span><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nbsp; <o:p></o:p></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 mso-fareast-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벨 자]는 실비아 플라스가 남긴 유일한 소설이다. 자살 한 달 전인 1963년 1월에 플라스는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벨 자]를 처음 출간했다. 이 소설 역시 삶을 기록하려는 플라스 문학의 자서전적 경향에서 탈피하지 않는다. [벨 자]는 ‘로망 아 클레프(Roman a cléf)’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프랑스어로 ‘단서가 있는 문학’이라는 뜻의 이 장르는 실제 현실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다루고 실존인물들을 가명을 써서 등장시키는 픽션과 넌픽션의 중간 장르다. 소설의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가 우울증과 자살충동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이, 뉴욕의 [마드모아젤] 지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하버드 서머스쿨에서 프랭크 오코너의 작문강좌를 수강하는 데 실패한 후 극심한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가 수면제 자살을 시도한 바 있는 실비아 플라스 자신의 삶의 궤적과 꼭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버디 윌라드와 스키장 사고는 고등학교 시절의 연인인 딕과 함께 사라낙에 가서 다리를 부러뜨렸던 사건의 재현으로 여겨지며, 후원자인 작가 필로메나 기니는 올리브 히긴스 프라우티와 병치된다. 친절한 여의사 닥터 놀란은 정신과 주치의로서 오랜 인연을 맺었던 닥터 루스 보이셔와 겹친다. 그리고 [벨 자]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에서 소실되어 있는 2년의 기록, 즉 최초의 우울증 발병과 자살 시도 이후 전기충격과 인슐린 요법으로 회복하는 기간의 내용을 보충하고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물론 소설의 가공을 거쳤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실존인물이 뒤섞여 있기도 하고, 순전한 창작으로 가필한 부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정신병 병동과 치료 과정에는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기를 다룬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와 [벨 자]의 몇 가지 핵심적 유사점은 - 사실관계 자체는 물론 주된 관심사와 상징, 정서의 유사점에서도 - 의미심장하다. 예컨대 [마드모아젤]에서 인턴 생활을 하던 시기에 유일하다시피 남아 있는 일기는, 당시 소련에 원자기술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로젠버그 부부의 전기처형에 대한 미국 대중의 심드렁한 도덕적 무감에 대한 플라스의 경악과 공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벨 자]에서도, 주인공인 에스더 그린우드가 사회의 주된 정서, 주된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물감과 혐오감을 느끼는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로젠버그 부부 사건은, 미국 역사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합리적 공포감이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과 법치의 영역을 넘어선 마녀사냥으로 번진 경우라는 평가를 받는다. 로젠버그 부부의 ‘전기 처형’은, 사회의 지배적 규준과 다른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상징적 장치로서 에스더 그린우드가 훗날 겪게 되는 - 그리고 실제로 당시 정신병 치료에 광범하게 도입되었던 - 전기 충격 요법과 이어진다. 차마 “다른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획일적 사회의 폭압이, 그 어떤 인습의 구속도 받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되고 싶었던 에스더 그린우드의 자유로운 영혼을 유리 뚜껑(벨 자)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처럼 소설을 시작하는 로젠버그 부부의 언급은 에스더 그린우드의 자기파괴 충동을, 매카시즘이 횡행하고 극도의 보수적 가정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던 1950년대 미국이라는 현실적 맥락에 자리 잡게 한다. 타자에 대한 극도의 불관용이 집단 광기에 준하는 비합리로 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기다. 절망의 깊이는 억압의 중압에 비례하는 법이니, 우리는 실비아 플라스의 문학을 통해 한 인간을 넘어 시대를 읽을 수 있고 또 읽어야 한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 mso-fareast-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벨 자]에 드러나는 실비아 플라스의 여성주의도 이 같은 맥락에서 조명해야 할 터이다. 순결과 여성의 몸에 대한 에스더 그린우드의 혼란된 태도는 의미심장하다. 특히 모성은 여성을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동물적 종족 번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굴레로서, 공포의 대상으로 제시되는 듯하다. 시인의 재능을 가진 딸에게 타자와 속기를 배워 비서가 되기를 원하는 어머니나 완벽한 중산층 주부인 버디 윌러드의 어머니 역시 체제에 길들여진 딱한 군상일 뿐 에스더의 역할 모델이 되어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면, 결국 에스더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모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몰이해와 남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사회의 체제적 이기심이다. 그녀는 성(性)의 본질 그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참된 소통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성적 관계의 공허함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폭압적 불관용으로, 안전한 범주 속에 가둬 길들이려고 하는 세계 속에서, 에스더 그린우드의 시성(詩性)은 그 자체가 저항이 된다. 에스더 그린우드가 빠져 들어가는 절망과 환멸의 병증은 그 자체가 안온하게 체제에 안주하지 못하고 영원히 꿈꾸며 저항하는 자의 낙인으로 읽힌다. </span></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 mso-ascii-font-family: 한컴바탕; mso-hansi-font-family: 한컴바탕"><span style="FONT-FAMILY: '돋움','Dotum'">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 에스더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끝없이 소통의 시도를 하지만, 계속해서 낙담한다. 비인간적인 치료의 과정 속에서도 파멸하지 않고 버텨낸다. 이 소설에서 에스더 그린우드가 퇴원하고 세상에 적응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엠마와 달리 - 그리고 플라스와 달리 - 그녀가 끝끝내 살아남았고, 살아남아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에스더는 절망과 고독의 한가운데서 죽음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려 투쟁하며, 그 투쟁은 영웅적이다. 플라스의 자살이라는 종지부로, 인간답게 실존하기 위한 부단한 투쟁의 가치까지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다. [벨 자]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실비아 플라스의 삶/문학을 오로지 죽음의 무도로만 보지 않고, 삶에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끝까지 부여하려 했던 한 시인의 치열한 실존의 꿈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어준다.</span> </span></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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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3 Jan 2009 02:44:37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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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픽션보다 더 이상한, [다크 나이트]와 조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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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6/88/a0006888_48a6dccc71c6f.jpg" width="229" height="32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6/88/a0006888_48a6dccc71c6f.jpg');" align="left" />[다크 나이트]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는데,&nbsp;그 순간 덮치는 첫번째 정서는 연민이었다. 이 영화, 이 역할, 이 연기가 생애 최후의 경험이었다니, 저 이미지가 그에게&nbsp;결정적인 기억으로 박제되다다니, 히스가 불쌍하고 불쌍해서였다.&nbsp;저런 역할, 저런 캐릭터는 그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다. 이 영화에서 조커는 악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nbsp;심지어 사람 같지도&nbsp;않고, 뭔가&nbsp;끝모를 심연, 까마득한 허공으로 통하는 블랙홀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사람에게, 저런 역할을 시켜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 조커는--그리고 히스 레저의 죽음은--&nbsp;[다크 나이트]를&nbsp;완성하는&nbsp;최후의&nbsp;퍼즐 조각이 분명하다.&nbsp;조커는 [다크 나이트]를 완성시킨다. &nbsp;<br><br>경찰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바람을 맞는, 간호사 옷차림으로 교태마저 흘리며&nbsp;천진하도록 입맛을 짭짭 다시며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던,&nbsp;백주대낮에도&nbsp;농축된 어둠을 몰고 다니는&nbsp;듯한 그 무거운 뒷모습에,&nbsp;추락하면서도 깔깔 웃어제끼던, 거꾸로 매달린 채로 끝까지&nbsp;배트맨을 유혹하길 포기하지 않던,&nbsp;[다크 나이트]의 조커는&nbsp;소름끼치게 실감나는 악마의 현현이다.&nbsp;하지만 이 악마는 성경적 근원조차 없다. 성경의&nbsp;사탄은 신에게서 기원한다. 하지만 조커의 뿌리는 픽션 그 자체일 뿐이다.&nbsp;그런 점에서 조커의 악은 기독교를 포함한 기존의 윤리 체제나 도상학(혹은 그 역상)이 아니라, 철저히&nbsp;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상상력의 유희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적이다. <br><br>따라서 조커가 '광대'요, 일종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라는 건 주목할 만하다. 그의 악행은 행위예술이다. 조커는 스스로 기원을 만들어내고 유동적이고 철저히 허구적인 정체성을 끊임없이 창출해낸다.&nbsp;조커의 기원은 무수한 다른 '이야기'들, 픽션들로 구성된다.&nbsp;말하자면 조커에 대해서 우리는&nbsp;끝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지문도, 이름도 없고, 옷마저 커스텀 메이드인 것"이다. 조커의 정체성은 조커의 행위들 그 자체로 정의된다. 그 스스로&nbsp;동기는 돈이 아니라&nbsp;메시지라고 말한다. 고담은 품격 있는 악인을 가질 가치가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그게 무슨 뜻일까. 소방차에 불을&nbsp;지르고 경찰서를 폭파시키고 병원을 파괴하는 일련의 테러는, 그러니까&nbsp;인간조건에 대한&nbsp;'메시지'를 전하는 전위예술이란다.&nbsp;<br><br>그러고 보면 조커가 공격하는&nbsp;것은 질서일 뿐 아니라,&nbsp;기존의 윤리와 제도가 내포하는 직설적인 재현의 방식, 혹은 그에 대한 믿음&nbsp;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 어떤 윤리적 금제도&nbsp;없는&nbsp;상상력의 유혹은, 순식간에 문명을&nbsp;붕괴시키고 혼돈을&nbsp;가져온다. 하지만 이 혼돈은 잘 들여다 보면 고담의 속속들이 썩은&nbsp;속내가 최후의 위선적 허물을 벗은 것이나 다름없다. 부패한 경찰, 마피아의 창궐, 어차피 병원이 안전을 담보하지도,&nbsp;법제도나 경찰이 정의를 재현하지 못하게 된 것이 고담의 현실이다. 대의민주주의와 법치제도라는 현대 서구 문명의 기반이 기표와 기의의 일치라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면, 조커는&nbsp;이미 그런 전제가 일종의 위선적&nbsp;겉치레에 불과해진 포스트모던 고담의 현실을 폭로하는 기폭장치인 셈이다.&nbsp;조커의 시각에서 볼 때, 직설, 혹은 직설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은&nbsp;거짓이다.&nbsp;이 세계에 유일한 진실은 은유와 상징과 허구다. 바로 이 때문에 조커는 하비 덴트를 타락시켜야 한다. 하비 덴트는 투명한 재현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투명한 기표가 되고자&nbsp;하는, 동키호테이자 궁극의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투페이스를 찾아내는 건 조커의 사명이 될 수밖에 없다. 조커가 전파하는 건 '악'으로서의 '악'이 아니라, 어떤 뒤틀린 형태의, 심오한&nbsp;진실인 셈이다. 자의적으로 설정된 모든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조커의 무정부주의의 본질이다. 조커의 메시지 속에서 의사는 악한이 되고, 광대는 인질이다.&nbsp;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하게&nbsp;'공정한'&nbsp;관계는 무작위성 뿐이고. 따라서 타락한 하비 덴트가 인과관계에 대한 모든 믿음을 끊어버리고 '무작위성' 그 자체인 우연의 전도사가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바로 이 때문에, 조커는 배트맨을 사랑한다. 배트맨은 조커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상징과 허구만이 진실을 투영할 수 있는 타락한 세계의 또 다른&nbsp;증거이기 때문이다.&nbsp;심층의 의미를 지닌, 표리부동하고 복잡한, 현실의 입체적이고 예술적인 재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오로지 배트맨 만이 조커의 재현 방식을 꿰뚫어보고, 바로 이 때문에 조커는 배트맨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br><br>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nbsp;[메멘토]의 관심사로 다시 돌아간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존재이지만, 그 꾸며낸 '이야기'가 없다면 현재를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메멘토]는 복원된 역사에 대한 깊은 회의로 가득한 영화였으나, 아무리 허구일지언정 역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떤 문명도 그 어떤 행위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오히려 허구를 궁극적으로 상찬했다. 조커도 배트맨도 하비 덴트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나는 하비 덴트를 믿는다"라는 배트맨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조커와 배트맨을 가르는 지점이니까. 배트맨 역시 이중성이나 표리부동성이 끼어들지 않은 투명한 선/정의/이성/합리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존재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순수의 상태를 지향하고 한없이 동경함으로써 현재의 행동을 결정한다. 말하자면 배트맨의 픽션은 조커와 달리 근원과 지향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레이첼 도스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 그 근원과 지향점 역시 잔인할 정도로 허무한 픽션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조커가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려 하는 만큼 배트맨이&nbsp;그를 사랑하고 지키려 하는 것도&nbsp;당연하다. 그리하여 배트맨을 향한 조커의 욕망, 하비 덴트를 향한 배트맨의 욕망, 그리고 하비 덴트가 레이첼 도스를 사랑하는 가장 컨벤셔널한 욕망은 기묘한 애정의 트라이앵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애정의 트라이앵글에는 픽션과 진실과 정의 혹은 윤리의 문제가 기괴하게 얽혀 있다. [다크 나이트]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기묘하게 섞여 있는 영화인데, 진실과 재현의 관계에 대해 비관적인 만큼 선택과 믿음의 중요성을 낙관한다. 블럭버스터에서 선악의 문제를 이만큼의 성찰로 끌어올린 건, 분명 엄청난 성취다. [다크 나이트]는 너무나 여러 층위에서 놀라운 영화다. <br><br>*<br><br><img class="image_righ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9/88/a0006888_48a9bd0d79750.jpg" width="229" height="28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9/88/a0006888_48a9bd0d79750.jpg');" align="right" />하지만, 또 다른 영화 이야기를 해 보자. 뜬금없이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라는 영화로 돌아간다.&nbsp;평범하고 외롭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해롤드 크릭이라는 한&nbsp;회계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삶이 한 여류작가에 의해 씌어지는 픽션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된다.&nbsp;다가오는 부당한 죽음에 맞서 작가/신에게 항의하려 찾아간 그는 자신의 죽음이 픽션을 위대한 걸작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nbsp;작품 속의 인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익숙한&nbsp;여류작가는 어느날&nbsp;진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nbsp;등장인물에 당황한다. 두 사람은 모두 선택의 기로에&nbsp;서게 되는 것이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nbsp;"끝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엔딩 때문에 걸작의 반열에 들지 못했지만, 나는 그 엔딩을 사랑한다.&nbsp;등장인물은 소설이 의미있는 완결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자기가 죽는 것 뿐이라는 걸 깨닫고 하찮은 삶을 예술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nbsp;작가는, 등장인물을 사람으로서 사랑하게 되면서,&nbsp;진부하고 평범한 그의 일상적 행복을 위해,&nbsp;역사상 최고의 문학적 걸작을 포기한다.&nbsp;아무리 위대한 픽션이라도 한 사람의 진부한 삶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거다. 히스 레저의 조커를 보면서, 그의&nbsp;연기와 그의 죽음이 이 영화를 완성시켰다는 생각을 하지&nbsp;않을 수 없었다. 아니, 물론, 설마 영화 때문에 죽음을 맞기야 했겠나. 하지만 생애의 단 한 순간이라도, 저런 역할, 저런 존재에 끔찍하게 공감하고 동일시해야 했던 그의 경험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집중과 공감&nbsp;덕분에 이 영화가 둘러쓰게 된 이 귀기 어린 아우라를&nbsp;생각하면,&nbsp;난 자꾸 해롤드 크릭의 운명을 떠올리게 되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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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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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8 Aug 2008 18:19:57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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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귀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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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8/06/88/a0006888_489870a1d28eb.png" width="500" height="327.9386712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8/06/88/a0006888_489870a1d28eb.png');" /></div>[아이언맨]을 촬영하고 있던 2007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나오미 왓츠와 함께 시각효과상을 시상한다. 턱시도를 차려입고 슬쩍 투스텝을 추며 단상으로 걸어나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주얼 이펙트는 우리로 하여금 외계인들을 보게 해주고, 다른 우주들을 보여주며, 슬로모션으로 도시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90년대 중반 저의 어느 평범한 하룻밤이었지요"라고. 말하자면 그의 과거는 이제 공식적인 농담 거리가 되었다.&nbsp;[아이언맨]의 개봉과 함께 이어진 마라톤 블럭버스터 홍보 캠페인에서 그의 과거에 대한 농담은&nbsp;마를 줄 모르는 유머의 샘이 되었다.&nbsp;그리고 의외의 대히트작이 된 [아이언맨]은 배우로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퍼소나를 슬픈 망명천재 찰리 채플린에서&nbsp;유쾌하고 섹시한 중년의 히어로&nbsp;에롤 플린으로 바꾸어 주었다. 왠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귀환에는, 어딘가 짜릿한 데가 있다. <br><br>*&nbsp;<br><br>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분명히 기억한다, 아니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소녀들이 열광했던 [마네킨]의 앤드루 매카시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회색 도시Less Than Zero]에서 풍력발전소의 풍차가 돌아가는 사막의 오픈카에서 친구의 어깨에 까만 고수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마약 중독으로 죽어가는 청년 줄리언으로 난 그를 처음 봤다.&nbsp;아니, 이런저런 다른 영화들을 먼저 봤을지 몰라도, 내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젊은 시절은 [회색 도시]로 기억된다. 브레이크 없이&nbsp;파국으로 치닫는 중독의 젊음을 소름끼치게 훌륭하게 연기했다고, 헐리웃에서는 동세대 최고의 유망주로 그를 추켜세웠다. [채플린]이 터졌다.&nbsp;그러나 중독의 청춘은 픽션의 경계를 넘어&nbsp;그의 삶이 되었고 어쩐지 슬픈 천재로 그는 잊혀지는 듯했다. <br><br>되돌이켜 보면 '중독'은 80년대, 90년대 영미권 젊은 작가들의 키워드였다.&nbsp;[회색 도시]의 작가인 브렛 이스턴 엘리스는 소위 X-세대의 대표주자로,&nbsp;마이클 제이 폭스가 등장하는 [Bright Lights Big City](1983)를 쓴 제이&nbsp;매키너니와 함께 '코카인 문학'이라는 서브 장르를&nbsp;만들었다. 그런가 하면&nbsp;영국에서는 마틴 에이미스가&nbsp;중독을 주제로 [Money](1984)를 써서 일약 영국문단의 원더보이로 등극했다.&nbsp;90년대로 들어오면 중독은 그런지와 만난다. 커트 코베인이&nbsp;젊은 문화의 비주얼 아이콘으로 등극하고, 스코틀랜드 작가 어빈 웰쉬의 [트레인스포팅](1993)이&nbsp;새로운 중독의 청춘코드를 장악한다.&nbsp;리버 피닉스가 바이퍼 룸에서 사망했고, 1995년에는 짐 캐롤의 [바스켓볼 다이어리]가 레오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촬영된다. 그리고 1996년의&nbsp;영화 [트레인스포팅]이 있었다.&nbsp;말하자면 당시의 청춘스타들은 마약에 대한 영화를 찍었거나, 마약중독자였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nbsp;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중독의 청춘 코드도 낡은 것이 되어갔다. 물론&nbsp;요즘도 마약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nbsp;재활시설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보수주의가 휩쓸던 8,90년대의 젊음을&nbsp;문화적 공허감과 자기파괴본능으로&nbsp;규정한, 그런&nbsp;강렬한 세대 정서가 더 이상 아니다. <br><br>그런데 소위 자신이 "마약 오남용의 포스터 보이"였다고 말하고 다니는 요즘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보면, 어쩐지, 터널을 뚫고 나온 이&nbsp;X-세대 코카인 문화의 생존자 같다는&nbsp;생각이 들어 왠지 모를 애착이 가는 거다.&nbsp;그는 스스로 자신의 중독에 대해 '시대'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작은 70년대의 히피문화부터다.&nbsp;그가 처음 마리화나를 피운 건 8살 때라고 한다. 히피였던 아버지한테 건네받았고,&nbsp;자기는 마리화나가 물이나 빵처럼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했다고&nbsp;한다. 70년대 히피 문화가 찰리 쉰과 같은 브랫팩과 어울리면서&nbsp;X-세대의 코카인 중독으로 바뀐 것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중독 역시 일종의&nbsp;퍼블릭 아이콘이 됐다.&nbsp;마약을 한 헐리웃 배우가 그 뿐이겠느냐마는, 워낙에 그의 중독이 요란벅적떠들썩했던 건 사실이다. 8, 90년대를 거쳐 거의 20년의 세월을&nbsp;'동세대 최고의&nbsp;불운한 연기천재'와 '동세대 최고의 못말리는 마약중독자'라는 타이틀을 바꿔가며 매스미디어를 오르락내리락하던 그는 2001년 가장 극적인 사태를 만들어낸다. 시들시들 죽어가던 [앨리 맥빌] 시리즈의&nbsp;구세주 래리 폴 역할로 당당하게 재기해 엄청난 인기 속에 골든글로브상을 받자마자 곧장 또&nbsp;마약소지죄로&nbsp;투옥된 것이다.&nbsp;커리어 사상 가장 정신 멀쩡한 인물을 연기하다가 기가 막힌 중독 사건으로 덜컥 투옥된 셈이다. 아마 허구의 캐릭터 앨리 맥빌이야말로&nbsp;그의 중독 때문에 가장 큰 희생을 치렀을 것이다. 인생 자체가 달라졌으니까.&nbsp;이제 그는&nbsp;더 이상 젊지도 않았고, 중독을 쿨하게 받쳐주던 문화도 사라지고 없었다. 중독의 세대는 죽었거나, 잊혀졌거나, 아니면&nbsp;중독을 극복하고 현실에 적응하고 있었다.&nbsp;그는 소멸하거나 변신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기로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결단을 내린다. <br><br>*<br><br>[아이언맨]으로 귀환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지금 우리 세대를 규정하는 또 다른&nbsp;문화에 멋지게, 보란 듯이 안착한다.&nbsp;성장을 거부하는 키덜트의 세계, 우리 세대가&nbsp;서브컬처이자 '저급오락'으로 즐기던&nbsp;만화가 메인스트림을 장악한 세계, 묵직한&nbsp;독립영화와 오스카의&nbsp;명예보다는 블럭버스터의 히어로가 누리는 부와 권위가 더욱 탐나는 시대. 그리고 아무런 트로마 없이 딴따라로서의 인생을&nbsp;한껏 즐길 수 있는 시대. 나체로 포르쉐 오픈카를 타고 LA 시내를 누비던 악동은 가는 곳마다 아들과 아내를 대동하고 다니는 패밀리맨이 되고, 마약은 허브티가 되고,&nbsp;청춘의 자기파괴는 이제 평생을 울궈먹을 농담거리가 되었다. 재미없는가. 물론 그는 리버 피닉스나 커트 코베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세대로부터&nbsp;생존했고, 지적이고 자조적인 유머감각과 주체 못하는 끼, 타고난 딴따라의 본능과 묘하게 섬세한 감수성으로 여전히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신동의 재능은 드디어 생활인의 성실을 만났다. <br><br>그러니까 어쩌면, 게임은 지금부터. <br><br><embed src="http://www.youtube.com/v/GT5QxVDRd0c&amp;hl=ko&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fullscreen="true"></embed><br><br>편집이 전혀 없이 롱테이크로만 찍었다는 Elton John, [I Want Love]의 뮤직비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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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Aug 2008 17:10:45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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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이만하면 훌륭하지 아니한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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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4/88/a0006888_4896f2d212e9c.jpg" width="500" height="713.72549019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4/88/a0006888_4896f2d212e9c.jpg');" /></div><br>그러니까, 이건... <br><br>김치 스파게티 만주 웨스턴 짬뽕 <br>글로벌 스탠다드 스타파워 블럭버스터 <br>롤러 코스터 비주얼 액션 라이드였구나. 푸하하. &nbsp;<br><br>아니, 이만하면 썩 훌륭하지 아니한가. <br><br>내 생애 어느&nbsp;주말의 두 시간이 분출하는 아드레날린을 타고&nbsp;흘러갔다. <br><br>김지운 감독의 전작을 본 적이 없다. 공포영화도 고리한 느와르도 이병헌도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남들 다 보는 [달콤한 인생]도 [장화홍련]도 보지 못했다.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들어간 극장에서, 두 시간 내내 어안이 벙벙했다. 와,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nbsp;플롯, 단순하다. 영화에서 어차피 서사의 줄기는 하나 뿐이다. "인생은 쫓고 또 쫓기는 것"이라는 대사의 변주인데, 이 영화 전체가 오로지 '추격'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추격에 의미심장한 라쇼날레 따위는 없다. 처음부터 공들여 붙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대평원에서 일본군과 마적들과 현상금사냥꾼이 다 모여서 엎치락뒤치락 아무나 쏴죽이며 서바이벌 게임을 '왜' 해야 하는지 그건 사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건 모두가 짜고 치는 고스톱의 '셋업'일 뿐이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그게 사실 전혀 상관없다.&nbsp;아니, 어차피 궁극의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이런 영화에서 서사의 개연성&nbsp;따위 슬쩍 개나 줘버린들 어떠랴.&nbsp;애초에 영화의 상상력과 야심이 거기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이 영화의&nbsp;의도가 애초에&nbsp;대서사나 심층서사도 아니고, 정치적&nbsp;발언도 아니고, 소위 소박한 '메시지'조차&nbsp;애초에 묵살하고 있는 걸.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폄하할 수는 없다.&nbsp;액션 이상의 무엇을 담지 않았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성취를 묵살해서도 안 될 것 같고. 오히려 블럭버스터가 위험하거나 불온해질 때는 뭔가를 잔뜩 담을 때 아니던가. <br><br>사실 나는 '문자' 중심의 상상력에 훨씬 친숙하다. 음악도 '글자'가 있고 '이야기'가 있어야 향유하기 쉬워서,&nbsp;클래식보다 팝과 록이 늘 내게&nbsp;가깝다. 그런가 하면 영화를 볼 때도 늘 고리타분하게 '글자'를 중심으로, 그러니까 서사와 대사 중심으로 바라보게 된다.&nbsp;그런데 이 영화는, 소설과 각본을 중심으로 한 활자적 상상력으로 대개의 서사를 향유하는 내게 낯선 종류의 상상력이 열어주는 새로운 지평 -- 달갑지는 않지만 아마도 21세기의 픽션이 전반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방향 -- 을, 그 지평의 쾌감을&nbsp;일별하게 한다. 그건 그래픽 노블을 포함한 만화 전반과&nbsp;뮤직비디오와&nbsp;분당시청률로&nbsp;성과를 계산당하는&nbsp;TV 프로그램과 스포츠, 그리고&nbsp;컴퓨터 게임을 지탱하는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전체적인 서사의 완성도라든가 캐릭터의 일관성보다는&nbsp;장면과 장면의 연결이 주는&nbsp;감각적 정서적 충격이라든가,&nbsp;CGI와 발달된 테크놀로지가 가능하게 한 엄청난 체감효과라든가, 시각적 쾌감의 극대화&nbsp;같은 장점들 말이다.&nbsp;판타지 소설과 만화가 헐리웃 블럭버스터를 장악한 것도, 아마&nbsp;이 '새로운' 상상력의 힘이 아니겠는가.&nbsp;내게는 낯설고, 가끔 나는 그런 상상력의 권력이동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 거침없는 힘은 이해한다. 그리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찬탄한다. 그런 점에서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이상한 놈]은 장면, 장면으로 이어질 때마다 새롭고 낯설고 매혹적인 추동의 쾌감이&nbsp;가히 최고급이다. 속도감도 비주얼도 유머도 그 때 그 때 제대로 먹힌다. 행동의&nbsp;합리적 이유가 좀 없으면 어떤가, 롤러 코스터를 타러 들어온 사람이&nbsp;욕망의 해소에 대한 철학의 부재를 논할 필요는 없다. 블럭버스터는 그렇다. 숨막히게 몰아쳐 비주얼과 액션의 근거를 회의할 여유도 주지 않으면 되는 거다.&nbsp;<br>&nbsp;&nbsp;&nbsp;<br>그리고 [놈놈놈]은 바로 그 부분에서 확실히 성공한다.&nbsp;무국적의 판타지 공간 같은&nbsp;귀시장의&nbsp;비주얼은,&nbsp;그 자체로&nbsp;매혹이다. 푸르른 하늘과 연갈색 땅이 인접한 만주 벌판과 흙먼지야말로 스펙터클이라는 말을 무색하지 않게 한다. 안 그래도&nbsp;짬뽕 장르에 한국 배우들을 쓰고 짬뽕의 공간에서 굳이 역사의식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으니 그것도 깔끔하고 좋다. 좋다 나쁘다를 우습게 가르지 않고 관객에게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 것도 좋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전에서부터 어차피 좋고 나쁜 건 도덕의 규준이 아니었고. 이 영화의 힘은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이상한 놈'으로 규정되는 스타일과 이미지인데, 결국은 그 비주얼 자체가 서사의 핵심요소가 되어버려서 겉멋의 차원을 훌쩍 넘어버린다. 말하자면, 2차대전의 유물 같은 오토바이와 우주인 같은&nbsp;구리 헬멧을 둘러쓰고 좌우로 왔다갔다 춤추듯 액션을 펼치는 송강호와 찬탄을 금치 못할 미모를 자랑하는&nbsp;정우성의 액션은 그&nbsp;자체로 영화적 성취다.&nbsp;글로벌 스탠다드로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스타일을 지닌 정우성이 밧줄에 매달려 하늘을 날아다니고 종마의 등에서 윈체스터 라이플을 돌리는 장면들은 [반지의 제왕]에서&nbsp;엘프 올랜도 블룸이 하얀 말에 빙글 돌려 타고 [영웅본색][첩혈쌍웅]에서 주윤발이 처음으로 쌍권총을 뽑아들고 반동으로 층계를 내려가던 모습을 보며 찬탄하고 환호했던 것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박수치고 환호할 만한&nbsp;이미지를 만들어 낸다.&nbsp;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뿌리박고 있지 않아도 그건 우리 세대에게 홍콩 누아르가 그랬듯이 젊은 세대가&nbsp;또 두고 두고 함께 추억할, 집단적인 시대의&nbsp;랜드마크 이미지가 될&nbsp;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nbsp;(하긴 어찌 보면 오늘날 가열찬 한국문화의 짬뽕스러운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멋지게 축약해 보여주기도 하는 이미지기도 하다)<br><br>[놈놈놈]의 마지막 성취는 그간 쌓아 올린 한국 배우들의 스타 파워로 밀고 나가는 블럭버스터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데 있다.&nbsp;이 영화에서 정우성은 [메가패스]나 [엑스노트] 같은 광고들에서 우리가 늘 보아왔던 바로&nbsp;그 비주얼의 제왕이다.&nbsp;캐릭터를 세밀화하는 많은 장면이 잘렸다고 하는데, 사실 난 박도원이라는 인물에게는 세부묘사가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nbsp;김지운은 정우성을 딱&nbsp;CF처럼 활용한다. 따라서 정우성의 짧은 스크린타임은 굉장히&nbsp;영악하고 적절한 전략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정우성은&nbsp;취향과 지역과 성적 차이 등등을 모조리 초월하는&nbsp;이미지와 비주얼의 소유자이므로, 이 영화가 추구하는&nbsp;목적에 그야말로 제대로 부합한다.&nbsp;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역시&nbsp;그대로&nbsp;영화스타 이병헌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nbsp;스스로를 몹시&nbsp;심각하게 몰아붙이는 열심형&nbsp;연기파로 이미지메이킹해온&nbsp;배우로서 그간의 궤적과&nbsp;박창이의 역할이 정확히 부합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여기서도 여전히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스스로를,&nbsp;그리고 배역을&nbsp;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진지'를 밥말아드신 이 영화에서 묘하게 부조화를 이루면서 흥미로운 층위를 만들어낸다. (이 층위는 살짝 코믹하다. 예컨대 윤태구가 마지막에 '네가 최고라고 하고 다녀'라고 말하는 순간) 그리고 송강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코믹 릴리프이자 스토리메이커로서 이 영화에서도 그 파워를 여실히 입증해 보인다.&nbsp;하지만 이 세 사람의 이미지는 '변신'이 필요없을 정도로 이미 든든하고 엄청나게 강력하다.&nbsp;그러니 김지운 감독은 거기 뭘 덧붙이려 하지 않고 그 스타파워를 포장해서 신나게 판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 <br><br>바로 그래서 이 영화의 플롯이 '좋은 놈'과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희한한 공간에서 무수한 사람을 죽이는 3259가지 다른 방법에 대한 이야기라 해도 어쨌든 영화가 먹히고 말이 되는 거다. 그렇게 얄팍한 서사로도&nbsp;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거고. 그게 스타 파워고 그게&nbsp;블럭버스터의 힘이니까.&nbsp;이런 얘기에 돈을 처바를 필요가 있느냐고 하지만, 블럭버스터라는 게 어차피&nbsp;대자본 놓고 대관객 먹는, 그런 거 아닌가.&nbsp;하지만 이 영화의 스타일과 이미지와 액션과 혼성장르의 영악함은, 한국영화에서 블럭버스터라는 게임의 규칙을 한 차원 다른 곳으로 끌어당겨 가는 힘이, 확실히&nbsp;있어 보인다. 가슴이 뻥 뚫리는 호쾌함은, 무해하고 신통하다. <br><br>내 여름의 두 시간, 아깝잖게 내줄 만큼 신나는&nbsp;'경험'이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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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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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4 Aug 2008 13:22:08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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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봄이었고, 미치기에 좋더라: 김진규의 [달을 먹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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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lockquote><blockquote><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1/88/a0006888_4891d8ad3391d.jpg" width="200" height="29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1/88/a0006888_4891d8ad3391d.jpg');" /></div></blockquote>꽃봉오리가 벙글려는지 며칠 전부터 제 살 간질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뭇가지 군데군데 튼 사이로 도로로 말린 새순이 비어져나왔지만, 노인네의 가물가물한 시력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겨우내 땔감으로 쓰다가 남은 홍싸리를 한 줌씩 십자로 묶어 뭉툭하게 비를 만들던 그의 목구멍에 봄바람이 자락째로 걸렸다. 컬컬컬, 어렵고 요란한 기침이 사립문짝을 넘어가서 떨어졌다. "두릅나무 씨가 천식 해수에 좋다는데....." 합죽한 입으로 노인이 씰기죽거렸지만 곁에 있던 아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야속한 아들이 보리밥을 먹고 밭으로 나가자마자 조촐하게 봄비가 내렸다. 감질나던 시간이 해갈되면서 마음을 틔웠고, 빗방울에 두들겨맞고서야 요요히 벌어진 꽃들을 보며 뭇입들은 침을 흘렸다. 그 사이에서 '오살하게 헤픈 년' 소리가 야멸차게 튀어나왔지만 사람들은 누가 누구더러 하는 소린지 굳이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br><br>해마다 봄이면 화기花氣에 홀린 마른 몸뚱이가 저수지로 기어들어갔다. 건져올려진 시신들은 하나같이 진흙투성이였고 사람들은 물에 헹구는 편이 낫겠다고 속으로 충고했다. 사람들은 더이상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 <br><br>깊은 밤이었고, 봄이었다. 미치기에 좋았다.<br>&nbsp;<br>- 김진규, [달을 먹다] 중에서 </blockquote><br><br>간만에 오지게 색스러운 책을 읽었다. 책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오감을 자극하는 색色이 뚝뚝 흘러 떨어진다. 홀리도록 요사스러우면서도 시치미 딱 떼게 정갈한 문장들이 사랑 때문에 색 때문에 목숨줄 내놓고&nbsp;정신줄 놓고 미쳐가는 인물들을 눈앞에&nbsp;선히 그려지도록&nbsp;생생하게 환기하고 살려낸다.&nbsp;서간체 문학이 태동하던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nbsp;더러운 정을&nbsp;품고 사는 인간 군상들의 얽히고 설키는 정의 족보를 조각보처럼 이어붙인다. 어차피 커다란 이야기 틀이&nbsp;어디로 왜 향하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가시는 걸음걸음 즈려밟는 진달래 꽃잎의 으스러지는 감각,&nbsp;서러운 잔향,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대한 소설이다.&nbsp;잿물을 받아 만드는 미끄럽고 붉은 빨랫물, 퇴폐적인 침향의 향취, 여인의 작은 발로 잘근잘근 밟아&nbsp;담근 국화주의&nbsp;풍류,&nbsp;천하일미의 꽃차를 담그는 소녀.&nbsp;침향의 코를 찌르는 수지냄새, 국화주의 달큰한 맛, 꽃차의 향내가 책장 밖으로 퍼져나온다. [달을 먹다]는 '카랑카랑한 햇살'과 '오종종한 솜털'로&nbsp;독자의 오감을&nbsp;날서게 벼려, 향과 색과 소리로 가득 찬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그런, 참으로 색스러운&nbsp;책이다. <br><br>이 세계가 소위 '리얼'하냐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사랑의 결핍으로&nbsp;머리가 하얗게 세는 어린아이, 매캐한 아편 속에서 제 살에 연모하는 이의 이름을 새기는 남자, 산사에서&nbsp;상사相思로&nbsp;산발하고 우짖는 젊고 아리따운&nbsp;대가집 소년,&nbsp;신분의 차이로 이루지 못한 사랑에 자발적으로 미쳐가는&nbsp;청년 선비, 어느 양반 과수댁&nbsp;집에서 복상사한&nbsp;천하미색 한량의 장례식에서&nbsp;뜬금없이 서럽게 곡을 하는&nbsp;천하박색의 향장...박물지처럼&nbsp;소상한 세부묘사에 비해 인물들의 궤적은 터무니없고&nbsp;비현실적인 데가 있다.&nbsp;"누가 봐도 타살이었지만 사람들은 쉬이 입을 놀리지&nbsp;않았다. 임금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나라는 분명 뻔뻔했"다는 대목은 이 소설을 구체적인 역사적 시점에 놓고 있으나, 김진규가&nbsp;우리 주위에 환기해 생생하게 불러내는 세계의 본질은&nbsp;몽환적이고&nbsp;낯설고 초현실적이며 탈역사적이어서, 사실 그리하여 매혹적인 황혼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nbsp;조선이라는 색스러운 별세계는, 묘하게 멀다.&nbsp;징하고 진한 감정들이 조각보로 만들어낸 이 아름다운 세계&nbsp;속에서만 갇혀서 흐른다. 내게로, 내 가슴에로 충분히, 충만하게 흘러들어주지 않았다. 인물들 가슴가슴마다 든 그 시퍼런 멍자욱을 그냥 멀리서 무슨 미학적 대상처럼 구경할 수밖에 없더라. 하지만&nbsp;핏멍울진 욕망의 조각보는&nbsp;미학의 대상으로 봐도 경탄스럽고&nbsp;매혹적이다. 구경꾼으로&nbsp;남을 수밖에 없어서&nbsp;슬플 정도로. &nbsp;<br><br>여전히 고마운 책이다.&nbsp;아주 잘 읽었다. 여즉껏 우리 글로 이렇게 고혹적인 문장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nbsp;작가라면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작가의 데뷔작이니 더욱이 앞으로&nbsp;기대할 것이 생겨서 좋고.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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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책</category>

		<comments>http://celiasden.egloos.com/1790815#comments</comments>
		<pubDate>Thu, 31 Jul 2008 15:46:57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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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굿나잇, 앤 굿럭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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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6/88/a0006888_4889f4c04ac22.jpg" width="301" height="4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6/88/a0006888_4889f4c04ac22.jpg');" /></div>컬러 필름을 흑백으로 렌더링해 만든 이 영화는,&nbsp;가능한 모든 층위에서&nbsp;노스탤지어에 호소한다.&nbsp;그 누구보다 고전적 헐리우드 스타들을 닮은 배우들, 중절모와 벙벙한 배바지,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다이앤 리브스의 재즈가 흐르는 바와 위스키,&nbsp;현란한 몽타쥬도 액션도 없는 세트에서의 담담한 롱테이크들,&nbsp;클로즈업 속에 파르르 떨리는 눈까풀과&nbsp;비껴가는 눈길들이 대사가 비워둔&nbsp;행간을 채운다.&nbsp;시간은 느리고 언행은 늘 의미심장하다.&nbsp;정보에도, 삶에도, 여백이 많았던 시절이라 정보와 삶 모두가 더 묵직하다.&nbsp;금기가 살아 있기에 사랑도 의리도 실체를 갖는 시대다.&nbsp;그리고 무엇보다 헐리우드 고전 영화의 시대다.&nbsp;이 영화는 그 모든 걸 한없이 그리워한다. &nbsp;<br><br>TV 카메라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앵커는 시청자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늘 슬며시 눈을 내리깔고 마지막 인사를 던진다. "굿나잇, 앤 굿럭."&nbsp;그 비껴가는 시선은 말없는 도전이다. 사유의 채찍질이다. 이제는 당신이&nbsp;생각의 부담을 떠맡고 불편한 화제라도 맞닥뜨려 판단하라는 명령이다. 그렇게 영화는 혁명과 전쟁을 말한다. 매카시가 만들어낸 공포의 침묵이 소리없이 나라를 짓누른다. 총소리도 없고 유혈사태도 없지만 글을 쓰는 그들은 전장에 있다. 에드 머로와 프레드 프렌들리는&nbsp;CBS 뉴스팀의 지휘관이다. 그들의 명령에 돈 할렌벡과&nbsp;조 웨시바를 비롯한 휘하의 병사들, 아니 기자들은 소리없이 충성하며 전장으로 뛰어나간다.&nbsp;하지만&nbsp;압박과 권력의 저항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nbsp;막강하고, 전쟁의 과정에서 희생자는 속출한다. 아내의 과거 경력이 팀에 누가 될까 빠지려는 에디 스캇, 매카시스트들의 공격을 한몸에 받던 돈 할렌벡의 자살은 위기를 정점으로 끌어올린다.&nbsp;금기로 되어 있던 사내결혼을&nbsp;하고 관계를 숨겨오던&nbsp;조와 셜리 워시바의 직장생활 역시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다. 에드 머로 역시 과거의 날조된 경력을 근거로&nbsp;빨갱이로 몰리게 된다. 이들의 삶에 닥쳐오는 보이지 않는 위협이 진짜배기기 때문에, 그들의 용기 역시 진짜배기가 된다. 타협을 모르는 에드 머로는 물론 굴하지 않고&nbsp;매카시의 공포정치가 종막을 내리는&nbsp;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야 만다. 이 과정에서 폐소적인 CBS 뉴스룸에서 벌어지는 담담한 대화들이 칼이 되고&nbsp;방패가&nbsp;된다. 속삭임과 눈짓과 몸짓이 배신과 충성의 희미한 경계를 가른다. 마치 &lt;12인의 성난 사람들&gt; 같은 고요하게 이글거리는&nbsp;서스펜스는 찬탄할 만하다. 가히 클래식하다. &nbsp;<br><br>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승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See It Now를 이끌던 에드 머로의 완고하고 비타협적인&nbsp;팀은&nbsp;비록 매카시즘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역사의 흐름 그 자체에 대항해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사라지고 해체되는 그들의 뒷모습까지를 직시한다. 퀴즈쇼의 열풍과 연예 인터뷰에 밀려 프라임타임을 빼앗긴 에드 머로는 자신에게 공로상을 수상하고자 모인 방송계 인사들에게 감사의 말 대신 호된 질책을 던진다. 방송이 공공성과 사회정의에 대한 책임을 포기한다면 그 어떤 의미도 전달하길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물론 어리석은 공룡의 유언이다.&nbsp;물론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그래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사라진&nbsp;무엇이기 때문에&nbsp;거울처럼 지금,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소통의 수단, 그러니까 소위&nbsp;"미디어"라는 게&nbsp;있기나 한가 싶은 이 시대를 다시 반추하게 만든다.&nbsp;진한 향수라는 정서를 통해서.&nbsp;영화 전체가 기대고 있는 흑백 필름의 노스탤지어는 그냥&nbsp;스타일리스틱한 겉멋이 아니다,&nbsp;결국은 지금 우리와 만나고 비판적 사유로 길을 터준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6/88/a0006888_488a150e39685.jpg" width="400" height="26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6/88/a0006888_488a150e39685.jpg');" /></div><br><br>아무튼 영화는 '멋'있다. 은근하고 기품있다. 교훈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생생한 캐릭터를 살려낸다.&nbsp;절반 이상이 배우들의 몫이다. 기가 막힌 앙상블 캐스트다. 맑고 단호한 눈빛과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인 에드 머로 역의 데이빗 스트래던이 아니었다면 "굿나잇, 앤 굿럭"이 그렇게 복잡한 뉘앙스를 띨 수 있을까. 훗날 CBS의 대표 프로그램인 &lt;60 Minutes&gt;의 프로듀서로 머로의 정신을 이어가는 죠 워시바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와 비밀결혼을 한 여성 프로듀서 셜리 워시바 역의 패트리샤 클락슨, 게다가 제프 다니엘스와 테이트 도노반,&nbsp;프랭크 란젤라까지, 누구 하나 화면을 빡빡하게 채우는 뿌듯한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 배우가 없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조지 클루니의, 조지 클루니에 의한 영화. 배우로서가 아니라 전방위로 영화를 가능하게 만든 공헌도를 말하는 거다. 멋진 사내들을 떼거지로 몰고 다니며 늑대무리의 대장 노릇을 하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인간이 멋있어도 되나. 역할도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앞만 보고 달리는 말 같은 에드 머로와 달리 현실적인 위험 요소들을 모두 계산에 넣고 팀원들의 사생활도 꿰고 있으면서 묵묵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를 클루니 아닌 누가 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각본과 감독을 맡았을 뿐 아니라 자기 집까지 저당잡혀 가면서 제작비를 충당했다는 일화까지, 이 영화에서 조지 클루니의 퍼소나야말로 가히 시대착오적이다. 멋있고 클래식하지 뭐냐, 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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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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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5 Jul 2008 17:18:04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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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리진>의 불가시성과 번역의 은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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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19/88/a0006888_4880c53bb07f4.jpg" width="150" height="22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19/88/a0006888_4880c53bb07f4.jpg');" /></div><br>신경숙의, 느릿해서 더욱 유혹적인 문체를 읽는다는 건 언제나 내겐 호사다. 그녀의 문체는 탐스럽고 서늘하다. 한글로 빚은&nbsp;문장을 참 아름다운&nbsp;소리로 가꿀 줄 아는&nbsp;글이다.&nbsp;하지만 그녀의 플롯은&nbsp;어김없이 위험스러운 멜로드라마의 경계에 서서 휘청거린다.&nbsp;사실 난 그런 불안함이&nbsp;좋다. 곡예라는 게 워낙 유혹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은 신경숙을 신경숙으로&nbsp;만드는 특유의 감상과 자기연민이 결국&nbsp;금을 넘어 넘쳐버릴 때도 있고, 그럴 때면 잉여의 감정이 남긴&nbsp;씁쓸하고도 비릿한 뒷맛이&nbsp;책을 덮고도 오래 추적거린다. &lt;리진&gt;도 그런 신경숙다운 소설이다.&nbsp;자칫 아슬아슬한 감상이 표면장력을 시험하며 찰랑거리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차마 넘치지 않는다, 곪거나 터지지도 않는다,&nbsp;좋은 균형이다.&nbsp;<br><br>남성이자 서구인인 나레이터 콜랭의 목소리가 리진의 서술을 받쳐주고 있기&nbsp;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술자로서 콜랭을 선택한 건 확실히 이 소설 최고의 선택이다.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여러 층위에서 효과적이다. 첫째로는 신경숙의 과잉된 감상을 걷어준다는 거다. 사실 신경숙의 글쓰기는, 그만큼 젠더가&nbsp;분명히 드러나는 글이 또 있을까, 싶게&nbsp;천생 여자답다. 여기에 여성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과도해지면 무익한 자기연민으로 화하고 냉정을 빼앗게 된다.&nbsp;콜랭의 시선을 통해 리진과 구한말을&nbsp;바라보고&nbsp;묘사하고 재현하는 작업은 신경숙 글의&nbsp;그런 젠더 편향을 넉넉히 상쇄하고 균형을 잡아준다.&nbsp;게다가 구한말의 문물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콜랭의 시선이 아마 지금 이 자리, 우리의 시선과 가장 닮은 시선이라는 걸 독자들은 곧 발견하게 된다.&nbsp;과거, 조선, 그 때의&nbsp;사람들, 그 매혹,&nbsp;그리고 무엇보다 그 낯섦.&nbsp;서구인이 처음 발견한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 한없는 낯섦, 타자성, 도저히 이해할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아름다운 외계에 대한 동경과 절망이다. 그리고 19세기 프랑스인의 그 시선을, 21세기 서울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때문에 조선을 바라보는 콜랭의 복잡다단한 심경은,&nbsp;백여년의 시간을 넘어 조선을 바라보는 우리의 동경과 절망을 그대로&nbsp;투영한다. 조선을 상상하고 복원하는 우리들 역시 우리 시대와 공간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잘 봐줘야 아웃사이더고,&nbsp;방관자고, 외지인이니까.&nbsp;시간은 공간보다 더 까마득한 거리를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콜랭에게, 우리에게, 조선을 상징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리진이다.&nbsp;조선과 리진을 바라보고 욕망하는 - 그러다 결국 염증을 내는 - 콜랭은 우리에게 그 어떤 캐릭터보다 더 생생하게 손에 잡히는 실체성을 갖게 된다.&nbsp;구체적이고 파악 가능하다.&nbsp;<br><br>하지만 리진으로 오면 얘기가 다르다. 리진은 독자가 파악 가능한 캐릭터가&nbsp;아니다.&nbsp;서술과 묘사는 언제나 리진의 언저리에서 부유하다 휘발한다. 리진은&nbsp;덧없고 기만적인 기표다.&nbsp;리진은 스스로 기의가 되려는 야심을 전혀 갖지 않아서 투명하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무언가를 재현하고, 다리를 놓고,&nbsp;자체로 완결을 주장하지 않으며 미완의 상태로라도 의미의 매개가 되려 한다. 콜랭에게는 명성황후의 기표가 되려 하고, 명성황후에게는 프랑스와 콜랭의 기표가 되려 한다. 리진은 피를&nbsp;흘리며 제살을 깎아&nbsp;콜랭의 세계와 명성황후의 세계를&nbsp;찰나이나마 이어주는 오작교의 까치같은 존재다.&nbsp;말하자면, 천생&nbsp;번역자다. 리진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불한사전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규정한다. 프랑스에서는 한국 문학을 번역하고, 한국에서는&nbsp;프랑스 문학을 번역한다.&nbsp;하지만 그 어떤 문화에도, 그 어떤 세계에도,&nbsp;뿌리를 내리고&nbsp;생명을 찾지&nbsp;못한다. 리진의 부유하는 정체성, 그 기묘한 불가시성은 번역의 은유로 비친다.&nbsp;<br><br>그리고 문화의 충돌은, 권력의 불균형과 직결된다. 그게 구한말의 슬픔이다.&nbsp;조선은 새로운 문화와 충돌하면서, 자기&nbsp;방어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말라죽어가는 리진의 운명이다. 프랑스어, 아니 프랑스 그 자체를 온몸으로, 삶으로&nbsp;번역한 리진은 그 파괴적인 외세의 무력까지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 불한사전에 독을 발라 씹어먹고 명성황후의 시해 장소에서&nbsp;자살하는 리진의 죽음은 소통 그 자체가 독이 되어 돌아오는 불평등한 소국의 몰락과&nbsp;서러운 번역의 반역을&nbsp;은유한다. <br><br>그런 점에서, 리진의 고향이자 뿌리인, 피리부는 강연이 너무 막연하고 피상적인 존재로&nbsp;그려진 건 많이 아쉽다.&nbsp;어쩌면 신경숙 그녀도 우리에게 조선을 탄탄히 번역해 보여주는데&nbsp;실패하고 절망하는&nbsp;흔적일 듯도 하고.&nbsp;&nbsp;&nbs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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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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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Jul 2008 16:35:05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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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데클란 도넬란의 [십이야]를 보고 뒤늦게...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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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7.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81cefacf.jpg" width="411" height="32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7.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81cefacf.jpg');" /></div>&nbsp;시월말에 LG 아트센터에서 Cheek by Jowl 극단의 러시아 남자배우들만으로 공연하는 &lt;십이야&gt;를 보다.&nbsp;데클란 도넬란은 셰익스피어 연극의 퍼포먼스 역사를 다룬 웬만한 책에서는 모조리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유명한 감독으로, 특히 &lt;허슬&gt;의 에이드리언 레스터,&nbsp;&lt;캠브리지 스파이즈&gt;, &lt;아내와 딸들&gt;, &lt;고스포드 파크&gt;의 톰 홀랜더가 함께 공연했던&nbsp;남자배우만의 &lt;뜻대로 하세요 As&nbsp;You Like It&gt;는&nbsp;전설적인 공연이다. 데클란 도넬란은 &lt;오만과 편견&gt;의&nbsp;미스터 다아시 매튜 맥페디언과 함께&nbsp;했던 &lt;헛소동&gt;을 비롯해 무수한 셰익스피어극과 르네상스극을 파격적으로 해석해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nbsp;명성이 높기에 오래 전부터 두근거리며 기대하고 있었다. &nbsp;<br><br>그리고, 이 공연은 내게 있어 셰익스피어 희극의 본질에 대해 정말이지&nbsp;새로운&nbsp;시각을 던져 주었다.&nbsp;과연 셰익스피어의 희극들처럼 순전히 리비도적인 내러티브가 다시 있을까, 하는 실감. &lt;십이야&gt;는 무수한 셰익스피어의 희극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어떤 고유한 개인을 향한 근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 전방위로 걸쳐 뻗어가는 편재하는 리비도의 흐름 , 그 힘과 그 아름다움과 그 긴장과 그 허무함과 그 뒤에 남는 서글픔 그&nbsp;모든 것에&nbsp;대한 입체적인 서사였다. 궁극적인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nbsp;남녀쌍동이들이, 젠더와 계급을 가로지르며&nbsp;일리리아라는 몽상적인 멜랑콜리의&nbsp;왕국을 휘젓는 이 정신없는 한바탕 난장은 조명과 몇 가지 소품만을 이용한 미니멀한 무대를 그야말로 환상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특히&nbsp;남녀 캐릭터 모두를 셰익스피어 당대처럼 모두 남자배우로 기용한&nbsp;데클란 도넬란의 연출은, 각 배우와 "캐릭터"의 고유성을 드러내기보다는&nbsp;몰개성적으로 흘러가는 이 리비도의 전방위적인 편재성을 강조하는데 대단히 효과적이다. 이 공연을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개별 배우 고유의&nbsp;매력에 정말로 최소한으로 기댄 연출과 연기였는데, 뭐랄까, 나이와 체격 조건이라든가 하는 뚜렷한 특징만 제외한다면 모든 배우가 모든 캐릭터를 대체해 연기할 수 있다는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올리비아를 연기한 배우가 비올라를, 세바스찬이 비올라를, 혹은 공작이 앤드루 경을, 안토니오가 페스카를, 혹은 마리아가&nbsp;올리비아를 연기하는 것이 충분히 상상이 간다는 말이다. 사실 내게 이 공연의 특수성은 바로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캐릭터들의 궁극적 차이라는 게,&nbsp;외모라든가&nbsp;어떤 내면적 특성이라든가 하는 고유의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세세한 버릇과 대사, 디테일한 행위와 철저하게 안무된 움직임,&nbsp;눈빛의 움직임이랄까 하는&nbsp;비본질적인 '차이'에 존재한다는 &nbsp;느낌이었던 거다. 처음 똑같은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아무런 분장 없이&nbsp;다 같이&nbsp;등장한 배우들은 정말로 서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유니폼을 입고 등장하자마자 이 모든 캐스트가 다 같이 외치는&nbsp;'아버지'는, 그들 모두의 아버지고, 그들의 원류는 결국 하나임을 보여준다.&nbsp;하지만 "대머리"의&nbsp;청년에게 머리띠를 둘러주고 치마를 입히는 순간, 그 청년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퇴폐적인 귀족 처녀 올리비아로 순식간에 변신한다.&nbsp;건장한 사내들은 아주머니가 되고, 시종이 되고, 남자의 역할을 하는 여자가 된다. 아들과 딸의 차이, 혹은 귀족 아가씨와 하녀의 차이, 멍청한 구애자와 공작의 차이는 머리카락을&nbsp;방정맞게 넘기는 손길, 쭉 편 어깨와 허리, 느릿느릿한 목소리, 호들갑스러운 말투...그런 것들로 규정된다. 굳이 목소리도 여자처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대사를 치는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계급과 젠더라는 '본질적' 차이는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nbsp;철저히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실감이 덮친다. 더구나 러시아어로 번역된 셰익스피어 대사들 역시 '차이를 횡단'하는 이 멋진 퍼포먼스와 참으로 어울렸고. <br><br><br><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c57231ed9.jpg" width="240" height="24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c57231ed9.jpg');" align="left" />결국 &lt;십이야&gt;에 반한 나머지 데클란 도넬란의 책 The Actor and the Target을 사서 읽고 있던 중인데, 메소드 액팅 스쿨과는 철저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도넬란의 연기론을 보니 내 느낌이 그리 빗나가지는 않았구나, 싶다. 도넬란은 배우가 "내면"의 무언가를 끌어내서 연기하려는 생각은 철저한 오류라고 치부한다.&nbsp;연기하는 매&nbsp;순간 순간 지극히 구체적인 외부의 타겟을 설정해놓고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면"은 끌어올려지지도 않거니와 구체적인 표현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nbsp;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연기를 잘 하려면 철저히 인물의 '내면'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nbsp;스타니슬라프 식의 관점과는 철저히 다른 이야기인데, 그 결과 예를 들어 말론 브란도의&nbsp;영화들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말하자면 말론 브란도와 같은 배우들은 그 '대체 불가능성'에 의존하지만,&nbsp;데클란 도넬란의 배우들은 올바른 훈련과 연기를 한다면&nbsp;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nbsp;그 때 그 때의 디테일한 상황의 완벽한 연출일 뿐. 이런 점에서&nbsp;&lt;십이야&gt;는 분명 '데클란 도넬란'이라는 연출가의 작품이 되는 셈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넬란의 스타일은 셰익스피어의 희극과는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절대로 유일무이한 캐릭터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사방에 피터팬이 뿌린 요정가루처럼 편재하며 사람을 슬프게 하고, 사람을 우습게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쫓게 만들고, 사람들끼리 싸우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또 노래하게 만드는 리비도, 욕망, 혹은, 그렇다, 어쩌면 그걸 사랑이라 한다면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올라가 세바스찬으로 바뀌었는데도&nbsp;행복해하는 올리비아와, 충복 세자리오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구혼의 손길을 내미는 공작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셰익스피어 자신&nbsp;그다지 캐릭터의 고유한 내면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하고.&nbsp;기이하게 텅빈 내면의 캐릭터들은 생생한 욕망의 실존으로 살아 숨쉬니까. 그 생생하게 실존하는 욕망이 배우들의 온몸과 목소리, 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꿈틀꿈틀거리면서 서사를 카니발처럼 화려한 주이상스의 향연으로 만들어 버리고. &nbsp;<br><br>차이의 환각을&nbsp;기가 탁 막힐 정도의 섬세한 흉내로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차이 그 자체의 비본질성을 각인하는 연출은 지극히 21세기적 감수성에 잘 맞아떨어지는 동시에 셰익스피어 희곡의&nbsp;정신을 새롭게 조명하는 힘이 있는데, 이런 연출은&nbsp; 말볼리오의 플롯을 다루는&nbsp;장인다운 솜씨에서도 드러난다.&nbsp;16세기라면 감히&nbsp;넘을 수 없는 신분의 장벽을 넘어 과도한 욕심을 부린 허세 많고 꼴불견의&nbsp;죄인으로 그려졌을 말볼리오는,&nbsp;오로지 즐거운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한 일군의 광대들, 즉 플롯메이커에 의해 오로지 관객의 즐거움을 위해 조종당한 캐릭터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그래서&nbsp;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nbsp;"복수하고 말겠다!"고 말하던 마지막 말볼리오의 엔딩은,&nbsp;결국 다시 늘 관객을 향해 박수를 구걸하거나 용서를 구하던 셰익스피어의 에필로그들과&nbsp;조각퍼즐처럼 기가 막히게 들어맞아 버린다. 가장 메타적이고 동시대적이면서도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이 엔딩이란. 결국 이 모든 한 판의 꿈같은 난장은, 오로지 관객을 위해 "스테이징"된 헛소동에 불과하니까. 잊을 수 없는 말볼리오의 쩌렁거리는 대사와 씨익, 하는 그 웃음의 의미심장함이란.&nbsp;<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7.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89a27076.jpg" width="500" height="356.15384615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7.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89a27076.jpg');" /></div>&nbsp;&nbsp;&nbsp;&nbsp;&nbsp;&nbsp;&nbsp;<br>그나저나, &lt;필로우맨&gt;, &lt;라만차의 사나이&gt;, &lt;스위니 토드&gt;에&nbsp;데클란 도넬란의&nbsp;올메일 캐스트 &lt;십이야&gt;로 이어지는 환상의 라인업이라니 - &lt;뷰티풀 게임&gt;, 기다려! - 올해&nbsp;하반기를&nbsp;이렇게 풍성하게 만들어 준 LG 아트센터 기획팀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박근형의 &lt;필로우맨&gt;과 데클란 도넬란의 &lt;십이야&gt;는 정말이지 뉴욕 런던 서울을 통틀어 볼 수 있었던 무수한 공연들 중에서도 너끈히&nbsp;베스트를 차지하는 만큼.&nbsp;눈앞에서 호흡해주며 나를 위해 기꺼이&nbsp;향연을 펼쳐주었던, 셰익스피어의 발칙하고 아름답고 생생한 언어 - 그 어떤 나라 언어로 되어 있든 힘을 잃지 않았던 - 와 한 호흡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맞물려 돌아가던 완벽한 &lt;Cheek by Jowl&gt;극단의 러시아 캐스트들에게 감사를 또 감사를. 브라바, 브라바, 브라바!!&nbsp;<br><br>내 생애 다시 한번 데클란 도넬란의 셰익스피어를 볼 수 있기를 빌고 또 빌며. 런던의 씨어터 뮤지엄 아카이브에 있다는 에이드리언 레스터의 &lt;뜻대로 하세요&gt;와 매튜 맥페디언의 &lt;헛소동&gt;을 꼭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며. 잊지 않으려고 여기, 이 자리에&nbsp;적어넣는 한 꼭지, 이제 끝.&nbsp;&nbsp;<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7.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d5e7b3ff.jpg" width="283" height="34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7.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d5e7b3ff.jpg');" /></div><br><div style="TEXT-ALIGN: center"></div><div style="TEXT-ALIGN: center">매튜 맥페디언이 출연한&nbsp;&lt;헛소동&gt;의 한 장면 </div><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e6534cc2.jpg" width="327" height="39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711/26/88/a0006888_474ade6534cc2.jpg');" /></div><br><div style="TEXT-ALIGN: center">남녀 공히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게 만들었다던, 전설적인 에이드리언 레스터의 로절린드 <br>데클란 도넬란의 98년작 &lt;뜻대로 하세요&gt; 중에서 <br><br><br>"The extraordinary thing about Adrian Lester was that, with his beautiful voice and grace of movement, when he played the female Rosalind playing at being the male Ganymede he seemed more like a woman playing a man than a man playing a woman. And when he played at Rosalind playing Ganymede playing Roalind, one simply gave up trying to work out in one's mind whether one thought he was a woman playing a man playing a woman or a man playing a woman playing a man playing a woman." <br><br>- Jonathan Bates, &lt;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Shakespeare on Stage&gt; </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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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플러스 알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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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6 Nov 2007 14:39:12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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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90일, 사랑할 시간> : 디테일, 그만 플롯을 구원하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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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4.egloos.com/pds/200706/23/88/a0006888_03065186.jpg" width="500" height="27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4.egloos.com/pds/200706/23/88/a0006888_03065186.jpg');" /></div><br>"제발 우리 두 사람 사랑하게 해주세요!" 라는 감정만큼&nbsp;대중문화에서 착취하고 또 착취하고 또 착취한 감정이 또 있을까. 드라마에서 광고에서 뮤지컬에서 영화에서 소설에서&nbsp;대중가요에서 보고&nbsp;또 보았던&nbsp;그 감정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의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아우라를 두르고 있다. 세상을 다 적으로 돌려도, 죽음을 불사해도, 나는 너를&nbsp;사랑한다, 는 강렬한 농도의 감정을 그려내는 시선은, 공감이 아니라 대개는 선망이고 동경이다.&nbsp;그래서&nbsp;소망과 현실의 간극이 만들어내는 욕망을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nbsp;대중문화는 그 아름다움을, 그 비현실성을, 선망과 동경의&nbsp;이미지로 포장해&nbsp;팔고 팔고 또 판다.&nbsp;박제되어 팔리는 이미지들은 점점 더 우리네 현실, 우리네 감정과 동떨어진 유리공 속의 세상으로 굳어간다.&nbsp;그럴 때, 금지된 사랑이라는 클리셰는 진짜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물건이&nbsp;된다. 그럴 때&nbsp;우린 그런 슬픔과 죽음 따위, 팔짱 끼고 오징어 다리 씹으며 구경하면 된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선남선녀 강지환과 김하늘의 &lt;구십일, 사랑할 시간&gt;은 짤막하게 줄여 말하자면,&nbsp;바로 그런 정서를 팔고 싶어하는,&nbsp;전형적인 통속대중신파멜러다.&nbsp;독한 첫사랑, 운명의 장난, 근친상간의 금기, 시한부 인생, 그리고 심지어 불륜. 듣기만 해도 피식, 비웃음부터 비질 흘리게 되는 그 모든 키워드가 그 안에 있다. <br><br>그런데&nbsp;&lt;구십일, 사랑할 시간&gt;은&nbsp;팔짱 딱&nbsp;끼고 앉아&nbsp;구경을 하게&nbsp;내버려두질 않더라.&nbsp;뭔가 다른 이야기,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게 아닐까,&nbsp;궁금해 하며&nbsp;나도 모르게 자꾸 마음을 열고 쫑긋 귀를 기울이게 만들더라.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사람의 말에 집중하니까, 그냥&nbsp;청각으로 잡아내는 소리의 의미가 아니라 더 깊은 감정의 의미를 읽어내게 되더라, 그래서 웃는 얼굴 뒤에 숨어 있던 지석의 아픔을 그만 들어버렸나보다, 극중 미연이가 말하듯이. "제발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라는&nbsp;얘기를 하면서 우리하고는 무관한 다른 세상의&nbsp;미학적 이미지를 던지는&nbsp;아니라,&nbsp;평범한 우리네 심장 속에 묻혀 있는 정서와 닮아 있고 맞닿아 있는 어떤 염원과 갈망을 흔들어놓는다.&nbsp;자꾸 흔든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살고 있는&nbsp;이 삶 속에 내재해 있는 쓸쓸함을 건드려, 저들이 아니라 우리 삶을, 우리 청춘을, 가버리는 세월을, 삶과 죽음의 의미를,&nbsp;같이 생각하고 공감하고 연민하게 만든다. 이런 힘은 전부 다, 순전히, 시놉의 키워드가 아니라 디테일에서 나온다. 클리셰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고&nbsp;박제된 유리공을 깨뜨려 영원무구한 이야기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는 힘, 언제나 그것, 디테일.&nbsp;<br><br>유리공을 깨뜨리는 디테일 하나는 1화의 오프닝이다. 억새풀 흔들리는 제주도의 들판에, 꺅꺅거리는 여학생들을 가득 태운 버스가 지나가고,&nbsp;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자전거를 몰고&nbsp;버스차창에서 내민 여학생들의 스치는 손길을 따라 달린다. 그리고 첫눈과 첫사랑을 기다리며, 라는 삼류 디제이 특유의 멘트와 함께 차안을 가득 채운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오는...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달뜨고 정신없고 어리석은 아이들이 바람을 맞으며&nbsp;청량하게 질주하고,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몰던 한 소년이 친구들보다 한참을 앞서가다 어느새&nbsp;혼자가 되어&nbsp;버스를 뒤쫓는다. 그런데 그 순간 인도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미친듯이 버스를 향해 달린다. 자기도 보르게 경쟁본능이 발동해 페달을 더 세차게 밟던 소년은 그만 딱, 멈추고 만다. 울며 버스에서 내린 한 여자를 으스러져라 껴안는 남자.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 소년은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그 연인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한 소녀의 나레이션. "그 장면은 그가 그&nbsp;시절&nbsp;빠져있던 그 어떤 음란서적보다&nbsp;더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구비구비 풀어내어도 모자랄, 수많은 기막힌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법한 한 장면. 생경한 타인의 삶과&nbsp;나의&nbsp;삶이&nbsp;격렬하게 충돌하며 은밀하게 얽히는 한 순간.&nbsp;앞으로 그 타인의 이야기를 살아낼 소년 지석의 삶과 그를 바라보게 될 시청자의 시선이 얽히는 한 순간.&nbsp;<br><br>이 드라마의 내러티브는 그 엄청난 신파와 멜로의 클리쉐들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인척 마구 흩뿌린다. 하지만 그 순간, 순간의 디테일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지석이&nbsp;술에 취해 이웃에게 시비를 걸며&nbsp;"이봐, 내가 무슨 교수야. 난 전임강사란 말이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쳐대는 순간처럼 너무나 있을 법한 디테일들 때문에, 플롯이라는 허울을 둘러쓴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의 덩어리들이 그만 생생하게 살아나 버리는 것. "그들"의 "포옹"을 지켜보던 "기억"을 품은 지석처럼, 지석의 기막힌 사랑을 지켜보는 우리의 삶에 그 디테일들이 그만 손을 뻗어버리는 느낌 같은 것. 제길, 그래서 그만 본의 아니게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와 "캐릭터"의 전개에 기가 막히면서도 앞뒤 맥락 전혀 모르면서도 가슴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장면과 설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한숨지으며 바라보던 기억. 일상을 연기하는 강지환은 참 배우같지 않게 행동할 때가 있어서, 그 어설프고 헌신적인 연기가 가끔 굉장한 리얼리티를 보여줄 때가 있는데, 예컨대 술을 많이 먹고 나동그라질 때, 그 몸의 언어가 너무 무방비라 그 허탈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지지리도 울고 울고 또 울던 그의 얼굴과 함께, 쏟아지던 비, 우수수 흩어지던 낙엽, 그리고 그렇게 지던 한 사람의 생명. 플롯이고 뭐고, 그 디테일 때문에 그 죽음을 남처럼 바라볼 수 없었던, 그래서 그만 내 죽음마저 생각해 버리고 말았던. 말도 안 되게 "나랑 삼개월만 살자"가 튀어나오고 "미친 넘"이라는 한 마디에 그저 눈물만 줄줄 흘러내리는 그 극단적인 상황들에, 그만 공감해 버리게 만들던. 그래서 그만 그 구제불능성의 플롯을 구원해 버리고 만 디테일로, 난 이 드라마를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조금은 왠지 부끄러운&nbsp;고백.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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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TV 드라마</category>

		<comments>http://celiasden.egloos.com/1590142#comments</comments>
		<pubDate>Sat, 23 Jun 2007 01:59:45 GMT</pubDate>
		<dc:creator>문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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