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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lackmoon`s 日.常.茶.飯.事.</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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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日.常.茶.飯.事.</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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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4 Nov 2009 14:45:0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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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lackmoon`s 日.常.茶.飯.事.</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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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자장가. 그것의 언캐니함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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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div style="TEXT-ALIGN: left"><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span></div><p class="바탕글"><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24/37/b0034137_4b0bdd08b057e.jpg" width="490" height="63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24/37/b0034137_4b0bdd08b057e.jpg');" /></div><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그것은 '잠'이자 '안식'이며 '끝나지 않을 꿈'이다.<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우리는 인생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낸다.'는 이 자조적인 고백 속에서 '잠' 그 자체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무기력함, 통제할 수 없음 그리고 미지의 공간의 동의어로서 말이다. 전기불의 발명자인 토마스 에디슨은 '잠은 시간의 낭비'라고 말하기 까지 했는데, 그에게 잠이란 정체된 생산력이자 빛으로 몰아낼 대상을 의미했다. </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하지만 과학적으로도 또 자연적으로도 잠은 거스를 수 없는 과정이자 숙명처럼 따라 붙는 동전의 다른 한 면이다. 심지어 잠을 거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소유했던 세계의 절반마저도 잃게 될 것이 분명하니.<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물론 역사적으로 잠에 대한 묘사가 매번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잠이야 말로 인생이라는 축제의 주된 양식이며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향유’라고 말했으며</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 인류의 가장 오랜 서사시라고 일컬어지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왕의 꿈 은&nbsp;제왕이 될 것임을 알려주는 예지몽이었다. </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의학적인 차원으로도 잠은 인체와 정신을 재생시키는 중요한 주기인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면 중에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성장 호르몬은 조직을 회복하고 면역체계를 강화시킨다.<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하지만 이와 같은 놀라운 생산 능력에도 불구하고 잠은 주로 죽음의 은유로 사용되어왔다. 기원전 8세기 헤시오도스는 '죽음의 형제, 곧 잠을 가진 밤.'이라는 표현으로 잠과 죽음을&nbsp;하나의 고리로 연결했으며. 16세기 영국의 시인 사무엘 다니엘 또한 잠에 대한 우리의 양면적인 태도를 다음과 같이 : "마력으로 근심을 잠재우는 밤이여, 캄캄한 밤의 아들이여, 고요한 어둠에서 태어난 죽음의 형제여' 라고 말했다. 최근 읽은 남진우의 시 또한 이렇듯 잠과 죽음의 유사성을 매혹적이고 동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럼에도 후반부에&nbsp;드러난 반전은 무척 섬뜩하다.<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먼 산 먼 길&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남진우<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br>어린 시절 텅 빈 마루에서 홀로 잠이 들면<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호랑이 한 마리 산에서 내려와 나를 물고 갔다 한다<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요한 한낮 지나 서서히 해가 저물녘<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깊은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면<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호랭이한테 물려 갔다 돌아온 게지<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식구들은 웃으며 말하곤 했다<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잠이 든 다음<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살그머니 수풀을 헤치고 내려온 호랑이 한 마리<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시내를 건너고 신작로를 가로지르고<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살짝 열린 대문을 지나<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햇살 눈부신 저편 마루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나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으기 바라다본 것일까<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뜨거운 호랑이 아가리에 물린 채<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몇 개의 산과 들을 뛰어넘는 동안에도<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깊은 잠은 끝없고<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직 지나가는 바람만이 귓가에 윙윙거릴 뿐<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 집 동굴에서도 여전히 잠만 자는 나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호랑이는 이리 굴려보고 저리 굴려보고<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혀로 핥아도 보았다가<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너무 심심한 나머지 다시 돌려주기로 한 것일까<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br>호랑이 입에 물려<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으로 오는 동안<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화르르 져 내리는 꽃잎 속에 아슴아슴 먼 길이 떠오르고<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악 대문을 열고 마실 나서는 어머니가<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에구머니나 놀라 외치는 소리에 옛다 내던지고<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호랑이는 다시 먼 산으로 가버린 것일까<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도 잠이 들면 <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오는 호랑이의 나직한 <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발소리가 들린다 내 귓가를 맴도는 더운 숨결 내 몸에 와 닿는<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타는 눈빛 내 잠 속에서 한 껏 아가리를 벌리고 <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단숨에 나를 삼켜버리는 <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 호랑이<br><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잠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가 어린이들을 재우기 위해 부르는 노래, ‘자장가’ 속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잠들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일종의 최면적 효과를 주는 것이&nbsp;자장가라고 한다면,&nbsp;그 속의 내용은&nbsp;영원한 안식에 대한 동경과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nbsp;마치 태초의 자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무가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nbsp;우리네</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 할머니들이 불러 주었던 자장가를 떠올려보자.<br><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은자동아 금자동아 이제 그만 울거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아지야 짖지마라. <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양이야 우지마라. <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도깨비야 오지마라. <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 아기 잘잔다.<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이 반복적이고 최면적인 노래는 매우 단조로운데, 우스개 소리에 따르면 이 반복의 최면성은 전 세계 자장가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라고 한다.&nbsp;주목할 것은 이러한 단조의 선율이 무가에서 비롯되었으며, 무한 반복의 최면상태를 통해&nbsp;황홀경으로 나아가는 형식적 과정은&nbsp;무가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nbsp;실제로 제주도의 많은 무가들이 형식적으로나 주제적인 면에서 잠노래 (자장가)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이는 서구의 자장가에서 조금 자세하고 학술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nbsp;이는 아무래도 더&nbsp;그로테스크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인데 &lt;Baby, baby, naughty baby&gt;가 대표적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불렸다는 이 자장가의 가사는 지금으로서도 받아들여지기 힘든 잔혹한 내용을 담고 있다.&nbsp;악몽을 유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br><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lt;Baby, baby, Naughty baby&gt;<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가, 아가, 나쁜 아가<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용! 요 시끄러운 녀석아.<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장 조용하지 않으면<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나파르트가 이 길로 지나간데<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br>아가, 아가, 그는 거인이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루앙의 철탑처럼 크고 시커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철탑에 기대어 아침식사로, 저녁식사로<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쁜 사람들을 매일 잡아먹는데.<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가. 악.. 네 소리가 들리면<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안으로 뛰어들어올꺼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장 네 다리를 찢어 죽일거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양이가 쥐를 찢듯이 말야.<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널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곤죽이 되도록 널 때릴거야.<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널 먹고, 먹고, 또 먹어,<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 입에 아작. 또 한 입에 쓱싹.<br><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알 수 있다시피 여기서 말하는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을 지칭한다. 우는 아이를&nbsp;호랑이가 잡아간다는 우리네 설화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며 특히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를 괴물로서 처벌하고자 하는 훈육의 시나리오는 어떤 측면에서 매우 억압적이다. </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우리나라의 &lt;망태할아버지 설화&gt;에서도 마찬가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 &lt;망태할아버지 설화&gt;를 바탕으로 쓴 한 동화책에서는 훈육을 거부하고 망태할아버지의 공포를 능동적으로 극복하는 아이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다시 자장가로 돌아와&nbsp;한 장의 음악 앨범을 주목해본다. &lt;If on a winter's night&gt;이라는 영국의 뮤지션 스팅의 최신작이다.&nbsp;그 또한 자장가가 가진 이중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데, 북클릿을 통해 그는 자장가가 듣는 사람을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불안하게 만드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주장한다.&nbsp;예를 들어 피터 워릭이 작곡한 스코틀랜드 자장가 ‘발룰라로우’는 가사의 측면에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가 두드러지는데 비해, 교회선법음계 멜로디와 저음부가 맞대면하는 Eb음에서는 곡 자체에 어두운 조짐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장가를 통해 전해지는 많은 구전설화들은 그 자체로 마법적이고 어두운 밤의 이야기들이니 더더욱.<br><br></span>이상에서 우리는 자장가 속에 담겨진 죽음과 어두운 세계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알아보았다. 일종의 아이러니이다.&nbsp;가장 안전한 공간에서 불려지는 노래. 그것도 악몽을 두려워하는 아린이들을 위해 불려지는 노래 속에 이미 내재적으로&nbsp;죽음의 매혹과 공포가 동시에 손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측면에 또 다른 이름을 붙여볼 수 있겠는데.&nbsp;자장가야 말로 언캐니 함이 아닐까.&nbsp;익숙한 공간이 낯설어 지는 것. 삶 속에서 죽음을 찾아내는 아이러니함으로서.<br><br><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br><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1) 에디슨과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는&nbsp;&lt;밤으로의 여행&gt;의 저자 크리스토퍼 듀드니의 글을 인용했습니다.<br></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2) 무가와 잠노래에 관한 유사성 부분은 예전에 제주도 무속인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취재할 때 알았던 사실입니다. 학문적인 근거가 취약하나 일반적 통념으로도 무가와 자장가는 여러가지 점에서 유사하다고 합니다.<br></span></span><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3) 영국의 자장가 <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lt;Baby, baby, Naughty baby&gt; 부분은 <span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a href="http://blog.naver.com/sylplus?Redirect=Log&amp;logNo=70018730677" target="_blank">http://blog.naver.com/sylplus?Redirect=Log&amp;logNo=70018730677</a>에 더욱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또한 블로거 sulplus는 이러한 자장가가 일종의 훈육의 알레고리로 기능하고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 또한 재미있는 글이므로 링크를 타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span></span></span></p></span></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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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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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4 Nov 2009 06:59:1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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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제1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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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left"></div><div style="TEXT-ALIGN: left"></div><div style="TEXT-ALIGN: left"></div><div style="TEXT-ALIGN: left"></div><p><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23/37/b0034137_4b0a9ff1da654.jpg" width="340" height="48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23/37/b0034137_4b0a9ff1da654.jpg');" align="left" />학교 선배가 기획한 영화제 <br>&lt;서울국제건축영화제&gt;에&nbsp;<br>스텝으로 참여하게되었습니다.&nbsp;&nbsp;<br><br>특히, 이번 영화제에서 만나고&nbsp;<br>알게된 사실들이 무척 흥미롭고&nbsp;<br>또 지적, 감정적으로 많은 자극이&nbsp;<br>되었습니다.<br><br>건축과 영화가&nbsp;<br>프로덕션 디자인과 미장센이라는<br>관계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처럼&nbsp;<br>이&nbsp;둘간의 창조적 작업의 욕망은&nbsp;<br>거울처럼 닮아있다는 생각입니다.<br><br>HAF (Host Architects' Forum)에서&nbsp;<br>보았던 대가들의 작업도 놀라웠으며<br>그것은&nbsp;제 작업에 대한 반성으로<br>돌아왔습니다.&nbsp;<br><br>쓰고나니 굉장히 수행적인 <br>아르바이트를 한 셈입니다.<br><br><br><br>09. 11. 23<br>서울국제건축영화제를 마치고....&nbs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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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事</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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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Nov 2009 15:02:5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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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he Archaeology of the Modern Grotesque 발제문 일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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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div style="TEXT-ALIGN: right"><strong></strong></div><p class="바탕글"><strong>Modern Art and the Grotesque<br>:&nbsp; David Summers의 The Archaeology of the Modern Grotesque를 중심으로 발제문.</p><p class="바탕글"></strong><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07/37/b0034137_4af542ff5b634.jpg" width="390" height="39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07/37/b0034137_4af542ff5b634.jpg');" /></div><!--StartFragment--><p style="TEXT-ALIGN: center" class="바탕글"><strong>&lt;시녀들 Las Meninas&gt;<br>Joel Peter Witkin<br>1987. Photography<br><br></strong></p><div style="TEXT-ALIGN: left"><br>그로테스크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을지라도 이 글에서 사용하는 그로테스크의 개념적 정의는 1987년에 뉴욕 Alternative Museum에서 열린 전시 &lt;Repulsion: Aesthetics of Grotesque&gt;에 많은 부분을 빌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시가 그로테스크란 용어를 왜 이렇게 모호하면서도 동시에 확정적으로 사용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통시적 추적을 통해 우리는 그로테스크에 대한 개념적 확장 그리고 새로운 미적태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div><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1. 넘치는 상상력</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물론 그로테스크란 20세기 유일의 현상은 아니며 현대문명 특유의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서구에서는) 최소한 저 멀리 로마문화의 초기 기독교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예술양식이며, 특히 이 시기에는 인간적 요소와 동식물의 요소들이 정교하게 결합되있는 형태가 대다수였다. 언어적으로 살펴 볼 때, 이탈리아어 ‘grottesco'를 어원으로 하는 프랑스어 ’grotesque'는 15세기 말 고대 로마의 폐허가 발굴되었을 때 지하에 파묻혔던 건축물 볼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이 건축물은 동굴(grotta)과 흡사하였는데, 그 벽 모양은 덩굴식물인 아라베스크에 공상의 생물, 괴상한 인간의 상, 꽃 ·과일 ·촛대 등을 복잡하게 결합시킨 것으로, 그 괴이함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며 그로테스키(grotteschi)라는 일종의 괴기 취미의 유행을 낳았다고 한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며 이 특별한 유적지는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그 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동굴 벽에 서명 혹은 낙서를 하면서 건축물 볼트를 르네상스의 문화유산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그로테스크라는 취향은 역사적인 의미이외에도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 욕망과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물론 미술사적인 의미에서 그로테스크는 다소 경멸적인 의미를 동반한다. 이미 호라티우스(Horace)와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당대에 등장하는 과도한 상상력 -예를 들어 반인반수의 그림-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바 있다. 호라티우스는 이러한 상상력이야말로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로, ‘sick man's dream'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비트루비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8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lang="EN-US">‘요즈음 우리나라 화가들은 친숙한 세계의 모습을 분명하게 재현하는 것 보다는 기괴한 모양들로 벽을 장식하고 있다. 둥근 기둥 대신에 괴상한 나뭇잎 모양과 둘둘 말린 머리 부분을 떠받친 세로줄이 간 나무줄기 모양들을 그리고 박공 대신 당초무늬를 그린다. -중략- 그 작은 줄기 모양의 기둥들은 사람이나 동물의 머리를 쓴 반인반수를 떠받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형상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었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중략- 꽃의 줄기가 어떻게 지붕을 받치며, 촛대가 어떻게 박공 모양의 조각을 지탱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연약한 새싹이 인간의 형체를 싣고, 어떻게 뿌리와 덩굴손에서 꽃과 인간의 몸을 결합한 잡종 형태들이 자라날 수 있단 말인가?</span><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lang="EN-US">’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lang="EN-US"></span></p><p class="바탕글">사실 호라티우스와 비트루비우스의 이러한 미적 태도는 스토아학파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듯 당대 학자들의 완고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제3의 미감 소위 그로테스키한 취향은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시각적 재현을 넘어서 일탈에 가까운 창조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미적 풍토는 새로운 미적양식으로 계승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중세라는 혹독한 시간을 거쳐 그로테스키한 취향은 르네상스를 통해 재발견 되기에 이른다. 그것의 대표적인 양식이 Mannerism이다. </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2. 확장되는 의미</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놀라운 것은 16세기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매너리즘을 통해 이 기괴한 취향을 미적양식으로 수용하고 있다면, 영국에서 ‘antic'이라는 이름으로 대유행 중이었다. 특히 16세기 당시 영국에서는 이 ‘앤틱’이라는 용어를 ‘망상의, 악마적인, 바보스러우며 우스꽝스러운’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는 유럽사회가 그로테스크를 바라보는 시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또 하나 지적할만한 사실은 조각 분야에서 그로테스크의 또 다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비트루비우스는 이 알 수없는 취향을 비난하며, 이것을 동양적인 것과 연결시키는 데 소위 그로테스크를 동양적인 것 혹은 타자적인 것으로 (물론 지극히 서양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첫 번째 지점이라 하겠다. (실제로 그로테스크 장식은 동양에 근접한 로마의 지역 Tralles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조각 장식에서 발견되는 이종교배의 이미지가 오로지 동양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의 발견할 수 있는 수 많은 이종교배의 이야기들. 오비디우스의 &lt;변신&gt;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초자연적 변신의 모티브야 말로 가장 서양적인 이야기지 않는가.</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이렇듯 오해와 낙인 속에서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소위 타자적인 것, 초자연적인 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제부터 살펴볼 의미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전개된다. 그것은 바로 그로테스크의 의미를 비논리적이고 비균질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합리주의자들에게 있어 이성과 평정심은 조화로움과 질서를 보장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무질서한 자연을 조화롭게 만들고자 이성이 필요하며, 예술에겐 이러한 질서를 시각적으로 재현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반대에 서있는 무질서와 충동이다. 이것들은 세계를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며 마치 기상예보를 비웃는 폭우처럼 모든 질서를 망쳐놓는 파괴자이다. 따라서 이성은 비이성과 이성의 구도 속에서 세계와의 싸움을 벌이고자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바로 그로테스크가 취하는 입장인데. 그로테스크는 이러한 이분법 자체를 부정한다. 인간과 괴수를 섞어놓았던 회화적 상상력으로 사랑과 광기를, 행복과 우울을 뒤섞어놓는다. 실제로 예술영역에 있어서도 장르 간의 접합을 시도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출현한 예술형식이 비희극(혹은 희비극 tragicomedy), 즉흥극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로테스크엔 또 하나의 의미, ‘변덕스러움(Whimsicality)'이 추가된다. 이는 시적 즉흥과도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미술의 즉흥은 기술적이라는 차이를 갖는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라는 의미에는 ‘기술(skill)’의 의미가 숨어있게 된다. 그런데 알다시피 기술적이라는 단어에는 ‘영리하다’. ‘재치있다’의 의미 외에도 ‘기만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Zeuxis)의 그림이 새를 떨어트릴 수 있을 만큼의 기술적 동시에 기만적이었던 것 처럼 말이다. </p><p class="바탕글"></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3. 역겨운 그러나 매혹적인…….</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이전까지의 그로테스크가 개인의 상상력으로 비롯된 순수한 형태의 기술적 표현이었다면, 이제부터 살펴볼 그로테스크는 훨씬 더 심층적이고 어두운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었다. 비트루비우스가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지 않도록 접합하려는 작가의 작위성에 대해 알 수 없는 의도라고 공격한 것처럼 프로이드에게 있어 행위의 작위성, 즉흥적 결합이야말로 무의식의 층위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나아가 유기체적 생명을 거스르는 이러한 분절적인 시도야 말로 죽음을 향한 이중적 욕망의 발현인 셈이었다. 따라서 프로이드에게 그로테스크란, 소위 ‘외설적이고 음란한 것’의 지향이며 은폐된 무질서의 공공연한 개시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이미 플라톤은 &lt;공화국 republic&gt;에서 이러한 취향을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보고 싶은 한 사나이의 욕망에 비교하고 있다. 또 그 광경을 보고 역겨운 동시에 스펙터클하다고 말하는 사내처럼 그로테스크는 양가적인 성격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의 기능을 설명하며 불쾌의 쾌를 내세운 바를 떠올리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가상과 실재에 대한 태도인데, 플라톤이 있는 그대로의 시체를 보고자하는 페티시즘적 열망을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가상의 재현-시-를 통한 불쾌의 쾌를 설명하고 있다. 즉, 실제 느끼는 불편한 감성들을 가상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시이자 예술의 기능이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로테스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접목시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반인반수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가상적 재현이자 부정확한 모사이므로 예술적 쾌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진귀함(novelty)'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4. 알 수 없는 목소리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 키케로는 이러한 종류의 진귀함을 또 다른 말로 잠재력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호라티우스와 비트루비우스의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그로테스크의 매력을 잠재력, ‘눈길을 잡아끄는 힘’으로 표현했다. 신화적으로 말하자면 헤시오도스에 의해 이름 붙여진 9명의 뮤즈들이 전해주는 능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목소리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뮤즈가 공공연히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가 영적인 허상, 소위 영감으로만 전달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러한 관계는 시인과 대중과의 관계와도 닮아있는데, 왜냐면 시인이 전하려는 진실의 목소리는 결국 진실 그 자체라기 보다는 진실의 가상적 재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의 딜레마로서 말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이러한 영적인 모호함이 건축적으로 표현된 양식이 아라베스크(arabesque)이자 무어레스크(moresque)이다. 당시의 이슬람에서는 성상숭배 금지되었는데 따라서 신을 직접 묘사할 수 없는 이슬람의 예술가들은 신의 섭리를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해 전달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당초(唐草) 무늬와 기하학적 무늬가 탄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아라베스크였다. 특히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은 교역을 통해 이러한 이슬람의 양식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색적인 문양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따라서 진귀함의 측면에서 이를 수용하고 자기화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피라미드, 분묘와 같은 동양의 건축물에 경외의 감정이 포함된 질투였던 것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5. </span><span style="FONT-WEIGHT: bold">웃음과 조롱 사이 </span><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이미 비트루비우스가 당대의 등장한 새로운 기법을 두고 조롱했듯이, 그로테스크는 웃음-그러나 즐겁다기 보다는 조롱에 가까운-과 연관되어있다. (물론 이와는 관계없이) 아리스토텔레스는 &lt;시학&gt;에서 웃음의 기능을 카타르시스 즉, 질서를 유지시키는 무질서의 분출로 설명했는데 이는 바흐친이 주장한 카니발적 그로테스크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18세기 미학자 클레이버러 또한 그의 책 &lt;영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 1965&gt;에서 이러한 추이를 지적하고 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굴림; FONT-SIZE: 8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그리하여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이성의 시대-그리고 신고전주의의 시대-에 좀 더 광범위한 뜻으로 쓰이게 된다. 이 시기에는 무절제, 환상, 개인적 취향, ‘유기체의 자연스러운 상태’의 거부 따위와 같은 그로테스크 형식의 특징들이 조롱과 배격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18세기 초엽에 이르러 이 말에 담기게 된 보다 일반적인 의미는 형용사로 ‘우스꽝스러운’, ‘뒤퉁그러진’, ‘부자연스러운’ 명사로는 ‘부조리’, ‘자연의 왜곡’ 등이있다.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그런데 그로테스크를 문학사 차원에서 논의하는 필립 톰슨은 이러한 웃음이 단순한 해학과 풍자로만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그로테스크를 희극적인 것과 끔찍스러운 것으로 나누기 보다는 그로테스크가 주는 효과의 측면에 주목해, 해소되지 않는 갈등과 결말이 전하는 웃음과 공포야 말로 진짜 그로테스크라고 주장한다.</p><p class="바탕글"></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6. 과학의 이름아래</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호라티우스와 비트루비우스의 예술관이 자연 질서의 모사라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미켈란젤로는 이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자연 질서 자체가 ‘참’이라는 보장이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화가의 임무란 자연의 모사가 아니라 장소와 상황에 따라 상상력을 발휘하고 인간의 감정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행위였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 조르지오 바사리는 反 비트루비우스, 反 부르넬스키적인 미켈란젤로의 피렌체 건축을 두고 'alla grottesca'라고 불렀는데 이는 도나텔로가 만든 성막에 대해서 마찬가지였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사실 이러한 시도를 가능케 했던 것은 미켈란젤로를 후원했던 교황 네오 10세와 추기경 질리오 메디치 덕분이었는데 다른 것과 차별화된 진귀함이야 말로 자신들의 가치와 권위를 잘 드러내는 수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장신구, 소지품, 건축양식에는 反 비트루비우스적인 동시에 그로테스크한 반인반수, 괴물들의 이미지가 다채롭게 출현했다. 물론 조르지오 바사리는 이러한 미켈란젤로의 창의성에 대해 다소간의 불안을 느꼈는데 왜냐면 미켈란젤로의 파격적인 시도가 바사리에겐 전통의 해체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미켈란젤로이 건축양식을 두고 ‘독일에 비해 떨어진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말한 독일의 건축적 양식은 다른 아닌 고딕이었다. (가장 그로테스크한 미감을 살린 건축양식 고딕말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사실 르네상스에 가장 꽃을 피운 학문이라면 과학일 것이다. 따라서 예술 또한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인간중심의 미술을 원근법이나 해부학을 이용해 재현하였고 또 이를 통해 풍경화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특히 자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생겨나며 작품들은 보다 정확한 시각적 영상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량화를 강조하는 당시 분위기 속에서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광학과 기하학에 집착을 보였으며, 단테는 &lt;향연&gt;에서 ‘기하학은 오류로 얼룩지지않은 가장 순수하고 그 자체로 혹은 원근법의 도움을 받더라도 가장 자명한 학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원근법을 회화론으로 가져온 알베르티의 또한 구체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이상적인 비례를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문제는 주류의 움직임과는 달리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아나모포시스라고 불리는 원근법의 왜곡인데. 한스 홀바인의 작품 &lt;대사들&gt;이 대표적이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아나모포시스를 실험했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특히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면 그는 아나모포시스의 실험처럼 예술가는 단지 재현의 도구가 되어선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있어 예술가란 창조자이다. 따라서 다빈치는 극단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시각적 재현을 최고의 가치로 꼽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 그로테스크의 미의식을 반영한 결과이자 그로테스크의 제3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그로테스크가 자연 질서의 재조합이라는 전제에서 논의되어 왔다면 이제 그로테스크는 당당한 세계의 창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Pictorial Imagination'으로서 말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7. 창조적 성찰 </span></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마지막으로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빌려와 보자.(다소 뜬금없지만...) 방법론적 회의에 따르면 상상이란 단순히 내면의 외면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은 실제의 경험으로부터 유추되는 세계이다. 따라서 모순적이게도 상상은 감각적이고 육체적이며 물질적이다.</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그런데 그는 말한다. “지금 내가 잠옷을 입고 화롯가에 앉아 있는 것을 회의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물론 알고 있다시피 대답은 ‘yes'이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심지어 화롯가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자신마저 의심한다. 발가벗고 잠을 자면서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로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신병자의 환상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회의 함에도 단 하나 회의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모든 것에 대해 회의할 때조차 내가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회의할 수 없음”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사실이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이 끝없는 회의의 의미는 감각적 세계와 경험으로부터 유추된 합리적 세계 사이의 장벽을 허문다는 데 있다. 회의라는 극한의 사유방식을 통해 합리적 사고의 우월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화롯가에 앉아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던 것처럼 감각과 실재는 구분될 수 없이 모호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소멸한 셈이다. 이를 회화적으로 이해해보면 자연질서를 전제로 한 현실과 회화 간의 경계가 사라짐 꼴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성적 사고가 어차피 방법적 회의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라면 회화적 재현은 논리적 인과율에 비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데카르트는 두 개의 이분법적 경계를 소멸시키는 것으로만 방법적 회의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법적 회의는 감각과 이성을 ‘성찰’이라는 초감각적 초이성적 행위로 이끈다. 즉, ‘jumble together’의 사유로서.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결론적으로 데카르트의 회의란 경험으로부터 추출되는 사유이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사유를 넘어서기 위해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찰은 곧 상상이고 창안이다. 발견되는 것이 아닌 발명되는 것으로서.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호라티우스와 비트루비우스가 비난한 상상은 다름 아닌 방법적 회의이자 성찰이라고. 다소 궤변처럼 들리는 이러한 논리는 예술가의 위치에 관한 중요한 문제제기가 된다. 예술가들은 신처럼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창조가 어떤 식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하는 엄청난 문제를 동반한 질문으로 말이다.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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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7 Nov 2009 09:51:4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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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Variation>에 관한 작업 노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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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align="center"><strong><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0/30/37/b0034137_4aea7abf9f4c0.jpg" width="490" height="47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0/30/37/b0034137_4aea7abf9f4c0.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StartFragment--><p style="TEXT-ALIGN: center" class="바탕글"><span style="FONT-WEIGHT: bold" lang="EN-US">V.A.R.I.A.T.I.O.N<br>2009<br>5min. Found Footage Cinema</span></strong></strong></p></div><!--StartFragment--><p class="바탕글">작품의 개요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기존 필름에서 찾아낸 이미지들을 기반으로 하는 found footage film 형식의 이 작업은 호러 영화에서 흔히 다뤄지는 폭력의 이미지들을 재조합하고 각각의 장면들을 해체하는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파운드 푸티지 형식이란 원래의 필름에서 특정한 부분만을 가져와 필름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해체하는 작업을 말한다. 니콜 브레네즈에 따르면 파운드 푸티지의 미학적 효과란 회고, 전유/전용, 변주/소모를 통해서 이뤄지는데 특히 이 가운데 본 작업은 전유와 전용이라는 파운드 푸티지의 형식을 빌려 호러 영화의 장르적 컨벤션을 탐구하고자 한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작품의 내용 :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본 작업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하는 호러의 재현방식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실체적인 공포이던 심리적인 두려움이던 간에 영화는 그것을 분명하게 기술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시각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벤야민은 영화가 시각적인 이미지를 넘어선 촉각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시각적이라 함은 매우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코자 한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따라서 전통적 호러 영화에서 추출한 공포의 이미지들을 재구성하고 기존의 서사가 아닌 다른 문맥 위에 위치시켰다. 또 작업의 제목인 변주 (Variation)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지들을 변주하고 새로운 리듬을 부여했다. 이러한 작업은 크게 두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먼저 호러 이미지의 리드미컬한 이미지의 재구성을 통해 이미지에 부여된 아우라를 파괴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관객들이 느끼는 공포의 체험이 결국 스크린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적 진실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조합된 공포의 이미지에서 느끼게되는 공포의 순간은 스크린 현실이 관객들에게 얼마나 실체적 공포로 다가설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소위 장르 컨벤션에 관한 연구인데, 호러 영화는 그 어떤 장르에 비해서도 확고한 서사문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따라서 전형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장르 컨벤션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또 다른 목표였다. 호러영화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들은 기승전결의 구조로 나누어 편집하였으며 따라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관습적인 이야기의 양식을 따랐다. </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그러나 변주의 세 번때 파트에서는 데이빗 린치의 비서사적이고 비관습적인 영화들을 다룸으로서 앞 선 호러 영화들과는 또 다른 방식의 호러영화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물론 데이빗 린치에 대한 오마쥬와 함께)</p><p class="바탕글"><p class="바탕글"><br>Footage Films :</p><p class="바탕글"></p><!--StartFragment--><p class="바탕글">&lt;Suspiria&gt;. Dario Argento. 1977<br>&lt;Shining&gt;. Stanley Kubrick. 1980<br>&lt;Evil Dead&gt;. Sam Raimi. 1982<br>&lt;Lost Highway&gt;. David Lynch. 1997<br>&lt;The Blair Witch Project&gt;. Eduardo Sanchez &amp; Daniel Myrick. 1999<br>&lt;Haute Tension&gt;. Alexandre Aja. 2003<br>&lt;Hostel&gt;. Eli Roth. 2005<br>&lt;Porn of the dead&gt;. Rob Rotten. 2006<br>&lt;Hostel 2&gt;. Eli Roth. 2007<br>&lt;Laid to rest&gt;. Robert Hall. 2009<br><br>(제작년도에 따른 목차)</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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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事</category>

		<comments>http://blackmoon.egloos.com/4265748#comments</comments>
		<pubDate>Fri, 30 Oct 2009 05:34:31 GMT</pubDate>
		<dc:creator>blackmoo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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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시간은 두 배로 흐르지요...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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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18/37/b0034137_4adb118ac0305.jpg" width="440" height="46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18/37/b0034137_4adb118ac0305.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제목이 sad potato라네요...<br><br><br>요즘은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는 커녕 시간은 두배로 흐릅니다.<br>그러니 다른 게 슬픈 게 아닌게죠. </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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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日</category>

		<comments>http://blackmoon.egloos.com/4257762#comments</comments>
		<pubDate>Sun, 18 Oct 2009 13:02:51 GMT</pubDate>
		<dc:creator>blackmoo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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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고고학 프로젝트 & my Work.....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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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908/05/37/b0034137_4a7867f149f73.jpg" width="390" height="57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908/05/37/b0034137_4a7867f149f73.jpg');" /></div><strong><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가재울 뉴타운에 관한 10개의 이미지'&nbsp;<br>in <br>&lt;구구절절&gt; 展&nbsp;<br>of <br>NEMAF<br><br>@ 서교예술실험센터&nbsp;</strong></div><p></strong><br>&nbsp; 가재울 뉴타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면서 부터 '고고학 프로젝트'를 병행해 왔습니다. 거창하게&nbsp;'고고학'이라고 이름붙였지만 사실은&nbsp;뉴타운 지역에서 버려진 물건들 혹은 가재도구들을 수집하고 발굴하는 퍼포먼스라 하겠습니다.&nbsp;버려진 앨범의 조각들을 모으고,&nbsp;남겨진 삶의 잔해들을&nbsp;채집해 일종의 가상적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지요.&nbsp;따라서 제 방과 아파트 베란다에는&nbsp;누군가가 버리고 간&nbsp;카페트, 서랍장, 의자, LP, 책 심지어 화장품과 공사장&nbsp;인부의 장갑 등이&nbsp;보관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상적인 물건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그것을 질료 그대로 펼쳐내는 작업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이미 현대미술의 언어와 문법에서 이와 같은 작업은 전혀 새롭지 않으며,&nbsp;제 기억에도 2006 광주비엔날레에서 중국작가 '송동'이&nbsp;그의 어머니가 긁어모은 30년 간의 생활용품들을 전시장에 빼곡히 쌓아놓는&nbsp;작업이&nbsp;떠오르는군요.<br><br>&nbsp; 따라서 제 작업을 유니크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nbsp;그렇다고 해서 이를 두고&nbsp;페티쉬나 오마쥬라고 부를 수는 더더욱 없을 듯 합니다.&nbsp;하지만 변명하자면 아마도&nbsp;저에게 있어 이 '고고학 프로젝트'라는 방식의 작업은&nbsp;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제 자신에 대한 사유이자 대상에 대한 수행적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기록의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맺음에 관한 고민의 지점이지요.&nbsp;<br><br>&nbsp;&nbsp;사실 채집된 물건들은 모두 파편적인 삶의 재구성일 뿐입니다. 하나의 삶을&nbsp;총체화하는&nbsp;구성물도 아니고 기억을 담지하는 중요한 단서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 것' 그 자체이지요.&nbsp;김 아무개의 의자와 박 아무개의 책상이 만나는 기묘한 조합이자 아무 의미없는 단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물들을 모아 하나의 가정된&nbsp;역사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마치 태초에 하나의 진실이 있었던 모양처럼 하나의 완벽한 집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죠. &nbsp;&nbsp;<br><br>&nbsp;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봅니다. 소위 포스트 다큐멘터리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가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이미&nbsp;객관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면에&nbsp;드러낸 채 세상의 관찰자를 자임하고 나선 형국이지요. 그렇다면&nbsp;객관을 포기하고 어떻게 주관으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질문의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nbsp;오히려&nbsp;완성된 하나의&nbsp;결론 대신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질문을 이끌어 낼 뿐입니다.&nbsp;<br><br>&nbsp; 다만 제게 있어 그것은 수행성일 뿐입니다. 대상과 객체에 대한 끝없는 관계맺음 말이지요. 다소 소박하고 거친 결론입니다. 물론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현재 까지의 제게 있어 진실인 척 하는 거짓보다는 거짓인 채 하는&nbsp;진실을 추구하는 편이 오히려 더 옳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재구성을 전시로 풀어낸 것이 미약한 제 첫 작업 입니다.&nbsp;&nbsp;&nbsp;<br><br>------------------<br><br>사실 오늘은 무척 피곤해서 그런지 횡설수설이네요...</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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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事</category>

		<comments>http://blackmoon.egloos.com/4204182#comments</comments>
		<pubDate>Tue, 04 Aug 2009 17:01:45 GMT</pubDate>
		<dc:creator>blackmoo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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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 (NEMAF)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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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908/04/37/b0034137_4a77b39d77b45.jpg" width="340" height="48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908/04/37/b0034137_4a77b39d77b45.jpg');" /></div></p><br>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 가운데 전시섹션 &lt;구구절절&gt;展에 참여하였다.<br>진행 중인 다큐멘터리가&nbsp;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설치및 영상 작업으로 풀어 낸 첫 번째 전시였다. <br>조금더 보완해야 하고 더해져야 할 것들이 많지만 영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nbsp;&nbs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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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事</category>

		<comments>http://blackmoon.egloos.com/4203664#comments</comments>
		<pubDate>Tue, 04 Aug 2009 04:09:01 GMT</pubDate>
		<dc:creator>blackmoo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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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마르틴 졸리의 <영상 이미지 읽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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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07/26/37/b0034137_4a6b3499edeee.jpg" width="190" height="27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07/26/37/b0034137_4a6b3499edeee.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마르틴 졸리 지음 / 김동윤 옮김<br>문예출판사</strong></div><p>&nbsp; 소위 포스트 다큐멘터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며 고른 첫 번째 도서이다. 물론 이 책은 포스트 다큐멘터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보다는 이미지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이라고 할 텐데.&nbsp;솔직히&nbsp;소쉬르, 야콥슨, 퍼스, 바르트등 소위 기호학에 대한 탄탄한 이해 없이는 논문의 논리와 사유를 전개할 수 없을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작한 독서였다. 이미지 개념에 대한 일목 요연한 정리와 실제적인 예들이 함께 제시되어 있어 다른 기호학 서적들에 비해선 친절한 느낌이 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부록처럼 실린 참고 문헌들의 목록이었다. 논문의 주요 참고를 삼을만한 목록이다.&nbsp;<br><br>------------------------------------------------------------------------<br><br>'이미지'란 단어의 다양한 의미들 (시각적 이미지 / 정신적 이미지 / 가상&nbsp;이미지) 사이에 공통된 점은, 무엇보다도 유추analogie인 것 처럼 보인다. 하나의 '이미지'가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시각적이든 아니든, 자연적이든 가공적이든 간에, 그것은 우선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 닮은 것이다. ...p.53<br><br>'단어와 이미지, 그것은 의자와 테이블 같은 것이다. 여러분이 식사하고자 할 때 의자와 테이블이 둘 다 필요하지 않은가?'... p.179 . 재인용 .&nbsp;단어와 이미지에 관한 장 뤽 고다르의 언급 . &lt;텔레라마&gt;&nbsp;제2278호(1993년 9월 8일)&nbsp;&nbsp; <br><b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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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常</category>

		<comments>http://blackmoon.egloos.com/4196835#comments</comments>
		<pubDate>Sat, 25 Jul 2009 16:39:37 GMT</pubDate>
		<dc:creator>blackmoo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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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 장마철 요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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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비 때문에&nbsp;연 이틀 다툼이다.<br>그리고 이로 인해 마음이 쓰여서 별로다.<br><br>서로 사과도 하고 이해도 했건만, <br>장마철의 습기처럼 가시지 않는 불편함에 더욱 신경이 예민해진다.<br><br>에고고...<br>이봐요. 미안해요.<br>싸우지 말고, 잘 지내보자구요.... </p>			 ]]> 
		</description>
		<category>日</category>

		<comments>http://blackmoon.egloos.com/4190914#comments</comments>
		<pubDate>Fri, 17 Jul 2009 14:28:44 GMT</pubDate>
		<dc:creator>blackmoon</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주디스 버틀러 읽기 ]]> </title>
		<link>http://blackmoon.egloos.com/418853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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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907/15/37/b0034137_4a5cc26e37a45.jpg" width="240" height="34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907/15/37/b0034137_4a5cc26e37a45.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strong>&lt;주디스 버틀러 읽기&gt;<br>임옥희 저. 도서출판 여이연</strong>&nbsp;</div><p><br>&nbsp; 1996년 6월, MTF (Male to Femail)&nbsp;트랜스 여성을 성폭행한 피고인들에게 대법원은 유죄판결을 내렸으나 죄목은 '강간죄'가 아니라 '강제 추행죄'였다.&nbsp;반면에 2002년 하리수씨의 성별 정정이 허가된 후, 2003년에는 서울 및 지방가정법원에서 22명이 성별 정정 허가를 받았고 2004년에는 22건의 성별 호적 정정 신청 중 10건이 허가, 2005년에는 26건의 신청 중 15건이 허가되었다. 문제는 대법원의 이러한 판결 근거인데,&nbsp;신체적 사회적 영역에서 전환된 성 역할을 '최종단계'까지 수행한다면, 전환된 성을 법률적 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nbsp;과연 최종단계의 수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리적 성과 사회적 성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인가?<br>&nbsp;<br>&nbsp; 최근, 주디스 버틀러 스터디를 하고 있다.&nbsp;영상커뮤니케이션 석.박사 과정에 계신 분들과 함께하는 스터디인데&nbsp;꽤나 논쟁적이고 치열한 분위기이다. 원인이야&nbsp;단연코 주디스 버틀러의 1차 텍스트라 할 수 있다.&nbsp;난해한 글쓰기, 급진적인&nbsp;이론, 다소&nbsp;모호한 정치적 실천이 논쟁의&nbsp; 대상이다.&nbsp;임옥희씨가 쓴 &lt;주디스 버틀러 읽기&gt;시작으로 해 현재는&nbsp;버틀러의 &lt;젠더 트러블&gt;까지 나간 상태인데, 오늘도 장장 3시간 반에 걸쳐 발제와 난상토론이 계속되었다.&nbsp;(물론&nbsp;막판엔 집중력 부족으로 딴 짓을 하다가 강君으로부터 옆구리를 찔리기도 했지만 말이다.ㅠㅠ)<br><br>&nbsp;&nbsp;사실 주디스 버틀러 스터디를 시작하면서 임옥희씨의 &lt;주디스 버틀러 읽기&gt;를 첫번째 텍스트로 활용한 것은 버틀러의 저작들을 조금 더 친숙하게 접하기 위해서였다. 놀라웠던 것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버틀러의 글을 알기 쉽게 정리한 임옥희씨의 글쓰기였는데, 덕분에 &lt;젠더 트러블&gt;과 다른 저작들을 읽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아니 진행형으로서 도움이 되고 있다.)&nbsp;<br><br>&nbsp; 그렇다면 짧게나마 버틀러의 사유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br>&nbsp;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퀴어 이론가이다. (어쩌면 버틀러의 사유에서는 페미니즘과 퀴어를 양분하는 태도 자체가 옳지 못하지만 이론적이고 학술적인&nbsp;편의를 위해 나눠본다.) 문제는&nbsp;버틀러의 기획이 페미니즘 진영에서 조차 일부 수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nbsp;아마도 이는&nbsp;버틀러의 첫번째 공격 대상이 바로 보편적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이기 때문인 듯하다. 버틀러는 묻는다. 페미니즘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집단적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성차를 강조하고 여성성을 신화화하는 페미니즘 전체에 대한 공격이기도 한데&nbsp;이러한 인식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nbsp;보편적인 '여성'에 대한 가정은&nbsp;여성성에 대한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보편적 집단을&nbsp;해체함으로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급진적으로 분쇄해내고 있는 것이다.&nbsp;그런데 문제는 이것이&nbsp;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학을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운동에 미치는 영향이다.&nbsp;어쩌면 보편적 정체성의 해체는&nbsp;운동의 기원을 상실하는 것이자 연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nbsp;<br><br>&nbsp; 버틀러는 이러한 논쟁에 대해 &lt;젠더 트러블&gt;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는데, 먼저 정체성의 정치학은 이미 권력의 이중적 기능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기욕망을 처벌하는 '사법적 기능' 그리고 내면화된 권력을 일컫는 '생산적 기능'이 그것이다. 두번째&nbsp;이유는&nbsp;여성이라는 재현의 대상이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인 맥락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다.&nbsp;실제로 아프카니스탄의 여인과 캘리포니아의 여인을 두고 어떻게 우리는 동일한 여성의 모습을 이상화해 그릴 수 있겠는가!&nbsp;요약하자면 버틀러에게 '범주'로서의 여성 주체에 대한 보편화와 통일화는 이성애 구도를 배껴온 또 다른 폭력일 가능성이 높다. 또 극단적으로 말해&nbsp;이성애의 구도에서 전개되는 페미니즘은 호모포비아를 생산할 수도 있다.&nbsp;<br><br>&nbsp;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버틀러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젠더라는 것이 일종의 이성애적 구도를 기획하는 사회화 과정이라면 섹스(생물학적 성차로서의 섹스)는 어떻게&nbsp;바라볼 수 있는가하고 말이다.&nbsp;재미있는 것은 버틀러의 답변이다.&nbsp;그녀에게 젠더와 섹스는 구분되지 않는다. 섹스는 젠더와 마찬가지의 담론의 산물이다.&nbsp;섹스는 진공상태에 놓여있지 않는다. 이미 태어나는 동시에 남성과 여성으로 양육되고 또 언어에 의해 반복적으로 호명되듯이 몸은 그리고 섹스는 모든 것의 대상이 된다.&nbsp;버틀러는 푸코의 사유를 빌려오기도 하는데, 푸코의 계보학에 따르면 섹스는 지극히 사회적이며 훈육의 대상이다. 각각의 에피스테메에 따라 섹스는 다양한 층위와 맥락에 서게 되고 결국 이성애적인 기획으로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아니 버틀러 식으로 말해 섹스는 곧 젠더이다. 심지어&nbsp;생물학적으로도 이것은 증명가능한데,&nbsp;성은 XX와 XY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XO, XXY, XYY로 구분되고&nbsp;있다.&nbsp;<br><br>&nbsp; 결국 버틀러가 해체하는 것은 섹스와 젠더의 경계이며, 보편적이라고 일컫어지는&nbsp;이성애적&nbsp;틀지우기다.&nbsp;어쩌면 이러한 대목에서 버틀러를 두고 결국 성차를 해체하는 퀴어이론가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이후 버틀러는 &lt;젠더 트러블&gt;의&nbsp; 개정판서문에서 약간의 입장이 후퇴하였음을 밝히기도 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변함이 없겠지만, 일시적이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보편적 정체성의 확립은 다소 용인할 수 있다고 말이다.&nbsp;사실 젠더와 섹스의 경계 허물기는&nbsp;뻗어나가는 버틀러 사유의 첫 단추이다. 이후로 버틀러는 섹스의 자율적 선택 가능성을 탐구하기도 하며, 애도의 정치학을 통해 슬픔으로 연대하는 정치적 실천 가능성을&nbsp;생각하기도 한다.&nbsp;<br><br>&nbsp; 이상이 버틀러식 '젠더 허물기' 약간의 맛보기인데, 발제를 준비하고 또 준비한 이들의 첫 마디는, '완벽한 이해가 아니므로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었다. 그 만큼 버틀러의 사유와&nbsp;기획이 어렵고&nbsp;방대하다는&nbsp;점이며, 다소 반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것은&nbsp;나 스스로가 이성애자의 삶을 너무도 공고하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마치 심리적 저항으로서 버틀러의 사유를 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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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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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4 Jul 2009 13:59:09 GMT</pubDate>
		<dc:creator>blackmoo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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