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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금씩 알아가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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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안녕하세요.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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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5 Jan 2009 13:27:0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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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금씩 알아가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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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안녕하세요.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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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메모] 세금과 위헌판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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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미국에서&nbsp;제대로 된 소득세제가 만들어진 것은 1894년이다.<br><br>원래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61년이었는데, 이&nbsp;때는 남북전쟁이란 특수한&nbsp;상황에서 북군측 정부가 재정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nbsp;3%의&nbsp;소득세율을 부과했다고 한다. 소득세의 대상도 철도회사에서 받는 배당과 이자, 금융기관에서 받는&nbsp;이자 및 공무원 보수 중 일정액을 넘는 금액으로 한정되었다.&nbsp;1864년에는 누진세율이 최고 10%까지&nbsp;올랐으나 요즘으로 보면 최저 세율에 불과할 뿐이다.&nbsp;그나마 이것은 전쟁이 끝나고 얼마 있다가 1871년 폐지되었다.<br><br>1894년의 소득세는 공평의 이념에 바탕한다. 당시까지 조세의 대종이었던 관세를 줄이고 소득세를 걷자고 주장한 것에서 추진된 것인데, 기본적인 이념은 당시 미국 상원 재무위원장 맥밀린의&nbsp;연설에&nbsp;잘 드러나 있다.<br><br><span style="COLOR: #3333ff">"관세는 수입물품을 쓰는 사람 모두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사람의 富가 아니라 必要에 물리는 세금이다. &nbsp;이제는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소유하는가에 따라 세금을 물리는 시대가 되었다."<br></span><br>이리하여&nbsp;관세 중심인 당시의 세제는 국민 다수의 희생 위에 북동부 상공업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어 1894년 관세를 낮추고 소득세를 매기기에 이르렀다. 세원도 1861년에 비해서 넓어졌음은 물론이다. <br><br>어떤 세금이 못 마땅할 때 그걸 비난하는 방식은 그 때나 지금이나 유사했던가 보다. 소득세제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이 제도를 공산주의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리고&nbsp;바로 이듬해인 1895년 미국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고 사라지게 된 것도,&nbsp;국민대중이 법원의 보수반동성을 비판했던 것도 예나 지금이나 유사하다. <br><br>위헌판결의&nbsp;이유는 미국 헌법에 특유한 연방제의 문제였지만 실제 쟁점은 소득세제의 본질에 관한 다툼이었다고 한다. 이 판결의 보충의견은 1894년의 소득세제는 부에 따라 세금의 차등을 두는 계급입법이고, 이는 종교에 따라 세금의 차등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하고 있다. <br><br>그 후 16차 헌법 개정 후 다시 소득세가 입법화된 것은 1913년이다. 현재와 같은 순자산증가설에&nbsp;근거한 소득세제가 정착된 것은 몇개의&nbsp;저서와 몇차례의 판결이&nbsp;있고 난&nbsp;다음의&nbsp;1940년대 이후이다.&nbsp;&nbsp;&nbsp;<br><br></p><div style="TEXT-ALIGN: right"></div><div style="TEXT-ALIGN: right"><p>(이창희, &lt;세법강의&gt;에서 요약)&nbsp; </p></div>			 ]]> 
		</description>
		<category>경제</category>

		<comments>http://athisplace.egloos.com/2243294#comments</comments>
		<pubDate>Sun, 04 Jan 2009 00:56:00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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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욥기와 하나님의 자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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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1.<br><br>욥기의 주제를 그 표면적 줄거리인 "의인의 고난"과 "행복한 결말"에 의지하여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br></span><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br>욥기에서 그런 "인과응보"의 신학은 욥의 친구들에 의해서 길게 표명된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신다는 것, 따라서 욥이 당하는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과응보의 신학(또는 성공의 신학, 축복의 신학)은 뒤에 욥기 내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부정당하고 꾸중을 받기 위해 소개되고 있는 신학일 따름이다.<br></span><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br>내가 들은 욥기에 관한 가장 인상깊었던 설교는 첨부한다. 설교자는, 흔히 욥기의 주제를 오해하게 만든다고 하는 욥기의 마지막 부분을 색다르게 해석해서 욥기의 근본 주제가 "<strong><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66ff">의인의 고난과&nbsp;회복이 아니라,</span>&nbsp;<span style="COLOR: #3366ff">인과율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자유</span></span></strong>"임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인과율에 갇혀 있지 않고,&nbsp;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쪼잔하게 채점해서 상벌하는 하나님은&nbsp;결코 하나님스럽지 않다.<br></span><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br><br>2.<br><br>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입장이라면 욥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기독교인이 아닌 입장이라면 욥기에서의 "하나님"을&nbsp; 굳이 인격신의 테두리 안에 좁게 가두어 두지 말아보자. "세상의 이치"랄까 "자연의 섭리"를 "하나님"의 자리에 대치해도 역시 훌륭한 통찰이다. 세상과 자연의 이치는 인과응보적인 인과율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br><br></span><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고종석의 글에서 얻어들었던 건데, 12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약했던 이슬람 신학자 이븐 루쉬드에게는 신조차 자연이었다. 범신론자 이븐 루쉬드는 자연을 能産的 자연과 所産的 자연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능산적 자연은 마음 속의 무제한적 존재(그 이름을 야훼로 하든 알라로&nbsp;하든, 뭘로 하든)를 가르킬 수 있지만 넓게는 우주적 질서나 유기적 생산력을 가르키며, 소산적 자연은 좁은 의미의 자연, 즉 피조물이다. 그러니까 능산적 자연은 "태어나게 하는 자연"이고 소산적 자연은&nbsp;"태어난 자연"이다.&nbsp;<br><br>우주적 질서... 너무 거친 이해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자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이란 흔히 말하는 "세상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인과응보적 의미에서의 인과율의 법칙에 갇혀있지 않다. </span></p><br /><br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tbody><tr style="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5px"><td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20px" colspan="2"><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욥의 굴복과 항거</strong></span> <div></div></td></tr><tr style="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5px"><td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10px" colspan="2" height="80"><span style="LINE-HEIGHT: 150%"><table style="TABLE-LAYOUT: fixed"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colgroup><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span></span><tbody><tr><td valign="top"><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제목: 욥과 하나님<br>본문: 욥기 42:10∼12<br>설교: 서중석 목사 (새길교회 1998.4.26 주일설교) <br><br>욥기는 여러 세기동안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무수한 신학자들과 평신도들 모두에게 깊은 신학적 숙고와 경건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욥기의 주제는 '의인의 고난'으로, 욥기의 이야기 진행은 '항거 후 굴복'으로, 욥기의 마지막 단락은 '행복한 결말'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항목은 모두 피상적인 수준의 욥기 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욥기 중에서 그 동안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해온 마지막 단락에 대한 집중적인 해석을 통해 욥기의 읽기 방향을 재 설정하고자 합니다.<br><br>욥기의 높은 봉우리들은 하나님이 나타나 폭풍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는 장면과 욥의 대답과 욥기 저자의 최후의 평(42:10∼17) 등을 담고 있는 마지막 다섯 장입니다. 그 중에서도 42장 10∼17절은 끝마무리를 위해 가볍게 도입된 보충단락이 아니라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는 핵심단락입니다. 그 이유는 이 단락이 욥기의 마지막 구절이 되는 42장 17절을 포함하고 있는바, 차차 밝혀지겠으나, 이 마지막 구절 속에 욥기 저자의 고난에 대한 사상이 농도 짙게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br><br>하나님이 욥에게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가 다녔었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도대체 이 말씀들이 모두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입다물라는 것입니다.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br><br>신약에서는 바울이 이와 비슷한 사상을 전개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롬9:19-20). 바울의 이런 생각은 결국 "오! 하나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 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 분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롬11:33)라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nbsp;<br><br>언뜻 보면 욥기의 저자도 욥의 철저한 굴복을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꺾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항거 후 굴복', 이것이 욥기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욥기가 이 지점에서 끝난 것으로 가정할 때에만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욥기 저자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물론 욥은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받게 됩니다.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의 '복'이 주어집니다. 사태는 평정된 듯이 보이고 평화가 욥기에 다시 깃들이게 된 듯이 보입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이 다시 태어났고, 딸들의 경우에는 전국을 통틀어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욥은 일백 사십 년을 살다가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은 것으로 욥기는 끝을 맺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의 해피 엔딩의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br><br>그러나 마지막 절은 항거하다가 결국 굴복하고 만 듯이 보이는 분위기를 반전시켜 줍니다. '기한이 차서'(sva yamin) 죽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욥은 그럭저럭 살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작가이자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보스턴대학교 엘리비젤(Elli Wiesel)교수가 'sva yamin'의 가장 적절한 영어 번역으로 제시한 'saturated with years'도 결국 같은 방향을 지시합니다. 곧 욥이 '세월 속에 흡수(와해)된 채' 살다 죽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 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결코 행복한 결말의 분위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절을 '욥이 늙도록 장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로 번역하는 것은 행복한 분위기를 가정하거나 암시하는 미흡한 처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개역의 '기한이 차서'가 훨씬 더 담담한 분위기를 드러내주는 적절한 번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br><br>왜 욥은 그럭저럭 살았습니까? 욥은 고통받기 이전에 자신이 소유했던 것보다 갑절이나 더 소유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갑절이나 되는 재산의 소유는 과연 욥을 기쁘게 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칠천 마리였던 양이 만 사천 마리가 되고, 삼천 마리였던 약대가 육천 마리로 늘었다는 것이 욥이 이유 없이 극심하게 당했던 고난에 대한 보상이 되었을까요? 재산을 두 배가 아니라 세 배로 받았다면 욥은 더 기뻐했을까요? 반대로 재산을 옛날보다 더 적게 받았다면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것이냐고 실망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소유의 크기는 욥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앞장에서 소유물의 유무는 욥과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br><br>만일 욥이 "하나님, 이 점은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저 점은 곤란합니다" 하고 하나님과 쟁론했다면 하나님은 결국 그 토론에서 명백하게 이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토론에서 질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9:3)는 것을 이미 간파한 욥은 자신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섭니다(42:3). 더 나아가 욥은 "다시는 더 말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하지도 아니하겠다"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br><br>이것은 욥이 하나님에게 동의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욥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문제 자체가 파괴된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욥의 항거의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문제 자체가 소멸되기보다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한 것은 자신과 욥의 엄청난 질적 차이에 대한 강변이었지, 이유 없이 당한 욥의 고난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욥이 이전에 가졌던 문제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욥은 강력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위압'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그 문제를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br><br>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뒤로 제쳐둔 채, 욥은 세월을 잊고 그럭저럭 살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욥은 하나님의 강한 자기 변론 이후로 더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야만 했습니다. 자살은 유대교 전통에서 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세월 속에 흡수된 채' 살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산다는 것은 삶을 거의 포기한 채 살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삶에 대한 그러한 포기는 힘센 하나님의 '위압'에 대해 힘없는 욥이 할 수 있었던 작은 항거의 몸짓이었습니다.<br><br>하나님이 강한 어조로 말했을 때, 욥은 철저히 굴복한 듯이 보였습니다. 만일 욥기가 마지막 단락 없이 그 지점에서 끝이 났다면 '굴복한 듯이 보였다'는 판단은 '굴복했다'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마지막 항거의 단락을 핵으로 삼고 역으로 소급해 가면 그러한 굴복이 표면적인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욥은 단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했던 인간(욥 이전 자녀)의 생명을 다른 인간(욥의 새 자녀)의 생명으로 대치하는 것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그 제공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러한 종류의 '대치'와 '보상'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건과 물건의 평면적 대치는 가능합니다. 카메라를 한 대 잃어버린 사람에게 새 카메라를 그것도 두 대를 주면 충분히 보상이 됩니다. 그러나 정신적 신체적 고통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그 물질이 아무리 크다 해도 미흡한 것입니다. 더구나 잘못 없이 죽어간 인간의 생명을 다른 인간의 생명으로 보상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자녀들을 일순에 모조리 없애 버리고 나서 그 이전 자녀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아름다운 새 자녀들을 줄 터이니 그런 줄 알라는 어떤 명령을 듣고서도, 그 제공을 아무런 항거 없이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상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제공을 욥이 묵묵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처리에 항거는 하고 싶으나 항거할 힘이 없음을 깨달은 사람의 포기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침묵 속의 항거입니다. "욥은 그러한 보상이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내버려두십시오"하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br><br>욥기 첫머리에서 욥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1:1). 그뿐 아니라 욥은 자기의 아들들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염려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다"(1:5).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욥기 저자는 왜 욥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묘사를 엄격히 제한시켰을까요? 더구나 욥이 "일백 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다"(42:16)면, 긴 세월을 살았다는 얘기인데,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며 살았는지, 또 자신의 후손들을 어떻게 보살피며 살았는지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흔히 동화에서 끝을 장식하는 '그 후 행복하게 살았다'는 정도의 간략한 보도조차 없습니다. 그저 오래 살았다는 그 기간만이 언급됩니다. 곧 욥의 삶의 '질'에 관한 지극히 짧은 형용사조차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다할 삶의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럭저럭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명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br><br>결국, 욥기의 마지막 단락은 '욥이 항거한 후에 굴복했다'는 욥기에 대한 전형적이고도 낭만적인 도식을 '욥이 표면적으로 굴복한 후에 침묵 속에서 항거했다'로 역전시켜 줍니다. 행복한 결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욥기는 다소 우울한 결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정됩니다. 그러나 결말이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우울하기 때문에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말을 통해 욥기가 애써 강조하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br><br>욥은 누구입니까? 욥은 한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 빈번히 짓밟혔던 수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 대한 상징적 대표입니다. 곧, 욥기의 저자는 욥에게 이러한 대표성을 부여함으로써 유대민족의 핍박받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로 고투합니다. 욥기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고통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기는 민족적 고난의 문제에 대한 값싼 해답들이 지혜문학 형식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던 정황에서 그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답을 거부하는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지혜문학입니다. 곧 욥기의 저자는 욥을 침묵 속에서 항거하게 함으로써 그 책의 주제가 유대인들의 민족적 고난에 대한 명확하고도 웅장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혀줍니다. 욥기는 소위 '의인'은 상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는다는 통념, 또는 이방 민족은 심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의로운 유대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 욥기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욥의 항거를 통해 욥기의 강조점은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자유의 문제에로 이동됩니다. 민족적 고난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영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br><br>욥기에서 욥의 항거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욥기의 주제는 그 책의 표면적인 것들이 표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의인의 고난'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근본 주제는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자유하다는 것은 그 분이 인간의 인과율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인간의 의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욥기가 제시하는 인과율을 넘어선 자유로운 하나님 상은 일면 독자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저자가 만일 인과율에 갇힌 하나님 상을 제시했다면, 독자의 절망감은 훨씬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과율에 따라 심판한다면 개인이건 그룹이건 그 누구도 그 아래 남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과율 속에서는 '은혜'라는 개념이 와해됩니다. 이러한 욥기의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한 이사야의 선언과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 시인 괴테는 "손안에 잡힌 것은 무엇이든지 다 썩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만, 인간의 하나님이 됩니다. 지평선은 우리가 그것을 잡으려고 아무리 다가가도 여전히 뒤로 밀립니다. 바로 그 점이 지평선을 지평선답게 해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절감하면 할수록,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 인식의 한계를 심각하게 자각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절망과 침묵, 경건과 은혜에 대한 열망 역시 그만큼 더 깊어질 것입니다. <br><br>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span><a href="http://saegilchurch.or.kr/" target="_blank"><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http://saegilchurch.or.kr</span></a><br><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span><a href="http://saegil.or.kr/" target="_blank"><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http://saegil.or.kr</span></a><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span></span></td></tr></tbody></table></span></td></tr></tbody></t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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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종교</category>

		<comments>http://athisplace.egloos.com/2244188#comments</comments>
		<pubDate>Sat, 03 Jan 2009 07:59:00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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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주인집의 과부 누이와 통간한 머슴이 천주학의 세력을 믿고... ]]> </title>
		<link>http://athisplace.egloos.com/223667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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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만열교수가 한말에 수용된 기독교가&nbsp;우리의 전통적 관습과 부딪히는 </span></span><a href="http://www.christianherald.tv/WZ_NP/section/view.asp?tbcode=SEC12&amp;cseq=23&amp;seq=54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재미있는 사례를 소개</span></span></a><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하고 있다. (종교학벌레님 <a href="http://religio.tistory.com/38">블로그</a>에서 알게 됨.)<br></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100%; FONT-FAMILY: '바탕','Batang'"><br><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1889년 3월 1일 &lt;대한크리스도인 회보&gt;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세력있는 양반 하나가 예수교가 있는 고을에는 갈 수 없으니 다른 고을로 발령을 다시 내달라는 내용이다.<br><br></span></span><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3333ff">"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느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제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그 까닭인 듯"<br><br></span>이만열 교수는 이런 사례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br><br><span style="COLOR: #3333ff">"이런 사례들은 ... 서양 선교사들의 힘을 의지한 기독교도들의 항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갖고 있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 정신’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nbsp;기독교인들에 의한 일종의 반봉건·사회개혁의 의미로 범주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span><br><br>이만열 교수의 풀이는, 기독교 세력이 (1) 서양 선교사의 힘을 믿고 "까불었던" 측면도 있겠으나, 거기에는 (2) 부정 부패에 대한 항거 정신과 반봉건 사회개혁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nbsp;<br><br>이 두가지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사례가 백범일지에 등장한 것을 기억한다. <br><br>백범일지의 연표를 참조하면 1898년의 일로 추정된다. 김구선생이&nbsp;명성왕후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 감옥소에&nbsp;갇혔다가 탈출한다. 탈출 후, 남쪽 지방의 아는 사람 집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는데&nbsp;충청도 강경에 사는&nbsp;공씨 성을 가진 어느 物商客主의 집에서도 며칠 머물게 된다. <br><br>김주영의 소설 &lt;객주&gt;에도 등장하는 강경은 당시 원산과 더불어 전국 2대 포구의 하나로 나라 안에서 가장 번성하던 고장 중의 하나였다.&nbsp;&nbsp;20세기 초반&nbsp;충청 이남에서는 가장 먼저 전기와 전화가 들어오고 현대식 병원이 들어서는 등 일찍 개화된 곳으로 천주교와 개신교도 일찌기 전래된 고장이다.&nbsp;(김대건신부가 서해를 통해 귀국한 것을 기념하여 금강변에 세운 유서깊은 나바위 성당은 인근 3km거리 안에 있다.)&nbsp;<br><br>요즘으로 치면 필시 재벌 반열에&nbsp;속했을 그 객주는&nbsp;김구선생의 인천 감옥소 동기였다가 먼저 석방된 사람으로,&nbsp;금전관계로&nbsp;소송이 걸려 잠시 감옥소에 있을 때 김구선생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 객주의 집은 엄청난 부자인 모양으로 김구선생은 대문 7개를 열고 그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고 한다.&nbsp;그 객주의 집에 머물고 있던 어느날 야심한 시각, 집 마당에 소란이 있었는데&nbsp;객주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니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nbsp;<br><br></span></span><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FONT-SIZE: 100%"><span style="COLOR: #3333ff">객주에게는 한&nbsp;누이가 있었는데 출가했다가&nbsp;남편을 여의고,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nbsp;수절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누이가 하필 그 객주집 상노<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밥상을 나르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어린 머슴)와 통간하여</span> 임신을 했고, 해산하던 중&nbsp;아기는 무사했으나 산모는&nbsp;죽고 말았다.&nbsp;집안 망신이라고 생각한 객주는 어릴 때부터 키워준 그 상노에게&nbsp;자기 새끼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살 것을 명한다. 그러나,&nbsp;상노는 천주교 신자로서&nbsp;천주학 신부의 세력을 믿고서 주인 말을 듣지를 않고 객주 집 옆에서 버젓이&nbsp;유모를 두고&nbsp;사는 것이었다.&nbsp;&nbsp;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싶었던&nbsp;객주는 야밤에 그 머슴을 불러 내서 거꾸로 매단 다음 그 과부의 어린 자녀(조카)의&nbsp;손에 망치를 들려주며, "너희들의&nbsp;원수를 때려 죽이라"고 이르는 중이었다.&nbsp;<br><span style="FONT-SIZE: 100%; COLOR: #666666"><br></span><span style="FONT-SIZE: 100%; COLOR: #666666"><span style="COLOR: #000000"><span style="COLOR: #999999"><span style="COLOR: #666666">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마친 객주는 김구에게 그 머슴을 좀 타일러 줄 것을 청한다.</span></span></span></span><br><br></span>갑오경장(1894)으로 철폐되었다고는 하나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관행조차 살아있고 신분의 구분이 엄연한 현실에서&nbsp;어려서부터 그 집에서 자란 상노의 행동은&nbsp;당시의 봉건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nbsp;주인 곁에서 얼굴을 들고 살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상노는 먼 곳으로 떠나살라는&nbsp;객주의 나름 "온건한" 제안을&nbsp;뿌리치고&nbsp;주인의 속을 끓이게&nbsp;한다.&nbsp;그런 상노의 행동 배경에는, 백범일지의 해석대로,&nbsp;&nbsp;머슴의&nbsp;행동을 후견해줄 천주학 신부세력의 현실적 힘이 있었을 것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천주교에서 배운 신분차별을 무시하는 반봉건적&nbsp;의식이 자리했을 것이다.&nbsp;<br><br>이것은 앞서 인용한 이만열 교수의 풀이, 곧 구한말의 기독교 세력이 선교사의 힘을 이용한 현실적 힘이 있었음과&nbsp;반봉건적 세계관을 키우는 토양이었음을 증언해준다 하겠다.<br></span></span><br><a h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05062">참고: 강경포사건<br></a>&nbsp;<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egloos.com/pds/200812/29/52/e0054152_4958a7138edb5.jpg" width="500" height="328.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egloos.com/pds/200812/29/52/e0054152_4958a7138edb5.jpg');" /></div></p></span><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12/29/52/e0054152_4958a750e4092.jpg" width="471" height="31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12/29/52/e0054152_4958a750e4092.jpg');" /></div></p><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 사진 위는 강경성당과 신진물산. 사진 아래는 그 길 건너편에 있는 대선상회. 지금은 초래해 보이지만 아마 이 둘이 강경에서 가장 큰 "물상객주"였을 것이다.&nbsp;70년대만 해도&nbsp;건물 안에 있던,&nbsp;사람이 들어가 작업하는 커다란 냉동창고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nbsp;두 곳 중의 한 곳은 孔씨 성을 가진 분이 운영하고 있었다는데,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 물상객주의 후손인지 여부는 아는 바 없다. (강경에서 객주는 1970년대까지도 10여명이 남아 있었으나 1978년을 끝으로 사라졌다고 한다.)&nbsp;<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br>&nbsp;<a href="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jho93700&amp;folder=57&amp;list_id=8775297">여기를 클릭하면 바로 인근 거리의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다.<br></a></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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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종교</category>

		<comments>http://athisplace.egloos.com/2236671#comments</comments>
		<pubDate>Mon, 29 Dec 2008 02:48:04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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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메모] 4복음서가 겨냥한 독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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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span style="FONT-SIZE: 170%"><strong>1.</strong></span>&nbsp;성서 본문비평을 소개한 바트 어만의 &lt;성경왜곡의 역사&gt;를 뒤늦게&nbsp;발견하여 재미 있게 읽었다. 책에 대한 탁월한 서평은&nbsp;며칠 전에 우연한 검색을 통해 알게 된 <a href="http://blog.empas.com/bhang813/read.html?a=14865792">블로그</a>에서 읽어 볼&nbsp;수 있다. <br><br>바트 어만은 서론 부분에서 신약의 정경화&nbsp;과정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nbsp;<br><br></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Batang'"><span style="COLOR: #3333ff">"율법의 지속적인 타당성을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마태복음서만 사용했다.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그룹은 마가복음서만 받아들였다. 마르시온과 그의 추종자들은 누가복음서만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형태와는 다른 것이었다. 발렌티누스파로 불리는 영지주의 그룹은 요한복음서만 받아들였다."&nbsp;("성경왜곡의 역사" p.80)<br></span><br>15년 전쯤 성서밖으로&nbsp;나와 성서를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 하워드 클락 키이의 저서 &lt;신약성서의 이해&gt;를 읽었었다. 혹시 그 무렵이라면 4복음서의 특징과 저기 인용된 구절의 의미에 대해&nbsp;제법 부연 설명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인용된 구절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매우 좁고 얕음을 절감하지만, 더 알게 되면 살을 붙이기로 하고 우선 생각나는 것만 몇가지만 적어놓는다.<br><br><br><span style="FONT-SIZE: 170%"><strong>2.</strong></span> 마태복음에 대해서는 &lt;신약성서의 이해&gt;에서 읽은 것이 조금 생각이 난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저자가&nbsp;동족인 유대인을 독자로 삼아 예수가 자신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해 쓴 책이다.&nbsp;유대교에 대해서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유대교의 제도를 사랑하고 그 신앙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관점이 녹아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의 반유대적 관점은 자기반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br><br>마태복음의 저자에게 있어&nbsp;메시아 예수는 자신들이 믿어온 히브리 성서에서의 예언의 성취이자 유대인으로서의 소망의 성취였다.&nbsp;그런 인식을 동족에게 설득시키기 위해&nbsp;마태복음에서는 자주 히브리 성서가&nbsp;인용된다. 대표적인 것은 이사야서 7:14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화를 이야기한 부분이겠다. 히브리 성서를 인용할 때는&nbsp;다음과 같은 독특한 도입양식이 등장한다.<br>&nbsp;<br><span style="COLOR: #3333ff">"이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한 것이라..."</span><br><br>이러한 양식은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nbsp;모두 11번이 등장한다고 한다.&nbsp;(1:12, 2:5, 2:15, 2:17, 2:23, 4:14, 8:17, 12:17, 13:35, 21:4, 27:9-10). 다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성서 해석관점에서 볼 때 이 예언들의&nbsp;원래의 의미가 마태가 자신의 글 속에서 그것을 인용했을 때 생각하고 있었던 의미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lt;신약성서의 이해&gt; p.194).&nbsp;<br><br><br><span style="FONT-SIZE: 170%"><strong>3.</strong></span> 복음서들은 씌여진 연대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뒤에 씌여진 것일수록&nbsp;점차&nbsp;예수를 신성화하고 있다.&nbsp;가장 먼저 씌인 마가복음에서의&nbsp;예수가&nbsp;가장&nbsp;덜 신성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그룹에서 마가복음만 받아들였다는 것은&nbsp;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br><br><br><span style="FONT-SIZE: 170%"><strong>4.</strong></span> 마르시온은 초기 기독교 형성기에 히브리 성서의&nbsp;하나님과 바울이 전도한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펴다 이단으로 몰린 "二神論者"이다.&nbsp;꼬맹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nbsp;성경 지식 외에 아무 것도 모르던&nbsp;고등학생 시절, 그러니까 마르시온의 "마"자도 모르던 시절, 그&nbsp;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분노하고 심판하는 구약의 하나님과 사랑하고 용서하는 신약의 하나님은&nbsp;왠지 다르다는 느낌.&nbsp;그래서 훗날 마르시온의 주장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nbsp;<br><br>마르시온과 그 추종자들이 복음서 중 누가복음만 받아들인 것은&nbsp;예수에 대한 그들의 이해, 즉 가현설론과 관련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트 어만이 잘 설명하고 있다. 가현설론은 예수가 인간으로 보이는 것일 뿐 결코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고 이해한다.&nbsp;즉 예수는 육체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으되, 무늬만의 인간으로&nbsp;실상은 완전한 하나님이다.&nbsp;<br><br>누가복음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구절을 제외할 경우, 가현설론에서 이해하는 예수의 모습과 잘 부합된다는 것이 바트 어만의 주장이다. 예를들어 누가복음의 예수는 다른 복음서에서와 달리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결코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고뇌하지도 않는다.&nbsp;"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같은 울부짓음은 누가복음에는 없다.&nbsp;(첨가 이전의 '원'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몸으로 온전한 고통을 감수한 대속적 죽음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nbsp;<br><br>바트 어만은&nbsp;누가복음 안의 다음과 같은 구절들들이, 가현설론이라는 이단에 대응하여, 정통파 기독교인들에 의해&nbsp;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본다.<br>1) 죽음을 앞둔 예수의 수난 기사 중 예수의 고뇌를 드러내는 부분(누가 22:43-44)<br>2) 성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는 구절(누가22:20).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br>3) 예수의 육체적 승천을 강조한 부분(누가 24:51-52)<br><br><br><span style="FONT-SIZE: 170%"><strong>5.</strong></span>&nbsp;영지주의와&nbsp;요한복음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nbsp;"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과 깨달음의 기독교라는 영지주의의 어렴풋한&nbsp;상관성? 오래 전에 읽었던 <span class="tit16 b">나그함마디(Nag Hammadi) 문서</span>를 기초로 한 영지주의 연구서&nbsp;"성서 밖의 예수"에 무슨&nbsp;설명이 있을 지 모르겠다.&nbsp;<br><br><br><span style="FONT-SIZE: 170%"><strong>6.</strong></span> 마태복음과 유대인의 관계에 대해&nbsp;최근 <a href="http://blog.empas.com/bhang813/read.html?a=1011926&amp;c=123494">알게 된 사실 한가지</a>를 참고로&nbsp;첨부한다. 참으로 악연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전통에서 서술된 책이긴 하지만&nbsp;아이러니하게도 규범적 유대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다.&nbsp;반복되는 이야기지만,&nbsp;유대인의 자기반성적 입장에서 서술 되었기 때문이리라.&nbsp;이러한 반유대적 성향에 기인한 필연인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악용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nbsp;다음의 구절, 즉&nbsp;예수 처형 직전 빌라도와 유대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훗날 기독교가 지배하게 되는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을 탄압하는데 두고 두고 악용되었다고 한다. <br><br><span><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ff"><font class="number">24 &nbsp;&nbsp;&nbsp;</font><font class="name">빌라도</font>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br></span></span><span><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ff"><font class="number">25 &nbsp;&nbsp;&nbsp;</font>군중은 <span style="COLOR: #cc0000"><strong><span style="COLOR: #3333ff">"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span></strong></span> 하고 소리쳤다.<br></span></span><span><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ff"><font class="number">26 &nbsp;&nbsp;&nbsp;</font><span style="FONT-SIZE: 85%"></span>그래서 <font class="name">빌라도</font>는 <font class="name">바라빠</font>를 놓아주고 <font class="name">예수</font>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공동번역 마27:24-26)<br></span></span></span></span></span></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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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종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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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5 Dec 2008 06:12:33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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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이런 생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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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404040; LINE-HEIGHT: 180%; FONT-FAMILY: 바탕;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span style="COLOR: #333333">&nbsp;</span><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33">“나는 ‘믿는다’라는 말을 좋아한다.&nbsp; <br></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404040; LINE-HEIGHT: 180%; FONT-FAMILY: 바탕;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ascii-font-family: 'Times New Roman'"><span style="COLOR: #333333"><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33">일반적으로, 누군가가 “나는 안다”라고 이야기할 때, <br>그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span>&nbsp; <br></span><br>&lt;마르셀 뒤샹프&gt;<br><br><br><br></span><div><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33">"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무한한 상상력을 가졌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마지막 시도로,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span></span></div><div><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33">&nbsp;</span></span></div><div><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333333">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nbsp;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nbsp;바꿀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span></span></div><div><span style="COLOR: #333333">&nbsp;</span></div><div><span style="COLOR: #333333">&lt;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어느 무덤에 적힌 묘비문&gt;</span></div></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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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잡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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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4 Dec 2008 05:44:13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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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세인트 조지스데이 현상에 대한 "수요탄력성에 의한 가격차별모형"의 효익과 한계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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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strong><span style="COLOR: #3333ff">&nbsp;"</span></strong><a title="세이트 조지스데이에서의 책 값 하락과 꽃 값 상승 현상" name="2224446"><strong><span style="COLOR: #3333ff">세인트 조지스데이에서의 책 값 하락과 꽃 값 상승 현상</span></strong></a><strong><span style="COLOR: #3333ff">"을 차별독점자의 이윤극대화 모형, 즉 <a href="http://athisplace.egloos.com/2224446">수요탄력성에 의한 가격차별모형으로 설명하는 것</a>의 효익과 한계에 대한 간략한 언급</span></strong><br><br><br>어떤 상품의&nbsp;수요 특성이 분리된 두 개의 시장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경우, 두 시장에서 수요의 가격탄력성 차이를 이용해서 시장마다 가격차별을 시도하고 이에 따라 이윤극대화를 추구할 수 있음. <br><br>이런 차별 독점자의 이윤극대화 전략 모형을&nbsp;적용해서, "축제용&nbsp;시장"과&nbsp;"평소용 시장"이 서로 다른 수요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 서적과 장미 라는 상품에 대해 판매자의 가격설정 전략을 설명해 보려고 시도한 것이 앞의 포스트 내용임. <br><br>물론&nbsp;독점 시장의 가격차별 모형이 우리의 예에 완벽하게 들어맞는&nbsp;것은 아님. 예를 들어&nbsp;차별 독점자의 가격차별 모형은 두 개의 시장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로 하나&nbsp;우리의 예에서 서적 경우&nbsp;"축제용 시장"과 "평소용 시장"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함(보관 가능성). 완벽한 독점시장도 아님. 그러나 원래 특정 모형의 전제조건이 현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란 거의 없는 것이기도 함.&nbsp;따라서 차별독점자의 이윤극대화 전략 모형을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에 어느 정도 적용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남아있음. <br><br>예를 들어&nbsp;장미의 경우에는 축제용에서의 시장 특성과 평소용에서의 시장 특성이 명확하게 다르고,&nbsp;장미의 보관불가능한 특성으로 시장분할도 가능하며,&nbsp;축제일을 중심으로 장미 수입업자의 관례적인 담합도 가능하므로 공급자가 어느 정도 가격설정력을 갖는다고 볼 수가 있겠음. 서적의 경우에도 책마다 동질성이 약하므로 어느 정도는&nbsp;완전경쟁상품과 다른 공급자의 가격설정력 유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음.&nbsp;(*** 아래 주석 참고)<br><br>더구나 우리에게는 독점 시장의 가격차별 모형을 적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현상을 거칠게나마&nbsp;일단 설명해보고 모형과 현실의 전제조건이 다른 부분은 그것대로&nbsp;감안해서 원래에서 약간 수정된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음.&nbsp;<br><br>어떻든&nbsp; "축제용&nbsp;시장"과&nbsp;"평소용 시장"의 수요 특성이 완전하게 다르다고 보고 차별 독점자의 이윤극대화 전략 모형을 사용할 때&nbsp;이윤극대화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음.<br><br><span style="COLOR: #ff0000"><strong>MR&nbsp; = P [1 - 1/abs(e)] = MC</strong></span><br><br><strong>[예제]</strong> "축제용 시장의 책"과 "평소용 시장의&nbsp;책"의 한계비용이 1000으로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축제용 시장의 책"의 가격탄력성이 2, "평소용 시장의 책"의 가격탄력성이 2.2라면 "축제용 시장의 책"의 가격은 2000원, "평소용 시장의 책"의 가격은 2200원에 설정될 것임.<br><br>이준구 이창용 공저의 경제학 원론의 가격차별 모형 부분(152p)에서 스캔한 다음 첫 문단을 읽어 보고 그림을 보기 바람. 두개의 그림에서 "축제용 시장의 책"의 수요곡선과&nbsp;"평소용 시장의 책"의 수요곡선은 다르고, 그&nbsp;때의 한계수입곡선도 다름. 이 때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이 두 시장에서 설정하는 가격은 차이가 있음.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3.egloos.com/pds/200812/18/52/e0054152_494a2d1b758df.jpg" width="500" height="426.26728110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3.egloos.com/pds/200812/18/52/e0054152_494a2d1b758df.jpg');" /></div>위 책의 스캔 맨 마지막, 주석이 가르키는 본문을&nbsp;보기 바람. 최적 판매량과 그 가격수준에서 두 상품의 가격탄력성은 다른 것으로 설명되어 있음.&nbsp;주석에는 그 관계에 대한 증명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우리는 지난 포스트에서 이미 증명한 바 있음.&nbsp;<br><br>위 그림에서는 A를 "평소용 시장", B를 "축제용 시장"으로 보고,&nbsp;각 시장에서&nbsp;이윤극대화를 위한&nbsp;서적가격 설정전략으로&nbsp;생각해 볼 수 있겠음. (최적판매전략 수준에서) 수요의 탄력성이 높은 B의&nbsp;"축제용 시장"에서의 서적가격이 더 낮게 설정되어 있음.&nbsp;&nbsp;<br><br>축제일이니까, 남들 선물 다 하니까, 축제용 시장에서의 상품은 필수품에 가까운 성질이 있으니까 축제용 시장에서의 가격탄력성이 더 낮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반드시 그럴 지는 알 수 없음. 축제 때 한번 사용되는&nbsp;일회성&nbsp;"뜨네기" 수요가 가격에 더 민감할(탄력적일) 것인지,&nbsp;평소에 사용되는 "진중한" 수요가 가격에 더 민감할(탄력적일) 지는 알 수 없음. 이것은 실증적으로 검증할 사항임. <br><br>다만 위 그림에서,&nbsp;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이&nbsp;설정한 가격을 보면, &nbsp;적어도 최적판매전략 수준에서는, 축제용 시장에서의 뜨네기 수요의 가격민감도(탄력성)가&nbsp; 평소용 시장의&nbsp;진중한 수요의 가격민감도(탄력성)에 비해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 &nbsp;<br><br>지난 포스트에서 제가 "장미 꽃"의 경우에 있어 &nbsp;위 그림과 다르다고 생각해서 좀 수정해 본 것은&nbsp;장미의 한계생산비용이었음. "축제용 시장"에서의 한계비용이 "평소용 시장"에서의 한계비용보다 월등히 클 것을 가정해 봤음. 이런 경우에는 설사 B인 "축제용 시장"에서의 장미가격의 수요탄력성이 더 높은&nbsp;경우라도&nbsp;얼마든지 "축제용 시장"에서의 가격이 더 높게 설정될 수 있었음.<br><br>*** 두 시장에서 판매자의 가격설정력에 어느 정도 차이만 있으면, 다시 말해 수요의 가격탄력성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면 시장의 산업적 특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음. 예를들어 한 시장은 거의 완전경쟁에 가까운 가격수용자로서의 특성을 보이고 다른 시장은 약간 느슨하게나마 가격설정력이 있더라도 가격차별 모형에 의한 설명이 가능할 듯. <br><br>*** 혹시 이 글이 잘못된 것이라도 위에 언급된 서적들과는 무관한 것임. 단지 그림 그리기가 힘들어서 옮긴 것임.</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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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경제</category>

		<comments>http://athisplace.egloos.com/2225240#comments</comments>
		<pubDate>Thu, 18 Dec 2008 10:47:48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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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세인트 조지스데이에서의 책 값 하락과 꽃 값 상승 현상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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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a href="http://freakonomics.blogs.nytimes.com/2008/12/15/what-do-books-and-roses-say-about-discounting/">세인트 조지스데이를 맞이하여 새로 맞이한 수요곡선에 대응하여 이루어지는 가격결정</a>은 &nbsp;"수요의 탄력성"과 "한계생산비용"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nbsp;이익극대화의 조건은 "한계수입(MR) = 한계비용(MC)"인데, 우선 이 조건을 "수요의&nbsp;탄력성"으로 표시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수요의 탄력성과 한계비용의&nbsp;크기가&nbsp;어떻게 달라지기에 책은 가격을 내리는데 장미는 가격을 올릴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br><br><strong>1. 수익극대화의 조건<br></strong><br>책이든 꽃이든 어떤 판매기업의 수익극대화 조건을 생각해 보지요.&nbsp;<br><br>R = P*Q<br>MR = dR/dQ = P(dQ/dQ) + Q(dP/dQ)<br>&nbsp;&nbsp;&nbsp;&nbsp;&nbsp;&nbsp;= P [1 + (dP/dQ)(Q/P)]&nbsp;<br>&nbsp;&nbsp;&nbsp;&nbsp;&nbsp; = P [1 + 1/e]<br>&nbsp;&nbsp;&nbsp;&nbsp;&nbsp; = P [1 - 1/abs(e)]<br><br>여기서 e는 수요의 탄력성인데, 보통은 부호가&nbsp;마이너스라서 절대값 abs(e)을 취했습니다.<br><br>수요가 가격에 대해서 탄력적[abs(e) &gt;1]이라면&nbsp;수익극대화를 위해서는 가격을&nbsp;낮추어야 하겠지요.&nbsp; "abs(e) = 1" 이 될 때까지 가격을 낮추면 "MR = 0"이되어&nbsp;&nbsp;수익극대화의 조건을 충족하게 됩니다. 즉 수익극대화 조건은 "abs(e) = 1"입니다.<br><br>(주) abs(e)&gt;1인 한에 있어서 수입 극대화를 노리는 판매업자라면&nbsp;당연히 판매가격을 내립니다. 이 말이 이해가 안 가면 <a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mid=sec&amp;sid1=101&amp;oid=020&amp;aid=0002012367">여기</a>를 봅시다. 언제까지 내릴까요?<br><br><strong><br>2. 이익극대화의 조건</strong><br><br>이익극대화의 조건은&nbsp;"MR= MC"입니다.&nbsp;MC가 양수인 점을 고려하면 판매기업의 판매수준 Q는&nbsp;항상 abs(e)이 1보다 큰 수준에서 결정됩니다. <br><strong><span style="COLOR: #ff0000"><span style="COLOR: #3333ff"><br><span style="COLOR: #ff0000">MR&nbsp; = P [1 - 1/abs(e)] = MC</span></span><br></span></strong><br><br><strong>3. 책값은 하락하고 꽃값은 상승하는 이유</strong><br><br>판매 기업의 이익극대화 조건을 가지고 하머메쉬가 궁금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br><br>세인트 조지스데이에는 출판사든&nbsp;장미 판매상이든 새로운 수요곡선에 직면하게 됩니다.&nbsp;책이든 꽃이든&nbsp;"평상시"의 수요함수와 "축제일"의 수요함수는 다릅니다. "평상시의 책"과 "축제일의 책"은 같은 책이라도 다른 상품인 셈이고 "평상시의 꽃"과 "축제일의 꽃"은 같은 꽃이라도 다른 상품이나&nbsp;마찬가지입니다. 축제일에는 단순하게 수요량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함수 자체가 달라진다고 봐야 할&nbsp;것입니다. 수요함수를 미분해서 구하는 탄력성도 당연히 다릅니다. 일시에 수요가 몰리는 만큼 한계생산비용도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nbsp;그럼 가격 탄력성과 한계비용의 조건이 축제일에 어떻게 달라지면&nbsp;하머메쉬가 궁금해하는 그런 현상이 나타날까요?<br><br><u><span style="COLOR: #3333ff"><strong><em>책의 경우</em></strong></span><br></u><br>책의 한계비용은 공산품의 특성상 그리 증가하지 않을 겁니다. 적게 찍는 서적의 경우에는 한계비용이 오히려 감소하는&nbsp;경우도 생각해 볼&nbsp;수 있겠습니다.&nbsp;위 이익극대화의 조건을 보면, 한계비용에 변동이 없거나 감소할 때 이익극대화를 추구하는 출판업자가 책의 가격을 인하했다는 것은 축제일의 최적 판매량에서 구한&nbsp;수요의 탄력성(abs(e))이 평상시의 최적 판매량에서 구한 탄력성에 비해&nbsp;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nbsp;즉, 출판업자의 가격인하 행위를 통해서&nbsp;우리는&nbsp;축제일에는 최적 판매량에서 구한 수요탄력성이&nbsp;평상시에 비해 커진&nbsp;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겠습니다.&nbsp;&nbsp;<br><br><u><strong><em><span style="COLOR: #3333ff">꽃의 경우</span></em></strong></u>&nbsp;<br><br>꽃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익극대화를 추구하는 꽃 판매상이 축제시에&nbsp;꽃의 가격을 인상하는 경우는,&nbsp;축제시 최적 판매량에서 구한 탄력성과 한계비용이 평상시에 비해서,<br><br>(1) 탄력성이 일정할 때 꽃의 한계비용이 상승했든가, <br>(2) 한계비용이 일정할&nbsp;때&nbsp;수요의 탄력성이 작아진 경우,&nbsp;<br>(3) 수요의 탄력성이 (책과 마찬가지로) 커졌지만&nbsp; 한계비용이 더욱 크게 증가한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 밖에, 상상하기는&nbsp;어렵지만, <br>(4) 한계비용이 작아지고 탄력성이 현격하게 작아진 경우도&nbsp;뭐 가능할 수는 있겠네요.&nbsp;<br><br>자, 꽃 판매상은 꽃 값을 인상했고, 그의 이익극대화 조건은&nbsp;우리가&nbsp;알고 있습니다. 위 (1)~(4) 중에서&nbsp;꽃 판매상이 직면한 상황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어느 경우일까요? 저는 일단 한계비용의 상승을 가정하고 있는 (1) 이나 (3)을 고려해야 한다고&nbsp;봅니다. 하나만 고르라면 한계비용도 상승하고 수요탄력성도 커진&nbsp;(3)을 고르겠습니다.&nbsp;&nbsp;<br><br>왜냐? 공산품인 책이야 한계생산비의 급등 없이 수요 급증에 대응한 공급의 탄력적 조절이 가능하지만, 농산물인 꽃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책은 미리 생산해서 저장해 둬도 되지만 꽃이 그것이 불가능합니다.<br><br>저장이 불가능하면 장미 농장을 확대해야 할텐데 하루만의 특수한 수요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별로 경제적이지가 않을 것입니다. 장미 꽃이라는 게 장미나무에서&nbsp;어느날 하루 날을 잡아 일제히 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농장을 확대했을 때 일찍 피거나 늦게 피는 그 많은&nbsp;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농산물의 경우 특정한 하루의 압도적 비정상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한계생산비용의 급등을 감수해야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br><br>한계비용은 그렇고 수요탄력성은 어떨까요? 특수를 맞이한&nbsp;장미의 수요탄력성이 책과 반대 반향으로 특별히 작아질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축제시에는&nbsp;꽃이나 책의 수요가 필수품화하니까 평상시의 꽃이나 책의 수요보다 탄력성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nbsp;축제시에 오히려 가격에 더 민감할 수 있습니다. 축제를 위해 일시적으로 생기는 "뜨네기" 수요가 평소의 "진중한" 수요에 비해 가격에 더 민감할(탄력성이 더 클)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엠피리컬하게 검증할 사항입니다.&nbsp;그렇지만 세인트 조지스데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책에 대해서는&nbsp;이미 검증 결과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span style="COLOR: #009900">(</span><span style="COLOR: #009900">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기발한 다른 생각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이 부분의 발상을 달리한다면,&nbsp;더 나아가 탄력성이 양수가 아닐 수 있다는 걸 합리화시킬 수 있다면&nbsp;더 재미있는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음.)</span><br><br><br><strong>4.결론</strong><br><br>정리하면, 책의 경우에는 이익극대화를 추구하는 서적상이, 한계비용이 일정하거나 약간 감소한다는 가정 하에서, 판매가격을 인하하였다는 것은&nbsp;최적 판매량 수준에서 평가할 때&nbsp;축제일의&nbsp;수요탄력성이 평상시에 비해 커졌기 때문이라고&nbsp;보는 것이 정상이겠습니다.&nbsp;<br><br>꽃의 경우에는 농산물의 특성상 최적 판매량 수준에서 평가할 때 한계비용이 급등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데, &nbsp;이 경우에는&nbsp;최적 판매량 수준에서 평가한&nbsp;탄력성의 크기가 커졌느냐 작아졌느냐에&nbsp;크게 상관없이&nbsp;꽃 값이&nbsp;상승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겠습니다[(3)번 케이스].&nbsp;다만, 한계비용이&nbsp;급등하지 않고 일정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nbsp;수요의 탄력성은 작아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2)번 케이스].&nbsp;.<br><br>이상 탄력성과 한계비용의 변화만 가지고&nbsp;&nbsp;"세인트 조지스데이에서의 책 값 하락과 꽃 값 상승 현상"을 설명해봤습니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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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경제</category>

		<comments>http://athisplace.egloos.com/2224446#comments</comments>
		<pubDate>Wed, 17 Dec 2008 17:10:47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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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왜 하필 신발이었을까?:  "신발"에 담긴 문화적 의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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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r>'알-자이디'라는 아랍권 기자가 이라크를 방문한 기자회견 중인 부시에게 개에 비유하는 욕설과 함께 신발을 던졌다고 한다.&nbsp;&nbsp;<br><br>이 기자는 평소 동료들에게 부시가 오면 "신발을 던지겠다"고 누차 말했다고 하며, 이 기자를 영웅시하는 이라크 일부 도시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미군 기지 앞에 몰려나와 미군측에 "신발을 던지"는 시위를&nbsp;벌였다 한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12/16/52/e0054152_4947008644210.jpg" width="315" height="22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12/16/52/e0054152_4947008644210.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12/16/52/e0054152_494757f06f03c.jpg" width="315" height="22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12/16/52/e0054152_494757f06f03c.jpg');" /></div><br><br>왜, 신발일까?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던질&nbsp;것일까?&nbsp; 기사를 보면서&nbsp;성경구절&nbsp;한 대목이 언뜻 떠올랐다.&nbsp;성경 난해구 사례로 종종 등장하는 구절,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검색해 보니 시편 60편 7-8절에 나온다. <br><br>다윗이 북부 시리아 지방을 정벌할 때 요압장군이 돌아와&nbsp;'소금 골짜기'에서 <font class="name">에돔</font> 군사 만 이천 명을 죽였다.&nbsp;시편 60편은 그&nbsp;때에 다윗이 지어 부른 노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話者로&nbsp;다음과 같이&nbsp;노래한다.<br><br><span><span style="COLOR: #3333ff"><font class="area">길르앗</font>이 내 것이요 <font class="area">므낫세</font>도 내 것이며 <font class="area">에브라임</font>은 내 머리의 투구요 <font class="area">유다</font>는 나의 규이며,</span><span><span style="COLOR: #3333ff"><font class="number">&nbsp;<br></font><font class="area">모압</font>은 나의 목욕통이라 <font class="area">에돔</font>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font class="area">블레셋</font>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span> (개역개정판 시편 60: 7-8)<br><br>100여년 전&nbsp;개화기 시절의 글투에다 잘 모르는 족속의 이름이&nbsp;나오고 있어서&nbsp;무슨 말인지 정확히는&nbsp;못 알아듣겠지만&nbsp;대충은,&nbsp;요즘의 우리말 비속어로 표현해서,&nbsp;<span style="COLOR: #3333ff">"모압, 에돔, 블레셋 등 여러 듣보잡 오랑캐들아, 너희들은 다 내 밥이다."</span>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다.&nbsp;뭔가 상대를 깔보고 조롱하는 느낌!! <br><br>듣자니, 중동지방에서는 신발을&nbsp;매우 부정하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이 있다고 한다.&nbsp;<br><br>세례 요한이 자기 자신을 가르켜 "예수 그리스도의 신들메(감발한 신발을 동여메는 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nbsp;신발에 담긴 의미를 넣어&nbsp;우리 감각에 맞게 한글 숙어로 번역하면&nbsp;"나는 그의 발 뒤꿈치 때만도 못하다"든가, "나는 그 사람 똥구멍이나 핥기에도 부족해" 뭐 그런 어감인 듯 하다.&nbsp;<br><br>구약 아모스서(2:6)에는 신발 한켤레 값에 가난한 자를 팔았다고 책망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도 신발은 아주 하찮은 것의 의미를 대유하고 있는 듯하다.<br><br>요약하면, 중동지방의 문화에서&nbsp;신발을 던졌다는 게 홧김에 그냥 아무거나 잡히는대로 집어 던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추측한다. 최대한의 경멸과 조롱과 모욕의 의미가 담긴... [아님 말고!!]<br><font size="3"><br></font></span></span><br><span><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009900"><font class="name">길르앗</font>도 나의 것이요, <font class="name">므낫세</font>도 나의 것이다. <font class="name">에브라임</font>은 내 머리에 쓰는 투구요, <font class="name">유다</font>는 나의 통치 지팡이이다.</span></span></span></span></span><span><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span style="BACKGROUND-COLOR: #ffffff"><span style="COLOR: #3333ff"><span style="COLOR: #009900"><font class="number">&nbsp;</font>그러나 <font class="name">모압</font>은 나의 세숫대야로 삼고, <font class="name">에돔</font>에는 나의 신을 벗어 던져 그것이 나의 소유임을 밝히겠다. 내가 <font class="name">블레셋</font>을 격파하고, 승전가를 부르겠다. (새번역)<br><br><span><span>The lands of Gilead and Manasseh are mine. Ephraim is my war helmet, and Judah is the symbol of my royal power.&nbsp;<span><font class="number">&nbsp;</font>Moab is merely my washbasin. Edom belongs to me, and I shout in triumph over the Philistines. (CEV)&nbsp;</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br>			 ]]> 
		</description>
		<category>종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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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6 Dec 2008 01:49:32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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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 세가지(1): 프로야구 응원팀 ]]> </title>
		<link>http://athisplace.egloos.com/221988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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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아빠로서&nbsp;아이들에게 별로 물려주고 싶지 않은(않았던) 것이 세가지가 있다. (1) "프로야구 응원팀" (2) "기독교 신앙", 그리고 (3) 이건 매우 주관적인 이야기긴 한데,&nbsp;&nbsp;편의상 "좌파의 심장"이라 해두자.&nbsp;<br><br><br><strong>1. 프로야구 응원팀</strong><br><br>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도 야구 중계를 꾸준히 보고 가끔은&nbsp;막내인 아들을&nbsp;동반하여&nbsp;야구장에도 찾아간다. (가까운 목동야구장에는 아내도 같이 가기도&nbsp;한다.) 때론 아이들 공부에 방해된다는 아내의&nbsp;눈치가 싫어 일부러 퇴근을 늦추고 직장에서 네이버로 야구 중계를 보기도 한다.&nbsp;<br><br>20년 전쯤이라면, 지금 우리 아들 또래들은&nbsp;아마도 대부분&nbsp;프로야구 어린이 회원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어린이 팬클럽 회원이 아니면 거의 왕따 수준이었을거니까.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야구에 그리 관심이 없다.&nbsp;꼬맹이 시절의 한일월드컵 때문인지 오히려 축구를 좋아한다. 3년 전만해도 교실 뒤에 붙은 초등학생들 장래희망란은&nbsp;절반이 프로축구선수로 채워졌다던가? 아들도 비슷했다. 그런데 가고 싶다는&nbsp;축구장에는 데리고 간 적이 없고 야구장에만 데리고 가봤다. 아빠랑 축구장에 갔었고, 그래서 박주영 선수를 봤다고 말하면&nbsp;친구들에게 자랑거리라도&nbsp;됐을텐데 야구장에 갔던 것은&nbsp;그리 자랑할만한 거리도 아니었던 것 같다.&nbsp;<br><br>어떻든&nbsp;그래도 아들은&nbsp;조금씩 야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몇번 야구장에 따라 가고, 내가 야구중계를 보면&nbsp;엄마 눈치를 보며&nbsp;가끔&nbsp;거실을&nbsp;기웃거리더니&nbsp;내가 응원하는 지방 연고의 한 프로야구 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nbsp;자녀가 아직&nbsp;어린,&nbsp;30대 초반의&nbsp;아빠라면 아들과 나란히 같은 팀을 응원하는 나 같은 처지가 부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nbsp;나도 그랬었었으니까.&nbsp;<br><br>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들이 나의&nbsp;응원팀을 물려받을 것이 조금씩 확실해지는 순간&nbsp;약간은 불편해지기&nbsp;시작 했다. 그리 전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야구 스타일이 아주 재미있는 것도 아닌, 그저&nbsp;그런 팀의 팬이 되도록&nbsp;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경기가 형편없고 연패가 이어지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nbsp;언젠가 전문적인 야구 매니아들이 우굴거리는 한 싸이트에서 자기 아버지의 연고팀을 물려받아&nbsp;"이런" 팀을 응원하게 됐다는 한 네티즌의 원망섞인 푸념(?)을 발견하고는 언젠가는 나도 저런 원망을 단단히 듣겠다는 생각도 했다.&nbsp;<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12/14/52/e0054152_49449a76e67fb.jpg" width="500" height="375.60975609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12/14/52/e0054152_49449a76e67fb.jpg');" /></div><br><br><br>아들의 처지가 그 옛날&nbsp;"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주인공과 비슷하거나 그런&nbsp;것은&nbsp;물론 아니다.&nbsp;아들이 그렇게까지 야구에 빠져있는 것도 아닌데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우승할 수 있는 전력에는&nbsp;많이 못미치지만&nbsp;그래도 제법 가을잔치에 초대되기도 하는 수준이기도 하다.&nbsp;그렇기는 해도,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만 자란 아들이, 야구가 막 재미있어지는 순간,&nbsp;자신의 취향에 맞는 팀을 선택해서 산뜻한 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맞볼 수도 있는 그런&nbsp;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nbsp;그저 그런 시골팀을&nbsp;응원하게 된&nbsp;것이&nbsp;미안스런 일이었다. "쟤는, 서울 출신인데 두산을 응원하든지, 야구 잘하는 SK 좀 응원하면 안 되나?"<br><br>그런데 올시즌이 끝날 무렵, 아들은 마침내 나의 응원팀에서 독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야구 올림픽 우승을 계기로 아들 또래의 꼬마야구팬들이 많이 생겼나보다. 마치 02년 무렵 축구가 유행을 탄 것처럼... 야구장갑과 배트, 야구공을 사달라고 하더니 제법 야구놀이를 하고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nbsp;친구들과 야구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많아졌을테고, TV중계도 좀더 집중해서 보는 것 같더니 어느 날인가, 앞으로는 두산베어스를 응원하겠다고 한다. 두산의 야구가 훨씬 재미가 있단다.&nbsp;<br><br>그래서, 나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nbsp;세가지 중 하나는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nbsp;&nbs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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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잡담</category>

		<comments>http://athisplace.egloos.com/2219883#comments</comments>
		<pubDate>Sun, 14 Dec 2008 03:09:45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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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직관을 배반하는 통계학!!!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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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조사대상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 샘플 사이즈도 커져야 정확도가 유지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직관적으로 그럴듯한 이야기지요.&nbsp; 근데, 때로&nbsp;통계학적 이론은 우리의 직관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항상 잘못된 것은 직관이지요.<br><br><strong>[예제] <br></strong><br>92년 5월, 미국 대통령선거. 남서부 지역은 현직 대통령 아버지 부시와 신출내기 클린턴의 접전이었다. 뉴멕시코와 텍사스가 중요했다. 유권자 수는 뉴멕시코가 120만명, 텍사스는 그 열배가 넘는 1250만명이었다. 한 여론조사기관이 뉴멕시코의 유권자 중 민주당 지지자의 비율을 추정하기 위해 2500명을 추출했다. 또 텍사스에서도 2500명을 뽑았다. 두 지역에서의 표본추출방법은 모두 단순무작위추출로 같았다. 뉴멕시코에서는 480명당 한명꼴로 표본을 추출한 반면, 텍사스에서는 5000명당 한 명꼴로 표본을 추출한 셈인데, 어느 지역에서 지지율 추정치의 확률오차가 작을까? (류근관 통계학 p.325)<br><br><strong>[답]</strong> <br><br>이항모형에서 표준오차를 구하는 간단한 공식을 사용하면, 뉴멕시코든 텍사스든 모두 [p(1-p)/n]^0.5= [0.5*0.5/2500]^0.5 = 1%. 95%&nbsp; 신뢰구간에서 오차한계는 두 지역 모두 +-1.96*1%= 약 +- 2%로 같음.&nbsp; 참고로 n= 1000이면 95% 신뢰수준에서 약 +-1.96*1.5811%= 약 +-3%가 나왔음. <br></p><p><br><strong>[참고]<br></strong><br>여기&nbsp;이항모형을 이용해서&nbsp;표준오차를 구하는&nbsp;수식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통계만 알면 되지만, 혹시 모집단의 지지율이 p=0.5인 걸 어떻게 아느냐고 의문을 가져 볼 수도 있음.<br><br>모집단의 지지율은 물론 모름. 그러나 (1) 선거 여론조사에서는 보통 p가 0.5 근처니까 근사적으로 0.5로 봐서 표준편차 계산에 큰 차이가 없고, (2) 더구나, 계산식에서 보듯이 표준편차는 p=0.5일때 최대값을 갖게됨. 오차한계를 구하는데 있어 표준편차를 최대치로 잡는 것은 가장 보수적인 접근이니까 안심해도 됨.<br>&nbsp;</p><p><strong>[해설] <br></strong><br>1. 비율을 추정할 때, 그 정확도를 결정하는 것은 표본의 절대적 크기이지 모집단에 대비한 상대적 크기가 아님. 물론 표본이 모집단에 비해 충분히 작을 경우에 그러함. 통상 표본은 모집단에 비해 충분히 작음. <br><br>2. 표본에 대한 복원추출(sampling with replacement)을 가정하면 이항 분포를 생각할 때 명백함. 다만 비복원추출(sampling without replacement)을 상정하면 표준오차를 구함에 있어 보정계수가 필요함. 그런데 모집단의 크기가 10만 이상이면 보정계수가 거의 1에 가까워서 보정계수로서의 의미가 없음.<br><br>3. 아직도 직관적 이해가 어려우면 이렇게 이해해 볼 것. <br><br>(1) 콜레스테롤 검사를 할 때 200kg의 씨름선수에게서 채취하는 혈액의 양과 20kg의 유치원생에게서 채취하는 혈액의 양은 다른가? 아님. 모두 10cc로 동일함. 혈관 속의 혈액만 균일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음. (류근관 교수의 설명)<br><br>(2) 작은 호수물이든 훨씬 큰 바닷물이든 거기 염도(소금기)가 얼마나 되는가를 알기위해서는 한방울만 찍어서 분석하면 되는 것임.&nbsp;바닷물이니까 (상대적인 비율을&nbsp;유지하기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양의 분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MOE의 크기는 모집단의 크기가 아니라 표본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a href="http://terrytao.wordpress.com/2008/10/10/small-samples-and-the-margin-of-error/">타오의 설명</a>)<br><br><span style="COLOR: #009900">(3) 즉 표본의 크기만 중요하지 모집단의 크기는 중요한 것이 아님. 즉 콜레스테롤 검사에 필요한 적당한 혈액의 양이 10cc인가 아니면 30cc인가, 이것이 중요한 거지 검사대상의 덩치는 중요한 것이 아님. 염도 측정에 필요한 적정 규모의 물이 한방울일지 한 컵일지는&nbsp;중요한 거지만, 그 물을&nbsp;가져온 곳이 작은 호수인가 넓은 바다인가는 중요하지 않음.&nbsp;<br></span><br>**** skynet에서 "타오" 블로그 글에 대한 논의 때문에&nbsp;정리한 것임.</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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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경제</category>

		<comments>http://athisplace.egloos.com/2219861#comments</comments>
		<pubDate>Sat, 13 Dec 2008 09:07:00 GMT</pubDate>
		<dc:creator>오늘여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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