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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hu의 光學실험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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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Eros와 Tanatos</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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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Nov 2009 13:31:2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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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hu의 光學실험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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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Eros와 Tanatos</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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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인권영화제 라디오 광고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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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3 Nov 2009 13:31:2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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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rechargeable님 글에 대한 답변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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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흥분을 하면서 썼기 때문에&nbsp;글에 두서가 없습니다. 양해하시길..<br><br>진실성에 대한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br></p><p>진실성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 이면에는 불변하는 것, 원초적인 것, 근본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것이 어떤 여과 과정이나 방해작용도 받지 않고 고스란히 표현될 때, 그러한 표현들은 진실성의 측면에서 탁월하다고 볼 수 있겠죠. '예술가'의 진실성을 말한다면,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작가의 원초적인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정체성에 이성이든 감성이든 욕망이든 몸이든 뭐가 포함되어 있든지 간에 그것의 본질을 예술활동에 그대로 녹여내야 진실성 있는 '예술가'로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p><p><br>근데 진실성을 담보해주는 어떤 원초적인 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전 예전에 아무리 세상이 조변석개하더라도 나에게는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게 나의 신념이고 영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스스로에 대해 가졌던 정체성이란 건 한낱 상상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 어떤 개념도 명확히 규정할 수 없고, 심지어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나 나불대는 말에 대해서도 어떤 게 제 진심에서 나오는 건지, 나의 진짜 모습이란 게 있는지 의문스러워질 정도입니다.</p><p><br>갑자기 딴 얘기를 하자면... 제가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너무 제 마음을 몰라줘서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저에게 사랑이 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도록 허락한 그 시간 동안 혼자서 열심히 고민한 내용을 쓰려고 했습니다. 사랑이 뭔지. 내가 널 사랑하는 게 맞는지. 저는 2시간 동안 펜만 들고 있다가 결국 한 글자도 못쓰고 펜을 내려놨습니다. 도대체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서요.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더니 "몹시 좋아함"이라고 나오더군요. 그런데 좋아한다는 것도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계속 언어 상의 의미를 뒤쫗다보면 좋아함에 대한 정의가 또 필요할 것이고, 그 정의에 대한 정의, 정의에 대한 정의에 대한 정의...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겠죠. 라깡은 언어를 기표의 환유라고 말했는데, 전 그때 이 말을 실감했습니다. 이 무한의 환유 속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더군요. 이후에도 몇 번 더 펜을 들어봤지만 지금까지 전 한 자도 못쓰고 있습니다.</p><p><br>인간이라는 것도 이 언어와 같은 거 아닐까요. 이 속에 어떤 변하지 않는 알맹이 같은 건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도, 진실성도 없죠. 다만 껍데기로 살아갈 뿐입니다. 페르소나들, 이 자체가 나 자신입니다. 제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적어도 전, 그리고 제 자신을 인간으로 일반화한다면 인간은, 기관 없는 신체라는 거. 제가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여기에 제 진정성이 있다고 말씀 못드리겠습니다. 수 없이 병렬되어 있는 여러 나 중에 한 명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겠죠.</p><p><br>그래서 전 '예술가'의 진실성 따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예술 평가의 잣대가 될 수도 없고요.</p><p><br>마찬가지로 전 예술작품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작품이 변하지 않는 채로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아폴론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조각 역시 계속 변합니다. 안 변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나노 단위로 관찰하면 물질적인 것은 다 변합니다. 그렇다면 의미, 정신적인 것들은 어떨까요? 조각의 형상과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들 이것들은 다 언어에 의해서 의미화된 것인데 언어는 무의식적인 것이고 그 자체로 탈중심적인 것입니다. 음악의 음표들과 화음들, 그 자체로 무엇을 지시하나요? 빈껍데기 같은 것입니다.&nbsp; </p><p><br>그렇다면 과연 어떤 잣대에서 예술을 평가해야 하는가? 마치 제 얘기는 예술을 평가할 수도 없고, 평가해봤자 그건 무의미한 것이라고 얘기하는 듯하죠. 전 평가는 열린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한 작품을 작가의 청렴함이라는 지평에서 평가할 수 있겠죠. 또 다른 측면에서 균형과 조화라는 지평에서 평가할 수 있겠죠. 또 창의성이라는 지평에서, 도덕성이라는 지평에서, 힘이라는 지평에서, 대중성이라는 지평에서 등 등... 이 지평은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평 중에는 자본이라는 것도 있겠죠. 즉 이 작품이 돈이 되느냐. 전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문제는 돈을 벌어다 주는 작품이 나머지 가지들을 모두 싹쓸이 한다는 것입니다. 비싼 작품이 창의성도 있고, 대중성도 있고, 힘도 있고, 도덕성고 있고, 기품도 있는 것처럼 착각을 유발한다는 것이죠. &lt;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gt;에 보면 부자는 착할 뿐만 아니라 예쁘기도 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딱 그꼴입니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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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soaea.egloos.com/3422438#comments</comments>
		<pubDate>Mon, 09 Nov 2009 10:44:14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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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초등학교 2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19금 전쟁영화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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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쿠엔틴 타란티노, &lt;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gt;<br><br>클라셰의 반복은 작품을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만들기 쉽다. 단, 타란티노의 작품을 제외하고. 감독은 &lt;바스터즈&gt;가 2차대전 전쟁영화들의 조합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무수히 많은 클라셰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단지&nbsp;관습적'이라는 평을 면할 수 있는 이유는 고전영화의 여러 요소들이 타란티노의 스타일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 한&nbsp;케릭터들,&nbsp;여과 없이 등장하는 고어들,&nbsp;환상적인 상황설정 등이 관객들에게&nbsp;재미를 주는 데 실패하고 있지는 않다.<br>&nbsp;<br>관객 입장에서 감독이 클라셰를 일부러 삽입했는지, 아니면 감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클라셰를 사용하게 된 건지는 감독 자신의 고백 말고는 알 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가령 어떤 영화에&nbsp;로맨스영화의 클라셰가&nbsp;나온다고 해보자. 감독이 전에 로맨스영화을 많이 보고 로맨스영화의 규칙에 따라&nbsp;영화제작을&nbsp;했다면 그건 의도적으로 클라셰를 삽입한 경우다. 하지만 로맨스영화의 규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nbsp;로맨스에 가장 적절한 촬영방식을 고민하다보니 얼추&nbsp;로맨스영화의 일반적인&nbsp;규칙에 맞는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관객에게는 동일한 클라셰로 보일 것이니,&nbsp;영상만 보고는 그것이 의도적인지&nbsp;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br>&nbsp;<br>&lt;바스터즈&gt;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2차대전 전쟁영화 뿐만 아니라 고어물, 복수극, 서부영화,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의 클라셰를 차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클라셰들의 차용을 놀랍고 위대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게 의도적인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 것인가? 타란티노와 얘기 해봤냐? 타란티노가 인터뷰를 통해 확실히 밝힌 부분을 제외하고는 답을 내지 않는 게 맞다.<br>&nbsp;<br>많은 클라셰들의 차용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문제다. 뭘 찬양하는가? 풍부한 영화적 경험? 성실한 기록 습관? 타란티노가 영화광인 건 누구나가 다 안다. 그런데, 그게 찬양할 거린가? 그렇다면 나는 "왜?"라고 묻고 싶다.<br><br>타란티노가 찬양받아 마땅한 건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말도 안 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자세히 표현하자면, 타란티노 영화는&nbsp;초등학교 2학년이 아주 잘 쓴 이야기 같다. 성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말이 안 되지만 아동의 세계에서는 말이 된다. 게다가 한국어 개봉명칭에서는 &lt;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gt;이라고&nbsp;친절하게 영화명을 설명까지 해주고 있지 않은가. 분명&nbsp;타란티노를 잘 아는 사람이 정한 게 틀림 없다)&nbsp;, 만화 같은 케릭터들, 유치한 개그들과 고어들... 이런 여러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재미와 통쾌함이다.<br>&nbsp;<br>그렇다면 이런&nbsp;작가미학적인 측면에서 &lt;바스터즈&gt;는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nbsp;스타일리쉬한&nbsp;액션씬, 단순하기 짝이 없는&nbsp;케릭터(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들)의 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이전 작들과 비교해 볼 때 고어와 긴장감, 유머는&nbsp;충분하지 않았다.&nbsp;화재씬은 서스팬스가 부족했다. 차라리&nbsp;&lt;말죽거리잔혹사&gt;의 옥상 격투씬이 더 긴장감을 줄 정도다. 이 영화에서 고어라고 해봤자&nbsp;머리가죽 벗기고 방망이로 두개골 부수고 이마에 칼집내는 정도다. &lt;킬빌&gt;의 두부 썰리듯 잘려나가는 신체들을 기대하면&nbsp;실망한다.&nbsp;머리가죽 벗기기,&nbsp;야구 대사 인용하기 등으로 억지 웃음을 유발하는 건&nbsp;좀&nbsp;아니다. 물론 나도&nbsp;엉터리&nbsp;이탈리아어 발음 등에서 뻥 터지긴 했지만, 시시한&nbsp;장면에서도 미친 듯이 웃어재끼는 사람들을 보면&nbsp;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nbsp;&lt;박쥐&gt;에서 박찬욱도 억지 웃음을 유발해서 상당히 짜증나게 하더니, 요즘 세계 거장들의 추세는 다 이런가 싶다. 난 차라리 &lt;킬빌&gt;에서 우마 서먼의 초딩같은 악필이 훨씬 웃겼다.<br><br>이 영화는&nbsp;그렇지 않아도 욕구불만인 나를 더 욕구불만으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적당한 스토리에 적당한 웃음, 적당한 통쾌함,&nbsp;매우 풍부한 고전 인용과 철두철미 정석에 의거한 연출을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공부하는 사람들이 뜯어보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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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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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1 Nov 2009 12:20:34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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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방황, 충동의 계절(부산국제영화제)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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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0시 12분, 내가 부산 센텀시티역 부산영화제 임시매표소에 도착한 시간이다.<br>이미 20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br>바로 합류하기엔 좀 뻘쭘해서 주변을 한 바퀴 돈 다음 줄을 섰다.<br>난 왜 이럴까?<br>줄은 그대로였다.<br><br>차가운 땅바닥에 앉기는 좀 그래서 백화점 앞에 있는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br>그러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다 의자를 가져오는 것이었다.<br>"생각만 하고 실천을 못하는 바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br>난 왜 이럴까...<br><br>새벽이 되니 너무 추웠다.<br>새벽 3시쯤엔 너무 추워서 홈플러스에 가서 이불을 사왔다.<br>앞에 혼자 온 여자분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게 좀 불쌍했지만 내가 살아야 할 것 아닌가.<br>덕분에 한 2시간 정도는 잘 수 있었다.<br>근데 새벽 5시가 되니 이불을&nbsp;몸에 감고 있어도&nbsp;정말 미치도록 추워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br>내 앞에 있던 자켓 하나 걸치고 밤새도록 자리 지킨 여자분 정말 존경한다.<br>그리고 정장에 구두, 하이힐 신고 밤샌 소수의 폼생폼사 인생들에게도 경의를.<br><br>애초에 사람 안 만나고 영화만 볼려고 부산 간 거라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br><br>첫 영화는 리노 브로카의 인시앙(1976).<br>필리핀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깐느에 초청된 작품이라고 한다.<br>원래 포함되어 있었던 섹스신이나 구타신이 편집되어 아쉬웠지만, 정말 감탄 나오게 잘 만든 영화다.<br>만약 원본대로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감동적일지 상상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 좀 오바했나.<br>돼지 도살과 복수의 동형관계가 만들어내는 풍부한 의미를 음미하며 만족스럽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br>필리핀 여성에게 있어 복수는 남자의 직업활동과 같다고나 할까?<br>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양자는 같다.<br>영화 중간중간 비참한 필리핀의 현실을 담은 장면도 인상 깊었다.<br><br>두번째 영화는 조니 토의 흑사회2(2006).<br>원래 "신부의 이상한 여행&nbsp;가방"을 보려고 했는데, 매표 시작 3분도 안되어 매진되서 어쩔 수 없이&nbsp;봤다.<br>지미와 비행기가 서로&nbsp;마주보는 장면에서 뒷 배경에 있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br>무협영화나 무협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br>전체적으로 매끄러웠지만 몇 가지 부분이 다소 아쉬웠다.<br>납득할 수 없는 지미의 광적인 욕망,&nbsp;충분히 해명되지 않는&nbsp;흑사회의 권력구조(어떻게 해서 이 깡패조직이 유지되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지미가 죽인 안경잡이 복서(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를 담은 의문스러운 쇼트 등이다.<br>안경잡이 복서가 죽는 장면에서 난 그 복서가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되어 나중에 지미가 흑사회 협회장이 되는데 방해를 할 것이란 암시를 받았다. <br>만약 3편에서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nbsp;쇼트는 비정합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br><br>흑사회2를 본 후 나는 신세계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그녀에게 줄 편지를 쓰려고 했다.<br>하지만 난 편지 내용을 생각하면서 급격히 우울해졌기 때문에 편지 쓰는 것은 관뒀다.<br>사랑이 뭘까?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정의를 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br>네이버 사전에서 사랑을 검색해 봤더니 "몹시 좋아함"이라고 나왔다.<br>그렇다면 몹시와 좋아함에 대한 정의가 또 필요할 것이다.<br>이렇게 계속 무한으로 진행되지 않을까.<br>라깡은 언어를 기표의 환유라고 설명했는데, 정말 그렇다.<br>난 어느 것도 정확히&nbsp;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무기력감을 느꼈다.<br>끝내 나는 그녀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br>그녀를 사랑한다고.<br>그래서 나는 우울하고 짜증이 났다.<br><br>마지막 영화는 정성일의 까페 느와르(2009)였다.<br>정성일은 영화 평론가로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데뷔작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br>영화가 참 어려웠다. 내가 조금만 더 건방졌다면 개판이었다고 표현했을 것이다.<br>이 영화는 대부분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다.<br>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인용하고 있다.<br>"괴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디워", "디워"에 대한 진중권의 비평, 박찬욱 감독도 인용된다.<br>라깡도 인용한 것 같다.<br>어떤 질문자는 라깡, 바디우, 지젝까지 언급했는데, 바디우, 지젝은 잘 모르겠다.<br>성경도 인용된다.<br>"선생님. 다시 겨울입니다", "씨발, 하는 것보다 빠는 게 더 좋아" 이런 대사들도 어디서 들은 듯한 느낌이 난다.<br>마지막 바이크 신은 왕가위의 타락천사의 엔딩을 연상시킨다.<br>영화제 전에 이 영화에 대한 프리뷰를 잡지에서 봤기 때문에, "까페 느와르"가 비평적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를 많이 했다.<br>어떤 사람은 시각화된 평론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영화는 공감각적이기 때문에 그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본다.<br>영화평론의 영화적 표현이라고 하는 게 옳을까.<br>아무튼 이 영화에서 평론가 정성일의 정체성을&nbsp;찾으려는 사람이 많았다.<br>하지만 인용이 많다고 해서 그 영화가 평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br>가령, 마모루 역시 그의 애니매이션에&nbsp;많은 사상가들을 인용하는데, 그걸 가지고 그의 영화가 평론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br>정성일이 아무래도 평론가로서 유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영화 역시 평론이라는 틀에서 바라보려는 것 같다.<br>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나 할까.<br>아무튼 나는&nbsp;이 영화를 영화평론과 관계지으려는 사람들과는 의견을 달리한다.<br><br>분명 이것은 새로운 시도였다.<br>인용으로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것은 정말 새로운 시도였다.<br>대사가 번역투의 고전어로 되어 있어 배우들의 연기는 자연스럽게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br>그것은 관객에게 이 영화의 배경이 새로운 시공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br>지금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것.<br>이 영화의 전체가 인용으로 되어 있는가?<br>그렇다면 이 영화는 발터&nbsp;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br><br>"까페 느와르"가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힘은 대단했다.<br>밤샘과 종일 영화감상으로 인해 매우 지쳤을 뿐만 아니라 급성 우울증에 빠진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5분밖에 졸지 않았다.<br><br>좀 가혹해진다면, 이 영화에 대해서 할 말이 정말&nbsp;많다.<br>감독은 GV에서 고전에 있는 문장이 살아 숨쉬는 것을 듣고 싶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백야"를 인용했다고 밝혔다.<br>그런데 현대 독일인들과 러시아인들이 두 편의 소설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br>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극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br>그렇다면 정성일은 그 두 소설의 번역판을 그대로 인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전어로 재번역했어야 했다.<br>그래야 독일인과 러시아인이 두 고전을 읽는 느낌과 같은 느낌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br>살아 있는 고전어의 느낌만이 아니라 번역투까지 느끼게 할 의도였다면,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br>번역은 언어체계상의 차이로 인한&nbsp;한계일 뿐이지 그것에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br>좀 오바를 해서 해석을 해줄 수는 있으나, 오바는 어디까지나 오바일 뿐이다.<br><br>영화 중간에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쇼트는 왜 나오는 걸까?<br>두 여자한테 차이고 끝내 죽어버리는 남자 주인공의 인생과 경향이 같다는 것을 빼면 그다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br>왜 거기 나오는지도 모르겠다.<br><br>식상한 클라셰들의 반복은 정말 구렸다.<br>예수천국 불신지옥, 빨간색 쨈, 포도주, 낡은 가방, 남산타워, 임신 등... 뭔가?<br><br>새벽 3시 반쯤 공항에 도착하니, 어떤 구린 놈이 자전거 부품을 또 훔쳐가서 타이어 바람이 다 빠져 있었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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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1 Oct 2009 14:57:4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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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자크 리베트, 빠리는 우리의 것, 1961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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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링크 : <a href="http://archive.sensesofcinema.com/contents/cteq/07/43/paris-nous-appartient.html" target="_blank">http://archive.sensesofcinema.com/contents/cteq/07/43/paris-nous-appartient.html</a><br><br>&lt;자크 리베트 작품의 특징&gt;<br><br>1. 동료 누벨바그 감독들을 까메오 등장시킴(빠리는 우리의 것에서는 고다르, 샤브롤, 리베트가 출연)<br>2. 대단히 긴 장편 영화 제작<br>3. 연극을 소재로 한 다수의 작품<br><br>&lt;작품의 이력&gt;<br><br>1. 1957년 제작 시작, 1960년 완성<br>&nbsp;&nbsp;&nbsp; 누벨바그 작품 중 가장 먼저 제작에 들어간&nbsp;작품<br>&nbsp;&nbsp;&nbsp; * Agnes&nbsp; Varda의 La Pointe Courte(1954)가 누벨바그의 첫 작품이라는 주장<br>2. 트뤼포 400번의 구타, 고다르 네멋대로 해라와 함께 누벨바그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br>3. 리베트의 첫 장편 작품<br><br>&lt;작품의 특징&gt;</p><p>&nbsp;</p><p>1. 다른 누벨바그 작품과의 공통점<br><br>저예산, 현장촬영, 비고전적 내러티브 형식, 다양한 미적양식 실험, 당대의 두요한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이슈에 대한 관심<br><br>2. 다른 누벨바그 작품과의 차이점<br><br>누벨바그 작품들은 시대정신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고 있으며, 현대적 실험정신과 대중문화를 조합하여 희망찬 에너지로 가득찬 빠리를 묘사하는 반면, "빠리는 우리의 것"은 염세주의와 정신이상, 50년대 후반의 망상증, 권태, 무기력증, 허무주의로 특징지워진다.<br><br></p><p>3. 다층성<br><br>관객은 광범위한 파시스트의 권력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인물들의 행동을 우스운 것으로, 난해한 존재론적인 것으로(어딘가에 절대 권력을 가진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것(메카시즘과의 연관성으로 보입니다)으로 해석한다. 해석자가 이 작품에 다른 어떤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말이 되며, 심지어 그것이 작품의 다른 요소와 모순되더라도 그렇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질수록 작품은 더욱 다층적이고 모호하게 된다(이것을 비평가는 감독과 관객이 함께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br><br>4. 모순성<br><br>관객은 이 작품에 대해 확신과 회의라는 모순된 감정을 느낀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이끌고 있는 음모론은 실제로 50년대 좌파 지식인이 느꼈던 침체된 감정에서 비롯됐다. 이점에서 관객은 필립의 광적인 정신이상을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음모론 그 자체는 불길하고 재수없는 것이다. 관객의 유일한 대변자인 안나는 이러한 확신과 회의의 사이에 위치한 인물로, 그녀는 음모론을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며, 아마 우리도 그녀와 마찬가지일 것이다.<br><br>이 영화는 빠리의 복잡한 미궁을 여행하고 있는 안나를 독특한 카메라 시점에서 담고 있다. 이러한 독특성은 대조의 미학을 강조하는 데서 얻어진다. 대조의 미학은 도시의 공간을 담은 연출기법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 연출을 통해 도시는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꿈에 나온 장면과 같이 추상적이다. 리베트는 철저하게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실내/실외 묘사를 통해 도시 공간의 사물과 사회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그러나 반대로 리베트는 동시에 기괴한 형태의 자연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대도시를 묘사함으로써 추상적인 도시 이미지를 산출해낸다. 안나가 빠리를 거니는 장면 역시 현장 촬영으로 인한&nbsp;실제성과 독특한 연출(과장된 발자국 소리, 필림 아더의 과장된 사운드 트랙 등)로 인한&nbsp;추상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br><br>5. 세기말적<br><br>이 작품은 빠리 구석 구석에 있는 도시의 피조물들(등장인물들)을 압도하고 있는 어떤 문화를 묘사한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60년대 빠리인들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떨쳐내고 희망으로 가득한 도시, 근대성 그 자체를 전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스로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지구를 풍미했던 회의주의의 희생자임을 자칭했던 "우리"는 이 현기증나는 도시 공간에 떠돌고 있다.<br><br>6. 내러티브와 연극의 독특하고도 애매한 관계<br><br>음모론의 정체를 파해치는 안나의 탐험 외에 이 영화를 구성하는 내러티브적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안나의 탐험에 보다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페리클레스이다. 제라드와 그의 무보수 연기자들은 매일 다른 장소에서 리허설을 하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즉 페리클레스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와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이는 세계 전체를 무대로 간주한 진정한 세익스피어 전통과 부합한다. 내러티브와 연극의 반영 관계 하에서 확신과 회의, 사물과 추상, 정치와 심리, 리얼리즘과 표현주의의 대비와 긴장은 규정하기 힘든 구조에 의해 더욱 복잡해진다.<br><br>고다르와 많은 누벨바그 감독들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기법에 의존하여 내러티브의 환상을 타도했다(브레히트는 연극과 관객의 정의적 일치를 통한 감정의 정화를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며, 연극이 사회적 진실을 다루도록 하여 관객이 연극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리베트는 극장 연극에 대한 강조를 통해 영화의 교묘한 반영이 영화 밖 또는 사회적 사실을 구성하도록 했다.<br><br>* 이 부분이 이해하기 가장 어려웠습니다. 브레히트의 전통을 따른 작가들은 영화에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반영시킴으로써 내러티브적 환상을 타파했던 것과 달리, 리베트를 세익스피어의 전통에 따라 영화와 연극의 반영 관계를 통해 내러티브적 환상을 파괴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세익스피어 극에서는 세계 전체가 일종의 무대로 간주되며, 그것은 "빠리는 우리의 것"의 구성 방식과 동일합니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세계 자체인 것, 즉 실재성을 담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nbsp;연극과 영화의 동일성에 의거, 영화의 모든 장면과 연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에 따라 내러티브의 환상성이 배제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연출 자체는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nbsp;있기&nbsp;때문에&nbsp;사물과 추상은 계속 대립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확신과 회의, 사물과 추상, 정치와 심리,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대립이 더욱 복잡해진다는 말은 내러티브와 연극의 반영 관계가 이러한 대조효과 산출의 한 요소로서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 합니다.&nbsp;<br><br>7. 이&nbsp;작품은 영화가 어떻게 하면 내러티브보다 서로 모순되는 대조적 상징에&nbsp;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p><!-- end clix_conte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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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soaea.egloos.com/3301213#comments</comments>
		<pubDate>Mon, 21 Sep 2009 09:07:54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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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지난 주말...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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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지난 주말은 힘들었다<br><br>부모님은<br>왜 이렇게<br>날 괴롭히는지<br><br>왜 이렇게<br>미련한<br>행동을 하는지<br><br>어떤<br>미래를 선택해야<br>나 자신과<br>주변 사람들과<br>사회가<br>이로울 수 있는지<br><br>나를 둘러싼<br>상황이<br>왜<br>이렇게 암울한지<br><br>영화는<br>왜 이렇게<br>재미없는지<br><br>왜 이렇게<br>그녀 생각이<br>나는지...<br><br>복잡한 생각 때문에<br>잠도 못잤고<br>입맛도 잃었다<br><br>보고 싶었던<br>뮤지컬도<br>보지 않았다<br><br>내가 정말 참기 힘든건<br>누군가 날 기만하는 것<br>아닌 척하면서 얕잡아보고<br>농락하는 거다<br><br>그는 모르겠지만<br>난 다 알고 있다<br>그가 날 기만하고 있다는걸<br>천하에 양아치 같은 놈<br>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br>인간 중에<br>가장 최악이다<br><br>정말 슬픈건<br>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것<br>난 생색을 잘 못내기 때문에<br>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긴 정말 힘들다<br><br>나에 대해서<br>잘 알지도 못하면서<br>호기심 때문에<br>장난으로<br>작업 건다는 그런 얘기를 제일 참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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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soaea.egloos.com/3241894#comments</comments>
		<pubDate>Mon, 14 Sep 2009 15:42:11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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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누벨바그는 왜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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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작가주의에 대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br><br>작가주의는 영화감독이&nbsp;다수의 작품에서 플롯, 미장센, 상징, 촬영 등 영화의 모든 요소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영화예술의 사조를 말한다. 그런데 왜 프랑스에서 이러한 작가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누벨바그가 처음 시작되었을까? 왜 하필 프랑스일까?<br><br>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프랑스를 식민지배했을 때,&nbsp;독일은 당시의 헐리우드 영화가 프랑스에 유입되는 것을 통제했다. 45년 프랑스가 독립하고 헐리우드 영화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영화에 심취했던 프랑소와 트뤼포가 "카뮈에 드 프랑스"라는 잡지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nbsp;경향'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부터 작가주의는 시작됐다. 트뤼포는 폭넓은 감상을 통해 감독에 따라 일관된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감독이 자신의&nbsp;개성에 맞게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이러한 견해가&nbsp;장 뤽&nbsp;고다르, 끌로드 샤브르 등 누벨바그 작가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하나의 예술 사조로 발전하기까지 이른다.<br><br>누벨바그는 기존의 가치들을 파괴하려는 당시의 시대적 경향에서 꽃 폈다. 누벨바그&nbsp;이전의 프랑스 영화들은 예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조잡한 통속극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벨바그의 선구자들은 영화를 하나의 예술로&nbsp;인식하고 작가주의를 통해서 영화가 예술로 격상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br><br>위의 설명이 믿을 만한 것인지는 다시 따져봐야 하겠다. 다음은 내 의견이다.<br><br>작가주의는&nbsp;사상사적으로 낭만주의와 유사한 사조이다.<br>&nbsp;<br>작가주의는 영화를 통한 자본축적을 추구하는 스튜디오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어&nbsp;영화감독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실천을 위해서는 열정과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nbsp;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의지를 가진 천재, 이는 바로 낭만주의적 천재 개념이다. 작가주의에서 가장 바람직한 감독은 바로 낭만주의적 천재인 셈이다.<br><br>낭만주의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작가주의가 왜 프랑스에서 탄생하게 됐을까. 스터디 시간에 농담조으로 독일 식민지배기간에 낭만주의를 뿌리로 하는 나치즘(합리적 사고의 마비, 초인적 의지를 통한 한계의 극복, 터져나오는 열정과 열광)이 프랑스인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긴데 4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독일이&nbsp;프랑스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맞지 않으며, 낭만주의가 독일 나치즘의 뿌리라는 것도 상당히 위험한 논리적 비약이기 때문이다.<br><br>그것보다도 프랑스인이 독일 식민지배 기간에 느꼈던 무력감이 작가주의의 탄생 배경이 아니었나 싶다. 독일 나치즘 이전까지 프랑스는 항상 독일의 우위에 있었다. 마치 한국이 일본의 우위에 있었던 것처럼.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독일은 프랑스를 심각하게 착취했고 프랑스인은 말로 할 수 없는 굴욕을 느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한 무력감은 종종 내면으로의 침잠으로 이어진다. 외부 세계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니 주체의 통제권은 내면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역시 100년 전쟁 이후 독일이 프랑스에 대해 느꼈던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br>&nbsp;<br>프랑스 누벨바그는 독일 낭만주의의 완전한 전치라고나 할까. 작가주의는 작가 자신의 내면적 신념에 대한 성찰과 침잠, 그리고 그것의 영상적 구현을 추구한다. 영상적 구현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관념이 현실화되는 쾌감을 맛본다. 이는 현실을 구성하는 관념이라는 낭만주의적 개념과 일치한다.<br><br>이상 여기까지. 위의 말이 맞는 것인지는 자료를 통해 확인하자.<br><br>그런데 예술이 뭘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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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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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0 Sep 2009 15:46:33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Stan Brakhage, The Dante Quartet, 1987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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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hell&nbsp; ltself<br><br>hell spit flexion&nbsp;&nbsp; 무슨 뜻일까?<br><br>purgation <br><br>existence is song<br><br><br>The Dante Quartet은 근세 문학가인 단테의 신곡을 패러디한 실험영화이다. 신곡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왜 이 작품이 trio가 아닌 quartet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의 3단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nbsp;The Dante Quartet은 hell itself, hell spit flextion, purgation, existence is song의 4단 구조로 되어 있다. 신곡을 바탕으로 한다면 quartet보다 trio가 더 적합할 텐데, 왜 굳이 Stan Brakhage는 지옥을 두 단계로 나누어 총 4개의 장으로 영화를 구성했을까?<br><br>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Stan Brakhage도 이 작품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br><br>필자는 이 영화의 4단 구조가 정통적 형이상학의 틀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다고 생각한다.&nbsp;일반적으로 3은 완성, 이상을 뜻한다.&nbsp;하나님은 성부, 성자, 말씀의 삼위일체의 원리 안에서 비로소 완전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thesis-antithesis-syntesis)&nbsp;역시 3단 구조로 되어 있는데(굳이 정반합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겠다), 이 변증법은 실체의 자기완성과정을 의미한다. 해겔의&nbsp;절대정신은 자기모순을 통해 모든 사물을 전유하는 실체로 발전한다. 단테 역시 지옥, 연옥, 천국으로의 여행을 통해 신의 자비로움에 귀의하고 안식을 얻는다. 감독은 이러한 3단 구조를 4단 구조로 변형하고 패러디하여 전통적 형이상학에 균열을 낸다.<br><br>이러한 전복적 시도는&nbsp;The Dante Quartet이 가진 독특한 영상적 특성과도 맞물려 있다. 이&nbsp;난해한 영상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화면의 연속이다. 사실 이 영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지시대상을 상실한 기호와 같다.&nbsp;사람들이 작품을 해석하는 일반적 경향은 영상 전에 등장하는 각 장의 제목을 읽고 뒤의 영상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다. 제목이 Hell itself라면 영상의 어떤 부분이 마치 지옥의 불꽃을 묘사한 것 같다고 해석하는 식이다. 근데 그것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제목을 전혀 보지 않고 영상만 본다면 그 영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실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혹자는 아무런 해석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영상이 마치 지옥 또는 천국을&nbsp;묘사한 것 같다는 식의 해석은 제목과 영상의 관련성 하에서다.<br>&nbsp;<br>바로 이점에서 The Dante Quartet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기호 개념에서 벗어난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기호는 실재를 재현하는 도구다. 그 기호는 지시대상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호를 제대로&nbsp;인식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애초에 그것이 지시했던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nbsp;원초적 언어는&nbsp;서로 다른&nbsp;언어집단의&nbsp;사람들도 같은 대상을 표상하게 한다는 플라톤의&nbsp;언어 이해와 같다(사실 이러한 개념은&nbsp;여러 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nbsp;최고의 와인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심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거나, 최고의 향수는 모든 사람에게 환희와 기쁨을 준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 난해한 영화에서 기호로서의 영상은 어떠한 대상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영상 이전에 등장하는 문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다. 이는 구조주의의 기호 개념과 같다. 구조주의에서 기표는 다른 기표와의 차이 관게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된다. The Dante Quartet의 참신성은 이러한 전통적 형이상학의 기호개념에서 벗어나 구조주의적 기호개념을 영상적으로 실천했다는 데에 있다. 일반적인 영화의 경우 우리는 항상 스크린이 영화 밖 실제 대상을&nbsp;재현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그러한 환상을 배제하기 때문이다.<br><br>나아가 이 영화는 후기 구조주의적인 요소 또한 포함하고 있다. 각 장의 제목과 영상이 엮어내는 구조는 닫힌 구조가 아니다. 우리는&nbsp;The Dante Quartet을 보며 이 말도 안되고 어처구니 없는 영상들이 과연 3개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또한 각 장의 제목들이 영상을 적절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인지 또한 의심할 수밖에 없다. existance is song이라는 애매하고 비유적인 표현이 천국의 영상과 맞물려 생산하는 풍부한 의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nbsp;유일하게 액자식으로 구성의 영상과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nbsp;hell spit flextion의 의미적 모호성을 어떻게 관련지을 것인가? 이 작품은 끝내 닫히지 않을 것이다. 영상과 텍스트에 존재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틈새 사이로 계속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올 것이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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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category>

		<comments>http://csoaea.egloos.com/3180426#comments</comments>
		<pubDate>Sun, 06 Sep 2009 14:17:53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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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고통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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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당직을 선 다음날이면<br><br>쓰러질 것 같은 피곤함에<br>실장과 선배에 대한 원망에<br><br>사무치는 그리움에<br>버림받았다는 슬픔에<br><br>고향에 대한 향수에<br><br>주체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br><br>어제는 우연히 박해일, 장진영 주연의 "국화꽃향기"를 봤다.<br>작품성은 별로였지만, <br>내가 인하같은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br><br>지난 5년동안 난 예슬이를&nbsp;사랑했었다.<br>남은 인생은 그녀를 사랑하며 살게 될까.<br>젊음을 낭비하며...<br><br>난 사람을 쉽게 사랑하지 못한다.<br><br>왜 다른 남자들처럼 여자를 대체재로,<br>성욕의 해소구로 여길 수 없는지&nbsp;<br>도대체 모르겠다.<br><br>어리고 예쁜 여자일수록 좋다는<br>그런 심리에 왜 공감을 할 수 없는지...<br><br>평범한 남자가 된다면<br>이런 고민할 필요 없을텐데<br><br>어디서부터 꼬여버린걸까...<br>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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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soaea.egloos.com/3171977#comments</comments>
		<pubDate>Sun, 06 Sep 2009 05:10:27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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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휴~ 힘들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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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영화관에서 극영화 보면서<br>존 적은 한번도 없는데<br><br>일주일동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는지<br>"북 호텔"을 보면서 그만 졸고 말았다<br>아까운 돈 7000원만 날린 거지<br><br>지난 한 주는<br>대부분의 시간 우울한 감정에 빠져 있었고<br>어쩌다가 이유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br>그녀 앞에서는&nbsp;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던<br>그런 한 주였다<br><br>그녀 목소리를 들으면<br><br>울음이 나올 것 같았는데<br>어찌된 일인지 그녀에게서 걸려온 전화도<br>아무렇지도 않게&nbsp;받을 수 있었다<br><br>그녀는 몇 마디 안 했지만<br>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br>어떤 경우에서도 말을 더듬는 법이 없었는데<br>이상했다<br><br>그녀는<br>식당에서나 복도에서나<br>우연히 나와 마주칠 때면<br>최대한 모른 척 했다<br>밝은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br>그녀의 얼굴은 이젠 기억 속에만 있다<br><br>사실 오늘은 걸어다닐<br>힘도 거의 없었지만<br>그녀 없이도<br>내 일상엔 변함이 없다는 걸<br>내 자신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br><br>무리한 덕분에<br>광주에 와서 처음으로<br>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br>방으로 돌아왔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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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soaea.egloos.com/3157036#comments</comments>
		<pubDate>Fri, 04 Sep 2009 14:20:11 GMT</pubDate>
		<dc:creator>CsOAEA</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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