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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Head Star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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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Smash Your Head!</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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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8 Oct 2007 13:04:4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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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Head Star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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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바로가기 삭제, 혹은 언인스톨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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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 그것은 매우 우발적이고도 계획적인 사건이었다. 예정되어 있었던&nbsp;일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것 뿐이야, 라고&nbsp;전화를 끊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날도 밤늦게 헬스장에서 돌아와 방청소를 하며 그녀와&nbsp;통화를&nbsp;했다. 통화는 내내 유쾌했다. 소소했고, 일상적이었다.&nbsp;그러다가 나는 어느새 방바닥에 누워&nbsp;핸즈프리 마이크를 입술 바로 앞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럼 우리 그냥 오빠-동생하는 게 어떨까.&nbsp;깔깔거리며 웃던 일련의&nbsp;대화&nbsp;후에 헤어짐의 말들이 자연스럽게&nbsp;오고 갔다. 생경하고 부조리한&nbsp;말들이었다. '오빠-동생 관계로의 전환'이라는 합의의 구체적인 내용조차&nbsp;전형적인 이별의 모습과는 달랐다. 울면서 싸운 적이 한 번 없는 우리의 헤어짐은&nbsp;그저 고요하고 담담했을 뿐이다. 말은 안했지만&nbsp;이별조차 저 혼자 집어삼켜 삭히겠다는 그녀의 익숙한 희생 정신, 혹은 마조히즘때문이라는&nbsp;것을 나는 알았다. 당신 정말 끝까지 이럴꺼야?&nbsp;너무 착해서 자꾸 속상한&nbsp;그녀에게&nbsp;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nbsp;합의 이후 우리의 대화 또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즐거웠다. <br /><br />2.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lt;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t;라고 하여 집에서 혼자 다운받아 본 기억이 있다. 레트는 스칼렛을 좋아했으나 애슐리를 향한 스칼렛의 마음에 지쳐 그녀를 떠난다는 것이 영화 속 애정관계의&nbsp;주된 스토리 라인이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오래된 에세이집에서 '레트는 스칼렛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쓴 적이 있다. 나는&nbsp;그 의견에&nbsp;동의한다. 레트는 스칼렛을 사랑하지 않았다.&nbsp;그는 단지 지독한 에고이스트였을 뿐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nbsp;골수 에고이스트인 나에게 몇 달 간&nbsp;시달린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역 전후로 두 달씩 총 네 달, 인생의 전환점에 선 이십대 중반 남자가 가장 정신없을 시기에 그녀는 내 곁에 있었다. 자신에게만 애정을 쏟기에도 바빴던 나에 대한 그녀의 인내와 희생이 우리 관계 밑에 구조적으로 깔려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감당할 수도&nbsp;없었다. 구조화된 착취관계를&nbsp;더 못 견뎌하던 것은 그녀보다 오히려 내 쪽이었다.&nbsp;어떤 블로거의 말처럼 마조-마조 관계의 흥미로운 측면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nbsp;나는&nbsp;자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에고이스트'에다가&nbsp;남에게 해를 끼치기보다 차라리 내가 손해보고자 하는&nbsp;'마조히스트'였다. 나를 희생할 수도 없고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힐 수도&nbsp;없는 것이다.&nbsp;그러므로&nbsp;내가 천사같은 그녀에 대해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였다. 차라리 내가&nbsp;에고이스트에 더 잘 어울리는&nbsp;사디스트였다면 어땠을까.&nbsp;우리의 연인&nbsp;관계는&nbsp;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br><br>3. 헤어진 다음 날 우리는 만났다. 항상 가던 레스토랑의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아 자주 먹던 메뉴를 시켰다. 빌딩 위의 현수막이 느리게 흔들렸고 초가을을&nbsp;배경으로&nbsp;새들이 허공을 비껴 날았다. 오빠-동생이라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편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웃었다. 다만 중간에 그녀가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의 제목을 물어서 내가 브라운아이드소울의 &lt;정말 사랑했을까&gt;라고 대답해주었을 뿐이다. 그러다 나는&nbsp;너스레 떨며&nbsp;책상 위에 놓여 진 그녀의 과제노트를 집어 와 펼쳐 보았다. 나 네 글씨 처음 봐.&nbsp;내가 말했다. 예전에 선물한 책에 편지 끼워 두었는데 그거 못 봤단 말이야? 그녀가 대답했다. 책에 편지를 끼워 선물하는 여자와&nbsp;제가 읽을 책이나 먼저&nbsp;읽느라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남자.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집으로 돌아와 책들을 뒤져 엽서 한 장을&nbsp;찾아내었다. 흐린 날 베네치아 수면 위로&nbsp;둥근 종탑들이 솟아있는&nbsp;그림의&nbsp;뒷장에&nbsp;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nbsp;고향 이야기를 써두었다.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함께 고향의 길을&nbsp;걷고 싶다는 그녀의&nbsp;작은&nbsp;청을 들어줄 수 있을지는 잘&nbsp;모르겠다. "parting이 아니라 conversion이야. 프로그램 제거가 아니라 그냥 바로가기 삭제일 뿐이라고." 내가 설득하려고 했던 이별의 모토에 충실한 우리는 오빠-동생의 관계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렇게 고향의 거리를 같이 걷는&nbsp;미래의 작은 문제 하나에도&nbsp; 우리의 '관계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를&nbsp;인간적으로 참 많이 아끼는&nbsp;나는 어쩌면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만났던 어떤 여자보다&nbsp;성숙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를 내&nbsp;울타리 안에서&nbsp;놓치기 싫은, 지극히 에고이스틱한 욕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nbsp;나는 아카시아숲이 보이는 내 방의 작은 창가로 가 황지우의 &lt;몹쓸 동경&gt;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그리고&nbsp;'가끔 나는 사랑한다 소리내어 말하고 한숨을 쉬곤 해요'라고 쓴 그녀의 편지를&nbsp;두 번째&nbsp;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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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삶-비망록</category>

		<comments>http://beauclerc.egloos.com/794119#comments</comments>
		<pubDate>Wed, 26 Sep 2007 10:13:20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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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See You Offline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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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nbsp; <strong>#1. 복수는 너의 것<br></strong><br>&nbsp;&nbsp;&nbsp;고교 2학년 때의 동대문구장이 떠오른다. 그 날은 대통령배 전국 고교 야구 대회의 결승 진출 티켓을 놓고 인천고와 광주일고가 맞붙는 날이었다.&nbsp;학교 풍물부였던 나는 응원부 친구들과 함께&nbsp;경기장 뒤쪽&nbsp;스탠드에 자리잡았다.&nbsp;그리고&nbsp;이내&nbsp;훌리건들의 카니발이 시작되었다. 남고생들의 테스토스테론이 함께 폭발시키는 에너지는, 북채로 소가죽을 빵빵 두들기는 것이나 플라스틱 나팔을 불어대는 것만으로 해소될 성질이 아니었다.&nbsp;훌리건들에게는&nbsp;제물이 필요했다.&nbsp;그 날 우리의&nbsp;먹잇감은 광주일고&nbsp;좌익수,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4번 타자 김홍일이었다. '홍일아 똥꼬가&nbsp;바지먹는다' '야 니 여자친구 죽이더라' 따위의 저질 도발들이&nbsp;필드 안쪽으로&nbsp;쉴새없이 떨어졌다.&nbsp;어디선가 '저 새끼 텔레토비 닮았다!'는 말이 들리자 누구랄 것도 없이 와하하 웃다가, 일제히 텔레토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라돌이~뚜비~나나~뽀오" 그 굵은 목소리들이&nbsp;합창하는 꼴에 정신 사나웠는지, 김홍일은&nbsp;단순한 플라이볼을 놓치는&nbsp;어이없는&nbsp;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우리들은 배꼽잡고 웃으며 김홍일을 손가락질 했고,&nbsp;그는 스탠드쪽을 한 번 보더니 고개 숙이고 벤치로 뛰어 들어갔다.<br /><br />&nbsp;&nbsp; 9회말 광주일고의 공격. 스코어는 3 : 2로 인천고가 앞서 있었다. 大인천고의 대통령배 결승 진출이 목전에 보이는 상황이었다.&nbsp;인천고 훌리건들은 벌써 승리에 취해 교복 셔츠를 벗어 머리 위로&nbsp;돌리며 방방 뛰고 있었다. 그 때&nbsp;김홍일이 타석에&nbsp;들어섰다. 김홍일은 신발로 타석을 슥슥 정리하더니&nbsp;방망이를 들어 우리 쪽을 가리켰다. 9회말 투아웃에 주자 1루,&nbsp;1점 뒤진 상황. 이 드라마틱한 설정에 저 재수없도록 만화같은 액션이라니. 물론 우리는 단체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화답해주었다. 방망이를 짧게 잡은 김홍일의 계속되는 파울 속에&nbsp;풀카운트가&nbsp;이어졌고, 우리는 진심으로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꺙, 알루미늄 배트의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초여름의 알맞게&nbsp;촉촉한 하늘에&nbsp;하얗고 작은&nbsp;물체가 사선을 그리며&nbsp;솟아 올랐다.&nbsp;그것은 펜스를 넘겨&nbsp;마치 사이언스 배쓸의 EMP 쇼크웨이브와 같이 우리 쪽으로 쿵&nbsp;떨어졌고, 우리는 몇 초 간 정적 속에서 무장해제되어 있었다. 9회말 투아웃 투쓰리 풀카운트의 끝내기 역전 홈런.&nbsp;포카하다가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연속 세 번 정도 나오면 이&nbsp;사건의 확률과 같을까.&nbsp;그걸 눈 앞에서 겪은 인천고 훌리건들은&nbsp;망연자실한 채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김홍일은 우리를 바라보며 2루 베이스를 밟았다. 그리고는 우리 쪽 스탠드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내렸다. 재수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김홍일 녀석의&nbsp;Sweet Revenge는&nbsp;심지어 우리들에게도 짜릿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nbsp;<br><br>&nbsp;&nbsp; 왕도비정도군과의 다섯번째 만남에 대한 후기는 이것으로 대신한다.&nbsp;내 성큰밭을 뚫고 들어오는 왕도비정도군의 마린-메딕 부대들을 보며 문득 그 날 하늘로 비상하던 김홍일의 야구공이 떠올랐다. 세상에 태어나서 6대 1로 이기다가 6대 7로 패배한 말도 안되는 역전패도 처음이지만, 이런 식으로 복수를 예고받고 나서 당하기도 또 처음이다.&nbsp;지난 달 나에게 캐발린 뒤&nbsp;야간 정액제를 끊고 20일동안 PC방에서 살았다는 왕도비정도군의 집념 앞에 나는 확실히 무릎을 꿇었다. 그건 차라리 지더라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니 내가&nbsp;아끼는 왕도비정도군은, 내가 이 일로 뭐 삐치거나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왕도비정도군은 만나면 만날수록&nbsp;마음에 드는 좋은&nbsp;동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다만 내 여자친구한테 하는&nbsp;'보클레어형이 여친님보다 제가 더 좋대요' 이딴 헛소리는 이제 제발 그만두자.&nbsp;<br><br>&nbsp;<br>&nbsp;<strong> #2. 헌책방과 설장구</strong><br><br>- 어렸을 때부터 내가 책에 집착했던 이유는 바로 형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이 있는 애들은&nbsp;무언가 달랐다.&nbsp;그들은 내게 없는 것들, 이를테면 아이큐점프, 매직아이,&nbsp;필기된 동아전과,&nbsp;쇠팽이, 개조한 베레타 BB탄 총과&nbsp;검은 비디오테잎같은 것이 있었다.&nbsp;녀석들은 나보다 항상 뭔가 아는 게 많았고 결정적으로 그걸 뻐기고 다녔다. 그&nbsp;사나운 꼴을 보던 어린 나는 내게도&nbsp;형이 있어서&nbsp;미지의 세계를 손쉽게 보여주기를&nbsp;바랐지만, 부모님께&nbsp;동생을 낳아 달라고 할 수는 있어도 형을 낳아 달라고 할&nbsp;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갖지 못한 형으로부터의 '고급정보'를&nbsp;갈구하며 동인천 배다리의 헌책방에 자주 갔다. 헌책방의 눅눅한 공기는&nbsp;마치 고대의 박물관처럼 시간을 정지시키는 힘이 있다. 나는 빛이 산란하는 오후에 헌책방 구석에 앉아&nbsp;한참동안 '시튼 동물기'나 '우리 몸은 왜'를 봤다.&nbsp;침을 발라&nbsp;넘겨 때가 묻거나 모서리가 말려 올라간 책들에는 간혹 누군가의 이름이나 흔적이 남아있었고, 그건&nbsp;마치 형이 보다가 나에게 준 것과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nbsp;<br><br>-&nbsp;1학년 때부터 시작한 풍물부는 내 고교 생활의&nbsp;절반이었다. 동료들과 북과 장구를 들쳐 메고 너른 잔디밭으로 나아가던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nbsp;1학년 때는 '북은 오히려 콘닥타-요'하고&nbsp;김영랑을 인용하며 호기부리고 다니던 고수(鼓手)였지만, 2학년 때 전학을 가서는&nbsp;그 학교 풍물부에서 장구로 전공을 바꿨다. 이후로 나는 장구와의 지독한 열애에 빠졌다. 아예&nbsp;개인 장구를 하나&nbsp;사서 심지어는&nbsp;집에서 방문 닫아 놓고 장구를 치는&nbsp;난리굿을 벌이기도 했다.&nbsp;장구에 대한 사랑은 앉은반 설장구에서 꽃을 피우고 선반 설장구에서 완성을 보았다. 장구를 치던 고교시절의 나는 마치 화선지에 떨어진 한 방울 먹물처럼, 나를 제외한 배경은&nbsp;모두 사라지고 오롯이 홀로 리듬 속으로 스며들곤 했다. 그건&nbsp;분명한 음악적 오르가즘이었다.&nbsp;그 때부터&nbsp;누가 넌 무슨 악기를 다룰 줄 아느냐고 물으면 당당히 '장구요'라고 대답을&nbsp;하고 다녔다.&nbsp;피아노나&nbsp;첼로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표정에는&nbsp;감추거나 드러내거나 비웃음의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이런 대답에 '맞장구' 쳐줄 수 있는 사람을 내 주변에서 만나기를 바랬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nbsp;않았다.&nbsp;<br><br>- <a href="http://kinopravda.egloos.com/3750160">Elliott</a>님과 <a href="http://narsha.egloos.com/1453323">narsha</a>님을 만났다.&nbsp;간단히 두 사람의 공통점은&nbsp;키가 크다는 것,&nbsp;신촌 일대를 주무대로&nbsp;산다는 것, 술자리에서의 유쾌한 대화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가 있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그들의 공통점은,&nbsp;어린 시절 헌책방과 설장구가 내 맘에 만들어 놓은 몇 개의 동그란&nbsp;구멍에 쏙 들어맞는 레고 조각같은&nbsp;사람들이라는 점이다.&nbsp;Elliott님은 어린 시절 헌책방의 나무 책장 아래서&nbsp;들추던&nbsp;책에 그어진 정성스런 밑줄, 혹은 형이 읽다가 물려준 헤르만 헷세 소설같은 사람이다. 나는 술자리에서 내내 Elliott님을 '최형'이라고 불렀고, 최형은&nbsp;학문을 열망하는&nbsp;복학생에게 꼭 필요한 말들을&nbsp;형처럼 다정하고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풍물부 회장을 지내면서 설장구도 쳤던&nbsp;narsha님은 늦가을의&nbsp;황금잔디 위에서 치는 장구의 열채 소리같은 처자다.&nbsp;날래고 화려하게 휘몰아치면서도&nbsp;북채가 짚는 리듬과 정확히&nbsp;조화를 이루어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nbsp;한다.&nbsp;장구와 맞장구의 미학을 아는 narsha님은 내가 찾던 그 사람 맞다. 이들과의 오프 모임은 정말 즐거웠다. 블로그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nbsp;없었을 소중한 인연들이다. 나는&nbsp;한 번 물면 잘 놓지 않는 맹수의 습성이 있으니 내 삶에 본격적으로 들어와 놓고선&nbsp;도망갈 생각은 하지&nbsp;않는 것이 좋다. 정확하게는&nbsp;어린 시절 꽉 물려 잘 빠지지 않던 레고 조각이 주던 절망감을 상상하시면 된다.&nbsp;<br><br>&nbsp;&nbsp;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이웃분들이 얼마나 멋진 분들일지 상상하면 막&nbsp;설레고 욕심이 난다. 다들 내 삶으로 끌어들여 꽉 물고 놓지 않고 싶다. 그러니까&nbsp;See you offline. 블로그가 사라진다고 해도 좋은 이웃분들과 연락하고 지내고 싶다. 이건 정말이다.&nbsp;<br><br>&nbsp;&nbsp; 그럼 저는 이만&nbsp;수업 들으러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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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삶-비망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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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6 Sep 2007 01:05:58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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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스웨덴 교육의 변화와 자립형 사립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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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nbsp;&nbsp; <strong>스웨덴 보수당 집권 이후의 교육<br></strong><br>&nbsp;&nbsp; 대학원 BK21 사업단이 스웨덴의 국가 교육청 국장을 초빙해 강연을 연다기에 한 번 가보았다. 주제는 스웨덴 보수당 집권 이후 교육 시스템의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연말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집권한 스웨덴 우파의 총선 승리를 기억할 것이다. 국내 보수언론들이 '노무현 정부의 비전 2030안이 토대로 하고 있는 스웨덴 복지 사회 모델을 스웨덴 자신이 부정했다!'며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긴 프랑스 우파의 대선 승리 이후에&nbsp;이명박 후보가&nbsp;사르코지 '동지' 운운했던 것에 비하면&nbsp;차라리&nbsp;점잖은 편이기는 했다.<br /><br />&nbsp;&nbsp; 당시 스웨덴 우파의 총선 승리를 복지 모델에 대한 민심 이반이 아니라고 분석한 한겨레 등의 평론은 타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히 민심을 분석하는 데까지만 옳았다. 그들이 '좌파적 우파'라고 장담해 마지 않던 스웨덴 보수당은 집권하자마자 부유세를 폐지해버렸으니 말이다. 저소득층과 중간 계급의 세금을 감면하되 복지 정책만큼은 사민당보다 잘하겠다고 약속했던 보수당의 모습은&nbsp;스웨덴 국민들이나&nbsp;국내 진보 언론들의 기대와는 다소 어긋나고 있다. 이명박의 유럽 우파에 대한 연정만큼이나 스웨덴 사민당을 '동지'로 부르고 싶었을 국내 진보 세력은 씁쓸한 시선으로 스칸디나비아&nbsp;반도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 스웨덴 국가 교육청 국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육 분야라고 해서&nbsp;'우회전'의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국장의 말마따나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교육 평준화를&nbsp;이룩했던 스웨덴의 교육은&nbsp;우파의&nbsp;입김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다. 'school for all'의 기치 아래&nbsp;만들었던 좌파의&nbsp;'통합학교'는 능력에 따라 학생들을&nbsp;선별하자는&nbsp;논리에 따라 3종류의 학교로 분화될&nbsp;예정이다. 의무교육 기간에 보는 국가 시험의 과목과 횟수도 더 늘리고, 이 성적에 따라&nbsp;상위 중등학교 진학이 결정되는 시스템 또한 공고해지고 있다.&nbsp;<br><br>&nbsp;&nbsp;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상위 중등학교에 진학할 때의 '학교 선택제(school choice)'라고 한다. 1991년부터 3년 간 있었던 우파의 단기 집권 기간동안 마련된 학교 선택제는 이후 15년 동안 논란 속에 유지되어 오고 있다. 1994년 재집권한 사민당은&nbsp;민간에 경영을 위탁한&nbsp;'자율학교'의 확산과 이 학교를 둘러싼 학교 선택제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nbsp;이미&nbsp;민간으로 넘어간 학교의 운영권을 다시 찾아올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우파의 집권 이후 학교 선택제는 더욱&nbsp;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자율학교는&nbsp;대도시의 각급 학교에서 10%를 넘어가고 있다.<br><br>&nbsp;&nbsp;&nbsp;&nbsp;&nbsp;<br><strong>&nbsp;&nbsp;&nbsp;&nbsp; 학교 선택제와 한국의 자립형 사립고</strong><br>&nbsp;<br>&nbsp;&nbsp;&nbsp;학교 선택제는 미국과 영국,&nbsp;스웨덴을 비롯한 주요 OECD 국가들에서 지난 수십년 간 가장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 일으킨 제도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교평준화&nbsp;논란 정도가&nbsp;될까. 실제로 미국의 바우처 제도나 차터 스쿨, 영국의 중앙정부 보조학교는&nbsp;학부모와 아동의 학교 선택권을 확대하고 학교 간 경쟁을 통해 교육의 다양성과 수월성을&nbsp;확보하려 했다. 미국이 훨씬 시장주의적일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의 학교선택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통해 계층간 교육기회의 형평을 도모하려는 방향에서 시행되고 있다. 그에 반해 영국은&nbsp;취약 계층을 위하여 투입되는 예외적 용도의 예산을 최소화하려는&nbsp;좀더 시장주의적인&nbsp;의도를 견지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nbsp;<br><br>&nbsp;&nbsp; 그러나 서구식 학교 선택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보다 그것이 계급적이고 인종적인&nbsp;차별을 노정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공동체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의식이 강하다는 스웨덴에서조차 학부모들이 학교를 선택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이민자들과 섞이기 싫어서'라고 한다. 아동의 다양한 관심과 성취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nbsp;교육에 시장원리를 도입하고 학교를 다양화하여 선택의 폭을 늘려도,&nbsp;결국 학부모들은 학교를 선택할 때 거의 전적으로&nbsp;학교의 인종 구성과 같은 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하다. 인종&nbsp;구성이 사회경제적 계층 구성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 경우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은 좀더 다양하고 만족스러운 형태의 교육서비스를 가져오기 보다는 학업성취와 계급에 기초한 학교의 기존 위계질서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우세하다.&nbsp;<br><br>&nbsp;&nbsp;&nbsp;한국 사회의&nbsp;학교 선택제에서&nbsp;주축을 이루고 있는 화두인 '자립형 사립고' 또한 이러한 계급적 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립형 사립고가 과연 도입 취지처럼 학교 교육의 다양성과 수월성을 확대하기 위한 것일까. 정말 학교 교육의 다양성과 학부모의 선택권 확대를 위해서라면 왜 대안학교의 제도적 인가 문제에 그렇게 미온적이었는가, 왜 요리고, 디자인고, 애니매이션고와 같은 특성화 고등학교를 더욱 확대하고 지원할 생각은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사실 궁색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립형 사립고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학부모의 선택권이라는 것은 성적과 계층에 따른 그룹핑, 심하게 말하면&nbsp;평준화로부터의 계급적 엑소더스에 가깝다. 그것은 서구의 인종적인 이유와는 다소 다르지만 학업 성취와 대학 진학이라는 도구적 목표에 수렴한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다.<br>&nbsp;<br>&nbsp;&nbsp;&nbsp;내가 굳이 자립형 사립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스웨덴 보수당의 집권이 가져온&nbsp;스웨덴 학교 시스템의&nbsp;변화가 대선을 앞둔 정국에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nbsp;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후보는 서울 시장 시절에도 강북의 자립형 사립고 설립, 특목고 확대를 추진한&nbsp;바 있다.&nbsp;역시&nbsp;이번&nbsp;대선 교육 공약에서도 전국의 자사고, 특목고 확대 조항을 찾을 수 있다. 자립형 사립고는&nbsp;김대중 정부 시절 몇 개의 시범학교를 지정하여 운영되다가 노무현&nbsp;대통령의 '평준화는 절대 건드릴 수 없다'는 방침에 따라 5년 동안이나 묶여 있는 상태다. 정권교체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여기서 표명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자립형 사립고의 무분별한 확대는 교육에&nbsp;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nbsp;한반도 대운하만큼이나 우려스러운&nbsp;일이다.&nbsp;<br><br>&nbsp;&nbsp;&nbsp;자립형 사립고를&nbsp;외국의 학교 선택제와 단순 비교를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nbsp;학생 납입금 때문이다. 스웨덴의 자율학교는 전적으로 국가 재정의&nbsp;지원을 받고, 미국의 차터스쿨이나 영국의 중앙정부 보조학교도 마찬가지다.&nbsp;최소한 '교육비의 공적 부담'이라는 공고한 토대&nbsp;위에서&nbsp;학교 선택제를 시행하고 있는데도&nbsp;적지 않은 계급적 논란에 휩싸인다. 이에 반해 자립형 사립고는 말 그대로 '재정의 자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학생 납입금의 고액화는 필연적이다. 교육의 사부담 위에서 시행되는 학교 선택제라는 말이다. 여기에&nbsp;적극적인 정책적 배려가 없다면 교육 기회의&nbsp;평등은 심각하게 훼손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아직 이러한 일각의 우려가 충분히 불식되지 못하고 5년 간이나 잠재되어 있는&nbsp;상황에서 이명박식 리더십으로 자립형 사립고가&nbsp;본격적으로 지정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nbsp;3불정책 담론의 진원지이자&nbsp;초등 사교육의 최대 목표인 특목고가&nbsp;몇 배로 늘어나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아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br>&nbsp;<br>&nbsp;&nbsp; 경제적 능력을 지닌 학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그 능력에 상응하는 지원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나는 상이한 능력, 특성, 기대를 지닌 사람들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현재의 평준화가 어떤 식으로든 개선되고 보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방식이 오직 자립형 사립고와&nbsp;특목고 확대라는 공식으로만&nbsp;사유되는 것에는 명백히 반대한다.&nbsp;상술하였듯이 대안학교를 제도적으로 끌어들이거나, 현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디자인고, 컴퓨터고, 애니매이션고와 같은 특성화고등학교를 더욱 확대하고 지원하는 방향도 있다. 자립형 사립고를 반대하는 것이 오로지 평준화 수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nbsp;학교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고 하더라도&nbsp;획일화된 국가 교육과정이 유지된다면 그 의미가 떨어진다. 학교 교육의 다양성과 수월성을 단지&nbsp;'학교 선택'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교육과정 다양화'의 차원에서도 생각해야하는 이유이다. &nbsp;<br><br>&nbsp;&nbsp; 중산층의 학교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보다는 소외계층에게도 중산층이 향유하는 수준에 상응하는 선택의 범위를 부여하는&nbsp;방향으로 학교&nbsp;선택제를 꾸려가는 것이 맞는 방향이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 선택제는 계급적으로 상위의 시각만을 반영하고 있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nbsp;있는 듯 하다. 그래서 TV에서 이명박 후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변화된 스웨덴 교육과 디자인고에 가겠다는 가난한 나의 친척동생이 자꾸 오버랩되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nbsp;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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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교육-에세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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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8 Aug 2007 09:04:55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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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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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nbsp;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 백인덕<br><br>&nbsp;쉴새없이 차량들이 들어가고 나오는<br>&nbsp;학교 앞 포장마차, 식어 가는 떡볶이와 어묵을<br>&nbsp;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처럼 번갈아 씹으며<br>&nbsp;자정을 향한 늦은 밤, 이십여년 전의<br>&nbsp;그 때처럼 난 혼자 되뇌였다.<br>&nbsp;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br>&nbsp;몇몇 연구실의 불빛들은 아직 살아 있지만<br>&nbsp;더 환하게 불 밝힌 건 대학병원 영안실,&nbsp;<br>&nbsp;가지에서 막 떨어지려는 꽃잎들이<br>&nbsp;내 흉한 어깨를 비스듬히 내려보고 있다.<br>&nbsp;병원을 다녀야만 했을 시간을, 나는<br>&nbsp;풀리지 않는 숙취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br>&nbsp;그러므로 잘못 다녔다는 것이다. 거기<br>&nbsp;휠덜린도 있었고, 라깡과 아아, 헤겔도 있었지만<br>&nbsp;정작 내 손으로 꾸민 작은 정원은 없었다.<br>&nbsp;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br>&nbsp;이미 다 식어버린 어묵 꼬치를 간장에 찍으며<br>&nbsp;내게 정원이 있었다면 어떤 나무와 풀,<br>&nbsp;가벼운 돌 몇 개가 어떻게 놓여졌을지<br>&nbsp;꿈을 꾼다. 자정이 다 된 늦은밤,<br>&nbsp;백일몽처럼 길을 찾는다. 자꾸 발길을 느리게<br>&nbsp;하는 잔바람,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br>&nbsp;이 한 마디로 이제는 시를 버려야겠다.<br /><br />#2. 군대 시절부터 매달 할머니 납골당에 찾아가는 나를 두고 어머니는 이제 그만 집착을 버리라 하신다. 이것은 집착일까. 집착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nbsp;형벌일까. 내가&nbsp;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은 비단&nbsp;할머니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납골당의 흰 벽은 휠체어에 할머니를 모시고 찾아갔던&nbsp;병원 지하의 초음파 검사실을 떠올리게 한다.&nbsp;나는&nbsp;그 어둡고 하얀 방에서&nbsp;'할머니 오래오래 사셔서 증손주도 보셔야죠'라고 말했고, 할머니는 눈을 감고 단지 내 손을 꼭 잡으셨다. 나무그늘의 풀섶을 정리하고 누운 암소의 마지막 진실 같은 거, 그게&nbsp;지금도 나를&nbsp;울릴 때가 있다. 그러므로&nbsp;나는 매번&nbsp;찾아가 스스로 되뇌는 것이다.&nbsp;나는 나를 키워주신&nbsp;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가?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만큼 나도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것은 입석들의 폐허가 되어버린 나의 정원에 바치는 눈물의 제의가 되고 만다.&nbsp;그러면 할머니는 영정에서 손을 뻗어 속절없이 범람하는 나를&nbsp;다독여주시곤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그 분과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지&nbsp;나는 알 수 있다. 할머니가 내게 남기신 사랑의 유산이 나의 작은 정원에 몇 개의 붉은 봉선화로 자라났다. 나는 이 꽃들에 물을 주어 키우는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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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삶-비망록</category>

		<comments>http://beauclerc.egloos.com/583183#comments</comments>
		<pubDate>Sat, 25 Aug 2007 06:53:14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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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More Free Lunch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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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 동기(motivation)에 관한 교육심리학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노인의 집 뒤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어서 그 동네 얼랄레파들이 모여 매일같이 공차기를 했다. 아이들은 공차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꽥꽥 소리지르는 노인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쳐 날뛰며 시끄럽게 굴었다. 보다 못한 노인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노인은 공터로 나가 "오늘부터 너희가 여기서 공차기를 하면 내가 1000원씩 주겠다"고 말하며 돈을 주었다. 아이들은 매우 기뻐하며 공을 차다가 돌아갔다. 다음날에도 노인이 다가와 "오늘은 돈이 없구나. 1000원은 너무 비싸고 오늘은 500원씩 주마"라고 말하며 또 돈을 주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흡족해하며 돌아갔다. 다음 날 아이들은 공터에서 공을 차면서 노인을 기다렸다. 이윽고 노인이 나타나 아이들에게 100원씩 주었다. 한 아이가 "오늘은 왜 100원이에요?"하고 묻자 노인은 "돈이 이것밖에 없다. 100원에라도 공을 차든지 싫으면 관두든지."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누가 100원 갖겠다고 힘들게 공을 차겠어요?"라고 말하고는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그 날 이후로 아이들은 공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br /><br />- 군대 선임 중에 제대하고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nbsp;형이 있다. 술마시다가 형이 블로그 이야기를 꺼냈다. 기업에서는 블로그를 차세대 마케팅의 핵심 기지로 보고&nbsp;전략적으로 기획하고 있다는 것.&nbsp;특히&nbsp;블로그 콘텐츠를&nbsp;기업대 개인, 혹은 P2P로 유료 거래하는 사업 모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단다. 형은&nbsp;반 년 밖에 안 된 게으른&nbsp;블로거도 블로거랍시고 나에게 자문을 구한다.&nbsp;"네 포스트들을 상업적으로 거래한다면 어떻겠냐?"는 형의 질문에 문득 떠오른 것은 위의 일화였다. 내적으로 충분히 동기화되어 있는 사람에게 외적 인센티브를 사용하면 오히려 내적 동기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nbsp;하던 굿도 멍석 깔아주면 안 하는 것이&nbsp;인간이다. 만약 그 사업 모델이 성공한다면&nbsp;공차기가 돌연&nbsp;'돈 받기 위해 힘들게 해야하는 것'으로 변해버린 아이들처럼 블로깅이라는 행위의 내적인 본질도 심각하게 왜곡될 것이다. 그러나&nbsp;내가 보기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블로그는 개별 포스팅 하나하나의 가치보다 덧글 달리고 트랙백&nbsp;달리는 전체 네트워크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nbsp;나는 내 블로그를 공동생산에 의한 공동저작물로 보고 있는데 과연&nbsp;상업적&nbsp;소유의 배타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그것은&nbsp;교환일기장을 두고 어느 한&nbsp;쪽에게&nbsp;돈 줄테니 팔라고 하는 것과 똑같이 이상한 일이다.&nbsp;그러므로 내 대답은 대문에 걸어놓은 것과 같이 '프로슈밍'이다.&nbsp;프로슈밍이라는 무보수 경제에 돈이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프로슈밍이 아니다. 기업은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 상책이다. 혼자 신나게 달리는 조랑말을 당근으로 유혹하지 마시라.&nbsp;누군가 가을동화의 원빈처럼 나에게 다가와 '너 블로그 얼마니, 얼마면 돼'라고&nbsp;묻는다면, 나는&nbsp;브레이브 하트의 윌리엄 월레스 모양으로 "More Free Lunch!"를 외치며 장렬하게 블로그를 폭파시킬 것이다. 이것은 블로깅의 내적인 동기와 프로슈밍을 지키기&nbsp;위한 숭고한 열사 정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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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삶-비망록</category>

		<comments>http://beauclerc.egloos.com/574523#comments</comments>
		<pubDate>Thu, 23 Aug 2007 02:50:14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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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대안교육 격세지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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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nbsp; 며칠&nbsp;전&nbsp;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가 내 놓은 '미래교육비전과 전략'을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nbsp;바로 '격세지감'이었다. 세상이 언제 이렇게 변했던가.&nbsp;학년군제, 무학년제, 교사 자격 갱신제 등 획기적인&nbsp;방안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쇼킹한 것은 홈스쿨링의 학력 인정에 관한 것이다. 2001년&nbsp;대안학교의 대표격인 간디학교가 미인가 중학교 운영 등의 이유로 경남 교육청에 의해 고발되었던 것이 불과 6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nbsp;한국 사회에서 홈스쿨링, 자유학교, 생태학교 등의 대안교육이 그나마 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nbsp;1999년의 일이다. 채 10년도 되지 않아 가장&nbsp;非제도적인 형태의 대안교육인 홈스쿨링을 정부에서&nbsp;향후 인정하겠다고 하는 것은&nbsp;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이 혁신안이 '실효성 없다' '현실과 동떨어졌다'라고 하며&nbsp;애써 무시하려고 하지만, 생각해보자, 1995년 5.31 교육개혁안이 나왔을 때도 지금과&nbsp;똑같은 반응이었다. 지난 12년동안 우리 교육 현장의 전체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nbsp;현 정부의 혁신안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얘기다.<br /><br />&nbsp;&nbsp; 대안 교육이 처음 기틀을 잡은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70~80년대에도 야학이나 달동네 공부방과 같은 민중교육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이것은 대안교육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다. 그 당시의&nbsp;민중교육운동은 학교의 양적 팽창에서 소외된 집단에게&nbsp;학교 교육을&nbsp;대신 제공해 준다는 기능이 강했다.&nbsp;90년대 대안교육이 근대 학교 교육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면,&nbsp;70~80년대의 민중교육운동은 사실상 학교 교육에 대한 '갈망'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초 조한혜정 교수의 '또 하나의 문화' 캠프나 자유학교 물꼬와 같은 선구적인 탈학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대안 교육의&nbsp;지류가 하나의 물결로&nbsp;합쳐진 것은 1995년 2월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모임'에서다. 1995년이 어떤 해인가. 향후&nbsp;한국 교육의 큰 밑그림을 그린 '5.31교육개혁안'이 나온&nbsp;해이다. 당시 한국 사회가 공유하고 있던&nbsp;'우리 교육 이대로는 안된다'라는 문제의식을, 위에서는 5.31 교육개혁안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구상으로, 아래에서는 근대 학교&nbsp;교육 체제를 전면적으로 극복하려는 대안교육운동으로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br><br>&nbsp;&nbsp; 그런데 문제는&nbsp;정부에 의해 대안교육이 다소 왜곡되고 제약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nbsp;1996년 12월에 발표한 '학교 중도탈락자 예방 대책'이었다.&nbsp;당시 한 해 7만명에서 8만명에 이르는 학교 중도&nbsp;탈락자들이 양산되고 있었고 정부는 이 문제를 '대안학교'라는 수용소를 통해 정책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nbsp;전국 여섯 개 권역 당 한 개씩 대안학교를 세워 이들을 교정하겠다는 생각이었다.&nbsp;물론 이 안은 대안교육운동 진영과 공교육 진영 양쪽에서 뭇매를 맞았다. 한 쪽에서는 '대안교육을 부적응자를 위한 교육으로 왜곡하지 마라'고 했고 한쪽에서는 '그들이&nbsp;대안이면 도대체 우리는 뭐란 말이냐'며 반대했다. 결국&nbsp;명칭을 '특성화학교'로 바꾸고&nbsp;대상도 학교 부적응자 뿐만 아니라 자연 친화적인 인성교육까지 확대했지만,&nbsp;세간에 널리 퍼진 '대안학교=문제아 수용소'라는&nbsp;부정적인 인식은 쉽게 희석되지 않았다.&nbsp;덕분에 학교 예정 부지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충남 부여의 반딧불고같은 경우는 추진 3년만인 2001년에야 '미인가' 중학교로&nbsp;문을 열 수 있었다.&nbsp;대안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무려 5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는 방증이다.<br><br>&nbsp;&nbsp;&nbsp;1990년대 후반 이제 막 새로운 교육을 꿈꾸며 새로운 학교를 꾸려가던&nbsp;많은 학부모와 교사들은 미인가 학교, 학력 인정,&nbsp;국가 교육과정 제도와 검인정 교과서 제도&nbsp;등의 제도적인 걸림돌 때문에 숱하게 좌절했었다. 대표적인 것이&nbsp;위에서&nbsp;말한 2001년의&nbsp;산청 간디학교와 경남 교육청의 충돌이다. 결국 간디학교는 당시 2001년 말에 중학교&nbsp;과정을 자진 해산하고 평생교육시설로 전환되고 말았다. 이런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과 제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간디학교는 4개의 분교로 증설되어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것은&nbsp;한국 사회 저변에 공교육에 대한 '대안에의 열망'이&nbsp;얼마나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아마 이번 교육 혁신위의 '미래교육비전' 안에도 바로 이런 거대한&nbsp;deschooling의 조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nbsp;게다가 홈스쿨링이라면 대안학교보다 훨씬 비형식적인 교육 형태인데 이것까지 인정하겠다니, 교육부는 도대체 얼마나 대인배가 되어버린 것인가.&nbsp;2001년 당시 경남 교육청 앞에서&nbsp;시위하던 간디학교 학생들이나,&nbsp;학교 부지를 찾아 쫓겨다니던 반딧불고 설립자들은 격세지감을 넘어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 법도 하겠다.&nbsp;그래도 다행인 것은&nbsp;시대의 조류가&nbsp;그들의&nbsp;땀과 눈물을 배신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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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교육-에세이</category>

		<comments>http://beauclerc.egloos.com/556513#comments</comments>
		<pubDate>Sat, 18 Aug 2007 11:06:15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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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광끼의 역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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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 친척 동생을 돌보기 전에는 밥도 두둑히 먹어두고 전신 준비 운동도 해 둔다. 다&nbsp;내가 살려고 하는 짓이다. 친척 동생은 그 악명높은 '미친 일곱살'이다. 취미는 전력&nbsp;질주, 특기는 내 팔뚝 물어 뜯기다. 좋아하는 것은 무어냐 물어보니 '돈'이란다.&nbsp;그럼 싫어하는 것은 무어냐고 물어보니 '뱀'이란다. 매우 간단명쾌한&nbsp;정신세계와&nbsp;끝을 모르는&nbsp;육체 에너지를 자랑하는 이 어린 괴물은&nbsp;나의 심각한&nbsp;연구 대상이다.&nbsp;피아제 인지발달론이나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 따위로는&nbsp;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그나마 프로이트 성격발달이론이&nbsp;좀 설명력이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시기의 아동은&nbsp;'리비도의 잠복기'에 있다고 한다.&nbsp;성적인 욕구가 철저히 억압되어 성적 활동은 침체되지만&nbsp;그 때문에 그 밖의 신체적&nbsp;활동은 매우 활발한 시기다. 불쌍한 어린 수컷. 그걸 풀 데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푸는 거냐. 그래서 이 녀석이 내 무등을 타고 광분해 날뛸 때면, 아예&nbsp;몽정기의 세계로 조기 입문시켜 버릴까하는 생각도 하곤 한다.&nbsp;좋은 동영상 교육 자료들이야 프루나나 폴더 플러스에 널려 있으니.<br /><br />2. 막내 고모에게&nbsp;'애한테 뭘 먹였길래 이러냐'고 하자&nbsp;'넌 뭐 안 그랬는 줄 아냐'며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신다. 사실 나의&nbsp;일곱살 시절을 곁에서&nbsp;지켜 본&nbsp;막내 고모다. 그래도 나 때는 '미운 일곱살'이었지 '미친 일곱살'은 아니었다고 항변해봐도 고모는&nbsp;너무 많은 걸 알고 계신다.&nbsp;고모가 심지어 어린 시절 내 동네 파벌의 이름인 '얼랄레'파를 기억하고 있을&nbsp;줄은 몰랐다.&nbsp;오랜만에 그&nbsp;이름을 듣자&nbsp;강호를 평정했던 흑풍회를 회고하는 천마신군의 심정으로 나는 잠시 추억에 젖었다. 얼랄레파는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모인&nbsp;유소년들의 자발적&nbsp;결사체였다.&nbsp;우리는 방과 후면 어김없이&nbsp;개떼처럼 몰려 다니며&nbsp;아파트 벨을 누르고 튀거나, 자동차 빽미러에 중국집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거나,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도로에 늘어 서서 지나가는 6번 버스에 물풍선을 던지는 활동들을 했다.&nbsp;생각해보면 나도 지칠 줄 모르고&nbsp;뛰어 다니던 억압된 리비도의 어린 수컷이었다. 굳이 나에게 얼랄레파를 상기시킨 막내 고모는 '걔가 그래도 너보단 양반이다', '그게 다 니 업보다'라는&nbsp;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다리를 잡고 흔드는 친척 동생을 보며, 시간이 흘러도 인류 내부에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꼬마 악당들의 업보가 어른거리는 것만 같아 잠시 현기증이 났다. <br><br>3. 청나라 사람 장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 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nbsp;사람에게는 벽癖이 없어서는 안된다.' 벽이란 병적으로 어떤 대상에&nbsp;미쳐 사는 것이다. '미쳐야 미친다'에 관한 <a href="http://kixzero.egloos.com/3327148">은하님의 포스팅</a>을 보고 생각했다. 과연 나는 어느 한 가지에 미쳐본 적이 있었던가. 여태까지는&nbsp;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을&nbsp;명확히 구분해두고&nbsp;해야 할 것을 먼저 처리하는 위주의 삶이었다.&nbsp;'숙제 먼저 하고 놀아라'라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좋아하는 반찬은 맨 마지막에 먹는 그런 종류의&nbsp;시시한 라이프 스타일 말이다. 그러다 보니&nbsp;해야 할 일을 먼저 함으로써&nbsp;얻을 수 있는 몇 가지를&nbsp;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나는&nbsp;숙제를&nbsp;끝내고 내가 뭐하고 놀려고 했는지 잊어 버리거나 좋아하는 반찬을 먹기도 전에 배가 불러 버리곤 했다. 미치고 싶은 대상을&nbsp;뒤로 미뤄버렸으니&nbsp;도대체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군대라는 굵직한 해야할 일을 마친 지금의 나는 좀 더 하고 싶은 일에 인생의 저울을 기울여볼 생각이다. 괴로워도 향유할 수 있는 일, '미친 일곱살'처럼 리비도를 끝까지 소진하고도 또 한 번 소진할 수 있는 일들을&nbsp;해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학교 시절 여자친구를 위해&nbsp;건배. HOT 장우혁의 광팬이었던 그녀는 나보고&nbsp;'자기는 장우혁을 닮았어'라며 환각을 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nbsp;'자기야 난 자기보다 우혁이가 더 좋아'라며 나를 떠나갔다. 아무래도&nbsp;무언가에 미칠려면&nbsp;이 정도는 되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야무진 다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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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삶-비망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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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1 Aug 2007 16:40:00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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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BK21이 주조한 02학번 이후의 대학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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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nbsp;&nbsp;&nbsp; <strong>이해찬 세대론 4부 - BK21이 주조한 02학번 이후의 대학<br></strong><br>&nbsp;&nbsp; 손학규 전 지사가 대선 출마를 발표한&nbsp;어제는 이해찬 전 총리가 출마를 선언한&nbsp;지 대략 두 달 정도 된 시점이다. 이해찬 전 총리는&nbsp;이미 '일자리 창출'을 공약의 핵심 컨셉으로 삼고 이를 구체화시켜 가고 있는 듯 하다. 특히 교육과 고용을 적극적으로 연계하겠다는 'EK21(Education &amp; Employment)프로젝트'가 눈길을 끈다. 영국의 교육고용부나 독일의 듀얼시스템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이 프로젝트는 누가 봐도 BK21사업을 연상시킨다. 말 많고 탈 많아 대학 관계자들 사이에서 '빌어먹을 코리아'로 불리는 BK21을 자신의 최고 치적으로 홍보하는 그의 강단이 나로서는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복선제인 유럽에서나 수월하게 돌아가는 교육-고용 연계를 단선제에&nbsp;학력 인플레 현상 뚜렷한 우리나라에 적용시키겠다니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nbsp;<br /><br />&nbsp;&nbsp; 노량진의 재수생 이야기를 다룬 김애란의&nbsp;&lt;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gt;라는 소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교육대학 지망생이었는데 이듬해 IMF로 인해 교대 커트라인이 껑충 뛰는 바람에 대학에 떨어진다. 이에 대해 주인공은 자신이 대학에 떨어진&nbsp;이유가 듣도 보도 못한 'IMF' 때문이라는 것은, 마치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잠깐 반짝거렸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고&nbsp;한다.&nbsp;이해찬 세대인 나에게는 BK21이 그랬다. 왜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2002년에 입시가&nbsp;바뀌고 정원이 줄었을까.&nbsp;대학에 들어가서도 전공 진입을 위해&nbsp;왜 그렇게&nbsp;아등바등 기를 써야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낯설지만 적확한&nbsp;대답이 바로 BK21이다.<strong>&nbsp;&nbsp;&nbsp;<br>&nbsp;&nbsp; <br><br>&nbsp;&nbsp; 1. BK21사업의 기원과 숨은&nbsp;정책 의도<br><br></strong>&nbsp;&nbsp;&nbsp; BK21은 전례없이 의욕적인 고등교육 개혁 사업이었다. 1999년&nbsp;4월 이전까지 초중등교육 개혁에 역점을 두었던 이해찬&nbsp;전 장관은 세계 수준의 연구력을 갖춘 대학원을 만들겠다며 고등교육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IMF 구조조정의&nbsp;한파로&nbsp;사회 각 부문의 예산 삭감이&nbsp;당연하게 이루어지던 시절에 대학에 투자할&nbsp;1조 4천억원을 따로 떼어냈으니 그&nbsp;의지는 높이 살 만하다. 이해찬 장관이&nbsp;지금 EK21에서 유럽식 고용연계 모델을 꿈꾸듯 당시에는 미국식 연구중심대학이 목표였다.&nbsp;19세기 후반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시작한 미국식 연구중심대학은&nbsp;전통 교양교육에서 출발한&nbsp;영국이나 독일의 종합대학과는 달랐다. 학부보다 대학원 중심, 산학 연계를 통한 이공학 중심의 학문 발달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식 연구중심대학은 냉전 시기&nbsp;과학 경쟁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br>&nbsp;<br>&nbsp;&nbsp; 이해찬 전 장관의&nbsp;처음 생각은&nbsp;이랬다.&nbsp;"오직 서울대, 그것도 특히 서울대 공대에만 한 해 2천억원씩 투자해서 하버드나 스탠포드 수준의 대학원을 만들어 보자. 서울대는 학부과정&nbsp;대폭 줄이고 대학원 중심으로&nbsp;돌리자. 어차피 대학 입시 문제나 사교육비 문제 다 서울대 학부 입학 때문에 생기는&nbsp;것 아닌가. 돈 주는 대신에&nbsp;서울대 학부&nbsp;정원 대폭 감축하고 서울대 입학에서 무시험 전형을 80%까지 확대하면, 입시경쟁도 완화되고 사교육비도 줄고 좋지 않겠나. 그리고 몇 년 안에 SCI논문이나&nbsp;세계 대학 평가에서&nbsp;양적으로 순위만 확 끌어 올리면 정권의 핵심 치적으로 삼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nbsp;지금은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있지만&nbsp;서울대에만 투자하겠다는&nbsp;그의&nbsp;구상은&nbsp;진짜였다.&nbsp;이 사실을 안 각 대학 관계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이 기본설계는 대학 사회의 반발에 부딪쳐 지원 범위가 모든 대학으로 확대되고 지원 분야도 이공계에서 여타 분야로 확대된다.&nbsp;<br><br>&nbsp;&nbsp;&nbsp;사정이 이렇게 되자 교육부는 다른 정책 목표를 설계한다. 그렇지 않아도 70년대부터 무분별하게 팽창한 대학이 80년 졸업정원제를 거쳐 몸집이 몇 배 이상 늘어난 상황이다. 게다가 1997년 김영삼 정부 시절 대학설립준칙주의로 부실 사학들이 대책없이 난립해서 골머리를&nbsp;썩고 있는 터였다. 특히&nbsp;박정희&nbsp;시절의 산업 수요에 맞춰 급증했던 공대 정원은&nbsp;아직도&nbsp;그 공룡같은 몸집을&nbsp;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nbsp;이&nbsp;대학 및 정원 팽창&nbsp;정책의 실패를 뒷수습하려면 이번이 기회였다. 대학원 위주의 '연구중심대학'이라는 컨셉만큼&nbsp;학부 정원 축소하기에 좋은 정책 목표가 또 어디&nbsp;있는가.&nbsp;돈 주는 대신&nbsp;과거에 잘못 팽창시켰던 모든 학교의 학부 정원을 확 줄여버리자. 그리고 될 성 부른 대학만 '선택과 집중'해서 키우고 애초에 글러먹은 지방 사학들은 이 참에 시장에서&nbsp;도태시켜 버리자. 그래서 교육부는&nbsp;학부 정원 감축, 모집단위광역화를 골자로 하는 대학&nbsp;구조조정을 BK21사업 지원과&nbsp;연계해서 요구하기 시작했다.&nbsp;모집 단위 광역화도 결국은 학과 통폐합을 통한 학부의 다운사이징을 염두에 둔 정책이었다.&nbsp;&nbsp;이렇게 애초 교육부의 의도가 '서울대&nbsp;집중 지원'과 '전체 대학의&nbsp;학부 정원 감축'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된 BK21사업에서는 사업비의 반 이상을 서울대가 독식했고 교육부가&nbsp;틈만 나면&nbsp;정원 감축을 들먹이며&nbsp;대학에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nbsp;<br><br><br>&nbsp;&nbsp;&nbsp;<strong>2. BK21이 바꾼 02학번 이후의 대학 환경</strong><br><br>&nbsp;&nbsp; 대학 운영과 관련된 주요 재정자원을 대학이 자족적으로&nbsp;마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nbsp;대학은 정부의 재정지원금과 학생 등록금을 제외한 마땅한&nbsp;재원을 마련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nbsp;대학은 비영리 법인으로 묶여 있으니 수익 사업을 적극적으로 할 수도 없다.&nbsp;등록금 인상하려면 학생들의 저항을 감당해내야 한다.&nbsp;그래서 정부가 주는 BK21과 같은 특수목적지원사업비는 대학 재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nbsp;교육부가&nbsp;사업 지원의&nbsp;전제 조건으로 내건 것들은 말로는 아무리 자율적&nbsp;선택 사항이라지만&nbsp;대학 입장에서는 '강제 권고'로 밖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nbsp;정부가&nbsp;돈을 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들, 이를테면&nbsp;2002학년도 대학 입학 제도 개선,&nbsp; 학부 정원&nbsp;15%감축, 모집단위 광역화 실시, 대학원&nbsp;확대 개방, 연구비 중앙 관리제와 교수 업적 평가제 실시 등을 대학들은 거의&nbsp;군 말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도권 대학들은 정원감축보다&nbsp;전임교수 충원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곳도 많았지만&nbsp;BK21사업을 따내기 위해 거의 모든 대학들이 무조건 교육부의&nbsp;지시에 따랐다. <br><br>&nbsp;&nbsp; 83년생 이해찬 1세대들과 이해찬 전 장관의 악연이 대학에 가서도 이어지는&nbsp;연결고리가 여기서 배태된다. BK21에서 연구사업은1999년부터 시작되었지만&nbsp;학부 정원 감축이나 모집 단위 광역화와 같은 제도 개혁은 주요 대학들이 '2002년까지'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2002년이면&nbsp;이해찬 1세대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해이다. 이해찬 전 장관이 BK21사업의 대가로 요구했던 제도 개혁이 2002년에 완성되고 작동하기 시작한다.&nbsp;실제로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은 2002년 입시부터 수시 입학과 고교장 추천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무시험 전형을 시작했다. 부분적으로 실시하던 모집단위 광역화는 2002년부터 전면 확대했으며, 2002년부로 학부 정원을&nbsp;15%이상 감축했다. 이해찬 전 장관의 초중등교육개혁 정책 덕분에 학력 저하니 교실 붕괴니 하는 소리를 듬뿍 들으며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해찬 세대들이다. 이들이&nbsp;대학 입학할 때가 되어서는 이해찬 전 장관이 손수 3년 전에 준비해 둔 대입&nbsp;제도를 거쳐&nbsp;들어가고,&nbsp;대학에 들어가서도 그가 BK21을 통해 대학에 반 강제한&nbsp;학부제로 골치를&nbsp;썩게 되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nbsp;&nbsp;<br><br>&nbsp;&nbsp;&nbsp;이해찬&nbsp;세대라면&nbsp;대개 전공진입을 위해 1학년 때부터 학점 전쟁에 뛰어들거나 혹은&nbsp;'광역화 투쟁'에 참여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BK21이 요구한 대학 구조조정 사항 중에 학생들의 피부에 가장&nbsp;와&nbsp;닿는 정책이 바로 모집단위 광역화였다.&nbsp;모집 단위 광역화는&nbsp;학생들의&nbsp;폭넓은 전공 선택과 통합적인&nbsp;대학 교육을 위한 '학부제'를 위해 실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교육부와 대학 당국의&nbsp;의도는 따로 있었다. 교육부는 세분되어 있던 학과를 합치면서 불필요한 정원을 제거하는 학부의 다운사이징을 원했다. 95년 이전에는&nbsp;사법학과와 공법학과, 경제학과와 국제경제학과,&nbsp;지금도 남아있는 동양사학과와 서양사학과와 국사학과, 이과 쪽에서는 전기공학과와 전자공학과와 전파공학과 등 학과가&nbsp;심하게 세분되어 있었다.&nbsp;단일 학과의 정원은 묶여 있지만 학과의 신설을 통한 정원 증원에는&nbsp;상대적으로 제약이 덜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육부는&nbsp;이런 세분된 학과들 묶으면서 정원을 줄이기 위해 95년 5.31교육개혁안 이후로 학부제안을 각 대학에&nbsp;요구하기 시작했다. 광역화 모집은 이 학부제안을 위해 부분적으로&nbsp;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99년 BK21사업과 연계시키면서 2002년까지 거의 모든 학교로&nbsp;전면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br><br>&nbsp;&nbsp; 대학의 입장에서&nbsp;모집단위 광역화를 실시한 이유는&nbsp;학제적인 연구와 통합적인 학생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 힘들다.&nbsp;오로지 BK21사업 자금을 따내기&nbsp;위한&nbsp;조건부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서였다.&nbsp;교육과정 상의 어떤 준비도 없이&nbsp;단지 '행정적 합체'에 지나지 않는&nbsp;광역화 모집은&nbsp;그래서 학내에서 많은 갈등과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내가 입학한&nbsp;사범대학&nbsp;인문사회교육계에는 교육학과, 사회교육과, 지리교육과, 역사교육과, 윤리교육과가 있었는데 1학년 때 각 전공 별로 전공 탐색과목을 듣는 것 이외에 어떤&nbsp;통합 교육도 시행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공통사회교육론이라는 과목에서는 역사, 지리, 사회교육과에서 각 과 교수님들이 한 학기의 강의를&nbsp;3분의 1로 쪼개어 맡는&nbsp;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사정은 다른&nbsp;단과대나&nbsp;여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졸속으로 시행된 광역화 모집은 학내의 극심한&nbsp;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2004년부터는 애초에 학부제 할 마음이 없었던&nbsp;대학 당국들도&nbsp;모집단위를 슬금슬금 세분화하기 시작했다.&nbsp;교육부 또한&nbsp;그렇게 강력하게 추진하던 광역화 모집을&nbsp;사실상 2004년 이후로 손을 놓은 상황이었다. 02학번, 03학번, 04학번들,&nbsp;딱 이해찬 1세대, 2세대, 3세대까지 그렇게 광역화로 신입생 시절 한바탕 홍역을 겪었다. 이해찬 세대라는 말은 단지&nbsp;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nbsp;<br><br>&nbsp;&nbsp;&nbsp;학생들에게 피부로 느껴졌던 모집단위 광역화 이외에도 2002년부터&nbsp;바뀐 대학 환경은&nbsp;꽤 많다. 이를테면 2002년을 기점으로 교수계약제(역시 이해찬 전 장관이 초중등교원 정년 단축 법안과 함께 통과시킨 법안이다)가 시행되어서 대학 교수의 법적 신분이 정규직에서 계약 임용직으로 완전히 바뀐 일도 있었다.&nbsp;그러나 무엇보다&nbsp;02학번 이후의 대학 환경 변화를 추동한&nbsp;구조적 힘은 교육부가 BK21과 연계해 학부 축소를 의도했던 커다란 대학 구조조정의 물결이었다. 문제는 대학의 특성화와&nbsp;경쟁을 유도했던 교육부의 외적인 구조조정 목표와는 반대로, 각 대학들이 교육부의 획일적인 정책 유도에 따라가다 보니&nbsp;모두 비슷비슷해지는 '이종동형화' 현상이&nbsp;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교육부가 그토록 특성화를 독려하고 경쟁을 강조했는데 오히려 경쟁은 제약되고, 전국의 모든 대학들이 교육부의 BK21사업 평가 기준에 따라 획일화되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졌다.&nbsp;덕분에 이해찬&nbsp;세대들은&nbsp;대학에 올라와서도 비슷비슷한 집단 경험을&nbsp;공유하게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 인생 행보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막힌 교육 개혁의 타이밍과&nbsp;동질적인 대학 환경 속에서, 이해찬 세대들은 고등교육개혁의 십자포화도 고스란히&nbsp;맞으며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인생을 걸어나갔다. &nbsp;&nbsp;&nbsp;&nbsp;&nbsp;<br><br><br>&nbsp;&nbsp; <strong>3.&nbsp;포스트 BK21사업과 대학원 정책의&nbsp;향방</strong>&nbsp;&nbsp;&nbsp;&nbsp;&nbsp;&nbsp;<br><br>&nbsp;&nbsp; 2005년에 종료된 제 1차 BK21사업 이후 참여정부는 2006년부터 7년 간에 걸친 제 2차 BK21사업을 추진 중이다. '선택과 집중'의 시장형 재정배분 방식과 돈으로 대학을 통제하려는 교육부의 의도도 여전하다. 이번에는 2단계 BK21사업단 선정과 관련해 각 대학의&nbsp;의학전문대학원 전환&nbsp;여부를 두고 한참 대학과 교육부가 기싸움을 했었다.&nbsp;의학전문대학원에 대해서는 상위 주요 대학들이 배출한 의사집단의 입김이 작용해서인지&nbsp;교육부가 한&nbsp;발짝 물러서기도 했다.&nbsp;고등교육정책이란&nbsp;결국 정치다. 대학은&nbsp;정부의&nbsp;돈을 받는 것과 자신의 자율성을 지키는 일 사이에서&nbsp;줄타기를 할 것이고, 정부는 스스로의&nbsp;통제력 강화를 위해 또 대학과 힘 겨루기를 해야 한다. 이러한 거래 교환 관계는 사실&nbsp;매우&nbsp;자연스러운 정치 현상이다. 국민의&nbsp;세금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야할 의무가 있는 교육부가&nbsp;대학에 돈도 주고 자율도 주는 것을 바라는&nbsp;것은 무리다. 중국의 211공정이나 일본의 COE21, 미국의 주립대학에서도 공공재정의 책무성을 요구하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가&nbsp;재정 지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과도하게 대학&nbsp;자율성을 훼손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지만, 이 현상을 오직 '대학의 자율성'이라는 프리즘에만 투영해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건 정확히 대학의 입장만을 반영한&nbsp;생각이다.&nbsp;&nbsp;<br><br>&nbsp;&nbsp;&nbsp;문제는 앞으로 이런&nbsp;대학과 정부의&nbsp;정치관계 아래서 영향을 받을 이해찬 세대들의&nbsp;진로다.&nbsp;2002년 이후로 5년이&nbsp;흐른 현 시점에서 이해찬 세대들은 대학원에 가거나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BK21사업이 가지는 가장 큰 교육정책사적인 의미는 평가 연계 재정 지원 정책의 결정판이라는 것과 더불어&nbsp;바로&nbsp;'대학원 팽창&nbsp;시대의 절정'이라는 점이다.&nbsp;정부가 그나마 대학원 정책이라는 것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다. 이전까지 대학원은 학부의 곁다리 취급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95년 5·31 교육개혁안에서 ‘대학원중심대학’이란 개념이 제시되고, BK21사업을 통해 본격적으로&nbsp;‘연구중심대학’론으로 발전하면서 교육부 정책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교육부가 조직 내에 ‘대학원지원과’를 만든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즉 학부를 축소하고 대학원 중심으로 가겠다는 BK21사업은&nbsp;50년대의 초등학교 팽창, 60년대의 중고등학교 팽창, 70~80년대에 걸친 대학 팽창에 이어 90년대&nbsp;중후반부터의 대학원&nbsp;팽창을 노정하는 것이었다.&nbsp;국민의 교육열을 수용하는 데에 오로지 '학교의 양적 팽창'으로&nbsp;대응해왔던&nbsp;정부가&nbsp;고학력 사회의 정점인 대학원 정책에 이르러서도 똑같은&nbsp;정책을 펴고 있다. 대학을 양적으로 팽창시킨 이전의 실패를 수습하는 동시에&nbsp;대학원 정원은 또 대책없이 늘리고 있는 것이다. 학부 정원 감축을&nbsp;대학에 강력하게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년 2천여명 박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BK21사업의 실제적인 양태를 보면 과연 이것이 정말 '구조조정'을 표방하는 정책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BK21사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했던 석박사과정생들의 초과 공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들이 졸업하는 2006년 즈음에서는 분명히 '박사 대란'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예측은 맞아 떨어졌고 BK21 졸업생 중 3명 중 1명이 자리를 못 잡거나 당시 BK21사업에 계약으로 참여한 많은&nbsp;포닥 연구원들이 사업이 끝나자 또 겉도는 일들이 벌어졌다. <br><p>&nbsp;&nbsp; 포스트 BK21사업은 제 1단계 사업보다 투입되는 예산도 많고 배출되는 박사도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제 1단계 BK21사업이 끝나고 2단계 사업이 시작되는 시점은 공교롭게도 이해찬 1세대가 대학을 졸업하기 시작한 시점과 또 일치한다.&nbsp;2단계 BK21사업과 연계되어 추진된 메디컬 스쿨 덕분에 그들 중 상당수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MEET, DEET문제를 풀고 있거나 로스쿨 덕분에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무슨 원수를 졌는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이해찬 세대들과 BK21의 악연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2단계 사업이 끝나는 2012년에는 BK21이 양성한 몇 만명의 박사가 적체되어 있을 것이고 정부는 또다시 '대학원생 감축' '대학원 구조조정' 운운하며 여태까지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양적 팽창에 매스를 들이대는 정책을 양산해낼 것이다. 1999년 이해찬 전 장관의 정책이 2002년에 영향을 미쳤듯 정책 준비와 시행 텀을 3년에서 4년 정도로 잡는다면, 그 대학원 구조조정 정책의 대상이 또 누가 될지는 자못 분명하다. 안타까운 사실은 사사건건 대립하는 정부와 대학의 정치 줄다리기&nbsp;속에서도 '대학원 팽창'만큼은 두 집단의 이익이 일치하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이고, 당분간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다는 점이다. '대학&nbsp;팽창의 시대'에서 '대학원 팽창의&nbsp;시대'의 과도기를 관통하는 이해찬 세대들은 아직도 그들의 업보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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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0 Aug 2007 08:05:32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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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헤드 스타트 2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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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nbsp;&nbsp; 제대를 하고 보름이 지나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내 방은 고시촌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다. 멀리 북한산 대신 관악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굽은 도림천을 따라 흐르는 발광發光물고기처럼 황급히 신림동을 빠져 나가는 자동차의 물결이 보인다. 학사대, 청운고시원, 장원서원 따위의 유교적 입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원룸들 사이로 두꺼운 책을 든 삼선 슬리퍼족들이 유유히 걸어 다닌다. 그들은 마치 순례자와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고 먼 사막을 건너 왔으나, 순례자들은 결코 성지에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신림동 고시촌. 2년 만에 이 약속의 땅에 돌아온 나의 이야기도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이다.<br /><br /><p>&nbsp;&nbsp; *<br>&nbsp;&nbsp; 보름 동안은 인천의 집에 머물렀다. 팔이 아프신 어머니를 대신해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널고 불과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프랑스로 떠나겠다는 동생을 뜯어 말리는 일로 며칠이 지나갔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고등학생들에게 어설픈 진학 상담이나 학습 컨설팅 따위를 해주다가, 오후에는 친척 동생들을 돌보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내가 집에 '보름씩이나' 머문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대개 집을 떠나 유목했었다. 기숙학원에 들어갔던 재수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군대 가기 전의 2년도 기숙사와 학교 주변의 원룸에 살았다. 군대 2년까지 합하면 족히 5년 동안은 진득하게 집에 붙어있은 적이 없었던 셈이다.</p><p>&nbsp;&nbsp; 접촉이 적으니 갈등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덕분에 부모님이나 동생과는 누구 못지 않게 살가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가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요 며칠 간 아프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생신 선물을 사러 나간 날, 일상적으로 부모님과 티격태격하는 동생보다 한 마디 대립없는 내가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더 부족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눈에 띄게 늘어난 아버지의 흰머리와 붕대를 두른 어머니의 오른팔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안부를 묻는 아들의 전화에 '다들 건강하다' '별 일 없으니 걱정마라'는 말 이외에 부모님이 어떤 말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안부는 절대 전화로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찾아와 함께 생활하고 스스로 헤아려 보아야 한다. </p><p>&nbsp;&nbsp; 그런 의미에서 동생에게도 참 미안하다.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떠나겠다는 동생을 역정을 내가며 나무란 나의 감정적인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과연 나는 동생의 날개에 어떤 꿈이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는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들여다 보기나 했던걸까. 오빠의 가시 돋친 훈계를 듣던 동안, 동생의 발뒷꿈치가 바작바작 갈라져 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동생의 자취방에 갔다. 쌍수를 들고 어학연수를 반대하던 아빠와 오빠를 위해 동생은 능숙하게 요리를 만들어 상을 차려 왔다. 자취방의 벽지에는 그림을 좋아하는 동생이 그리다만 푸른 물제비꽃과 배추나비가 가만히 움직이고 있었다. 겉보기엔 철이 없어도 속 깊은 녀석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내 마음은 낮은 데시벨로 동생아, 누가 뭐래도 난 죽을 때까지 네 편이다,라고 작지만 진심으로 중얼거렸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p><p>&nbsp;&nbsp; *<br>&nbsp;&nbsp; 새로 구한 방은 마음에 든다. 언덕 위에 있어서 그런지 값도 적절하고 주변에 온통 고시생들뿐이라 조용하다. 非고시생인 나는 학생이 살기에 최적화된 이 곳의 고시 인프라를 고시생인 척 이용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하기 위해 며칠 동안이나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비 오는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지구에 닿기 전의 어린 왕자가 들른 혹성들에서처럼 꽤 여러 종류의 인간 군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황토 내의만 달랑 걸친 채로 집을 설명해주던 어떤 아저씨는 자기 집의 가장 큰 장점이 '수맥'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풍수학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는 나의 관상에 '관'이 들어있어 여기서 살면 고시에 꼭 합격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고시 안 한다고 말하자 무안한 듯 형광등 스위치를 자꾸 껐다 켜던 아저씨는, 아마 다른 사람의 얼굴에도 '관'이 들어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어떤 집주인은 내가 집이 마음에 들어 조금 뒤에 계약금을 가지고 오겠다고 한 그 짧은 사이에 다른 학생과 계약해버렸고, 어떤 집주인은 그냥 나가기 미안해서 예의상 명함 하나 달라고 한 나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해댔다. 주인과 열쇠를 들고 함께 찾아 간 반지하방에 살던 남자는 '친구와 있다'며 방 구경하는 것을 꺼려했다. 많이 난처해하는 것 같아 그냥 힐끗 보고 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등을 떠밀어 신발을 벗고 잠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인디안 핑크색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를 올려다 보는 그 여자의 눈빛은 공포와 두려움과 뻘쭘함으로 버무려져 있었고, 나는 '웃을까 울을까 망설였다네'하는 동요를 떠올렸다. </p><p>&nbsp;&nbsp; 어쨌든 분명한 것은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 동네 어딘가에서도 사람들은 가끔 냄비를 태워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다치거나, 밤이면 술에 취해 어딘가에 처박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잠든 사이에 소방차가 빨간 불을 번쩍이며 나 몰래 다녀가겠지. 의무소방 동기 녀석이 티슈를 잔뜩 사들고 나의 자취방에 처음으로 찾아왔다. 녀석과는 소방서 건물 뒤쪽의 세탁기 앞에서 논쟁 아닌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제대하면 소방서를 좋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쁘게 기억하고 있을까. 녀석은 그래도 청춘의 한 시절을 몸 담았던 곳이니 아름답게 남지 않겠느냐고 했고, 나는 소방서의 안 좋은 것들을 속속들이 다 보았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 방에 찾아 온 동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때 네 말이 맞았던 것 같다. 녀석은 정말이냐며 되물었다. 그래, 정말이다. 너와 내가 작은 사이렌 소리에도 놀라 벌떡 일어나곤 했던 것이 정말이었던 것처럼. 그 시절 소방서 옥상에서 머리를 박곤 했던 너와 나의 얼굴이 모두 까맸던 것처럼. </p><p>&nbsp;&nbsp; *<br>&nbsp;&nbsp; 다시 돌아 온 학교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자잘한 것들은 바뀌었으나 큰 틀은 그대로다. 새로 생긴 건물들은 대개 군대가기 전에 완공을 보았던 것들이다. 이를테면 사범대 뒤의 교육정보관, 인문대 옆의 교수학습개발센터, 대학원 기숙사나 BK 국제관 등 모두 2006년 이전에 개관한 것들이다. 제 1차 BK21사업에서 할당받은 돈으로 착공한 것이 2000년 즈음이었고 제 2차 BK 21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완공을 계획하고 있던 것들이라 그렇다. 덕분에 기숙사에 살았던 1학년 시절, 2003년에는 내가 살던 신관 옆의 대학원 기숙사 신축 공사의 소음과 먼지를 고스란히 받아주며 살았었다. 이제는 학교가 좀 안정된 듯 하다. 중앙 도서관 터널도 깔끔하게 바뀌었고 자하연에도 벤치가 여러 개 생겨났다. </p><p>&nbsp;&nbsp;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학교보다 내가 바뀌었다고 난리들이다. 며칠동안 도서관에 찾아가면서 동기들을 많이 만났다. 약속은 한 명 잡았는데, 한 명 헤어질 때 즈음 또 한 명을 만나 그렇게 릴레이로 밤까지 아홉 명을 만난 희한한 날도 있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살 쪄서 못 알아 보겠다고 한다. 군대가기 전보다 10킬로나 쪘으니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 여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둘로 갈린다. 하나는 '살 쪄서 보기 좋다, 멋있어졌다, 이제 사람 태가 좀 난다'는 쪽이고, 하나는 '마르고 샤프했던 우리 보클레어는 어디로 갔느냐,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냐, 슬프다'하는 쪽이다. 첫 번째 집합에 모인 이들의 아부성을 적절히 걸러내고, 두 번째 집합에 모인 이들의 말 뒤에 숨은 애정도 알아서 캐낸다면 긍정과 부정도 얼추 반반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최종 판단은 나 자신과 부모님의 것이다. 나는 내 평생 숙원이었던 '살찌기'를 달성해서 좋다. 부모님은 아들이 군대가서 살쪄서 나온 것이 가장 좋으시단다. 그렇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살찐 것은 좋은 것이다.</p><p>&nbsp;&nbsp; 이제는 살이 빠질 일만 남았다. 그저께 한양대에서 있었던 MBC 여름음악페스티벌에 가서 미친듯이 뛰어 준 덕분에 벌써 1킬로가 빠졌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한 달 남은 개강이다. 군대 가기 전에도 기말 소논문을 한 편 쓰고 나면 2킬로씩 빠져있곤 했었다. 그 때보다 10킬로가 쪘으니 소논문 대여섯편 정도는 지금 체중으로 커버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이상은 힘들다. 나의 불 타오르는 학문에의 열정이 제발 지방만을 홀딱 태워주었으면 좋으련만. 아니, 지금으로서는 제대로 엔진이나 돌릴 수 있도록 나의 헤드가 제발 스타트나 해주었으면 좋겠다. 8월은 헤드스타트를 위한 공회전의 시기다. 시간은 자꾸 가고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또 대답을 해야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이 얼마 뒤에 떳떳한 한 시점으로 느껴졌으면 한다. 반 년 전 어떤 시간이나 공간이 아니라 자욱한 연기 속에 살았던 첫 헤드스타트의 그 때가, 지금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으로&nbsp;당당하게 남은 것처럼 말이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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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삶-비망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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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4 Aug 2007 11:11:0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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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전역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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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bsp;&nbsp; 협곡에서의 마지막 날 밤, 맹수들 중 어떤 것은 다 자란 제 새끼들을 캄캄한 절벽으로 떨어뜨려 그중 살아 돌아온 것들만을 데리고 대평원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아침 햇살 아래 늠실대며 빛나는 표범 새끼들의 자랑스런 등이여!&nbsp; <strong>-이시영, &lt;사바나&gt;-</strong><br /><br />&nbsp;&nbsp; *<br>&nbsp;&nbsp; 전역식이 있던&nbsp;오후. 옥상 위의 무전 안테나 위로 장맛비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제복을 빳빳하게 다려입고 배째라는 식으로 머리에 왁스도 좀 발랐다. 의무소방원 전역식이 있을 예정이오니&nbsp;모두 강당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방송을 듣고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어 보았다.&nbsp;전역식이라는 말은&nbsp;멀고 먼 이국에서 돌아온&nbsp;퇴역 장교에게나 어울리는 말인 줄 알았다. 혹은 광활한 사막을 코를 벌렁이며 건너 온 단봉낙타에게나.&nbsp;<br><br>&nbsp;&nbsp;&nbsp;단상에 올라 표창장을 받고 박수도 좀 받았다. 표창장은 투철한 군인정신과 강한 희생정신을 가진 소방대원으로 나를 그렸다. 직원분들과 악수를 하면서 고생 많았다는 말을 골백번쯤 들었다.&nbsp;그리고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nbsp;겨울의 어느 새벽에 차고&nbsp;앞의 눈을 쓸며 한 시간 동안 입에 욕을 달고 있었던 일이나, 직원분들에게 눈 똑바로 뜨고 대들었던 일 같은 게 떠올랐다.&nbsp;어떤 반장님은 그런&nbsp;내 손을 잡고&nbsp;못해줘서 미안하다, 너는 어딜 가서든 잘할 거다라며 눈물조차 글썽이셨다.&nbsp;이별이란 용서나 참회 따위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나는&nbsp;고개 숙이면서, 단상 앞에서 뒤로 돌아&nbsp;이들에게&nbsp;뜨겁게 거수경례&nbsp;붙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nbsp;<br><br>&nbsp;&nbsp; *<br>&nbsp;&nbsp; 일주일&nbsp;동안 홍보실에 앉아 6mm 비디오 테잎을 돌려 보았다. 2년 간 내가 출동 나갔던 영상들을 추출해 프리미어로 편집해 볼 요량이었다. 성냥갑만한&nbsp;테잎 안에는 피, 연기, 검댕, 화염 따위와 뷰파인더 뒤에 눈을 대고 있던 내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도&nbsp;가장 못 사는 우리 관내 사람들의 이야기가&nbsp;가득 담겨져 있다. 어떤 아주머니는 자신의 반지하 방이 눈 앞에서 타는 것을 보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어떤 할머니는 홀딱 타 버린 집보다 불장난하다가 놀라서 도망 간&nbsp;자폐아 손주를 더 걱정했다. 매일 내게&nbsp;찾아와 인수 사인을 받아가던 빼빼마른 집배원 아저씨는 사거리에서&nbsp;교통사고가 나&nbsp;아스팔트 위에&nbsp;웅크리고 있었다.&nbsp;장마철에는 축대가 무너져 아랫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비 맞은 가재도구를 챙겨&nbsp;어디론가 망연히&nbsp;흩어졌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이는 트럭이 덮쳐&nbsp;천국처럼 흩날리는 그의 터진 점퍼의&nbsp;오리털 아래에 지옥처럼 누워있었다.<br>&nbsp;<br>&nbsp; 비디오는 딱 거기까지다. 불이 꺼지고&nbsp;구급차의 문이 닫히는&nbsp;장면 딱 거기까지.&nbsp;그 이후의&nbsp;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nbsp;새와 나비들이 어딜가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것처럼, 새와 나비처럼&nbsp;여리고 약한 그들의 인생이 어디서&nbsp;계속되고 있는지 궁금해지곤&nbsp;한다. 집은 다시 구했는지, 아픈 건&nbsp;다 나았는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nbsp;시간의 출구 앞에 서 있는 나처럼 그들도&nbsp;생각보다&nbsp;질긴 자신의&nbsp;生에 놀라며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비디오의 속편을 기다리는&nbsp;영화광의 마음으로 비 오는 창밖을 향해 그들에게 한 점 안부를 날린다. 모두들, 안녕하시죠?<br><br>&nbsp;&nbsp; *<br>&nbsp;&nbsp; 마지막 밤에는 후임들과&nbsp;소주를 마셨다.&nbsp;깐풍 새우, 유산슬, 족발에 치킨까지 그 밤의 초호화 메뉴는 내무실의 전설처럼 남을 것이다. 나는 술을 권했고 후임들은&nbsp;잘 받아 마셨다.&nbsp;그런데 그들에게 건넨 나의 사과를&nbsp;후임들은 손사래치며 받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렇게 좋은 선임은 아니었다. 눈물이 찔끔날 때까지 갈구고 갈군 적도 많았다.&nbsp;어쩌면&nbsp;마지막 밤의 참회 가득한 말들조차 나는 1541 콜렉트콜처럼 수신자 부담으로 그들에게 전했는지도 모르겠다. 못난 선임을 두어 고생한 녀석들이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던 걸요, 하며 웃는 모습이 차라리 더 미안했다.&nbsp;술잔이 오가고&nbsp;웃음이 오가고 밤이 깊어갔다. 잔뜩 쌓인 녹색병 옆에 눕자&nbsp;맡후임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찌 그것들을 사랑하지&nbsp;않을 수 있을까.&nbsp;그 날 밤 나는 모든 마지막을 끌어 안고 웃으며 행복하게 잠들었다.&nbsp;<br><br>&nbsp;&nbsp; 해가 뜨자 배웅 나온 후임들과&nbsp;굳게 악수를 하고 소방서 정문을 나섰다. 운 좋게도 휴일이라 부모님이 소방서 앞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아버지께서 특히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먼저 건넌 강을 아들도 무사히 건넜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시영의 시에 나오는 표범 새끼처럼 자랑스런 등을 햇빛에 늠실대며 소방서를 걸어 나왔다. 지독하게 감격적인 한 순간이 나머지 생을 지탱할 수 있다면 소방서에서 나와 어머니를 품에 안아드린 순간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기쁜 날에 부모님과 차에 타고 탁 트인 내부 순환로를 달렸다. 오늘 돌아가서는 아버지 양말을 벗겨드리고 어머니의 등을 긁어드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nbsp;할머니의 납골당에&nbsp;들러 산그림자와 더불어 한참 있다가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조금 눈물도 흘렸다.&nbsp;길은 인천의 바다까지 곧고 길게 뻗어 있었다.&nbsp;앞으로의 내 인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멋진 일들이&nbsp;가득할 것이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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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삶-비망록</category>

		<comments>http://beauclerc.egloos.com/438915#comments</comments>
		<pubDate>Thu, 19 Jul 2007 04:54:34 GMT</pubDate>
		<dc:creator>보클레어</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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