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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종교학 벌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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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삶과 일과 배움과 놀이가 채 나누어지지 않는, 두루뭉술한 공간을 꿈꾼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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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Nov 2009 08:00:09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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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종교학 벌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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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삶과 일과 배움과 놀이가 채 나누어지지 않는, 두루뭉술한 공간을 꿈꾼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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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부산 헌책방의 "바가바드 기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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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그저께 ‘함석헌의 종교’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은 한국기독교가 낳은 예외적으로 풍성한 텍스트인 함석헌과 그에 대한 종교학적인 독해가 만난 의미 있는 자리였다. 그날의 좋은 발표들을 듣던 중 내 마음을 찌릿하게 울린 대목은 예기치 못했던 세부적인 부분이었다. 함석헌은 &lt;&lt;바가바드 기타&gt;&gt;의 주해를 통해 그 특유의 기독교 사상의 폭을 넓힌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1950년 부산의 헌책방에서 &lt;&lt;기타&gt;&gt;를 구해 읽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발표문에의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span></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blockquote><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span style="COLOR: #330099">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에 하루는 헌책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기타가 한 권 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br>[&lt;&lt;바가바드기타&gt;&gt;, 함석헌 주석, &lt;&lt;함석헌 전집&gt;&gt; 13권(한길사, 1983), 3-4.]</span></span></p></blockquote></span><br /><br /><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자료가 공부를 어떻게 좌우하는지 푸념을 한 적도 있고(<a href="http://bhang813.egloos.com/1875227">자료 획득과 인문학하기</a>), 부산에서 종교학 활동을 한 채필근의 예를 든 적(<a href="http://bhang813.egloos.com/1875651">책이라는 물질과 학문</a>)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전쟁 중의 부산의 헌책방이라는 조악한 상황에서 공부할 책을 만난 이 이야기는 내게 다른 울림을 준다. 마치 기적 이야기라도 듣는 것 같은. 공부를 가능케 할 물질적 자원이 극미한 상황에서도 높은 사상을 펼쳐낸 함석헌 선생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span></p><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br>나는 근대 힌두교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20세기 힌두교가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인도 지식인들에 의해 민족주의적으로 빚어진 작품이라는 연구자들의 견해를 수용한다. 나는 ‘모든 종교는 한 봉우리에 이르는 여러 길이다’라는 멋들어진 문구가 20세기 힌두교의 현대화를 위해 힘쓴 종교운동가들, 특히 라마 크리슈나 같은 이들이 힌두교를 고차원적인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는 가운데 강조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lt;&lt;기타&gt;&gt;가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내용으로 독서된 것은 인도 지식인들에 의해 그런 식으로 가공되어 영어로 출판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을 해 본다. <br>발표에서는 파니카 이후의 종교다원주의 논의가 함석헌에 의해 독자적이고 선구적으로 제시되었다고 의의를 부여하였지만, 이를 좀 삐딱하게 생각하면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이나 함석헌이나 만들어진 힌두교 전통에 함축된 논리를 자신의 자리에 적용한 것이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공유된 자료에서 유도된 논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손에 주어진 자료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따지는 것은 후학의 몫일 것이고, 그가 주어진 것을 갖고서 주어진 것 이상의 고도의 사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br><br>그가 불교 문헌을 접한 사정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것은 감옥에서 읽을 것이 불교 경전밖에 없어서 생긴 사상적 만남이다. 척박한 물질적 조건은 더 심했다고 할 수 있겠다.</span></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span style="COLOR: #330099"><blockquote><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span style="COLOR: #330099">나는 본래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일제 때 감옥에 들어가서 감방에서 책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무량수경을 읽다가 기독교 신앙과 불교 신앙은 본질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읍니다.<br>[함석헌, &lt;진리는 더 위대합니다&gt;, &lt;&lt;불광&gt;&gt;(1978 6월), &lt;&lt;함석헌 전집&gt;&gt; 5권(한길사, 1983), 344.]</span></span></blockquote><p></p></span><p><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23/09/a0100509_4b0a404d07a99.jpg" width="500" height="312.18274111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23/09/a0100509_4b0a404d07a99.jpg');" /></div></span></p><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사진 출처: <u style="text-underline: #0000ff single"><span style="COLOR: #0000ff" lang="EN-US"><a href="http://hanulh.egloos.com/4541567">http://hanulh.egloos.com/4541567</a></span></u>&nbsp;)<br><br>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얼마 전 &lt;다큐멘터리 3일&gt;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부산의 헌책방. 채필근이 부산에서 종교학 책이 없어 고생했던 것과는 반대로, 함석헌은 이곳에서 뜻밖의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 공교롭다. 동서 사상의 한 만남이 있었던 곳으로 나는 이곳을 기억할 것이다.</span></p><br/><br/>tag : <a href="/tag/책" rel="tag">책</a>,&nbsp;<a href="/tag/부산" rel="tag">부산</a>,&nbsp;<a href="/tag/함석헌" rel="tag">함석헌</a>,&nbsp;<a href="/tag/바가바드기타" rel="tag">바가바드기타</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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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종교학공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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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부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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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Nov 2009 08:00:09 GMT</pubDate>
		<dc:creator>房家</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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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감염된 언어, 감염된 종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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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고종석의 &lt;&lt;감염된 언어&gt;&gt;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저항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워낙 깔끔한 문체와 유려한 논리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은 내가 종교 영역에서 <a href="http://bhang813.egloos.com/5939658">혼합현상(syncretism)에 대한 논문</a>을 썼을 때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div>그땐 내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겨웠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풀어내는 것은 고도의 글쓰기 능력이다. 그때 이 분의 글을 읽었다면 흉내라도 낼 수 있었을 것을.<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17/09/a0100509_4b0271fb0b78d.jpg" width="153" height="23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17/09/a0100509_4b0271fb0b78d.jpg');" /></div></div><div></div><div>나는 종교학(사실상 신학)에서 ‘혼합주의’에 쏟아지는 욕설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혼합현상’으로 고쳐 짓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어학에서 크레올화(-化, creolization)라는 예를 가져와서 설명에 보태기도 하였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어를 둘러싼 논쟁에 순수/깨끗함의 추구라는 문제가 존재했음을 깨닫지 못했다.</div></span><br /><br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종교사에서 만남과 섞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언어 역시 그러하다. <div>&nbsp;</div><div><blockquote><div>한 언어 안에 외래 요소가 상당히 들어와 그 언어가 잡탕 언어가 되는 것도 별난 일도 무서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스라한 옛날의 탄생 이래 끊임없이 겪어온 일이기도 하다.&nbsp;</div><div>[고종석, &lt;&lt;감염된 언어&gt;&gt;(개마고원, 2007), 92]</div></blockquote>&nbsp;</div><div>그러므로 순수에 대한 열망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꿈이다. 그것은 현상이 아니라 믿음이다.</div><div><blockquote><div>순수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우리가 그 순수한 언어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99)</div><div>순혈주의의 속살은 아집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섞임과 스밈은 문화적 생물학적 진화의 피할 수 없는 요건이다.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 역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다. 설령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순수한 한국어’만으로 이뤄진 언어 체계는 흉측하기 짝이 없는 전체주의의 언어일 것이다. 아름다운 순수어를 고집하는 마음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104)</div></blockquote></div><div><br>고종석은 ‘섞임과 스밈’이라는 글에 ‘언어순수주의에 거는 딴죽’이라는 부제를 부였다. 이를 흉내낸다면 혼합현상에 대한 나의 글은 ‘순수정통주의에 거는 딴죽’이 될 것이다. 순수정통주의는 종교사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지향이며, 한국 종교사에서는 더욱 유난하다. 흔히 드는 예로, 한국의 성리학, 선불교, 개신교(거기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는 원산지보다도 더 지독한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장로교회에서는 자신이 정통 캘빈주의 신학을 계승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하지만 ‘Cavin’이 ‘캘빈’으로 발음되는 것은 미국물 많이 먹은 개신교 내부의 관습이다. 이 언어 자체가 정통성의 모호함을 상징한다.)</div><div>고종석은 서문에서 순수성의 지향이 가지는 정치적 위험을 경고한다.</div><div><blockquote>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北伐), 정왜(征倭)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30)</blockquote></div><div>물론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이 타자에 대한 배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적당하다. 언어순결주의는 ‘민족’을 단위로 하는 반면에 순수정통주의는 자신의 종교 집단을 단위로 한다. 그 정치적 위험은 언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종교사가 증언하는 바다. 가까운 사례 하나만 들어보면, 한국 근대불교사를 극도로 혼탁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정화’(淨化)였다.</div></span><br/><br/>tag : <a href="/tag/혼합현상" rel="tag">혼합현상</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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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종교학공부</category>
		<category>혼합현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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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09:47:24 GMT</pubDate>
		<dc:creator>房家</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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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괴테의 이파리, 벤야민과 엘리아데의 현상학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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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사실 최근에 조너선 스미스가 엘리아데의 &lt;&lt;종교형태론&gt;&gt;에 붙이는 주석에서 괴테의 식물 형태론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때 좀 황당했다.(<a href="http://bhang813.egloos.com/1875769">&lt;&lt;Relating Religion&gt;&gt;의 2장</a>을 참고할 것) 처음 듣는 괴테의 식물학 책도 신기했거니와 엘리아데가 직접 언급도 하지 않은 책을 &lt;&lt;형태론&gt;&gt;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이론으로 제시한 것도 낯설었다.</span></p><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그런데 괴테의 이파리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다른 사상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 이야기가 조금 덜 낯설게 되었다. 그 사상가는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받아들인 괴테를 통해서 엘리아데가 받아들인 괴테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더 나아가 ‘현상학’이라는 전통에 대해서도 전보다 이해하게 되었다. </span></p><br /><br /><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엘리아데(조너선 스미스가 이해한 엘리아데를 말함. 이하 마찬가지)와 매우 비슷하게도, 벤야민에게 괴테가 영향을 미친 부분은 원형상/원형 개념이다. (이 개념은 ‘기원’과도 관련을 갖는다. 벤야민은 “&lt;&lt;독일 비극의 기원&gt;&gt;에서 개진한 기원 개념이 원현상이라는 괴테의 근본 개념의 엄정하고 불가피한 전이”임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기원 개념에 대해서는 최근에 &lt;&lt;독일 비애극의 원천&gt;&gt;이라고 번역된 책들을 찾아보아야 겠다.)<br>벅 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span></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blockquote><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벤야민이 찾아낸 19세기의 ‘이미지들’은……현재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는 감각적 원현상(Urphänomen)이다. 벤야민은 원현상이라는 용어를 자연 형태론에 관한 괴테의 글에서 빌려왔다.……괴테는 이러한 구조의 원형적 원형식(archetypal ur-form)이 생물학적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준다고 믿었으며, 나아가 이러한 원형식이 경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br>[수잔 벅 모스, 김정아 옮김, &lt;&lt;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gt;&gt;(문학동네, 2004), 101.]</span></blockquote></span><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괴테의 식물학의 의미에 대해서는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해준다.(1913년) 이 구도에 따르면 원형상은 이데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통해 드러난다. “(원형상은) 마음속의 광경일 뿐인 것 같지만 때때로 현실로 ‘주의 깊은 관찰자의 눈앞에 노출된다.”(102) 이러한 이해는 이전의 이분법을 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지멜은 이렇게 말한다.</span></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blockquote><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원형상은 이러한 괴리[객관과 주관, 보편과 특수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원현상은 시간 속에서 관찰된 무시간적 법칙 바로 그것이다. 원현상은 특수한 형식 속에서 무매개적으로 드러나는 일반이다. 그런 것이 존재하기에 그[괴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최선의 방법은 모든 사실이 이미 이론임을 포착하는 것이리라. 하늘의 푸른빛은 우리에게 색채론의 근본 법칙을 밝혀준다. 현상의 이면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현상 자체가 이론이기 때문이다.”(102-3)</span></blockquote></span><p><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지멜을 통해 괴테의 원현상 개념을 받아들인 벤야민은 이것이 파리를 비롯한 유럽 도시에서 관찰한 풍물들(엄밀하게 말하면 경제적 사실들)을 분석하는 자신의 작업의 구도이기도 함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이미지들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자본주의적-산업주의적 경제 형태를 훨씬 순수하고 맹아적인 단계에서 가시화하는 것”(104)이었다. 벤야민은 자기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사실들을 가지고 구성할 것. 이론을 완전히 제거하고 구성할 것. 괴테가 형태론에 관한 글에서 시도했던 것.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은 괴테뿐이다.”(104)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괴테의 개념을 자연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왔다”(103)<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7.egloos.com/pds/200911/11/09/a0100509_4afa41e67fe85.gif" width="412" height="47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7.egloos.com/pds/200911/11/09/a0100509_4afa41e67fe85.gif');" /></div>엘리아데와 벤야민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지는 사상가들이다.(예를 들어 사회주의에서 종말론적인 모티브만을 읽어내는 엘리아데는, 벤야민이 보았다면 철부지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리라. 과거의 모티브가 현실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된 소박한 관찰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괴테의 이파리 이야기를 모델로 현상으로부터 구조를 파악하는 구도는 두 사상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벤야민은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strong>나뭇잎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적 식물 세계가 펼쳐지듯</strong>”(104)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일련의 역사적인 형태들이 펼쳐지는 것을 찾고자 하였다. 엘리아데는 다양한 종교 현상에서 이러한 펼쳐짐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펼쳐짐의 근원이 되는&nbsp;원형적인 이파리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lt;&lt;종교형태론&gt;&gt; 작업의 동기가 되었다.</span></p><br/><br/>tag : <a href="/tag/발터_벤야민" rel="tag">발터_벤야민</a>,&nbsp;<a href="/tag/엘리아데" rel="tag">엘리아데</a>,&nbsp;<a href="/tag/원형" rel="tag">원형</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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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 익힘</category>
		<category>발터_벤야민</category>
		<category>엘리아데</category>
		<category>원형</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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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1 Nov 2009 04:39:4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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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한풀이를 넘어선 책이 되었으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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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최준식 선생님은 대중적으로 호소력 있는 문체로 종교학의 중요한 이슈를 다루는 책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몇 안 되는 종교학자 중 하나이다(독보적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nbsp;않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분이 종교학계의 (김용옥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준만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nbsp;파급력이 그 정도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span><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404040" size="3" face="바탕"><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br />
</span></font><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404040" size="3" face="바탕"><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span style="LINE-HEIGHT: 18px; FONT-FAMILY: dotum; COLOR: rgb(51,51,51); FONT-SIZE: 12px" class="Apple-style-span"><table><tbody><tr style="PADDING-BOTTOM: 0px; LINE-HEIGHT: 1.5em;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COLOR: rgb(51,51,51); FONT-SIZE: 12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0px"><td style="PADDING-BOTTOM: 0px; LINE-HEIGHT: 1.5em;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COLOR: rgb(51,51,51); FONT-SIZE: 12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0px"><a style="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 black; FONT-WEIGHT: normal; TEXT-DECORATION: non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699789&amp;ttbkey=ttbbhang8132252004&amp;COPYPaper=1"><img style="PADDING-BOTTOM: 0px; BORDER-RIGHT-WIDTH: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BORDER-TOP-WIDTH: 0px; BORDER-BOTTOM-WIDTH: 0px; BORDER-LEFT-WIDTH: 0px; PADDING-TOP: 0px" border="0"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etc/book/coversum/8990699789_1.jpg"></a></td><td style="PADDING-BOTTOM: 0px; LINE-HEIGHT: 1.5em;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COLOR: rgb(51,51,51); FONT-SIZE: 12px; VERTICAL-ALIGN: top;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0px" align="left"><a style="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 black; FONT-WEIGHT: normal; TEXT-DECORATION: none"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699789&amp;ttbkey=ttbbhang8132252004&amp;COPYPaper=1">무교</a>&nbsp;-&nbsp;<img style="PADDING-BOTTOM: 0px; BORDER-RIGHT-WIDTH: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BORDER-TOP-WIDTH: 0px; BORDER-BOTTOM-WIDTH: 0px; BORDER-LEFT-WIDTH: 0px; PADDING-TOP: 0px" border="0" alt="6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6.gif"><br />
최준식 지음/모시는사람들</td></tr></tbody></table></span></span></font></div></div><br /><br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이번 책 &lt;&lt;무교: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gt;&gt;(모시는 사람들, 2009)을 읽고 느낀 반가운 점과 아쉬운 점은 선생님의 전작들에서 느낀 것들과 연속선상에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선명한 이슈 제기에 있다. 이보다 더 선명하기는 어려울 정도이다. 책의 제목에 모든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그렇다. 무교(무속)는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문화를 형성해오고 현재에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고유의 종교인데,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고 미신이라는 부당한 취급을 당해오고 있다. 무교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니라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이 책처럼 시원하게 이야기한 책은 없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것을 짚어낸다는 점에 이 책의 힘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다고 반복하는 데서 책의 한계가 노정되기도 한다.<div><br />
</div><div>내가 최선생님의 책에서 매번 느끼는 아쉬움은 대화 상대의 수준이 낮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적인 글쓰기이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내 생각엔 책에서 상정하는 대화 파트너(이것은 독자와 반드시 일치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의 수준을 조금만 높여 잡아도 책의 내용이 풍부해질 수 있는데, 그 가능성이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반복적으로 무교가 미신이 아니며 정교한 종교 체제라고 거듭해서 강변한다. 내 욕심에는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이야기를 전개했으면 좋겠는데, 이 책은 거기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한 권이 소진되는 느낌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미신에 불과한 무교가 어떻게 고유전통이냐고 힐난하는 60대 후반의 종교학자’를 언급한다. 아마 그는 가상의 독자를 대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제불능의 대상에 발끈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야기의 분량은 늘어날지 몰라도 비생산적이다.&nbsp;</div><div><br />
</div><div>이 책은 무교를 종교로 보아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을 담고 있다. 책의 1, 2부에서는 종교문화로서 무교의 다양한 측면을 소략하게나마 담음으로써 그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3부의 태도는 좀 다르다. 1, 2부에서는 부당하게 깎여 내린 무교의 위상을 격상하는 방향이었다면, 3부는 기독교와 불교를 싸잡아 깎아내리면서 무교와 같은 위치에 놓는 방향을 보인다. 물론 무교나 기독교나 불교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모두 존재하는 데, 무교의 나쁜 면만 부각되고 거대 종단의 나쁜 면은 부각되지 않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의 궁극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3부의 논의는 지나치게 한쪽 방향이다. 나는 책의 마지막 글인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똑같다”라는 표제와 “그저 권력으로 판가름 날 뿐”이라는 소제목은 참 잘 붙여진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이 블로그 어디선가 정통과 이단을 가리는 것은 쪽수(권력)의 문제라고 쓴 적이 있어서, 저자의 제목에 공감을 한다. 하지만 종교가 똑같다는 것이 냉소적인 뜻만 담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기독교도, 불교도 유치한 신앙인데 무교만 유치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논리전개는 파괴적이다. 나 역시 종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종교학도이긴 하지만, ‘모든 종교는 구라다’는 종교의 개혁을 꿈꾸는 종교인들이 내뱉는 선언적인 언어이지 종교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꾀하는 자리에서 나올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종교는 ‘신성한 구라’라는 정도의 존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div></span><br/><br/>tag : <a href="/tag/무교" rel="tag">무교</a>,&nbsp;<a href="/tag/권력" rel="tag">권력</a>,&nbsp;<a href="/tag/최준식" rel="tag">최준식</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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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 익힘</category>
		<category>무교</category>
		<category>권력</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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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9 Nov 2009 05:57:35 GMT</pubDate>
		<dc:creator>房家</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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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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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때론 짙타를 받기도 하지만, 나의 지론은 ‘사랑=소유욕’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전제를 깔고 있는 모든 연애 담론과 실천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 나에게 &lt;&lt;향연&gt;&gt;의 그리스 현인이 펼치는 사랑론이 좀 뜻밖의 것이어서 간단한 기록을 남긴다.&nbsp; <div>에로스(사랑)에 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눈 후 책의 중간쯤부터 소크라테스가 끼어들어 자신 특유의 논리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기 시작한다.</div></span><br /><br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blockquote><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1)여기서 그가 대뜸 던지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에로스는 특정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nbsp; <div>(2)문답의 결과 “사랑은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에로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 바로 그것을 욕구한다.”고 할 수 있다.</div><div>(3)“에로스는 자신이 욕구하고 사랑하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그것을 욕구하고 사랑한다.”</div><div>(4)“결국 자신이 갖고 있지 않으나 본인이 필요로 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만 욕망과 사랑은 존재한다.”</div><div>[플라톤, 박희영 옮김, &lt;&lt;향연: 사랑에 관하여&gt;&gt;(문학과지성사, 2003), 108-14.]</div></span></blockquote><div><br />
</div><div>처음부터 사랑은 한 주체가 상대방을 대상화하여 욕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상대방과의 상호관계의 문제는 고려되지 않으며 오직 주는 쪽에서의 문제일 뿐이다. 서양 전통에서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가 이렇게 일방적인 것임을,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한참 연구주체와 연구대상의 관계를 논하는 논문을 쓴 뒤라, 주체-대상이 이처럼 살벌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div><div>짝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 노인네의 사랑론에는 상호적인 교감은 전혀 안중에 없다. 사랑은 서로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나의 낭만적인 견해를 사정없이 깨는, 자신에 결여된 것을 욕망하는 이 사랑에는 분명 아픈 경험의 페이소스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예상하게 된다. 이것은 &nbsp;‘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대비되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의 감성이다.</div><div><br />
</div><div>1982년에 해오라기는 쓰디쓴 정서를 바탕으로 그렇게 노래했다.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div><div><br />
</div><div><blockquote><div>언젠가 당신이 말했었지 혼자 남았다고 느껴질 때</div><div>추억을 생각하라 그랬지 누구나 외로운 거라 하면서</div><div><br />
</div><div>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지 지난날이 자꾸 떠오르면</div><div>애쓰며 잊으려 하지 말랬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div><div>……</div><div>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오로지 주려고만 하랬지</div><div>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div></blockquote></div><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1/03/09/a0100509_4aef15b04b6bb.jpg" width="240" height="24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1/03/09/a0100509_4aef15b04b6bb.jpg');" /></div></div></span><br/><br/>tag : <a href="/tag/소크라테스" rel="tag">소크라테스</a>,&nbsp;<a href="/tag/사랑" rel="tag">사랑</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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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신변잡기</category>
		<category>소크라테스</category>
		<category>사랑</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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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Nov 2009 17:24:50 GMT</pubDate>
		<dc:creator>房家</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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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다이몬, 신이 아닌 존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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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
			<![CDATA[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플라톤의 &lt;&lt;향연&gt;&gt;에서 ‘다이몬’에 대해 설명해주는 대목을 만나다. <div>&lt;&lt;향연&gt;&gt;은 에로스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싣고 있는데, 그 중에서 중심으로 이루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소크라테스가 들은 디오티마의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테마에게 배운 것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에로스가 신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 그는 묻는다.</div><div><br />
</div><div><blockquote><div>“그러면 도대체 에로스는 무엇이란 말입니까?”</div><div>“……그는 가사적인(죽을 수 있는) 것과 불사적인 것의 중간자라 할 수 있지요.”</div><div>“디오티마여! 그 중간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div><div>“소크라테스여! 그것은 위대한 정령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b>정령(daimon)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신과 가사적 존재의 중간자</b>라 할 수 있답니다.”</div></blockquote></div></span><br /><br /><span style="LINE-HEIGHT: 26px; FONT-FAMILY: 바탕; COLOR: rgb(64,64,64); FONT-SIZE: 13px" class="Apple-style-span">정령은 신이 아니고,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이다.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div><br />
</div><div><blockquote><div>“정령은 어떠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요?”</div><div>“정령들은 신들에게는 인간들이 전하는 기도와 번제물들을, 그리고 인간들에게는 신들이 전하는 그들의 뜻과 번제에 대한 답례의 선물들을 해석해주고 전달해줌으로써, 신과 인간의 중간에 존재하면서 그 빈틈을 채워주고 이 우주 전체를 그 자체에 결합시켜주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지요. 정령들의 그러한 역할 때문에, 모든 예언술과 번제, 입문식, 주문 그리고 모든 예언과 마술에 관한 사제들의 기술이 번창할 수 있었지요. 사실 신은 인간들과 섞이지 않는 법인데, 이 정령들 덕분에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교제와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일들에 능통한 사람을 신통(神通, 절묘한 번역이다!)한 사람이라 부르는 반면, 그외 다른 일들에 능통한 사람, 즉 보통의 기술들이나 특정한 손재주를 지닌 사람을 장인이라 부른답니다.” <br />
[플라톤, 박희영 옮김, &lt;&lt;향연: 사랑에 관하여&gt;&gt;(문학과지성사, 2003), 118-19.]</div></blockquote><br />
</div><div>그리스 종교를 잘 몰랐던 나로서는 다이몬에 대한 딱 부러지는 설명에서 알게 된 것이 많다. 우선 다이몬이 신이 아니라는 것. 나는 다이몬이 유일신(God)은 아니라고 해도 잡신(gods) 계열에는 속할 줄 알았는데, 그리스 체계에서는 엄연히 계급이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nbsp;</div><div><br />
</div><div>내가 최근에 조사했던 내용은 ‘다이몬’이 기독교 세계에 잔존해 있다가(영어로는 '데몬'(demon)) 2천년이 지나 비서구 세계의 이방문화의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된 사정에 대해서였다.(<a href="http://bhang813.egloos.com/9748810">타일러의 귀신론</a>) 기독교 세계에 머무르는 동안 데몬에겐 악령이라는 평가가 덧붙게 되었고, 결국엔 이 부정적 함의를 벗어던지기가 힘들어서 정령(spirit)이라는 단어로 대체된다. 그래서 인용한 책에서 사용된 ‘정령’이라는 <b>번역</b>은 적절하다.</div><div>한국의 ‘귀신’에 서양인들이 처음 사용한 명칭도 ‘데몬’이었는데, 1900년 이후엔 ‘정령’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신을 신(god)이 아니라 데몬/정령으로 부른 것은 이해가 가는 것이지만, 위에서 소개한 그리스 문화의 엄밀한 용법에서 볼 때는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신/다이몬/인간’이라는 엄밀한 3항 분류가 존재했다. 반면에 동아시아 전통에서 귀신(鬼神)은 신(神)이다. 무당들이 모시는 것은 ‘신’이다. 그래서 신이 비신(非 神) 혹은 반신(半神) 계열인 데몬으로 불리는 것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b>번역</b>이다. 개념의 문화적 층위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당대 문화적 맥락의 위치에서 상응하는 것을 찾아낸 결과이다.</div><div>내가 일본 종교에 밝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의문이 있다. 나는 한국 전통의 신/귀신이나 일본의 신(가미)이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각자의 역사적 발전을 거치긴 했지만 같은 뿌리를 가졌고, 신 개념에 대한 생각도 비슷한 점이 더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신들은 영어로 ‘가미’(kami)라고 음역되든지 더 일반적으로는 신들(gods)이라고 표현되는 것 같다. 그래서 신국(神國) 일본은 ‘신들(gods)의 나라’로 영미권에서도 인정받는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정령의 나라’라고나 할까?</div><div><br />
</div><div>디오티마라는 무녀(巫女, 이 또한 매력적이면서도 위험을 담지한 <b>번역</b>이다)가 전해준 지혜로운 이야기를 듣다가 내 논문이 생각나 괜히 심란해진다.</div><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02/09/a0100509_4aee8f3ccb117.jpg" width="283" height="42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02/09/a0100509_4aee8f3ccb117.jpg');" /></div></div></span><br/><br/>tag : <a href="/tag/소크라테스" rel="tag">소크라테스</a>,&nbsp;<a href="/tag/번역" rel="tag">번역</a>,&nbsp;<a href="/tag/다이몬" rel="tag">다이몬</a>,&nbsp;<a href="/tag/귀신" rel="tag">귀신</a>,&nbsp;<a href="/tag/정령" rel="tag">정령</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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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 메모</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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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Nov 2009 07:42:24 GMT</pubDate>
		<dc:creator>房家</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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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신, 궁극적 실재의 방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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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class="Apple-style-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size: 13px; line-height: 26px; color: rgb(64, 64, 64);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것”이라고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이 기독교 위주의 종교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의는 계속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을 강조하는&nbsp;기독교식의&nbsp;정의를 교정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뭐니 뭐니 해도 불교이다.&nbsp;<div>유럽의 불교인들은 서구적인 종교 개념의 문제를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린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독일의 불교”라는 김명희 선생님의 발표의 한 대목이다.</div><div><br />
</div><div><blockquote>달케(Paul Dahlke, 1865-1928)는 종교가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면 종교로서 불교를 정의할 때 불교가 ‘신 없는 종교’의 구조를 갖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달케는 <b>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b>이라고 역설하였다. 단지 <b>이 질문의 답이 실재로부터 주어질 수 없을 때 종교적 방편개념으로서 ‘신’이 필요한 것</b>이다. 즉 인류의 견실한 발전을 위해 방편으로서 ‘신’ 개념이 필요하다는 게 달케의 주장이었다.</blockquote></div><div><br />
</div><div>독일 불교인 달케에 대해서는 이 글(<a href="http://www.ripl.or.kr/Archives/Academic/k019.htm ">이동호, “유럽불교의 개척자들”</a>)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편이다. 그는 종교는 삶의 저편에 대한 질문이라고 했다. 멋있는 표현이다. 신은 ‘저편’에 대한 하나의 상징, 불교적인 언어로는 방편이다. 저편은 ‘무한자’나 ‘궁극적 실재’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표현이다. 그의 설명 논리는 불교적인데, 여기엔 쉽게 거부하기 힘든 힘이 느껴진다.</div><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1/01/09/a0100509_4aed43e61a687.jpg" width="172" height="27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1/01/09/a0100509_4aed43e61a687.jpg');" /></div></div></span><br/><br/>tag : <a href="/tag/종교개념" rel="tag">종교개념</a>,&nbsp;<a href="/tag/불교" rel="tag">불교</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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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 메모</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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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1 Nov 2009 08:16:0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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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크루소의 종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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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소설 &lt;&lt;로빈슨 크루소&gt;&gt;는 1719년에 출판되었다. 맥그레인은 이 소설에 나타난 타자와의 만남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span></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blockquote><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font-size: 10p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000066">크루소의 경우에 그와 타자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19세기 진화론적 인류학의 경우처럼 </font><strong><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000066">시간</font></strong><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000066">이 아니라 </font><strong><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000066">종교</font></strong><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000066">이다.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지리적 종교가, 직선적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 종교가 가로놓인 것이다. 크루소의 외딴 섬은 기독교적인 지리 내에 위치한다. 지구 표면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관심의 모눈이라는 위도와 경도 아래 존재한다.……<br />
크루소가 보기에 ‘야만인’들은 벌거벗었고 자신은 옷을 입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총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영혼에 기독교로 무장하였다. 타자는 원시인(primitive)이 아니라 야만인(savage)이다. 기독교적인, 종교적인 인식 내에서 타자가 출현하는 것이다.……크루소에게 있어 야만인은 19세기처럼 역사의 시간에 근본적인 준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부재와 그에 따라 금수, 악마,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간 본성의 바닥상태에 근본적인 준거를 두는 것이다.[Bernard McGrane, &lt;&lt;Beyond Anthropology: Society and the Other&gt;&gt;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89), 51.]</font></span></blockquote></span><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19세기와 18세기의 타자 인식을 대조하면서, 18세기에 타자와 유럽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준거는 종교(기독교)의 유무라고 지적한 저자의 분석이 날카롭다. 18세기 유럽 독자들이 &lt;&lt;로빈슨 크루소&gt;&gt;에서 읽어낸 것도 바로 그러한 인식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수용의 자세가 1668년에 출판되어 18세기에는 다양한 유럽언어로 번역되어 읽혔던 &lt;하멜 표류기&gt;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관련된 내용은 <a href="http://bhang813.egloos.com/1875751">하멜의 한국 종교 서술</a> 참조) 이것은 카베사 데 베카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응과도 통하는 것이리라. (<a href="http://bhang813.egloos.com/1875622">카베사 데 베카 읽기</a>) <br />
&lt;&lt;로빈슨 크루소&gt;&gt;도 제대로 읽어보고 &lt;&lt;김씨 표류기&gt;&gt;도 보면, &lt;&lt;하멜 표류기&gt;&gt;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련만 요즘은 그럴 시간이 없다.<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5.egloos.com/pds/200910/08/09/a0100509_4accdb13ee478.jpg" width="430" height="38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5.egloos.com/pds/200910/08/09/a0100509_4accdb13ee478.jpg');" /></div></span></p><br/><br/>tag : <a href="/tag/만남" rel="tag">만남</a>,&nbsp;<a href="/tag/하멜" rel="tag">하멜</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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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 메모</category>
		<category>만남</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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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7 Oct 2009 18:18:29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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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종교는 원래 보수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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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종교는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이며 도덕적 의무는 종교에서 비롯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로버트슨 스미스는 한술 더 떠 종교의 기본적인 속성은 보수적이라고 선언한다. 이 대가의 말씀이 다소 노골적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것은 거역하기 힘든 논리이기도 하다. 나중에 그 자신이 보수적인 교단에 의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span></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blockquote><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font-size: 10pt; "><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000066">종교적 감정은 원래(naturally) 보수적이다. 종교는 오래된 관습이나 관례에 매어있기 때문이다. 신들은 전통적인 의례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고, 오랜 기간을 거쳐 확립된 행위 규범에 의해 신성함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신들은 항상 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것 같다.<br />
W Robertson Smith,&nbsp; &lt;&lt;Lectures on the Religion of the Semites&gt;&gt;, 2nd ed. (London: Adam &amp; Charles Black, 1894[1889]), 53.</font></span></blockquote></span><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훗날 로버트슨 스미스의 기본적인 입장을 받아들인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기능주의에서 받게 되는 비판이 이 점에 관한 것이다. 기능주의적 설명은 종교와 사회변동을 연관시켜 설명하는 데 취약하다고. 종교가 사회변동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사례들을 수도 없이 찾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속성’이 보수적이라는 지적을 뒤엎을만한 반론을 구성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span></p><br/><br/>tag : <a href="/tag/로버트슨_스미스" rel="tag">로버트슨_스미스</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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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 메모</category>
		<category>로버트슨_스미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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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7 Oct 2009 13:22:42 GMT</pubDate>
		<dc:creator>房家</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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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종교 개념의 세번째 영역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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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얼마 전에 피터 바이어(Peter Beyer) 교수의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서구적인 종교 개념이 비서구사회에 적용된 과정을 개괄하는 강연이었는데 나에게 너무 익숙한 내용이어서 그런지 다소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가 청중들의 수준을 다소 낮게 설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돌같이 단단한 논의 전개는 인상적이었지만, 내용은 다소 평범해서, 도대체 그의 대표적인 이론 작업인 지구화(globalization)에 대한 논의가 종교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회의만 느낀 채 강연장을 떠났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6.egloos.com/pds/200910/07/09/a0100509_4acb8b2e37918.jpg" width="396" height="19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6.egloos.com/pds/200910/07/09/a0100509_4acb8b2e37918.jpg');" /></div>오늘 종교 개념에 대한 다음 논문을 읽고서 그의 학자로서의 저력을 느끼게 되었다. 최근 종교학자들의 종교개념 논쟁을 깊이 있게 정리하고 자신의 대안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글이다. 그의 대표작에 해당하는 글은 아니겠으나 그의 정연한 논리에서 배울 점이 많은 글. 내가 그에 대해 가진 생각이 ‘짧았음’을 느끼게 되었다.<br>Peter Beyer, "Conceptions of Religion: On Distinguishing Scientific, Theological, And" Official" Meanings," &lt;&lt;Social Compass&gt;&gt; 50-2 (2003): 141. 파일: <a href="http://pds15.egloos.com/pds/200910/07/09/Beyer_Conception_religion.pdf">Beyer_Conception_religion.pdf</a><br></span><br /><br /><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바이어는 종교 개념에 대한 논의들을 둘로 분류한다. <br>1) 신학적인 종교 개념. 이 논의의 고전인 &lt;&lt;종교의 의미와 목적&gt;&gt;을 쓴 윌프레드 스미스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 스미스는 종교 개념의 불만족성을 이야기하고 ‘신앙’(faith)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는데, ‘불순한 종교’를 버리고 ‘순수한 신앙’을 지향하는 그의 태도에 신학이 함축되어 있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br>2) 다른 하나는 학문적인 종교 개념. 다소의 견해차는 존재하지만, 맥커천, 치데스터, 아사드, 피츠제럴드 등 종교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을 강조하는 최근의 비평적 학자들의 입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입장이 두드러진 것은 “종교만을 위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종교는 오직 학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고 말한 조너선 스미스일 것이다. 학문적 기획의 맥락에서 논의되는 종교 개념이다.</span></p><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br>바이어가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개념과 학문적 개념의 구분 외에 현실적인 종교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이론적 목적을 위해 정의하는 종교 개념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와는 별도로 ‘보통사람들이 일컫는 범주’(folk category)로서의 종교 개념의 층위를 분리할 것을 제안한다.<br>3)그는 이것을 ‘공공의’(official) 종교 개념이라고 부른다. 여러 국가들의 법률 체계에서 다루어지는 종교, 정부, 법정, 매스 미디어, 교육 기관에서 다루어지는 종교를 말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종교는 법적인, 행정적인 맥락에서 규정되는 종교라는 것.</span></p><p><span style="LINE-HEIGHT: 200%; FONT-FAMILY: 바탕; COLOR: #404040; FONT-SIZE: 10pt;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br>이 제안은 종교 개념의 현실적인 작용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학자들의 책속의 논의와 구분되면서도, 또 구분되기 때문에 학술적 논의를 도움되는 방향으로 참고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의 영역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br>예를 들어 티사 웬거는 미국 뉴멕시코주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자신의 전통적인 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전통을 ‘종교’로 명명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미국 정부가 전통 춤을 없애는 정책을 펴자, 원주민들은 이전까지는 풍습(custom)으로 분류되었던 자신의 전통을 종교로 명명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종교가 됨으로써, 그들의 전통은 미국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에 의거하여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Wenger, Tisa, ""We Are Guaranteed Freedom": Pueblo Indians and the Category of Religion in the 1920s," &lt;&lt;History of Religions&gt;&gt; 45-2 (2005): 89-113. 파일:<a href="http://pds15.egloos.com/pds/200910/07/09/Wenger_Pueblo_and_Religion.pdf">Wenger_Pueblo_and_Religion.pdf</a>] 이러한 종교 개념의 전략적 사용은 공공의 종교 개념 영역에서의 일로 잘 이해될 수 있다.<br>다른 예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무교/무속이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특히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미신 취급을 받았던 예도 공공의 영역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a href="http://bhang813.egloos.com/10143418">전씨 아주머니 이야기</a>) 전에 내가 종교 개념에 대해 쓴 어설픈 논문에서는, 논문을 여는 부분에서는 공공의 종교 개념에 대한 사례들을 늘어놓고, 본문에서는 학문적 개념에 대한 고민을 전개했다.(<a href="http://bhang813.egloos.com/1875494">덧씌워진 종교 개념에 대한 최근 논의들</a>) 지금 생각해보니 바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여 두 영역을 구분한다면 좀 더 논의가 선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span></p><br/><br/>tag : <a href="/tag/종교개념" rel="tag">종교개념</a>,&nbsp;<a href="/tag/피터_바이어" rel="tag">피터_바이어</a>,&nbsp;<a href="/tag/티사_웬거" rel="tag">티사_웬거</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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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종교학공부</category>
		<category>종교개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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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티사_웬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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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6 Oct 2009 18:29:1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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